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과학 1

인도불교에서 부파의 성립과 발전/이자랑

수선님 2020. 3. 22. 11:59

인도불교에서 부파의 성립과 발전

- 부파 성립에 있어 율의 역할을 중심으로 -

(본고는 금강대학교 HK연구단 주최로 열린 제1회 동아시아불교집중담론(제1차 2015.2.9 및 제

2차 2015.8.27)에서 구두 발표한 원고를 수정 ․ 보완한 것이다.)

이자랑/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HK연구교수


Ⅰ. 머리말

Ⅱ. 부파 발생에 관한 전승: 근본분열과 지말분열

Ⅲ. 부파의 정체성 확립과 율의 공유

Ⅳ. 부파와 대승의 관계 : 학파로서의 대승

 

Ⅴ. 맺음말


<한글요약>

불멸(佛滅) 후 100년경부터 시작된 불교교단의 분열은 이후 200~300년 동안 이어졌으며, 그 결과 교단은 18 혹은 20여개의 집단으로 나뉘었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이 기간을 ‘부파불교(시대)’, 이때 발생한 각 집단을 ‘부파’라고 부른다. 분열 기사를 전하는 제 전승을 통해 분열의 원인 등을 엿볼 수 있으며, 이에 따르면, 이들 부파는 주로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부파 분열사에 대해 직접 언급하는 이들 자료를 통해서는 부파 발생의 원인은 파악할 수 있어도, 각 부파의 성립 요건이나 운영 실태까지 알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불멸 후 100년경에 발생하여 이후 인도불교사의 주역으로 활동했던 여러 부파가 실제로 어떤 성격의 집단이었으며, 하나의 부파로 인식되는 기준은 무엇이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다양한 각도에서 부파의 실상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부파의 정체성 확립에 있어 특히 ‘율(律, vinaya)’이 갖는 의미의 중요성이 근년 지적되고 있다. 기존에는 교리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곧 부파의 발생 원인이자, 교리 그 자체가 각 부파의 성격을 규정짓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이라고 생각되어 온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근년에 이루어진 많은 연구들은 동일한 율의 수지가 곧 동일한 부파에의 귀속 의식을 심어주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을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예를들어, 빨리율에 근거하여 파승(破僧, saṃghabheda)의 개념을 구체적으로 밝혀낸 베헤르트(Bechert)의 연구는 동일한 갈마(羯磨, 승단회의)의 실행 여부가 독립된 현전승가(現前僧伽)의 성립 여부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요건이었음을 보여준다. 부파 역시 하나의 독립된 현전승가를 기준으로 성립되었을 것이므로, 이 연구 결과는 부파 분열과 관련

해서도 유용하다. 또한 부파 간에 갈마설의 차이에 의해 자파와 타파를 구별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예도 알려져 있다.


본고에서는 이들 선행 연구를 기반으로 하여, 동일한 구족계를 받고 동일한 갈마를 실행하며, 동일한 규범에 따라 생활하는, 이른바 ‘율의 공유(共有)’야말로 부파의 가장 중요한 성립 요건이었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 고찰하였다.


Ⅰ. 머리말


일미화합(一味和合)을 유지하던 불교교단1)이 처음 분열한 것은 붓다의 입멸 후 100여년 경의 일이라고 전해진다. 10사(事) 혹은 5사를 둘러싼 논쟁으로 말미암아 교단은 상좌부(上座部, Theravāda)와 대중부(大衆部, Mahāsaṃghika)의 두 파로 분열하였다. 이 사건을 일반적으로 근본분열이라 부른다. 이어 이 두 파는 각각 재분열을 거듭하며, 불멸 후 300~400년 무렵까지 18 내지 20개로 분파해 간다. 이를 지말(枝末)분열이라고 한다. 불멸 후 100년경부터 그 후 200~300여년에 걸쳐 불교교단이 복수의 집단으로 분열해 간 이 시기 및 이 시기에 발생한 복수의 각 집단을 보통 학계에서는 ‘부파(部派)불교’ 시대 및 ‘부파’라고 일컫는다. 이때 사용되는 ‘부파’라는 용어의 적절성 여부에 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2) 현재 이를 대체할 만한 정착된 다른 용어가 있는 것도 아니므로, 본고 역시 부파라는 말로 이 시기의 전통 교단을 지칭하고자 한다.

1) 불교 공동체를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되는 말에 僧伽(saṃgha, 혹은 僧團)와 敎團이 있다. 이 두

용어에 대한 개념 규정은 아직 명확하게 이루어진 적이 없으며, 혼용되고 있다. 이 중 승가의

개념은 비교적 명확하다. 즉, 출가자로 구성된 공동체를 가리킨다. 이에 비해 교단은 출가

공동체인 승가의 의미로 사용될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출가 ․ 재가의 사부대중을

모두 포함한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본고에서는 승가를 포함한 보다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불교공동체를 ‘교단’이라는 말로 표현하고자 한다.

2) 이 말은 전통적인 불교용어는 아니며, 메이지(明治) 이후 근대 일본학자들이 만들어낸 조어

(造語)이다. 부(部)라는 용어는 전통적 술어로 있었으나, 여기에 파(派)를 추가하여 부파라고

한 것은 무슨 파의 계보를 중시하는 일본 문화에 일본불교 특유의 종파, 학파 의식을 추가하여

초기 인도불교의 다양화 과정을 부파라는 개념 틀로 이해하려 한 배경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용어가 등장하게 된 배경이나 문제점에 관해서는 박창환, 「한국 부파 ․ 아비달마 불교학의

연구성과와 과제」, 「한국불교학」 제68집(서울: 한국불교학회, 2013), pp.42-48을 참조.


부파라는 용어 자체도 문제이지만, 사실 이 시기에 분파한 각 집단, 즉 부파를 가리키는 원어 자체도 명확하지 않다. 예를 들어, 각 부파의 명칭에는 ‘설(說)’이나 ‘교리’ 등을 의미하는 ‘와다(vāda)’라는 말이 사용되는가 하면, ‘~에 속하는, ~의’라는 의미를 갖는 ‘-ika, -aka’ 등의 형용사적 어미가 사용되기도 한다. 따라서 이들 부파의 공통된 성격, 다시 말해 부파라고 했을 때 이를 공통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명칭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실제로 빨리문헌에서는 이 18부 내지 20부를 ‘니까야(nikāya)’, ‘아짜리야꿀라니(ācariyakula)’, ‘아짜리야와다(ācariyavāda)’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곧 부파교단의 성격을 명확하게 하나로 규정짓는 일이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남겨진 자료를 통해 볼 때, 각 부파는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의 차이나, 불교 교단의 지리적 확장, 특정 인물 내지 그의 주장이나 해석을 중심으로 한 그룹화 등을 통해 발생한 것으로 보이며, 모든 부파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주요 부파들은 각각 삼장(三藏, 혹은 일부)을 소유하고, 일정한 지역에서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부파로서의 정체성 획득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즉, 대중부의 비구가 대중부의 비구로서 다른 부파와 구별되는 것, 혹은 설일체유부의 비구가 설일체유부의 비구로서 자타 모두 구별 가능한 가장 중요한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부파 간의 교리적 논쟁에 주목하여 교리적인 입장 차이가 각 부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가장 핵심적 요소라고 생각되어 온 경향도 있었지만, 근년 율장 및 대승불교의 기원에 관한 연구 등이 진척되면서 실은 ‘율의 공유(共有)’가 각 부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일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3) 즉, 부파 구성원들 간의 ‘율에 관한 공통된 이해와 실천’이야말로 부파의 가장 주요한 성립 기반이 되는 것이다. 이는 대승불교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관점이다.

