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가름:
불교에서 가르치는 마음자세--1
부처는 (만약 그를 대중적 의미에서의 종교의 창시자라 불러도 된다면) 종교의 창시자들 중에서 순수하고 소박하게, 사람이 아닌 다른 것이길 바라지 않은 유일한 스승이었다. 다른 스승들은 신神이거나, 사람 모양을 한 신의 화신이거나, 신에게서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들이다.
부처는 다만 사람이었고, 무슨 신이나 외계의 권능으로부터 성령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자신의 모든 깨달음과 이룸, 성취를 인간적인 노력과 지성 때문이라고 여겼다. 사람은, 아니 오로지 사람만이 부처가 될 수 있다. 바라고 노력한다면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모든 사람이 제 스스로 지니고 있다. 우리는 부처를 "아주 뛰어난 이"(殊勝한 이)라 부를 수 있다. 그의 '사람됨'은 너무나 완벽해서 후대의 대중적 종파에서는 거의 '초인'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불교에 의하면 사람의 지위는 최상이다. 사람은 스스로가 주인이라서 그 사람의 운명을 심판할 윗 존재나 권능은 없다. '자기가 자기자신의 피난처이다. 어찌 다른 누가 피난처일 수 있겠는가?'라고 부처는 말하였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기자신을 피난처로 삼아라', 그리고 다른 이에게서 피난처를 구하거나 도움을 받으려 하지 말라고 훈계하였다.[주1]
부처는 개개인이 스스로를 개발시키고, 자기 해방에 힘쓰라고 가르쳐 고취시켰다. 사람에겐 스스로 노력하고 지성을 닦아 모든 속박에서 해방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부처는 '그대의 일은 그대가 해야되느니. 여래[주2]는 다만 길을 가르쳐 줄 뿐'이라고 말했다.
만에 하나라도 부처가 '구원자'라 불려진다면 그것은 오로지 해방, 즉 열반涅槃의 길을 발견하여 보여주었다는 의미에서 그러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길"을 제 스스로 쫓아가야만 한다.
[주1]<역주> 여기서 '피난처'(refuge)라는 표현이 좀 어색하게 느껴질 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에게도 매우 친숙한 의미이다. 앞으로 여섯째 가름에서 자세히 보게 되겠지만, 부처의
가르침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는 피난처를 소박한 자신에게서 구할 따름이고, 그외에 덧붙여 종교적 의미로서 부처(佛)와 가르침(法)과 승가(僧)에서 피난처를 구할 따름이다.
[주2] 여래如來(Tathagata)의 문자적 의미는 '진리에 도달한 이', 즉 '진리를 발견한 이'이다.
이것은 부처가 자신을 가리킬 때나 일반적으로 부처를 가리킬 때 쓰이는 용어이다.
부처가 제자들에게 자유를 허용한 것은 바로 이,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원칙에서다.《마하빠리닙바나-경Mahaparinibbana-sutta》(D.16;{遊行經},長阿含2)에서 부처는 결코 승가[주3]를 다스리려고 생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승가가 자기에게 의존하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고 말한다.
자기 가르침에는 비밀스런 교리가 없다고 말하며, 아무것도 '스승의 움켜쥔 주먹'(acariya-mutthi;師拳)속에 감추지 않았고, 또는 다른 말로 '소매속에' 들어있는 것이 전혀 없다고 하였다.
[주3] 승가僧家(Sangha)의 뜻은 '공동체'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이 용어는 승려 조직체인 '불교
승려들의 모임'를 가리킨다. 부처(Buddha;佛), 가르침(Dhamma;法), 모임(승가;僧)는 "세 의지처"(Tisarana;三歸依處)나 "세 보물"(삼보三寶;빨.Tiratana,산.Triratna)로 알려져 있다.
<역주> 대승적 의미에서는 승가가 출가승려들만이 아니라 부처의 가르침에 따르는 사람
모두의 동아리를 뜻한다. 사부대중四部大衆, 즉 비구比丘(bhikkhu;남자 승려), 비구니 比丘尼(bhikkhuni;여자 승려), 우바새偶婆塞(upasaka;남자 평신도), 우바이偶婆夷(upasika; 여자 평 신도)가 하나된 동아리(和合衆)를 승가라고 한다.
부처가 허용한 사고의 자유는 종교사宗敎史적으로 다른 종교에서 들어보지 못한 것이다. 부처에 의하면, 자유는 필수불가결 하다. 인간의 해방은 진리를 제 스스로 깨닫는데 좌우될 뿐이지 어떤 신神이나 외계의 권능이 순종적인 선행에다 보수를 주는 식으로 자비로운 은총을 내려주는데 좌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번은 부처가 꼬살라Kosala 왕국의 께사뿟따Kesaputta라는 작은 읍에 갔었다. 이 읍의 주민들은 깔라마Kalama라는 성씨姓氏로 알려져 있었다. 부처가 자기네 읍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서, 손님으로 맞아 경의를 표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존자시여, 께사뿟따에 찾아온 사문과 바라문[주4]이 몇 사람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오로지 자기 교리만을 설법하고 교화시킵니다. 그리고 남의 교리는 깔보고 헐뜯고 냉소합니다. 그리고 나서 다른 사문과 바라문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 역시 자기네 교리만을 설법하고 교화시키고 남의 교리는 깔보고 헐뜯고 냉소합니다.
