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스님

원효 전기의 재구성: 신화적 해석의 극복

수선님 2020. 4. 5. 12:01

 

원효 전기의 재구성: 신화적 해석의 극복


김 종인 *


• 목차 •
Ⅰ. 서론
Ⅱ. 元曉 전기에서의 쟁점 사항
1. 元曉의 小名 誓幢의 의미
2. 元曉의 학맥 관계
3. 無碍行과 저술의 시기
Ⅲ. 元曉 전기의 재구성
․元曉의 행적에 관한 기록들 간의 대조표
․기타 주요 기록
․영문초록





* 스토니브룩 뉴욕 주립대학교 박사과정
Ⅰ. 서론

元曉는 역동적인 삶과 뛰어난 저술 활동으로 인하여 생존해 있던 당시부터 뛰어난 인물로 평가되었다. 그가 죽은 후에는 그의 삶을 전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상당량의 문헌과 구전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많은 현대 불교학자들이 현존하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元曉의 삶에 대해 연구하였으며, 문헌 고증 측면에서는 많은 성과를 낳았다. 자료들간의 비교 연구를 통하여 기록과 기록들을 서로 연결시켰으며, 또 불일치하는 점들에 대해서는 어느 쪽이 보다 정확한 것인가를 거의 밝혀 내었다. 그러나 고증학적인 연구 범위를 넘어서서 元曉의 삶을 해석하고, 또 그런 해석을 바탕으로 다시 고증학적 성과물들을 검토하면서 元曉의 삶을 재구성하는 데에서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도 기행과 파계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 그의 인간적인 격정과 저술을 통해 이룩한 그의 학문적 ․종교적 업적간의 상관 관계에 대한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해석을 하지 못하고 있다.
기존의 많은 연구들이 元曉의 삶을 지나치게 이상화한 나머지, 목적론적인 해석틀을 못 벗어나고 있다. 말하자면, 元曉는 한국불교의 시조이고 동아시아 불교 전체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 보살로 일컬어지는 성인이라는 전제에 사로잡혀, 그의 모든 행적들을 성인이 되는데 불가피한 요인들로 해석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元曉의 삶의 마디마디를 기계론적인 인과관계로 연결하여, 기행과 파계로 상징화되는 원효의 행적들을 마치 十牛圖의 주인공이 성인이 되기 위해 밟아 가는 정연하게 순서 지워진 단계처럼 묘사하고 있다.
현대 연구자들의 이와 같은 시각은 元曉의 전기에 관한 주요한 1차 문헌인 ��宋高僧傳��의 저자 贊寧이나 ��三國遺事��의 저자 一然의 그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데, 그들은 元曉를 포함하여 그들이 다루고 있는 인물들을 초세간적, 말하자면 일반의 상식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 속에 산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신화적 이상화는 우리에게 어떤 불교적 이상 인격에 대한 동경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원효의 실제적인 삶의 모습과는 다를 뿐 아니라, 오히려 그의 삶의 정신과는 반대되는 것이므로 재고를 요한다. 본 고는 기존의 목적론적인 해석과 기계론적인 인식에서 벗어나서 원효의 삶을 당시의 일반적 인간유형 속에 두고 보다 사실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원효의 기행과 파계는 스스로를 성인으로 만들기 위한 불가피한 단계가 아니라, 그의 격정적 성격으로 인한 삶의 내부적 모순과의 싸움으로 그려질 것이다.
Ⅱ. 元曉 전기에서의 쟁점 사항
1. 元曉의 小名 誓幢의 의미
元曉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三國遺事��에 의하면 元曉란 이름은 (불교를) 처음으로 빛나게 하였다는 뜻으로 元曉 스스로가 지은 이름이며, 당시 사람들은 그를 향언으로 새벽(始旦)이라 불렀다 한다.1) ��三國遺事��는 또 그의 第名으로 新幢을 소개하고 있다.2) 이 외에도 그는 靑丘大師,3) 元曉菩薩,4) 丘龍大師,5) 聖種性,6) 華嚴法師者大權菩薩7) 등으로 불렸다.
그런데 위의 호칭들 중 학자들간에 논란을 일으킨 것은 小名인 誓幢이다. 一然이 誓幢의 幢자가 毛, 즉 “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주석을 붙여 놓아 그 의미에 대해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데다가, 공교롭게도 신라의 軍號에도 誓幢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元曉의 小名 誓幢이 군호 誓幢에서 유래된 것이라면 그의 행적을 군대 생활과 연관지을 수 있게 되어, 전기를 해석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8) 그러나 김영태는 (당시의) 기록들 속에 군대 명칭으로 이름을 지은 경우를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부정하고, 元曉의 어머니가 娑羅樹 밑에서 元曉를 낳았다는 ��三國遺事�� 元曉不羈 條의 기록에 착안하여 誓幢이란 “새털”의 의미라고 해석하였다. 그에 의하면, 娑羅樹의 “娑”는 털옷이란 뜻이며, 그냥 털이라고도 쓰이므로 娑羅樹는 “털옷을 걸친 나무”의 뜻이 된다고 하였다. 元曉의 아버지가 奈麻 신분으로서 털옷을 입었을 수 있으며, 그 옷을 걸어 놓고 元曉를 낳았기 때문에 元曉의 이름에도 털, 즉 幢자가 들어가게 되었다. 또 第名이 新幢 즉 새 털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 그의 이름을 새 털로 지었는데, 새와 서(誓)는 음이 비슷하므로 이를 新幢과 誓幢으로 표기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이다.9) 상당수 학자들이 별 생각없이 이 입장을 따르고 있다.
필자는 두 입장 모두에 동의할 수가 없다. 먼저 小名 誓幢이 군호에서 유래했다는 입장에 대해서는 김영태의 반론에 동의한다. 군호를 小名(兒名 어릴 적의 이름)으로 지을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元曉가 군대 생활을 했을 수는 있으나 군호를 元曉의 아명과 연결시킬 수는 없다. 사라수에 근거한 김영태의 논리는 김지견에 의해서 반박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김지견은 “‘娑羅樹’는 석존 탄생을 전하는 降誕說話의 룸비니 동산의 ‘娑羅樹’를 그대로 옮겨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보았다.10) 그럴 경우 娑羅樹에서 새털을 유추해내고, 다시 誓幢을 유추해 낼 근거가 없어진다. 그러나 一然이 幢자를 毛자로 주석해 놓은 것의 의미에 대해서는 계속 연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문제는 당시의 작명 관습과 표기법, 그와 관련된 언어학적 연구의 도움을 받아서 풀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2. 元曉의 학맥 관계
