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과학 1

여래장 개념의 성립과 사상의 구조

수선님 2020. 3. 22. 12:14

불교학연구(Journal for Buddhist Studies)

제50호(2017.3) pp. 83∼117

여래장 개념의 성립과 사상의 구조

-인도불교 안에서

정호영/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chyoung@cbnu.ac.kr

I. 여래장・불성 개념의 성립

II. 청정법신과 객진번뇌의 대립

III. 여래장의 존재와 시간과 실천

IV. 맺음말

[요약문]

불성(佛性, buddhadhātu) 또는 여래장(如來藏, tathāgatagarbha) 사상은 그 사상의 독자성

에도 불구하고 인도불교의 맥락에서 독립된 학파로 간주되고 있지는 않다. 이는 아마도

‘여래・불’ 또는 ‘여래・불이 되는 근거’에 대한 논의가 인도 대승불교의 모든 학파들이

공유할 수밖에 없는 보편적인 것이라는 점 그리고 특히 ‘여래・불’에 대한 긍정적 접근

을 중심으로 하는 여래장・불성 사상이 부정적 논의를 중심으로 하는 주류불교와의 대

립에서 점차 이면의 ‘방편설’로 포섭되어 갔던 점에 기인할 것이다.

이 글은 여래장・불성 사상 전반을 다루지 않는다. 단지 인도불교 안에서 ‘여래장’ ‘불

성’ 개념이 어떻게 출현하고 그 초기 이론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확립되어 갔는가를 살

펴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 제Ⅰ장에서 ‘여래장’ ‘불성’ 개념이 처음 성립되어 가는 과

정을 살펴본다. 이는 여래장・불성 사상의 원형archetype에 해당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

에서 여래장・불성 사상이 기본적으로 중생과 여래의 ‘동질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여래장・불성 사상은 생사・윤회하는 존재로서의 실존 상황을 도외시

하지 않는다. 중생과 여래의 ‘이질성’에서 유래하는 문제로부터 도피하지 않는다는 것

이다. 제Ⅱ장에서는 이와 같이 서로 대립되는 두 극을 포함한 사상체계가 어떻게 모습

을 갖는가를 살펴본다. 그런데 한편으로 번뇌의 존재는 그 자체의 지양에 관한 논의를

수반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여래장・불성 사상이 상세한 수행론을 제시하지 않지만, 이

른바 ‘수행무용론’(修行無用論)에 함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수행의 문제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제Ⅲ장은 이 수행의 문제와 관련하여, ‘시간’에 대한

여래장・불성 사상의 인식과 새롭게 적극적으로 도입된 ‘종성’ 개념이 그 단초를 마련하

고 있음을 밝힌다.

I. 여래장・불성 개념의 성립

1. 여래장경과 대승 열반경

여래장・불성과 관련된 제반 사항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대표적인 문

헌이「보성론」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보성론」은 불・법・승의 삼보와

이 삼보 출현의 원인인 여래장 또는 [불]성, 그 여래장의 현현으로서 보리, 보리

가 지닌 공덕, 여래의 활동이라는 7주제로 분석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네 번째

주제인 여래장이 중심인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보성론」은 여기에서 ‘모든

중생은 여래장이다 sarvasattvās tathāgatagarbhāḥ’라는 근본 명제를 인용, 제시

하면서 이는『여래장경』Tathāgatagarbhasūtra에 의거하여 설명될 것이라고 명

언한다.1)「보성론」은 아홉 가지 비유를 통해 여래장을 상세히 설명하는 부분

에서도 여래장경의 명칭을 언급하고 있다.2) 나아가「보성론」은 “선남자여,

이것이 제법의 법성이다. 여래가 출현하건 출현하지 않건 언제나 이들 중생은

여래장이다”3)라는 문장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는 ‘연기’가 초시대적 보편적

진리임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초기불교 이래의 관용구를 변용한 것으로서,

「보성론」이 여래장의 보편성에 대한 경증으로『여래장경』4)으로부터 인용한

것이다.

1) RGV 26. 이하「보성론」의 게송은 그 게송번호로, 주석산문은 페이지 수로 표시한다.

2) RGV 66.

3) eṣā kulaputra dharmāṇāṃ dharmatā utpādād vā tathāgatānām anutpādād vā sadaivaite sattvās

tathāgatagarbhā iti. RGV 73.

4) 善男子, 諸佛法爾 若佛出世 若不出世 一切衆生 如來之藏(T.16.457c).

이러한 점들은「보성론」이 여래장 개념의 시원을『여래장경』으로 간주하

고 있음을 보여준다. 타카사키(高崎)가 여래장 사상의 형성에 관한 방대한 논

의에서 ‘모든 중생이 여래장이다’라는 선언이『여래장경』에서 처음 이루어졌

다고 하면서5)『여래장경』을 여래장설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것도 그의 여

래장 사상에 관한 연구가 보성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과 맥을 같이 한다.

그는 한편으로「보성론」에서의『여래장경』인용 외에도,『열반경』이『여래장

경』을 인용하고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보강하고 있다.

5) 高崎(1974:41)

이 가운데『여래장경』과『열반경』의 관계에 관련하여서는,『열반경』연구

를 바탕으로 대승불교 성립에 관한 문제 등에도 신선한 안목을 제시해 온 시모

다(下田)의 경우도 종래의 견해와 다르지 않다. 나아가 그는 적극적으로 그 근

거를『열반경』의 구성에서 찾고 있기도 하다. 우선 그가 인용하고 있으면서『여

래장경』의 이름이 등장하는『열반경』해당 부분의 티베트어역은 다음과 같다.

여기에 어떤 비구가『여래장대경』*tathāgatagarbha-mahāsūtra을 설하고

자 하였다. “일체 중생에 불성이 있다 *asti buddhadhātuḥ sarvasattveṣu.

그 성(性, dhātu)이 각 자의 몸에 있어, 중생들은 수많은 번뇌를 멸진시키

고 붓다가 될 것이다. 이챤티카[一闡提]는 제외한다.”6)

6) 下田(1997:267)에서 인용. 법현역(復有比丘 廣說如來藏經, 言一切衆生皆有佛性. 在於身中 無量煩惱悉除

滅已 佛便明顯 除一闡提. T.12.881b). 담무참역은 ‘여래장경’ 대신 ‘佛秘藏甚深經典’(T.12.404c)으로

되어 있다.

시모다는『대반열반대경』이라는 명칭이 「여래성품(如來性品) 제13」 이후

에 여러 차례 등장하지만, 위 인용문이 위치한 「분별사정품(分別邪正品) 제10」

에서는 한 차례도 언급되지 않고, 또 ‘일체 중생에 불성이 있다’는 중요한 선언

의 소재가『여래장경』이라고 하는 것은, 여래장의 주장이『열반경』의 외부라

는 점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시모다 역시『여래장경』이『열반경』보다 선행하

며, 여래장이란 개념은『여래장경』에서 유래한다는 타카사키의 주장을 받아

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 위에서 시모다는『열반경』이『여래장경』의

여래장tathāgatagarbha을 불성buddhadhātu으로 대체하고 구문도『여래장경』의

sarvasattvās tathāgatagarbhāḥ가『열반경』에서 *astibuddhadhātuḥsarvasattveṣu로

변경되었다고 한다.7)

7) 田(1997:268).

이에 대해 래디치Radich는 역으로『여래장경』의 여래장이 외부로부터 온

것이라고 주장한다.『여래장경』에서 ‘여래장’이란 어휘가 등장하는 것은 9개

의 비유 가운데 오직 첫째 비유에서인데, 짐머만Zimmermann이 지적하듯이 이

첫 번째 비유는 후에 다른 비유들의 의미를 종합하기 위해 부가된 것으로 보이

며, 그러한 점에서 ‘여래장’의 개념이 대표적인 것이긴 하지만 유사한 여러 용

어들 중의 하나라는 점에서8) 단지 제한된 의미에서만『여래장경』으로 불릴

수 있을 따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여래장’이 언급되는 방식에서,『여

래장경』이 아무런 논쟁 없이 ‘여래장’을 언급하는 것과는 다르게『열반경』에

서는 ‘여래장’이 상당한 분량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종종 청자(聽者)들이 당혹

스러워하고 의심하며 때로는 마라의 설이라 비판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이

는 ‘여래장’이라는 새로운 개념에 관한 논쟁이『열반경』에서 처음 이루어지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9) 이러한 논의들을 바탕으로 래디치는 위 인용문의

『여래장대경』이 현존하는『여래장경』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부르는 여러 이름

중의 하나이며, 현존하는『여래장경』은 오히려 그 이름을 미리 존재하고 있던

『열반경』으로부터 취했을 가능성이 충분함을 지적한다.10)

8) Zimmermann(2002:48-53).

