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학은 어디로 나아 갈 것인가 / 강종원 | |||
철학함과 문헌학 | |||
| [15호] 2003년 06월 10일 (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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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방법론 서(序) 1. 오늘날 동·서양을 통틀어 '인문학의 위기'라는 언명은 더 이상 신선한 자극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언명은 시장논리에 떠밀려 학문제도권 내에서 영향력을 상실해 가는 인문학의 상업적 몰락을 상징하며, 그 때문에 '배고픈 인문학자'라는 관념과도 묘하게 겹쳐진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를 통해 인문학자들이 배불렀던 시절이 언제 존재하기나 했던 것일까? 비록 서양의 중세와 동양의 관료체제에서 인문학이 중요성을 부여받긴 했었지만, 그것은 단지 인문학 자체가 권력 쟁취를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 시대에조차 어진 선비들은 야인으로 살아갔거나 혹 크게 등용되었을지라도 스스로 가난의 길을 걸어가곤 하였다. 그렇기에 더 이상 '인문학의 위기'에 우리가 동요될 이유는 없다. 아니 동요된다기보다는 더 이상 구걸하지 말자는 것이다. 인문학을 선택한 자들은 자신의 신념과 행복을 위해 선택한 그 길이 '배고픔의 길'임을 마땅히 알고서 출발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어찌하여 배고픔의 길을 선택했는지, 그 목적에 대해서는 냉철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적어도 시대정신에 당당히 참여하는 일은 그 이유의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시대정신에서 --- '불교'가 아니라1){{) '불교'와 '불교학'은 분명히 구분 가능하다. 그것은 현존하는 교단이나 문화권이 없는 어떤 고대 종교에 대한 연구 분야가 존속할 수 있는 이유와 동일하다. 따라서 '불교'가 인류 문화에서 사라지더라도 '불교학'이 존속하는 상황을 상상하는 일은 가능하며, 물론 그 반대의 상황도 상상 가능하다. 하지만 그러한 의미의 '불교학'을 나는 바라지 않는다. 다만 그러한 구분이 매우 엄연한 것임을 상기하길 바랄 뿐이다. }} --- '불교학'의 위상은 과연 무엇인가? 불교학은 인문학이란 가난한 동네에서 과연 얼마만한 존재 가치를 가지는 것인가? 오늘날 자연과학에 비해 인문학은 비주류이며, 인문학 안에서도 철학의 영향력은 더욱 감소되었다. 그리고 철학 안에서도 동양사상을 다루는 분야는 더더욱 좁은 자리를 차지한다. 이제 불교학은 자신의 위치를 돌아볼 때가 되었다. 2. 어떤 학문 분야의 역사적 위기는 그 분야가 채택한 방법론(methodology)에 대한 반성(reflection)을 요구한다. 그리고 방법론에 대한 논의는 본성 상 그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에 대한 논의보다는 패러다임(paradigm)에 관한 담론이어야만 한다. 만일 방법론에 대한 논의가 그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에 대한 논의로 한정될 때, 그것은 헤게모니 문제로 전락하고 만다. 그 때 방법론은 곧 학문분과론 내지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실제 대상인 특정 대학이나 특정 학과를 거론하거나, 특정인을 거론하게 됨으로써 곧잘 저차원의 논쟁으로 변질되어 버리거나, 혹은 논의의 취지 자체를 오해하는 사태도 벌어질 수 있다. 그 경우 문제는 학문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 투쟁의 양상을 띠게 되고, 생산적인 논쟁이 불가능하게 된다. 방법론 논의가 반드시 패러다임 논의로 나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패러다임 논의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단순한 제안이 아니라 그것을 보여주는 것 즉 실현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방법론은 '보여줄 대상'이 아니라 "보여준다"(showing)는 행위에 수반되어 비로소 보이는 것이어야만 한다. Ⅱ. 학문과 방법론 1. '불교학'(the Buddhist studies)은 그 형식에 있어서 '불교'(Buddhism)와 동의어가 아니다. '불교학'은 '불교'를 연구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2){{) '불교학'이란 학문 명칭은 더 없이 애매하고 불만족스러운 것이다. 그 점은 한문으로 '佛敎學'이라고 하든지, 아니면 영어로 'the Buddhist studies'라고 하든지 간에 그러한 불만족은 해소되지 않는다. 이 용어는 너무나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불교'와 관련하여 너무도 다양한 방식의 연구를 수행하는 소위 '불교학자'들이 모두 자신들을 '불교학자'라는 어떤 직업적 성격을 지칭하는 추상명사를 통해 동질감을 갖는 이상한 현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한국에 있어서 그러한 정체성이 확보될 수 있는 것은 '불교학자'라는 단어가 '불교도인 직업적 연구자 집단'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는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반면 서양이나 일본에 있어서 이 용어는 '불교고전문헌학'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 듯해서 역시 그러한 내용으로 '불교학'이라는 폭넓은 어감을 독차지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함이 있어 보인다. 어떤 용어가 유연하게 사용되는 것은 언어의 본성에 속한 일이라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 용어가 어떤 심오한 어감을 은연중 품고 있는 경우에는 심각한 오도(誤導)들을 발생시킨다. 