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

불교경전 제5강좌 반야 경전, 제6강좌 방등 경전

수선님 2020. 3. 22. 13:04
제 5 강좌 반야 경전
      24. 반야심경
      25. 금강경
      26. 대반야바라밀다경
      27. 문수반야바라밀경
      28. 대반야경
      29. 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
24. 반야심경 (般若心經)
<대반야경> 6백 권의 사상을 한자 260자로 가장 짧게 요약하여 그 진수만을 담고 있는 경전이라 하면 <반야심경>을 떠올린다. <반야바라밀다심경>의 준말로 핵심은 역시 공(空)사상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실체가 없는 공임을 철저하게 터득함으로써 반야(지혜)를 얻어, 결국에는 정각(正覺)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법회의식에서 독송되고 있으며, 반야부 경전 중에서도 가장 많이 읽히고 있다. 경전을 살펴보면 관세음보살을 통해서 반야의 인격을 보였으며, 불생불멸을 통해서 반야의 실상을 천명했고, 보살과 부처님을 통해서 반야의 공덕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반야바라밀에 대한 신앙과 발원으로 경의 종반부를 이루고 있다. 산스크리트 원전은 대본과 소본 2종류가 전해지고 있다. 양본의 내용은 별다른 차이가 없으나, 다만 대본에는 소본에 없는 서론부분과 결말부분이 들어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독송되고 있는 경은 당나라 현장(玄裝)이 번역한 것으로 소본에 해당된다. 현존하는 한역본은 구마라집의 <마하반야바라밀대명주경>(402∼413년 번역)과 현장의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649년 번역) 등 7본이 있다. 이 밖에도 티벳역. 몽고역.프랑스역.영역 등이 있는데, 특히 1884년 막스 뮬러(Max Muller)와 일본의 난조우(南條文雄) 박사가 일본 장곡사 소장의 대본과 법륭사 소장의 소본을 교정 .영역한 것은 19세기 불교학계의 큰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원제 : The Ancient Palmleaves containing the Prajna- Pramita-hridaya-sutra and the Ushinsha- vigayadharani) 주석서는 중국에서만도 당나라 규기(窺基)의 <반야바라밀다심경유찬>(2권)과 법장(法藏)의<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1권) 등 77부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원효(元曉)의 <반야심경소>와 원측(圓測)의 <반야심경소>와 원측(園測)의 <반야바라밀다심경찬>(1권)이 있는데, 원효의 것은 현존하지 않는다. 특히 원측의 것은 현장의 한역본에 대한 최초의 주석서로서 내용이 뛰어나 그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반야심경 해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는 크다(대), 많다(다), 초월하다(승)의 뜻이고, 반야는 지혜, 깨달음의 뜻이며, 바라밀다는 저 언덕에 이르다(도피안)는 뜻이다. 심경은 핵심되는 부처님의 말씀이란 뜻이다. 일체를 초월하는 지혜로 피안에 도달하는 가장 핵심되는 부처님의 말씀.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관자재보살(관세음보살)이 (삼계. 사생. 육도의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깊은 반야바라밀을 수행할 때에 오온(물질적 현상, 감각작용, 의지적 충동, 식별작용)이 모두 공함을 (실체가 없음을) 확연히 알고 이 모든 고통(4고, 8고)에서 벗어 났느니라.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여, 물질적 현상이 그 본질인 공과 다르지 않고, 공 또한 물질적 현상과 다르지 않으니, 물질적 현상이 곧 본질인 공이며, 공이 곧 물질적 현상이니라. 감각작용, 지각작용, 의지적 충동, 식별작용도 다 공이느니라.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사리자여, ( 이 모든 존재들이 외관상으로는 생겨나는 것 같기도 하고 없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더러운 것 같기도 하고 깨끗한 것 같기도 하고 증가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감소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이 모든 현상계의 본질적 차원(관세음보살의 차원)에서는 생겨나는 일도 없고 없어지는 일도 없으며, 깨끗한 것도 없고, 더러운 것도 없으며, 감소하는 일도 없고, 증가하는 일도 없느니라.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그러므로, 사리자여) 이 현상계의 본질의 차원인 공의 입장에서는 물질적 현상도 없고, 감각작용과 지각작용 그리고 의지적 충동과 식별작용도 없느니라.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이 공의 세계에서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사유작용 등 감각작용도 없고, 빛깔과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비감각적 대상인 원리 등 객관대상도 없으며, 시각의 영역도(청각의 영역, 후각의 영역, 미각의 영역도(청각의 영역, 후각의 영역, 미각의 영역, 촉각의 영역) 사유의 영역등 주관작용도 없느니라.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이 공의 세계에서는) 무명도 없고, 무명의 소멸도 없으며(행, 식, 명색, 6입, 촉, 수, 애, 취, 유, 생도 없고 그 소멸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늙고 죽음의 소멸도 없느니라.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以無所得故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고
(이 공한 세계에서는)고통도 없고, 고통의 원인도 없고, 그 원인의 소멸도 없고 그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수행방법도 없느니라. (그럼므로 이 공의 세계에서는) 깨달음도 없고, 깨달음을 얻은 것도 없고, 깨달음을 얻지 못한 것도 없느니라.
菩提薩 依般若波羅密多 故心無 碍 無 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그럼므로 사리자여)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므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두려움이 없느니라. (보살은) 뒤바뀐 잘못된 생각을 멀리 떠나 마침내는 열반에 이르렀느니라.
三世諸佛依般若波羅密多 故得阿 多羅三 三菩提
삼세제불의반야바라밀다 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최상의 깨달음인 아뇩다라 삼먁 삼보리(완전한 깨달음)를 얻었느니라.
故知般若波羅密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그러므로, 이 반야바라밀다는 이 큰 신비한 주문이며, 큰 밝은 주문이며, 큰 최상의 주문이며, 이 얼마나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주문인가를 알아야 하느니라.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般若波羅密多呪 卽說呪曰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이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은 능히 일체의 고액을 소멸시키며 진실하여 거짓이 없나니, 그러므로(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이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일러 가로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3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우리 함께 피안으로 가자. 피안에 도달하였네. 아! 깨달음이여 영원하라."
25. 금 강 경
금강경의 완전한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 또는 「능단반야바라밀경」입니다.
600권의 「대반야경」가운데 제9회 제577권 「능단금강분」과 같은 것으로, 별도의 번역본들이 독자적인 경전으로 고려 팔만대장경에 실려 있기도 합니다. 「반야심경」과 함께 널리 독송 되고 있는 「금강경」은 교종이나 선종을 막론하고 매우 중요하게 여겨져, 지금까지 강원에서 교육할 때 고등 교과인 사교과(四敎科)의 주요 경전으로 교육되고 있습니다.
「금강경」의 금강(金剛)은 금강석 곧 다이아몬드를 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기에 무엇이라도 부술 수 있고, 세상에서 가장 예리하기에 무엇이라도 자를 수 있으며, 세상에서 가장 반짝이기에 어둠을 밝게 비출 수 있다는 금강석을 부처님의 가르침, 반야의 지혜로 비유한 것입니다. 금강석처럼 단단하고 예리하고 반짝이는 완전한 반야의 공지(空智)로 보살행을 수행하면 열반을 성취하여 성불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설한 경전이란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금강경의 구성
「금강경」은 분량이 약 300송쯤 되기 때문에 「삼백송반야경」이라고도 부르는데, 전부 여섯 번 번역되었습니다. 그 중 가장 널리 독송 되고 있는 것은 402년에 번역된 구라마집의 「금강반야바라밀경」입니다. 경의 구성을 살펴보면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공의 이치를 가장 잘 터득하고 있었다는 수보리와 부처님의 문답식의 대화를 전개해 가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법회인유분」제1에서 시작하여 「응화비진분」제32 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 사상의 골자는 철저한 공사상에 입각한 윤리적 실천에 있습니다. 부처님이 사위국에서 수보리 등을 위하여 처음에 경계가 공(空)함을 말하고, 다음에 혜(慧)가 공함을 보이고, 뒤에 보살공 (菩薩空)을 밝혀 공혜(空慧)로서 체(體)를 삼고 일체법 무아(無我)의 이치를 말한 것을 요지로 하고 있습니다. 금강경은 반야부 계통 경전의 핵심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공사상(空思想)을 설하고 있지만 공(空)이란 글자를 전혀 사용치 않으면서도 공의 이치를 유감없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이 경이 대승불교의 최초기에 성립된 것으로서 아직 공이라는 술어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 금강경의 내용
이 경의 전편에 흐르는 사상은 다른 반야부 계통의 경전과 같이 공사상(空思想)입니다. 철저한 공사상에 의해 번뇌와 분별심을 끊음으로써 반야지혜를 얻어 대각을 증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경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다름 아닌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 공사상에 가장 밝은 해공제일(解空第一) 수보리 존자라는 점은 이 경의 내용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즉 수보리는 부처님께 "세존이시여, 최고의 진리를 배우고 닦으려는 마음을 낸 선남선녀는 마음 자세가 어떠해야 하며(어떻게 수행해야 하며),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라고 질문 하였습니다. 부처님은 이에 답하시게 되니 이 경의 주요 내용은 수보리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엮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금강경
금강경은 교종인 삼론이나 법상, 화엄, 천태 등 뿐만 아니라 선종에서도 근본 경정으로 삼는 중요한 경전이다. 그리하여 중국에서는 일찍이 하택 신회가 그의 어록에서 이 경전을 가리켜서, “일체행은 반야바라밀행이니 금강반야바라밀경이 최승 제일이다.”라고 하였으며 육조단경에서도 “이 경을 지니면 곧 견성하여 반야 삼매에 들게 된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 경명은 둘 중에서 금강석이 모든 것을 끊을 수 있는 것과 같이 가장 단단하고 완벽한 반야의 지혜로 피안에 이를 수 있으며, 모든 집착과 분별심을 단멸하는 데 있어서 가장 뛰어나다는 의미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한다.
이 경전의 한역을 여러 번에 걸쳐서 이루어졌는데, 최초의 것은 후진의 구마라집이 402년에 번역한 것으로서 이는 현장이 번역한 대반야경의 600권 중에서 제9회 제557권인 능단금강분의 별역으로 능단금강반야밀경 또는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고 하며, 줄여서 금강반야경 혹은 금강경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특히 이 경은 인도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널리 수지 독송되어 그 주석서만 해도 800여 종에 달했다고 하며, 금강경오가해라고 하여 구마라집의 한역에 양나라의 부흡과 당나라의 혜능과 종밀 및 송의 야보와 종경 등 5인이 주석한 내용을 엮은 주해서가 유명하다.
또한 금강경은 그 성립 시기가 대략 서기 150년에서 200년 경으로 추측되어서 대승불교의 초기의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이에서는 대승이나 소승과 같은 술어를 찾아볼 수 없을 뿐더러, 흔히 반야부 경전 계통에서 살필 수 있는 공사상 등이 서술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소승과 대승이 격렬하게 대립되기 전에 유포되었던 대승 사상을 함축한 경전으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전은 또한 이 보다 먼저 설한 것이 화엄과 아함 및 방등경류요, 뒤에 설한 것이 법화·열반경류이므로 오시에서 본다면 한 중간에 있어서 중요한 시기와 지위를 점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전에 설한 것은 세간법으로부터 출세간법으로, 속제에서 진제로 들어가는 것을 가르친 것이니, 즉 불과 유에서 유로 가는데 지나지 않다고 한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유를 파하고 공을 나투며, 상을 떠나서 성을 밝히어 무상(無想)의 종(宗)과 무주(無主)의 체(體)를 세우고 있는 점이 특색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중생계의 현실 세계로부터 열반의 이상 세계로 가는 관문이 있는데 이 관문을 통과하는데는 오직 지혜가 필수 불가결로서 중요한 시기와 지위에 부처님께서 이 경전을 때에 맞추어 설하셨다는 것이다.
육조 혜능 대사는 그리하여 이에서 무상으로 종으로 삼고, 무주를 체로 삼으며, 묘유(妙有)를 용(用)으로 삼았던 것이다. 먼저 종으로 삼은 무상이란, 모든 법에는 어떤 모양도 없다는 것이 근본 이념으로, 이는 일단 모든 것을 부정하는 개념으로 나타난다. 어떤 존재를 인정하고 판단하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높은 경지의 존재일지라도 결국은 상대적인 유의 관계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를 철저히 부정해서 그 가운데서 초월적인 영원한 존재와 자아를 찾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경전에도 모든 존재는 모양이 다 허망하여 진실한 것이 아니므로, 모양 아닌 것으로 보는 지혜가 참으로 부처를 보는 안목이라고 설해져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주함이 없는 것을 근본의 체성으로 삼는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존재와 판단을 인정치 않는 것과 그 개념이 같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무상한 경지이기 때문에 어느 곳에 머문다는 것은 벌써 집착심이 일어난 것이며, 진실한 마음을 낼 수 없기 때문에 분별심이라는 것이다. 즉, 물질은 성주괴공으로 그 모양이 변해가고, 정신적인 것은 생주이멸로 그 양상이 찰나마다에 바뀌어 가는데, 어느 곳에 머뭄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다고 금강경에서는 모든 것은 모양이 없고, 주처가 없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가운데서도 어떤 묘용이 있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평범 속의 비범이요, 무질서 속의 질서인 법칙성의 존재, 즉 연기법이 상주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무는 결코 완공이 아니고 활공과 진공으로서 모양이나 주함이 없는 가운데도 어떤 진리인 법칙성은 존재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이 진리의 작용이 묘유의 용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 경에는 지혜를 일깨워 주는 중요한 교의와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수지하거나 독송하면 많은 공덕이 따른다는 것이다. 즉 “황하의 모래와 같이 많은 몸을 가지고 보시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이 경의 사구게 한 구절만을 외운 공뎍에 비기지 못한다.”거나, “만일 삼천대천세계 중에 있는 수미산만한 칠보 무더기를 가지고 어떠한 사람이 보시에 사용하더라도, 반야바라밀경 중의 사구게 등을 지녀 이의 뜻을 알고 외워서 남을 위하여 설명해 준다면, 이는 앞에서 말한 보시보다 백 배의 복덕이 있으며 백천만억 내지 숫자가 있는 대로 비유를 들어 말할지라도 능히 표현할 수가 없는 복덕이 있는 것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 등이 이를 잘 말해 준다.
이러한 금강경이 불교의 전역시대인 양나라를 거치고, 종파시대인 당 때와 유지 시대인 송을 거쳐오면서 중국의 모든 시대를 풍미했는데, 여기에서 산출된 금강경오가해는 금강경에 관한 인도 유식가들의 논리해석으로부터 중국 선사상의 형성과 발전에 이르는 대표적인 주석을 거려 뽑아서 의식적으로 배열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강원의 사교과 중에 이 금강경에 관한 교육이 있으며, 원효 스님의 금강반야경소를 필두로 원측 스님의 금강반야경소 등 많은 저술이 있다. 특히 금강경오가해에 관한 설의가 조선초에 함허에 의하여 찬술되었는데, 이는 선과 교의 융합을 의도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고, 이후에는 선종에서 이 경을 지도 이념으로 오늘날까지 삼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에 관한 우리 국민들의 사경 불사나 석경 조성 등은 그 영원한 신앙성을 말해 주는 것으로서, 어떠한 경전보다도 우리 일상 생활과 친밀해져 있음을 나타내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26. 대반야바라밀다경 (大般若波羅蜜多經)
600권. K-1(1-1). T-220(5-1). 당(唐) 시대(A.D. 660∼663) 번역. [역] 현장(玄 ). [범] Mah praj p ramit -s tra. [약] 대반야경(大般若經). [별] 대품경(大品經), 대품반야(大品般若),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 600부 반야(般若).
대반야바라밀다경은 반야부의 여러 경전들을 집대성한 총서(叢書)이다. 역자인 현장 당시까지 번역된 경전과 현장이 새롭게 번역한 경전들을 총체적으로 수록하고 있다. 반야부 경전 중에서는 팔천송반야경, 즉 소품반야경의 성립이 제일 앞서며 대품반야경이 그 다음에 이어지고, 금강반야경도 이 시기와 비슷하다. 그 다음에 대반야바라밀다경이 성립되었으니, 이것은 대승 경전 성립의 중기에 집대성된 것으로 보인다.
전체의 구성은 제16회로 이루어져 있는데, 경전이 설해진 장소를 중심으로 다시 4처(處)로 분류하기도 한다.
첫째 제1회에서 제6회까지와 제15회는 왕사성 독수리봉의 기사굴산(耆 ?山)에서 설해졌다.
둘째 제7회에서 제9회까지와 제11회에서 제14회까지는 사위성의 기수급고독원에서 설해졌다.
셋째 제10회는 타화자재천왕궁에서 설해졌다.
넷째 제16회는 왕사성 죽림 정사에서 설해졌다.
제1회는 10만 송(頌)이다. 그 분량은 제1권에서 제400권까지이며, 전체 600권 중의 3분의 2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품수는 79품이다. 그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우선 모든 것이 공(空)하다는 것을 선언한다. 물질적 존재뿐만 아니라 정신적 존재 역시 공하다는 점을 설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차별적인 견해에 집착함이 없도록 한다. 이렇게 공을 자각하고 수많은 중생을 제도하려는 사람을 보살이라 하는데, 이러한 보살의 이념을 가장 분명하게 제시한 경전이 반야경이다. 그리고 그 같은 보살이 실천하는 덕목을 6바라밀로 정형화하였다.
공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공에 입각한 실천을 반야 바라밀이라 한다. 비록 분량의 다소에서 차이가 있지만 모든 반야부 경전은 이러한 공의 체득과 실천을 그 주된 사상으로 하고 있음은 차이가 없다. 제1회는 현장에 의해서 처음으로 번역되었으므로 이역본이 없다.
제2회는 2만 5천 송이다. 그 분량은 제401권부터 478권까지이며, 85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회와 비교해 보면 품에 개합(開合)이 있으며, 글이 간략하지만 뜻은 같다. 다만 상제보살품(常啼菩薩品)과 법용보살품(法涌菩薩品)의 2품이 없다. 이역본으로 방광반야바라밀경(放光般若波羅蜜經, K-2),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 K-3), 광찬경(光讚經) 등이 있다.
