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철교수의 불교강좌
■ 이종철 교수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일본 동경대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도 Mysore대학 연구원과 중국 북경대 교환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로 재직중이며, 전공은 불교철학(구사, 유식)이고 ‘인도불교와 동아시아불교의 비교연구’에 관심을 갖고 있다.
1. 연재를 시작하며 ▲ 위로
공사상의 근원적 질문 안고 불교사상 탐구 시작
흔히 연기(緣起)라던가 공(空)이라는 말로 불교사상을 집약적으로 표현합니다. 어찌 보면 지극히 간단한 말에 불과합니다. 이 때문인가 많은 사람들이 연기니 공이니 쉽게 말하며 불교 사상의 핵심을 다 파악하고 있는 듯 치부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연기가 무언데, 공이 무언데 하고 캐묻기 시작하면 어느새 대답에 궁해지는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연기’나 ‘공’이 불교 이외의 다른 사상 체계에서는 쓰이지 않는, 불교만의 특이한 전문 용어임을 감안한다면 이것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어떤 이는 ‘연기’가 부처님의 깨달음에 직결되는 용어이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적 알음알이로 헤아려 알 수 없는 노릇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성적 파악은 아예 불가능하니 헛된 노력은 집어치우고 수행에 전념하는 것이 덧없는 인생에서 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합니다.
‘공’에 관해서도 마찬가지 말을 합니다. 깨달음의 저 깊은 곳에서 보면 다 일리 있는 말이고 저마다 옷깃을 여미게 하는 진지함이 깃들어 있는 말입니다. 불교 텍스트에서도 같은 언급에 자주 접하게 됩니다. 공성의 세계나 연기의 세계는 언어가 끊기고 알음알이가 멈춘 지점에서 저절로 열리는 세계, 스스로 증득해야 알며 깨친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세계로 묘사되곤 합니다. 우리가 긍정하든 부정하든 적어도 불교 텍스트에서는 한결같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텍스트로 하여금 말하게 하라’는 입장에 서있는 저로선 이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 문화가 어느덧 대승불교 가운데서도 가장 근본주의적인 형태인 선불교에 친숙해있기 때문에, 이성이나 언어에 대한 불신이랄까 회의가 비교적 널리 퍼져있는 편이지요.
그렇지만 연기나 공의 체험적 측면을 강조한 나머지, 언어나 논리를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간다면 사태는 심각해집니다. 부처님의 마음만 취하고 말은 버려도 좋다는 이야기로 비약할 수 있으며, 또한 불교 사상가들이 세계 사상사에서 이루어낸 혁혁한 공적들이 사장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식들이 판치는 세상도 당연히 예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 텍스트에 비추어보아도, 연기나 공이 언어나 논리를 부정한다는 말은 아무런 근거 없는 억측에 지나지 않으며, 이 역시 무언가 잘못된 선입견이 만들어낸 착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명확하게 말하라! 공사상은 공성의 체험적 측면을 중시하면서도 동시에 공성의 표현을 중시합니다.
구마라집 보다 조금 이른 4세기 말에 중국의 도안(道安)은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라는 노자의 첫 구절을 원용하여, 도에는 가도의 도와 상도의 도가 있다고 보고 이를 각각 속제와 진제에 배당시켰습니다. 이는 나가르주나(龍樹 150~250)가 〈중론송〉에서 표명하고 있는 이제설과 하나도 다를 바 없습니다. 공성의 체험적 측면과 언어를 동시에 존중하는 이, 진제와 속제를 동시에 바라볼 줄 아는 눈 밝은 이, 곧 ‘두 눈(複眼)을 가진 이’의 모습을 우리는 〈중론송〉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연재에 앞서 우선 전제로 삼아야하는 근본적인 원칙이 있습니다. 공사상은 기본적으로 본질주의자의 입장과 양립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현상을 넘어 또는 현상의 저 밑바닥에, 내 안이나 내 밖에서, 그 어떤 자기 원인적 존재론적 본질을 설정한다면, 이는 본질주의자입니다. 다른 한편 존재론적 본질이 부정된다고 해서 현상마저 부정해버린다면, 이도 본질주의자입니다. 현상과 본질의 뗄 수 없는 관계를 상정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결국 같기 때문입니다. 삶의 세계에서 현상이 있으면 거기에 반드시 존재론적 본질이 있어야 하는가, 또는 정말로 있는 것인가? 공사상이 우리에게 던지는 근원적인 질문을 안고, 이제 우리는 나가르주나와 함께 꽤 긴 여행을 떠나 보겠습니다.
2. 나가르주나에게 부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 ▲ 위로
부처님의 진리는 연기… 윤회수렁서 중생구제
“논서(論書)를 쓰려는 사람은 자신의 스승이 얼마나 위대한 지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먼저 스승의 수승한 능력을 찬탄하면서 스승에게 경배를 올린다.”
이는 와수반두(世親, 320~400)가 지은 〈구사론〉 첫머리에 나오는 말로, ‘귀경게’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철학적 논서를 보면 흔히 첫머리에 저자가 자신의 스승을 칭송하는 게송이 붙어있습니다. 산스크리트어로 ‘망갈라쉴로까(magalaloka)’, 일반적으로 ‘귀경게(歸敬偈)’라고 부르는 이 게송이 언제부터 논서 첫머리에 붙게 되었는지 그 정확한 연원은 확정짓기 어렵지만, 대충 인도에서 여러 학파의 원형이 성립되기 시작한 시점 곧 기원 전후로 추정됩니다.
어쨌든 2~3세기의 불교사상가 나가르주나의 〈중론송(中論頌)〉도 스승을 찬탄하는 귀경게 두 수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 이야기도 이 귀경게 풀이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존재는] [영원불변한 원인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며(不生), 또한 [완전한 無로]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不滅).
[원인에 해당하는 존재는, 영원불변한 실체로서] 상주하는 것이 아니며(不常), 또한 [결과에 상관없이] 단멸하는 것도 아니다(不斷).
[원인에 해당하는 존재와 결과에 해당하는 존재는 서로] 동일한 것이 아니며(不一), 또한 [서로 무관한] 별개의 것도 아니다(不異).
[존재는 영원불변한 원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며(不來), 또한 [영원불변한 원인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不去/不出).
[존재의] 이러한 [인과관계, 곧] 연기(緣起)는 세간의 무수한 속설로는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며, [그 자체] 완전한 해방의 영역이다. 이와 같은 연기(緣起)를 가르쳐주신, 설법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설법자이신 정각자(正覺者=부처님)께 경배를 올린다.”(1-1; 1-2)
무슨 말인지 도대체 알 수 없다고요? ‘존재’니 ‘실체’니 ‘인과관계’니 잘 들어보지 못한 철학적인 용어가 나오니 벌써 머리가 지끈지끈, 도망치고 싶지요? 하지만 첫 술에 배부르겠습니까! 괄호와 같은 기호도 많아서 복잡하지요? 참고로 이번 연재에서 제가 쓰는 몇 가지 기호에 관해서 보충 설명하지요.
각진 괄호 [ ]안에 든 말은 이해를 돕기 위해서 원문에 없는 말을 문맥에 따라 보충한 것이기 때문에, 제 나름의 원문 이해 방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둥근 괄호 ( )안에 든 말은 간단한 설명이나 대체 가능한 용어인데, 필요에 따라 한역(漢譯)이나 산스크리트어를 첨가하는 수준에 그치겠습니다. 어지간하면 괄호 없이 쉬운 문장으로 만들어보도록 애써보지요. 게송을 인용할 때 ‘(1-1)’, ‘(3-2)’와 같이 썼는데, 이는 각각 첫 번째 장의 첫 번째 게송, 세 번째 장의 두 번째 게송을 뜻합니다.
그럼, 다시 귀경게로 돌아가겠습니다. 나가르주나의 공사상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나가르주나가 부처님을 어떤 분으로 보았는지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공사상도 그 핵심은 결국 부처님의 깨달음(正覺)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귀경게는 좋은 소재가 됩니다. 나가르주나는 귀경게에서 부처님을 ‘설법자 가운데 최고가는’ ‘스승’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와수반두도〈구사론〉의 귀경게에서 부처님을 ‘일체지자(一切智者)’로, 대비심(大悲心)을 지닌 ‘스승’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와수반두의 설명에 따르면, ‘스승’이란 정법(正法) 곧 진리를 가르쳐서 중생을 윤회의 수렁에서 구해내지, 결코 신통력이나 소위 ‘은총’ 따위를 베푸는 이가 아닙니다. 나가르주나가 부처님을 ‘스승’으로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가르치는 진리는 과연 어떤 것일까요?
귀경게에서 보듯이, 나가르주나는 부처님이 가르치시는 진리를 ‘연기’라고 못 박습니다. ‘연기’의 심층적인 의미도 문제 거리이겠습니다만, 어쨌든 나가르주나의 공사상이 바로 이 ‘연기’에 뿌리박고 있음을 알 수 있겠지요? 〈중론송〉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끝납니다.