元曉는 특별히 누군가를 스승으로 삼아서 공부하지 않았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高仙寺誓幢和尙碑와 ��三國遺事�� 元曉不羈 條에서 元曉가 學不從師 즉 일정한 스승 없이 공부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宋高僧傳��11)에서는 元曉가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여러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고 하고 있어 외견상 서로 일치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은 같은 사실을 조금 달리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三國遺事�� 역시 “二惠同塵 條”, “朗智乘雲 條,”에서 元曉가 혜공과 낭지로부터 나름대로 배운 흔적을 보이고 있다.12) ��三國遺事��의 “學不從師”라는 표현은 元曉가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공부를 같이 한 스승이 없다는 의미일 따름이며, 전적으로 스승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誓幢和尙碑의 경우도 유사하다. ��宋高僧傳��에서의 표현 역시 결국은 元曉가 특정 스승에 집착하지 않았음을 표현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학자들간에 실질적 논란을 일으킨 것은 “學不從師”와 “隨師禀業” 사이의 표현 차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가 아니라, 大覺國師 義天(1055-1101)이 義湘과 元曉가 普德에게서 배웠다는 것을 시13)를 지어 표현하고, “元曉와 義湘이 涅槃經과 維摩經 등을 배웠다.”14)고 한 것의 역사적 사실성 여부에 대해서다. 김영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관점에서 이 사실을 부정한다. 첫째는 당시는 삼국간에 전쟁이 한창이었으므로 元曉와 義湘이 고구려나 백제15)로 가서 ��涅槃經��과 ��維摩經��을 배우는 데 필요한 시간만큼 체류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이 사실이 오직 普德의 懷古詩에만 있다는 점이다.16) 그러나 고익진은 善德王 11년(642)에 백제의 맹공에 시달린 신라가 고구려에 김춘추를 보내 구원을 요청한 일을 들어 이 무렵에는 元曉와 義湘이 普德에게 배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비록 고구려가 신라의 청원을 거절하였지만, 고구려와 신라 사이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17)
이 문제에 대해서는 김영태의 두 번째 관점을 고려하면서도, 고익진의 관점을 보다 넓게 적용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김영태는 단지 삼국간에 전쟁중이라는 사실만으로 元曉와 義湘이 普德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으나, 당시의 국가간의 국경 상황과 전쟁의 상황이 오늘날과는 매우 달랐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三國史記��에 나오는 租未坤의 이야기는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는 하급 관리(級湌)였는데, 전쟁중에 백제에 포로로 잡혀가서 佐平 任子의 집에 종이 되었다. 그는 충실한 생활로 임자의 신임을 얻은 후에 몰래 빠져 나와 신라로 돌아 온 뒤 김유신을 만난다. 그러나 김유신의 부탁으로 다시 백제로 넘어가 임자에게 김유신을 뜻을 전한 후 신라로 돌아온다.18) 당시는 국가간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고 다만 전쟁의 결과에 따라 변경 지역의 각 성들의 소속만이 계속해서 바뀌는 상황이었으므로, 국경을 넘는데 거의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또 경우는 다르지만 춘추전국시대의 지식인들이 개인적으로는 각 제후국들을 자유로이 이동하듯이, 당시 한반도에서도 개인의 이동 자체는 큰 문제가 안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때문에 전쟁상황이라는 것 자체가 그들간의 만남을 불가능하게 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김영태의 말처럼 원효와 보덕과의 만남이 다만 義天의 회고시에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그 역사적 사실성을 떨어뜨린다고 하겠다.
3. 無碍行과 저술의 시기
元曉의 행적에 대한 현대의 연구물들이 보여주는 기계론적인 사고, 혹은 직선적 발전론적인 사고방식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곳이 바로 元曉의 無碍行과 주요 저술시기에 대한 인식이다.
一然은 鄕傳을 인용하면서, 元曉가 薛總을 낳은 후 소성거사로 이름을 바꾸고는 노래하고 춤을 추며 수많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민중들을 교화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薛總이 태어난 연도를 기록하고 있지는 않으며, 또 다른 기록들에도 이 점이 분명히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언제부터를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다.19) 일연은 元曉가 파계한 것이 태종무열왕 때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또 元曉가 2차 유학길 도중에 마음을 돌이킨 시기가 기록에 나와 있기 때문에, 학자들은 이 두 사실로부터 元曉의 無碍行 시기를 유추해낸다. 그러나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元曉의 행적에 대한 기계론적 인식태도로 말미암아 학자들은 一然의 기록을 그대로 따라 원효의 無碍行을 파계 이후의 일로 보거나, 심지어는 파계 자체도 2차 유학길 도중 마음을 돌이킨 이후의 일로 보려 한다. 기계적 발전론의 사고로 볼 때는 元曉가 깨닫기 전에는 無碍行에 나섰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20) 그 시기를 보다 더 후기로 미루는 경우도 있으며,21) 이것을 구체적으로 당나라 군대가 한반도에서 퇴각한 676년 이후로 잡고 있는 경우도 있다.22)
학자들은 또 원효가 깨달음을 얻은 후부터 주요 저술들을 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하는데, 저술활동과 無碍行을 병행했다고 보는 것은 상식적으로 무리가 있다. 이 마을 저 마을로 춤추고 노래하며 떠돌아다니면서 그 많은 논리적인 글들을 썼다는 것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저술 작업을 마무리한 후, 혹은 676년 당나라 군대의 퇴각 후의 일로 보는 것은 더욱 무리다. 그 경우 元曉의 나이가 60세가 넘는데, 도대체 춤추고 노래하며 몇 고을이나 교화를 펼칠 수 있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誓幢和尙碑를 보면 元曉가 혈사에 기거하면서 왕실을 멀리하였으며, 또 제자들에게 강학을 했음을 짐작케 하는 구절들이 있는데, 이것이 보다 상식적으로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元曉가 2차 유학에서 마음을 돌린 후 주요 저술을 하였을 것이라 주장은 특별한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元曉의 無碍行의 시기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결혼하기 이전까지 떠돌아다니면서 한 기행을 미화한 표현으로 보는 것이 더욱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 이유는 첫째로 ��宋高僧傳��에서 元曉가 처음부터 예측할 수 없는 인물로서 대중을 교화할 때 일정한 방식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며,23) 둘째는 ��三國遺事��에서의 이 대목이 향전을 근거로 한 것이라고 일연 스스로 말하고 있을 뿐 아니라, 파계에서 無碍行으로 이어지는 구성자체가 하나의 소설적 구성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재론할 것이다.)