9) Radich(2015:32-34)

10) Radich(2015:52). 출판되기 이전의 이 논문을 접한 시모다(2014:68-69)는 여래장이라는 개념이 처

음 등장하는 문헌에 대한 최신의 성과에 따라 자신의 “종래 이해에 대해 일부 수정”한다, “여래장

사상의 기원은 재고를 요하게 되었다”고 말함으로써 래디치의 연구 성과에 공감을 표하고 있다.

래디치의 이러한 논의는 이제까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던 여래장 사

상의 계보를 재정립케 한다. 여래장 사상의 기원을『여래장경』에 두고,『여래

장경』・『승만경』・『부증불감경』의 이른바 ‘여래장 3부경’을 통해 여래장 사상

이 발전되어 갔으며, 그 이론적 체계는「보성론」에서 완성되었다는 기존의 이

해에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여기에서『열반경』은 주류가 아니라 방계일 따름

이었다. 이제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에서『열반경』, 『여래장경』의 여래장설을

점검해 본다.

2. 대승 열반경의 여래상주와 실유불성

불교도에게 붓다의 죽음은 실로 중대한 사건이다. 그의 전 생애를 다룬 전기

외에 그의 죽음만을 주제로 한 텍스트가 성립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들 문헌들은 역사적 사실만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필히 성립 당시

경전 작가의 이해가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여러 문헌들 가운

데 간단히 초기불교 디가 니카야의 「대반열반경」과 대승의『열반경』특히

법현(法顯)역『불설대반니원경(佛說大般泥洹經)』을 대비하면 다음과 같은 차

이가 보인다.

우선『디가 니카야』의 「대반열반경」은 붓다 입멸에 상당히 앞서 마가다국

의 수도 라자가하를 떠나 몇 곳을 지나 웨살리에서 머물고 다시 여러 곳을 거

쳐쿠시나라에 이르러 병을 얻고 입멸한 후 그의 유골이 분배되어 사리탑이 건

립되는 전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이에 대해 대승의『열반경』은 입멸의 날 하

루의 기록이며, 장소도 쿠시나가라에 한정되어 있다. 등장인물에 있어서도 전

자의 경우, 처음부터 아난다가 붓다를 수행하고, 후에 붓다에게 1겁을 이 세상

에 머물러줄 것을 요청하지 않았다 하여 질책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후

자에서 아난다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가공의 인물인 보살 가섭(迦葉)

이 붓다와 문답을 나누는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불설니원경』은 붓다 입멸

직전에서 마무리되고 있다. 경의 마지막은 붓다가 문수사리에게 4부대중을

위해 널리 설할 것을 그리고 마하가섭과 아난이 도착하면 그들에게 마지막 설

법 내용을 전해줄 것을 부탁하는 장면에 이어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나고 있

다. “이 때 세존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몸에 병이 나타나게 하고는 오른쪽

옆구리로 대지에 눕고 마음을 가다듬어 생각을 밝게 하였다.”11)

11) T.12.899c. 여기에 붓다의 죽음을 주제로 하는『열반경』에서 붓다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으로 마

무리되는 역설이 존재하다. 대승『열반경』에서 아난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이와 관련되어 있는 듯

하다. 붓다의 입멸에 대한 암시에도 불구하고 이를 알아채지 못해 붓다에게 세상에 계속 머물러줄

것을 요청하지 못한 책임이 있는 아난다 이야기는, 영원한 붓다를 강조하는 대승『열반경』과는 조

화되기 어려운 것이다. 대승『열반경』의 무대가 ‘하루 한 곳’이라는 점도 과거・현재・미래가 압축

되어 있는 ‘지금’, 시방十方세계가 귀착되는 ‘여기’를 상징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장치는 대승

『열반경』이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라 그 죽음을 넘어서 있는 영원한 삶의 의미에 대한 논의에 집중

하는 것을 돕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불설니원경』의 내용은 담무참(曇無讖)역『대반열반경』제10권까

지의 내용과 일치한다. 대승『열반경』의 원형이 이에 해당함을 짐작케 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논의되는 내용은 크게 여래상주(如來常住)와 실유불성(悉有

佛性) 두 가지라는 점이 지적되어 왔다.12)

12) 시모다(下田 1997:163이하)는 이러한 평가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기 위하여『대반니원경』의 제1, 2,

3, 4, 6품을 제1류로, 제5품과 제7에서 마지막 제18품까지를 제2류로 구분하면서 제1류를 「원시대

승열반경」으로 이해한다. 래디치(Radich 2015:Appendix 4)도 이를 바탕으로 그러나 보다 단순하

게 두 층으로 나누고 각각 ‘법신’과 ‘여래장’을 주제로 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여래상주의 요체는 붓다의 수명이 무량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몸은

상주하며, 금강석과 같이 견고하고[金剛身], 단순한 육체의 잡식신(雜食身)이

아니라 영원한 진리를 신체로 하는 법신(法身)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의

배경에는 오랫동안 전승되어온 붓다의 사리śarīra, 유골dhātu 숭배가 있는 것으

로 보인다. 이에 따르면 붓다의 유골은 여전히 생명prāṇa이 있으며13), 붓다는

그의 반열반 후에도 그가 머물렀던 장소에 실제로 현존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의 유골이 안장되어 있는 불탑stūpa이 독립된 ‘법적 인격’(a legal person)으로

간주되어 토지 소유가 가능하고, 불탑을 훼손하는 것이 오역죄로 간주되는 것

도 이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골은 살아있는 붓다와 기능적으로 동일하다.14)

13) Schopen(1987:126)은 신코트Shinkot에서 발굴된 유골상자 뚜껑 안쪽에 “생명이 스며있는 세존 석

가모니의 유골” prāṇasametaṃ śarīraṃ bhagavataḥ śākyamuneḥ 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음을 보고

하고 있다. [*불교학연구회 2016년도 추계 학술대회(2016.11.12.)에서 발표된 본 논문에 대한 논평

에서 이영진(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은 이 명문이 1959년 라모뜨에 의해 최초로 보고되었음

을 밝히고 있다(Lamotte, Histoire du Bouddhisme indien, t. I : Des origines à l’ère Sâka, 1959,

p.474).]

14) Schopen(1987:128-133).

이와 같이 유골신앙은 붓다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확신시켜 주지만, 그래서

붓다의 몸이 금강신・법신임을 가르쳐 주지만, 이는 다른 한편으로 역사적 인

물로서의 석가모니의 전 생애가 단지 ‘세간수순’(世間隨順)의 모습일 따름이라

는 점으로 귀결되어야 함을 내포한다. 말하자면 그의 수태, 탄생으로부터 그의

출가, 깨달음, 수많은 설법, 입멸에 이르기까지 그의 세간에서의 삶이 모두 중

생구제를 위한 임시적 방편으로 시현(示現)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15) 여

기에 석가모니의 절대화가 역사적 석가모니를 단지 가현적(假現的, docetic)16)

존재로 간주되게끔 하는 역설이 있다. 그리고 이 역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붓

다 석가모니의 유골에 대한 신앙 그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작용한다. 가현적

존재의 유골이 영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열반경』이 불탑신앙에 소극적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15) T.16.880b.

16) Radich(2015:105이하)는 열반경의 불타론을 ‘Docetic Buddhology’로 명명하면서, docetism을

“Buddha’s appearance and action in the world is only an appearance.”로 설명한다.

이와 같이 외재하는 불탑숭배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는 불탑의 내재화를 동

반한다. 파괴되지 않는 것이 밖에 있지 않다면, 그것은 안에 있음이 틀림없겠

기 때문이다. 이제 붓다buddha의 유골dhātu은 중생 속의 불성buddhadhātu이 되

며, ‘여래의 유골을 간직하고 있는탑’tathāgatadhātugarbhāḥ stūpāḥ17)은 ‘여래를

간직하고 있는’tathāgatagarbha 중생이 된다. 여기에서 불성buddhadhātu・여래

장tathāgatagarbha은 붓다의 유골이 아니라 살아 있는 붓다이며, 중생은 완전한

붓다, 불성・여래장이 거주하는 장소이다. 이제 대승『열반경』은 유골・불탑의

내재화를 통해 ‘입멸한 붓다를 애도하여 세운 추모의 건조물을 미래를 위한 새

로운 붓다들의 못자리seedbed로 바꾸고, 무덤tomb을 자궁womb으로, 중생들

을 붓다들의 어머니로 만든다. 그리고 그 무대장치인 붓다의 반열반의 절망을

희망으로 전환시킨다.’18) 대승『열반경』은 이와 같이 붓다의 죽음에서 오히려 영

원한 붓다를 발견하고 나아가 그 붓다가 중생 속에 계속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17) 이는『팔천송반야경』의 구절로 불탑 숭배의 공덕과 경전의 서사・수지・독송의 공덕을 비교하는

부분에 등장한다. 여기에서 garbha는 간직하는 ‘안’ ‘공간’ ‘방’을 의미한다. 下田(1997:290), Radich

(2015:161), 김성철(2009:102) 참조.

18) Radich(2015:165).

