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적 사유의 대화가능성을 위한 방법론적 모색
― 원효, 워즈워스, 미메시스 손현 (성결대학교)
1. 시작하는 말
통상적인 용례에 따라 일단 동양과 서양이라는 두개의 변별적 용어를 받아들이기로 하자. 그리고 필자는 최근 인문학적 화두로 부상한 ‘동·서양 적 사유의 대화가능성’이라는 주제에 주목한다. 상대적인 방위의 개념인 동과 서를 동양과 서양으로 고유명사화했을 때 그 차이는 단순한 구분을 넘어 서양중심적인 차별의 개념을 내포한다. 대부분의 동양 국가에서 ‘근 대화’란 ‘서양화’를 의미한 점에서 최소한 근대로 특징지어지는 시기에 이 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러니까 서양주도적인 근 대화에 대한 자기반성의 국면으로서 ‘탈근대’로 불리는 1960년대 이후의 오늘날에 이르러, 동양과 서양은 더 이상 일방적인 주객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 대해 주체적이고도 객체적인 입장을 공유하는 대화적 관계 로 이해된다. 혹은 최소한 그런 지향점을 상상하게 되었다. 여기서 대화란, 대표적으로 바흐친(M. Bakhtin)의 대화주의(dialogism) 이론을 빌어 이해하 자면, 각 개체를 그 단일적인 통일성이 아니라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성내 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동시대적인 상호 영향관계뿐만 아니라 과거 156 유럽사회문화 제16호 혹은 미래와 연결된 비통합적 요소들과의 상호 교접을 포함하는 것으로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린 이질적인 것들의 공존으로서 다성성(polyphony) 과 비종결성(unfinalizability)을 특징으로 한다(5-46). 다시 말해 오늘날의 인문학은 통상적인 동·서양이라는 구분을 그런 구분이 낯설어지는 지점으 로 끝없이 이동시키려는 노력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화의 핵심이 자기동일성을 해체함으로써 개체들 간의 공존적 관계성을 구축하는데 있다고 할 때 오늘날 동·서양적 사유의 대화가능성 을 위한 일반화된 방법론적 원칙, 즉 일명 ‘거리 최소화의 원칙’으로 불릴 만한 것으로, 비교를 통해 공통성과 차이를 이해함으로써 서로 간의 이질 성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은 대화의 바람직한 방향성이라는 점에서 재검토 를 요한다. 간단한 예로 최근 동·서양적 사유의 대화가능성이라는 화두를 주도하는 분야중의 하나인 불교와 포스트모더니즘 간의 관계를 보자. 불 교는 기원전 5세기경 인도의 석가모니가 창시한 종교로서 대부분의 동양 국가가 한 때는 불교 국가였다는 점에서 동양적 사유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서양 근대의 사상적 경향을 이르는 모더니 즘 “이후”(post)의 “탈”(post) 모더니즘적 사상 경향을 통칭하는 용어다. 전 자가 존재의 고유한 속성을 부정하고 대신 인연에 따른 변화와 상호관계 성을 강조하는 ‘연기론’(緣起論)을 특징으로 한다면 후자는 이성주의와 개 인주의 그리고 통합지향적인 사고에 경도된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과 반성 으로서 탈중심적인 다원주의를 특징으로 한다. 그러니까 불교와 포스트모 더니즘은 동양의 전통 사상과 서양의 가장 현재적인 사상으로서 오늘날에 이르러 만나고 있다는 것인데, 그 만남의 핵심은 일차적으로 두 사상 간의 강한 친연성에 있다. 새로운 윤리학의 가능성을 불교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에서 탐색하는 박진(Jin Y. Park)의 ?불교와 탈근대성―선, 화엄, 불교 적이며 포스트모던적인 윤리의 가능성? (Buddhism and Postmodernity: Zen, Huayan, and the Possibility of Buddhist Postmodern Ethics)을 비롯하여 불교, 특히 원효(元曉)의 사상을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론적 개념을 원용하여 재해석하는 김형효의 ?원효의 대승 철학?, 하이데거의 존재(Sein) 개념과 동·서양적 사유의 대화가능성을 위한 방법론적 모색 ― 원효, 워즈워스, 미메시스ㆍ손현 157 원효의 진여(眞如) 개념을 동일선상에 놓고자하는 김종욱의 ?원효와 하이 데거의 대화―근본의 사유?, 장시기의 원효와 들뢰즈-가타리의 만남― 깨달음의 몸과 기관들 없는 몸 등은, 강조점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나, 본질의 해체를 주장하고 존재의 독립성보다는 관계성을 중시하는 점에 서 불교와 포스트모더니즘을 친연한 것으로 연결시키고 있으며 그런 친 연성을 대화의 시발점으로 삼는 공통된 경향을 보인다. 물론 불교와 포스트모더니즘 간의 차이를 식별하는 일도 중요하다. 예 를 들어 ?원효와 하이데거의 비교 연구―인간론을 중심으로?에서 박찬국 은 원효와 하이데거를 철학적 현재성이라는 관점에서 비교하면서 양자가 실존주의적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라면 전자가 수행론 중심의 실천적 측 면을 강조하는 반면 후자는 존재의 온전한 재현을 역사적 조건의 문제로 방기함으로써 실천적 문제를 등한시함을 지적한다. 언어관의 측면에서 불 교와 포스트모더니즘을 비교하는 이도흠은 원효의 언어관과 포스트모더 니즘 에서 언어에 대한 공통된 불신에도 불구하고 전자가 역사적 정박으 로서 세속적 언어와 진리의 언어 간의 회통(會通)을 주장한다면 후자는 “회의주의적 인식론에 빠지고 만다”고 지적한다(40). 박찬국이 이야기하듯 이 대화란 “일정한 공통성과 차이가 있을 경우에만”(23) 가능하기에 이런 차원의 비교작업은 현재 동·서양적 사유의 대화가능성을 모색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론으로 수용되고 있다. 그런데 공통성과 차이를 중심으로 한 비교연구는 적어도 그것이 비교 대상간의 거리를 최소화하고자하는 목적으로 진행되는 한 다음의 두 가지 이유에서 동·서양적 사유의 대화가능성을 제한해 온 것으로 보인다. 첫째, 지금까지의 연구는 동·서양의 사유가 ‘서로 다르다’는 전제에서 출발함으 로써 공통성을 강조하는데 이는 대화의 조건으로서 각 사유의 자기동일성 을 해체하기 보다는 오히려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두 개의 다른 비교 대상은 항상 닮은 데가 있으면 다른 데도 있다는 사실을 기본적으로 인정 할 필요가 있다. 공장의 복제품일지라도 전적으로 동일할 수는 없으며 최 소한 인간의 일이라고 할 때 전적으로 다른 것도 없다. 그런데 ‘다르다’를 158 유럽사회문화 제16호 전제로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비교는 공통성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이는 비교의 대상을 동질화시킴으로써 각 대상의 자기동일성 또한 강화시킨다. 다르다고 여긴 것에서 발견한 공통성이 가져다주는 의외성을 자기동일성 이 해체될 때의 낯섦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 지금까지 도 출된 공통성과 차이가 서로가 서로에 대한 기준이 되는 상호참조적 (inter-referential) 관계라는 사실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 불교와 포스트모더 니즘이 서로 닮았다거나 다르다고 할 때는 전자를 후자의 언어로 그리고 후자를 전자의 언어로 재해석하는 작업이 되는데, 이는 서로의 사상을 상 호 복제하는 방식으로 각 사상의 이념적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효과를 낸다. 불교는 포스트모던적 개념에 비추어 더욱 불교다워지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차이조차도 비교대상에 비추어 각 사유의 해석적 통 일성을 강화하는데 기여한다. 물론 이런 비교를 통해 각 사상의 자기이해 는 더욱 깊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자기이해는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 효과에 의해 내적 논리를 강화할 뿐 각 사상을 해석적 개방성과 비 종결성에 기반한 대화의 지점으로 이동시키는 것은 아니다. 