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과학 1

무아·윤회 문제의 공약불가능성/조종복

수선님 2020. 3. 22. 12:12

동아시아불교문화』33집, 2018. 3, 135~160


무아·윤회 문제의 공약불가능성

조 종 복/동국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Ⅰ. 문제의 제기

Ⅱ. 윤회의 주체에 관한 전통적 학설들의 한계

Ⅲ. 무아․윤회 논쟁과 공약불가능성

Ⅳ. 맺음말


<국문초록>

무아설에서는 주체가 부정되지만 윤회설에서는 주체가 필연적으로 전제

되는 사실에서 무아와 윤회의 주체성을 모순 없이 연결하는 문제를 두고 그

동안 많은 해석과 논쟁이 있어 왔다. 본고는 무아와 윤회가 공약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둘이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무아와

윤회가 서로 충돌되거나 모순되지 않음을 공약불가능성(incommensura bility)

개념에 의탁하여 살펴보자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토머스 쿤(Kuhn, T. S.)이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에서 주장한 상이한

패러다임 사이의 공약불가능성 테제에 의하면 패러다임 간의 차이는 근본적

인 것이고 서로 다른 세계를 의미하기에 때문에 상이한 패러다임에 입각하

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으며 상대방의 관점에 완전히 접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무아와 윤회는 동일 평면에서 분절된 개념이 아니

다. 무아의 세계와 윤회의 세계는 ‘규칙이 다른 게임’의 세계이므로, 한쪽의

기본 술어를 가지고 다른 한쪽을 재단하려고 하면 필연적으로 범주의 오류

(category-mistake)를 범하게 된다. 무아와 윤회 사이에는 공약불가능성이 존

재한다. 불교 내의 무아와 윤회의 상충이라는 문제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무아·유아 논쟁에서 무아와 윤회를 동일 평면에서 양립시키려는 시도는 무

아설의 절대성을 인정하되 윤회설의 의미를 약화시켜 무아·윤회설을 정당

화하거나, 반대로 윤회설을 수용하고 무아설을 약화시켜 타협하는 견해를 취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무아와 윤회는 동일한 시공간의 차원이 아니다.

양측의 시공간에는 공약 불가능성이 존재하므로, 그 둘의 소통은 수평적 평

면이 아닌 수직적 사고를 통해 시도되어야 한다.


Ⅰ. 문제의 제기


무아설은 불교의 핵심 교리로서 고유한 것이나 윤회설은 유아설(ātman)과

함께 불교 이전에 성립되었다. 두 교리는 다른 바탕에서 이루어졌지만 불교

는 이들을 양립시켜 왔다. 그런데 무아설에서는 주체가 부정되지만 윤회설

에서는 주체가 필연적으로 전제되는 사실에서 두 이론체계는 표면적으로 상

충 관계에 놓이게 된다. 이를 두고 이루어진 무아·윤회 논쟁1)은 무아와 윤

회의 개념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에 따라 매우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어 왔다.

1) 무아·윤회의 주체문제에 대한 논쟁은那先比丘經(Milindapañha)(BC150경)에서도 언급되

어 있을 정도로 오래된 논제이다. 구미에서는 Liz Davids(1843-1922)가 쟁점화 하였고, 국내에

서는 윤호진이 1981년에 프랑스 소르본느대학에 제출하였던 박사학위 청구논문那先比丘經

에서의 무아와 윤회문제(Le Probléme de l’anātman et du saṃsāra dans le sūtra du bhikṣu

Nāgasena)를 1992년에무아·윤회문제의 연구(민족사)라는 제목으로 국내 출판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촉발된 무아·윤회 논쟁이 지금까지 간헐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불교는 종교이자 철학이며 철학이자 종교이다. 윤회의 주체 문제를 사이

에 두고 무아설과 윤회설이 모순된다는 사실이 인정되면 종교로서도 철학으

로서도 불교는 결코 성립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논쟁에는 무아와 윤회

의 모순적 성격을 해소하여 불교 교리의 체계를 확립하여야 한다는 불가피

한 측면이 있다. 마쓰다 히데오(增田英男)는 무아와 윤회의 주체성이 모순

없이 연결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의 해석 가능성을 5가지로 분류한다.


① 무아의 입장을 절대적으로 중시하는 해석이다. 무아를 자아의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해석하고, 자아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윤회설은 불교의 본지

가 아닌 당시 유행한 사상을 첨가한 것 또는 방편으로 본다[無我絶對說].


② 윤회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무아는 ‘주체로서의 자아(主體我)’

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 관념, 아집과 집착에 고착된 ‘실체인

자아(實體我)’의 부정을 의미할 뿐이고, ‘진실된 자아(眞我)’를 오히려 긍정하

는 해석이다[眞我說].


③ 무아의 입장과 윤회의 주체성이 양립함을 인정하는 해석이다. 무아설

과 윤회설의 입장 차이 또는 견해의 차이로 보아, 각각의 입장에서 쌍방의 존

립을 인정한다[無我·輪廻 兩立說].


④ 무아설과 윤회설을 모두 부정하는 해석이다. 붓다의 무기, 즉 중도의 입

장에 불교의 본지가 있다고 하여, 어떤 것에 대해서도 확정적인 언표를 유보

한다[無我·輪廻 否定說].


⑤ 무아설과 윤회설의 양자를 초월하고 지양하는 견지에서 보는 해석이

다. 유아와 무아를 구분하여 분석적으로 보는 입장을 희론으로 본다. 이것을

절대적으로 부정하고 초월한 무분별지에서 진실의 주체(법신)가 확립된다고

본다[般若法身主體說].2)

2) 增田英男(1965), 110-111.; 정승석(1999), 217. 재인용.


위와 같이 해석한 ①의 입장은 주체성의 문제를 미해결로 남긴 것이고, ②

의 입장은 무아설의 근본 의미를 훼손한 해석이며, ③의 입장은 모순을 회피

했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고 ④의 입장은 소극적인 판단 중지에 그친 견해라

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마쓰다 히데오는 결국 ⑤의 입장으로 귀착하게 된다

고 평가한다.3)

3) 정승석(1999), 218.


모든 존재를 네 가지 논리 형식으로 고찰하는 四句分別이 있다. “A다(有)

·A가 아니다(無)·A이기도 하고 A아닌 것이기도 하다(亦有亦無)·A도 아니

고 A아닌 것도 아니다(非有非無)”가 그것인데, 이를 무아론에 대비하면, “사

람에게는 我가 있다. 사람에게는 我가 없다. 사람에게는 我가 있기도 하고 없

기도 하다. 사람에게는 我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의 형식이

될 것이다. 마쓰다 히데오의 분류에서 ①,②,③,④ 네 가지는 사구분별의 유·

무·역유역무·비유비무에 해당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결론적으로 제시한

⑤의 견해는 네 가지 논리의 모든 존재형식을 벗어나 중도를 표방한 것이라

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무아와 윤회를 초월하여 제3의 입장을 건립한 것

이다. 여기에는 공약불가능성이 전제되어 있다.