3. 여래장경이 말하는 내 안의 붓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보성론」은 여래장 사상의 연원을『여래장경』에서

발견한다.「보성론」이『열반경』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

고19) 그 연원을『열반경』이 아니라『여래장경』에서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문제에 대한 해명의 일환으로 그리고『여래장경』이 이야기하는 여래장의 의

미가 무엇인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아홉 가지 비유 가운데 대표적인 제1유를

일부 인용한다.

19) RGV 56에 전거를 밝히지 않은 인용 게송이 있는데 한역은 이를『대반열반경』의 게송이라 명기한

다(T.31.835c). 또 RGV 77에 “10지에 있는 보살도 여래장을 겨우 엿볼 따름이라고 [경에] 설해졌

다.”라는 구절의 한역은 단지 ‘경에 설하기를’經說이라고 되어 있는데, 타카사키(高崎1989:337 n.1)

는 이를『열반경』으로부터의 인용으로 판단한다.

"그 때 세존께서 전단중각에 계시면서 바르게 앉아 삼매에 드시고는 신변

(神變)을 나타내 보이셨다. 천 개 잎의 연꽃이, 크기는 수레바퀴만하고,

수는 헤아릴 수 없으며, 색깔과 향기가 충족하면서도 아직 피어나지 않

았는데, 그 모든 꽃 안에 ‘변화신의 부처님’[化佛]이 계시면서 허공에 높

이 솟아 세계를 덮은 것이 보배의 장막과 같았다. 그 하나하나의 연꽃이

한량없는 광명을 비추는 가운데 모든 연꽃이 동시에 펼쳐져 빛나고 있던

차, 부처님의 신력(神力)으로 말미암아 순식간에 시들어버렸는데, 그 모

든 꽃 안에 일체의 변화신 부처님이 가부좌하고 앉아 계시면서 각각 수

백천의 광명을 발하였다...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이와 같이 선남자

여, 내가 ‘붓다의 눈’[佛眼]으로 일체중생을 보니,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

음의 온갖 번뇌 가운데 여래의 지혜와 여래의 눈과 여래의 몸이 있어 가

부좌를 하고 엄숙히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다]. 선남자여, 일체 중생은

비록 온갖 번뇌의 몸속에서도 여래장이 있어 항상 염오되지 않고, 덕의

모습을 갖추고 있어 나와 다르지 않다[如我無異]...선남자여, 온갖 부처님

의 진리[法爾]는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여도 세상에 출현하지 않아도

일체 중생은 여래장으로서 상주 불변하는데 단지 그 중생이 번뇌에 덮여

있어, 여래께서 세상에 나와 널리 법을 설하시는 것이다...”20)

20) T.16.457b-c.

한편「보성론」은『화엄경』 「여래성기품」의 ‘미진함천’(微塵含千)의 비유를

상당히 길게 인용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축약하면 다음과 같다.

"중생의 무리 속에 여래의 지혜tathāgatajñāna가 침투anupraviṣṭa하지 않은

어떠한 중생도 없다. 그럼에도 상념에 묶여saṃjñā-grāha 여래의 지혜를

알지 못한다...예를 들어 승리자의 아들이여, 삼천대천(三千大千) 세계 크

기의 큰 화포(畫布)가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 화포에 삼천대천 세계가 남

김없이 그려질 것이다...그런데 그 큰 화포가 극미(極微)의 티끌 속으로

들어갔다고 하자. 하나의 극미의 티끌 속에 큰 화포가 들어가듯이, 그와

같이 다른 모든 극미의 티끌 속에 같은 크기의 화포들이 들어갔다고 하

자. 그런데 학식 있는...그는 천안(天眼)을 갖고 이 크나큰 화포가 작은 극

미의 티끌 속에 있음을 그리고 이것이 어떤 중생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

음을 안다...그는...그 티끌을 부수어 [화포를 집어내고], 나머지 모든 티

끌로부터 [화포를 집어낼 것이다].

이와 같이 승리자의 아들이여, 여래의 지혜, 무량한 지혜, 일체 중생에 이

익이 되는 지혜는 일체 중생의 심상속(心相續, cittasaṃtāna) 속에 들어가

있다...그리고 여래는 염오되지 않은 여래의 지혜에 의해 중생들의 주거

를 관찰하고...“아, 이들 중생은 있는 그대로 여래의 지혜를 알지 못한

다...내가 이들 중생들을 위해...상념에 의한 속박을 제거해주리라...여래

지혜를 자각하여 여래와의 평등성samatā을 체득케 하리라.”...21)

21) RGV 22-24.

위의 두 인용문은 중생 하나하나에 여래 또는 여래의 지혜가 들어가 있음을

독특한 비유를 통해 설명하는 공통점을 가지면서, 논의의 전개 방식 또한 상당

히 평행적임을 보여준다. 타카사키는 이러한 점에 근거하여『화엄경』 「여래

성기품」을 ‘여래장경의 소스’ 또는 ‘여래장 사상의 출발점’으로 규정한다.22)

보다 구체적으로는 “『여래장경』이『성기경』의 이 아이디어를 채용하여

경의 주제로 하고, 여기에서 언급된 여래와 중생의 동일성을 한 걸음 더 나아

가게 하여 중생을 ‘여래를 태아로 지닌 것’(여래장)으로 설정하여 여래장설을

전개시킨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23)고 단언한다. 이러한 그의 주

장은 그 후 정설로 받아들여져 왔으며, 시모다에서도 위의 내용을 담고 있는

타카사키의 논문 「화엄교학과 여래장사상」은 “많은 논고 중에서도 중요한

것”24)으로 간주되고 있다.

22) 高崎(1989:248 n.3). Harrison(1990:54) 또한 「여래성기품」이 여래장경의 ‘원형’prototype이라고

한다. 그는『법화경』또한『여래장경』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1990:56).

23) 高崎(1960:108).

24) 下田(2014:55).

「보성론」의 여래장 해석 특히 이른바 ‘여래장의 세 뜻’ 가운데 첫 번째로 거

론되는 ‘여래 법신의 편만’은 확실히 「여래성기품」의 ‘여래 지혜의 침투’와 궤

를 같이 한다는 점에서『화엄경』과「보성론」을 연결짓는 것은 타당하다. 그리

고 거슬러 올라가『여래장경』과『화엄경』 「여래성기품」과의 관계도 명확해

보인다. 「여래성기품」이 모든 중생의 무리 속에 여래의 지혜가 침투해 있다고

하는 점이『여래장경』에서 중생에 여래의 지혜, 여래의 눈, 여래의 몸이 있다

고 하는 방식으로 반영되어 있으며, ‘미진함천’의 비유도 일견 ‘연꽃 속의 화

불’과 상응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화엄경』 「여래

성기품」 →『여래장경→「보성론」’의 영향관계를 설정하기에 충분한 근거

로 작동된다.

그런데 「여래성기품」을 조금 검토해 보면 위의 논의는 여래성기 즉 여래출

현이 10가지로 설명되는 가운데 그 네 번째인 ‘여래의 마음’이 다시 10가지로

설명되면서, 여래의 지혜가 무처부지(無處不至)임을 말하는 부분에 근거한 것

임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 여래성기는 여래의 반열반과 관련하여 이야기되고

있기도 한데, 그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여래는 단지 중생이 반기고 기뻐하도록 세상에 출현하고, 중생이 걱정하

고 슬퍼하고 그리워하도록 열반을 시현한 것일 따름이다. 실제로 여래에

겐 세상에의 출현도 열반도 없는 것이다. 여래는 상주한다. 법계가 [상주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여래는 단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열반을

시현한다.25)

25) T.9.628b. [*위 인용문 가운데 ‘여래는 상주한다. 법계가 [상주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로 번역된

부분은 본래 ‘여래는 상주하고 진여, 법계이기 때문이다.’로 되어 있었다. “如來常住如法界故”로 되

어 있는 원문의 번역을 위와 같이 수정한 것은 불교학연구회 2016년도 추계 학술대회에서의 분 논

문에 대한 논평자 이영진의 의견을 따른 것이다. 그는『지광명장엄경』의 예를 통해 그렇게 수정되

어야 함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여래가 반열반을 시현할 때, 먼저 부동삼매(不動三昧)에 들어간다. 삼매

에 들어가서는 하나하나의 몸에 각각 헤아릴 수 없는 억, 천 나유타의 큰

빛을 발하는데, 그 하나하나의 빛에서 각각 헤아릴 수 없는 억 아승기의

신묘한 보배의 연꽃이 출현한다. 그 하나하나의 연꽃은 각각 말 할 수 없

는 꽃술들을 지니고 있는데, 그 하나하나의 꽃술에 보배의 사자좌가 있

고, 그 하나하나의 [사자]좌 위에 여래가 가부좌를 하고 있다. 그때 [모습

을] 드러낸 모든 여래의 몸은 일체 중생의 수와 같고, 공덕이 구족되어 있

으며, 상호가 장엄하고, 본원(本願)을 다해 마쳤다.26)

26) T.9.628c-629a.