하지만 존자시여, 저희들은 도대체 누가 바른말을 하는 존경스런 사문과 바라문인지, 그리고 누가 틀린 말을 하는지 몰라서 항상 의혹과 혼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주4]<역주> 여기서 바라문婆羅門(Brahmana)은 카스트에서 바라문 계급의 성직자, 사문沙門 (recluse)은 그 밖에 계급의 출가자이다. 사문은 나중에 불교에서 일반적으로 출가자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그래서 부처는 종교사에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이런 충고를 해 주었다.
'그대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이 의혹에 사로잡혀 있는 것, 그대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의심스러운 것에서 의심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자아, 깔라마들이여, 전해들은 이야기나 관습이나 풍문에 이끌리지 마십시오. 여러 종교들의 성경이 갖는 권위에 이끌리지 마시오. 논리나 추론에도 이끌리지 마시오. 피상적인 사고에도 이끌리지 마시오. 사변적인 견해를 즐기는 것에도 이끌리지 마시오. 그럴 듯한 것에도 이끌리지 마시오. '이것이야말로 우리 스승이다'라는 생각에도 이끌리지 마시오. 오! 깔라마인들이여. 그대들이 어떤 것이 건전치 못하다(akusala;不善), 그릇되다, 나쁘다고 알게 된다면 그것을 버리시오. ..... 그리고 그대들이 어떤 것이 건전하고(kusala;善) 좋은 것을 알게 된다면 받아들이고 따르도록 하십시오.'[주5]
[주5]<역주> 여기에서 선善한 것은 받아들이고 악惡한 것은 받아들이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고 건전한 것(善)은 받아들이고 건전치 않은 것(不善)은 받아들이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첫 가름:
불교에서 가르치는 마음자세 -- 2
부처는 한층 더 나아갔다. 심지어 제자들이 여래(부처) 자신까지도 조사해 보아야 하며, 그래서 제자가 그가 따르는 스승의 진정한 가치를 완전히 확신해야 한다고 말했다.
부처의 가르침에 의하면 의심(vicikiccha;疑)은 "다섯 장애"의 하나이다. "다섯 장애"[각주1]란 진리를 명확히 이해하고 정신적 진보를 하는 데 있어서 (또는 어떤 진보에 있어서도)장애가 된다. 그러나 의심은 '죄'가 아니다. 불교에는 믿음이라는 계명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은 불교에 '죄'라는 것 자체가 없다. 몇몇 종교에서 가르치는 원죄같은 것이 불교에는 없다.
모든 해악의 뿌리는 무명[각주2]과 그릇된 견해(miccha ditthi;邪見)이다. 의혹, 혼란, 흔들림이 있는 한 진보가 가능치 않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이해거나 명확히 보지 않은 이상, 의심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진일보하기 위해선 의심을 제거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의심을 제거하려는 이는 명확히 보아야 한다.
[각주1] "다섯 장애"(nivarana;五蓋)는 ⑴감각적인 애욕(貪慾), ⑵악의(瞋애), ⑶정신적, 육체적 마비와 권태(昏沈睡眠), ⑷근심과 걱정(悼擧惡作), ⑸의심(疑惑)이다.
[각주2] <역주> 무명無明(avijja)이라는 불교용어는 더없이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지은이가 'ignorance'라고 영역한 것과 같이 우선 '모르다' 라는 의미가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무명은 모든 삶과 존재가 계속되게 하는 근본 원인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명을 단순히 '무지無知'라고 옮겨서는 그 의미가 너무 빈약해진다. 이 번역에서는 '無明'이라는 한역어를 그대로 사용할 것이다.
의심이 없어야만 한다든지, 믿어야만 된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냥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해하고 본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한 학생이 수학문제를 공부할 때 어떻게 풀어나갈지 모를 경우가 닥친다. 그 학생이 미심쩍어 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곳에서 그러하다. 그 학생이 이 의혹을 가지고 있는 이상, 풀어나갈 수 없다. 풀어나가기를 바란다면 이 의혹을 해결해 버려야 한다. 그리고 이 의혹을 해결하는 길이 있기 마련이다. 그냥 '믿습니다'라던가 '나는 의심치 않습니다'라고 말해서는 문제가 풀릴 리 없다.
억지로 믿고, 이해도 못하면서 억지로 받아들이는 것은 정치적인 것이지 정신적이거나 지성적인 것이 아니다.
부처는 항상 의심을 쫓아 버리는 일에 열심이었다. 심지어 죽기 몇 분전까지도 제자들에게 자기 가르침에 의심나는 데가 있으면 나중에 의심을 씻어낼 수 없었다고 후회하지 말고 질문하라고 몇 번씩이나 당부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때 말한 것은 감동적이었다.
'만약 너희들이 스승이 어려워서 질문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런 사람은 친구에게 알리도록 하여라.'(즉, 질문할 것이 있는 사람이 친구에게 말하여, 친구가 그를 위해 대신 질문토록 하라.)
<역주> 한역경전에는 '너희가 만일 스스로 부끄러워하여 감히 묻지 못하겠으면 마땅히 친한 벗을 통해 빨리 와서 물으라'(汝等若自참愧不 敢問者 當因知識速來諮問) [{遊行經},長阿含2,大正藏1.26b]로 되어 있다.
