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의 가르침을 법(法)이라고 하므로 불교를 불법(佛法)이라고도 하고, 부처가 되는 길이라는 뜻에서 불도(佛道)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교의 내용은 교조인 석가모니가 35세에 보리수 아래에서 달마(達磨, dharma: 진리)를 깨침으로써 불타(佛陀, Buddha: 깨친 사람)가 된 뒤, 80세에 입적할 때까지 거의 반세기 동안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교화할 목적으로 말한 교설이다.
그러나 부처가 탄생한 때인 서기전 5세기부터 현재까지 2500년 동안 불교는 원시불교·부파불교(部派佛敎)·소승(小乘) 및 대승불교 등으로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다양하게 발전하여 왔고, 경전도 여러 가지가 새롭게 편찬되어 왔다.
따라서 교리나 의식도 여러 지방의 발전과정에 따라서 판이하게 달라졌으므로 한 마디로 ‘불교는 이것’이라고 묶어 말할 수는 없게 되었다. 이것은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불교의 특이한 면이다.
불교의 교조인 석가모니는 브라만(Brahman)의 정통교리사상이 흔들리던 서기전 5세기에 크샤트리아(Kshatriya: 무사·왕족의 계급)계층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가 출생한 시기는 브라만 전통사상에 대한 회의 속에서 새로운 사상을 표출하고자 노력했던 비브라만적인 신흥사상가들이 많이 출현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브라만 전통교리를 신봉하는 승려들과 구분하여 이들 신흥사상가들은 사문(沙門)이라고 불렀으며, 불교도 이 같은 비브라만적 신흥사상에 속한다. 그러나 불교는 전통 브라만사상의 형이상학적·본질론적 경향도, 사문의 회의적·부정적인 경향을 나타낸 신흥사상도 지양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부처가 형이상학적·본질론적 질문에 대하여 대답을 보류하였다는 기록이 초기경전에 보인다. 즉, 이 세상은 끝이 있는가 없는가, 시간은 유한한가 무한한가, 내세는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등에는 답변을 보류하였다고 한다.
부처는 어떤 전제나 선입관을 근거로 하는 추론을 피하고, 모든 것을 현실의 있는 그대로도 보고 아는 입장을 지향하였다.
아트만(atman: 眞我)이나 브라만(梵神)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보다는 ‘인간이 지금 이 자리에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라는 실존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므로 부처가 깨친 진리는 형이상학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존재하는 구체적 양식, 즉 연기(緣起)로 설명된다. 이 세계는 신이나 브라만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의존관계 속에서 인연에 따라 생멸(生滅)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생활의 실제문제와 부딪쳤을 때 그 문제의 해결에 주력하는 것이 부처의 가르침이고 곧 불교이다. 불교의 교리나 이론은 자연히 인생문제의 해결이라는 실제적 목적이 앞서기 때문에 이론을 위한 이론이나 형이상학적 이론은 배제되었던 것이다.
또 부처는 사람마다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조건과 개인적 차이에 따라서 그때 그때 가르침의 내용을 달리하는 응병시약적(應病施藥的: 병에 따라 각각 약을 지어 줌)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획일적이고 일방적인 길보다는 다양한 길을 택하였다. 불교의 교리가 너무 다양하게 전개되어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반면, 사람마다 지닌 사회적 조건을 충분히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불교의 관용성을 찾아볼 수 있다.
[1. 인도불교]
불교가 일어날 당시 인도의 종교계는 다른 고대민족과 마찬가지로 애니미즘적 경향을 띤 원시신앙이 지배하고 있었고, 『베다』와 『우파니샤드』에 근거를 둔 브라마니즘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개인 속에 내재하는 원리로는 아트만을 상정하고, 우주의 궁극적 근원으로는 브라만을 설정하여 이 두 원리는 동일한 것[梵我一如]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또 인간의 행위는 전생의 업에 의해 지배된다고 하였고, 현재의 행위는 미래의 고락(苦樂)을 결정한다는 윤회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이 윤회에서 해탈하는 것을 당시 사상가·종교가들은 최고의 이상으로 주장하였다.
업(業)·윤회·해탈의 사상은 후대 인도사상의 골격을 이루는 것이며, 불교 역시 이러한 인도의 전통적 사상을 근저로 하고 새로운 종교사상으로 두각을 나타냈던 것이다.
석가도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 이러한 종교적 풍토 속에서 브라마니즘의 수행방법을 따랐다. 석가가 29세에 부인인 야쇼다라(Yasodhara, 耶輸陀羅)와 아들 라후라(Rahula, 羅睺羅)를 버리고 출가하여 택한 수행방법은 당시에 크게 유행하고 있던 선정(禪定)과 고행(苦行)이었다.
처음 출가한 석가는 알라라 칼라마(Alara Kalama)와 우다카 라마푸타(Uddaka Ramaputta)에게서 가르침을 받다가 만족하지 못하여 5명의 수행자와 함께 고행의 길을 떠났다.
6년의 고행 끝에 고행이 최상의 방법이 아님을 알고 그 동안 행했던 모든 수행법과 이론을 떨쳐버렸다. 그리고 부다가야(Buddhagaya)의 보리수 아래에서 다시 7일 동안 명상한 끝에 마침내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
부처가 깨달은 진리를 법(法)이라 하며, 그는 이 법을 펴기 위해 베나레스(Benares)의 녹야원(鹿野園)으로 가서 그곳에 있던 다섯 수행자에게 최초의 설법을 하고[初轉法輪], 그들을 제자로 삼았다. 이로써 불교는 교조·교리·교단을 갖춘 하나의 종교가 되었다. 이때부터 부파불교 이전까지를 원시불교시대라 부른다.
원시불교의 중심교리는 중도(中道)·십이연기(十二緣起)·사제(四諦)·팔정도(八正道)이다. 출가 수행 당시의 극단적 고행도 태자시절에 누렸던 쾌락과 마찬가지로 진리를 깨닫는 길에는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못함을 안 석가는 두 극단을 지양하는 길에서 진리를 깨달았다. 이 두 극단을 지양한 길을 원시불교에서는 ‘중도’라고 불렀다.
이 중도의 구체적인 실천항목을 여덟 가지 올바른 길이라 하여 ‘팔정도’라고 하였다. 팔정도는 바른 견해[正見], 바른 생각[正思惟], 바른 말[正言],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활[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신념[正念], 바른 명상[正定] 등이다.
팔정도의 이론적·교리적 근거로는 네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가 있다. 네 가지 진리는 첫째 고[苦]를, 둘째 고의 근원[苦集]을, 셋째 고에서 해탈함[苦滅]을, 넷째 고에서 해탈하는 방법[苦滅道]을 제시한 것이다.
인간의 존재를 ‘고’로 파악한 초기 경전은 인간의 탄생도 고이고 늙어감도 고이고 병(病)도 고이고 죽음 역시 고이며, 미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고이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함도 고이고, 가지고 싶은 것을 얻지 못함도 고라고 하였다. 한 마디로 인간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 요소나 정신적 요소가 모두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팔정도와 사성제는 부처가 깨친 뒤 제일 처음 말한 초전법륜(初轉法輪)으로 알려져 있다. 이 초전법륜의 내용은 그 뒤 설명형식과 방법은 달라졌다 해도 불교교리의 기본적 골격임에는 틀림없다.
또한 불교의 실천요목을 계(戒)·정(定)·혜(彗) 삼학(三學)의 체계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계는 불교가 가르치는 이상인 열반(涅槃)을 실현하기 위하여 수행자가 날마다 실천하여야 할 생활규범인 계율이다.
계율은 생활규범이므로 출가수행자와 재가수행자,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근본 5계인 살생하지 말라, 훔치지 말라, 음란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술 마시지 말라 등은 누구나 지켜야 하는 규범이다.
그렇다고 계율만 엄격히 지키는 일은 윤리적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계율에 근거하여 보다 높은 거룩한 종교적 체험을 얻기 위하여는 종교적 수련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즉 명상, 정신적 통일, 지관(止觀) 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선정(禪定)이라고 한다.
이 선정은 가만히 앉아 있는 소극적·부정적 자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감각의 세계에서 스스로 벗어나는 무아(無我)의 적극적 자세로 전환하여 자유의 경지를 개발하는 것이 선정의 본분이다.
그러나 선정이 주관적 환상에 빠지지 않으려면 바르고 엄격한 계율적 실천이 앞서야 한다. 따라서 바른 선정은 계율에 의하고, 또 계율은 바른 선정에 의하여 거룩한 종교적 차원으로 고양된다.
그러나 계율과 선정 그 자체가 최종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해탈에 이르는 지혜를 터득하기 위한 길에 지나지 않는다. 윤리적 계율에 의하여 마음과 몸이 청정해진 사람이 선정에 의하여 이르는 최고의 경지가 이 지혜이다.
이같은 지혜를 불교는 반야지(般若智)라고 하여 다른 유형의 지혜와 구별한다. 이 반야지는 곧 해탈이고, 불교에서는 각(覺)이나 오(悟)의 동의어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1.1. 원시불교시대]
이러한 근본교리를 중심으로 석가는 45년 동안 교화활동을 하며 승단(僧團)을 이끌다가 80세가 되는 기원전 543년 열반에 들었다. 승단은 마하가섭(摩訶迦葉) 등이 중심이 되어 석가가 제정한 율(律)과 교법(敎法)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 때 제자들은 불교의 교법을 정리하는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석가가 듣는 사람의 바탕과 능력에 맞추어 수기설법(隨機說法)한 것을 결집(結集: 부처님이 말한 내용을 묶어 정리함)을 통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는데, 이것을 ‘제1결집’이라 한다.
왕사성(王舍城)에 500명의 비구(比丘)들이 모여서 마하가섭을 사회자로 하고 우바리(優波離)가 율(律)을, 아난(阿難)이 법(法)을 암송하여 불설(佛說)의 내용을 서로 검증하고 확인한 것이다.
그 뒤 불교는 마가다국을 근거지로 여러 도시의 왕후와 일반 서민의 귀의를 얻으면서 각지로 전파되어 갔다. 특히, 기원전 317년경 찬드라굽타(Chandragupta)에 의하여 인도 최대의 통일국가인 마우리아왕조가 성립되고, 이 왕조 제3대 왕 아소카(Asoka, 阿育)가 즉위한 뒤 불교는 비약적으로 팽창하여 카슈미르·간다라지방을 비롯한 인도의 각 지역과 박트리아의 그리스 식민지역, 스리랑카·버마 등 국외에까지 전파되었다.
아소카왕은 열렬한 불교신도로서 법(法)인 진리에 의한 통치를 지도이념으로 삼는 등 불교발전에 많은 공헌을 한 왕이다.
[1.2. 부파불교시대]
그러나 불교의 급속한 팽창과 유통은 일면 교단 자체의 질서면에서 많은 문제를 제기하였고, 그것은 드디어 교파분열을 초래하였다.
석가의 열반 후 100년경, 계율의 해석 차이로 인해 전통적 보수파와 진보적 자유파가 대립되어 두 개의 부파를 낳았다. 전자를 상좌부(上座部: 장로를 중심으로 한 지도층)라 하고 후자를 대중부(大衆部: 젊은 승려를 중심으로 한 일반층)라 한다.
부파 발생의 원인은 부처의 교설을 받아들이는 자세와 교단질서확립에 대한 의견 차이에서 유래되었다. 불멸 후 100년경 베샬리(vaisali)에서 비구의 ‘10사(事)’를 두고 합법임을 주장하는 측과 비법(非法)이라고 반대하는 측이 대립되어 분열된 것이다. 비법이라고 주장한 측이 700명의 비구를 모아 집회를 열었는데 이것이 ‘제2결집’이다.
이때 상좌부는 윤회로부터 해탈하는 길은 감각적 욕망의 근원을 끊기 위해 엄격히 계율을 지키는 출가자의 수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고, 그 목표는 마음과 육체의 안정을 얻어 최고성자인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부처도 아라한에 이른 성자의 한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대중부에서는 중생도 본질적으로는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여, 중생과 부처가 동일한 것이며, 따라서 윤회가 그대로 열반이라는 이론을 전개할 근거를 마련하였다.
부파는 계속 분열되어 서력기원을 전후하는 시기에는 각각 18개 또는 20개 정도의 부파를 형성하였다. 최초의 근본분열은 계율해석의 학술상 차이에 있었지만, 이 시기에는 학설보다 지도자인 장로(長老)를 중심으로 하여 조직체계를 달리하였거나 지리적으로 너무 떨어져서 새로운 부파를 형성하는 일도 많았다.
대표적 부파로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독자부(犢子部)·설산부(雪山部)·화지부(化地部)·음광부(飮光部)·경량부(經量部) 등이다. 이와 같은 불교의 부파적 전개는 외적 확대와는 달리 부처님 당시의 순수성이나 참신함을 잃고, 율(律)과 경(經)에 대한 훈고학적인 주석학을 중심으로 하는 아비달마(阿毘達磨: 論藏) 불교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또한 불교는 승원(僧院) 중심, 출가 중심의 학문불교로 변화하여 대중성을 잃어갔고, 일부에서는 저급한 미신적 신앙에 친화감을 가지게 되어 석가 당시의 탄력성을 잃고 말았다.
이러한 경향에 대립해 불교 본래의 모습으로 복귀하려는 운동이 진보적 입장을 대표하던 대중부 및 재가(在家)의 불교도가 주동이 되어 일어났다. 이것을 대승불교운동이라고 한다.
[1.3. 대승불교의 흥기]
대승불교가 흥기한 것은 서기전 1세기경이나, 움직임의 태동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대승불교의 대두로 인하여 이전의 상좌부를 중심으로 한 불교를 통칭하여 소승불교라 불러, 대승불교와 함께 오늘날까지 불교의 성격을 규정하는 2대유파로 보게 되었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대두로 소승불교가 쇠퇴 또는 소멸의 길을 달린 것이 아니라 서로 정통을 주장하며 계속 부파로서의 발전을 보였고, 그러한 세력은 스리랑카를 위시한 남방제국으로도 퍼져나갔다.
스리랑카의 경우 부다다타(Buddhadatta)·부다고샤(Buddhaghosa)와 같은 학자들에 의해 수많은 주석서들이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소승불교의 기지로서 태국·미안마·캄보디아·라오스 등지에 남방불교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소승에 대한 대립적 자세를 취하며 일어난 대승불교는 종래의 관점을 혁신하였다. 수행관(修行觀)에 있어서 자기해탈을 주장하는 대신 대중의 구원을 선행시킬 것을 주장하였고, 열반의 상태에 안주해 버리는 소승의 최고성자 아라한 대신에 보살(菩薩)이라는 새로운 이상적 인간상을 제시하였다. 또 이미 열반에 들어간 역사적 부처 대신에 미래의 초월적 불신관(佛身觀)을 내세웠다.
이러한 변화는 쟈타카(jataka: 本生譚), 아바다나(avadana: 譬喩文學) 및 아비달마의 우주론의 확립과 더불어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상이 조직적으로 종합되면서 새로운 대승경전이 만들어졌다.
1세기 후반에 쿠샨왕조가 성립되고 제3대 왕인 카니슈카(Kanishka)가 즉위한 뒤 불교는 또 한 차례 흥왕기를 맞게 된다. 북인도의 대부분과 서인도 북반(北半), 중앙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던 카니슈카 왕은 국내 각지에 불탑(佛塔)과 사찰을 건립하고 적극적인 불교보호정책을 썼다.
이때 불교는 파르티아(Parthia)·속디아(Sogdia)지방에까지 보급되었고 이 시기부터 이곳의 학승(學僧)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불전 번역에 종사하였다. 그것은 쿠샨왕조의 영토가 광대하여 중국의 문화와 쉽게 닿을 수 있는 구실을 하였기 때문이다.
간다라지방에서 마투라지방에 걸치는 지역은 아직 부파불교가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어 설일체유부를 위시한 대중부·음광부·법장부·화지부 등 여러 부파불교가 병립한 상태에 있었고, 그 중 설일체유부가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파가 중심이 되어 아비달마불교를 더 한층 발전시켜, 그 결과 유부(有部) 학설의 총서인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이 카슈미르지방 학승들의 손에 의해 편찬되었고, 이 논서를 중심으로 한 학문경향이 성행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부파불교적 경향이 지배적인 시기에 대승운동은 계속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리하여 서기전 3세기에서 서기 1세기 사이에 대승운동의 결실이라 할 수 있는 수많은 대승경전들이 출현하였다.
초기 대승경전 가운데 중요한 것들은 『반야경』·『법화경』·『유마경』·『아미타경』·『십지경(十地經)』 등이다. 이 가운데 『반야경』은 대승경전을 대표하는 경전으로, 이 경전에 실린 공사상(空思想, 中觀思想)은 대승불교의 기본적 교리로서 불교사상의 근본 사조를 이루었다.
그 뒤 이 공사상을 확립한 대표적 인물은 남인도 출신의 용수(龍樹)로서 그의 『중론송(中論頌)』은 부파불교가 지닌 오류를 결정적으로 논박하였다.
용수 이후에 여래장사상을 천명한 『승만경(勝鬘經)』·『해심밀경(解深密經)』·『능가경』 등이 나타나고 있으며, 특히 『해심밀경』의 유식설(唯識說)은 270∼480년 사이에 미륵(彌勒)·무착(無着)·세친(世親) 등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된 사상으로, 용수의 공사상과 함께 불교사상의 2대 조류를 형성하는 학설이 되었다.
용수는 불교의 기본교리인 연기(緣起)를 보다 심오한 체계로 전개하여 경험에 나타난 모든 대립을 부정하는 절대적 일원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대립의 도식(圖式)을 생과 멸(滅), 오는 것과 가는 것, 중단과 계속, 같은 것과 다른 것 등으로 분류하였고 중생과 부처, 윤회와 열반은 본질적·일원적 입장에서 동일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이 본질적 동일성을 아는 지혜가 반야라고 하였다.
또한 용수의 학설과 항상 대립되는 입장을 지닌 무착과 세친의 유식사상은 용수의 절대적인 일원론의 입장을 시인하면서도 인간 존재의 구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려고 상당히 복잡한 관념론을 내세웠다.
그들은 이 세상이 사유적 구성(思惟的構成)으로 되었다고 주장하고, 사유를 떠나서는 외계(外界)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결국 외계라고 생각하는 것도 주관적 사유의 투영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의식의 흐름, 즉 아라야식(alaya識)뿐이라는 것이다. 즉, 아라야식이 새로운 행업(行業)을 쌓음으로써 일정한 경향을 형성하고, 이 형성에 의하여 사람의 성격도 결정된다고 보았다.
공사상과 유식사상은 세친 이후 2대학파를 형성하였고, 7세기에 이르기까지 이 두 학파는 인도 대승불교의 양대 산맥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관학파는 용수 이래 불호(佛護) 계통과 청변(淸辨) 계통으로 나뉘었고, 다시 전자는 월칭(月稱)과 적천(寂天)이 계승하였으며, 후자는 적호(寂護)와 연화계(蓮華戒)가 계승하였다. 유식학파는 세친을 계승한 진나(陳那) 계통과 덕혜(德慧)·안혜(安慧)의 계통으로 나뉘었고, 전자는 다시 호법(護法)과 법칭(法稱)이 계승하였다.
이 시기는 불교사상에 있어 난숙한 발달을 보인 시기였는데, 이들은 불교 내부에서 상호간 활발한 논쟁을 벌였을 뿐만 아니라 외부의 힌두교와 자이나(Jaina)교의 종파들과도 논쟁을 벌였다. 인도불교는 이와 같이 대승불교를 중심으로 발전을 계속하였고 그 학문적 전승을 위해 나란타사원이 국제대학으로서의 구실을 하였으며, 발라비사원도 불교학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종교적 열정은 감퇴되기 시작하여 종교생활은 나란타·발라비·비크라마시라와 같은 대학으로 집중되었고, 이른바 승단 중심의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4. 밀교의 성립]
7세기 중엽에서 말엽에 이르는 시기에는 새로운 불교의 대두를 보게 된다. 곧 밀교(密敎)의 발흥이다. 밀교사상은 석가 당시부터 주법(呪法)으로 전해오던 주구(呪句)·진언(眞言: mantra)·다라니(陀羅尼, dharani)를 송지(誦持)하면서 그것으로 마음을 통일하고 구경의 경지에 도달하여 불(佛)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불교의 일파이다.
7세기 중엽에 이르러 이러한 사상이 종합되어 『대일경(大日經)』·『금강정경(金剛頂經)』과 같은 문헌으로 나타남으로써 밀교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이 밀교도 대승으로 분류되고 있으나 대승불교의 퇴영적 일면을 드러내는 사상으로 평가된다. 그 발생 이유는 세친 이후 대승불교가 지나친 철학적·이론적 경향으로 흘러 일반대중과 멀어졌고, 마침내 아비달마불교가 빠진 것과 동일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당시 인도에서 탄트라(tantra)문학이 유행하게 됨에 따라 불교의 밀교적 전개가 촉진된 것이다. 특히 중관사상이 밀교화되었으며, 따라서 밀교는 힌두교사회에서 환영받아 급속히 보급되었다. 8세기 후반에 와서는 밀교가 대중화됨과 동시에 저급한 의례를 도입하기까지 하였다.
밀교의 대중화는 또 다른 불교유파인 금강승(金剛乘)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 운동을 일으킨 사람은 인드라부티(Indrabhuti)였다. 그의 아들 연화생(蓮華生)은 밀교를 티베트로 전하였고, 이때 인도로부터 다수의 고승이 티베트에 들어가 밀교를 중심으로 한 대승불교를 전파하였다.
그러나 티베트에는 이미 중국에서 온 학승들이 있었는데 이들과 인도학승 사이에 견해 차이가 생겨 혼란을 일으켰다. 이에 티손데첸왕은 수도 라사(Lhasa)에서 회의를 열어 논쟁을 매듭지었다.
그 결과 인도측 점문파(漸門派)의 설이 인정되고 중국의 돈문파(頓門派)의 설이 배척되어, 티베트 불교는 인도 후기의 불교의 성격을 그 주류로 삼게 되었다. 티베트로 들어간 밀교는 머지 않아 라마교로 발전하게 되었고, 그것은 티베트 고유의 종교로 정착하게 된다.
[1.5. 인도불교의 쇠퇴]
금강승불교가 팔라왕조(750∼1199)의 보호를 받으며 마가다지방과 서벵골지방에서 영향을 끼치고 있었으나, 이때의 불교는 거의 힌두교나 다를 것이 없는 상태로 변질되어 버렸다. 불교의 세력은 오히려 중국·우리나라·일본에서 흥왕을 보았다.
이와 같이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한 것은 불교 자체가 내적으로 변화를 일으켜 미륵불·관음보살·대일여래 같은 불보살들이 힌두교의 여러 신들과 거의 같은 성격과 기능을 가지게 된 점에 있다.
또한 10세기 말에, 아프가니스탄지방에 있던 터키계의 가즈니왕조는 1001∼1027년에 17회나 북인도를 침략하여 많은 노예와 전리품을 얻어갔다.
그때 점령지는 오래 지배되지 않았으나 불교와 힌두교의 사원이나 성지에 대한 파괴와 약탈, 승려의 학살은 세계사상 그 유례가 드물 만큼 철저하였다. 그 뒤에도 이슬람교도의 침략과 파괴는 계속되었다. 1203년 비쿠라마실라사원의 파괴와 더불어 불교는 인도 본토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2. 중국불교]
[2.1. 불교의 전래와 역경사업]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연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이설이 있다. 다소 전설적인 것으로는 『위략(魏略)』의 서융전(西戎傳)에 나타나며, 그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2년에 대월지왕(大月氏王)의 사자 이존(伊存)이 불교를 전수하였다는 것이다. 그 뒤 65년에 후한 명제(明帝)의 이복동생인 초왕영(楚王英)이 황로(黃老)와 함께 불교를 믿었다고 한다.
이 같은 기록에서 불교는 서력기원을 전후하여 무역로인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의 북쪽 황하유역에 전수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150년대에는 안식국(安息國)에서 온 지루가참(支婁迦讖)이 『반주삼매경 般舟三昧經』이라는 대승경전을 번역하였다. 당시의 역경승(譯經僧)들은 인도·대월지국·안식국·강거국(康居國)에서 온 이방인들이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거꾸로 구도(求道)와 구법(求法)을 위하여 서역으로 향하였다. 위나라의 주자행(朱子行)을 비롯하여 많은 순례승들이 서역을 찾아나섰다.
처음 북부지역인 뤄양(洛陽)·장안(長安)에 전래되었던 불교는 그 뒤 역경승 지겸(支謙)이 오나라의 서울 건업(建業)에서 포교하고, 월남에서 북상한 강승회(康僧會) 역시 오나라에 들어와 포교에 종사함으로써 점차 남부중국에까지 교세를 확장하게 되었다.
특히 불도징(佛圖澄)은 중앙아시아의 구자국인(龜玆國人)으로서 신통력과 주술로 사람들의 신앙을 얻었고 국왕의 고문을 지냈다.
그의 제자 도안(道安)은 전진왕(前秦王)부견(符堅)의 신임을 받아 경전목록과 중국인 출가자를 위한 생활규범을 작성하였다. 또 도안의 제자 혜원(慧遠)은 여산(廬山)에서 백련사(白蓮寺)를 짓고 염불 중심의 결사운동(結社運動)을 전개하였다.
특히 혜원의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은 불교의 보편주의와 중국의 민족주의가 대립하면서 불교가 중국적 풍토에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호교적 논설이다. 또한 서진시대(西晉時代)에는 축법호(竺法護)가 『정법화경(正法華經)』·『광찬반야경(光讚般若經)』 등을 번역하였다.
이 무렵 중국의 일반 사상계에서는 노장사상(老莊思想)이 성행하였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불교를 노장사상에 의하여 이해하려는 풍조가 현저히 나타났다. 이를 격의불교(格義佛敎)라고 하는데, 불교사상의 공(空)을 노장사상의 무(無)와 대비하여 설명하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격의불교의 특징이다.
이는 불교가 중국에서 정착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였고, 동시에 중국 사대부층이 불교에 접근하는 길을 터놓은 것이다. 또 불교의 윤회사상이 도입되어 전생·현생·내세에 대한 인과응보 개념이 중국인의 생활에 깊이 뿌리를 내린 것도 이때였다.
중국불교의 역경사(譯經史)나 사상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남긴 인물은 구마라습(鳩摩羅什)이다. 중앙아시아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소승불교를, 나중에는 대승불교를 공부했던 그는 『대품반야경』·『금강반야경』·『묘법연화경』·『유마경』·『아미타경』 등의 대승경전과 용수의 『중론』·『십이문론』 등 중관학파(中觀學派)의 논서들을 번역하였다. 특히 중관사상은 그의 한역(漢譯)을 근거로 중국에서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그의 제자 승조(僧肇)는 『조론(肇論)』을 저술하여 중국인이 이해한 공사상을 피력하였다. 이 『조론』의 영향은 당대 이후 중국불교사상계를 풍미하였고, 구마라습이 번역한 『중론』·『십이문론』은 중국의 삼론종(三論宗)을 전개시키는 근거가 되었다.