이 인용문은『여래장경』이 ‘여래성기’에서 여래의 ‘지혜’뿐만 아니라 ‘반열

반’과도 밀접히 관계에 있음을 시사한다. 특히 연꽃 속에 수많은 사자좌가 있

고 그 하나하나의 사자좌에 여래가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으며, 그 여래의 수

가 중생의 수와 같다는 이미지는『여래장경』의 이미지와 거의 그대로 중첩된

다. 이러한 점은『여래장경』역시 붓다의 열반에 대한 해석과 전혀 무관한 것

은 아닐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그런 가운데 위 인용문에서 여래가 삼

매에 들어간다는 점이 주목된다. 연꽃, 사자좌, 여래는 모두 삼매 속의 이미지

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여래장경』을 되돌아보면,『여

래장경』역시 삼매가 전제되어 있는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여래장경』, 나아서는 여래장 개념의 출현이 불수념(佛

隨念, buddhānusmṛti) 또는 견불(見佛, buddhadarśana) 전통과 일정한 관계에 있

음을 상정케 한다. 불수념 또는 견불은 삼매속에서 붓다와의 직접적인 만남을

기획한다. 명상 속에서 붓다와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것이다.『열반경』이 붓다

의 유골을 통해 붓다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면, 불수념・견불은 붓다

의 유골과는 무관하게 깊은 명상 속에서 붓다의 모습을 세세하게 떠올리고, 또

그렇게 하여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그와 마주하여 그의 설법을 듣는 것이다.

불수념・견불은 아마도 붓다의 사후 그의 ‘현존에 대한 열망’27)에서 비롯되었

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은 점차 하나의 수행체계로 발전하여 최초기의

반야경전인『도행반야경』에는 수많은 붓다와의 만남을 기술하는 ‘견시방제

불삼매’(見十方諸佛三昧)28)라는 명칭으로 그리고『반주삼매경』에는 현재의 모

든 붓다가 눈앞에 현전해 있다고 하는 ‘현재제불실재전립삼매’(現在諸佛悉在

前立三昧)29)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삼매 수행에서 석가

모니 붓다와의 만남은 우주의 수많은 붓다와의 만남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러

한 점은『화엄경』도 예외는 아니다.『화엄경』 「현수보살품」이 “만약 붓다에

대한 염상[念佛]의 선정이 파괴되지 않는다면 항상 시방十方의 붓다를 보고, 항

상 시방의 붓다를 본다면 여래가 항상 안주安住함을 안다”30)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27) 한재희(2014:445).

28) T.8.472a.

29) T.13.905a.

30) T.9.433c.

그런데 삼매 속에서의 붓다와의 직접적인 대면은 주객 대립의 관계가 아니

다.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은 깊은 명상 속에서 상호 침투하여 합일되어 간다.

대상은 더 이상 대상이 아니게 되고, 그럼으로써 보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지 않을 수 없다. 대상에 대한 집중은 결국 자기 자신으로 귀환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붓다는 저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다.31)

‘내 안의 붓다’로서의 최초기 여래장 사상이 삼매의 체험과도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입론은 삼매의 이러한 성격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31) 불수념・・견불은 애초 붓다 숭배의 형식이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발견’으로 귀결되는 것은 자연스

러운 일이다. 한편『반야경』,『반주삼매경』은 삼매의 경험을 공성의 철학과 결부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이 점이『여래장경』과 현저히 다른 점이다. 예를 들어『반주삼매경』에서 ‘현재제불실재

전립삼매’ 곧 반주삼매는 꿈속에서 붓다를 아무런 장애 없이 만나는 것으로 또는 꿈속에서 한 여

인과 거리낌 없이 사랑하는 것으로 비유되기도 하는데(T.13.905a-b; Harrison 1990:32ff), 이는 결국

꿈속에서 자유로웠던 일들이 아무리 생생하여도 깨어나서는 실체가 없는 허망한 일이 아닐 수 없

음을 내포한다.『반주삼매경』에서 삼매는 붓다에 대한 집중이지만, 공성의 인식은 붓다에 대한

부정을 내포하며, 이 점이『반주삼매경』의 또 한 축인 아미타불에 대해 정토신앙의 아미타불과는

다른 이해를 보인다. 정토신앙에서 아미타불과의 만남은 죽음의 순간에 일어나는 실제의 사건이

지만,『반주삼매경』에서 그 만남은 마음의 소산이며, 어느 때에나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Harrison 1978:51-52).

그런데『여래장경』은 보는 자로서의 ‘나’가 주체로 정립되는 것을 발견한

다. 이는『열반경』,『화엄경』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열반경』은 ‘불성이 모든 중생에 있다’*asti buddhadhātuḥsarvasattveṣu고 하여,

중생은 주어인 불성이 존재하는 장소일 따름이다. 이 점은『화엄경』 「여래성

기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곳에서 ‘중생의 무리에 여래의 지혜가 침투해

있다’sattvanikāye...tathāgatajñānaṃ...anupraviṣṭam고 하여,『열반경』에서와 마

찬가지로 ‘중생의 무리’가 처격(處格, locative)으로 그리고 ‘여래의 지혜’가 주

어로 표현되어 있다.*보주) 이에 대해『여래장경』은 그 경이 담고 있는 사상을

집약한 선언, ‘모든 중생은 여래장이다’sarvasattvās tathāgatagarbhāḥ라는 문장에

서 보듯이 ‘중생’이 주어로 제시된다. 여래의 유골, 여래의 지혜가 존재하고 스

며드는 ‘대상’에서 완전한 여래를 간직하고 있는 ‘주체’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 보주)『화엄경』 「여래성기품」의 원문은 “na sa kaścit sattvaḥ sattvanikāye saṃvidyate yatra

tathāgatajñānaṃ na sakalam anupraviṣṭam”(중생의 무리에서 여래의 지혜가 완전히 침투하지 않은

중생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으로 되어 있어, sattvanikāye는 ‘~중에서’를 의미하는 속격의

역할을 하고, 처격의 역할은 yatra(=sattve)가 하고 있다는 논평자 이영진의 지적은 문법적으로 정확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정 없이 그대로 둔 것은 위 축약이 지나친 점도 있지만 그 취의를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장점도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기존의 불타론이 인간학으로 새롭게 전개된다고도 하겠는데,

이 경우 인간학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현실이 전면에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여래장경』에서 여래는 중생에게 ‘나와 다르지 않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중

생은 자신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온갖 번뇌’에 눈감을 수 없다. 부처님

은 나보고 ‘네가 부처님이다’라고 말하지만, 나는 ‘내가 번뇌를 벗어나지 못한

중생’임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동일성의 선언은 위로부

터 내려오지만, 차이성은 현실의 증언이라는 점에서 동일성과 차이성은 한 영

역의 언어가 아니다.32) 아마도 후에 객진번뇌(客塵煩惱)라는 말이 성립된 것은

이러한 점을 배경으로 할 것이다.『여래장경』에 ‘객진’이라는 표현은 없다. 여래

와 중생의 동일성에 일차적 관심이 있는 것이다. 청정한 여래장과 염오된 번뇌

의 공존에서 유래하는 딜레마에 대한 충분한 인식은 좀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32) 동일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앨런 콜은 ‘different sameness’와 ‘suspended sameness’를 구별한다. 전

자는『여래장경』에서 동일성이 선언될 때에도 붓다와 중생 사이에 위계hierarchy가 존재한다는

점을, 후자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서 ‘안에 있는 붓다’internal buddha가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미

래에 아버지가 될 아들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면서 동일성이 유예되

어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Cole 2005:200-203).

II. 청정법신과 객진번뇌의 대립

『승만경』은 여래장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여래 법신이 번뇌의 외피를

벗어나 있지 않은 것을 여래장이라 한다.”33) 여기에서 번뇌는 외피, 껍질로 간

주된다. 번뇌가 객진(客塵, āgantuka)으로 불리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안과 밖,

본질과 현상으로 구분하는 가운데 번뇌는 밖의 것, 일시적이고 외래적인 것,

비본질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승만경은 “자성

청정심이 염오된다는 것은 알기 어렵다...소위 자성청정심을 알기 어렵고, [바

로] 그 마음이 번뇌에 염오된다는 것도 알기 어렵다”34)고 하여, 서로 대립하는

청정과 염오가 두 영역으로 분리되지 않고 동일한 마음 위에 성립됨을 인정하

고 있다. 보성론 또한 유구진여(有垢眞如, samalā tathatā) 즉 여래장을 설명하

기 위해『승만경』의 이 부분을 인용하면서, “유구진여가 동시에yagapad 일시

에ekakālaṃ 청정하면서 염오되었다고 하는 점이 불가사의하다”35)고 말한다.

모순되는 것들을 서로 다른 시점(時點)으로 분리함으로써 그 모순을 해소시키

는 것이 아니라, 모순 그 자체가 불가사의한 채로 수용되고 있는 것이다.