태종무열왕을 만나고 요석궁의 과공주와 만나기 이전까지 元曉는 자신의 삶의 방향을 찾기 위해 많은 독서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끝없이 방황했을 것으로 보인다. 元曉의 그런 모습은 ��宋高僧傳��24)에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결혼 이후에는 한편으로는 국사에 관여하면서, 저술과 강학을 하면서, 이전에 독서와 방황을 통해 온축한 사상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가 관여한 國事란 실무적인 일이 아니라 國師로서의 조언과 같은 역할이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강학과 저술을 하는데 아무런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삶으로부터 일탈하여 다시 과거로 돌아가려는 충동이 태종무열왕이 죽은 다음 해인 661년 2차 유학의 시도로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여행 도중 자신이 이제는 스스로 자신의 삶과 사상을 정리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되돌아온다. 그는 이후 죽을 때까지 줄곧 강학과 저술로 일관한 것으로 보인다. 元曉가 만년에 無碍行을 했다는 것은 무명에서 깨달음으로, 깨달음에서 대중교화로 (언어에서 행위로)라는 기계론적인 도식을 元曉의 삶에 뒤집어씌운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Ⅲ. 元曉 전기의 재구성
元曉는 617년에 태어났다.25) 서기 7세기는 고구려, 신라, 백제를 비롯하여, 당과 말갈이 서로간에 합종연횡을 펼치며 치열한 전쟁을 벌이던 시기이다. 551년에 신라와 백제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한 이래 676년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을 포섭하여 당나라 군대를 물리칠 때까지 끊임없는 전쟁이 한반도에서 진행되었다.26) 김유신의 전술적 활약과 고구려와 당을 넘나드는 김춘추의 외교적 노력으로 삼국의 패권은 신라가 잡았지만, 통일전쟁의 긴 기간 동안 신라는 줄곧 열세를 면치 못했으므로, 오랜 전란으로 인한 통치 기반의 불안정성을 예측할 수 있다. 신라는 대내적으로도 성골 출신 왕자가 없어지면서 2대에 걸쳐 여왕이 통치하는 가운데 국가의 중심이 흔들려 진덕왕 원년(647)에는 毗曇과 廉宗의 반란이 일어나는 등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27) 또 신라를 상대 중대 하대로 구분함에 있어서 대부분의 학자들이 성골이 끝나고 진골로서 왕이 된 태종무열왕(재위 654-660)을 기점으로 시기 구분을 하고 있다. 元曉가 죽은 것이 686년이며, 당나라 군대가 최종적으로 한반도에서 철수한 것이 676년이므로, 元曉는 전쟁과 소요의 격동기 속에서 산 셈이다.
그의 출생지는 지금의 경산군 자인면28)이다. 이 곳은 당시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 가까운 곳으로서 걸어서도 하루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거리였으므로 元曉로 하여금 세상의 변화를 빨리 감지할 수 있게 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출생지와 관련하여 또 하나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이곳은 신라의 군사적 요충지 중의 하나였으며,29)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이 이곳의 군주로서 활약하였다.30) 끊임없이 전쟁이 이어지는 시기에 전략적 요충지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매우 힘들었을 것은 분명하지만, 元曉의 전기와 설화 속에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元曉가 어떻게 바라보았는가에 대한 서술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세상에 나아가고자 하는 뜻을 가졌으리라는 것을 관련된 일화들을 통해서 추측할 수 있다.31) 그의 파계와 관련된 설화가 단적인 예라 하겠다. 元曉가 요석궁의 공주와 결혼한 사실은 많은 문학적 소재를 제공하지만, 元曉의 삶에 대한 해석에서 파계가 가지는 중요성은 무열왕과의 관계 속에서 보아야 할 것 같다.
무열왕과의 관계를 설명하기 이전에 먼저 元曉의 출신 배경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의 출신 배경은 역동적인 그의 행적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元曉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들인 薛總, 손자인 薛仲業의 관직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5두품이거나 6두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골과 진골을 포함하여 8두품으로 이루어진 골품제를 상․중․하로 크게 나누면 6두품과 5두품은 같은 등급에 속하는데, 이 두 품에 속한 사람들은 신라사회의 계층적 구조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32) 그들은 바로 진골 밑에 오는 신분으로서, 신분적 상승의 욕구가 가장 강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17관등급 중에서 서열 6위에 해당하는 阿湌까지 오를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국가에서 왕족에게만 주는 특혜 같은 것은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33) 그들은 실제로 신라 행정의 최고 실무진층을 이룬 반면에 신분적인 한계로 말미암아 국사를 좌우할 수는 없는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위치는 그들로 하여금 삶에 대해 열정적으로 대하게 만드는 동시에 그에 자기반성을 깊이 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三國史記��는 列傳 제6에서 뛰어난 학자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强首, 薛總, 최치원 등이 모두 6두품 출신이다. 기록의 주 내용 역시 이들의 업적에 대한 언급보다는 그들이 세상을 어떻게 반성적으로 보았는가를 그리고 있다. 元曉의 삶 역시 이들과 궤를 같이한 것으로 보인다.