3) 푸생은 일찍이 부파를 정의하면서 school(vāda)과 sect(nikāya)라는 두 개념으로 구분하여

이해하고 있다. 즉, school이 교리(아비달마)에 관한 개념이라면, sect는 율에 관한 개념이라고

본다. 그리고 부파는 명확히 율에 관한 개념을 전제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de la Vallée

Poussin, L. “‘Notes bouddhiques Ⅶ: Le vinaya et la pureté d’ intension’ and ‘Note additionnelle’,”

Académie Royale de Belgique: Bulletins de la Classe des Lettres et des Sciences Morales et

Politiques, 5e série, vol.15 (1929): pp. 201-217, 233-234. ; “Notes bouddhiques Ⅷ:Opinions

sur les relations deux véhicules au point de vue du Vinaya,” Académie Royale de Belgique:

Bulletins de la Classe des Lettres et des Sciences Morales et Politiques, 5e série, vol.16

(1930): pp. 20-39.


이하, 본고에서는 기존의 연구 성과를 중심으로 ‘율의 공유’와 부파 성립의 문제, 독자적인 교단을 형성하지 않는 이른바 학파로서의 대승 등을 검토하면서, 인도에서 부파의 성립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Ⅱ. 부파 발생에 관한 전승 : 근본분열과 지말분열


부파의 발생은 불멸 후 100년경에 교단에서 일어난, 이른바 근본분열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근본분열을 기록하는 대표적인 자료로는「도사(島史, Dīpavaṃsa)」와「대사(大史,

Mahāvaṃsa)」등의 초기 빨리 연대기와,「이부종륜론」이나「대비바사론」등 설일체유부 계통의 문헌이 있다. 그런데 이 양자가 전하는 근본분열의 배경이나 과정은 상당히 다르다.4)

4) 불교문헌에서 근본분열의 원인으로 기록되는 전승은 각각 이들 2종의 문헌에 전해지는 10사 와

5사 사건 외, 왕사성결집에서 이미 부파가 발생하였다는 전승,사리불문경(大正藏

24권, pp.899下-903上)에 나타나는 율의 증광 등 모두 4종이다.


「도사」등의 빨리 연대기에 의하면, 붓다 열반 후 100년경에 웨살리(Vesālī)의 한 승원에 살던 왓지족 출신의 비구들이 포살일에 발우에 물을 가득 채워놓고 금전을 받고 있었다. 우연히 이 모습을 목격한 야사(Yasa)라는 비구는 율에 어긋나는 행위라며 비난하였다. 하지만 왓지족 출신의 비구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이를 계기로 교단에는 큰 논쟁이 발생하였다. 즉, 금은 수납 외, 이들이 실행하고 있던 다른 아홉 가지 행위를 포함한, 도합 열 가지 행위에 대한 적법성 여부를 둘러싸고 의견이 나뉘었고, 교단에서는 위원회를 구성하여 옳고 그름을 가렸다. 그 결과 열 가지 행동 대부분이 율에 어긋난다는 결정이 내려졌고, 이에 근거하여 제2결집이 실행되었다. 빨리율을 비롯한 현존하는 제 율의 「칠백건도」에도 이 사건은 전해지고 있지만, 제 율에서는 논란을 잠재운 후 제2결집을 실행하였다는 것까지만 기술하는 한편, 빨리 연대기에서는 결과에 승복하지 못한 승려들이 불복함으로써 교단은 크게 둘로 분열하였다고 한다.


먼저「도사」에서는 “[불멸후] 최초의 100년을 지나 두 번째 100년에 들어섰을 때, 상좌설(上座說, theravāda)에서 대 분열이 발생하였다”5)라고 언급한 후, 제2결집 결과에 납득하지 못한 자들이 따로 편을 이루어 10,000명을 모아 대합송(大合誦, mahāsaṃgīti)이라 불리는 결집을 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경과 율을 편찬했다고 기술한다.6) 한편,「대사」에서는 “처음에 마하깟사빠를 비롯한 대장로들에 의해 실행된 정법의 합송은 상좌(theriyā)의 [합송]이라 불린다. 처음 100년 동안은 그 상좌설(theravāda) 하나 만 있었으나, 이후 이로부터 다른 아사리설(阿闍利說, ācariyavāda)이 발생하였다. 두 번째 합송을 행한 그 장로들에 의해 억압되었던 10,000명의 그 나쁜 비구들은 모두 대중부(Mahāsaṃghika)라는 아사리설을 일으켰다”라고 한다.7)

5) “nikkhante paṭhame vassasate sampatte dutiye sate mahābhedo ajāyittha theravādanam

uttamo.” (Dpv. 제5장 제16게)

6) Dpv. 제5장 제30-38게.

7) “yā Mahākassapādīhi mahātherehi ādito katā saddhammasaṃgīti theriyā ti pavuccati.

(1) eko va theravādo so ādivassasate ahu, aññācariyavādā tu tato oraṃ ajāyisuṃ.

(2) tehi saṃgītikārehi therehi dutiyehi te niggahītā pāpabhikkhū sabbe dasasahassakā

(3) akaṃs’ ācariyavādaṃ te Mahāsaṃghikanāmakaṃ, tato Gokulikā jātā Ekavyohārikā pi ca.

(4) (Mv. 제5장 제1-4게)


이들 기술로부터 십사에 대한 교단의 판단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따로 한 무리를 이루어 원래의 교단에서 분리해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분열한 두 파의 호칭이다. 이들은 각각 ‘테라와다(Theravāda)’와 ‘마하상기까(Mahāsaṃghika)’라 불리고 있다. 먼저 테라와다의 ‘테라’의 경우, 어원은 명확하지 않지만, 산스크리트어 √sthā에서 파생된 말로 ‘지속적인, [많은 날 동안] 지켜본’ 등의 의미를 지니는 말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교단에서 법랍이 높거나 존경받는 비구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편, ‘와다’는 ‘말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vad (vac)’에서 파생된 말로 ‘언설(言說)’, ‘명제(命題)’, ‘교의(敎義)’, ‘교리(敎理)’ 등의 의미를 지닌다.8) 빨리경전에서 와다는 입으로 하는 일상적인 ‘말(speech)’, 말을 주고받음으로 인해 생기는 논쟁이나 토론, 논박, 나아가 교리나 교의, 주의(主義)를 함께하는 무리나 교파, 분파 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9) 따라서「도사」나 「대사」등 빨리연대기에 보이는 테라와다란 빨리상좌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정통인, 말하자면 제1결집에서 결정된 불설을 올바르게 전승해 온 상좌들의 설내지 이를 지지하는 자들로 이루어진 그룹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마하상기까란 ‘대중(大衆)’, 즉 ‘많은 인원으로 구성된’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테라와다라 불리는 정통설에 반대하여 분열해 나온 자들인데, 그 수가 상당히 많았다는 점이 호칭에 반영되고 있다.