칼루파하나(Kalupahana)는 붓다는 자아의 존재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

지 않은 중도의 입장을 취하였으며, 붓다의 “무실체성의 이론(the theory of

nonsubstantiality)은 한편으로는 브라만이나 아트만과 같은 우파니샤드적 실

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가능한 모든 연속성을 극단

적으로 부정하고 있는 물질론에 대한 부정의 입장으로서, 모든 가능한 자아

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 그 두 가지 극단적 대립 사이의 중도를 지향

한 것”4)이라고 한다. 즉 상주와 단멸의 중도적 자아를 상정하여, 실체성을 가

진 불멸의 자아는 부정하지만, 그렇다고 현생의 자아나 내생의 자아에 대한

동일성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라고 해석한다.

4) Kalupahana(1976), 41


한편 상주론도 아니고 단멸론도 아닌 중도의 입장에서, 자아는 연기의 자

아이며 “동일성을 유지시키는 그 무엇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건에 따라 조건

이 지속하는 한 지속·연속되는 하나의 과정”5)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중도적 관점을 윤회의 주체 문제와 결부시킬 경우, 중도의 근본 입장

이 명확하게 드러나기보다는 자칫 ‘연기적 실체’, 즉 연기하므로 결코 실체6)

일 수는 없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연기 과정의 기저에 흐르는 ‘어떤 것’으로서

‘연기적 실체’가 있다는, 새로운 형이상학적 명제를 정당화하는 주장으로 변

질될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 이 점은 뒤에서 논의할 상속이론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장애가 되며 문제가 되기도 한다.

5) 안옥선(2004), 222

6) 연기와 실체에 대한 다양한 해석 중에서 여기서 말하는 실체는 ‘연기이므로 무자성인 실체’의

의미이며 상태에서 포착되는 질료(dravya)가 아닌, 동적인 상태에서 포착되는 자성(svabhāva)

의 의미로서 기술함


국내에서 무아·윤회 논쟁의 일반적인 형태는 무아와 윤회가 대립적인 모

순 관계이라는 입장과 양립 가능한 관계라는 입장의 두 주장이 서로 대치하

는 구도로 진행되었다. 지금까지도 이 논쟁은 종료되지 않은 채, 현재 진행형

으로서 많은 학술적 담론을 양산시키고 있다. 무아를 체득하면 윤회는 없다

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무아와 윤회의 모순성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는 불필

요하다는 방경일의 견해7)와 무아설은 윤회로부터 벗어난 해탈의 경지를 지

향하는 반면에 윤회설은 괴로움의 유전 양상을 밝힌 것으로 두 교설은 각기

다른 경지를 나타내는 까닭에 서로는 대립한다거나 충돌한다고 보기 힘들다

는 임승택의 견해8)가 그동안의 다양하고 복잡하게 전개된 무아·윤회 논쟁

에 내재된 그릇된 문제의식을 적절히 비판하였다고 본다. 본고는 이 두 견해

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간의 논의에서 노출된 혼선은 무아와 윤회의 상충 문

제를 수평적 차원에서 절충하여 무아와 윤회의 병립적 이해를 도모하였기

때문에 유발된 측면이 많다. 여기에서는 윤회의 주체에 관한 전통적인 학설

들과 이에 관한 경전의 내용을 먼저 검토한 후, 불교 교의의 핵심인 무아를

확언하는 문제와 윤회 속의 자기동일성을 구명하는 문제가 서로 공약불가능

함을 고찰함으로써, 무아와 윤회가 공약불가능하기 때문에 공존할 수 없는

개념인 것이 아니라 반대로 무아와 윤회가 공약불가능하기 때문에 서로 충

돌되거나 모순되지 않는다는 점을 드러내고자 한다.

7) 방경일(2008), 153-173.

8) 임승택(2015), 1-31.


Ⅱ. 윤회의 주체에 관한 전통적 학설들의 한계


1. 푸드갈라설·식설·상속설

무아인데 무엇이 윤회하는가? 윤회의 주체 문제를 궁구하기 위해서는 먼

저 무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또 ‘我’가 없다고 하는 ‘無我’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我’를 규정하는 것이 선결 과제가 된다. 결국

무아·윤회 문제는 “나는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명제에서 출발하게 된다. 무

아와 윤회를 화해시키는 문제는 단지 불교학자들만의 아포리아는 아니다.

붓다 당시뿐만 아니라 그의 후대 제자들에게도 많은 어려움을 야기하였다.9)

붓다의 열반 후 약 2세기경부터는 윤회의 주체를 설명하는 여러 가지 설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몇 개의 부파들이 형성되었다. 그것들은 실체아

인 푸드갈라(pudgala, 補特伽羅)說, 정신적 원리인 識(vijñāna)說, 계속의 원리

인 相續(saṃtāti)說이다.10)

9) Kalupahana(1976), 45-46

10) pudgala(補特伽羅)설은 犢子部와 正量部, 識(vijñāna)설은 長老部와 分別說部, 大衆部, 化地

部, 상속(saṃtāti)설는 說一切有部와 經量部가 주장했다. 윤호진(1992), 147


『잡아함』의「重擔經」에는 인간 존재에 오온 외에 다른 ‘요소’가 있다는 것

을 암시하는 듯한 대목이 있다. 붓다는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지금 짐[重擔]과 짐을 짊어지는 것[取擔], 그리고 짐을 내려놓는 것

[捨擔]과 짐꾼[擔者]에 대해 말하겠다.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오온이다. ...짐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푸드갈라

(pudgala, 士夫)이다. 푸드갈라는 이러한 이름과 성을 가지고, 이러한 삶을

살고, 이러한 음식을 먹고, 이러한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는 [존재이다].”11)

11)雜阿含經(T2, 19a·16-22), “我今當說重擔 取擔 捨擔 擔者 諦聽 善思 當為汝說 云何重擔

謂五受陰...云何擔者 謂士夫是 士夫者 如是名 如是生 如是姓族 如是食 如是受苦樂”


이 짐꾼의 비유에서는 오온 외에 존재하는 ‘다른 것’이 있고, 그것이 괴로

움과 즐거움을 느끼는 것으로 설해져 있다. 대우주와 소우주의 유비에 따라

대아와 소아로 나누는 베다·우파니샤드의 전통에 따를 경우, 이 ‘짐꾼’은 아

뜨만 같이 명백한 실체로 간주되는 자아이다.12) 현상의 개별적인 자아인 아

뜨만은 결국 영원불변의 절대성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므로 배후의 보편

적인 절대 자아와 본질상 같은 자아이고, 영원불변의 실체로서의 자아이므로

무아에서는 부정될 수밖에 없다. 실체라는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외

부의 변화와 관련 없이 동일하게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인데, 수많은 조건들이

상호 의존하여 발생과 소멸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세상으로 보는 불교가 이런 불변적인 실체를 인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푸

드갈라(pudgala, 補特伽羅)설은 다른 비구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오온의

배후에서 그것과 같지도 않지만 다르지도 않으면서 그것을 짊어지고 있는

짐꾼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는 ‘非卽蘊非離蘊說’로 발전하였다.