비교의 과정 에서 자기반영적 관계를 흔드는 보다 객관적이고도 이질적인 요소의 개입 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 하에 필자는 동·서양적 사유의 대화가능성을 모색하는 새로운 방법론으로 다음의 네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대화란 양자 간에 일정한 공통성과 차이가 있을 경우에만 가능하 다는 전제를 받아들이되 그 방향은 공통성에서 출발하여 차이를 천착하는 것이어야 한다. 대화가 자기동일성을 넘어선 지점에서 가능하다고 할 때 그것은 기본적으로 자기이해를 요하지만 핵심적으로는 자기이해를 방해 하는 이질적 대상과의 조우를 요구한다. 서로 닮았다고 여긴 대상에서 발 견하는 타자성을 온전히 수용하는 것이야 말로 자기해체적인 대화의 핵심 요소라는 것이다. 따라서 동·서양적 사유의 대화란 화해를 도모하기 보다 는 차이를 천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둘째, 비교의 기준을 보다 객관화한다. 뮬론 비교란 기본적으로 상호성 동·서양적 사유의 대화가능성을 위한 방법론적 모색 ― 원효, 워즈워스, 미메시스ㆍ손현 159 을 내포하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객관화된 기준을 세우기란 사실상 불가능 하다. 하지만, 비유적으로 말해 실험실에서 어떤 변수의 작용을 관찰하기 위해 특정 조건을 고정시켜 반복하듯이, 자의적 요소를 최대한 제거한다 는 점에서 객관성을 확보할 필요는 있다. 다시 말해 공통성에서 출발하여 차이로 나아가겠다고 할 때 우선 공통성의 기준을 실험실적인 반복성이라 는 점에서 보다 객관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셋째, 위의 두 가지 조건을 선행시킬 경우 대화는 장르(genre) 횡단적일 수 있다. 지금까지 동·서양적 사유의 대화가능성은 철학은 철학과, 종교는 종교와, 문학은 문학과 더불어 동일 장르 내에서 모색되는 것이 일반적이 었다. 이는 잘못된 것은 아닐지라도 대화의 범위를 확실히 제한한다. 공통 성뿐만 아니라 차이에 대한 이해를 통해 대화가능성을 모색함에도 불구하 고 사실상 해소 불가능한 차이는 처음부터 제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르 횡단적인 비교대상의 경우 장르의 차이가 때로는 사유의 차이를 가르는 핵심 요소일수도 있다. 넷째, 동·서양 사유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났다면 그 차이를 자기해체 적인 대화의 지점으로 이끌어 가는 방법론으로 필자는 미메시스적 분석법 을 제안한다. ‘재현’ 혹은 ‘모방’을 의미하는 미메시스를 외래서 그대로 사 용할 때 이미 암시되었듯이 미메시스적 분석법이란 에리히 아우어바흐 (Eric Auerbach)가 ?미메시스―서구문학에서의 현실 묘사?(Mimesis: The Representation of Reality in Western Literature)에서 채택한 방법론을 모델로 한다. 이는 사유의 내용보다는 형식에 대한 분석법으로 상호참조적인 해 석적 관계를 지양할 뿐만 아니라 비교대상간의 거리를 (억압하는 것이 아 니라) 객관적으로 노출시킨다는 점에서 동·서양의 사유를 보다 개방적인 대화의 지점으로 이동시킨다고 본다. 필자는 위의 조건을 만족시키는 대화상대로 원효와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를 비교해보고자 한다. 각각은 동양의 불교 사상과 서양의 낭 만주의 사상을 대표하는 인물로 동·서양적 사유의 새로운 대화가능성을 위한 모델로 선택되었다. 본 연구의 목적은 말 그대로 방법론적인 모색에 160 유럽사회문화 제16호 있으므로 실험적인 성격이 강하며 전문적인 비교연구를 의도하는 것은 아 니다. 연구는 각 사유의 가장 일반화된 개념과 논쟁거리를 중심으로 진행 될 것이다. 또한 위에서는 기존 연구의 방법론적인 문제점을 예시 차원에 서 불교와 포스트모니즘의 경우를 들어 간략히 언급하였다면 아래에서는 본격적인 모색의 일환으로 원효와 워즈워스의 예를 통해 기존 방법론의 문제점을 보다 구체적으로 예증하는 과정도 포함될 것이다. 2. 실험실적인 반복성 원효와 워즈워스의 만남은 매우 낯설다. 전자는 7세기경 한반도의 고대 왕조국가인 신라의 고승(高僧)으로 ?대승기신론 소·별기?(大乘起信論疏別 記)와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등의 불교경전 해설서를 통해 동양 적 불교교리의 정립에 영향을 끼친 종교사상가라면 후자는 18~19세기를 걸쳐 산 영국의 시인으로 당시의 주요 예술운동인 낭만주의를 대변하는 시인으로서, 각기 다른 시대에 다른 관심사를 가지고 살았다고 할 수 있 다. 또한 불교가 동양인들에게 하나의 무의식으로 존재하는 동양적 사유 의 전형이라면 낭만주의야 말로, 아더 러브조이(Arthur O. Lovejoy)의 말을 빌면, 서양 역사에 있어 “이보다 더 심오하고도 중요한”(294) 변화의 예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영향력을 발휘한 사상으로 매우 서양적인 요소라는 것 또한 둘의 만남을 어색하게 만든다. 불교와 낭만주의 간의 이질성에 대 한 선입견이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원효와 워즈워스는 다음과 같 은 일명 ‘마음의 발견’에 관한 일화를 중심으로 각각의 사유를 전개한다 는 점에서 시·공간적인 단절을 뛰어넘는 근친성을 보인다. 원효는 젊었을 때 동료 의상(義湘)과 함께 불법을 공부하기 위해 당나 라로 유학을 떠난다. 어느 날 강에 이르러 배를 타려하는데 비바람이 불고 어두워져 가까운 토굴에 머무르게 된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일어난 일행 은 자신들이 머물렀던 토굴이 사실은 파헤쳐진 무덤이었음을 알게 된다. 동·서양적 사유의 대화가능성을 위한 방법론적 모색 ― 원효, 워즈워스, 미메시스ㆍ손현 161 무덤을 토굴로 알고 마음 편히 하룻밤을 보낸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날씨 가 궂어 같은 곳에서 하루를 더 묵기로 한다. 그런데 밤이 깊어 자리에 들 려고 하니 이제는 귀신이 나타나 원효를 괴롭힌다. 똑같은 장소가 생각하 기에 따라 전혀 다른 심리적 파장을 만들어낸 것이다. 한편 워즈워스는 대학 시절 친구 존스(Jones)와 함께 심플론 고갯길을 거쳐 알프스 정상을 넘어가는 등정에 나선다. 시인이 되기를 꿈꾸고 있는 젊은이로서 숭고를 상징하는 자연 대상을 직접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데 등정 도중 어쩌다 일행에서 낙오해 길을 헤매는데, 우연히 지나던 농부 로부터 자신이 그토록 고대하던 알프스 정상을 부지중에 이미 넘어왔음을 알게 된다. 즉 숭고의 대상을 눈앞에 두고도 시인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이다. 원효의 경우처럼 동일한 물리적 대상이 생각하기에 따라 전혀 다 른 심리적 차원을 만들어내는 경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각각 “무덤 일화”1)와 “심플론 고갯길 일화”로 알려진 위의 두 일화는 장소와 몇 가지 소품을 제외하면 ‘외부대상에 우선하는 마음의 발견’을 주제로 한다는 점에서 매우 일치한다. 7세기 아시아의 후미진 토굴에서 일어난 일이 19세기 유럽의 알프스 등산로에서 동일한 형태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반복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사실 이런 류의 ‘세상만사 마음먹기 달렸다’는 이야기야 흔하지만 그것이 자의식화하면서 사유의 중 심 화두로 부상하였다는 점이다. 원효와 워즈워스에게 각 일화는 사유의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적 계기로 작용한다. 이런 흔한 일화가 왜 유렵에서 는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중요한 의미를 띠고 부상하였느냐는 질문을 해 볼 필요도 있다.2) 또한 각 일화는 주인공의 개성이 드러나는 개인적 차원 1) 이 일화는 대중적으로는 “해골물 일화”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토굴에 묵는 도중 한밤에 갈등을 느껴 바가지로 물을 마셨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 바가지가 해골 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일화가 등장하는 ?송고승전?(宋古僧傳)에는 해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며 해골은 이야기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사후에 추가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2) 여기서 우리는 각 일화가 등장한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볼 수 있다. 