제3회는 1만 8천 송이다. 그 분량은 제479권부터 537권까지이며, 31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2회와 비교할 때 개합이 같지 않으며 역시 상제보살품과 법용보살품이 없다. 제2회와 제3회 역시 상제보살품과 법용보살품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지만 따로이 유통되었던 것이며, 제1회에서 이미 자세히 설해졌으므로 집대성을 함에 있어서는 생략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역본은 없다.
제4회는 8,000송이다. 그 분량은 제538권부터 555권까지이며, 29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존은 자신이 옛날 인행(因行) 시에 연등불(燃燈佛) 밑에서 반야 바라밀을 수행하여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授記)를 받았다고 설한다. 또 부처의 열반 이후에는 사리를 모신 탑에 공양하는 것보다는 반야 바라밀을 서사(書寫)하고 독송하는 공덕이 더욱 크다는 반야경에 대한 신앙을 설하였다.
이역본으로 마하반야초경(摩訶般若 經),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 소품반야바라밀경(小品般若波羅蜜經), 대명도경(大明度經) 등이 있다.
제5회의 분량은 제556권부터 565권까지이며 24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4회보다 더욱 간략하다. 별도의 소품류(小品類) 경전으로 생각된다. 소품은 도행반야경 등에서는 글은 간략하며 뜻이 풍부하지만, 제1회 제2회 제3회 등에서는 그 단어 수가 늘어나고 해석도 자세하다. 반야경은 큰 위력이 있어서 그 자체가 신비한 주문이라고 말하면서 이 경전을 그대로 믿고 외울 것을 강조하였다. 이역본은 없다.
제6회의 분량은 제566권부터 제573권까지이며 17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경전에서는 보살이 불도를 닦는 데 삼매가 얼마나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는지를 설한다. 마치 사자가 어떤 짐승도 두려워하지 않고 편히 지내듯이 보살도 삼매에 들어가면 마음을 쓰거나 잡념이 생기는 일이 없기 때문에 결국 공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역본으로 승천왕반야바라밀경(勝天王般若波羅蜜經)이 있다.
제7회는 700송인데 만수실리분(曼殊室利分)이라 한다. 그 분량은 제574권부터 제575권까지이다. 만수실리는 문수사리의 다른 이름이다. 어떻게 해야 여래를 ?수 있는지를 묻는 부처님의 질문에 문수 보살은 여래란 깨달은 마음, 진여(眞如)라고 대답하였다. 이 진여는 본래 차별이 없는 공이므로 모습을 그릴 수도 없으며 말로 표현할 수도 없다. 다만 명상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고 하면서 삼매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역본으로 문수사리소설마하반야바라밀경(文殊師利所說摩訶般若波羅蜜經)과 문수사리소설반야바라밀경(文殊師利所說般若波羅蜜經)이 있다.
제8회는 나가실리분(那伽室利分)이라 한다. 그 분량은 제576권이다. 문수 보살이 걸식을 소재로 삼아서 반야 사상을 천명하는 경전이다. 먼저 나가실리 보살이 문수 보살에게 "당신이 걸식하러 가는 것을 보니 아직도 먹는 생각을 끊어 버리지 못한 것이 아닌가?" 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이에 대해 문수 보살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 본성이 공하여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만일 먹는 생각을 끊어 버렸다고 하거나 끊어 버리지 못하였다고 한다면, 그것은 벌써 이 세상에 끊어 버릴 수 있는 것이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이역본으로 불설유수보살무상청정분위경(佛說濡首菩薩無上淸淨分衛經)이 있다.
제9회는 능단금강분(能斷金剛分)이라 한다. 그 분량은 제577권, 한 권이다. 적은 분량의 경전이지만 반야부 경전 중에서 가장 널리 읽혔으며, 불교 사상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이역본으로 구마라집 보리류지 진제 등이 번역한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현장이 번역한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 의정이 번역한 불설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佛說能斷金剛般若波羅蜜多經) 등이 있다.
제10회는 150송이며 반야이취분(般若理趣分)이라 한다. 그 분량은 제578권의 한 권이다. 이 경전에서 부처님은 금강수 보살을 대상으로하여 반야의 이치를 설하고 있는데, 특히 신비한 주문을 설하면서 이 주문이 모든 부처의 어머니라고 하였다. 이 경전은 반야부 경전이지만 그 속에 밀교적인 요소를 강하게 담고 있음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역본으로 실상반야바라밀경(實相般若波羅蜜經), 금강정유가이취반야경(金剛頂瑜伽理趣般若經) 등이 있다.
제11회부터 제15회까지는 1,800송이고, 제16는 2,100송이다. 이 6회에서는 차례로 6바라밀을 설하는데, 보시 지계 반야 바라밀을 설하는 부분이 특히 자세하다. 궁극적으로 공에 입각하여 6바라밀을 실천하여야 한다는 것이며, 그럴 때 비로소 하나하나의 바라밀이 모두 깨달음으로 회향된다는 것이다.
반야 사상은 아함경의 연기설을 계승 발전한 것으로서 대승 불교의 시작을 이룰 뿐만 아니라, 이후 모든 대승 불교 교리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기본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대반야바라밀다경 600권은 바로 그 같은 반야 사상을 모두 집대성한 최대의 경전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그렇지만, 그 핵심은 이 대부(大部)의 반야경 안에 포함되지 않은 반야심경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반야심경에서 상세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6바라밀의 실천, 삼매에 대한 강조, 반야 바라밀의 밀교적 해석 등이 추가되어 있다는 정도의 차이만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27. 문수사리소설마하반야바라밀경
(文殊師利所說摩訶般若波羅蜜經)
2권. K-10(5-943). T-232(8-726). 양(梁) 시대(A.D. 302) 번역. [역] 만다라선(曼陀羅仙). [범] Sapta atik -praj p ramit . [약] 문수반야바라밀경(文殊般若波羅蜜經), 문수사리반야바라밀경(文殊師利般若波羅蜜經), 문수사리설반야바라밀경(文殊師利說般若波羅蜜經), 문수설마하반야경(文殊說摩訶般若經). [이] 대반야바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의 제7회 만수실리분(曼殊室利分), 문수사리소설반야바라밀경(文殊師利所說般若波羅蜜經).
상권은 반야 바라밀에 대해서 설한다. 모든 법에는 본래 상이 없다. 부처도 부처로서의 결정성(決定性)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관불(觀佛)이 강조된다.
"관불이라는 것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며, 오는 것도 아니고 가는 것도 아니며, 이름도 아니고 모습도 아님을 부처라고 이름한다. 마치 스스로 몸의 실상을 관찰하는 것처럼, 부처를 관찰하는 것 역시 그렇다. 오직 지혜있는 자만이 알 수 있으므로, 이를 관불이라 이름한다."
중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중생이라고 해서 중생상(衆生相)이 따로이 있다고 보지 않으며, 한량없는 중생을 열반에 들게 하였더라도 중생계는 늘어나는 것도 아니며 줄어드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이렇게 결정성이 있다고 보지 않는 무상이 반야 바라밀이므로 두 가지 상이 없는 것이다. 상반되는 것으로 보이는 언어와 보리 역시 둘이 아니라 한다. 언어도 공(空)하고 보리도 공하여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리와 5역(逆) 또한 둘이 아니다. 보리도 공하고 5역도 공하여 두 가지 상이 없기 때문이다.
하권은 일행(一行) 삼매를 설한다. 삼매에 들어가는 데에도 실로 마음에 상(相)이 없이 들어가야 한다고 하여, 무상(無相)이 삼매의 기초가 됨을 분명히 하였다. 그것은 마치 활쏘기와 같은 것이다. 활쏘기를 오래 익혀서 잘 쏘게 되면, 비록 아무런 생각이 없더라도 이미 오래 익혔기 때문에 화살은 모두 과녁에 명중시킬 수 있다.
"처음에 불사의(不思議) 삼매를 익히는 데에도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붙들어 매서 오래 익히면 성취되어서 다시 마음에 아무런 생각이 없이 항상 정(定)을 갖추는 것과 같다."
여기서 불사의 삼매는 곧 일행 삼매를 말한다. "일행 삼매는 법계가 하나의 상인 것이니, 법계를 대상으로 해서 마음을 붙들어 매는 것이 일행 삼매이다." 이 같은 정의는 마음으로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심일경성(心一境性)을 일행 삼매로 정의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그런데 일행 삼매는 염불 삼매와 관련되고 있어서 주목된다.
"선남자 선여인이 일행 삼매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공한처(空閑處)에 머물러서 산란한 생각을 모두 버리고 모습을 취하지 않으며 마음을 한 부처에게 붙들어 매고 오롯이 그 이름을 외우며, 부처님 처소에 따라서 몸을 바로 하여 정면으로 향하여야 한다. 능히 한 부처를 매 생각마다 상속(相續)하여 생각한다면 곧 한 생각 중에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를 보게 되리라."
일행 삼매라고 하는 하나의 구체적 수행법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다른 반야부의 경전과는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일행 삼매는 중국의 선 불교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도신(道信)과 홍인(弘忍)을 거쳐서 북종선(北宗禪)의 신수에게 전해졌으니, 신수는 일행 삼매를 소의(所依)의 수행법으로 삼았던 것이다.
28. 대반야경 (大般若經)
대반야경은 大般若波羅蜜多經(Mah -prajn p ramit -s tra) 600권으로서 당의 현장이 660년 정월부터 663년 10월에 걸쳐 번역한 것이다. 이 경은 대정신수대장경 5권에서 8권에 걸쳐 실려 있고 글자 총수는 약 5백만자에 이른다. 반야부에 속하는 경전이 전체 경장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중에서도 그 중 4분의 3이 이 대반야경이므로, 이 경전의 그 사상적 내용에 있어서나 막대한 양에 있어서나 실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경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경전은 반야부의 여러 경전을 집대성한 것으로서 반야부의 일대총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경 전체를 현장이 번역한 것은 아니고, 현장代(602∼664)까지 번역된 반야부의 경들과 현장이 번역한 경들을 총체적으로 수록한 것이다.
중국에서 반야부의 경전이 구전되어 온 과정을 살펴보면, 근본 경전으로부터 대소의 2부로 분류할 수 있는 것들이 중국에 구전으로 전해져와서, 이미 3세기경에는 2부의 존재와 그 실증이 시도되었다. 이어 4-5세기에는 4종설이 전래되고 그에 대한 논증이 시도되었으며, 6-7세기에는 8부설이 전해져 그에 대한 실증이 논해졌다. 그러다가 7세기의 현장에 의한 16회 대반야경이 실현됨으로써 반야부의 경전은 완경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경전의 구성은 600권 4處 16會 275分으로 구분되는데, 4處란 이 경전이 설해진 네 장소를 말한다. 즉 1. 왕사성 취봉산 기사굴산(1∼6회, 16회), 2. 사위성 급고독원(7-9회, 11∼14회), 3. 타화자재천왕궁(10회), 4. 왕사성 죽림정사(16회).
16회 600권은 내용상 크게 2부로 나눌 수 있는데, 1회부터 5회까지는 증광된 것들로서 6회 이하의 경정들과는 명료하게 다르다. 여기서‘會’라고 하는 것은 별개의 부분을 말하는 것으로서, 다시 말해 16개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회별로 그 송을 보면 장단의 차이가 많아서 예컨대 제1회는 600권 중에서 400권이나 되고, 제8회와 제9회 등으로 단 1권으로 되어 있다, 또 내용과 형식에서도 회별로 차이가 많다.
대반야경 16회의 구성 상황과 명칭, 권수, 별역본 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괄호안이 별역본이다.
제1회(1∼400권) : 10만송반야.
제2회(401∼478권) : 2만8천송반야(대품반야), 방광반야바라밀경(20권, 무라차 역), 광찬반야바라밀경(10권, 축법호 역), 마하반야바라밀경(대품반야 27권, 나집 역).
제3회(479∼537권) : 1만8천송반야.
제4,5회(538∼565권) : 8천송반야(소품반야), 도행반야바라밀경(10권, 지루가참 역), 대명도경(6권, 지겸 역), 마하반야초경(5권, 축불염 역), 마하반야바라밀경(10권, 나집역)(소품반야), 불모출생삼장반야바라밀다경(25권 시호 역), 불모보덕반야바라밀경(3권, 법현 역), 성팔천송반야밀다일백명 진실원의 다라니경(1권, 시호 역).
제6회(566∼573권) : 승천왕반야, 승천왕반야바라밀경97권, 월파수나 역)
제7회(574∼575권) : 7백송반야(만주실리분), 문수사리소설마하반야바라밀경(2권, 만타라선 역), 문수사리소설반야바라밀경(1권, 승가바라 역).
제8회(576권) : 5백송반야(나가실리분), 유수보살무상청정분위경(2권, 상공 역).
제9회(577권) : 금강반야(능단금강분), 금강반야바라밀경(1권, 나집 역), 금강반야바라밀경(1권, 보리유지 역), 금강반야바라밀경(1권, 달마급다 역),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1권, 의정 역)
제10회(578권) : 1백 50송반야(반야취리분), 실상반야바라밀경(1권, 보리유지 역), 금강정유가이취반야경(1권, 금강지 역), 변조반야바라밀경(1권, 시호 역), 최상근본금강불공삼매대교왕경(7권, 법현 역).
제11회(579∼583) : 보시바라밀다분
제12회(584∼588) : 정계바라밀다분
제13회(589) : 안일바라밀다분
제14회(590) : 정진바라밀다분
제15회(591∼592) : 정려바라밀다분
제16회(593∼600) : 반야바라밀다분
이와 같은 구성상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반야경 안에는 여러 가지 별역본들이 현장이 이 경을 번역하기 약 400년 전부터 제11회에서 제16회의 7회는 현장 이전에 그와 유사한 내용의 이본이 전역된 일이 없는 새로운 것이다.
이 경도 다른 반야부 경전과 같이 공(空)사상을 천명하고 있으며, 육바라밀 중 특히 반야바라밀을 강조하고 있다. 반야(智慧)는 불모(佛母)이며 육바라밀의 원천이어서 일체의 불법이 반야로부터 유출되었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성취함으로써 육바라밀을 성취할 수 있으며, 육바라밀을 성취함으로써 일체지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은 600권이나 되는 방대한 경전이어서 같은 반야계 경전인 대품반야경이나 소품반야경 또는 금강반야경과 이 경을 요약한 반야심경 등에 비해서 많이 읽히거나 연구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10에서 말했듯이 이 경은 '진국(鎭國)의 전(典), 인천의 대보'로 여겨 천재, 병란, 질병, 기근 등의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이 경을 고승들에게 독송시키거나 강설하게 하고, 서사(書寫) 유포시키고 받들어 공양함으로써 그 어려움을 없앨 수 있다고 믿어 종파와 관계없이 전독(轉讀)되었다. 이 경의 제398권을 보면 '송지(誦持)하는자, 전독하는 자, 사유하는 자, 여실히 행하는 자는 모든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얻을 것이다'라고 하여 이 경의 공덕을 설한 부분이 잇다. 이 경을 송지전독하고 경에서 설한대로 행함으로써 일체의 고액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액을 면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볼 때는 제재초복(除災招福)이요 국가적으로 볼 때는 진호국가(鎭護國家)인 것이다.
이 경은 이러한 점에서 신앙적으로 존중되어 왔다. 고려 고종 때 몽고군이 침입하여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하였을 때, 몽고군의 격퇴를 불전에 기원하여 온 국민이 혼연일치하여 조조(雕造)한 고려대장경의 경우 그 첫머리에 이 대반야경을 배열한 것은 바로 그러한 데에 연유가 있는 것이다.
29. 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 (大乘理趣六波羅蜜多經)
10권. K-1381(37-325). T-261(8-865). 당(唐) 시대(A.D. 788) 번역. [역] 반야(般若). [약] 육바라밀경(六波羅蜜經), 이취육바라밀다경(理趣六波羅蜜多經). [별] 육도경(六度經), 이취육도경(理趣六度經).
대승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실천 덕목은 바로 6바라밀다이다. 대승 보살이 닦아야 할 여섯 가지 바라밀다를 상세히 설명하고 이를 실천하여 궁극적인 지혜를 터득하여 깨달음에 이를 것을 강조한다. 전체 내용은 모두 10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1품에서 제4품까지는 일반적인 서술로서 대승 반야에 대해서 말한 뒤, 제6품에서 제10품까지는 6바라밀 각각에 대해서 한 품씩 나누어서 세세하게 분석하여 설명하고 있다.
제1 귀의삼보품(歸依三寶品)에서는 먼저 설법의 배경과 동기를 말한다. 부처님이 왕사성의 죽림 정사에 머물 때, 자씨(慈氏) 보살이 부처님에게 설법을 청하였다. 그러자 부처님은 여러 비구들에게 불보(佛寶)와 법보(法寶), 승보(僧寶) 등 3보에 귀의해야 한다는 말로 대설법의 문을 연다. 여기서 불보는 불신(佛身)과 불덕(佛德)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법보와 승보는 각각 세 가지로 분석하여, 그 각각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3보야말로 중생들이 번뇌의 고통을 떨치고 안락을 얻게 되는 길잡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제2 다라니호지국계품(陀羅尼護持國界品)에서는 여러 보살 마하살과 4천왕 및 여러 천신들에게 6바라밀다를 설명하고 다라니를 호지하고 서원을 세우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 또한 6바라밀의 다라니를 호지하는 공덕에 비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서, 6바라밀은 모든 부처를 낳은 어머니이며 모든 부처가 의지하는 보배라고 한다.
제3 발보리심품(發菩提心品)에서는 아직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내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 마음을 내게 하는 다섯 가지의 뛰어난 마음에 대해서 말한다. 즉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대하는 자비심과 깨달음과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결코 물러나지 않겠다는 불퇴전의 마음 등이 그것이다. 이미 발심한 사람에게는 세 가지의 뛰어난 마음으로 대승의 보살 수행에 정진할 것을 당부한다.