12) 윤호진(1992), 149.


識(vijñāna)說에서는 아트만과 흡사하면서도 윤회의 원리를 대신할 수 있

는 정신적인 현상을 상정하고, 그 자리에 識이나 心을 위치시켜 이들을 동일

성이 담지되는 주체로서 고려하게 된다. 식은 감각기관과 그 대상이 만날 때

발생하는 정신적인 현상이며 아뜨만 같은 불변적이고 상주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다. 이러한 식이 기존의 불교에

서 윤회의 주체로 간주되는 中有를 포괄하는 개념13)으로서 육체 혹은 개체

를 통일하고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윤회의 주체에 상당

하는 것을 불교 교리 안에서 찾고자 한다면, 식이 적합하리란 점은 수긍할 수

있다. 12지 연기설에 의해서도 제3지인 식이 현재의 생존의 첫 단계로서 설

명되기도 한다. 또 초기경전에서 이 식이 정신적인 현상이며 윤회의 주체처

럼 표현되는 예는 많이 볼 수 있다.14) 붓다는 이러한 식은 ‘緣으로 생기는 識’

으로서, “연기해서 성립해 있는 식이기 때문에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윤회

의 주체일 수 없다”고 부정한다. 붓다는 연기를 설함으로써 식의 고정화 또는

실체화를 경계하고 무아설의 취지에서 일탈하지 않도록 하였다.15) 대승불교

에 오면 이와 같은 식은 아뢰야식으로 언급이 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윤회의

주체 개념이 외형상 오온에서 중유, 중유에서 식, 식에서 아뢰야식으로 발전

하는 양상을 보인다.16)

13) 정승석(1999), 189-196.

14) ‘心과 意와 識은 同體의 異名’이라고 설하듯이 식과 심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지만, 대체로 마

음의 주체적 측면을 표현하는 것이 심이고, 마음의 작용의 측면을 표현하는 것이 식과 의이

다. 그 중에서 식은 ‘분별하여 앎’[了別]을 뜻하며, 지적인 면을 관장한다. 意는 思量을 뜻한

다. 원어인 mamas[제7식]는 집착의식을 의미한다. 정승석, 앞의 책, pp.113. 윤호진에 의하면

아함경에서 대부분의 경우 ‘식’이 ‘6식’과 같은 ‘식’의 의미로 쓰일 경우에는 단지 ‘식’이라고 하

지만, ‘영혼’과 같은 내용으로 쓰일 때는 ‘神’, ‘識身’ 또는 ‘神識’이라는 표현이 쓰이거나 ‘香陰’

또는 ‘中陰衆生’으로 구별이 가능하다고 한다. 윤호진(1992), 153-154.

15) 정승석(1999) 186.

16) 아뢰야식이 윤회의 주체가 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문제는 아뢰야식의 三相(自相·果相

· 因相)과 四有(中有·生有·本有·死有)의 과정 그리고 業因과의 관계를 살펴야 하나, 제

한된 지면으로 본고의 주제를 갈무리해야 하는 사정상 소략하였다.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

은 Schmithausen(1987); 오형근(1989) 참조.


相續(saṃtāti)說은 과보를 받는 것은 푸드갈라나 識과 같은 ‘어떤 것’이 아니

라 ‘상속’이라고 한다. 상속은 그 자체 속에 존재가 죽어도 중단되지 않고 이

어지는 ‘계속의 원리’를 포함한다. 쉼 없이 변하면서 어느 한 순간도 동일하지

않고 지속하여 흘러가는 강물처럼 아뜨만과 같은 존재 없이도 윤회와 과보

법칙은 유지된다고 설한다. 윤회하는 주체 없이 과보가 이루어지는 것을 ?증

일아함?에서는 우유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비유하면 우유와 같다. 우유는 변하여 酪[凝乳]이 되고, 낙은 生酥[버터]가

되고, 생소는 熟酥[정제된 버터]가 되고, 숙소는 醍醐[요구르트]가 된다.”17)

그러나 우유에서 낙으로, 낙에서 생소로, 생소에서 숙소로, 숙소에서 제

호로 계속해서 변화하지만 ‘변화하지 않는 어떤 것’이 변화의 과정에서 변화

없이 남아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들 사이에 동일성은 없다. 낙은 더 이

상 우유가 아니다. 그리고 생소는 더 이상 낙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

는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우유 없이 낙은 없고, 낙 없이 생소는 없다. 역시

생소 없이 숙소는 존재할 수 없다.

17)增壹阿含(T2, 602a·21-22), “譬如牛乳 乳變爲酪 酪爲生酥 生酥爲熟酥 熟酥爲醍醐”


상속설은 ‘푸드갈라’나 ‘식’ 대신에 ‘상속’이라는 과정 자체를 도입하였다.

상속이란 “전후의 순간(찰나)을 결부시킴으로써 흘러가는 추리과정”18)이다.

상속설에 의하면 어떤 존재의 재생은 유형의 존재 요소들, 즉 영혼·정신·

물질의 이동이 아니라, 업의 원리에 의한 상속을 통하여 계속된다. 이 상속의

원리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경전이 바로 “업과 과보는 있지만 그것을 짓는

자는 없다. 이 존재가 사라지면 다른 존재가 이어진다.”는 경구가 있는『잡아

함』의「第一義空經」이다.

18) 佐佐木現順(1974), 60.


“눈(眼)은 생길 때 오는 곳이 없고 소멸할 때 가는 곳이 없다. 이와 같이

눈은 진실이 아니지만 생겨나고 생겨났다가는 소멸하는 것으로 업과 과보

는 있지만 그것을 짓는 자는 없다. 이 존재[陰]가 사라지면 다른 존재가 이

어진다. 단 세속의 수법은 제외된다. 귀․코․혀․몸․마음도 또한 이와

같이 설해진다. 단 세속의 수법은 제외된다. 세속의 수법이란 ‘이것이 있으

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을 일컬으며,

무명을 연하여 지음(行)이 있고, 지음을 연하여 의식(識)이 있고, 대략적으

로 설하여, 또한 순전한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다시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는 것

으로, 무명이 소멸하면 지음이 소멸하고, 지음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

고, 이와 같이 대략적으로 설하여, 또한 순전한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소

멸한다는 것이다.”19)

19)雜阿含(T2, 92c16-20), “眼生時無有來處 滅時無有去處 如是眼不實而生 生已盡滅 有業報

而無作者 此陰滅已 異陰相續 除俗數法 耳鼻舌身意亦如是說 除俗數法 俗數法者 謂此有故

彼有 此起故彼起 如無明緣行 行緣識 廣說乃至 純大苦聚集起 又復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

無明滅故行滅 行滅故識滅 如是廣說 乃至純大苦聚滅”


윤호진은 “상속개념이 이해되어 표현되자 일관성 있는 체계로 보이게 되

었으며,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교리가 윤회신앙과 양립할 수 있게 되었

다”는 발레 뿌생(Louis de La Vallée-Poussin)의 말을 인용하면서 상속설이 무

아와 윤회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가장 설득력이 있으나, 상속이론에서도 윤회

의 주체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 있으며 상속설을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푸드갈라설과 식설이 그 존재의미를 상실해 버린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20) 살아 있는 존재에게 한 생에서 다른 생으로 변하지 않고 계속되

는 주체 같은 것은 없지만, 생은 계속되고 한 생에서 만들어진 업이 다른 생

에 상속하여 영향을 미친다는 상속설의 견해는 외형적으로는 무아와 윤회가

모순되지 않고 설명이 가능한 것으로 착각하게 할 수 있다.

