법화경 알기

[스크랩] 자성, 개시오입.

수선님 2017. 12. 31. 12:50

      자성(自性)과 개시오입(開示悟入).

 

오늘은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의미와 깨달음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법화경 방편 품에,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뜻은 ‘개시오입(開示悟入)’에 있다고 했습니다.

 

‘개시오입’이라는 말은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신 네 가지 뜻(목적)으로,

첫째, 개(開)=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여래(如來)의 진리(眞理)를 열게 하고,

둘째, 시(示)=진리를 보게 하고,

셋째, 오(悟)=진리를 깨닫게 하고,

넷째, 입(入)=그 진리의 길에 들게 한다는 것으로 중생들을 열반의 길로 인도 한다는 뜻으로,

 

개(開)는 불법을 펼치신 것이고. 시(示)라는 것은 보여준다는 뜻으로 묘법의 공덕을 실증(實證)하여 중생들에게 보여주신 것이고. 오(悟)는 깨닫다 는 뜻이고, 입(入)이라고 하는 것은 들어간다는 뜻으로, 중생들로 하여금 완전히 묘법(妙法)을 체득(體得)하게하여 깨달음의 세계로 들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에게 불법을 열어 보이시고, 법을 통해 진리를 보게 하시고, 중생들에게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그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기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개시오입(開示悟入)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뜻은 중생들로 하여금 고통의 윤회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뜻을 확실히 알고 철저히 믿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확실히 믿는 마음이라야 善業을 지을 수 있는 것이고 선한 마음이라야만 참 나를 볼 수 있는 것이고, 참 나를 볼 수 있어야만 저 피안(彼岸)의 세계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잘못 믿으면 사도로 가는 수가 있습니다, 사도(邪道)라고 하는 것은 헛된 것이고 망상이고 허망한 것이어서 절대로 진리를 구할 수 없고, 사도를 믿는 자는 결국에는 천길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정도(定度)를 가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를 구하고 견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만약에 부처를 찾음에 있어 형상으로 찾거나 소리로 찾거나 색으로 찾거나 여타 눈에 보이는 것들로  찾아서는 결코 진정한 불법을 볼 수 없다는 것이고, 이렇게 형상이나 소리나 물질로 부처를 찾는 것은 정도(定度)가 아닌 사도(邪道)라고 하는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유의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일체의 모든 법(法)이, 꿈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아침 이슬과 같이 덧없고 번개 불이 번쩍 하고 지나가는 것처럼 허망하고 허무하기 짝이 없다고 하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생겨났다 없어지기를 반복하는 형체는 실로 참나가 아닌 거짓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너희들이 나라고 믿고 있고, 전부라고 믿고 있는 것은 모두가 참이 아니다. 참은 바로 그 가운데 있는 자성(自性)이 바로 나 자신이니라.’ 하신 것입니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나라고 하는 것은 참 나가 아니라 거짓된 나라는 것입니다.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작용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 사대육신은 언젠가는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것임으로 참 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형상으로 몸을 바꾸어 가며 나고 죽기를 수 없이 하여 몸은 항상 없어지지만,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 그 무엇인가가 존재합니다.

 

참 나라고 하는 것은, 형체도 없고 이름 지을 수도 없는 것이기에 편의상 자성이라고 하는데, 이 자성을 보는 것을 견성이라고 하고 이것이 바로 나의 본래모습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성을 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누가 알려준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배워준다고 해서 배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이 수행을 철저히 해서 깨쳐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글자로 알 수도 없는 것이고 형상으로도 알 수 없는 것이고 생각으로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오로지 본인의 수행(修行)정진(精進)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본래면목을 알게 하기위해서 부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법문을 하신 것입니다.