“[중생에 대한] 연민으로 말미암아, [윤회의 원인인] 잘못된 견해를 깡그리 끊어버리도록 진리를 설해주신, 그 분 가우따마(Gautama=부처님)에게 귀의합니다.”(27-30)
중생을 향한 가없는 대비심(大悲心)을 지니고, ‘연기’라는 진리를 설해서 중생으로 하여금 삿된 견해를 없앨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윤회의 수렁에서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님의 모습, 〈중론송〉의 처음과 끝에는 바로 이러한 부처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3. 부처님을 향한 신앙은 맹종도 회의주의나 상대주의도 아니다 ▲ 위로
나가르주나와 와수반두, 이 두 인물은 대승불교가 배출한 가장 걸출한 불교 사상가입니다. 각자 대승불교의 쌍벽을 이루는 중관사상과 유식사상의 비조로서 추앙받는 인물이지요. 그런데 이 두 사람이 부처님을 ‘스승’으로 부른다는 것은 우리의 종교적 감성에 비추어볼 때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전통적으로 대승불교 문화권에 속해있는 데다가 근현대에 들어서서 기독교와 같은 타종교의 영향이 가미되면서 우리 마음속에 어느덧 부처님은 신적인 존재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부처님을 일체지자(一切智者) 곧 전지자(全知者)로서 모셨던 전통적 시각이 전능자(全能者)에 대한 ‘신앙’으로 탈바꿈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나가르주나에게서 그러한 신적인 모습을 띤, 전능자 부처님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어디까지나 진리를 가르치는 스승입니다. 신통력을 부린다든지 점을 친다든지 신적인 은총을 내린다든지 하는 일은, 부처님이 스승으로서 제시하는 구제의 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윤회의 수렁에 빠진 중생에게 부처님은 진리의 가르침이라는 손을 내밀어줍니다. 그 손을 붙잡고 수렁에서 나오는 일은 중생 각자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나가르주나에게 이 진리는 ‘연기’라는 한마디로 응축됩니다. 이 즈음에서 나가르주나를 거울삼아, 불교에서 말하는 ‘신앙’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도 뜻있는 일이겠습니다.
현대 사회는 ‘다종교 사회’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종교학자들은 이를 ‘종교다원주의’로 묘사하여 다종교 간의 상생(相生) 관계를 꾀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 사상계를 휩쓸면서 ‘절대적 진리’의 고전적인 아성을 우스개 거리로 만들고 있습니다.
다종교 사회에서 한 종교만의 진리성을 주장하는 일은 갓 쓰고 자전거 타는 격이 될 것입니다. 해체를 주장하는 곳에서 설립을 주장하면 뺨맞기 십상입니다. 후세의 사가들이 ‘상대주의 시대’로 칭할는지도 모르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서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것은, 부처님께서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하신 말씀, 곧 “연기를 보는 자 법을 본다”는 말씀, 더불어 “여래가 이 세상에 태어나든 태어나지 않든지 이 법성(法性=緣起)은 정해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부처님은 당신의 깨달음이 당신 혼자만의 깨달음이 아니라 옛 부처님이 가셨던 길을 가셨을 뿐이라고 겸허하게 말씀하십니다. 옛날 부처님이 가셨고 지금 부처님이 가시고 훗날 부처님이 가실 길이 정해져 있고 그 길이 ‘연기’라고 한다면, 연기는 비록 사변의 대상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미 절대적 진리 또는 궁극적 진리(불교에서는 이를 ‘진제(眞諦)’라고 부릅니다)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따라서 ‘연기’를 존중하는 입장과 ‘상대주의 시대’와는 어딘가 걸맞지 않으며, 심지어는 서로 모순적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신앙’도 이러한 진리관에 뿌리박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믿을 ‘신(信)’자 하나를 들어볼까요? 제가 확인해 본 바로 ‘신(信)’(범어로 ‘쉬랏다 raddh’)은 결코 단순한 종교적 신앙, 곧 우리가 체험할 수 영역을 ‘믿습니다’ 하나로 다 인정해버리는 비지성적 태도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信)’은 ‘진리에 대한 확신’, 중생을 고의 굴레에서 완전하게 해방시켜주는 절대적 진리가 있다는 확신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절대적 진리에 대한 회의주의나 상대주의는 그것이 절대적 진리로 향하는 도정에서 제시된 방법론적 회의나 상대적 진리가 아닌 한,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연이 먼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은 연기를 보신 분이기 때문에 ‘부처님’이라 칭송 받습니다. 우리가 연기를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진리, 한 치의 우연이나 상대성도 허용하지 않는 냉혹하리 만치 엄숙한 진리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교 신자의 신행(信行)은 이와 같은 절대적 진리에 대한 확신, 부처님 말씀 속에 절대적 진리에 이르는 길이 있다는 확신에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나가르주나가 머리 속에 그렸던 ‘연기’에는 이러한 진리관, 부처님에 대한 확신이 깃들어 있습니다.
4. 연기와 희론(1) ▲ 위로
“연기(緣起)는 세간의 무수한 속설로는 접근할 수 없다.” 나가르주나의 〈중론송(中論頌)〉 귀경게에 나오는 이 구절은 대승불교(大乘佛敎) 사상의 핵심을 건드리는 말입니다.
‘세간(世間)의 무수한 속설로는 접근할 수 없다’는 말은 한역(漢譯)에서는 흔히 ‘희론적멸(戱論寂滅)’이라는 멋들어진 말로 옮기고 있습니다. ‘적멸(寂滅)’이야 ‘소멸된다’ ‘없어진다’는 뜻이기 때문에 이해하기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좀 복잡한 문제는 제가 ‘세간의 무수한 속설’로 풀이한 ‘희론(戱論)’이라는 말에 있습니다. 이 말은 대승불교 사상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데 아주 중요한 용어이기 때문에 2회에 걸쳐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희론’은 범어 ‘쁘라빤짜(prapaa)’의 한역인데, 이는 어근 pra-pa 또는 pra-pac (상세히 설명하다; 흩뜨리다)에서 나온 명사형입니다. 원래는 현시, 전개, 확장, 확산, 확대, 다양화, 상세한 설명을 뜻하는 말인데, ‘흩뜨리다’는 뜻이 우세했는지 점차로 철학적 영역에서는 ‘현상’ ‘현상계’ ‘환상’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희곡에서는 ‘어리석은 말’을 뜻하게 됩니다.
대승불교를 주요한 모태(母胎)로 삼은 한역에서는 ‘희론(戱論), 허위(虛僞), 망상(妄想)’과 같이 좋지 않은 뜻으로만 쓰입니다. 한역만 보아도 대승불교에서 ‘쁘라빤짜’를 상당히 안 좋게 보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지요?
아마도 ‘흩뜨리다’라는, 어근의 뜻을 살려서, 무언가 진상을 꿰뚫지 못하고 언저리로만 얼쩡거리는, 알갱이를 꿰차지 못하고 모호하게 흩뜨리는 말이라는 뜻으로, ‘희론’이라 옮긴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연기를 왜 ‘희론적멸’로 표현했는지 〈중론송〉의 다음 게송(偈頌)을 대비시켜 생각해보면 그 의의가 좀더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업(業)과 번뇌(煩惱)가 소멸함으로써 해탈(解脫)이 있다. 업과 번뇌는 분별심(分別心, vikalpa)에서 생기고 분별심은 희론(戱論, prapaa)에서 생기지만, 희론은 공성(空性)에서 소멸한다.“(18-5)
이 게송에서 공성(空性)은 연기(緣起)와 같은 말입니다. 〈중론송〉에서는 “‘연기’ 바로 그것을 우리는 ‘공성(空性)’이라 말한다. 〈중략〉”(24-18)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업이나 번뇌는 생사윤회(生死輪廻) 세계를 가리키기 때문에, ‘희론’은 생사윤회의 원인(原因)을 가리키는 것으로 풀이되고, 연기(緣起)와 대극적(對極的)인 자리에 놓입니다.
‘분별심(分別心)’이란 말이 나왔으니 유식사상(唯識思想)에 빗대어 설명해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유식사상에서는 우리 마음을 표층적(表層的) 영역과 심층적(深層的) 영역으로 나눕니다.
심층 영역에 해당하는 마음이 소위 ‘알라야식’이지요. 그런데 유식사상의 용어법을 보면, 표층마음과 심층마음을 같이 싸잡아서 곧 우리의 오감각(五感覺)과 의식(意識), 마나식, 알라야식을 전부 ‘위깔빠(vikalpa)’ 곧 ‘분별심’이라고 부릅니다.
‘분별심’은 생사윤회의 대해에서 헤매고 있는 우리 중생(衆生)의 마음을 뜻합니다. 흥미로운 일은 ‘분별(分別)’이란 말로 중생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 마음의 현 상태까지 그려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분별’이라 하면 여자-남자의 분별, 적-친구의 분별 등 수많은 차별상(差別相)이 언급되겠지만 이 모든 분별은 나와 대상의 분별 곧 주관(主觀)-객관(客觀)의 분별(分別)로 통합될 수 있습니다.
유식사상에서는 이 분별심을 근본적으로 변혁시키지 못하는 한, 주관과 객관으로 경계선이 그어진 분별심이 있는 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없고 이 때문에 업과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가르주나는 이 분별심이 희론에서 생긴다고 하는군요. 왜 그럴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 해결의 실마리를 던져주는 것이 바로 짠드라끼르띠입니다. 그는 ‘희론은 말’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희론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무언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음을 말하고 있지요?
이 즈음에서 언어의 어떤 점이 생사윤회와 관련되는지 캐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5. 연기와 희론(2) ▲ 위로
연기를 깨닫게 되면 희론 사라지고 해탈
언어는 보기에 따라 여러가지 기능 및 속성이 있습니다. 인간을 ‘호모 로스(Homo loquens, 언어적 인간)’라고 해서 다른 동물 종(種)과 확실하게 구분하는 표식으로 언어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최근에는 기호학적 사유가 진행됨에 따라, 인간에게 있어 언어의 중요성을 새로운 관점에서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언어에 관해서, 불교 사상은 무엇보다도 언어의 분절(分節) 기능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분절’이 말 그대로 대나무를 마디마디 쪼개나가는 것을 뜻하듯이, 언어의 분절기능이란 온전한 존재의 세계, 통짜인 존재의 세계를 갈래갈래 나누어 ‘갈라진 세상’으로 만드는 기능입니다.