20) 윤호진(1992), 156.


용수는「因緣心論釋」에서 12연기를 해설하고 윤회를 설한다. 용수에 의하

면 윤회는 空한 오온으로부터 공한 오온이 발생하는 것이며, 이에 대한 설명

으로 경전을 가르치는 것 등 여덟 가지 비유를 들고 있다.


“실체로서 자아가 없는 것으로부터 실체로서 자아가 없는 것이 발생한다

는 것에는 어떤 비유가 있습니까?...예들 들면, 스승의 염송이 제자에게 옮

겨간다는 것은, 스승의 염송이 없어지게 되기 때문에 옮겨가는 것은 아니

다. 그리고 제자가 복창하는 것은 다른 곳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원]인이 없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죽는 시점의 마음도 스승의 염송

과 같다. 그것이 저 세상에 가지는 않는다. [만약 간다면] 상주한다는 오류

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저 세상이 다른 곳으로부터 발생하는 것

도 아니다. [만약 다른 곳으로부터 발생한다면 원]인이 없다는 오류에 빠지

기 때문이다....등불로부터 밝음이 생기고, 얼굴로부터 거울의 영상이, 도

장으로부터 도장 찍히는 것이, 태양석으로부터 불이, 씨앗으로부터 싹이 발

생하고, 신 맛의 과일[을 다른 사람이 먹고 있는 것]을 원인으로 입에 침이

흐르고, 음성으로부터 메아리가 발생한다. 그들도 전자와 후자가 다르다고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와 같이 존재의 무리는 옮겨감이 없는 것을 이해

하여야 한다.”21)

21)因緣心論釋(T32, 490b42-49), “從自性無我之法 還生自性無我之法者 有何譬喻...譬如師所

誦者 若轉至弟子 師後更無言說 是故不至 彼弟子誦者 亦不從餘得 成無因果故 如師所誦臨

終心識 亦復如是 成常過故 不至他世 彼世亦不從餘得 成無因果故...如是從燈生燈 依於面

像 鏡中現其影像 從印成文 從精出火 從種生芽 從梅生涎 從聲出嚮 即彼異彼 不易施設 如是

諸蘊相續結 不移智應察”


경전을 가르칠 때, 스승이 경문을 염송하고 제자가 그것을 따라 읊는다. 경

문을 염송하는 스승의 언어가 그대로 제자에게 옮겨갈 리는 없다. 그러나 제

자가 따라 읊는 말은 스승 이외의 다른 곳에서 온 것이 아니라 스승의 입에서

나온 것을 원인으로 한다. 그 양자의 관계는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

니다. 그것은 씨앗에서 싹이 나올 때, 씨앗은 싹과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

도 아닌 것과 같다. 용수는 인과관계를 부정할 때도 원인과 결과가 같은 것도

다른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원인이 결과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

라는 것은, 원인이 원인으로서 실체를 갖지 않고 결과도 결과로서 실체를 갖

지 않는 공이라는 것이다.


용수는「因緣心論釋」에서 ‘옮겨감이 없는 續生’이라는 것은 실체가 있는

어떤 것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옮겨감이 없이 이

어지는 것이라고 설한다. 그러나 ‘옮겨감이 없음(不移)’과 ‘이어짐(續)’이라는

두 개념이 역설적으로 병치된 윤회의 정의는 이해하기 어려우며, 옮겨감이

없는데 어떻게 이어진다고 하는지, 그리고 ‘경전을 가르치는 것’ ‘등불’ 등으로

비유한 그것들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아직 해소되지 못한 채

로 있다. 무아라는 진실을 유아의 형식으로 전달하려는 이러한 방식들은 여

전히 용납되기 어렵다.


2.『나선비구경』의 ‘나(我)’에 관한 대론

‘나’에게 아트만과 같은 고정 불변한 실체가 인정되지 않는다면 감수작용,

기억작용, 식별작용 등 정신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우리가 외부 대

상을 지각할 때 우리에게 지각되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의식과는 별개로 존

재하는 외계의 물적 자체의 형상인가? 아니면 나의 인식 속의 표상인가? 이

러한 인식의 주체와 객체에 대한 문제나 인식의 성립과정 등은 지금도 다양

한 철학적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는 해명하기 어려운 난제들이다. 일반적으

로 인간에게 감각기관이 없으면 그 감각기관에 따른 작용을 느낄 수 없고, 한

순간 일어난 작용이 무한히 지속되지 않는다. 우리가 무엇을 보려고 할 때는

그것은 단지 눈으로만 가능하고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단지 귀로만 가능하

다는 것이 상식이다.


『那先比丘經』의 那先比丘와 彌蘭陀王의 대론에서 나선비구가 미란다왕에

게 자아의 개념에 대해 묻자 미란다왕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 내부에 있는 영혼(āme)으로서 눈[眼根]으로 형상을 보고, 귀[耳根]

로 소리를 듣고, 코[鼻根]로 냄새를 맡고, 혀[舌根]으로 맛을 보고, 몸[身根]으

로 물체를 접촉하고, 마음[意根]으로 현상[法]을 압니다. 우리가 궁전에 앉아

서 원하는 창문을 통해 동쪽·서쪽·북쪽·남쪽을 내다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영혼 역시 원하는 문[感覺器官]을 통해서 바깥 세계를 내다 볼 수 있습니

다.”22)

22)那先比丘經(������T32, 712c),那先比丘經의 대응본인 빨리어밀린다빵하(Milinda pañha)

에 한역본의 ‘人’은 베다구(vedagū)로 ‘命’은 영혼(āme)으로 되어 있다. 베다구는 자이나교에

서 말하는 지와(jiva, 영혼) 또는 ?우파니샤드?의 아뜨만과 동일한 것이다. 윤호진(1992), 259-

260.