참 진리는 말이나 글로는 표현 할 수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께서, 언어(言語)를 통해서 진리를 설(說)하신 것이 불법입니다. 붓다는 늘 말하기를 ‘나의 법문(法問)은 방편이요 뗏목과 같은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법문에는 항상 不說一字의 입장이 깔려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부처님께서는 법문하실 때, 절대자의 입장에서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고 항상 스승의 입장에서 법문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불법은 모두가 방편이요 뗏목과 같은 것이라고 하셨고, 뗏목은 강을 건너기위해서 필요한 것이지 강을 건너면 뗏목은 필요치 않듯이 불법을 완전히 배우고 익히고 나면 그 법마저 초월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역대 조사와 선지식들도 역시, 언어(言語)화(化) 할 수 없는 이 진리를 후학들에게 쉽게 전하기 위해 많은 고심을 한 것 같습니다. 그들이 즐겨썼던 法을 공안(共案)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타인과의 문답에서 나오는 조사들의 言句로, 이 공안은 말로 표현이 불가능한 도리를 언어를 통해서 隱喩的으로 말한 것으로 깨달음의 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방법입니다.

 

公案은 言語이면서 언어가 아니고, 언어가 아니면서 또한 언어인 것입니다.

이것은 祖師의 사사로운 말들이 아니라 佛祖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바른 깨달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깨달음의세계로 바로 가는 敎外別傳인 直指人心見性成佛의 禪佛敎가 가장 盛했던 시대가 중국의 당송(唐宋)시대였는데 이 시대(時代)에는 대승불교(大乘佛敎)가 민중(民衆)에 널리 퍼져 일반화 되어 꽃을 활짝 피웠던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는 禪佛敎가 일반화(一般化) 되어 민중 속에 깊이 뿌리를 내렸던 시대로, 이때 이들이 주로 했던 수행방법이 話頭를 參究하는 看話禪이었는데, 이것은 어떤 특정한 화두(話頭)를 가지고 하는 관심법(觀心法)으로 사물의 겉모습을 떠나 본래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이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그토록 노력한 것은, 견성하고 성불을 하지 않으면 생사(生死)윤회(輪廻)의 고(苦)에서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중생들이 복을 많이 지어 극락세계에 난다고 하여도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극락세계 또한 지은 복이 다 하면 언젠가는 또다시 육도(六度)를 윤회하는 것이기 때문에 극락 또한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중생들은 항상 여행자와 같은 처지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에서의 생이 끝나면 다른 생으로의 여행을 다시 시작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육도를 끊임없이 계속해서 윤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극락세계에 간다하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지옥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즐거움만 있는 극락에서는 복을 지을 수가 없기 때문에 복이 다하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중생이 행복하고 즐겁기만 하면 복덕을 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극락에서는 모든 것이 즐겁기 때문에 복덕을 지을 생각을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옥도 마찬가지 입니다. 지옥에서는 모든 것이 괴롭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복덕을 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보가 다 하는 날 다른 곳으로 윤회를 반복 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복은 복이 아닌 것이고, 고(苦)또한 고가 아닌 것입니다. 복(福)은 고(苦)를 낳고, 고(苦)는 복(福)을 잉태(孕胎)하는 것입니다.

 

이 윤회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불도(成佛道)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윤회(輪廻)의 고리를 끊고 성불(成佛)로 바로 가는 길을 중생들에게 알려주신 분이 바로 부처님 이십니다. 불자라면 누구나 이 불법에 의지하여, 윤회의 고리를 끊고 영생(永生)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앞서도 말씀 드렸지만 여행자는 가지고간 여비가 다 떨어지고 여행이 끝나면 반드시 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모든 것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지어놓은 복이 다하면 반드시 다른 곳으로 윤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보살(佛菩薩)님께 아들딸 잘되게 해주십사하고 나 잘되게 해달라고 복(福)을 빌지만, 그 복이라고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고(苦)를 잉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소원하는 것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실망 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지금 소원하는 것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너무 기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복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그 복(福)이 고(苦)로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지금 이루어지지 않은 소원이 지금 당장은 원망스럽지만 시간이 지난 뒤에 보면 오히려 잘된 일일수도 있는 것입니다. 인생지사(人生之事)새옹지마(塞翁之馬)와 같은 것이니까요.

