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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본 생명 개념과 불살생계

수선님 2020. 3. 22. 12:30

불교에서 본 생명 개념과 불살생계

특집: 불살생 선택인가 당위인가

[37호] 2008년 12월 10일 (수)

1. 생명과 불살생계, 그 의미와 범위는 확실한가?

윤리적, 도덕적 실천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은 크게 계(戒: Śīla)와 율(律: Vinaya)의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인과응보의 법칙이 지배하는 생명의 세계에서 그 준수와 위반 여부에 따라 미래나 내생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이법(理法)으로서 지침’이 계라면, 계의 토대 위에서 승단을 운영하고자 제정된 ‘인위적 규범들’이 율이다. 거칠게 비교하면 계는 윤리(Ethics)에 해당하고 율은 법(Law)에 해당한다.

계를 어길 경우, 누가 보건 보지 않건 인과응보의 이치에 따라 자업자득의 과보를 받지만, 율을 어길 경우는 이에 덧붙여 승단의 처벌을 받거나 스스로 참회해야 한다. 계에서는 신(身), 구(口), 의(意) 삼업(三業)이 모두 문제가 되지만, 율에서는 타인에게 표출되는 신업과 구업만 문제로 삼는다. 초기 불전 곳곳에서 가르치는 오계와 십선계 등의 지침이 계에 해당하고, 《사분율》에 수록된 비구 250계나 비구니 348계의 구족계와 같은 규범이 율이다.

그런데 오계나 십선계에서는 살인을 포함하여 ‘살생하지 말 것’을 첫 계목으로 제시하고, 구족계에서는 ‘살인’을 승단 축출죄인 4바라이죄에 포함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불교 윤리에서는 다른 생명체의 목숨을 해치는 것을 가장 금기시하는데, 이런 불살생의 지침을 준수하려고 할 때 선행되어야 할 것은 ‘생명’이 무엇이고 ‘인간’이 무엇인지 그 의미와 범위를 확정하는 일일 것이다.

혹자는 “불살생계의 대상인 ‘생명’과 ‘인간’의 의미가 너무나 분명하기에 살생하지 말라거나 살인하지 말라는 지침의 의미도 분명하다.”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생물학에서는 곡식이나 채소와 같은 식물 역시 생명체의 범위에 포함하는데, 그런 생명체들을 먹고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불살생계를 철저하게 지키려면 굶어 죽어야 하기에 참으로 난감하다. 또 생물학에서는 박테리아와 같은 세균도 생명체에 포함하는데, 우리 몸에 박테리아가 침입하면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백혈구가 몰려와 그 박테리아를 죽인다.

세균에 감염되어 질병이 발생할 때 약을 먹으면 병에서 회복되지만, 그런 약 가운데 항생제(Antibiotics)라는 것은 ‘생명체’인 세균을 죽이는 약이기에 약을 먹는 순간 불살생계를 범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세균성 질환에 걸리면 약도 먹지 말아야 할 것인가?

이뿐만이 아니다. 몇 년 전 뇌사자(腦死者)의 장기이식이 법제화되었다. 뇌사(Brain death)란 심장은 박동하지만, 뇌파가 끊어진 상태를 말한다. 지금의 의술로는 뇌사자를 소생시킬 수 없기에, 간이나 신장, 눈이나 심장과 같은 장기를 적출하여 다른 환자의 몸에 이식한다.

뇌사 상태라고 하더라도 장기를 적출하기 전까지는 체온이 남아 있는데 장기를 떼어 낸 이후 뇌사자의 몸은 싸늘하게 식으면서 사후경직(死後硬直, rigor mortis)이 일어나며 완전한 시체로 변한다. 따뜻한 체온이 남아 있는 뇌사자는 살아 있는 인간인가 아닌가? 미래에 언젠가 뇌사자를 소생시키는 의술이 개발될 수 있지 않을까? 뇌사자 역시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장기이식을 위해 그를 시체로 만드는 일에 관여한 모든 사람은 살인죄를 범한 꼴이 되는 것 아닐까?

또, 아직도 법원의 심리(審理)가 진행 중인 ‘황우석 박사의 배아줄기세포 사건’을 예로 들어 보자. 그 당시 전 세계 의학계와 종교계에서는 배아줄기세포가 인간의 범위에 포함되는지 아닌지 여부를 놓고 큰 논란이 벌어졌다. 체세포 복제를 통한 배아줄기세포 생성 과정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생식세포인 난자의 핵을 체세포의 핵으로 대체한 후 특정한 전기화학적 자극을 가하면, 수정란과 마찬가지로 분열을 일으키며 성장을 시작한다. 복제양 돌리나, 복제견 스누피의 예에서 보듯이 이런 배아를 암컷의 자궁에 착상시키면 성체(成體)로 자라난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체세포 복제 후 배아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1주일 정도 경과하면 균일한 줄기세포(Stem cell)의 단계가 되는데, 이를 해체하여 시험용기에서 키우면 무한히 증식한다. 이런 줄기세포에 특정한 전기화학적 자극을 가하면 피부, 심장, 신경, 뼈 등 우리의 신체를 구성하는 갖가지 기능세포로 분화한다.

이렇게 줄기세포에서 분화된 각종 장기세포를 활용한다면, 환자의 병든 장기를 신선한 장기로 대체하는 ‘꿈의 의학’이 가능하기에 한 편에서는 환호하였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그 연구와 기술의 비윤리성을 지적하며 강하게 비판하였다. 체세포 복제를 통해 만들진 배아 역시 자궁에 착상시킬 경우 인공수정을 통해 만들어진 배아와 마찬가지로 태아로 성장하기에 이를 해체하는 것은 살인 행위일 수가 있다.