元曉의 출가 동기에 대한 기록이 없으므로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오늘날 우리들이 석가모니의 출가담을 통해 이해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식으로 이해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元曉는 결코 초월적 가치관으로서의 불교에 매료되어 현세적인 가치나 염원들을 완전히 뒤로 한 채 산으로 향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元曉의 출가 동기를 짐작해 보는 데는 신라사회에서의 불교의 위치를 파악해 보는 것 역시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정치, 사회적인 관계에서 당시의 불교는 오늘날의 불교와는 전혀 달랐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불교가 들어 온 이래 신라 사회에서의 불교는 단순히 내세의 문제를 다루는 종교가 아니라 국가의 문화 전체였다. 지식의 습득과 전수, 정치적 이념의 창출, 예술적 표현, 이 모든 것이 불교를 매개로 하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34) 승려들은 위로는 왕사, 국사로서 정치적 이념의 창출자였으며, 아래로는 일반교육자였다. 그들은 또한 시인이요, 외교관이며, 군사고문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된다는 것은 분명 오늘날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출가라기보다는 일차적으로 그 사회에서 가장 체계적인, 어떤 의미에서는 유일한, 교육기관에 입학하는 일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三國史記��에 나오는 强首(?-692)의 이야기35)는 그런 상황을 잘 보여 준다. ‘[强首가] 성년이 되어가면서 독학으로 글을 읽을 줄을 알고, 그 의미를 이해하였다. 부친이 그 뜻을 시험해 보려고 그에게 물었다. “너는 佛道를 배울 것이냐, 儒道를 배울 것이냐?” 이에 强首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제가 듣사온즉 佛道는 세상 밖의 가르침이라 합니다. 저는 세간인인데 어찌 佛道를 배우겠습니까? 儒者의 도를 배우기를 원합니다.”’ 여기서 비록 强首가 불교와 유교를 세상 밖의 道와 세간의 道로 구분하기는 하지만,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 아버지의 질문 태도이다.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불교 아니면 유학을 공부해야 하는 것이 당시의 실정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强首가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로 고민하기 때문에 출가를 할 생각이 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글을 좋아하고 거기에 재주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불교를 배울 생각이 있는지를 묻고 있다.
强首는 元曉와 같은 시대의 사람인 만큼, 위 이야기는 元曉가 출가할 당시 불교가 신라사회에서 가지는 위치와 출가의 의미를 짐작하게 해 준다. 元曉는 수행과 열반으로 특징지어지는 종교적 이상으로서의 불교에 자신을 온전히 내던지기 위해 출가를 했다기보다는, 일반적 의미에서 자신의 사고의 지평을 넓히는 차원에서 불교사회에 발을 내디뎠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다만 强首와 달리 元曉는 출세간적인 영역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더 컸거나, 혹은 당시 불교가 유교보다 성하여 사회에 영향력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불교에 입문하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元曉가 출세간적 진리로서의 불교 교리에 전적으로 매료되어 출가한 것이 아닐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하는 다른 두 가지 구체적인 사실이 있다. 첫째로 그가 외전에 능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 아니라,36)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大乘起信論疏��의 서문을 보면 실제로 그가 노장 사상에도 상당히 젖어 있음을 알 수 있다.37) 둘째로는 그의 삶에 대한 기록들이 일관되게 그가 출가 후에도 일정한 스승 없이 잡다하게 공부했음을 말하고 있다.38)
元曉는 쌍상투(대략 16세 전후)를 튼 나이에 출가하였다고 한다.39) 청소년기에서 청년기로 접어들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할 나이에 출가를 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출가는 사실상 방황의 시작으로 보인다. 외적으로는 그를 만족시켜줄 만한 스승을 찾을 수 없었으며, 자신 또한 내부적으로 정리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元曉 자신이 후에 한국불교의 원조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한국 불교계는 아직 본 궤도에 오르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사실이며, 실제로 자질이 있고 물리적으로 뒷받침이 되는 승려들은 모두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상황이었다. 불교사회 자체가 세속사회로부터 격절되지 않은 당시의 상황에서, 그는 출가하였지만 자신의 이상을 불교적 이상과 일치시키지 않았으므로 불경뿐 아니라 여타의 서적들도 두루 읽었으며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 그러한 방황은 그가 여전히 세속에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는 방도를 찾기에 골몰했으며, 그로 인한 욕구와의 갈등 속에 살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중에 無碍行으로 미화되어 전하는 元 曉의 기행들이 바로 그러한 갈등의 표출이었으리 생각된다.
元曉는 두 차례에 걸쳐 당나라에로의 유학을 시도했는데, 두 차례 모두 8세 아래인 義湘과 함께였다. 元曉와 義湘은 출가한 나이는 서로 비슷하였으나, 義湘은 대략 출가한 지 10년 무렵에 입당을 시도한 데 비해 元曉는 18년 정도 후에 입당유학을 시도한다.40) 이처럼 元曉가 뒤늦게 8살이나 아래인 義湘과 유학을 떠나게 된 데는 물질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義湘이 왕족인 朴씨 출신인데 비해 원효는 5두품 내지 6두품 출신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元曉는 독자적으로 중국에 유학갈 처지가 안 되었기 때문에 경제적 기반이 있는 義湘과 동행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낳는다. 실제로 元曉 이전에 당나라에 유학을 간 승려들 가운데 安含, 明朗(慈藏律師의 생질), 圓測, 圓光, 慈藏 등 성이 밝혀진 대부분이 왕족 출신들이었다. 아버지의 지위가 17등급의 벼슬 가운데 11위로 중하급 관리계급에 속하는 元曉로서는 아마도 혼자서는 유학을 갈 재원을 마련할 처지가 안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41)
650년에 義湘과 함께 元曉는 육로를 통해 당에 가려고 하였으나, 요동에서 순라군에게 잡힌 그는 첩자로 몰려 수십 일간 억류되어 있다가 간신히 풀려 나왔다.42) 가까스로 마련한 유학 기회를 포기해야만 한 元曉는 큰 좌절을 맛보았음이 분명하다. 당에의 유학을 통하여 세상에 뜻을 펼치고자 하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그는 인생의 새로운 길을 찾아야만 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요석궁의 공주와 결혼함으로써 태종무열왕과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三國遺事��는 元曉의 파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스님은 어느날 상례를 벗어난 행동을 하며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불렀다. “어느 누가 자루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주려는가? 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라.” ... 이때 태종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스님은 귀부인을 얻어 귀한 아들을 낳으려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좋은 일이 있겠는가.” 공주는 ... 薛總을 낳았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지혜롭고 민첩하여 경서와 역사에 두루 통달하여 신라 10현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 43)