또한, 동진시대(東晉時代)의 역경승이었던 불타발타라(佛駄跋陀羅)는 후대 화엄종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이 된 『화엄경』을 번역하였다.
담무참(曇無讖)은 『열반경』을 번역해서 중국불교에 ‘일체의 중생에게는 모두 다 불성이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는 사상을 전래하여 불성설(佛性說)의 전개를 위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 역경승 진제삼장(眞諦三藏)은 『섭대승론(攝大乘論)』 등의 유가학파 경전을 번역하였을 뿐 아니라,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의 대표적인 논서인 『대승기신론』을 번역하여 당나라의 화엄종 성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 경전들은 역경이 이루어진 것과 거의 같은 시기 또는 100∼200년의 간격을 두고 모두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으며, 우리나라 고승들에 의해서 깊이 있게 연구되고 유포되었다. 이들 경전들은 우리나라 불교의 여러 종파의 근본경전으로 채택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불교사상의 골격이 되었던 것이다.
[2.2. 육조시대의 불교]
육조시대(六朝時代)라 함은 강남(江南)의 건업(建業)에 도읍을 두었던 육왕조시대(六王朝時代)를 말한다. 육조는 강남 땅에서 번영한 귀족정치·귀족문화라는 공통성에 착안한 문화사적인 명칭이다.
육조불교의 특색은 육조문화의 일반적인 특색과 마찬가지로 귀족적·고답적·학술적이었으므로 북조(北朝)의 국가적·주술적·실천적인 불교와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남조에는 족벌귀족이 광대한 장원을 소유하고 제왕 이상의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그들은 높은 고전적 교양을 몸에 지니고 현학(玄學)을 숭배하며 청담을 즐겼다.
불교도 이들에게는 방외은일적(方外隱逸的:세상 밖의 뛰어난 것)인 것으로 받아들여져서 『유마경』과 『반야경』 등이 애호되었다. 격의불교가 성행된 것도 이때였다.
여산의 혜원(慧遠)이 “사문(沙門)은 방외(方外)의 빈(賓)이므로 세속적 정치권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게 된 것도 그 자신이 동진의 귀족사회에 몸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육조시대의 불교는 전반적으로 지배자들의 보호를 받아 정치에 참여하는 승려도 많았을 뿐 아니라 북조에서 있었던 폐불(廢佛: 북위의 태무제, 북주의 무제 등이 사원·불당·불상·불경 등을 파괴하고 승려들을 환속시키며,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장원과 노비를 몰수한 불교탄압사건)도 없었고, 왕후·귀족에 의하여 웅대한 사원이 건립되어서 불교의 연구시대라고 칭할 만큼 경론의 연구와 강설이 성하였다.
제(齊)나라의 태자 문혜(文惠)와 동생 숙자량(肅子良)은 열렬한 불교신자로서 많은 학승을 가까이 하여 강석(講席)과 법회를 설치하고 불교서적의 편찬사업을 행하였다.
양(梁)나라의 무제(武帝)는 남조의 여러 제왕들 중에서도 높은 교양을 가지고 있어서 불교의 교리에도 정통하였다. 그는 스스로 『단주육문(斷酒肉文)』을 저술하고 대사원을 건립하였으며, 육지나 물에 있는 고혼을 제도하는 법회인 무차대회(無遮大會)를 10여 차례나 열었다.
역경사업도 육조시대에 가장 성행하였다. 앞에서 열거한 외에도 강량야사(畺良耶舍)·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등의 외국승과 법현(法顯) 등의 중국승이 활약하였다.
또한 양대(梁代)에는 승황(僧晃)·법운(法雲)·지장(智藏)의 3대법사가 출현하고, 또 불교사가로 유명한 승우(僧祐)는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과 『홍명집(弘明集)』 등의 많은 저술을 남겼다. 『고승전(高僧傳)』을 지은 혜교(慧皎)도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다.
[2.3. 수·당의 불교]
수나라와 당나라는 중국 불교가 새로운 전개를 보이게 된 시대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불교에 가장 큰 폭으로 영향을 미쳤던 것도 이 시대의 불교이다.
남북의 분열을 통일한 수나라와 그 뒤를 이은 당나라는 통일국가의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불교를 요청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특정의 경론에 입각한 새로운 조직화가 진행되었다. 그 대표적인 특색이 종파불교(宗派佛敎)이다.
수·당 이전에도 비담종(毘曇宗)·섭론종(攝論宗)·성실종(成實宗)·지론종(地論宗)·열반종(涅槃宗) 등의 종(宗)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학파라고 불러야 할 것이고, 후대에 생겨난 종파와는 다른 것이었다. 학파로부터 종파로의 발전을 촉진한 계기가 된 것은 사원경제의 독립과 교판(敎判)의 확립이다.
수나라의 지의(智顗)가 대성한 천태종이 『법화경』을 지상으로 하는 독자적인 교판을 확립하여 처음으로 종파를 만들었다. 당나라 때에는 법장(法藏)이 『화엄경』을 중심으로 불교를 체계화하여 화엄교리를 완성하였다.
또한 도선(道宣)은 계율(戒律)을 연구하여 율종(律宗)을 창시하였고, 현장(玄奘)과 규기(窺基)는 인도의 새로운 유가유식설(瑜伽唯識說)을 기초로 하여 법상종(法相宗)을 열었다. 아울러 선무외(善無畏)·금강지(金剛智)·불공(不空) 등이 들여온 밀교의 융성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천태종과 화엄종이 수·당불교의 사상적 절정이라고 한다면 선종(禪宗)과 정토교(淨土敎)는 불교의 중국화와 민중화에 커다란 구실을 하였다. 선종은 5조 홍인(弘忍)의 무렵에 이르러 도속(道俗)의 귀의자가 급증하게 되었고, 6조 혜능(慧能)은 그때까지 없었던 도시에 대한 포교를 중시하였다.
홍인으로부터 갈라지게 된 혜능의 계통은 남종선(南宗禪)이라 불리고, 신수(神秀)의 계통은 북종선(北宗禪)이라 불렸는데, 이 두 파는 처음 대등한 교세를 유지하였으나 얼마 뒤에 북종은 쇠퇴하고 말았다.
정통교는 담란(曇鸞) 이후 도작(道綽)·선도(善道)가 나와 구칭염불(口稱念佛)을 보급함으로써 무지한 민중들의 환영을 받아 많은 신자를 획득하였다.
845년의 폐불과 연속된 전란으로 말미암아 불교는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었으나,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한 선종과 민중의 마음속 깊이 파고든 정토교는 그 세력을 더하여갔다. 수·당의 불교는 중국불교 융성의 정점에 위치한다.
2.3.1. 선종의 발달
선(禪)은 인도에서 기원된 것이나 중국에 전해져서 새로운 발전을 보게 되어 유력한 종파의 하나가 되었다. 선종의 조사(祖師)인 보리달마(菩提達磨)는 이입사행설(二入四行說)에 입각한 좌선을 권장하였다. 선종은 그 뒤 혜가→승찬→도신→홍인에게 차례로 전해졌고, 홍인의 시대에는 법회에 참가하는 이가 500명에 이르렀다.
당의 초기에는 신수의 북종과 혜능의 남종이 대립하여 분열되었다. 북종은 차츰 닦아 깨닫는 점오(漸悟)를, 남종은 단번에 깨닫는 돈오(頓悟)를 표방하였다.
혜능은 6조가 되어 그 문하에 회양(懷讓)·행사(行思)·신회(神會) 등이 있었고, 강서와 호남을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하였다. 그리고 백장(百丈)은 선원에 있어서의 규범이 되는 청규(淸規)를 만들었다.
특히 혜능 이후 5대에 걸쳐서 위앙(潙仰)·임제(臨濟)·조동(曹洞)·운문(雲門)·법안종(法眼宗)의 5가(家)가 성립됨으로써 송대(宋代) 이후 불교의 주류를 이루었다. 우리 나라는 6조 혜능의 남종선을 이어받아 신라 말에 선문구산(禪門九山)이 성립되었으며,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5가 중 임제종의 선을 이어받아 현재의 조계종(曹溪宗)에까지 그 맥락은 이어지고 있다.
2.3.2. 밀교의 발달
현교(顯敎)에 대응하여 불교의 비밀, 심오한 교리를 뜻하는 밀교가 처음 중국에 전래된 것은 동진시대의 전반에 백시리밀다라(帛尸梨密多羅)와 담무란(曇無蘭)에 의하여 『대관정신주경(大觀頂神呪經)』·『시기병경(時氣病經)』·『청우주경(請雨呪經)』 등의 많은 밀교경전이 번역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 경전은 병을 고치고 비를 오게 하는 주문이나 제천(諸天)의 위덕을 찬미하는 따위의 주문을 중심으로 삼고 있는데, 이것을 잡밀(雜密)이라고 한다. 이것은 주술적인 면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순수한 밀교라고는 말할 수 없으나 진언다라니(眞言陀羅尼)나 그 밀법(密法)은 중국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이와 같은 기반 위에 당나라 때의 선무외·금강지·불공의 3대사(三大士)에 의하여 밀교의 교리와 의식궤범·만다라 등이 조직되고 체계화되었다.
이들이 전한 밀교는 『대일경』이나 『금강정경』 등에 기초를 둔 인도의 정통밀교로, 잡밀에 대응하여 순밀(純密)이라고 부른다. 이 순밀 또한 선무외의 제자였던 불가사의(不可思議) 등에 의해 신라로 전래되었으나 종파로까지 발전되었음을 입증하는 사료는 찾아볼 수 없다.
2.3.3. 유·불·도 3교의 담론
당나라 중기부터 유교와 불교와 도교의 대표자들은 궁중에서 잦은 토론회를 가졌었다. 황제의 탄생일을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3교의 대표적인 학자들을 궁중에 초대하여 토론을 벌이는 행사가 매년 개최되었다.
3교의 담론은 당나라 초기 고조(高祖)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며, 고조는 624년에 박사(博士) 서광(徐廣)에게 『효경(孝經)』을, 사문 혜승(慧乘)에게는 『반야심경』을, 도사 유진희(劉進喜)에게는 『노자』를 각각 강의하게 하였다.
또 태종(太宗)은 639년에 공영달(孔穎達), 사문 혜정(慧淨), 도사 채황(蔡晃)의 3인에게 홍문전(弘文殿)에서 3교에 대한 담론을 하게 하였다.
그 뒤 대종·덕종·경종·문종·무왕·선종·의종·소종 등의 역대 황제들도 연례행사로 개최하였으나 차츰 형식화되면서 진지한 맛이 없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3교의 담론은 초기의 종교토론회 성격과는 달리 전혀 내용이 없는 궁중의례의 하나로 변질되고 말았다.
3교의 논쟁은 당나라 중기부터 격화되었으나 논쟁의 이면에는 서로 융합하려는 움직임도 있어서, 절에서는 노자의 상을 그려 붙이기도 하고 유자(儒者)나 도사로서 불교를 연구하여 출가하는 자까지 출현하게 되었다.
2.3.4. 교선일치(敎禪一致)
선종과 교종이 교세를 확장하여 가면서 말과 글을 통하여 가르침을 펴는 화엄종·천태종 등의 교종과, 말과 글에 의하지 않고 부처님의 마음을 전하고자 하는 선종이 서로 일치한다는 주장을 낳게 되었다. 교선일치의 주장은 당나라 중기의 화엄종 제4대조인 징관(澄觀)의 사상으로부터 싹이 터서 제5대조 종밀(宗密)에 의하여 명료한 형태로 나타났다.
종밀은 처음 선을 공부하고 뒤에 징관의 가르침을 받아 화엄교학에 정통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화엄과 선을 융합하여 일치시키고자 교선일치론을 주장하였다.
이 교선일치의 사상은 송대(宋代)에 이르러 차츰 뚜렷해져서 선종과 교종의 융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송나라 초기에 연수(延壽)가 주장한 교선일치를 비롯하여 천태선·화엄선·염불선 등이 두드러지게 유행하게 되었고, 교종을 배우는 자가 선문(禪文)을, 선에 몸을 담은 자가 교종의 제학(諸學)을 탐구하는 일도 흔히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의 의천(義天)과 지눌(知訥)이 교선일치의 사상을 깊이 포용하여 교관병수(敎觀竝修)·정혜쌍수(定慧雙修) 등을 주창함으로써 한국불교의 한 정통으로 정착시켰다.
[2.4. 송나라의 불교]
송나라의 불교는 염불선(念佛禪), 송학(宋學)과 선(禪)의 교류, 거사불교(居士佛敎)의 성립, 백련교(白蓮敎) 등으로 집약된다.
2.4.1. 염불선
당나라 중기에 일어난 교선일치 운동은 송나라 때에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연수의 교선일치설이 확립되자 천태·화엄·정토종의 학도로서 선을 연구하거나 선가에서 교학을 공부하는 이도 출현하였다. 그리고 정토종은 특별한 하나의 종파로서보다는 이들 각 종파의 사람들이 염불신앙을 가지게 됨으로써 성행하게 되었다.
송대의 정토교도로서 유명한 이들 중에는 선종이나 천태종 출신자들이 많았고, 특히 천태종 계통의 정토교가 성행하였다. 선종에서는 염선일치(念禪一致)를 주창하려고 『종경록(宗鏡錄)』·『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을 지은 연수를 비롯하여 종이(宗頤)·종본(宗本)·법수(法秀)·의회(義懷) 등은 모두 염불선을 강조하였고 선정습합(禪淨習合)을 취했던 인물들이었다. 거사들로는 양걸(楊傑)·왕일휴(王一休) 등이 유명하다.
이와 같은 풍조는 선종을 더욱 성행하게 하였으며, 이러한 인물들이 일반 사회의 종교로서 민중 속에 깊이 뿌리를 박고 애호되고 보급되었던 정토교를 배워 매일의 일과로서 아미타불의 이름을 외게 됨에 따라 염불선이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명대(明代) 와서도 역시 선정융합(禪淨融合)의 형태인 염불선이 성행하였으며, 청조(淸朝)의 옹정제는 스스로 원명거사(圓明居士)라 칭하고 염불선을 고취하였다. 민간에서는 명나라 이후 이와 같은 염불선을 중심으로 불교가 신봉되고 실천되었다.
2.4.2. 선과 송학(宋學)
송나라 때에는 훈고학(訓詁學)을 탈피하고 성(性)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성리학이 나오게 되었는데 이를 ‘송학’이라고 한다. 송학자들 중에는 학문과 실천의 방법으로서 참선을 익힌 이들이 많다.
주돈이(周敦頤)는 귀종사의 불인(佛印)과 동림사의 상총(常總)으로부터 불교의 학문을 배웠고, 장재(張載)도 상총에게 배웠으며, 정이(程頤)도 선을 배웠다.
특히 주자(朱子)는 어릴 때부터 종고(宗杲)의 『대혜어록(大慧語錄)』을 애독하고, 당나라의 선사인 위산(潙山)의 사상을 사랑하였다. 선이 당시의 이름 있는 유학자를 사로잡게 된 이유는, 선이 간단명료한 교리에 의거하여 적절한 수행방법으로 지심견성(指心見性)을 터득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당시에 차차 정비되어 간 승원(僧院)은 다른 종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고, 그 중에도 초범탈속(超凡脫俗)한 고승들이 많이 배출되어 후배를 지도하였고, 기지에 차고 준열한 문답과 대담이 가득찬 선가(禪家)의 어록에는 청신하고 기발한 문자가 약동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선종의 제1서라고 일컬어지는 『벽암록(碧巖錄)』과 당나라 중기 이후에 처음으로 교계의 표면으로 나타난 『능엄경』은 많은 사람에게 애독되었고, 거사(居士)로서 주석서를 남긴 이들도 있다.
송나라 이후 명·청나라 때에도 중국불교는 삼종일원(三宗一源)·민간불교 등의 독특한 성격을 띠면서 발달하였으나, 우리나라는 조선시대의 배불정책으로 불교가 쇠퇴되어 명나라 이후의 중국불교는 우리나라에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인도의 불교가 원류로서 한국불교의 뿌리를 점한 것이라면 중국불교는 각 시대마다 한국불교가 새로운 옷을 입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고, 고려 말까지 중국불교의 큰 특색은 우리 나라에 수용, 변형되어 새로운 물결을 조성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
우리나라의 불교는 인도나 중국 불교의 단순한 연장이나 퇴화가 아니다.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는 육로 또는 해로를 통해서 만주대륙과 한반도 등의 우리 민족문화권에로 동류(東流)한 뒤, 우리나라의 지역과 풍토 및 민족성 안에서 독특하게 전개되었다.
[1. 전래]
삼국 가운데에서 제일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고구려이다. 372년(소수림왕 2) 여름인 6월,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은 순도(順道)를 시켜 불상과 불경을 고구려에 전하였다.
이에 소수림왕은 사신을 보내서 감사의 뜻을 표하고, 순도로 하여금 왕자를 가르치게 하였다. 2년 뒤인 374년에는 진나라의 승려 아도(阿道)가 고구려로 왔다.
소수림왕은 그 이듬해 봄에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伊佛蘭寺)를 세우고 순도와 아도를 각각 그 절에 머물도록 하였다. 이 두 절은 우리나라에 세워진 최초의 절이다.
고구려에서 처음 받아들인 불교는 ‘인과적(因果的) 교리로서의 불교’ 또는 ‘구복(求福)으로서의 불교’라 하는데, 이는 재래의 토속신앙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삼국 중에서 고구려가 불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여 새로운 관념형태를 형성함으로써, 삼국 중 가장 먼저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형성의 기틀을 잡게 된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391년(고국양왕 8)에는 영을 내려서 불교를 숭신(崇信)하여 구복하게 함으로써 불교를 더욱 장려하였다.
백제에는 고구려보다 12년 뒤인 384년(침류왕 1)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인도의 고승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晉)으로부터 바다를 건너서 서울인 광주(廣州)의 남한산으로 들어오자 왕은 그를 궁 안에 머물도록 하였고, 그 이듬해 10명의 백제인을 출가시켜 승려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뒤 160여 년이 경과한 성왕 때까지는 불교관계 기사가 전혀 보이지 않다가, 526년(성왕 4)에 인도로부터 귀국한 겸익(謙益)을 맞이함으로써 크게 발전을 보았다.
신라의 불교 수용은 순탄하지 않았다. 신라가 고구려의 세력을 배경으로 발전하고 있었던 눌지마립간 때에, 고구려로부터 묵호자(墨胡子)가 신라의 서북경지방인 일선군(一善郡:善山)에 들어와 모례(毛禮)의 집에 기숙하면서 불법을 전하였으며, 모례는 신라인으로서 최초의 신도가 되었다.
그때 중국의 사신이 향(香)을 가지고 왔으므로 묵호자가 나아가 분향예불(焚香禮佛)하는 법을 가르치고 공주의 병을 완쾌시킴으로써 신라왕실에서도 불교를 알게 되었으나 별로 신도를 얻지 못하였다.
그 뒤 소지마립간 때에 고구려에서 아도(阿道)가 들어와서 불법을 전도한 뒤로는 신봉하는 자가 늘어났다. 신라에 왔던 아도는 고구려에 왔던 중국승 아도와는 동명이인(同名異人)으로, 아도라는 이름은 머리가 없는 자라는 뜻으로 삭발승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로 보고 있다. 그 뒤에도 신라왕실은 불교공인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씨족중심 귀족들의 끊임없는 반대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씨족적 기반을 억누르고 중앙집권적 국가를 확립하고자 했던 왕실파(王室派)들은 법흥왕 중심으로 불교를 새 지배체제의 구축을 위한 정신적 지주로 삼아서, 왕법(王法)과 불법(佛法)을 동일시하고 부처의 위력을 왕의 위력으로 대치하여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520년(법흥왕 7)에 율령을 반포하여 국가조직에 관한 정비를 일단락 지은 법흥왕은 527년에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계기로 배불파(排佛派)를 제압하고 불교공인을 선포하였으며, 529년에는 영을 내려 살생을 금하도록 하였다.
이차돈이 순교한 지 7년 뒤에는 그가 절을 만들고자 했던 천경림(天鏡林)에 신라 최초의 절인 흥륜사(興輪寺)를 창건하였고, 법흥왕은 왕위를 진흥왕에게 물려주고 스스로 승려가 되어 법공(法空)이라고 불렀다. 이때의 불교는 ‘선행수복(善行受福)으로서의 불교’, ‘인과적 교리로서의 불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고구려의 경우처럼 토속신앙과 자연스럽게 혼합되었다.
[2. 삼국시대]
[2.1. 고구려의 불교]
2.1.1. 전개
고국양왕이 불교를 신봉하라는 영을 내린 이듬해인 392년(광개토왕 2)에는 평양에 9개의 절을 창건하였고, 395년에는 진나라 승려 담시(曇始)가 교화를 위해 고구려로 왔다.
담시는 불교의 교리연구 및 설법의 이해에 필요한 경률(經律) 수십 부를 가지고 왔고, 수계(授戒)를 베풀어 불제자가 되는 길을 트이게 함으로써 불교역사상 매우 중요한 계기를 맞게 하였다.
498년(문자왕 7)에는 대동강변에 금강사(金剛寺)를 창건하여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였으며, 576년(평원왕 18)에는 의연(義淵)을 중국 북제로 보내어 정국사(定國寺)의 법상(法上)에게 불기(佛紀) 및 중국의 불교전래 등 불교의 역사전개와 교학(敎學)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를 배우게 하였다.
그는 대승론서(大乘論書)의 저자 및 저술 연기(緣起), 그 저술이 갖는 영험 등에 관한 것을 자세히 배워가지고 돌아왔는데, 그가 관심을 가지고 새로 가져온 경론(經論)들은 후일에 신라의 학승들이 철학의 전거로 삼아 빛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구려의 불교도 27대 영류왕 때에 들어온 도교의 득세로 말미암아 점차 빛을 잃고 말았다. 도교는 624년(영류왕 7)에 들어왔으며, 643년(보장왕 2)에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당나라로부터 숙달(叔達) 등 8명의 도사와 『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을 받아들인 뒤부터는 불교를 박대하였다.
사찰을 몰수하여 도관(道館)으로 삼았고 그때까지 불교인을 대우하던 자리에 도교인을 앉히는 등 불교에 대한 박해가 극심하였다.
이 갑작스러운 변동에 불교인들 중에는 견디다 못해 외국으로 망명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특히 보덕(普德)은 이를 고구려 멸망의 징조로 여기고 여러 차례 조정에 간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당시 백제 땅인 완산주(完山州: 全州)의 고대산(孤大山, 高達山)으로 옮겨가고 말았다. 그 뒤 고구려는 곧 멸망하게 되었다.
2.1.2. 구법(求法) 및 전교활동
고구려의 승려가 외국으로 나가서 불교문화활동을 한 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중국으로 가서 구법활동을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에서의 전교활동(傳敎活動)이다.
중국으로 가서 법을 구한 승려는 의연을 비롯하여 몇 명의 이름이 보이고 있다. 고구려의 고승이었던 승랑(僧朗)은 장수왕 말년경에 중국으로 가서 삼론학(三論學)을 공부한 뒤 중국 삼론종의 종주(宗主)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삼론(新三論)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하여 확립시켰다.
삼론종은 『중론(中論)』·『십이문론(十二門論)』·『광백론(廣百論)』의 삼론에 의거하여 반야중도사상(般若中道思想)을 강조한 종파로서, 승랑 이전까지는 삼론과 『성실론(成實論)』을 함께 취급하여 학적인 분리 및 연구가 없었으나, 승랑이 『성실론』을 삼론과 완전히 분리시키고 새로운 학적 체계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한국인으로서 중국인을 가르친 승랑이 중국불교계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이 밖에도 일찍이 중국에 들어가서 유명한 수나라의 지의에게서 공부한 뒤 그곳에서 영이(靈異)와 기서(奇瑞)를 보이다가 세상을 떠난 파야(波若)와 중국승려인 스승과 함께 인도로 갔던 현유(玄遊)는 사자국(獅子國: 스리랑카)에까지 가서 살았다고 전한다.
6세기 중엽 이래로 고구려의 왕실과 조정이 불교를 등한히하고 박해하는 태도를 노골화하자 많은 승려들은 고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제일 먼저 불교를 받아들였던 고구려에서 그 뿌리를 제대로 펴지 못한 채, 거기서 길러진 고승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다른 나라에서 그 뜻을 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 양원왕 때에 신라로 온 혜량(惠亮)은 찬란한 신라불교의 밑거름 구실을 하였다.
일본 포교에 힘쓴 고구려 승려들로서는 혜편(惠便)·혜자(惠慈)·승륭(僧隆)·담징(曇徵)·혜관(慧灌)·도등(道登)·도현(道顯) 등이 있다. 혜편은 584년에 소가노우마코(蘇我馬子)의 요청으로 시바다쓰(司馬達)의 딸인 선신(善信)과 선장(禪藏)·혜선(慧善)을 가르쳐 출가시킴으로써 일본 귀족들의 존숭을 받았다. 그가 일본 최초의 비구니를 탄생시킨 것이다.
혜자는 595년 고구려의 승려로서 일본에 귀화하여 불교를 크게 진흥한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스승이 되었으며, 백제의 승려 혜종과 더불어 호코사(法興寺)를 창건하였다. 이 절은 뒤에 계속 많이 건너온 고구려와 백제 승려들의 거처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일본을 불교화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또 담징은 유교의 오경(五經)에 통달해 있었을 뿐 아니라 공예·채색·지묵(紙墨)에도 능하여 일본미술사의 선구적 구실을 하였다. 혜관은 쇼토쿠태자가 창건한 강코사(元興寺)에 머물면서 반야중도사상을 천명하고 삼론(三論)을 강의하여 심오한 불교철학을 일본에 심어준 승려이다.
일본의 사서(史書)에는 큰 가뭄을 맞았을 때 혜관이 기우(祈雨)를 하여 큰비를 내리게 한 공로로 승정(僧正)에 뽑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등 역시 삼론종의 승려로서 일찍이 당나라로 들어가 길장(吉藏)으로부터 삼론의 뜻을 배운 뒤 일본으로 건너가서 우지강(宇治川)에 큰 다리를 건설하였다. 이것은 하나의 다리로서가 아니라 중생을 피안으로 건네준다는 종교적 의미로 일본 왕의 고사(古史)에는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말년에 일본으로 건너간 도현은 칙명으로 다이안사(大安寺)에 머물면서 불법을 펴는 한편, 『일본세기(日本世記)』 등 몇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이 밖에도 적지 않은 승려들이 일본에 가서 활약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유학승을 보내어 고구려의 불교문화를 배워갔다.