의료계에서는 수정 후 약 2주까지의 배아는 기능 분화가 일어나지 않은 상태이기에 의술을 위해서 활용해도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주장한 반면, 종교계 일부에서는 체세포 복제 배아라고 하더라도 자궁에 착상시킬 경우 성체로 성장할 수 있기에 그것을 해체하는 것은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에 대한 연구를 극력 반대하였다.

난자의 직경은 약 0.1mm 정도 되며 불전에서는 양털 끝에 맺힌 기름방울 정도의 크기라고 비유한다. 가는 연필심 자국보다 더 작다. 이러한 난자의 핵을 체세포 핵으로 대체한 복제 배아는 인간인가, 아닌가? 살아 있는 생명인가, 아닌가? 눈을 씻고 보아도 보이지 않는 하잘 것 없는 한 점의 수정란이라고 해도 만일 그것이 인간의 씨앗이라면 함부로 해쳐서는 안 될 것이다. 높은 빌딩 꼭대기에서 내려다볼 때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점(點)보다 작아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를 향해 돌멩이를 던질 수 없듯이…….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와 상반된 판단도 가능하다. 체세포 복제 배아의 경우 많은 기술적 조작을 거쳐야 인간으로 잉태되기에 그 상태 그대로를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난자 없이 체세포를 그대로 줄기세포로 성장시키는 기술이 개발되었다고 한다.

앞으로 언젠가는 우리 몸의 세포 어떤 것이든 물리화학적 조작을 거쳐 인간으로 잉태시키는 기술도 개발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으로 잉태 가능한 세포를 조작하는 실험이나 시술은 금지되어야 한다.”라는 것이 ‘생명윤리의 절대 원칙’이라면 수혈이나 장기이식과 같이 나의 체세포를 남에게 제공하는 의료 행위 역시 모두 금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 사회는 수혈이나 장기이식, 또는 그를 위한 연구나 실험은 허용을 넘어서 오히려 권장하고 있다. 공평성의 원칙에서 본다면 체세포 복제 배아를 해체하는 연구와 시술은 금하면서, 수혈이나 장기이식을 위한 연구와 시술은 권장하는 윤리와 법의 체계는 이율배반적이라고 비판받을 수 있다.

생물학에서는 식물이나 세균 모두 생명의 범위에 포함시키기에, 현대 생물학의 세계관 하에서 불살생계를 철저히 지키려면 식물도 먹어서는 안 되고 병이 들어도 약을 먹지 말아야 할 것이다. 병에 걸리면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내 핏속의 백혈구가 세균을 박멸한다. 현행법에서는 뇌사자의 장기이식을 허용하고 권장하지만, 미래에 언젠가 뇌사자를 소생시키는 기술이 개발된다면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는 살인에 동조한 공업중생이 될 수도 있다.

체세포 복제 배아가 인간인지 아닌지 모호하고, 체세포 복제 배아를 해체하는 것이 살인인지 아닌지 판단하기가 난감하다. 우리가 불살생계에 대해 논의하려면 먼저 살생해서는 안 되는 ‘생명’의 의미와 범위를 확정해야 하는데 이런 예들에서 보듯이 그것이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2. 생명 개념의 정립을 위한 현대 생물학의 시도

이 논문은 불살생계의 준수와 위반의 문제를 풀고자, 살생 행위의 대상인 ‘생명’의 의미와 범위를 불교 교학에 근거하여 정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러나 불전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생명 개념을 확정한 후 불살생의 윤리를 권유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의 이해와 동의를 얻지 못한다면 이는 실효성 없는 ‘불교인만의 독백’이 되고 말 것이다.

다양한 종교의 교의(敎義)는 상충하지만 이를 넘어서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수용되는 것은 과학적 세계관이다. 현대 생물학에서 정의하는 생명 개념을 개관한 후 이를 불교의 생명 개념과 비교할 때 불살생계의 취지가 한층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1953년 웟슨(Watson)과 크릭(Crick)은 모든 생명체의 기본 요소인 DNA(Deoxyribo-Nucleic Acid)가 아데닌(Adenine)과 티민(Thymine), 구아닌(Guanine)과 시토신(Cytocine)이 각각 짝을 이루는 네 가지 염기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과, 이런 DNA사슬이 이중나선(Double Helix) 구조를 갖는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DNA의 기능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동식물의 몸을 구성하는 기초 물질인 단백질의 제조를 위한 형틀로서 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복제를 통해 2세에게 유전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이다.

사람을 포함하여 고양이, 개구리, 바퀴벌레든, 또 소나무, 민들레, 이끼, 버섯이든 모든 동식물은 그 몸이 DNA로 이루어진 유전 정보에 토대를 두고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공통되고, 새끼를 낳든 열매를 맺든 DNA로 이루어진 유전 정보가 2세에게 전달된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이렇게 모든 생명체의 기반인 DNA의 정체가 밝혀졌기에 ‘생명’에 대한 확실한 정의하에 생물학이 연구되고 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모든 생물학자가 동의하며 논리적 정합성과 보편성을 갖는 ‘생명에 대한 정의’는 아직껏 정립되어 있지 않다.