8) SED, pp.916, 939 등.

9) 정준영, 「테라와다(Theravāda, 上座部) 불교의 발생과 흐름」,「한국불교학」제55집

(서울: 한국불교학회, 2009), pp.207-208.


이처럼「도사」등의 빨리연대기에서는 근본분열로 발생한 이 두 파의 호칭에 ‘와다(vāda)’ 혹은

‘-aka, -ika, -iya’ 등 형용사를 만드는 접미어를 붙여 ‘~설’ 이나 ‘~의, ~에 속하는’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상좌의 설 혹은 많은 숫자로 구성되었다는, 이른바 호칭 그 자체의 의미에서 드러나는 것 외에 사실상 이 두 파의 부파로서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만한 단서는 없는 것 같다. 분열의 배경을 서술한 전승의 내용으로 보아, 이들이 율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견해가 나뉘어 둘로 갈라졌다는 사실만이 분명할 뿐이다.


한편, 이러한 초기 빨리 연대기의 전승과는 달리, 설일체유부 계통의 문헌에서는 대천(大天, Mahādeva)의 5사(事)를 근본분열의 원인으로 전한다. 대천이 포살일에 설한 아라한의 깨달음을 둘러싼 다섯 가지 주장에 대해 교단에서 찬반 논란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大衆部)’로 나뉘었다고 한다. 이들 문헌에서는 이들 그룹을 ‘부(部)’ 혹은 ‘중(衆)’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예를 들어,「대비바사론」에서는 대천의 5사로 교단이 ‘상좌부’와 ‘대중부’로 나뉘었다고 하며,10)「이부종륜론」에서는 처음에는 대중부와 상좌부로 분열했다가 이어 ‘4중(衆)’으로 나뉘었다고 한다.11) ‘부’나 ‘중’으로 한역된 원어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점은 이들 문헌이 한역될 당시나 그 이전에 중국에서 ‘부’나 ‘중’이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는지, 이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10)「大毘婆沙論」卷90(『大正藏』27, p.511下20).

11)「異部宗輪論」卷1(『大正藏』49, p.15上15-17).


한편, 초기의 빨리연대기나 설일체유부 계통의 한역 문헌에서는 근본분열 이후에 거듭 2차, 3차 등에 걸쳐 교단이 분열하여 결과적으로 본말 합쳐서 20부로 분열해 갔다고 전한다. 이를 지말분열(枝末分裂)이라고 한다.「도사」나「대사」의 지말 분열 전승은 주로 분파 계보 중심의 내용이라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특히 상좌부의 분파에 관해 성전의 의미나 문장에 대한 개작이 원인이 되고 있다고 전한다. 한편, 설일체유부 계통의 문헌에 전해지는 전승에서는 교리적 해석의 차이, 창시자, 거주지 등이 각 부파의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요소이자 부파 성립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부종륜론술기」와「부집이론소」등의 문헌에서는 지말분열로 인해 발생한 각 부파의 기원을 부파의 이름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를 분석해 보면, 부파 발생의 배경을 추측해 볼 수 있다. 크게 분류하면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 교리의 해석을 둘러싼 차이에 의해 분열한 경우로, 교리적 특징을 들어 부파 명으로 삼는다. 대중부 가운데는 일설부(一說部), 설출세부(說出世部), 설가부(說假部)가 있으며, 상좌부 중에서는 설일체유부, 본상좌부, 정량부, 경량부[說轉部]가 해당한다.

예를 들어, 설출세부는 “세간의 번뇌는 전도(顚倒)로부터 발생하여, 이것이 또한 업을 낳고, 업으로부터 과보가 발생한다. 세간법은 이미 전도로부터 발생한 것이며, 전도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세간법은 단지 가명(假名)만이 있으며 모두 실체가 없다. 출세간법은 전도로부터 일어나지 않으며, 도(道) 및 도과(道果)는 모두 실유(實有)로 단지 이것만이 실(實)이며, 세간은 모두 가(假)이다.”라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주장이 대중부의 취지와 맞지 않았기 때문에 따로 갈라져 나와 설출세부가 되었다고 한다.12)

12)「大日本續藏」83권, p.218左a13-18.


둘째, 부파의 창시자의 이름을 부파명으로 삼은 경우이다. 예를 들면 계윤부(鷄胤部), 다문부(多聞部), 독자부(犢子部), 법상부(法上部), 현주부(賢冑部), 화지부(化地部), 정지부(正地部), 법장부(法藏部), 음광부(飮光部, 혹은 善歲部)가 이에 속한다. 다문부의 경우, “널리 삼장을 배우고 깊이 붓다의 가르침을 깨달았기 때문에, 덕에 따라 이름을 삼아 다문부라 한다. 당시 부파의 창시자는 다문의 덕을 갖추고 있었다.”라고 한다.13) 혹은 “붓다 재세 당시 사피의(祀皮衣)라는 무학(無學)이 있었다. 선인이었을 때 항상 나무껍질로 된 옷을 입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이다. 전에 설산에 머무르고 있어, 붓다가 열반에 들었을 때 사피의는 선정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몰랐다.

불멸 후 200년에 이르러 설산에서 나와 대중부에서 삼장을 펼쳤다. 대중부가 단지 얕은 뜻만 퍼뜨리고, 깊은 뜻은 펼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이 스승은 구족하여 다시 깊은 뜻을 읊었다. 그 때 그가 설하는 것을 펼치는 자도 있고, 펼치지 않는 자도 있었다. 펼친 바의 가르침이 대중부보다도 깊고, 이전에 들은 바를 넘고 있었기 때문에 다문이라 한다.”라고 한다.14)

13)「大日本續藏」83권, p.218右a1-3.

14)「大日本續藏」83권, p.218右a3-9.


셋째, 부파가 거주하고 있던 장소의 이름을 부파 명으로 하는 경우이다. 회산주부(灰山住部), 제다산부(制多山部), 북산주부(北山住部), 밀림산부(密林山部), 설산부(雪山部)가 포함된다. 이들은 각 부파가 거주하고 있던 산 이름을 그대로 부파 명으로 하고 있다. 이 설명으로부터 교리적 해석의 차이, 창시자, 거주지 등이 각 부파의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요소이자 부파 성립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지말분열에 관한 이러한 전승은 설일체유부 전통에 속하는 후기의 논사들이 남긴 문헌에만 보이며, 진위(眞僞)를 확인할 수 있는 비교 자료는 없다. 따라서 어느 정도까지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남는다.