좀 까다로운 이야기가 될지는 모르지만 언어의 분절기능은 ‘의미’의 형성과정에서 잘 드러납니다. 한 예로 ‘희다’라는 말의 의미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볼까요? 유명한 불교 논리학자 진나(陳那, 디그나가)의 설명을 따라가 보면, ‘희다’라는 말은 우선 ‘희지 않은 것’을 동시에 내세우게 되고, 그 다음에 노란 것이 아니다, 까만 것도 아니다, 붉은 것도 아니다 등등 다른 색을 배제함으로써 ‘희다’의 의미를 드러내게 됩니다.
이같이 언어는 일차적으로 자타(自他)의 분절을 꾀한 뒤, 차례대로 타자를 배제함으로써 자신의 의미를 구축합니다. 나가르주나가 말한 ‘희론’이 언어와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은 바로 이러한 언어의 분절 기능 때문이고, 이 점 때문에 희론은 주관-객관의 분별로 대표되는 분별심의 토대로 자리 잡습니다.
유식사상에서 알라야식을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이라고도 하지요? 말 그대로 종자란 종자는 모두 알라야식 안에 내장되어 있기 때문에 알라야식을 일체종자식이라 합니다.
그런데 종자 가운데는 ‘업종자(業種子)’라고 부르는, 전생에서 행한 업의 과보를 때가 되면 싹틔울 씨앗도 들어있지만, ‘명언종자(名言種子)’라고 불리는 특이한 씨앗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명언종자가 바로 언어능력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마음은 하얀 도화지 같이 그 안에 아무것도 칠해져있지 않은 백지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선천적으로 다양한 종자들을 지니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알라야식 안에 명언종자가 있다고 한다면 이는 표층마음에서뿐만 아니라 심층마음에서도 언어활동이 존재한다는 말이 됩니다. 심층마음에서 진행되는 언어활동을, 유식사상에서는 ‘의언(意言, manojalpa: 마음의 속삭임)’이라고 표현하여, 조용히 속삭이듯 진행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표층마음에서처럼 그렇게 확연하게 언어의 분절 기능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언어의 분절기능은 여전히 마음 저 깊숙한 곳에서 묵직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지요.
표층마음에서 심층마음에 이르기까지 우리 마음속에는 언어의 분절기능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관한 그 어떠한 말도 언어의 분절 기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결국 통짜인 존재의 세계를 갈가리 찢어놓는 꼴이 되기 때문에, 깨달은 이의 눈으로 보면 ‘놀고 있네!’ 라는 한마디밖에 들을 수 없게 됩니다. 구마라집의 역어(譯語) ‘희론(戱論)’의 배후에는 이러한 숨은 맥락이 있지 않을까요?
희론이 사라질 때, 언어의 분절기능을 벗어나 존재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통째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분별심을 떨쳐버리고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듯한 생사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희론 적멸’에 관한 나가르주나의 의중은 아마도 그런 것이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나가르주나가 ‘희론이 적멸한’다고 표현한 ‘연기’는 연기를 깨달음으로써 증득하게 되는 ‘해탈’, ‘열반’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중론송〉귀경게에는 연기에 관한 또 다른 수식어 ‘완전한 해방의 영역’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한역에서는 ‘길상(吉祥, iva)’이라 옮긴 이 말도, ‘연기’가 해탈을 뜻하기 때문에 수식어로 사용되었다고 보면 좋겠습니다.
이제 제가 〈중론송〉귀경게의 뒷부분을 “연기(緣起)는 세간의 무수한 속설로는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며, 그 자체 완전한 해방의 영역이다.”이라고 옮긴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났는가요?
6. 연기는 존재를 인정하나 본체는 부정한다 ▲ 위로
귀경게 첫 부분에 대한 해석에서 저는 연기를 ‘존재의 인과관계’라고 풀이했습니다. ‘연기’란 말 자체가 다른 종교나 철학에서는 볼 수 없는 불교만의 고유한 전문술어이고, 또 불교의 생명과도 같은 중요한 교설이기 때문에, ‘연기’에 관해서 수행자는 수행자대로 학자는 학자대로 비전문가는 비전문가대로 저마다 깊이 생각한 바가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나가르주나의 〈중론송〉은 그 전체가 부처님이 설하신 ‘연기’를 대승불교의 공사상으로 풀어냄으로써 한편으로는 대승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교 밖의 다른 학파와 불교 안의 아비다르마 불교를 대승불교 안으로 포섭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가르주나의 연기에 관한 성찰과 관련시켜, 연기에 관한 제 생각을 간략하게나마 정리해 놓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연기를 ‘존재의 인과관계’라 풀이했을 때, 제가 말하는 ‘존재’는 저 유명한 ‘다르마(dharma)’의 현대적 풀이입니다. 범어 ‘다르마’에는 현상, 존재, 진리, (부처님의) 교설 등 참으로 많은 의미가 들어 있어서 어느 한 가지로 단순화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철학적 영역에서는 주로 ‘현상적으로 있는 것’ 곧 ‘존재’를 뜻합니다. 한역에서는 일반적으로 ‘법(法)’으로 번역하지요.
〈아함경〉에서도 이미, 우리의 삶의 세계에서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 곧 ‘다르마’를 ‘5온’, ‘12처’, ‘18계’라는 범주로 분류 고찰하고 있고, 대승불교에서도 특히 유식사상에서는 ‘오위백법(5位 100法)’이란 범주 하에서, 존재의 특성 및 존재 상호간 인과관계를 면밀하게 살핍니다. ‘존재’라 하면 상당히 정적인 분위기를 지닌 말이지만 불교에서는 이 존재에 ‘연기’라는 빛을 쪼이기 때문에, 존재는 흐르고 흘러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으며 인과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서로 역동적으로 관계 맺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고 해서 세상의 부단한 변화를 말합니다. 그렇지만 존재와 존재가 끝임 없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인과관계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연기를 중시하는 사고에서는, 존재를 하나의 과정(process) 또는 사건(accident)으로 바라보면서, 동시에 인식까지 포함해서 존재 일반을 ‘인과관계내 존재’(이는 ‘緣生法’이란 말로 표현됩니다)로 바라봅니다.
서양철학의 현상-본질 구도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존재 저 너머에 또는 존재 저 안에 불변의 실체로서 도사리고 있는 존재론적 본질 또는 본체(本體)를 상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상사에서 본체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인도 같으면 창조주 브라흐만, 내 안에 유령처럼 도사리고 있는 아뜨만 등의 이름을 붙일 터이고, 서양 사상 같으면 제일원인, 유일신, 영혼, 절대정신 등으로 이름 붙일 것입니다.
중국 사상계에서도 한때는 ‘공(空)’을 본체로서의 ‘무(無)’로 이해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공사상에 따르면, 이렇게 본체를 전제로 삼는 견해는, 전에 설명했던 소위 ‘언어의 분절기능’에 얽매인 희론, 분별심의 산물일 뿐입니다. 관계성을 중시하는 연기적 사고에서 관계망에서 벗어난 또 하나의 초월적 본체를 인정한다는 것은 무언가 자기모순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같은 맥락에서 나가르주나는, 아비다르마 불교 시대 때 각 부파가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법체(法體: 존재의 자성 또는 존재의 본체)에 관해서 예리한 메스를 들이댑니다.
나가르주나의 용어법에 따르면, ‘자성’(自性, svabhva)도 자기 원인적 존재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본체와 매한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배후에 본체를 상정하는 사유 경향을 한 묶음으로 통틀어서 ‘본체론적 사고’라 명명해 볼 수 있을 것이고, 이와 같은 사유 경향을 고집하는 입장을 ‘본질주의자’로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공사상에서는 자성이 없는 다르마의 세계, 곧 본체가 비어있는 존재의 세계만을 이 세계의 전부로 제시합니다. 연기 또는 공사상과 ‘본질주의자’는 이러한 맥락에서 양립하기 어렵습니다.
자연과학이나 서양철학에서 쓰이는 ‘인과관계’와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연기에 관해서 ‘불교적’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여 ‘불교적 인과관계’로 표현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 양 항에 본체가 배당되는 일이 없고, 언제나 ‘인과관계로 얽힌 존재’가 배당되기 때문입니다.
7. 논서명 〈중론송〉에서 ‘중(中)’의 의미 ▲ 위로
나가르주나의 논적은 본질주의자이다
중도의 자리서 열반길로…대승불교의 공사상은 전형적으로 “x에 y가 없다”는 언어표현법을 씁니다. 숨어있는 문맥을 고려하면, 이 때 x는 어김없이 존재 또는 연생법(緣生法)을 가리키고, y는 본체 또는 자성(自性)을 가리킵니다. 간단히 말해서 존재는 인정하나 본체는 부정합니다. “책상이 공(空)하다”는 말은 ‘책상에 본체가 없다’는 뜻이지 ‘책상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책상이 있다”고 할 때, 그 말은 ‘책상이 단지 인연에 따른 현상으로서 있다’는 뜻이지, ‘책상이 본체를 지닌 것으로서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연기를 중시하는 공사상이 인연에 따라 생멸하는 존재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을 리 없습니다. ‘공(空)’을 과대 적용하여 현상적 존재마저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는 피해야 할 함정입니다. ‘있다’는 말을 과대 적용하여 존재에 본체가 깃들어 있다고 본다면 이도 역시 피해야 할 함정입니다. 전자는 엄연히 있는 존재마저도 없다고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변(無邊)’이라는 심연에 빠지고, 후자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본체를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변(有邊)’이라는 수렁에 빠집니다.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하니 존재의 수가 늘어나지요. 그래서 유변은 ‘증익변(增益邊)’이라고도 합니다. 엄연히 있는 존재를 없다고 하니 존재의 수가 줄어들지요. 그래서 무변은 ‘손감변(損減邊)’이라고도 부릅니다.