제4 불퇴전품(不退轉品)에서도 부처님은 자씨 보살의 질문에 대해서 답하는 형식으로 설법한다. 이 품에서는 제3품에서 말한 내용에 대해서 보다 더 상세하고 광범위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보살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자비심을 가지고 용맹 정진하되 결코 물러서는 일이 없는 확고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제5 보시바라밀다품(布施波羅蜜多品)에서는 진정한 보시란 무엇인가를 말해 준다. 보시에는 재물 보시와 법 보시, 두 가지가 있지만 법 보시가 훨씬 뛰어난 것이라 한다. 또한 소시(小施), 대시(大施), 제일의시(第一義施)를 구분하여 설명하고 참되고 원만한 보시가 어떤 것인지 제시하고 있다.
제6 정계바라밀다품(淨戒波羅蜜多品)에서는 흔히 지계(持戒) 바라밀다라고 하는 수행법에 대해서 설명한다. 정계 바라밀다를 수행하는 데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간탐(?貪), 진에(瞋喪), 염욕(染欲) 등이다. 이 3대 장애를 멀리 떠나고 열 가지 정계 바라밀다를 실천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10종 정계란 몸에 대한 세 가지 정계와 말에 대한 세 가지 정계, 뜻에 대한 세 가지 정계를 말한다. 살생과 도둑질, 음행, 헛된 말, 탐욕, 성냄, 어리석음 등 열 가지를 범하지 않고 10선(善)을 이룬다면, 또한 그 각각의 선행에 대한 과보를 네 가지씩 얻을 것이라 한다. 그 밖에 보살이 지켜야 할 금계(禁戒)로서 65가지를 제시한다.
제7 안인바라밀다품(安忍波羅蜜多品)에서는 흔히 인욕(忍辱) 바라밀다라고 하는 수행법을 말한다. 안인 바라밀다에는 32가지가 있다. 즉 무탐(無貪), 불해(不害), 무진(無瞋), 무한(無恨) 등 어떠한 곤경과 고통마저도 참고 견디어 내는 것이 곧 보살이 닦아야 할 안인 바라밀다이다. 부처님은 만약 자신의 원수가 칼로써 자기 수족을 잘라 내어도 반항하지 않고 견디어 내는 것이 보살의 인욕이라 하면서, 그 까닭은 세상 모든 것이 공(空)한 것이기 때문이라 한다. 그 밖에도 12처인(處忍), 8정인(正忍), 8사인(邪忍) 등을 설명한 뒤, 구경인(究竟忍)을 얻어서 궁극적인 깨달음에 이르도록 가르치고 있다.
제8 정진바라밀다품(精進波羅蜜多品)에서는 신(身) 구(口) 의(意), 3업 중에서 의업이 가장 뛰어난 것임을 밝힌다. 의업은 정진(精進)과 퇴전(退轉), 둘로 나눌 수 있는데, 정진 바라밀다를 수행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과보로서 10종 승사(勝事)를 열거하고 있다. 6바라밀다 중 정진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바라밀다는 모두 정진의 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제9 정려바라밀다품(靜慮波羅蜜多品)에서는 정려, 즉 선정 수행에 대해서 말한다. 16가지의 정려를 설명한 뒤에 성문, 연각의 정려와 달리 보살의 명상은 오직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한 목적을 갖는다고 말한다. 또한 정려 바라밀다를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되는 다섯 가지 번뇌에 대해서 설명하고, 4무량심(無量心)을 비롯하여 월등 삼매의 뜻을 말한다.
제10 반야바라밀다품(般若波羅蜜多品)에서는 앞서 말한 다섯 가지의 바라밀다를 닦기 위한 근본이 되는 것이 반야 바라밀다임을 설명한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들은 바로 이 반야 바라밀다에 의지하여 깨달음을 얻은 것이라고 하며, 반야 바라밀다를 닦지 않고서 깨달음이나 해탈을 성취할 수 없다고 한다. 그 밖에 반야 바라밀다를 수행하는 데 장애가 되는 열 가지 및 7무진(無盡), 8선교법(善巧法) 등을 설명한다.
이와 같이 대승 반야 사상을 6바라밀다의 수행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와 더불어 밀교적 수행법도 함께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이 경은 밀교부로 분류되기도 한다.

제 6 강좌 방등 경전
        30. 대집경
        31. 대보적경
        32. 대방등여래장경
        33. 유마경
        34. 승만경
        35. 원각경
        36. 능엄경
30. 대집경 (大集經)
<대집경>은 <대방등대집경>의 준말로 전체 17품 6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방등이라 함은 대승경전을 통칭하는 말이요, 대집이라 함은 많이 모았다는 말로서 곧 대승의 교리를 많이 모았다는 뜻이다. 중국 수나라 때 승취(僧就)가 편찬한 경으로 제1품에서 제11품까지의 26권과 제13품의 3권은 북량의 담무참(曇無讖)이 번역했다. 제12품 4권은 송나라 때 지엄(智儼)과 보운(寶雲)의 공동번역(427년)으로 <무진의보살경>이라는 별행본으로 전해오고 있다. 제14품 12권, 제15품 11권, 제16품 2권은 나련제야사 의 번역(566년)으로 각기 <대승대방등대집일장경> <대승대방등대집월장경> <대승수미장경>으로 독립되어 있다. 제17품 2권도 후한의 안세고(安世高)가 번역한 것으로 <불설명도오십교계명>이라는 별행본으로 독립되어 있다. 경전의 전반부를 살펴보면 부처님이 욕계와 색계의 중간에 도량을 열어 시방의 불보살들을 모아 놓고 대승의 법을 설하고 있는 것으로 일관성이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후반부부터는 공(空)사상에 덧붙인 밀교적 요소가 주요내용으로 되어 있어서, 이 경 전체로서는 일관성이 없어 보인다. 이는 여러 사람이 번역한 것을 모아 편찬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 경전의 권1 끝부분을 보게 되면 '대집경 제1권 교정 후서'라는 글이 실려 있다. 이 글은 고려본을 편찬할 때 적은 것으로서 여러 목록과 대조하여 여러 가지 이동이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또한 '고려조 분황종에서 성행한 경'이라는 사실도 밝히고 있는데, 원효대사와 분황사와의 깊은 관련성으로 보아 분황종이라 함은 원효대사의 후학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경은 원효대사가 저술 속에서 자주 인용한 <허공장보살경>이 이 경전(제8품) 속에 포함되어 있어 그 중요성을 반증해 주고 있다. <대집경>은 여러 가지 경전을 많이 모았다는 뜻 외에도 많은 무리가 모여서 법문을 함께 들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일명 '큰 보배의 덩어리'(大寶聚)라는 표현을 쓰고 있기도 하다.
대방등대집경(大方等大集經)
60권. K-56(7-1). T-397(13-1). 북량(北?) 시대(A.D. 414∼426) 번역. [역] 담무참(曇無讖), 나련제야사(那連提耶舍) 외. [범] Mah vaipulyamah sa nip ta-s tra. [약] 대집경(大集經).
대승 불교의 반야 공(空) 사상에 따라 법상(法相), 법수(法數), 법보(法寶) 등을 비롯하여 대승 보살이 닦아야 할 불도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본 경의 전반부는 담무참이 번역하였고 후반부는 수(隋) 시대 때 나련제야사(那連提耶舍), 법호(法護) 등이 번역하였다. 본래 30권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나 후대에 다시 30권을 추가하여 총 60권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전체 내용은 총 17개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11개 품과 6개 분(分)이 혼합되어 있다.
서품(序品) 즉 영락품(瓔珞品)에는 부처님이 성도한 지 16년째에 이르렀을 때라는 배경 설명이 나온다. 보살은 마치 영락으로 몸을 치장하듯이 불도를 닦는 바탕을 갖추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제2 다라니자재왕보살품(陀羅尼自在王菩薩品)에서 부처님은 4종 영락 장엄법, 8광명(光明), 16대비(大悲), 32선업(善業) 등을 설명한다.
제3 보녀품(寶女品)에서는 보녀의 인연을 비롯하여 10역(力), 4무외(無畏), 18불공법(不共法) 등을 설명한다.
제4 불현보살품(不 菩薩品)에서는 불현 보살에게 부처님이 모든 법에서 자유 자재로운 삼매를 비롯하여 갖가지 대승 교리에 대해서 설명한다.
제5 해혜보살품(海慧菩薩品)에서는 보살은 굳은 믿음을 토대로 수행을 쌓아서 마침내 부처가 되는 수기를 받게 된다고 한다.
제6 무언보살품(無言菩薩品)에서는 왕사성의 무언 보살에 대한 인연 이야기를 통해서 참된 믿음이란 어떠한 것인지 보여 주고 있다.
제7 불가설보살품(不可說菩薩品)에서는 불가설 보살이 부처님에게 질문하자 그에 대한 답변으로서 공(空)의 이치를 비롯한 대승 불법을 설명하고 있다.
제8 허공장보살품(虛空藏菩薩品)에서는 허공장 보살의 질문을 받고, 부처님이 허공장 보살의 전생 인연을 비롯한 여러 대승 불법을 설명해 주며, 모든 불법의 근본이 대승법임을 밝힌다.
제9 보당분(寶幢分)에서는 불도 수행을 방해하는 악마를 굴복시키기 위한 진언에 대해서 설명한다.
제10 허공목분(虛空目分)에서는 불법의 핵심인 공(空)의 이치에 대해서 설명하고, 중생을 구제하여 불법으로 이끄는 실천 문제를 언급한다.
제11 보계보살품(寶 菩薩品)에서는 보계 보살의 질문에 따라 부처님이 6바라밀을 비롯하여 보살의 여러 가지 수행 방법에 대해서 설명한다.
제12 무진의보살품(無盡意菩薩品)에서는 6바라밀, 4무량심, 6통(通) 4섭(攝), 4의(依) 등을 설명한다.
제13 일밀분(日蜜分)에서는 번뇌를 낳는 원천이 되는 애욕에서 벗어나 불도를 수행하는 것에 대해서 설명한다. 또한 4방의 모든 보살들이 모여서 정법을 수호하고자 서원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제14 일장분(日藏分)에서는 번뇌의 근본인 애욕을 벗어나기 위한 방도와 악업을 없애는 다라니의 공능(功能) 및 용왕과 마왕 파순 등이 불법에 귀의한 인연 등을 말한다.
제15 월장분(月藏分)에서는 여러 악귀들이 불법에 조복되어 귀의하게 되는 인연과 탑사(塔寺) 건립의 공덕 등을 설명한다.
제16 수미장분(須彌藏分)에서는 보살들이 닦아야 하는 선정 수행과 다라니의 공덕이 매우 크다는 것을 말한다.
제17 시방보살품(十方菩薩品)에서는 시방의 모든 보살들에게 불법을 수행하는 방도와 108번뇌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한다. 아울러 온갖 고통의 뿌리가 되는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 끊임없이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31. 대보적경 (大寶積經)
120권. 당(唐) 시대(A.D. 706∼713) 번역. [역] 보리류지(菩提流志). [범] Mah ratnak a-s tra. [약] 보적경(寶積經).
대승 불교의 심묘(深妙)한 법보를 담고 있는 여러 경들을 한데 묶어 놓은 경이다. 전체 49회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회마다 별도의 경들로서 각각 독립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대승의 법보(法寶)를 담고 있는 여러 경들을 한데 모아서 편찬하였기 때문에 각각에 담긴 사상적 배경도 매우 다양하다. 예컨대 제5회의 경우에는 정토(淨土) 사상을, 제46회의 경우에는 반야(般若) 사상을, 제2, 3, 7, 11, 24회의 경우에는 밀교(密敎) 사상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총 49회로 이루어져 있는 본문은 매 회마다 독립적인 경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총 49개의 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 품수는 대략 77품에 이른다. 또한 각각의 회마다 별도의 이역본들이 다양하게 성립되어 있다. 보리류지가 본 경을 편찬할 때 이미 축법호를 비롯한 여러 고승들이 번역해 놓은 23종의 경은 그대로 포함시켰으며, 번역본이 있었으나 다시 번역한 경이 15종이며, 처음 번역한 것이 11종이었다고 전한다.
제1 삼율의회(三律儀會)의 이역본으로서는 북량(北?) 때 담무참(曇無讖)이 번역한 대방광삼계경(大放廣三戒經)이 있다. 본 회에서는 신(身), 구(口), 의(意), 세 가지에 따른 계율을 주제로 한다. 비구와 보살들은 마땅히 계율을 지킴으로써 위없는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제2 무변장엄회(無邊莊嚴會)에서는 갖가지 다라니(陀羅尼)와 부처님의 이름을 외우는 공덕에 대해서 말한다.
제3 밀적금강역사회(密迹金剛力士會)의 이역본에는 북송(北宋) 때 법호(法護)가 번역한 여래불사의비밀대승경(如來不思議秘密大乘經)이 있다. 본 회에서는 밀적 금강 역사가 불보살의 뛰어남을 설명한다. 그 밖에 밀적 금강 역사의 전생 인연을 비롯하여 석가모니 부처님의 고행 이야기 및 밀적 금강 역사가 수기받는 이야기 등이 들어 있다.
제4 정거천자회(淨居天子會)에서는 정거천(淨居天)의 천신이 등장하여 부처님에게 보살의 여러 수행 단계를 묻고 그에 대해서 부처님이 설법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제5 무량수여래회(無量壽如來會)의 이역본으로서 불설무량청정평등각경(佛說無量淸淨平等覺經), 불설무량수경(佛說無量壽經), 불설아미타삼야삼불살루불단과도인도경(佛說阿彌陀三耶三佛薩樓佛檀過度人道經), 불설대승무량수장엄경(佛說大乘無量壽莊嚴經), 불설대아미타경(佛說大阿彌陀經) 등이 있다. 본 회의 내용은 일명 아미타불이라 하는 무량수 여래의 성불 인연과 무량수 여래의 세계를 상세히 설명한다. 특히 무량수 여래의 이름을 외우면 서방 극락 세계에 태어날 수 있다는 아미타 신앙의 근거가 되는 부분이다.
제6 부동여래회(不動如來會)의 이역본으로서 후한 때 지루가참(支婁迦讖)이 번역한 아촉불국경(阿 佛國經)이 있다. 본 회에서는 동쪽에 있는 극락 세계인 묘희 세계의 부동 여래가 오랜 수행 끝에 부처가 된 인연을 말한다.
제7 피갑장엄회(被甲莊嚴會)에서는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고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굳세고 견고한 마음에 대해서 설명한다.
제8 법계체성무분별회(法界體性無分別會)에서는 세상 모든 것의 본래 체성(體性)은 분별할 수 없는 공(空)에 불과한 것임을 말한다.
제9 대승십법회(大乘十法會)의 이역본으로서 양(梁) 시대 때 승가바라(僧伽婆羅)가 번역한 대승십법경(大乘十法經)이 있다. 여기서는 대승 보살이 닦아야 할 열 가지 법을 설명한다.
제10 문수사리보문회(文殊師利普門會)의 이역본으로서 서진(西晋) 시대 때 축법호가 번역한 보문품경(普門品經)이 있다. 문수사리 보살이 등장하여 부처님에게 깨달음에 대해서 묻자 부처님은 선정 삼매를 통해서 공의 이치를 터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제11 출현광명회(出現光明會)에서는 부처님이 월광 보살에게 온 세상을 밝게 비추는 지혜를 갖게 된 연유와 그 지혜의 힘이 얼마나 큰지 설명하고 있다.
제12 보살장회(菩薩藏會)에서는 6바라밀을 중심으로 하여 대승 보살이 수행해야 할 불도에 대해서 설명한다.
제13 불위아난설처태회(佛爲阿難說處胎會)의 이역본으로서 서진(西晋) 시대 때 축법호가 번역한 불설포태경(佛說胞胎經)이 있다. 본 회에서는 부처님이 아난에게 수태 과정부터 태아의 성장, 출생 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제14 불설입태장회(佛說入胎藏會)에서는 부처님이 여자의 수태에 대해서 설명한다. 특히 이 설교를 통해서 난다를 교화시킨 인연 이야기도 함께 들어 있다.
제15 문수사리수기회(文殊師利授記會)의 이역본으로서 서진(西晋) 때 축법호가 번역한 문수사리불토엄정경과 당(唐) 시대 때 불공(不空)이 번역한 대성문수사리보살불찰공덕장엄경이 있다. 본 회는 문수사리가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게 된 인연 이야기이다.
제16 보살견실회(菩薩見實會)의 이역본으로서 북량(北?) 때 일칭(日稱) 등이 번역한 부자합집경(父子合集經) 등이 있다. 본 회에서는 대승 보살들이 불법의 참된 이치를 깨닫고 마침내 부처가 되는 수기를 받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
제17 부루나회(富樓那會)에서는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설법 제일로 불렸던 부루나의 인연 이야기를 중심으로 보살이 닦아야 할 수행 지침을 설명한다.
제18 호국보살회(護國菩薩會)의 이역본으로서 북송(北宋) 때 시호(施護)가 번역한 불설호국장자소문대승경이 있다. 여기서는 호국 보살을 주인공으로 하여 불법을 깨닫고 수행에 힘써 불도를 완성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제19 욱가장자회(郁伽長者會)의 이역본으로서 후한(後漢) 때 안현(安玄)이 번역한 법경경(法鏡經)과 서진(西晋) 시대 때 축법호가 번역한 욱가라월문보살행경이 있다. 여기서는 재가 보살과 출가 수행자들이 지켜야 할 계율과 행법들을 설명한다.
제20 무진복장회(無盡伏藏會)에서는 세상 모든 법의 무차별상(無差別相)에 대해서 설명하고 보살은 중생들이 온갖 번뇌를 떨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말한다.
제21 수환사발다라기회(授幻師跋陀羅記會)의 이역본으로서 서진(西晋) 시대 때 축법호가 번역한 불설환사인현경이 있다. 발다라라는 환술사(幻術士)가 부처님의 교화를 통해서 마침내 수기를 받게 되었다는 인연 이야기이다.
