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박사 학위논문 極微 해석을 통해 본 世親 철학의 轉移
2017년 2월 서울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동양철학전공 이 규 완 極微 해석을 통해 본 世親 철학의 轉移 지도교수 안 성 두 이 논문을 철학박사 학위논문으로 제출함 2016년 10월 서울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동양철학 전공 이 규 완 이규완의 박사학위논문을 인준함 2017년 1월 위 원 장 (인) 부 위 원 장 (인) 위 원 (인) 위 원 (인) 위 원 (인) - i - 국문초록 이 논문은 세친의 극미 해석을 통하여 그의 철학적 전이과정을 추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를 위하여 논문에서는 세친이 『유식이십론』에서 제시한 몇 가지 명제들을 추적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세친은 『유식이십론』에서 ‘오직 표상일 뿐(vijñaptimātra)’임을 천명하고, 그에 대한 논증에서 심(心, citta), 의(意, manas), 식(識, vijñāna)과 표상(表象, vijñapti)이 동의어라고 설명한다. 두 번째 는 『구사론』에서 12처의 실유설을 지지하였던 세친이 『유식이십론』에서는 12처를 인무아를 확립하기 위한 숨은 의도를 가지로 설해진 가설적 존재라고 주장한다. 세 번째로 세친은 『구사론』에서 극미설을 인정하지만 『유식이십론』에서는 극미의 실재성 부정을 통하여 법무아의 확립을 논증한다. 세친의 철학에 나타나는 이같 은 일련의 해석적 변화와 철학적 전이의 경로를 극미설에 초점을 맞추어 탐색하 는 것이 이 논문이 의도하는 바이다. 논문은 극미설을 세친철학의 전이과정을 분석하는 구상적인 도구로 채택되었 으며, 이는 세친 자신이 『구사론』의 12부분에서 다양한 아비다르마 학파철학의 주제들을 논의하면서 사용하였던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극미 해석에 따른 철 학적 분석을 수행하기 위한 전제로 아비다르마 각 학파들의 극미 개념을 명확히 확정할 필요가 대두되었다. 기존의 연구에서 오해되었거나 남겨진 문제들을 점검 하고 철학적 함의를 검토한 후에야 그에 근거한 세친 철학의 분석이 정당성을 확 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문은 아비다르마철학 학파들의 극미개념을 명 확히 하는 것과 세친철학의 전이과정을 추적하는 두 부분으로 구성하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극미설은 바이셰시카학파의 실재론과 설일체유부의 존재론에서 등 장하는 극미 개념의 연관성을 중심으로 연구되었다. 이 논문에서는 기존의 연구 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다음의 세 가지 관점에 주목하였다. 첫째는 니야야학파의 극미설과 불교철학의 관련성 문제이다. 이 논문에서는 『니야야수트라바시암』의 극미설 논쟁에서 니야야-바이셰시카의 결합개념인 결합(saṃyoga)에 대응하는 대 론자의 두 가지 결합방식인 saṃcita와 samudita를 확인하고, 그것이 내용적으로 『순정리론』에서 상좌 슈리라타와 중현 사이에 논란이 되었던 화합(和合)과 화집 (和集)에 상응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또한 『구사론』 I. 44ab와 대응하는 『순 정리론』의 본문분석을 통해서 『구사론』에서 ‘적집(積集)’으로 번역되었던 saṃcita 가 『순정리론』의 ‘화합(和合)’에 해당한다는 점을 밝혔다. 이를 통해 미확정 상태 - ii - 로 남아있던 화합과 화집의 산스크리트 원어를 확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극미의 결합에 관한 논란이 『니야야수트라』의 주석자 바챠야나(Vātsyāyana) 시기에 이 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였음을 확인하였다. 두 번째로 이 논문에서는 불교철학 내적으로 온(蘊), 처(處), 계(界)의 3과(科) 체계와 5위 75법과 같은 다르마의 체계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극미개념이 어떻게 해석되었는지를 추적하였다. 설일체유부의 5위 75법은 물질적 존재, 심리적 존재, 관념적 존재의 실유성을 포괄하는 다르마체계였다. 그러나 비유자-경량부는 관념 적 존재의 실재성을 부정하였고, 유식계통에서는 물질적 존재를 부정하는 등 서 로 견해를 달리하였다. 극미는 물질적 존재의 가장 미세한 구성요소를 해명하는 개념이다. 전통적으로 4대종이 함께 모여서 물질을 구성한다는 설명방식은 『비바 사론』에서 4대종과 4대소조가 함께 하여 물질을 구성한다는 팔사구생의 방식으로 재해석된다. 이런 변화는 실재성의 층위를 감각지각을 초월한 극미 자체에 한정 할 것인가 아니면 감각기관에 지각되는 극미들의 집적에까지 확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이것은 세계를 감각지각의 영역으로 해명하는 12처의 가실 (假實)문제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지면서, 경험세계에서 인식대상의 실재성에 대한 철학적 논변으로 발전하였다. 세 번째로 불교철학에서 극미부정의 논리를 『대지도론』으로 확장하여, 극미부 정이 대승철학의 양대 학파인 중관계의 공성(空性)과 유식계의 유식성의 해명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논증하였다. ‘관념에 의해 무한히 분할하였을 때 도 달하게 되는 가장 미세한 기본단위’라고 정의되는 설일체유부의 극미는 결국 공 (空, śūnya)로 해소될 것이며, 그것은 크기를 가지지 않는 심리적 존재 혹은 단 지 관념적으로 가설된 존재(prajñaptisat)일 뿐이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이런 관 점은 『유가사지론』에서도 수용되며, 『유식이십론』에서 세친이 채택한 논리이기도 하다. 이같은 극미개념의 분석을 바탕으로 대상과 인식에 대한 학파철학의 특성, 그 리고 세친의 대상과 인식대상에 대한 해석의 변화과정을 추적하였다. 세친은 『구 사론』의 12부분에서 다양한 설일체유부의 철학적 주제들을 극미개념을 끌어들여 분석하였다. 특히 세친의 철학적 전이과정과 관련해서는 지각되는 물질에 해당하 는 표색(表色, vijñaptirūpa)과 인식대상(ālambana)이 실재하는 대상(viṣaya)로 부터 분리되어가는 과정에 주목하였다. 설일체유부의 정설에서는 표색과 인식대상 이 실재성에 있어 대상과 연속성을 지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상좌 슈리라타 - iii - 는 지각경험에 의해 구성되는 세계의 물질현상과 인식대상은 실재의 차원과 구분 되는 것이며, 지각에 의해 인식된 현상세계는 실재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보았다. 구사론주 세친은 대상과 인식대상의 실재성을 모두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설일체 유부의 관점에 있지만, 양자의 질적 차이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상좌 슈리라타의 견해를 수용하였다. 중현(衆賢)은 상좌 슈리라타의 주장이 괴법론(壞法論)이며 도 무론종(都無論宗)에서 한 치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고 경고하였다.바로 그 한 걸 음을 내딛는 세친의 철학적 전이가 『유식이십론』에서 완성된다. 세친은 『유식이십론』을 통해, 삼계(三界)가 오직 표상(表象, vijñapti)일 뿐이라 는 명제에 도달한다. 아비다르마철학에서 인식과 대상으로 구분되었던 두 영역은 ‘오직 표상일 뿐’의 논증을 통해 하나의 가설적 존재로 통합된다. 상좌 슈리라타 에게 실재의 영역으로 남아있던 극미의 차원은 부정되고, 따라서 실재차원에서 다르마의 존재를 부정하는 법무아(法無我)가 확립된다. 다르마의 실재성이 부정되 고 난 후 12처에서 감각기관과 지각대상의 관계는 종자(bīja)와 현현(pratibhāṣa) 으로 대치된다. 게송 11-15의 주석에서 이루어지는 논증은 극미의 비실재를 전제 하였을 때 인식주체에게 경험되는 인식대상에 대한 해명을 목적으로 한다. 설일 체유부의 극미개념은 부정되었지만, 감각지각에 경험되는 인식대상은 극미의 화합 에 의한 형상(ākāra)과 같은 것으로 설명된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구사론주 세친은 자신의 철학적 논증과 논리적 분석을 위 해 극미개념을 적절한 사용하였으며, 때문에 그를 통해 세친의 철학적 전이과정 을 추적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구사론주 세친은 아비다르마철학에 대한 상세 한 이해를 바탕으로 경량부 상좌의 혁신적인 개념들을 수용하여 자신의 철학으로 통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중현이 염려한 바와 같이 세친은 결국 상좌 슈라라타 의 심신(心身) 이원적 인식존재론에서 극미의 실재성을 포기하고 법무아를 수용함 으로써 유식으로 전향하게 된다. 그러나 세친은 극미의 화합(和合, saṃcita)으로 설명되는 현상세계와 그것에 대한 인식의 문제에서는 상좌 슈리라타의 설명체계 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이를 통해 세친은 설일체유부와 비유자-경량부, 유심사상 의 중간 지점을 관통하는 유식(唯識, vijñaptimātra)철학을 확립하였으며, 이후 중국의 법상철학과 인도-티베트의 인식논리학이 분기하는 철학적 단초를 제공하 였다. 주요어: 세친, 극미, 화합, 화집, 유식, 인식대상, 12처
1장. 서론 1절. 문제제기와 연구목적 ‘대상(artha)을 있는 그대로(yathābhūtam) 아는 것’은 불교철학의 제1명제라 고 할 수 있다.1) 그러나 학파철학의 발전에 따라 대상은 외부에 실재하는 대상 (viṣaya)과 인식대상(ālambana)의 동일성 문제로 분화하고, ‘있는 그대로’는 대상 자체와 감각지각의 무분별성의 문제로, 그리고 인식은 대상에 대한 감각지각, 인 식적 측면에서의 지각, 그리고 의식에 관련된 문제 등으로 정교하게 발전하였다. 이러한 철학적 논변의 전개과정에 구상적인 분석도구로 발전한 개념이 극미(極微, paramāṇu)2)이다. 다양한 극미설의 공통적 기반은 극미가 대상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구성요소이지만, 감각지각을 초월해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전제로 부터 ‘다수의 극미로 만들어진 경험세계는 실재하는가?’ 혹은 ‘인식되는 세계는 ‘있는 그대로’인가 아니면 허구적 구성물인가?‘ 라는 등의 질문이 이어진다. 질문 에 대한 대답은 크게 외부대상의 실재성을 옹호하였던 설일체유부, 경험세계와 외부실재의 불연속성을 주장하였던 상좌 슈리라타(Śrīlāta), 그리고 외부에 실재하 는 존재를 부정하였던 유식가들의 입장으로 대별될 수 있다. 세친(Vasubandhu, ca. 400 - 480)은 『구사론』에서 설일체유부와 상좌 슈리라타의 해석에 대한 통 합적이고 발전적인 모델을 탐색하고 있으며, 『유식이십론』에서는 유식무경(唯識無 境)으로 도약한다. 이 논문은 극미설을 통하여 세친철학의 전이과정을 탐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세친은 설일체유부로 출가하여 선대 궤범사의 지도를 받았으며 상좌 슈리 1) 따라서 계경 중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지 않은 것을 보았다고 하거나 본 것을 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성인의 말이 아니다. 그리고 본 것을 보았다고 하고 보지 않은 것은 보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성인의 말이다.” 『阿毘達磨順正理論』: 故契經言。於不見言見。於見言不見。此非聖語。於見言 見。於不見言不見。此是聖語。(T29.351c12 - 14). 중현의 이 인용문은 『中阿含經』 「業相應品 2」 (T01.437c9 - 22) 등에서 처럼 『아함경』 계통에서는 구업(口業)의 해명과 관련되어 등장하며, 마하승 지율에서는 성자의 말에 대한 판단의 근거로 제시된다. 『摩訶僧祇律』: 八事非賢聖語者,見言不見、 聞言不聞、妄言不妄、識言不識、不見言見、不聞言聞、不妄言妄、不識言識,是名八事非賢聖語. (T22, 325a7 - 10). 그러나 『순정리론』에서 중현은 이 말은 “인식은 반드시 대상을 가진다(識必有境)”는 설 일체유부 인식론의 경증으로 해석하였다. 2) 이 논문에서는 극미론 혹은 극미설은 불교원자론에 한정된 기술적용어로 사용하며, 일반적인 철학적 논변의 맥락에서는 원자 혹은 원자설 등으로 지칭한다. 그리고 번역 용어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paramāṇu는 ‘극미’로, aṇu는 ‘원자’로 통일하여 번역, 사용한다. - 2 - 라타의 사상에 강하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3) 이러한 사상적 편력을 통해 세친은 설일체유부의 핵심적 주제, 즉 일체존재의 실재성 문제에 깊은 관심 을 기울였다. 설일체유부에서 일체의 존재는 물질적 존재, 심리적 존재, 관념적 존재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여기에서 물질적 존재(색법)는 외부에 존재하는 물질 적 대상을 의미하며, 이 물질적 존재의 규명은 대상과 인식의 문제에 대한 철학 적 해명과 직결된다. 극미는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미세한 기본단위로서 개별적 인 극미의 실재성은 물질세계의 실재성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 되며, 개별극미와 극미의 집적물 사이의 관계는 조성된 현상세계의 성질을 이해하는데 필수요소이 다. 불교를 포함한 인도철학의 제학파들은 각기 특수한 극미해석을 통해 자신들 의 존재론적 기반을 확보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극미설은 통합적 철학체계에서 주춧돌과 같은 기능을 하였다. 자기 완결성을 지닌 학파철학의 체계에서 극미해 석은 철학적 정합성을 지닌 극미설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학파들의 극미개념에 대한 분석은 각 학파의 철학적 관점과 해석의 특징을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도움 을 준다. 세친은 단일한 학파 귀속성을 가지지 않고, 설일체유부에서 비유자-경량 부 계열, 상좌 슈리라타의 사상적 단계를 거쳐 유식가로 변모하였기 때문에 극미 해석에 있어서도 다양한 면모를 드러낸다. 따라서 세친의 극미해석에 대한 정확 한 파악은 세친의 철학적 전이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분석적 틀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세친에 귀속되는 문헌에 나타나는 상이한 철학적 성격과 각종 전기에 기록된 세친연도의 불일치로 인해 세친의 정체성과 학파적 성격에 대한 논란이 이어져왔 다. 프라우발너(Frauwallner, 1951)는 세친의 연대에 대한 상이한 전승과 서로 다른 철학적 개념의 사용을 근거로 유식가 아상가(Asaṅga)의 동생 세친과 『구사 론』의 저자 세친을 구분하는 세친 2인설을 주장하였다.4) 그러나 자이니(Jaini, 1958)는 디팡까라(Dīpaṅkāra)의 언급을 통해 구사론주 세친의 경량부적 사유가 자주 대승에 경도된 사상으로 비판받았다는 사실 등에 주목하였다.5) 『아비다르마 3) 권오민 (2008) 「Pūrvācārya(先代 軌範師) 再考」. 『불교학연구』 No.20. 243 - 288.; (2012) 『上座 슈 리라타와 經量部』. 서울: 씨·아이·알, 890 - 959. 4) Frauwallner, Erich (1951) on the Date of the Buddhist Master of the Law Vasubandhu, Rome: Istituto Italiano per il Medio ed Estremo Oriente.;프라우발너의 주장 가운데 ‘아상가의 동생인 세친’이 구사론주 세친보다 한 세기 앞서는 연장자 세친(elder Vasubandhu)라는 주장에 대 한 직접적인 비판은 다음을 참조 바란다. Marek Mejor (1989) "The Problem of Two Vasubandhus Reconsidered." Indologica Taurinesia. Vol. 15 - 16. (1989 - 1990), 275 - 283. 5) Jaini, Padmanabh S. (1958) “On the Theory of Two Vasubandhus”. Bulletin of the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University of London. Vol. 21, No. 1/3, 48 - 53. - 3 - 디파』 (Abhidharmadīpa)에서 디팡까라는 구사론주가 극미설, 심불상응행, 중동 분(sabhāgatā), 수명(āyuḥ) 등의 해석에서 경량부를 추종한다고 비판하고, 이와 관련하여 구사론주의 사상이 대승경전(vaitulika-śāstra)에 경도된 것이라 경고하 였다.6) 따라서 자이니는 진제의 『바수반두법사전』에 전하는 세친의 사상적 전향 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할 수 있으며, 유식가 세친과 구사론주 세친은 동일 인물 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슈미트하우젠(Schmithausen)은 불확실한 연대기나 논사의 비판이 아니라 『구사론』이나 『유식이십론』 등의 논서 상에 나타 나는 사상을 직접 검토함으로써, 양자의 사상적 연관관계를 탐색할 필요성을 제 기하고, 『유식이십론』과 『유식삼십송』에 나타난 경량부 철학을 고찰하였다.7) 슈 미트하우젠이 제시하는 “경량부적 전제”들은 다음과 같다. 먼저 라모트(Lamotte) 의 『성업론』연구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성업론』은 불교전승에서는 유식학파 소 속으로 알려져 왔지만 경량부 텍스트임이 분명하고 『구사론』과 동일한 저자에 의 해 저술된 것이 확실하다. 이것은 구사론의 저자 세친이 후에 유식가로 전향한 간접적인 증거가 될 수 있다.8) 구체적으로 『유식이십론』에 대해서는 경량부 고유 의 (a) 상속전변차별(saṃtāna-pariṇāma-viśeṣa) 용어의 사용, (b) 『유식이십론』 에서 단층(單層)의 식의 흐름은 유가행파의 식의 흐름의 복합체가 아니라 경량부 의 6내처(內處), 즉 감각기관의 표상능력을 계승한다는 사실, (c) 심의식 가운데 식(vijñāna)은 자주 “대상에 대한 식(識)”9)으로 심(心) 또는 의(意)와 대립하며, 이 때 식(識)과 표상(表象, vijñapti)은 동의어라는 점, (d) 직접지각과 표상의 문 제, (e) 유식성(vijñaptimātrata)의 논거로 실재하는 대상으로서 극미의 부정을 제 시하는 점 등을 들고 있다. 이 논문은 자이니와 슈미트하우젠의 고찰을 토대로 구사론주 세친이 설일체유 부의 일파에서 어떤 경로를 거쳐 경량부 상좌 슈리라타의 사상을 수용하고 유가 행파로 전향하였는지를 극미론을 중심으로 탐구보고자 한다. 세친은 불교철학의 논의에서 극미개념을 가장 적절히 사용한 논사로 평가할 수 있다. 그는 『구사론』, 『성업론』, 『유식이십론』 등에서 다양한 철학적 주제를 논하면서 극미개념을 끌어 6) Jaini (1958), 50 - 51. 7) Schmithausen (1967) "Sautrāntika-Voraussetzungen in Viṁśatikā und Triṁśikā". In: Wiener Zeitschrift für die Kunde Süd- und Ostasiens, 11, 109 - 136. ("「二十論」と「三十論」にみられる 經量部的 前提," (加治洋一 譯), 『佛敎學セミナ―』 37號 (1983), 96 - 73.) 8) Schmithausen (1967), 112. 9) 슈미트하우젠은 여기서 “대상인식”(Objekterkenntnis)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이것은 "viṣaya- 또는 ālambana-vijñaptiḥ" 다시 말해 ‘외부대상 혹은 인식대상에 대한 표상’으로 보충 설명하였다. - 4 - 들여 보다 구상적이고 분석적이며 논리적으로 설득력있는 논변을 제시하였다. 특 히 『구사론』에서는 12가지 영역에서 극미개념을 가지고 아비다르마철학의 다양한 주제들을 설명하고 있으며, 자주 설일체유부의 정통설과 비유자-경량부의 입장, 상좌 슈리라타의 해석을 채택하여 논증을 전개하였다. 『유식이십론』은 이처럼 다 각도에 걸친 철학적 분석의 결론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곳에서 세친은 “삼계에 속하는 것은 오직 표상일 뿐(vijñaptimātra)"이라는 대명제에 도달한다. 이 명제 는 세 가지 측면에서 보강된다. 첫째는 심의식(心意識)이라는 심적영역과 기존에 대상의 영역에서 논의되었던 표상(表象, vijñapti)이 동일한 영역에 속한다는 것이 다. 둘째는 『구사론』에서 실유하는 것으로 인정되었던 12처(處)가 『유식이십론』에 서는 인무아(人無我)를 설하기 위한 가설적인 존재로 해석된다. 또한 감각기관을 포함하는 내처(內處)는 종자로, 인식대상에 해당하는 외처(外處)는 현현 (pratibhāsā)으로 설명되었다. 이는 6식설의 체계에서 종자의 상속전변차별과 알 라야식을 결합시키는 독특한 과도기적 형태로 보인다. 세 번째는 법무아의 확립 을 위해 극미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설일체유부의 극미개념에 따르는 한, 극미는 공(空, śūnya)으로 해소될 수밖에 없으며 극미개념에 기반한 물질세계의 구성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된다. 『유식이십론』에서 “오직 표상일 뿐”이라는 명제에 도달하게 되는 세 가지 경 로를 탐색하기 위하여, 논문에서는 먼저 불교극미설의 기본 개념들을 재확인하고 학파적 해석이 상이점들을 명확히 할 것이다. 전통적으로 극미설이 바이셰시카와 의 연관성에 주목하여 논의되었던 것에 반하여, 상좌 슈리라타와 세친의 극미분 석을 『니야야수트라』의 논리적 분석의 맥락에서 고찰할 것이다. 