元曉의 파계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것은 元曉의 삶을 이해하는 큰 분기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대부분의 해석들은 이를 元曉의 一切無碍行의 표출로 이해하는데, 이는 元曉에 대한 지나친 이상화의 결과라 하겠다.
이러한 이상화 작업은 사실은 元曉의 파계를 길게 다루고 있는 ��三國遺事�� 자체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기록 자체가 鄕傳인 만큼, 정말로 元曉가 위 인용문의 노래를 직접 불렀는지, 또 무열왕이 그 노래를 듣고 정말로 말했는지 알 수 없다.44) 아마도 그의 뛰어난 아들인 薛總을 매개삼아 元曉의 파계를 미화하기 위하여 위와 같은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元曉와 요석궁의 공주 사이에 자식이 없었거나, 설사 있었더라도 薛總처럼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다면 향전은 다른 식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실제로 이 향전은 ��三國遺事��의 元曉傳에서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모두가 元曉의 파계가 충분히 의미 있는 것임을 입증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45) 그런 관계로 원효의 결혼 상대자임에도 불구하고 정당화에 도움이 안 되는 공주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으며, 元曉를 알아 본 태종의 지혜와 薛總의 뛰어남에 대해 길게 씌어져 있을 따름이다.46)
향전을 인용한 一然이나 기존 연구자들의 해석과 달리, 元曉의 파계는 종교적 이상과 현실과의 합일의 차원이 아니라 원효가 당시에 처한 현실적 상황 자체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파계의 상대가 태종무열왕의 딸이라는 사실과, 이때는 (654년에서 660년 사이) 바로 元曉가 1차 유학을 실패하고 (650) 좌절감에 빠져 있을 때이므로 결코 종교적 승화의 차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데다가, 당시 元曉의 나이가 37세에서 43세 사이이며, 태종의 나이로 보아 과공주 역시 꽤 나이가 들었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의 파계를 단순히 순수한 사랑의 결과로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필자의 눈에는 1차 유학이 실패한 후 승려로서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던 생각을 접은 그가 세속적인 정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앞날을 계획하기 위해 방향을 전환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결혼 후에 元曉의 생활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변화는 다시 사회인이 된데서 오는 변화보다는, 왕족과의 결혼으로 인한 신분적 변화에서 오는 것이었을 것이다. 신라 골품제 하에서는 혈연적 신분이 개인의 사회적 위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그것은 승려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元曉 시대까지의 불교가 왕실 귀족 중심의 불교였으며, 주요 명망있는 승려들 역시 왕족 출신들이었다는 것만 보아도 이 사실은 분명하다. 하급 관리의 아들인 元曉로서는 일반사회에서나 승려로서나 자신의 포부를 실현할 기회가 없었을 터이지만, 결혼 후에는 나름대로 기회를 맞았을 것으로 보인다.
誓幢和尙碑는 끝 부분에 원효의 환속 후의 덕을 기리는 대목에서 국가를 바로잡았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는 태종무열왕과 관계를 맺은 후에 국사에 참여하여 그가 꿈꾸었던 바를 실현할 기회를 만난 것으로 보인다.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다음의 두 가지 기록 역시 그가 문무왕 때까지 국사에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간여했음을 말해 주고 있다. 첫째는 ��三國遺事�� 太宗春秋公 篇에 원효가 662년에 김유신에게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보낸 그림을 해독해 준 사실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47) 둘째는, 誓幢和尙碑에 문무대왕(661-682)의 치세의 번영을 기리는 대목이 있는데, 이는 원효의 활동이 문무대왕의 성공적인 치세에 기여했음을 간접적으로 기리는 것으로 보인다.
��宋高僧傳�� 義湘傳에 의하면 元曉는 661년에 다시 입당을 시도하였다가 크게 깨닫고 발길을 되돌린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입당 시도 당시 원효는 그렇게 결연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지가 않다. 당시 그는 이미 나이가 40이 넘었을 뿐 아니라, 薛總도 태어난 시점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두 번째 입당 시도는 다분히 충동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바로 전 해인 660년 태종무열왕의 죽음이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원효는 자신의 정치적 배경을 잃었다고 판단하고서 나서 다시 한 번 자신의 활로를 모색해 본 것이다.48) 그러나 이 충동적인 여행 도중에 그는 뜻하지 않은 깨달음을 얻는다. 마음이 확실히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행 도중 줄곧 끊임없는 갈등 속에서 운수행각을 하던 지난날과 가장으로서의 현실을 돌아보게 되었으며, 그러한 갈등이 그로 하여금 확실한 마음의 정리를 가져다 준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元曉는 樴山(지금의 성환과 천안 사이)의 어느 토굴에서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고 발길을 되돌린다.49) “三界唯心 萬法唯識, 心外無法 胡用別求, 我不入唐”50)으로 표현되는 그의 깨달음은 그의 철학적 진리에 대한 완결적 표현인 동시에, 자신의 삶에 대한 내적인 정당성의 확으로 보인다.
이후 元曉는 국사에 참여하는 한편으로 저술과 강학을 하였으며, 만년에는 국사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오로지 강학과 저술에 몰두한 것으로 보인다. 誓幢和尙碑에는 그가 (만년에) 혈사로 옮겼으며, 왕실을 멀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비에는 또 그가 강의를 하였으며, 죽을 당시에는 大師 칭호를 받는 제자가 9명이나 있었다는 사실도 기록하고 있다. 그는 686년에 70세의 나이로 입적한다.
< 元曉의 행적에 관한 기록들 간의 대조표 >