[2.2. 백제의 불교]
2.2.1. 전개
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150년 동안의 불교사 변천은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 뒤 526년(성왕 4)에 겸익(謙益)이 인도에 갔다가 돌아와서 율종(律宗)을 시작하였다.
겸익은 인도의 상가나사(常伽那寺)에서 범어(梵語)를 배우고 특히 율부(律部)를 전공한 뒤 인도승 배달다삼장(倍達多三藏)과 함께 귀국하였다.
그는 범문(梵文)으로 된 율문(律文)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번역하여 72권으로 엮었으며, 담욱(曇旭)과 혜인(惠仁)은 그 율에 대한 소(疏) 36권을 지어 왕에게 바쳤다.
이는 인도로부터 직접 가지고 온 원전을 백제인의 손으로 번역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의의 있는 일이었으며, 백제불교가 계율주의적 경향을 띠게 하는 데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또한 541년(성왕 19)에는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열반경』 등 경의 뜻을 풀이한 의소(義疏)와 공장(工匠)·화사(畫師) 등 불교문화와 관련된 인물들을 청하여왔다. 552년(성왕 30)에는 불교를 일본에 전하였는데 그 뒤 많은 승려들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불교포교 및 예술의 발달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599년(법왕 1)에는 왕이 살생을 금하는 영을 내려 민가에서 기르는 조류(鳥類)까지 놓아주게 하였고 수렵도구는 모두 불태우게 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승려 30명을 배출시켰으며 왕흥사(王興寺)라는 큰 절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 해에 법왕이 죽자, 아들 무왕이 즉위한 지 35년 만에 선왕의 뜻을 이어 완공하였다. 물가에 세워진 이 절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하며,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이곳에서 놀기를 즐겼다고 한다.
또한 무왕 때에는 익산에 미륵사(彌勒寺)를 창건하였다. 무왕이 그의 비인 선화공주(善花公主)와 용화산(龍華山)으로 가는 도중에 못 속에서 미륵삼존불(彌勒三尊佛)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 왕비의 발원에 의하여 그 못자리에 이 절을 세웠다는 전설이 전하는데, 지금도 그 절터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석탑이 남아 있어 당시의 웅대했던 모습을 알 수 있다. 무왕 때의 고승으로는 지금의 충청남도 수덕사(修德寺)에서 『법화경』을 독송하면서 삼론(三論)을 연구했던 혜현(惠現) 등이 있었다.
『주서(周書)』 이역전(異域傳)에는 백제에 승려와 사탑이 매우 많았고 불교문화가 대단히 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의자왕 때 백제가 멸망함에 따라 그 명맥은 끊어졌지만, 백제의 불교는 일본에서 찬란히 꽃을 피웠으며 현재에도 일본에는 많은 흔적들이 남아 있다.
2.2.2. 전교활동
백제 승려 중 해외로 유학한 승려는 겸익과 현광(玄光)이 있었다. 현광은 중국에 가서 혜사의 제자가 되어 『법화경』 안락행품(安樂行品)의 법문을 은밀히 받고 법화삼매(法華三昧)를 증득한 뒤 귀국하여 고향인 웅주(熊州) 옹산(瓮山)에서 교화활동을 크게 펼쳤다. 그러나 백제불교의 해외활동 중 가장 손꼽히는 것은 일본에의 전교활동이다.
일본인들에게 불교를 처음으로 전래하여 준 이는 백제의 성왕이었다. 성왕은 일본의 서부희(西部姬)에게 달솔(達率) 사치계(斯致契) 등을 보내는 한편, 금동석가상 1구와 미륵석불, 번개(幡蓋), 경론(經論) 약간 권을 함께 보내었다.
그러나 일본의 군신들은 이를 믿고 사용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소가노우마코숙이(蘇我馬子宿禰)만이 이를 존경하여 이시카와가(石川家)에 불전(佛殿)을 만들고 안치하였으나 불경과 불구들의 의미는 알지 못하였다.
그때 환속하여 하리마국(播磨國)에 와 있던 고구려의 승려 혜편(惠便)에 의해 발견되어서 그의 가르침을 받고 세 사람의 비구니가 출현하였으며, 소가노우마코와 시바다쓰 등의 불교신자가 생기게 되었다.
또한 성왕은 554년에 담혜(曇惠)·도심(道深) 등 16명의 승려들을 일본에 보내어 교화활동을 하게 하였다. 557년(위덕왕 4)에는 또다시 경론과 율사(律師)·선사(禪師)·비구니·주금랑(呪禁朗)·불공(佛工)·사장(寺匠) 등을 일본으로 보냈다.
당시 일본은 쇼토쿠태자가 불교를 크게 숭상하여 각처에 큰 가람을 세우고 있었던 때였으므로 토목(土木)·와공(瓦工) 등의 많은 공인이 필요하였다. 이들 백제인들은 난바(難波)의 대별왕사(大別王寺)에 머물면서 불교진흥에 크게 공헌하였다.
또한 588년에는 불사리(佛舍利)와 승려·사공(寺工)·화공(畫工)·와장(瓦匠) 등을 일본에 보냈으며, 일본에서는 선신니(善信尼) 등의 승려들이 백제로 건너와서 3년 동안 계율을 배우고 돌아갔다.
이 때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승은 혜총(惠聰)·영근(令斤)·혜식(惠寔)·영조(聆照)·영위(令威)·혜숙(惠宿) 등이다. 이 백제의 승려들은 일본인 신도들에게 직접 수계의식을 집행하여 일본승려의 탄생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601년(무왕 2)에는 삼론에 뛰어난 학자이면서 명의(名醫)이기도 하였던 고승 관륵(觀勒)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천문·지리·역서·둔갑(遁甲)·방술서(方術書) 등을 전하는 한편 불교문화진흥에 많은 공을 세웠다.
이 해에 일본에서는 승려가 도끼를 가지고 할아버지를 타살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에 승려들을 감독할 필요를 느껴 승정(僧正)·승도(僧都)·법두(法頭) 등의 직제를 마련하여 승려의 기강을 세우게 하였다. 이때 관륵은 승정, 고구려의 덕적(德積)은 승도, 백제의 연충(連充)은 법두가 되었다.
그 밖에도 일본의 자료에 의하면 담혜(曇慧, 일본에 간 해는 554년)·일라(日羅, 551년)·풍국(豐國, 587년)·혜미(慧彌, 609년)·법명(法明, 655년)·의각(義覺)·도장(道藏, 684년)·도령(道寧, 684년)·다상(多常, 690년)·원각(願覺, 690년)·원세(願勢, 690년) 등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인들의 생활 및 불교문화의 향상에 크게 기여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법상(法相)과 구사학(俱舍學)·삼론학(三論學) 등에 능했던 도장은 『성실론소(成實論疏)』 16권을 찬술하였으며, 비구니 법명은 『유마경(維摩經)』을 독송하여 병자를 고쳤다고 한다.
백제의 승려들은 일본의 불교를 중흥하는 주춧돌 구실을 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문화의 원류(源流)를 우리나라에서 찾게 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2.3. 신라의 불교]
2.3.1. 진흥왕대의 불교
신라의 불교는 법흥왕에 의해서 크게 발전하는 길이 개척되었으나, 불교를 진흥시켜 불교국가로 손색없는 기반을 닦아놓은 것은 진흥왕에 힘입은 바 컸다.
554년(진흥왕 15) 흥륜사의 낙성과 더불어 왕은 국민들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국법으로 허락하였다. 549년에는 양나라로 유학갔던 각덕(覺德)이 최초로 불사리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550년에는 불교의 제반 업무를 관장하는 행정기구인 대서성(大書省)과 소년서성(少年書省)을 설치하였다. 이듬해에는 신라로 귀화한 고구려 승려 혜량을 승통(僧統)으로 삼고 그 밑에 비구승을 관장하는 대도유나(大都唯那)와 비구니승을 관장하는 도유나랑(都唯那娘)을 두게 함으로써 교단을 지도, 육성하게 하고 통솔을 용이하게 하는 체제를 확립하였다.
565년(진흥왕 26)에는 진나라의 문제(文帝)가 승려 유사(劉思)를 신라의 유학승 명관(明觀)과 동행하게 하여 불교 경론 2,700여 권을 전하였다. 이것은 신라의 불교계에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게 한 일이다.
나날이 늘어가는 한역(漢譯)된 불교경전 중 중요한 문헌들이 곧 신라인들의 불교 이해를 돕게 된 것이며, 이때부터 신라에서는 본격적인 불교연구의 기틀이 잡히게 되었다. 당시 한반도 전체 불교계를 위해 유사와 명관의 기여는 대단히 막중한 것이었다.
또한 567년에는 14년의 공사 끝에 최대의 사찰이었던 황룡사(皇龍寺)를 비롯하여 기원사(祇園寺)와 실제사(實際寺)의 두 절을 세웠고, 574년에는 이 황룡사에 장륙(丈六)의 불상을 안치하였다.
이 장륙불은 금동불상으로 3만 5007근의 구리와 1만 198푼의 금이 들었으며, 좌우의 두 보살은 철 1만 2000근과 금 1만 130푼이 들었다고 한다.
572년(진흥왕 33) 10월에는 팔관지법(八關之法)과 인왕백고좌회(仁王百高座會)를 열어 신라 최초의 불교 호국도량(護國道場)을 개설하였다. 승통 혜량의 지도 아래 7일 동안 베풀어진 팔관지법은 이때 전몰장병의 위령제로 시작되었으나, 뒤에 민족의 축제인 팔관재(八關齋)로 바뀌게 되었다.
또 백고좌회는 원래 100명의 고승을 모아 불경을 강(講)하는 모임이다. 이때에 설법을 할 만한 100명의 고승이 이미 나타났었는지는 의문이지만 혜량과 그 밖의 몇 사람이 주동이 되어 경전을 강하는 일종의 연구적 모임이었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576년에는 고승 안홍(安弘)이 중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불사리와 함께 『능가경(楞伽經)』·『승만경(勝鬘經)』 등 완숙한 대승경전을 가지고 오는 한편, 인도로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체류하고 있던 인도승 비마라(毗摩羅)·농가타(農伽陀)·불타승가(佛陀僧伽) 등과 함께 귀국하였다. 이들은 공식적으로 신라에 온 최초의 외국승려이다.
왕은 이 해에 머리를 깎고 사문이 되어 호를 법운(法雲)이라 하였으며, 왕비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永興寺)에 살았다고 한다.
이 밖에도 진흥왕의 불교진흥책에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국선(國仙)과 화랑도(花郎徒)의 창설이다. 화랑도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설이 있지만 역사적인 자료를 통해서 정확하게 살펴보면, 신라불교문화를 진흥시킨 진흥왕이 불교사상을 근간으로 하여 설치하였던 청소년 수양단체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는 진흥왕이 나라를 흥하게 할 목적으로 불교의 미륵사상(彌勒思想)과 이상국가사상인 전륜성왕사상(轉輪聖王思想) 등을 중심으로 해서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단체에서는 신라의 미륵을 상징하는 국선이 모든 무리를 통솔하고, 그 아래에 각각 소단체의 우두머리로 화랑이 있어서 자기 무리의 낭도(郎徒)들을 거느렸다. 또 낭도에는 일반 소년낭도와는 달리 한 사람의 승려가 낭도로 있으면서 국선을 보좌하였다.
이와 같은 화랑도의 불교적인 면을 뒷받침하는 많은 사료 중에서 미륵선화(彌勒仙花)와 화랑 김유신(金庾信)의 용화향도(龍華香徒) 및 진흥왕의 아들 동륜태자(銅輪太子)·금륜왕자(金輪王子)의 이름 등은 움직일 수 없는 대표적인 사실(史實)의 예증이다.
2.3.2. 진평왕대의 불교
진흥왕의 뒤를 이은 역대 왕들도 그를 본받아 불교문화를 진흥시켜서 훌륭한 고승들이 많이 배출되어 신라불교를 더욱 꽃피우게 되었다.
진흥왕의 뒤를 이은 진지왕 금륜은 진흥왕의 둘째아들로서 태자 동륜이 일찍 죽자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진지왕이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폐위되자 동륜의 아들 진평왕이 579년에 즉위하였다.
진평왕의 이름은 백정(白淨)으로서 석가모니의 아버지 이름인 백정왕(白淨王, 일명 淨飯王)에서 취한 것이고, 왕비도 석가모니의 어머니 이름을 그대로 취하여 마야부인(摩耶夫人)이라 하였다. 또한 진평왕의 아우 백반(伯飯)과 국반(國飯) 등도 인도 백정왕의 아우였던 백반왕 등의 이름에서 취한 것으로서, 이때의 왕실은 석가족의 왕명들을 그대로 따온 것이었다.
이러한 것은 왕즉불(王卽佛)의 사상을 표시한 것으로, 그 뒤를 이은 선덕여왕의 이름 덕만(德曼)과 다시 그 뒤를 이은 진덕여왕의 이름 승만(勝鬘)도 다같이 불교에 연원을 두고 있다. 특히 승만은 『승만경』의 여주인공인 승만부인의 이름을 취한 것이다.
이 진평왕 때에는 원광(圓光)·담육·지명(智命) 등의 고승들이 활동하였던 시기이다. 지명은 585년(진평왕 7)에 진나라로 가서 18년 동안 공부한 뒤 귀국한 고승으로, 무엇보다도 계행(戒行)이 깨끗하기로 유명하였다.
진평왕은 그에게 대덕(大德)을, 나중에는 대대덕(大大德)의 계위를 주어 존경하였다. 또한 596년에 수나라로 들어가 유학을 하고 605년에 귀국한 담육 지명과 견줄 만한 이 시대의 고승이었으나 그가 어떤 분야에서 활약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이 시대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긴 고승은 원광이다. 그는 589년(진평왕 11) 중국에 가서 불법을 깊이 공부하고 교화활동 등으로 이름을 떨치다가 600년에 신라로 돌아왔다. 그가 남긴 큰 업적은 첫째, 대승의 경교(經敎)를 강설하여 대승의 법문을 펴고 크게 교화하였다.
둘째, 불교의 국가적 적응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608년에 고구려를 치기 위하여 수나라에 청병(請兵)하는 글인 걸사표(乞師表)를 써달라고 왕이 부탁하였을 때, 승려로서 자기 나라를 이익되게 하기 위해 남의 나라를 멸망시켜 달라는 글을 쓸 수가 없지만 신라의 백성이기 때문에 백성의 도리로서 왕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걸사표를 써주었다.
셋째,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설한 점이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며, 벗을 믿음으로 사귀고, 싸움터에 나가면 물러서지 말아야 하며, 살생은 가려서 하라는 이 세속오계는, 평생의 교훈이 될 만한 가르침을 청하는 귀산(貴山)과 취항(箒項)에게 세속인으로서 지켜야 할 것을 일러주어 백성의 도리를 다하게 한 것이다.
이것은 원광이 새로 제정한 것도 아니며 불경에 있는 말 그대로도 아니다. 그때까지의 신라 사람들에게 오래 내려오던 미덕들을 원광이 덕목화(德目化)하여 평생을 지킬 교훈으로 삼게 한 것이다. 그의 장례는 국장(國葬)으로 베풀어졌고, 왕과 동등한 대접을 받았다.
2.3.3. 통일 전까지의 불교
진평왕 이후 신라가 반도를 통일하기까지인 632∼668년의 36년 동안에는 선덕여왕·진덕여왕의 두 여왕과 태종무열왕의 치세가 전개되었고, 마지막으로 문무왕이 그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선덕과 진덕의 두 왕은 여왕이었으나 그 속명(俗名)까지도 인도불교의 경전 속에 나오는 성녀인(聖女人)의 이름을 본떠서 지을 정도로 신앙심이 깊은 독신자였다.
선덕여왕 때에 서라벌에는 분황사(芬皇寺, 634년)와 영묘사(靈妙寺, 635년) 및 황룡사의 9층탑이 조성되었고, 태종무열왕 때에는 한산주(漢山州)에 장의사(壯義寺, 659년)가 창건되었다.
그 밖에도 금곡사(金谷寺)·법류사(法流寺)·원녕사(元寧寺)·통도사(通度寺)·수다사(水多寺)·석남원(石南院)·압유사(鴨遊寺)·실제사(實際寺) 등의 이름이 사기(史記)에 나타나 있다.
또한 664년(문무왕 4)에는 사람들이 함부로 불사(佛寺)에 재화(財貨)와 토전(土田)을 보시하는 것을 금할 정도였으므로, 이 시기의 신라불교는 백성들 사이에 보편화되어 있었고 매우 융성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승려의 수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634년(선덕여왕 5)에는 왕이 병으로 오래 누워 있었는데, 그때에 백고좌법회를 황룡사에서 열고 『인왕경』을 강하게 하였으며, 승려 100명을 득도하게 하였다.
또 선덕여왕 재위기간에는 승려들이 중국으로 유학가는 일이 많았다. 이들은 귀국하여 신라불교의 전성기를 형성하게 되는데, 원효와 의상이 함께 당나라로 갈 것을 꾀한 일도 이때의 일이다. 원측(圓測)이 당나라 현장과 자은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명랑(明朗)과 자장(慈藏)이 당나라로부터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크게 활약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또 당나라로 건너갔다가 다시 인도에까지 가서 구법(求法)을 한 승려들도 상당수에 달하였다. 인도의 나란타사(那蘭陀寺)에 머물면서 많은 불경을 읽고 깊이 연구하였으며, 본국으로 돌아오려던 뜻을 이루지 못하고 70여 세에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 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를 비롯하여 혜업(慧業)·현태(玄泰)·구본(求本)·현각(玄恪)·혜륜(惠輪)·현유(玄遊) 및 두 명의 이름을 알 수 없는 승려 등이 선덕여왕 때에 인도로 갔다고 전한다.
특히, 중국에서 교화활동을 하여 크게 명성을 떨친 뒤 귀국한 자장의 활동은 신라 불교를 재정비하고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중요한 업적은 첫째, 643년 (선덕여왕 12)에 귀국하면서 부처님의 바리[鉢盂]와 가사(袈裟), 사리(舍利)와 불경 400여 상자, 번(幡)·당(幢)·화개(花蓋) 등 법당을 장엄하게 꾸미는 물품을 가지고 와서 신라에 새로운 불교문화를 도입한 것이다.
둘째, 귀국한 뒤 대국통(大國統)이 된 그는 국내의 교단을 정비하고 승단(僧團)의 기풍을 쇄신하였다. 특히 보름마다 열리는 포살(布薩)을 엄격히 시행하고 겨울과 봄에 두 차례의 시험을 치러 잘못을 범함이 없도록 하였으며, 순사(巡使)를 보내어 지방사찰들을 돌아보게 하는 한편, 불교의식을 장중하고 엄하게 지내도록 함으로써 정법(正法)을 지키고 보호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 불교의 일대 번영을 초래케 하였다.
셋째, 『화엄경』을 비롯한 대승경론을 강하고 통도사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만들어 계법(戒法)을 널리 폄으로써 국민의 대다수가 불교를 신봉하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넷째, 호법(護法) 및 호국의 불사(佛事)를 크게 일으켰다. 불법을 신봉하고 널리 펴기 위한 호법의 불사로서 자장은 양산의 통도사와 오대산의 수다사, 태백산의 석남원, 원녕사·태화사(太和寺) 등 많은 절을 세웠다. 특히 오대산을 문수도량으로 설정하여 불국토신앙(佛國土信仰)의 대중화를 꾀하였다.
호국의 불사 중 대표적인 것은 왕에게 청하여 황룡사에 9층탑을 건립한 일이다. 그는 신라를 둘러싼 9개국의 침략을 막아 삼국을 통일하고 신라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한 상징으로 높이 225척의 이 탑을 건립하였다.
또한, 이 시대에는 일반대중들의 생활 속에 뛰어들어 모든 사람들에게 불교를 골고루 전파한 선각자적인 고승들이 많이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고승으로 혜숙(惠宿)과 혜공(惠空), 그리고 대안(大安)을 들 수 있다.
혜숙은 승려이면서도 일찍이 국선의 낭도로 있다가 안강의 적선촌(赤善村)에 살면서 왕도 중심의 귀족적인 불교의 범주를 벗어나서 시골사람들에게 불법을 알리고 서민을 교화하였다.
혜공은 본래 미천한 태생이었으나 어려서부터 신이한 행동이 많아 주인인 귀족으로부터 성인의 대우를 받았으며, 출가한 뒤에는 혜공이라 이름하였다. 그는 당시 승려들과는 달리 귀족적인 위치와 웅장한 절을 버리고 이름없는 작은 절에 살면서 매일 마을의 골목 거리를 다니면서 대중을 교화하였다.
허름한 옷에 삼태기를 등에 지고는 초부·목동이나 뒷골목의 건달, 술주정꾼들이나 가난한 서민들과 호흡을 같이하며 가까이 하였다. 서민교화의 선구자였을 뿐 아니라 학덕도 당대에 뛰어난 고승으로 일찍이 원효가 저술을 할 때 언제나 혜공을 찾아 물었다고 하며, 옷이 물에 젖지 않는 등 서민들 사이에 깊이 파고 들 수 있었던 이행(異行)이 많았던 고승이었다.
또한 본래의 이름을 알 수 없는 대안은 항상 특이한 모습으로 장터거리에 살았다. 언제나 동발(銅鉢)을 마주 치며 “대안 대안(大安 大安)”을 외치고 돌아다니면서 서민을 교화하였으므로 대안성자(大安聖者)라고 불렀다. 대안과 원효는 스승과 제자처럼 지낸 사이였다고도 한다.
이 시대의 불교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 점은 삼국통일의 주축이 되었던 화랑도와의 관계이다. 그때의 화랑도 속에는 승려들이 속해 있어 그들의 정신적 교육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직접 전투에 참가하기도 하였으며, 화랑 출신의 장군들은 그 신앙에 의지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도 하였다.
화랑들과 함께 있었던 실제사의 승려 도옥(道玉)은 655년(태종무열왕 2) 백제와의 싸움에서 화랑 김흠운(金欽運)이 전사하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부처님의 말씀을 듣건대 위로는 술업(術業: 수행)을 잘 익혀서 본래의 성품을 회복하고, 다음으로는 도용(道用:포교)을 일으켜서 남을 이익되게 하라 하였으나, 내가 상문(桑門: 승려)의 용모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한 가지 선(善)도 취할 수 없다. 차라리 종군하여 살신(殺身)함으로써 보국(報國)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그리고는 승복을 군복으로 갈아 입은 뒤 이름을 취도(驟徒)로 바꾸고 적진으로 돌진하여 힘껏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659년에는 한산주에 장의사를 세워 전사한 화랑들의 명복을 빌기도 하였다. 또한 15세에 화랑이 되었던 김유신은 그와 함께 하는 무리들을 용화향도라 하여 불교정신에 입각한 새 시대의 주인공들을 길렀을 뿐 아니라, 전쟁중에도 깊은 신심(信心)을 잃지 않았다.
661년 고구려와 말갈의 합병군이 신라의 북한산성을 포위공격하여 성의 함락이 눈앞에 다다랐을 때, 김유신은 “사람의 힘이 이미 다하였다. 강조(降助: 신이 내려와 도와 줌)를 얻을 수밖에 없다.” 하고 불사(佛寺)에 이르러 단을 만들고 기도를 올렸더니 갑자기 큰 별이 적진으로 떨어지며 우뢰와 비가 하늘과 땅을 진동하였고, 고구려병들은 포위망을 풀고 달아났다고 한다.
또 김유신이 왕명을 받들어 당나라군과 연합하여 고구려에 쳐들어갈 때 현고잠(縣鼓岑)의 수사(岫寺)에 이르자 며칠 동안 행군을 멈추고 재계(齋戒)하고 정성껏 불공을 올린 뒤 행군을 계속하였다. 그는 대승불교의 보살정신을 그대로 소유한 전형적인 화랑이었다.
통일전야의 신라에는 밀교(密敎)가 들어와서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632년에 당나라에 들어가 635년에 귀국한 명랑(明郞)은 밀교를 최초로 신라에 들여온 승려이다.
통일 후 당나라가 신라를 침범하려는 기세가 엿보일 때, 명랑은 밀교의 비법을 써서 당나라 군사를 무찔렀고 신라 신인종(神印宗)의 종조(宗祖)가 되었다. 많은 고승들과 왕실을 중심으로 한 재가신자들의 노력으로 신라적 불교토착화가 이루어졌고, 통일 후 불교의 황금시대를 맞이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3. 통일신라시대]
통일신라기의 불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고려왕조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거의 250년간 계속된다. 그런데 이 시기에는 대체로 전 100년과 후 150년으로 구분되는 두 기간 동안에 각각 다른 특징을 보인다.
전기는 불교사상이 건전하게 발전한 시기이고, 후기는 그 전기불교가 차차 퇴락, 쇠퇴하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불교가 일기 시작한 시기이다.
[3.1. 통일신라 전기의 불교]
민족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 통일하였으면서도 그들의 좋은 점을 받아들이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불교 역시 안정된 환경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문화까지 더 보태어 내면적인 심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결과가 있기까지는 훌륭한 고승들의 배출과 그들의 끊임없는 교학적 연구, 교화활동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3.1.1. 교학연구의 흐름
통일신라 전기에 활동한 대표적 고승으로는 원효·원측·의상·경흥(憬興)·의적(義寂)·도증(道證)·승장(勝莊)·둔륜(遁倫)·태현(太賢)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저술을 보면, 대체로 불경으로는 『대반야바라밀경』·『금강반야경』·『법화경』·『화엄경』·『대무량수경』·『아미타경』·『열반경』·『미륵경』·『금광명경』·『범망경』, 논(論)으로는 『광백론(廣百論)』·『유가론(瑜伽論)』·『유식론(唯識論)』·『아비담잡집론(阿毘曇雜集論)』·『인명론(因明論)』·『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등에 관한 연구 주석서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불교 역사상 경론(經論)에 대한 주소(註疏)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였으며, 교학연구도 이때의 산물이라는 것은 역사를 논하고 평가함에 있어 새로운 시사를 주는 것이다.
이 시대의 불교는 철학적으로 『화엄경』의 일승원융사상(一乘圓融思想)을 기초로 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론으로는 『반야경』, 특히 『반야이취경(般若理趣經)』과 『금강반야경』을 중요시하였으며, 인명(因明)·유식(唯識)·유가(瑜伽)의 이론을 응용하였다.
또한 『법화경』과 『열반경』은 가장 대승적인 경전으로서 이 시기의 모든 불교사상가들이 한결같이 중시하였다. 또한 신앙면에서는 『미륵삼부경(彌勒三部經)』·『무량수경』·『아미타경』·『약사경(藥師經)』을 중요하게 여겨 대중교화의 방편으로 삼았다.
또한 국가안태를 위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는 일찍이 중국에서 유행한 『금광명최승왕경』과 『인왕반야경』이 매우 중시되었으며, 여러 차례 백고좌강회나 팔관회에서 강설되었다.
