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 삼성설(唯識三性說)과 삼무성설(三無性說)>
1. 유식 삼성설(唯識三性說)
유식 3성이란 유식불교에서 우리 마음의 존재 양식, 그리고 만유의 실상을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 계산해서 집착하는 마음) · 의타기성(依他起性 - 경계(境界)에 의해 일어나는 마음) · 원성실성(圓成實性 - 원만하고 실다운 마음)의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 것을 말한다.
이는 세상의 모든 존재 양상을 마음속으로 환원해 3종으로 분류한 것으로, 3성(三性)이라 불리며, 이 세상의 모든 일체만법은 3성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3성설은 우리 마음인 식(識)을 떠나서 외부세계에서는 따로 진실한 경계가 없다는 사상을 세 가지로 설명한 것이다.
그리고 3성은 서로 관계가 있으면서도 그 성질이 서로 다른 것이 특징인데, 3성은 모두 인연에 의해 형성된 것이므로 자성(自性)을 지니고 있다 할 수 없으므로 모두 무성(無性)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삼성이 실제로는 무성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학설이 삼무성설(三無性說)이다.
중생은 3성(三性)으로 마음을 쓰기 때문에 계산해서 집착하므로 변계소집(遍計所執)하지만 보살은 3성이 있으나 계산해서 집착하지 않으므로 원성실(圓成實)의 마음을 쓴다.
이러한 3성은 유식사상의 중심개념이자 유가유식종(喩伽唯識宗)이나 삼론종 · 법상종(法相宗) 철학의 골격을 이루는 근본교의 중의 하나로서, 유식학의 원전이라 할 수 있는 해심밀경(解深密經)과 유가사지론(瑜加師地論), 그리고 섭대승론(攝大乘論) 등에 실려 있고, 이러한 원전의 학설을 요약한 것이 세친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이며, 유식삼십송을 해설한 성유식론(成唯識論)인데, 이들에도 자세히 기록돼 있다.
(1)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산스크리트어 parikalpita-svabh?va)
‘변계소집성’의 이름 가운데 ‘변계(遍計)’는 진리를 망각하고 이리저리 잘못 헤아려 억측하는 것으로 주관적인 자신의 감정과 욕망으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선악시비(善惡是非)와 이해득실(利害得失)을 따져 마음으로 계산하는 것이다. 보고 듣는 것을 그냥 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속으로 계산하면서 보고 듣고 하므로 잘못 보고 잘못 듣게 되기 때문에 변계한다. 그리고 소집(所執)은 변계에 의해 잘못 보거나 계산된 대상에 대해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있다거나 없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계(計)’는 계탁(計度, 헤아려 판단함)을 뜻하는데, 무명을 일으킨 무지를 말한다.
따라서 무지로 말미암아 물질과 마음의 인연법과 진실성을 망각하고, 집착한 마음의 작용을 일으켜 번뇌 망상에 빠지는 성질을 변계소집성이라 한다. 이는 우리 중생 차원의 ‘마음가짐’으로서, 모든 것에 두루 집착해서 바르게 판단하지 못하는 성품이다. 즉, 중생은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고 모든 것을 치우치게 보고 집착한다는 말인데, 이를 다른 말로 정유리무(情有理無)라고 한다.
그리고 변계소집이란 존재하지 않은 것을 존재한다고 집착함이다. 가령 어두운 밤에 노끈을 보고 뱀이라고 잘못 여기는 것과 같이 생사(生死)가 본래 없는데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것을 존재한다고 집착하고, 보리열반(菩提涅槃)이 법계(法界)에 충만하지만 그 실(實)을 보지 못하고 보리열반을 따로 찾는 것 등이 모두 변계소집이다. 나아가서 이와 같이 사물을 잘못 보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착각은 다 변계소집이다.
변계는 6식 7식으로 한다. 언어를 사용해 변계한다. 그러므로 자기 무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본래 없는 마음이 경계에 의해 일어난 것을 집착해서 내 마음이라 하고 사량(思量)하고 헤아리면 이것이 곧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 돼서 윤회(輪廻)의 씨가 되는 것이다.
중생은 모두 무명(無明)과 탐진치(貪瞋痴) 삼독심(三毒心)에 가려진 눈으로 보는 것이라서 바로 못 보고, 번뇌를 야기해 악업을 짓는다. 그리하여 온갖 분별로써 마음속에서 지어낸 허구적인 대상, 온갖 분별로 채색된 허구적인 차별상을 가지고 있다.
