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30송 (론서)

삼시교판(三時敎判)과 삼성중도설(三性中道說)

수선님 2021. 6. 6. 11:07

삼시교판(三時敎判)과 삼성중도설(三性中道說)

하도겸 칼럼니스트

 

뜻으로 간추린 백일법문 19

부처님이 가르침을 시설할 때에,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설하셨는데 그 근기를 크게 세 등급으로 나누고 가르침도 여기에 맞추어 세 시기로 나누어 일대시교(一代時敎)를 설했다. 그런데 모든 중생들은 무명에 눈이 멀었기 때문에 미혹한 업을 짓고, 하근기의 중생들은 나[我]의 실체가 있다는 아집(我執)을 지어 생사에 윤회하여 해탈의 길을 밟지 못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처음에 정각을 이루어 선인녹원에서 사제의 법륜을 굴려 「아함경(阿含經)」을 설해서 최하근기의 중생들로 하여금 아집을 버리고 점차적으로 성위(聖位)에 들도록 하여 마침내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하게 했다.

세존이 소승의 법집(法執)에 대한 유견(有見)을 타파하기 위하여 영축산에서 모든 법이 다 공하다는 것을 설하니 그것이 소위 마하반야경(摩訶般若經) 등이다. 여기서 중근기의 중생들로 하여금 소승의 유견을 버리고 대승의 공견(空見)으로 들어가게 했는데, 그들은 세존이 비밀한 뜻으로 무를 설하여 유를 파하는 것을 듣고서는 일체만법이 다 공한 줄을 알아 유무이제(有無二諦), 진속이제(眞俗二諦), 이사이제(理事二諦) 등의 상대적인 이제는 모두 다 떨쳐버리게 된다.

한 쪽은 유를 집착하고 또 한 쪽은 공을 집착해서 서로 옳다고 다투기에 여래께서 공과 유의 집착을 제거하기 위하여 세 번째 시기에 비밀히 말하지 않고 요의교, 즉 중도사상을 제대로 다 표현한 「해심밀경」을 설하여 일체 모든 것이 오직 식만 있지 객관적인 경계는 없다고 하여 유식(唯識)을 주장한다. 유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경계를 대하여 법에 집착하지만 그것은 오직 식만이 있고 경계는 없다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의 이치를 모르기 때문이며, 이 심외법무의 도리로 유집을 타파한다. 또 유집을 부수어서 일체가 공하게 되므로 전체가 다 공하니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닌가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즉 안으로 식이 분명히 있다[非無內識]고 주장하여 일체가 다 공하다는 집착을 또한 타파한다.

소승에서 주장하는 유견도 떠나고 대승에서 주장하는 무견․공견도 다 떠나 바로 중도에 들어가 진제의 도리에 대한 깨침이 분명히 있게 된다. 모든 것이 다 공하다고 하여 아주 텅 비어서 아무 것도 없다고 하면 이것은 단공(斷空)에 떨어져 공견외도(空見外道)가 되고 불교가 아니다. 왜 그런가 하면 진제의 도리에 분명히 깨침이 있어 일체가 공한 가운데 유가 있고, 또한 속제(俗諦) 중에 묘하게 능히 머물러 있으면서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속제라는 것은 유(有)를 말하고 버림[捨]은 공으로 보아 결국 유가 공이라는 말이다. 공이 즉 유이고, 유가 즉 공으로서 공즉시색 색즉시공과 아주 비슷한 뜻이 된다. 이렇게 되면 중도가 안될래야 안될 수가 없는 것이다.

중생이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윤회할 때에 허망하게 분별하는 망상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능취나 소취, 또는 자아나 법 할 것 없이 모두가 허망한 마음 가운데 있는 것이어서 실제로 그것을 찾아볼 수는 없다. 허망한 마음 가운데에 능취와 소취가 없게 되면, 이 마음은 생멸한다는 망견(生滅妄見)이 아니고 진공묘유(眞空妙有)가 된다. 허망한 마음 가운데 진여가 있다고 하는 것은 ‘무명의 실성이 곧 불성’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무명 즉 분별하는 망심(妄心) 자체가 근본적으로 공하기 때문에, 무명 이대로가 불성이고, 허망한 분별망심 이대로가 진여이다. 그러므로 진여 밖에 망심없고 망심 밖에 진여가 없는 것이다.