유변과 무변은 존재의 진상을 왜곡하기 때문에 불교에서 말하는 ‘여실지견(如實知見)’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유변과 무변의 두 가지 상반된 그릇된 견해를 떠난, 존재의 진상에 부합하는 견해를 ‘중도(中道)’라 합니다. 나가르주나의 공사상은 바로 이 ‘중도’라 언명한 자리를 굳게 지키며 열반성(涅槃城)으로 향해 묵중한 걸음을 옮깁니다. 나가르주나가 자신의 저서 이름을 〈중론송〉이라 했을 때, 왜 그 이름에 ‘가운데 중(中)’자 하나를 깊이 새겨 넣었는지, 이제 우리는 이해가 갑니다.
유변에 빠진 이들은 본체 없는 존재는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 무변에 빠진 이들은 본체가 없으면 존재도 성립할 수 없다고 합니다. 유변이나 무변은 둘 다 본체를 존재의 성립조건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존재와 본체의 뗄 수 없는 관계를 상정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합니다. 둘 다 결국은, 존재의 배후 또는 존재의 저 밑바닥에 본체 곧 존재론적 본질을 상정하는 ‘본질주의자’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공사상은 기본적으로 본질주의자의 견해와 같은 길을 걸어갈 수 없으며 본질주의자의 입장에서 나온 갖가지 다양한 모습을 띈 주장을 모두 ‘희론(戱論)’ 곧 ‘세간의 무수한 속설’로 간주합니다. 여기에서 〈중론송〉의 주된 논적(論敵)이 본질주의자임이 역력하게 들어납니다.
공사상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오해 가운데 하나는 허무주의(虛無主義)로 보는 해석일 것입니다. 곧 ‘공(空)’을 ‘텅 비어 아무 것도 없음’(虛無/全無)으로 파악하는 해석입니다. 본질주의자는 본체를 존재의 성립근거로 보기 때문에 본체를 부정하는 것은 곧바로 존재마저 부정하는 것으로 연결 지웁니다. 앞에서 보았던, 중도와 양립할 수 없는 무변이죠. 그렇다면 공사상을 허무주의로 보는 해석은 결국 무변에 빠진 본질주의자에게나 가능한 일임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본질주의자는 한 가지 매우 중요한 물음을 빠뜨리고 있군요. 본체를 존재의 성립근거라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의 타당성은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아무튼 본질주의자는 자신의 그릇된 세계관 때문에 공사상을 제멋대로 허무주의로 오해하고서는 “너는 우리 앞에 엄연하게 존재하는 세계를 통째로 부정하려 드느냐”고 따지고 들지만, 나가르주나가 볼 때 상황은 정반대로 허무주의의 함정에 빠져드는 것은 연기론자나 공성론자(空性論者, śūnyatāvādin)가 아니라 바로 본질주의자이다. 이같은 적반하장격의 상황을 〈중론송〉은 다음과 같이 해학적으로 묘사합니다.
“(본질주의자인) 너는 네 자신의 잘못을 우리에게 돌리고 있다. 말을 타고 있으면서 말을 잊고 있는 것과 같다. 만약 네가, 본체를 근거로 삼아 뭇 존재가 실재한다고 본다면, 그렇다면 너는 뭇 존재가 인연 없(이 생기)는 것으로 보고 있는 셈이다.”(24-15;24-16)
8. ‘유무(有無)’와 ‘공(空)’의 구별 ▲ 위로
앞에서 우리는 나가르주나의 공사상이 어떻게 본질주의자가 빠지기 마련인 유무의 양변을 비켜 가는가, 어떻게 중도를 일관성 있게 걸어가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공사상과 중도의 관계를 좀더 깊이 다루어보기 위해서,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인 ‘있다(有)’와 ‘없다(無)’, 이 두 가지 상반된 말과 ‘비어있다(空)’라는 말이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 알아볼까 합니다. 왜 이러한 철학적인 이야기를 다루어야 하는가?
여기에는 실로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 한 가지만 들면, 공(空)과 무(無)를 같은 것으로 보는 시각이 의외로 깊이 뿌리박혀 있어, 이 영향 때문에 공사상의 정체성이 손상되기 쉽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시각의 뿌리는 멀리는, 동아시아에서 공사상의 수용과정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위진 시대에 형성된 ‘현학(玄學)’입니다. 현학의 주요 주제는 ‘본말(本末)’, ‘유무(有無)’와 같은 현상계와 본체계의 관계였습니다.
공사상 입장에서 무엇보다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점은, 현학이 이 세상의 성립 기반을 ‘본(本)’, ‘무(無)’와 같은 본체에 두었다는 점입니다. 본체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현학은 본질주의자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공사상의 주요 논적은 본질주의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공사상의 입장에서는 현학의 ‘무’가 ‘공’으로 탈바꿈하지 않는 한 결코 어깨를 나란히 할 수는 없겠죠? 이러한 심각한 문제가 간헐적으로 제기되기는 하였습니다만, 제가 생각하기에, 동아시아 사회에서 유무(有無)와 공(空)의 관계를 명확하게 ‘해결한’ 사람은 구마라집과 그 제자 승조가 처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전회 연재를 본 분은 눈치 채셨겠지만, ‘있다’(有)는 말과 ‘없다’(無)는 말에는 제각기 두 가지 상이한 차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없다’(無)에는 ‘본체가 없음’(nisvabhva 無自性)과 ‘존재마저 없음(虛無/全無)’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으며, ‘있다’(有)에는 ‘존재가 인연에 따른 현상적 존재로서 있음’(緣生有)과 ‘본체가 있음’(sasvabhva 有自性)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구분해 보면, 같은 ‘유무’라 하더라도 본질주의자와 공사상가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곧 본체와 존재에 관해 정반대인 ‘유무’를 뜻하고 있음이 판연하게 드러납니다. 본질주의자의 ‘무(無)’는 존재마저 없다는 허무로 빠지고, ‘유(有)’는 존재에 본체가 있다는 유자성(有自性)으로 흐릅니다.
이에 반해 공사상의 ‘무(無)’는 존재에 본체가 없다는 무자성(無自性)을 가리키며, ‘유(有)’라 하면 존재가 인연에 따른 현상으로서 있다는 연생유(緣生有)를 가리킵니다.
이른바 ‘쌍차쌍조(雙遮雙照)’로 공사상의 핵심을 갈파하는 이도 있습니다. ‘유무를 부정하면서 동시에 유무를 살린다? 무언가 알쏭달쏭 신비한 의미가 깃든 것 같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가보다!’고 고개를 끄덕이곤 하지요. 원효가 말한 ‘불연지연(不然之然)’도 같은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 않은 것이 그렇다, 틀린 것이 옳다? 나가르주나의 공사상은 이렇게 모호한 신비주의적 연막술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이렇게 해석해보면 어떠하겠습니까. 본질주의자가 쓰는 ‘유무’를 틀렸다고 부정하면서 공사상가가 쓰는 ‘유무’를 옳다고 긍정한다고.
존재에 본체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논쟁거리로 등장할 때, 본질주의자의 입장에서 ‘있다’고 말하거나 아니면 공사상가의 입장에서 ‘없다’고 말하는 양자택일만이 있을 뿐이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는 어정쩡한 제3의 입장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적어도 본체의 ‘유무’에 관해서는 소위 ‘배중률(排中律)’의 법칙이 고수됩니다.
〈중론송〉에서도 여기저기서 ‘비유비무(非有非無)’에 해당하는 표현이 등장하지만, 이를 문맥을 무시하고 자구에만 매달려 해석해서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게 됩니다. 한역만 보는 이는 한문 번역문의 모호성에 기인한다고 변명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오히려 해석자의 지평이 모호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구마라집이 번역한 〈중론 청목소〉에서 다음과 같은 ‘유무’에 관한 명확한 언명을 볼 수 있습니다.
“유(有)와 무(無)는 상호 모순개념이다. 어떻게 한 존재에 ‘서로 모순된’ 두 가지 규정이 적용될 수 있겠는가?”
9. 연기와 존재 ▲ 위로
‘연기(緣起)’가 무엇입니까 묻자 부처님께서는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라고 답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라고 답하십니다. ‘이것’과 ‘저것’ 자리에 각각 원인과 결과를 대비시켜 보면 ‘연기’가 뜻하는 의미 내용이 알기 쉽게 드러납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여기서 말하는 원인과 결과는 연생법(緣生法) 곧 인연에 따라 생긴 존재입니다. 존재의 생성 소멸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기 마련이고 그 원인마저도 생성 소멸한다는 메시지가 들어있는 것이지요.
일견 간단해 보이는 이 메시지에 따르면, 우리의 존재 세계는 어떠한 필연적인 인과관계로 얽혀 있습니다. 단지 수행이 부족한 우리가 모르고 있을 뿐이지요. 부처님을 ‘일체지자(一切智者)’라고 부르는 것은 연기를 깨달은 부처님만이 이 모든 필연적 인과 관계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회남자〉에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사람의 머리는 왜 둥글며 발은 왜 평평한가?” 불교 논서에서도 이와 유사한 질문이 나오지요. “공작새 꼬리에 있는 반점은 어떻게 생긴 것인가?” 〈회남자〉에서는, 사람의 머리는 하늘을 닮아 둥글고 발은 땅을 닮아 평평하다고 답하지만, 부처님 같으면 그런 식의 우화적인 대답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모든 인과관계를 상세히 풀어내셨을 터이니 말입니다.
불교 논서에서는, 공작새 꼬리의 반점이 어떻게 생성되었는지 부처님만이 그 모든 필연적인 인과의 연쇄고리를 풀어낼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삶의 세계 또는 존재의 세계가 털끝만치도 우연론(偶然論)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필연성’이란 말이 나오니 조금 차가운 감이 드는가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업(業)의 인과응보에 관한 메시지를 새겨듣는다면, 불교의 한쪽 얼굴은 참으로 냉혹하리만치 차갑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이라 하더라도 업의 인과응보에서 비껴갈 수는 없다고 하니까요.