생명에 대해 연구하고 있지만, 생명에 대해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확실하지 않다는 말이다. 이런 역설적 상황은 생물학에만 국한된 일이 아닐 것이다. 철학에 대해 연구하지만 철학에 대해 분명한 정의를 내릴 수 없다. 광물에 대해 연구하지만 광물과 광물 아닌 것의 경계부가 모호하다. 법학을 연구하지만 법에 대한 보편적 정의를 내리지 못한다. 인간에 대해 연구하지만 인간이 무엇인지 모른다. 나 자신에 대해 탐구하지만 끝내 내가 누군지 모른다…….

이런 역설이 발생하는 것은 ‘인위[인간의 조작]’와 ‘자연[스스로 그러함]’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생명, 철학, 광물, 법, 인간, 나……’ 등등의 모든 개념은 인위적 분별을 통해 만들어진 것들인데, 우리는 이런 인위적 분별의 테두리를 인위가 아닌 자연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자연에는 테두리가 없다. 자연에는 선(線)이 그어져 있지 않다. 그래서 인위적으로 오려 낸 개념의 정의를 자연에서 찾으려고 하는 우리의 시도는 모두 실패하고 만다. 그 어떤 개념이든 그에 대해 정의 내리려 할 때 만나게 되는 비극적 운명이다. 생명을 탐구하는 학문이 생물학이지만, 생명에 대한 보편적 정의를 아직껏 정립하지 못하는 이유는 생물학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위와 자연의 상충에 있다.

생명에 대한 보편적 정의는 없지만, 과학자들은 관점에 따라 생명에 대해 다양한 정의를 시도해 왔다. 생리학적 정의, 물질대사적 정의, 생화학적 정의, 유전적 정의, 열역학적 정의 등이 그것이다. 이들을 각각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생리학적 정의: 생명이란 섭식, 대사, 배설, 호흡, 이동, 성장, 생식, 자극에 대한 반응을 수행하는 계(系)이다.

② 물질대사적 정의: 생명이란 자신의 물질을 끊임없이 외부와 교환하지만 일반적인 특성을 잃지 않고 체제의 확실한 경계가 있는 물체이다.

③ 생화학[분자생물학]적 정의: 생명이란 핵산 분자에 생식 가능한 유전 정보를 암호화하여 가지고 있고, 단백질성 촉매인 효소를 사용하여 물질대사의 화학반응 속도를 조절하는 계이다.

④ 유전적 정의: 생명이란 자신들이 가지는 유기물질, 행동양식, 구조 등을 복제하는 존재들이다.

⑤ 열역학적 정의: 생명이란 개방된 계로 열, 빛, 물질 등 우주의 무질서를 통해 자신의 질서를 증가시키는 어떤 국소 부위이다.

일반적으로 생명체라고 생각되는 것 모두가 이런 정의를 다 만족하게 하는 것은 아니며, 생명체라고 볼 수 없는 것 가운데에도 이런 정의를 충족시키는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생리학적 정의의 경우, 일개미나, 일벌, 또 수나귀와 암말 사이에서 태어난 노새, 호랑이와 사자의 교배종인 라이거(Liger)는 생식 능력을 결여하고 있지만, 이들을 생명체에서 제외할 수는 없다.

또 바이러스는 생명체의 근본 요소인 RNA나 DNA를 갖고 있으며 동식물에 기생하여 자기복제를 통해 2세를 생산하지만, 이를 분리하여 결정으로 만들 수 있기에 생명체라기보다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적 존재로 간주한다.

위에 열거한 생명에 대한 정의들은 각각 이렇게 예외가 존재하므로 생명 개념에 대해 생물학적으로 확실하게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특징을 통해 생명의 정체를 이해할 수 있다.

① 항상성(Homeostasis) - 어떤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고자 생체 내부의 환경을 조절하는 것. 예를 들어 온도를 유지하고자 땀을 흘리는 것.

② 조직(Organization) - 생명의 기본 단위인 세포가 하나 또는 그 이상 모여서 이루어짐.

③ 대사(Metabolism) - 무기물을 세포의 구성 요소로 합성하려고 에너지를 사용하고 (Anabolism) 고분자의 유기물을 저분자 물질로 분해함으로써 에너지를 방출하는 것(Catabolism). 살아 있는 것들은, 내부의 생체조직을 계속 유지하고(Homeostasis) 생명과 관련된 다른 갖가지 현상들을 산출하려면,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④ 성장(Growth) - 이화작용(Catabolism) 이상의 높은 합성률을 유지함. 유기체가 성장함에 따라 단순한 물질축적 이상으로 몸의 모든 부분에서 크기가 증가한다.

⑤ 적응(Adaptation) - 변화된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 진화와 관련하여 생체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물질대사를 통해서 만들어진 생체의 구성 요소, 변화된 환경이라는 외적 요인 그리고 그 생체의 유전 형질에 의해 적응 능력이 결정된다.

⑥ 자극에 대한 반응(Response to stimuli) - 자극에 대한 반응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단세포동물의 경우는 건드리면 수축 반응을 나타내고 고등동물의 경우는 각각의 감각기관들과 연관된 복잡한 반응을 나타낸다. 자극에 대한 반응이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일도 있는데 나뭇잎이 태양을 향해 움직이는 것과 동물이 먹이를 추적하는 것 등이 그 예이다.

⑦ 생식(Reproduction) - 새로운 유기체를 생산하는 능력. 원생동물의 예와 같이 하나의 세포가 두 개의 세포로 분열하는 생식 방법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생식’이란 새로운 개체를 생산해 내는 것을 의미한다(무성생식이든, 유성생식이든).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성장 과정 도중에 새로운 세포를 생산하는 것도 생식에 속한다.