이 문제는 점차로 이 글을 진행해가면서 살펴보겠지만, 우선은 여기서 내가 사용한 '불교학'이란 용어를 개략적이나마 정의하는 일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불교학'은 '불교'와 관련된 제반 사항들을 대상으로 해서 연구한다"는 나의 정의에 따라 본고에서 사용하는 '불교학'이란 용어는 '불교에 대한 연구'(the studies of Buddhism)와 동의어이다. }} 그것은 '사회'와 '사회학'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불교도(=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불교학을 할 수 있고, 모든 불교학자가 불교도일 필요도 없다. 하지만 불교학자도 '∼학자'라고 불리는 까닭에, 그가 불교도이든 아니든 일반적으로 우리가 '학자(學者)'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활동 내용과 공통적인 내용과 기준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불교학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집합에서 '불교도이면서 동시에 학문적 요건 --- 이것은 학위의 소지 여부와 같은 외형적인 것이 아니다 --- 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제외된다. 이에 대해 "불교를 대상화(objectification)하는 불교학은 불교의 진리를 드러내지 못한다"는 우려 섞인 반론도 제기될 수 있겠지만, 이는 정당한 질문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경우 "그렇다면 불교를 대상화하지 않고서 어떠한 학(學)이 가능한가?"라는 강력한 반문이 제기될 수 있기 때문인데, 그 질문자가 신비스런 종교적 신념에 호소함으로써 독자적인 종교활동을 시작하겠다고 각오하지 않는 한, 정당한 이성의 소유자라면 그러한 질문은 처음부터 제기할 수 없다. 그러나 위의 '대상화'(objectification)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보다 심도 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방법론적 대상화'(methodological objectification)를 말한 것이지, '인식론적 대상화'(epistemological objectification) 혹은 '진리론적 대상화'(objectification in the theory of truth)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한편으로 '불교'는 '불교학의 대상'인 동시에 '불교학의 내용'이다. 이상에서 제기한 모든 언명들은 학문적 활동에 대해서(of, on, about)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학문적'이라는 조건을 갖는 한에 있어서 이미 '공적 차원'(public level)을 전제하고 있다. 2. '학문적'(學問的)이란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 사람이 '이성의 보편적 사용'을 시도하면서부터 비로소 성립되는 활동을 의미한다. 그렇지 못한 이성의 사용 혹은 사유의 작용이란 어떠한 제도나 법률, 그리고 학제(學制)로도 '학문적 활동'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다. 적어도 공적(公的, public)으로는…….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이성의 공적 사용'과 '이성의 사적 사용'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그가 말한 '이성의 사적 사용'이란 성직자가 설교할 때나 공직자가 정부의 입장을 대변할 때와 같이 체제 내에서 제한적으로 이성을 --- 나의 개념으로는 '지력(知力)'을 --- 을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이성의 공적 사용'이란 한 사람의 학자로서 자신의 지력을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을 보다 명료히 표현하기 위해 '이성의 보편적 사용을 위한 시도'와 '이성의 제한적 사용 시도'로 바꾸어 말할 것을 제안한다. 왜냐하면 이성(理性)이란 그 정의 상 간주관적(間主觀的, inter-subjective)이기 때문이다. 간주관적이지 않은 어떠한 '지력의 사용'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성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또한 그런 의미에서 '이성의 사용'이란 어떤 것이든 이미 '공적 사용'을 전제한다. 만일 칸트가 말한 '이성의 공적 사용'을 형식적 측면에서는 체제 바깥에까지 설득력을 갖기 위한 노력이며, 내용적 측면에서는 '두루 널리 알릴만한 것'을 먼저 본 자가 다른 이들에게 간절히 알리려는 시도라고 이해한다면, '이성의 보편적 사용 시도'란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오해를 보다 줄일 수 있다. 불교학도 하나의 학문이라면 바로 이와 같은 '이성의 보편적 사용 시도'라는 의미에서, 학문의 기본적 요건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3. '이성의 보편적 사용 시도'라는 것은 자신이 가진 세계관 혹은 진리관을 타인에게 전달하고 설득하려는 노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체계들'(the systems of truth) 혹은 '지식체계들'(the systems of knowledge)은 '신념체계들'(the systems of belief)을 선행하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진리체계들' 사이의 충돌은 '유용성'(utility)과 '설득력의 강도'(intensity of persuasion)에 의해 선택(choice) 혹은 합의(consensus)로 귀결되지만, '신념체계들'간의 충돌에서 '선택'은 필연적이지 않다. 만일 '신념체계들'이 충돌할 때 한 사람의 학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가능한 보다 많은 개인들과 사회가 자신의 신념체계를 수용하도록 설득하는 노력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한 '노력'은 스스로 가장 폭넓은, 따라서 보편적이라고 믿고 있는 방식으로 수행된다. 만일 '가장 폭넓은, 따라서 보편적'이라고 믿었던 방식이 잘못되었다면, 그의 노력은 필연적으로 실패하게 된다. 그런 경우 '설득' 역시 실패하게 된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가장 폭넓은, 따라서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원리는 여전히 건재한다. 4. '이성의 보편적 사용'을 시도하는 이, 즉 자신이 가진 세계관 혹은 진리관을 타인에게 전달하고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자가 바로 '학자'이다. 