이렇듯 이 시기는 한국불교 역사상 불교의 참뜻이 가장 원만히 드러났으며 불교의 구체적 기능이 충분히 발휘되었고, 이론과 실행면에서도 원만한 융화가 이루어져 독특한 한국불교를 형성할 수 있었다.
3.1.2. 초기 고승들의 활동
이 시대에는 민족적 불교문화의 완성에 주축이 되었던 많은 고승들이 있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원효와 의상이다.
원효는 한국불교 최고의 고승이다. 그는 한국의 불교를 정리하여 사상적으로 토착화시킨 이론의 천재일 뿐 아니라, 불교정신을 실천적으로 발휘하게 한 위대한 교육자이기도 하였다. 그는 일찍이 중국으로 가서 구법(求法)할 뜻을 품고 의상과 함께 육로로 당나라를 향해 갔으나 고구려에서 잡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10년이 지난 뒤 백제가 망하여 바닷길이 열리자 다시 당을 향해 길을 떠났으나, 도중에서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되돌아왔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일어난다. 신라에 없는 진리가 당에 간들 있겠으며, 당에 있는 진리가 신라에는 없겠는가?” 하고 유학의 길을 포기한 원효는 국내에서 더욱 불교의 증진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불교의 참뜻을 알리고 불교의 혜택을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입히기 위하여 교화를 위한 실천의 길에 나섰다.
모든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거사(居士)의 차림으로 손에는 무애(無碍)의 박을 쥐고 노래와 춤을 추며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당시 신라사회의 잘못을 지적하여 올바른 진로를 가르쳐 보여주었고, 사람들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현실과 보이지 않는 영원한 실상(實相)의 의미를 깨닫도록 깊은 세계관과 인생관을 제시해 준 고승이었다. 이와 같은 그의 뜻은 저술을 통해서도 널리 반영되었다.
그의 저서는 85종 180여 권에 이르며, 현재에도 20여 종이 남아 있다. 그 중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및 『기신론별기(起信論別記)』는 현대에까지 그 참신성을 드러내는 올바른 인생관을 담고 있으며,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은 진정한 평화와 통일과 자유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하여 얻어질 수 있는가를 갈파한 신비적 체험의 책이다.
또한 대승경론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화엄경』·『법화경』·『열반경』·『유마경』·『반야경』·『해심밀경』·『대지도론』·『유식론』·『보성론』·『섭대승론』 등에 대한 종요(宗要)와 소(疏)를 지어 방대한 불교철학의 진수를 드러냄으로써 불교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길잡이가 되게끔 하였다. 그는 승려인 동시에 위대한 사상가였고, 초인적인 저술가였으며 뛰어난 실천가였다.
의상은 661년(문무왕 1)에 당나라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에 있는 화엄종의 지엄을 찾아가서 『화엄경』을 연구한 뒤 중국에서 화엄을 강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당나라가 신라를 침범하려 한다는 정보를 듣고 671년에 귀국하여 국가의 위기를 구하였다. 신라로 돌아온 의상은 온 나라에 화엄불교를 널리 펴기 위하여 태백산에 부석사(浮石寺)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백성들을 교화함으로써 해동화엄초조(海東華嚴初祖)가 되었다.
그리고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금정산 범어사(梵魚寺) 등지에서도 화엄의 도리를 전법하였다. 또한 그는 낙산사(洛山寺)에 신라 관음신앙의 터전을 열었으며,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表訓)·진정(眞定)·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 10명의 수제자와 3,000명의 문도를 길러 한국불교의 사상과 신앙사에서 가장 큰 맥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는 화엄사상과 관음신앙을 정착시켰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가 전한다.
이들 2대고승 외에도 통일 직후의 신라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어 불교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신문왕 때 국로(國老)를 지냈던 경흥(憬興)은 학덕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았으며 삼장(三藏)을 통달한 고승으로서, 『미륵삼부경소』를 비롯한 40여 부 250권의 저술을 남겨 신라 3대저술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또한 신문왕대의 고승으로는 승전(勝詮)과 도징(道澄)·점개(漸開) 등이 있다. 692년(신문왕 12)에 귀국한 승전은 당나라의 법장이 새로 지은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 등 5종의 책을 가지고 와서 의상에게 전하였고, 스스로 화엄을 강하면서 『심원장(心源章)』을 지었다.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지만 도징 또한 당나라로부터 귀국하면서 천문도(天文圖)를 가지고 와서 왕에게 바친 일이 있다. 점개는 흥륜사에서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에 의거하여 잘못을 참회하고 업장을 없애고자 하는 예식인 육륜회(六輪會)를 베풀기 위해 시주를 권하며 다니기도 하였다.
이 밖에 혜통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밀교로써 크게 교화하였으며, 그의 가풍은 전승되어 후대에 진언종(眞言宗, 摠持宗)의 근거가 되었다.
3.1.3. 8세기 전반기의 불교
이때의 신라불교계의 주류는 원효·의상·자장이 닦아놓은 사상이 그대로 흐르고 있었고, 밀본(密本)·명랑·혜통을 중심으로 한 밀교의 한 줄기가 병행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가장 존숭을 받은 불보살은 석가모니불을 비롯한 아미타불·미륵불·약사여래·관세음보살·지장보살이었다.
성덕왕 때에는 태종무열왕을 위해 봉덕사(奉德寺)를 세우고 인왕도량을 열었다. 『호국인왕반야경(護國仁王般若經)』을 근거로 나라와 백성의 안락과 번영을 기원하는 이 도량이 기록화되기는 이때가 처음이다.
또한 704년 김사양(金思讓)에 의해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이 당나라로부터 들어오게 됨에 따라 금광명도량을 개설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다.
또 이 시기에는 저마다 조상의 영(靈)을 위하여 조상(造像)하는 습관이 크게 유행되기 시작하였다. 현존하는 감산사(甘山寺)의 미륵존상과 미타존상은 성덕왕 때 중아찬(重阿飡)의 벼슬에 있던 김지성(金志誠)이 세상을 떠난 부모와 전처 등을 위해서 만든 것으로, 이러한 경향은 차차 더욱 성행하여 경덕왕 때에 이르러서는 불국사(佛國寺)와 석불사(石佛寺) 등이 김대성(金大城)에 의해 이루어진다.
경덕왕은 그 이전 50년 동안에 다스린 다른 왕들에 비하면 훨씬 탁월하게 불교를 발전적으로 이끌어간 지도자였다. 그는 745년에 우금리(禹金里)의 한 가난한 여인이 민장사(敏藏寺)의 관음상 앞에서 7일 동안 기도를 드렸더니 행방불명되었던 아들 장춘(長春)이 되돌아왔다는 소문을 듣고 그 절에 많은 토지와 재물을 시주하였다.
장춘이 살아서 돌아오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당시 신라인들에게 있어 나라를 그리는 마음이 불보살을 섬기는 마음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어, 당시 신라불교가 완전히 민족사상 또는 민족신앙으로 토착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왕은 이듬해 4월 대사령(大赦令)을 내려 관용을 베풀고, 150명에 달하는 많은 승려를 출가시킴으로써 중국의 양무제(梁武帝) 이래로 신심 깊은 왕이 취하는 경건한 참회의 행위를 본받았다.
753년 여름에는 가뭄이 매우 심하여 이를 걱정한 왕이 태현(太賢)을 궁중으로 불러 기우(祈雨)를 하도록 하였는데, 태현은 『금광명경』을 강하여 비를 내리게 하였다. 이것이 『금광명경』을 강설한 최초의 기록이다.
754년에는 왕이 법해(法海)를 불러 황룡사에서 『화엄경』을 강하게 하고 친히 행차하여 분향하였다. 이 해에는 황룡사의 범종이 주조되었으며, 755년에는 분황사에 약사여래상을 모셨다. 이는 문헌상 약사여래에 관하여 언급한 최초의 기록이다.
약사여래신앙은 『약사경』을 근거로 하여 생긴 신앙으로서, 약사여래는 사천왕(四天王)과 팔부신중(八部神衆) 및 십이지신(十二支神)을 권속으로 삼고 있는데, 그를 지극한 마음으로 칭명염송(稱名念誦)하는 이에게 가난과 굶주림과 질병 등을 물리치게 하고자 하는 여러 가지 소원을 성취시켜 주는 존재로 되어 있다.
그리하여 각처에서는 약사여래와 그 권속들을 새긴 동불(銅佛)·석불·석탑·벽화 등이 많이 나타나고 이에 대한 신앙이 점차 증대하여 갔다.
또한 이 당시의 신앙형태는 특정한 한 부처나 보살에게만 국한되지 않았으므로 여러 불보살을 한꺼번에 믿고 섬기는 경우도 많았다. 같은 무렵 강주(康州: 진주)에서는 신도 수십 명이 미타사(彌陀寺)를 창건하여 만일(萬日)을 염불 수행하기로 하고 계(契)를 맺기도 하였다.
때로는 아미타불을, 때로는 약사여래나 미륵이나 지장보살을, 그리고 때로는 관음보살을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 신앙하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신앙풍조였다.
그와 함께 약사여래·미륵불·아미타불·석가모니불을 사방불(四方佛)로 생각하고 신봉하는 사방불신앙도 생겨났다. 그러나 사방불이 반드시 부처만이 아니라 보살을 포함할 경우도 있었다.
왕자였던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이 오대산에 보천암(寶川庵)을 세우고 수행할 때 체험한 오만진신(五萬眞身) 중 4대(四臺)의 주존(主尊)은 동서남북을 좇아 관세음보살·아미타불·지장보살·석가모니불의 순으로 열거되고 있다.
경덕왕 때의 불교관계 기사는 교학연구보다는 불보살에 대한 신앙에 얽힌 영험담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차츰 불교가 타력신앙의 경향을 띠고 있음을 말하여주고 있다.
경주 한기리에 사는 희명(希明)이라는 여인은 분황사의 천수관음(千手觀音)에게 빌어 장님 아이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었다. 아간 귀진(貴珍)의 집 종인 욱면(郁面)은 미타사에서 열심히 염불하여 서방정토에 왕생하였다.
포천산(布川山)의 다섯 비구는 미타를 염불하고 서방을 구한 지 몇 십년 만에 홀연히 성중(聖衆)이 서쪽으로부터 와서 맞이하였다는 것도 이때의 일이다.
또 758년에는 김대성이 발원해서 시작한 불국사와 석굴암의 창건공사가 끝나 신림(神琳)과 표훈(表訓)을 주지로 삼았다. 이 두 절의 정묘한 예술성은 종교적 신심의 외적 표현으로서, 그 조각이 지니는 고도의 정신성은 당시 신라불교가 발휘할 수 있었던 최고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758년에는 큰 번개가 일어나 절 16개 소에 진동이 있었고, 760년에 해가 둘이 나타나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았다. 왕이 월명(月明)에게 이를 해결해 줄 것을 청하자, 월명은 「도솔가(兜率歌)」를 지어 이를 쫓아버렸다고 한다.
이 「도솔가」의 내용은 미륵불에 대한 찬탄의 노래이며 그가 지은 「제망매가(祭亡妹歌)」는 절실한 미타신앙을 표현하고 있는데, 문학적으로도 높이 평가를 받고 있는 뛰어난 작품이다.
또 월명과 함께 향가문학 개발의 선구자가 되었던 충담(忠談)도 이때의 승려로서 「안민가(安民歌)」와 「찬기파랑가(讚耆婆郎歌)」를 남겼다. 이 중 「안민가」는 경덕왕의 청에 의해 지은 것으로, 선정(善政)을 찬양하고 국민의 분발을 촉구하고 있다. 또한 충담은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茶)를 달여 남산 삼화령(三花嶺)의 미륵세존에게 바쳤다고 한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고승으로는 태현(太賢)과 진표(眞表)가 있다. 『성유식론학기(成唯識論學記)』 등 52부 120여 권을 저술하여 원효·경흥 등과 함께 3대저술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태현은, 특히 유식학(唯識學)에 뛰어난 대가로서 중국학자들까지도 그의 학설을 안목(眼目)으로 삼았다 한다.
일찍이 출가한 진표는 참회정진으로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참회법과 점찰간자(占察簡子)를 전해받고 새로운 참회불교인 점찰교법(占察敎法)을 크게 일으켜서 널리 국민을 교화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교화활동은 이전까지 있었던 신라 불교인들의 교화활동과는 다른 특이한 것이었다.
그는 영심(永深)·보종(寶宗)·신방(信芳)·체진(體珍) 등 훌륭한 제자들을 길렀으며, 금산사(金山寺)·길상사(吉祥寺:지금의 法住寺) 등을 창건하고 교법을 크게 떨쳤다.
이 시대에는 많은 대덕들이 저술과 교화활동 등으로 크게 활약하였고, 뛰어난 불교예술가와 기술자들이 많이 배출되어 당시의 불교문화를 찬연히 빛나게 하였다.
[3.2. 통일신라 후기의 불교]
8세기 후반과 9세기에 걸친 불교계는 전통적인 교종의 발전이 그 한계점에 도달하여 점차 그 모순을 나타내고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선사들의 분주한 중국 내왕으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새로운 기운이 일어나고 있던 시기였다.
3.2.1. 교단의 침체
혜공왕대 이후의 불교교단은 차츰 침체되어서 불교인들의 활동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형편이었다. 불교가 침체된 가장 큰 원인은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혼란에 있었다. 통일 이후 민족 대통합의 벅찬 과업을 성취하여 민족문화 창조의 힘찬 저력을 보여주었던 신라왕조였으나, 혜공왕대에 이르러 지금까지의 안정과 전통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왕좌의 쟁탈전이 잦아지면서 정치는 혼란해졌고 조정은 안정을 잃어 정치가 혼란해짐에 따라 불교도 그 활기를 잃어갔다. 전쟁과 암투로 위정자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되면서 국가는 어지러워지고, 백성들 또한 갈팡질팡 헤매게 되었으며, 신라는 이미 국가적으로 정도(正道)를 간직하고 기릴 능력을 잃고 있었다. 따라서 창조적이고 선도적이며 활력에 차 있던 불교문화 활동은 그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또한 뜻 있는 불교인들은 혼란을 피해서 산 속 조용한 곳을 찾아 은둔생활을 하거나 해외로 떠나는 이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교단은 크게 위축되고 불교문화는 침체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의 불교는 그 순수성이 퇴색되고 주술적 신앙과 어우러져 있었다. 불교인지 무속(巫俗)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혼탁해져 있었음이 여러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분황사 우물에 있는 용(龍) 세 마리를 당나라 사신이 저주하여 작은 고기로 만들었다는 이야기, 김현(金現)과 호녀(虎女)의 만남이 얽힌 호원사(虎願寺) 이야기, 헌강왕 때 동해용왕의 한 아들인 처용(處容)의 형상을 문에 붙여서 재앙의 귀신을 쫓았고 용을 위해 망해사(望海寺)를 세웠으며, 왕이 포석정에 행차하였을 때 남산의 귀신이 임금의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다는 이야기 등은 귀신들과 관련된 설화이다.
그리고 진성여왕 때에 거타지(居陁知)라는 사람이 용왕의 자손으로서 간을 빼 먹는 늙은 중을 활로 쏘아 죽였다는 이야기, 다라니(陀羅尼) 모양으로 은어(隱語)를 만들어 진성여왕과 그 유모의 비행을 풍자하는 이야기 등은 사회의 혼란과 더불어 불교계가 이미 그 순수성을 잃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몇 명의 고승들이 있어 불교계를 이끌어갔다. 헌덕왕 때의 심지(心地)는 진표(眞表)의 점찰법(占察法)을 계승하고 동화사(桐華寺)에 참당(懺堂)을 지어 대중을 교화하였다.
원성왕 때에는 황룡사의 승려 지해(智海)가 궁중에서 50일 동안 『화엄경』을 강독하였다. 또한 799년에는 범수(梵修)가 당나라로 갔다가 징관(澄觀)의 『신역후분화엄경의소(新譯後分華嚴經義疏)』를 가지고 돌아왔다.
802년에는 순응(順應)이 해인사의 중창을 시작하였으며, 그 뒤를 이은 이정(利貞)이 완성하였다. 806년에는 사찰을 새로 짓는 것을 금지하고 다만 수리하는 것만을 허락하였으며, 사찰에서 사용하는 기구나 기타 복식에 금·은·비단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였는데, 이로써 당시 귀족불교의 사치가 얼마나 심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헌덕왕 때에는 이차돈의 넋을 기리는 법회가 그 기일(忌日)마다 베풀어졌다. 법흥왕이 없이는 이차돈이 없고, 이차돈이 없이는 신라불교가 없다는 뜻에서 영수선사(永秀禪師)의 주관 아래 이 법회가 이루어진 것이다.
흥덕왕 때인 827년에 구덕(丘德)은 당나라에서 돌아오면서 불경 약간 권을 가져왔고, 보요도 귀국하여 해룡왕사(海龍王寺)를 창건하였다.
당나라에 갔던 진감국사(眞鑑國師)는 830년에 귀국하여 쌍계사(雙磎寺)를 중심으로 선법을 전파하고, 지리산 일대에 차[茶]나무를 심어 다도(茶道)를 보급하였다. 이처럼 많은 승려들이 당나라를 내왕하면서 새로운 불교인 선(禪)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선풍진흥(禪風振興)과 관계없이 신라는 갈수록 쇠퇴해 갔다. 경문왕 때의 사람으로 유교뿐 아니라 불교·도교에까지 통달했던 최치원(崔致遠)은 894년 가족을 거느리고 가야산으로 숨어버린 뒤, 모형(母兄)인 현준(賢俊)과 대사 정현(定玄)의 도우(道友)가 되어 산 속에서 생을 마치게 된다.
신라의 멸망기인 효공왕 이후 경순왕에 이르는 기간 동안 불교사원에도 온통 불길한 징조만 나타난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봉성사(奉聖寺)의 회랑 21칸에 까치가 깃들이고, 참포(斬浦)의 물이 바닷물과 3일 동안이나 서로 싸웠다고 하며, 또 영묘사(靈廟寺)의 행랑에 까치와 까마귀들이 다투어 집을 지었다.
경명왕 때에는 사천왕사(四天王寺) 벽화 속의 개가 울었다고 하며, 사천왕사 오방신(五方神)의 활줄이 모두 끊어지고 벽화 속의 개가 튀어나왔다가 들어갔고, 흥륜사에는 큰 불이 났다.
경애왕 때에는 황룡사가 요동하여 서쪽으로 기울어졌다고도 한다. 그러한 가운데 935년 10월 마침내 왕은 고려에 항복하고 왕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 신라왕조는 사실상 끝나고 말았다.
3.2.2. 선불교의 전래와 진흥
9세기에 접어들면서 전래된 선불교(禪佛敎)는 신라불교계에 새로운 생기를 불러일으켰다. 선종은 이미 통일신라 초기에 중국의 달마선(達磨禪)이 남북으로 갈라지기 전인 4조 도신(道信)의 선이 신라승려 법랑(法朗)에 의해서 전해진 바 있고, 이어서 신수(神秀)의 북종선(北宗禪)이 신행(神行)에 의해 전래되었으나 크게 전파되지는 못하였다.
선이 신라에서 유행하게 된 것은 남종선(南宗禪)을 중국의 지장으로부터 전해받은 도의(道義)와 홍척(洪陟)이 821년과 826년에 각각 귀국한 이후의 일이다.
그 뒤 계속 당나라에서 남종선을 전수받은 유학승들이 귀국하여 선사찰(禪寺刹)을 세웠고 선종 선포의 거점을 형성하였다. 또한 885년(헌강왕 11)에는 행적(行寂)이 경저(慶諸)의 선법을 받아왔으며, 효공왕 때에는 형철(逈徹)·경유(慶猷)·여엄(麗嚴)·이엄(利嚴) 등이 각각 조동종(曹洞宗)의 선법을 가지고 돌아왔다.
도의는 821년 귀국하여 남종선을 처음으로 신라에 전하였으나, 무념무심(無念無心)을 근본으로 하여 심인(心印)을 전하는 그의 새로운 선풍(禪風)은 경전연구에 젖어왔던 신라불교계에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은거하여 지냈다. 그 뒤 도의의 법을 이은 염거(廉居)를 거쳐 체징(體澄)이 840년에 귀국하여 가지산에 보림사(寶林寺)를 세우고 도의의 종풍을 크게 떨침으로써 가지산파(迦智山派)를 이룩하게 되었다.
도의와 함께 수학하였던 홍척은 826년에 귀국하여 지리산에서 선도(禪道)를 창도하였다. 그와 도의가 각각 남북에서 선도를 창도하였으므로 이를 북산의남악척(北山義南岳陟)이라고 일컫는다.
홍척은 실상사를 창건하고 여기서 선법을 선양함으로써 실상산파(實相山派)를 형성하였다. 수백 명의 문도를 두었으며, 흥덕왕과 태자 선강(宣康)의 귀의는 지극하였다. 이 실상산파는 신라에서 최초로 개산(開山)된 선문이며, 그의 제자 수철(秀澈)이 제2조가 되었다.
또한, 일찍이 부석사에서 화엄학을 공부한 혜철(惠哲)도 당나라 지장의 심인을 얻고 839년에 돌아와서 크게 선풍을 떨침으로써 태안사(泰安寺)를 중심으로 동리산파(桐裏山派)를 이루었다.
그의 제자로는 도선(道詵)과 여선(如禪) 등이 있었다. 중국 지장의 심인을 이어받은 가지산·실상산·동리산 등 3파가 호남에서 그 선풍을 떨치고 있을 때 호서지방에서는 보철(寶徹)의 선을 이어받은 무염(無染)이 성주산파(聖住山派)를 개산하였다.
당나라에 있을 때 백낙천(白樂天)과 각별한 도연(道緣)도 맺고 동방보살(東方菩薩)이라는 별칭을 받기까지 했던 그는 845년에 귀국하여 성주사를 창건한 뒤 선풍을 크게 떨쳤다.
그는 「무설토론 無舌土論」이라는 글을 지어 불교와 조도(祖道:조사의 가르침)를 구별하면서, 불교를 응기문(應機門)·언설문(言說門)·정예문(淨穢門)으로 나누고, 조도를 정전문(正傳門)·무설문(無說門)·부정불예문(不淨不穢門)으로 나누어 선(禪)과 교(敎)의 차이를 논하였다.
한편 837년에는 현욱(玄昱)이 당나라로부터 귀국하여 혜목산 고달사(高達寺)에서 전법하였는데, 그의 선풍을 이어받은 심희(審希)가 봉림사를 창건하고 크게 선풍을 떨치게 되자, 이를 봉림산파(鳳林山派)라고 하였다. 그의 법맥을 이은 자적(慈寂)은 이 산문을 더욱 융성하게 하였다.
관동지방에서는 사자산파(獅子山派)의 선풍이 진작되었다. 사자산파는 847년에 중국 보원(普願)의 선풍을 이어받고 귀국한 도윤(道允)의 제자 절중(折中)이 스승을 계승하여 개창한 것이다. 흥녕사(興寧寺)에 중심을 둔 사자산파는 종홍(宗弘) 등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도윤과 때를 같이하여 귀국한 범일(梵日)은 강릉 굴산사에 자리를 잡고 40여 년간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선풍을 진작하였으며, 그의 제자 개청(開淸)이 사굴산파를 형성하였다.
순지(順之)도 경문왕 때에 귀국하여 위앙종(潙仰宗)의 선풍을 떨쳤다. 위앙종에서는 일원상(一圓相)을 그려가면서 공부하였는데, 그 원상(圓相)의 갈등(葛藤)이 처음으로 순지에 의해서 신라에서도 행해지게 되었다.
그는 「사대팔상(四對八相)」의 법과 「삼편성불론(三遍成佛論)」을 제창하였는데, 삼편성불은 증리성불(證理成佛)·행만성불(行滿成佛)·시현성불(示顯成佛)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와 때를 같이하여 귀국한 대통(大通)도 위앙종을 전파한 승려이다.
또한 얼굴이 검기 때문에 흑두타(黑頭陀)라는 별칭을 얻었던 혜소(慧昭)는 830년에 귀국한 뒤 지리산 쌍계사에 6조 혜능의 영당(影堂)을 세우고 선법을 크게 떨쳤으며, 신라에 처음으로 어산범패(魚山梵唄)를 전하기도 하였다. 그의 법을 이어받은 도헌(道憲)은 문경에 봉암사(鳳巖寺)를 창건하고 희양산파(曦陽山派)를 개창하였다.
이 밖에도 행적(行寂)과 무착선사(無著禪師)·홍각선사(弘覺禪師) 등도 널리 선을 선양하였다. 선불교는 교종의 전통적인 권위에 대하여 반성을 가하는 동시에, 교종이 지니는 고대적 사고방식에 맞설만한 새로운 체질을 만드는 데 힘쓰면서 고대 지성에 대응하는 중세적인 지성으로서의 선종을 모색하였던 것이다.
[3.3. 신라불교의 해외활동]
3.3.1. 중국에서의 활동
신라시대에는 중국으로 유학한 신라 승려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의 대부분은 본국으로 돌아와서 신라 불교문화에 공헌하였으나, 일부는 계속 중국에 머물면서 중국의 학계나 교계에 큰 영향을 미친 고승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원측·승장(勝莊)·신방(神昉) 등 유식학파의 승려들과 무상(無相)·지장(地藏) 등의 선사들을 들 수 있다.
신라의 왕손으로 일찍이 출가하여 중국으로 건너간 원측은 법상(法常)과 승변(僧辨) 등의 강학을 듣고 유식학의 연구에 힘썼다. 그는 삼장(三藏)의 교학은 물론 고금의 장소(章疏)에도 통달하였다.
당 태종의 명에 의하여 서명사(西明寺)에 머물렀는데, 그의 계통을 서명학파(西明學派)라 하였던 것도 이 때문이다. 신라에서는 그의 귀국을 청하였으나 측천무후(則天武后)가 그를 매우 존경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제자 중 도증(道證)·승장(勝莊)·자선(慈善) 등이 뛰어났으며 도증과 승장은 신라사람이었다. 도증은 원측의 학설을 이어받아 『성유식론요집(成唯識論要集)』·『성유식론강요(成唯識論綱要)』 등 무게 있는 저술을 남긴 뒤 697년에 귀국하였는데, 태현(太賢)이 그의 제자라고도 전하여진다.
승장은 『성유식론결(成唯識論訣』·『범망계본술기(梵網戒本述記)』 등 다수의 저술을 남겼을 뿐 아니라, 의정(義淨) 등이 삼장을 역경(譯經)할 때는 증의(證義)가 되기도 하였다.
신방도 일찍이 당나라에 가서 현장의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4인 중의 1인이 되어 대승방(大乘昉)이라고 불리었다. 그리고 현장의 역경장에서 증의의 한 사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십륜경소(十輪經疏)』·『성유식론요집』 등 적지않은 저서도 남겼다.