‘저 사람이 밉다’ 하는 것도 역시 번뇌에 가린 마음에서 보는 것이지, 그 사람이 객관적으로 미운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중생심은 나의 망정, 나의 망상(妄想)에만 있지 원래 본바탕인 법성(法性)의 자리인 리(理), 즉 우주의 참다운 진리에는 없다. 정유리무(情有理無)인 것이다.
중생은 이와 같이 정유리무의 상태에 있는지라, 중생의 망정에만 있고 참다운 이치에는 없는 것을 가지고 싸우고 좋아하고 전쟁까지 한다. 즉, 본래 없는 것을 범부의 망상(妄想)으로 갖가지 추측ㆍ억측을 통해 있다(有)라고 집착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토끼 뿔’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토끼의 뿔이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긴 귀를 뿔로 착각하는 경우처럼 깨달음에 의해 관조(觀照)된 경지가 아니라, 범부의 미망(迷妄) 때문에 있는 것처럼 잘못 판단하는 일체의 사물현상이 변계소집성이다.
일반 가정의 경우, 별로 예쁘게 생기지도 않았지만 부모 입장에서 보면 자기 아이니까 예쁘고도 예쁘다. 헌데 이것도 정에 끌려, 자식에 집착해서 치우치게 본 것이다. 이처럼 망상으로 치우치게 봐서 집착하는 성품이 곧 변계소집성이다.
중생은 매사에 집착하는 이와 같은 변계소집성에 얽매여 번뇌 망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뿌리쳐버리면 우리 집안이나 가정, 마을이나 나라, 온 세계나 우주에 평화가 올 것이다. 이와 같이 변계소집성은 번뇌를 뜻하지만 다행인 것은 번뇌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수행하면 없어질 수가 있다.
(2) 의타기성(依他起性, 산스크리트어 paratantra-svabh?va)
‘의(依)’는 의지, 의탁의 뜻이고, 제법이 타(他)를 의지해 일어난다는 말로서 인연(因緣)이란 말과 같은 뜻이다. 초기불교에서 말한 연기법을 유식에서는 바로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 한다. 이는 만물이 인연에 의해 생겨났다는 뜻으로, 사물은 언제나 원인과 결과에 의해 생성소멸(生成消滅)을 거듭한다는 것이다. 의타기성은 자성(自性)이 없다는 소리이고, 인연이기 때문에 무자성, 즉 본무자성(本無自性)임을 나타내는 유식의 철학관이다. 부싯돌이 부딪치므로 불이 일어나듯 마음은 본래 나고 멸함이 없으나 인연에 의해 생(生)하고 인연에 의해 멸(滅)하므로 연생연멸(緣生緣滅)인 것이다.
타(他)에 의존하지 않으면 결코 기(起)가 되지 않는 것이니, 세상만물은 타와의 인연에 의해 생길 뿐 홀로 자생(自生)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의타기성은 만물을 생(生)하게 하는 이치이다. 아무리 사람으로 윤회할 수밖에 없는 종자(種子)를 스스로 지니고 있어도 내 부모와의 인연 없이는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나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의타로 기(起)하는 것이다. 산천초목의 현상이 그렇고 모든 물질이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현상도 그렇다. 인연소생(因緣所生)이므로 모두 의타기인 것이다.
한 송이 꽃이 피는 것도 꽃씨나 태양이나 기후, 공기와 물과 영양분이 뿌리와 줄기와 잎에 영향을 미쳐 생기는 일이다. 즉, 우주 천지의 모두가 거기에 관련돼 있다. 이와 같이 중중무진(重重無盡) 온 세상이 연결돼 있다. 남을 의지해 존재하는 것, 그리고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의타기성으로서 우주 만물 그 어디에도 혼자 존재하는 것은 없고, 그 어느 것도 자기의 원인만으로는 나기 어려우며, 반드시 다른 연(緣)에 의해 일어난다. 즉, 사바세계에 있는 삼라만상 모두가 다 인연 따라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인연생인연멸(因緣生因緣滅)'이라는 말이다.
‘나’라는 존재, ‘너’라는 존재, 풀 한 포기조차도 모두 인연 따라 이루어지고, 태양계(太陽系)나 우주의 뭣이든 다 인연 따라서 잠시 이루어진다. 현상계의 모든 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조건과 환경이 인연이 돼 나타나는 이것이 의타기성(依他起性)이다.