학자(Scholar)의 의미에는 '연구자'(scholar)와 '철학자'(philosopher)라는 의미가 함께 내포된다. 5. 불교학의 방법은 다른 학문이나 분야에 대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오랜 기간 동양학자들은3){{) 우리가 '동양학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집합에는 불교학자, 인도철학자, 동양(중국)철학자, 동양종교학자, 도교연구자, 선(禪)학자, 선(禪)연구자 등으로 표현되는 일련의 학자 집단이 속하게 된다. 그가 서양식 대학 교육을 받았든, 아니면 동양의 전통적 교육체제 --- 서당, 향교, 강원(講院), 선방(禪房), 스승의 문하에서 사숙하는 것 등등 --- 의 산물이든 혹은 독학(獨學)을 하였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 학문방법론에 있어서 '동양적인' 그 무엇이 별도로 존재한다고 표방해 왔다. '별도로 존재하는' 그러한 방법은 무엇인가? 만일 그것이 "방법을 수행함이 곧 세계와 진리를 보는 것, 그리고 오직 그것들이 함께 할 때만 그러하다"라는 것인가? 그런 의미라면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는 실현(realization)을 통해서만 설명(explanation)이 가능하며, 반대로 설명을 행함과 동시에 실현시킬 수 있는 그 무엇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별도의 방법을 인정하더라도 "가장 폭넓은, 따라서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원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큰 '설득력의 강도'를 여전히 지니고 있다. '설득력의 강도'를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불교학은 다른 학문과 동일하다. '설득력의 강도'를 중요시함을 공유하는 한에 있어서, 그리고 그 원칙을 적용하여 '학문활동'을 비로소 실현시킨다는 점에 있어서, 불교학의 학문활동은 다른 학문들의 학문행위로부터 결코 독립적일 수 없다. 따라서 '학문'은 '불교학'의 유(類)개념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너무도 엄연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교학'의 유개념이지 '불교'의 유개념은 아니다. 6. '학문'이 학문활동들의 유개념인 한에 있어서 모든 철학은 하나다. '모든 철학'이란 시간적으로는 '역사 전체', 공간적으로는 '전(全)지구'라는 의미에서 모든 철학을 일컫는다. 따라서 모든 철학들은 시대적 구분과 기능적 구분 그리고 발생지역적 구분을 갖는다. 철학을 분류함에 있어서 '시대적 구분'은 지역에 따라 다르다는 점에서 일반화할 수 없다. 서양의 중세와 동양의 중세가 물리적으로 다른 것처럼. 또한 '기능적 구분'은 명료하지 않다. 예를 들면 인식론과 심리철학 그리고 인지과학 분야에서 그 각각의 분과가 다루어야할 바가 명료하지 않은 어떤 문제들이 남아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또한 논리학과 메타논리학, 그리고 논리철학 사이에도 유사한 현상은 존재한다. 이와 달리 '발생지역적 구분'만큼은 일반화도 명료화도 가능하다. 이제까지 우리는 그러한 손쉬운 방법을 통해 서양철학·동양(중국)철학·인도철학이라는 구분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철학을 발생지역적으로 구분하는 일이 대부분 그 용이함에서 기인한 일임을 알아두자. 이러한 구분은 그 용이함에서 기인한 것 일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4){{) 물론 철학에 대한 지역 중심의 분류는 서양인들이 서양철학적 관점에서 자신들의 것을 '철학'이라 부르고 나서, 다른 것들을 규정한 데서 그 일차적인 유래를 찾을 수는 있다. 또한 서양에서 출판된 일반적인 철학사나 철학 사전들에 동양의 철학적 내용들이 실린 것은 이제 한 세기가 될까 말까한 일이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내용 말고도 분류의 용이함이 또한 이러한 용어들을 지금껏 사용하게 한 중요한 원동력임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 만일 원한다면 지역적으로 더욱 세분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므로 필요할 경우 얼마든지 더 세분화할 수 있다. 이는 분류학(taxonomy, classification)의 문제이지 철학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시대적 구분'과 '기능적 구분'은 외연의 확정이 불가능함으로 분류학을 명료하게 적용하기에는 난점이 있다. 비록 발생지역적 구분이 그 용이함에 기인한다 할지라도, 그러한 분류에도 역시 분류자의 '보는 방식(way of seeing)'은 개입되어 있다. 그렇기에 사실상 어떠한 분류도 완전한 분류란 없다. 그러한 분류들은 단지 '잠정적 이름'(vyavah ra, 假名)일뿐이다. 예를 들어 고전적 생물학에서 최초의 분류인 '동물'과 '식물'로의 분류가 용이한 방식이기도 하지만, 보는 방식에 따라 식물로도 동물로도 분류할 수 없는 생물이, 혹은 생물로도 분류하기 어려운 존재들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아무 문제없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존재들을 분류할 때 우리에게 난점이 발생한다. 발생지역적 구분에서 볼 때, 불교철학은 지금까지는 동양(중국)철학과 인도철학의 영역에 관계해왔다. 또한 부분적으로는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극동 철학의 영역에 관계해왔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렇다는 보장은 없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7. 불교학은 역사적 불교철학의 활동영역을 따라 자신의 연구대상을 확정해왔다. 현대의 불교학자들은 지역적 구분을 가지고 연구에 임하지만, 실제로 그 분류들이 역사적인 사건들, 즉 시간적 자취라는 점은 그다지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오늘날 불교학자들은 인도, 중국, 극동 등의 지역 개념으로 분류하여 연구를 진행하지만, 그러한 분류는 당시의 불교철학자들이 활동한 지역이 이동하면서 생긴 부수적 구분일 뿐이다. 