 

불법공부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한결 같아야 합니다. 기도 할 때도 원(願) 하는 것이 이루어지고 아니 이루어지는 것에 집착하기 전에, 모든 소원을 부처님께 맡겨 두고 기도 그 자체에만 전념해야 합니다.

그리고 복덕(福德)을 지어야 합니다. 복덕을 많이 지어놓으면 소원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영원한 복락(福樂)을 누릴 수 있는 길은 오로지 불법을 의지해서 견성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피안(彼岸)의 세계에 이르지 못한다면 적어도 노력은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삶을 행복하게 영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노력이 쌓여서 언젠가는 피안의 저 언덕으로 넘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불법을 공부하다보면 어느 순간 세상이 다르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 때 가서보면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세상과는 전혀 다른,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당나라 때 덕산 이라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이 덕산이 누구냐 하면, 육조 혜능에서 청원 석두, 천황, 용담으로 내려오는 법맥을 이은 선사로 당대를 대표하는 대단한 선지식 이었습니다.

 

이 덕산스님이 아직 젊은 시절의 일로, 그는 금강경을 제일 아꼈고 일생을 금강경을 가지고 생활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부를 때 속성(俗姓)이 주 씨인 관계로 주금강경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어느 날, 교외별전(敎外別傳)인 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을 주장하는 불교가 남쪽지방에 널리 전파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를 믿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덕산은 이 스님들을 만나 코를 납작하게 해 주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덕산은 걸망에 금강경(金剛經)소초(小草)를 짊어지고 멀리 남쪽으로 길을 나섰습니다.

길을 떠나 예주 땅에 다다른 덕산스님은, 점심때가 되어 점심요기를 하려고 주위를 살펴보니 그늘진 곳에 할머니가 시루떡을 앞에 놓고 파는 것이었습니다. 덕산이 그 노파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할머니 이게 뭡니까?’

‘보면 모릅니까, 떡이지요.’

‘한 개에 얼마요?’

‘30전입니다.’

‘그럼 점심요기나 합시다.’

그리고는 걸망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스님, 그 걸망에 뭘 그리 넣고 다니시오.’

‘금강경 소초입니다.’

‘그렇습니까, 내가 전생에 업을 많이 지어서 빈궁(貧窮) 고(苦)를 벗어나지 못하고 이렇게 살지만 그래도 귀한 불연(佛緣)으로 절에 가서 법문(法問)듣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금강경을 들어도 한 구절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스님께서 그 구절을 설명해 주시면 떡은 그냥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뜻을 설명하지 못하면 내가 만 냥을 준다 해도 이 떡은 팔수 없습니다.’

덕산은 속으로 웃으면서, 오늘 점심은 공짜로 먹을 수 있겠구나, 내가 금강경의 대가인데 이 노파가 뭘 모르고 묻는구나, 하고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래 어디한번 물어보시오.’

‘금강경은 석가모니부처님과 慧空第一이라는 수보리존자가 공(空)에 대해서 얘기한 내용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일체동관분에 보면, 수보리야 過去 心 不可得이요, 現在 心 不可得이요, 未來 心 不可得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過去에 이룬 마음도 얻을 수 없고, 現在에 가진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보지 못한 未來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過去現在未來가 不可得인데 조금 전에 스님은 떡을 사서 점심을 한다고 했습니다. 點心이란 점찍을 점(點)에 마음심(心)입니다. 그러나 三世心도 不可得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스님께서는 어느 마음에 점을 찍겠습니까?’

스님은 그만 깜짝 놀랐습니다.

 

원래 점심이란 말은 간단한 식사를 가리키는 말로, 얼마 안 되는 음식을 배속에 점을 찍듯이 집어넣는다는 데서 생긴 말입니다.