33) tathāgata-dharmakāyo ’vinirmukta-kleśakośas tathāgatagarbhaḥ sūcyate(RGV 12); 如來法身

不離煩惱藏 名如來藏(T.12.221c). 보성론 한역에서는 “如來法身 不離煩惱藏所纏 名如來藏”(T.31.824a)

으로 되어 있다.

34) T.12.222c.

35) samalā tathatā yugapad ekakālaṃ viśuddhā ca saṃkliṣṭā cety acintyam. RGV 21.

앞서『여래장경』이 모든 중생은 “온갖 번뇌의 몸속에서도 여래장이 있어 항

상 염오되어 있지 않다”고 하고 있음을 보았는데, 이 역시『승만경』에서 언급

하는 청정법신과 객진번뇌의 대립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승만경』은 ‘자성청정심, 바로 그 마음이 번뇌에 염오되어 있다’고 하며,「보

성론」은 청정과 염오가 동시적인 사태라고 말한다.『승만경』이 특히 그러하

고「보성론」도 실제로는 이를 계승하지만, 여래장과 번뇌는 때로는 전혀 이질

적인 것으로 때로는 동일한 것에 근거한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하나의 텍스트

에서 또는 여래장 사상 일반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사태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그 이해의 틀로서 중도의 의미를 확인해 본다.

1.『상응부』가 전하는 비유・비무의 중도

『상응부』44:10「아난다경」은 붓다가 ‘자아ātman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

해서도, ‘그러면 자아는 없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침묵한 것으로 전한다.

질문자가 자리를 떠난 후 왜 질문에 답하지 않았는가라는 아난다의 질문에 붓

다는 ‘자아가 있다’고 하면 상주론에, ‘자아가 없다’고 하면 단멸론에 빠질 것

이기 때문이라 답한다. 그리고『상응부』12:15 「캇차나곳타경」은 바른 견해

[正見]는 ‘있음’과 ‘없음’의 관념에 의지하지 않는 것으로서, 여래는 이 두 극단

에 의지하지 않고, 중도에 의해 법을 설한다고 말한다.

이들 경전에 의해 바른 견해는 중도이며, 중도는 있음과 없음의 관념에 의지

하지 않는 것임을 그리고 그 중도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

면 중도는 왜 언어로 표현될 수 없을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언어가 흘러가

는 사태를 개념적으로 고정한다는 점이다. ‘책상’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책

상이듯이 그리고 실제의 책상이 사라져도 개념으로서의 책상은 여전히 존재

하듯이, 언어는 사태를 고정하고 개념을 실체화하며 우리를 그에 속박되게 한

다. 따라서 개념적 사고는 흘러가는 사태를 있는 그대로 기술하지 못한다.

한 직선의 예를 들어 중도의 의미를 점검해 본다. 가운데 어떠한 점을 중심

으로 직선이 펼쳐져 있다면, 좌측은 마이너스 영역, 우측은 플러스 영역이 되

고, 가운데 점은 ‘영’으로 명명될 것이다. 이 때 플러스 영역의 어떤 지점에서

‘영’을 향해 바라본다면, ‘영’은 지평선 바깥의 영역이지 않을 수 없다. 시야가

닫는 곳은 플러스가 시작되는 그 언저리일 따름이다. 우리의 시선은 무한히

‘영’에 가까워질 수는 있어도 ‘영’ 그 자체를 목도하지는 못한다. 이는 마이너

스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마이너스 영역에서 ‘영’에 무한히 가까워질 수

있어도 ‘영’ 그 자체에 이르지는 못한다. 그런데 이 ‘영’은 플러스 영역에서 볼

때 플러스 영역 밖에 있다는 점에서 마이너스의 어떤 것으로 간주되고, 마찬가

지로 마이너스 영역에서 플러스 영역의 어떤 것으로 보이기도 할 것이다. ‘영’

은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아니고 특히 중간의 ‘어떤 것’이 아니지만, 때로는 플

러스, 마이너스의 어떤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영’은 규

정되지 않는 본래의 자리를 넘어 플러스, 마이너스 지역으로 확장된다. 이 때

그 ‘영’은 플러스, 마이너스의 어떤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점에서 ‘영’은

하나의 점이 아니라 때로는 확장되고 때로는 수축되는 영역이며, 그럼으로써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유동적인 사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도는 이렇게 ‘영’을 중심으로 하는 가변적인 영역이다. 유와 무가 우리의

선택지일 때, 중도는 그러한 유, 무로 규정할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언어로 표현

되지 않으면 안 될 때 그것은 유 또는 무의 영역으로 넘어와 하나의 유 또는 무

로 제시된다. 거꾸로 말해 어떤 유 또는 무의 입론은 그것이 중도의 이념을 바

탕으로 하는 한, 의미 있는 주장이 되는 것이다. 붓다가 비유비무의 중도를 설

하면서 동시에 무아를 강조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것도 이러한 점에 연유할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붓다 최초의 설법『초전법륜경』의 첫 주제는 중도이

며, 두 번째 설법을 담은『무아상경』의 중심 내용은 무아이다.

지나친 단순화의 오류를 충분히 인식하면서 여래장 사상이 출현하기까지

의 인도불교 흐름을 유・무의 문제로 정리한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초기불교가 무아anātman를 강조하는데 이는 선행하는 우파

니샤드의 자아ātman론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면서 초기불교의 무아론이 또 하

나의 극단론이 되지 않는 것은 그 무아론이 중도를 기반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

다. (2)아비달마불교는 법dharma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이는 기본적

으로 무아인 것의 자기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초기불교 무아론

의 부정적 성격이 긍정적인 분위기로 전환되는 측면도 내포한다. (3)초기대승

의 반야・중관은 이 법의 존재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공성śūnyatā을 강조하

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에 대해 (4)유식, 여래장 사상은 알라야식 및 여래장의

존재astitva를 적극적으로 선양한다. 각각 미혹의 존재와 붓다 본성의 내재성

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인도불교의 흐름을 이렇게 (1)자아의 무, (2)법의 유, (3)아와 법의 공, (4)알

라야식・여래장의 유로 요약할 때, 그 역사는 마치 진자(振子)처럼뚜렷이 유와

무를 오간다. 이러한 점이 불교의 역동성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중도가 구체

적 이론 체계로 제시될 때 끊임없이 스스로를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2. ‘허망분별’과 ‘여래장’의 ‘있음’이 의미하는 것

초기 유식학파의 문헌「중변분별론」은 “허망분별은 있다”abhūtaparikalpo’sti

는 명제로 시작한다.「보성론」역시 “일체 중생에 여래장이 있음”sarvasattveṣu

tathāgatagarbhāstitva36)을 주장한다. 이렇게 초기 유식학파, 여래장 사상 모두

‘있음’astitva를 이야기한다. 그러면 과연 그 ‘있음’은 어떠한 의미일까?

36) RGV 15 (I.16 주석산문).

「중변분별론」에서 ‘허망분별’은 매우 역설적인 존재이다. 그것은「중변분

별론」이 주장하듯 ‘있음’에 틀림없지만, 소멸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의 존재이

다. 허망분별은 일차적으로 인식주체로서의 우리를 의미한다. 마치 데카르트

에 있어 모든 것이 의심되어도 의심하는 자신의 존재는 의심될 수 없듯이, 이

인식주체의 존재는 자명한 것이다. 그러나 유식의 체계에서, 인식대상이란 식

[허망분별]이 현현된 것일 따름으로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될 때 인식주

체 또한 그 대상의 비실재성에 의해 스스로 붕괴된다. 둘은 능소能所 관계에 있

고, 이 능소관계는 상호의존적이기 때문이다.

「중변분별론」에서 이러한 점은 삼성(三性)의 문제로 설명된다. 이 때 허망

분별은 의타기성에 상응한다.「중변분별론」게송 I.5는 ‘대상=변계소집성, 허

망분별=의타기성, 둘의 없음=원성실성’으로 규정한다. 여기에서 둘이 능소,

주관・객관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둘의 없음은 주관・객관의 동시 소멸을 의미

한다. 결국 의타기성 곧허망분별은 원성실성에서 소멸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이다. 이러한 점에서「중변분별론」의 삼성은 허망분별의 자기전개와 자기해

체를 중심으로 구성된 것이며,37) 우리는 이를 통해 허망분별의 ‘있음’이 소멸

하기 위해 있는 것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37) 삼성설에 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정호영(2008;2011) 참조.