사고의 자유만이 아니라 부처가 허락한 포용은 종교사를 배우는 학생에겐 놀라운 것이다. 날란다Nalanda에 우빨리Upali라는 유능하고 부유한 호족이 있었다. 그는 니간타 나따뿟따(자이나 마하비라)의 유명한 평신도였다. 한번은 마하비라가 우빨리를 일부러 보낸 일이 있었다. 부처를 만나, 업業의 이론에 대해 몇 가지 논쟁을 벌여 부처를 굴복시키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그 주제에 대해서 부처의 견해는 마하비라와 달랐기 때문이다.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논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우빨리는 부처의 견해가 옳고 자기 스승의 견해는 틀렸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부처에게 자기를 평신도(偶婆塞)로 받아들여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부처는 다시 생각해 볼 것을 권유했다. 그리고 '그대 같은 유명인사는 신중히 생각하는 것이 유익하니까', 서두르지 말라고 하였다. 우빨리가 다시금 자기 의사를 표시했을 때, 부처는 이전에 믿던 종교의 스승들을 이제까지 해오던 대로 계속 존경하고 공양하라고 당부하였다.
기원전 3세기에 인도의 위대한 불교 황제 아쇼카는 포용하고 이해하는 이 거룩한 일화를 받들어 광대한 자기 왕국안의 다른 모든 종교들을 존중하고 지원하였다. 바위에 새겨진 그의 칙령은 오늘날에도 원문을 읽어볼 수 있는데, 황제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자기 종교만을 숭배하고 다른 이의 종교를 비난하는 행위를 하지 말 것이며, 이러저러한 도리에 따라 남의 종교도 존중할 지어다. 그렇게 하면 자기 종교의 성장에 도움이 되며, 남의 종교에도 똑같이 봉사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종교의 무덤을 파게 되며, 또한 다른 종교에도 피해를 주게 된다. 자기 종교를 숭배하며 다른 종교를 헐뜯는 사람은 누구나 "나는 내 종교를 찬양하리라"는 생각으로 자기 종교에 헌신하느라 그렇게들 한다. 그러나 그와 달리, 그렇게 해서는 자기 종교를 더욱 심히 상하게 한다. 그러하니 화합은 좋은 것이다. 모든 백성은 들을 지어다. 다른 이가 가르친 교리에도 귀를 기울일지어다.'
우리는 여기서 이 서로 이해하는 정신을 오늘날에도 적용해야 될 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도 똑같이 적용해야겠다고 부언해야겠다.
이 포용과 이해의 정신은 처음부터 불교문화와 불교문명에서 가장 소중한 이상의 하나였다. 사람들을 불교로 개종시키는데 있어서나 2500년의 긴 역사에 걸친 전파 과정에서 단 한 번이라도 사람들을 박해하던가, 피 한 방울을 흘리게 한 일이 없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불교는 평화롭게 아시아 대륙 전체로 퍼져서 오늘날에는 5억이 넘는 신도를 갖고 있다. 폭력은 어떤 형태이건, 어떤 구실 때문이건 간에 부처의 가르침에 완전히 반대된다.
첫 가름:
불교에서 가르치는 마음자세 -- 3
이런 질문이 자주 제기된다. 불교는 종교인가, 아니면 철학인가? 그러나 당신이 무어라 부르건 상관이 없다. 불교는 당신이 어떤 딱지를 붙이던 간에 그대로이다. 라벨은 하찮은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부처의 가르침에 붙이는 '불교'라는 딱지도 그리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가 지어놓은 이름이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이름 속에 무엇이 있나요?
우리가 장미라 부르는 건,
무슨 다른 이름이라도 향기로운 것을.
같은 이유로 진리에는 상표가 필요치 않다. 진리는 불교표도, 기독교표도, 힌두교표도, 회교표도 아니다. 진리는 누군가의 전매품이 아니다. 파벌적인 딱지는 진리를 자주적으로 이해하는데 장애가 되며, 사람의 마음에 해로운 편견을 만들어낸다.
이는 정신적, 지적 관점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인간관계에서 역시 그러하다. 예컨대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날 때 그를 한 인간으로 보지 않고 영국인, 프랑스인, 독일인, 미국인, 또는 유태인 같은 딱지를 붙이고, 우리 마음속에 딱지와 어우러진 갖가지 편견을 갖고서 그 사람을 대한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우리가 갖다 붙이는 속성과는 전혀 무관할 것이다.
사람들은 구별하는 딱지를 너무나도 좋아해서 심지어는 모두에게 공통된 인간적 성품과 감정에도 딱지를 갖다 붙이려고 기를 쓴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상표'의 자비와 사랑을 이야기한다. 예컨대 불교의 자비 또는 기독교의 사랑을 말하면서 다른 '상표'의 것은 깔본다. 그러나 자비와 사랑은 파벌적일 수 없다. 그것은 기독교도나 불교도나 힌두교도나 회교도나 간에 그러하다.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불교도의 것이나 기독교도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사랑일 뿐이다. 사랑, 박애, 자비, 포용, 인내, 우정, 욕망, 증오, 심술, 무지, 자만등과 같은 인간적 가치와 감정에는 당파적인 딱지가 필요 없다. 그것들은 특정 종교에 속하는 것이 아니니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에겐 어떤 관념이 어디서 왔는가가 하찮다. 한 관념의 근원과 발전은 학술적인 문제이다. 사실, 진리를 이해키 위해서는 그 가르침이 부처에게서 나왔는지, 다른 누구에게서 나왔는지 아는 것도 필요치 않다. 필요한 것은 그것을 보고 이해하는 일이다. 이것을 설명한 중요한 이야기가 《마지마-니까야Majjhima-nikaya》(中部: 경전번호140)에 있다.