그러나 나선비구는 미란다왕이 생각하는 것처럼 영혼이나 아뜨만과 같은

정신적인 어떤 실체가 있어서 그것이 형상을 보고 듣고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면, 그것은 단지 눈으로만이 아니고 다른 기관을 통해서도 형상을 볼 수 있고

역시 귀와 코로만이 아니고 다른 기관들을 통해서도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

을 수 있게 된다는 모순을 지적하면서 감각기관과 독립된 것으로 영혼이나

아뜨만과 같은 인식주관의 존재를 부정하고 식별작용을 설명한다. 또 경전

에는 “눈(眼)과 물질(色)이 인연하여 眼識이 생긴다. 이 세 가지가 합쳐진 것

이 觸이다. 촉과 함께 수·상·행·식이 생긴다.”23)는 붓다의 교설이 있다.

이 뿐만 아니라 경전에서는 아뜨만과 같은 인식주관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

문에 사람이 눈과 귀로로 형상을 보고 듣고, 코로 냄새를 맡을 수 있고, 혀로

맛 볼 수 있고, 몸으로 물체를 접촉할 수 있고, 마음[意]으로 생각[法]을 알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많은 교설이 존재하고 이에 대한 설명에는 대단히 복

잡한 문제를 수반하게 된다.

23)雜阿含(T2, 87c24-25), “眼色緣生眼識 三事和合觸 觸俱生受想思”


『나선비구경』의 나선비구는 감각기관이 그것과 관계되는 대상과 접촉할

때 그것에 상응하는 식이 발생하는데, 6식 가운데 한 가지 식이 발생하면 그

결과로서 의식이 반드시 발생하고, 의식이 발생하면 필요한 다른 정신 현상

들 즉 촉·수·상·행·심(尋, vitrka, 省察)·사(伺, vicara, 考察)들이 저절로

발생하게 되며, 이 모든 것은 상호관계 속에서 되풀이하면서 발생하고, 거기

에 불변하고 항상하는 주체는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24)

24)那先比丘經(T32, 709c170-173), “神動即生苦樂從苦樂 生意從生念 展轉相成 適無常主”; 윤

호진(1992), 268.


인지과학에 따르면 외부자극이 우리의 감각기관[根]을 통해 신경계를 자

극하면 감각수용기관에서부터 신경변환이 일어난다. 이때 외부로부터 수용

된 물리적인 자극 그 자체가 곧바로 의식 등의 심리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것

이 아니고, 신경계에서 감각세포를 통해 전기적 생화학 부호로 변환되어 여

러 단계의 신경적 단위를 거쳐 처리된 것이 외부자극에 대한 반응을 일으키

게 된다고 한다. 이때 외부로부터 수용된 물리적 자극은 사물의 직접적 인식,

즉 지각과의 관계에서 발생하게 되는 감각소여(sense-data)25)이다. 우리가 꽃

을 지각할 때 우리의 감관에 지각되는 것은 ‘우리의 감관에 나타난 것들’일

뿐, 그들 자신이 곧 ‘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실재하는 꽃’은 동일한 것이지만

그것의 향기, 빛깔, 꽃잎의 모양 등은 우리의 지각여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적 대상을 감각할 때 우리가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물적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감각소여이다. 그렇다면 그

감각소여를 지각하는 것은 누구(무엇)인가. 이에 대해 불교에서는 ?나선비구

경?이 편찬된 시기로 추정되는 당시, 지각문제에 대한 논쟁의 결과로 정립된

이론으로서 식견설과 근견설26)이 있다.

25) 감각소여(sense-data)는 17세기와 18세기 Locke, Berkeley, Hume이 사용한 서양철학의 전통적

인 개념으로 Locke는 ‘단순관념(simple idea)’, Berkeley는 ‘감각(sensation), Hume은 ’인상

(impression)’라는 명칭을 사용했는데 이들이 지시하는 내용은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감각소

여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장현호(1990), 490.

26) ‘봄’[見]이라는 인식은 發識取境의 능력을 구유하고 있는 勝義根인 두 눈[二眼根]에 의해 이루

어진다는 설일체유부의 정설(根見說)에 대해 그 이단적 견해로 4가지 학설이 있다. 첫째는

안식이 색을 본다는 法救(Dharmatrāta)의 ‘識見說’이며, 둘째는 안식과 상응하는 慧가 색을 본

다는 妙音(Ghoṣa)의 ‘慧見說’, 셋째는 안식과 동시의 心·心所法이 화합하여 색을 본다는 譬

喩者(Dārṣṭāntika)의 ‘和合見說’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눈으로 색을 본다는 犢子部의

‘一眼見說’이다. 윤영호(2014), 219-220.


불교의 식견설, 근견설 등은 현대 인지과학과도 상당부분 서로 상통하는

데가 있다. 인지과학에서는 임상병리학적인 실험들을 통해 뇌손상 환자의

다양한 시지각 관련 병증들을 분석하였는데 그 중 ‘색맹’과 ‘맹시’의 경우는 불

교 식견설과 근견설의 설명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다. ‘색맹’은 정상적인

눈[안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색채 사이의 경계는 지각할 수 있지만 색깔 자

체는 보지 못하는 병증이며, ‘맹시’는 눈[안근]의 손상이 아닌 뇌의 특정부위

의 문제로 실명한 병증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맹시 환자의 경우, 실험을

위해 주어진 시각적 자극을 탐지하거나 위치를 정확하게 추측하고 심지어

전혀 의식적인 알아차림 없이 그들에게 던져진 공을 잡는 경우도 있었다. 이

의 원인에 대한 명확한 규명은 아직 실험적으로 완벽하게 입증된 것은 아니

지만,27) 임상실험에서 보듯이 색맹은 불교의 식견설을 지지하는 사례로 볼

수 있으며, 맹시는 근견설을 입증하는 과학적 근거로 채택할 수 있다.28)

27) 이정모(2012), 404-405.

28) 윤영호(2014), 253.


이와 같이 윤회의 주체성에 대한 해석과 그 전개 양상은 각 부파마다 달라

진다. 또한 영혼이나 아뜨만과 같은 ‘어떤 것’이 없이 어떻게 정신 현상이 생

기는가 하는 문제는 초기불교에서부터 지금의 인지과학에 이르기까지 중요

한 연구 과제로 다루어지며 구체적인 해명을 위해 다각도의 모색이 이루어

지고 있다. 무아·윤회의 자기 동일성 문제에 공약불가능성 개념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我)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가능하기 때문에, 이상의 논

의를 통하여 부분적이나마 필요한 범위 내에서 무아에 관한 경전의 내용과

더불어 인지과학의 지각작용을 살펴보았다.


Ⅲ. 무아·윤회 논쟁과 공약불가능성


1. 쿤(Kuhn)의 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29)

29) 상이한 패러다임 사이에는 어떤 합리적 논의도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두 패러다임을 관통하

는 보편적 진리나 궁극적 기준은 세울 수 없다. Kuhn(1922-1996)이 그의 저서과학혁명의 구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에서 제기했던 개념. 통약불가능성으로도 번역되고

있다.