즉 인도불교에 나타났던 논사(論師)들은 당시의 살아 있는 철학자들이었고, 후대로 오면서 인도에서 불교의 맥이 끊어졌지만, 중국과 극동에서는 새로운 살아 있는 불교 논사들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과거의 불교의 역사를 지역적 자취를 따라가며 연구하는 일은 정당한 것이긴 해도, 그것이 본질은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래의 불교학은 미래의 불교의 철학활동들이 어디로 움직일 것인가에 그 향방을 맡기고 있다. 따라서 만일 오늘날 불교학자가 아닌 불교에 기반을 둔 철학자가 서양에서 나타난다고 하면, 불교학에는 다시금 '서양불교'라는 새로운 지역적 구분이 추가될 것이다. 진정한 불교의 철학자, 즉 논사가 나타나지 않는 한, 적어도 교학(敎學) 분야에서 20세기의 '극동불교'란 용어는 필요하지 않다. 연구할만한 가치 있는 대상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8. 앞에서 "모든 철학은 하나다"라고 한 것은 '철학함'(philosophylising)이라고 하는 활동(activity)의 본성이 하나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여기서 '하나'라는 말은 "구조적으로(in structure) 동일하다"는 것을 묘사하는 형용사이다.5){{) 그것은 '부사'라고도 불릴 수 있으며, 혹은 '동사'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 즉 자신들이 보고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든 간에, 그 본 바를 일단 타인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하는 한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신념체계가 가장 보편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어한다. 물론 어떤 경우엔 "보편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할 수는 있으나, 그 경우에도 "보편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자신의 주장 자체는 보편적이라고 주장하고 싶어한다. 따라서 '이성의 보편적 사용 시도'와 '설득력의 강도'를 높이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어떤 지역에서 발생한 철학이든 그것들이 '철학함'의 행위적 본성을 공유한다는 데는 공통된다.6){{) 이 점에서 나는, 철저하게 '참' 아니면 '거짓'이라는 2가원칙(bivalence principle)적, 진리값-결정적(value definite) 진술들을 위한 논리학인 고전논리학(Classical Logic)이 가지고 있는 배중률(tertium non datur)의 무제한적 인정과 같은 전제들에 반대한다. }} 활동의 본성이 공통적이라는 것은 그 형식적인 면에서 그러하다. 그렇기에 내용적인 면에서까지 동일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실제로 형식과 내용의 범주적 오류는 일상적 학문활동에서 너무도 빈번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학문활동이라고 하는 객관성을 갖춘 듯한 외관을 지니고 있기에 사태는 더욱 심각하다. "학문!"이라는 말, 그것은 왠지 우리를 숙연하게 만든다.7){{) 현학적인 사람들의 고상한 픽션들을 생각해 보라! }} 또한 형식과 내용은 어떤 단계에서는 구분 가능하고, 또 다른 단계에서는 구분 불가능하다. 9. 한 학자가 '설득력의 강도'를 높이려고 한다면, '내용적 설득력에 대한 자신의 믿음'(위자비량[爲自比量])과 함께, '타인에 대한 설득의 방법'(위타비량[爲他比量)]에 대해서도 강구해야만 한다. '설득의 방법'이란 사실 상 우리들 상호간의 간주관성(inter-subjectivity) 확보가 실현되는 장(場, field)이어야 한다. 만일 간주관성이 확보되지 못한다면 그러한 방법은 다수에게 채택될 수 없다. '설득의 방법'이란 대화(dialogue)라는 놀이(game)를 전제하고, 그 놀이의 종목과 규칙을 정하는 것과도 같다. 놀이의 종목 선택은 설득의 방법을 사실상 실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놀이의 종목은 보다 많은 이들이 원하는 것으로 결정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즉 보다 적은 이들이 원하는 종목을 선택할 경우, 그 선택은 '이성의 보편적 사용 시도'와 '설득력의 강도'라고 하는 더 큰 원칙을 상실할 우려가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러하며, 어떤 경우 그러한 놀이는 아예 시작하는 일조차 불가능할 수도 있다. 나는 그런 경우를 "방법론적 소외(methodological estrangement)가 발생했다"고 표현한다. 10. 고대 동양의 철인(哲人)들이 종목을 선택한 것을 보면, 그 당시 사회에 널리 퍼진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설득력의 강도'를 높이려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방법이 오늘날 그대로 사용된다는 보장은 없다. 그 구조는 같을지라도 적어도 외관은 다를 것이다. 11. 놀이의 종목을 선택하는 것은 곧 '어떤 한 종류의 논리학 체계'(a kind of system of logic)를 선택하는 일이다. 이러한 선택에서 그 체계들(systems)은 구성(construction) 가능하다. 그리고 놀이의 종목이 결정되면 세부적 규칙들을 정하게 된다. 이러한 세부적 규칙들의 단일 항목들을 규정 혹은 도입하는 일이 의미론(semantics)이다. 그리고 의미론을 통해 도입된 항목들간의 관계를 부여하는 일이 구문론(syntax)이라고 표현된다. 12. 불교학자들 역시 자신의 설득의 방법을 강구하며, 그것은 과거나 지금, 그리고 미래에도 변함이 없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방법에 대한 고민은 놀이의 종목 선택으로 실현된다. 불교학자들 역시 놀이의 종목을 선택함으로써 자신들의 설득의 방법을 독자적으로 강구하거나, 아니면 기존의 종목 속으로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편입된다. 