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철학

[인도불교의 역사 하] 중에서

수선님 2020. 4. 5. 11:51

[인도불교의 역사 하] 중에서.


원시불교는 이성적인 종교이며, 붓다의 깨달음은 주술과는 관계가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바이며, 붓다의 깨달음은 주술과는 무관했을 것이다. 그것은 붓다가 깨달은 법이 지혜에 의해 깨달아지는 것이며, 깨달음은 암흑이 아니고 광명으로서 미신이나 맹목적 신앙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아함경]에는 붓다가 깨달은 법에 관하여 “아직 들어보지 못한 법에서 눈이 뜨여 지(智), 혜(慧), 명(明)이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고 설해져 있다. 법은 보여지는 것이며 그 때 마음에 광명이 생기는 것이므로 깨달음의 지(智), 혜(慧), 명(明) 등은 조금도 의심을 남기지 않는 것으로서 밝은 진리의 통찰이다. 또한 “법은 세존에 의해 훌륭하게 설해졌다. 이것은 현실 속에서 입증되는 것이며, 때를 기다리지 않는 것으로 항상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열반으로 인도하는 것이며 지자(智者)에 의해 각각 알려져야 할 것이다”라고 하는 설명도 있다. 여기서도 법이 개개인에 의해 확증되는 것이며, 시간을 초월한 진리로서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음이 강조되고 있다. 즉 보편적인 진리임이 주장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설명에는 ‘법은 이해되는 것’임이 주장되고 있다. 그것은 이해의 종교이며, 믿음의 종교는 아니다. 지혜로써 진리를 통찰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이것은 원시불교의 교리인 4제설이나 12연기설, 5온 무아설 등의 기본적인 교리에도 잘 드러나 있다. 따라서 원시불교의 깨달음은 비합리적인 미신이나 맹목적인 신앙과는 무관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깨달음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간단히 결론지을 수는 없다. 불교의 깨달음이 언어에 의한 표현을 초월해 있다는 것은 대승불교에 이르러서부터 특히 강조되지만 이 점은 원시불교에서도 이미 언급되고 있다. 예컨대 [범망경]에 의하면 세상 사람들은 붓다가 계를 잘 지키며 완전한 수행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 여래를 찬탄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소하거나 흔한 말에 불과하다. 여래가 스스로 증지(證知:깨달아 앎)하고 현증(現證:증득)하여 설하는 제법은 매우 심오하여 난견(難見), 난지(難知), 적정미묘하며, 심사(尋伺:찾아 엿봄)의 경지를 초월해 있고, 지극히 미묘하여 지자(知者)만이 알 수 있다. 이 제법에 의해서만 여래를 바르게 찬탄하고 말할 수가 있다. 여기서는 여래가 깨달은 법이 난지(難知), 난견(難見)하다는 것, 심사(尋伺)의 경지를 초월해 있음이 설해진다. 이 경우의 심사(尋伺)는 논리를 말한다. 붓다의 깨달음은 논리를 초월해 있으며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난지(難知), 난견(難見), 미묘한 것이다.

또한 ‘여래가 증지(證知)한’이라고 하는 경우의 증지(證知)로 번역한 Abhinna에는 깨달음의 지혜라는 의미와 동시에 신통(神通)이라는 의미가 있다. 신족통(神足通), 천안통(天眼通) 등의 6신통(神通)의 신통은 Abhinna이다. 이 신통에는 합리적 이성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신비스런 지(智)의 성격이 있다. 그리고 깨달음의 법은 그러한 신비스런 지(智)에 의해 증지되는 까닭에 난지, 난견하다고 하며, 논리적 이해를 초월해 있다고 한다. 붓다의 깨달음은 범부가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것이므로 그 점에서 신비스럽게 생각되었을 테지만 동시에 깨달음 자체에도 신비적인 성격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깨달음이 명(明)으로 말해지고 있다는 점에도 잘 나타난다. 앞서 언급했듯이 “여태까지 들어보지 못한 법을 통해 눈이 뜨여 지(智), 혜(慧), 명(明)이 생기고”라고 설해진 경우의 명(明)에는 지식이나 과학 등의 의미가 있으며 또한 ‘주문’의 의미가 있다. 주문인 경우의 ‘빗자’는 ‘명주(明呪)’로 번역된다. 따라서 ‘빗자’로서의 지(智)에는 후술하는 바와 같이 신비스런 성격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원시불교에서 이해되고 있던 ‘깨달음의 지(智)’는 복잡하다. 그것은 이성적이며 광명이 넘치는 지(智)이지만 소위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지식은 아니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 깨달음의 지(智)가 비의(秘義)와 결합될 여지가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미신적인 주문이나 비합리적인 점 등은 [범망경]에서 분명히 배척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주문과 붓다의 깨달음은 관련을 맺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아함경]에는 호주(護呪:보호해주는 주문)나 진실어(眞實語) 등이 설해져 있다. 그리고 일반 민중은 불교에 귀의했다고 하더라도 어리석고, 무력하며, 붓다의 가르침을 법대로 실행할 수는 없었다. 그런 어리석고 의지가 박약한 불교도들간에는 미신적인 신앙도 행해졌을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원시불교에는 이성적인 상부구조와 미신적인 하부구조라는 이중구조가 있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히라카와 아키라 저, 이호근 번역, [인도불교의 역사 하], 민족사, 1994)에서 인용.


여진무애현오상수 성상구가 적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