이렇게 개별극미, 극미의 접촉, 극미의 결합, 대상과 인식 등에 대한 개념을 확립하고, 그를 바탕으 로 『구사론』에서 세친이 12영역에서의 철학적 주제에 대한 논증을 위해 어떻게 극미설을 채택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모든 논의는 상좌 슈리라타의 주장 이 '공화론자(空花論者)'라거나 ‘도무론종(都無論宗)에서 단지 한 찰나만 떨어져 있을 뿐’이라는 중현(衆賢)의 비판10)이 세친의 『구사론』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 으며, 『유식이십론』에서 실제로 현실화하는지에 초점이 모아질 것이다. 마지막으 로 타학설의 논파를 목적으로 하는 『유식이십론』에서 세친이 지금까지 자신의 주 장이기도 했던 학설들을 논파하면서 “삼계에 속하는” 이 현상세계가 “오직 표상 일 뿐”이라는 명제를 어떻게 논증해 가는지 추적해 볼 것이다. 여기서 세친이 논 10) 『阿毘達磨順正理論』: 以此與彼都無論宗。唯隔一剎那見未全同故。(T29.631a2 - 3) - 5 - 파의 대상으로 삼는 학파와 개념들에 주목함으로써 대상과 인식에 대한 세친의 관점을 탐색하고, 세친 이후 인식논리학과 유식철학에서 해석적 분기점을 검토해 볼 것이다. 2절. 극미(極微)론 연구현황 세친철학의 전이과정을 극미개념을 통해 고찰하고자 하는 논문의 목적을 위해 서는 불교철학의 극미설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개념규정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 다. 분석의 도구로 사용되는 불교철학의 극미개념이 정확히 명시되어야 그에 기 초한 분석의 타당성이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본론에 들어가지 전에 먼저 기존의 불교 극미설에 대한 선행연구를 검토하고, 문제점과 남겨진 과제들 을 점검하도록 하겠다. 불교에서의 극미설에 대한 연구는 3세대로 구분해 볼 수 있다.11) 1세대는 불교학에서 극미설의 존재를 확인하고, 소개하는 단계를 말한다. 불교학에서 극미연구를 촉발하게 된 계기로 우메샤 미슈라(Umesah Mishra)의 바이셰시카의 극미설에 대한 연구, Conception of Matter According to Nyāyavaiśeṣika를 언급해야 할 것이다.12) 그는 여기서 인식주체와 대상, 그리고 인식자체의 관계에 대한 입장의 차이에 따라 인도철학파 전반의 계통을 분류하 고, 인도철학사상을 유물론, 실재론, 관념론이라는 철학적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이 글은 인도철학에서 극미론을 철학적 관점에서 세밀하게 분석한 가장 초기의 대표적인 저술이며, 이후 연구에서 일종의 전형을 제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 에서 미슈라는 논의 주제와 관련해서 불교의 설일체유부, 경량부, 유식사상 등의 개념을 간간히 제시하면서 그 특징을 비교하고 있다. 바로 뒤를 이어 1940년 야마구치 스스무(山口益)의 「유식이 파척한 극미설에 대하여」 (1940)13)라는 짧은 논문이 발표되었다. 그는 여기서 청변(淸辯, Bhāviveka)의 『중관심론』 제5장 「입유가행진실결택」장(章)의 극미설 비판을 『유 식이십론』의 극미비판과 디그나가(Dignāga)의 『관소연론』의 배경에서 조망하였 다. 야마구치는 청변이 세속으로서의 극미의 실재성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승론 11) 여기서 극미연구의 세대 구분은 필자 자신이 시대와 연구의 특징을 감안하여 임의로 설정한 것임을 밝혀둔다. 12) Umesha Mishra (1936) Conception of Matter: According to Nyāya-Vaiśeṣika. Delhhi: Gian Publishing House. (c.1987). 13) 山口益 (1940) 「唯識の破析する極微說について」. 『宗敎硏究』. 季刊2年 4輯 (106號), 395 - 400. - 6 - (勝論, Vaiśeṣika)의 단일한 전체상의 실재성에 대한 논란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개별극미는 지각되지 않기 때문에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극미의 화합은 실재성이 없기 때문에 인식발생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관소연론』의 관 점을 수용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야마구치의 연구는 『유식이십론』과 『관소연 론』의 극미해석의 관점을 들어서 유식과 중관계 논서의 상관성에 주목하여, 극미 설 연구에서 학파적 관점에 주목하였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14) 『중관심론』을 텍스트로 한 이 논문의 후속 연구는 반 세기 이상을 지나 2008년 데이비드 에켈 (David Eckel)의 『바비베카와 그의 불교도 반론자들 (BHĀVIVEKA and His Buddhist Opponents)』15)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에켈은 이 방대한 저술에서 『중관심론』과 주석 『염사택』을 포함한 포괄적인 연구결과를 제시하였지만, 극미 설의 연구에는 해당 본문의 해석을 넘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어서 한 동안은 텍스트 비평적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구사론』, 『유 식이십론』, 『관소연론』 등의 문헌에 대한 주석적 연구 가운데 극미 관련 텍스트 들에 대한 간략한 해설 등이 추가되는 정도의 연구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 기 간의 연구에서는 극미의 개념, 기원, 극미설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였던 설일체유 부의 극미설 체계, 학파들의 극미해석의 특성, 극미설과 관련된 철학적 주제들, 극미설과 다른 철학체계와의 상관성 등에 관한 상세한 논의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다. 미즈노 고겐(水野弘元)은 불교의 물질개념에 대한 연구(1951)16)에서 속성화한 4대종에 근거한 불교고유의 색취(色聚)개념은 양적분석에 기초한 외래적인 극미의 적취(微聚)개념과는 다른 것인데, 이를 무리하게 결합하려는 설일체유부의 시도가 혼란을 야기하였다는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였다. 이런 미즈노 고겐의 분석은 향후 극미론을 대하는 일종의 고정관념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후나 14) 『관소연론』 (Ālambanaparikṣa)에 대한 주목할 만한 공동연구 성과가 최근에 발표되었 다.Duckworth, et al. (2016) Dignāga's Investigation of the Percept: A Philosophical Legacy in India and Tibet. NY: Oxford University Press. 이 저술은 Ālambanaparikṣa의 모든 알려진 티베트 주석서를 포괄하는 분석을 통해 대상의 지각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 사상사적 맥락에서 어떻게 고찰되어 왔는지를 검토하였다. 관련하여 『관소연론』의 한역 주석서들에 대한 연구결과도 곧 발표될 예정이다. 15) Eckel, Malcolm David (2008) Bhāviveka and His Buddhist Opponents: Chapters 4 and 5 of Bhāviveka’s Madhyamakahṛdayakārikaḥ with Tarkajvāla Commentary/ Translated and Edited with Introductioin and Notes by Malcolm David Eckel.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6) 水野弘元 (1951) 「佛敎における色(物質)の槪念について」. 『印度哲學と佛敎の諸問題』. 宮本正尊 等編. 宇井伯壽博士還曆記念論文集. 東京: 岩波書店. - 7 - 하시 이츠사이(舟橋一哉)의 연구(1952)는 주석적 연구에서 4대종과 극미개념의 결 합이 유부철학을 더욱 혼란스럽게 하였다는 일반적인 주장에 대해 반론을 제시하 였으며,17) 이에 대해 사쿠라베 하지메(櫻部建)가 곧바로 재반박함으로써18) 잠시 논쟁적 성격을 띠기도 하였다. 1970년대 들어 좀 더 진전된 형태의 연구결과들이 발표되면서, 비로소 불교의 극미론에 대한 윤곽이 밝혀지게 된다. 요시모토 신교(吉元 信行, 1971)19)는 『구 사론』과 『아비다르마디파Abhidharmadīpa』의 본문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설일 체유부의 팔사구생(八事俱生)설의 특징은 상호 모순적인 기원을 가지는 색취설과 극미설의 융합에 있다고 결론짓는다. 같은 해 카지야마 유이치(梶山 雄一)는 『구 사론』에서 극미의 정의와 관련된 본문 AKBh 20ab와 세친 자신의 주석에 관한 연구(1971)20)에서 개별극미와 극미의 집적의 실재성에 관한 문제를 12처 해석의 맥락에서 검토하고, 세친에게는 개별극미와 복합극미가 모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한 실재성을 지닌다는 결론을 제시하였다.21) 경량부 연 구 분야에서 불후의 업적을 남기고 있는 가토 준쇼(加藤純章, 1973)22)는 경량부 와 유부를 비교하면서 극미의 결합에 있어서 두 가지 방식, 즉 화합과 화집에 대 한 본격적인 개념정립과 용어의 확정을 시도하였다. 핫토리 마사아키(服部正明, 1975)23)는 『인식과 초월』에서 유식학 성립의 배경으로, 유부, 경량부, 세친, 진 나, 등의 인식대상의 개념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바시셰시카, 설일체유부, 경량부, 세친의 극미설을 인식대상의 관점에서 고찰하였다. 우에스기 노부아키(上杉宣明, 17) 舟橋一哉 (1952) 「俱舍論の敎義に関する二三の疑問」 『大谷学報』 通号 112, 32 - 44. 후나하시 이츠 사이(舟橋一哉)는 설일체유부의 색취설(色聚說)과 극미설이 내적 일관성을 지니는 통합적 체계를 확립 하는데 성공하였다고 주장하였으며, 이런 입장은 이후 사사키 시즈카에 의해 계승된다. 佐佐木閑 (SASAKI Shizuka) (2009) 「有部の極微説」. 『印度学仏教学研究』. 巻57, 932 - 926. 18) 桜部建 (1953) 「俱舍論の論書としての性格の一面」, 『大谷学報』 通号 117, 41 - 52. 19) 吉元信行 (1971) 「有部の八事俱生說」. 『印度學佛敎學硏究』. 20卷 1號 (通卷39), 331 - 336. 20) Kajiyama Yuichi (梶山 雄一) (1971) "The Atomic Theory of Vasubandhu, the Author of the Abhidharmakośa." 『印度学仏教学研究』. Vol. 19, No.2 (1971), 1006 - 1001. 21) 카지야마의 이런 결론은 세친의 극미설을 중현의 것과 동일시하는 견해로, 세친극미설의 한 측면만 을 설명하는 한계가 있다. 이하 세친의 극미설을 검토하는 부분에서 동일한 본문과 『순정리론』에서 중현의 비판을 통해 세친의 극미설이 중현과 상좌 슈리라타를 개념적으로 통합 내지 극복하려는 경향 을 보이며, 그것이 12처설의 해석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밝히도록 하겠다. 22) 加藤純章 (1973) 「極微の和合と和集 -有部と経部の物質の捉え方」. 『豊山教学大会紀要』. 東京: 豊山 教学振興会, 129 - 137. 23) 하토리 마사아키 (1991) 「유가행파의 철학」. 이만 역. 『인식과 초월』. 서울: 민족사. (服部正明 (1975) 『佛敎の思想 4: 認識と超越』. 服部正明, 上山春平 『共著』. 東京: 角川書店, (1975)), esp. 2장: ‘실재론과 유식사상’, 59 - 99. - 8 - 1976)24)는 『순정리론』에 나타난 중현의 극미설을 중심으로 질적 차원의 8사구생 과 양적차원의 극미소조의 결합에 의한 설일체유부의 물질개념을 분석하였다. 그 는 설일체유부의 설명체계가 무방분의 극미개념을 고수하면서, 양과 질의 통합, 가극미와 실극미의 층위를 통해 결합관계 등을 고찰하는 반면, 극미의 크기를 상 정하는 경량부의 관점은 소박한 분석에 그치고 있다는 입장을 피력하였다. 앞서의 연구를 바탕으로 1980년대 들어서 극미연구는 경량부, 유식학파 등의 학파적 논서에 나타난 해석과 철학적 관점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미코 가미 에쇼(神子上惠生, 1983)25)의 연구는 세친 이후의 설일체유부의 입장을 대면 하는 슈바굽타(Śubhagupta, ca. 650 - 750 CE)의 『외계대상의 논증』 (Bahyārthasiddhikārika)에 나타난 극미개념을 통해, 유식론사들의 극미 비판에 대한 설일체유부의 재반박을 소개하였다. 카토 토시오(加藤利生)26)는 『유가사지 론』에 나타난 극미비판에 대한 소개(1987)와 유식학파가 극미개념을 사용하는 의 도에 대한 논문(1989, 1990), 초기유식학파의 극미개념에 대한 논문(1998) 등을 제출하였다. 카토 준쇼는 자신의 저술 『경량부의 연구』(1989)에서 다시 경량부설 을 중심으로 극미의 개념과 결합관계 등에 대해 상세히 논술하였다.27) 하야시마 오사무 (早島理, 1988, 1989)도 유식논서들에서 극미비판의 관점에 대해 고찰하 였다. 그는 무착이 편집한 『유가사지론』, 『현양론』과 『아비다르마집론』, 이에 대 한 안혜의 주석인 『잡집론』, 세친의 『유식이십론』에 나타난 극미비판의 관점을 집적한 극미들의 대상성과 극미 상주(常住)의 문제를 중심으로 요약하였다.28) 1997년 나수 엔쇼(那須 円照)는 기간의 아비다르마 극미론을 총정리하는 두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설일체유부 논사들 내부에서 상이한 극미해석 들이 존재함을 보였으며, 『순정리론』에 나타난 논란을 중심으로 중현과 상좌 슈 리라타, 그리고 세친의 극미론의 상이점을 검토하였다.29) 24) 上杉宣明 (1976) 「說一切有部の極微論硏究」. 『佛敎學セミナ-』. 24號, 37 - 52 25) 神子上惠生 (1983) 「シュバグプタの極微說の擁護: 知識の認識對象の問題をめぐって」. 佛敎文化硏究 所紀要. 22輯, 1 - 17. 26) 加藤利生 (1987) 「『瑜伽師地論』に見られる瑜伽行派の極微論の特色」. 『印度學佛敎學硏究』. 35卷 2 號 (通卷70), 80 - 82.; 「唯識学派の極微論をめぐる問題 -極微論受容の意図について-」. 『印度学仏教 学研究』. Vol. 38 No. 1. (1989).; 「唯識学派の極微論の起源とその意図」. 『龍谷大学大学院研究紀要』. 人文科学 11, (1990), 66 - 80.; 「極逈色の極微について」. 『仏教学研究』 通号 54. (1998), 39 - 60. 27) 加藤純章 (1989) 『經量部の硏究』. 東京: 春秋社, 平成元, 148 - 177. 28) 早島理 (1988) 「『顯揚聖敎論』に見られる極微說』. 『印度學佛敎學硏究』. 37卷 1號 (通卷73), 85 - 92.; 「極微説管見 ―瑜伽行唯識学派を中心に―」. 『長崎大學敎育學部人文科學硏究報告』 vol. 38. (1989), 19 - 36. 29) 那須 円照. (1997) 「アビダルマの極微論(1): 極微が触れるか触れないかという問題を中心として」. 『佛 - 9 - 이와 같은 선행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효도 가즈오는 초기유가행파의 논서들, 세친의 『유식이십론』, 진나의 『관소연론』, 『장중론』, 안혜의 『중변분별론안혜석』, 『유식삼십송안혜석』 등의 검토를 통해 초기유가행파의 극미설 비판의 전개와 변 화를 추적하였다.30) 효도 가즈오(2006)는 여기서 『순정리론』에 나타난 저자 중현 (衆賢, Sanghabhadra)과 상좌 슈리라타(Śrīlāta)간의 논쟁을 바탕으로 극미의 결 합에서 있어서 ‘화집(和集)’과 ‘화합(和合)’의 개념을 비교 정리하였다. 아베신야 (阿部真也, 2004)는 설일체유부의 극미설과 고대 그리스철학의 원자론을 비교철 학적 관점에서 분석하였고,31) 사사키 시즈카(佐佐木閑, 2009)는 팔사구생(八事俱 生)설에 나타난 유부 극미설을 정합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하였 다.32)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의 극미연구도 아비다르마철학과 경량부 연구에서 촉발되었는데, 권오민의 『有部 阿毗達磨와 經量部 哲學의 硏究』(1994)에서 극미 에 대한 부분적 고찰이 초기 연구에 속한다.33) 이후 남수영(1998)은 극미설을 유 식무경설과 대립적 관점에서 고찰하면서, 『유식이십론』을 비롯한 유식학파의 극 미비판은 유형상지식론과 무형상지속론간의 인식론적 대립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분석하였다.34) 또한 김치온(1998)은 『관소연연론』을 중심으로 외계대상의 부정에 관해 고찰하였다.35) 같은 해 방인(1998)은 설일체유부와 경량부의 극미론을 적극 적 극미론으로 유식의 극미론을 비판적 극미론으로 정의하고, 구유부(고살바다), 경량부, 신유부(신살바다), 유식의 극미론에 대하여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 시기의 연구들에 이르러 불교 극미론의 대강이 정리되고, 중요한 教學研究』 Vol.53, 1 - 27.; 「アビダルマの極微論(2): 極微が触れるか触れないかという問題を中心と して」. 『インド学チベット学研究』 (2), 60 - 86. 30) 兵藤一夫 (2005) 「初期瑜伽行派の極微說批判 (一)」. 『佛敎とジャイナ敎: 長崎法潤博士古稀記念論 集.』. 長崎法潤博士古稀記念論集刊行會 編. 東京: 平樂寺書店, 289 - 313.; 「初期瑜伽行派の極微說 批判 (二)」. 『佛敎學セミナ―』 Vol. 84. (2006), 25 - 54. 효도 가즈오는 같은 시기 비니타 데바 (Vinitadeva)의 주석, 『유식이십론석』 (rab tu byed pa nyi shu pa'i 'grel bshad)와 규기(窺基)의 주석, 『유식이십론석』을 참고하여 『유식이십론』 (Viṁśatikākārikā)텍스트 전부를 번역하고 상세한 주 해를 덧붙인 『唯識ということ: 『唯識二十論』を讀む』. 東京: 春秋社, (2006)를 출간하였다. 31) 阿部真也 (2004) 「有部の極微説をめぐって 古代ギリシアとの比較」. 『仏教文化学会紀要』 Vol. 13, 86 - 105. 32) 佐佐木閑 (2009) 「有部の極微説」. 『印度学仏教学研究』. 巻57, 932 - 926. 33) 권오민 (1994) 『有部 阿毗達磨와 經量部 哲學의 硏究』. 서울: 경서원. 34) 남수영. (1998) 『유식이십론』의 극미설 비판. 『印度哲學』. Vol.7, 197 - 218. 35) 金致溫 (1998) 「外界 對象의 否定에 관한 一考察 : 陳那의 『觀所緣緣論』을 중심으로」. 『白蓮佛敎論 集』 Vol.8, 321 - 347 - 10 - 철학적 논점들이 대부분 도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기간의 연구를 바탕으로 윤영 호(尹煐鎬. 2008)는 기존의 설일체유부 극미론을 정리하고, 그것을 현대 물리학의 원자 혹은 소립자 개념과 비교하는 연구를 발표하였으며,36) 박인성(朴仁成, 2008) 은 『유식이십론』 게송 10에 나타난 극미와 결합의 개념을 규기의 주석을 통해 재 조명하였다.37) 뒤이어 발표된 박창환과 권오민의 장문의 논문들은 극미론 연구의 지평을 확대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박창환(2009)은 상좌 슈리라타의 주장을 “감각지각 불신론”으로 규정하고, 세친의 인식론적 지평을 슈리라타와 중현에 대 한 “절충주의”로 해석하였다.38) 권오민(2010a, 2010b)은 세친 『유식이십론』 전후 의 극미논쟁에 관한 다양한 문헌적 자료와 함께 대상에 대한 학파철학의 관점을 소개하였다. 그는 극미비판을 중심으로 전개된 세친의 외계대상 비판논리를 불교 철학의 복합성이라는 측면에서 상관관계를 상세히 기술하고39), 디그나가의 『관소 연론』 등에 나타난 외계대상의 비판적 논거들이 아비다르마 이래 불교철학의 논 쟁에서 상호교차하며 차용되고 있음을 밝혔다.40) 이상의 선행연구에 대한 검토를 통해41) 기간의 연구에서 드러난 특징을 요약 해 보면 다음과 같다. 연구사적으로 볼 때, 극미론 연구는 인도철학의 원자론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였으며, 불교에서는 바이셰시카의 원자론과 설일체유부의 극 미설의 연관관계에 규명에 초점을 두었다. 이러한 초기 연구의 대체적인 합의는 불교의 극미설이 바이셰시카의 원자론에 영향을 받아 성립하였으며, 불교 전통의 속성 중심의 존재론과 양적인 원자개념의 불일치로 인해 아비다르마의 철학체계 에 혼란을 초래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대 인도지중해 문명권에서 보편적이었 던 4원소설이 원자설로 이행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으며, 그 양자의 통합 또는 이 36) 尹煐鎬 (2008) 「有部의 極微說 연구」. 『韓國佛敎學』 Vol.50, 39 - 66. 윤영호는 이 연구의 주제를 확대, 발전시켜 박사논문으로 제출하였다. 윤영호.(2013) 『說一切有部의 極微說 硏究』. 동국대학교 박 사논문. 37) 朴仁成 (2008) 「『유식이십론』 게송10에 대한 규기의 해석(1)」, 『韓國佛敎學』 Vol.50, 313 - 350. 38) 박창환 (2009) 「法稱(Dharmakīrti)의 감각지각(indriyapratyakṣa)론은 과연 輕量部적인가?- 上座 슈리라타(Śrīlāta)의 감각지각 불신론과 이에 대한 世親의 절충론을 통해 본 경량부 前5識說의 전개 과정」. 『인도철학』 제27집, 5 - 51. 39) 권오민 (2010a) 「불교철학에 있어 학파적 복합성과 독단성(I):세친의 『유식이십론』에서의 외계대상 비판의 경우. 『인도철학』 제28집, 139 - 170. 40) 권오민 (2010b) 「불교철학에 있어 학파적 복합성과 독단성(II): 진나의 관소연연론에서 외계대상 비판 의 경우」, 『불교연구』 제33집, 41 - 97. 41) 이상에서 대표적인 연구는 거의 망라하였다고 생각하지만, 이 외에도 간간히 단편의 논문들이 발표 되었다. 그리고 유식세친 이전을 중심으로 한 연구목적으로 인해 『관소연론』 등 세친 이후의 극미관 련 논서들에 대한 연구는 이곳에서 기술하지 않았다. 이들은 이하 논의의 과정에 필요한 경우에만 소 개하도록 할 것이다. 