세계적 베스트셀러「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의 저자 존 그레

이(John Gray)는 그의 책에서 남자와 여자는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완전히 다

른 존재자로, “의사를 전달하는 방법이 서로 다를 뿐 아니라, 생각하고 느끼

고 지각하고 반응하고 행동하고 사랑하고 필요로 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

든 것을 달리 한다.”30)고 말한다.

30) 존 그레이, 김경숙 역(2002), 19. 본문 예시는 정동진(2011), 1-24.에서 차용한 것이다.


“금성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화성에서 사용하는 언어에는 꼭 같은 어휘들

이 존재하는데, 문제는 그 어휘들이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는 데 있다.

형식상의 표현은 거의 비슷하지만 말의 속뜻이나 감정적으로 강세를 두는

부분이 서로 달라 자칫 오해가 생기기 쉬웠다. 그래서 의사전달에 문제가

발생하면 그들은 이것이 예의 그 차이에서 비롯되는 오해일 뿐이라고 여기

고, 약간의 도움을 받아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게 되곤 했다. 그때의 두 사람

사이에는 지금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믿음과 이해가 있었다.”31)

31) 존 그레이, 김경숙 역(2002), 94


그들은 비록 서로 다른 세계로부터 왔기 때문에 서로 다른 생각과 언어를

사용하지만,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면 사랑을 꽃피울 기회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토머스 쿤(Kuhn, T. S.)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주장한 상이한 패러다임

사이의 공약 불가능성 테제에 의하면 “패러다임 간의 차이는 근본적인 것이

기에 상이한 패러다임의 추종자들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으며,

패러다임들이 결국 서로 다른 세계를 의미하기에 상대방의 관점에 완전히

접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쿤(Kuhn)의 패러다임에 영향을 받지 않은 학문

분야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폭넓게 영향을 미친 이 책에서 그는 “과

학이 점진적·단선적·축적적으로 발전한다고 보는 기존의 비역사적 과학관

을 비판하며 과학 발전의 두 단계, 즉 정상적 단계와 혁명적 단계를 구분하고

있다.”32)

32) Kuhn, 김명자 역(2009), 155, 212.


쿤(Kuhn)에 의하면 “과학이 축적적인 방식으로 발전하는 것은 그것이 정

상적 단계에 있을 때이다. 이 단계에 있는 과학, 즉 정상과학은 점증하는 과

학적 지식의 더미에 계속 보탤 수 있는 벽돌들을 연구를 통해 생산해 내는 그

러한 과학 활동이다.”33) 그는 이러한 “정상과학의 근저에는 그것의 일관된

연구 전통을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주도하고 있는 어떤 통일된 관점이 존재

한다고 보는데, 이 정상과학 전통의 일관성의 원천을 그는 패러다임”이라고

부른다.34)

33) Kuhn, 조인래 편역(1997), 187.

34) Kuhn, 김명자 역(2009), 74.


혁명적인 변화들은 정상적인 변화와는 다르며 훨씬 더 문제가 많다. 혁명

적인 변화는 그것이 일어나기 전에 사용되던 개념들로는 수용할 수 없는 발

견들을 동반한다. 과학자가 이러한 발견을 이루어 내거나 수용하기 위해서

는 어떤 영역의 자연 현상들에 대해 생각하거나 기술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

어야 한다.35) 예컨대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us)천문학에서 코페르니쿠스

(Copernicus)천문학으로의 전이 과정이 이러한 부류의 변화에 해당한다. 이

전이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태양과 달은 행성(planet)이지만, 지구는 행성이

아니었다. 전이 이후에 지구는 화성이나 목성과 마찬가지로 행성이 되었고,

태양은 항성(star)이 그리고 달은 새로운 종류의 천체의 위성(satellite)이 되었

다. 이런 부류의 변화가 법칙이나 이론의 변화를 동반할 때 과학 발전은 온전

한 의미에서 축적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경우 과학자들은 이미 알려져 있

는 것에 단순히 덧붙이는 방식으로 옛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옮겨갈 수 없다.

그들은 옛 이론의 어휘로 새로운 이론을 기술할 수 없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

다.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서 행성들은 지구를 중심으로 공전하고, 코페르

니쿠스 체계에서 행성들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한다.” 이 문장은 비정합적

이다. 첫 번째로 등장하는 ‘행성’이라는 용어는 프톨레마이오스적이고, 두 번

째는 코페르니쿠스적이다. 이 두 용어는 자연에 다른 방식으로 적용되고 있

다. 즉, ‘행성’이라는 용어를 단일한 의미로 해석하는 한, 이 명제는 참이 아닌

것이다.

35) Kuhn, 조인래 편역(1997), 189


공약 불가능하다 함은 공통된 척도가 없다는 말이다. 즉 엄밀한 의미에서

공통된 분모, 공동의 지반이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공약 불가능한 명제 사이

에서 양측의 주장은 서로 엇갈릴 수밖에 없고, 그들의 논쟁은 쉽게 결론이 나

리라고 전망하기 어렵게 된다. 베다서나 ?우파니샤드? 사상을 통해 볼 때, 붓

다의 무아설의 등장은 이전의 다신론 사상, 범아일여 사상36)과는 완전히 구

별되는 혁명적인 패러다임의 교체였다. 이는 쿤(Kuhn)의 과학 발전 단계로

보면, ‘정상적 단계’가 아닌 ‘혁명적 단계’에 해당한다. 그런데 붓다의 무아설

이 설해진 이후에도 그 이전의 윤회사상이 그대로 수용이 되면서 붓다의 무

아설과 기존의 윤회설이 일견 모순되는 것으로 보이는 공약 불가능한 관계

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동안의 무아·유아 논쟁에서 보듯이 무아와 윤회를

동일 평면에서 양립시키려는 시도는 무아설의 절대성을 인정하되 윤회설의

의미를 약화시켜 무아·윤회설을 정당화하거나 반대로 윤회설을 수용하고

무아설을 약화시켜 타협하는 견해를 취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무아와

윤회는 동일한 시공간의 차원이 아니다. 양측의 시공간에는 공약 불가능성

이 존재하므로 그 둘의 소통은 수평적 평면이 아닌 수직적 사고를 통해 시도

되어야 가능해진다.

36) 범아일여설을 붓다 이후에 나온 사상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조준호(2004), 71.


2. 무아의 세계와 윤회의 세계

인간은 저마다 무아의 세계로도, 윤회의 세계로도 나아갈 수 있는 가능태

로서의 존재이며, 我와 윤회는 인간 자체에 양립해 있다.37) 그런데 무아에 대

한 이해가 어려운 것은 무아가 깨달음의 영역에 속한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무아인 깨달음의 영역은 윤회의 시공간과는 그 차원을 달리 한다. 두 차원으

로 구분한다고 하여 우리 앞에 다양하게 드러나 전개되는 현상의 이면에 인

식 불가능한 ‘어떤 것’인 실체가 초월적으로 따로 존재함을 말하자는 것은 아

니다. 불교는 현상적인 변화의 이면에 만물을 유지시키며 남아 있는 불변의

근원을 상정하는 실재론과는 근본적으로 구분된다.38) 단지 현상은 연기하며

그 이면에 고립적이고 자성적인 실체는 없다. 현상 자신이 본체가 되는 ‘현상

즉 본체’이다.