그런 점에서 종목 선택을 하지 않은 불교학자는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그중 기존의 종목으로 무의식적으로 편입하는 일은 때로는 겸손에서, 때로는 무지에서 기인하였다. 실제로 놀이의 종목에 대한 선택 행위 혹은 그에 대한 반성의 결여는 한 학습자를 학자일 수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학문의 적(敵)이다. Ⅲ. 문 헌 학 1. 현대 불교학에 있어서 최초의 종목 선택은 고고학과 서지학, 사전편찬으로 묘사되는 일련의 활동들을 통해 실현되었다. 이러한 활동 전체를 나는 '문헌학'(philology)이라고 부른다. 그러한 일련의 활동들은 그 활동의 본성이 구조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비록 활동의 외연이 때로는 겹치고 때로는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메타(meta)적 성찰차원에서 보면 그것들이 사실들(facts)로부터 혹은 구체적 자료들(data)로부터 출발하며 자료들의 분석과 정리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그것은 참으로 과학과 유사하다! 자료들은 관찰 가능하며 경험의 영역에 존재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방법을 '실증적 연구'라고 부른다. 2. 앞의 II.11.에서 살펴보았듯 놀이의 종목 혹은 그 체계는 구성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나는 문헌학이 불교학자에게 있어서 유일한 선택이 아니다는 점을 주장하려 한다. 다만 아직껏 우리가 참으로 다른 또 하나의 종목 선택을 역사상에서 아직은 보지 못했던 것일 뿐이다. 우리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그 종목은 심지어 중층적(overlapping)일 수도 있다. 즉 여러 가지 다양한 종목들을 통해서만 보다 큰 어떤 종목의 실현을 비로소 볼 수 있는 --- 혹은 그 역도 가능한 --- 그러한 형태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문헌학도 배제되지 않으며 심지어 필연적 상호관계를 갖기까지 한다. 3. '불교학'이라는 선택의 주체는 문헌학만을(only) 자신의 놀이 종목으로 선택함으로써 '내용의 실현'과 '설득력의 강도 강화'에 실패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문헌학은 언제나 무죄(無罪)였다. 오히려 문헌학은 오늘날 불교학이 이 만큼이라도 존립할 수 있게 한 공로자였다. 그런 만큼 문헌학자들은 불교학에 있어서 공로자이자 또한 피해자이며, 한편으로는 무의식적 수구(守舊)에 동참하고 있다. 문헌학적 연구만을 심화시킴으로써 다른 가능성을 폐쇄하는 것은 '직업적 불교학'을 위한 것이기는 해도 '불교'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문헌학' 역시 불교학만큼이나 모호한 용어라는 점을 먼저 기억하자. 4. '문헌학'(philology)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실현되는가? 우리는 몇 가지 방식으로 그것의 성공한 사례들을 볼 수 있다. 오늘날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받는 불교학 내의 문헌학적 연구들 --- 즉 불교문헌학 --- 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경우1.] 탐사와 발굴을 통해 발견된 고문헌들을 원형대로 보존하고, 사진으로 찍어 마이크로 필름으로 만들거나 제본하는 일. 이러한 작업을 '문헌 고고학'(archaeology of text)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경우2.] 고고학적으로 새로이 발견된 어떤 고문서를 복원하고, 현존하는 다른 판본들과 비교하여 원문을 이리 저리 짜 맞추어, 가장 원전에 가까운 최종적 교정본을 만드는 작업. 이러한 연구를 '비판 교정적 편집'(text-critical editing)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경우1.]과 [경우2.]를 합해 불교학자들은 '사본 연구'라고도 부른다. [경우3.] 지금껏 한 번도 완전하게 번역된 일이 없는 --- 그러나 비판 교정본은 존재하는 --- 하나의 혹은 경전에 대해 그 역사적 위치를 조망하는 내용과 더불어 자신의 연구방법을 간단히 서술하는 서문이 약 5페이지. 그 텍스트 안에 있는 [철학적] 내용들을 30∼40페이지에 걸쳐 요약 설명하거나, 가끔은 이전의 간략한 연구 역사, 즉 누가 그 필사본을 발견했으며 다음으로 비판교정본(text-critical edition)을 만드는 상황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등 10페이지 정도의 배경 설명이 덧붙혀진다. 그리고는 100∼200페이지에 달하는 해당 텍스트의 번역이 따라붙고, 보다 꼼꼼한 경우 필사본들 사이의 차이를 설명하고 때로는 원본을 교정한 '문헌교정 내용들', 즉 '글자짜맞추기에 대한 각주 모음'(text-critical note)이 20∼30페이지 덧붙혀지기도 한다. 이런 경우를 '원전 비평적 번역'(text-critical translating) 혹은 '주석적 번역'(annotated translation)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경우4.] '비판 교정적 편집'이나 '원전 비평적 번역'을 통해 축적된 내용들을 검토하여, 최종적으로는 용어집이나 사전 혹은 색인을 만들려는 작업. 이러한 경우를 '사전편찬학적 연구'(the lexicographical studies)라고 부르자. [경우5.] 하나의 개념 혹은 용어를 시대적 선후관계에 있는 여러 문헌들의 내용 속에서 그 의미의 변천과정을 추적하거나, 그 문헌들의 사상적 변화 추이를 탐구하는 것. 이러한 경우를 '철학사적 연구'(the studies in the history of philosophy)라고 부르도록 하자. [경우6.] 역사상 존재했던 두 학파나 사고 전통들 사이, 혹은 특정한 고전 사상과 특정한 현대 사상 사이를 병렬적으로 비교 검토하는 일. 이러한 경우는 '소박한 비교철학적 연구'(the na ve comparative studies of philosophy)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많은 경우 기존의 '비교철학'이란 바로 이 단계에 위치한다. [경우7.] 불교의 어떤 교리적 내용들을 사회적, 정치적, 과학적 문제 등에 적용하여 검토해보는 연구. 이 분야는 흔히 '응용불교학'(the applicative studies of Buddhism)으로 불린다. 일단 [경우1.]에서 [경우5.]