이들에 대한 관련 서지정보는 참고문헌에 수록하였다. - 11 - 행에 관한 해석에서 바이세시카와 설일체유부에 차이점이 존재하였다. 이같은 기존의 연구들은 극미개념과 용어 자체에 대한 몇 가지 오해 내지는 불일치를 아직 해소하지 못하였다. 대표적으로 극미설이 불교철학에서 수용 발전 되는 경로를 바이셰시카에 국한하는 경향이 있으며, 개별극미 개념과 학파철학의 존재론적 전제들, 그리고 결합, 화합, 화집 등과 같은 극미의 결합방식의 용어와 개념의 불확정, 그리고 그것의 인식론적 함의 등에 대한 논의에는 한계를 노정하 였다. 또한 특정한 문헌에서 극미의 의미 등에 치중함으로써, 하나의 통합적이고 자기완결적인 철학체계 안에서 극미개념이 어떻게 기능하였는지, 나아가 대상과 인식이라는 문제 혹은 학파철학과 극미설의 상관관계 등에 대한 철학적 탐구로는 발전하지 못하였다. 다음 장에서는 논리적인 철학적 분석의 도구로서 극미해석의 유래와 그에 기반한 극미분석이 학파철학의 해석적 관점을 보여주는 시금석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논증하도록 한다. - 12 - 2장. 극미해석: 학파철학의 정체성에 대한 시금석 탄생은 결합이요, 죽음은 해체다. 저마다 따로 떨어진 미세한 구성원소들은 영 원하고 변경될 수 없는 것이며, 광대한 허공 속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면서 서로 결합하고 흩어진다.42) 만물의 구성요소로서 원자(原子, atom)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체의 대상세 계을 해명하고자 하는 철학적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원자론은 근대에 이르기 까지 철학사의 주류로 자리잡지는 못하였지만, 언제 어느 곳에서나 해명되어야 할 보편적 도전의 과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불교철학에서 전통적으로 일체(一 切, sarvam)의 존재를 3과(科), 즉 온, 12처, 18계로 설명하였는데, 이러한 이론 체계는 경험주의적이고 인식론적 경향이 강한 불교 인식존재론의 특수성을 반영 한다.43) 반면 4대설과 극미론은 범 인도유럽어계통의 보편적 맥락에서 발전된 철 학개념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전통적으로 불교의 극미설이 바이셰시카의 원자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었다. 바이셰시카는 6구의(句義, padārtha)개념에 근거한 실체의 정의에서 극미설을 발전시켰으며 4대종과 원자 개념의 통합에 주력하였다. 반면 니야야학파는 원자의 해석에 있어서 원자개념의 논리적 분석에 치중하였다. 이런 두 가지 경향은 불교철학에서도 이미 『비바사 론』의 단계에서 상당한 통합과 이론적 정립의 단계로 진입하여 있었다. 불교의 『니까야』나 『아함경』의 전승, 그리고 아비다르마와 설일체유부, 경량부 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세계에 대한 전통적인 불교의 교설에서 세계는 의식으로부 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주체의 감각기관과 의식에 의해 제한되는 것이 다.44) 대상세계는 오직 감각기관이라는 문을 통해서만 파악되며, 감각기관의 작용 42) 장 살렘. 양창렬 옮김 (2009) 『고대의 원자론: 쾌락의 윤리로서의 유물론』. 서울: 난장, 13. (Jean Salem, L'Atomisme antique: Democrite, Epicure, Lucrece, Librairie Grenerale Francaise. 1997.) 43) 설일체유부나 경량부와 같은 학파적 관점은 불교철학 내부로부터 실재론이라는 혐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바이셰시카 등의 인도 실재론자들은 불교의 제학파를 모두 비실재론적이며 현상주의적이라 는 비판을 받았다. 이는 불교의 무상(無常), 무아(無我), 그리고 찰나생멸의 개념이 기본적으로 항구불 변하는 실재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Cf. Matilal (1986), 223-254. 44) 대표적인 예를 하나 제시하면, 『썅윳따 니까야』 (SN)의 「일체경」, 즉 「삽바 숫따」 (Sabba-sutta)에 12처를 중심으로 일체를 설명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비구여, 내가 그대에게 일체에 대하여 설하겠다. 잘 듣도록 하라. 비구여, 무엇을 일러 일체라 하는 가? [그것은] 눈과 물질(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감촉, 마음과 의식대상이다. 비구 - 13 - 에 한해서 인식가능하다. 그리고 그 감각기관의 지각은 다시 의식에 의해 제한된 다. 따라서 인식된 세계는 감각기관에 의해 조건지어지고 의식에 의해 한정된 세 계일 뿐이다. 그러므로 세계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의식의 한정을 소 멸시켜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역설이 발생하게 된다. 의식은 일체의 대상을 있 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인 동시에, 그것이 없이는 어떠한 대상의 인 식도 불가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는 그러한 대상과 인식의 문제가 극미개념을 통하여 어떻게 해명될 수 있는지를 고찰해 보도록 하겠다. 1절. 극미의 개념 극미의 개념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가장 미세한 물질’이라는 기본적인 원자 개념에서 출발하여, 학파적 견해와 관점의 차이에 따라 정교한 개념적 장치들이 추가되는 경로를 밟는다. 그리스 원자론은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다’는 점에 방점 을 두어 명칭도 atom으로 불리게 된 반면에 인도철학에서는 ‘가장 미세한’에 초 점을 두어 aṇu 혹은 paramāṇu라고 불리게 되었다. 니야야-바이셰시카에서 원 자는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범주에 속하는 실체로써 반드시 물질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극미(極微, paramāṇu)’는 ‘가장 미세한 물질(색)’로서 ‘물질’의 가장 미세한 기본단위일 뿐이지 의식 등 다름 영역에는 포함되지 않는 다. 이는 바이셰시카학파의 물질분류에서 ‘요소적 물질(bhautika)’에 한정되는 개 념이다. 이와 같이 극미개념의 구체적인 내용은 학파철학에 따라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기 때문에, 극미설에 대한 제학파의 해석들을 검토하기 위하여 먼저 각 학 파의 극미개념에 대한 정의를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여, 이것이 일체이다. sabbaṃ vo bhikkhave desissāmi, tam suṇātha. Kiñ ca bhikkhave sabbaṃ. cakkhuñ c'eva rūpā ca, sotañ ca saddā ca, ghānañ ca gandhā ca, jivhā ca rasā ca, kāyo ca phoṭṭhabhā ca, mano ca dhammā ca. Idaṃ vuccati bhikkhave sabbaṃ. (SN 35.23. v.3. (4:15)) 불교철학의 존재론에서 이러한 경험주의적 관점은 12처설에서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나는데, 아비다 르마철학에서 가장 우수한 존재의 분석으로 인정되었던 12처설의 감각경험 중심의 세계분석은 이후 불교의 존재론과 인식론이 하나의 범주로 통합되어가는 근거가 된다. - 14 - 1. 사대종(四大種, mahābhūta)과 원자 지중해 문명권에서 4원소설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설에 의해 대체되는 경향을 보였다면, 인도에서는 4대종과 극미개념이 경합하면서 위상을 재정립하는 형태로 발전하였다. 때문에 세계구조는 더욱 혼란스럽고, 설명체계는 더욱 복잡해진 것으 로 여겨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바이셰시카나 불교 등 인도철학 전반의 산스크리 트 문헌에서 ‘가장 미세한 것’에 상응하는 용어는 아누(aṇu)로써, 그리스의 원자 (原子, atom)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가장 작은 물질단위’를 의미하 였다.45) 지수화풍의 4대종만을 가장 미세한 구성요소로 인정하여 그것을 원자로 설정하는 초기의 입장은 점차 4대종으로 만들어진 색향미촉의 4대소조까지 원자 에 포함하는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이 때 4대종과 4대소조를 극미와 원자 중 어 느 것에 대응시키는가에 따라 존재개념과 존재론적 층위의 위상이 달라지는 결과 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인도의 철학계는 이런 혼란스럽고 복잡한 문제에 대한 논 쟁의 과정을 통해 존재와 인식에 관한 통찰을 심화 발전시킬 수 있었다. 초기불교의 원자개념은 가장 먼저 4대종(大種, mahābhūta)을 계(界, dhātu) 와 동일시하면서 개념적 통합을 시작하였다. 계(界, dhātu)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층위, 구성성분, 요소, 원소 등을 의미하며, 문법적으로는 어근(root)을 뜻한다. 따라서 물질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요소로서 알려진 4원소(대종)에 계(界)의 명칭을 부여한 것은 특별한 발상의 도약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며, 아마도 대종과 계(界)의 두 개념은 자연스럽게 융합하였을 것이다. 4대종은 4계(界)로, 4대종에 허공과 의식을 더한 6원소는 6계(界)로 자연스럽게 등치된 것으로 보인다. 『맛지 마 니까야』 140경인 「계분별경」 (Dhātuvibhaṇgasutta)에서 이같은 흔적을 발견 할 수 있다. 비구여, ‘사람은 이 여섯 가지 구성요소(dhātu)[를 가진다]’고 말해집니다. 그 45) 이 아누(aṇu) 개념은 종종 '가장 작은(parama) 원자(aṇu)'를 의미하는 극미(paramāṇu)와 혼용되었 기 때문에 두 개념의 층위가 구분되어야 할 경우에 더욱 혼란을 야기하였다. 이 때 원자(aṇu)와 극미 (paramāṇu)는 '가장 첫 번째'에서와 같이 중복적인 의미에 지나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이후 개념이 세분화되면서 양자의 의미 분화가 이루어진다. Cf. Gangopadhyaya (1980). paramāṇu에 대 한 한문 번역어는 진제의 인허(鄰虛)와 현장의 극미(極微)가 있다. 인허는 ‘텅빔의 상태에 가깝다’는 뜻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진제가 극미를 공(空, śūnya)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반면 현장의 극미는 ‘극히 미세한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되는데, 이 또한 법상유식이 유식적 존재의 실재성 에 강조점을 두는 철학적 관점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 15 - 것은 무엇이라고 말해집니까? 그것은 여섯 가지 구성요소, 즉 지계, 수계, 화 계, 풍계, 허공계, 그리고 식계입니다. 비구여, ‘사람은 이 여섯 가지 구성요소 [를 가진다]’고 말해지고, 그것은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46) 여기에서 여섯 가지 구성요소(dhātu)는 앞에서 세계를 구성하는 6원소로 설명되 었던 것에 계(界)의 명칭을 부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뒤이어지는 각각의 계(界) 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먼저 각각의 구성요소들을 내적인 측면과 외적인 측면으 로 구분하고, 내적인 것에는 신체의 내적인 장기(臟器)들을, 외적인 것에는 외부 의 상응하는 사물들을 대응시킨다. 이것은 12처를 내입처와 외입처로 구분하는 방식과 동일하고, 또 『증일아함경』의 내외구분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증 일아함경』에서와는 달리 이곳에서 여섯 가지 구성요소들은 내외를 막론하고 올바 른 관찰에 의해 소멸되어질 것들이다. 여섯 가지 요소들을 바르게 관찰하면, 그것 들에서 ‘나’, ‘나의 것’, ‘나 자신’의 어떤 것도 발견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바르게 관찰하고 그것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날 때, 각각의 계(界)들은 의식으로부터 소멸하게 된다. 『아비달마품류족론』47)에서의 물질(색)에 대한 설명은 4대종과 4대소조를 12처 의 분류체계로 재정의하는 형태를 보여준다. 물질(색)이란 무엇인가? 존재하는 물질(색)이란 4대종과 4대종에 의해 만들어 진 소조색을 통틀어 말한다. 4대종은 지계 · 수계 · 화계 · 풍계를 말하며, 소 조색은 안근 · 이근 · 비근 · 설근 · 신근 · 색경 · 성경 · 향경 · 미경과 촉경 의 일부와 무표색을 말한다.48) 46) Dhātuvibhaṅgasuttaṃ 344. (MN 140, 3.239): “‘Chadhāturo ayaṃ, bhikkhu, puriso’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Kiñcetaṃ paṭicca vuttaṃ? (chayimā, bhikkhu, dhātuyo) – pathavīdhātu, āpodhātu, tejodhātu, vāyodhātu, ākāsadhātu, viññāṇadhātu. ‘Chadhāturo ayaṃ, bhikkhu, puriso’ti– iti yaṃ taṃ vuttaṃ, idametaṃ paṭicca vuttaṃ. "'A person has six properties.' Thus was it said. In reference to what was it said? These are the six properties: the earth property, the liquid property, the fire property, the wind property, the space property, the consciousness property. 'A person has six properties.' Thus was it said, and in reference to this was it said. Cf. 『中部』 140經 = 「界分別經」. 47) 『아비달마품류족론』은 『비바사론』의 책임편집자로 알려져 있는 세우(世友, Vasumitra)에 의해 저술 되었다. 포터(Potter)와 린트너(Lintner)에 따르면 이 논서는 『비바사론』의 편집 직후에 저술된 것으 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 논서는 『비바사론』 편집 바로 전후, 즉 서기 150년 경의 아비다르마철학 의 대강을 알려준다고 할 수 있다. Cf. Potter (1988), 375 - 376. 48) 『阿毘達磨品類足論』 「辯五事品 1」: 色云何?謂諸所有色,一切四大種及四大種所造色。四大種者,謂 地界、水界、火界、風界。所造色者,謂眼根、耳根、鼻根、舌根、身根、色、聲、香、味、所觸一分及 無表色。(T26.692b24 - 27) - 16 - 초기불교의 교학에서 일체의 존재는 오온, 12처, 18계에 의해 설명되었으며, 그 가운데 12처가 일체의 존재를 가장 잘 설명하는 체계로 인정되었다. 더하여 물질 (색)을 4대종과 4대소조로 정의하는 방식도 『니까야』와 『아함경』에서 많은 사례 를 찾을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서로 다른 이들 설명체계가 하나로 통합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물질은 보다 궁극적인 구성요소인 4대종과 그것들이 모여서 만 들어진 4대소조로 구성되며, 우리의 경험세계에 포착되는 물질들은 이 4대소조에 해당한다. 12처에서 물질은 감각기관(안, 이, 비, 설, 신)과 그것에 의해 감각되는 대상(색, 성, 향, 미, 촉), 그리고 법처에 속하는 무표색을 포함한다. 이들 모두는 궁극적인 구성요소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4대소조이다. 여기서 4계 (界)는 정확하게 극미와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후 18계와 12처의 실 재성을 논하는 곳에서 극미의 결합관계를 설명하는 방식과 동일하다. 4대종과 극미를 직접 관련지어서 논하는 논서는 『비바사론』, 『구사론』, 『순정리 론』이 있고, 『유가사지론』은 극미를 부정하는 맥락에서 대종을 대립시키는 논법을 구사한다. 따라서 대종과 극미의 직접적인 관계설정과 동일시 과정은 아비다르마철 학의 비바사 논사들에 의해 처음으로 시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비비사론』에는 4 대종과 극미의 관계설정에 관한 논란과 이설(異說)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문] 하나의 4대종은 단지 하나의 소조색 극미만을 만드는가? 다수를 만들 수 있는가? 만약 단지 하나만을 만든다면, 네 가지 원인에 하나의 결과가 되지 않 겠는가? 다수의 원인과 적은 수의 결과는 이치가 자연스럽지 못하다. 만약 다 수를 만들 수 있다면, 다시 말해 하나의 4대종으로 만들어진 물질이 다수의 극 미를 가진다면, 서로 구유인이 되지 않겠는가? 아비다르마 논사들이 설하기를 ‘저항을 지닌 소조색들은 서로 서로 구유인이 되지 않는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아비다르마의 정설에 위배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답] 마땅히 다음과 같이 설해야 한다. 하나의 4대종은 단지 하나의 조색극미 를 만들 수 있다. [문] 그렇다면 서로 네 가지 원인에 하나의 결과가 되지 않겠는가? 다수의 원 인에 적은 결과는 이치에 맞지 않다. [답] 다수의 원인에 적은 수의 결과 역시 과실이 없다. 세속에서 눈앞에 나타 난 것을 보는 그와 같은 종류이기 때문에, 네 가지 원인과 하나의 결과는 이치 상으로 모순되지 않는다.49) 49) 『阿毘達磨大毘婆沙論』: 問一四大種為但造一造色極微。為能造多。若但造一。如何不成因四果一。因 多果少理不應然。若能造多。則一四大種所造色有多極微。云何展轉非俱有因。對法者說。有對造色展轉 相望無俱有因。許則便違對法宗義。答應作是說。一四大種但能造一造色極微。問如何不成因四果一。因 - 17 - 4대종과 원자는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라는 점에서 개념적으로 동 일한 외연을 지닌다. 그렇다면 4대종과 원자의 내포(內包)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 가? 본문에서는 대종과 극미는 서로 층위를 달리하는 물질의 기본단위로 설정되 고 있다. 여기서 극미는 4대종으로 만들어진 소조색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물 질의 기본단위인 극미에 대하여 4대종은 그 보다 더 미세한 구성요소로서 기능하 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존재의 층위를 구분하는 방식은 대상의 실재성과 인 식에 관한 이후의 논쟁에서 기본적인 구도를 제공하였다. 일단 4대종과 극미의 층위가 결정되고 나면, 이제 4대종과 네 가지 기본요소 들이 만들어 낸 결과물인 극미의 인과적 관계가 해명되어야 한다. 먼저 다수의 원인에 다수의 결과, 즉 4대종을 원인으로 해서 다수의 극미들이 만들어진다고 가정하면, 인과적 집적성을 특정하기 곤란한 문제가 발생한다. 특정한 하나의 극 미라는 결과에 대해 원인을 특정할 수 없고, 대신 다수의 동일한 극미들 한 무더 기가 다수의 원인에 의해 발생하였다는 모호한 주장이 된다. 아비다르마 논사들 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다수의 극미가 동일한 시간, 동일한 장소에서 서로 서 로 원인이 되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저항을 지닌 물질은 동일한 시간, 동일한 장소에 함께 존재할 수 없다. 본문에 따르면 비바사의 정설은 4대종, 즉 다수의 원인이 하나의 소조색인 극 미를 산출한다는 것이다. 소조색인 극미가 하나의 단일한 물질일 경우에는 네 가 지 다른 원인이 하나의 결과를 산출하였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서로 다른 원인 들이 작용하여 특정한 하나의 결과만을 산출한다는 설명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 지만, 문제를 해소했다고 하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비바사 논사는 여기서 눈앞에 나타나 보이는(現見) 존재들의 부류에 대해 언급한다.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들은 흙, 물, 불, 공기의 네 가지 원소들이다. 모든 물질은 이 네 가지를 포 함하고 있다. 그러나 경험되는 흙은 흙 하나만으로, 물은 물 하나만으로 경험된 다. 이처럼 세속에서 경험되는 물질들은 어떤 특정한 하나의 성질을 나타내지, 물 과 불이 함께 나타나지 않는다. 궁극적 실재의 차원에서 다수의 원인들은 세속적 경험의 차원에서 하나의 결과를 산출한다. 따라서 소조색으로서의 극미는 지각할 수 있는 사물의 성질을 지니고 있는 최소단위이다. 극미의 선을 넘으면 4대종의 네 가지 성질이 항상 함께 공존하고 있다. 그렇다면 동일한 4원소로 만들어지는 극미들은 어떻게 서로 다른 성질을 지니 多果少理不應然。答果少因多理亦無失。世現見有如是類故。因四果一於理無違。(T27.663c7 - 15) - 18 - 게 되는가? 