그러면「보성론」에서 여래장의 존재는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을까?「보성

론」이 그 논의 과정에 유식의 개념들을 상당히 차용하고 있지만,「보성론」에

삼성에 대한 언급은 없다. ‘있음’의 의미와 관련지을 때, 이러한 사실은「보성

론」에서의 ‘있음’이 자기부정 또는 소멸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지 않음을 가리

킨다. 그러면 여래장이 ‘있다’고 하는 의미는 무엇일까?「보성론」은 그 교설의

목적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도 일체는 공하며

구름, 꿈, 환영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고 여러 곳에서 설해졌는데,

다시 왜 불성buddhadhātu이 중생 각자에 있다asti고

여기 제불은 설하셨는가? (I.156)

겁약한 마음, 낮은 중생에 대한 경시, 허망한 것에 대한 집착

진실한 법에 대한 비방, 자아에 대한 집착

이 다섯 가지 허물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를 단멸하기 위하여 설하는 것이다. (I.157)

게송 I.156은 여래장사상의 사상사적 위치에 대한 인식을 포함한다. 여래장

의 ‘존재’에 관한언명이 일체가 공이라는 반야・중관과 예리하게 대립한다는

점이 충분히 의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보성론」은 여기에서 여래장 개념

의 존재론적 의미를 규명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여래장이라는 존재 그 자체

의 의미가 아니라 왜 붓다가 ‘여래장이 있다’고 설하는지를 묻는다.「보성론」

은 게송 I.157에서 다섯 가지 허물을 열거한 다음, 그 허물들이 제거됨으로써

획득되는 다섯 가지 덕으로서 노력하는 마음가짐, 스승으로의 존경, 반야

prajñā, 지혜jñāna, 대자심(大慈心, mahāmaitrī)을 제시한다(I.166).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신속히 붓다다움buddhatā을 얻는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여래

장의 ‘존재’가 성불론, 구제론soteriology의 맥락에서 논의되고 있음을 발견한

다. 여래장의 ‘존재’는 중변분별론의 허망분별과 같이 소멸을 통해 원성실

성의 실현,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가 구제론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장의 ‘있음’은 현재 있는 것이면서 항상 구제론

적 목표를 지시한다. 그것은 삶의 과정에 염오 속에 있으면서도 자기실현을 목표

로 한다는 점에서 여래장의 ‘있음’은 현실적이며 동시에 당위적인 존재가 된다.

3. 유식과 여래장이 공유하는『아비달마대승경』의 게송

『아비달마대승경』은 산스크리트 원전은 물론 한문, 티베트어와 그 밖의 어

떠한 언어로도 번역된 사례가 알려져 있지 않은 경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헌의 중요성은 무착의「섭대승론」의 가장 중요한 경증(經證)으로 인용되

고 있는 점 그리고 동일한 게송이「보성론」에도 인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

게송은 다음과 같다.

시작도 없는 때로부터 성(性 또는 界, dhātu)은 일체법의 동등한 의지처,

그것이 있을 때, 일체의 [윤회의] 생존이 있고 또 열반의 증득이 있다.38)

38) 현장역「섭대승론은」“無始時來界 一切法等依 由此有諸趣 及涅槃證得”(T.31.133b),「보성론」에 인용

된 산스크리트 원문은 “anādhikāliko dhātuḥ sarvadharmasamāśrayaḥ/ tasmin sati gatīḥ sarvā

nirvāṇādhigamo ’pi ca//”(RGV 72) 그리고 그 한역은 “無始世來性 作諸法依止 依性有諸道 及證涅槃

果”(T.31.839a)로 되어 있다.

「섭대승론」은 유식학파의 핵심적인 개념 가운데 하나인 ‘알라야식’을 ‘무

엇보다 먼저 알아야할 것’으로 규정하면서 그 첫머리에서 다루고 있는데, “세

존께서는 이 알라야식을 어디에서 설하셨는가”라는 물음을 스스로 제기한 후

『아비달마대승경』의 위 게송을 인용한다.「섭대승론」은 계속하여 알라야식

의 명칭이 직접 언급되고 있는『아비달마대승경』의 다른 게송을 인용하지만,

「보성론」이 위 게송만을 인용하여 여래장의 한 측면을 설명하고 있는 것과 관

련해서는「섭대승론」의 경우 위 게송 속의 ‘계’dhātu가 알라야식을 가리키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면 동일한 게송이 어떻게 유식학파에

서는 알라야식으로, 여래장사상에서는 여래장으로 해석될 수 있을까?

유식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의 일상 경험은 그 영향력을 깊은 심층의식 속에

남기고, 이 심층의식의 일정한 경향성은 우리의 삶의 양태를 결정한다. 알라야

식이 윤회의 기반이란 이러한 점을 지칭한다. 그런데 이러한 윤회의 소용돌이

에서 벗어나는 것 또한 윤회 속의 존재 그 자체이다. 윤회하는 바로 그 사람이

열반을 증득하는 것이다. 결국 유식의 체계에서 알라야식이 윤회하고 알라야

식이 열반을 증득하는 것이고, 이러한 점은 위 게송의 ‘계’가 ‘알라야식’으로

해석 또는 대체되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보여준다.

다만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윤회와 열반의 무한한 거리에 드러나 있는

‘차이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회와 열반이 동일한 한 존재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유래하는 ‘동일성’이 논리적으로 충돌한다는 점이다. 어떻

게 차이성과 동일성이 동시에 만족될 수 있는가? 바꾸어 말하여 어떻게 동시

에 같으면서 다를 수 있겠는가? 유식에서 삼성의 논리는 바로 이를 해명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섭대승론」은 삼성의 문제를 염정이분(染淨二分) 의타기성

이론으로 설명한다. 염정이분이란 전체가 염오분(染汚分)과 청정분(淸淨分)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의타기성이 염오되면 변계소

집성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고, 또 원성실성은 그것이 전적으로 청정하게 된

것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변계소집성, 원성실성은 의타기성 위에서

성립되는 두 가지 삶의 양태라 하겠다. 그렇다면 미혹의 생존에서 열반으로의

전환, 변계소집성이 버려지고 원성실성이 성취되는 근본적 전환 또한 의타기

성 위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의타기성은 그 전환 이전에도 이후에도 의연히 존

재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39) 그러나 여기에 철저한 자기 부정이 개재되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유식불교의 ‘회향’이 혁명적 전환으로 설명되는 것

은 이 때문이다.

39)「중변분별론」에서 의타기성은 소멸한다. 이에 대해「섭대승론」의 의타기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삼성설이 두 유형으로 이야기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 두 유형은 독립된 두 유형이라기보다, 전

자는 실천론・수행론의 입장에서 그리고 후자는 존재론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삼성설이라는 한

체계의 두 모습이라는 것이 적절하다. 정호영(2011) 참조.

그러면「보성론」에서 이 게송은 어떻게 해석되고 있을까? 보성론에서 이

게송이 인용되는 곳은「보성론」이『여래장경』에서 제시된 9가지 비유를 상세

히 언급하고 이를 다시 여래장의 세 자성 즉 법신・진여・종성에 배분하여 음미

하는 가운데, 그 마지막의 종성을 “3종의 불신(佛身)이 생기하는 종성”

trividhabuddhakāyotpatti-gotra으로 규정하면서, 여래다움tathāgatatva을

‘3종 불신의 현현’으로, 여래성tathāgatadhātu을 ‘그것을 얻기 위한 원인hetu’

으로 설명한 이후에서다. 여기에서 종성은 dhātu와 동의어로 그리고 여래다움을

얻기 위한 원인hetu으로 주석되고 있다. 종성으로서의 여래장이 원인으로 그리고

그 원인이 충분히 실현된 결과가 여래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여래장의 세 자성의 의미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논의할 것이지만, 이 가운데

종성의로서의 여래장과 여래의 관계를 인과관계로 설명하는 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원인과 결과 사이의 질적 동일성과 시

간적 선후의 문제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전자와 관련하여 원인과 결과 사이의

차별이 전적으로 배제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는 있다. 만약

차이가 없다면 원인과 결과는 구별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여래장과 여래는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러면 그 차이는 무엇일까? 9가

지 비유 중 ‘과일 속의 씨앗’에 암시되어 있듯 ‘성장’과 관련된 의미는 다음 장

에서 검토하기로 한다면, 이 차이는 중생과 붓다의 차이로 나타난다. 그런데

중생과 붓다 사이의 아득한 차이는 여래장 사상에서 중생 안에서의 차이로 내

재화된다. 자성청정심과 객진번뇌의 대립이 그것이다. 외재적 아득한 차이가

내재화됨으로써 ‘미소화’(微小化)40)된다고도 하겠다. 이 미묘한 차이는 동일

성으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 실천・수행이 의미를 갖는 것도 이 차이의 확인

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40) ‘미소화’는 시모다의 용어이다. 그는 “여래장・불성이라는 개념의 탄생에 의해 붓다와 중생의 차 이는

중생 자신 내부로 자리를 옮기고, 개별적으로 미소화한 차이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下田 2014:33)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번뇌를 ‘객진’으로 호칭하는 것은 여래장 사상

이 동일성에 형이상학적 우위를 인정함을 뜻한다. 그러나 이 동일성은 동일한

것의 단순한 지속을 의미하지 않는다. 동일성이 시간의 계기 속에 모습을 드러

낼 때 앨런 콜의 명명과 같이 ‘유예된 동일성’suspended sameness으로서 미래로

향해 열려 있는 동일성이 될 것이다.41)

41) 주32 참조. 그리고 이 절의 사족으로 마츠모토 시로의 ‘비판불교’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다. 마츠모

토는『아비달마대승경』의 위 게송을 포함하여 여래장사상 일반을 기체설dhātuvāda로 규정하고

이를 배격한다. 그에 따르면 여래장사상은 단일한 기체가 다원적인 법dharma을 일으키는 발생론

적 일원론, 근원실재론으로서 우파니샤드의 아트만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관한 다양한

논의는 보리수 가지치기에 수록되어 있기도 한데, 그의 그러한 논란은 근본적으로 그가 여래장

사상의 중도적 역설적 지평을 형식논리와 실체론으로 환원하여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실

체론적 이해가 갖는 문제에 대해서는 김영욱(2000)이 선학과 관련하여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또 이와 별개로 여래장이란 개념의 기원을 ‘연꽃의 구조’[蓮華藏, padmagarbha]에서 구하는 그의

작업(松本 1993)도 여래장tathāgatagarbha과의 어휘의 유사성 이상의 것을 보여주지 못하는 듯

하다.