예를 들어 인간이라는 동물의 경우, 호르몬이나 신경계의 작용을 통해 신체의 물리화학적 상태를 계속 일정하게 유지하며[①항상성], 피부세포, 신경세포, 뼈세포 등 200여 종의 세포가 기본 단위인 각종의 장기로 이루어져 있고[②조직], 음식을 섭취하고 산소를 호흡함으로써 활동 에너지를 얻거나 혈구 등의 신체 성분을 만들어 내고[③대사], 나이를 먹으면서 성인이 될 때까지 신체의 각 부위가 자라나고[④성장], 열대지방에서 생활할 경우 검은 멜라닌 색소가 피부에 침착되어 자외선을 차단하며[⑤적응], 오관을 통해 들어온 감각적 자극에 따라 사지 등의 근육을 움직여 신체를 보전하며[⑥자극에 대한 반응], 배우자를 맞이하여 2세를 출산한다[⑦생식].

그런데 이상에 소개한 생물학적 생명 개념이, 앞으로 고찰할 불교의 생명 개념과 크게 다른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동물과 함께 식물이 생명의 범위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우리의 몸과 마음 가운데 몸만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3. 불교와 생물학의 생명 개념, 어떻게 다른가?

불전에서는 생명을 중생(衆生: Sattva)이라고 부른다. 중생은 유정(有情)이라고 한역(漢譯)되기도 한다. 유정이 아닌 것, 즉 중생이 아닌 것은 무정물(無情物)이라고 부른다. 불교의 불살생계에서 말하는 '죽여서는 안 되는 생명체'가 바로 중생이고, 유정류이다.

그런데 불전의 가르침이 현대 생물학과 다른 것은 이러한 중생의 범위에 식물을 포함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천신, 아수라, 아귀, 지옥중생의 네 가지를 중생의 범위에 포함시킨다는 점이다. 연기법(緣起法)에 대해 설명할 때에도 육도중생의 생사윤회는 내연기(內緣起)라고 부르면서, 모든 중생은 ‘무명 → 행 → 식 ↔ 명색 → 육입 → 촉 → 수 → 애 → 취 → 유 → 생 → 노사’로 이어지는 십이연기의 법칙에 의해 살아간다고 설명하는 반면, ‘씨앗 → 뿌리 → 싹 → 줄기 → 잎 → 꽃 → 열매’로 이어지는 식물의 생장 과정은 외연기(外緣起)라고 부르면서 일반적인 물질의 인과관계와 같은 것으로 취급한다.

식물은 무정물이라는 것이다. 불교의 불살생계에서 말하는 생명의 범위에, 생물학에서 생명에 포함시키는 식물은 들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생물학에서는 거론도 하지 않는 천신 등의 네 가지 존재가 더 추가된다. 생명의 범위에 대한 생물학과 불교의 이러한 견해 차이를 도시(圖示)하면 다음과 같다.

이 가운데 우리 눈에 보이는 존재는 식물과 인간과 축생이다. 과학적 객관성과 합리성의 기반 위에서 연구되어 온 생물학에서는 눈에 보이는 존재들만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면 불교에서 살생해서는 안 되는 생명체인 중생의 범위에 식물은 들어 있지 않고, 우리에게 인지되지 않는 천신 등의 네 가지 존재들은 포함된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의 수태 과정에 대한 십이연기의 식과 명색의 상호관계에 대해 설명하는 디가니까야(Dīgha Nikāya)의 "마하니다나수타(Mahānidānasutta)"에서 우리는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세존: 식(識: viññāṇa)을 조건으로 삼아 명색(名色: nāmarūpa)이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아난이여, 식이 어미(mātu)의 자궁에(kucchismiṃ) 들어가지(okkamissatha) 않았는데도 명색이 성장하겠느냐?

아난: 그렇지 않사옵니다.

세존: 아난이여, 만일 식이 어미의 자궁에 들어간 후에 벗어난다면(vokkami) 명색이 이번 생에 탄생하겠느냐(abhinibbatti)?

아난: 그렇지 못하옵니다.

세존: 아난이여, 만일 어린 남아와 여아의 식이 파괴되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명색이 성숙하고 성장하여 성인이 되겠느냐?

아난: 그렇지 못하옵니다.

세존: 그러므로 명색의 원인이 되고 근본이 되고 조건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식이니라. 왜냐하면 식을 조건으로 삼기 때문에 명색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 경문에서 보듯이 심신 복합체인 명색이 자궁 속에서 자라나려면 식이 어미의 자궁에 들어가야 한다. 《구사론》에서는 이런 입태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한층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불전에서 말하듯이, 세 가지가 함께하기 때문에 모태에 들어간다. 첫째는 어미가 배란기에 있어야 하고, 둘째는 부모가 교합을 해야 하고, 셋째는 간다르바(gandharva)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중유(中有: antarābhava)를 제외하고서 어떤 것이 간다르바이겠는가?

앞에서 인용했던 "마하니다나수타"에서 어미의 자궁에 들어간다는 식(識)을, 《구사론》에서는 간다르바라고 표현하면서 이것이 바로 중유라고 설명하고 있다. 어미가 배란기에 있다는 조건은 자궁 내로 ‘난자’가 배출되었다는 의미이고, 부모가 교합을 한다는 것은 아비의 정자[精]가 난자[血]와 결합하여 수정란이 생성되었다는 의미인데, 생물학에서는 난자에 정자가 결합한 수정란을 생명체의 시작으로 보지만, 불전에서는 이러한 수정란에 간다르바(gandharva), 즉 식(識)이 결합되어야 비로소 생명체로 자라난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렇게 식의 도입 여부에서 불교의 생명관과 생물학의 생명관은 갈라진다.

