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송곤 박사의 ‘불교교육학’강좌 11. 불교교육의 기초 (The Foundations in Buddhist Education)와 차제적 교육방법 |
1) 초기불교 교육방법의 토양 : 온(蘊)·처(處)·계(界)
ⓛ 불교교육의 존재론적 기초 초기불교 경전에서 서술하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교육방법은 온(蘊) · 처(處) · 계(界) · 근(根) · 제(諦) · 연(緣) 등을 순차적으로 說하는 과정에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다. 미리 말하지만 남방불교권에서 존경하는 붓다고사 스님은 위숫디막가(Visuddhimagga; 淸淨道論)에서 이 여섯 가지 온(蘊) · 처(處) · 계(界) · 근(根) · 제(諦) · 연 등을 위빠사나 수행을 위한 토양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을 보더라도 이 여섯 가지는 초기불교의 교육방법에서 핵심이라고 할 것이다. 부처님은 출가 비구들에게 자상하게 오온(五蘊)을 비롯하여 육근(六根)과 육경(六境), 그리고 12처(十二處), 18계(十八界) 등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하셨다. 즉 오온(五蘊)에 대해서 그리고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눈[眼] · 귀[耳] · 코[鼻] · 혀[舌] · 몸[身] · 생각[意] 등의 여섯 가지[육근]와 그 대상인 색[色: 형상으로 보이는 것] · 소리[聲] · 냄새[香] · 맛[味] · 촉감[觸] · 사물과 대상 경계 등으로서의 법[法] 등의 여섯 가지 대상[六境], 그리고 장소를 가리키는 육근[六內入處]과 육경[六外入處]이 합쳐진 열두 가지 장소[十二處], 또한 이 열 두 가지 장소에 눈[眼]의 경계 · 귀[耳]의 경계 · 코[鼻]의 경계 · 혀[舌]의 경계 · 몸[身]의 경계 · 생각[意]의 경계 등 6계(六界)가 합쳐진 18계(十八界) 등이 부처님께서 출가 비구들에게 순차적으로 강조해서 말씀하신 내용[교육내용]이다. 이것이 초기불교 경전에 나타나는 출가 비구들에게 부처님이 차제적(次第的)으로 說한 교육과정에 나타난 교육방법이다. 그런데 교육학의 측면에서 중요한 것들이 있는데, 그것은 오온설(五蘊說)과 육육법설(六六法說)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불교교육학의 기초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오온은 불교에서 말하는 존재론이라고 할 수 있다. 오온을 알기 쉽게 설명하면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져서 감각적으로 알 수 있는 물질 형상으로서의 색(色; form)이 있고, 그리고 감각기관을 통해서 느끼는 感受작용으로서의 수(受: feelings)가 있으며, 그 다음 감각기관을 통해 받아들인 것을 생각하고 의도적으로 행동하는 知覺으로서의 상(想: thinking)과 지음으로서의 행(行: volition)이 있고, 그 다음 분별 인식하는 식(識: perception)이 있다. 오온은 크게 물질과 정신으로 대별되는데, 이에 불교의 존재론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교육적으로는 오온설을 불교교육의 존재론적 기초(The ontological foundation in Buddhist Education)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오온설이 불교교육의 존재론적 기초가 되는 이유는 부처님께서 색(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등 오온이 영원하지 않으며, 또한 ‘나’도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니며, 이와 같이 잘 관찰해서 앎으로써 깨달아 열반을 증득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但由自悟而證涅槃. 我生已盡. 梵行已立. 所作已辦. 不受後有]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 경전에서 서술하고 있는 내용에서는 그것을 설하고 있다.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 때 바가범[세존]께서 바라니사 선인(仙人)이 떨어진 곳인 시녹림(婆羅痆斯仙人墮處施鹿林)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다섯 비구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들은 마땅히 알라. 색(色)은 나인가? 만약 색이 나라면 색은 응당히 병이 들거나 고뇌를 받지 않는다. 내가 이와 같이 욕망하고자 하는 것도 색이고, 내가 이와 같이 욕망하지 못하는 것도 색이다. 이와 같지 않으므로 나는 감정에 따라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색이 내가 아니므로,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도 그와 같다. 또한 비구들이여. 네 생각은 어떠한가? 색은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대덕이신 세존께 사뢰어 말씀드리길, “색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색은 영원하지 않다[無常]. 이것은 괴로움이다. 고통 그 자체이다. 무너지는 고통이며, 지속하는 고통이다. 그런데도 나의 성문, 많이 들은 제자들이여! 내가 있다고 집착하는가? 색이 나라면 내게 모든 색이 있고 색은 나에게 소속되어 색 가운데 내가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알라. 수상행식도 항상 영원하지 않음과 함께 하며 또한 이와 같다. 무릇 있는 바 색이 과거 미래 · 현재, 안과 밖의 작고 새밀한 것, 수승하거나 저열하거나 멀거나 가깝거나, 모두 나라고 내세울만한 것이 없다. 너희들은 마땅히 알라. 응당 바른 지혜로 잘 관찰하라. 이와 같이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의 과거 미래 현재,[안과 밖의 작고 새밀한 것, 수승하거나 저열하거나 멀거나 가깝거나] 모두 마땅히 알라. 앞에서와 같이 바른 지혜로 관찰해야 한다. 나의 성문 다문성제자들이 이 오취온을 관찰하려면 ‘나라고 내세울만 나’와 ‘나의 것’이 없음을 알라. 이와 같이 관찰하면 세간에서 능히 취하는 주체도 없고 취한 대상도 없다. 전변(轉變)하는 것도 아니다.”