원효가 활동한 7세기의 신라는 이웃 국가인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한반도 162 유럽사회문화 제16호 의 이야기라는 점도 특징적이다. 우리는 일화 자체가 아니라 일화를 통해 원효나 워즈워스라는 매우 구체적인 개인을 기억한다. 그러니까 주제나 형식적인 면에서 매우 흡사한 경험이 약 1200년의 시차를 두고 동양과 서 양에서 각각 반복되고 있다는 것인데 이 공통성을 기초로 우리는 각 일화 가 어떤 사유로 발전되어 나가가는지를 추적함으로써 두 사유간의 새로운 대화의 방법론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3. 차이의 천착 원효는 무덤 일화를 통해 발견한 마음의 중요성을 “일심론”(一心論)으 로 완성한다면 워즈워스는 그것을 “상상력론”으로 완성한다. 일심론과 상 상력론은 일단 기존의 비교연구에서처럼 공통성과 차이를 나열하는 방식 으로 접근할 때 풍성한 내용을 제공한다. 둘은 이름이 다르듯이 동일한 이 론은 아니지만 공통성 또한 일정하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선 무덤 일화에 대한 원효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분별하는 마음이 일어나기에 온갖 차별 현상들이 생겨나고, 분별하는 마 음이 사라지니 토감과 고분이 별개의 것이 아니구나. 모든 세계(三界)가 오 직 분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요, 모든 차별 현상들이 오직 마음 헤아림 의 산물이로다. 마음의 분별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은 없는 것이니, 어찌 마음 밖에서 따로 구하리.3) (재인용, 박태원 26) 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으며 워즈워스가 활동한 19세기의 영국은 산업혁 명을 통해 유럽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즉 각 시대는 전쟁 혹은 혁명을 통해 공통적으로 격변과 부흥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었으며 ‘마음의 일화’는 그런 시대성에 부응하는 새로운 개인성, 즉 내면에 기초한 보다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개인성을 호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3) 生故種種法生 心滅故龕墳不二 又 三界唯心萬法唯識 心外無法故用別求 동·서양적 사유의 대화가능성을 위한 방법론적 모색 ― 원효, 워즈워스, 미메시스ㆍ손현 163 마음을 쓰지 않을 때는 무덤일지라도 편안하였지만 마음을 쓰게 되니 무덤이어서 근심이 생긴다. 그와 같이 마음이 생기면서 갖가지 분별하는 것들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분별이 사라지니 오직 마음이 세계의 법이 요 근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마음은 근심과 분별의 원인이니 근심을 없 애기 위해 마음이 생기지 않게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마음이 근심의 원인이라는 사실 자체에 마음의 중요성이 있다. 즉 원효는 우리가 마음을 벗어날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 다시 말해 “마음 밖에 따로 구[할]” 일이 없음을 깨달음으로써 마음으로부 터 생기는 모든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사 실을 아는 것, 모든 근심과 분별이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을 아는 것이 중요 하다. 원효는 이런 마음을 그로부터 온갖 법이 생겨나는 만유의 실체라는 의 미로 일심이라고 부른다. ?대승기신론 소·별기?에서 원효는 일심 사상을 다 음과 같이 풀이한다. 모든 존재의 참모습은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적정(寂靜)하여 오직 일심일 뿐인데 [. . .] 이 일심의 체가 본각(本覺)이지만 무명(無明)4)에 따라서 움직여 생멸을 일으킨다.5) (86-87) 마치 상심(常心)이 무명의 연을 따라서 변하여 무상심(無常心)을 일으키 지만 그 상성(常性)은 항상 스스로 변하지 않는다고 말함과 같으니 이처럼 일심(一心)이 무명의 연을 따라 변하여 많은 중생심을 일으키지만 그 일심은 항상 스스로 둘이 없는 것이다.6) (131) 4) 은정희의 주석에 따르면 “진여가 한결같이 평등한 것을 알지 못하고 형상의 차별 적인 여러 모양에 집착하여 현실세계의 온갖 번뇌와 망상을 이루는 근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21; 각주12). 5) 以一切法無生無滅 本來寂靜 唯是一心 [. . .] 又此一心體是本覺 而隨無明動作生滅 6) 如說常心隨無明緣戀作無常之心 而其常性恆自不變 如是一心隨無明緣戀作多衆生心 而其一心常自無二 164 유럽사회문화 제16호 일심은 본래적인 것과 파생된 것, 깨달음과 무지한 것, 항상성과 비항상 성간의 대비를 통해 설명된다. 존재의 참모습은 일심이지만 어리석음 때 문에 일체의 왜곡적 구분이 생기며 일심은 항상 같은 마음이나 역시 깨닫 지 못하여 현세의 인연에 따라 수많은 차별적인 중생심을 만들어 낸다. 여 기서도 다시 한 번 이런 대비가 진세와 현세 혹은 일심과 중생심이 따로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깨달음의 원천은 둘을 구분하여 현세와 중생심 등을 솎아내는 것이 아니라 둘이 다르면서도 근 본에 있어 하나임을 아는데 있다. “이중성이 서로 차이 속에서 동거하는 현상”(김형효 68)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한 가지 맛의 약이 그 옮겨 가는 곳에 따라서 여러 가지 다름이 있으나, 이 약의 참된 맛은 산에 머물고 있는 것”이나, “빈 골짜기에 소리가 없으나 부름에 따라 메아리가 나오는 것”(71), “흙덩이와 티끌” 및 “금과 [금으로 빚은] 장신 구”(125), 그리고 바닷물이 움직이는 것을 물결이라 하지만 이 물결의 움 직임을 바닷물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57, 171) 등의 비유를 통해 거듭 설명된다. “결국 평등하게 되고, 변하거나 달라지는 것도 없으며 파괴할 수도 없는 것이어서 오직 일심(一心)뿐”(103)이라는 것이다. 이런 설명에 서 주목할 것은 위와 같은 논지의 일심론이 문맥을 바꾸어가며 거듭 반복 된다는 것이다. 마치 마음이 인연에 따라 번뇌를 일으키더라도 궁극적으 로 일심으로 돌아오듯이 원효의 일심론도 문맥을 달리하여 반복되면서 결 국 일심으로 복귀하는 구조를 갖는 점이 특징적이다. 반면 워즈워스는 자신의 시인으로서의 성장을 그린 자전적 시 ?서곡? (The Prelude)에서 “심플론 고갯길 일화”를 통해 다음과 같은 상상력론을 펼친다. 상상력이여! ―여기 그 힘이 내 노래의 눈과 나아가는 길 앞에 마치 아버지 없는 연무처럼, 스스로를 일으켜 세워, 그 재능의 온갖 능력을 다 발휘하여, 내 앞을 가로질러 동·서양적 사유의 대화가능성을 위한 방법론적 모색 ― 원효, 워즈워스, 미메시스ㆍ손현 165 솟아났었지. 나는 구름에 휩싸인 듯이 길을 잃었었지, 뚫고 나가려 애쓸 생각도 않고 멈춰 섰었지, 그리고 이제야, 정신을 차려, 나는 내 영혼에게 말하네, “나 그대의 영광을 알아보노라.” 그런 정복의 힘을 지닌 채, 그런 놀라운 약속이 현현하는 가운데, 감각의 빛이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여주는 섬광가운데 꺼질 때, 그곳에 위대함이 깃드네, 우리가 젊었든 늙었든 그곳에 깃드네. 우리의 운명, 우리의 자연, 우리의 고향이 무한성과 함께 하네―오직 그곳에 함께 하네; 그것은 희망, 결코 다함없는 희망과 함께 하네, 노력, 기대, 또한 욕망, 그리고 항상 새로운 가능성으로 떠오르는 그 무엇과 함께 하네. 그런 전투적 깃발 아래에서 마음은 자신의 힘을 증명할 어떤 전리품이나 성과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네, 스스로의 완성이요 보상인 생각의 축복에 싸여―7) (필자 번역) 7) Imagination!