그런데 지말분열에 의해 발생한 부파 역시, 빨리 연대기에서는 ‘vāda’나 ‘~에 속하는 자들’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형용사적 접미어를 붙여 표현하고 있으며, 설일체유부 계통의 한역 문헌에서는 ‘부(部)’라는 역어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근본분열과 마찬가지로, 이들 용어만을 보아서는 이들 부파가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 알기 어렵다. 빨리상좌부의 입장에서 다른 부파의 교리를 논파하고 있는 「까타왓투(Kathāvatthu)」의 주석에서는 상좌부와 대중부를 비롯한 (18)부를 ‘(aṭṭhārasa) 니까야(nikāyā)’ 혹은 ‘(aṭṭhārasa) 아짜리야꿀라니(ācariyakulāni)’ 혹은 ‘아짜리야와다(ācariyavāda)’라고도 표현하여, 근본이나 지말분열로 발생한 부파를 니까야, 꿀라, 와다 등의 다양한 말로 표현하고 있다.15) 이중 ‘니까야’란 집회, 클래스(class), 그룹 등을 의미하는 말이다.16) 경장(經藏, Suttapiṭaka)을 5부(部, nikāya)로 분류할 때 사용되듯이, 니까야는 공통된 특징을 갖는 것들을 따로 분류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한편, ‘아짜리야꿀라니’는 스승을 의미하는 ‘아짜리야(ācariya)’와 씨족이나 문중 등을 의미하는 ‘kula(꿀라)’로 구성된 말로 스승의 계보를 가리킨다. 즉, 스승이 설하는 혹은 속한 계보에 근거하여 각 집단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보아도, 또한 근본분열과 지말분열에 관한 여러 전승을 보아도 ‘부파’라는 이름하에 18 내지 20부의 각 집단을 특정할 만한 기준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15) Kv.A, pp.2-3.

16) PED, p.352 nikāya항


Ⅲ. 부파의 정체성 확립과 율(律)의 공유


근본분열이나 지말분열에 관한 전승을 볼 때, 불멸 후 100년경부터 교단이 분열하여 이후 18 내지 20개의 부파로 나뉘어져 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들 부파가 각각 독립된 집단으로서, 다시 말해 다른 집단과 구별하여 자기들만의 정체성을 주장할 수 있는 보다 근본적인 요인은 무엇이었는지, 이들 전승으로부터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일단 이들 전승에 드러나는 부파 성립의 배경으로는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 차이, 불교교단의 지리적 확장,17) 특정 인물 내지 그의 주장이나 해석을 중심으로 한 그룹화18)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모든 부파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주요 부파들은 각각 삼장(혹은 일부)을 소유하고, 일정한 지역에서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7) 이 점에 대해서는 Przyluski, J. Le concile de Rājagṛha: Introduction a l’ histoire des

canons et des sectes bouddhiques (Paris, 1926-28); Hofinger, M. Étude sur le

concile de Vaiśāli (Louvain, 1946) ; 塚本啓祥,「改訂增補 ․ 初期佛敎敎團史の硏究」

(東京: 山喜房佛書林,1966) 등이 주목하고 있다.

18) 붓다의 직제자들은 각각 특정 스승을 중심으로 그들 밑에서 수행을 한 것으로 보인다.

SN.Ⅱ, p.155.


그런데 이러한 특징들과 더불어, 부파로서의 정체성 획득과 관련하여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로 ‘율의 공유(共有)’라는 문제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즉, 대중부의 비구가 대중부의 비구로서 다른 부파와 구별되는 것, 혹은 설일체유부의 비구가 설일체유부의 비구로서 자타 모두 구별 가능한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구성원들 간의 ‘율에 관한 공통된 이해와 실천’이라는 관점을 고려해 볼 만하다. 구족계(具足戒)의 수지는 불교의 정식 출가자인 비구 ․ 비구니가 그 자격을 획득하고 또한 유지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또한 교단의 구성원으로서도 율장에 규정된 규칙은 반드시 실행해야 한다. 그런데 이 율에 대한 이해가 공통되지 않으면, 당장 교단 운영에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수지해야 할 구족계가 동일하지 않으면 범계 여부의 판정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며, 교단 운영에 있어서도 구성원의 통일된 행동을 이끌어낼 수 없다. 더구나 불교교단은 교단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안을 갈마(羯磨, kamma)라는 회의를 통해 결정해야 하며, 이는 동일한 경계[現前僧伽] 안에 속하는 구성원의 ‘전원출석’과 ‘만장일치’에 의해 실행된다. 교단의 일원으로서의 행동 규범인 율에 대한 공통된 이해와 실천이 없다면, 화합갈마의 실행에 적지 않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율이 갖는 이러한 의미는 붓다 재세 당시에 발생한 대표적인 파승 사건인 ‘데와닷따(Devadatta,

提婆達多) 사건’과 ‘꼬삼비(Kosambī, 拘晱彌) 비구들 분열 사건’을 통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들 사건을 전하는 전승을 보면, 분쟁이 발생하였을 때 대립하는 양측이 공통적으로 취한 행동은 바로 ‘갈마의 분리’였다. 「파승건도」에 의하면, 데와닷따는 붓다가 자신이 제안한 5법(法)을 거부하자, 아난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오늘부터 세존과 헤어지고, 비구들과 헤어져서 포살을 하고 승가갈마를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주장에 동조하는 500명의 비구들과 함께 가야시사(象頭山)로 가버린다.19) 한편 「꼬삼비건도」에 의하면, 한 비구의 행동을 둘러싸고 교단 안에 싸움이 발생하였다. 결국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싸우다가 교단이 둘로 나뉘었다. 그러자 한쪽 그룹의 비구들이 계(界, sīmā) 밖으로 나가 별도로 자신들만의 계를 형성하여 갈마를 실행한다.20)

19) Vin. Ⅱ, pp.197-199.

20) 이 행동에 대해 붓다는 “만약 그들이 각각 내가 정한 대로 포살이나 승가갈마를 한다면

문제 없다”라고 하며, 그것은 ‘그들은 서로 不同住(nānāsaṃvāsaka)이기 때문’에 허용

된다고 설명 한다. 승가가 분열했는데 이를 나무라기는커녕 ‘부동주’라는 이유로 허용해

주고 있다. 이 부분은 불교에서 다수의 부파가 발생하게 된 배경으로서 주목해 볼 만한

개념이다. 李慈郞, 「初 期佛敎敎團の硏究 -サンガの分裂と部派の成立-」(東京大學博士學位論文, 2001),

pp.71-83 ; 李慈郞, 「サンガの和合をめぐって -samānasaṃvāsakaとnānāsaṃvāsakaの檢討-」,

「佛 敎硏究」36호(東京: 國際佛敎徒協會, 2008), pp.231-253을 참조.