② 불교교육의 인식론적 기초 그 다음 육육법설, 즉 육근과 육경이 만나서 성립하는 12처, 18계 등의 說이 있다. 잡아함경에 보면, 부처님께서는 일체(一切)는 12처(十二處)라고 강조하셨다. 이 열 두 가지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열 두가지를 벗어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나아가 이 열두 가지의 상호작용, 즉 눈과 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생각과 여러 가지 사물등 현상 사이에 相互 이루어지는 인식작용을 마찬가지로 잡아함경에서 說하고 계시는데 필자는 이와 같이 육근이 육경을 만나서 18계가 형성되기 까지의 인식과정을 교육적으로 볼 때 불교교육의 인식론적 기초(The Epistemologicl Foundation in Buddhist Educaton)라고 말하고자 한다.
後代 대승경전인 반야심경에서는 ‥ 照見五蘊皆空 ‥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을 說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이전에 부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이 오온과 육육법을 설하셨는지 잘 살피고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왜 오온과 육육법을 설하셨을까? 오온의 경우 색(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 등 다섯 가지는 실재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이 깨닫지 못해서 오온을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오온을 설하셨다고 할 수 있다. 데이비드 J. 칼루파하나는 ‘붓다는 무엇을 말했나’라는 책에서 “인간의 본성은 영원하거나 불변하는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인간이 그러한 행복을 기대하는 사물 자체는 영원하지 못하다. 영원하지 못하거나 덧없는 사물에서 나온 행복이나 만족은 분명 잠깐일 것이고 따라서 자신의 기대, 즉 영원한 행복을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고통이 발생한다. 그가 만족을 얻고자 하는 대상은 결국 불만족스러울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 있어 괴로움의 원인은 그 자체가 불만족스러운 사물에 집착하는 데에 있는 것과 같다.”라고<데이비드 J. 칼루파하나; 나성옮김, 붓다는 무엇을 말했나, pp.69-70. 4. 존재의 세 특성에서 인용함> 함으로써 영원하지 못하고 고통을 가져오는 존재의 특성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칼루파하나 교수의 서술을 통해서 독자님들의 오온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시길 바란다. 그리고 인간이 겪는 여덟 가지 고통[八苦]과 윤회의 고통 등은 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대상과의 관계에서 잘못된 인식작용과 행위 등에서 비롯하기 때문에 육육법을 강조해서 설하셨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죽하면 육근을 六賊이라고 典籍에서 말했겠는가 말이다. 상윳따 니까야를 보면 사리뿟따 존자를 찾아온 어느 비구에게 사리뿟따는 육근을 절제해야 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형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말하고 있어 귀담아 들을 내용이다.