—lifting up itself Before the eye and progress of my song Like an unfathered vapour, here that power, In all the might of its endowments, came Athwart me. I was lost as in a cloud, Halted without a struggle to break through, And now, recovering, to my soul I say 'I recognise thy glory'. In such strength Of usurpation, in such visitings Of awful promise, when the light of sense Goes out in flashes that have shewn to us The invisible world, doth greatness make abode, There harbours whether we be young or old. 166 유럽사회문화 제16호 (6: 525-46) “심플론 고갯길 일화”는 경험 당시에는 워즈워스에게 별다른 의미를 남 기지 않는다. 위의 해석은 실제 경험 후 14년의 시차를 두고 시를 쓰는 현 재의 시점에 이르러 완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워즈워스에게 상상력에 대한 깨달음은 어느 순간 “그 재능의 온갖 능력을 발휘하여” 한꺼번에 현 현하듯이 이루어 진 것으로 묵시적이고도 운명적인 성격을 띤다. 워즈워스로서는 당연히 시적 감동을 기대하고 오른 등정 길이었기에 알프스의 자연에 자신의 시심(詩心)이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시 인에게는 시의 죽음을 경고한 것이라고 할 만하다. 거대한 상징 앞에서 시 인의 상상력은 죽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경험에 대한 시인의 해 석은 큰 반전과 함께 한다. “나 그대[상상력]의 영광을 알아보노라”라는 단도직입적인 문구가 여실히 전달하듯이 상상력의 죽음이 오히려 더 위대 한 상상력의 발견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반전의 핵심은 상상력 이 스스로의 경험주의적 한계로부터 벗어나는데 있다. 즉 시인은 자연과 상 상력간의 단절의 경험을 통해 상상력이란 ‘자연이 이끈’ 힘이 아니라 오히 려 ‘자연을 이끄는’ 힘임을 깨닫는 것이다. 상상력의 위대함은 자연에서 독 립하여 “감각의 빛이 [. . .] 꺼질 때” 자율적인 마음의 능력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외부의 물적 자극에서 독립하여 “보이지 않는 세계”를 드러내는 마음의 창조력이 상상력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이렇게 새로 발견한 마음의 중요성을 생각이 “스스로의 완성이요 보상”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Our destiny, our nature, and our home, Is with infinitude―and only there; With hope it is, hope that can never die, Effort, and expectation, and desire, And something evermore about to be. The mind beneath such banners militant Thinks not for no trophies, struggles for no spoils That may attest her prowess, blest in thoughts That are their own perfection and reward― (6: 525-46) 동·서양적 사유의 대화가능성을 위한 방법론적 모색 ― 원효, 워즈워스, 미메시스ㆍ손현 167 마음의 발견을 통해 존재의 진리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워즈워스의 상 상력론은 원효의 일심론과 몇 가지 점에서 다르다. 우선 일심론과 상상력 론이 공통적으로 마음이 세상법의 근원임을 이야기하고 있으나 전자가 마 음내의 마음의 작용에 집중한다면 후자는 대상에 대한 마음의 작용에 집 중한다. 용어 자체가 그렇듯이 일심이란 마음의 본성에 대한 이름이라면 상상력은 대상에 대한 마음의 작용을 이르는 말이다. 둘째, 일심이 인연에 따라 변하는 무상심의 중심이 되는 본래적인 마음이라면 상상력은 대상을 향해 밖으로 나가는 마음이다. 바다와 물결의 관계로 비유되듯이 일심과 무상심이 원심력과 구심력의 관계라면 “연무”(vapour)로 비유되는 상상력 은 고정되지 않는 휘발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런 이유로 일심론이 균형 잡힌 마음의 평정심을 강조한다면 상상력론은 마음의 고양감을 강조한다. 전자의 마음이 반복적인 순환운동을 특징으로 한다면 후자에서 마음은 외 부의 것을 향해 점점 부풀어 오르는 특징이 있다. 상상력은 “스스로를 일 으켜 세워” 나타나고 “정복하는 힘”으로 드러나며 “결코 다함없는 희망” 과 “항상 새로운 가능성으로 떠오르는 그 무엇”과 함께 한다. 더욱이 상상 력은 여러 번에 걸쳐 “힘”으로 연상된다. 좀 거칠게 말하면 일심론이 본래 적인 것에서 벗어나 현세적인 욕망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중시한다면 상상력론은 물질주의적 한계에서 벗어난 욕망의 확장 가능성에 강조를 둔 다. 전자가 마음을 다스린다면 후자는 마음을 분발시키는 것이다. 욕망이라는 관점에서 일심론과 상상력론을 정반대의 방향으로 해석해 놓았지만 스펙트럼을 넓혀 둘 간의 공통점을 찾자면 그 또한 가능하다. 이 는 두 개의 역설, 즉 일심이 중생심과 둘이면서 하나라는 역설과 상상력 또한 죽음의 사실과 공존한다는 역설로 설명할 수 있다. 삶의 모순과 다양 성을 역설의 논리로 혼융 내지 통섭하고자 하는 점에서 두 사유의 공통성 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먼저 원효의 일심론이 본래적인 것으로의 귀환 에 강조를 둔다고 해서 세속적인 인연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본래적인 것이라고 해서 세속적인 것을 부정하고 돌아갈 어떤 근원적 실체가 있다 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래적 이치에 대한 깨달음의 자리를 168 유럽사회문화 제16호 의미하며 일심론은 세속적인 것이 성스러운 것과 서로 다르지 않다는 진 속일여(眞俗一如)의 정신을 통해 그 실천적 측면을 강조한다. 하나가 아니면서 둘을 융합하였으므로 진(眞)이 아닌 사(事)가 애초에 속(俗) 이 된 적이 없으며, 속이 아닌 이(理)가 애초에 진이 된 적이 없다. 둘을 융합하 였으면서도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진과 속의 자성이 세워지지 않는 것이 없고, 염(染)과 정(淨)의 상이 갖추어지지 않는 것이 없으며, 양변을 떠났으면서도 중 간이 아니기 때문에 유(有)와 무(無)의 법이 만들어지지 않는 바가 없고, 옮음과 그름의 뜻이 두루 하지 아니함이 없다.8) (?금강삼매경론? 19) 진과 속은 둘이 아니기 때문에 일심이 아니면 중생심이거나 중생심이 아니면 일심인 것이 아니다. 또한 진과 속은 둘은 아니지만 하나도 아니기 때문에 일심이나 중생심은 하나로 환원될 수 없으며 대신 서로 다른 채 자유롭게 세워질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중간에 있다는 것도 아니다. 둘 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지점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회색지점이 아 니라 이것과 저것을 모두 넘나들 수 있는 자유 자재함 혹은 머물지 않음 의 지점을 의미한다. “이미 ‘다르지 않음’이니 어찌 ‘하나’가 있을 것이며 참됨과 허망함이 녹아 섞였으니 무엇을 ‘참됨’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 다(재인용, 박태원 309). 화려한 연꽃이 향기로운 들판에서 피지 않고 냄새 나는 수렁의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린 것과 같이 이질적인 것이 서로 한 몸 을 이루었기에 이질적임에도 둘이 아니라는 역설 속에 일심론의 참된 도 리가 있는 것이다. 이는 “세움이 없되 세우지 않음이 없[음]”(?금강삼매경 론? 20)의 역설로 거듭 표현되기도 한다. 워즈워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필자는 앞서 창조적 상상력을 강조했지 만 그 상상력이 자아의 죽음을 근거로 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예를 들어 상상력으로 비유된 연무는 “아버지가 없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낭 8) 不一而融二故, 非眞之事未始爲俗, 非俗之理 未始爲眞也. 融二而不一故, 眞俗之性無 所不立, 染淨之相莫不備焉, 離邊而非中故, 有無之法無所不作, 是非之義莫不周焉. 