부처가 한번은 옹기장이의 헛간에서 밤을 보냈다. 그 헛간에 젊은 사문이 먼저와 있었다.[각주1] 그들은 초면이었다. 부처는 사문을 살펴보고 이렇게 생각했다. '이 젊은이에게 호감이 간다. 내가 말을 걸어보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부처는 그 젊은이에게 물었다.
'오! 비구여,[각주2] 그대는 누구의 이름으로 집을 떠났소? 누가 그대의 스승이오? 그대는 누구의 가르침을 좋아하시오?'
[각주1] 인도에서 옹기장이의 헛간은 널찍하고 조용하다. 빨리경전에 보 면 고행자와 사문들뿐만 아니라, 부처 자신도 방랑수행(遊行)하는 동안에 옹기장이의 헛간에서 밤을 보냈다고 언급하고 있다.
[각주2] 여기에서 부처가 이 사문을 '비구'라 부른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비구라는 용어는 불교 승려에게 쓰인다. 그가 동아리(승가)의 일원인 비구가 아님을 나중에 보게 될 것이다. 그가 부처에게 동아 리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해주도록 요청했기 때문이다. 아마, 부처당시에 비구라는 용어는 자주, 다른 고행자들과 구분되지 않고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부처가 그 용어의 사용에 엄격한 제한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비구는 "거지", 즉 '음식을 구걸하는 이'를 뜻하며, 여기서는 아마도 말 원래의 의미로 쓰인 것 같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비구라는 용어가 불교 승려에게만 쓰인다. 특히,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같은 나라와 방글라데쉬의 치타공 지방 의 상좌불교 승려를 가리킨다.
'오! 벗이여'라고 젊은이가 대답하였다. '사꺄족의 후예, 고따마라는 사문이 있습니다. 그분은 사꺄족을 떠나서 사문이 되었답니다. 그분은 아라한, 즉 "완전히 깨달은 이"라는 드높은 칭송이 자자합니다. 그 세존의 이름으로 저는 사문이 되었습니다. 그분은 저의 스승이십니다. 그리고 저는 그분의 가르침을 좋아합니다.'
'그 세존이며, 아라한이며, 완전히 깨달은 이가 지금 어디에 계신답니까?'
'벗이여, 북쪽 나라에 사밧티Savatthi(舍衛城)라고 부르는 도시가 있습니다. 세존이시며, 아라한이시며, "완전히 깨달은 이"가 지금 계신 곳이 바로 그곳입니다.'
'그대는 일찍이 그 세존을 본적이 있소? 그이를 보면 알아볼 수 있겠소?'
'저는 그 세존을 뵈온 적이 없습니다. 제가 그분을 뵙더라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부처는 이 처음보는 젊은이가 집을 떠나 사문이 된 것이 자기 이름을 따라서 임을 알았다. 그러나 자기 정체를 숨기고 말했다.
'오! 비구여, 그대에게 가르침을 주고 싶소. 잘 듣고 새기도록 하시오. 내 말하리다.'
'예, 좋습니다. 벗이여'라고 젊은이는 동의하였다.
그래서 부처는 진리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젊은이에게 베풀었다.(그 요점은 나중에 설명하겠다.) 설법이 끝나자마자, 뿍꾸사띠Pukkusati라는 이름의 그 젊은이는 자기에게 말하고 있는 사람이 부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일어나 부처 앞으로 다가가서 스승의 발에 엎드려 절하고는, 몰라보고 '벗'[각주3]이라 부른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였다. 그리고 나서 부처에게, 수계受戒[각주4]를 주시어 "동아리"에 받아들여 달라고 간청하였다.
[각주3] 여기서 쓰인 용어는 친구를 뜻하는 아부소Avuso(友)이다. 그것은 같은 지위의 사람끼리 부르는 경어이다. 그러나 제자가 부처를 부를 때는 이 용어를 결코 쓰지 않는다. 대신에 제자들은 "선생님" 이나 "님"과 비슷한 의미의 반떼Bhante라는 용어를 썼다. 부처 당시 승려 동아리 사람들은 상대방을 아부소, 즉 벗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부처가 돌아가기 전에 후배 승려는 선배를 반떼(尊師), 즉 "선생님"이나 아야스마Ayasma(具壽), 즉 "형님"이라고 부르도록 가르쳤다. 그러나 선배는 후배를 이름이나 아부소라고 불러야 한다. 이런 관습은 지금까지 승가에서 계속되고 있다.
[각주4] <역주> 수계受戒는 부처님이 제정한 계율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곧 정식으로 부처의 제자가 됨을 의미한다. 물론 정해진 형식의 통과의례를 거친다. 그것을 '수계식受戒式'이라고 한다. 출가한 승려가 되기 위해서 받는 계율을 구족계具足戒라 하며 그 의식을 득도식得度式이라고 한다.
부처는 그에게 발우〔동냥 그릇〕와 가사袈裟〔비구가 걸치는 간소한 옷〕가 준비되어 있느냐고 물었다.(비구는 반드시 세벌로 된 가사(三衣)와 음식을 구걸키 위한 발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뿍꾸사띠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자, 여래는 발우와 가사가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수계를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뿍꾸사띠는 발우와 가사를 구하러 밖으로 나갔는데 그만 불행히도 소에 받혀 죽고 말았다.[각주5]
[각주5] 인도에서 소들이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여기에 언급된 것으로 보아 그 전통은 오래된 것 같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소들은 순하며, 사납거나 위험하지 않다.