제22 대신변회(大神變會)에서는 부처님의 뛰어난 신통력과 보살의 능력을 설명하고 누구든지 공의 이치를 터득하여 깨달음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제23 마하가섭회(摩詞迦葉會)에서는 부처님이 입멸한 뒤에 보살이 어떻게 불도를 닦아야 하는지 설명한다.
제24 우파리회(優波離會)의 이역본으로서 동진(東晋) 시대 때 번역된 불설결정비니경과 당(唐) 시대 때 불공(不空)이 번역한 불설삼십오불명예참문이 있다. 여기서는 보살이 계율을 어기는 이유와 죄를 참회하는 방법, 대승 계율의 특징 등을 설명한다.
제25 발승지요회(發勝志樂會)의 이역본으로서 수(隋) 시대 때 사나굴다가 번역한 발각정심경이 있다. 깨달음을 이루고자 하는 바른 뜻을 세우고 불도를 닦는 보살은 마침내 극락 세계에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제26 선비보살회(善臂菩薩會)에서는 보살이 갖추어야 할 6바라밀의 수행에 대해서 말한다.
제27 선순보살회(善順菩薩會)의 이역본으로서 위(魏) 시대 때 백연(白延)이 번역한 불설수뢰경(佛說須賴經)과 전량(前?) 시대 때 지시륜(支施崙)이 번역한 불설수뢰경이 있다. 선순 보살의 설법으로 듣고 파사닉왕(波斯匿王)이 마침내 불법에 귀의하게 된 인연을 말한다.
제28 근수장자회(勤授長者會)의 結ず뼈막關?서진(西晋) 시대 때 백법조(白法祖)가 번역한 불설보살수행경(佛說菩薩修行經)과 북송(北宋) 때 시호(施護) 등이 번역한 불설무외수소문대승경(佛說無畏授所問大乘經)이 있다. 부유한 장자의 신분으로도 탐욕심을 버리고 불도를 잘 닦는다면 깨달음을 얻어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제29 우다연왕회(優陀延王會)의 이역본으로서 서진(西晋) 시대 때 법거(法炬)가 번역한 불설우전왕경(佛說優塡王經)과 북송(北宋) 때 법천(法天)이 번역한 불설대승일자왕소문경(佛說大乘日子王所問經)이 있다. 우다연왕과 그의 두 부인의 일화를 통해서 색욕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제30 묘혜동녀회(妙慧童女會)의 이역본으로서 서진(西晋) 시대 때 축법호가 번역한 불설수마제보살경(K-39), 후진(後秦) 때 구마라집이 번역한 불설수마제보살경(T-335), 당(唐) 시대 때 보리류지가 번역한 수마제경(K-36) 등이 있다. 본 회에서는 어린 묘혜 동녀를 주인공으로 하여 불도 수행에는 남녀 노소가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제31 항하상우바이회(恒河上優婆夷會)에서는 부처님과 여자 신도 사이의 문답을 통해서 대승 불법을 설하고 있다.
제32 무외덕보살회(無畏德菩薩會)의 이역본으로서 서진(西晋) 시대 때 축법호가 번역한 불설아사세왕녀아술달보살경이 있다. 본 회에서는 대승과 소승을 대비하여 대승 불교의 우월함을 강조하고 있다.
제33 무구시보살응변회(無垢施菩薩應辯會)의 이역본으로서 서진(西晋) 시대 때 축법호가 번역한 불설이구시녀경과 동위(東魏) 시대 때 반야류지가 번역한 득무구녀경이 있다. 무구시 보살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여러 가지 대승 불법에 대해서 문답한다.
제34 공덕보화부보살회(功德寶華敷菩薩會)의 이역본으로서 보리류지가 번역한 문수사리소설불사의불경계경이 있다. 공덕보화부 보살과 부처님 사이의 문답을 통해서 부처의 이름을 외우고 지니는 공덕이 얼마나 큰지 설명한다.
제35 선덕천자회(善德天子會)에서는 부처님이 깨달음의 경지란 일체 차별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깨달음을 성취한 불보살의 능력을 말하고 있다.
제36 선주의천자회(善住意天子會)의 이역본으로서 서진(西晋) 시대 때 축법호가 번역한 불설여환삼매경과 북위(北魏) 시대 때 비목지선(毘目智仙) 등이 번역한 성선주의천자소문경(聖善住意天子所問經)이 있다. 선주의 천자와 문수 보살의 문답을 통해서 대승 불법을 수행하는 보살의 위신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 말하고 있다.
제37 아사세왕자회(阿 世王子會)의 이역본으로서 서진(西晋) 시대 때 축법호가 번역한 불설태자쇄호경과 서진(西晋) 시대 때 번역된 불설태자화휴경이 있다. 부처님이 아사세왕의 왕자에게 불도를 닦으면 현세와 내세에 좋은 과보를 받게 된다는 것을 요지로 하여 보살 수행에 대해서 설명한다.
제38 대승방편회(大乘方便會)의 이역본으로서 서진(西晋) 시대 때 축법호가 번역한 혜상보살문대선권경과 북송(北宋) 때 시호(施護)가 번역한 불설대방광선교방편경이 있다. 대승 보살이 갖가지 방편으로써 중생들을 불법으로 이끄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제39 현호장자회(賢護長者會)의 이역본으로서 당(唐) 시대 때 지바가라(地婆訶羅)가 번역한 대승현식경이 있다. 현호 장자와 부처님 사이의 문답을 통해서 중생의 식(識)에 대해 설명한다. 이것은 원래 사나굴다가 번역한 이식경(移識經)을 현호장자회로서 대보적경에 편입한 것이다.
제40 정신동녀회(淨信童女會)에서는 여자의 몸으로 닦아야 할 불도에 대해서 설명한다.
제41 미륵보살문팔법회(彌勒菩薩問八法會)의 이역본으로서 후한(後漢) 시대 때 안세고가 번역한 불설대승방등요혜경(K-50)이 있다. 미륵 보살이 부처님에게 깨달음을 얻는 방도를 묻자, 부처님은 보살이 닦아야 할 여덟 가지 법과 그 공덕을 설명해 주고 있다. 보살의 8법이란 깊은 믿음과 아낌없이 베푸는 마음, 자비로운 마음 등이다.
제42 미륵보살소문회(彌勒菩薩所問會)의 이역본으로서 서진(西晋) 시대 때 축법호가 번역한 미륵보살소문본원경(K-51)이 있다. 보살이 닦아야 할 열 가지 불도를 설명한다. 예컨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서원을 세울 것, 마음의 동요가 없을 것, 모든 것을 분별하지 말 것, 계율을 지킬 것 등이다.
제43 보명보살회(普明菩薩會)의 이역본으로서 진(晋) 시대 때 번역된 불설마하연보엄경이 있다. 부처님이 가섭과 보명 보살에게 설법한 내용으로서 보살이 닦아야 할 행법(行法)이 주제이다.
제44 보량취회(寶梁聚會)에서는 비구들이 지켜야 할 계율 등 수행도에 대해서 말한다.
제45 무진혜보살회(無盡慧菩薩會)의 이역본으로서 북송(北宋) 시대 때 시호(施護)가 번역한 대가섭문대보적정법경(大迦葉問大寶積正法經)이 있다. 부처님과 무진혜 보살 사이의 문답을 통해서 깨달음을 이루는 마음과 그 마음을 지니기 위해서 닦아야 할 불도에 대해서 말한다.
제46 문수사리설반야회(文殊師利說般若會)의 이역본으로서 양(梁) 시대의 만다라선(曼陀羅仙)이 번역한 문수사리소설마하반야바라밀경, 같은 시대의 승가바라(僧伽婆羅)가 번역한 문수사리소설반야바라밀경, 당(唐) 시대의 현장(玄 )이 번역한 대반야경 제7 만수실리분이 있다. 보살이 닦아야 할 반야 바라밀에 대해서 설명한다.
제47 보계보살회(寶 菩薩會)의 이역본으로 북량(北?) 시대 때 담무참이 번역한 대방등대집경보계보살품이 있다. 부처님이 보계 보살의 청을 받고 나서 보살이 닦아야 할 네 가지 수행법 및 37도품 등에 대해서 설명한다.
제48 승만부인회(勝 夫人會)의 이역본으로서 유송(劉宋) 시대 때 구나발다라(求那跋陀羅)가 번역한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이 있다. 승만 부인이 대승 불교에 대해서 설명하는 가운데 오로지 1승 법인 대승만이 참된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한다.
제49 광박선인회(廣博仙人會)의 이역본으로서 북위(北魏) 시대 때 반야류지가 번역한 비야사문경이 있다. 브라만교를 따르던 광박 선인을 비롯하여 여러 브라만들이 불법에 귀의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상과 같이 전체 49회 가운데 열거되는 품은 총 77개 품에 이르지만 실제로 품이 나오는 경은 제2 무변장엄회를 비롯한 8개 회에 국한된다. 그 나머지 회에 나오는 경들은 품의 구별이 없는 경들이다. 총 49개의 경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에서 거듭 강조하고 있는 대승 보살이 닦아야 할 여러 가지 수행법을 통해서 대승의 불법을 터득하여 깨달음을 얻고 마침내 부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2. 대방등여래장경
<개요와 구성>
대승불교의 목적을 중생구제에 있다고 본다면, 그러한 목적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사상은 여래장사상일 것이다. 여래장 사상은 모든 중생들이 깨달을 가능성과 근기를 지니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래장 계열의 경전들은 대승 초기경전들인 반야, 법화, 화엄계열의 경전들에 이어 중기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방등여래장경>은 대승 중기 경전에 속하는 경전으로서 여래장 사상을 설한 경전이다.산스크리트이름은 <아리야 타타가타 가르바 나마 마하야나 수트라(Arya tatha-gata garbha nama mahayana sutra)>이다.
한문으로 번역된 것은 東晋의 불타발타라가 서기 420년에 번역한 <대방등여래장경>과 唐의 不空이 번역한 <大方廣如來藏經>의 두가지가 있다. 현재 한문본은 신수대정대장경 제 16권 4백57쪽~4백60쪽에 있다.
한글대장경에는 제65권 3백82쪽~3백95쪽에 있다.한문 번역은 원래는 네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한다. 첫번째의 번역은 西晋의 法炬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법거의 번역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법거의 생존연대가 서기290-312이므로 3세기 초에는 이미 <여래장경>이 성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여래장계열의 경전들 가운데 최초로 이루어진 경전은 <대방등여래장경>이다. <여래장경>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중생이 여래장을 지니고 있음을 설한 경전이다. 如來藏의 산스크리트어는 [타타가타 가르바(tathagata garbha)]이다. [타타가타(tathagata)]는 여래를 의미하고, [가르바(garbha)]는 태아나 모태를 의미한다.
즉 여래장은 여래가 될 씨앗을 의미한다. 이것은 아뢰야식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지만 <여래장경>에서는 아직 그러한 연관관계가 나타나 있지는 않다. 여래장계의 경전에서는 중생의 번뇌속에 있으면서도 더럽혀지는 일이 없는 여래장이 있음을 설하고 있다. 경전의형식은 설법한 내용 다음에는 반드시 게송의 형식으로 비슷한 내용을 반복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내용도 단순하여 여래장이 있음을 강조할 뿐 아뢰야식과의 관계를 설한다거나 여래장과 아뢰야식을 함께 설하는 내용도 아직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보면, <여래장경>은 여래장계 경전가운데 최초로 성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경전에서 주장하는[일체의 중생이 갖추고 있는 여래장은 상주불변 한다]라는 내용은 <急般經>에서 주장하는 [일체중생은 모두 불성을 갖추고 있다]는 가르침과 같은 것이다. <여래장경>에서는 여래장에 대해 아홉가지의 비유를 들어 설하고 있다. 대단히 짧은경전으로서 대부분의 경의 내용은 이 아홉가지 비유를 설명하고 있다.
<여래장경>에 설해진 아홉가지의 비유는 후에 <究境一乘寶性論>에 계승되어 여래장 사상의 체계화가 이루어지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 아홉가지 비유를 통하여 <여래장경>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홉가지 비유에 대해서는 <보성론>에서 <여래장경>의 게송을 인용하여, 여래장의 청정성과 아홉가지 번뇌와 연결시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여래장경>에서는 아홉가지 비유의 내용을 살펴보고, 아홉가지 번뇌와 관련된 내용은 <보성론>에 의하여 살펴보도록 하겠다.
<보성론>에서는 무량번뇌소전품 대정신수대장경 제31권.8백37쪽 윗단, 8백40쪽 아랫단에 설명되어 있다.
<여래장의 9가지 비유>
<여래장경>의 처음 부분에서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지 십년째 되던 해에, 왕사성의 기사굴산에서 무수한 보살들에게 여래장경을 설하셨음이 기록되어 있다. 이어서 아홉가지 비유를 통해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의심을 풀어 주기 위하여, 여래장경을 설하고 있음이 드러나 있다.
1. 시든 연꽃 가운데 앉아 있는 부처님
시든 연꽃 가운데 앉아 있는 부처님의 비유에서는 중생과 여래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설하고 있다.<여래장경>에 있는 [연꽃 가운데 앉아 있는 부처님의 비유]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남자야, 부처님께서 만든 연꽃이 시들고 무수한 부처님께서 그 연꽃 안에 머물고 있으며, 상호는 장엄하고 결가부좌한 채로 커다란 광명을 내는 희귀한 일을 대중이 보고 공경하지 않을수 없음과 같다.
이와 같이 선남자여, 내가 부처의 눈으로 일체 중생을 보니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등의 여러 번뇌 가운데 여래의 지혜와 여래의 눈과 여래의 몸이 있어, 결가부좌한 채 움직이지 않는다. 일체의 중생이 여러 세계의 번뇌 가운데 있어도 여래장이 있어 항상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덕스러운 相을 갖추고 있음이 나(부처님)와 다르지 않다.
위에서 살펴본 비유는 중생이 여래장임을 설하고 있다. 그 근거로서 모든 중생의 여래장은 항상 변하지 않는 것임을 제시하고 있다. 즉 여래와 중생은 다르지 않으며, 단지 번뇌에 덮혀 있어도 중생이 지니고 있는 여래장은 흔들리지 않으며, 이것이 중생의 본래 모습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내용은 여래의 눈으로 본 것이다. 여래의 눈으로 보지 않아도 중생이 본래 여래임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선남자야, 부처가 세상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일체 중생의 여래장은 항상 머물러 있으면서 변하지 않는다. 단지 중생은 번뇌에 덮혀 있기 때문에 여래가 세상에 나와 자세히 설하고있는 것이다. 이것은 번뇌를 없애고 일체지를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시든연꽃 가운데 앉아 있는 부처님]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나머지 여덟 가지의 비유도 중생은 갖가지 번뇌로 덮혀 있어도 여래장을 지니고 있으며, 번뇌를 제거하면 본래의 모습인 여래가 드러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2. 꿀벌 무리 가운데 감추어져 있는 꿀
좋은 꿀이 벼랑의 나무에 매달려 있고 그 주위를 무수한 꿀벌들이 지키고 있다. 지혜로운 사람이 방편으로써 먼저 그 벌을 물리치고, 뜻에 따라 꿀을 먹고, 그 혜택을 모든 사람에게 베푼다. 이상이 [꿀벌 무리 가운데 감추어져 있는 꿀]의 비유이다.
여기서는 번뇌(꿀벌의 무리)를 제거하고, 여래장(좋은 꿀)을 드러내는 목적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꿀을먹되 뜻에 따라 먹어야 하며(여래장을 드러내며), 그 먹은 목적은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임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게송에서는 [대자비로써 중생을 제도한다]고 보다 명확하게 목적을 설하고 있다.
3. 단단한 껍질 속에 감추어져 있는 열매
맵쌀의 껍질과 겨를 아직 벗기지 않았을 때는, 가난하고 어리석은 자는 가볍게 여기고 천하게 생각하여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탈곡을 하면 항상 유용하게 쓰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래의 무량한 知見을 번뇌 (맵쌀의 껍질과 겨)가 덮고 있다는 비유이다. 게송에서는 이 비유에 대해 중생은 부처의 여래성과 같아, 개화하여 청정하게 하면 즉시 무상도를 이룬다고 설명하고 있다.
4, 더러운 곳에 떨어져 감추어져 있는 순금
순금이 더러운 곳에 떨어져 오물에 덮여있어도 세월이 지나도 순금은 파괴되지 않는데도 아무도 아는 자가 없는 것과 같다. 그 때 지혜의 눈을 가진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순금이 있음을 알려 주어 순금을 갖게 한다. 여기서 더러운 곳은 무량한 번뇌이고, 순금은 여래장이며, 지혜의 눈을 가진 자는 여래를 뜻한다. 부처님이 순금이 있음을 알려주는 목적도, 모든 중생이 바른 깨달음을 이루고, 부처님이 중생구제를 하는 것과 같이 베풀게 하기 위한 것이다.
5. 가난한 집에 있는 보물
가난한 집에 보물이 있어도, 보물은 자기가 있다고 말하지 못한다. 보물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말을 해주는 자가 없으면, 중생은 보물창고를 개발하지 못한다. 이와 같이 중생은 여래의 知見과 두려울 것 없는 힘과 큰 법의 보물창고가 몸안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 때문에 五欲에 빠져들고, 윤회를 끊지 못하여 무량한 고통을 받는다. 중생(가난한 집)의 몸 안에 여래장(보물창고)가 있음을 알려 주어 큰 부자가 되게 하고(깨달음을 얻게 함) 중생을 널리 이롭게 하기 위하여 경을 설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6. 암라나무 열매(망고와 비슷한 과일)안에 들어 있는 씨앗
암라나무열매 안에 들어 있는 씨앗은 부서지지 않아, 땅에 심으면 커다란 나무가 된다. 이와 같이 무명번뇌(열매)에 덮여 있는 여래장(씨앗)은 부서지지 않는다.