高仙寺誓
幢和尙碑
��宋高僧傳��
(元曉 條)
��三國遺事��
(元曉不羈 條)
기타
출생연도

617
출생지
佛地村
東海의 湘州
押粱郡, 佛地村, 栗
谷, 娑羅樹 아래
가계
손자: 薛仲業
祖: 仍皮公, 赤大公,
父: 談 柰乃末
子: 薛總
이름
薛氏
薛氏
薛氏, 小名: 誓幢,
第名:新幢, 自名:
元曉, 別名: 始旦
출가시기
쌍상투트는 나이

1차
유학시도
시도 사실만
기록
650(��三國遺事�� 前後所
藏舍利 條)
2차
유학시도


661(��三國遺事�� 前後所
藏舍利 條)
스승관계
學不從師
隨師禀業
學不從師
제자관계
萬善和尙 등
9명의 제자


결혼

太宗武烈王 때
(재위: 654-660)
저술
초기에 阿比曇
연구 ��十門和諍
論�� ��華嚴宗要��
��華嚴經疏��
��三昧經論��
��金剛三昧經論��저술
��華嚴經疏�� 「十回向品」에서 붓을 놓음
無碍行
처음부터
薛總을 낳은 후
임종
680년
3월 3일(음)


기타
匡正國家, 外書
를 읽어 세상 이 배척, 穴寺 에 오래 주석,
왕궁을 멀리함
출가 후 집을 희사
初開寺라 칭함
娑羅樹 옆에 절을
세우고 娑羅寺라함

기타 주요 기록:
1. ��三國遺事��
義相 條: 義湘이 29 살에 출가한 후, 얼마 안 되어 元曉와 입당 을 시도하다 실패. 661년에 배로 입당하였다.
二惠同塵 條: 元曉가 여러 경전에 주소를 달 때 惠空에게 질의 했다.
蛇福不言 條: 元曉가 高仙寺에 있을 때 蛇福의 어머니를 장사지 내 주었다.
廣德嚴莊 條: 元曉가 嚴莊에게 揷觀法을 가르쳐 주었다.
朗智乘雲 條: 元曉가 磻高寺에 있을 때 朗智의 권유로 初章觀文 과 安身事心論을 讚하였다.
2. ��三國史記��
列傳 6: 薛總의 아버지가 元曉인데, 승려였으나 환속한 후 소성 거사라 자처하였다.
3. ��宋高僧傳��
義湘傳: 元曉가 義相과 함께 입당을 시도하다가, 고분에서 깨닫 고 되돌아갔다.






ABSTRACT
Understanding of Wonhyo's Life :
The Overcoming of Idealization in Wonhyo's Life

Kim Jong-in
Lecturer
State University of New Yorkt at Stony Brook

Many modern Buddhist scholars have investigated Wonhyo's life. Their investigation has been very successful in obtaining philological achievements, though the existing materials with regard to his life are very limited in quantity. Through comparison among both similar and differing records, they have clarified historical truth and falsity. However, their success remains within philological study, and shows fundamental limits in their understanding of Wonhyo's life. First of all, they failed to exhibit a rational approach to the key point, which is the co-relation between the strong pathos in his life, manifested in his eccentricities and denial of precepts, and his scholarly achievements.
Most existent studies were approached from a teleological perspective, and idealized Wonhyo's life. According to these studies, Wonhyo was a sage or bodhisattva who founded Korean Buddhism and exerted a strong influence on the entire East Asian Buddhist tradition. Thereupon, all the episodes related to his life were seen as necessary for the creation of his sagehood. All the historical records were rearranged based on the scheme of mechanical causation, in order to show that he followed the same steps that the hero of the “Ten Cow Painting" took through to become a perfect sage.
Wonhyo was depicted by these scholars as an other-worldly figure, standing remote everyone else. The image of Wonhyo idealized as such might arouse some yearning in people's minds. However, this image is not only different from the reality of his life, but also opposes the spirit of his life. This article intends to depict Wonhyo as natural human being of his society. A rational approach based on the historical records has been taken; the eccentricities and denial of precepts in his life has been perceived as evidence of his internal conflict.