까지를 예로 든다면, 불교학 내에서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문헌학'에 대한 설명은 대체로 이러한 경우들의 묘사와 더불어 실현된다. 그리고 그러한 활동들이 지금까지 소위 '불교학'이라고 부르는 학문활동에 있어서 주류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또한 위에 제시된 사례들의 순서들은 기초적 분야부터 시작하여 점차 복잡한 활동들을 속성으로 하는 순서로 되어 있다. 5. '문헌학' 전반은 넓은 의미의 정보습득을 주된 임무로 한다. 그렇기에 그것은 최종적인 목적지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해석(interpretation)과 반성(reflection)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III.1.에서 살펴보았듯이 그것은 자료수집에서 시작하여 그 자료의 분석으로 귀결한다. 그러한 분석은 우리가 바라는 넓은 의미의 해석과 반성에는 부족한 감이 있다. 전통적으로 이러한 비판에 대한 반론으로 "번역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번역자의 관점이 개입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번역행위는 동시에 철학함이다"라고 주장하는 오래된 믿음이 있다. 이 믿음은 "문헌학에 단순한 정보습득 이상의 그 어떤 차원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은 심리적 요인이 암묵적으로 깔려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 '번역자의 관점 개입'이란 대부분 생물학적 관점 개입이다. 즉 그것이 일종의 '개입'이긴 하지만, 인간이 생명을 가지고 행하는 모든 행위에서 발생하는 기본적인 관점 개입보다 그다지 멀리 나가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본적 '관점 개입' 혹은 '보는 방식의 작용'을 우리는 '초보적 관점 개입'이라고 부를 수 있다. 오늘날의 영어로 쓰여진 어떤 철학적 원서를 번역하는 일을 생각해보자.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가 '번역'(translation)이라고 말할 때, 이미 거기에는 '초보적 관점 개입'을 포함한다. 하지만 '초보적 관점 개입'을 '철학'(philosophylising)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6. 일반적으로 학문활동과 관련된 여러 용어들에 외관상 어떤 숭고한 인상이 겹쳐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헌학'이란 용어에도 오랜 세월에 걸친 거품의 층이 존재한다. 불교의 문헌학은 참으로 많은 량의 비(非)문헌학적 원전들을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다. 위대한 철학들이 --- 철학사가나 철학자가 아닌 --- 위대한 문헌학자들의 손에서 번역되었다. 그리하여 '위대한 문헌학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위대한 철학자들'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이다. Ⅳ. 철 학 함 1. 학자의 학문활동은 '정보습득'과 '해석'의 두 차원으로 나뉘어진다. '정보습득'의 행위를 할 때, 학자(Scholar)는 연구자(scholar) 또는 역사가(historian)가 된다. 그리고 '해석'의 행위를 할 때, 학자는 철학자(philosopher)가 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글읽기'와 '글쓰기'로 나누는 방식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유사하다. 한 사람의 학자는 '연구자'일 수 있으며 동시에 '철학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이 하는 활동의 범주에 매우 예민할 경우에만 두 가지 활동 모두에서 성공적일 수 있다. 2. '불교학' 역시 다른 학문활동들과 마찬가지로 불교와 관련된 '정보습득 활동'과 그에 이어지는 '분석 및 해석 활동'이라는 두 범주로 구성된다. '문헌학'은 이들 중 '정보습득 활동'에 포함되며, 불교학의 '정보습득 활동'에에 있어서는 필수적이면서도 최고의 비중을 점한다. 그리고 이 점은 앞으로도 변하기 어렵다. 불교학에 있어서 '분석 및 해석 활동' 즉 '해석'은 '철학함'에 의해 주로 이루어진다. '문헌학'과 '철학(철학함)'은 불교학을 구성하는 주요한 두 축이다. 불교학자가 '문헌학'을 할 때 '철학사가'(哲學史家, the historian of philosophy)가 되고, '철학'을 할 때 그야말로 철학자(Philosopher)가 된다. 불교학자가 철학사가일 뿐만 아니라 철학자를 겸할 때, 우리는 그를 '불교철학자'(Buddhist philosopher)라고 부른다. 3. 불교도이면서 동시에 불교학자인 학자들만이 '불교철학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 불교도이면서 동시에 불교학자인 사람이라고 해서 누구나 불교철학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불교도이면서 동시에 불교학자인 학자가 '불교'라고 하는 '신념체계'를 내용으로 하여 체계적으로 적극적이고도 공적으로 변론하고 설득하려고 시도할 때 비로소 불교철학자가 된다. 그러한 설득은 철저히 간주관성의 유지를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만 하며, 단순한 웅변이나 설교가 아니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불교철학자는 '철학함'이라는 활동을 하는 동시에 자신이 옹호하고자 하는 신념체계가 불교인 학자이다. 그런 점에서 불교철학자와 잠재적으로 불교철학자가 될 가능성을 가진 '불교도이면서 동시에 불교학자인 학자들'은 불교 공동체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 자동적으로 부여된다. 불교라는 신념체계를 설득하고 변론하는 공적 책임은 그들을 제외하고는 불교전통 혹은 불교공동체 어디에서도 담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교계의 학문적 프로들(professionals)이기 때문이다.8){{) 불교를 공부하는 직업적 연구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실존과 자아에 대한 고민들이 자주 발견된다. 그러한 고민이 무척이나 소중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그 연구자의 '사적 차원'(private level)의 문제라는 점 또한 중요하다. 