7. 누더기에 싸여 있는 순금의 상
어떤 사람이 순금상을 가지고 다른 나라에 여행을 가는데, 험한 길을 가다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여 누더기로 포장을 하여 가지고 갔다. 이 사람이 여행 도중에 갑자기 죽게되어 순금상은 들판에 버려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순금상이 누더기에 쌓여 있어 더럽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지혜의 눈을 지닌 자는 누더기 순금상이 있는 것을 알고 꺼내어 예를 올린다.
이와 같이 중생이 번뇌(누더기)에 쌓여 있어도 그 안에 여래장(순금상)이 있어 여래와 다르지 않다. 중생이 비록 번뇌에 쌓여 생사의모든 괴로움을 받지만, 중생이 지니고 있는 여래의 성품(여래장)은 번뇌에 부서지지 않는다.
8. 비천한 여인이 임신한 존귀한 왕의 아들
가난하고 천한여인이 귀한 아들을 잉태했는데,마땅히 성스러운 왕으로서 천하의 왕임에도, 알지못한채 세월을 보내어 스스로를 항상 열등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중생은 모두 그 몸에 여래장이 있지만, 가난하고 천한 여인과 같이 알지 못한다. 중생은 비록 번뇌에 덮여 있다해도, 여래장을 지니고 있어 존귀한 몸이므로 스스로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 이 때문에 부처님은 중생이 지닌 여래장은 모든 중생을 구제할 광명이고, 정진하여 가장 높은 바른깨달음을 얻어 무량한 중생을 제도하게 하기 위하여 설하는 것이다.
9. 진흙에 묻힌 황금의 상
대장장이가 순금의 상을 다 만드는데 어리석은 자는 겉의틀이 검다하여 땅에 함부로 놓아 둔다. 대장장이는 비록 겉이 검은 틀로 쌓여 있다해도 틀이 식은 후에 그 틀을 열고 순금상을 꺼낸다. 안에 들어 있던 순금상은 더러운 것(번뇌)이 제거되면 그 상호(相好)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와 같이 번뇌의 진흙에 덮여 있는 중생도 여래장을 지니고 있으므로 금강의 지혜로써 번뇌의 틀을 깨트리고 여래장을 드러내어야 함을 설하고 있다.
위의 아홉가지 비유는 번뇌에 덮혀 있는 중생의 여래장을 비유한 것이다.
시든 연꽃, 꿀벌의 무리, 단단한 껍질, 더러운 오물, 가난한 집, 암라나무 열매, 누더기, 비천한 여인, 진흙틀의 아홉가지는 번뇌를 상징하고 있다.
또한 부처님, 꿀, 열매, 순금, 보물, 씨앗, 순금상, 잉태된 왕의 아들, 황금상의 아홉가지는 번뇌에 덮여 있는 중생들이 지니고 있는 여래장을 의미하고있다. <보성론>에서는 위의 아홉가지 비유에 연결시켜 아홉가지 번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신수대정대장경 제31권, 8백31쪽 윗단)
1, 연꽃이 처음 필 때는 보기 좋아도 시들어 질 때는, 보기에 좋지 않다. 탐욕의 번뇌도 처음에는즐거운 듯 하지만 나중에는 즐겁지 않다.
2, 벌의 무리들은 꿀을 만들기 위하여 성내는 마음으로 꽃을 문다. 성내는 마음이 일어날 때는 많은 고통과 번뇌가 생긴다. 중생의 성내는 번뇌를 설명한 것이다.
3, 벼는 안에 곡식을 지니고 있지만 밖은 단단한 껍질과 겨로 덮여 있다. 이와 같이 중생은 어리석음의 번뇌로 인하여 안에 여래장이 있음을 보지 못한다.
4, 더러운 오물과 같이 지혜를 보는 탐내는 마음도 이와 같고, 욕심이 일어날 때 번뇌에 묶여있는 것은 마치 더러운 오물과 같다. 이것은 중생이 일으키는 탐욕의 번뇌의 참 모습을 설명한 것이다.
5, 중생은 땅속에 있는 진귀한 보물을 보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자재로운 지혜가 무명번뇌로 덮여 있어도 중생은 지혜의 눈이 없어 보지 못한다.
6, 과일의 씨앗은 나중에 싹을 틔운다. 이와 같이 견도(見道)에서 끊어지는 번뇌는 다음의 수행계위를 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번뇌의 연기법을 설명한 것이다.
7, 보살의 제7지에 있는 모든 번뇌는 마치 태아와 같다. 이것은 일곱번째의 비유로 번뇌를 끊고, 무분별의 지혜로 들어가야 하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8, 보살의 7, 8, 9지는 진흙틀의 진흙과 같이 아직은 번뇌를 지니고 있다. 대지혜를 지닌 모든 보살은 금강의 지혜로써 번뇌를 끊는다. 이것은 대보살의 경지를 비유로써 설명한 것이다.
9, 연꽃에서 진흙틀에 이르는 아홉가지 비유는 탐냄, 성냄, 어리석음의 아홉가지 번뇌를 보여주고 있다는 의미이다.
<여래장의 의미>
위에서 말한대로 <여래장경>에는 여래장사상이 체계적으로 정립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아홉가지 비유를 통하여, 모든 중생이 여래장을 지니고 있으며, 여래장을 드러내어 중생구제를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을 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래장경>은 이미 여래장 사상의 근원을 제시하고 있으며, 뼈대를 갖춘 것으로 생각된다.여래장은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씨앗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다.
때문에 여래장은 한문번역의 佛種姓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種姓의 산스크리트어는 고트라(gotra)이다. 고트라는 인도사상에서는 원래 선천적인 능력을 의미한다.
부파 특히 有部에서는 聲聞, 獨覺,菩薩의 종성으로 전개된다. 이것은 인도의 계급제도인 四姓이 태어나자 계급이 나누어지는 것과 같이, 三乘의 깨달음의 경지는 각기 달라진다는 의미로사용되었다. <화엄경>에서는 보살을 여래의 가문에 태어난 자라고 규정하고, 그 임무는 부처의 계통을 보존하고 단절시키지 않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법화경>에서는 삼계의 중생이 모두 부처님이 자식이라고 하며 一乘을 설하고 있다. 결국 고트라의 개념이 여래장사상과 결합하여, 여래의 가문을 이루는 중생의 세계로 확대되었다. 모든 중생은 여래장을 가지고 있으므로, 차별이 없어, 깨달음을 이룰 수 없다는 一闡堤도 여래장사상에서는 깨달음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래장이 중생이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種姓이므로, 이것은 여래의 胎와 밀접한 관계가 있게 된다. 태의 가르바(garbha)는고트라(gotra)와 매우 유사한 개념이다. 가르바는 本性의 의미이다.여래장은<반야경><화엄경><법화경><유마경>에서 그 의미가 확장되고 중생계와 연결되지만, 여래장계열의 경전에 오면 여래장의 의미가 정착된다. 특히<여래장경>에서 처음 보이는 여래장사상은 <보성론>에 이르러 체계적으로 정립된다.
여래장의 세가지 뜻은
1)중생이 여래에 含藏되어 있고,
2)중생이 여래를 갖추고 있으며,
3)중생은 여래의 공덕을 모두 내어 보일 수 있다는 의미이다.
33. 유 마 경
<經名에 대하여>
유마경의 산스크릿트 원어는 비말라끼르티.니르데샤.수트라(Vimalakirtinirdesha su-tra)이다. 비말라(Vimala)는 사람이름이다. 뜻으로보면 [맑다] [깨끗하다]는 의미를 가진다. 끼르티는 [-라고 부른다]는 의미이고, 니르데샤는 "물음을 주고 받는다는"뜻이다. 그래서 우리말로 直譯하면 "비말라라고 부르는 이와의 문답을 주고 받은 부처님 말씀"이 된다.
고래로 비말라를 音譯하면 維摩라고 썼으나 간혹 昆摩羅라고도 쓴 적이 있다. 신라때의 華嚴十刹 가운데 하나로 열거된 원주 비마라사가 대표적 실례이다. <유마경> <유마힐경> <유마힐소설경>등이 거의 같은 뜻이고, 아주 간혹 <不思談經>.<無垢釋經>이라고도 한다. 또 古典속에는 <淨名經>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말한대로 [깨끗하다]는 의미를 살린 번역태도이다.
<경전의 성립배경>
불교문헌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유마경>은 초기대승경전 가운데서도 상당히 일찍 성립된 것이리라 믿어진다. 般若사상을 표방하지만, 中觀學派에서와 같은 난삽한 변증법이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점, 在家불교의 위상을 드높인다는 점, 그리고 자유분방한 사상성이 뛰어나다는 점등에서 그와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유마경>의 무대는 바이샤알리(Vaisha-li)이다.
경전의 주인공 유마거사는 바이샤알리의 호부로 묘사된다. 한역으로는 [長者]인데 이들은 최근연구에 따르면 신흥귀족그룹이라는 것이다.
전통적 캐스트제도 하에서 막대한 부를 향유한 신흥재산가 그룹이다. 불교경전에 이 장자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기원정사를 희사한 수닷타도 장자며, 유마거사도 장자이다.
인도에서 카스트제도가 확립되는 것은 기원전 7, 8세기의 일이다. 아리얀(Aryan)이 정복자로서의 군림을 정당화시킨 사회적 제도이다. 그러나 부처님이 활약하시던 기원전 6, 7세기경에는 캐스트제도가 급격히 몰락한다. 도시국가들이 생겨나고, 상업경제가 발달하면서 전통적 질서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사상적 혼란기에 등장하는 것이 六師外道등의 도덕적 퇴폐주의자들 이다. 막강한 부를 향유하는 신흥 長者그룹들이 사회의 지도층 인사로서 부각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누(Manu) 法典에도 [돈은 캐스트이다]라는 선언이 언급될 정도였다. 대승불교가 성공할 수 있었던 많은 요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장자그룹의 歸依를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초기불교 이래, 불교가 어쩔 수 없이 귀족적 모습을 띄우게 되는 한계점까지도 포함해서 말이다. 바이샤알리는 부처님 당시에도 융성한 경제를 자랑하던 나라였다. 유명한 기생 암라파알리(Amrapa-li)의 고향이며, 쟈이니즘(Jainism)의 교조 마하비라(Mahavira)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유마경>이 이곳을 무대로 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즉 경제적 번영과 도덕적 퇴폐는 반드시 자유로운 사상을 잉태한다. 새로운 가치질서를 요청하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형식주의. 권위주의는 몰락할 수밖에 없다.
자유분방한 사회풍조는 재가불교의 발달을 부추기고 있었다. 유마거사는 이와 같은 시대분위기 속에서 태어난 위대한 사상가였다. 그는 생활속의 불교, 타락한 현실 속에서 불법을 이루려는 願行의 모델인 셈이다.
<구성과 내용>
漢譯本으로는 支謙의 번역 2권, 鳩摩羅什의 번역 3권, 玄奬 번역6권등이 있다. 큰 차이는 없으나, 그 가운데서 羅什의 번역이 가장 널리 읽히고 있다.<유마경>은 문학적 성격이 강하지만 특히 희곡적 소재를 간직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구성을 가진다. 1)불국품~ 3)제자품까지는 서론부분이다.
유마거사의 위대함과 십대제자들의 형식성이 극명한 콘트라스트를 이룬다. 제자들은 유마거사의 와병 소식을 듣지만, 선뜻 문병에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두 유마거사에게 망신을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4)보살품과 5)문질품에서는 문수사리 보살이 등장한다. 유마거사의 對論者로서는 오직 지혜제일 문수사리뿐이라고 부처님은 판단하신다. 6)불사의품~ 9)入不二法門品에서는 문병을 간 보살들이 스스로의 경지를 토로하는 부분이다.
주로 不二사상이 근간을 이루면서 空. 般若등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이 돋보인다. 향적불품은 外界人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특이한 장면이다.
우주의 별세계 가운데 이상적 나라를 설정하고, 그 나라 사람들과 지구인과의 대화를 담고있다.
우리는 여기서 불전 편찬자들의 무한한 상상력을 엿본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나드는 신선한 思考의 전형을 만날수 있다. 향적이라는 나라는 고통과 슬픔이 없는 곳이다. 사바세계의 중생들은 그곳을 동경한다. 그러나 유마거사는 이 슬픔이 곧 진실한 열반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보살행품~>촉누품 까지는 마무리부분이다. 미륵보살에게 이 경전의 중요성을 부촉하시는 내용이다. 이렇게 보면 <유마경>은 5막6장쯤 되는 희곡시나리오를 연상시킨다. 때로는 희화적이고 엄숙하지만, 군데군데 극적인 反轉의 妙를 살린 뛰어난 구성이다.
心淨卽佛土淨<유마경>의 중심사상은 반야이다. 사물의 實相을 판별하는 절대적 인식이 없으면, 양면성을 통찰할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플라톤의 절대악을 연상하게 된다. 그는 <윤리학>에서 절대악을 논구 하였다. 과연 이 세상에 절대악이 존재하는가? 일반적으로 남을 때린다거나, 목숨을 빼앗는 행위는 악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전쟁터에서는 남을 죽이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많이 죽여야만 예찬을 받는다. 따라서 죽임의 행위자체를 절대악으로 치부할 수 없다. 그는 고민끝에 절대악을 [선의 결핍]이라고 규정하고 만다. 그러나 유마거사는 보다 명쾌하게 결론을 내린다. 목건련이 죄지은 비구를 교화하는 장면에서 그 잘못됨을 통렬히 지적한다.
목건련은 참회를 요구하지만 그 참회에는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죄를 지은 비구의 罪性은 어디 있는가 몸 안에 있을까. 아니 이미 뉘우쳤기 때문에 몸 안에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몸밖에 있을까. 그렇지도 않다.
죄와 罪性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몸 안과 밖의 중간에 있는 것일까? 이는 궤변에 불과하다. 따라서 罪와 罪性은 어디에도 있지 아니하다. 다만 그것이 있다고 고집하게 됨으로써 우리는 罪를 논하고 있을 따름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空性의 體得이다. 즉 분석적으로 이해하는 행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대상을 분석하고 사유하여 그 空을 입증하기는 쉽다. 그러나 대상 자체를 보고 空을 느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것을 우리는 直觀이라고 말한다.
흔히 서양사상의 특징을 분석적인데서 찾는데 반해, 불교사상의 직관성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불교적 직관은 바로 空性을 파악하는 절대적 인식이 될 수 있다. 이 不二사상은 현실긍정의 낙관론으로 이어진다. 부정해야 할 대상을 없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불교사상의 참신성과 미래성을 발견할 수 있다. 二分法의 태도로서는 현실적 고난을 영원히 극복할 수 없다. 그곳에는 언제나 제국주의적 정복의지만이 있을 따름이다. 서양사상의 한계는 이 二分法的 발상에 있다.
요즈음의 자연보호라는 개념도 二分法의 연장선상에 있다. 불교사상의 입장에서 보면, 보호하는 이와 받는 이라는 대립의식이 있을 수 없다. 인간의 삶자체가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의 순환질서 자체가 삶의 원리이다. 구태여 보호한다는 발상 자체가 이미 不二를 벗어난 편견이라고 말할 수 있다.
평화라는 서구적 개념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결코 전쟁의 반대개념이 아니다. 공존의 질서는 서로의 존재가치를 인정할 때 이루어질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평화는 [조화] [선린]의 의미를 지닌다. 대립의 양자가 본질적으로 [하나]일수 있다는 인식의 공감대를 형성해야만 한다.
불교적 不二論은 인류미래의 영원한 [진리]이다. <유마경>에서는 이 不二의 이상이 실천적으로 전개되어야만 함을 역설하고 있다. 이점이 또한 불교사상의 現前化라고 말할 수 있다. 재가불교의 位相을 높이려는 사상성과 함께 가장 주목할만한 실천적 의지라고 생각한다.
<禪宗과의 관련>
경전이 담고 있는 폭넓은 사상성과 참신성 때문에 옛부터 선종과는 깊은 관련을 맺어 왔다. 특히 馬祖道一의 문하였던 大珠慧海는 후학들의 지도지침으로 <유마경>을 자주 언급한바 있다. 그 외에도 황벽희운등 선사들의 語錄에는 자주 <유마경>에 대한 인용이 보인다.
이것은 선종이 지향하던 無碍의 근거가 이곳에서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선종의 궁극적 목표는 自性成佛이다. 自性을 확인하는 첫번째 작업은 不二이다. 나를 떠나 날 찾으려는 外向性 콤플렉스로서는 결코 自我를 확인할 수 없다. 그래서 六祖慧能 이래 [見性]은 선종의 핵심적 테마였다. 나를 확인하려면, 우선 객관적 인연의 함수관계를 이해해야한다.
나라는 주관은 이웃, 조국, 자연, 우주등과 횡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 나를 에워싼 모든 實在들은 결코 나와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그 본질에 있어서 하나일 뿐이라는 自覺이 선행해야 한다. 이때 비로소 小我的 自我는 우주적 자아로 비상할 수 있다. 그때의 실천적 행위를 우리는 同體大悲라고 말한다.
선종의 이와 같은 思考패턴은 <유마경>과 흡사한 점이 많다. 그래서 교종이라고 해서 다분히 무시될수 있었던 교전 가운데도 특히 중요한 전적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불교는 선교융합을 표방하였기 때문에 많은 論師들에 의하여 <유마경> 연구가 진행된바있다. 특히 원효스님이 <유마경종요> <유마경소>등을 저술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비록 모두 없어져 버렸지만, 그의 사상적 폭을 짐작하게 해주는 일이다. 해방이후 우리말로 출판된 <유마경>도 다수 있지만, 그 가운데서는 백봉 김기추의 <유마경강설>, 박경훈이 번역한 <유마경>등이 추천할만 하다.
"중생이 아프기 때문에 내가 아프다는" 유마거사의 독백속에는 二分法을 비웃는 날카로운 지성이 번득인다."부처님은 一音으로 연설하지만,중생은 만가지로 이해한다"는 가르침 속에는 중생의 허망한 인식을 꼬집는 참신성이 있다. 이 경전이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에 신라의 선조들은 현실의 아픔을 이기는 지혜를 실현하였다. 출가와 재가를 형식적으로 나누는 권위주의를 배격할수있었다. 적어도 동아시아 거사불교에 있어서 이 <유마경>은 나침판이자, 등불로서 존숭되어 왔던 것이다.