동·서양적 사유의 대화가능성을 위한 방법론적 모색 ― 원효, 워즈워스, 미메시스ㆍ손현 169 만주의 비평가 폴드만(Paul de Man)에 따르면, 상상력이 “궁극적인 근원으 로부터 단절되어 있음”(90)을 의미한다. 불교적으로 이야기하면 마음에 본 래의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이다. 기대를 안고 시인을 산 정상으로 이끌 던 모든 안정된 의미의 근원이 일시에 사라진 것이다. 또한 감각의 빛이 꺼지면서 드러나는 “보이지 않는 세계”라는 것도 “경험세계에 반하는 정 신적,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는 점에서 자아의식의 해체를 요구한다. 외부 적으로 자아를 구성하는 관습화된 의미가 제거되고 대신 순수한 내면과 대면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콜리지(S. T. Coleridge)의 유명한 정의 에 따르면 상상력은 “재창조하기 위해 용해하고 흩뜨리고 분산시킨다”(It dissolves, diffuses, dissipates, in order to recreate)(Lee 329). 상상력이 창조력이기는 하나 그것은 어떠어떠한 것을 창조하기보다는 창조의 미래적인 가능성일 따름이라는 점 또한 지적되어야 한다. 그것은 “놀라운 약속”이며 “ 희망,” 그리고 “노력, 기대, 욕망”과 함께 한다. 상상 력의 확장성을 의미하는 “항상 새로운 가능성으로 떠오르는 그 무엇” 또 한 “그 무엇”일 뿐 ‘무엇인지’ 특정되지 않는다. 상상력은 워즈워스가 생 각하는 마음의 표본일 뿐이지 어떤 마음인지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런 특징을 두고 앤토니 이스트홉(Antony Easthope)은 “탈인 식”(derealization)(44)이라는 용어를 통해 외부로부터의 의미 작용을 최소 화하려는 워즈워스적인 인식 태도를 지적하였으며 토마스 위스킬(Thomas Weiskel)은 “읽기에 대한 저항”(the resistance to reading)(167-204)이라는 개 념을 사용하여 주체로서 이데올로기화한 자아인식에 저항하는 태도를 지 적하였다. 폴드만은 상상력의 실패의 경험에 특히 주목하여 워즈워스에게 이 구절이 역사가 “어떤 행위, 위험하고도 파괴적인 행위인한 [. . .] 의지 의 오만(hubris)에 다름 아니다”(57)는 인식을 얻는 계기가 된다고 말한다. 상상력의 발견에 따른 욕망의 고양감과 더불어 관습화되고 고착된 욕망의 파괴성에 대한 인식이 동시에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원효와 워즈 워스는 약간의 강조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지향점에 있어 상호모순적인 해 탈과 욕망 혹은 해체와 구성의 요소를 동시에 품는 역설의 세계관을 보여 170 유럽사회문화 제16호 주는 점에서 공통적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이런 해석적 공통성은 각 사유가 수용적 측면에서 어떤 변형을 겪느냐는 질문 앞에서 무의미해 진다. 사실 어느 사유든 삶의 다면성을 포 섭하고자하는 점에서 그 정수에 이르면 논리적 긴장과 복잡성을 띄게 마련 이다. 하지만 그런 긴장과 복잡성은 일반적인 수준에서 수용될 때 일정한 단순화를 수반한다. 사유의 정수가 제공하는 긴장 자체가 일상성을 넘어서 는 정신적인 집중과 고통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단순화 내지 왜 곡은 각 사유의 차별성, 때에 따라서는 아주 사소한 차이에 의해 그 방향성 이 심각하게 달라진다. 원효와 워즈워스가 이 점에서 좋은 예가 된다. 필자는 위에서 원효적인 해탈이 초월성과 세속성을 동시에 품은 자유 자재의 상태임을 강조하였으나 그의 사상이 대중적으로 수용될 때 두 상 반된 요소간의 상생적 긴장은 유지되기 힘들다. 대신 그것은 두 가지 방향 중 반세속주의로 점점 왜곡된다. 원효의 사유가 종교적인 한에서 반세속 성은 피할 수 없다 할지라도 문제는 왜곡의 정도와 그 용이함이다. 우선 원효가 ?금강삼매경론?에서 이미 경고한 것으로 “일심”의 ‘일’과 관련한 오해를 지적할 수 있다. 즉 둘이 아니라고 해서 하나라고 헤아리는 것과 하나가 아니라고 해서 “두가지 진리가 있고 하나인 진실은 없다고 헤아 려” 중도로서의 하나의 진실에 머무는 것이다(515). 전자는 일심을 모든 번뇌와 다툼을 없앤 초월성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며 후자는 둘 중 어느 것 에도 마음을 두지 않는 회의주의로 환원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원효가 이 두 가지 오해를 “약을 복용하다가 병을 이룬 것”으로 비유하고 “치료하기 가 어렵다”고 하였는데(515), 현실 부정의 방향성이 사유의 비본래적인 왜 곡으로 내재해 있음을 언급하는 것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의 과정에 고통의 요소가 강조되는 것 또한 불교 적인 반세속주의를 유포하는데 기여한다. 불교의 참선은 몸과 마음을 모 아 세계의 근원을 성찰하는 수행법의 하나인데 이때 중요한 것은 마음을 평정하게 하는 것과 더불어 몸의 안락을 경계하는 것이다. 초심자들의 수 행을 돕는 암송용 경전인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의 다음의 구절이 동·서양적 사유의 대화가능성을 위한 방법론적 모색 ― 원효, 워즈워스, 미메시스ㆍ손현 171 보여주듯 불교적인 깨달음의 정도는 종종 고통의 크기에 비례한다. 1-09. 메아리 울리는 바위굴을 염불당으로 삼으며, 애처롭게 지저귀는 오 리와 새들을 마음을 기쁘게 하는 벗으로 삼아야 한다.9) 1-10. 절하는 무릎이 얼음과 같이 되더라도 불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없으 며, 주린 창자가 끊어지는 것과 같이 되더라도 음식을 구하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10) 1-11. 갑자기 백 년에 이르거늘 어찌 배우지 아니하며, 일생이 그 얼마나 된다고 수행하지 않고 제멋대로 놀겠는가?11) 추위와 굶주림이 수행의 일부를 이루며 인생의 무상함이, 예를 들어 찰 나적인 쾌락주의를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행을 고무하는 이유 가 되는 것은, 이 구절만 떼어서보면, 자학적인 수준의 금욕주의로 읽힐만 하다. 물론 서양 기독교에서도 욥(Job)의 경우와 같이 고통은 깨달음에 이 르는 중요한 과정적 요소다. 하지만 욥의 경우 고통은 신에 대한 믿음이 시험받는 과정의 일부로서 궁극적으로는 신의 전지전능함 안에서 믿음의 회복으로 승화된다. 반면 위의 구절에서 고통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강 도를 더할수록 바른 수행의 증거가 된다는 점에서 고통자체가 목적이 된 측면이 있다. 박찬국은 이런 고통을 “고뇌에 대한 능력”( 니체의 213)이 라고 부른다. 즉 삶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상적이고 비본래적인 삶이 제공하는 위로와 위안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삶의 본질이 바로 고통 이라는 사실을 꿰뚫어보아야 하는데 불교적인 고통은 삶의 위로와 위안을 거부하고 자발적으로 ‘위대한 고통’을 감수함으로써 삶에 대한 그와 같은 9) 助響巖穴 爲念佛堂 哀鳴鴨鳥 爲歡心友 10) 拜膝如氷 無戀火心 餓腸如切 無求食念 11) 忽至百年 云何不學 一生 幾何 不修放逸 172 유럽사회문화 제16호 통찰을 얻고자하는 태도라는 것이다(209-216). 여기서 문제는 그런 고뇌의 능력이 직접적인 육체적 고통으로 입증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또한 불교적인 반세속주의는 문화의 접경지대를 지나 서양에서 수용될 때 현대 철학의 중요한 쟁점인 ‘주체성’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자아 부정’ 의 철학으로 오해되는 경향이 강하다. 영어로 “selflessness”로 옮겨지는 “무아”라는 개념이 그런 오해의 주요인이다. 일심이 단일한 실체를 부정 하는 것과 같이 무아는 고정 불변하는 실체로서의 ‘나’가 없다는 뜻으로 ‘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이며 독립적인 자아 대신 관계 속의 자아를 강조하는 개념이다. 나를 관계 속에 놓기 위해서는 자기중심적인 자아를 비워야 하며 이는 상상력이 창조력이 되기 위해서는 안정화된 자 아의식을 비워야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 참 뜻을 왜곡하여 “무아”를 비 개성 내지 몰주체성과 동일시하는 경우가 서양 학자들 간에 자주 목격된 다. 