축구가 좋아 매일 아침 공을 차는 조기축구회원 아저씨에게 우리는 반드시 이기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떤 축구선수가 국가대표로서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면, 그에게는 반드시 월드컵 16강에 진출해야 될 의무가 부여된다. 그가 사적으로 얼마나 축구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가졌느냐와는 관계없이 말이다. 마찬가지로 대학원생 이상의 연구자들은 돈을 벌든 안 벌든 학문프로들이라 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 대학원생들에겐 더 이상 학생할인이란 제도적 혜택은 적용되지 않으며, 또한 그들이 대학원에서 보내는 시간에 다른 이들은 노동현장에서 일하고 있음을 명심하자. }} 특히 체제 혹은 제도권 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책임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가 동의하든 거부하든 간에……. 불교공동체 내의 지적 엘리트로서 부과되는 이론적 책임성은 특히 불교공동체 바깥에 대하여 자신의 학문활동의 내용인 '불교' 자체를 변론하고 설득하는 일이 된다. '불교'에 대한 이론적 대표성을 불교 내적으로도 부여받지만, 특히 '불교학자'라고 부르면 당연히 '불교에 대한 이론적 대리자'로 여기는 불교 바깥의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하기에, 불교도이자 동시에 불교학자인 학자의 학문활동은 결코 사적(私的)일 수가 없게 된다. 그런 점에서 불교도가 아닌 불교학자는 '불교철학사가'(historian of Buddhist philosophy)는 될 수 있지만 '불교철학자'는 되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비록 '불교철학자'가 되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다른 종류의 철학자일 수는 있다. 즉 그가 문헌학과 더불어 철학을 병행하는 경우 --- 다시 말해 불교 이외의 다른 신념체계를 옹호하고 설득하는 노력을 보일 때 --- 그는 어떤 종류의 철학자가 되든지, 철학자인 것이다. 그러나 그가 변론하고 설득하려는 '신념체계'의 내용이 불교는 아닐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불교철학자'라고 부를 수는 없는 이유이다. 어떤 이가 만일 불교철학에 대해 단순한 문헌학적 작업만 하면 '불교문헌학자'라고 부를 수 있으며, 주어진 연구 자료에 대해 철학적 검토까지 해낸다면 '불교철학사가'라고는 부를 수 있겠지만, 불교적 신념체계라는 입장에 서서 그것을 옹호하고 설득하려고 하지 않는 한 다른 종류의 철학자는 될 수 있어도 '불교철학자'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리고 어떤 이가 '불교철학자'라고 불릴 수 있을 때, 그는 이미 불교도라고 불릴 수 있다. 그것은 그가 어떠한 사회적 역사적 제도나 조직 등 공식적 절차에 의해, 스스로 혹은 타인에 의해 불교도라고 인정되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내용적으로 그는 불교도가 된다. 그런 점에서 모든 맹목적이지 않은 신앙이란 결과인 것이지 출발점이 아니다. 4. '불교철학자'는 다른 모든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철학적 행위가 성공적(successful)이기 위해 노력한다. '성공적'이라는 것은 자신이 가진 '신념체계'의 내용 즉 불교 그 자체에 대한 변호와 타인에 대한 설득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어 참답게 불교를 실현하는 것이다. 불교철학자의 철학적 행위가 성공적이기 위해서는 성공적인 방법이 요구된다. 그것은 이미 앞에서 다룬 '이성의 보편적 사용 시도'와 '설득력의 강도를 높이는 일'을 통해 실현될 것이다. 불교철학자의 성공적 임무 수행은 곧 이 시대에 있어서 불교의 성공적 실현과 동일한 것이 된다. 그것은 또한 부수적으로 불교학의 성공적 실현을 보장한다. 불교철학자의 활동에 있어서 문헌학은 필수적이긴 해도 전부는 아니다. 문헌학은 자신의 최종적 논거를 문헌에 근거하기 때문에 한계를 갖는다. 문헌학적 논쟁에서 주요한 패턴은 다음과 같다. 문: 그대는 무엇을 근거로 주장하는가? 답: 무슨 무슨 논서(論書)에 나와 있다. 문: 그 논서가 옳다고 무엇으로 보장하는가? 답: 무슨 무슨 경전(經典)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문: 그 경전이 옳다는 것은 무엇으로 보장하는가? 답: ...............9){{) 우리는 가끔 이 부분의 침묵 대신 "그대는 불심이 없는가?"라는 위협에 직면하곤 한다. 그러나 그러한 진술은 논리적으로는 침묵만도 못한 것이다. }} "무슨 무슨 논서에 나와 있다"라는 주장의 설득력은 불교도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유의미하지 않다. "무슨 무슨 논서에 나와 있다"라는 주장은 "나는 AD 2세기경 혹은 그 옛날 어느 때 인도 혹은 중국에 살았던 불교철학자 아무개가 저술한 어떤 논서를 읽은 바 있고, 그 안에서 그가 '무엇 무엇'이라고 주장했다는 사실을 본 적이 있다"라는 사실을 보여줄 따름이다. 5. 철학적 자료들을 대상으로 연구한다고 해서 그 모든 활동이 '철학함'이라 불리지는 않는다. 이미 문헌학을 통해 '초보적 관점 개입 활동'을 포함해 자료의 번역이 끝난 사상체계를 놓고 그 체계를 구조적으로 검토할 때에서야 비로소 우리가 '철학' 즉 '철학함'이라고 부르는 활동이 시작된다. 그 체계의 구조적 검토가 바로 '철학사'(history of philosophy)이며, 철학사를 통해 구조적으로 검토된 한 체계에 대해 옹호 혹은 비판활동을 전개해 나가는 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철학함'이다. 6. 불교논리학(Buddhist logic)에 대한 불교학적 활동을 검토해보자. 먼저 고전적 불교논리학자가 저술한 특정한 논서에 대한 문헌학적 검토가 있게 된다. 이 과정에서 애매모호한 개념들의 번역어를 결정하고, 문법적으로 명료하지 않은 문장들은 완결된 문장 구조를 가지도록 확정된다. 다음으로는 전체적 내용을 파악한 후 철학적 평가를 하게 된다. 이러한 철학적 평가는 문헌학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논리철학(the philosophy of logic)의 영역이다. 논리철학적 검토 능력의 획득은 논리학의 본성을 이해할 때 가능하다. 