간다르바라고도 불리는 식(識)이 수정란에 결합되면 자궁 내에서 태아로 자라나는데, 심신(心身) 복합체인 이런 태아를 명색(名色: nāmarūpa)이라고 부른다. 명(名: nāma)은 식, 간다르바, 심(心) 등으로 불리는 태아의 ‘정신’에 해당하고, 색(色: rūpa)은 수정란 이후 세포분열을 통해 성장하는 태아의 ‘몸’에 해당한다. 이제 생명관에서 불교와 생물학의 차이가 명확해졌다. 생물학에서는 ‘DNA 사슬에 새겨진 유전 정보에 따라 만들어진 몸’을 생명체라고 간주하는 반면, 불교에서는 그런 몸에 식이 결합되어야 불교적 생명체인 중생(Sattva)이라고 보는 것이다.

생물학에서 생명의 범위에 포함시키는 식물의 경우는 ‘DNA에 기반을 둔 몸’만으로 이루어진 존재로, 식이 결합되어 있지 않기에 중생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 인간과 짐승의 경우는 몸도 갖고 있지만 개개의 몸에는 그에 해당하는 식이 결합되어 있기에 중생이다. 또 그 몸의 모습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천신, 아수라, 아귀, 지옥중생의 경우 고락을 느끼는 식을 갖기에 불교적 생명체인 중생의 범위에 포함된다.

따라서 식이 없는 식물을 해치는 것은 불교적 의미의 살생이라고 볼 수 없고, 축생과 인간을 해치는 행위는 물론이고 천신이나 아수라, 아귀나 지옥중생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해치는 것은 살생의 범위에 들어간다. 그러나 천신이나, 아수라, 아귀, 지옥중생의 경우 대부분의 인간에게는 그 존재 여부조차 불확실하기에 이들을 해치는 것이 살생인지 아닌지 여부는 이 글에서 다루지 않겠다.

불살생계와 관련한 불전의 가르침을 종합하면, 인간이나 축생을 해치는 것은 살생죄를 범하는 것이지만 식물을 해치는 것은 ‘살생죄’의 범위에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식물을 함부로 해쳐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율장에 의하면 식물을 해치는 것도 계를 범하는 행위가 되는데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식물이 중생의 거주처(居住處)이기 때문이다.

율장에서는 나무나 풀과 같은 식물을 귀신촌(鬼神村) 또는 유정촌(有情村)이라고 부른다. 귀신과 새, 짐승, 모기, 파리, 뱀, 전갈, 개미와 같은 유정류가 식물에 의지하여 살고 있기 때문에 풀이나 나무를 손상하는 것은 그들의 집을 망가뜨리는 꼴이 된다. 식물을 함부로 해쳐서는 안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승가의 명예가 훼손되기 때문이다. 화지부(化地部: Mahīśāsaka)의 율장인 《오분율》에서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부처님께서 새로 지은 강당에 도착하여 자리에 앉아 비구들에게 물으셨다. “이 강당은 누가 지었는가?” 답하여 말했다. “우리가 만든 것입니다.” 다시 물으셨다. “풀과 나무는 누가 베었는가?” 답하여 말했다. “그것도 역시 우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모저모로 꾸짖으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되느니라. 풀과 나무에 대해 일반 사람들은 ‘살아 있는 존재라는 생각(生命想)’을 낸다. 그대들이 그런 일을 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혐오하는 마음을 품게 하느니라.”

중생이 살아가는 현장인 육도 속에 식물의 세계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인용문에서 보듯이 일반 사람들은 풀과 나무에 대해 ‘살아 있는 존재라는 생각(生命想)’을 내기에, 출가 승려가 이를 해칠 경우, 자비심이 없다고 혐오하며 승가를 비난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이 현대 생물학에서 말하는 동물과 식물 가운데 식물은 불교적 의미의 생명체, 즉 중생(Sattva)이 아니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DNA사슬에 담긴 유전 정보에 따라 조성된 몸을 갖고 있으며, DNA의 자기복제를 통해 2세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그러나 불교적으로 볼 때 식물은 그 어떤 것이든 생명체가 아니며, DNA에 토대를 두고 이루어진 동물의 몸은 생명체의 토대일 뿐이다. 그런 동물의 몸에 간다르바(gandharva), 중음신 등으로 불리는 ‘식(識)’이 결합되어야 비로소 생명일 수 있는 것이다. 십이연기설의 ‘명색’ 지분으로 설명하면 동물의 몸은 ‘명(名: nāma)인 식’이 깃드는 ‘물질[色: rūpa]’일 뿐이다. 불전의 육계설(六界說)에서는 유정류의 구성 요소를 ‘지, 수, 화, 풍, 공, 식’의 여섯 가지로 분류하는데, DNA와 몸은 이 가운데 ‘지, 수, 화, 풍’의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물질일 뿐이다. 생물학적 개념을 도입하여 불교적 생명체인 육도중생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이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DNA와 관련된 중생: 인간, 축생

DNA와 무관한 중생: 천신, 아수라, 아귀, 지옥중생

불교의 불살생계에 대해서 논의하려고 할 때, 우리가 다룰 수 있는 것은 육도중생 가운데 ‘DNA와 관련된 중생’인 인간과 축생이다.