예를 들어 프로이드는 무아의 경지인 니르바나를 “제로 레벨로의 이 동”(the move to zero), 즉 죽음 충동(the Death Drive)과 동일시하였고(90)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불교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진정한 자 아’(a true self)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 . .] 그런 것은 없다는 것, 그런 자아란 단지 망상이요 거짓이라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통해 발견하는 것은 “사유자가 없는 사유의 흐름”(a flow of thoughts without a thinker)일 따름이라는 것이다(108). “심플론 고갯 길 일화”에서 상상력의 작용을 선(Zen)의 개념으로 분석하는 존 루디(John G. Rudy)는 ?워즈워스와 선심―무아의 시학?(Wordsworth and the Zen Mind: The Poetry of Self-Emptying)에서 상상력이 주체와 객체간의 구분이 사라지는 지점에서 작용함을 강조하는데 그 때 “모든 계시는 주체없이 일 어난다. 이 일어남이 근원이 없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복종해서 계시는 영 원히 진화하고 순환하는 술어들의 형태로 전달된다”(81)고 말한다. 구분이 사라진 완벽한 몰입(complete immersion)과 하나 됨(oneness)이 지젝이 의 미한 것처럼 주체가 사라진 사유만의 흐름과 동일시되고 있는 것이다. 원효에 대한 왜곡이 염세적인 자아부정의 방향성을 보인다면 워즈워스의 동·서양적 사유의 대화가능성을 위한 방법론적 모색 ― 원효, 워즈워스, 미메시스ㆍ손현 173 경우 그것은 감상적인 자아 과잉의 방향성을 보인다. 거듭 말하지만 그의 상상력론이 마음의 무조건적인 창조력을 예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개 인의 자율적인 마음의 작용을 찬미하지만 외부 대상에 의존하는 관습적이 고 집단화된 마음의 작용에 대한 비판을 동시에 담고 있다. 새로운 것의 창 조를 위해 안정되고 관습화된 것을 해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동시 대 또 다른 낭만주의 시인 존 키이츠(John Keats)는 워즈워스의 시적 태도를 자기와 똑같은 감흥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한다는 의미로 “자기중심적 숭엄 미”(the egoistical sublime)로 규정하였다(Lee 428). 필자는 앞서 상상력론에 작동하는 논리적 비약을 지적하였는데 폴드만이 상상력을 그 비약의 아래 쪽 끝에서 이해한다면 키이츠는 위쪽 끝에서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키이츠가 확대해석한 자기중심주의는 낭만주의가 가장 유행하였고 그 런 까닭에 후기 낭만기로도 불리는 19세기 후반의 빅토리아기에 이르면 개인중심의 도덕주의로 변질된다. 빅토리아기의 대표적 사상가인 존 러스 킨(John Ruskin)은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율적인 상상력으로 파악한 자 연을 중시한 점에서 워즈워스의 계승자로 불리는데 이 때 자율적 상상력 은 개인의 활력이나 무한한 다양성을 담보하기보다는 개인에게 적합화된 신의 진리를 발견하는 도구다. 그가 토머스 칼라일(Thomas Carlyle)과 더불 어 기획한 예술을 통한 인간 개조론12)은 개인적 자율성을 담보로 부상한 중산층이 개인주의 내에서 하나의 집단 세력으로 보수화하는데 중요한 논 리를 제공한다. 폴드만은 그것을 “정통성”(authenticity)의 문제로 따졌는데, 정통 낭만주의가 고도의 집중화된 내면적 사고를 통해 인간의 한계를 직 시하고 그를 통해 한계의 비극성을 승화시키는 역설의 긴장을 유지한다면 비정통 낭만주의는 그런 역설의 긴장을 억압하고 대신 인간의 한계를 잘 만들어진 도덕률로 위로하고자 한다(51-59). 빅토리아기의 중요한 가치관 인 “자기만족”(self-complacency)과 “점잖음”(respectability) 등은 이런 보수 12) 러스킨은 “성 조지 조합”(Saint George Guild)을 조직하여 인간개조와 사회개혁을 시도하였으며 칼라일은 『영웅숭배론』(The Heroic in History)에서 종교적 확신과 결합한 힘을 숭배하는 태도를 드러낸다. 174 유럽사회문화 제16호 화한 낭만적 개인주의의 산물이다. 또한 ?낭만적 제국주의―보편화된 제 국과 근대성의 문화?(Romantic Imperialism: Universal Empire and the Culture of Modernity)에서 사리 마크디시(Saree Makdisi)에 따르면 20세기 초반 제국주의의 확산에 가장 많이 기여한 사상이 낭만주의이다. 제국주 의는 자본주의의 전지구적인 확산과 동시적인데 자본주의는 의식의 창조 물을 사물의 기원과 동일시하는 낭만적 논리에 기반한다는 것이다(1-22). 개인의 자율성을 담보하던 상상력이 세력을 확장해 타자에 대한 자기중심 적 억압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변질된 것이다. 이는 분명히 정통 낭만주의 의 왜곡이긴 하나 낭만주의가 새로운 시대정신과 만나 파생시킨 문화적 현상이라는 점에서 낭만주의의 부정할 수 없는 일부를 이룬다. 이와 같이 원효의 불교적인 사유와 워즈워스의 낭만주의적인 사유가 그 본질에 있어 공유하는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적으로나 지역적 으로 이동하면서 문화적으로 정반대의 왜곡을 만들어낸다면 두 사유의 대 화는 이렇게 확대된 거리를 분명히 인정하고 그 거리를 횡단하는 지점에 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공통성을 통한 대화란 차이의 억압에 다름 아니며 차이의 단순한 나열 또한 대화와는 거리가 멀다. 대화의 핵심은 서 로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나고 그 차이를 건너 타자를 만나는데 있다. 필자 는 여기서 차이의 노출과 횡단이 차이의 탈권력화에 의해 가능하다고 보 고 방법론적으로 미메시스적 분석법을 제안하는 것이다. 4. 미메시스 아우어바흐가 ?미메시스―서구문학에서의 현실 묘사?에서 채택한 방법 론은 (1)미메시스의 역사성과 (2)대상과의 거리두기 효과라는 두 가지 이 유에서 본 논문의 취지에 부합한다. 아우어바흐는 자신의 책에서 미메시 스를 현실(reality)을 재현하는 방식으로서 문체(style)를 비롯하여 비유법, 운율, 상황, 논리 등의 요소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사용하는데 그에 따르면 동·서양적 사유의 대화가능성을 위한 방법론적 모색 ― 원효, 워즈워스, 미메시스ㆍ손현 175 특정 미메시스는 특정한 세계관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는다. 예를 들어 서 양의 대표적인 미메시스로서, 호머의 서사시 ?오디세이?(Odyssey)와 기독 교 경전 ?구약?(The Old Testament)은 단지 우연적으로 그런 표현 양식을 띄게 된 것이 아니다. 대신 각 문학적 양식은 당대의 사회문화적인 삶의 총체가 드러나는 방식이다. 특정 시대의 역사성이 특정한 미메시스로 구 현된다는 것이다. 혹 미메시스를 재현이나 모방으로 번역할 때는 마치 역 사가 선행하고 이차적으로 그것을 전달하는 표현양식이 기능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언어를 개별적 요소의 합이 아니라 하나의 구조물로 파악하는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 이후 언어적 표현 양식은 오히려 내용을 구성하는 원리로 생각된다. 언어로 구조화되기 이전의 삶 자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어떻게 언어로 구성하느냐가 삶의 내용을 규정한 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정 시대의 사유를 이해하는데 표현양식에 대한 분 석이 그 사유의 이념에 대한 분석보다 더 본질적일 수 있다는 뜻이다. 또한 미메시스적 분석은 대상에 대한 ‘거리두기’의 효과를 만들어낸다. 아우어바흐에 따르면 ?오디세이?는 문체상 충분한 디테일을 분명한 의미 와 함께 “절대적 현재”(the absolutely present)의 시점에서 제공한다. 모든 일이 분명한 의미를 띠고 지금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착시를 심 어준다는 것이다. 반면 ?구약?은 디테일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지만 대신 디테일을 모르기에 우리가 알고 있는 나머지 모두는 깊은 의미가 있 다는 착시를 심어준다. 