따라서 문헌학적 훈련과는 별도로 논리철학적 훈련이 요구된다. 7. 논리철학적 훈련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주어진 논리학 체계에 대해 그 완전성(completeness)과 타당성(validity)을 검토하는 일이다. 그것이 철학적 번역만으로 가능할 것인가? 불교를 포함한 인도논리학에 대한 다음과 같은 유명한 평가를 생각해보자. 인도논리학(Indian logic)은 서양의 형식논리학(formal logic)과 달리 인식론과 존재론적 문제들을 함께 다룬다는 점에서 단순한 논리학이 아닌 인식논리학이라고 불릴만하다. 아마도 이러한 표현이 의미하고자 하는 바는 서양의 형식논리학에 비해 인도논리학이 어떤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하지만 논리학에 인식론이나 존재론이 결합해 있다는 것이 왜 보다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서 명료한 설명은 하지 않는다. 이런 경우 문헌학적 해독은 해놓고도 논리철학적 작업은 실패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위의 인용문을 지지하도록 만들려면 다음과 같은 논증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서양의 형식논리학은 --- 비록 최근의 경향은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 언어나 개념 혹은 존재의 도입은 자명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한 변항들(variables) 자체의 문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명료화한다는 모토와 양립할 수 없는 변항들의 불확정성 때문에 연결사(and 나 or 등)나 위치지정 역할의 변항(x, y 등) 같은 요소들만 형식화할 수 있었고, 나머지 문제들은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방식은 한계를 보이게 되었다. 그런 방식의 논리학은 그 쓰임이 제약받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인식과 존재의 문제를 처음부터 논리학 체계로 받아들인 인도논리학의 방법은 정당한 것이었고, 그로부터 우리는 논리학의 발전을 위한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세계 자체에 보다 근접할 수 있는 '형식적인 방법'(formal way)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상의 논증과 평가 어디에 문헌학이 있는가? 우리는 이런 활동을 '논리철학적 활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실제로 이러한 활동은 불교의 오래된 전통이었다. 그리고 이보다 발전된 형식적 체계도 존재하였으니, 예를 들면 티벳 승원의 논리교육 체계인 뒤라(bsdus grwa)체계 같은 것이 그러하다. 8. 불교학이란 '불교'라는 내용을 실현하기 위해 '문헌학'과 '철학'을 잠시 사용하는 것이다. 불교학은 불교라는 내용에 대한 여러 가지 형식 가운데 하나이다. '문헌학'이 불교학에 잇어서 기본적이고도 필수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불교학'의 동의어일 수는 없다. 불교학은 철학에 대해서도 동일한 관계를 가진다. 불교학은 불교를 위해, 그리고 불교 그 자체 역시 어떤 것이든 걸림 없이 사용한다. 그러한 자유로운 사용 자체가 불교의 진리체계를 자유롭게 한다. 그런 점에서 불교와 불교학은 방법론적으로 실용적(pragmatic)이다. 9. '철학함'의 관점에서 보면 '문헌학'의 외연은 다소간 명료해진다. 불교학 내에서 '문헌학'은 '철학함'에 상대되는 개념이다. 그 안에서 '철학함' 역시 '문헌학'에 상대적인 개념이다. '철학함'이라는 방법에 대비될 때, '고전문헌학'(classical philology)이나 '비교문헌학'(comparative philology) 등, 문헌학의 세부적 구분들은 철저하게 문헌학 내부의 일이 되고 만다. 그 모든 것은 '문헌학'이라는 일반명사 아래 포섭될 수 있으며, 앞에서 묘사된 문헌학의 속성들을 공통적으로 지니게 된다. V. 또 하나의 불교학 1. 비로소 우리는 불교학의 교육체계가 '철학함'이라는 또 하나의 구성요소를 결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훌륭한 '문헌학자'가 되기 위해 다양한 언어를 통한 엄청난 노력의 문헌해독 능력이 요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훌륭한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철학함의 훈련'이라고 하는 그 나름의 또 다른 노력이 마땅히 필요하다. 김호성이 '짜깁기의 철학'이라고 말했던 폐단은 바로 정보습득과 철학적 분석이라는 두 가지 본원적 활동에서 후자의 결여로 인해 파생된 사태들이다. 그리고 어떤 측면에서 그것은 필연적 결과이다. 불교학은 "어떻게 하는 것이 훌륭한 문헌학적 활동을 하는 것인가"를 아는 것만큼 "어떻게 하는 것이 훌륭한 철학적 활동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잘 그리고 명료하게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사실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미래 불교학의 향방을 결정하는 결정적 출발점이다. 2. 이것이 정녕 한국 불교학계만이 가진 문제인가? '문헌학 지상주의'란 문헌학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한 한국 불교학계만의 문제인가? 우리는 한 손에는 '문헌학'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철학'을 든 '불교철학자'를 현대에 들어와서 한국에서, 그리고 --- 만일 철학자로 가장한 몇몇 연구자들을 제외한다면 --- 서양이나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아직 경험해보지 못했다. 그러한 불교철학자를 우리가 만나는 날이야말로 앞서 살펴본 '소박한 비교철학적 연구'와 다른 진정한 의미의 '비교철학'인 동시에 '철학'이라고 부를만한 하나의 학문활동이 시작되는 날이 될 것이다. 이제 '불교문헌학'이 '불교학'이란 용어의 독점적 사용권을 양보할 역사적 시점을 맞이한 것은 아닐까. 강종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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