그리고 물질들의 속성의 변화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원인이 네 가지 기본요소로 고정되어 있다면, 결과는 동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경험되는 세계는 매우 다양하고 변화하는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비바사 논사들은 이 문제 를 대종의 숫자와 세력으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첫째는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닌 대종들이 특정한 수의 조합이 될 때, 특정한 성질을 나타낸다는 주장이다. 이는 대종 자체의 숫자에 증감이 있고, 구성하는 물질에 따라 각 대종들의 숫자에 차 이가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비바사론』의 가상의 반론자는 물질의 특성에 차이가 있는 것을 대종의 증감으로 볼 때 발생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만약 4대종 의 증감이 있다면, 대종들은 서로 분리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견 고한 물질 가운데 지(地)극미가 많고, 수, 화, 풍이 적다면, 지극미는 수, 화, 풍과 같은 양만큼은 분리되지 않고 함께 할 것이지만, 초과하는 나머지의 지극미는 떨 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4대종은 항상 분리되지 않고 함께 한다는 주장에 위배 된다.50) 그리고 만약 4대종의 증감이 없다면, 돌과 물 등 물질의 특성의 차이를 설명할 수 없다.51) 비바사 논사는 대종들의 숫자에는 증감이 있지만, 서로 분리되 지 않고 함께 한다는 점에는 문제가 없다고 해명한다. 네 가지 대종들은 각각이 일대일 대응관계인 하나의 집합처럼 함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은 어느 것이 결여된 상태에서는 작용을 할 수 없고, 숫자의 다소에 도 불구하고 반드시 서로 협력하여야 하나의 일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이다. 마 치 사람의 숫자가 서로 다른 마을들이 함께 어떤 하나의 일을 하는 경우와 같 다.52) 따라서 사물의 다양한 성질의 차이는 대종의 숫자의 증감에 의해 4대종 소 50) 『비바사론』의 정설은 ‘4대종이 함께 모여서 하나의 소조색을 만든다’는 4사구생(四事俱生)을 기본으 로 한다. [문] 하나의 4대종은 단지 하나의 소조색 극미만을 만드는가? 다수를 만들 수 있는가? .... [답]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하나의 4대종은 단지 하나의 조색극미를 만들 수 있다. 『阿毘達磨大毘婆沙論』: 問一四大種為但造一造色極微。為能造多。若但造一。如何不成因四果一。因多 果少理不應然。若能造多。則一四大種所造色有多極微。云何展轉非俱有因。對法者說。有對造色展轉 相望無俱有因。許則便違對法宗義。答應作是說。一四大種但能造一造色極微. (T27.663c7 - 13) 51) [문] 4대종 자체에는 증감이 없다고 한다면 어찌 두 가지 구유(俱有)의 잘못이 있겠는가? 만약 증감 이 있다면 어지 서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째서 그런가? 만약 견고한 물질 가운데 지극미 가 많고 수, 화, 풍[극미가] 적다면, 지극미를 따라서 수 등이 결합하고 나머지는 서로 떨어져 존재하 게 될 것이다. 나아가 움직이는 물질들도 마찬가지이니 만약 증감이 없다면 물이나 돌 등의 물질은 견고함이나 연함 등의 성질의 차이를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阿毘達磨大毘婆沙論』: 問四大種體有 增減不。設爾何失二俱有過。若有增減寧不相離。所以者何。若堅物中地極微多。水火風少。地微隨與水 等量雜餘則相離。乃至動物說亦如是。若無增減水石等物。不應得成堅軟等異. (T27.682c23 - 28) 52) 『阿毘達磨大毘婆沙論』: 答應言大種體有增減。問若爾云何名不相離。答雖有增減而不相離。以展轉相 資同作所作故。如堅物中雖地微多水火風少。然離水等地微不能作所作事。乃至動物說亦如是。如多村邑 - 19 - 조색인 극미의 성질이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란에서 반론자가 대종의 층위와 극미의 층위를 구분하고 있지 않다는 점 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여기서 4대종의 특징인 서로 분리되지 않고 함께 하는 성질(不相離)을 지(地)극미 등에 적용함으로써 대종과 극미를 동일시하는 것 처럼 보인다. 이는 극미를 대종의 소조색으로 보았던 이전의 입장과 배치된다. 가 상의 반론자에게는 궁극적인 차원에서 물질의 성질은 네 가지로 한정되며, 극미 의 종류도 네 가지가 될 것이다. 지각되는 사물의 성질은 이 네 가지 극미들의 조합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견고성을 지닌 물질인 돌은 물과 구분된다. 돌이라는 사물에서 물과 불과 공기를 찾을 수는 없다. 그리고 이 돌을 가장 미세한 단위까 지 쪼개면, 견고한 특성을 지닌 돌의 가장 작은 단위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처음 의 전제는 4대종이 함께 가장 미세한 물질인 극미를 만든다는 것이었으며, 질문 은 이 가장 미세한 물질단위의 성질이 어떻게 결정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반론자가 대종과 극미를 동일화함으로써 개념상의 혼란을 초래하였다. 기존에 4 대종으로 만들어지는 극미는 지금 여기서 대종과 동일화되는 극미와는 구분되어 야한다. 따라서 지, 수, 화, 풍(風)극미들이 모여서 그와 다른 층위의 극미를 만들 어야 할 것이다. 이런 구도는 『비바사론』에서 사극미(事極微)와 취극미(聚極微)의 개념으로 정 식화되어 있다. 이 때 사극미는 대종과 극미가 동일화되는 차원에서의 극미개념 이고 취극미는 대종으로 만들어진 소조색으로서의 극미를 의미하게 된다. 이제 대종으로 만들어졌으며, 가장 미세하고, 지각대상의 성질을 가지고 있었던 극미는 보다 미세한 대종 차원의 극미와 구분된다. 여기서 이 대종 차원의 극미도 여전 히 물질적 성질을 지니며 지각될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소조색의 속성과 같은 것으로 설명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아비다르마철학의 정 설은 대종 차원의 극미도 실재하는 물질적 존재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앞 서의 질문, 즉 ‘물질단위의 성질은 어떻게 결정되는가?’는 대종 차원의 극미들이 어떤 방식으로 결합하여 다양한 성질을 지닌 물질을 만드는가에 대한 문제로 환 언될 수 있다. 그리고 『비바사론』에서의 대종의 특성에 따르면, 네 개의 대종(극 미)은 항상 함께 있다는 4사구생의 전제를 견지하면서 다양한 물질의 성질을 해 명하는 것이 과제가 된 것이다. 앞에서 숫자의 증감을 주장하는 논사는 4사구생 의 원칙에서 이탈하여 대종극미들의 구성분포가 물질의 성질을 결정하는 것으로 共營一事。雖有人數多少不同。而互相須不可相離. (T27.682c28 - 683a4) - 20 - 설명하고 있는 셈이다. 물질이 지니는 상이한 성질에 대한 또 다른 해명은, 그것이 극미 숫자의 증감 이 아니라 극미의 세력의 강약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이다.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대종 자체는 증감이 없다. [문] 그렇다면 돌 등은 어떻게 견고하고 연한 성질 등의 차이를 지니는가? [답] 대종의 세력이 강함과 약함이 있기 때문이다. 견고한 사물 가운데 4대종 의 극미와 같이 그 숫자는 비록 동일하지만 그 세력에 있어서 지(地)극미가 강 한 것과 같다.53) 이 논사도 앞에서와 같이 대종과 극미를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종의 소조 색으로서 극미를 설정하는 비바사의 정설과는 다른 견해를 전제로 한다. 이 주장 에서는 대종의 숫자에 의해 소조색의 성질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대종이 더 강한 세력을 지니고 있는가에 따라 성질이 결정된다고 본다. 소금과 보리가 서로 다른 감각지각을 발생시키는 것은 그것들에 속해 있는 극미 세력의 강약에 따른 것이다. 이곳의 논란은 대종과 극미를 동일한 층위에 놓음으로 인해 다소 혼란을 야기 하였다. 그러나 앞서 대종으로 만들어진 소조색으로서의 극미개념에 비추어 보면, 지각되는 물질의 다양한 성질이 어떻게 결정되는지에 대한 해명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일체의 사물은 그 속성을 잃지 않은 가장 미세한 물질로 나눌 수 있을 것 이다. 이 때 그 가장 미세한 물질, 즉 극미는 여전히 지각될 수 있는 다양한 성질 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하나의 극미와 조대한 사물은 그 성질에 있어서 연속성 을 지닌다. 산과 바위와 바위를 가장 미세하게 쪼갠 극미는 견고성이 우세한 성 질을 갖는다는 점에서 연속적이라는 말이다. 한편 대종과 하나의 개별적인 극미 의 관계는 그 특성이 다소 모호한 측면이 있다. 다수의 지, 수, 화, 풍이 특정한 숫자나 세력의 결합에 의해 하나의 개별적인 극미의 성질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 다수의 지(地)극미에 상이한 숫자나 세력의 수(水)극미가 결합하였을 때, 그 비율 에 의해 견고성이 연한 성질을 띠게 된다면 총량이라는 측면에서는 연속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각각이 견고성과 습윤성을 지닌 극미들이 서로 다른 비율로 결합하여, 중간정도의 견고성을 띠었다고 하면, 이 중간정도의 견고성이라 53) 『阿毘達磨大毘婆沙論』: 有說。大種體無增減。問石等云何堅『*』軟等異。答大種勢力有增微故。如堅 物中四大極微。體數雖等而其勢力地極微增. (T27.683a9 - 12) - 21 - 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성질이 된다. 어느 쪽에 초점을 두느냐에 따라 상이하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이후 상좌 슈리라타 와 중현은 극미들로 만들어진 복합체의 성질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게 된다. 『비바사론』단계에서는 아직 극미와 대종의 위상을 혼용하는 사례들이 발견되 고, 극미와 대종이 개념적으로 완전히 통합되지 못한 채 병렬적으로 공존하는 개 념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극미론의 전개에서 항상 등장하는 주제 가운데 개별극 미들 사이의 간격과 극미들의 접촉 가능성에 대한 문제가 있는데, 『비바사론』에 서는 대종에 대해 동일한 주제와 논증을 제시하고 있다.54) 세친은 『구사론』에서 이와 같은 논란이 4대종과 4대소조의 8사구생(八事俱生)이라는 개념을 통해 극미 론으로 통합되었음을 보여준다.55) 이러한 미취는 욕계에서, 성(聲)이 없고 근도 없을 때에는 여덟 가지 ‘사’가 함 께 생기[八事倶生]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라도 감소하여서는 생기하지 않는다. 무엇이 여덟 가지인가? 이를테면 4대종(大種)과 4대종에 의해 이루어진 [造色] 색, 향, 미, 촉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소리는 없더라도 근이 있을 경우, 제 극미취(極微聚)로서 구 생하는 사(事)는 혹은 아홉 가지, 혹은 열 가지가 된다.56) 먼저 여기서 논의하고 있는 물질(색)은 욕계(欲界)의 범위 안에서 존재하는 물질 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점은 자주 잊혀지거나 간과되기 쉬운 점인데, 세친 의 논서에서 다루고 있는 대상세계나 현상들은 바로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욕계를 중심으로 펼쳐진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색계(色界) 혹은 무색계(無色界)에 대한 언 급은 추가적인 설명으로 제시된다. 다섯 가지 감각기관 모두에 의해 파악되는 욕 계의 세계와는 달리, 색계는 향기(香)와 맛(味)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팔사 구생의 조건은 소리와 감각기관이 없는 상태이다. 이것은 감각기관에 전혀 의존 하지 않으며, 다섯 가지 감각대상 가운데 소리를 제외한 질료적 물질의 발생에 54) 대종의 간격에 대해서는 『阿毘達磨大毘婆沙論』: 問大種等聚中有間隙不。(T27.683c16 - 25), 대종의 접촉에 대해, 『阿毘達磨大毘婆沙論』: 問諸極微互相觸不. (T27.683c26 - 684a17), 극미의 지각가능성 에 대해서는 『阿毘達磨大毘婆沙論』: 問極微當言可見不可見耶. (T27.684a18ff.)에서 논하고 있다. 55) 팔사구생의 기원과 상이한 존재론적 층위의 결합에 의한 물질의 발생, 그것에 대한 인식의 문제 등 은 개별극미와 취극미(聚極微)의 해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극미론적 관점에서 팔사구생의 해명 은 이하 세친의 극미설을 다루는 부분에서 재검토하도록 할 것이다. 56) 권오민 (2002) 『아비달마구사론』. 4 Vols. 서울: 동국역경원, 156. 이하에서 권오민의 한글역 『아비 달마구사론』은 『구사론』으로 약칭하도록 한다. - 22 - 대한 설명이다. 감각기관과 독립적이고, 아직 소리(聲)를 갖지 않는 가장 미세한 물질은 4대와 4대소조의 여덟 가지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 은 8가지 요소 중에 하나라도 빠질 경우에는 가장 미세한 단위의 물질이 형성되 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명백하게 구성 요소 하나 하나의 양적 집적에 의 해 어떤 지각될 수 있는 물질단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8가지 원소로 특징지 워지는 특정한 조건 하에서만 질적인 차원을 달리하는 물질단위가 형성된다는 것 을 의미한다. 이어서 각각의 감각기관은 하나의 구성요소로서 기능한다. 감각기관 이 개입하고 소리가 물질의 속성에 포함되는 경우에 하나의 물질단위는 9개 혹은 나아가 11가지의 원소들이 함께 모여서 형성되는 것으로 설명된다.57) 이 물질은 기본적으로 지, 수, 화, 풍의 4대종으로 나타내지는 네 가지 속성, 즉 견(堅), 습 (濕), 난(煖), 동(動)을 모두 내포하고 있지만, 형성된 물질단위에서는 세력과 작용 이 가장 강성한 것을 따라서 견고함, 습기, 온난, 운동성 등의 속성을 드러낸다. 유여사(有餘師)의 주장에 따르면, 이 때 물질의 성질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대 종들은 ‘그 자체의 특성을 드러내지 않고 단지 종자(種子)로만 존재’할 뿐이다.58) 그리고 이어서 물질단위를 구성하는 구성요소들이 계(界, dhātu)와 동일시되고, 또 나아가 계(界)는 종자(種子)로 설명된다. 따라서 유여사에 따르면 물질에 나타 나는 성질들이 드러나지 않고 있을 때에도 4대종의 속성들은 종자의 형태로 존재 한다. 세친이 이미 『구사론』단계에서부터 극미와 계(界)와 종자의 관계설정과 개 념적 통합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덧붙여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은 여덟 가지 요소에 포함되는 4대종과 그것으로 만들어진 소조색의 존재론적 층위와 실재성에 관한 문제이다. 설일체유부는 4대 종과 소조색의 실재성을 모두 인정한다. 중현은 『순정리론』에서 이 문제를 4대종 과 대종으로 만들어진 색깔을 통해 설명하였다. 그러나 만약 청색이 온갖 대종과는 다른 실유하는 하나의 실체라고 설한다면, [4계 중의] 1계가 증대됨에 따라 다수의 4대종이 각기 청색을 낳아 하나의 색 취를 합성(合成)하는 것이 되어 이치에 어긋남이 없다. 따라서 대종과는 다른 소조색이 존재하는 것이다. 57) 신근(身根)은 자신의 요소 하나만을 추가하여 아홉 가지 요소에 의해 물질에 대한 접촉이 가능하다. 그러나 안근, 이근, 비근, 설근 등은 자신의 감각기관 외에 신근이 동시에 필요하기 때문에 열 가지 요소에 의해 감각대상의 발생을 경험할 수 있다. 여기에 소리가 추가되면 11가지의 요소들이 함께 하 여 오감에 감각되는 물질의 발생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구사론』, 156 - 157. 58) 『구사론』, 158. - 23 - 또한 지교(至敎, 즉 聖敎)에서도 분명히 이를 증명하고 있으니, 이를테면 계경 에서 “존재하는 모든 색은 다 4대종과 아울러 4대종의 소조색에 포섭된다”고 말한 바와 같다.59) 중현은 대종뿐만 아니라 대종으로 만들어진 소조색으로 나타난 청색 등도 실유하 는 실체라고 보기 때문에, 4대종과 소조색을 모두 물질을 구성하는 요소로 설명 하기에 문제가 없다. 그러나 경량부의 상좌 슈리라타는 같은 문제에 대하여 상반 된 결론에 도달한다. 상좌도 대종들이 모여서 4대종과는 다른 어떤 청색과 같은 소조색을 발생시키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상좌는 그렇게 발생한 청색 등은 그것의 구성요소인 4대종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으며, 또 실재성을 지니지 못하 는 가설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상좌 슈리라타에게 4대소조는 이미 4대종이 특정한 방식으로 결합하여 만들어진 물질일 뿐이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상은 실재하는 4대종의 차원의 실재성에 대한 것일 뿐이 며, 가설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현상세계에 기만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상좌와 중현 모두 네 가지 구성요소들이 모여서 어떤 창발적인 발생을 일 으키는 것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중현은 그것을 존재론적인 실체의 발생으로 보 고, 상좌는 그것을 인식론적인 형상(ākāra)의 발생으로 본다. 극미와 대종의 관계에 있어서 『유가사지론』은 아비다르마전승과는 매우 다른 입장을 취한다. 『유가사지론』에서는 일체의 물질을 구성하는 것은 대종이며, 극미 는 존재의 정당성이 부정된다. 색취 내지는 일체법들은 자신의 종자들로부터 발생한다. 그것은 어떻게 그런 가? 대종들이 취집하여 물질(색)을 발생시킨다고 말해진다.60) 대종들이 취집하여 물질을 발생시킨다는 점에서는 아비다르마 계통과 일치하지만, 그것들은 심상속에 속해 있는 안과 밖의 대종과 소조색들의 종자로부터 발생한다 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또한 대종은 대종의 종자에 의해 발생하는 것 과 같이 소조색은 소조색의 종자에 의해 발생한다. 대종과 소조색의 공통적인 기 59) 『순정리론』, 233 (124). 이하 『순정리론』은 권오민 번역 『아비달마순정리론(阿毘達磨順正理論)』을 기 본으로 하며, 이 경우 『순정리론』과 현장역 『阿毘達磨順正理論』을 함께 인용한다. 그리고 논문 저자 자신의 번역인 경우에는 현장의 한역만을 인용하도록 하겠다. 60) YBh 52.12 - 13.: tatra rūpasamudāyo tāvat sarvadharmāḥ svabījebhya utpadyante | tat kathaṃ | mahābhūtāny upādāya rūpaṃ jāyata ity ucyate | - 24 - 반은 종자이다.61) 반면에 어떤 취색도 극미로부터 발생하는 것은 없다.62) 『유가 사지론』의 저자에 따르면, 극미는 논리적으로 성립이 불가능한 개념일 뿐이다. 세 친은 유식으로 전향하면서 이 극미 부정의 논리와 종자 등의 개념들을 채택하고 있다. 불교에서 초기의 원자개념은 지, 수, 화, 풍 등의 네 가지 원소(四大種)와 혼용 되어 사용되다가 점차 오온, 12처, 18계 등과 같은 불교 고유의 개념들과 부분적 통합을 이루어 갔다. 대종과 극미개념의 이론적 통합성을 팔사구생(八事俱生)에 대한 세친의 논의에서 매우 심도깊게 다루어진다. 따라서 팔사구생 개념은 이후 극미론에 대한 검토단계에서 다시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다. 『유가사지론』에서 보 는 바와 같이 극미론의 전개과정에서 유식계열은 아비다르마계통과 상반되는 입 장을 견지한다. 이후 구사론주 세친은 극미설과 관련한 논쟁에서 아비다르마철학 의 문제의식과 논의방식을 따르지만, 이미 비유자-경량부의 종자개념 등을 수용 하여 있으며, 이후 극미개념을 부정하면서 유식으로의 전향을 완성하게 된다. 2. 『바이셰시카수트라』의 극미설 바이셰시카 철학의 원자개념을 보여주는 기본 텍스트는 학파의 창시자로 알려 져 있는 카나다(Kaṇāda)의 저술 『바이셰시카수트라』(Vaiśeṣika-sūtra)이다. 먼저 이 경전에서는 특수(viśesa)의 실체 개념을 중심으로 원자(aṇu)개념을 설명하고 있으며, ‘극미(paramāṇu)’에 대한 언급은 발견되지 않는다. 카나다는 4대종과 원 자의 개념적 차이를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원자 개념은 보조적인 것으 로 간주하였다. 먼저 바이셰시카철학에서 실재하는 존재(sat)는 영원하고 원인을 갖지 않는 것이며,63) 실재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그것의 작용(kārya) 을 통해서이다.64) 그리고 다수의 실체가 결합하였을 때 색깔 등의 특성을 지닌 지각경험이 발생한다.65) 61) YBh 52.15 - 53.1.: sarveṣāmādhyātmikabāhyānāṃ bhūtānāmupādāyarūpāṇāṃ cādhyātmaṃ cittasantatau bījāni sanniviṣṭāni | tatra tāvad upādāyarūpabījam upādāyarūpaṃ janayati yāvad bhūtabījena bhūtānyajanitāni bhavanti | bhūteṣu [53] punar jāteṣu tadupādāyarūpaṃ svabījādevotpadyamānaṃ tadupādāyajātam ity ucyate | 62) YBh 53.9.: na ca rūpasamudāyo kadācit paramāṇur utpadyate. | 63) VS 4.1.1: satkāraṇavannityam | Cf. VS(E) (133): The eternal is that which is existent and uncaused. 