III. 여래장의 존재와 시간과 실천

‘여래상주’(如來常住)에서 상주에 상응하는 산스크리트어는 nitya이며, 이

어휘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영원eternal으로 번역된다. ‘여래는 영원하다’는 것

이다. 그런데 이 번역어로부터 출발하여 ‘여래상주’의 의미를 이해하려 할 때

그 본래의 의미가 충분히 전달되기는 어렵다. 현대어 ‘영원’이 ‘동일한 것의 무

시간적 지속’으로 이해되고, 여래가 그러한 의미에서 영원한 존재라면, 그는

초월적 신성의 존재일 수는 있어도 세간 속에 활동하는 역동적 존재일 수는 없

기 때문이다.

산스크리트어 nitya는 어원적으로 부사 또는 접두어 ni-에 접미어 –tya가 결

합된 것으로서, 이 때 ni-는 안in 또는 안쪽inside of을, -tya는 앞선 말을 형용사

로 만들면서 ‘그 말에 의해 제시된 장소에서 발견되는 어떤 것’이란 의미를 갖

는다.42) 따라서 nitya는 ‘(안에, 여기에) 있는’being located in이라는 어원적 의미

를 가지며, 그렇게 있음이 지속되는 것으로 파악될 때 항상적constant, 영구적

permanent이란 파생적 의미를 갖게 된다.43) 막스 뮐러Max Müller는 그러한 의

미의 변화에 대해 “안에 있는 것, 어떤 사물이나 장소 안에 있는 것은 그 자신의

것이며, 그에 특유한 것이며, 움직이거나 변화하지 않는다. 따라서 nitya의 이

차적 의미는 변화하지 않는unchanging, 영원한eternal 고유의 것”44)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42) Hara(1959:90-91). Hara와 Brough의 논문에 관한 정보는 하바타(幅田 2014:148)에 의거. 하바타는

선행하는 연구결과를 바탕으로“‘여래는 nitya다’를 실천하는 자들의 집에 여래는 머문다”는 문장

을 붓다의 사후에도 ‘붓다가 여기에 있다’고 관상할 때 붓다는 그곳에 있다는 의미로 해석한다(幅

田 2014:150).

43) Brough(1952:76-77)

44) Hara(1959:94)에서 재인용.

이러한 설명들을 통해 우리는 nitya가 본래 ‘(안에, 여기에) 있는’이란 의미

의 존재 개념이지만 이것이 이후 시간개념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

러한 전환이 가능한 최대의 이유는 그 존재가 관념적 순수공간 속의 존재가 아

니라 현실에서 시간과 함께 또는 시간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사유되는 점에

기인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논의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존재가 구제론의 맥

락에서 토의되고 있다는 점이다. 구제론 나아가 실천론은 염오와 청정, 현실과

미래의 이상이 구별되어야 하고, 이 구별은 시간의 계열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일성이 강조되는 여래장계 경전에서 비록 명료하지는 않더라도 시간

의 문제가 전적으로 배제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1.『부증불감경』의 ‘중생계’ 세 뜻에 담긴 시간의 문제

『부증불감경』은 증가견・감소견을 비판하고 세계가 일계(一界, ekadhātu)임

을 강조한다. 여래장과 여래, 중생과 붓다, 생사와 열반의 동일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부증불감경』에 과거・미래 등의 어

휘가 등장하고, 여래장이 이들 시간적 어휘들과 함께 언급되고 있는 것을 발견

한다.

『부증불감경』은 ‘일계’는 여래의 지혜로써만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심심

(甚深)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깊고 깊은 것은 제일의제, 제일의제는 중생계, 중

생계는 여래장, 여래장은 법신이라고 하면서, 중생계sattvadhātu를 다음과 같

이 3가지 성질[法]을 가진 것으로 설명한다.

(1) 무시(無始)이래 현존하면서 본성적으로 [자신과] 결합되고 청정한 여

래장으로서의 성질

(2) 무시이래 현존하면서 본성적으로 [여래장과] 결합하지 않고 번뇌에

싸여 있으며, 청정하게 되지 않은 여래장으로서의 성질

(3) 미래가 다하도록 동등하고 항상되며 [완전하게] 존재하는 여래장으

로서의 성질45)

45) 一者 如來藏本際相應體及淸淨法, 二者 如來藏本際不相應體及煩惱纏不淸淨法, 三者 如來藏未來際平等恒

及有法(T.16.467b). 우리말 번역에 Silk(2015:113)를 참조하였다. 그리고「보성론」에서는 여래장의

10義와 9喩 사이, 게송 I.95의 주석산문에 이 부분이 인용되어 있다. 다만 그 순서가 (3), (2), (1)로 되

어 있는데 이는 (3)이 여래장 그 자체를 설명하는 10의와 관련되어 있고, (1)과 (2) 특히 (2)가 번뇌

에 염오되어 있는 상태의 여래장을 설명하는 9유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고「보성

론」에서는 (3)과 (1)의 주어가 법성dharmatā으로 그리고 (2)의 주어는 번뇌의 외피kleśakośa로 되어

있어 의미가 보다 명료하게 되어 있다. 이에 대해『부증불감경』이 한결같이 ‘여래장’을 의미상의

주어로 하고 있는데, 이는『부증불감경』이 ‘일계’를 강조하는 점과 관련되어 있는 듯하다.

여기에서 여래장은 세 측면으로 이야기되고 있는데 시간의 의미를 담고 있

는 어휘는 (1)과 (2)에서는 ‘무시이래’(本際, anādi), (3)에서는 ‘미래가 다하도

록’(未來際, aparāntakoṭi)이다. 이 말들은 함께 어울려 ‘시작도 없는 그 오래 전

부터 끝도 없는 먼 미래’라는 경과를 나타내는 듯하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

여 ‘무시이래’는 과거를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과거에 대한 관심을 차

단한다. 청정한 여래장 또는 이를 둘러싼 번뇌의 시원에 대한 관심을 차단하는

것이다. ‘시작이 없는 것’에 대해 시작을 묻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라는 점에서

그러한 질문을 부적절하게 만든다.46) 이제 관심은 현재의 상황에 집중된다.

46) Tola and Dragonetti(1980:12).

그런데 한편으로 (1)과 (3)은 다른 것이 아니다. 비록 (1)이 현재의 모습을, (3)

이 미래의 상황을 기술하지만, 이 둘은 청정하고 항상되며 명백히 실재하는 여

래장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면 (1) 이외에 (3)을 덧붙이는 진정한 의미

는 무엇일까? 그것은 확실히 여래장을 현재와 미래의 두 계기로 나누고자 하

는 것이지만, 동일한 것이 두 계기로 나뉘어 설명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계기가 둘이라 함은 그 계기들이 서로 다름을 의미한다. 그러면 어떻게 동일한

것이 두 계기에 서로 다를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해결책은 가능태와 현실태의 구분일 것

이다. 현재의 잠재적 가능성이 미래에 완전히 실현된다면, 미세한 차이에도 불

구하고 기본적인 동일성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러나 보다 엄밀히 말하여 현재의 여래장은 불완전하게 실현되어 있는 것이 아

니다. 번뇌에 둘러싸여 있어도 여래장 그 자체는 온전히 청정한 것이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두 시점의 존재양태가 모두 완전한 것이라면, 그리고 두 시

점 사이의 변화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면, 그 변화는 자기실현이 곧 자기회복

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현재에서 미래로의 변

화(현재→미래)는 자기실현이지만, 그 변화는 결국 본래의 자기 자신으로 되

돌아오는 것(미래→현재)이다. 우리는 전자에서 시간의 계기를, 후자에서 본

래적 동일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동일성은 무시간적 지속이 아니라 시간적

계기 속의 역동적 움직임(현재⇄미래)이다. 나아가 이러한 점이야말로 수행부

정론 즉 본성적 완전함이 전제되는 사상체계에 수행의 문제가 개입일 여지가

없다는 여래장사상에 대한 평가는 여래장의 ‘존재’가 갖는 구제론적 의미 그

리고 그 구제론이 전제하는 전후 차별의 시간의 문제를 읽지 못하였기 때문임

을 밝혀준다.