두 번째 메시지에 따르면, 존재의 세계에는 그 어떠한 상존하는 본체도 없습니다. 존재의 세계는 쉼 없이 생성 소멸하지만 이 생성 소멸의 과정을 초월해 홀로 실재하는, 그러한 상존하는 원인은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존재 세계의 성립기반으로 신이나 영혼과 같은 초월적 실재를 상정하는 종교적 또는 철학적 본체론도 배제됩니다. 존재의 세계는 그 어떤 고정적 일점(一點)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인과관계에 얽힌 채 생성 소멸의 흐름에 합류되어 쉼 없이 흘러갑니다. 이렇게 보면 존재는 하나의 ‘흐름’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이러한 존재의 모습을 불교에서는 ‘상속(相續)’이라고 합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존재의 모습. 상존한다고 할 수 없으니 ‘불상(不常)’이고, 그렇다고 해서 단절된다고도 할 수 없으니 ‘부단(不斷)’입니다. 상존도 단절도 아닌 시계(視界)에서 존재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이제 우리는 〈중론송〉귀경게와 관련시켜 한 가지 물음을 던져야 합니다. “존재가 생성 소멸하는 상속(相續)이라면, 왜 〈중론송〉귀경게에서는, ‘존재’에 ‘생기는 것도 아니요(不生)’, ‘소멸하는 것도 아니요(不滅)’ 등 수식어를 덧씌우는가?”
〈중론송〉 범어 원전을 보면 ‘존재’ 자리에 ‘연기’가 들어갑니다. ‘불생’이니 ‘불멸’이니 하는 수식어가 원전에서는 ‘연기’를 수식하는 말로 돼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원전의 ‘연기’ 자리에 ‘존재’ 곧 인연에 따라 생성 소멸하는 ‘연생법(緣生法)’을 대체시키겠습니다. 구마라집의 한역도 ‘연기’ 자리에 ‘인연(因緣)’을 놓아 역시 저와 같이 ‘존재’로 풀고 있으니 저 혼자만의 독단적 해석은 아닙니다.
〈반야심경〉의 한 구절도 ‘불생’, ‘불멸’을 ‘존재’에 연관시키고 있으니 좋은 참고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뭇 존재, 곧 본체가 없는 존재는 생기는 것도 아니요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諸法空相 不生不滅) 제 풀이가 〈중론송〉이 본질주의자를 주된 논적으로 삼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서, ‘불생’ 등을 ‘연기’보다는 ‘연생법’ 곧 ‘존재’에 관련시킨 것이라고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10. 범부와 성자의 구별 ▲ 위로
구마라집이 번역한〈중론 청목소〉에서는,〈중론송〉귀경게가 “제일의(第一義) 곧 궁극적 진리를 약설(略說)한 것”이라고 합니다. 지혜가 제일가는 사람(第一) 곧 최고가는 지혜를 지닌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경계(義)라는 뜻이 들어있으므로, ‘궁극적 진리’는 당연히 일반 범부가 알 수 있는 경계는 아니겠지요. 곧 ‘궁극적 진리’라는 말속에는 벌써 범부와 성자(聖者)의 구별이 들어 있습니다.
왜 이러한 구별이 있는지 의아해 하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구별이 불교를 무언가 신비적인 것으로, 범부인 우리로서는 인연이 먼, 경원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닌지 비판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 모두가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생과 부처가 하나요, 열반과 번뇌가 하나요, 등등 ‘무차별적인 하나’를 강조하는 대승불교의 표어(標語)만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라온 우리에게는 낮선 말일 수밖에 없지요.
그렇지만 복잡성의 세계를 지나지 않은 단순성의 세계는 그 공허한 단순성, 내용 없는 형식 때문에 정치적 캐치프레이즈에 다름없습니다. 무차별적인 ‘하나’로 그쳐서는 안 된다, 차별적인 수많은 ‘구별’을 통과해야 비로소 내용이 풍부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고(苦), 고의 원인, 고의 소멸,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진리를 말합니다. 이를 각각 ‘고제’, ‘집제’, ‘멸제’, ‘도제’라 하여 통틀어 ‘사성제(四聖諦)’로 부르지요. 그런데 ‘사성제’에는 ‘성스러울 성(聖)’ 자가 들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사성제’를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로 풀이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에 부딪힙니다. 어떻게 고통이나 고통의 원인에 관한 진리가 ‘성스러운’ 것이 될 수 있는가? 더구나 즐거움 등의 경험도 ‘고’라 하여 이를 ‘고제’ 또는 ‘고성제’라고 부르는 걸 보면 이러한 의문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해석을 달리해 ‘성스러울 성(聖)’자를 ‘성자(聖者) 성(聖)’으로 이해하면, 쉽게 그 의문이 풀립니다. ‘사성제’를 ‘성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네 가지 진리’로 풀이할 수 있단 말이지요. 이런 비유를 들어보지요. 머리카락이 손바닥에 놓여있을 때 우리는 고통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똑같은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가면 우리는 엄청난 고통을 느끼겠죠. 머리카락은 무상한 현상입니다. 손은 범부이고, 눈은 성자입니다. 성자만이 무상한 현상을 보고 고통을 느끼지, 범부는 손바닥과 같아서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비유입니다. 이걸 보면 ‘사성제’란 말도 범부와 성자의 구별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범부와 성자의 구별 때문에, 불교는 종교인지 철학인지 일률적으로 대답하기 어려워집니다. 성자가 겪은 체험 곧 선정(禪定) 체험이 불교의 교리 체계 곳곳에, 불교 텍스트 구석구석마다 빠짐없이 스며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철학이 경험 세계의 경계선을 늘리고 넓혀서 선정체험까지 그 경계선 안에 담아둘 수 있다면, 생과 생의 경계를 뛰어넘는 문제, 예를 들어 ‘윤회’나 ‘중유(中有)’의 문제까지 다룰 수 있다면, 불교는 ‘철학’이라 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불교에서 최고가는 지혜를 지닌 이는 연기를 깨달은 이입니다. 대승불교적인 표현을 빌리면 공성을 깨달은 이가 됩니다. 그런 이의 지혜는 분별심이 끼어 들 여지가 없기 때문에, 아니 이미 분별심이 남김없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무분별지(無分別智)’라고 불립니다.
‘아니다, 아니다’로 부정되는, 생멸(生滅), 단상(斷常), 일이(一異), 내출(來出) 등은 분별심에서 나온, 존재에 관한 갖가지 속설들을 8가지 범주로 정리한 것일 뿐입니다. ‘분별심’이라 하면, 언어의 분절 기능에 얽매인 본질주의자가 연상되지요? 그렇다면 ‘불생(不生)’ 등 8가지 부정적 표현방식은 모두 본질주의자의 존재에 관한 갖가지 속설을 부정하는 것임을 알 수 있겠지요?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생멸’ 등의 말은 본질주의자의 분별심에서 나온 말입니다.
반면에 ‘불생, 불멸’등의 말은 무분별심에서 나온 말입니다. 언어라 해도, 언어의 분절 기능에 얽매인 사람의 말과 언어의 분절 기능에서 벗어난 사람의 말, 이 두 차원이 있는 것입니다. 그릇된 언어관에 현혹되어 언어를 깡그리 부정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구정물을 버리려다 옥동자마저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죠!
11. ‘불상부단(不常不斷)’에 관해서 ▲ 위로
〈아함경〉에서,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는 질문에 부처님은 있다 없다 가타부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부처님이 형이상학적 문제에 관해서 침묵을 지킨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 따지는 것 자체가 생사윤회의 고통을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형이상학적 문제에 빠지지 말고 실질적인 고통의 해결 방안을 모색하라는 뜻에서 ‘침묵’을 보이신 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그럴듯한 해설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보기에 사정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첫째,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영혼이라는 본체에 관련된 질문이기 때문에 본체를 부정하는 연기론 또는 무아론의 입장에서는 결코 모호하게 넘어갈 수 없는 중대한 질문입니다.
둘째, 부처님은 ‘일체지자(一切智者)’라 불릴 정도이니 당연히 어떤 질문이든지 대답할 수 있는 분인데 왜 굳이 말씀을 안 하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가타부타 말하지 않는 것을 ‘불기(不記)’라고 하는데 이는 ‘침묵’과 같을까요? 모르기 때문에 침묵에 잠길 수 있겠고, ‘알면서 침묵하는’ 경우도 있겠습니다. 부처님의 ‘불기(不記)’는 ‘알면서 침묵’에 해당하겠지요? 그렇다면 답을 알면서 왜 말씀하시지 않고 침묵을 지켰을까요?
부처님의 설법을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 합니다. 상대편의 근기에 따라 말씀을 한다는 뜻이지요. ‘근기’라 하면 지적 능력, 종교적 능력도 포함되겠지만 상대편 내면에 깊게 뿌리박힌 세계관도 중요한 요소로 등장합니다.
만약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라고 물어보는 상대편이 본체론적 세계관을 지닌 본질주의자라면 과연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있다’고 대답하면 상대편은 틀림없이 영혼이라는 본체가 실재한다고 믿어버릴 겁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제법무아’ 사상과 상충되지요? ‘없다’고 대답하면 이 본질주의자는 ‘아하! 예전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는 말이구나!’라고 생각하고는 낙담한 나머지 허무주의에 빠질 겁니다.
‘신은 죽었다’고 갈파했던 니체가 허무주의의 대변자가 되었던 연유도 여기에 있을는지 모릅니다. 본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구마라집의 제자 승조는〈조론〉첫머리에서 위진 현학에서 쓰던 용어 ‘본무(本無)’를 공사상을 풀이하는데 원용합니다. 그렇지만 내용은 ‘무를 본체로 삼는다(以無爲本)’는 원래의 본체론적 뜻을 환골탈태시켜, 본체가 ‘본래 없다’로 됩니다.