37) 정승석(1999), 219.

38) Kalupahana(1975), 86


대승기신론에서는 마음과 대상을 포함하여 일체의 구분이 배제된 진여문

과 마음과 대상의 구분 그리고 대상 상호간의 구분이 존재하는 생멸문의 중

층 구조로 세계[일심]를 설명한다. “진여는 양상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언

설의 극한을 일컫는 것이며, 말로써 말을 보내는 것이다.”39) 진여는 ‘참으로

그러한 것’이며,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말로써 말을 없애려는 것’

이다. 이러한 설명에 의하면 중층구조의 상위 층은 ‘일체의 구분이 배제된 절

대의 세계’, 또는 ‘어떤 것도 아닌 것’이며, 이것은 언어의 정상적인 용법이 미

치지 못하는 ‘말할 수 없는 세계’이다. 반면에 언어의 정상적인 용법이 적용되

는 하위 층인 ‘말할 수 있는 세계’는 범부에게 주어진 세계의 전부이며 차별적

이며 생멸하는 세계인 것이다. ‘말할 수 없는 세계’에서 말은 ‘말할 수 있는 세

계’에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의미를 가진다. 진여인 무아와 생멸인 윤회는 서

로 다른 차원의 세계이다. 그러나 이 두 개의 층은 서로 맞붙어 있는 수직적

인 중층 구조이지만, 개념상으로만 구분될 뿐 사실상으로 분리되는 것은 아

니다.

39)大乘起信論(T32, 576a09-10), “言眞如者 亦無有相 爲言說之極 因言遣言”


윤회의 세계는 시공간의 제약을 조건으로 하지만, 무아의 세계는 시공간

을 조건으로 하지 않는다. 20세기 물리학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융의

동시성 이론 등을 재정립한다. 일정한 길이를 가진 진자는 항상 같은 시간 안

에 같은 위치로 돌아온다는 사실과 같이, 시간을 사건들 사이의 간격과 그 지

속 기간에 대한 양으로 생각해 왔던 기존의 관념으로부터 근본적인 전환이

이루어졌다. 우주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절대시간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없

었고, 각자 자신만의 시간이 있을 뿐이라는 상대시간 개념으로 대치되었다.


불교에서는 시간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설일체유부는 ‘식유필경’에 근거

하여 존재의 문제를 정리하였는데, 그들의 존재 체계인 五位七十五法에는 시

간(kāla)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또 유부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찰나

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법체향유’도 삼세에 걸쳐 변하지 않는 실체가 아니

라 찰나적인 존재로 보았다.40) 중관과 유식불교의 입장도 시간에 대한 해석

에 있어서는 유부와 기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중관학파에 있어서 시간이란

시간의 근거로 규정되었던 존재조차도 실체가 없는 무자성․공의 연기법일

뿐이므로 시간 또한 당연히 실체성이 부정된다. “과거는 현재와의 관계에 의

해 과거로 존재하는 것이고, 현재도 과거나 미래와의 관계에 의해 현재로 존

재하는 것이며, 미래는 현재와의 관계에 의해 미래로 존재한다. 따라서 과거,

현재, 미래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 의존적으로 존재하며

실체적 존재가 아니다.”41) 유식학파에서는 모든 존재를 百法으로 분류하였

는데 유부와 달리 심불상응행법에 시간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때의 존

재는 유부에서의 존재와는 달리 가립된 존재로서 실체성을 비판하기 위해

상정된 것이며 시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오직 식의 표상일 뿐으로 시간을

실체적으로 본 것은 아니다. 유부를 포함하여 불교의 모든 학파들은 시간의

실체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시간이란 존재의 변화에 근거한 추론의 산물이

다.

40)阿毘達磨俱舍論(T29, 74c11-12)에서도 시간은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햇빛이

비치는 동안을 ‘낮’이라 하고, 어두운 상태를 ‘밤’이라고 하는 것처럼, 유위법의 상태를 표현

하는 개념[增語]일 뿐이라고 한다. “時名是何法 謂諸行增語 於四洲中 光位闇位如其次第立

晝夜名”

41)中論(T30, 25c06-10), “若因過去時 有未來現在 未來及現在 應在過去時 若過去時中 無未來

現在 未來現在時 云何因過去 不因過去時 則無未來時 亦無現在時 是故無二時 以如是義故

則知餘二時”


결국 불교에서도, 현대 과학에서도 시간은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었던 것

이다. “불교는 유일신이든, 시간이든 그러한 것이 실체적으로 존재해서 세계

를 존속하게 하거나, 단멸하게 한다는 견해를 거부한다. 현상으로부터 독립

한 시간이라는 실체가 있어서 현상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42) 반대

로 현상의 변화에 의해서 시간이 나타난다. 현상의 변화가 없다면 시간도 없

다. 그러므로 실재하지도 않는 시간이라는 것이 범부의 삶을 제약하고 있는

것이 된다. “무아라는 사실, 그로 인해 우리의 일상적 시간 경험도 허구라는

사실은 불교적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무지의 베일에 가려져 있다. 따라서

범부인 우리들은 다만 시간의 환상 속에서 그것이 환상인 줄 모르고 거기에

스스로 속박되어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43) 우리가 벗어나려는 윤회의 본질

은 곧 허구인 我를 변화의 기체로 삼은 시간의 환상인 것이다. 실제로 초기불

교에서는 무명의 의미로 ‘三際에 대한 무지’, 즉 ‘과거·현재·미래에 대한 무

지’를 말하기도 한다.44)

42) 에지마 야스노리(江島惠敎)는 “시간을 독립된 실체로 보지 않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존재자

에 즉해서 있다는 것이 불교의 입장이다.” “아비달마에서도 그랬지만 불교는 시간을 존재자

이외에 있는 것으로 세우지는 않는다. 시간은 현상하는 존재자의 변화와 생멸의 상태 자체

에 즉해서 세워진다.”고 한다. 江島惠敎(1995), 209.

43) 이은영(2015), 136.

44)雜阿含(T 2, 126c05-06), “所謂無明者 於前際無知 後際無知 前·後·中際無知


『나선비구경』에는 시간을 ‘존재하는 시간’과 ‘존재하지 않는 시간’의 두 종

류로 나누어 설명한 부분이 있다. 결과를 초래할 수 있거나, 또는 그 자체로

서 결과를 낼 가능성을 가지고 있거나, 다른 생을 야기할 수 있는 業

(saṃskāra)은 ‘존재하는 시간’이고, 이와 반대로 지나가 버렸거나 사라져 버렸

거나 소멸되어 버렸거나 변화되어 버린 業은 ‘존재하지 않는 시간’에 속한다.