따라서 의타기성은 여환가유(如幻假有), 즉 모든 것은 고정돼 있거나 상주법이 아니라, 환상과 같은 것으로서 임시로 존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삼라만상 이것들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잠시 허깨비같이 가짜로 모양을 나툰 것일 뿐이다. 순간 찰나도 같은 모습, 고유한 존재가 아니다. 이런 허깨비 같은 존재를 중생들은 망정으로, 망상으로 헤아려서 있다고, 좋다고, 싫다고 고집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의타기성은 마치 허깨비와 같은 것이어서 인연 따라 일어나고 인연 따라 소멸하는 까닭에 공(空)이다. 존재를 존재하게 한 근원이 소멸될 때 만물은 공(空)의 본질로 되돌아가고 만다.
모두가 인연생(因緣生)이고 공(空)이다. 사바세계에 있는 두두물물(頭頭物物) 산하대지 삼라만상 모두가 인연 따라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무상하고, 공(空)이고, 허망하다는 말이다. 소중한 내 몸뚱이나 그대 몸뚱이나 내 집이나 모두가 다 가짜로 잠시 중생의 망식에 있어 보이는 것이지 실재하지 않다는 말이다.
마음 또한 의타기로 생긴다. 마음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상대인 경계와의 인연으로 인해 일어나는 것이다. 상대에 의해서만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비록 5근 6식을 지니고 있어도 경계인 상대가 없으면 마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잠자고 있을 때 5근 6식이 다 잠들어 꿈도 꾸지 않는다면 한 마음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눈을 뜨고 깨어나면 보이는 것, 들리는 것으로부터 부딪치게 되는 사람들과의 인연으로 인해 수도 없는 마음들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의타기성(依他起性)이 중생들 삶의 보편적인 본래모습이다. 그런데 의타기성에서 분별심을 일으켜 왜곡시켜 보면 변계소집성이 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면 원성실성이 된다. 의타기성의 본성은 변화하지 않고 영원한 진리의 체성을 구족하고 있다는 뜻에서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은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은 자리로서 함께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3) 원성실성(圓成實性, 산스크리트어 parini?panna-svabh?va)
원성실성은 본래적인 것, 중생의 망상분별을 떠난 참다운 성품자체를 말한다. 원만(圓滿), 성취(成就), 구경(究竟), 진실(眞實)의 의미로서 이른바 불성(佛性), 법성(法性), 본성(本性), 진여(眞如), 실상(實相)의 경계가 원성실성이다. 즉, 원만성취가 이루어진 무한 공덕을 갖춘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말한다. 진공묘유(眞空妙有), 이 자리가 원성실성이고, 중도(中道)이며, 이것이 우리의 본성품이다.
그러나 중생의 망령된 마음에서는 불성, 진여, 부처와 여래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중생은 안 보이니까 부인을 한다. 정무리유(情無理有)란 말이다. 정무리유란 범부의 망정(妄情)에는 없지만 우주의 참다운 도리(理)에는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반대말 정유리무(情有理無)는 망정으로 인해 이런 참다운 도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가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물건이나 유정(有情)이나 어느 존재를 볼 때, 바로 보면 원성실성이고, 잘못 보면 변계소집성이다.
한 송이 꽃을 보더라도 꽃은 꽃대로 자연 그대로 피어나온 것이데, 그 꽃을 두고 우리 중생은 곱다, 안 곱다, 예쁘다, 밉다 하고 마음을 일으킨다. 본래에는 그런 것이 없다. 따라서 본래대로 본다면 진여불성이다. 이것이 바로 진여연기(眞如緣起)이고 중도(中道)로서 원만하게 이루어진 참다운 우주의 실상(實相)이다.
인연 따라서 된 것은 허망한 것이기 때문에 공(空)이지만 그러나 우주의 참다운 모습은 다만 공인 것이 아니라 결국 원성실성이다. 자비, 지혜, 행복, 능력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원만하게 갖추어진 그런 자리를 말한다.
망령된 중생의 마음에서는 불성(佛性)이 안 보인다. 그러나 중생의 망령된 마음에는 없지만 영원한 우주의 도리, 진리에서는 분명히 있다. 그래서 원성실성은 정무리유의 진여실상의 묘체(妙諦)로서, 이것이 우리의 본성이다. 또한 모든 존재의 본성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러한 삼성(三性)으로 비공비유(非空非有) 한, 공도 아니고 또는 유도 아닌 중도실상(中道實相)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비유컨대, 밤에 뱀인 줄 알고 놀랐는데, 다음날 자세히 살펴보니 노끈임을 알게 됐다는 예화가 있다. 여기서 뱀인 줄 알고 놀란 것은 변계소집성의 상태이다. 그런데 노끈을 뱀으로 오인하게 된 것은 그 모습에 유사성이 있었기 때문이고, 거기에 두려워하는 마음이 더해져서 그렇게 놀란 것이다. 이는 노끈과 마음이 인연화합 한 것이므로 의타기성이다. 그러나 뱀이 아니라 노끈임을 알게 돼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은 원성실성이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변계소집성은 범부의 망정(妄情)에만 있고 원래 본바탕인 법성(法性)의 자리인 이(理), 즉 우주의 참다운 도리(理)에는 없다는 정유리무의 세계로서, 유위유루(有爲有漏)의 상태에 있는 미혹한 범부의 세계 또는 세계관이다.