 

이 노파가 물은 것은, 곧 점심의 心은 배를 이르지만 이를 마음으로 보고, 이 마음이란 것은 어디에도 머무는 곳이 없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어떤 마음에, 어떻게 점을 친다는 것이냐고 추궁한 것입니다.

 

덕산은 이 노파가 단순히 三世心도 不可得 이라는 말의 교리적인 답을 원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었습니다. 보통내기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의외의 허를 찔린 덕산은 그만 입이 딱 달라붙어서 말을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별명이 주금강경이라고 할 정도로 금강경에 관한한 세상에서 자기를 따라올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자부하던 덕산스님이, 이 노파의 말 한마디에 그만 아무 대답도 못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한참이 지나도 대답이 없자 노파가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중노릇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스님도 金剛經 小草를 메고 다니는 것을 보니 금강경공부를 많이 하셨나본데, 어디 금강경이가 중이요, 문자만 보고 입만 나불댈 줄 알았지, 수십 년 긴 세월 금강경을 독송할 때, 보는 이가 누구이며 말하는 이가 누구이고 듣는 이가 누구인가! 하며 그 마음으로 공부했다면 그 몸에 어두운 마음과 교만한 마음을 지금까지 그대로 가지고 있겠습니까?’

 

덕산은 면전에서, 떡 파는 노파에게 망신을 당하고 호되게 야단을 맞고 보니, 자신이 강북에서 유명한 덕산이라고 밝힐 수 도 없는 노릇이고 참으로 비참하기 짝이 없는 노릇 이었습니다.

 

한참을 지난 뒤 노파가 또다시 말했습니다.

‘스님, 그동안 중노릇 잘못했으면 지금부터라도 잘 하시오.’

호기가 대단했던 덕산도 대답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

‘내가 오랜 세월 떡장수를 하며 많은 사람들을 대하다보니 얼굴을 보면 사람을 볼 줄 아는 지견이 생겼습니다. 불법을 만나서 옳은 길로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옳은 스승을 만나야 합니다. 스님이 지금까지 옳은 스승을 만나지 못한 모양인데 제가 스승 한분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여기서 10리쯤 가면 용담산이 있는데 그곳에 용담원이라는 절이 있습니다. 그 절에 용담선사라고 하는 스님이 계시는데 그 분을 한번 만나보십시오.’하는 것이었습니다.

 

대답은 열심히 했지만 덕산은 노파의 얘기가 귀에 제대로 들어올 리 없었습니다. 덕산은 투덜거리며 말하기를,

‘수십여 년 동안 금강경을 가지고 법문을 했고 사람들이 나를 보고 주금강 이라고 불렀는데, 떡장수 노파에게 말 한마디 못하다니... 오늘로서 금강경은 끝이다.’

 

덕산은 그 길로 바로 용담산 으로 용담스님을 찾아갔습니다.

용담원에 이르러 보니 아무도 없는 듯 조용했습니다. 덕산은 다시 호기를 내어,

‘시도용담(是到龍潭)하니, 용불견담불견(龍不見潭不見)이로구나. (용담원이라고해서 왔더니 용도 볼 수 없고 연못도 볼 수 없구나.) 하고 큰 소리로 외치며 용담원에 들어섰습니다.

 

이때 용담선사가 이것을 보고,

‘그대는 참으로 龍潭에 온 것이네, 어디서 왔는가?’

‘스님의 말씀을 듣고 법을 청해 듣기위해 왔습니다.’

‘그럼 저 객실에서 쉬다가 오늘 저녁에 오거라, 그러면 법문을 일러 주겠다.’

저녁이 되어 덕산스님은 선사를 찾아 갔습니다. 그러나 용담선사는 말하기를,

‘피곤한 몸으로 멀리서 왔으니 그대가 법문을 들을 수 있겠는가,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아침 일찍 오거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선사를 찾아 갔더니 말하기를,

‘잘 쉬었느냐, 오늘 하루 더 쉬었다가거라, 그러면 오늘 저녁에 법문을 일러주겠다.’