선사들 가운데서 지덕(知德)은 일찍이 5조 홍인의 11제자 중 1인으로서 이름을 날렸다. 또 성덕왕의 제3왕자 무상(無相)은 당 현종(玄宗)의 지극한 예우를 받았으며, 뒤에는 성도(成都)에 들어가서 지선(智詵)과 그 제자 처적(處寂)의 선풍을 이어받아 정중사(靜衆寺) 주지가 되었다.
그는 무억(無憶)·무념(無念)·막망(莫忘)의 3구설(三句說)을 천명하여 계(戒)와 정(定)에 구애하지 말고 보리(菩提)를 증득하는 데 근본이 되는 혜(慧)를 잊지 말 것을 가르쳤다.
무상과 때를 같이하여 성도에 있었던 김선사(金禪師)도 당 현종이 대규모의 대성혜사(大聖慧寺)를 창건할 때 칙명으로 그 공역(公役)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창건 후 주지로 임명되기까지 하였다. 경덕왕 때에 입당한 무루(無漏)는 8대탑(八大塔)에 예배하고자 인도로 가기 위해 파미르를 넘었으나 도중에 되돌아와서 성도에 자리를 잡았다.
이 밖에도 왕족 출신으로 지주의 화성사(化城寺)에서 선풍을 크게 떨친 지장(地藏)을 비롯하여 가지(迦智)·충언(忠彦)·각체(覺體)·도균(道均)·국청(國淸)·청원(淸院)·와룡(臥龍)·서엄(瑞嚴) 등이 있었다.
또한, 당나라에는 신라의 사찰이 있었다. 삼국통일 이후 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신라인들은 산둥반도나 장쑤성(江蘇省)에 많이 살았다.
이러한 신라인들의 집단거주지를 신라방(新羅坊)이라고 하였으며, 신라인들의 신앙장소이자 정신적 의지처로 삼기 위해 창건한 절을 신라원(新羅院)이라고 하였다. 신라원은 서해를 항해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기원하였던 곳이었을 뿐 아니라 본국과의 연락기관 구실도 하였다.
이와 같은 신라원 중에서 흥덕왕 때에 장보고(張保皐)가 산둥반도의 적산촌(赤山村)에 세운 법화원(法華院)은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이 법화원은 당으로 가는 신라의 유학승은 물론, 일본승려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사찰의 규모나 일상의식, 연중행사는 신라 본국과 같았다. 매년 8월 15일을 전후하여 3일 동안에 걸쳐 열렸던 축제는 성황을 이루었고, 정기적인 강경회(講經會)도 열었다.
여름에는 『금광명경』을, 겨울에는 『법화경』을 강하였던 강경회는 약 250여 명이 모여 2개월 동안 계속하였다. 신라원 외에도 백낙천이 즐겨 찾았던 향로봉(香爐峯)대림사(大林寺)에는 신라 승려만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볼 때 이러한 신라사원이 더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3.2. 인도 구법순례
당나라로 갔던 신라승려 중 일부는 인도로 순례의 길에 올랐으나 모두들 신라 본국으로 돌아오지는 못하였다.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인도로 간 아리야발마와 혜업은 불교학의 최고 전당인 나란타사에서 불경을 연구하다가 죽었다.
당나라 승려 현조(玄照)와 더불어 인도로 갔었던 현각(玄恪)은 40세가 조금 지났을 때 죽었으며, 현태(玄太)는 서장(西藏)을 거쳐 중인도로 가서 부다가야의 보리수를 참배한 뒤 대각사에서 연구를 마치고 당나라로 돌아왔으나 그 뒤의 소식은 알 수 없다.
범어(梵語)에 능숙했던 혜륜(慧輪)은 666년에 인도로 들어가 신자사(信者寺)에서 10년간 공부한 뒤 도화라(都貨羅)지방의 사원으로 옮겼다. 구법순례 중 수마트라섬의 서해안에 있는 바로사국에서 죽은 2인의 신라유학승이 있었으나 그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인도 등지에서 생애를 마쳤지만 대범(大梵)과 혜초(慧超)는 인도에서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중국불교계에 공헌한 바가 컸다. 대범은 대각사에서 연구하고 돌아왔으며, 혜초는 벵골만의 니코바르군도를 거쳐 인도로 들어갔다.
일찍이 당나라로 가서 인도승 금강지(金剛智)의 제자가 되었던 혜초는 해로로 인도에 가서 모든 불적지를 순례한 뒤 다시 서역의 여러 나라를 돌아보았고, 중국으로 돌아와서는 많은 교화활동을 하였으나 끝내 신라에는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가 남긴 인도여행기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은 지금도 그 상당부분이 남아 있어 문화교섭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밖에도 경덕왕대에 당나라로 간 원표(元表)는 인도로 가서 성적(聖蹟)을 순례하고 당으로 돌아올 때 80권 『화엄경』을 가지고 와서 지제산(支提山) 석실(石室) 안에서 고행을 하였다.
3.3.3. 도일승(渡日僧)의 활동
통일시대에 들어서면서 신라승의 도일(渡日)은 더욱 빈번해졌고, 이에 따라 일본에의 불교문물 전달도 많아졌다. 687년(신문왕 7)에 왕자 김상림(金霜林)이 불상과 바리·번(幡) 등의 불구를 일본에 전한 것을 필두로 690년에는 전길(詮吉) 등 50여명이 일본에 건너가서 전교하였다.
고승 심상(審祥)도 성덕왕 때 일본으로 가서 크게 교화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을 뿐 아니라, 740년에는 일본의 금종도량(金鐘道場)에서 『화엄경』을 개강하여 일본 국왕을 비롯한 승속(僧俗)의 찬사를 받았다.
또한 지봉(智鳳)은 일본에 법상종(法相宗)을 전파하였고, 백제왕의 후예인 교키(行基)는 도로를 닦고 수리사업을 일으키는 등의 복지사업을 일으켰으며, 문수보살의 화신이라는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752년(경덕왕 11)에는 왕자 김태렴(金泰廉)이 일본으로 가서 당시 일본불교의 중심지인 남부 도다이사(東大寺)에 머물면서 불사(佛事)를 크게 도왔다.
758년에는 승려 32명과 비구니 2명, 남자 19명과 여자 21명이 일본으로 가서 무사시노(武藏野)의 한지(閑地)에다 신라도(新羅都)를 설치하고 교화에 힘썼으며, 816년에는 승려 26명이 건너가서 일본 여러 절에 배치되어 불법을 폈다.
반면에 관상(觀常)·운관(雲觀) 등의 일본승려가 신라로 유학 와서 신라의 불교문화를 수입하여갔으며, 신라명신(新羅明神)을 호국신으로 삼은 사례도 있었다.
[4. 고려시대]
삼국을 통일하여 강대한 국가를 형성했던 신라도 그 말기에 이르러서는 정교(正敎)가 어지럽게 되었고, 이러한 혼란기에 후백제와 태봉의 두 나라가 새로이 일어나서 다시 삼국이 병립하게 되었다.
태봉의 왕 궁예(弓裔)는 불교에 대한 믿음이 매우 두터운 사람이었다. 그가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된 뒤에는 팔관회를 비롯한 많은 불교행사를 가졌으며,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하고 두 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고 이름하였을 뿐 아니라 스스로 20여 권의 경을 지어 강설하기도 하였다. 후백제의 왕 견훤(甄萱) 역시 궁예에 못지않은 불교신자였다.
이와 같이 후삼국은 모두 불교를 숭상하였고,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태조 왕건(王建)도 불교를 숭상하여 국가적으로 크게 보호, 장려하였다. 태조는 불교와의 인연이 매우 깊었던 사람이다. 그는 불교를 크게 신봉하였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출생을 전후해서부터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도선(道詵)의 명성을 들으면서 많은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고려를 건설하고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 오직 불교의 힘에 의해서라고 믿었다. 이와 같은 태조의 태도와 신념은 결과적으로 고려 전체의 불교를 왕성하게 하고, 또 국가의 종교를 불교로 결정지었던 것이다.
[4.1. 고려 초기의 불교]
4.1.1. 태조의 봉불(奉佛)
왕위에 오른 태조는 나라의 번영을 위해 더욱 불교옹호에 힘쓰는 한편, 많은 사탑을 세우고 불사를 크게 일으켰다. 즉위년인 918년에는 팔관회를 열어 연례행사로 삼았고, 919년에는 송악으로 도읍을 옮긴 뒤 성내에 법왕사(法王寺)·자운사(慈雲寺)·왕륜사(王輪寺)·내제석원(內帝釋院)·사나사(舍那寺)·천선원(天禪院)·신흥사(新興寺)·문수사(文殊寺)·원통사(圓通寺)·지장사(地藏寺) 등 열 개의 큰 사찰을 세웠으며, 낡고 허물어진 사찰과 탑 등을 다시 고치도록 하였다.
921년에는 오관산에 대흥사(大興寺)를 세우고 고승 이엄(利嚴)을 맞아들여 사사하였고, 922년에는 왕의 옛집을 헐고 광명사(廣明寺)를 창건하였으며, 일월사(日月寺)를 짓기도 하였다. 923년에는 사신이 중국에서 돌아오면서 가져온 오백나한화상(五百羅漢畫像)을 해주의 숭산사(崇山寺)에 안치하였고, 924년에는 외제석원(外帝釋院)·구요당(九耀堂)·신중원(神衆院)·흥국사(興國寺) 등을 창건하였으며, 927년에는 지묘사(智妙寺)를 세웠다.
928년에는 중국에 갔던 홍경(洪慶)이 돌아오면서 대장경(大藏經) 일부를 싣고 예성강에 이르렀을 때 친히 나아가서 맞이하여 제석원에 안치하였으며, 929년에는 인도의 삼장법사인 마후라(摩睺羅)가 왔을 때도 위의를 갖추고 맞이하여 구산사(龜山寺)에 있게 하였다. 930년에는 안화선원(安和禪院)을 세워 선의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938년에는 인도 마가다국의 대법륜보리사(大法輪菩提寺)의 밀교계통 승려 홍범(弘梵)이 『갈마단경(羯磨壇經)』을 가지고 고려로 옴으로써 고려 밀교의식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940년에는 천호산에 개태사(開泰寺)를 창건하고 낙성화엄법회(落成華嚴法會)를 열었을 때 왕이 친히 소문(疏文)을 지었을 뿐 아니라, 낡은 신흥사(新興寺)를 수리하고 무차대회(無遮大會)를 개설하여 연례적 행사로 삼게 하였으며, 제5왕자를 출가시켰다.
943년 태조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친히 십조(十條)의 훈요(訓要)를 지어 다음 왕들의 본보기가 되게 하였는데, 제1조에 불법을 신봉하고 불사를 일으킬 것을 강조하였고, 제2조에는 도선이 정한 곳 이외에는 함부로 사찰을 세우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와 같이 고려왕조는 집권 초기부터 불교를 중시하여 외면상 불교국가를 형성하였고, 더할 수 없는 불교전성시대를 이룩하게 되었지만, 고려인들이 부처에게 복을 비는 타력적 신앙과 지리도참신앙 쪽으로 치우치게 된 것도 이미 태조 때부터 비롯된 것이다.
또한, 태조는 일찍부터 경유(慶猷)와 충담(忠湛) 등을 왕사로 삼고 현휘(玄暉)를 국사로 삼았으며, 이엄·여엄·윤다(允多)·경보(慶甫)·희랑(希郎) 등 많은 고승들을 우대하였다.
또 그는 신라가 9층탑을 세워 삼국을 통일한 옛일을 본받아서 개성에는 7층탑, 평양에 9층탑을 세워 통일의 대업을 이루고자 하였고, 무려 500개에 달하는 사찰과 총림(叢林)·선원(禪院)·불상·탑 등을 3,500여 개나 세웠다.
태조 때의 선승 중 이엄은 태조의 부름을 받고 사나내원으로 나와 왕사가 되었고, 경보는 고려에 조동종을 전하였으며, 긍양은 924년에 귀국하여 태조·혜종·정종·광종 등 4대에 걸친 왕의 자문에 응하였다.
또한 현휘는 924년에 국사가 되었고, 여엄은 역시 조동종의 선풍을 일으킨 승려였으며, 찬유는 경주를 중심으로 선림(禪林)을 일으켰는데 광종으로부터 국사가 될 것을 종용받기도 하였다.
동리산파 출신인 윤다는 태조의 빈례(賓禮)를 받았고, 충담은 당나라에서 율(律)을 공부한 뒤 귀국하여 왕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태조 때의 불교는 왕 자신의 열렬한 불교존숭에 따라 크게 성황을 이루었으며, 특히 선문의 팽창은 두드러진 특색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라 말부터 일기 시작한 선종 계통의 많은 선승들은 태조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고려의 지배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크게 활동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당시의 새로운 불교의 한 계통인 선종에만 유의한 것이 아니라, 전통적 불교인 교종에도 관심을 기울여 불교계의 조화를 도모하였다. 전통적 불교의식의 부활이나, 교종사원의 개축·건립 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전통불교인 교종과 혁신불교인 선종의 대립은 종식될 수 없었고, 그 사상적 과제를 해결하게 된 시기는 제4대 광종 때에 이르러서였다.
4.1.2. 태조 이후의 불교
태조의 숭불호법(崇佛護法)의 정신은 그 뒤를 이은 모든 왕들에게 면면히 계승되었다. 제2대 혜종은 재위기간이 2년밖에 되지 않아 이렇다 할 만한 업적은 보이지 않지만, 현휘(玄暉)·절중(折中) 등 많은 승려들의 탑이 이때에 세워졌다. 제3대 정종은 선왕인 태조가 숭불하던 것을 전승하여 불교를 더욱 발전시켰다.
정종은 10여 리나 떨어져 있는 개국사로 친히 걸어가서 불사리(佛舍利)를 안치하기도 하고, 곡식 7만 섬을 여러 사찰에 헌납하기도 하였으며, 불명경보(佛名經寶)와 광학보(廣學寶)를 설치하여 불경을 공부하도록 권장하였다.
불명경보와 광학보는 현재의 장학재단과 같은 것으로서, 그 기금은 나라에서 마련하고 기구와 운영은 각기 큰 사찰에 일임하여 불교학자를 길러 내도록 하였다.
제4대 광종은 대보은사(大報恩寺)를 궁궐 남쪽에 세우고 불일사(佛日寺)를 동쪽 교외에 창건하여 태조와 그의 왕비인 유씨(劉氏)의 원당(願堂)으로 삼았다. 또한 왕비 유씨의 복을 빌기 위하여 숭선사(崇善寺)를 새로 짓기도 하였다.
958년에는 쌍기(雙冀)의 건의에 따라 과거를 채택하였다. 이에 준하여 승과(僧科)를 새로 두어 대덕(大德)·대사(大師)·중대사(重大師)·삼중대사(三重大師)·선사(禪師)·대선사(大禪師) 등의 선종법계(禪宗法階)와 대덕·대사·중대사·삼중대사·수좌(首座)·승통(僧統)의 교종법계도 만들었다. 승려의 국가고시제도인 승과에는 종선(宗選)과 대선(大選)이 있었다.
종선은 총림선(叢林選)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각 종파 안에서 행하는 것이고, 여기서 합격하면 대선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일종의 예비고사였다.
국가에서 실시하는 본고사 대선은 크게 선종선(禪宗選)과 교종선(敎宗選)으로 나누어졌는데, 선종선은 주로 광명사(廣明寺)에서, 교종선은 주로 왕륜사(王輪寺)에서 실시되었다. 이 승과는 고려 말까지 내려왔고, 조선시대에는 중기에만 실시되었다.
960년에는 오월왕 전숙(錢俶)이 사신을 보내어 천태론소(天台論疏)의 교전과 그 밖의 불전을 구하였다. 이에 제관(諦觀)이 천태 관계 문헌들을 가지고 송나라에 가서 의적(義寂)을 만나 중국천태종을 다시 일으키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함으로써 고려의 문화적 위신을 크게 떨쳤다. 그리고 제관은 『천태사교의 天台四敎儀』를 저술하여 중국승려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또, 963년에는 귀법사(歸法寺)를 세우고 균여(均如)로 하여금 머물게 하였고, 일종의 구급기관으로서 현재의 재해대책본부와 같은 상설기관인 제위보(濟危寶)를 설치하였다.
968년(광종 19)에는 국사·왕사의 이사제도(二師制度)가 시작되었다. 광종은 홍화사(弘化寺)·삼귀사(三歸寺)·유암사(遊巖寺) 등의 절을 창건한 뒤 혜거(惠居)를 국사로 삼고, 탄문(坦文)을 왕사로 삼았으며 974년에 혜거가 죽자 탄문을 국사로 삼았다. 광종은 서로 싸우고 있던 각 종파의 정리에 노력하던 중, 특히 당시 불교계의 가장 큰 과제였던 선교의 융합에 유의하였다.
그 통합의 사상체계로서 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을 포섭하는 천태종과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흡수하고 유학사상이나 노장사상까지도 통합하는 사상체계인 법안종(法眼宗)의 도입에 크게 노력하였다.
이와 같은 기풍 아래, 천태종에서는 제관과 중국천태종의 16대조가 되어 중국천태종의 부활에 크게 기여한 고려승려 의통(義通) 등이 배출되었다. 법안종에서는 지종(智宗) 등 36인이 중국에 파견되는 등 크게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광종의 사망에 이은 개혁의 중단으로 말미암아 일련의 통합운동은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광종 이후에는 다시 보수적인 불교가 지배적인 위치에 오르게 되었지만, 광종의 선교통합운동은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가장 높이 평가할 만한 정책 중 하나이다.
이는 위로는 원효의 통불교운동(通佛敎運動)에 이어지고 아래로는 의천과 지눌의 불교통합운동에 연결된다는 역사적 의의를 가진 것이다.
제6대 성종은 불교사원 세력의 지나친 팽창을 경계하여 집을 버리고 사원으로 만드는 것을 금하였으며, 팔관회와 연등회도 폐지시켰다. 그러나 988년에는 정월과 5월과 9월의 삼장월(三長月)에 도살을 금하였을 뿐 아니라, 991년에는 승려 36명을 송나라에 보내어 유학하게 하였으며, 송나라에서 대장경을 들여오는 등의 치적을 남긴 것으로 보아 불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화엄(華嚴)에 조예가 깊었던 정토사의 탄문(坦文)을 스승으로 모시기도 하였다.
제7대 목종은 또다시 불사(佛事)를 크게 일으켜 진관사(津寬寺)·숭교사(崇敎寺)·시왕사(十王寺) 등의 원찰(願刹)을 창건하였다.
제8대 현종은 성종에 의하여 폐지되었던 연등회와 팔관회를 다시 부활시켰다. 그리고 거란의 침입으로 왕이 서울을 버리고 피난하였으므로 송악은 거란병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때에 현종이 신하들과 함께 불력(佛力)을 빌려 적을 물리치고자 대장경판을 각인(刻印)하여 부인사(符仁寺)에 보관하였다.
초조대장경이라고 불리는 50축(軸)의 경문이 조각되었고, 10만 송(頌)의 거란장경(契丹藏經)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의천(義天)은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계획은 이미 성종 때에 송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관본대장경(官本大藏經)을 가져와 고유의 남북이장(南北二藏)과 거란장(契丹藏)을 교합(校合)함으로써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밖에도 현종 때에는 많은 불사가 이루어졌다. 경주 황룡사의 탑을 수리하고, 중광사(重光寺)·대자은현화사(大慈恩玄化寺)·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혜일중광사(惠日重光寺) 등을 창건하였다.
또 궁중에서는 『인왕반야경』을 자주 강설하였으며, 1019년에는 3,200여 명의 도승(度僧)과 함께 10만여 명을 반승(飯僧)하였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이 시기에는 승려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음식을 공양하는 반승이 연례행사로 베풀어졌다.
또한 역대 왕들은 자주 보살계(菩薩戒)를 받았으며, 왕자 넷이 있으면 그 중 하나를 출가하도록 하여 더욱 불교를 숭상하였다. 백좌도량(百座道場)·금강경도량(金剛經道場)·소재도량(消災道場)·천제석도량(天帝釋道場)·마리지천도량(摩利支天道場)·문두루도량(文豆婁道場) 등을 여러 사찰에 개설한 것은 모두가 당시 외적을 물리치려는 호국적·주술적 신앙심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불교행사와 아울러 대장경의 간행 및 많은 사찰과 탑의 건립 등도 이러한 국난을 극복하려는 호국적인 신앙심과 직결되는 것이다.
1043년(정종 9)에는 굉확선사(宏廓禪師)가 안심사(安心寺)의 동남쪽에 24개의 대사찰을 세우고 3,000여 명의 승려를 이끌고 선문을 크게 진흥하였다. 또 경행(經行)이라는 의식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개경의 거리를 세 갈래로 나누어서 『반야경』을 메고 가면 법복을 입은 승려들이 보행독송(步行讀誦)하고, 그 뒤를 감압관(監押官)과 백성들이 따랐다. 또 왕의 생일을 맞이하면 전국의 각 사찰에서는 기복도량(祈福道場)을 개설하였다.
윤경회(輪經會)라는 모임도 자주 있었는데, 이는 때때로 관리들이 민폐를 끼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귀족문화의 융성과 아울러 귀족불교로서 크게 번성한 불교계에서는 점차로 사치와 타락의 기운이 일어나게 되어 불교의 본 정신과는 거리가 멀어져 가게 되었다.
문종 10년(1056)에 내린 교서(敎書)에는 부역을 면하기 위한 무리들이 승려가 되어 재화를 모으는 데 급급하고, 밭 갈고 가축을 기르며 장사를 일삼을 뿐 아니라 사원에서 파와 마늘을 다지거나 술냄새를 풍기며, 승려의 속인 복장, 여염집 출입, 백성들과의 싸움 등을 지적하고 있어 그 당시 불교계의 일부가 얼마나 부패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불교의 모순은 일부 유학자들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유학자들도 사상적인 기반이 불교에 있었기 때문에 불교사상 자체보다는 사원세력의 부패를 지적하는 데 그치고 있다.
최충(崔冲)을 비롯한 이름난 유학자 12명도 용흥사(龍興寺)·귀법사(歸法寺) 두 절에서 면학하여 널리 이름을 떨쳤었다. 또한 문종 때의 국사 정현(鼎賢)은 유가밀교(瑜伽密敎)를 통해 신이(神異)를 나타낸 승려로서 『금고경(金鼓經)』을 강하여 비오기를 빌기도 하였다.
선종·헌종·숙종 때의 불교는 의천(義天)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진다. 송나라에서 천태와 화엄학 등을 공부하고 1086년에 귀국하여 흥왕사에 머물게 되었던 의천은 흥왕사 내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여 나라 안에 널리 흩어져 있던 고서(古書)를 수집하고, 송·요·일본으로부터 불서(佛書)를 구입하여 1,010부, 4,740여 권의 속장경(續藏經)을 간행하였다.
그 뒤 조계산 선암사(仙巖寺)를 중흥하고 다시 홍원사(洪圓寺)·해인사 등을 거쳐 그를 위해 창건한 국청사(國淸寺)로 와서, 1097년(숙종 2) 처음으로 천태교관(天台敎觀)을 강의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1099년의 식년(式年)에 제1회 천태종 승선(僧選)을 가졌고, 1101년에는 국가에서 주관하는 천태종 대선(大選)을 행함으로써 의천이 개창한 천태종은 명실상부한 하나의 종파로서 공인되었다.
많은 제자 중 가장 뛰어났던 계응(戒膺)·혜소(惠素)·교웅(敎雄) 등은 천태종을 계승하여 그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이렇듯 의천이 활발한 교화를 펴고 있는 동안에도 고려의 불교는 좀처럼 정화되지 못하고 있었으며, 일부 승려들이 민심을 현혹하여 미신적 경향은 계속 증대되고 있었다.
광기(光器)는 음양서(陰陽書)를 위조하였다가 발각되어 형벌에 처하여졌고, 남녀 승려가 한데 어울려 만불회(萬佛會)라는 놀이를 즐기기도 하였다. 이는 불사를 빙자한 유흥놀이였다.
또한 각진(覺眞)은 음양(陰陽)을 망발하며 백성들을 현혹시키다가 유배되었으며, 반승을 비롯한 숱한 기복불교적인 행사는 끊이지 않았다. 다만 여진족의 침략이 있었을 때 승려의 무리로 구성된 항마군(降魔軍)이 조직되어 여진을 물리치는 데 공헌하였으나, 별다른 효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예종 때에는 덕창(德昌)·담진(曇眞)·낙진(樂眞)·덕연(德緣) 등의 고승이 있었다. 담진은 왕사가 되어 선을 설하여 비오기를 빌었고, 또 빈번히 경행(經行)을 하였다.
궁중에서는 기복불교로 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멀리 떨어진 지방에는 뛰어난 선사(禪師)가 있었다. 벼슬을 버리고 뜻하는 바 있어 『설봉어록(雪峯語錄)』과 『능엄경(楞嚴經)』을 가지고 이름있는 산을 두루 찾아다니며 혼자 수도하여 불도를 깨달은 이자현(李資玄)은 고려시대 선학독립(禪學獨立)의 제일인자로서 지눌(知訥)에 앞선 선구자라고도 할 수 있다.
제17대 인종 때에는 전후 반승이 13회나 열렸었는데, 요망한 무리들이 이 틈을 타서 간악한 짓을 할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자는 묘청(妙淸)으로서 매우 괴이한 팔성당(八聖堂)을 궁중에 두게 하고, 서경천도를 주장하다가 1125년에는 서경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고려불교를 순수하게 이끌어갔던 학일(學一)·탄연(坦然) 등의 고승들은 있었다. 학일은 조사선(祖師禪)을 제창한 승려로서 예종의 지극한 존경을 받다가 국왕의 곁을 떠나 운문사(雲門寺)에서 많은 후학들을 지도하였으며, 탄연은 인종 때에 왕사가 되고 예종 즉위 뒤에도 두터운 예우를 받았으나 70세에 단속사(斷俗寺)로 은퇴하여 종풍(宗風)을 크게 떨쳤던 선승이었다. 특히 그의 서법(書法)은 정묘하여 고려의 명필로서도 유명하였다.
이러한 선사들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불교는 계속 타락상을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의종 이후 법문(法門)의 문란이 극에 달하고 있었으나, 표면상으로는 경건한 불사들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왕은 1147년에 왕자의 출생을 기원하여 영통사에서 50일 동안 『화엄경』을 강설하였고, 금은자화엄경 2부를 사경(寫經)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복자내시(卜者內侍) 영의(榮儀)가 국가기업의 흥망과 임금의 수명은 오직 기도를 부지런히 하는 데 달려 있다고 하여 왕을 미혹시켰고,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하려면 제석천과 관음보살을 섬겨야 한다고 해서 두 보살상을 그려 중앙과 지방의 사원에 널리 나누어 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법회를 축성법회(祝聖法會)라고 하였다.