이와 같이 교단 안에 대립이 발생하게 되면, 서로 계를 달리 하여 별도의 갈마를 함으로써 상대 그룹과 갈라섰음을 보여준다. 갈마는 승가 운영의 기본이다. 새로운 출가자를 양성하는 구족계도 갈마로 진행하고, 보름 마다 바라제목차를 낭송하며 승가의 화합과 청정을 확인하는 포살도 갈마로 이루어진다. 또한 승가에 다툼이 발생하였을 때도, 소임자를 선출할 때도 모든 것은 갈마를 통해 전원합의로 결론을 내야 한다. 따라서 어떤 문제에 대해서든 서로 다른 의견을 지닌 자들은 동일갈마 실행에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동일갈마를 실행할 수 없다는 것은 곧 교단 최대의 이념인 화합을 실현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치명적인 일이다. 따라서 어떤 요인으로 분열을 했건, 그 이후 동일한 부파의 구성원으로서의 인식을 각 비구들에게 명확하게 심어 준 것은 율에 관한 공통된 이해였다고 생각된다.


이는 몇몇 선행연구들을 통해서도 이미 지지되는 바이다. 가장 대표적인 연구자로 먼저 후라우발너를 들 수 있다. 그가 주목한 것은 제3결집 후에 실행된 전도사 파견 전승이다.「도사」나「대사」등의 초기 빨리연대기에 의하면, 불멸후 236년경, 빠딸리뿌뜨라의 아쇼까원에서는 적주(賊住)비구들의 침입으로 7년 동안이나 포살이 실행되지 못하는 혼란이 발생하였다. 당시의 왕 아쇼까는 목갈리뿟따띳싸라는 장로와 더불어 교단의 안정을 회복한 후, 제3결집을 실행하였다. 그리고 정법을 지키기 위해 인도의 변경지로 불법을 전파하는 전도사를 파견하였다고 한다.


후라우발너는 전도사가 파견된 지역과, 제 부파의 산지(産地)가 일치하는 것으로부터 설일체유부, 법장부, 화지부, 분별상좌부는 아쇼까왕 시대에 행해진 전도사 파견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고, 결론적으로 그들의 율장인「십송률」,「사분율」,「오분율」,「빨리율」은 각각 기원전 250년의 아쇼까왕 시대에 비디샤(Vidiśā) 교단에서 유행하고 있던 원본적 율장에 근거한 것으로, 전도 당시, 각 전도사에 의해 도입되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6종 광율(廣律)의 내용이 거의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이것을 전한 제 학파(schools)가 본래 먼 나라로의 전도에 의해 태어났기 때문이며, 교리적인 의미에서의 부파는 보다 후기의 발전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한다.21) 즉, 전도사들이 가져온 율장을 근거로 각 지역에서 부파가 발생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전도사 파견 전승의 역사성 문제도 있기 때문에 이 의견을 모두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교단이 어떤 문제로 분열했든지 간에, 그 교단이 출가자 집단이라면 율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전도사 파견 당시 지율자(持律者)를 포함한 5명의 비구가 동행했던 이유는, 새로운 출가자의 양성을 위해 이들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교단의 모든 일은 반드시 갈마를 통해 결정해야 한다. 그 교단의 규칙에 따라 구족계를 받고, 또한 동일한 갈마를 통해 결정된 여러 가지 규칙을 함께 지킬 때 이들은 동일 부파의 구성원으로서 소속 의식을 갖게 된다. 이 점에서 율장의 초래가 부파 성립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점을 지적한 후라우발너의 연구는 주목할 만하다.

21) Frauwallner, E. The Earliest Vinaya and the Beginnings of Buddhist Literature (Rome, 1956),

pp.1-23.


베헤르트의 파승에 관한 연구 역시 초기의 부파 발생을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하다. 그는 승가 분열, 즉 파승(破僧, saṃghabheda)에 관한 빨리율의 용례를 조사한 결과 “파승이란 계에 의해 한정된 지역적인 승가, 즉 현전승가(現前僧伽)가 율의 문제로 나뉘어, 포살 등의 승가갈마를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22) 흔히 부파분열이라고 하면, 분열사에 관한 전승에서 언급되는 바와 같은 교리적인 문제를 둘러싼 의견의 차이와 이로 인한 분열과 대립 등을 먼저 연상하지만, 베헤르트의 연구에 의하면 초기의 제 부파(nikāya)는 하나의 계안에서 율의 해석을 둘러싸고 의견이 나뉘면서 발생했을 가능성이 크며, 교리를 둘러싼 입장의 차이에 의해 발생한 와다(vāda)의 성립은 보다 후기의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23)

22) Bechert, H. “Aśokas “Schismenedikt” und der Begriff Saṃghabheda,” Wiener Zeitschrift

fürdie Kunde Süd und Ostasiens, vol.5 (1961): pp. 18-52. ; 한편, 파승의 의미에 관해서는

그 후, 사사키 시즈카가 한역 율도 精査하여 구체적인 의미를 밝히고 있다. 佐々木閑,インド

佛敎變移論 -なぜ佛敎は多様化したのか(東京: 大藏出版, 2000), pp.57-123

23) Bechert, H. “Notes on the Formation of Buddhist Sects and the Origins of Mahāyāna”,

German Scholars on India, vol.1 (1973): pp. 6-18; “On the Origination and Characteristics

of Buddhist Nikāyas, or Schools,” Premier Colloque Étienne Lamotte (Louvain-la-Neuve,

1993), pp.51-56


한편, 부파 발생에 언어가 미친 영향을 고려한 히뉴버의 연구도 주목된다.24) 그는 승가갈마를 실행할 때 이루어지는 언어의 발음에 의한 차이와 부파 형성과의 관련을 논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부파 간에는 갈마설을 읊는 구절이나 문자의 발음 및 형식에 다소의 차이가 있으며, 자파와는 다른 갈마설을 읊는 다른 부파의 갈마는 그 유효성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예를 들면, 삼귀의의

‘buddhaṃ saraṇaṃ gacchāmi’를 읊을 경우, 비음으로 ṃ을 발음하는 것도, 혹은 ‘buddham

saraṇam gacchāmi’처럼 그저 m으로 발음하는 경우도 있다. 빨리율의 주석서인 Smp에서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인정하는데, 이는 곧 부파 간에 갈마설의 차이에 의해 자파와 타파를 구별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실제로 나중에 동남아시아에서 이 두 발음을 둘러싸고 분열이 발생한 사례를 비조는 보고하고 있다.25) 또한, Smp는 삼귀의를 읊을 때, 구족계를 받고자 하는 자의 이름을 거론하고 ‘ahaṃ bhante Buddharakkhito yāvajīvaṃ buddhaṃ saraṇaṃ gacchāmi.(존자여, 저 붓

다락키따는 평생 부처님께 귀의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안다까(Andhaka)파의 주석서에 보이는데, 이와 같은 낭송법은 빨리 성전에서도 다른 주석서에서도 전혀 볼 수 없는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 낭송법은 안다까들의 취향에 불과하기 때문에 따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 기술로부터는 구족계의 갈마어를 둘러싸고 안다까와 마하위하라(Mahavihāra)의 테라와딘(Theravādin)이라는 두 개의 상이한 율 전통이 존재했음이 예상된다.