전자는 현실의 세계를 후자는 진실의 세계를 재현 한다. 그런데 이런 분석은 각 미메시스를 그것을 생산하는 세계관에서 맥 락화함으로써 미메시스적 관점에서 세계관을 관조하게 할 뿐 후자를 판단 하고자 하지 않는다. 세계관을 관점화할 뿐 해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오디세이?가 대변하는 희랍적 세계관과 ?구약?이 대변하는 히브리적 세 계관이 서로 이질적으로 여겨지거나 혹은 얕은 논리로 야합하는 대신 각 세계관은 그 내적 구성 원리의 차원에서 분석될 따름이다. 그럼으로써 각 세계관은 이념적으로 탈권력화되어 각각의 구성 원리에 의한 구조물로서 만 부각되는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의 표현을 빌면 아우어 176 유럽사회문화 제16호 바흐의 방법론은 각 세계관을 “재확인”(reaffirmation)하는 것이 아니라 그 로부터의 “고통스런 소외”(agonizing alienation)를 유발한다(8). 필자는 동· 서양적 사유의 대화란 이와 같이 구성 원리에 대한 분석을 통해 각 사유 의 차별성이 드러나면서 동시에 거리두기를 통해 그 차별성이 탈권력화하 는 지점에서 가장 개방적으로 진행된다고 본다. 그렇다면 미메시스적 관점에서 원효와 워즈워스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 은 이야기를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보다 본격적인 논의는 차후의 과제로 미 루고 제언적 수준에서 몇 가지 문제가 될 만한 논점만 제시해보고자 한다. 첫째, 불교의 경전을 해석하거나 주석하는 형태인 원효의 글은 불교 경 전의 미메시스적인 특징을 공유하는데, 불교 경전의 미메시스적 특징에 대한 기존 연구가 공통적으로 “수행성”(修行性)을 그 특징으로 지목함을 지적할 수 있겠다. 즉 글이 지식을 전달하기 보다는 독자 혹은 청자의 인 식 전환을 유도하는 정신 훈련의 성격을 띤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요르그 플라센(Jӧrg Plassen)은 불교 경전 해설서를 정신적 수행과 동일시하는데 독자 혹은 청자의 “인식을 변형시키고” 그들이 “유와 무의 중간지대를 걸 어갈 수 있도록 훈련시킨다”는 점에서 “카타르시스적 양식”을 특징으로 한다고 말한다(73-74). 고영섭의 설명을 빌면 원효적인 미메시스는 어떤 사실이나 진실을 전달하고자 하기 보다는 인식을 바꾸는 훈련교본과 같아 독서의 현장이 직접적인 지적 훈련의 장이 된다. 그것은 “‘나의 복원’을 통하여 ‘나의 행위의 회복’을 꾀하는” 것으로 “청자 스스로가 자신의 삶이 배어있는 주어(불성)를 확인하고 이 세계를 주인공으로 살게 된다”(43). 필 자가 앞서 원효의 글에서는 같은 내용이 문맥을 달리하여 반복적으로 언 급됨을 지적하였듯이 일심 혹은 무아는 깨달음에 이르는 여러 개의 다른 개념적 통로라고 할 수 있고 각 개념 또한 깨달음을 유도하기 위해 여러 개의 다른 문맥에서 “반복적인 과잉성”(repetitive redundancy, Plassen 82)을 띠고 다루어진다. 한편 서양학자들은 워즈워스의 미메시스적 특징에 대해 서도 “되어감”(becoming)을 특징으로 한다는 점에서 “수행성”(遂行性)을 언 급한다. 물론 원효의 수행이 영어로 “practice”에 해당한다면 후자의 수행은 동·서양적 사유의 대화가능성을 위한 방법론적 모색 ― 원효, 워즈워스, 미메시스ㆍ손현 177 “perform”에 해당하는 것으로 전자가 현재적 반복성을 특징으로 한다면 후 자는 ‘미래적 완료성’을 특징으로 한다. 즉 양자의 미메시스가 모두 진리의 일방적인 전달 대신 글 읽기에 독자의 주체적인 참여를 요구하는 점에서 공 통적이라면 전자의 반복적 갱신과 달리 후자에서 주체의 참여는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미래적 완결성의 특징으로 한다는 것이다. “나” 로 설정된 시 인은 어느 순간 “너”로서의 상상력을 발견하게 되고 시인은 “일을 잃었 다”(was lost)가 “이제 회복되어”(now recovering) “우리”(we, us, our)라는 보 다 보편적인 문맥 속에서 상상력에 의한 새로운 미래적 가능성을 꿈꾼다. 일심론에서 주체가 보편성과 “절대(성)”(김성룡 420)을 전제로 개별성을 획 득한다면 상상력론에서 주체는 개인성을 전제로 보편성으로 나아간다. 각 각 개인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며 또한 각각 자아 부정과 자 아 과잉의 사유로 오해될 여지가 남는 지점 또한 드러낸다. 둘째, 원효적인 사유에서 “일심” 이나 “무심” 혹은 “무아”와 같은 이분 법으로 오해받을 만한 용어들은 철학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미메시스적 관점에서도 분석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일심이란 본래적인 것, 즉 구분을 없애고 전체를 원융한 것으로서 “참으로 같은 때 같은 모임에서 다른 종 류의 중생들이 똑같이 이해함으로 말미암아, [. . . ] 착란되지 아니하니”(? 대승기신론 소·별기? 71) 그렇게 이르게 된 것이다. 즉 일이란 구분이 없는 보편성을 이르는 것이지 “이” 혹은 “삼”과 대비되는 개념이 아니다. 그렇 다면 일심은 왜 본심내지 보편심이 아니고 구분의 오해를 일으키는 일심 으로 지칭되어야 하나? “무심”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은 ‘나’와 ‘남’, 선과 악, 좋음과 싫음의 상대적인 경지를 초월해서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치 우치지 않는 마음을 이른다. 김형효가 파악하듯이 불교적인 무(無)는 해체 론적인 문맥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구성론의 무는 무의미나 부정되 어야할 허무의 상징이지만 해체론에서 무는 끝없는 에너지의 보고와 같 다”(20). 그렇다면 무심 또한 평정심 내지 충만(充滿)심이 아니고 왜 지극 히 이분법적인 무심인가? 이에 대한 원효의 대답은, 일심의 예를 들면, 이 며 “이미 둘(二)이 없는데 어떻게 일(一)이 될 수 있는가? 일도 있는 바가 178 유럽사회문화 제16호 없는데 무엇을 심(心)이라고 말하는가? 이러한 도리는 말을 여의고 생각 을 끊은 것이니 무엇이라고 지목할지는 모르겠으나 억지로 이름 붙여 일 심이라고 하는 것이다”(88)라는 것으로 언어의 임의성을 강조하고 있다. 자주 인용되듯이 달을 가리키기 위해서는 손가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 과 같은 원리로 언어를 뜻과의 대응 관계가 아니라 순수한 기표로 사용함 으로써 “말로 말을 버[리는]”(이도흠 36) 언어행위라는 것이다. 하지만 각 용어는 그것이 의도하는 역설성 내지 형용 모순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 고 오히려 왜곡시키는 측면이 있다. 특히 현대에 팽배한 실증주의적 사고 내에서 그 왜곡은 더욱 악화된다. ‘일’과 ‘무’가 각각 어떻게 보편성과 충 만함을 대변하는가? 다시 말해 오늘날 불교는 현대적인 문화 감각과 유리 된 점이 많고 이는 무엇보다 수사적인 생경함에 기인하는 바가 크므로 이 런 괴리를 메우는 일이 불교 연구에서는 시급해 보인다. 셋째, 동일한 마음의 발견이 두 가지 다른 유형의 사유를 만들어낸 데 에는 장르의 차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원효와 워즈워스의 일화는 주 인공의 개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사적인 경험을 토대로 한다. 사실상 ‘마음 의 발견’이라는 주제 자체가 내면성의 발견이라는 점에서 각 일화의 주인 공은 내적 개인일 수밖에 없다.13) 이점에서 두 일화는 철학은 물론 시의 화두가 되기에 적합하다. 원효가 불교사상가이자 시인이기도 하였다는 사 실14)은 여기서 상당히 시사적이다. 그가 발견한 마음은 그에게 종교경전 의 해설자이상의 보다 극적이고 개성적인 삶을 요구했던 것이다. 반면 워 즈워스는 시인이자, 개인적 정서를 담은 서정시로 철학적 사유를 하고자 13) 원효가 귀족중심의 교학불교를 포기하고 대중적이고도 평민중심적인 불교를 부흥 시키고자한 것과 파계를 하고 그 후 여러 실존적 부침을 겪은 것은 무덤일화 후 동행자였던 의상과 달리 귀국하기로 한 개인적 결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4) 원효의 시인으로서의 면모는 그가 파계 후 저잣거리에서 춤추며 노래 부르기를 즐 겼고 무애가 와 같은 노랫말을 남겼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원효를 불교사상가로서보다는 개성이 뚜렷하고 내면에 충실한 한 개인으로 소비한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고창수는 계간지 『文학 史학 哲학』제3호의 권두사를 원 효대사가 시인에게 한 말 이라는 제목의 시로 대신하고 있는데 일반인들이 원효 를 그만큼 시적으로 느낀다는 점을 반증한다. 