나중에 부처에게 이 슬픈 소식이 전해졌을 때, 부처는 뿍꾸사띠가 지혜로운 사람이며, 이미 진리를 보았으며, 열반의 실현과정에 있어서 마지막에서 두 번째 지위를 얻은 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래서 아라한[각주6]이 되는 마당에 태어났으며 마지막 과정을 거쳐서, 이 세속에 다시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각주6] 아라한阿羅漢(Arahant)은 욕망과 증오, 악의, 무지, 자만심, 거드름, 등등의 모든 오염과 더러움에서 떠난 사람이다. 아라한은 네 번째 경지, 그러니까 열반을 실현하는 궁극적 경지에 도달하였으며, 지혜와 자비, 그리고 그런 순수하고 거룩한 성품으로 가득 차 있다. 뿍꾸사띠는 그때 전문적인 용어로 아나함阿那含(Anagami;不還) 욕계欲界 의 번뇌를 끊고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라 부르는 세 번째 경지에 도달했을 따름이다. 두 번째 경지는 사다함其陀含(Sakadagami;一來) [한번 욕계에 돌아오는 사람], 첫 번째 경지는 수다원須陀洹(Sotapanna;預流)[흐름에 든 사람]이라 부른다.
이 이야기에서 뿍꾸사띠가 부처의 이야기를 듣고 그 가르침을 이해했을 때 자기에게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또는 그것이 누구의 가르침인지를 몰랐음이 아주 명백하다. 그는 '진리'를 보았다. 약이 좋으면 병이 나으리라. 누가 그것을 준비했는지, 어디서 그것이 유래되었는지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첫 가름:
불교에서 가르치는 마음자세 -- 4
거의 모든 종교가 믿음으로 건설되었다. 다시 말해서 '눈먼' 믿음으로 건설된 것 같다. 그러나 불교에서 강조하는 것은 '보는 것', 즉 알고 이해하는 것이지 신앙이나 믿음이 아니다. 불경에는 보통 '믿음'이나 '신앙'이라고 번역되는 삿다saddha(산.쉬랏다sraddha;信)란 단어가 있다.
그러나 삿다란 단어는 그런 류의 신앙이 아니며, 납득에서 탄생되는 '확신'이다. 대중부大衆部의 불교에서, 그리고 또한 경전에서 일반적인 용법으로 쓰이는 삿다란 단어는 마땅히 인정되어야 하는데, 부처와 가르침(法), 그리고 동아리(僧家)에 대한 헌신을 나타내는 의미에서 '신앙'이란 요소를 가진다.
4세기의 위대한 불교철학자 아상가Asanga(無著)에 의하면 쉬랏다에는 세 가지 면이 있다. ⑴어떤 것을 완전히, 그리고 확고하게 납득하는 것, ⑵훌륭한 성품에서의 청아한 기쁨, ⑶마음자세에 있어서 목적을 성취하려는 열망이나 바램이 그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대부분의 종교에서 이해시키는 믿음이나 신앙은 불교와 인연이 멀다는 것을 알아두어야 한다.
믿음에 대한 의문은 보지 못 하였을 때 일어난다. 여기서 본다(see)는 말은 그 단어의 모든 의미를 말한다.[각주1] 당신이 보는 순간 믿음에 대한 의문은 사라진다. 만약 내 손에 보석을 쥐어 감추고 있다고 말하면 당신은 그것을 보지못했기 때문에 의심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손을 펴서 보석을 보여준다면 당신 스스로 그것을 보게 되어 의문이 일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고대 불경 구절에서 '깨달아라 손바닥에 있는 보석(또는 미로발란myrobalan 열매)를 보듯이'를 읽게 된다.
[각주1] <역주> see의, 여기에 관련된 주요한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눈으로)보다: to use the eyes; have or use the power if sight
2. 쳐다보다, 주의하다: to look at; get sight of; notice
3. 이해 인식하다: to understand or recognize
4. 알아내다: to find out or determine
5. 경험하다, 겪다: to have experience of; undergo
6. 방문하다, 만나다: to visit; call upon or meet
부처의 제자 무실라Musila는 다른 승려에게 '벗 사빗타Savittha여, 헌신이나 신앙이나 믿음 없이도 좋아하거나 이끌리지 않고도, 풍문이나 관습에 따르지 않고도, 명확한 이론들로 사유하지 않고도, 사변적 견해들을 즐기지 않고도, 나는 〔둑카(苦)의〕생성이 그치는 것이 열반임을 알고 보았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부처는 '오! 비구들이여, 나는 더러움과 오염의 파괴는 아는 이와 보는 이에게나 (의미)있는 것이며, 알지 못하는 사람과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의미)없는 것이라 말한다'라고 하였다.
언제나 알고 보는 것이 관건이지 믿는 것이 관건은 아니다. 부처의 가르침은 '와서 보라'(ehi-passika)고 당신에게 권하는데 한정될 뿐이고 와서 믿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불경에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을 언급할 때 언제나 사용하는 표현은 '때와 더러움이 없는 "진리의 눈"(Dhamma-cakkhu;法眼)이 뜨였다', '그이는 진리를 보았다. 진리를 얻었다. 진리를 알았다. 진리를 꿰뚫었다. 의심을 극복하였다. 흔들림이 없게 되었다', '그래서 바른 지혜를 가지고 있는 그대로(yathabhutam;如實) 본다'이다.