24) 초기의 부파 발생에 언어가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지적한 최초의 연구는 Minayeff, Pali

Grammar, A Phonetic and Morphological Sketch (New Delhi, 1882; Indian Edition, 1990),

pp. 35-48일 것이다. 그는, 초기의 불교도들이 자신들의 방언으로 성전을 보존하는 습관이

있으며, 그것이 제 학파의 형성에 공헌했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 정보는 Dutt, N. The

Spread of Buddhism and the Buddhist Schools (New Delhi, 1980), p. 118로부터 얻었다.

25) Bizot, F. Les traditions de la pabbajjā en Asie du Sud-Est (Vandenhoeck & Ruprecht in

Göttingen, 1988).


이상, 몇몇 대표적인 연구를 중심으로 부파의 정체성 확립에 있어 율이 지니는 중요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들 연구에서 공통적으로 부각되는 것은 바로 공통된 율에 근거한 공통된 갈마의 실행이다.


부파의 발생 요인은 사실 한 두 가지로 정리하기 어렵다. 기본적으로는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이 배경에는 특정 장로를 둘러싼 비구들의 그룹화가 있을 것이고, 또한 교단의 지역적 확장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요인에 의해 다툼이 시작되었건 혹은 자연스럽게 그룹화가 이루어졌건 간에, 교단의 운영에 있어 율이 지니는 의미를 고려할 때 ‘율의 공유’야말로 부파라 불리는 전통적인 불교교단의 정체성 확립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Ⅳ. 부파와 대승의 관계 : 학파로서의 대승


부파의 정체성을 율의 공유라는 관점에서 규정해 볼 수 있다면, 대승은 어떠한가? 대승이 부파에 소속된 학파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몇몇 학자에 의해 표명된 견해이다. 여기서 학파란 구족계 갈마에 의해 소속이 결정되는 교단으로서의 자립성에 초점이 놓여 있는 부파라는 개념과는 달리, 교단으로서의 자립성과는 무관하게 동일한 사상적 신조의 공유에 초점이 놓여 있다.26) 그런데 대승의 기원과 관련하여 대승이 특정한 하나의 부파에서 나왔는지, 아니면 다수의 부파 속에 대승을 지향하는 자들이 있어 이들이 대승을 일으켰는지에 관해서는 아직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26) 한편, 나띠에는욱가장자경(Ugraparipṛcchā)의 분석 결과, “이 경전의 작자에게 있어

대승이란 바로 菩薩道이다. 대승이란, 학파school도 아니고, 교단sect도 아니며, 운동

(movement)도 아니다. 그것은 기성 불교교단 속에서 추구되어야 할, 각별한 정신적 사명이다.

따라서 대승교도, 다시 말해 보살이란 무언가 새로운 불교를 신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가장 엄격하고 가혹한 형태로 오로지 불교를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결론짓고 있다.

Nattier, J. A Few Good Men: The Bodhisattva Path according to The Inquiry of Ugra

(Ugraparipṛcchā(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03), p. 195.


가장 본격적으로 학파로서의 대승의 모습을 밝혀낸 것은 아마 쇼펜일 것이다. 쇼펜은 대승

(Mahāyāna)에 언급하는 6세기부터 12세기에 걸친 14종의 비문과, 또 다른 표현으로 대승에 언급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80종의 비문을 조사한 결과, 대승은 4세기까지 비문 상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4세기까지 대승은 독립된 교단을 형성하는 일 없이 부파 속에서 공존하였을 가능성을 서술하고 있다.27) 그런데 이 점에 대해 가라시마 세이시는 후대까지 대승(mahāyāna)이라는 이름이 인도의 초기 명문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대승의 주역이 대중부라는 특정 부파에 소속된 자들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28) 대승과 대중부의 밀접한 관련이 지적되는 한편, 대승이 부파 교단에 소속된 학파적 성격이 강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일치하지만, 이를 어떤 특정 부파가 아닌 다수의 부

파 속에서 발견하려는 입장도 있다. 현재 학계에서는 이 입장이 우세한 것 같다.29)

27) Schopen, G. “Mahāyāna in Indian Inscriptions,” Indo-Iranian Journal, vol.21 (1979),

pp. 1-19.대승이 부파와 구별되는 교단으로서의 조직을 가지고 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대승의 학파로서의 존재 가능성에 관해서는 근년 대승을 ‘부파 내부의 경전

제작 운동’으로 이해한 시모다의 연구를 비롯하여, 대승불교의 기원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대략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고 생각된다. 下田正弘,「涅槃經の硏究」(東京:

春秋社, 1997). ; 下田正 弘, 「經典を創出する-大乘世界の出現」,「大乘佛敎の誕生」

シリーズ大乘佛敎2(東京: 春 秋社, 2011).

28) 辛嶋靜志, 「누가 대승(mahāyāna) 경전을 창작하였는가? -대중부(大衆部) 그리고 방등

(方等,vaitulya)경전」,불교학리뷰16호(논산: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2014),

pp.59-68.

29) 이는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이미 몇몇 학자들을 중심으로 주장되어 온 견해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프르질러스키는 대승이 특정한 한 부파로부터 발생한 것이 아닌, 각 부파 내부에서

대승 운동을 발전시켜 갔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설일체유부의 대승’ ‘정량부의 대승’ ‘법장부의

대승’이라는 존재를 추정한다. 이외, 위에서 언급한 Bechert와 Poussin, 그리고 Przyluski, op.

cit., p.364도 유사한 의견을 보이고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下田正弘, 앞의 책, pp.16-17을 참조.


다소 후대의 기록들이기는 하지만, 5~7세기경에 인도를 방문했던 중국 구법승들의 기록은 당시 인도불교의 상황을 살펴보는데 있어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그런데 이들 기록에서도 대승교도가 부파교단에서 동주하며 부파의 율에 따라 생활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관련 기술을 발췌해 보자.


「마하승기율」에 의하면, 5세기에 인도를 방문한 법현法顯(339-420년)은 빠딸리뿌뜨라 천왕정사(天王精舍)에서 대중부의 율 사본을 필사하고 있다.30) 이 정사가 대승의 승려들이 거주하는 대승 사원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사원의 대승 승려들은 대중부에 속했으며, 이 사원은 대중부 겸 대승 사원이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31) 이 율 사본이 한 때 악한 왕의 횡포로 피폐해졌던 빠딸리뿌뜨라 승단이 율에 근거하여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기원정사에서 가져왔다32)는 점을 고려할 때, 그냥 보관하고 있던 율 사본 가운데 하나로 보기는 어려우며, 이 사원에서 오래 전부터 실행되고 있던 율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즉, 대승의 사람들도 부파의 율을 전승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 하나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법현은 “대승의 사람은 반야바라밀, 문수[보살], 관세음[보살] 등을 공양한다”라고 기술하고 있다.33) 이는 대승의 승려가 지니는 특

징이 대승 문헌이나 보살의 공양 여부에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30)摩訶僧祇律卷40(大正藏 22권, p.548中5-7), “法顯於摩竭提國 巴連弗邑 阿育王塔南

天王精舍 寫得梵本還楊州”

31) 辛嶋靜志[2014: 63-64].成實論의 저자인 하리바르만(Harivarman, 250-350년경)의

전기 에 “時有僧祗部僧住巴連弗邑 並遵奉大乘 云是五部之本(당시 빠딸리뿌뜨라에 살았던

대중부의 비구들은 모두 대승을 받들고 있었고, 이것이야말로 5부 니까야의 근본으로 말해

졌다)”라고 하여, 빠딸리뿌뜨라에서의 대중부와 대승의 밀접한 관계를 엿볼 수 있다고 한다.