64) VS 4.1.2.: tasya kārya liṅgam | Cf. VS(E) (134): The effect is the mark of the existence. 65) VS 4.1.8.: anekadravyasamavāyāt rūpadiviśeṣāc ca rūpopalabdhiḥ | Cf. VS(E) (138): - 25 - 또 흙 등 [4원소의] 복합체(결과물)인 3종의 실체는 몸, 감각기관, 대상이라고 불리는 것들이다. ..... 그러나 '원자의 결합'(aṇusaṃyoga)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66) 몸이나 대상과 같은 물질적 존재들은 지, 수, 화, 풍의 4대종에 의해 만들어진다 는 설명은 4원소설의 전형적인 명제이다. 특이한 것은 여기서 원자(aṇu)의 결합 (saṃyoga)을 끌어들인다는 점이다. 게송만을 통해서는 이 원자가 4대종과 어떤 관계인지가 명확하지 않지만, 『니까야』 등에서와 같이 4대종을 원자개념과 등치 시키는 4원소설의 형태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때 흙 등의 대종(원자)들은 결합(saṃyoga)을 통하여 3종의 실체에 해당하는 결과물(kārya)을 산출하게 된 다. 원자의 결합에 대한 개념으로 제시된 이 saṃyoga는 아마도 문헌상에 등장하 는 가장 고전적인 것으로 추정되며, 세친이 『유식이십론』(Viṁśatikākārikā) v.10 절에서 술어로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이기도 하다. 그리고 흙 등의 궁극적 실체로 만들어지는 색, 향, 미, 촉 등의 감각대상도 실체로서 인정되지만, 영원성을 지닌 것은 아니다.67) 이 역시 『니까야』와 『아함경』에서 설명되었던 4대종과 4대소조의 관계와 정확히 일치하는 부분이다. 『바이세시카경』 7.1.2 - 5에 바로 이어서 초기 원자론의 혼란을 유발하였거 나, 혹은 바이셰시카 원자론의 불완전한 모습을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게송 이 나타난다. 그러나 원자는 이와 반대이다. 원자는 마하뜨이다. [왜냐하면] 동시에 특수가 존재하기도 하고 특수가 존재하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68) Perception of color arises from its combination with a compound of substances more than two, and from its possession of some special characteristics of color. 66) VS 4.2.1 & 4.2.5.: tat punaḥ pṛthivyādikāryadravyaṃ trividdhaṃ śarīrendriyāviśayasaṃjñakam | .... aṇusaṃyogas tv apratiṣiddaḥ | Cf. VS(E) (143 - 145): The aforesaid product-substance, Earth, etc., is again three-fold, under the names of body, sense, and object. 67) VS 7.1.2 - 4.: prthivyādirūparasagandhasparśā dravyānityatvād anityāś ca | etena nityeṣu nityatvam uktam | apsu tejasi vāyau ca nityā dravyanityatvāt | Cf. VS(E) (193 - 194): The Color, Taste, Smell, and Touch of Earth, Water, Fire,, and Air, are also non-eternal, on account of the non-eternality of their substrata. By this is implied eternality (of Color etc., which reside) in eternal substances. And also in consequence of the eternality of their (respective) substrata, (Color, etc.) are eternal in Water, Fire, and Air. 68) VS 7.1.10 - 12.: ato viparītamaṇu | aṇu mahaditi tasmin viśeṣabhāvād viśeṣābhāvāc ca | ekakālatvāt || Cf. VS(E) (205 - 206). - 26 - 앞의 게송에서 카나다는 4대종은 궁극적 실체이며, 지각의 영역이 아니며, 감각대 상의 특징을 지니는 4대소조는 실체이기는 하지만 무상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원 자는 그렇게 명확히 구분되는 존재가 아니다. 원자는 마하뜨(mahat)로 정의되는 데, 그것은 특수 즉 궁극적 실체성을 지니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것이 다. 이것은 원자의 개념이 4대종에 대응할 수도, 4대소조에 대응할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된다. 바이셰시카의 후대 전승에서 마하뜨는 지각되는 최소 단위이고, 따 라서 삼중체(tryaṇuka)로 정리되기 때문에 혼란은 해소된다.69) 그러나 이런 해명 은 『바이셰시카수트라』의 주석에서 발전된 원자론일 뿐, 카나다의 문헌에서는 흔 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카나다의 저술 단계에 한정해서 본다면, 원자 (aṇu), 즉 ‘미세한 것’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를 두 층위에 모두 적용할 수 있는 개 념으로 채택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런 해석은 『니까야』와 『아함경』 과 같은 초기 문헌에서 발견되는 관점과 일치한다. 이를 통해 카나다의 『바이셰 시카수트라』는 4대종설과 원자 개념이 처음으로 결합하는 과정을 반영하고 있지 만, 이 단계에서는 아직 ‘가장 미세한 물질의 기본단위’로서의 원자 개념과 관련 된 주제들이 충분히 인식되지는 않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바이셰시카에서 궁극적 실체, 즉 4대종과 허공, 시간, 공간, 자아, 마음 가운데 원자적인 성격을 지니는 4대종과 마음의 작용은 지각되지 않는(adṛṣṭa) 것을 특 징으로 한다. 원자들 가운데 불은 위로 상승하는 성질을 지니며, 바람은 옆으로 부는 성질을 지닌다. 이것은 감각기관에 지각되는 현상의 불이나 바람을 지칭하 는 것이 아니다. 4대종으로 만들어진 물질들에 내재하지만 지각되지 않는 작용력 으로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본문에서도 4대종의 결합과 관련된 중요한 언급이 등장한다. “불이 결합하기 때문에, 물이 적집하거나 소멸한다.”70) 앞서 saṃyoga 라는 용어가 4원소들의 결합을 의미한다는 점은 확인하였다. 본문에서는 비지각 적인 대종들의 결합과는 다른 맥락에서 ‘적집(saṃghāta)’와 ‘소멸(vilayanam)’이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문맥에서 물의 적집과 소멸은 아마도 소량 혹은 가장 작은 단위의 물이 모여서 양적으로 증가하는 현상과 그것이 조금씩 줄 69) 후대에 발전된 형태의 원자론에서는 개별 원자(aṇu) 두 개가 모여서 이중체(dvyaṇuka)를 형성하고, 그것이 다시 세 개가 모여 삼중체(tryaṇuka)를 만드는데, 이 삼중체가 지각되는 최소 단위로 주장된 다. 70) VS 5.2.8 - 9.: apāṃ saṃghāto vilayanam ca tejaḥ saṃyogāt | tatra visphūrjathurliṇgam | Cf. VS(E) (164.): Condensation, and dissolution, of water, are due to conjunction with fire. The pealing of thunder is the mark of that. - 27 - 어서 마지막에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렇게 양적 증감 혹은 소멸의 맥락에서 ‘적집(saṃghāta)’이 나타난다는 사실은 의미심 장하다. 왜냐하면, 이후 『구사론』에서 극미의 집적을 나타내는 용어로 이 ‘적집 (saṃghāta)’이 사용되기 때문이다. 결합의 용어 문제는 학파별로 결합의 성격에 대한 정의와 관련하여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데, 극미의 결합관계를 검토하면서 용어와 특성에 대해 정리하도록 하겠다. 3. 설일체유부의 고전적 극미설 불교에서 4원소설은 이미 남북전의 분열 이전부터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71) 그러나 불교철학에서 극미설은 아비다르마철학의 발전과정에서 태동한 것으로 보인다. 설일체유부 아비다르마철학의 7론72)에서는 아직 “극미(極微)”개념 이 등장하지 않지만, 이후 극미론에서 논의되는 몇 가지 주제들이 다루어지고 있 다. 7론의 하나인 『발지론』은 카챠야니뿌트라(Kātyāyanīputra, 迦多衍尼子)가 지 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연대는 대략 서기전 150 - 50년으로 추정되고 있 다.73) 그러나 『발지론』에 대한 백과사전적 주석서인 『비바사론』 (Mahavibhāṣaśāstra)에서는 극미와 관련된 대부분의 쟁점들이 논의되고 있는 것 71) 4대종에 대한 중요한 언급이 나타나는 『니까야』의 대표적인 경전들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DN: Kevaddha Sutta DN 11 (i.211), 「堅固経」; Mahāsatipaṭṭhāna Sutta DN 22 (ii.290), 「大念処経」. MN: Dhātuvibhaṅga Sutta (The Exposition of the Elements), MN 140 (iii.237), = 『중부아함』 「界 分別経」; Satipaṭṭhāna Sutta MN 10 (i.55), 「念処経」; Mahāhatthipadompama Sutta (The Greater Discourse on the Simile of the Elephant's Footprint), MN 28 (i.184), 「象跡喩大経」; Mahārāhulovāda Sutta (The Greater Discourse of Advice to Rahula), MN 62 (i.420), 「教誡羅 睺羅大経」; Chabbisodhana Sutta MN 112 (iii.29), 「六浄経」; Bahudhātuka Sutta MN 115 (iii.61), 「多界経」; Kāyagatāsati Sutta MN 119 (iii.88), 「身行念経」; Anāthapiṇḍikovāda Sutta MN 143 (iii.258), 「教給孤独経」. SN: Saṃyutta Nikāya의 여러 "Dhātu Sutta" SN 18.9 (ii.248); SN 25.9 (iii.227); SN 26.9 (iii.231); SN 27.9 (iii.234)); Saddhammapatirūpaka Sutta SN 16.13 (ii.222); Bīja Sutta SN 22.54 (iii.54); Āsivisopama Sutta SN 35.238 (iv.172); Kiṃsukopama Sutta SN 35.245 (iv.191); Dutiya-mittamacca Sutta SN 55.17 (v.365). AN: Titthāyatana Sutta AN 3.61 (i.173); Nivesaka Sutta AN 3.75 (i.222); Rāhula Sutta AN 4.177 (ii.164). 72) 아비다르마철학의 7론(論)은 『집이문족론』, 『법온족론』, 『시설족론』, 『식신족론』, 『계신족론』, 『품류 족론』, 『발지론』을 의미한다. 이 가운데 『발지론』은 이후 『대비바사론』이라는 방대한 주석서의 모태 가 되기 때문에 설일체유부의 초기철학을 이해하는데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다. 73) 권오민 (2003) 『아비달마불교』. 서울: 도서출판 민족사, 34. - 28 - 으로 보아, 극미론이 상당한 정도 정립되어가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비바사론』은 카니쉬카(Kaniṣka)왕의 통치기간에 500명의 아라한들이 카슈미 르에서 편찬하였다고 전해진다.74) 따라서 설일체유부의 극미론은 서기 150년 경 에는 일정 정도 완성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여겨진다. 이는 아마도 비슷한 시기에 저술된 것으로 보이는 『니야야수트라』 (Nyāyasūtra)에 등장하는 반론자들의 극 미설에도 반영되었을 것이다. 이제 『비바사론』을 비롯한 기간의 논서들에 등장하 는 초기 불교의 극미설을 개관해 보도록 한다. 1) 극미개념의 정의 『비바사론』에서 극미개념에 대한 정의는 136권의 본문에서 상세하게 논하고 있다. 아래 인용문의 전반부(1~4)에서는 물질로서 극미의 성질에 대해 정리하고, 후반부(5~8)는 그 극미에 대한 인식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문] 그 극미의 크기는 어떠하다고 알아야 하는가? [답] 마땅히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한다. 1) 극미는 가장 미세한 물질(색)이기 때 문에 2) 자르거나, 파괴하거나, 꿰뚫을 수 없으며, 취하고 버리거나, 타고 내리 거나, 모으거나 늘어뜨릴 수 없다. 3)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으며, 모난 것도 아니고, 둥근 것도 아니며, 네모이거나 네모가 아닌 것도 아니며, 높은 것도 낮은 것도 아니다. 4) 더 이상의 작은 부분이 없고, 더 이상 쪼갤 수 없다. 5) 볼 수도 소리를 들을 수도 없고, 냄새를 맡거나 맛을 볼 수도 없고, 만져서 접 촉할 수도 없기 때문에 극미라고 한다. 6) 이것은 가장 미세한 것으로 그것의 일곱 개가 모여서 하나의 미진을 이룬다. 7) 바로 이 미진이 눈과 안식이 지각 하는 것 중에 가장 미세한 것이다. 8) 안근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 째는 천안, 둘째는 전륜성왕의 눈, 셋째는 보살의 눈이다. 일곱 개의 미진이 모여서 하나의 동진을 이룬다.75) 먼저 극미는 가장 미세한 물질(색)이다. 이 “가장 미세한 물질(색)”이라는 정의는 어떠한 형태의 비물질적인 추상, 즉 무한히 쪼개어지는 형이상학적 원자와 같은 74) Potter, Karl H. (1998) Encyclopedia of Indian Philosophies : Abhidharma Buddhism to 150 A.D. Vol. 7. Delhi(India): Motilal Banarsidass, 511 - 512. 라모트에 의하면 카니쉬카 왕에 의한 결집은 서기 128 - 151년에 열린 것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비바사론』의 편집은 대략 서기 150년 전 후에 완성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비바사론』의 산스크리트본은 전하지 않으면, 659년 현장에 의 해 번역된 『아비달마대비바사론』 200권 (T27. No.1545)만이 현존한다. 75) 『阿毘達磨大毘婆沙論』: 問彼極微量復云何知。答應知極微是最細色不可斷截破壞貫穿不可取捨乘履摶 掣。非長非短。非方非圓。非正不正。非高非下。無有細分不可分析。不可覩見。不可聽聞。不可嗅甞。 不可摩觸故說極微。是最細色。此七極微成一微塵。是眼眼識所取色中最微細者。此唯三種眼見。一天 眼。二轉輪王眼。三住後有菩薩眼。七微塵成一銅塵。(T27.702a4 - 12) - 29 - 존재를 배제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 가장 미세한 물질은 더 이상 쪼개어지지 않는 물질의 최소단위이기 때문에 어떠한 변형도 가해질 수 없다. 또 한 극미는 어떠한 형태도 지니지 않는다. 니야야-바이셰시카에서 극미를 원형(圓 形)으로 정의하고,76) 일정한 크기를 암시하였던 것과는 달리 『비바사론』에서는 극미가 형태를 가지지 않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와 관련해서 두 가지 문제를 고 려해 보아야 한다. 첫째는 여기에서 형이상학적 극미의 부정 혹은 긍정에 있어 불철저한 측면이 노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설일체유부의 아비다르마철학에서는 극 미가 ‘물질(색)의’ 가장 미세한 단위이면서 동시에 어떤 형태나 크기를 지니지 않 는 것으로 주장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주장은 서로 상충하는 것으로 보 인다. 때문에 니야야-바이셰시카 뿐만 아니라 경량부에 의해서도 무한으로 분할 되어 크기를 지니지 않는 극미 개념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물 질은 형태와 크기를 지닌다’는 직관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문제는 설일체유부의 극미론에서는 형태의 가장 미세한 단위인 형색(形色)극미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질을 가장 미세한 단위까지 분석하였을 때, 가장 미세 한 기본단위로서의 물질(색)인 극미에 여전히 남아 있는 가장 궁극적인 속성 (dharma)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해 설일체유부 논사 들은 색깔과 형태 두 가지가 모두 존재한다고 주장한 반면, 경량부의 상좌 슈리 라타는 오직 색깔만이 마지막까지 속성으로 남게 되고 형태는 특성을 잃게 된다 고 보았다.77) 아비다르마 철학에서 대상세계에 대한 모든 경험적 사실들은 최종 적으로 극소귀납(mereological reduction)의 방식에 의해 극미로 수렴된다. 따라 서 대상에 대한 분석은 무한히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극미에서 멈추게 되어 무한 소급에서 벗어난다. 극미는 더 이상 분석될 부분을 가지지 않으며, 더 이상 쪼개 어질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미세한 물질(색)은 어떻게 조대한 물질을 구성하며, 어떻게 감각 76) VS 7.1.20.: nityaṃ parimaṇḍalam | VS(E) (209): Parimadala is eternal. 강고파냐야의 주석적 번역은 다음과 같다. The eternal magnitude [i.e. the maginitude of an atom] is known [according to the Vaiśeṣikas] by the special term parimaṇḍala [lit. round all along; complete round]. Gangopadhyaya (1980), 125. 77) 17 - 18세기 영국 경험론자들은 조대한 물질(gross object)에 대한 인식/경험에 주목하고 있기 때 문에, 인도불교철학과는 반대로 형태를 일차적인 속성으로 색깔을 이차적인 속성으로 판단하였다. 이 는 분석적 방식으로 존재를 규명하고자 하였던 인도고대철학과 경험된 세계의 실재성을 규명하고자 하였던 영국근대철학의 상이한 관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비다르마철 학은 이후 보다 경험세계의 실재성 문제쪽으로 이행하면서 두 철학사조의 유사성이 강화된다. - 30 - 기관에 지각될 수 있는가? 개별적인 극미는 감각지각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 미세하여 감각지각이 포착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다는 의미일수도 있고, 개별적으로는 어떤 감각지각의 대상으로도 현상하지 않는다는 의미일수도 있다. 개별적인 극미들이 감각지각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 있어서는 모든 학파들이 공 유하고 있다. 이 극미들은 7의 배수로 결합하면서 조대한 물질을 형성한다. 가장 미세한 극미가 7개 모여서 만드는 것이 미진(微塵, aṇu)이다. 이 미진부터가 감 각기관에 지각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감각지각에 지각될 수 있다는 것은 일 종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즉 미진에서부터는 눈이라는 감각기관에 의해 포착될 수 있는 특성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매우 미 세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눈에 보여지는 것은 아니다. 신적인 존재들의 눈, 즉 천안(天眼)은 미진부터 볼 수 있으며, 정도에 따라 전륜성왕의 눈, 보살의 눈에 의해 보여진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단지 얼마나 미세한 것을 볼 수 있느냐는 정도의 차이일 뿐, 본질적인 차이는 아니다. 미진에서부터 그 이상의 크기를 가진 모든 물질들은 근본적으로 눈 등의 감각기관의 지각의 대상으로서 성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2) 극미와 4대종 아비다르마철학에서 극미와 4대종의 관계와 개념적 통합과정을 살펴보기 위하 여 앞서 인용한 『비바사론』의 본문의 일부를 재고해보도록 하겠다. [문] 하나의 4대종은 단지 하나의 소조색 극미만을 만드는가? 다수를 만들 수 있는가? 만약 단지 하나만을 만든다면, 네 가지 원인에 하나의 결과가 되지 않 겠는가? 다수의 원인과 적은 수의 결과는 이치가 자연스럽지 못하다. 만약 다 수를 만들 수 있다면, 다시 말해 하나의 4대종으로 만들어진 물질이 다수의 극 미를 가진다면, 어찌하여 서로 구유인이 아니겠는가? .... [답]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하나의 4대종은 단지 하나의 조색극미 를 만들 수 있다.78) 4대종이 함께 하나의 소조색을 만든다고 하면 다수의 원인이 하나의 결과만을 산 출한다는 자연스럽지 못한 설명에 도달한다. 반면에 다수의 원인이 다수의 결과 78) 『阿毘達磨大毘婆沙論』: 問一四大種為但造一造色極微。為能造多。若但造一。如何不成因四果一。