각주)-----------------
1) ��三國遺事�� 元曉不羈 條.
2) ��三國遺事�� 元曉不羈 條.
3) ��高仙寺聖敎目錄��; 成田俊治, 1988, 「일한문화교류와 불교」 원광대원불교사상연구원 주최 제 11회 韓日佛敎學術會議 발표논문 요지, p.24; 김상현, 「元曉行蹟에 關한 몇 가지 新資料의 檢討」 ��신라문화�� 5, 동국대학교 경주대학, 1988. 12; ��경산문학�� 8, 한국문인협회 견산지부, 1992, 재수록. p.11.
4) 金延彦, 「普賢寺法印國師碑」 ��韓國金石文』p.412.
5) ��金光明最勝王經玄樞�� 卷1, ��大正新修大藏經�� 56, p.501; ��梵網戒本疏日珠鈔�� 卷1, ��大正新修大藏經�� 62, p.7; ��華嚴經探玄記洞幽鈔�� 卷84, ��日本大藏經�� 經論部 1, p.299.
6) 「靈通寺大覺國師碑」 ��大覺國師外集�� 卷13.
7) 「天竺山佛影寺記」 ��韓國寺刹全書�� 上, p.563.
8) 다음의 학자들이 이런 입장을 표명하였다. 葛成末治, 「新羅誓幢和尙塔碑に就いて」 ��靑丘學報�� 5 (1931); 八百谷孝保, 「新羅僧元曉傳攷」 ��大正大學學報�� 38 (1952); 本井信雄, 「新羅元曉の傳記について」 ��大谷學報�� 41 (1961); 李鐘益, 「新羅佛敎와 元曉思想」 ��東方思想論叢�� 동간행위원회, 서울: 보련각, 1975.
9) 김영태, 「傳記와 說話를 통해 본 元曉硏究」 ��佛敎學報�� 17 (1980), p.9-10. 동국대학교; 김영태, ��佛敎思想史論�� 民族社, 1992. 재수록.
10) ��孔雀王呪經��, ��大正新修大藏經�� 19. 449a; 金知見, 「海東沙門 元曉像 素描」, ��元曉硏究論叢��, 國土統一院, 1987; ��元曉聖師의 哲學世界��, 民族社, 1989. 재수록.
11) ��宋高僧傳�� 卷4, 唐新羅國黃龍寺元曉傳.
12) 위의 기타 기록 참조.
13) ��大覺國師文集�� 卷19, p.11上.
14) ��大覺國師外集�� 卷17, p.8上.
15) 報德은 고구려 사람이지만, 650년 6월 (음력)에 고구려를 떠나 백제의 完山 孤大山으로 갔다는 기록이 ��三國史記��에 나온다. (��三國史記�� 卷22; ��高句麗本紀�� 10, 寶藏王 9년 6월 條).
16) 김영태, 앞의 글.
17) 高翊晉, ��韓國古代佛敎思想史�� 동국대출판부, 1989, p.178; 전미희, 「元曉의 身分과 그의 活動」 ��韓國史硏究�� 63 (1988), p.81.
18) ��三國史記�� 卷42, 列傳 第2, 金庾信 篇, 中.
19) Buswell은 이것을 662년이라고 적고 있는데, 원효가 661년 당나라에로의 2차 유학시도 중 마음을 돌린 이후로부터 계산하여 1년 후로 잡았으리라고 추측은 가나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인지 정확히 기록하고 있지 않고 있다. Buswell, Robert E. JR. “The Chronology of Wonhyo's Life and Works: Some Preliminary Considerations,” 元曉硏究論叢. 國土統一院, 1987; The Formation of Ch'an Ideollogy in China and Korea, Prinston Univ., 1989. p. 64; “Wonhyo as Cultural and Religious Archetype; A Study in Korean Buddhist Hagiography.” ��佛敎硏究�� 11&12 (1995), 한국불교연구원, p.147.
20) 김영태, 앞의 글, p.56-57.
21) 고익진, 앞의 글, p.177.
22) Buswell, 앞의 글, p.150.
23) ��宋高僧傳�� 卷4, 唐新羅國黃龍寺元曉傳.
24) ��宋高僧傳�� 卷4, 唐新羅國黃龍寺元曉傳.
25) 元曉의 탄생 연대는 ��三國遺事�� 元曉不羈 條에 나와 있고, 또 이는 高仙寺誓幢和尙碑에 기록된 그의 사망 연대(680년 3월 3일 (음력))와 당시의 나이(70)로부터 계산한 것과 일치한다.
26) 고익진은 元曉가 출생한 617년에서 고구려가 멸망하는 668년까지의 신라는 백제로보터 16회, 고구려로부터 4회의 침입을 받았으며, 신라 역시 이들 나라에 4번 쳐들어간 것으로 ��三國史記��를 토대로 밝히고 있다. 고익진, 앞의 글, p.178.
27) ��三國史記�� 卷5, 眞德王 條.
28) ��三國遺事��에 나오는 압량군 佛地村이 지금의 경산군 자인면이라는 데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없다.
29) 今西龍, 「新羅上州下州考」 ��新羅史硏究��, 1933; 申瀅植, 「新羅地方制度의 發展과 軍主」 ��韓國古代史의 新硏究�� 一潮閣, 1984. pp. 193-197; 전미희, 「元曉의 身分과 그의 活動」 ��韓國史硏究�� 63 (1988). p.75.
30) ��三國史記�� 列傳, 金庾信.
31) 다른 모든 역사적 혼란기와 마찬가지로 당시는 또한 영웅호걸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三國史記�� 列傳의 상당수가 이시기의 인물들(김유신, 을지문덕, 김인문, 귀산, 强首)로 채워져 있는데, 元曉 역시 난세 속의 영웅들과 비슷한 강렬한 성격을 지녔을 것으로 볼 수 있겠다.
32) 신라시대 육두품에 관한 연구로는, 이기백, 「新羅六頭品硏究」 ��省谷論叢�� 2 (1971); ��新羅政治社會史硏究�� 일조각, 1974; 崔在錫, 「新羅時代 骨品制」 ��동방학지�� 53 (1986); 權悳永, 「新羅官等 阿湌, 奈麻에 대한 고찰」 ��국사관논총�� 1991.