또 안화사(安和寺)에 제석수보살(帝釋須菩薩)을 새겨놓고 승려들을 모아 밤낮으로 쉬지 않고 보살의 명호를 외우도록 하고는 이를 연성법석(連聲法席)이라고 불렀다.
영의는 이와 같이 주술을 일삼으면서도 밤을 새우며 절하는 등 다른 승려로 하여금 천만일을 한계로 고행을 계속하도록 하였다. 왕이 주술적인 불사만을 좋아하였으므로 궁중의 뜰은 늘 승려들로 가득하였고, 대신들은 물론 일반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절과 탑을 다투어 지었다.
사찰은 더욱더 화려하게 꾸며졌고 왕은 자주 사찰에서 대신들과 연회를 베풀었으며, 승려들도 이에 참여하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이와 같은 일로 국고가 급격히 줄어들고 무신들이 차별을 받게 되자, 이의방(李義方) 등이 주동이 되어 무신의 난이 일어났으며, 왕은 거제로 쫓겨가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무신이 집권한 명종 때에도 나라의 사정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권신(權臣) 이의방 등은 권력을 남용하여 문신을 살육하였고, 살육을 간하는 관리들까지 욕보이는 등 그 횡포는 말할 수 없었으며, 국왕은 반승을 되풀이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1170년(의종 24)에는 이고(李高)가 승려 수혜(修惠)·현소(玄素) 등과 모의하여 반기를 기도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이의방에 의해 살해되었다.
1174년(명종 4)에는 귀법사의 승려 100여 명이 성문 북쪽으로 쳐들어가서 이의방 일파를 타도하려 하였으나, 사병까지 거느리고 있는 그에 의해서 수십 명이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에 중광사·홍호사·귀법사·홍화사 등의 승려 2,000여 명이 개경의 동문으로 모였으나, 문이 닫혀서 들어가지 못하게 되자 성밖의 민가를 불태우고 들어가서 이의방 형제를 죽이려 하였고, 이에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 승려들의 도성출입을 금지하였으며, 개성 부근의 사찰을 약탈하고 불태우기까지 하는 불상사를 초래하였다. 마침내 이의방 형제는 승도들의 손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고, 그들의 세력을 타도한 승려 종참(宗旵)과 정균(鄭筠)의 횡포가 다시 시작되었으나 그들 역시 반정에 의해서 죽음을 당하였다.
[4.2. 고려 중기의 불교]
혼탁과 광란의 분위기를 정화하고, 바르고 참된 불교의 뜻을 선양하기 위해 의연히 일어난 뜻 있는 승려가 이 시대에는 많이 나타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승려는 지눌(知訥)이다.
그는 수도시절에 『육조단경(六祖壇經)』·『화엄론』·『대혜보각선사어록(大慧普覺禪師語錄)』을 읽고 세 번을 크게 깨친 뒤, 송광산 수선사(修禪社)를 중심으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결성하여 새로운 선풍을 크게 떨쳤다.
그는 문도를 지도함에 있어 『금강경』·『육조단경』·『화엄경』으로 강론하였고,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경절문(經截門) 등의 3문을 열어 그들을 가르쳤는데, 이 전통은 현재까지 한국불교 선종의 근본이 되고 있다. 지눌은 성품이 근엄하였으나 자비로웠고, 불교의 율(律)을 엄격히 따랐으나 개차(開遮:열고 닫음)의 여유를 남겼으며, 참된 것과 속된 것을 엄격히 구별하였으나 그것이 둘이 아님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또한 선종의 승려로서 평생을 참선에 몰두하였지만 틈틈이 불경 읽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부처님 뜻을 전하는 것이 선(禪)이요 부처님 말씀을 깨닫는 것이 교(敎)라고 믿었기 때문에 선과 교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선종이다 교종이다 하고 싸우는 것은 부처님의 참뜻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설파하면서, 이 무의미한 논쟁을 매듭짓기 위해 선교합일(禪敎合一)을 주창하였고 정혜쌍수(定慧雙修)를 구현한 실천가였다.
이러한 주장과 실천은 신라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이나 무애(無碍)한 행동, 대각국사 의천의 교관병수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지눌의 출현은 부패 타락한 귀족불교의 탁류를 적어도 나라 안 심산유곡까지는 미치지 못하게 하였고, 우리나라 불교의 청신한 명맥을 유지하는 데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그의 제자인 요세(了世)·승형(承逈)·혜심(慧諶) 등은 지눌이 출현하지 않았더라면 빛을 보지 못하였을 고려 중기의 고승들이다. 이들은 조계산 수선사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여 한국사상사에 큰 이정표를 세운 사상가들이다.
이들 중 요세는 참회와 백련사결사(白蓮社結社)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소년시절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우고 36세에 지눌의 제자가 되었으나 끝내 천태종풍을 버리지 못하였다.
참의(懺儀)를 닦음에 있어 육신이 허락하는 한 하루에도 53불(佛)에게 예배하기를 12번씩 하였으며, 남해산(南海山) 기슭에 80여 칸의 보현도량(普賢道場)을 짓고 법화삼매(法華三昧)를 닦았다.
오로지 산 속에만 머물러 50년 동안 한번도 서울의 속진(俗塵)을 밟은 일이 없었다고 한다. 또 하루 일과로 그는 『법화경』 1부와 아미타불 1만 번을 염불하였다.
그러나 그가 지방에서 활약하고 있던 시기에 중앙불교계에는 말할 수 없는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1211년(희종 7)에는 최충헌(崔忠獻)이 무인정치로 왕을 폐립하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여 권세를 남용하자 승도들은 이에 맞서 싸우는 등 혼란이 거듭되었고, 중국대륙에서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하고 있던 몽골족의 침입에 대비해서 격퇴를 기원하는 호국적 불사가 빈번하게 거행되었다.
신종은 거의 달마다 각종 도량(道場)을 열고 멸적(滅賊)을 기원하는 것을 조정의 일과로 삼았고, 희종도 소재도량(消災道場)·인왕도량(仁王道場) 등을 1년에 몇 차례씩 개설하였으며, 강종도 연생도량(延生道場)·성변소재도량(星變消災道場) 등을 거의 매월 개설하여서 적군의 격퇴를 기원하였다.
제23대 고종 재위 46년 동안에는 거란과 몽골의 침략으로 호국적인 기복불사가 더욱 성행하였다. 이 시기에도 각종의 도량을 개설하여 보살계를 받거나 담론법석(談論法席)·진병법석(鎭兵法席) 등의 모임을 가지고 연등회와 팔관회 등의 행사를 아울러 행하였는데, 그 모두가 호국적 불교에서 나온 의식이었다.
또한 앞서 현종 때 각간(刻刊)되었던 대장경판(大藏經版)이 1232년 몽골병에 의하여 소실되자, 고종은 1237년부터 1251년까지 16년 동안에 걸쳐 각장(刻藏)을 계속하여 재조대장경을 완성하였다.
현종 때에 대장경을 판각하여 외적을 물리쳤던 사실을 본받아 적병을 물리치고자 하였던 것이며, 국가적 전란을 겪으면서도 온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모든 불보살(佛菩薩)의 가호를 빌기 위함이었다.
이 대장경은 우리 민족이 남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대장경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시대의 문호로 알려진 이규보(李奎報)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그는 『능엄경』·『능가경(楞伽經)』 등의 대승경전을 즐겨 읽었으며, 혜문(惠文)·각월(覺月) 등의 승려와 특별한 교우를 맺어 선도(禪道)에도 많은 흥미를 보였다.
또 승형과 혜심은 지눌의 문하에서 심요(心要)를 체득한 고승들로서 승형은 능엄선(楞嚴禪)으로 경기지방에서 현풍(玄風)을 떨쳤다.
승형은 지눌의 문하에서 공부한 뒤 청평산에 있는 이자현의 유적을 찾아 그의 「문수사기(文殊寺記)」를 보고 『능엄경』이 깨달음의 요로(要路)임을 느끼고 그곳에 머물면서 『능엄경』을 공부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능엄경』이 선가의 필수교과로서 존경받게 된 것은 승형에 의한 것이다.
혜심은 지눌이 가장 사랑한 수제자로서 지눌이 입적하자 그 자리를 이어 수선사 제2세가 되었으며, 크게 종풍을 진작하였다. 그는 고칙(古則) 1,125수와 여러 조사의 염송을 모아 『선문염송(禪門拈頌)』을 편찬하였다. 혜심은 이 책을 적극 활용하여 후진육성에 힘썼으며, 이로 인하여 고려불교는 역사적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 책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의 내용을 고려인의 입장에서 처음으로 정리한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높이 평가되며, 조계산문에서 대대로 중요한 교과서로 삼았을 뿐 아니라, 지금도 한국불교의 소의경전으로 채택되고 있다.
지눌과 혜심 이후 고려불교는 충렬왕대까지 수선사가 중심이 된 조계종에 의해서 다소 안정되어 있었다. 혜심의 뒤를 이은 수선사 제3세는 청진국사(淸眞國師)이지만 그의 생애는 전혀 전하지 않는다.
제4세 혼원(混元)은 1252년부터 5년 동안 수선사에 머물렀고, 제5세 천영(天英)은 고종·원종·충렬왕의 3대에 걸쳐 활동하였으며, 제6세 충지(冲止)는 1286년부터 7년 동안 수선사 사주(社主)로 있으면서 지눌의 유궤(遺軌)를 한층 더 빛나게 하였다.
충지 이후 수선사의 법맥을 이은 이로는 제10세 만항(萬恒)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 제7·8·9세의 사주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는데, 이는 원나라의 고려 지배기간중 수선사의 활동에 관한 기사가 전해지지 않고 있다는 것과 함께 생각할 때, 수선사의 위치가 몽골의 분열정책에 의하여 새로 생겨난 다른 많은 결사들과 동등한 계위로 격하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또한 충렬왕 때에 조계산 수선사 이외의 지역에서 활약한 가장 두드러진 승려로 일연(一然)과 혜영(惠永)이 있었다. 일연은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그의 저서 중 『삼국유사』는 우리나라의 종교사적인 고사들을 주체적인 입장에서 수록하여 후세에 구체적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또한 혜영은 화엄교학을 천명함으로써 높이 평가받고 있을 뿐 아니라 원나라에서도 그 명승이 널리 알려진 고승이었다.
한편, 고려왕실의 기복적 미신의 폐풍은 지눌·혜심 등의 교화를 통해서 일시적으로 저지를 당하는 듯하였으나 선(禪)의 종지가 하근기 중생에게는 어렵다는 점 때문에 다시 기복적 불교가 성행하였다.
또한 지눌의 법맥을 잇는 수선사 중심의 활동이 점차로 그 힘을 잃어갔고, 몽고의 강한 영향권에 속했던 13세기 말∼14세기 초까지의 불교계는 승려도 사찰의 수도 많았고 불사(佛事)도 빈번히 거행되기는 하였으나, 불교의 진면목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하고 있었다.
충렬왕 때의 승려들은 형식상 사회적 우대를 받았지만 뇌물을 주고 선사 또는 수좌(首座)가 되는 예가 허다하였으며, 심지어는 승려의 상당수가 취처(娶妻)하는 한심한 상황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충렬왕 때를 기점으로 사(社)라는 이름이 붙은 사찰 중심의 결사(結社)가 많이 생겼다. 이는 수선사와 같이 사찰명인 동시에 그 사찰을 중심으로 수행을 위해 모이는 신도단체의 이름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았다.
[4.3. 고려 후기의 불교]
몽골족의 지배하에서 자주적인 발전역량을 상실했던 고려의 불교계는 충렬왕 이후 타락과 분열·대립이 더욱 심화되었다. 다행히 충렬왕 때까지는 지눌로부터 시작된 건전한 불교기풍이 그의 제자들의 직접·간접적인 영향 아래 하나의 일관된 맥락으로 이어졌지만, 제26대 충선왕으로부터 제30대 충정왕 때까지의 고려는 철저한 이민족의 압제 밑에서 민족문화 불모의 터전이 되고 말았다.
이 시대에도 고승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과 기력을 잃은 지배자들은 이미 나라와 백성을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멸망이 임박한 원나라의 쇠잔한 기력에 간신히 이끌려가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충선왕 때에는 만승회(萬僧會) 등의 기복행사 위주의 신앙이 성행하였고, 충혜왕은 방종하기 짝이 없었으며 술사(術師)들의 말을 믿어 실덕(失德)이 심한 무자격자였다. 충목왕과 충정왕 때에는 왕의 위엄도 사상도 볼만한 것이 없는 시대였다.
이 시대의 고승으로는 충숙왕 때에 왕사와 국통을 역임한 정오(丁午)와 왕사 혼구(混丘), 국통 무외(無畏), 그리고 조계산 수선사 제10세 만항(萬恒)과 중국 원제(元帝)의 총애를 받은 의려(義旅), 그 밖의 왕사 조형(祖衡)·조륜(祖倫)·뇌묵(雷默)과 인도승인 지공(指空) 등이 있었다.
이 중 혼구는 충렬왕·충선왕·충숙왕의 3대에 걸쳐서 존경을 받았던 고승으로서 성품이 단정하고 엄하였으며 천성이 자상하여 그 친척이 모두 소미타(小彌陀)라고 불렀다 한다.
1326년(충숙왕 13) 3월에 원나라를 거쳐서 고려로 들어온 인도승 지공은 개경과 금강산 등에 머물면서 고려불교계에 새로운 기풍을 불러일으켰다.
자안(子安)은 법주사(法住寺)·국녕사(國寧寺)·민천사(旻天寺) 등에 있으면서 유식학을 크게 폈을 뿐 아니라 『심지관경소기(心地觀經疏記)』 등을 지어 많은 강사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경론장소(經論章疏)』 92권을 펴내기도 하였다.
또 『석가여래행적송(釋迦如來行蹟頌)』 776구(句)를 지어 각 구절마다 주해를 붙인 뇌묵(雷默)은 오로지 암자에만 머물러 『법화경』을 송하며 아미타불을 염하고, 불경을 서사(書寫)하는 것을 일과로 하여 20년을 보냈다고 한다.
공민왕대에는 복구(復丘)·보우(普愚)·신돈(辛旽)·혜근(慧勤) 등이 왕사로 임명되어 왕을 보필하며 불교의 명맥을 유지하는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이들 중 신돈은 수도승 또는 학승으로보다는 공민왕의 정치개혁을 도운 정치가였으므로 다른 승려들과는 그 성격이 다르나, 나머지 세 고승들은 고려불교의 끝을 장식한 사상가요 수도승으로서, 특히 배불정책 밑에서 조선불교의 맥락을 잇게 하는 초석이 된 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고승들이다.
조계산 천영의 제자인 복구는 21세에 승과(僧科)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한 뒤 오로지 수도에 힘쓰면서 명리를 바라지 않았지만, 공민왕의 즉위와 함께 왕사로 책봉되어 적지않은 감화를 왕에게 미쳤다.
보우는 임제종(臨濟宗)을 도입하여 선문(禪門)의 새로운 조류를 형성하였고 고려 말의 불교계에 생기를 불어넣은 점에서 한국불교사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고승이다.
보우는 1348년에 귀국하여 여러 차례 공민왕의 부름에 불응하다가 1356년에 왕사가 되어 광명사(廣明寺)에 머물면서 왕도의 누적된 폐단, 정치의 부패, 불교계의 타락 등에 대하여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서울을 한양으로 옮겨 인심을 일변하고 선문구산을 일문(一門)으로 통합하고 종파의 이름을 ‘도존(道存)’이라 할 것을 건의하는 등 정교(政敎)의 혁신을 도모하기를 주장하였으나, 그 뜻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가 지은 「태고암가(太古菴歌)」·『태고집(太古集)』 등에는 그의 깊은 경지와 구세(救世)의 큰 뜻이 역력히 나타나 있다. 보우와 동시대의 사람으로 임제종의 법맥을 이은 고려 승려로는 경한(景閑)과 나옹이 있다.
경한은 무심선(無心禪)을 제창한 보기 드문 고승으로서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라고 알려지는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나옹은 일찍부터 많은 이적을 남겼고 1371년에는 왕사가 되었다. 우주를 각계(覺界)로 삼고 만유를 불신(佛身)으로 보며, 천지일월산천초목(天地日月山川草木)을 법(法)과 심(心)으로 풀이하는 것이 지눌을 거쳐 원효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적 맥락을 이루고 있으며, 그의 염불관(念佛觀)·정토관(淨土觀)도 역시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이들 고승들 중 보우의 밑에서는 혼수(混修)·찬영(粲英) 등이 나왔으며, 나옹의 밑에서는 자초(自超)·축원(竺源)·법장(法藏) 등의 고승들이 나와서 조선 초기 불교의 명맥을 잇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배불(排佛)의 움직임이 크게 나타나고 있었다. 1352년(공민왕 1)에 이색(李穡)은 비교적 온건한 어조이기는 하였으나 왕에게 불교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중세 이후 불교도의 수가 더욱 늘어났으나 오교양종(五敎兩宗)은 명리를 구하는 소굴이 되었으며, 큰 냇가 깊은 산골에 절 없는 곳이 없을 정도가 되었으니 나라의 백성 중 놀고 먹는 자가 많아져서 지식 있는 사람들이 모두 마음 아프게 생각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제현(李齊賢)과 더불어 불교에 조예가 깊은 불교신자로 널리 알려져 있어 극단적인 배불론자가 될 수는 없는 사람이었지만, 다소의 몰지각한 승려들과 왕실의 지나친 맹신현상에 대해서는 묵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보우도 공민왕의 왕사가 되었을 때 선문구산의 폐를 말한 것은 이색이 지적한 사실과 관계가 없지 않은 것이었고 이와 거의 같은 시기의 일이었다.
1361년 어사대에서는 승려의 무리가 과부나 외로운 여자를 꾀어 머리를 깎아 비구니를 만들고는 함께 거처하면서 음욕을 함부로 하고 불사(佛事)를 권해 풍속을 어지럽히고 있다는 보고를 한 일이 있다. 이로부터 몇 해 뒤에 배불론자인 정도전(鄭道傳)은 이론과 실제 두 가지 면에서 대대적인 불교배척운동을 펴기에 이르렀다.
그의 불교배척 논의는 상당히 일반적인 편견에 좌우된 느낌이 있어, 전적으로 상대방을 납득시킬 만한 것은 못 되었지만 부분적으로는 타당하였다. 특히 당시의 불교 이해 및 실천에 대한 정당한 비판이 포함되어 있다.
공민왕 말기에는 ‘태조구세지상(太祖九世之像)’이라는 것을 만들어 태조의 전신(前身)을 아홉 가지로 말하면서, 왕위에 오르기 바로 전에는 어느 절의 소였고 죽은 뒤에는 보살이 되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여 김자수(金子粹) 등에 의하여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당시 불교도들의 윤리적 타락에 관한 비판은 전법판서(典法判書) 조인옥(趙仁沃)에 의해서도 신랄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그 주된 내용은 욕심을 적게 해야 하는 교(敎)를 믿는 자들이 금욕(金欲)·정욕(情欲)을 더욱 밝히고 있다는 데에 집중되고 있다.
[5. 조선시대]
고려 말부터 거세게 일기 시작한 배불의 기세는 왕조가 바뀐 조선시대 초기에 이르러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고려 때에도 불교배척의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던 유학자들은 조선의 건국과 함께 본격적인 불교배척을 꾀하였으며, 위정자의 정책적인 불교탄압이 시작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조선시대의 불교는 억압당하고 배척을 받았던 불교수난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5.1. 조선 초기의 불교]
5.1.1. 왕실의 불교정책
1392년 7월에 이성계(李成桂)는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우고 태조가 되었다. 태조는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고려 말에는 보우·나옹 등의 재가제자(在家弟子)가 되었을 뿐 아니라 무학(無學)과는 특별한 관계에 있었다. 태조는 즉위년에 무학을 왕사로 삼고 궁중에서 승려 200명에게 반식(飯食)을 하였다.
또 연복사(演福寺)에 탑을 중창하고 문수회(文殊會)를 베풀었으며, 해인사의 고탑(古塔)을 중수하면서 탑 안에 대장경을 인성(印成)하여 안치하고 복국이민(福國利民)을 발원하였다.
1394년에는 천태종의 고승 조구(祖丘)를 국사로 삼았고, 『법화경』 3부를 금서(金書)하여 고려 왕씨(王氏)들의 명복을 기리게 하였다.
1397년에는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를 위하여 흥천사(興天寺)를 세웠으며, 진관사(津寬寺)에 수륙사(水陸社)를 만들게 함으로써 이후 해마다 수륙도량을 열어 군생(群生)의 명복을 빌었다.
이듬해에는 강화도의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대장경판을 지천사(支天寺)로 옮겼으며, 흥천사의 수선사주(修禪社主) 상총(尙聰)이 선을 닦고 경을 강설하는 승풍을 장려하여 나라를 복되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것을 상서(上書)하자, 태조가 그 뜻을 따랐다.
이 밖에도 건국의 경찬사업(慶讚事業)으로 대장경을 인간(印刊)하고 금은자 사경 등을 하게 하였으며, 사원을 없애고 승려를 도태시켜야 한다는 주변의 여론이 빗발치듯할 때, 개국의 처음부터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척불정책에 휩쓸리지 않았다.
그러나 태조의 양위를 받은 정종은 숭유정책의 첫 단계로서 서울의 동서남북과 중앙에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설치하였고, 제3대 태종이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숭유배불정책(崇儒排佛政策)은 시작되었다.
태종은 즉위년에 궁중에 있던 인왕불(仁王佛)을 내원당(內願堂)으로 옮기게 하고 궁중에서의 불사(佛事)를 모두 폐지하였다.
1402년에는 서운관의 상소를 좇아 서울 밖의 70개 사찰을 제외한 모든 사찰 전토(田土)의 조세를 군자(軍資)에 소속시키고 사찰 노비(奴婢)를 나누어서 기관에 분속시키게 하였다.
이와 같이 노비를 줄임으로써 사원의 토지까지도 삭감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어 많은 토지가 국가에 몰수되었다. 이에 1406년(태종 6) 2월에 조계종의 승려 성민(省敏)이 여러 차례 의정부에다 사원과 토지와 노비를 종전대로 둘 것을 호소하였다.
당시의 정승 하륜(河崙)이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으므로 성민은 수백 명의 승려를 이끌고 가서 신문고를 치고 왕에게 척불정책의 완화를 직접 호소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태종은 오히려 그 해 3월에 전국에 242개 사찰만을 남게 하고 나머지 사원의 토지와 노비를 모두 국가에서 몰수하도록 하였으므로, 242개 사찰 이외에는 모두 폐사(廢寺)가 되고 말았다.
태종은 또 재위 6년에서 7년 사이에 11종(宗)의 종단을 축소시켜 7종으로 만들었다. 태종 6년 3월까지는 조계종(曹溪宗)·총지종(摠持宗)·천태소자종(天台疏字宗)·천태법사종(天台法事宗)·화엄종·도문종(道門宗)·자은종(慈恩宗)·중도종(中道宗)·신인종(神印宗)·남산종(南山宗)·시흥종(始興宗)의 11종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태종 7년 12월 이전의 총지종과 남산종을 합쳐서 총남종(摠南宗)으로 만들고, 중도종과 신인종을 합쳐서 중신종(中神宗)으로, 천태소자종과 천태법사종을 합쳐서 천태종으로 만듦으로써 조계종·천태종·화엄종·자은종·중신종·총남종·시흥종의 7종으로 줄인 것이다.
또한 국사·왕사의 제도를 없애고 도첩제(度牒制)를 엄히 실시하였으며, 승려를 시켜 비오기를 기원하는 기우불사를 폐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산릉(山陵)의 곁에 사찰을 세워서 명목을 빌게 했던 옛 관습도 폐지하였다.
제4대 세종은 즉위년부터 더 심한 훼불(毁佛)을 강행하였다. 이에 승려들은 1419년(세종 1)과 1422년에 중국으로 가서 명나라 황제에게 국내의 심한 불교박해 사정과 이에 대한 구원을 호소하였으며, 세종은 명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배불책을 늦추고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태종 때 폐지한 사찰과 노비 중에서 완전히 처리되지 못한 것을 모두 정리하였고, 1422년에는 매년 초에 사찰과 산천에 사람을 보내어서 복을 비는 의식과 경행의식을 중지시켰다.
세종의 척불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1424년 4월에 단행된 종단의 폐합이다. 그는 조계종·천태종·총남종을 합쳐서 선종으로, 화엄종·자은종·중신종·시흥종을 합쳐 교종으로 만듦으로써 지금까지의 7종을 선교 양종(兩宗)의 2종파로 줄였을 뿐 아니라 전국에 사찰 36개 소, 토지 7,950결, 승려 3,770명으로 한정시켜 버렸다.
종단을 폐합하여 축소시킴으로써 사찰의 수를 많이 줄일 수 있게 되고, 이에 따른 적지않은 토지와 노비가 국가의 큰 재산으로 몰수될 수 있다는 계산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종은 성밖의 승려에게 도성의 출입을 금지시켰고 연소자의 출가를 엄금하였다.
그러나 세종도 나중에는 불교를 신봉하는 국왕이 되었다. 중년 이후 불경을 즐겨 읽고 내원당을 세웠으며 법요(法要)·조상(造像)·조사(造寺) 등에도 열을 올렸다. 그러나 숭유억불의 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지 못하였고 유생들의 반발만 극한에 달하였다.
제5대 문종도 승니(僧尼)가 되는 것을 금하고 승니의 도성출입을 금하는 등 배불정책을 계속하는 듯하였으나, 그의 재위기간은 2년에 불과하였다.
조선시대의 대호불왕(大護佛王)이라고 할 수 있는 제7대 세조는 즉위하자 이전까지의 배불정책을 외면하였다. 본래 신심이 두터워서 평소에 신미(信眉)·수미(守眉)·설준(雪峻) 등의 고승과 가까이 지냈던 그는 일찍이 수양대군(首陽大君) 시절에 공자와 석가의 도에 대하여 그 우열을 언급하게 되었을 때에 하늘과 땅의 차이 같다고 비교할 만큼 불교를 좋아하고 불교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세종은 1447년에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그에게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짓게 하였던 것이다. 그는 1457년에 왕세자가 죽자 명복을 빌기 위하여 『금강반야경』을 수서(手書)하였고, 명을 내려 『능엄경』·『법화경』 등을 대조하며 교정하게 하였으며, 홍준(弘濬)·신미 등으로 하여금 기화(己和)의 『금강경설의(金剛經說誼)』를 교정하고 오가해(五家解)에 넣어 한 책으로 만들도록 하였다.
또 『영가집(永嘉集)』의 제본동이(諸本同異)를 교정하고 『증도가(證道歌)』의 언기주(彦琪註)·굉덕주(宏德註)·조정주(祖庭註) 등을 모아 한 책으로 인행(印行)하였으며, 『법화능엄번역명의집(法華楞嚴翻譯名義集)』 등을 인행하였다.