34. 승 만 경
<불교사에서의 위치>
불교에서는 초기부터사람들의 심성을 객진번뇌. 본성청정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까 수행을 하면 누구나를 가릴 것 없이 해탈하여 사바세계에서 벗어나 니르와아나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부파불교에서는 각 부파에 따라서 여러가지 학설이 제기되기는 하였지만 해탈사상은 모두 수용하였다. 다만 깨달음을 얻어도 아라한을 목표로 하는 성문사상에 머물렀다.
그들은 출가전문적이고 니르와아나에 안주하여 민중교화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에 반하여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기치를 들고 새로운 불교운동을 전개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서기전 1세기 경으로 추산되는 이들의 불교운동을 대승불교라고 부른다.
이때 최초의 대승경전인 반야경전군이 성립되었다. 여기서는 모든 존재에 실체가 없음을 지혜로써 직관하라는 공을 제창하면서, 부처가 재세하던 시대의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새로운 물결이었다.
이어서<법화경>이 성립되어 일불승사상을 제창한다. 이경은 모든 중생이 구제의 대상임을 선언한다. 대승만이 구제의 대상이 되고 소승들은 그럴 수 없다면, 이것은 부처의 자비와 평등의 가르침에서 벗어난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비유와 방편을 제시하여 남녀. 노소. 인종. 계급. 소승. 대승의 구별이 없이 중생은 한결 같이 부처의 품에 들어 행복하고 평화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또 같은 무렵의 <화엄경>에서는 "마음. 부처. 중생, 이 셋은 아무런 차별이 없다"라고 하는 삼계유심사상을 선양한다.
이는 우리들의 삶에 적극적이며 희망적인 비젼을 제시하여 주려는 것이라고 본다. 이와 같은 반야.법화.화엄의 사상을 계승하면서 해탈에 관한 우리들의 자질. 성품의 문제를 논의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사람이 깨달음의 길을 걸으려면, 그들의깨달을 자격. 자질을 여러 각도에서 연구하여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 불교사적으로는 부처가 깨달음을 시현한 것을 근거로 하여, 우리 모든 중생에게 그와 동등한 자질. 가능근거가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이와 같은 것을 바탕으로 하여 새롭게 등장한 경전군들을 여래장 계통의 경전군이라고 말하고 싶다. 대승중기에 이루어진 이들 경전으로는 <대방등여래장경> . <부증불감경> . <스리이마알라아왕비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 등이 있다. 구나바드라 (394~468)가 436 년에 번역한 <스리이마알라아왕비사자후일승대방편방광경>은 산스크리트원본은 단편만 존재하며, 티벳 역본이 현존한다.
<무대설정의 배경>
이 경에서는 아요디야아국의 스리이마알라아왕비가 주인공으로 활약한다. 그녀는 그 당시 인디아에서 최대 강국 중의 하나인 코살라국의 쁘라세나짓트왕과 말리카왕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성품이 곱고 행복한 공주이다. 이 나라의 수도인 스라아와스티는 그 당시 인디아에서 가장 번성하던 도시의 하나이며, 불교 최대의 사원인 기원정사가 자리잡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부처는 이곳에서 여러차례에 걸쳐서 안거를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공주는 스라아와스티에서 남쪽으로 1백50km쯤 떨어져 자리잡고 있는아요 디야아국의 야쇼미트라왕에게로 시집을 가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이다. 이후 이 공주의 활동의 무대는 아요디야아로 된다. 거대한 가가라강을 등지고 있는 풍요로운 이 아요디야아는 힌두교들의 7대 영장중의 하나로 인디아에서는 유명한종교도시이다.불교에서는 샤아키야족이, 힌두교에서는 라마신이 태어난 곳이라고 하여 예로부터 순례자들이 끊이질 않는다.
1528년에는 무갈제국이 라마를모신 힌두사원을 헐어버리고 무슬림사원을 세우면서 종교분쟁의 터로 바뀐다. 이렇게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아요디야아를 무대로 설정한 배경을 현대에 사는 우리는 한번 음미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어느날 종교적 정서가 짙은 코살라의 왕비와 왕은 부처의 가르침을 온 누리에 널리 홍보하고 싶은 서원을 실현하려고, 여대신으로 하여금 그들의 공주인 스리이마알라아왕비에게 편지를 전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공주로 하여금 부처의 가르침을 신수봉행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과 평화를 실현하라는 것이다.
<Vimalakirti소설경>이 재가 청신사(upasaka)인 위말라아키이르티의 소설이라면, 이 경은 재가의청신녀(upasika)인 스리이마알라의 소설이다. 이는 재가신도들의 새 불교운동을 발단으로 해서 일어난 대승불교의 연장선상에서 일불승사상에근거한 청신사와청신녀의 평등성을 가르치려고 하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여남평등사상을 실현하려는 그 배경을 또 음미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일불승의 표방>
번뇌의 근원은 무명이다. 무명으로부터 두가지의 번뇌가 일어난다. 하나는 주지번뇌이며, 또 하나는 전번뇌이다. 전자는 잠재적인 상태의 번뇌라면, 후자는 이미 발현해버린 상태의 번뇌이다.
주지번뇌에는 또 네가지가 있으니,
(1)일방적인 편견 속에 존재하고 있는 잠재적인 번뇌인 견일처주지번뇌,
(2)범부의 세계인 욕망계에 특유하는 집착속에 존재하고 있는 잠재적인 번뇌인 욕애주지번뇌,
(3)육체를 소유하는 이의 세계에 특유하는 집착 속에 존재하고 있는 잠재적인 번뇌인 색애 주지번뇌,
(4)윤회의 생존에 공통으로 있는 집착 속에 존재하고 있는 잠재적인 번뇌인 유애주지번뇌이다.
그런데 이 네가지의 주지번뇌가 가지고 있는 힘은 모든 전번뇌의 기초가 되는 것이긴 하지만, 이것을 또 무명주지의 큰 힘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만큼 무명주지는 질기고 센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성문의 지혜로는 끊을수 없다. 다만 여래의 깨달음의 지혜를 빌려서만이 소멸시킬 수 있다. 이것은 대승이야말로 진실한 가르침이어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예를 들면 어떤 종류의 씨앗이나 초목.약초.삼림도 모두대지에 의존하며,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 발육하듯이, 성문이나 독각, 세간적인 것이나 출세간적인 선법의 모든 것은 대승에서 연원한다. 우리가 삼승을 말하기는 해도 그것은 방편이며 최종적으로는 불승이라고하는 유일한길에 귀착한다. 이 불승이라고하는 유일한 길, 즉 일승을 체득함에 의하여 비로소 무상의 완전한 깨달음을 얻는다.
<여래장설>
여래장이라는 용어는 <대방등여래장경>에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 경에서는 [아홉가지의 비유]를 들어 여래장이 부처의 가르침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상징적으로 제시하여 주고 있다.
tathagatagarbha를 분해하여보면,tatha는 [so taht, same, 그냥 그대로, 사실 그대로, 如]라는 뜻이며, 다음에는 gata로 볼 것이냐, agata로 볼 것이냐에 따라 뜻이 다르다. gata는 [gone, 가버렸다, 去], agata는 [come, 와 버렸다. 來]라는 뜻이다. 앞의 것을 따르면 如去, 뒤의 것을 따르면 如來이다. garbha는 [grasp, 꼭 움켜쥠]이 원래의 뜻이다. 여기서 의미를 확대시켜, [womb, 태, 자궁, 태아]라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tathagatagarbha는 [여래의 자궁]으로도 풀이되고, [자궁 속에 들어 있는 여래]로도 풀이되지만, 중국의 스님들은 [여래장]이라고 번역했다.
우리말로 [부처님의 마음자리]라고 옮기면 어떨까. 자궁의 기능은 무엇인가. 태아와 함께 생각되는 것이지 만일 태아를 빼놓고 생각하면 별로 의미가 없다. 그래서 자궁은 언제나 태아와 함께 취급할 때 그 기능이 가장 온전하게 드러난다.
그렇다면 [여래의 자궁]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여래의 씨알이 들어 있다.여래의 씨알은 무엇인가. 중생이다."인간은 모두가 철학자이다. 전문적인 철학자와 그렇지 않은 철학자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차이는 양적인 것이지 질적 차이는 아니다Antonio Gramsci"라고 말하는 것처럼 중생은 작은 부처일 뿐이다. [자궁 속에 들어있는 여래]로 봐도 뜻은 같다.
이 <스리이마알라아왕비사자후대방편방광경>에서는 여래장설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 여래장은 성스러운 진리의 의의를 해석할 경우의 기초이다. 그런데 여래장이라고 하는 기초가 아주 심원하므로 성스러운 진리의 의의도 또한 심원하며, 난지.난해하다. 이론의 영역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세간적 상식으로는 미칠 수 없고, 다만 총명한 지자만이 아는 바이다.
여래장은 생사윤회하는 경우의 의지처이다. 여기서 윤회란 우리들의 조금 전의 순간에 몸에 있는 모든 감관이 작용을 잃든 잃지 않든, 아직 감수하지 않는 모든 감관을 새로 몸에 받는 것을 말한다. 죽음과 삶을 나타내는 윤회라고 하는 이름은 여래장의 별명이다.
세간의 상식적인 말투인, 죽음이란 모든 감관의 기능이 정지함을, 삶이란 새로운 감관의 발생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래장은 죽음과 삶을 초월한다. 왜냐하면 여래장은 연기의 법칙에 근거한 생멸. 변화를 특질로하는 유위의 존재의 영역을 초월하여 상주. 견고. 적정. 영속적이다.
그러므로 여래장은 법신과는 본질적으로 결합한 불가분리의, 또 깨달음의 지혜와는 땔래야 땔 수 없는 바의 무위법에 있어서의 의지처이며 기반인 것이다. 동시에 법신과는 본질적으로 모순되고 그로부터 분리되며, 깨달음의 지혜와는 무관계한 유위법에 있어서도 또한 의지처이며 기반인 것이 여래장이다.
여래장이 만일중생의 내부에 없다면 사람이고 뇌를 싫어하고 니르와아나를 소망하여 동경하고 구하는 서원을 세우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6식과 심법지라고 하는, 이들 일곱가지는 순간적인 존재로써, 일순도 지속하지 못하고, 따라서 고뇌를 감수하는 일도 없으니까, 그것들이 고뇌를 싫어하고 니르와아나를 소망하여 동경하고 구하는 서원을 세우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여래장은 비롯함도 모르고 끝장도 없는 불생불멸의 것이니까 고뇌를 감수한다. 그러니까 여래장은 더더욱 고뇌를 싫어하고 니르와아나를 소망하여 동경하고 구하는 서원을 세우는 주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경에서는 여래장이 공성을 나타내는 데 있어서 두가지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첫째는 공여래장이다. 여래장에는 본디부터 법신과는 무관계이며, 깨달음의 지혜로부터 단절된 모든 번뇌의 장애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번뇌가 전혀 없다는 뜻에서 空이다. 둘째는 불공여래장이다. 번뇌는 허망하여 존재하지 않는데, 여래장은 법신과는 땔래야 땔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간지스강의 모래알보다도 더 많은 불가사의한 부처의 모든 덕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덕성을 고루 갖추고 있다는 뜻에서 不空이다.
<여인성불의 길>
부처의 자비와 평등의 정신에 바탕을 둔 구제의 문제를 생각한다면, 여.남의 구별은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정신이 잘 살려진 것이 <승만경>이다. 웨샤알리이를 무대로 해서 위말라이키이르티거사는 不二의 법문을 설파했다면, 아요디야아를 무대로 해서 스리이마알라아왕비는 중생을 평화의 세계로 인도해야 함을 역설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자궁 속에 들어있는 여래]인 이 왕비는 부처로부터 수기를 받고 큰 서원을 세운다. 그녀는 깨달음에 이를 때가지 서원을 굳게 지킬 것을 맹세한다. 그럼 열가지 서원이 오늘날 불교운동을 함에 있어서도 많은 것을 시사함으로 그 내용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기로 한다.
1)금후 나는 계율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은 마음을 결코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2)금후 나는 스승들에 대하여 불경스런 마음을 결코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3)금후 나는 어떤 경우에도 중생에 대하여 분노하거나 해를 끼치는 마음을 결코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4)금후 나는 타인의 행복이나 성공을 부러워하는 마음을 결코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5)금후 나는 아주 조금이라도 인색한 마음을 결코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6)금후 나는 자기자신의 향락을 위해 축재하지 않겠습니다.
7)금후 나는 보시. 애어. 이행. 동사의 사섭법에 의하여 중생들을 위하여 도움이 되기를 원합니다. 결코 자신을 위한 이익을 얻을 목적으로 중생들을 매혹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무잡념, 무권태, 불퇴전의 마음으로 중생들을 따뜻하게 포용하겠습니다.
8)금후 나는 의지할 곳 없는 사람, 포박당한 사람,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 고뇌하는 사람, 가난한 사람, 큰 재앙을 만난 사람들을 보면, 그들을 돕지 않고는 한발자욱이라도 버리고 지나쳐버리지 않겠습니다.
9)금후 나는 돼지고기나 새고기 등을 매매하는 죄를 지으면서 생활하며, 여래가 말씀하신 가르침이나 계율을 소홀히 하는 성질을 가진 사람을 보게되면, 결코 무관심하게 지나치지 않겠습니다.
어느 부락이나 마을, 도회지나 시골, 왕성의 안이나 밖에서 누구를 막론하고 나의 명령이 미치는 한 응징해야만 할 부류들을 절복하며, 구제해야만 할 부류들에 대하여는 이를 섭수합니다. 이것은 왜 그런가 하면 이 절복과 섭수에 의하여 이 세상에 정법을 영원히 존재케 하기 위함입니다. 정법이 영원히 존재한다면 신들이랑 인간들의 몸으로 태어나는 이는 중대하고 사후에 악도에 떨어지는 이는 감소할 것입니다.
10)금후 나는 정법을 몸에 익히는 것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마음을 결코 일으키지 않겠습니다. 왜냐 하면 만일 정법을 몸에 익히는 것을 잃어버리면 대승의 가르침을 잃어버립니다.
대승의 가르침을 잃어버리면 빠아라미타아(paramita)를 잃어버립니다. 빠라아미타아를 잃어버리면 대승을 구하지 못합니다. 만일 보디트와대사이면서 대승에 안주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정법을 몸에 지니려 하지 않고, 스스로 그릇된 길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들은 어리석은 범부들의 지위로 떨어지는 운명이 되고 말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죄악이라고 인정하고 대죄인으로 간주합니다.
정법을 몸에 익힘으로써 나도 또 미래의 보디트와들도 헤아릴 수 없는 복덕을 얻는다고 하는 목적을 성취할 것입니다. 이 열가지 내용을 통해서 대승불교의 참정신을 구현하기 위하여 우리자신이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출가와 재가를 막론하고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탐욕이 치성하고, 우리들의 삶의 질서가 흐트러짐으로 먼저 지계를 해야 한다.
그래서 첫째 원으로 계율을 세운 것으로 본다. 우리는 선지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다. 선지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무명의 세계에서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래서 둘째 원으로 스승에게 불경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사람이 분노심을 일으키면 극단적으로는 타인을 크게 해친다.
5계중에서도 불살생을 말하는 것은 남의 목숨을 나의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겨 더불어 함께 살라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셋째 원으로 불해를 세운 것이다. 사람의 행복이나 성공은 노력 끝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럴 때 축하하여 주거나 기뻐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신이 애써 노력하지는 않고 부러워하기만 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을 경계하기 위하여 넷째 원을 세운 것이다.
사람이 인색하면 헐벗고 굶주린 사람을 봐도 동정심이 없다. 나누어 가짐으로써 남을 불행으로부터 건져주려는 정신을 살리려고 다섯째 원을 세운 것이다. 사치와 향락은 사람을 타락으로 이끌기 쉽다. 그런데 재산을 모아 사치와 향락에 쓴다면 무슨 보람이 있겠는가. 우리는 주변에서 헐벗고 굶주린 사람을 많이 볼 수 있지 않는가.
그래서 여섯째 원을 세운 것이다. 재가자들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의 실천덕목이 사섭법이다. 이와같은 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혹세무민하거나 쓸데없는 생각을 버려야 함으로 일곱번째원을 세운 것이다. 이 세상에는 여러가지 일로 불안해하거나 고뇌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고서는 자리를 뜨지 않겠다는 것이 여덟번째 원이라고 본다. 인디아에서는 채식과 육식을 엄격하게 구별하여 淨.不淨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힌두들은 채식을 많이 하고 있다. 그들은 채식을 하는 것으로써 스스로를 청정하다고 규정하고, 육식을 하는 타종교인을 비난하였다.
이에 불교에서도 은연중 육식을 삼가하고 채식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새로운 불교운동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왕권을 빌려 응징이라도 하겠다는 절복과 또 적극적으로 구제의 대상을 찾아나서는 섭수를 표방한다.
이 아홉번째 원속에는 그 당시 타종교와의 관계에서의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정법을 따르는 것이 대승을 수호하는 것이다. 대승이야말로 지혜를 완성할 수 있다. 지혜를 완성하는 길만이 대승을 영원히 보전하는 길이며, 대승의 흔들림이 없을 때 중생을 모두 구제할 수 있다는 인류 구원관을 제시하는 것이 열번째 원이라고 본다.
왕비는 이 열가지 원을 요약. 정리하여 3대원으로 함축하고 있다.
1)이 진리에 걸은 서원으로써 중생에게 이익을 가져올 복덕을 쌓고, 이런 선근의 공덕으로 정법을 이해할 수 있기를 원하오며,
2)정법을 이해한 뒤에도 게으름을 피우거나 두려워하는 일 없이 중생에게 가르침을 펼 수 있기를 원하오며,
3)정법을 펼침에 있어서는 신명을 돌보지 않을 것이며, 재산을 바쳐서라도 호지하고, 몸에 익히기를 원하오이다.