“지나가 버렸거나 끝나 버렸거나 없어져 버린 과거에 대해서 시간은 존

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결과를 낳거나 결과를 낳는 선천적인 가

능성을 갖거나 딴 곳에 다시 태어나게 될 사상(事象)에 대해서 존재합니다.

죽어서 딴 곳에 다시 태어날 존재에게 시간은 존재하며, 죽어서 딴 곳에 다

시 태어나지 않을 존재에게 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완전히 자유롭게

된 존재에게 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완전히 해탈했기 때문입니다.”45)

45) Rhys Davids(2013), 129.


“죽어서 딴 곳에 다시 태어날 존재에게 시간은 존재하며, 죽어서 딴 곳에

다시 태어나지 않을 존재에게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업이 남아 있

는 존재에게 시간은 존재하며, 열반을 성취한 아라한에게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시간은 윤회와 열반에 관계하여 존재하는 것임을 설한 것

이다. 나선비구에 의하면 시간의 始原은 알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시간의 시

작이 너무나 아득하게 멀기 때문이 아니라 시작도 끝도 없는 바퀴의 동그라

미(圓) 같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간의 시원은 인식되지 않지만, 어떤

사람이 시간에서 벗어나는 것은 알 수 있다. 과거·현재·미래 시간의 근거

가 무명이며, 무명은 사람이 재생하는 원인이므로 무명과 욕망을 더 이상 가

지고 있지 않으면 설사 그가 삶을 계속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의 생존의 끝,

즉 그의 시간의 끝은 알 수 있다고 한다.46)

46) Rhys Davids(2013), 128-130


실재하는 불변의 자아가 있어서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가듯이 전생에서

현생으로, 현생에서 내생으로 옮겨가는 것을 ‘윤회’라고 한다면, 그것은 윤회

를 시간의 문제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불변의 자아는 없는 것이며 시간 또한

실재하지 않는다. 무아와 윤회가 양립 가능한지 아닌지의 문제에 대한 혼란

이 있는 것은 본래 ‘無我’이며, ‘無時間’이지만, 우리들 범부의 입장에서는 ‘有

我’이며, ‘有時間’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공간이 끊어진 ‘무아’, ‘무

시간’의 세계는 시공간의 제약이 전제된 ‘유아’, ‘유시간’인 윤희의 세계와는

다른 차원의 세계이다. 자아가 존재하고 시간이 실재한다는 생각이 있는 범

부의 패러다임과 무아를 채득하여 더 이상 과거·현재·미래로 펼쳐진 시간

이 모두 환상에 불과함을 깨닫고, 시간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벗어난 상태의

패러다임과는 공약 불가하다. 이러한 한계성은 붓다의 설법에서 無記47)라는

방식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무기는 붓다가 단지 침묵한 것이 아니라 공약불

가능성으로 인하여 범부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일상의 언어로써 단정적으

로 설명할 수 없음을 逆說한 것이다.

47) 10항목 혹은 14항목에 대해 붓다가 그 답을 설하지 않은 無記(avyākata).


Ⅳ. 맺는 말


무아는 깨달은 자의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며, 윤회는 그 세계를 경험하지

못한 범부의 세계이다. 무아의 세계와 윤회의 세계는 “규칙이 다른 게임”의

세계이므로, 한쪽의 기본 술어를 가지고 다른 한쪽을 재단하려고 하면 필연

적으로 범주의 오류(category-mistake)를 범하게 된다. 무아는 주객 미분이며

무시간적 세계이기 때문에, 윤회 주체의 동일성을 푸드갈라나 識에서 찾아

무아를 설명한다거나, 과정[상속설] 속에서 무아를 표현해 내려는 노력은 애

초부터 불가능한 시도였다. 무아와 윤회는 동일 평면에서 분절된 개념이 아

니어서 둘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공약불가능성이 존재한다. 불교 내의 무아

와 윤회의 상충이라는 문제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아직 깨닫지 못한 범부

는 여전히 시간의 흐름을 믿으며, 나의 태어남과 늙음, 죽음에 연연해하는 윤

회의 삶을 실재라고 믿는다. “범부에게는 분명히 ‘나’와 ‘나의 삶’, ‘나의 죽음’

이 있고, 나의 과거, 현재, 미래, 나의 전생, 현생, 내생이 있지만, 깨달은 자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범부의 환상에 불과하다. 그런 면에서 범부가 겪는 윤

회는 자아 중심적으로 구성되는 시간의 환상”48)이라 할 수 있다.

48) 이은영(2015), 165.


유아의 상대로서의 무아를 보는 것은 二法 차원의 무아이고, 유아도 아니

고 무아도 아닌, 또는 유아이기도 하며 무아이기도 한, 유무 중도의 무아는

不二法 차원의 무아이다. 붓다가 설한 무아는 유무 중도의 무아인 것이다. 그

런데 윤회는 생멸의 차원이며 유·무 二法의 차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

떤 형태로 무아·윤회 사이의 분절선을 소거하여도 그 둘은 결코 융합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는 무아와 윤회가 모순된 관계여서 서

로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공약불가능성을 지시

하고 있을 뿐이다. 무아와 윤회는 공약불가능하기 때문에 서로 공존할 수 없

는 개념인 것이 아니라, 반대로 무아와 윤회는 공약불가능하기 때문에 서로

충돌되거나 모순된다고 말할 수 없다.


무아는 싯달타가 각고의 수도 끝에 스스로 깨달은 것이다. 인간 세계 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에 적용되는 진리이기 때문에, 범부의 차원에서는 단편적인

지식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며, 그 전모를 이해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

이다. 무아의 체득이 그러하다. 범부가 어느 한 순간 만이라도 진정으로 나를

포기한 적이 있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경전의 내용 대부분은 我觀으로 채

워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我와 無我를 양변에 놓고 이루어진 무아·윤회

논쟁은 소모적이다. 我가 없는데 지은 업을 미래 어느 세상에 누가 과보를 받

는가하고 질문하는 것은 마치 꿈에 주은 돈을 꿈에서 깨어 누구에게 돌려주

어야 하느냐고 묻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질문이다. 꿈과 현실은 공약불가하

다.


뉴턴역학은 3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의 세계를 다루며 상대성이론과 양

자역학을 토대로 한 현대물리학은 시간과 공간이 넘나드는 4차원 시공간의

세계를 다룬다. 그렇게 함으로써 현대물리학은 뉴턴의 고전물리학이 담아내

지 못했던 자연의 영역을 더욱 충실히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무아가 무분별

의 차원이기 때문에 비유의 대상으로 놓을 수는 없지만, 말하자면 무아설의

영역과 윤회설의 영역도 이와 같은 방식의 사고 대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패러다임에서 거부되었거나 담아내지 못했던 ‘어떤 것’을 다른 패러

다임으로 수용할 수 있는 경우 이를 진실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손에 잡힌

미꾸라지만 미꾸라지이고,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간 미꾸라지는 미꾸라지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단지 그들은 공약 불가능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