부처가 자신의 깨달음을 언급할 때 '눈이 생겼다. 앎이 생겼다. 지혜가 생겼다. 학문이 생겼다. 빛이 생겼다'라고 말하였다.
항상 앎 또는 지혜(nana-dassana;智見)로써 보는 것이지 신앙으로써 믿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바라문교의 정통주의(Brahmanic orthodoxy)가 자기네 전통과 권위를 의심하지 말고 유일한 진리라 믿고 받아들이라고 편협하게 주장하던 시대임을 고려할 때 더더욱 가치가 있다.
한번은 학식 있고 유명한 바라문의 동아리가 부처를 만나러와서 긴 토론을 벌였다. 그 동아리의 한 사람은 까빠티까Kapathika라는 16세의 소년 바라문이었다. 그 동아리 사람들 모두가 그를 두드러지게 똑똑하다고 여겼다. 그가 부처에게 질문을 던졌다.
'고따마님, "손상되지 않은 구전口傳"으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옛 바라문 성서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바라문들이 절대적 결론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것만이 유일한 진리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은 틀렸다" 자, 고따마님 이것에 대해 무슨 말씀을 하시렵니까?'
부처는 물었다. '바라문들 가운데 단 한사람이라도 "이것만이 유일한 진리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은 틀렸다"라고 제 스스로 알고 보았다고 주장하는 바라문이 있는가?'
젊은이는 솔직하여 '아니오'라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단 한사람의 스승이나 아니면 일곱 세대를 거슬러 올라간 스승들의 스승이나 심지어는 그 성서의 지은이들 중에 "이것만이 유일한 진리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은 틀렸다"고 자기가 알고 보았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는가?'
'아뇨.'
'그렇다면 그것은 서로서로 앞사람을 붙들고 서있는 장님들의 행렬과 같네. 첫째 장님도 보지못하고, 가운데 장님도 보지못하며, 마지막 장님도 역시 보지못하지. 그렇게 내게는 바라문들의 처지가 장님들의 행렬같아 보인다네.'
그래서 부처는 바라문의 동아리에게 더없이 중요한 충고를 해주었다.
'"이것만이 유일한 진리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은 틀렸다"라고 결론짓는 것은 진리를 지키는(문자적 의미는 '수호하는') 지혜로운 이에겐 가당치 않은 일이라네.'
그 어린 바라문은 진리를 지킨다거나 수호한다는 개념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청하였다. 부처는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신앙을 가졌다. 만약 "이것이 나의 신앙이다"라고 한다면 그 한도 내에서만 진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라네. 그냥 그렇게만 해서는 "이것만이 유일한 진리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은 틀렸다"랄 수 있는 절대적 결론에까지는 나아갈 수 없는 것이라네.'
달리 말하자면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믿기 마련이라서 "이것을 믿는다"라 말할 뿐이다. 그 사람은 그 한도내에서만 진리를 받드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단지 자기 믿음이나 신앙 때문에 자기가 믿는 것만 유일한 진리이고 다른 모든 것은 거짓이라고 말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부처는 말한다. '한 가지(어떤 한 가지 견해)에 집착하고 다른 것(견해)들을 천하다고 깔보는 것, 슬기로운 이는 이런 것을 족쇄라 부른다.'
첫 가름:
불교에서 가르치는 마음자세 -- 5
한번은 부처가 제자들에게 원인과 결과(因果)의 교리를 설법하였다. 듣고나서 제자들은 명확히 보고 알게 되었다 말하였다. 그래서 부처는 말하였다.
'오! 비구들이여, 이 견해가 그토록 순수하고 명확하다 하더라도, 너희가 붙들어 놓지 않고, 애지중지하고, 보물같이 여기고, 집착한다면 그 가르침이 뗏목과 같음을 이해치 못한 것이다. 뗏목은 건너가기 위한 것이지 집착하기 위한 것이 아니니라.'
부처는 다른 곳에서 이 유명한 비유를 설법하였다. 거기에서 그의 가르침이 건너가기 위한 것이지 집착하고 짊어지고 다니기 위한 것이 아니라며 뗏목에다 비유하였다.
'오! 비구들이여, 한 사람이 여행길에 있다. 그는 거대한 물줄기를 만났다. 이쪽 물가(此岸)는 위험하다. 그러나 저 건너 물가(彼岸)는 안전하고 위험이 없다.41 안전하고 위험이 없는 저 건너 물가로 건네다줄 배가 없다. 또한 건너갈 다리도 전혀 없다. 그가 혼잣말을 한다.
"이 물바다는 넓디넓다. 그리고 이쪽 물가는 위험으로 가득 차있다. 그러나 저 건너 물가는 안전하고 위험이 없다. 저 건너 물가로 건네다 줄 배도 없고, 건너갈 다리도 없다. 그래서 내가 풀과 나무, 잔가지와 잎사귀들을 모아서 뗏목을 만들고 그 도움으로 손으로 발로 저어 저 건너 물가로 가는 것이 좋겠다."