33) 권혜영, 「新羅 官等 阿湌, 奈麻에 대한 고찰」 ��국사관논총�� 1991, p.52: “지금까지의 연구성과에 의하면 4두품 신분은 大舍까지만 승진할 수 있었으며, 5두품은 大奈麻까지, 그리고 6두품은 阿湌까지만으로 그 승진이 제한되어 있었다고 한다”.
34) 후대로 가면서 체제가 정비된 이후에는 유교의 영향도 상당하였지만, 불교는 계속 ��신라문화��의 주류로서의 위치를 유지하였다.
35) ��三國史記�� 卷40, 列傳 4, 强首 條.
36) 誓幢和尙碑에는 그가 外書에도 능했으며 그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배척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37) 夫然大乘之爲體也 肅焉空寂 湛爾充玄 玄之又玄之 ... 寂之又寂之 (��大乘起信論疏��, ��韓國佛敎全書�� 1. 733上).
38) 誓幢和尙碑; ��宋高僧傳�� 唐新羅國黃龍寺元曉傳; ��三國遺事�� 元曉不羈 條.
39) ��宋高僧傳�� 卷4, 唐新羅國黃龍寺元曉傳.
40) 1차 입당 시도 당시 원효의 나이는 34살인데, 이는 우리가 연도와 나이를 추적할 수 있는 그 어떤 승려들보다 유학 시도 당시의 나이가 많다. 참고로 그들의 나이를 보면 다음과 같다.
安含(579-640) 22세 때; 圓測(613-696) 14세 때; 慈藏(608-677경) 28세 때.
41) 이 둘은 서로간에 많은 현실적 도움을 주고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義湘은 유학에 필요한 경비를 댈 수 있었을 것이며, 세상 경험이 많은 8살 위의 元曉는 낯선 상황에 대처할만한 능력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42) ��三國遺事�� 義湘傳敎 條.
43) ��三國遺事�� 元曉不羈 條.
44) 많은 학자들이 元曉의 파계를 元曉의 2차 입당 시도(661) 이후로 보고자 하는데, 고익진은 ��三國遺事��의 태종무열왕은 문무왕(재위 661-681)과 혼동된 것이라고 추측한다(고익진, 앞의 글, p.177). 고익진이 ��三國遺事��의 기록을 부인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三國遺事��에 연대적 오류가 많은 데다가, 元曉의 파계를 2차 입당 시도 중에서의 깨달음과 연결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宋高僧傳��의 기록, 즉 元曉가 입당을 포기한 이후 “임의로 중생의 근기에 수순하여 도무지 일정함이 없었다.”는 것과 연결시켜, 그의 파계를 無碍行의 표현으로 파악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45) Benard Faure는 이 이야기를 구마라집이 왕의 요청으로 계율을 범하고 국가를 위하여 자손을 낳는 이야기와 비슷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설득력 있는 관점이라고 본다. Benard Faure, “Random thoughts: Wonhyo's 'Life' as thought,” ��佛敎硏究�� 11&12 (1995). 한국불교연구원. p.208, p.209.
46) 이야기 속에서 마땅히 한 축을 형성해야 할 것으로 보이는 요석궁의 공주가 완전히 배제되게 된 동기가 무척 흥미롭다. 특히 태종무열왕 직전만 해도 선덕왕과 진덕왕이라는 두 여왕이 신라를 통치하는 등 여성들이 사회 전면에 나선 사회였으며, 태종무열왕의 결혼과 관련해서도 그 상대자인 김유신의 누이 문희의 이야기가 상세히 전해지고 있다. 태종무열왕과 薛總 모두가 元曉에 필적할 만큼 뛰어난 인물이었으므로, 그들만으로도 元曉의 파계를 이상화하기에 충분하다고 보았던 것 같다. 반면에 공주가 과부였다는 사실이 그녀를 통해 元曉의 파계를 승화시키기에 적절치 않은 것으로 보았을 것 같다. 여기서도 이야기 자체가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정교히 짜여졌음을 볼 수 있다.
47) ��三國遺事�� 太宗春秋公 條.
48) 전미희, 앞의 글, p.86-87.
49) 김상현은 月光寺圓郞禪師碑(��朝鮮金石總攬�� 上, p.84)의 “大通이 樴山에 이르러 神聖 元曉가 成道한 곳인 **에 寓居하며 석달동안 定을 닦았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圓朗國師 大通이 樴山에 머물렀던 시기는 845년부터 856년 사이의 어느해였다. 다라서 元曉가 성도한 장소가 직산에 있었고, 9세기 중반에는 이미 기념할 만한 곳으로 인식되고 있어, 당시의 고승 대통이 그곳에서 석 달 동안이나 우거하며 수행할 정도로 유명한 곳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 직산은 지금도 성환과 천안 사이에 있고, 남양만의 당항성으로 가는 중도에 해당한다. 신라의 海門이라고 한 ��宋高僧傳��의 기록이나, 당시 신라에서 당나라로 통하던 교통로와도 어긋나지 않는다.” 김상현, 앞의 글, p.7.
50) ��宋高僧傳�� 卷4, 唐新羅國黃龍寺元曉傳.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