辛 嶋靜志, 앞의 논문, p.64에서 재인용.

32)摩訶僧祇律卷40(大正藏 22권, p.548中1-5).

33)高僧法顯傳(大正藏 51권, p.859中27-28), “摩訶衍人則供養般若波羅蜜 文殊師利

觀 世音等”


7세기에 인도를 여행하고 나란다사에서 유학한 구법승 의정義淨(635-713년)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전한다. 그는 대승과 부파교단이 하나의 승원에서 섞여 생활하고 있는 모습을 전하면서 “그 모습을 보면, [대승도 소승도] 율검律檢(율장의 가르침에 의한 檢校)은 다르지 않고, 모두 오편五篇을 제정하고 있으며, [대승도 소승도] 모두 사제를 닦고 있다. 만약 보살을 예배하고 대승경을 독송한다면 이를 대승이라 하며, 이러한 것을 하지 않는다면 이를 소승이라고 부른다. 단지 그것만이 다르다. 그리고 말하는 바의 대승이라 해도 두 종류가 있음에 불과하니, 중관과 유가34)이다”라고 한다.35) 의정의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대승과 소승은 하나의 승

원에서 공주하고 있었다. 둘째, 율에 대한 이해를 함께 하고 있다. 셋째,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인 사제를 함께 배우고 있었다. 넷째, 대승교도들은 보살에 대한 예배 및 대승경전을 독송하고 있다. 다섯째, 대승은 중관과 유가 둘 뿐이다. 이로부터 당시 인도에서는 몇몇 주요한 부파들을 중심으로 교단이 형성되어 있고, 대승은 그 부파의 구성원으로 존재하여 단지 보살에 대한 예배나 대승경전 독송 등과 같은 행동을 특별히 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중관 혹은 유가에 속해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34) 대승불교가 전개된 이후, 설일체유부나 경량부, 유가행파, 중관파 등이 특히 세력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이 중 유가행파와 중관파는 각각 동일한 사상을 주장하는 계통의 사람들을

총칭하는 명칭이며, 독립된 부파를 형성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 池田練太郞, 「佛敎敎團の展開」,

「佛敎の形成と展開」新アジア佛敎史 02 インドⅡ(東京: 佼成出版社, 2010), p.162.

35)南海寄歸內法傳(大正藏 54권, p.205下). ; 宮林昭彦 ․ 加藤榮司 역,「南海寄歸內法傳 -

七世紀インド佛敎僧伽の日常生活」(京都: 法藏館, 2004), pp.17-18.


한편, 7세기 전반에 인도 각지를 순례하였던 현장(602-664년)은 승가라(僧伽羅, 스리랑카)국에서 ‘대승상좌부(Mahāyāna-Sthavira)’를 익히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36) 현장이 언급한 ‘대승상좌부는 상좌부에서 구족계를 받고, 상좌부 갈마에 의해 생활하는, 이른바 상좌부 비구이면서 대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자들의 집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37)

36)大唐西域記卷8(『大正藏』51권, p.918中).

37) Bechert, op. cit., “Notes on the Formation of Buddhist Sects and the Origins of

Mahāyāna”, p. 13.


이들 기록으로부터 5~7세기경의 인도에서는 부파교단 내부에 대승교도가 공주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그리고 “[대승도 소승도] 율검은 다르지 않고, 모두 오편을 제정하고 있다”는 의정의 기록으로 볼 때, 대승교도 역시 부파의 율장에 따라 생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대승을 부파로부터 독립된, 이른바 또 다른 부파의 형태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된다.38)

38) 밀교 문헌인의례강요(Kriyāsaṃgraha)의 출가 작법에서도 밀교의 출가자가 어떤 부파에

소속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種村隆元, Kriyāsaṃgrahaの出家作 法」,

「インド哲學佛敎學硏究」제2호(東京大學インド哲學佛敎學研究室, 1994), pp.53-67.


또한 대승불교에 부파교단의 구족계에 해당하는 새로운 계율이 보이지 않는 것도 대승의 교단으로서의 존재에 의문을 품게 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대승에서는 초기에 ‘십선계(十善戒)’가 중시되다가, 이후 삼취정계(三聚淨戒) 등이 등장한다. 그런데 십선계는 구성원을 통제할 수 있는 율적(律的)인 성격을 갖지 않으며, 삼취정계에서는 오히려 보살이 지켜야 할 계율로서 부파교단에서 지켜지고 있던 바라제목차나 재가자의 오계, 팔재계 등의 수지를 섭율의계(攝律儀戒)로 도입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대승‘계’로서 내용적인 면에서 모든 중생에 대한 대비심에 근거한 적극적인 선행의 실천을 강조할 뿐이다. 대승의 독자적인 율장이 없다는 것은 대승불교의 출가자가 부파 교단에서 구족계를 받고 그 안에서 생활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승은 교단으로서의 조직은 형성하고 있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39)

39) 渡邊章悟, 「大乘敎團のなぞ」, 佛敎の形成と展開 新アジア佛敎史 02 インドⅡ(東京:

佼成出版社, 2010), pp.173-174.


한편, 대승의 대표적 논사들이 각각 특정 부파에 속해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을 통해서도 대승과 부파 교단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먼저 나가르주나(Nāgārjuna, 龍樹)는 대중부와의 밀접한 관계성이 지적되고 있다. 나가르주나는 대중부 안다까(Andhaka)파가 번성한 안다까 지방에서 활약했는데, 그의 이름을 딴 나가르주나꼰다(Nāgārjunakoṇḍa)에서 대중부 혹은 대중부 계의 부파의 3세기 비문이 다른 부파의 것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이 발견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이 지역에서 대중부나 그 계통의 부파가 번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40) 이 외, 짠드라끼르티(Candrakīrti)나 샨띠데바(Śāntideva)도 저작 내용으로 보아 대중부 내지 그 계통 부파 소속의 승려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41)

40) 이 외, 나가르주나가 대중부의 경전에 특히 밝았다고 보이는 여러 증거들도 있다.

辛嶋靜志,앞의 논문, pp.64-65.

41) 辛嶋靜志, 앞의 논문, pp.65-66.