오! 비구들이여, 그래서 그 사람은 풀과 나무, 잔가지와 잎사귀들을 모아서 뗏목을 만들었다. 그 도움으로, 손으로 발로 저어 저 건너 물가로 갔다. 건너가 반대편 물가에 닿고서 그가 생각한다. "이 뗏목은 내게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이것의 도움으로 손으로 발로 저어 이쪽 물가로 무사히 건너왔다. 내가 이것을 이고 지고 가는 데 마다 가지고 다닌다면 좋을 것이다."'[각주1]
[각주1] <역주>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의 끝 구절, 즉 '아제 아제 바라아제'라는 주문(呪)은 바로 이 "이쪽 물가"(차안)과 "저 건너 물가"(피안)에 대한 내용이다. 그 산스크리트 원문과 한역은 다음과 같다.
gate gate paragate parasamgate bodhi svaha
揭帝 揭帝 婆羅揭帝 婆羅僧揭帝 菩提娑婆訶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제사바하)
그 의미를 에드워드 콘츠 교수의 Conze,Edward의 영역에 의하여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가 버림이여,* 가 버림이여, Gone, go
저 건너로 가 버림이여, gone beyond,
완전히 저 건너로 가 버림이여, gone altogether beyond,
오! 깨달음이로구나! 축복이어라! what an awakening, all hail!
'어떻게 생각하느냐? 오! 비구들이여. 그가 이런 짓을 했다면 뗏목에다 알맞게 행동한 것인가?'
"아닙니다, 존자시여."
'그러면 어떤 방법이 뗏목에다 알맞게 행동하는 것인가? 반대편 물가로 건너간 뒤에 그 사람이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보자. "이 뗏목은 내게 엄청나게 도움이 되었다. 이것의 도움을 받아 손으로 발로 저어 이쪽 물가로 무사히 건너왔다. 이 뗏목을 물가로 끌어올리거나, 메어두거나, 떠내려보내고 나서 그것이 어떻게 되던 간에 내 갈 길을 가리라" 이렇게 행동하여야 그 사람이 뗏목을 가지고 알맞게 행동한다고 할 수 있다.'
'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나는 뗏목과도 같은 교리를 가르쳐왔다.―그것은 건너가기 위한 것이지 가지고 다니기 위한(직역하면 집착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 비구들이여, 가르침이 뗏목 같음을 이해하는 너희는 유익한 것(dhamma;法)까지도 그만두어야 한다. 하물며 해로운 것(adhamma;邪法)에 있어서랴.'[각주2]
[각주2] 주석에 의하면 여기서의 법法(dhamma)이란 지고한 정신적 성취 뿐만 아니라, 순수한 견해와 관념이다. 법이 아무리 높고 순수하다 하더라도 거기에 대한 집착은 버려야하는 것이다. 하물며 해롭고 나쁜 것에 있어서랴.
이 우화에서 부처의 가르침이 사람을 안전과 평화, 행복, 안정, 열반의 성취에 인도함을 뜻한다는 것이 아주 명백하다. 부처가 가르친 교리 전부가 그러한 결과에 인도하는 것이다. 그는 지적 호기심만을 만족시키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그는 현실적인 스승이어서 사람에게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주는 그런 것만 가르쳤다.
첫 가름:
불교에서 가르치는 마음자세 -- 6
부처는 한때에 꼬삼비Kosambi(알라하바드Allahabad 근처)의 싱사빠Simsapa나무 숲에 머문적이 있었다. 그는 몇 개의 잎사귀를 손에 들고 제자에게 질문하였다.
'오!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것이 더 많은가? 내 손안에 잎사귀 몇 개와 여기 숲 전제에 잎사귀 중에서.'
'세존이시여, 세존의 손안엔 아주 적은 잎새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싱사빠나무 숲 전체에 있는 잎들이 정말로 훨씬 더 많습니다.'
'그와 같다. 비구들이여, 내가 아는 것 중에 너희에게 이야기해준 것은 아주 적은 것에 지나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매우 많다. 그러면 왜 (그것들을)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쓸데가 없기 때문이다. ..... 열반에 인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가 그것이다.'
어떤 학자들이 헛되이 시도하는 것처럼, 부처가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 것을 추측하려는 것은 우리에게 무익하다. 순전히 사변적이고 비현실적인 문제만을 만들어 내는 쓸데없는 형이상학적 질문을 논하는 것에 부처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그것들을 "견해들의 황무지"라고 여겼다. 부처자신의 제자들 중에도 이런 태도가 못마땅한 자가 좀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예의 하나로 말룽꺄뿟타Malunkyaputta
(만童子)를 들 수 있다. 그는 형이상학적 문제인 유명한 고전적 질문들을 부처에게 던지고 대답을 요구하였다.
하루는 말룽꺄뿟따가 오후 일과의 '명상'수행에서 일어나, 부처에게 와서 인사하고는 한쪽 켠에 앉아서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제가 홀로 명상을 하다가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세존께서 제쳐 놓으시고 거부하시어 설명되지 않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즉, ⑴우주는 영원한가? 아니면 ⑵영원치 않은가? ⑶우주는 유한한가? 아니면 ⑷무한한가? ⑸영혼과 몸은 같은 것인가? 아니면 ⑹영혼과 몸은 제각각 인가? ⑺여래는 죽은 뒤에도 존재하는가? 아니면 ⑻죽은 뒤에는 존재치 않는가? 아니면 ⑼죽은 뒤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존재치 않는가? 아니면 ⑽존재치 않으면서 (동시에) 존재치 않은 것도 않은 것인가?
이런 문제들을 세존께서는 제게 설명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이 (태도)는 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세존께 와서 이 문제들에 대해 여쭈어 보려 하였습니다. 세존께서 그것들을 제게 설명해 주신다면 저는 계속 세존밑에서 거룩한 삶을 따를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들을 설명해 주지 않으신다면 저는 이 "승가"를 떠나가 버리겠습니다.