因 多果少理不應然。若能造多。則一四大種所造色有多極微。云何展轉非俱有因。對法者說。有對造色展轉 相望無俱有因。許則便違對法宗義。答應作是說。一四大種但能造一造色極微. (T27.663c7 - 13) - 31 - 를 산출한다면? 본문에서 구유인(俱有因)이라는 설명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다. 추 론하자면 하나의 4대종이 다수의 소조색을 만든다면 그것은 4대종 각각이 처음 조건에서 서로서로 영향을 주어 아마도 네 개의 소조색이 만들어진다는 의미로 보인다. 다시 말해, 개별적으로 흩어져 있는 각각의 대종이 하나의 덩어리로 모이 면 서로 서로가 원인이 되어서 다수의 소조색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79) 그러나 비바사사는 4대종은 오직 하나의 소조색을 만들 뿐이라고 단언한다. 네 가지의 대종이 함께 모여서 오직 하나의 소조색, 즉 색, 향, 미, 촉 등의 어떤 감각대상 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 명제에도 난점은 존재한다. 어떻게 4대종이 모여서 상이한 소조색을 만들어내는가? 그리고 소조색이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실 재하지 않으며 소멸할 것이 아닌가? 『비바사론』에서는 이 문제를 1) 대종 숫자의 증감과 2) 대종의 세력의 강약으 로 설명하는 방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대종의 숫자가 증감함에 따라 소조색의 성질을 설명하는 방식은 예를 들어 견고한 물질에는 지(地)가 많고, 수, 화, 풍이 적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4대종이 항상 함께 집합을 이룬다 는 원칙에 위배된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지(地)의 숫자가 많다면, 수, 화, 풍과 함께 한 덩어리를 이루는 지(地)를 제외하고 나머지 지(地)들은 홀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증감이 없다면, 돌이나 물 등의 성질의 차이를 설명하기 어 렵다. 이런 지적에 대해 비바사사는 4대종이 함께 한다는 것은 네 가지 대종이 하나씩 집합을 이룬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면서, 숫자의 증 감에 의한 성질의 차이를 지지한다.80) 그리고 이와 달리 대종의 세력의 강약으로 사물의 성질을 설명하는 어떤 이의 설명방식도 제시된다.81) 사물의 성질이 다른 79) 이 해석은 흩어져 있던 네 개의 원소들(x, y, z, w)이 한 덩어리로 모이면, 하나의 원소 x가 나머지 원소들을 원인으로 해서 소조색 X가 되며, 나머지도 그렇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흩어져 있 을 때의 네 원소들은 모이면 다음 순간 바로 소조색의 덩어리(X, Y, Z, W)로 변화한다. 이 주장의 문 제점은 각각의 소조색, 이를테면 색, 향, 미, 촉은 개별성을 상실하고 모두 함께 존재해야 한다는 점 이다. 80) 『阿毘達磨大毘婆沙論』: 問四大種體有增減不。設爾何失 二俱有過。若有增減寧不相離。所以者何。若 堅物中地極微多。水火風少。地微隨與水等量雜餘則相離。乃至動物說亦如是。若無增減水石等物。不應 得成堅軟等異。答應言大種體有增減。問若爾云何名不相離。答雖有增減而不相離。以展轉相資同作所作 故。如堅物中雖地微多水火風少。然離水等地微不能作所作事。乃至動物說亦如是。如多村邑共營一事。 雖有人數多少不同。而互相須不可相離。問心心所體亦有增減。如何乃言則不如是。謂心所法於三界。三 性。有漏。無漏。諸心聚中有多有少。答由事等故不名增減。若一心中有二想一受等可名增減。然一心中 一想一受等故異大種. (T27.682c23 - 683a9) 81) 어떤 이의 의견은 '대종의 자체[의 숫자에는] 증감이 없다'는 것이다. 문: 암석 등은 어떻게 견고한 것과 연한 것 등이 다른가? - 32 - 것은 대종의 숫자가 증감하는 것에 따른 것이 아니라, 각각의 사대종이 서로 다 른 세력을 지님에 따라 다른 성질을 지닌 물질이 만들어진다. 바위와 같은 견고 한 물질에는 4대종이 모두 함께 존재하지만, 지(地)의 요소가 매우 강성하기 때문 에 견고한 성질을 지니는 것이다. 여기서 사대종은 어떤 성질의 기본단위가 아니 고, 다양한 작용력을 가지는 성질 자체와 같은 것으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 사대 종은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것으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4대종을 질적인 차원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비다르마철학에서 발견되는 하나의 해석적 전통이기도 하다. 문: 지, 수, 화, 풍은 어떤 성질과 작용을 가지고 있는가? 답: 견고함이 땅의 성질이고, 지지(支持)하는 것이 그 작용이다. 습기가 물의 성질이고, 포섭하는 것이 그 작용이다. 온난함이 불의 성질이고, 열기가 그 작 용이다. 움직임이 바람의 성질이고, 늘이는 것이 그 작용이다.82) 4대종은 만물을 구성하는 질료적 기반으로 설명하던 초기의 형태를 벗어나 견고, 습기, 온난, 움직임 등으로 속성화한다. 이것은 초기 대종이 여러 가지 속성을 가 진 질료적 실체로 여겨지던 것에서 역전이 발생한 것이다. 어떤 실체가 모여서 더 큰 사물을 구성한다는 설명은 이제 기본적인 속성들이 함께 작용하여 하나의 소조색을 산출한다는 해석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런 설명방식은 초기불교의 『니 까야』와 『아함경』 전승에서 발견하였던 대상세계의 무상(無常)성과 무아(無我)의 관점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이후 극미론의 정립과정에서 보다 중요한 철학적 쟁 점으로 부각하게 된다. 4대종과 소조색을 극미개념과 통합하는 과정에서 개별적 답: 사대종의 세력이 강하고 약함이 있기 때문이다. 견고한 물체 가운데 사대극미의 본체의 숫자는 비록 같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세력에서는 지극미가 강한 같다. 나아가 동물도 역시 이와 같이 설명해야 한 다. 똑 같은 양의 소금과 보릿가루를 혀 위에 두면 소금은 식을 강하게 발생하고 보릿가루는 식을 약 하게 발생시킨다. 이것(사대)도 역시 그러하다. 또 물과 초가 균등하게 화합하여 설식이 발생하는 것 과 같으며, 바늘끝, 새깃털이 신식을 발생시키는 것과 같다. 『阿毘達磨大毘婆沙論』: 有說。大種體無 增減。問石等云何堅軟等異。答大種勢力有增微故。如堅物中四大極微。體數雖等而其勢力地極微增。乃 至動物說亦如是。如一兩鹽和一兩麨置於舌上。鹽生識猛麨生識微。此亦如是。水酢均和生舌識喻。針鋒 鳥翮生身識喻. (T27.683a9 - 15) 82) 『阿毘達磨大毘婆沙論』: 問地水火風何相何業。答堅是地相。持是地業。濕是水相。攝是水業。煖是火 相。熟是火業。動是風相。長是風業。이어서 추가적인 설명이 계속된다. 問地是堅相亦是色相。廣說乃 至。風是動相亦是色相。如何一法有二相耶。答有亦無失。由此理趣於一法中。可得施設有多相故。如一 有漏法。即有如病如癰等。廣說乃至。百四十句諸過患相而無有失。此亦如是。有餘師言。相有二種。一 自相。二共相。堅濕煖動相是自相。色相是共相。如是二相互不相違。於一法立亦無有過。(T27.663b8 - 18) - 33 - 인 4대종을 물질의 가장 미세한 기본단위로 본다면, 가장 미세한 물질은 그 특성 을 유지하면서 보다 조대한 물질을 구성하게 되어 존재의 연속성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반면에 소조색을 가장 미세한 물질의 기본단위로 본다면, 속성화한 4대종 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새롭게 등장한다. 또한 개별적인 4대종과 그것이 모여서 만들어진 소조색 사이에 존재론적 불연속성의 문제도 발 생하게 된다. 3) 현색극미와 형색극미의 존재 물질적 대상의 형태와 색깔 가운데 무엇을 보다 궁극적인 요소로 인정할 것인 가 하는 문제는 대상과 인식에 관한 철학적 주제에 항상 함께 하였던 질문이다. 아비다르마철학의 제학파들도 학파철학의 관점에 따라 상이한 해석을 제시하였다. 『비바사론』이 전하는 아비다르마철학의 정설은 다음과 같다. [문] 하나의 [개별적인] 청색극미는 존재하는가 아닌가? [답] 존재한다. 단지 안식에 의해 파악되지 않을 뿐이다. 만약 하나의 극미가 청색이 아니라면, 여러 극미가 취집한 것도 역시 청색이 아니어야 할 것이다. 황색 등도 마찬가지이다. [문] 길이 등의 형태극미는 존재하는가 아닌가? [답] 존재한다. 단지 안식에 의해 파악되지 않을 뿐이다. 만약 하나의 극미에 길이 등의 형태가 없다면, 여러 극미가 취집한 것도 역시 길이 등의 형태가 없 어야 할 것이다.83) 설일체유부 철학에서는 물질을 궁극으로 분석하였을 때 남게 되는 극미에 현색 (顯色)극미와 형색(形色)극미의 두 종류가 있다고 주장한다. 현색극미는 청(靑), 황 (黃), 적(赤), 백(白)의 기본색을 포함하며, 형색극미는 원(圓), 사각(四角), 장(長), 단(短) 등의 형태와 크기를 포함한다. 개별적인 단위에서 지각을 넘어서 있는 극 미들에 이같은 현색과 형색의 두 종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추론 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그 추론은 현재의 지각 혹은 경험에 근거한다. 청색극미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만일(if) 청색극미가 없다면(-P), 극미의 취집도 청색이 아닐 것이다(-Q)”는 논리식으로 설명된다. 이 논리식은 간단히 “만일(if) 청색인 극미의 83) 『阿毘達磨大毘婆沙論』: 問為有一青極微不。答有。但非眼識所取。若一極微非青者。眾微聚集亦應非 青。黃等亦爾。問為有長等形極微不。答有但非眼識所取。若一極微非長等形者。眾微聚集亦應非長等 形。(T27.64a25 - b1) - 34 - 취집이 관찰된다면(Q) 청색극미가 존재해야 한다(P)"는 긍정식으로 치환될 수 있 다. 설일체유부에서 개별적인 극미에 현색과 형색의 두 종류의 극미가 존재해야 한다는 주장은 현재의 경험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으며, 개별적인 극미와 극미의 적집 사이에는 속성의 연속성이 유지된다는 전제를 함축하고 있다. 이는 설일체 유부의 극미설을 이해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철학적 관점으로 이후의 논쟁에서 반 복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처럼 현색극미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은 앞서 개별적인 극미는 형태 와 크기를 지니지 않는다는 전제와 모순되는 것으로 보인다. 현색극미는 파랑색 의 물질을 계속해서 분할하여도 여전히 파랑은 남게 되며, 최종적으로 파랑의 가 장 미세한 단위에 도달할 것이라고 말한다. 현색극미는 같은 방식으로 물질의 형 태가 극미단위에까지 소급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물질의 반복적인 분석을 통해 기존의 형태가 변형되고, 소멸하는 과정을 관찰하면 최종적으로 극미에 어 떤 형태적 특성들이 남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직관에 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색극미의 옹호는 이후 중현(衆賢)을 비롯한 설일체유부계통의 논사들에게 일관 된 경향이기 때문에 어떤 철학적 착각이나 오류에 의한 일탈적 현상으로 볼 수 없다. 오히려 형태조차도 극미 차원에서 실재하는 것으로 상정하는 설일체유부의 존재론은 모든 물질(색)의 실재성을 극미차원에서 담보하기 위한 핵심적인 장치이 다. 항아리가 ‘항아리’로 인식되기 이전에도 어떠한 물질의 덩어리에는 둥근 형태 와 크기 등이 있는데, 그런 형태와 크기 등이 실재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은 그것 의 실재성이 극미차원에서 담보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 극미의 정의와 현색극미의 존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현색극미와 형색 극미를 포함하여 설일체유부의 실재개념을 이해하는데 있어 윌리엄스(D. C. Williams, 1953)의 트롭(trope) 개념은 매우 유용한 것으로 판단된다.84) 형색극미 84) Williams, D. C. (1953) “On the Elements of Being I,” in Mellor and Oliver (repr. 1997), 112 –124. First published 1953, The Review of Metaphysics, 7(1): 3–18. 구체적인 특수(concrete particular)만이 실재한다고 보는 유명론적 입장과 추상적 보편(abstract universal)이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실재론의 중간지대에서 설절된 존재개념이다. 트롭(trope)은 특수(particular)이긴 하지만 구체적(concrete)이지 않으며, 추상적(abstract)이긴 하지만 보편(universal)은 아닌 존재이며, 또 존 재하는 모든 것은 트롭(tropes)일 뿐이라는 것이 이론의 핵심이다. 바이셰시카는 명시적으로 보편 (universal, samānya)의 실재성을 주장하기 때문에 이 이론의 적용이 불가능하겠지만, 설일체유부는 근본적으로 보편의 실재성을 부정하면서도 실재론적 입장을 견지하는 철학적 경향으로 인해 이 트롭 이론을 통해 새롭게 해석될 여지가 충분히 있다. 설일체유부의 존재론과 트롭이론의 문제는 이 논문 의 주제를 벗어나기 때문에, 트롭이론에 따른 유부실재론의 해석 가능성은 다른 기회에 탐색해보도록 하겠다. 설일체유부의 실재개념에 대해 트롭(trope)개념의 적용 가능성을 언급해 준 교토대의 데구치 야스오(出口康夫)교수에게 감사드린다. - 35 - 는 원, 사각, 장, 단 등의 특수한(particular) 형태를 지니지만, 구체적(concrete) 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들이 원(圓) 등의 추상적(abstract) 개념화가 가 능하지만 그것이 어떤 보편적(universal) 실재성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현색과 형색 두 종류의 극미는 어떤 구체적인 형태와 크기를 지니지 않는 극미개 념과 충돌하지 않으면서 공존할 수 있게 된다. 4) 하나와 다수 불교철학에서는 일체의 존재를 포괄하는 범주로 오온(五蘊), 12처(處), 18계 (界)의 세 가지 개념을 상정한다. 오온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항아리와 같은 어 떤 대상은 물질적 덩어리인 색온(色蘊)과 그것의 감각적 수용(受), 개념(想), 판단 작용(行), 의식(識)의 네 가지 의식적 영역으로 분석된다. 여기서 물질적 영역에 한정되는 색온(色蘊)은 다수의 극미로 구성된 것이다. 이렇게 다수로 구성된 물질 의 덩어리는 감각지각의 대상으로 ‘항아리’라는 개념적 존재를 구성하는 오온의 물질적 토대이다. 사물에 대한 인식을 신뢰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이 물질적 덩 어리가 극미의 실재성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궁극적이고 실재의 측면에 서 분석한다면, 하나의 극미라는 물질(色蘊)이 감각적 수용, 개념, 판단작용, 그리 고 의식의 계기를 포괄하여 ‘극미’라는 인식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인 경험의 차원에서는 다수의 극미들이 집적한 사물이 다섯 계기를 포괄하여 ‘항아 리’라는 인식에 도달한다. 이 때 항아리는 가설적인 덩어리로서 그것의 실재성은 개별극미들의 실재성에 토대를 두고 있다. 아비다르마 논사들은 말한다. "만약 가설적인 온의 관점에서 본다면,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 것이다. "하나의 극미는 하나의 계, 하나의 처, 하나의 온의 작은 부분이다." 만약 가설적인 온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면, 마땅 히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할 것이다. "하나의 극미는 하나의 계, 하나의 처, 하나 의 온이다. 어떤 사람이 곡식 무더기에서 하나의 곡식 알갱이를 들었을 때, 다 른 사람이 너는 무엇을 들고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는 만약 곡식 무더기의 관점에서 본다면, 나는 곡식 무더기에서 하나의 알갱이를 집었다고 대답할 것 이고, 만약 곡식 무더기의 관점에서 보지 않는다면, '나는 지금 곡식을 집었다' 고 대답할 것이다.85) 85) 『阿毘達磨大毘婆沙論』: 阿毘達磨諸論師言。若觀假蘊應作是說。一極微是一界一處一蘊少分。若不觀 假蘊應作是說。一極微是一界一處一蘊。如人於穀聚上取一粒穀。他人問言汝何所取。彼人若觀穀聚應作 是答。我於穀聚取一粒穀。若不觀穀聚應作是答。我今聚穀。(T27.384a18 - 24) - 36 - 설일체유부의 관점에서는 이 가설적인 온(蘊)도 실유(實有)하는 것으로 인정한다 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항아리나 곡물무더기는 토끼뿔이나 허공의 꽃과 같 은 비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항아리’나 ‘곡물무더기’로 개념화하기 전에 이미 어 떤 물질 덩어리인 항아리와 곡물덩어리로 존재하며, 이들의 실유성은 개별적인 극미들의 실재성에 토대를 두고 있다. 다시 말해 물질적 존재들은 극미의 실재성 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에 실재성의 측면에서 연속성을 지닌다. 개별적인 극미 (낱알)는 궁극적인 차원에서 실재하는 것이며, 극미들의 집적(곡물더미)도 개별적 인 극미들의 실재성에 근거하여 그것의 실재성을 확보할 수 있다. 설일체유부가 실재성을 두 층위로 구분하는 독특한 해석의 방식은 극미와 자 상(自相)의 개념에 대한 층위적 해석체계로 확립된다. 아비다르마철학에서 인식의 대상은 자신만의 고유한 속성(particular property)에 해당하는 자상(自相, svalakṣana)과 보편적 속성(universal property)에 상응하는 공상(共相, sāmānyalakṣana)을 지니는 것으로 본다. 공상은 다수의 사태들에서 공통적인 속성을 파악하는 것으로 분별에 의한 관념적 구성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지각의 대상이 아니며 사태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감각 기관(五識身)은 자상만을 인식대상으로 하여 지각을 발생시킨다. 그런데 만약 7개 의 극미가 모여서 비로서 청색 등 지각의 대상이 된다면, 개별극미들이 공통적으 로 가지고 있는 청색이라는 성질, 즉 공상(共相)을 지각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 니냐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문] 어떻게 신식(身識)이 공상(共相)인 대상을 인식조건으로 하는가? 오식신은 자상(自相)을 인식조건으로 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답] 자상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사자상(事自相)이고, 둘째는 처자상(處 自相)이다. 만약 사자상에 의지하여 설한다면, 오식신도 공상을 인식조건으로 한다[고 하고], 처자상에 의지하여 설한다면, 오식은 오직 자상만을 인식조건으 로 한다[고 하기] 때문에, 서로 모순이 없다.86) 『비바사론』의 논사는 여기서 두 층위의 자상개념에 근거한 관점주의적 대답을 제 시한다. 먼저 궁극적 차원에서 사태 자체의 고유한 성질에 근거하여 본다면, 우리 의 감각기관에 의해 포착되는 인식은 공상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 86) 『阿毘達磨大毘婆沙論』: 問云何身識緣共相境。以五識身緣自相故。答自相有二種。一事自相。二處自 相。若依事自相說者。五識身亦緣共相。若依處自相說。則五識唯緣自相故不相違。(T27.65a12 - 16) - 37 - 다. 그러나 우리의 감각기관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 식의 다섯 가지 인식은 오직 그에 상응하는 색깔, 소리, 향기, 맛, 감촉이라는 다 섯 가지 자상을 대상으로 하여 인식을 발생시킨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사태자체 와 감각경험, 진실과 세속, 존재와 인식의 차원 등을 이원적으로 구분하면서도 그 양자의 연속성을 확보하려는 설일체유부의 일관된 철학적 입장이다. 대상 세계를 실재 자체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신체적 감각기관은 다수의 대상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공통의 이미지를 지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감각경험의 차원에 서 볼 때, 우리의 감각지각은 상응하는 대상의 자상을 인식하기 때문에 존재와 인식이 교차하는 지점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상이한 관점의 해석을 교차시키는 이 지점은 바로 경량부나 유식학파의 공격을 받는 약점이 된다.87) 앞의 두 인용문에서 논의된 주제가 두 층위의 극미설로 정리된 형태가 법구의 『잡아비담심론』에서 발견된다. [답] 2종의 극미, [즉] 사극미와 취극미가 있다. 사극미는 [예를 들어] 안근극미 [와 같은 것을] 말하는데, 바로 안근을 다른 극미들로 미분하여 모두 자체의 사태를 나타낸 것이다. 사극미이기 때문에 아비담에서 설하기를 안근은 1계, 1 입처, 1온을 포섭한다고 설하였다. 취극미는 다수의 사극미가 모인 것을 여기 에서 취극미라고 설한 것이다. 자상에 머무르기 때문에 다르마의 성질에 혼란 을 일으키지 않는다. 88) 여기서 2종의 극미는 전혀 다른 종류의 극미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극미의 두 가지 존재양식과 그것들의 실재성에 관한 것이다. 사극미는 사태 자체의 특수성 을 지닌 개별적인 극미를 의미하고, 취극미들는 그것들이 특수하게 모여있는 존 재양태를 말한다. 