하는 수없이 하루를 쉬고 저녁에 또 선사를 찾아 갔습니다.

그런데 법문을 들려주겠다던 선사는 법을 일러줄 생각은 안하고 세상의 잡다한 얘기만 늘어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덧 삼경이 되자,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아침에 오거라, 그러면 그때 법문을 일러주리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는 수없이 덕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오니 밖이 너무 어두워서 자신의 신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용담스님이 호롱불을 확 들이대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깜깜했던 대지가 환하게 밝았습니다. 덕산이 신발을 찾아 신고 댓돌을 내려서서 한발을 막 내딛자 용담스님은 호롱불을 입으로 훅하고 불어서 확 꺼버리는 것이었습니다. 환했던 대지가 다시 칠흑같이 깜깜해 졌습니다. 그 순간 덕산은, 머리를 무엇인가가 탁 하고 치고 지나가고 깜깜했던 마음이 밝아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야말로 確哲大悟 한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덕산은 용담스님에게 큰절을 올리며,

‘스님 감사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어째 네가 내게 큰절을 하는가, 나는 아직 한마디도 법문을 하지 않았거늘.’

‘佛 祖師께서 설해놓은 것을 스님께서 노파심으로 제게 길을 가르쳐 주겠다고 동은 동이고, 서는 서다, 남은 남이고, 북은 북이다, 라고 일러주셨던들 어찌 오늘 이 같은 배움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보니 스님께서 하신 말씀이 법 아닌 것이 없고 법문 아닌 것이 없는데 제가 깨닫지 못하고 더듬거리고 찾아다닌 것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만약 젊은 날의 조주였다면 ‘여기가 용담’이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일갈을 했을 터인데 덕산은 이틀이 되도록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크게 깨친 덕산스님은 그 후 선풍을 날리며 ‘설봉과 암두’ 같은 훌륭한 제자를 두었고, 후에 중국 조동종과 법안종의 태두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一統에 一切가 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것이 법문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산하대지가 화장세계요, 두두 물물이 비로자나부처님이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한밤중에 우는 소쩍새 소리도 그대로가 불법이고, 담장 밖에서 들려오는 황소울음소리도 그대로가 불법이고, 잔설이 남아 있는 이른 봄에 피는 제비꽃도 그대로가 법문이고, 깊은 산골짜기 떨어지는 폭포수도 그대로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요, 도도히 흐르는 강물도 말없는 법문을 들려주는 것입니다. 듣기 좋은 소리, 듣기 싫은 소리 세상의 잡다한 것들이 듣기에 따라서는 모두가 선지식 인 것입니다.

 

여기에 혹하고 저기에 혹하고 이리저리 몰려다니지 말고, 산하대지가 들려주는 참다운 법문을 들을 줄 아는 智見을 길러야 하는 것입니다. 칠흑 같은 어두운 마음에 제 신발하나도 찾지 못하는 마음으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어느 이른 아침, 비둘기가 동구 밖에서 괴나리봇짐을 지고 마을을 나서는 까마귀를 만났습니다. 비둘기가 이상해서 까마귀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이렇게 이른 아침에 괴나리봇짐을 메고 어디를 가는가?’

‘이 마을사람들이 모두 나를 싫어해서 다른 곳으로 떠나기로 했네.’

‘어디로 갈 곳은 정했는가?’

‘갈 곳을 정한 것은 아니고 어디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는 곳으로 가서 살려고 하네.’

‘그대는 사람들이 그대를 왜 싫어하는 줄 아는가? 사람들은 그대를 싫어하는 게 아니고 그대의 울음소리를 싫어하는 것이네, 그대가 울음소리를 고치지 않는 한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일걸세.’

 

근본 바탕을 바꾸는 마음의 혁명을 일으켜야 합니다. 이것이 일통(一統)이 일체(一切)에 통하는 도리입니다.

 

                          기축년, 음력 정월 스므여드레.  마포원각사. 정덕.

출처 : 원각사
글쓴이 : 신묘장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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