“어느 때 사리뿟따 존자는 사왓띠의 기원정사에 있었다. 그때 어떤 비구가 사리뿟따 존자에게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벗, 사리뿟따여, 나와 함께 지내던 비구가 수행생활을 그만두고 세속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렇습니다. 벗이여, 감각기관[눈, 귀, 코, 혀, 몸, 생각 등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말한다]의 문을 지키지 않을 때, 먹는 것에 적당한 양을 조절하지 못할 대, 그리고 온전히 깨어있지 못할 때, 이런 사람이 그의 온 일생을 온전하고 청정한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벗이여, 만일 비구가 감각기관의 문을 지키고 먹는 것에 적당량을 알고 그리고 온전히 깨어 있다면, 그의 온 일생을 온전하고 청정한 수행자의 삶을 사는 것은 가능합니다. (여섯 감각기관의 절제) 그러면 감각기관의 문을 어떻게 지킵니까? 눈으로 대상을 볼 때 거죽으로 드러난 모습이나 특성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눈을 다스리지 않으면 탐욕과 불유쾌함의 바람직하지 않은 나쁜 것들이 마음속에 스며들 것입니다. 그래서 눈을 절제하는 수행에 전념하고 눈을 잘 지킵니다. 그런 결과 그는 눈의 절제를 얻습니다. 귀로 소리를 들을 때, 코로 냄새를 맡을 때, 혀로 맛볼 때, 몸으로 촉감을 느낄 때, 마음으로 현상을 지각할 때, 이 모든 감각현상에서 거죽으로 드러난 모습이나 특성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귀를, 코를, 혀를, 몸을, 마음을 다스리지 않으면, 탐욕과 불유쾌함의 바람직하지 않은 나쁜 것들이 마음속에 스며들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감각기관을 절제하는 수행에 전념하고 감각기관을 잘 지킵니다. 그런 결과 그는 감각기관의 절제를 얻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초기불교가 인간의 감각에 의한 지각작용을 무조건 반대하거나 부정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감각의 대상인 색[色: 형상으로 보이는 것] · 소리[聲] · 냄새[香] · 맛[味] · 촉감[觸] · 사물과 대상 경계 등으로서의 법[法] 등은 우리들이 세계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원천<데이비드 J. 칼루파하나; 나성옮김, 붓다는 무엇을 말했나, p.49. 2.인식론 참조.>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감각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 부처님은 감각의 지각 자체에 어떤 문제나 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데 있어서 해석하는 방법과 관련한 제약 때문이라고<데이비드 J. 칼루파하나; 나성옮김, 붓다는 무엇을 말했나, p.49에서 인용> 말씀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중부경전의 다음 내용은 감각 지각의 과정에 대해 묘사하고 있어서 소개한다. “오 친구여, 시각의식은 시각기관과 시각대상에 의존하여 일어난다. 이 세 가지가 함께 만나는 것이 접촉[觸]이다. 접촉 때문에 감각이 일어난다. 그가 느끼는 것을 그는 지각한다. 그가 지각하는 것을 그는 추론한다. 그가 추론하는 것에 그는 집착한다. 그가 집착하는 것, 그것 때문에 그러한 집착된 지각의 성격을 가진 개념이 과거 · 미래 · 현재에 속하는 시각 기관이 인식할 수 있는 시각 대상에 관하여 그를 공격한다.”<데이비드 J. 칼루파하나; 나성옮김, 붓다는 무엇을 말했나, p.50에서 재인용함> 이 경전을 해석해보면, 시각기관과 시각대상과의 관계에서 접촉에 의해 시각의식이 발생했고, 즉 眼觸因緣生受가 되었으며, 그럼으로써 지각이 발생하고[想], 이어서 이것을 추론도 하고[思], 이에 집착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다른 감각기관도 마찬가지이다. 즉 耳觸因緣生受 · 想 · 思, 鼻觸因緣生受 · 想 · 思, 舌觸因緣生受· 想 · 思, 身觸因緣生受 · 想 · 思, 意觸因緣生受 · 想 · 思 등의 똑같은 인식과정을 겪는다. 그런데 이러한 집착이 발생한 것은 탐욕과 자만심과 독단적 견해에서 기인하는데, 주관적으로 느끼는 좋고 나쁨[好惡]의 태도가 감각의 지각을 방해하고 종국에는 감각의 인상을 왜곡시킨다는 것이다.<데이비드 J. 칼루파하나; 나성옮김, 붓다는 무엇을 말했나, p.51> 과거 필자는 동국대 대학원 재학시절에 초기불교를 강의하시는 고익진 교수님으로부터 원시불교(현재는 초기불교라고 불리운다)를 배우는 행운을 누렸다. 수업시간에 고익진 교수님은 온(蘊) · 처(處) · 계(界)의 과정, 즉 오온을 비롯해 육육법에서 12처, 18계에 이르는 과정의 중요성을 수업시간에 강조하셨다. 필자도 오온을 비롯해 육육법에서 12처, 18계에 이르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 지면에서 다시 강조하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오온을 비롯해 육육법에서 12처, 18계에 이르는 과정은 불교교육의 현장에서 불교적 교사들뿐만 아니라 불자들이 다 같이 반드시 주목하고 알아야 할 ‘교육적 기초’가 되는 내용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이상에서 설한 오온을 비롯해 육육법과 12처, 그리고 18계 등에 대한 선이해(先理解)가 돼야 그 다음 가르침인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지 않을까 본다. [출처] 이송곤/불교교육의 기초와 차제적 교육방법|작성자 양벌리영어공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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