따라서 여기서 취극미는 불특정한 다수의 극미들이 모인 극미 덩어리 일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 사자상(事自相)과 처자상(處自相)의 본 문에서 감각기관의 관점에서 다섯 가지 감각지각의 대상을 자상으로 보았듯이, 이곳에서 취극미는 처자상에 상응하는 것으로 읽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궁극적 차원에서 하나의 극미가 1계, 1입처, 1온을 포섭하지만, 실질적인 경험적 차원에 87) 비유자-경량부와 유식학파의 비판적 관점에 대해서는 이하 극미와 극미의 결합을 다루는 부분에서 상세히 검토하도록 하겠다. (2장 5절, 6절; 3장 2절 3, 9, 11 등) 88) 『雜阿毘曇心論』 「行品 2」: 答二種極微。事極微。聚極微。事極微者。謂眼根極微。即眼根微餘極微 皆說自事。以事極微故。阿毘曇說。眼根一界一入一陰攝。聚極微者。眾多事此中說聚極微。住自相故法 相不雜亂。(T28, 882b16 - 20) - 38 - 서 색깔 등의 지각은 취집한 극미를 대상으로 이루어진다. 『아비담심론』에서도 극미의 두 층위와 그것이 지닌 철학적 함의는 충분히 고찰되지 못하고 있지만, 이후 세친의 『구사론』과 중현의 『순정리론』에서 전면적인 논쟁이 전개된다. 지금 이곳의 『아비담심론』단계에서는 개별적인 극미의 실재성에 주목하여 사극미의 규 명에 주목하고 취극미를 부수적으로 간주한다. 반면 중현의 『순정리론』은 취극미 를 실극미(實極微)로 사극미를 가극미(假極微)로 명칭하여, 경험적 대상의 실재성 을 보다 강조하는 방향으로 관점이 이동한다. 5) 극미의 접촉 설일체유부의 정의에 따르면, 극미는 형태와 크기를 가지지 않으며 감각지각을 초월해 있지만, 다수의 극미가 모여서 조대한 물질을 구성한다. 그렇다면 형태와 크기를 가지지 않는 극미들이 다수가 모여서 크기를 가진 사물을 구성할 때, 개 별적인 극미들은 어떻게 하나의 사물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극 미들이 서로를 붙잡아서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 접촉에 의해 결합해야 할 것이라는 의문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크기를 갖지 않는, 다시 말해 크기가 0 (零)으로 수렴하는 극미가 접촉한다면 그것은 같은 곳에 겹쳐져서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아니면 극미가 접촉하기 위하여 부분을 가져야한다는 문제가 발생한 다. 반대로 접촉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충격에 모두 흩어질 것이며, 어떤 물체와 부딪혀도 소리가 나지 않을 것이다.89) 이에 대한 『비바사론』의 정설은 다음과 같 다. [답] 마땅히 다음과 같이 설해야 한다. 극미는 서로 접촉하지 않는다. 만약 접 촉한다면 마땅히 전부 또는 부분[에 접촉]하여야 할 것이다. 전부 접촉할 경우 에는 하나의 본체가 되는 과실이 있게 된다. 부분이 접촉할 경우에는 부분이 있다는 과실이 발생한다. 그러나 모든 극미는 그보다 더 미세한 부분이 없다. 『비바사론』의 대답은 극미는 접촉하지 않기 때문에 접촉에서 제기되는 딜레마에 89) 이것은 극미의 접촉 문제가 가진 딜레마를 지적하는 반론자의 문제제기이다. 『阿毘達磨大毘婆沙論』: 問諸極微互相觸不。設爾何失。二俱有過。若相觸者寧不成一。或成有分。若不 相觸擊時應散或應無聲。(T27.683c26 - 28) 온갖 극미는 서로 접촉하는가 아닌가? 그렇다면 무슨 잘못이 있는가? 두 가지 모두 오류가 있다. 만 약 서로 접촉한다면 어찌하여 하나가 되지 않는가? 또는 부분이 있게 될 것이다. 만약 서로 접촉하지 않는다면, 두드리면 흩어지고 또는 소리가 나지 않아야 할 것이다. - 39 - 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극미는 접촉하지 않으며, 더 이상 미세한 부분을 가지 지 않는 물질의 최소단위이다. 그렇다면 극미들은 어떻게 결합한 것과 같은 현상 을 나타내고 또 두드려도 흩어지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풍계(風界)가 개별적인 극미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풍계의 힘은 영 원한 것은 아니며, 시간이 흐르면 흩어질 수 있다.90) 『비바사론』 73권에서는 이 접촉의 문제가 극미의 촉처(觸處)에 대한 질문으로 제기되었다. 반론자의 질문은 극미가 접촉을 특징으로 하는 촉처를 가진다면, 그 것은 ‘접촉할 수 있기 때문’이거나 ‘본체가 접촉하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접촉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촉처라고 이름해야 할 것인데, 이 세 가지 모두 잘못된 것이 라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설일체유부에게 있어 극미는 접촉하지 않기 때문에 접 촉의 가능성이나 본체가 접촉한다거나 접촉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모순을 발생시 키기 때문이다.91) 이에 대하여 비바사(vibhāṣa)의 논사는 접촉할 능력이 있기 때 문에 촉처라고 한다는 입장을 지지한다. 그러나 문제는 개별극미들은 접촉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촉처가 접촉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모순적 상황이다. 비바사 사는 이 문제를 승의와 세속의 문제로 비껴간다. 촉처가 접촉한다고 말하는 것은 세속적인 차원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 승의(勝義)적 차원에서는 실제로 접촉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해명은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대답으로 보이며, 이 후에 중현은 보다 내용적으로 상세하고 논리적으로 납득할 만한 대답을 제공한 다. 접촉에 관련된 『비바사론』의 정설은 당시에도 만족스러운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던 듯하다. 『비바사론』에는 존자 세우(世友)와 대덕(大德), 무명의 유여사(有 餘師)가 주장한 이설(異說)을 소개하고 있다. 세우(世友)존자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극미는 서로 접촉하는가 아닌가? 답: 90) 『阿毘達磨大毘婆沙論』: 問聚色相擊寧不散耶。答風界攝持故令不散。問豈不風界能飄散耶。答有能飄 散。如壞劫時。有能攝持。如成劫時。(T27.684a2 - 4) [문] 취집한 물질(색)이 서로 부딪힐 때 어찌하여 흩어지지 않는가? [답] 풍계가 포섭하여 유지하기 때문 에 흩어지지 않는다. [문] 어찌 풍계가 떨어져 흩어지게 할 수 없는가? [답] 떨어져 흩어지게 할 수 있다. [세계가 무너지는] 괴겁의 때와 같이. 또 포섭하여 유지할 수 있다. [세계가 유지되는] 성겁의 때와 같이. 91) 『阿毘達磨大毘婆沙論』: 問何故名觸處。為是可觸故名觸處。為體是觸故名觸處。為觸所緣故名觸處。 設爾何失。三皆有過。所以者何。若是可觸故名觸處。極微展轉既不相觸。如何觸處是可觸耶。若體是觸 故名觸處。大種造色非觸自性。如何觸處體是觸耶。若觸所緣故名觸處。此亦是餘心心所境。如何但說觸 所緣耶。答應作是說此是可觸故名觸處。(T27.380a1 - 8) - 40 - 서로 접촉하지 않는다. 만약 서로 접촉한다면, [극미는] 마땅히 제2찰나까지 머 물러야 할 것이다. 대덕(大德)은 설하여 말하였다. 일체의 극미는 실제로는 접촉하지 않지만, 단지 무간이기 때문에 접촉한다는 명칭을 가립한 것이다.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극미는 서로 실제로 접촉하지 않으며, 무간인 것도 아 니다. 단지 화합하여 머무르는데, 그것이 서로 가까이 있는 것을 가립하여 접 촉이라고 명하는 것이다.92) 세우 존자의 입장은 시간성을 개입하여 극미의 접촉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관점의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설일체유부의 정설은 일체의 대상세계는 현재찰나 에 함께 발생하기 때문에 시간적 지체현상이 발생하지 않는다. 즉 접촉은 발생의 찰나에 동시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우의 관점에서는 극미가 발생하고 접촉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그 다음찰나까지 지속해야 한다는 문제가 발 생한다는 것이다. 찰나생멸이라는 불교철학의 대전제에 따르면 2찰나의 지속을 통한 접촉은 불가능하다는 비판이다. 세우의 이런 비판은 극미접촉의 부정이라는 측면보다 제2찰나로의 흐름을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매 순간 찰나생멸하는 존재들의 연속성과 찰나적으로 소멸하는 대상에 대한 지각의 가능성에 대한 경량부 상좌 슈리라타나 불교인식논리학의 철학적 논변의 출발이 이 지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대덕(大德)의 주장은 극미는 실제로는 접촉하 지 않지만, 그것들이 중간에 어떤 틈도 없는 무간(無間)이기 때문에 접촉한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대덕이 설명하는 무간(無間)이 시간적 아니면 공간적 무 간 중에 어느 것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 개괄하면, 설일체유부는 공간적 측 면에서 존재들의 관계를 고찰하는 경향이 강한 반면에 비유자-경량부는 시간적 연속성의 문제에 보다 관심을 기울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어떤 이의 주장은 단지 극미들이 화합하여 가까이 머무는 것을 ‘접촉’이라고 가설 적으로 말한다는 주장이다. ‘어떤 이’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그는 극미가 접촉 하지 않는다고 보았으며, 접촉이란 단지 가설적으로 주어진 명칭에 지나지 않는 다고 주장하였다는 사실이다. 현장역의 본문에 등장하는 극미들의 ‘화합(和合)’은 그 원어(原語)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주장을 하는 이에 대한 어떤 학파적 정보를 주지는 못한다. 92) 『阿毘達磨大毘婆沙論』: 尊者世友作如是說。極微展轉互相觸不。答互不相觸。若相觸者即應住至第二 剎那。大德說曰。一切極微實不相觸。但由無間假立觸名。有作是說。極微展轉實不相觸亦非無間。但和 合住彼此相近假立觸名。(T27.380a18 - 23) - 41 - 『비바사론』 132권에 극미의 접촉에 관한 두 가지 이설(異說)이 다시 거론된다. 이곳에서 존자 세우의 설은 앞의 73권의 인용과 동일한 반면, 대덕은 주장은 약 간 다르게 소개되고 있다. 대덕께서 설하여 말하였다. [극미는] 실제에 있어서는 접촉하지 않는다. 단지 합집(合集)에 의하여 서로 간에 간격이 없이 생겨날 때에 [그것을] 세속제에 따 라 서로 접촉한다고 가설적으로 이름한 것이다.93) 이 대덕의 주장은 극미의 접촉을 부정하는 관점에서 앞의 73권의 핵심을 요약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본문에서 추가된 부분은 ‘합집(合集)에 의하여.. 생겨날 때’ 와 ‘세속제에 따라 서로 접촉한다고 가설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부분은 73 권에서 ‘어떤 이’의 주장으로 소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73권에서는 ‘합집(合集)’ 대신 ‘화합(和合)’이 사용되고 있다. 이런 용어의 채택은 원문에서 용어의 차이와 어떤 내용적 함축이 문제가 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현장의 번역에서 두 용어가 일관성이 없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해석상의 어려 움을 야기하였다. 이곳에서는 『비바사론』 단계에서 이미 ‘화합’과 ‘화집’을 구분할 만한 어떤 개념의 분화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대신하 고, 이후 4장 5절의 “극미의 결합방식: 결합, 취집, 화합, 화집’에서 상세하게 논 구하도록 하겠다. 6) 대상과 인식: 연속과 불연속 『비바사론』 44권과 108권에는 지혜(智)와 인식(識)과 대상세계(境)에 관한 흥 미로운 논의가 포함되어 있다. 논란은 지혜와 대상과 인식에 대해 혼란을 불식시 키고, 올바른 개념적 정의를 확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진다. 44권의 본문에는 세 가지 유형의 이설(異說)들이 소개되고 있다.94) 첫째는 비유자(譬喩者)로 알려 93) 『阿毘達磨大毘婆沙論』: 大德說言。實不相觸。但於合集無間生中。隨世俗諦假名相觸。(T27.684a9 - 11) 94) 『阿毘達磨大毘婆沙論』: 問何故作此論。答為止他宗顯正義故。謂或有執。有緣無智如譬喻者。彼作是 說。若緣幻事健達縛城及旋火輪鹿愛等智皆緣無境。為遮彼執顯一切智皆緣有境。或復有執。有智不緣境 有境非智緣。為遮彼執顯一切智皆能緣境。顯一切境皆智所緣。復次為顯外道有顛倒故境智相違。及顯內 道無顛倒故境智相順。復次有說。智多非境以一境上有多智故。今欲顯示境多非智由此因緣故作斯論。 (T27.228b20 - c1) [문] 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하는가? [답] 다른 종(宗)을 중지시키고 바른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니 혹 어떤 이는 “없는 것(無)을 반연하는 지 - 42 - 진 이들로 “일체의 지(智)는 모두 존재하지 않는 대상(無境)을 인식대상으로 한 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환영(幻影)이나 신기루, 혹은 횃불을 돌릴 때 그것이 마 치 불바퀴(旋火輪)처럼 보이는 것 등과 같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대상으 로 하여 지(智)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의 대론자는 지(智)와 대상세계가 서로 상응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어떤 지(智)는 인식대상을 토대로 해서 발생하 지 않는 경우도 있고, 어떤 대상들은 지(智)의 토대로서 기능하지 않기 때문에 지 (智)에 포착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세 번째 대론자는 지(智)가 대상세계보다 양 적으로 더 많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 다수의 지(智)가 발 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장의 번역에 의하는 한, 이 세 명의 대론자는 지(智)를 인식과 같은 개념으 로 사용하고 있으며, 그 인식과 대상 사이에 직접적인 대응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다는 점에 대체로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비유자에 따르면 일체의 인식은 외부대상(境)을 직접적인 인식대상으로 하지 않으며, 환상 이나 착각에 의한 불바퀴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비유자의 유 명한 무경각(無境覺)설인데,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면, ‘인식은 대상을 가지지 않는 다(識無境)’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무경(無境), 즉 ‘대상을 가지지 않 는다’는 외부대상세계의 비존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의 대론자는 인식과 대상 사이에 필연적 상관관계가 없기 때문에 인식과 대상은 일정부분만을 교집합으로 가지고 나머지 부분들은 서로 상응하지 않는 별개의 영역으로 남겨져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인식은 대상세계를 인식대 혜가 있다”고 집착하는데 마치 비유자(譬喩者)와 같다. 그는 “만일 요술로 된 일(幻事』이나 건달바성 (建達縛城』이나 횃불을 돌려 생기는 불바퀴(旋火輪)나 녹애(鹿愛:아지랑이) 등을 반연한다면 그 지혜 는 모두가 없는 경계(無境)를 반연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 집착을 차단하면서 온갖 지혜는 모 두가 있는 경계(有境)를 반연한다는 것을 나타내[1165 / 1338]기 위해서이다. 혹 어떤 이는 “지혜가 경계를 반연하지 않은 것이 있고 경계가 지혜의 연(緣)이 아닌 것도 있다”라고 집착한다. 그런 집착을 차단하면서 온갖 지혜는 모두가 경계를 반연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온갖 경계는 모두가 지혜의 소연 (所緣)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또 외도(外道)는 뒤바뀜(顚倒)이 있기 때문에 경계와 지혜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며 내도(內道)는 뒤바뀜이 없기 때문에 경계와 지혜가 서로 수순한다는 것 을 드러낸다. 또 어떤 이는 “지혜가 많고 경계는 그렇지 않으니 하나의 경계(一境) 위에는 많은 지혜 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는 경계가 많고 지혜는 많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려고 한 다. 이런 인연을 말미암아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아비다르마대비바사론』(한글대장경), 1164 - 1165. Cf. 『阿毘達磨大毘婆沙論』: 問何故作此論。答為止他宗顯正理故。謂或有執。有諸覺慧無所緣境。如取幻事 健達縛城。鏡像水月影光鹿愛旋火輪等。種種覺慧皆無實境。為遮彼執顯諸覺慧皆實有境。或復有執。有 能知智不知所知。有所知境非智所知。為遮彼執顯無能知智不知所知。及無所知境非智所知。由此因緣故 作斯論。(T27.558a7 - 14) - 43 - 상으로 해서 발생하는 경우도 있지만, 비유자의 주장과 같이 대상을 가지지 않고 발생하는 경우도 있으며, 대상 가운데에도 인식되지 않고 남겨진 부분들이 있다 는 것이다. 세 번째 대론자의 주장은 대상은 하나의 방식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 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하나의 대상에 대해 다수의 인식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주 장이다. 이는 인식된 지식이 어느 하나의 진리로 확정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다원성을 암시하는 입장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주장들은 경험된 세계의 관찰을 통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설일체유부의 논사들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한 『비바사론』의 논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인식은 대상세계를 인식대상으로 한다는 것과 온갖 대상은 모두 인식대 상(所緣)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외도(外道)[를 따르는 자들]은 [사유가] 거꾸로 뒤집어졌기(顚倒) 때문에 대상(境)과 인식(智)이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고], 내 도(內道)[를 따르는 자들]은 전도(顚倒)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상과 인식이 서로 상응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 논의를 전개한다].95) 설일체유부의 확고한 입장은 인식과 대상, 대상과 인식은 직접적으로 대응하며, 양자의 외연은 일치한다는 것이다. 대상이면서 인식되지 않는 것은 없고, 인식되 었으면서 대상이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이 보기에 대론자들은 대상과 인식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智)와 식(識)도 구분하 지 못하는 자들이다. 『비바사론』의 논사는 지혜는 인식과 대상보다 외연이 좁기 때문에 포함되는 관계를 가진다고 본다. 모든 인식은 대응하는 대상을 가지는 반 면, 모든 인식이 지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지혜는 인식의 일부분으로 한정되고, 지혜 자체가 인식의 대상(jñeya)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96) 지혜는 가장 좁은 외 연을 가지게 된다.97) 지혜는 비록 인식과 대상 보다 좁은 외연을 가지지만, 그것 95) Cf. 『阿毘達磨大毘婆沙論』: 為遮彼執顯一切智皆緣有境。.... 為遮彼執顯一切智皆能緣境。顯一切境皆 智所緣。復次為顯外道有顛倒故境智相違。及顯內道無顛倒故境智相順。(T27.228b23 - 28) 96) 『阿毘達磨大毘婆沙論』: 智多耶境多耶。答境多非智。所以者何。智亦境故。謂智唯攝一界一處一蘊少 分。境攝十八界十二處五蘊。(T27.228c1 - 3) [문] 지혜가 많은가? 대상이 많은가? [답] 대상이 많으며, 지혜는 그렇지 않다. 어째서 그런가? 『왜냐하면』 지혜도 역시 경계『가 될 수 있 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지혜는 단지 1계, 1처, 1온의 부분에 포함되지만, 대상은 18계, 12처, 5온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97) 『阿毘達磨大毘婆沙論』: 智多耶識多耶。答識多非智。所以者何。諸智皆識相應。非諸識皆智相應。忍 相應識非智相應故。(T27.229a1 - 3) [문] 지혜가 많은가? 식이 많은가? - 44 - 들과 별개의 영역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과 대상과 상응하는 영역에 포함 된다. 