세존께서 우주가 영원한 것을 아신다면 제게 그렇다고 설명해 주십시오. 만약 세존깨서 우주가 영원치 않다는 것을 아신다면 그대로 설명해 주십시오. 만약 세존께서 우주가 영원한가 그렇지 않은가 등등에 대하여 모르신다면 모르는 사람으로서 솔직히, "나는 모른다. 나는 보지 못하였다"라고 말하십시오.'
말룽꺄뿟따에게 해준 부처의 대답은 오늘날 세계에서 그런 형이상적 의문으로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불필요하게 마음의 평화를 뒤흔들어 버리는 수 백만의 사람들에게 정말 유익하다 아니할 수 없다.
'말룽꺄뿟따야, 내가 너에게 "이리 오너라. 말룽꺄뿟따야. 내 밑에서 거룩한 삶을 따르라. 그러면 네게 그 문제들을 설명해 주겠노라"라고 말한 적이 있더냐?'
'없었습니다, 존자시여'
'그렇다면 말룽꺄뿟따야, 네가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밑에서 거룩한 삶으로 따르려 합니다. 그러면 세존께서는 그 문제들을 제게 설명해 주시리라 믿습니다"라고 내게 말한 적이 있었느냐?'
'없었습니다, 존자시이여'
'말룽꺄뿟따야,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네게 "이리와서, 내 밑에서 거룩한 삶을 따르라. 그러면 네게 그 문제들을 설명해 주겠노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너 또한 내게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밑에서 거룩한 삶으로 따르려 합니다. 그러면 세존께서는 그 문제들을 제게 설명해 주시리라 믿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어리석은 자여, 이런 마당에 누가 누굴 거부하느냐?'
'말룽꺄뿟따야, 만약에 누가 "나는 그 문제들을 설명해주기 전에는 세존밑에서 거룩한 삶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여래에게서 이 질문들의 답을 듣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생각해 보아라, 말룽꺄뿟따야. 어떤 사람이 독화살에 부상을 입었다. 그래서 친구와 친척이 의사에게 데려갔다.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보아라. "누가 내게 활을 쏘았는지를 알기 전엔 이 화살을 뽑아내지 않겠다. 끄샤뜨리야Ksatriya(무사 계급)일까, 아니면 바라문(사제 계급)일까, 바이샤Vaisya(상인과 농민 계급)일까, 아니면 수드라Sudra(천민 계급)일까? 이름이 무엇이고 성씨가 무엇일까? 키가 클까, 작을까, 중간일까? 피부 색깔은 까말까, 갈색일까, 아니면 누런색일까? 그 작자는 촌사람일까? 읍내 사람일까? 아니면 도회지 사람일까? 무슨 활로 나를 쐈는지 알기 전에는 이 화살을 뽑아내지 못하겠다. 어떤 종류의 활시위를 썼을까? 어떤 화살일까? 무슨 깃털이 화살에 쓰였나? 살촉을 뭘로 만들었나?" 말룽꺄뿟따야, 그 사람은 이런 것들 중에 어떤 것도 알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말룽꺄뿟따야, 그와 같이 어떤 이가 "나는 세존께서 우주가 영원한가 아니면 영원치 않은가 따위의 질문에 대답해 주시기 전에는 그분 밑에서 거룩한 삶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여래에게서 이런 의문들에 대한 답을 듣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부처는 말룽꺄뿟따에게 거룩한 삶은 그런 견해들과 무관하다고 설명하였다. 누가 그런 문제에 대해 어떤 주의주장을 갖더라도 태어남과 늙음과 병듦과 죽음(生老病死), 슬픔과 비애, 아픔, 통한, 고통(憂悲惱苦)이 있다. "내가 밝힌 것은 바로 이 삶에서 이런 것들이 그치는 것(즉,열반)이다."
'그러하니 말룽꺄뿟따야, 내가 설명해야할 것을 설명하고 설명하지 말아야될 것을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을 명심하거라. 내가 설명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우주는 영원한가, 영원치 않은가? 등등(열 가지 견해;十無記)을 설명하지 않았다.
말룽꺄뿟따야, 왜 나는 그것을 설명치 않았는가? 그것들은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정신적인, 거룩한 삶에 근원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더러움에 대한〕혐오와 〔집착을〕여읨, 〔둑카(苦)의〕그침, 평안, 〔지혜를〕깊이 꿰뚫음, 완전한 깨달음과 열반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네게 그것들을 말하지 않은 이유이다.'
'그러면 말룽꺄뿟따야, 내가 설명한 것은 무엇인가? 나는 둑카dukkha(苦), 둑카의 생겨남, 둑카가 그침, 둑카가 그치도록 인도하는 길을 설명하였다. 말룽꺄뿟따야 내가 왜 그런 것들을 설명하였는가? 그것에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신적인 거룩한 삶에 근원적으로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더러움에 대한〕혐오와 집착을 여읨, 중지, 안정, 〔지혜를〕깊이 꿰뚫음, 완전한 깨달음과 열반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설명하였다.'[각주1]
[각주1] 부처의 이 충고는 말룽꺄뿟따에게 바람직한 영향을 준 것 같다. 다른 곳에서 그가 가르침을 받으려고 부처를 다시 찾아와 아라한이 되는 길을 따랐다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A. (Colombo,1929), pp.345~346; S. IV (PTS), p.72
이제, 부처가 말룽꺄뿟따에게 설명해준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알아보기로 하자.
실론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gikoship/15780666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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