상대편이 본질주의자일 때, 그것도 어떤 광신도처럼 본체론적 세계관에 푹 빠져 옴짝달싹 못하는 때에, 영혼이 ‘있다’고 대답하면 상대편은 본체가 상존한다고 상견(常見)에 빠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영혼이 ‘없다’고 대답하면 본체가 예전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고 ‘단견(斷見)’에 빠질 것입니다.
〈아함경〉에서 부처님께서 ‘불기(不記)’하신 상대편 대화자가 지독한 본질주의자임을 알 수 있겠죠? 부처님께서는 상대편이 본체론의 속박에서 벗겨나도록 영혼이 있다든지 없다든지 가타부타 말씀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서 침묵하셨다’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요? 영혼이란 본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은 당연하니 말입니다.
〈밀린다왕문경〉에서도 이와 비슷한 대화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밀린다왕은 나가세나 존자에게 영혼이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 둘 중에 하나를 명확하게 말해줄 것을 요구합니다. 나가세나 존자는 이 물음에 대해서 ‘불기(不記)’하고, 역으로 다시 밀린다왕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궁궐 안에 있는 망고는 그 맛이 시던가요 아니면 달던가요?” 궁궐 안에는 망고나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밀린다왕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있지도 않은 망고에 대해서 그 맛이 신지 단지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결국 밀린다왕도 나가세나 존자의 물음에 ‘불기(不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이렇게 보면 ‘상존(常)’이니 ‘단절(斷)’이니 하는 것은 본질주의자가 본체에 대해 지니는 견해 가운데 하나입니다. 연기나 공사상에서 영혼이란 본체는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것에 대해서 상존한다느니 단절되었다느니 할 수는 없겠죠? 그래서〈중론송〉귀경게에서는 ‘아닐 불(不)’자 하나를 앞에 붙여 본질주의자를 향해서 ‘불상(不常)’이라고 ‘부단(不斷)’이라고 하는 겁니다.
12. ‘불생불멸(不生不滅)’에 관하여 ▲ 위로
〈중론송〉귀경게에서 무슨 뜻으로 ‘존재’는 ‘생기는 것도 아니요(不生)’, ‘소멸하는 것도 아니요(不滅)’라고 할까요? 이 물음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으로 구체화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존재의 세계는 무상하여 생성 소멸하기 마련인데 이를 ‘생기는 것도 아니고’ ‘소멸하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면 ‘제행무상(諸行無常: 뭇 존재는 영원하지 않다)’에 어긋나지 않는가? 둘째, 게다가 ‘생기는 게 아니다(不生)’란 말은 인도철학에서 ‘생기지 않은 아뜨만’, ‘생기지 않은 브라흐만’과 같이, 본체에 관한 수식어로도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불생’이니 ‘불멸’은 본체론적 세계관에서 나온 말이 아닌가?
어찌 보면 당연한 물음이지요? 그렇지만 이러한 질문을 통해서〈중론송〉귀경게에 등장하는 ‘불생(不生)’, ‘불멸(不滅)’의 의미가 좀더 명확해집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여기서 부정하고 있는 ‘생’이니 ‘멸’은, 본질주의자가 생각하는 ‘생성’ ‘소멸’ 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중론송〉귀경게는 본질주의자가 상정하고 있는 생성과 소멸을 부정할 뿐. 존재 세계의 생성 소멸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본질주의자는 대체 어떠한 ‘생’을 말하기에 나가르주나는 이를 부정하는 걸까요?
존재의 ‘생’이란 무엇입니까? 존재가 예전에는 없다가 지금 있는 것입니다. 존재의 ‘멸’이란 무엇입니까? 있다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생이란 뜬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멸이란 뜬 구름이 흩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존재 세계를 뜬 구름에 비유하고 있으니 존재 세계를 바라보는 허허로운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뜬 구름’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인연에 따라 생기고 소멸하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라, 공사상에 따르면 본체를 전제로 삼을 필요 없이, 생성 소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질주의자는 존재의 생성 소멸을 어떻게 이해할까요? 본질주의자는 현상의 배후에 상존하는 존재론적 본질, 존재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본체를 존재 세계의 성립기반으로 생각합니다. 이 때문에 어찌 보면 자연스럽게, 존재가 생성 소멸할 때 본체는 존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주요한 관심거리로 떠오르기 마련이고, 본체가 생성의 직접적 원인으로서 자리 잡게 됩니다. 곧 자기동일성을 지닌 상존하는 본체에서 존재가 생긴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의 세계에서 존재 생성의 으뜸가는 원인을 탐구하는 학문을 ‘제일철학’이라 불렀습니다. 이는 나중에 ‘형이상학’으로 불리게 됩니다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형이상학에서 제일원인으로서 신(神)을 상정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신(神)은 뭇 현상의 첫째가는 존재 원인입니다. 신은,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일체의 존재를 움직이는 자, 곧 ‘부동(不動)의 원동자(原動者)’라는 묘한 말로 표현됩니다. 어떻습니까? 부동의 원동자! 말은 그럴싸하지만 어딘지 본체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이렇게 보면 대사상가로 손꼽히는 아리스토텔레스도 한 편으로는 본체론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군요. 곧 공사상가와 대립되는 본질주의자의 측면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본질주의자와는 달리 공사상가는 본체를 부정합니다. 연기를 ‘존재의 인과관계’라 풀었을 때, 원인과 결과 양 항에는 존재 곧 연생법이 놓인다는 점을 기억해두시기 바랍니다. 원인 쪽에 본체가 오면 그 구도는 공사상가가 구상하는 구도와 ‘단순한 차이’를 넘어 ‘대립’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존재의 생성을 본체로부터 유출(流出)로 보는 생각, 또는 존재의 생성을 어떠한 본체가 있어 제어하면서 이끌어간다는 생각, 이 모두 본질주의자의 세계관입니다. 가령 인도의 상키야 철학 같으면 전자, 헤겔 철학 같으면 후자의 방향을 취하고 있습니다.
공사상은 이와 같은 생성의 모습, 본질주의자의 생성에 관한 생각을 부정합니다. 생성을 부정하니 당연히 소멸도 부정하겠죠? 그래서 존재는 ‘생기는 것도 아니요(不生)’, ‘소멸하는 것도 아니(不滅)’라고, 나가르주나는 말하고 있습니다.
13. 부처님오신날 단상 ▲ 위로
서양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데카르트는 철학사의 무대를 장식하는 유명한 한 마디를 남겼습니다.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에게, 생각하는 나는 엄연한 실체로서 존재합니다. 곧 변함 없이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본체입니다. 순서에 따라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정신과 육체는 같은가 다른가? 당연히 이 질문 속에도 ‘정신’이 생각하는 실체로서 전제되어 있고, 정신과 육체는 별개의 실체로 정립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에 부딪칩니다. 데카르트가 생각해낸 것과 같은 '생각하는 나'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그것이 본체로서 존재한다면 불교의 무아론, 또는 대승불교의 공사상과 양립가능한가?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나’와 인도 베단따 철학자 샹까라(akara, 8세기)의 ‘아뜨만’이 기묘하게도 마치 쌍둥이같이 닮은 것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일입니다. 함께 비교해보지요.
샹까라의 저서 〈우빠데샤 사하스리〉에는 다음과 같은 문답이 나옵니다.
한 제자에게 스승은 이렇게 물어봅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제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저는 육체와는 별개의 것입니다. 육체는 태어났다가는 죽으며, 새가 먹어치우거나 흙으로 돌아가며, 칼이나 불에 상하고 병에 걸리기 쉽습니다. 저는 제가 저지른 선악의 업 때문에 새가 집으로 들어오듯이 이 육체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육체가 스러지면 또 다시 선악의 업으로 인해 다른 육체 안으로 들어가겠지요. 마치 새가, 전에 살던 집이 부서지면 다른 집으로 옮겨가듯이. 이렇게 저는 시작도 끝도 없는 윤회의 와중에 있습니다.
제 자신의 업 때문에 신·동물·인간·아귀 상태를 전전하며 한 번 얻은 육체를 차례로 버리면서 되풀이해서 새로운 육체를 획득했습니다. 제 자신의 업 때문에 물레방아같이 그칠 새 없는 생사의 바퀴에 꿰어 돌면서 금생의 육체를 획득하고 나서 저는 윤회의 바퀴를 전전하는 데 지쳐버렸습니다. 윤회의 바퀴를 전전하는 일을 그치기 위해서 저는 당신께 입문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영원하며 육체와는 별개의 것입니다. 사람들이 걸치는 옷과 같이 육체는 왔다 갔다 합니다.”
‘정신’이니 ‘아뜨만’이니 표현이야 다르지만 영혼과 같은 본체를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데카르트와 샹까라는 친형제 같지 않습니까? 다시 한번 샹까라의 말을 들어볼까요? 샹까라는 〈브르하드아라니야까 우빠니샤드〉의 한 구절을 원용하여 ‘아뜨만’에 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남이 그(의 모습)을 볼 수는 없으나 그 자신은 보고 있는 자이며, 마찬가지로 남이 (그의 소리를) 들을 수는 없으나 그 자신은 듣고 있는 자이며, 남이 (그에 관해서) 생각할 수는 없으나 그 자신은 ‘생각하고 있는 자’이며, 남이 (그를) 식별해낼 수는 없으나 그 자신은 식별하고 있는 자입니다.”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나’가 여기에서도 얼굴을 내밀고 있군요. 〈아함경〉에도 유사한 문답이 나옵니다. “영혼과 육체는 같습니까 다릅니까?” 부처님은 이 질문에 대해서 ‘불기(不記)’, 같다 다르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은 것은 질문을 한 상대편이 지독한 본질주의자였기 때문입니다. 곧 존재하지도 않는 영혼을 놓고 그것이 육체와 같다 다르다 어느 쪽으로도 말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어찌 대답하든 상대편의 본체론적 세계관을 바꿀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택한 방식이 ‘불기(不記)’였던 것이지요.