그런데 우리 눈에 보이는 중생인 ‘인간과 축생’ 가운데 축생의 범위에 대해 불전에서는 어떻게 가르치는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고양이나 코끼리와 같은 포유류, 까치나 비둘기와 같은 조류, 붕어나 뱀장어와 같은 어류는 모두 축생이다.

아무 죄책감 없이 서슴지 않고 이런 축생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기나 개미와 같은 곤충, 박테리아와 같은 세균 역시 중생이기에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하면 이에 동의하는 사람 역시 많지 않을 것이다. 모기도 중생이기에 죽여서는 안 되는가? 박테리아도 중생이기에 살균하면 안 되는가?

불전에서는 중생의 종류를 앞에서처럼 천신, 아수라, 인간, 아귀, 축생, 지옥중생의 여섯으로 나누기도 하지만, 탄생 방식에 따라 난생(卵生), 태생(胎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의 네 가지로 구분하기도 한다. 난생은 알에서 태어나는 중생으로 거위, 공작, 앵무새, 기러기와 같은 조류 및 어류가 이에 속하고 태생은 자궁에서 자라 태어나는 것으로 코끼리, 말, 소, 돼지, 양, 나귀와 같은 것을 말하며, 습생은 축축한 곳에 의지하여 탄생하는 것으로 나방, 모기, 지네와 같은 곤충과 벌레(蟲)들이고 화생은 의탁하는 곳 없이 태어나는 것으로 천신과 지옥중생과 중음신이 이에 속한다고 한다.

이렇게 태, 난, 습, 화의 네 가지 방식으로 태어나는 존재가 모두 생명체이기에 이를 죽이는 것은 불살생계를 범하는 꼴이 된다. 모기나 개미와 같은 벌레는 이 가운데 습생에 속하며, 이를 죽이는 것 역시 살생이다.

그러면 박테리아와 같은 세균은 어떤가? 불전에서는 생후 7일이 되면 몸에 8만 마리의 호충(戶蟲)이 생겨 몸의 이곳저곳을 갉아 먹는데(生七日己身內即有八萬戶虫縱橫噉食) 머리칼을 먹고 사는 것도 있고, 머리를 먹고 사는 것도 있으며, 눈, 뇌, 귀, 코, 입술 …… 신장, 비장 …… 무릎, 정강이를 먹고 사는 것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8만’은 ‘많은 수’를 의미하며, ‘호충’은 ‘방(cell)과 같은 벌레’라는 의미이기에 박테리아와 같은 세균으로 볼 수 있다. 즉 생후 7일이 되면 수많은 박테리아가 우리 몸에 생겨 기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경문을 보면 이런 박테리아 역시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되는 생명체임을 알 수 있다.

[수행자가] 음식을 먹고자 할 때에는 자리를 펴고 손을 씻고서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 '몸속에 8만 마리의 호충(戶蟲)이 있는데, 호충이 이 음식을 먹어서 모두 다 편안하게 살아간다. 내가 지금은 음식으로 이 모든 호충에게 보시하지만, 나중에 깨달음을 얻을 때에는 가르침으로 보시하겠다.'

부처님께서 사위국에 계실 때, 아라한이 대열반에 들었다. 비구들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몸에는 8만 마리의 호충이 살고 있으니, 만일 그 몸을 화장(火葬)한다면 그 벌레들을 죽이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비구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이 일을 부처님께 고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사람이 죽을 때 벌레도 역시 죽는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몸에는 8만 마리의 호충이 살고 있으며 이 모두 제도(濟度)의 대상이다. 모기나 개미와 같은 곤충은 물론이고 박테리아와 같은 세균 역시 습생의 축생이다.

4. 불교의 생명관과 불살생계의 지범개차(持犯開遮)

우리 눈에 보이는 존재 가운데, 불교의 불살생계에서 생명으로 간주하는 것은 인간을 포함한 동물이다. 생물학 용어로 말하면 포유류와 조류, 어류는 물론이고 곤충과 세균까지 모두 중생에 포함된다. 우리가 불살생계를 지키고자 할 때 포유류와 조류, 어류, 곤충을 죽이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는 쉽진 않지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박테리아와 같은 세균조차 죽여서는 안 될까? 불살생계를 지키고자 할 때 지침이 되는 것은 율장의 ‘계목’과 ‘판례(判例)’들인데 다음과 같은 판례에서 이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설일체유부율분별(說一切有部律分別)’이라고 번역되는 《살바다비니비바사》에는 다음과 같은 경문이 있다.

어느 날, 사리불이 청정한 천안(天眼)으로 허공에서 벌레(蟲)들을 보았는데, 물가의 모래알과 같고 그릇에 가득한 좁쌀알과 같이 무변하고 무량하였다. 이를 보고 음식을 중단하여 이삼일이 지났을 때 부처님께서 식사를 하라고 명을 내리셨다. 무릇, 육안(肉眼)에 보이거나 녹수낭(漉水囊)에 걸리는 크기의 벌레가 든 물을 금지하는 것일 뿐이지 천안에 보이는 것까지 금지하는 것은 아니다.

《근본설일체유부백일갈마(根本說一切有部百一羯磨)》에서도 다음과 같은 경문이 발견된다.

“대덕이시여, 이미 걸러 낸 물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 마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관찰하고 나서 마실 수 있느니라.” “대덕이시여, 걸러 내지 않은 물도 마실 수 있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관찰해서 벌레가 없으면 마셔도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니라.” 아나율 존자가 천안(天眼)으로 물을 보니 분명히 물속에서 보이는 것 가운데 무량한 중생이 있었다. 세존께서 고하셨다. “천안으로 물을 보아서는 안 되느니라.”