의타기성은 모든 것은 고정돼 있거나 상주법이 아니라, 환상과 같은 것으로서 임시로 존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여환가유(如幻假有)의 세계로서 유위무루(有爲無漏)의 상태에 있는 수행자들이 가진 세계 또는 세계관이다.
그리고 원성실성은 범부의 망정에는 있지 않고 우주의 참다운 도리(理)에는 있다는 정무리유(情無理有)의 세계로서 무위무루(無爲無漏)의 상태이며, 우리의 본성이고, 불성이며, 진여, 진공묘유인 부처가 가진 세계 또는 세계관이다. 따라서 원성실성의 세계 또는 세계관은 완전한 깨달음을 증득했을 때만 비로소 가질 수 있다.
2. 삼무성설(三無性說)
유식학에서 말하는 유식3성인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은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고 자성이 없다고 부정하는 이론을 삼무성설(三無性說)이라고 한다. 즉 3성은 모두 인연소생으로 이루어진 것이지 스스로 자성을 지닌 것이 아니므로 이들이 모두 무성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상무성(相無性) · 생무성(生無性) 승의무성(勝義無性)의 3무성에 의해 유식 3성을 부정함으로써 이 세상에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일체개공(一切皆空)의 진리를 밝히고 있다.
유식에서 3성은 마음에 의해 전개된 현상의 성격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3무성은 3성이 철저한 무자성에 의거하고 있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3성과 3무성의 교리는 유식사상의 근본성격을 나타내며, 유식사상이 불교의 무아(無我) ? 무자성(無自性)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유식설은 식(識) 이외의 존재를 부정해 ‘식만 있고 대상계는 없다’라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을 주장하지만 궁극의 경지에서는 그런 식마저도 존재하지 않은 식무경무(識無境無), 즉 식도 없고 대상계도 없다는 입장에서 반야 공사상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에 자성이 없다고 설명하는 것이 상무성(相無性)이고,
-의타기성(依他起性)에 자성이 없다고 설명한 것을 생무성(生無性)이라 하며,
-원성실성(圓成實性)에 자성이 없다고 설명한 것을 승의무성(勝義無性)이라고 한다.
1) 상무성(相無性) - 상무성이란 형상과 특질을 가진 존재는 본래 자성이 없다는 뜻으로, 이것은 변계소집성에 의해 분별된 상에는 자성이 없다는 의미이다. 즉, 온갖 분별과 망상으로 집착해서 번뇌를 일으키는 변계소집성은 허구적인 것으로 자성이 없고, 일체만법의 상(相)은 무성이라는 것이다.
2) 생무성(生無性) - 의타기성은 삼라만상이 인연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이므로 만법은 인연 따라 생하는 것이지 자성으로 자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생무성이란 인연 따라 생겨난 것에 자성이 없다는 의미로 의타기성의 연기적인 존재는 자성을 갖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3) 승의무성(勝義無性) - 승의무성은 원성실성의 무성성(無性性)을 말하며, 불교에서는 승의무성(勝義無性)을 진여성(眞如性)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모든 존재는 궁극적인 진리, 즉 승의(勝義)로서만 실재할 뿐 아무런 실체성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진여는 원만 상주하는 것으로 만유의 근원인 원성실성은 곧 절대법이므로 아무런 모양도 없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유식30송>의 제24송에 “승의무성이란 원성실성이 무성임을 밝힌 송이다. 원성실은 의타기로 생기한 마음을 계탁(計度-상상하고 분별함)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므로 찰나생멸의 이치에서 불변부동하고 무생무멸의 성(性)이 아니기 때문에 제1의제에 속하며 이를 승의제라 한다. 승의제란 본래 공(空)하여 무소유이므로 유와 무를 초월하고, 그러면서도 세속제를 수순(隨順)하므로 승의라 하는 것이고, 굳이 말하자면 무자성(無自性)이라 말하는 것이다.”라고 돼 있다. 이는 승의무성이란 승의 즉 궁극적으로 무자성이란 의미로 원성실성은 근본적으로 자성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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