<새로운 가치관의 설정>
우리 중생은 모두 애기부처임을 확인한 셈이다. 재가의 애기부처인 스리이마알라아 왕비가 무애자재한 모습으로 부처의 인가를 받아 정법을 수호하여 대승을 길이 보전할 대원을 세우고 있음을 본다.
이런 정신은 우리 역사 속에서도 면면히 숨을 쉰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신라시대에세명의 여왕이 있음을 안다. 이는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가 힘들다. 그들은 모두 정법에 따라서 왕위에 오른 것이다.
부처의 가르침인 정법이 아니고는 어떻게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크레오파트라의 음모와는 그 성질이 다르다. 재가의 청신녀가 부처의 수기를 받는다면, 재가의 청신사나 출가한 비구니.비구도 마찬가지이다. 부처의 자비와평등의 정신속에서는 4부대중은 동등한 형제자매일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비구니 종정이나 비구니 총무원장의 출현을 기대해 봄직도 하다.
35. 원각경(圓覺經) - 시공초월한 부처님의 깨달음의 묘사)
<이름에 대하여>
한문 글자의 뜻처럼 원만한 깨달음을 다룬 통칭 <원각경>의 온전히 갖춘 이름은 <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이다.원만한 깨달음을 수식하는[大方廣]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크고 올바르고 넓다]는 뜻으로 깨달음의 본체와 형상과 활용을 상징한다.
[修多羅]는 범어s-utra의 음역으로서 일반적으로 경전을 가리킨다.[了義]는 가르침의 표현정도가 대승궁극의 경지를 남김없이 완전하게 설명되었다는 뜻으로 상황의 필요에 따라 단편적으로 불완전하게 서술된 [不了義]에 대조시켜 이 경의 뛰어남을 강조하고자 덧붙인말이다.
따라서 <원각경>은 크고 올바르며 넓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가르치는 완전한 경전임을 이름으로 보이고<대방광 원각경>, <원각수다라 요의경>, <원각요의경>등으로 약칭되며 동아시아에서 널리 공부되어져 왔다.
<성립과 번역>
<원각경>은 중국당나라때 불타다라(覺救라 번역)가 한문으로 번역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梵本도 없고 역자에 대한 확실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오래전부터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일거라는 논의가 있어 왔다.
우선 경의 연기나 체제부터 대부분의 다른 경에서 전통적으로 보이고 있는 보편적구성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를테면, 경의첫머리에 의례적으로 나오는 바, 언제 누가 어디서 무엇을 누구에게 왜 어떻게 설했다는 상황 설명에 있어서, <원각경>이 보이는 바로는 설법장소로서 특정한 곳의 이름이 없이 다만 신통광명장에 드셔서 삼매속의 不二의 경지에서 나투신 淨土로 묘사되고 있다.
부처님이 함께하신 대중도 문수.보현 등 큰보살 10만명과 더불어 계신것으로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인도의 어느 나라 어느 지역 혹은 어느 도량에서 일천이백오십인의 상수대중과 함께 계셨다는 등의 다른 번역경전에서 보이는 통상적인 구성을 초월하고 있다는 점도 인도를 무시하고 그 당시 (7세기말) 중국에서 흥행한 대승교리의 독자적 재구성이 아닌가 하는 짐작을 낳게 한다.
특히 역자로 알려진 불타다라는 계빈국 사람으로만 알려져 있을 뿐, <원각경> 이외에는 다른 번역한 경이 없으며 다른 행적을 알려주는 어떤 전기도 없고, 역경의 정황을 알려주는 믿을만한 기록이 없을 뿐아니라, 몇몇 뒷사람들의 단편적인 언급들도 일정치 않으며 간혹 서로 어긋나 조작으로 보이기도 하는게 사실이다.
주요 내용에 있어서도 <능엄경>이나 <기신론>등과 비슷한 부분이 있어 그들에 바탕을 둔 후대의 찬술일 수도 있다는 추측도 가능하게 하는데, <능엄경>이나 <기신론> 자체가 중국찬술일 것이라는 학계의 연구를 감안하면 <원각경>도 僞經으로 볼 수 있겠다.
어떻든 이 경은 얼마뒤에 宗密(780-841)의 수많은 주석서(9종 60권)를 통하여 크게 선양되었고,宋의 眞宗황제(大方廣圓覺經御註 2권)등 明.淸에 이르기까지 20여명의 주석가에 의한 수십권의 관계저술이 전해온다.
한국에서는 涵虛(圓覺經疏 3권)有一(圓覺私記 2권)義沾(圓覺私記 1권)의 연구가 있었고, 한글 창제후 간경도감에서의<圓覺經諺解>(1465년 발간)가 유포되는 등 현존하는 많은 목판본 (10여종)이 보여주듯 그 유통이 활발하였고, 특히 근세 한국불교의 선각자龍城禪師와 그의門人 韶天스님의 한글판이 각각있고 근래 동국대학교 부설역경원에서도 月雲스님의 번역이 발간되었다.
특히 주목되는 바는 전통 승가대학들의 교과과정 가운데 중요한 교재로 쓰여오고 있으며 탄허스님의 역해가 있다. 일본에서는 鳳潭(大方廣圓覺經 集註日本決 3권)과 山田(大方廣圓覺經日譯 1권)등이 있다.
결국 <원각경>은 중국, 한국, 일본에서 중시되며 유통되고 있는 점에 유의하면 이경의 중국찬술여부에 관계없이 그 사상이 높이 평가되고 존중되며 애독되고 연구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구성과 내용>
<원각경>은 부처님과 열두보살과의 문답형식으로 엮어진12장의 간결스런 단권으로 되어있다.여늬경들처럼 그 序分(서론)에서 경의 연기를 밝히고, 이어서 正宗分 (본론)으로 문수보살로부터 원각보살에 이르기까지 열한명의 보살들이 차례로 11章에 걸쳐 부처님께 원각수행방법을 물어 들으며 맨끝 열두번째의 賢善首菩薩章으로서 流通分(결론)을 이룬다.
짧은 머릿글에서 이경은 통상적인 범주를 넘어선 법회의 정황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역사적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모든 부처님의 진리의 세계에서 일상적 말과 글로 충분히 표현하기 어렵고 보통의 인식과 상상을 넘어서는 不二와 삼매의 상태에 계시며 큰 깨달음의 오묘하고 평안한 이상세계의 부처님 정경을 묘사하고 있다.
첫 번째로, 대승불교권에서 지혜의 상징으로 알려진 문수보살이 법회대중을 위하여, 부처님께서 처음 일으키셨던 법다운 수행과 모든 보살들이 대승에 맑고 깨끗한 마음을 내어 번뇌의 병을 멀리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여쭈어 발심하게 하며, 아울러 말세중생들이 삿된 소견에 빠지지 않게 하려 법문을 청한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원각을 해설해 가르치시고 그 문을 통해 무명을 끊어 깨달음을 이루게 하신다. 위없는 진리의 왕이신 부처님께는 모든 법을 갖추어 주재하시는 큰 문이 있어 [원각]이라 이름하고, 이를 통하여 보살들에게 모든 진리와 깨달음(보리)과 열반과 지혜의 완성(바라밀)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니, 모든 부처님들도 이를 의지하여 어리석음을 끊고 깨달음을 이루셨다.
밝은 지혜가 없다는 것(무명)은 모든 중생이 옛날부터 갖가지로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방향을 잘못 앎같이 그릇되게 자기를 알고 있는 것이다. 비유하면 눈병이 난 사람이 아무 것도 없는 공중에서 꽃을 보거나 둘째 달을 보는 것 같다.
실제로 허공에는 꽃이 없지만 눈병난 사람은 헛것을 보고 착각에 집착하여 허공의 성품은 물론 정작 꽃이 나는 곳도 모르는 것과 같다. 이러한 그릇된 집착으로 말미암아 나고 죽음에 헤메이니, 그러므로 無明이라 한다. 그렇지만 무명이라는 것은 실제로 본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꿈을 꾸는 사람이 꿈속에서 본 것이 꿈 깬 뒤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같고, 눈병으로 말미암아 허공의 꽃을 본 삶이 눈병이 낳은 후 꽃이 사라진 곳을 말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러므로 중생들도 본래 나고 죽음이 없는 가운데 있는 것으로 여겨 헤메게 되는데, 원각을 닦는 이는 그러한 본래 없음을 알게되어 헛도는데서 벗어나게 된다. 두번째로, 보현보살이 그 법회대중과 말세중생들이 이 원각의 맑은 경지를 듣고 어떻게 수행하여 저 모든 헛것들로부터 떠날 수 있을지 여쭈움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중생들의 가지 가지 헛것들도 모두 원각의 묘한 마음에서 생겨난 것이 마치 헛꽃이 허공에 있는 것같으니 헛꽃이 비록 없어져도 허공은 없어지지 않듯 중생의 마음에 나타난 것들이 사라져도 그 원각의 마음자체는 변함없다.
그러므로, 헛것인줄 알면 곧 그를 떠남이라, 별다른 방편을 지을 것 없으며, 헛것이 없어지면 그것이 곧 깨달음이라, 따로 점진적인 과정이 필요 없으니, 이렇게 원각을 이루라. 세번째, 보안보살이 앞에서 설하신 뛰어난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할 중생들을 위해 다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순서로 수행하며 어떤 방편을 써야할지 여쭈움에, 부처님이 가르치시기를 부처님의 맑고 원만한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면 먼저 사마타(Sama-tha 망념을 쉬고 마음을 한곳에 집중함)를 닦고 계율을 지키며 생각하라,
이 몸은 네가지 요소(고체. 액체. 기체. 열)로 어울려진 것이니 이것들이 흩어지면 [나]라고 여겼던 몸과 마음은 어떻게 되는가? 결국 그 몸과 마음은 헛된 것이다.
중생의 헛된 몸이 사라지면 헛된 마음도 또한 사라지고, 헛된 마음이 없어지면 다른 모든 헛된 것들도 따라 없어지나, 헛되지 않은 것은 없어지지 않느니, 마치 거울에 쌓였던 먼지와 때가 없어지면 거울 본래의 밝음이 나타남과 같다.
이렇게 모든 헛것들이 없어지면 문득 가없이 맑고 깨끗함을 얻게 되는 데, 허공과 우주도 이 원만한 깨달음에서 나타난 바이다. 이 깨달음이 밝고 깨끗하므로 그 마음과 물과 온 세상 만물들이 모두 깨끗해진다. 그러므로 보살은 일체에 매이지 않게 되는데, 왜냐하면 일체가 원각이기 때문이다.
중생이 마음을 닦아 이루면 그 깨달음이 온 우주를 두루 비추어 한없는 세상도 허공중의 꽃같이 생겼다 없어지듯 하며, 생사와 열반조차 꿈과 같으리니, 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깨닫게 되어 일체에 걸림이 없으리라.
옛날부터 이보안보살장은 <화엄경>의 보현행원품및<법화경>의 보문품과 같이 가장 널리 독송되어 오고 있다. 네 번째, 금강장보살이 앞장의 설법으로부터 일으킬 수 있는 중생들의 세가지 의심들을 여쭙는다.
"만약 중생이 본래부처였다면 어찌하여 모든 무명이 다시 있게 되었으며, 만약 저 모든 무명이 중생에게 본래 있었다 하면 무슨 이유로 부처님은 중생이 본래 부처였다 하시며, 온세상 중생들이 본래 부처였다가 나중에 무명을 일으켰다면 모든 부처님들은 언제 다시 번뇌를 일으키시겠습니까?"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모든 세계의 시작과 끝, 생김과 없어짐, 앞뒤에 있음과 없음, 모임과 흩어짐, 일어남과 그침등의 생각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져 돌아가며 바뀌는 것이 모두 윤회이다. 이러한 윤회하는 마음으로써 원각을 분석하고 판단하려하면 저 원각의 성품마저 따라서 윤회하는 것 같이 보임이 마치 구름이 지나감에 달이 가는 것 같이 보이고, 배가 지나감에 강가의 언덕이 가는 것같이 보임과 같다. 광석을 녹여 순금을 분리해 내지만 순금은 광석을 녹임으로써 금아닌 물질이 금으로 변해지는 것이 아니라 광석속에 본래없었던 금이 추출된 것이다.
눈병으로 허공의 꽃을 보지만 그 병이 낳아 한번 헛꽃이 사라지면 그 꽃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므로 다시 그 자리에 생겨나지 않는 것과 같다"고 답하신다. 다섯번째 미륵보살은 "어떻게 윤회의 뿌리를 끊으며, 윤회에는 몇가지 성품이 있고, 부처님이 보리를 닦는 데에는 몇가지 차별이 있으며, 다시 번뇌의 세계에 들어가자면 어떤 방편으로 가르쳐 중생들을 건져낼수 있겠읍니까?"라고 묻는다.
부처님께서는 "윤회의 뿌리는 애욕으로서 애욕이 원인이 되고 거기서 목숨을 아낌이 그 결과이다. 그 과정의 조건에 따라 지옥, 아귀나 ,천상, 인간등의 여러가지 삶의 세계도 벌어진다. 그러므로 모든 욕심과 아울러 미워함과 사랑함을 버리고 원각을 구하면 그 깨달음을 얻게 되리라. 모든 중생이 탐욕으로 말미암아 무명을 일으켜서 다섯가지 인간성의 차별 (五性)이 생기고 이치와 사물에 장애(二障)를 일으키므로 탐욕을 끊고 원각을 위하여 발원. 수행하면 마침내 그 깨달음을 이루리라.
그 과정에서 올바른 스승과 도반을 찾아 수행할 것이요, 그릇된 생각을 가진 자를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여섯번째 청정혜보살이 앞에 언급된 여러가지 인간성의 차별에 따른 깨달음의 차이에 대한 물음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원각의 자체성품에는 차별이 없지만 중생의 인연에 따라 다섯가지 차별이 생겼고, 각 지위에 따라 수행과정에 차이가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경우 중생들이 느끼는 일체의 분별장애가 모두 깨달음이 되며 일체를 포용하기도 초월하기도 허공과 같이 자재무애 하시다"고 대답하신다.
일곱 번째, 위덕자재보살이 점진적인사람의 수행과정을 여쭈움에 부처님은 奢摩他 (Samatha), 三摩鉢堤 (Samapatti), 禪那(dhyana) 등의 觀法을 가르치신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수많은 아라한과 벽지불을 성취케한다 하여도 이 원각법문을 듣고 한순간 수행한만 못하다고 원각수행을 찬양하신다.
여덟번째 변음보살이 원각문 수행법을 여쭈움에 부처님은 單. 複. 圓修의 25종 觀行을 보이신다. 아홉번째, 정제업장보살이 법회대중과 말세중생의 장래에 의지할 안목을 청하며, 부처님은 나쁜 행위의 뿌리는 네가지 그릇된 견해(四相: 我. 人. 衆生. 壽者)에서 비롯됨을 보이시고 이러한 그릇됨을 바로 알고, 탐욕. 성냄등의 모든 번뇌들을 없애므로써 맑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신다.
열번째로 보각보살은, 말세중생이 어떤 수행을 하며 어떤 병을 없애고 어떻게 발심하여 그릇된 길에 빠지지 않겠는가 여쭈니, 부처님은 네가지병(作.止.任.滅)이 없는 올바른 선지식을 의지하고 배우라 하신다.
열한번째, 원각보살이 말세중생의 안거방법과 세가지 관법수행에 대하여 여쭙고, 부처님은 세가지 기간(長:120日, 中:100日, 下:80日)의 참회도량개설과 3종관법의 수행을 해설하시며 권장하신다.
열두번째로 현선수보살이 이경의 말세유통에 대하여 여쭈우니, 부처님은 이 경이 수많은 부처님들께서 설하시고 지키시는 바로서 모든 보살들이 의지하는 모든 경전가운데 가장 중요한 경이므로 잘 받들어 지니라 분부하시며, <大方廣圓覺尼羅陀經>, <修多羅了義經>, <秘密王三昧經>, <如來決定境界經>, <如來自性差別經>등으로 이름 붙여 주신다.
또한 이경은 오직 부처님의 경지를 다루었으므로 부처님만이 경의 내용을 제대로다 설명할 수 있다하시고, 만약 모든 보살들이나 말세중생들도 이를 의지하여 수행하면 부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하신다.
아울러 이 경의 위치를 大乘頓敎로 정하시고, 일반대승교와 비교하여 뛰어남을 분명히 하시며, 온우주에 가득히 여러가지 보물을 쌓아 보시하는 공덕이 이경의 이름이나 한 귀절을 듣는 것만 같지 못하며, 무수한 중생을 교화하여 아라한을 만든 것이 이경의 반게송 해설한 것만 못하다고 비유를 들어 보이시고, 이경의 이름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는 이는 수많은 부처님께 선근을 심은 결과라고 이경의 공덕을 부연하신다.
<후대에 미친영향>
<원각경>은 이경 자체에서도 분명히 선포하였듯이 대승교리가운데서도 가장 빨리 깨달음을 이루게 하는 가르침(大乘頓敎)으로 알려져왔다. 한국의 전통교학체제인 이른바 이력과정에서도 <능엄경>, <기신론>, <금강경>을 거친다음 이 <원각경>을 공부하게 되어있다.
특히 경전공부를 부질없이 여기며 체험을 강조하는 선종에서도<원각경>은 존중되고 유통되었음이 주목된다. 이를테면, 중국에서 華嚴祖師로 뿐만 아니라 禪宗大家로 이름난 圭峰禪師가 이 <원각경>에 대하여 가장많은 주석을 내었고 그 방면의 모범이 되었으며, 한국에서는 涵虛堂 得通禪師에 의한 <圓覺經疏>가 이경 학습에 고전으로 취급된다.
이경은 한글로 일찍 번역되어 사리와 함께 이경의 이름을 따서 붙인 원각사의 십층석탑 (국보 제2호)안에 봉안되고 숭앙되어 왔다. 원각사는 오늘날 [탑골공원]으로 통하는 지역에 세조대왕이 창건한 절로서 그 당시 서울에서 가장 웅장하였었다고 전한다.