데카르트나 샹까라의 대답과 사뭇 다르지요? 현상적 존재에 본체가 없음. 이것이 공사상에서 바라본 존재 세계의 실상이고, 바로 이 점 때문에 본질주의자와 공사상가는 서로 다른 길을 갑니다. 공사상의 입장에서 보면, 데카르트나 샹까라는 본질주의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겉모습은 다르지만 알맹이는 여전히 데카르트주의, 샹까라주의인 갖가지 사상, 종교가 세상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 전야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곰씹어보는 까닭입니다.
14. ‘不一不異’, ‘不來不出’에 관하여 ▲ 위로
씨앗에서 싹이 나고 싹이 자라서 줄기가 되며 다시 줄기에서 열매가 생겨 씨앗을 맺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스런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존재의 성립기반으로 본체를 상정하는 본질주의자는 이러한 상식적인 세계상에 대해서 삐딱한 시선을 던집니다. 곧 ‘씨앗’하면 씨앗의 본체, ‘싹’하면 싹의 본체를 결부시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씨앗에서 싹이 생긴다"고 할 때, 본질주의자는 씨앗의 본체와 싹의 본체는 동일한 것인가(一) 서로 별개의 것인가(異) 하는, 겉으로는 상당히 고상해 보이는 ‘사이비 물음’을 제기합니다. 왜 ‘사이비 물음’이냐 하면, 존재하지도 않는 본체를 놓고 같으니 다르니 따지는 것은 애초에 문제로 성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신을 인정하는 본질주의자는 씨앗이니 싹이니 이 모든 만물은 만물의 본체인 ‘신에게서 나와(來) 신으로 돌아간다(出)’고 말합니다. 또 만물의 본체로 무(無)를 인정하는 본질주의자는 만물이 ‘무에서 나와 무로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철학의 종언, 형이상학의 종언을 갈파하는 철학자들은, 특히 비트겐슈타인 같은 ‘비둘기의 발처럼 조용히 다가온 혁명가’는, 철학사에 등장하는 위대한 천재들이 대개 이러한 ‘사이비 물음’으로 수많은 시간을 허비했다고 폭로합니다. 나가르주나가 〈중론송〉 귀경게에서 ‘일이(一異)’, ‘내출(來出)’을 부정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그 타겟은 본질주의자입니다.
‘내출(來出)’ 곧 오고 감이 화제가 되었으니 승조의 시 한 수가 떠오릅니다. 승조의 〈조론〉가운데 〈물불천론〉이라는 짧은 글이 있습니다. ‘물불천(物不遷)’은 ‘사물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게 사물인데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니 모순적인 문장이죠? 승조가 읊은 시 한 수는 갈수록 사람을 당혹하게 합니다.
“돌개바람은 산악을 쓰러뜨리나 항상 고요하며, 강하는 다투어 흐르나 흘러가지 않는다. 먼지는 흩날리나 움직이지 않으며, 일월은 하늘을 지나나 돌지 않는다.”(旋嵐偃嶽而常靜 江河競注而不流 野馬飄鼓而不動 日月歷天而不周.)
중국의 대유학자 주희는 〈주자어류〉(126권)에서 이 시를 인용하고는, 승조의 공사상이 장자의 설을 도습(盜襲)한 ‘환망적멸지론(幻妄寂滅之論)’이라고 비아냥거립니다. 겉으로 보면 주희의 말이 그럴 듯 하지요? 승조가 왜 이렇게 요상한 말을 하는지 그 속내를 드러내 보이지 못한다면 주희의 비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중론송〉에서 나가르주나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미 가버린 것이 어디에 가는 일은 없다. 아직 가지 않은 것도 어디에 가는 일은 결코 없다. 이미 가버린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 지금 가고 있는 것도 어디에 가는 일은 없다.”(2-1)
이 게송의 취지는, ‘가는 자’라는 본체를 전제로 한 행위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곧 “가는 자 가지 않는다"고 말할 때, ‘가는 자’는 본질주의자가 몽매에 떨쳐버리지 못하는 본체로서의 행위자이고, ‘간다’는 행위는 그러한 본체의 행위입니다. 공사상가로서는 당연히 이 양자를 부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게송의 취지를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승조의 알쏭달쏭한 시를 해명할 수 있는 열쇠를 손에 쥔 게 됩니다.
승조의 시에 등장하는 돌개바람, 강하, 먼지, 일월, 이 모든 존재는 공사상의 입장에서 보면 본체가 없는 현상적 존재입니다. 따라서 이렇다 할 ‘본체’의 작용은 없습니다. 현상을 현상으로만 볼 때 돌개바람은 있는 그대로 산악을 송두리째 날려버릴 만큼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상의 배후에 그 어떤 본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본질주의자는 자꾸 현상의 힘을 본체와 결부시켜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질주의자가 상정하는 본체 및 본체의 작용을 부정하면서 내놓은 표현이 ‘돌개바람은 항상 고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승조의 시는 위진 현학적인 ‘무(無)의 본체론’을 교정함으로써 존재를 있는 그대로 존재로만 보라는 주문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불교에 대한 주희의 무지를 이렇게 수정해야 할 것입니다. 곧 승조는 〈장자〉의 설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장자〉를 공사상의 입장에 따라 재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15. 나가르주나는 왜 〈중론송〉을 지었는가? ▲ 위로
이제까지 〈중론송〉귀경게에 관해서 꽤 긴 해설을 했습니다. 이 귀경게를 통해서 나가르주나가 불교의 핵심 교설 곧 연기(緣起)에 대한 이해를 집약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해설로, 초기불교에서 대승불교로 연면히 이어지는 ‘한 맛(一味)’을 느끼셨으면, 제 의도는 충족된 셈입니다.
귀경게에서도 또렷이 드러나듯이 〈중론송〉의 주제는 ‘연기’입니다. 나가르주나가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첫 번째로 손꼽았던 게 바로 ‘연기’였던 것입니다. 저는 ‘연기’를 ‘존재의 인과관계’로 풀어 귀경게를 해설했고, 나가르주나의 타깃을 본질주의자로 규정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중론송〉본문에 대한 해설로 넘어갈까 합니다. 그렇지만 그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군요.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나가르주나는 〈중론송〉을 저술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중론송〉은, 경전과는 달리, 치밀한 체계와 논리를 중시하는 철학적 논서입니다. 와수반두가 〈석궤론〉에서 말하고 있듯이, 논서는 적어도 두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비로소 ‘논서’라 부를 수 있습니다. 첫째, 배우는 이의 번뇌를 제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배우는 이를 삼악도(三惡道: 지옥, 아귀, 축생) 및 윤회 생존에서 구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철학서’와는 그 용도가 판이하지요? 논리학마저도 해탈에 이르기 위한 길로 수용하는 인도 전통에서는, 불교의 철학적 논서가 열반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일 수밖에 없습니다.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할 때 열반으로 향하는 길이 열린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러한 논서의 쓰임새에 비추어볼 때, 우리는 〈중론송〉의 저술 의도도 간략하게나마 〈중론송〉 귀경게에 들어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본질주의자가 제시하는 ‘세간의 무수한 속설’을 잔가지 치듯 제거하여, 배우는 이로 하여금 ‘완전한 해방의 영역’인 열반으로 안내하기 위하여 〈중론송〉을 썼다고 말입니다.
한편 구마라집이 번역한 〈청목소〉는 〈중론송〉의 저술 목적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이 시바神에게서 생겼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시간에서 생겼다고 하고, … 어떤 사람은 자기원인적 존재(自然)에서 생겼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원자(微塵)로부터 생겼다고 한다. 이러한 잘못 때문에, … 갖가지 사견(邪見)에 빠져, 갖가지 방식으로 ‘나’나 ‘내 것’을 말하며, 진리를 알지 못한다.
부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러한 갖가지 사견을 끊고 진리를 알게 하기 위하여, 먼저 성문승(聲聞乘)을 대상으로 한 법문에서 십이인연(十二因緣)을 설하셨으며, 이미 십이인연을 익히고 행하여 큰마음(大心)(=보살심)을 지녔으며 깊은 진리를 받아들일 만한 바탕이 형성된 사람을 위하여, 보살을 대상으로 한 대승 법문(大乘法)을 통해 존재의 실상에 관해서, “뭇 존재는 생기는 것이 아니며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 동일한 것이 아니며 별개의 것도 아니다(一切法, 不生不滅, 不一不異)” 등등 [뭇 존재는] 끝없이 공(空)하여 [본체는] 그 어떤 것도 없다(畢竟空無所有)고 설하셨다. …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오백 년이 지난 상법(像法)시대에 사람들의 인식능력은 둔해지고 뭇 존재에 깊이 집착한 나머지, 십이인연(十二因緣), 오음(五陰=五蘊), 십이입(十二入=十二處), 십팔계(十八界) 등에 관한 확정적 정의만을 구하고, 부처님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단지 문자에만 집착하여, 대승 법문 가운데 ‘끝없이 공하다’는 설법을 들어도 왜 [뭇 존재가] 공(空)한지를 알지 못하고 [다음과 같은] 의심을 품었다.
곧 만약 모든 것이 끝없이 공하다고 한다면 죄복(罪福) 및 그 과보에 관해서 어떻게 구별한단 말인가? 이같이 [죄복 및 그 과보의 구별이 없]다면 일상적 진리(世諦)와 궁극적 진리(第一義諦)의 구별도 없어지지 않겠는가? 이같이 ‘공’의 자구적 정의만을 취하여 탐착을 일으켜 [뭇 존재가] 끝없이 공하다는 사태(畢竟空)에 대해 갖가지 오류를 일으켰다. 용수보살(龍樹菩薩=나가르주나)이 이러한 오류를 없애기위하여 이 〈중론(송)〉을 지었다.”