그 밖에도 많은 경전을 금서(金書) 또는 묵서(墨書)하게 하였으며, 이 모든 경에 왕은 친히 발어(跋語)를 짓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미로 하여금 월출산 도갑사(道岬寺)를 중창하게 하고 약사여래상을 안치하였다.
또 1458년에는 신미·수미·학열(學悅) 등에게 해인사 대장경 50부를 인출하여 각 도의 명산대찰에 나누어 봉안하게 하였고, 이듬해에는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합본하여 『월인석보(月印釋譜)』를 출간하였으며, 불교음악인 영산회상곡(靈山會上曲)과 불교 가무극인 연화대무(蓮華臺舞)가 만들어졌다. 1461년 6월에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많은 불전(佛典)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간행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이듬해에 『능엄경언해』가 간행되었고, 1463년에는 『법화경』을, 해를 이어서 『금강경』·『반야심경』·『원각경』·『영가집』 등의 경전을 국역, 간행하였다. 이는 세조가 남긴 공헌 중 가장 큰 치적으로 손꼽히는 것이다.
또 1464년 5월에는 태조가 세웠던 흥덕사(興德寺)의 터에 대원각사(大圓覺寺)를 세우게 하였는데, 6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4월에 완성하였다. 그 뒤 이 사찰에다 대불상과 대종(大鐘)을 만들어 안치하였으며, 13층의 대석탑을 세워 1467년 사월초파일에 낙성을 보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세조는 정인사(正因寺)를 세우고, 해인사·상원사(上院寺)·월정사(月精寺)·청학사(靑鶴寺)·회암사(檜巖寺)·신륵사(神勒寺)·쌍봉사(雙峯寺)·표훈사(表訓寺) 등 사찰의 중수와 보수를 도왔고,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와 오대산·금강산의 여러 사찰과 낙산사(洛山寺) 등을 찾아 공양하는 등 외호불사(外護佛寺)를 많이 일으켰다. 그리고 앞서 세종이 폐지했던 도성경행(都城經行)을 부활시켜 성황을 이루게 하였다.
또 왕은 승려에게 범죄의 혐의가 있으면 반드시 국왕에게 먼저 계청(啓請)해서 허가를 받고 난 뒤에 고문하게 하였으며, 관속(官屬)이 함부로 사찰에 출입하는 것을 엄금하였고, 도승(度僧)과 선시(選試)의 법을 『경국대전』에 명기하여 후손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이와 같이 세조가 지금까지의 가혹했던 승정(僧政)을 완화시키고 승려의 권익을 보장하여 줌으로써 승려의 도성출입은 자유롭게 되었고 출가도 제한을 받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성종이 즉위하자 척불정책은 더욱 엄하게 행하여졌다. 1471년(성종 2) 6월에는 도성 안에 있던 염불소를, 12월에는 간경도감을 폐지하였고, 1473년 8월에는 사대부의 부녀자가 머리를 깎고 출가하는 것을 금하였으며, 1475년에는 도성 내외의 비구니사찰을 헐어버리게 하였다.
1475년 12월에는 국왕의 생일 때 사찰에서 개설했던 축수재(祝壽齋)를 폐지하였으며, 1492년 2월에는 도첩(度牒)의 법을 정지시키고 도첩이 없는 승려는 모두 정역(定役)과 군정(軍丁)으로 충당시켰다.
성종이 금승(禁僧)의 법을 세워 승려가 되는 것을 금하고 승려를 환속시킴으로써 사원은 텅텅 비게 될 형편이었다. 이러한 때에 인수(仁粹)·인혜(仁惠) 두 대비(大妃)가 금승의 법을 취하하라는 전교를 내렸으므로 한때 중지가 되었으나 성종의 본심은 척불에 있었으므로 불교의 수난은 멈추지 않았다.
불심(佛心)이 대단했던 인수대비가 불상을 만들어서 정업원(淨業院)에 보냈을 때 유생들이 이를 빼앗아 불태움으로써 대비가 크게 노하였을 때도 성종은 유생들을 벌하지 않았다.
성종은 승려들에게 공재(供齋)하는 풍습을 엄금하고 사찰을 창건하거나 승려가 되는 것을 금하는 등 척불책을 철저히 함으로써 승려의 수를 줄였고 사원을 폐사로 만들었다.
다음 왕인 연산군은 선종의 도회소(都會所)인 흥천사(興天寺)와 교종의 도회소인 흥덕사(興德寺) 및 대원각사를 모두 폐하여 공해(公廨)로 삼았고, 삼각산의 모든 절에서 승려를 쫓아내어 폐사로 만들었으며, 성내의 비구니사찰을 없앤 뒤 비구니들을 궁방(宮房)의 노비로 만들었다.
승려를 환속시켜 관노로 삼거나 혼인시켰으며, 사찰의 토지는 모두 관부(官府)로 몰수하였다. 이러한 연산군의 폭정으로 인하여 불교는 더욱 박해를 받게 되었으며, 승과마저도 실시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시대는 불교가 그 존재성을 완전히 무시당한 시기였다.
중종이 즉위하자 그의 생모인 정헌왕후(貞憲王后)의 신불(信佛)에 의해 불교를 복구하려는 움직임이 보이는 듯하였으나 배불의 큰 조류는 어쩔 수 없었고, 결국은 어느 왕보다 더 심한 폐불정책을 보여주었다.
1507년(중종 2)의 식년(式年)에 승시(僧試)를 시행하지 않음으로써 승과(僧科)는 완전히 폐지되고 말았다. 불교는 중종에 의해서 선종과 교종의 양종마저도 없어지게 되었고, 그 뒤 무종파(無宗派)의 혼합적인 현상으로 전락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 당시 유생들의 불교에 대한 횡포도 적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1509년에 몇 사람의 유생이 청계사(淸溪寺)의 경첩(經帖)을 훔쳐간 것과 1510년 3월에 흥천사(興天寺)의 5층 사리각(舍利閣)에 방화한 사건은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또 중종은 같은 해에 각 도의 사찰을 폐사로 만든 뒤 토지를 향교에 속하게 하였다.
1512년에는 흥천사와 흥덕사의 대종(大鐘)을 녹여 총통(銃筒)을 만들게 하였으며, 원각사를 헐어 그 재목을 연산군 때 헐린 민가에 나누어주게 하였을 뿐 아니라 경주의 동불(銅佛)을 부수어서 군기(軍器)를 만들게 하였다.
1516년에는 『경국대전』에 있는 도승조(度僧條)를 지워서 빼어버리게 하였으며, 1518년에는 도성 남쪽의 비구니처소를 철거시키고 불상을 헐게 하였다. 중종은 역사상 가장 혹독한 배불왕이었다.
5.1.2. 배불 속의 고승
건국 초기의 고승으로는 태조의 왕사였던 무학(無學)과 그의 제자 기화(己和)가 있었다. 무학은 나옹의 법을 이어받은 뒤 태조가 조선을 창업하는 데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다.
태조가 신도(新都)인 한양(漢陽)으로 천도하는 데 주역이 되었고 다난한 건국사업을 도왔을 뿐 아니라, 태조가 태종에 대한 노여움으로 함흥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을 때는 태조로 하여금 다시 서울로 오게 하여 부자의 사이를 가깝게 하는 데도 공헌하였다.
기화는 배불의 기세가 치열할 때, 정법(正法)을 수호하고 오해와 무지를 없애기 위해서 크게 노력한 조선 초기의 명승이다.
특히, 그는 『현정론(顯正論)』·『유석질의론(儒釋質疑論)』 등을 지어 불교를 탄압함이 합당하지 못함을 밝혔을 뿐 아니라, 유교와 불교는 물론 한 걸음 더 나아가 도가의 사상까지를 포함하여 삼교일치(三敎一致)를 제창함으로써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세조 때의 고승인 신미(信眉)와 수미(守眉)는 세조가 믿고 숭배한 승려들로서 속리산에서 서로 만난 동갑의 동학(同學)이었다.
이들은 세조의 인경불사(印經佛事)와 간경도감의 역경사업에 큰 힘이 되었으며, 그 밖의 불교문화사업과 세조 자신의 신불(信佛)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두 승려를 일컬어 이감로문(二甘露門)이라고 불렀다.
또한,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던 김시습(金時習)도 승려가 되어 스스로 설잠(雪岑)이라 이름한 뒤 양주의 수락사(水落寺)와 경주의 금오산 용장사(茸長寺) 등에서 머물렀다.
그는 여러 차례 세조의 부름을 받았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교리면에서는 특히 『법화경』에 깊은 조예를 보여 『법화별찬(法華別讚)』을 저술하였는데, 선(禪)의 안목으로 『법화경』을 보아 참신한 해설을 붙이고 있다.
연산군과 중종의 혹심한 척불 속에서 한국불교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대표적인 고승으로 정심(淨心)과 지엄(智儼)이 있었다.
정심은 연산군 때에 환속하여 황악산에 들어가서 여자 신도와 거짓으로 혼인생활을 하는 것처럼 꾸미고 숨어 살다가 선법(禪法)을 지엄에게, 교법(敎法)을 법준(法俊)에게 전하여 실낱 같던 법맥(法脈)을 가까스로 잇게 하였다.
지엄은 말년에 지리산 초암에 머물면서 제자의 양성에 몰두하였는데, 후학들에게 『선원도서(禪源都序)』와 『법집별행록(法集別行錄)』을 가르쳐 여실한 지해(知解)를 얻게 하고, 다음에 『선요(禪要)』로써 지해의 병을 제하게 하였으며, 때때로 『법화경』·『화엄경』·『능엄경』 등의 대승경전으로써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들 불전(佛典)들은 모두가 현재 우리나라 불교 강원(講院)의 교과과정으로 채택하고 있는 것으로 그 연원을 지엄에 두고 있다. 그의 문하에서 영관(靈觀)과 일선(一禪)이 배출되었으며, 다시 영관 밑에서 휴정(休靜)·선수(善修)의 두 대사가 배출되어 크게 불교를 중흥시켰다.
[5.2. 조선 중기의 불교]
5.2.1. 문정왕후의 흥불(興佛)
문정왕후 윤씨는 중종의 왕비로서 중종의 혹심한 배불정책 속에서도 불교를 독실하게 신봉하여 승려의 권익을 옹호하려고 노력하였다. 1545년에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대비로서 섭정하게 됨에 따라 평소에 품었던 불교중흥의 뜻을 펴고자 하였다.
대비는 1550년(명종 5) 12월에 선교양종(禪敎兩宗)을 부활시키고, 그 이듬해에 보우(普雨)에게 교단중흥의 중책을 맡겼다.
이에 보우는 문정대비를 도와 봉은사(奉恩寺)를 선종 본사로 삼고, 봉선사(奉先寺)를 교종 본사로 삼았으며, 도승법(度僧法)과 승과를 다시 시행하는 등 교단중흥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에 승과 예비시험을 시행하고 1552년에는 본고사인 승선(僧選)을 실시하였다.
교단은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되었고, 유능한 승려들이 승선에 응시하였다. 조선시대의 최고 고승인 휴정도 이때의 승과출신으로 명종대에 교종판사(敎宗判事)와 선종판사(禪宗判事)를 역임한 바 있었고, 유정(惟政) 역시 그 뒤의 승과에 등용되었던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이와 같이 보우가 문정대비의 도움을 받아 불교를 중흥시켜가는 과정에 대해 당시 조정의 대신과 유생들은 크게 반발을 하기 시작하였다.
사방에서 보우를 타도하려는 상소가 빗발치듯하였고, 전국의 유생들이 동원되어 터무니없는 죄목을 날조하여 보우를 요승(妖僧)으로 규정하고 참살해야 한다는 주장이 극심하였다.
성균관의 유생들이 성균관을 비우고 시위까지 하였지만 문정대비는 숭불흥교(崇佛興敎)의 정책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고 보우를 옹호하였다.
그러나 불교중흥의 기세는 1565년 4월에 문정대비가 세상을 떠나면서 모든 사업은 중단되고 보우는 곧 잡혀 제주도로 귀양가서 제주목사 변협(邊協)에 의하여 장살당하였다.
이로부터 승려의 사회적 지위는 다시 떨어져서 사역(使役)과 천대로 그 양과 질이 저하되었으며 불교는 산중으로 다시 숨게 되었다.
보우와 문정대비에 의한 15년 동안의 불교부흥운동이 비록 중도에서 꺾이고 말았으나, 궁중에 불법숭상의 기풍을 깊게 하고 불교계에 유능한 인물을 배출시켜 교단의 명맥이 유지되었으며, 후일에는 국난을 극복하는 데도 승려들이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된다.
보우는 유생들에게 시샘과 미움을 받고 요승이라는 악명을 뒤집어썼지만, 사실은 요승이 아닌 지략과 학식을 갖춘 걸승(傑僧)이요 순교자였다.
5.2.2. 의승군(義僧軍)의 구국(救國)
보우와 문정대비에 의해 부흥의 빛을 보았던 불교계의 고승들은 유생들의 탄압에 의해 산 속으로 쫓겨가서 살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외적침입으로 국가가 위태로워지자 산 속에서 뛰쳐나와 대창과 낫으로 외적을 무찌르고 나라의 어려움을 구하는 데에 앞장을 섰다.
1592년(선조 25)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은 당쟁의 혼란 속에서 정치적 지주를 잃고 있던 이 땅을 무인지경처럼 휩쓸어버려 왕성도 무너지고 국왕 선조는 북쪽으로 피란 길을 떠났다.
이러한 때에 공주 갑사(岬寺)의 청련암(靑蓮庵)에 있던 영규(靈圭)는 500여 명의 의승군을 이끌고 청주성(淸州城)의 왜적과 싸워 크게 승리를 거두고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의주로 피란갔던 왕은 처음으로 승전보가 전해지자 영규에게 당상(堂上)의 직과 상을 내렸지만, 왕의 특사가 도착하기도 전에 영규는 의병장 조헌(趙憲)과 함께 다시 금산(錦山)의 왜적을 물리치다가 중과부적으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 금산성 싸움에서 조헌을 비롯한 700명의 의사(義士)와 영규가 거느린 800명의 의승이 끝까지 싸우다가 순교함으로써 왜적도 끝내 성을 버리고 물러나게 되었다. 영규는 바로 휴정의 제자였다.
또 묘향산에 있던 휴정도 왕의 부탁을 받고 산에서 내려와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의 직함을 받은 뒤, 전국의 승려에게 격문을 돌려 모든 불교인이 왜적을 몰아내는 싸움에 가담할 것을 호소하였다.
휴정은 순안 법흥사(法興寺)에서 1,500명의 의승을 모았고 그의 제자 유정은 금강산에서 일어나 광동지방을 중심으로 800명의 의승을 모았으며, 처영(處英)은 지리산에서 일어나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1,000여 명의 의승을 이끌고 각각 참전하였다.
이 밖에도 의엄(義嚴)·경헌(敬軒)·신열(信悅)·청매(靑梅)·해안(海眼)·법견(法堅)·쌍기(雙冀) 등은 모두 쟁쟁한 의승장들이었고, 각처에서 일어난 의승의 총수는 5,000여 명에 이르렀다.
도총섭 휴정은 73세의 고령으로 제자 의엄에게 병권의 일부를 대행시켰으며, 광동지방에서 달려와 도총섭의 주력승군과 합세한 유정을 승군도대장(僧軍都大將)으로 삼아서 실전을 도맡게 하였다.
그리하여 1593년 1월에 이들 의승군은 명나라군과 합세하여 왜적을 무찔러 평양성을 회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또한 처영은 행주산성 싸움에서 용맹히 싸워 크게 공을 세웠다.
유정은 왜적이 정유년에 재침하였을 때도 의승군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서생포(西生浦)의 왜적을 포위하였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적진 속을 드나들며 적정을 탐지하고 평화회담에도 힘을 썼다.
또한 후방에서도 팔공산성·금오산성 등의 산성을 쌓는 일을 비롯하여 4,000여 석의 군량미를 조달하고 많은 집기물을 제공하는 등의 공적을 남겼다.
전란이 끝난 뒤 그는 산성의 방비를 위해 힘쓰다가 잠시 산사(山寺)로 돌아가 쉬었는데, 그때 또 조정에서 일본과의 국교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서 다시 유정을 불러 그 문제를 일임하였다.
유정은 1604년(선조 37) 7월에 왕의 특명으로 일본에 가서 이듬해 5월에 귀국하였다. 그때 그는 국교상의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였을 뿐만 아니라, 포로로 잡혀갔던 동포 3,000여 명을 데리고 돌아오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가 일본에서 겪은 일과 그 성과 및 일본인들의 유정에 대한 대우들에 관해서는 흥미있는 설화가 전해오고 있는데, ‘설보화상(說寶和尙)의 이야기’는 특히 유명하다.
1636년(인조 14) 12월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때에도 의승군들이 일어나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그 중 각성(覺性)과 명조(明照)는 대표적인 의승장이다.
임진왜란 때에 스승 부휴(浮休)를 대신하여 싸움터에 나가서 명나라 장수와 함께 바다에서 왜적을 무찔렀던 각성은 1624년 조정에서 승려들로 하여금 남한산성을 쌓게 하였을 때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 되어 역사(役事)를 감독한 뒤 3년 만에 완공하였다.
그 뒤 지리산 화엄사에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3,000여 명의 의승군을 모아 항마군(降魔軍)이라 이름하고 남한산성을 향하였으나 도중에 왕이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진군을 중지하였다.
또 명조는 1627년(인조 5) 후금이 쳐들어왔을 때 4,000여 명의 의승군을 거느리고 안주(安州)의 전투에서 크게 전공을 세웠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군량미를 모아 보급하는 등 많은 활약을 하였다.
5.2.3. 승단의 활동
휴정이 교화력을 펼친 뒤 불교계에는 조선 건국 이래 최대의 고승들이 활약하는 시대가 된다. 한편으로 구국을 위한 의승활동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불교의 혜명(慧明)을 전승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고승은 휴정과 선수(善修)이다.
휴정은 조선시대 불교에 있어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좌선(坐禪)·진언다라니(眞言陀羅尼)·염불(念佛)·간경(看經) 등의 경향으로 나누어져 있던 당시 불교계의 상황 위에서 휴정은 선교불이(禪敎不二)를 강조하였고, 궁극적으로는 선을 통하여 견성(見性)을 이룩하는 우리나라 불교의 전통을 다시 한번 새로운 각도에서 재확립시켰다. 휴정 이후 우리나라의 불교승단은 거의가 휴정의 후손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만큼 그의 영향력은 큰 것이었다.
또한 선수는 휴정과는 동문으로서 휴정과는 다른 각도에서 불교계에 큰 영향을 끼쳤던 대선사였다. 그는 평생 신도로부터 받은 모든 시물(施物)을 남김 없이 그 자리에서 나누어주어 자신이 가지는 일이 없었으며, 뛰어난 인품과 덕화에 도를 묻는 무리가 항상 끊이지 않았다.
휴정과 선수의 제자들은 각각 유파(類派)를 형성하거나 개인적으로 교화활동을 전개하여 조선시대 불교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휴정의 제자에는 유정을 비롯하여 언기(彦機)·태능(太能)·일선(一禪)·인영(印英)·원준(圓俊)·해안(海眼)·인오(印悟)·법견(法堅)·경헌(敬軒)·영규·처영·의엄(義嚴) 등 뛰어난 인물이 많았으며, 유정·언기·태능·일선의 네 사람은 가장 대표적인 제자로서 휴정문하의 4대파(四大派)를 이루었다.
그 중 언기는 유정과 더불어 휴정문하의 쌍벽을 이룬 이로서, 선과 교를 별문(別門)으로 보지 않는 휴정의 경향을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교(敎) 안에서도 일승(一乘)·삼승(三乘) 등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고, 청중의 근기(根機: 깨닫는 능력)에 따라서 대승과 소승, 깊고 얕은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독특한 주장을 하였다. 그에 의해서 형성된 편양파(鞭羊派)는 여러 파들 중에서 가장 성하였다.
태능은 임진왜란 때 의승으로 참전하였으며, 나중에는 축성(築城)하는 일에도 종사하여 공을 세웠다. 그도 역시 사상적으로 선과 교를 일원이류(一源異流)로 보는 전통적 입장을 취하였으며, 현변(懸辯) 등 수백 명의 제자를 길러 소요파(逍遙派)의 문풍(門風)을 떨쳤다.
또 일선(一禪)은 처음 『법화경』을 배우고 나중에 휴정의 법을 이은 이로서, 『법화경』 3,000부를 찍어 배포하였을 뿐 아니라, 병란으로 승풍이 퇴폐하고 승려들이 선가(禪家)의 본분으로 되돌아오지 않음을 개탄한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문하에 충언(冲彦)·태호(太浩) 등 많은 제자들이 있어서 정관파(靜觀派)를 이루었다.
이 밖에도 법을 묻는 이에게 『도서(都序)』와 『절요(節要)』로 결택(決擇: 배움의 길을 바로잡음)하게 하고 『선요(禪要)』와 『서장(書狀)』으로 참증(參證: 깨달음을 증명함)하여 스스로 법을 얻게끔 지도했던 경헌, 임진왜란 때 의승장의 한 사람으로서 출정하였다가 은거한 뒤 자연을 벗삼아 순수한 선게(禪偈)를 남겼던 인오가 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의승군을 일으켜 전공을 세운 뒤 구례화엄사에 머물렀던 해안, 스스로 휴정의 문파에 속함을 자처하면서 수많은 이적(異蹟)을 남겼을 뿐 아니라 석가모니불의 소화신(小化身)이라고 전해지는 일옥(一玉) 등도 많은 제자들을 길러 크게 선풍(禪風)을 떨쳤다.
부휴선사의 문하에서도 각성(覺性)·응묵(應默)·희옥(希玉)·성현(聖賢)·인문(印文)·담수(淡水)·희언(熙彦) 등이 7파(七派)을 형성하여 그 문풍(門風)을 크게 떨쳤다.
이 중 벽암의 문파가 가장 성행하였으며, 희언은 보기 드문 초연도인(超然道人)의 풍모를 보여준 고승이었다. 이들에 의해 새로운 기풍을 회복한 불교계에는 그 이후에도 휴정의 문손(門孫)과 부휴의 문손 두 계통에서 쟁쟁한 인물들이 배출되어 불교계에 적지않은 업적들을 남겼다.
휴정의 후대에는 앞에서 본 그의 제자들 이후로 응상(應祥)·의심(義諶)·도안(道安)·지안(志安)·상언(尙彦)·유일(有一)·의소(義沼)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학장(學匠)과 종사(宗師)들이 이어 나왔다. 이들 중에는 선지(禪旨)에 깊은 선사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이 화엄을 중심으로 한 강경(講經)의 대가들이었다.
부휴선수의 후대에도 그의 문하 7파 이후에 처능(處能)·수초(守初)·성총(性聰)·수연(秀演)·최눌(最訥) 등의 종사들이 있었으며, 그 밖에도 많은 대가들이 끊이지 않았다. 이들 승려 사이에서는 사자상승(師資相承)의 독특한 전법방식에 따라 권속 관념이 생기게 되었고, 자연히 그 승풍(僧風)에도 약간의 차이를 보였다.
그것은 대개 선과 교의 두 종파 중 어느 편에 치중하느냐에 따라 나누는 것이 일반적인 판단 기준이었지만, 실제로는 모두 표면상으로 선과 교의 일치를 주장하는 쪽으로 기울어졌으므로 큰 차이가 없었고, 포용성의 넓고 좁음에 차이를 보였을 뿐이다.
그러나 크게 휴정과 부휴의 2개 파로 나누어져 있던 조선 중기의 승단은 연초(演初) 때에 합일이 됨에 따라, 그 뒤의 승려들에게는 그 전과 같은 뚜렷한 계보를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
5.2.4. 배불(排佛)과 불교계의 흐름
임진왜란 이후 승려들의 사회적 지위는 다소 호전되었지만, 위정자 및 유생들의 부당한 핍박과 시달림은 계속되었다.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을 비롯한 주요 장소에 산성을 수축하고 수비하는 일은 모두 승려에게 맡겼고, 관가와 유생들에게 종이와 기름과 신 등을 만들어 바치게 하였으며, 그 밖의 잡역을 시켰다. 승려들은 여전히 사회에서 가장 심한 천인대접을 받고 있었다.
또한 현종은 적극적으로 불교를 탄압하여 승려들의 사회적 냉대는 점차 심해졌다. 현종은 즉위와 동시에 양민이 출가하여 승니(僧尼)가 되는 것을 금하였고 또 이미 승니가 된 사람들도 환속할 것을 권하거나 명령하였다.
그는 서울의 비구니사찰인 자수원(慈壽院)과 인수원(仁壽院)을 철폐하고 거기에 모셨던 열성(列聖)의 위판(位版)을 땅에 묻어버렸으며, 사찰 소속의 노비와 위전(位田)은 모두 본사(本司)로 돌리게 하였다.
이러한 사태는 1749년(영조 25)에도 있었는데, 영조는 승려의 도성출입을 금하였다. 정조는 불교를 신봉한다고 하면서 불교를 옹호하는 듯한 몇 가지 조처를 취하기는 하였으나, 그의 신앙은 철저한 이기주의적 기복신앙이었으며, 다른 왕족, 왕가 주변사람들의 불교신앙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승려들은 이러한 사회적 환경 속에서 자연히 더욱 은둔적·체념적인 길을 택하거나, 주위의 조건에 적절히 대처하여 이익을 얻어보려는 경향도 나타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탄압 속에서 정면으로 반대의 뜻을 천명했던 승려는 처능이었다. 처능은 현종이 불교를 탄압하자 그에 항의하는 「간폐석교소 諫廢釋敎疏」를 올려, 조선왕조의 척불책과 배불사상을 논파하였다.
이 소는 조선시대 모든 상소문 중 가장 길고 분량이 많은 것이었으며, 현종의 더 심한 박해를 미연에 방지하는 구실을 하였다.
또한, 이 시대의 사상 조류로는 『화엄경』의 중시를 들 수 있다. 우리 불교사에서 『화엄경』의 사상이 매우 중시되어 온 것은 하나의 전통이다.
이 시기에 와서 그 전통은 거의 모든 문중, 거의 모든 승려들 사이에 아무런 이론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었고, 편양 언기와 부휴·선수의 문중에서 특히 중시되고 있었다. 의심(義諶)은 『화엄경』의 동이(同異)를 연구한 뒤 음석(音釋)을 가하였다.
같은 편양문하의 도안(道安)은 화엄종주(華嚴宗主)라고 불릴 정도로 『화엄경』을 자주 설법하였다. 정혜(定慧)는 화엄에 통효하여 그것을 강설하는 데에 있어 당대의 독보적인 존재였다고 하며, 지안(志安)은 금산사(金山寺)에서 화엄법회를 열었는데 그때 모인 청중이 1,400명이나 되었다. 새봉(璽篈)도 선암사(仙巖寺)에서 화엄강회를 베풀었는데, 그때 모였던 1,207명의 회중(會衆) 명단은 지금도 남아 있다.