2.「보성론」이 제시하는 ‘여래장’의 세 뜻과 실천

여래장사상은「보성론」에서 치밀하게 체계화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

다. 이 가운데 보성론은 일체 중생이 여래장인 이유를 세 측면에서 기술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게송 I.27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붓다의 지혜가 중생의 무리에 침투해 있기 때문에

그 [중생의 무리가 번뇌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무구(無垢)인 점이 본래

[붓다와] 불이(不二)이기 때문에

붓다의 종성에 그 결과를 상정하기 때문에

일체 몸을 가진 자는 붓다의 본성garbha을 가진다고 [붓다에 의해] 설해졌다."

주석산문은 이 여래장의 세 뜻에 대해 (1)여래의 법신dharmakāya이 일체 중

생에 편만(遍滿)해 있다, (2)여래의 진여tathatā는 차별이 없다, (3)여래의 종성

gotra은 존재한다는 의미로 부연하여 설명한다. 이 가운데 (1)은 여래장경 그

리고 더욱 소급해서는『화엄경』 「여래성기품과 맥락을 같이 함은 재론의 여

지가 없다. 붓다의 지혜가 절대적인 것으로 강조될 때 그리고 그 절대성이 보

편성으로 이해될 때,47) 붓다의 지혜는 중생 속에도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중

생이 여래장인 근거는 붓다의 지혜, 보다 근원적으로는 ‘붓다’의 절대성에 있

다. 이에 대해 (2)는 중생과 붓다에 차이, 차별이 없음을 근거로 한다. 그리고 이

는 부증불감경의 ‘일계’를 연상케 한다. 또 한편으로는 그 차이 없음의 조건

즉 번뇌로부터의 해방은 역으로 번뇌에 둘러싸여 있는 상황을 상기하게 만들

며, 이는 곧『승만경』의 가르침을 되돌아보게 한다.

47) 불교에서 절대성은 초월성이 아니다. 초월성은 다른 것을 부정, 배제하는 바로 그 이유로 자신이

한정된다. 한정된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진정 절대적이라면 어떠한 한정도 있을 수 없기 때

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1)이 붓다와 중생의 관계가 순수한 동일성의 차원에서 그

리고 (2)는 번뇌의 유무에 대한 차이성이 의식된 맥락에서 논의되고 있음을 발

견한다. 동시에 (1)은 붓다의 절대성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에서 근원적으로 불

타론임에 반해 (2)는 중생의 염오됨이 의식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인간론

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3)은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

(3)이 앞의 둘과 가장 다른 점은 ‘성장’의 개념이 엿보인다는 점이다. 위의 게

송 I.27은 ‘붓다의 종성에 그 결과를 상정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결

과는 ‘여래’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종성(=여래장)과 여래는 인과관계로 파악

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그런데 인과관계는 그것이 ‘관계’라는 점에서 어떠한

종류의 것이든 연속성이 전제되면서도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에서 변

화의 의미가 내포되지 않을 수 없다. 원인에서 결과, 여래장에서 여래로의 발

전, 현현의 의미가 드러나 있는 것이다.

물론 엄격한 의미에서 게송 I.27의 진의는 종성이 그 결과인 여래와 다르지

않다는 것으로 보인다. 종성을 언급할 때 ‘붓다 또는 여래의 종성’이라 하여 종

성을 한정짓고, 원인에 그 결과를 ‘상정한다’48)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인

을 말하면서도 결과의 성격을 그 자리에 대치하는 것은 인과의 동일성을 강조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보성론」이 이전의 여래장계 문헌

에서 사용하지 않던 종성 개념을 도입하고, 이를 여래장의 세 뜻의 하나로 사

용하면서 원인의 의미로 규정하는 것은 (1)과 (2)로는 설명되지 않는 어떠한 의

미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은 결국 여래로 ‘성장’하기 위한 근거

를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48) ‘상정한다’는 번역어는 高崎(1989:44)에 따른 것이다. 이에 상응하는 산스크리트어는 upacāra인데,

루엑은 이를 ‘환유換喩적 치환’metonymous transfer으로 설명한다. 원인(=종성)이 결과(=여래)의

이름으로 불리기 때문이다(Ruegg 1976:345). 안성두(2011:274)는 이를 ‘비유적으로 표현된다’고

번역한다

『여래장경』에서 비롯된 아홉 비유는 일견 ‘과일 속의 씨앗’(제6유), ‘빈천한

여인 몸속에 있는 전륜성왕이 될 태아’(제8유)처럼 생물학적 성장의 의미를 담

고 있는 듯하지만, 이는 그 비유물이 본래 갖고 있는 성격일 따름으로『여래장

경』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여래장경』은 단지 여래장과 번뇌의 공

존을 전제하면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으로서 전자의 청정성, 불변성을 강조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보성론」에 이르러서는 인간의 유의미한 활동에

의미 부여가 이루어져야 할 요청에 따라 종성 개념이 도입되고, 이에 의해 변

화, 발전, 성장을 설명할 바탕이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이러한 이해가 가

능하다면, 종성은 넓은 의미의 행위론, 실천론, 수행론을 제시하는 것이며, (1)

의 근본적 동일성과 (2)의 현실적 차이성의 대립을 지양해 가는 역동적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유예된 동일성’에 내재된 역동성이 가장 잘 표현된

것이 종성 개념이라는 생각이다.

IV. 맺음말

여래장 사상은「보성론」에서 체계화의 정점에 달한다.「보성론」의 체제는

그 첫머리에 7종 금강구(金剛句)로 제시되어 있는데, 이는 불・법・승 삼보와 이

삼보가 출현하는 원인으로서의 여래장 그리고 이 여래장이 현현된 보리, 보리

가 갖는 덕성, 덕을 지닌 붓다의 활동의 일곱 주제를 말한다. 나아가「보성론」

은 믿음과 회향에 대해 언급한다. 믿음은 여래장이 존재한다는 사실[有,

astitva], 필경 성불할 수 있다는 가능성[畢竟得, śakyatva], 성취할 보리에 지향해

야 할 가치로서의 공덕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는 점[功德, guṇavattva]에 대한 믿

음을 포함한다.49) 그리고 회향과 관련하여「보성론」의 마지막 본송(V.25)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삼]보와 청정한 성dhātu과 무구한 보리와 여러 덕과

[붓다의] 활동, 이 일곱 의미의 구를 여실히 설함으로써 내가 얻은 공덕, 원컨대

이에 의해 이 [땅의] 사람들이 무한한 광명을 지닌 무량수(無量壽) 선인(仙人)을

보고, 그렇게 본 후 무구한 ‘진리의 눈’[法眼]을 얻고 궁극의 보리를 얻기를!”

49) RGV V.8.

4세기 후반 성립된 것으로 간주되는「보성론」은 본송과 주석게송 그리고

주석산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본송을 원형으로 하고 이것이 주석게송및 주

석산문으로 발전한 것이라면 그 사이에 유가행파의 술어가 추가되어 가는 점

이 확인된다. 여래장사상이 유가행파의 술어로 조직화되어 갔던 것이다. 그 후

「법계무차별론」,「무상의경」,「불성론」등은「보성론」의 영향 아래 성립된 것

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6세기 이후「보성론」은 자취를 감춘다. 그러면서도 여

래장 사상은 중관학파 학승들에 의해 부수적으로 논의되었으며, 11세기 이후

에는「보성론」이 재발견되어 학승들의 문헌에 인용되는 사례들의 나타나고

있다. 11세기 후반에는 티베트로 전파되어 요의(了義)의 가르침으로 때로는 중

관학파의 일부로 편입되면서도 중요한 학설로 전승되었다.50)

50)「보성론」의 전개는 加納(2014)에 자세하다. 이 밖에 티베트에서의 전승에 대해서는 안성두(2005),

차상엽(2014), Ruegg(1989) 참조.

이제 앞서의 논의를 되돌아보면 여래장 개념은 붓다의 관점에서 선언된 붓

다와 중생의 동일성을 기반으로 성립된 것이지만, 인간의 관점에서 차이성이

전적으로 부정될 수 없을 때, 동일성과 차이성은 미묘하게 공존하지 않을 수

없다. 여래장사상은 이 둘의 관계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나타남은 당연

한 일일 것이다. 열반경, 여래장경에서는 완전한 동일성이 강조된다. 그

러나 점차 차이성이 인식되어 갈 때 ‘객진’의 존재가 더욱 뚜렷해지고, 동일성

은 미래로 유예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수행론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이다. 보성론에서 말하는 여래장의 세 의미, 그 가운데 특히 ‘종성’에 관한

논의가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러나 보성론은 구체적인 수행의 방법을 열

거하지는 않는다. 수행과 그 수행 방법은 우리 각자의 문제이다. 이 시대에 부

응하는 ‘여래장’에 대한 새로운 의미부여 또한 우리의 과제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