〈청목소〉를 보면, 공사상에 대한 갖가지 오해를 시정하기 위해서 〈중론송〉을 쓴 게 됩니다. 공을 허무로 보는 본질주의자의 오해에 관해서는 이미 앞에서 설명했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하지요. 여기서는 공사상과 윤리의 문제를 짚어 보겠습니다.
16. 공사상에 뿌리박은 윤리 ▲ 위로
대승불교의 공사상은 선악(善惡)의 상대적 관점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소위 ‘윤리’ 문제와 관계없다고 보는 이가 있습니다. 심하게는 공사상을 받아들이면 윤리를 해치게 된다고까지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모든 게 공하다”고 한다면, 소박한 윤리 의식마저 성립할 여지가 없다고 비판하는 것이지요. 그럴 듯 하지요? 이러한 비판은 실상 공사상을 처음 접할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던 물음 가운데 하나입니다.
〈중론송〉에서도, 공사상이 윤리를 해치는 게 아니냐는 반론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공하다’고 한다면, 당신은 (존재의) 생성도 소멸도, (더 나아가) 네 가지 성자의 진리(四聖諦)도 없다는 (허무론적인) 오류에 빠지게 될 것이다.”(24-1)
‘사성제’란 말이 쓰인 것을 보면, 여기서 반론자는 아비다르마 불교의 논사(論師)입니다. 아비다르마 불교에서는 존재의 구별원리로 ‘자성(自性)’을 내세웁니다. 이 ‘자성’을 나가르주나가 부정했던 존재론적 본질로 볼 것이냐, 아니면 인식론적 본질로 볼 것이냐, 이 자체 불교 사상사에서는 큰 논란거리입니다.
가령 유식사상에서는 ‘자성’을 인식론적 본질로 받아들여 ‘자상(自相)’과 거의 같은 뜻으로 씁니다. 그렇지만 아비다르마 불교에서는 거의 존재론적 본질 곧 본체의 뜻으로 쓰인 것 같습니다. 아비다르마 불교 시대 때 유력한 부파였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는, 교학의 근간을 이루는 주요 명제로 ‘법체항유(法體恒有: 존재의 자성 곧 본체는 상존한다)’를 내세웠다고 평가할 정도이니까요.
이러한 평가에 따른다면, 생멸· 선악 등으로 규정되는 뭇 존재는 서로 구별되는 고유한 존재론적 본질 곧 ‘자성’을 지니고 있고, 이 ‘자성’으로 인해서 ‘이 존재는 고다’, ‘이 존재는 고의 원인이다’ 등 ‘사성제’에 관한 구별이 성립한다고 보는 게 아비다르마 불교입니다.
공사상은 이러한 존재론적 본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강한 부정입니다. 따라서 공사상의 논리에 좇으면 결국 ‘사성제’와 같은 불교 윤리의 근간이 뿌리 채 뽑혀 나가게 된다는 것이 아비다르마 논사가 우려하는 사항입니다.
존재에서 존재론적 본질을 제거한다고 해서 윤리 체계가 부정되는가? 나가르주나의 생각은 전혀 다릅니다. 나가르주나는 존재에 대한 관점의 전회(轉回)를 요구합니다. 180도 거꾸로 생각해서, 존재에는 존재론적 본질이 본래 없기 때문에, 존재 간의 구별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공사상이 윤리 체계의 토대로 자리 잡는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중론송〉의 한 구절을 인용해보지요.
“공성(空性)을 인정하는 자에게는 뭇 (존재)가 성립한다. 공(성)을 부정하는 자에게는 뭇 (존재)가 성립하지 않는다.”(24-14)
고통(苦)을 예로 들어볼 수 있겠습니다. 고통은 인연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본질주의자의 생각처럼 고통에 존재론적 본질이 있다면, 고통은 인연에 따라 생긴 현상이 아니기 때문에 어찌해도 그 고통을 없앨 수 없습니다. 그러한 고통은 관념으로만 있을 수 있을 뿐 실제로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고통은 공성에서만 성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중론송〉의 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났는가요?
고통이 현실적으로 성립해야 차례대로 ‘사성제’가 성립합니다. 사성제가 성립해야 고통을 ‘알고’ 고통의 원인을 ‘끊으며’, 고통이 없어진 해탈을 ‘증득하고’ 고통의 원인을 끊기 위해 ‘수행하는’ 것 등 윤리적 ‘선(善)’이 성립합니다. 이렇게 선(善)을 실천하는 사람이 성립할 때 승가 공동체가 성립합니다. 이런 식으로 존재 세계 및 윤리 체계는 공성 안에서나 가능하기 때문에, 나가르주나는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인연에 말미암지 않고는 그 어떤 존재도 생겨날 수 없다. 바로 그 때문에 공(空)하지 않고서는 (곧 존재론적 본질을 지니고서는) 그 어떤 존재도 있을 수 없다.”(24-19)
나가르주나의 공사상이 부정하고 있는 것은 본질주의자가 제시하는 것과 같은 본체이지, 존재나 윤리적 덕목 그 자체는 결코 아니라는 것, 이 점을 다시 한번 새기고, 이제 그만 말머리를 본문 쪽으로 돌리겠습니다.
17. 마음의 네 가지 원인〈끝〉 ▲ 위로
〈중론송〉의 첫 번째 장은〈원인에 대한 고찰〉입니다. 구마라집의 한역에 따르면〈관인연품(觀因緣品)〉이지만, 범어 원문에서는〈연(緣)에 대한 고찰〉로 되어 있습니다. ‘연(緣)’이란 원인 일반을 통칭하는 표현으로, 아비다르마 불교에서는 이를 네 가지 유형으로, 곧 인연(因緣), 소연연(所緣緣), 등무간연(等無間緣), 증상연(增上緣)으로 구별합니다. 이 말들은 현장 이후 널리 쓰인 역어입니다만, 구마라집 같으면 이를 각각 인연(因緣), 연연(緣緣), 차제연(次第緣), 증상연(增上緣)으로 번역합니다. 구마라집이 장 제목을〈관인연품〉이라 붙인 것은, 네 가지 유형의 원인을 대표하는 것으로 ‘인연’을 보았기 때문이지 이 장이 인연만을 다루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따라서 첫 번째 장을〈원인 일반에 대한 고찰〉로 보면 무난하리라 생각합니다. 원인은 결과에 상대하는 말이지요? 그리고 제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여기서 우리가 ‘원인’이니 ‘결과’니 하는 것은 ‘원인이나 결과에 해당하는 연생법(緣生法)’ 곧 인과관계로 얽혀 있는 존재를 뜻합니다. 그러니〈중론송〉첫 번째 장은, 어떠한 존재가 생길 때 그 원인에 해당하는 존재는 어떤 것인가 하는 물음을 논의 주제로 삼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네 가지 유형의 원인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금 번거로우시겠지만 사전 지식으로서 이에 관해서 간단하게 파악해두죠. 우리 ‘마음’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불교에서 ‘마음’이라 하면, 심층영역의 마음도 있겠고 표층영역의 마음도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흔히 시각 청각 등 감각을 마음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불교에서는 다섯 가지 감각과 의식을 모두 표층영역에 속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또 이 마음을 인과 관계에 얽혀 있는 ‘존재’로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이 ‘마음’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생길까요?
아비다르마 불교에서는 마음의 생성 조건 또는 원인을 네 가지로 분류해서 생각합니다. 마음이 생기기 위해서는 우선, 눈·귀·코 등 감각 능력이나 정신과 같은 사유능력이 ‘지금’ 온전하게 있어야 하지요? 이러한 현 찰나의 감각 능력이나 사유능력은 마음이 생기기 위해서 직접적인 원인 노릇을 하기 때문에 이를 ‘인연’이라고 부릅니다.
두 번째, 마음이 생기기 위해서는 색깔·형태·소리·냄새 등 감각 대상이나 개념·관념과 같은 사유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대상이 없이 마음이 생겨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러한 인식 대상들을 ‘소연연’이라 불러 마음의 생성 원인에 끼워 넣습니다.
세 번째, 마음은 ‘존재’이기 때문에 불교적 시각에서 보면 부단히 흐르는 ‘상속(相續)’(이에 관해서는 전에 설명했죠?)입니다. 따라서 현 찰나의 마음이 생기기 위해서는 한 찰나 전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구요? ‘찰나(刹那)’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 단위입니다. 원자핵이 한 번 진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에 비유할 수도 있겠고, 또는 앞으로는 그 보다고 더 작은 시간 단위를 생각해낼 수도 있겠지요. 아무튼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짧은 시간 단위라 보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존재 세계를 ‘무상(無常)의 상(相) 하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존재는 한 찰나 한 찰나 생성 소멸이 이루어지는 ‘찰나적’ 존재일 뿐입니다.
따라서 어떤 존재든지 어떤 찰나에 생성되기 위해서는 전 찰나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존재는 흐름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죠? 마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부단한 흐름인 한, 바로 직전 찰나의 마음이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로 현 찰나의 마음이 생깁니다. 이를 ‘등무간연’이라 부르는데, 현 찰나의 마음과 시간적으로 붙어있고(無間) 그 질이 거의 같기(等)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인 겁니다.
네 번째, 마음이 생기기 위해서는 그 생성을 가로막는 장애 요인이 없어야 합니다. 가령 눈이 말짱하고 정신도 정상적으로 제 기능을 다하고 있으며, 시각대상이 눈앞에 있다 하더라도, 햇볕이 없으면 시각이 생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경우에 햇볕이 있는 것은 시각이 생기기 위한 보조적 원인이 됩니다. 이러한 보조적 원인을 모두 통틀어서 ‘증상연’이라 불러 생성 원인 항목에 추가합니다.
이렇게 네 가지 유형의 원인이 고루 갖춰지면 마음이 그 결과로 생겨나게 됩니다. 조금 까다롭지만 그 치밀한 이론적 구성에 감탄스럽지 않습니까?〈끝〉 ▲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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