정조 때의 의소(義沼)는 『화엄사기(華嚴私記)』를 지었고, 상언(尙彦)은 소실된 『팔십화엄(八十華嚴)』 간본을 새로 간행하였다.
이들은 조선시대의 문예진흥기인 영조·정조 때에 더욱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또한 유·불·도 3교의 일치를 주장하는 것도 이 시대 불교사조의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수초(守初)를 비롯한 성총(性聰)·수연(秀演) 등이 다 그 방면의 선구자요, 의소·응윤(應允)도 그러하였다.
그리고 조선 중기 후반의 불교수행은 대개 선이냐, 교냐, 염불이냐 하는 세 가지로 나뉘어왔다. 이 밖에 진언집(眞言集)이 생기고, 여러 가지 의식이 성행되면서 밀교적 경향도 다시 대두한 것이 사실이나, 이러한 여러 가지 경향들을 이론적으로 회통시키는 데는 화엄의 도리가 필요하며, 실천으로는 선의 실수(實修)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수도가 부족했던 승려나 거사들 사이에서는 잡신(雜信)·미신(迷信)의 경향도 강하게 보였던 것이 이 시대 불교의 특색 중 하나가 되었다.
당대의 화엄종주였던 도안은 노장(老莊)에도 밝고 시문에 매우 뛰어난 재질을 보였으나, 그의 사상은 매우 잡박하여 오히려 선가(禪家)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명부(冥府)의 시왕(十王), 귀매(鬼魅)의 정령, 객관적인 정토를 다 실재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가 하면 묘향산의 운봉(雲峰)은 도안만큼 이름은 나 있지 않았으나, 『심성론(心性論)』을 저술하면서 원효의 문장을 방불하게 하는 글을 지어 원만공적(圓滿空寂)한 심체(心體)가 한량없는 공덕과 무량한 묘용(妙用)을 가지고 있음을 선언하였다.
또 새봉은 선·교를 혼합할 뿐만 아니라 북두(北斗)를 숭배하였는데, 오늘날 남아 있는 칠성신앙(七星信仰)은 이러한 습관의 흐름으로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의 승려들 사이에서는 반야(般若)의 관조(觀照)가 철저하지 못한 사람이 많았는데, 의소는 그 관(觀)이 철저하지 못한 까닭으로 천당과 지옥의 실재를 증명하려고 헛된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또 최눌은 음양오행의 설을 유물론적으로 받아들여 바다의 조석(潮汐)을 그것으로 풀이하였고 산신(産神)·역신(疫神)·신신(身神)·명신(命神)·음양오행신(陰陽五行神) 등이 실재한다고 하고, 그것 때문에 자기의 몸이 약하다고 설명하였다.
[5.3. 조선 후기의 불교]
조선 후기의 불교계는 이렇다 할 종(宗)이 없는 무종파의 교단으로 존립하였다. 비록 종파나 종명(宗名)이 없었지만 불교는 엄연하게 존재해 있었고, 차별적인 종명과 종지(宗旨)가 없는 오직 하나로 이루어진 통불교(通佛敎)의 교단이었다. 그러나 이 교단은 불교인의 자각에 의해서가 아니라 배척과 억압의 정책에 의해서 무기력하게 팽개쳐진 것이었다.
그러나 무종파의 상황은 법맥을 중심으로 하여 본다면 교단의 주축은 선종이었다. 그러나 휴정과 선수 이후로 그 법손(法孫)들이 수선(修禪)에만 전심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경교(經敎)의 연구에 힘쓴 경향이 짙었고, 한때는 간경(看經)·강학(講學)에 전념하는 고승들이 수없이 이어 나왔다. 그리하여 긍선(亘璇)의 『선문수경(禪文手鏡)』 저술 이후, 불교계에는 새로운 선담(禪談)의 바람이 일어났다.
또 승려들은 고성염불(高聲念佛)로 정토(淨土)에 왕생할 업(業)을 닦았고, 때로는 진언을 외워 비밀법(祕密法)에 몰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교단의 변천 결과로 승단 안에는 이판승(理判僧)과 사판승(事判僧)이 형성되기에 이르렀고 승려의 수행도 선과 교와 염불의 3문으로 나누어짐에 따라서 대부분의 대사찰에는 선방·강당·염불당을 갖추고 있었다.
5.3.1. 선론(禪論)과 염불회(念佛會)
긍선이 선학연구의 지침서로서 『선문수경』을 저술하자 이때부터 조선 말기의 불교계에는 새로운 선론이 일어나게 되었다. 당시의 불교계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선의 연구서로서 긍선은 이 책에서 조사선(祖師禪)·여래선(如來禪)·의리선(義理禪)의 3종선(三種禪)을 세우고, 조사선과 여래선을 격외선(格外禪)으로, 의리선을 최하급의 선이라고 보았다.
이 『선문수경』에 대해 가장 먼저 반론을 제기한 이는 근세의 고승으로서 다선일미사상(茶禪一味思想)을 펼친 의순(意恂)이다. 그는 『사변만어(四辨漫語)』를 지어 의리선과 격외선, 여래선과 조사선, 활인검(活人劍)과 살인검(殺人劍), 진공(眞空)과 묘유(妙有)의 네 가지 측면에서 백파의 선론을 반박하였다.
또 홍기(洪基)도 긍선의 『선문수경』이 고석(古釋)에 어긋나서 그것을 고쳐 바르게 한다는 뜻으로 『선문증정록(禪門證正錄)』을 지어 긍선의 선론을 지적하고, 고석을 인증하여 그 잘못된 바를 변증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긍선의 문인이며 법손인 유형(有炯)은 『선원소류(禪源溯流)』를 지어 의순의 『사변만어』와 홍기의 『선문증정록』을 다시 반박하고 긍선의 『선문수경』을 비호하였다.
그 뒤 서진하(徐震河)는 『선문재정록(禪門再正錄)』를 지어 긍선·의순·홍기·유형의 선론에 대하여 논술하였다. 여기서 서진하는 긍선의 설을 찬성하거나 또는 반대하였지만, 그때까지의 선론을 총정리하여 집대성하지는 못하였다.
이와 같이 긍선의 선론을 중심으로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종지로 하는 선에 이론이 가해지고 논쟁이 일어남으로써, 조선 말기 불교계의 한 시대적 특징으로 전개되어 갔다.
또 이 시대의 불교계에는 고성염불로 일과를 삼는 미타정토신앙의 풍조가 널리 유행하였다. 우리나라에 있어서 미타신앙은 불교 전래와 거의 동시에 이 땅에 들어왔고 통일신라 때부터 성행하였다.
특별히 정토종(淨土宗)의 성립은 보지 못하였지만, 미타염불은 모든 불교인에게 거의 보편화되었고, 특히 조선 말기에는 크게 성행하였다. 많은 사찰에는 염불당이 있어서 만일회(萬日會)를 설(設)하고 아미타불을 칭념하여 정토왕생을 원구하는 염불의 모임들을 가졌다.
불교도들이 1만 일을 한정하여 나무아미타불을 칭념하는 이 만일염불회는 부쩍 성행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건봉사(乾鳳寺)와 망월사(望月寺)의 염불회가 유명하였다.
특히 건봉사의 만일회는 전후 3회에 걸쳐 대법회를 가졌다. 처음은 순조 때에 용허(聳虛)가 시작하여 마쳤고, 두번째는 철종 때에 벽오(碧梧)가 시작하여 마쳤으며, 세번째는 만화(萬化)가 1881년에 시작하여 1908년에 마쳤다.
또한 이 시대에 와서 승려들 사이에 이판승과 사판승의 구별이 생겨나게 되었다. 참선·간경·염불의 삼문(三門)으로 수행을 했던 이시대의 승려 중 참선과 염불하는 승려를 수좌(首座)라 하고 경을 공부하는 승려를 강사(講師)라고 불렀다.
이들 수좌와 강사는 가급적이면 시끄러움을 피하여 산중의 사암(寺庵)에 머물렀으며 사원의 사무와 관가나 유생들에 의해 주어지는 역임(役任)에 종사하는 것을 불명예로 여겼다.
이에 따라 자연히 사원을 운영하고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해야 할 승려층이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수도하는 수좌와 강사를 이판승이라 하고, 사원의 제반 업무를 맡아보는 주지 등의 승려를 사판승(事判僧)이라 하였다.
이판승은 잡무를 멀리하고 공부에 의하여 교단의 혜명(慧明)을 계승함으로써 불교의 명맥을 이어갔고, 사판승은 비록 무식하고 공부에는 힘쓰지 못하였으나 유생들과 위정자의 횡포를 견디면서도 사찰의 여러 가지 업무를 처리하여 사원의 황폐를 방지하고 교단의 명맥을 유지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5.3.2. 승려 입성(入城)의 자유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역사(役事)가 도성 안에서 있을 때에만 승려의 입성이 허락되었을 뿐, 대부분의 시기에는 천인과 죄인처럼 취급되어 도성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그러다가 1895년(고종 32) 4월에 입성의 금령(禁令)이 해제되었는데, 여기에는 일본승려들의 힘이 컸다. 이듬해에는 여러 사찰의 승려들이 일본승려들과 합동으로 성내의 원동(苑洞)에서 무차대법회(無遮大法會)를 베풀었다.
그 뒤 1898년 봄에 다시 성내의 승려를 축출하고 출입을 금하라는 영을 내렸으나, 실행되지 못하고 오래지 않아 풀리게 되었다.
오랫동안 발을 들여놓지 못하던 성내에 출입할 수 있는 자유가 허용되자 승려들은 자유롭게 서울을 중심으로 포교할 수 있게 되었고, 배척과 천대의 굴레에서 벗어나 승려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기 위한 노력들을 하게 되었다.
암담하였던 불교는 다시 밝은 빛을 비출 수 있게 되었지만, 오래지 않아 국가의 관리를 다시 받게 되었고, 또 일제의 통치권 아래에 들어가게 되고 말았다.
[6. 근대]
[6.1. 국가의 관리]
조선 중엽 이후 굳게 닫혔던 성문이 근대에 들어오면서 열려지게 됨에 따라 자유로운 불교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고, 국가에서도 뒤늦게나마 자각을 하여 지금까지의 불교배척의 억압정책을 지양하고 국가적인 관리를 꾀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아울러 불교계에서도 전국 사원의 통일적인 통제를 위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1899년에는 동대문 밖에 원흥사(元興寺)를 세워 한국불교의 총종무소(總宗務所)인 국내 수사찰(首寺刹)로 삼고 13도에 각각 하나의 수사(首寺)를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합하였다.
그 뒤 1902년에는 정부에서 사원의 국가관리를 위하여 궁내부(宮內部) 소속으로 관리서(管理署)를 설치하였다. 관리서는 사사관리세칙(寺社管理細則)을 제정하고, 대법산(大法山)과 중법산제(中法山制)를 실시하여 전국 사찰 및 승려에 관한 사무 일체를 맡아보았다.
대법산은 국내 수사인 원흥사로 정하고, 중법산은 도내 수사 16개 절을 지정하였다. 오랫동안 관심 밖에서 방치되었던 전국의 사찰 및 승려는 이를 계기로 국가행정의 범위 안에서 보호를 받게 되었다. 관리서는 궁내부에 소속원 정부의 한 관서였기 때문에 국가공무원인 관리가 관리주사(管理主事) 등의 사무직에 임명되어 제반 서무를 맡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정치의 혼란과 공무원의 부패로 인하여 이 관리서가 제도적·이념적으로는 아주 훌륭하였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이렇다 할 뚜렷한 발전을 도모하지는 못하였다. 다만 이로 인하여 승려의 위치나 일반적 대우가 나아진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러한 관리서와 대법산의 제도도 오래가지 못하고 1904년 1월에 폐지됨에 따라, 그 소관 사무는 내부(內部) 관방(官房)에 옮겨졌다가 2월에는 내부 지방국(地方局)의 주관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 뒤 1906년에 이보담(李寶潭)과 홍월초(洪月初) 등이 원흥사에 불교연구회(佛敎硏究會)를 설립하였다.
이 불교연구회는 일본 정토종의 영향을 받아 설립된 것이었으므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기관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여기에서 명진학교(明進學校)라는 새로운 교육기관을 창설하였다는 것은 길이 남을 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명진학교는 현대적인 불교교육을 위한 최초의 교육기관으로 불교연구회가 중심이 되어 원흥사를 교사로 하여 1906년에 세웠던 것으로서 오늘날 동국대학교의 전신이 된다.
1908년 3월에는 전국 승려 대표자 52명이 원흥사에서 모임을 가지고 종단의 이름을 원종(圓宗)으로 결정한 뒤 원흥사에다 종무원(宗務院)을 설치하였다. 1910년 서울 전동에 각황사(覺皇寺)를 세우고 조선불교중앙회무소(朝鮮佛敎中央會務所)로 삼을 때까지 원흥사는 근대 한국불교의 발상지요, 새 불교의 요람지 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원종의 종정(宗正) 이회광(李晦光)은 일본으로 가서 일본 조동종(曹洞宗)과 연합하기로 합의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분개한 국내의 승려들은 승려대회를 열었고, 1911년 정월에는 영남·호남의 승려들이 순천 송광사에서 총회를 열고 임제종(臨濟宗)을 세웠다.
임제종은 임시 종무원을 송광사에 두었다가 그 뒤에는 동래 범어사(梵魚寺)로 옮겨, 서울 원종과 맞서서 포교활동 등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미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고 조선총독부가 생긴 뒤의 일이었으므로, 불교종단도 총독부의 지배하에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총독부는 사찰령(寺刹令)을 제정하여 이 땅의 모든 사찰과 승려문제를 규제하였으므로, 원종과 임제종의 대립도 저절로 없어지고 우리나라의 불교는 국가의 운명과 함께 조선총독의 관리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6.2. 교단]
1910년 8월에 나라를 잃은 이 땅의 불교는 1911년 6월 새로운 사찰령이 제정, 반포됨으로써 조선총독부의 지배 아래에서 새로운 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즉 총독부 사찰령에 의하여 한반도 내의 교단은 30곳의 본산제(本山制)로 형성되었으며, 조선불교선교양종(朝鮮佛敎禪敎兩宗)이라 하여 지금까지의 종론(宗論)을 통일하고 중앙에 30본산회의소(本山會議所)를 설치하였다.
이와 같이 불교교단은 조선총독의 지배하에 30본산으로 나뉘어 각각 30군데의 교구(敎區)로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비록 30본산회의소가 있었으나 각 본사간의 유기적인 연관관계가 결여되어 있었으므로 30본산 주지들이 포교 및 교육사업의 일원화를 꾀하기 위하여 연합규제를 마련하고 30본산 연합사무소를 서울의 각황사(覺皇寺)에 두었다.
그러나 이 연합사무소는 이름 그대로 30본산의 연합사무만을 집행하였을 뿐, 전국사찰을 통할하고 전국 승려를 통제하는 권한은 없었다.
그리하여 실질적인 중앙통제기관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러한 필요성에 의하여 성립된 것이 조선불교선교양종중앙총무원(朝鮮佛敎禪敎兩宗中央總務院)이다. 중앙총무원이 1922년 1월 각황사에 설치된 뒤 그 해 5월에는 같은 각황사에 불교선교양종중앙교무원(佛敎禪敎兩宗中央敎務院)이 설치되었다. 몇 년 뒤에는 양원(兩院)이 하나로 뭉쳐서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朝鮮佛敎中央敎務院)이 되었다.
1929년 1월 각황사에서 전국승려대회를 열고, 종헌(宗憲)과 교무원의 원칙(院則) 및 교정회법(敎正會法)·종회법(宗會法) 등을 제정하였으며, 7명의 교정(敎正)을 선출하여 종단 최고의 원로기관으로 하였다.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은 명실공히 중앙통제기구로서의 체제를 갖춘 것이었다. 그러나 오래 가지 않아서 근본적인 어떤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다시 총본산운동(總本山運動)을 전개시키기에 이르렀다.
1941년 봄에 태고사(太古寺: 지금의 曹溪寺)를 세워 총본산으로 삼고 조선불교선교양종이라고 불리던 종단의 이름을 조계종(曹溪宗)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교단을 통제하기 위하여 31본산 위에 전국 사찰을 통일적으로 총괄하는 총본산을 두었는데, 그 총본산을 태고사로 삼았다.
1941년 4월 23일부터 조선불교조계종 총본사 태고사사법(太古寺寺法)의 인가를 얻어 조계종으로 발족한 이 종단에서는 제1대종정(宗正)을 중원(重遠)으로 추대하고 그 해 6월 6일부터 총본사인 태고사 종무원에서 종무를 시작하였다. 이 조선불교조계종도 1945년 8월 15일의 광복과 더불어 한국불교조계종(韓國佛敎曹溪宗)으로 정비되어 새로운 출발을 보게 되었다.
광복과 함께 1945년 10월에는 전국승려대회를 열어 일제의 사찰령과 당시까지의 사법(寺法)을 폐지하고 새로운 불교교헌(佛敎敎憲)을 제정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조계종 초대 교정에 박한영(朴漢永)을 추대하였다. 이로써 한국불교는 식민지정책의 굴레를 벗어나서 불교문화를 무한히 꽃 피울 내일을 약속하게 된 것이다.
[6.3. 교육 및 문화사업]
불교의 현대적 교육은 1906년 명진학교가 설립되면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 그 뒤 각 지방에 불교학교를 설립하게 하였는데 이는 젊은 불교인에게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학교 건립이라는 명분으로 각 지방의 사찰재산들이 징발당하였으므로 이를 방지하려는 의도도 내포되어 있었다. 명진학교의 교장은 당시 불교연구회 회장이었던 이보택(李寶澤)이 맡았으며, 1907년에는 이회광이 선임되었다.
1908년 불교연구원에 이어서 원종종무원이 원흥사에 들어선 다음 명진학교는 불교사범학교(佛敎師範學校)로 고쳐졌으나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 뒤에도 능인보통학교(能仁普通學校)·고등불교강숙(高等佛敎講塾) 등을 세웠으나 오래지 않아 폐지되었고, 1916년에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을 설립하였으나 3·1운동 때 학림의 학생들이 많이 활약하였고 또 독립운동에 앞장섰기 때문에 총독부의 제지를 받다가 1922년 30본산연합 제규(制規)가 폐지된 뒤 폐교되고 말았다.
1921년에는 따로 동광학교(東光學校)가 설립되었고, 1922년에는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를 인수하여 경영하였는데, 1925년에 이 두 학교를 병합하여 불교전수학교로 만들었다.
이 불교전수학교는 1930년 중앙불교전문학교로 승격되었고, 그 뒤 1940년에는 혜화전문학교(惠化專門學校)로 학교명을 고쳤으며, 1946년 9월에는 동국대학(東國大學)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53년에는 동국대학교로 승격되었다. 이 밖에도 서울과 각 지방에는 종립학교(宗立學校)가 설립되어 초·중·고등학생들의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교육기관 이외에 이 시대의 문화사업으로는 불교지(佛敎誌)의 간행을 들 수 있다. 신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불교계 최초의 잡지로 발간한 것은 1910년 12월에 창간된 『원종 圓宗』을 들 수 있으나, 이는 원종 종무원의 기관지이며 겨우 2호로서 종간되었다.
불교문화의 종합지이며 본격적인 불교잡지는 발행인 권상로(權相老)가 1913년 2월에 발간한 『조선불교월보(朝鮮佛敎月報)』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 잡지는 1913년 8월에 19호로 종간되었다.
그 해 11월에는 『해동불교(海東佛敎)』가 박한영(朴漢永)에 의해 발간되었는데, 1914년 6월에 8호로 종간되었다. 1915년 3월에는 『불교진흥회월보(佛敎振興會月報)』가 이능화(李能和)에 의해 발간되었다가 같은 해 12월에 9호를 내고 종간되었고, 1916년 4월에는 다시 이능화가 『조선불교계(朝鮮佛敎界)』를 발간하였으나 3호를 내고 종간되었으며, 1917년 3월에 다시 이능화가 『조선불교총보(朝鮮佛敎總報)』를 발행하여 1920년 5월까지 21호를 발간하였다.
1924년 7월에는 권상로가 『불교(佛敎)』를 발행하여 10년을 속간하다가 1933년 6월에 107호를 내고 종간되었고, 또 1937년 3월에 『불교』지가 다시 속간되어 이를 『신불교(新佛敎)』라 하였는데 광복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 밖에도 1914년에 동경 유학생들이 발간한 『금강저(金剛杵)』와 1920년에 통도사에서 발간한 『취산보림(鷲山寶林)』, 또 같은 해에 조선불교청년회 통도사지회가 발행한 『조음(潮音)』, 1924년 7월에 조선불교회가 발행한 『불일(佛日)』, 같은 해에 북경 불교유학생회에서 발행한 『황야(荒野)』, 1935년에 발간된 『불교시보(佛敎時報)』, 불교전수학교 교우회에서 발행하였던 『일광지(日光誌)』 등이 있었다.
[7. 현대]
현대 우리나라의 불교사에 있어 가장 큰 과제는 일제시대에 문화적인 탄압의 일환책으로 일본식 불교를 신봉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대처승(帶妻僧)을 장려함으로써 흩어졌던 승단을 다시 정화하는 데 있었다. 일본인들의 승려 대처화는 무뢰배의 승려들을 중심으로 크게 호응을 얻었고, 식민지정책의 비호 아래 무뢰한 파계괴법승(破戒壞法僧)들의 사원 장악이 자행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소수의 비구승들은 최후의 보위책으로서 1926년 12월에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朝鮮佛敎禪理參究院: 현재의 禪學院)을 설립하였다. 그 뒤 이곳을 중심으로 모든 정화운동이 미약하나마 전개되기에 이르렀고 1941년 3월 13일에는 이 선학원에 당대의 고승들이 모두 참석하여 비구승대회(比丘僧大會)를 열었다.
이때 석가모니의 교지(敎旨)를 천명하고 정법(正法)의 수호를 위해서는 승풍(僧風)을 정화하고 대처승의 비리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비구승의 여망에도 불구하고 총독부는 오히려 그 대회가 불법임을 주장하며, 선학원을 중심으로 하는 비구승의 세력을 거세하는 작업에 착수하기까지 하였다.
1945년에 광복을 맞았으나 불교종단의 암운은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광복 초의 혼란을 틈타 종권다툼은 더욱더 극을 향해서 치닫고 있었다. 1950년 이래, 각지의 뜻 있는 승려들은 다시 절을 찾아 정법수호(正法守護)의 기치를 내걸게 되었다.
전국의 각 사찰마다 비구와 대처승의 싸움은 그칠 날이 없었고, 절을 뺏고 빼앗기는 싸움은 유혈사태까지 초래하게 되었다. 조실(祖室)을 추방하거나 선원(禪院)을 이동하기도 하였으며, 숱한 문화재들이 파괴되고 도굴된 것도 많았다.
6·25전쟁이 발발하였을 때도 이와 같은 사정은 변하지 않았다. 신심 있는 승려가 지키지 않는 절은 이미 수도장이라기보다는 관광지였고 놀이터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와 같은 경위는 당시 임시수도 부산에 있던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에게 상세히 보고되기에 이르렀고, 이승만은 “처자 있는 사람들은 절에서 물러가고, 한국 고유의 승풍을 살리기 위해 독신승이 사찰을 지키게 하라.”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이 담화는 정화추진의 일대 전기가 되었다.
1954년 6월 24일 서울 안국동의 선학원에서는 원로 비구(元老比丘)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교단정화대책위원회(敎團淨化對策委員會)를 구성하였고, 8월 24일에는 제1차로 전국비구승 대표자대회가 소집되어 정화운동의 기본방침을 결정하였다.
교계 신도들뿐만 아니라 사회의 언론도 적극적으로 위원회의 결의사항을 지지하였고, 사회정화·민족종교부흥이라는 관점에서 각계각층의 적극적인 성원을 받았다.
1954년 9월 28일에는 제2차 전국비구승대회가 열렸고, 이 대회에서 새로운 종헌(宗憲)이 채택되었으며, 종정에 송만암(宋曼庵), 부종정에 하동산(河東山), 도총섭(都摠攝)에 이청담(李靑潭) 등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대처승들은 새로운 물결의 흐름을 완강하게 거부하였으며, 이와 같은 상황에서 도저히 쌍방의 합의점을 찾을 길이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더구나 종정으로 추대된 송만암마저 정화방법에 이의를 제기하게 되자, 전국비구승대회는 하동산을 새로운 종정으로 추대하고 대처승들에 의해 강점되었던 태고사(太古寺)를 다시 되찾기 위해 법적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리하여 1954년 11월 5일에 그곳을 정식으로 접수하여 조계사라고 개칭하였다. 숱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쌍방은 전권대표 5명씩을 선발할 것을 합의하여 불교정화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했으나, 그 회합에서도 양측의 합의점은 찾지 못하였다.
1955년 8월 11일에는 제5차 전국승려대회가 소집되었는데, 많은 논란을 겪은 끝에 새로운 종단의 출범에 관한 여러 가지 행정적인 문제들이 제기되고 검토되었다.
그때 조계사에는 1,003명의 비구가 참석하였고, 새로운 종단의 종정으로 석우(石友)가 추대되었다. 1958년 8월 13일 다시 하동산이 종정으로 추대되었고, 효봉(曉峰)·청담 등 여러 고승들과 함께 대처승을 설득하고 회유하여 극렬한 반대만을 일삼던 대처승들은 신종단(新宗團)의 출범에 협조하기에 이르렀다.
1962년 4월 12일 통일종단이 이루어지기까지 많은 사연이 있었지만 당국의 협력과 신심 있는 수도자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서 오랜 불교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불교재산관리법」에 의하여 등록된 18개 종단이 있다. 한국 최대의 통합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을 비롯하여 통합종단의 구성에 끝내 불응하여 별립(別立)한 한국불교태고종(韓國佛敎太古宗)이 있다.
그 밖에 대한불교진각종(大韓佛敎眞覺宗)·대한불교진언종(大韓佛敎眞言宗)·대한불교불입종(大韓佛敎佛入宗)·대한불교법화종(大韓佛敎法華宗)·한국불교법화종(韓國佛敎法華宗)·대한불교일승종(大韓佛敎一乘宗)·대한불교천태종(大韓佛敎天台宗)·대한불교원효종(大韓佛敎元曉宗)·대한불교화엄종(大韓佛敎華嚴宗)·대한불교총화종(大韓佛敎總和宗)·대한불교법상종(大韓佛敎法相宗)·천화불교(天華佛敎)·대한불교미륵종(大韓佛敎彌勒宗)·대한불교정토종(大韓佛敎淨土宗)·대한불교용화종(大韓佛敎龍華宗)·대한불교보문종(大韓佛敎普門宗) 등이 있다.
[출처] 불교역사란 무엇일까?|작성자 임기영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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