이 두 가지 인용문에서 사리불과 아나율이 천안을 통해 보게 된 ‘무수한 벌레’들 역시 박테리아와 같은 세균에 해당할 것이다. 앞 장 말미의 인용문에서 말하는 우리 몸속의 8만 마리의 벌레들 역시 부처님의 천안에 의해 관찰된 것이다. 일반 비구들의 육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 몸속에 사는 8만 마리의 벌레들의 경우, 부처님은 “사람이 죽으면 그런 벌레도 죽는다.”라는 단안(斷案)을 통해 화장(火葬)을 허용[開]하였고, 사리불과 아나율이 천안으로 발견한 ‘무수한 벌레’들에 대해서는 음식이나 물에 그런 벌레들이 있긴 하지만, 그것들을 ‘살생해서는 안 될 생명체’의 범위에서 제외함으로써 식음을 허용[開]하였다.

이제 이 논문 제1장에서 제기했던 의문들로 돌아가 그에 대해 하나하나 답해 보자. 제1장에서 제기했던 의문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① 식물도 생명이기에 불살생계를 지키려면 식물도 먹어서는 안 되는가?

② 박테리아와 같은 세균도 생명이기에 병에 들어도 약을 먹지 말아야 할까?

③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백혈구가 세균을 박멸하는 것은 살생 아닌가?

④ 장기이식을 위해 뇌사자의 몸을 해체하는 것은 살인 아닌가?

⑤ 체세포 복제 수정란을 배양하여 줄기세포를 만드는 것은 살인 아닌가?

①의 경우 불교에서는 식물을 중생에 포함시키지 않기에 식물을 해치는 것은 불살생계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식물은 벌레나 짐승과 같은 중생의 거주처이기에 함부로 해쳐서도 안 된다.

②의 경우 육안에 보이지 않는 박테리아 역시 생명체의 범위에 들어가지만, 불살생계의 윤리에서 이를 문제 삼지 않는다. 사리불과 아나율의 천안에 보인 세균조차 해치지 말아야 한다면, 어떤 음식도 먹어서는 안 되고 어떤 물도 마셔서는 안 될 것이다.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실 때 피치 못하게 범하게 되는 세균에 대한 살생은 살생죄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러면 병을 치료하려고 약을 복용하는 것은 허용될까?

《사분율》에서는 비구가 병에 들었을 때 다섯 가지 약을 써도 된다는 가르침이 보인다. 다섯 가지 약은 수(酥), 유(油), 생수(生酥), 밀(蜜), 석밀(石蜜)인데, 부처님 당시 일반인들이 사용하던 약품에 해당한다. 따라서 세균성 질환에 걸렸을 때 약품을 사용하는 것 역시 허용될 수 있으며 ③의 경우 더더욱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현대의 의료 기술인 ④뇌사자의 장기이식과 ⑤체세포 복제 배아의 경우, 율장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을 수가 없기에 그 시술 또는 기술의 허용[開]과 금지[遮] 여부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뇌사자’나 ‘체세포 복제 배아’가 ‘살아 있는 인간’에 속한다면, 이를 해치는 것은 살인 행위가 될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법규에서는 ‘뇌사자의 장기이식’은 허용[開]하고, ‘체세포 복제 배아를 이용한 줄기세포 연구’는 많은 단서를 달아 그 연구에 제한[遮]을 가한다. 한편 불임 부부의 인공수정을 위해 제조되었으나 임신에 실패했을 경우를 대비해 보관하는 ‘냉동 배아’의 경우는 5년이 지나면 줄기세포 연구를 위해 활용 가능하다[開]. ‘뇌사자, 체세포 복제 배아, 5년이 지난 냉동 배아’ 모두 ‘인간’이라는 개념의 범위에서 ‘주변부’에 속하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해쳐서는 안 될 생명인가, 아니면 생명이 아니기에 의술에 활용해도 되는가? 이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앞에서 검토해 보았듯이 불교의 생명관은 현대 생물학의 생명관과 다르다. 현대 생물학에서는 DNA에 기반을 둔 존재를 생명으로 간주하는 반면 불교에서는 식(識)의 개입 여부로 유정류와 무정물을 구분한다. 그런데 유정류와 무정물을 구분하는 이러한 ‘인지(認知)’는 초기불교, 또는 아비달마불교적인 거친[麤] 조망일 뿐이다. 개념에 대한 이런 실재론적 조망을 ‘법유론(法有論)’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구사론》에서는 일체를 5위 75법[法]으로 분류한 후 75법 각각이 모두 별개의 실재[有]라고 가르친다. 이런 법유(法有)의 조망하에서는 ‘생명’이라는 개념 역시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율장의 불살생계는 이렇게 ‘생명’과 ‘비생명’을 가르는 철저한 ‘분별’에 입각한 윤리 지침이다. 이러한 분별은 ‘개념적 앎’인데 우리가 체험하는 일체를 색, 수, 상, 행, 식의 다섯 가지로 분류하는 오온설(五蘊設)에 대입하면 ‘개념적인 앎’은 상(想: saṃjñā, saññā)에 해당한다. 그런데 《금강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수보리야, 만약에 보살에게 중생상(sattva-saṃjñā)이 있다면 그는 보살이 아니니라. 왜 그런가? 수보리야, 아상(ātma-saṃjñā)이나 중생상(sattva-saṃjñā)이나 수자상(jiva-saṃjñā)이나 인상(pudgala-saṃjñā)이 있는 자는 보살이 아니라고 말해야 하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중생상이란, ‘살아 있는 생명체라는 생각’이다. ‘자아가 있다는 생각[我相]’이 잘못된 것이듯이, ‘살아 있는 생명체라는 생각[衆生相]’ 역시 잘못된 것이다. 이렇게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살아 있다는 생각을 붙이지 말라는 것이 《금강경》의 가르침인 반면, 이와 반대로 《화엄경》에서는 모든 것에 대해 생명을 부여한다. 온갖 강물에도 신격이 부여되고[主河神], 땅도 살아 있고[主 地神] …… 바다도 살아 있고[主海神], 물도 살아 있고[主水神], 불도 살아 있고[主火神] …… 밤도 살아 있고[主夜神], 낮도 살아 있다[主晝神]. 반야계 경전인 《금강경》에서는 “그 어떤 것도 생명이랄 것이 없다.”라고 역설하며, 《화엄경》에서는 “모든 것이 살아 있다.”라고 노래한다. 《금강경》에서는 절대부정의 조망을 통해 ‘생명에 대한 분별’을 해체하고, 《화엄경》에서는 절대긍정의 조망을 통해 ‘생명에 대한 분별’을 해체한다.