한편, 유식사상의 대성자인 바수반두는 설일체유부 계통의 승려로 「아비달마구사론」을 지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몇몇 대승경전의 주석서 역시 지었다. 이런 그를 설일체유부의 「아비다르마디빠」에서는 ‘설일체유부로부터 낙오’한 자라고 비난하고 있다.42) 또한 빠라마르타(Paramārtha, 眞諦)는 정량부의 율 문헌인「율이십이명료론(律二十二明了論)」을 번역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정량부 소속의 비구였을 것으로 추정되며,43) 논리학으로 이름을 떨친 디그나가(Dignāga)는 독자부에서 출가했다고 생각된다고 한다.44)

42) Abhidh-d 282.1. 앞의 논문, p. 68. 한편, 후나야마는 바수반두와 더불어, 중관파의 논사

샨타 락시타도 설일체유부 계통으로 보고 있다. Funayama, T., “The Work of Paramārtha:

An example of Sino-Indian cross-cultural exchange”, Journal of the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Buddhist Studies, vol.31, no.1-2 (2010), pp. 147-148.

43) Funayama, 앞의 논문, pp. 147-148.

44) Funayama, 앞의 논문, p. 147, note 20.


이와 같은 점을 고려할 때 대승의 출가자 역시 부파교단에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은 부파의 승려였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아 보인다. 다만, ‘부파교단’이라고 했을 때 그 범위를 어디까지 한정할 수 있을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많은 대승불전의 기술로부터 알 수 있듯이 대승을 비판하는 불교도는 존재했으며, 실제로 설일체유부의 논서인아비다르마의 등화燈火(Abhidharmadīpa)는 대승불전은 삼장 밖에 있다고 단언하는등 설일체유부를 중심으로 대승에 대한 비판이 적지 않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파에 따라 대승에 전적으로 호의적이었던 경우가 있는가 하면, 적대적인 경우도 있는 등, 입장 차이는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45)

45) 馬場紀壽, 「上座部佛敎と大乘佛敎」, 大乘佛敎の誕生シリーズ大乘佛敎 2(東京: 春秋社, 2011),

p.144.


한편, 대승이 학파로서 부파 내부에 병존하고 있었다는 점은 대승경전이 부파 내부에서 전승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련의 증거들을 통해서도 증명된다. 예를 들어, 90년대 중반 경부터 간다라에서 간다라어 및 산스크리트어 사본이 연달아 발견되고 있는데, 대중부 ․ 설출세부 계통의 부파 문헌과 더불어 대승경전으로 생각되는 사본이 포함되어 있다. 마크 아론과 리챠드 살로몬은 이들 사본의 검토 결과, 대승불전은 1, 2세기부터 존재하였으며, 대승은 이른바 주류불교(Mainstream Buddhism), 즉 대중부를 포함한 여러 전통 부파 속에서 공존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46)

46) Allon, M & Salomon, R. “New Evidence for Mahayana in Early Gandhāra,” The Eastern

Buddhist, vol.41-1, 2010, pp.1-22. 이러한 점들과 관련하여 간다라 지방에서 전통적인

부파의 승원에 대승의 보살상이 상당히 많이 있었다는 것을 지적한 Rhi의 논문도 부파

내부에서 대승경전이 숭배되고 있었던 상황을 보여준다. Rhi, Juhyung. “Bodhisattvas in

Gandharan Art: An Aspect of Mahayana in Gandharan Art”, Gandharan Buddhism:

Archaeology, Art, Text, Pia Brancaccio & Kurt Behrendt (ed.) (Vancouver and Toronto:

University British Columbia Press, 2006), pp.151-182.


Ⅴ. 맺음말


인도에서 부파의 확립은 율의 공유라는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한편, 대승의 출가보살들은 부파 교단에서 구족계를 받고, 그 부파의 일원으로 살면서, 단지 사상적으로 대승을 추구하는, 이른바 학파라 불리만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즉, 대승은 부파교단에서 기존의 전통적인 율에 따라 생활하고 각 부파의 교리를 학습하면서, 한편으로 보살도를 추구하는 일부의 승려들이 만들어낸 사상적 공동체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미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인도에서 대승불교는 교단사적 입장에서 그 실체를 파악하려고 하면 좀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특히 초기대승불교는 ‘지속적인 일종의 경전 제작 운동’이라고 정의할 만한, 이른바 ‘경전 제작’이라는 점에서

큰 특징을 보여준다. 전통적인 부파교단 내부에서 대승을 지향하는 자들이 지속적인 경전 제작을 통해 대승이라는 실체를 서서히 만들어간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시모다 마사히로는 2011년에 발표한 「경전을 창출하다 –대승세계의 출현」이라는 논고에서 ‘대승교단이 대승경전을 생산한 것이 아닌, 대승경전이 대승교단을 생산했다’는 취지의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47) 즉, 대승교단이라는 구체적인 실체가 존재하고 이 교단 안에 속한 사람들이 경전을 제작하거나 건축, 미술 등의 활동을 한 것이 아닌, 경전이 먼저 존재하고 이를 기반으로 대승은 교단으로서 구체화되어갔다고 하는 것이다. 즉, 텍스트가 외부 세계를 변용시켜 갔다고 이해하고 있다. 시모다는 이어 동아시아를 예로 들며, 대승교단이 없었던, 말하자면 교단적 요소가 전혀 없었던 중국에 ‘서사 경전’이 도입되면서 이를 기반으로 대승교단이 창성創成되기 시작했다고 하며, 대승경전이 외부 세계에 작용하여 외부 세계를 변용시키고 대승교단을 창출해내었다고 한다. 그리고 “역경 삼장의 기록이나 비문의 출토 시대가 보여주듯이, 대승경전이 대승교단을 창성하는 속도는 인도보다 중국에서 빨랐을 가능성이 있다. 역경 삼장들이 대승교단의 기초가 되는 대승의 율장을 구하기 위해 인도에 갔던 사실, 하지만 입수할 수 없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보살계 불전이 편찬된 사실은 이러한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준다.”48)라고 하여, 중국에 대승 서사경전이 도입된 후 교단으로서의 체계를 갖추어 나갔던 점에 유의하며 대승교단의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47) 下田正弘, 앞의 논문, pp.38-71.

48) 下田正弘, 앞의 논문, p.49.


또한 중국인들이 처음으로 율의 진정한 의미를 인식하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후 4세기 후반 20년 무렵 부터49)였던 것으로 보인다. 교단 정비 등을 위해 율장 완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중국승려들 가운데 율장을 구하기 위해 직접 인도로 가는 사태가 발생하였는데, 중국에서 인도불교의 ‘부파’라는 개념을 비교적 확실하게 인식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일 것이다.50)

49) TŌRU FUNAYAMA. “The Acceptance of Buddhist Precepts by the Chinese in the

Fifth Century, Journal of Asian History, Vol.38, No.2 (2004): p. 10.

50) Bangwei Wang[1994] “Buddhist Nikāyas through Ancient Chinese Eyes,”

Untersuchungen zur buddhistischen Literatur, ed, by H. Bechert (1994): p. 166.


이러한 점들은 인도처럼 구족계 갈마에 의해 소속이 결정되는 교단으로서의 자립성에 초점이 놓여 있는 부파의 개념이 아닌, 동일한 사상적 신조의 공유에 초점이 놓인 학파의 개념 내지 그에 기반을 둔 종파 등의 실체를 이해하는데 있어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학보 제74 집

 

 

 

 

 

 

실론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gikoship/15782984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