허망한 분별심은 속제(俗諦)이고 공성은 진제(眞諦)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속제 가운데 진제가 있는 것은 색즉시공이요, 진제 가운데 속제가 있는 것은 공즉시색이니 이것은 진공묘유의 내용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둘이 없다’라는 것은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이 없다는 뜻이다. 유위법과 무위법 이 둘은 일체만법을 다 거두어 들이는데, 유위라는 것은 허망한 분별을 말하는 것으로 속제(俗諦)이고, 무위는 공성(空性)으로서 진제(眞諦)다. 분명히 공하면서 허망한 분별이 있고 허망한 분별이 있으면서 분명히 공하므로 공도 아니고 공 아님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공이 아님[非空]은 진속 이제(二諦)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니, 즉 유무든지 진속이든지 이런 것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공 아님도 아님[非不空]이라는 것은 능취와 소취 또는 아와 법, 이 두 가지가 전부 다 공한 것이므로 공 아님도 아닌 것이다. 유와 무를 떠나고 그러면서 유와 무가 서로 통하는 중도에 입각해 있는 것이다.

삼성이란 원성실성(圓成實性)․의타기성(依他起性)․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으로 일체 제법의 성질을 세 가지로 분류한 것이다. 원성실성은 깨달음의 세계를 나타내는 말로 진여(眞如)라고도 한다. 원성실성에는 변하지 않는다는 진공(眞空)인 불변의(不變義)와 연에 따라 변한다는 묘유(妙有)수연의(隨緣義)가 있다. 의타기성은 만법이 연기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임시로 존재한다는 사유의(似有義)와 실성이 없다는 무성의(無性義)가 있다. 일체만법은 연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성이 없는 것이다. 변계소집성은 집착과 미망의 세계를 가리키며 함부로 헤아린 것인 망정이 있다는 뜻인 정유의(情有義)와 참된 도리가 없다는 뜻인 이무의(理無義)가 그것이다. 미혹의 망정은 있지만 진실한 이치는 없다는 말이다.

삼으로 새끼줄을 만들어 길바닥에 놓아 두었는데 어둠침침할 때에 어떤 사람이 이것을 보고 뱀으로 잘못 알아 깜짝 놀랐다. 이렇게 새끼줄을 착각하여 뱀으로 분별하는 망견을 변계소집성이라고 한다. 깜짝 놀란 후 자세히 보니 뱀이 아니고 새끼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새끼줄이라는 것도 본래 삼으로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새끼줄을 풀어 보면 새끼줄이 아니다. 이 새끼줄은 풀어서 옷도 만들 수 있고 여러가지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실성(實性)이 없는 것이다. 즉 새끼줄은 임시로 삼을 꼬아서 만든 것이므로 새끼줄이 있는 듯하지만 분해해서 보면 새끼줄은 없고 삼뿐이다. 여기서 새끼줄은 바로 의타기성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삼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그대로 있다. 그것으로 새끼줄을 만들든 다른 무엇을 만들든간에 삼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것은 원성실성을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이 원성실성은 진공묘유로서 그 자성이 공하면서 또한 묘유이기도 한다. 삼을 진공으로 비유하면 그 삼으로 새끼줄이나 베를 짜는 용(用)은 곧 묘유로 볼 수 있다.

원성실성 가운데 자성이 변하지 않는다는 불변(不變)과, 의타기성의 참된 성품이 없다는 무성(無性)과, 변계소집성의 이치가 없다는 이무(理無)는 모두 다 무변(無邊)으로서 서로 통해 있다. 즉 불변도 공이고 무성(無性)도 공이며 이무(理無)도 공이기 때문에 삼성의 성질이 한 가지로 통해 있어 결국은 그 의미가 서로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말을 파괴하지 않고도 항상 근본을 이루므로 아무리 자성이 인연을 따르더라도 불변 그대로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경전에서 중생 그대로가 열반이라고 하였으니 그 뜻은 중생 외에 별도로 열반이나 부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을 부수어서 열반을 만들고 부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본성을 바로 알면 그것이 바로 부처이고 열반인 것이다. 이것은 삼성에서 불변과 무성과 이무의 뜻이 서로 통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에 대한 적절한 비유로 금과 가락지의 비유가 있다. 즉 금으로 가락지를 만들지만 가락지를 제외하고 금이 없고 금을 제외하고 가락지가 없으니 가락지 그대로가 금이다. 금으로 젓가락 등 어떤 것을 만들든 금의 자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작용하는 상태는 달라도 그 밑바탕을 이루는 본성에는 변함이 없다. 불변과 수연의 관계도 이와 같아 불변이 곧 수연이고 수연이 곧 불변이다.

 

 

 

 

 

 

 

 

 

[출처] 삼시교판(三時敎判)과 삼성중도설(三性中道說)|작성자 불교학자료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