비록 옛건물은 없지만 건물유래를 기록한 비석(보물제3호)과 함께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어진 삼일운동의 발원지로서 원각사지는 <원각경>을 일깨우는 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고 본다. 아뭏든 수많은 대장경가운데에서 규모로는 <화엄경>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그 내용만은 독보적으로 빼어났다는 정평을 받고있는 그리 길지 않은 한권의 <원각경>이 선종과 교종을 막론하고 널리 학습되어 온 것은 이경의 영향이 어떠하였는가 짐작 할 수 있게 한다.
오늘날에도 승속을 막론하고 불교인들의 법명이나 신행단체 등에 [원각]이란 이름이 많이 쓰이고 있음을 볼때, <원각경>은 계속 기려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끝으로 한국이자랑하는 세계적 문화유산인 고려대장경(국보 제32호)이 안치된 해인사의 대장경판고(국보 제52호)법당입구 양쪽 주련에 새겨진 글귀를 소개하며 마친다.
[원각도량이 어드메뇨?] (圓覺道장何處)
[바로 지금 이 삶이로세!] (現今生死卽是)
36. 능 엄 경
<성립배경과 비중>
불교에서 진정한 의미의 종교성을 지닌 것은 대승불교이다. 초기(원시)불교나 부파(소승)불교는 편협한 사상체계를 지닌 까닭에 인간구제에서 원만치 못하다.
대승불교는 그러한 약점들을 극복한 가장 원만한 종교성의 발현 체계이다. 가령 인간의 행위 양식을 知. 意. 情으로 구분할 때, 초기불교적 행위양식은 의지적 성향이 강하며, 부파불교의 것은 지적인 이론에 밝고, 대승불교의 지향은 정적인 관점에 무게를 둔다.
특히 초기나 부파불교의 행위성향은 지나치게 인간의 정적인 면을 억제하고 그저 의지 강하고 지적교만에 빠지도록 하는 인간교육 내지는 종교지표를 설정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종교실천은 매우 금욕적이고 고집 센 수행인을 만들어 갔고, 종교지식은 머리카락까지 셀려는 번쇄한 철학도를 만들었다. 개인적인 인내와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로 고독한 자기싸움을 연출했으며, 추상적 종교관념은 자기 우월성을 증명이라도 하듯 도그마적 권위를 등에 업고 치장해 갔다.
여느 경전에서나 머리에 나오는 6성취의 정형구는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그런 역사가 대략 5백년이나 지속됐다. 무엇이든 오래 머물수록 썩기 마련인 바, 석가모니의 신선한 가르침도 시간이 흐를수록 못난 제자들의 아집과 종권에 의해 변질돼 부패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활발한 인간성을 어두운 골방에 처넣어 비인간화시키는 제도로 고착되어 갔다. 이제 여기저기서 인간의 본래 자리 곧 아무런 때묻지 않은 인간성을 되찾으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여태까지 인간의 정적인 면을 아주 말살하고 인간을 딱딱한 존재, 근엄한 선비, 고집장이 외곪인으로 만들었을 뿐, 훈훈한 기분과 웃음깃든 분위기는 있지 못했다.
굳은 얼굴과 긴장된 자기 관리만이 있을 뿐, 음악을 듣는다거나 놀이를 하는 따위 감성적 행위는 전혀 용납될 수 없었기에, 타락은 덜해갈지라도 보다 중요한 인간성의 아기자기한 기운이 사라져 갔던 것이다.
그래서 승단은 비록 정예화 돼 갔을지라도 일반 서민과 대중은 승단을 등지고 추억이나마 옛 석가모니 부처님의 따스한 정서를 느끼려고 불탑예배를 하였다.
소위 성지순례와 불상예불이 그것이었다. 그들은 거기서 정적인 기쁨과 종교적 발원을 가졌다. 이런 행동과 운동의 무리가 대승불교를 주장하는 깨어 있는 자들이었다.
세태는 시간이 갈수록 대승불교에 유리하게 전개되어 갔고, 대승불교 운동가들은 그것을 십분 활용하여 인간의 정적인 면을 기저로한 사상체계를 세워갔다.
그 정적인 가치는 자비이며, 그 사상체계는 사회(중생)구제이고, 그 주체는 보살 즉 불자였다. 이 기본구조에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숱한 대승불교의 경전군이 쏟아져 나왔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사상을 알리는 경전들은 한결같이 자비를 바탕으로 사회구제를 외치는 성실한 불자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대승불교의 역사도 7백년정도 흐르다보니, 또 썩어터지는 인간의 제도우상을 안고있었다. 더욱이 인도적 배경이 아닌 중국의 이질적 문화요소까지 겹치어, 마냥 생생하기만 했던 그 대승불교의 정신은 시대적 요구를 수용하지 못한 채 지적인 희롱과 의지적기만 그리고 정적인 탐닉에 허둥대고 있었다.
세상은 시시각각 변하고 새로운 도전을 받아 응전해야 하는 격돌속에 있는데, 중국땅에 정착한 대승불교는 창조성을 발휘해 교단 내외적 도전을 응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냥 과거의 영광을 팔아 현실적 기득권의 향유에만 눈을 돌렸던 것이다.
급기야 다시 안으로 썩고 밖으로 압력을 받는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것을 우리는 법란이라 하지만, 그 근본 요인은 해이해져 대승불교의 정신이 증발해버린 탓이다.
그래서 어설픈 정치승이 나오고 사이비 도인이 나와, 더욱 부처를 팔아 자기 배만 채우는 상업종교로 전락돼 갔다.(이런 현상은 오늘날도 비슷하다) 어느 때나 있었던 부패현상이지만, 적어도 <능엄경>이 나올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법란을 크게 두 번이나(물론 작게는 여러 번이었지만) 겪고난 다음인지라 선각자들은 석가모니의 그 정신이 무엇보다도 절실했던 것이다.
그 정신이란 지. 정. 의적인 행위양식을 고루 갖춘 사회구제 즉 시대적 영도능력을 실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당시 교단적 문제를 안고 씨름하면서 제2의 석가모니 부처님상을 그렸던 것이다.
그것이<능엄경>이 나오게 된 큰 동기이다.<능엄경>의 전역사정을 알리는 최초의 문헌은 저 유명한 지승(智昇, ~740)의 <開元釋敎錄>(730년에 지음)에 나타나 있다. 그 목록 제9에 경의성립과정이 대강 나온다.(A)"사문석 회적은 순주 사람인데, 고향의 나부산남루사에 머물고 있었다.
그 산은 仙聖들이 유거하는 곳이다. 회적은 오래도록 경론들을 익혀 아주 해박하였으며 구류칠략에도 밝았다. 그런데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해변가에는 자주 인도 스님들이 와서 머물곤 하였다.
회적은 나아가 인도서적과 인도언어를 배워 다 통달했다. 한번은 삼장 보리류지(Bodhiruci,~727)가 <보적경>을 번역할 때 멀리서 회적을 불러와 증의케 했다. 회적은 일을 마치고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뒤에 광부에서 노닐다가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인도 스님이 범어경전 1엽을 싣고 온것을 만났다. 청해같이 이를 번역하여 묶어10권으로 만들었다. 곧<대불정만행수능엄경>이 그것이다. 회적은 經旨를 필수하고 겸해 문리도 증철했다. 그 인도스님은 경을 전역하는 일을 마치자 사라졌는데 그 가는 바를 알 수 없다.
南使에 의해 경을 유통하여 이곳(즉 장안)까지 이르렀다. "이 기록에 의하면, <능엄경>은 광동성 순주에서 회적스님이 어느 무명의 인도스님을 만나 그가 가져온 경을 같이 번역하고 필수. 윤문까지 해서 이룩된 것이다.
말하자면 <능엄경>은 회적에 의해 번역돼서 유포된 것이다. 그런데, 지승이 7백30년에 쓴<續古今譯經圖記>에 의하면 보통경전이 번역되는 데에 갖춰야 할 요소들을 제대로 설명하고 있다.(B)"
사문 반라밀제(Paramiti)는 중국말로 극량인데 중인도 사람이다. 도에 뜻을 품고 여러곳을 시찰하며 인연따라 제도했다. 전전 교화하더니 중국에와 광주 제지사에 머물었다.
대중이 그의 해박함을 알고 가서 배우는 이들도 많았다. 중생을 유익케 함을 염두에 두고 신비한 기적도 행했다.신룡 원년(705)5월23일, 드디어 관정부에서 1품을 송출해서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이라 이름했다. 1부 10권이다.
오장국 사문 미가석가는 역어하고, 보살계 제자 전정간대부동중서문하평장사청과 방융이 필수하고, 순주 나부산 남루사 사문 회적은 증역했다. 그 (반라밀제)스님은 경을 전역하는 일을 마치고 배를 띄워 서쪽으로 돌아갔다. 남사에 의해 (이 경이) 이곳에 유통되게 됐다.
"지금 (B)문헌은 경의 전역과정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A)는 매우 불투명하다. 그러나(A).(B)가 같은 저자의 기술인 만큼, 그 서술양식에 따라 (A)가 먼저고 (B)는 뒤에 이뤄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왜 같은 지은이의 같은 해 저술인데도 전혀 다른 전역배경이 설명돼 있는가?
바로 이점이 문제다. 이것은 처음엔(A)의 경본이 있었고 다시 뒤엔 (B)의 경본이 있었다고 해석될 수 있다. 그 때문에 다른 것이다. 즉 애초에<능엄경>은 중국에서 찬술된 것이다.(B)의 주장은 이를 숨기고 경이 인도에서 왔다고 하려고 의도된 기술이다.
경이 그같이 중국찬술이란 점은 경의 내용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경은 대체로 용어나 기술상 번역가들이 할 수 없는 어려운 용어들을 동원해서 함축성 있게 북잡한 교리를 전개하고 있다.
대략 여덟 글자를 한 문장으로 구성하고 있고, 교리도 백화점처럼 다양한 체계를 지닌다. 또한 다른 대승경전들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고유명사나 교리, 용어 등이 유별나게 많다. 가령, 7大, 7趣, 하늘의 건립, 12류생, 3첩유변 등이다. 말하자면 경 내용상 중국인의 정서에맞도록 독서인층을 향해 설해져 있고 종합적인 수행관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도교적 요소나 유교적 요소 또 주술적 요소 등이 한데 어울린 불교종합경전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송나라 이후 점점 여느 경전보다도 이 경이 널리 읽혀지고 수행의 지침서로 출가. 재가인을 막론하고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유가학자들마저 <능엄경>을 애독하고 주석서까지 냈으니, 알만하지 않는가! 그만큼 이 경은 중국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그 영향권에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고려 중기이후 교문. 선문에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점에서 이 경은 <화엄경>이나 <법화경>을 능가한다.
<사상과 특징>
<능엄경>은 중국불교가 제대로 정착되고 중국적인 꽃을 피우려고 할 때, 중국인의 정서에 맞게 찬술된 중국최고의寶典이다. 그 기본틀은<화엄경>에 있지만 불교실천을 현실에 끌어들여 누구에게나 어울릴 수 있는 依用경전에 걸맞게 <능엄경>은 다양한 교리내용을 함축성있게 제시하고 있다.
먼저 경은 마음의 문제를 차원 깊이 다루고 있다. 불교를 마음을 깨치는 종교로 정의할 때 이 마음 자체가 다분히 유식학적 용어이지만 경은 처음에 이 마음의 소재를 다각도로 분석하고 그 허실을 공개하고 있다.
그 형식은 세존과 아난이 대화하는 가운데 많이 안다는 아난의 부족한 점과 그릇된 견해 등을 하나씩 논파하고 있다. 도대체 마음이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이 질문은 매우 어렵고도 핵심적인 요체인 까닭에 경의 많은 분량을 차지해서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한마디로 마음은 본디 영묘하고 원명한 진심이지만 어쩌다 외부 환경때문에 이렇게 고통받는 범부가 됐다는 것이므로, 그 외부조건(즉 대상)에 새로운 인식과 처방을 요구하고 있다.
인식이란 외부 조건을 가변적인 것 즉 바꿔져야 할 장애로 보고 그것을 없앨 의욕을 갖는 일이다. 그래서 그 조건이 바뀌어 새로운 조건인 긍정요건으로 전환될 때 우리는 그 내용인 본심이 제대로 드러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수행이란 외부조건(객진번뇌)을 제거한다고 할 때 그것은 부정적 요건에서 긍정적 조건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인 것이다. 이 작업은 내용과 형식이 하나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능엄경>은 그 형식의 개조에 힘쓴다. 그 점에서 이 경은 어떤 경보다도 수행의 형식에 많은 비중을 둔다.
간혹 어떤 선문에선 無修無證을 외치며 막행막식하는 탈형식적 행동을 많이 하는데, 이는 외부조건의 위력이나 존재성을 아주 무시한 관념론의 산물이다. 종교가 현실에서 정당성과 합리성을 가져야 하는데, 이를 오로지 관념화한 나머지대상(객진번뇌)을 도외시한 것은 오히려 대상에 사로잡히는 꼴이 되고 만다.
형식이 깨졌으니 내용인들 별 수 있겠는가? 아무런 소용없는 희롱거리인 것을. 그래서 경은 내용인 본심의 실용성과 효율성을 위해, 보이는 대상 즉 5온.12처.18계.7대 등이 곧 여래장임을 천명하고 있다.
즉 외부 조건인 대상이 여래장으로 작용할 때 그 본심이 제대로 드러나 광명해 진다. 우리는 5온 등 외부 조건을 마냥 번뇌덩어리로만 생각한다. 그 번뇌가 전환되어 열반이 되는 줄 모른다. 경은 그런 고정관념을 아주 자세히 비판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용이 형식을 제대로 갖춰야 제 노릇을 하듯, 재삼 본심(여래)이 드러나려면 형식인 외부조건이 탈바꿈해야한다는 것이다.
탈바꿈하는 데에도 간단치 않다. 적게는 55단계 넓게는 60가지 단계를 거쳐야 한다. 55나 60이란 숫자는 탈바꿈하는 데에 거쳐야 하는 숱한 과정과 차례를 의미한다. 갑자기 되는 건 아니다. 이를 보살의 階差位라 한다. 경은 <화엄경>이나 <영락경> 등의 설을 인용해 장엄스럽게 인간의 형식을 바꾸는 과정을 그려 놓고 있다.
여기서 교육이 성립된다. 교육은 한 인간의 내부적 대상에 의해 즉 형식을 바로 잡는 작업인 것이다.(객진번뇌에서 본심으로 되돌리는 작업에서 그 번뇌를 전환시켜 열반으로 하는 것이다.)
경은 자세히 인간 교육적 형식의 탈바꿈을 논설하고 있어서 모든 불자의 귀감이 되고 남는다. 다음엔 그런 형식적 탈바꿈을 하는데에 있어서 가장 탁월한 방법으로 온몸으로 뛰는 현장성을 강조하고 있다.
제6장의 관음(이근)원통과 제7장 능엄주 지송이 바로 그것이다. 관음원통이란 신.구.의가 함께 어울린작업이다. 관음원통의 대표적 진언이 능엄주이다. 그리고 관음이나 주문은 현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한 형식이다. 경은 모든 방편 중에서 관음원통(또는 주문)이 가장 으뜸이라고 설파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수행이나 삶 또는 고고한 종교도 반드시 현실성의 효용성을 배제해선 아니 된다는 뜻이다. 어려운 철학이나 관념의 유희가 아닌 현실에서 우리의 안락과 이익을 더할 솔직한 행위 즉 불자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온몸으로 뛰는 현실적 인간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경은 그 주문의 실천적 확장을 위해 쓰여졌다. <능엄경>은 애당초 인간의 현실적 이익과 안락을 위해 설해졌다는 것이다. 비록 어구나 교설이 어려운 한자나 추상적 용어들로 짜여져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한없는 현실적 인간애를 기저로 하고 있다.
그리고 경의 제8.9.10은 <능엄경>만이 갖고 있는 특이한 구성과 내용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실천상에서 생기는 숱한 시행착오와 실천의 어려움을 제시하고 있다.
소위 선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50가지 마구니 상념들인 그 허상들을 조목조목 나열하고 경계하고 있다. 여기서 강조하는 요점이란 어떠한 외부적 변화에도 핵심을 잃지 않는 자세를 갖는 것이다.
그 변화에 속으면 그걸로 타락되는 사이비가 된다. 이는 시행착오가 늘 있을 수 있는 취약점과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야 하는 인간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내용만으론 제 기능을 못한다. 반드시 형식이 갖춰져야 명실상부한 기능이 성립된다.
경은 시종일관 인간의 원만한 삶을 향하여 내용과 형식의 갖춤을 외치고 있다. 그것을 위해 내용인 본심은 본래 원명하므로 건드릴 것은 없고, 오직 객진번뇌 격인 형식을 탈바꿈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외부조건인 환경. 법. 제도 같은 수단. 과정을 아주 중요시하고 그것의 완비나 합리적 정리를 해야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런 결과, 경은 인간의 실천적 과정을 중요시하고, 탈바꿈하는 형식과 단계의 의미를 한마디로 천명하여 <頓悟漸修>를 강조한다.
제10권 마지막에 분명히 천명하고 있다. 돈오점수란 온 몸으로 실천하여 내용과 형식이 명실상부하는 기능이 이뤄짐을 말한다. 돈오는 앎이고 점수는 실천이다. 그러나 앎에 의해 더욱 실천이 된다. 마찬가지로 돈오는 점수에 의해 더욱 밝아지고 점수는 돈오에 의해 더욱 실감된다.
이것이 온몸으로 뛴다는 경의[깨달음]에 대한 요지이다. 그러므로<능엄경>은 보통 말하는 지행합일된 종교행위를 실행적으로 강조하는 특징을 갖는다. 종교는 현실에 안락과 이익을 가져다주는 실천에 있지, 그저 관념의 장난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경은 그래서 옛부터 발랄한 선문에서 늘 애용돼 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