동·서양적 사유의 대화가능성을 위한 방법론적 모색 ― 원효, 워즈워스, 미메시스ㆍ손현 179 한 철학자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원효의 경우 경전해설이라는 미메시스적 틀이 그의 시적인 면모를 수용할 수 없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면 워즈워스 의 경우 서정시라는 틀이 그의 철학적 사유를 수용할 수 없는 한계를 안 고 있었다. 경전해설은 보편적 차원의 보편적 진리 속에 개인을 위치시킴 으로써 원효의 개인성은 그 틀 밖에서 일종의 야사처럼 떠돌 수밖에 없었 으며 ?서곡?은 개인적 정서를 사회나 역사에 대한 철학적 윤리의식과 결 합시키지 못한 채 종결된다. 워즈워스는 ?서곡? 이후 ?은둔자?(The Recluse)에서 “은둔 시인의 감정과 생각을 통해 인간과 자연 그리고 사회 에 대한 견해를 담은 철학적 시를 쓰고자”(The Poetical Works 589) 하였으 나 후자는 미완으로 남게 있다. 필자는 앞서 같은 성격의 일화가 서양의 경우 왜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중요한 의미를 띠고 부상하였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마음의 발견’이 서양의 경우 개인성이 표 출되는 서정시의 형식을 기다린 때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혹은 마음 의 발견이 개인의 압축된 주관성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서정시적으로’ 표 현되기 위해서는 서양의 낭만주의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마음의 발견 을 통해 훨씬 더 일찍 개인의 자율성을 고무시킨 점에서 불교가 불교답다 면 그 자율성을 시적으로 실천한 점에서 낭만주의는 낭만주의답다. 불교 와 낭만주의가 발견한 마음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표현 양 식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 것으로 이 개방적이고도 비종결적인 차이를 드 러내는 것이야 말로 동·서양의 사유를 자기동일성의 경계를 넘어 대화의 지점으로 이끄는 방법이다. [주제어] 대화주의, 원효, 워즈워스, 일심론, 상상력론, 미메시스 180 유럽사회문화 제16호 참고문헌 고영섭. ?불교경전의 수사학적 표현의 연구―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불교의 눈?. 서울: 동국대학교, 1996. 고창수. 「원효대사가 시인에게 한 말」. ?文학 史학 哲학? 3권 (2005): 1-7. 김성룡. 「원효의 글쓰기에 나타난 텍스트적 주체의 문학 사상사적 의의」. ?시 대와 철학? 14권2호 (2003): 409-432. 김종욱. ?원효와 하이데거의 대화―근본의 사유?. 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2013. 김형효. ?원효의 대승철학?. 서울: 소나무, 2006. 박찬국. 「니체의 불교관에 대한 비판적 검토―고통의 문제를 중심으로」. ?철학 사상? 33권 (2009): 193-235. ______. ?원효와 하이데거의 비교연구―인간관을 중심으로?. 서울: 서강대학교 출판부, 2010. 박태원. ?원효사상연구?. 울산: 울산대학교출판부, 2011. 원효.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은정희, 송진현 역주. 서울: 일지사, 2000. _______. ?대승기신론 소·별기?(大乘起信論疏別記). 은정희 역주. 서울: 일지 사, 1992. _______. ?初發心自警文?. 조기영 옮김. 서울: 지식을만드는지식, 2009. 이도흠. 「元曉의 언어관과 포스트모더니즘」. ?시와 세계? 2권 (2003): 31-40. 장시기. 「원효와 들뢰즈-가타리의 만남―깨달음의 몸과 기관들 없는 몸」. ?한 국선학? 1권 (2000): 373-390. Auerbah, Erich. Mimesis: The Representation of Reality in Western Literature. Trans. Willard R. Trask. New York: Doubleday & Co, 1957. Bakhtin, Mikhail. Problems of Dostoyevsky's Poetics. Ed. & Trans. Caryl Emerson. Intro. Wayne C. Boo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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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evailing method in this field is to domesticate strangeness by listing the common and the different in the two entities. I first point out that a method of this sort delimits the dialogic scope by helping strengthen rather than deconstruct the hermeneutic unity of each entity: the compared two become reaffirmed in their ideologies either through the homogenizing sameness or even through the difference that is induced in an inter-referential mirroring. As an alternative, then, I suggest the following four conditions to consider: First, upon the premise that a dialogue is possible when the two entities are both same and different, more focus should be put on the difference, not on the sameness as heretofore, because a dialogue starts where one accepts the otherness of the other. Second, it is necessary to secure objectivity in the criteria for comparison: a laboratorial repetitiveness in terms of sameness in the particular case of this study needs to be set up to explore the focused difference. Third, those to be compared could be genre-transgressive: sometimes the genre, a formal factor, could play a crucial role in deciding the content of a thinking. Fourth, self-deconstruction of each entity seems to be a prerequisite to a dialogue based on polyphony and unfinalizability: thus, a 동·서양적 사유의 대화가능성을 위한 방법론적 모색 ― 원효, 워즈워스, 미메시스ㆍ손현 183 mimetic analysis, an analysis of the way the content is organically related to the form, is proposed to alienate the ideologic content of each entity from itself. Wonhyo, a scholar-monk in the Shilla dynasty of Korean history, and Wordsworth, an English Romantic poet in the 19th century, are selected to be compared in terms of this possibility of dialogue. [Key words] dialogism, Wonhyo, Wordsworth, the one mind, imagination, mimesis (논문투고일: 2016.04.12./ 논문심사일: 2016.06.06./ 게재확정일: 2016.06.10) [저자연락처] hyks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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