이렇게 ‘생명 개념’에 대한 절대부정과 절대긍정의 조망이 ‘불교적 인지의 궁극’이긴 하지만, 이런 무차별, 무분별의 조망으로는 “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말라.”는 불살생계의 지침이 도출될 수 없다. 불교 생명윤리는 ‘생명’과 ‘무생명’을 가르는 ‘분별’의 토대 위에서 내려지는 ‘묘관찰(妙觀察)’의 지침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떤 것도 생명일 수 없지만, 역(逆)으로 모든 것이 생명일 수 있다.”는 무한의 인지(認知)에서 어느 지점에 선을 그어 불교 윤리의 지침으로 삼을 것인가? 앞에서 예로 들었던 ‘뇌사자의 장기이식’이나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불살생계를 어기는 행위인가, 아닌가?

《금강경》이나 《화엄경》의 가르침에서 보듯이 ‘생명’이라는 개념에 명확한 선(線)을 그을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인간’이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나는지, 그 출발점과 종착점을 확정하기가 난감하다. 불전에서는 모체의 자궁에서 정자와 난자와 간다르바의 삼자가 화합하면 인간으로 자라난다고 가르치며, 그 후 낙태를 할 경우 살인의 업을 짓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면 ‘체외에서 수정된 후 보관 중인 냉동 배아를 법정 보관 기간인 5년이 지난 후에 해체하는 것’은 살인인가, 아닌가? 난자의 외피에 체세포를 주입하여 성장시킨 체세포 복제 배아는 인간인가, 아닌가? 또 뇌사자는 인간인가, 아닌가? 이를 알고자 하는 이유는 그런 ‘앎’에 근거하여 ‘불살생계’의 준수[持]와 위반[犯] 여부가 판가름되고 아울러 이런 세 가지 존재의 의학적 활용을 허용[開]할 것인지 금지[遮]할 것인지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에서 소개했던 ‘사리불과 아나율이 천안으로 보았던 호충(戶蟲)의 예화’에서 우리는, 생명과 생명 아닌 것을 가르는 ‘선 긋기’의 기준을 찾을 수 있다. 생명 개념의 주변부에서는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주관적 가치에 의해 그 ‘가름의 선(線)’이 그어진다는 점이다.

천안으로만 보이는 호충조차 불살생계의 대상인 생명체의 범위에 포함시킬 경우 물도 마실 수 없고 밥도 먹을 수 없어서 수행 자체가 불가능하다. “수행을 통해 삼독(三毒)의 번뇌를 제거한다.”라는 ‘선(善)-가치’의 보전을 위해서 ‘천안에 보인 호충’은 생명체의 범위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뇌사자나 체세포 복제 배아와 같이 ‘생명 개념의 주변부’에 속하는 대상에 대해 그것을 해체해도 되는지[開] 아닌지[遮] 결정하려고 할 때, 우리는 율장의 이런 판례에 준하여 판단할 수 있다.

그것을 해체하려고 하는 우리의 주관적 동기가 선(善)하다면 뇌사자나 체세포 복제 배아는 ‘불살생계의 대상으로서 생명체’의 범위에서 제외된다. 그러나 그 동기가 악(惡)하다면 생명체의 범위 내로 들어온다. 동기의 선악 여부는 탐, 진, 치와 같은 번뇌의 유무로 판가름한다. 뇌사자나 체세포 복제 배아를 해체하려는 동기가, 돈을 벌려는 재물욕이나 이름을 날리려는 명예욕 등의 탐욕에 있다면 그런 시술은 살인(殺人)이다. 그러나 고통받는 다른 환자에게 도움을 주려는 순수한 자비심이라면 그런 시술은 살인이 아니다. 뇌사자나 배아는 그를 훼손하는 자의 마음가짐에 따라 생명체가 될 수도 있고, 무정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생명 개념의 주변부인 ‘인식(認識)’의 극한에서는 주관적 ‘가치’에 의해 ‘존재’의 범위가 변한다.

김성철 / 1957년생. 1982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졸업. 1997년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 학과 박사 과정 졸업(철학박사). 현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교수, 불교평론 편집 위원장. 저서 및 역서로 《중관사상》, 《원효의 판비량론 기초 연구》, 《중론》, 《회 쟁론》 등이 있고, 논문으로 〈역설과 중관논리〉외 50여 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