이러한 설일체유부의 관점은 대상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 는 가능성을 보장한다는 특성을 가진다. 5위 75법의 체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설일체유부의 일체 대상은 물질적인 것, 심리적인 것, 그리고 관념적인 것 으로 구분할 수 있다. 모든 인식은 대상을 가지지만, 모든 대상이 감각지각에 의 해 파악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감각기관은 상응하는 감각지각의 대상이 특정되어 있으며, 동시에 범위가 한정되어 있다. 대상세계에 포함되면서도 지각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경우는 7개의 극미가 모인 미진(微塵)보다 더 작은 물질의 영 역, 눈에 대해서 소리와 같이 감각기관과 상응하지 않는 감각대상, 너무 멀리 있 는 것, 눈에 대해 너무 가까이 있는 것 등98)이 열거될 수 있다. 따라서 대상의 파악은 단지 육체적인 감각기관에 의해서만 경험되고 확증되는 것이 아니다. 이 가운데 개별적인 극미는 물질적인 대상의 토대를 이루는 것으로 간주되지 만, 너무 미세하기 때문에 육체적인 감각기관에 의해 지각될 수 없다. 그렇다면, [문] 극미는 볼 수 있다고 해야 하는가? 볼 수 없다고 해야 하는가? [답] 존자 묘음(妙音)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극미는 마땅히 볼 수 있다고 해 야 한다. 혜안(慧眼)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아비다르마 논사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극미는 마땅히 볼 수 없다고 해야 한다. 육안(肉眼)이나 천안(天眼)으 로 능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혜안에 의해서는 질문을 하지 않았는 데, [그 이유는 혜안에 의하면] 온갖 다르마들이 모두 차별이 없기 때문이 다.99) 본문에서 존자 묘음(妙音)과 아비다르마 논사는 모두 극미가 육안으로는 보이지 [답] 식이 많으며, 지혜는 그렇지 않다. 어째서 그런가? 『왜냐하면』 온갖 지혜는 모두 식과 상응하지 만, 온갖 식이 모두 지혜와 상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忍, kṣānti)과 상응하는 식은 지혜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98) 『阿毘達磨大毘婆沙論』: 復次有色極細故。不見非非境故。如減七微色處 / 有色非境故。不見非極細 故。如除色處餘積集 / 色有色極細故。不見亦非境故。如除色處。餘極微色。/ 有色非極細故。不見亦 非非境故。如藥杵頭逼眼瞳子。/ 復次有色極遠故。不見非非境故。如四大王眾天等。住自宮時。彼雖是 人眼境而遠故。不見 / 有色非境故。不見非極遠故。如梵眾天等來至人間雖近不見 / 有色極遠故。不見 亦非境故。如梵眾天等住自宮時。人眼不見 / 有色非極遠故。不見亦非非境故。如藥杵頭逼眼瞳子。 (T27.64b1 - 12). 『대정장』의 구두점을 바꾸어 읽었으며, 문장이 끊어지는 부분은 “/”로 표시하였다. 99) 『阿毘達磨大毘婆沙論』: 問極微當言可見不可見耶。答尊者妙音作如是說。極微當言可見。慧眼境故。 阿毘達磨諸論師言。極微當言不可見非肉天眼所能見故。此中不依慧眼作問。以於諸法無差別故。 (T27.684a18 - 22) - 45 - 않는다는 사실 판단에 동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양자의 차이점은 ‘본다,’ 즉 지각의 의미에 대한 차이점에서 비롯된다. 아비다르마 논사들에게 ‘본다’는 지각 은 감각지각을 의미한다. ‘본다’는 것은 감각기관이 대상을 포착하는 행위이며, 매우 미세한 극미는 이 감각지각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감각지각으로 관찰하고 확인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묘음에게 ‘본다’는 것은 인식으로서의 지 각을 의미한다.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 포착된 대상을 ‘보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인식되었을 때에야 성립하는 것이다. 아비다르마 논사는 혜안의 관 점에서 말한다면, 온갖 다르마(속성)들은 모두 차별이 없어진다는 점을 지적한다. 비바사사들은 가장 기본적인 속성들의 차이를 남김없이 분석하고 열거하여 다르 마의 분류체계를 완결지우는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따라서 차별적인 속성들을 하나의 범주로 통합해 버리는 것에 대해 거듭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한다.100) 다 시 말해 혜안의 관점에서 보면, ‘눈으로 본 것’과 ‘귀로 들은 것’은 모두 눈과 귀 라는 육체적 감각기관과는 다른 심적영역의 지각정보를 의미하게 되며, 모든 사 물에 대한 지각도 궁극적으로는 이와 마찬가지로 의식정보로 환원되게 될 것이 다. 따라서 혜안으로 ‘본다’는 설명은 아비다르마철학의 기본적인 목적을 이해하 지 못하는 대답으로 평가될 수 있다. 이 문제는 이후 불교인식논리학에서도 논쟁의 주제가 되었던 문제, 즉 ‘본다’ 는 지각은 하나의 개별적인 색깔을 대상으로 하는가? 아니면 다수의 색깔을 인식 의 대상으로 하는가?라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만일 ‘5색으로 꼰 실을 보았다’ 면, 이 ‘보았다’는 감각지각은 다수의 색깔을 함께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의 인식이 다수의 자성(自性)을 가진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아비다르마철학에서 하나의 인식은 하나의 본체만을 취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문] 어떻게 ‘안식이 5색실을 인식대상으로 한다’라는 말의 뜻이 통하게 할 것 인가? [답] 다수의 물질(색)이 화합(和合)하여 함께 하나의 물질(색)을 발생하는 것이 며, 그 하나의 물질(색)을 볼 때 [그것을] 다수의 물질(색)을 본다고 하는 것이 다. 100) 이런 입각점의 차이는 경량부와의 논쟁에서 반복적으로 제기된다. 경량부는 지나치게 번쇄하고 혼 란스러운 설일체유부의 분류체계를 부정하고 보다 수미일관하고 간결한 개념적 구도를 도출하려고 하 는 반면, 중현과 같은 설일체유부 논사는 그런 시도들이, 예를 들어 ‘본다’거나 ‘듣는다’는 지각의 차 이들을 소거하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 부분의 논의는 이하 설일체유부의 다르마체계와 경량부 와의 논쟁부분에서 재론하기로 한다. - 46 - 세우(世友)존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나의 안식이 한꺼번에 다수의 물 질(색)을 취하는 것이 아니다. [각각을 취하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함께 하 는 것이 아닌데도 함께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증상만(增上慢)이다. 마 치 선화륜(旋火輪)이 바퀴가 아닌데도 바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 증산만이 다.” 어떤 이는 “다수의 물질(색)을 인식대상으로 하여 하나의 안식을 일으킨다”고 하였다. [문] 하나의 안식은 다수를 인식하는 성질이 있다고 해야하는가? (이하 중략) [답] 만약 개별적으로 분별하면 하나의 물질(색)을 인식대상으로 하여 하나의 안식을 일으키는 것이지만, 만약 개별적으로 분별하지 않는다면 다수의 물질 (색)을 인식대상으로 하여 하나의 안식을 일으키는 것이다. 대덕(大德)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약 명료하게 물질(색)의 차별을 파악하 지 않으면, 다수의 물질(색)을 인식대상으로 하여도 하나의 식이 발생한다. 숲 을 볼 때 나뭇잎 등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것과 같이.”101) 여기에서의 논란은 단일한 속성을 지닌 개별적인 사물과 다수의 속성이 함께 섞 여있는 복합체에 대한 인식의 문제로서, 극미와 같은 단일한 속성의 기본적인 구 성요소가 다수가 적집되어 조대한 물질을 이루었을 때 그것에 대한 인식의 실재 성과 관련된 것이다. 이에 대한 전통적인 해답은 하나의 물질(색)을 조건으로 하 여 하나의 인식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5색실을 본다’거나 항아리, 군대의 행렬 등을 본다는 사태를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감각주체는 분명히 빨강, 노랑 등의 다섯 가지 색깔을 보는 것이 아니라 5색실을 보는 것으로 여겨 지기 때문이다. 『비바사론』의 본문에는 이에 대한 몇 가지 상이한 견해가 제시되 고 있다. 첫째는 물질(색)이 화합(和合)하여 하나의 물질(색)로 나타나는 데, 그 하 나의 물질(색)을 보면서 다수의 물질(색)을 본다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화합(和 合)의 산스크리트 원어와 그 의미는 확인할 수 없다. 단지 다수가 화합하여 하나 의 물질(색)로 나타난다는 점과, 그렇게 하나로 나타난 물질(색)에서 다수의 물질 (색)을 본다고 말할 수 있게끔 다수가 구분이 가능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 다. 두 번째는 세우(世友)존자의 주장으로, 아비다르마의 전통적 입장을 따르면서, 101) 『阿毘達磨大毘婆沙論』: 此云何通。如說。眼識緣五色縷。若緣多色生眼識者。則一眼識有多了性。了 性多故應有多體。一法多體與理相違。有說。但緣一色生於眼識。問此云何通。如說。眼識緣五色縷。答 多色和合共生一色。見一色時言見多色。尊者世友說曰。非一眼識頓取多色生。速疾故非俱謂俱。是增上 慢。如旋火輪非輪謂輪。是增上慢。有說。亦緣多色生一眼識。問應一眼識。有多了性。乃至廣說。答若 別分別則緣一色生一眼識。若不別分別則緣多色生一眼識。大德說曰。若不明了取色差別。則緣多色亦生 一識。如觀樹林總取葉等。(T27.64a13 - 25) - 47 - 다수의 물질(색)에 대한 인식을 선화륜(旋火輪)에 대한 인식과 같이 허구적인 것 으로 파악하는 입장이다. 이에 따르면 조대한 물질에 대한 인식은 모두 허구적인 구성물이 될 것이다. 세 번째 입장은 단순히 다수의 물질(색)을 인식대상으로 하 여 하나의 안식을 일으킨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하나의 원인이 하나의 인식을 일 으킨다는 아비다르마의 원칙을 폐기하고 대신 다수의 원인이 하나의 인식을 일으 킨다는 전혀 다른 주장의 선언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모두 보다 구체적인 내용이 추가되어야 의미가 분명히 드러나겠지만, 대체적으로 마지막 대덕(大德)의 주장에 서 종합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본문에서 이어지는 질문들이 함축하는 것은 만약 사태가 그러하다면, ‘하나의 안식에게 다수의 물질(색)을 인식하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겠는가?’라는 제 안이다. 이에 대하여, 비바사사는 예의 관점주의적인 대답을 준다. 개별적인 것들 을 분별하여 보면 하나의 물질(색)이 하나의 지각을 발생시키지만, 그렇지 않으면 다수의 물질(색)이 하나의 지각을 발생시킨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 로 이러한 주장이야말로 극미의 결합에 대한 중현(衆賢)의 관점을 잘 드러내주는 것이다. 하나의 인식을 획득하였을 때에도 개별적인 구성요소들은 그 개별성을 잃지 않으며, 단지 카메라의 초점을 어디에 잡는가에 따라 개별적인 다수 혹은 함께 모인 하나의 덩어리가 앵글에 잡히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반면 비유자-경 량부 계통의 논사로 거론되는 대덕(大德)은 개별적인 대상이 아니라 다수의 물질 (색)을 인식대상으로 할 경우에는 비록 그것이 명료하게 파악되지는 않을지라도 하나의 인식을 발생시킨다고 주장한다. 다수의 나무잎과 줄기가 하나의 나무라는 지각을 만들어내고, 다시 다수의 나무가 숲에 대한 지각을 산출하는 것과 같다. 개별적 구성요소와 그것들이 결합한 집합체 사이에 상이한 차원의 인식대상을 설 정하는 설명방식은 이후 상좌 슈리라타의 극미 화합설에서 핵심적인 개념으로 등 장한다. 2절. 개별극미와 다수의 극미 1. 개별극미 불교철학의 극미론에 있어 선두라고 할 수 있는 고전적 설일체유부(구유부)의 극미개념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이곳에서는 『구사론』에 나타난 세친의 극미개념 - 48 - 과 중현의 『순정리론』에 나타나는 신설일체유부(신유부)와 상좌 슈리라타의 주장, 그리고 『유가시지론』에 나타난 유식가들의 극미개념을 고찰해 보도록 하겠다. 극 미개념에 대한 세친의 정의는 신유부와 경량부 상좌의 해석을 선택적으로 취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먼저 이들의 논쟁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중현은 극미의 존재를 경증(經證)과 이증(理證)으로 논증한다. 그러나 경증으로 제시된 인용문은 앞서 『비바사론』에서 보았던 『아함경』의 ‘가장 미세한 물질(색)’에 대한 언급에 지나지 않으며, 『비나야』를 지시하는 부분은 원문을 확인할 수 없다.102) 『아비담심론』에서 극미를 사극미(事極微)와 취극미(聚極微)의 두 층위로 해석 하였던 방식을 채용하여, 중현도 극미가 가극미(暇極微)와 실극미(實極微)의 두 층위를 가지는 것으로 분석하였다.103) 그러나 그 명칭에서 보듯이 양자가 극미를 보는 관점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유부와 신유부는 모두 두 층위에서 극 미의 실재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하지만 구유부의 정의에서는 명백 하게 개별극미의 실재성에 주목하고 있는 반면에, 신유부 중현은 극미들이 집적 한 상태를 실제적으로 경험되는 차원의 극미로 보고, 개별적인 극미들은 추론적 인 사유의 대상으로 설명한다. 비록 이 추론적 대상의 실재성이 축소된 것은 아 니지만, 판단의 기준이 지각되는 실극미에서 놓여있다는 점에서 차이점이 드러난 다. 여기서 이 추론의 대상이 되는 가극미(暇極微)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가극미는 분석에 의한 추론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취색(聚色)을 사 유에 의해 점차 분석하여 가장 작은 상태에 도달할 것이다. 그 후에 그것에서 색, 성 등의 극미의 차이를 분별한다. 이렇게 분석되어 극한에 이른 것을 이름 하여 가극미라고 한다. 사유로 지극히 깊고 넓게 탐구하여 기쁨을 일으키게 한 다. 이것은 미세함의 극한이기 때문에 극미라고 한다. ‘지극함’이란 물질(색)을 분석하여 궁극에 이르렀다는 것이고, ‘미세함’은 오직 혜안(慧眼)에 의해서만 인식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극미라는 말은 ‘미세함의 극한’이라는 뜻을 나 타낸다.104) 102) 아직까지 『비나야』의 증거를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이것은 아마도 숲(araṇya)에서 거하는 수행자 들과 그들이 탁발을 하는 마을까지의 거리를 산정할 때, 거리(크기) 개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단위 를 나타내는 기준으로 극미가 제시되었던 것 같다. Cf.; 『阿毘達磨順正理論』: 然為安立阿練若處。故 毘奈耶。但作是說。七極微集。名一微等。....... 為一俱盧舍。毘奈耶說。此是從村至阿練若。中間道 量。 (T29.521c22 - p. 522a4) 103) 『阿毘達磨順正理論』: 然許極微略有二種。一實二假。其相云何。實謂極成色等自相。於和集位。現量 所得。(T29.522a5 - 7) 104) 『阿毘達磨順正理論』: 假由分析。比量所知。謂聚色中。以慧漸析。至最極位。然後於中『*』辯色聲等 極微差別。此析所至。名假極微。令慧尋思極生喜故。此微即極。故名極微。極謂色中析至究竟。微謂唯 - 49 - 개별적인 극미는 감각지각에 의해 파악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유의 분석에 의해 도달하는 ‘가장 미세한 물질(색)’에 대한 가설적 존재이다. 그러나 설일체유 부의 존재론에서 이 가설적 존재의 실재성과 물질성은 의심되지 않는다. 이것은 설일체유부가 집적된 대상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 들도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존재론적 연속성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만약 극미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취색도 존재할 수가 없을 것이다.105) 따라서 극 미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다. 『순정리론』에서 (1) 극미는 물질(색)에 포함된다. 그렇다면 물질(색)의 정의에 따라 극미도 파괴된다고 보아야 하지 않은가? 여기서 극미의 두 번째 특징이 주 어진다. (2) 극미는 현 찰나에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일이 없다. 항상 적집한 상태 로 있기 때문에 적집이 변화하고 파괴되는 것을 통해 개별극미도 그러하다는 것 을 안다.106) 그리고 이어서 극미의 몇 가지 특성들이 언급된다. 즉 극미를 설정함에 있어 [극미 자체는] 비록 공간적 부피(方分)도 없으며, 또 한 역시 다른 색과 직접적으로 접촉(觸對)하는 일도 없을지라도 [감각적 대상 이 되는 실제적] 극미는 공간적 점유성을 지녀 다른 물질의 생기를 장애하는 작용(障用)을 갖는다고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니, 변애의 뜻도 역시 이와 같음 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107) 따라서 극미는 (3) 공간적 부피를 가지지 않으며, (4) 극미를 포함한 다른 물질 (색)과 접촉하지 않지만, (5) 다른 물질(색)들이 자신의 공간을 점유하지 못하도록 저항하는 성질을 가진다. 이런 극미 정의는 앞으로 전개될 극미의 물질성, 극미의 결합, 극미의 부분, 극미의 접촉 등과 같은 많은 논란을 함축하고 있다. 상좌 슈리라타의 개별극미에 대한 개념정의의 전체적인 모습을 정확하게 확인 하기는 어렵다. 단지 중현의 비판을 통해서 슈리라타의 극미개념에서 몇 가지 특 是慧眼所行。故極微言。顯微極義。(T29.522a7 - 12) 105) 그러므로 극미 그 자체는 반드시 존재한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취색도 없어야 할 것이다. 취색은 반드시 이것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阿毘達磨順正理論』: 是故極微。其體定有。此若無者。聚色應 無。聚色必由此所成故。(T29.522b9 - 10) 106) 어떤 이는 주장하기를, “파괴되기 때문에 물질(색)이라고 한다면, [극미도 파괴된다고 해야 할 것인 데] 어떻게 극미가 파괴된다고 하겠는가?” [답변] “어떠한 극미도 현재 [찰나에] 홀로 머무르지 않고, 적집하여 머무르기 때문에 변화의 뜻이 성립한다.” 『阿毘達磨順正理論』: 有說。變礙故名為色。若爾 極微云何變礙。無一極微現在獨住。積集住故變礙義成. (T29.337c22 - 24) 107) 『순정리론』, 79.; 『阿毘達磨順正理論』: 如立極微。雖無方分亦無觸對。而許極微有礙有對有障用故。 應知變礙義亦如是。(T29.337c25 - 27) - 50 - 징을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다. 먼저 가장 특징적인 차이점은 개별극미와 극미 의 집적 사이에 불연속성을 들 수 있다. 여기서 불연속성은 존재론적인 동시에 인식론적 불연속을 모두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상좌(上座)는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5식의 소의(즉 5근)와 소연(즉 5경)은 다 같이 실유가 아니니, 극미 하나하나 는 소의와 소연이 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며, 다수의 [극]미가 화합할 때 비로 소 소의와 소연이 되기 때문이다.”108) 극미들의 집적이 지각됨에도 불구하고, 개별적인 극미들은 감각지각을 초월해 있 다는 것이 설일체유부와 비유자-경량부가 모두 동의하는 전제이다. 그러나 설일 체유부는 극미의 집적이 지각되는 것은 개별적인 극미들의 지각대상이 되는 능력 이 연속적으로 극미의 집적에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상좌 슈리라타 는 양자를 구분한다. 개별적인 극미는 감각기관을 초월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극 미들의 집적에서 지각이 발생하였다면 극미들의 집적에서 무언가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극미의 결합과 관련된 논의에서 좀 더 심층적 으로 고찰해 볼 것이다. 상좌 슈리라타는 극미의 부분과 접촉의 문제에서도 설일체유부와 완전히 입장 을 달리한다. 그런데 저 상좌(上座)는 이에 대해 다시 이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극미 자체는 바로 유방분(有方分, 부피를 갖는 것)으로, 어떻게 그 자체의 존재를 갖는 것[有自體]을 무방분(無方分)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109) 극미들이 모여서 지각대상이 되는 어떤 사물을 형성할 수 있다면, 적어도 그 것들은 양적으로 집적이 가능해야 하고, 또 집적된 것들이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경우에 극미들은 서로 접촉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형이 상학적인 극미의 개념에서는 극미들이 접촉이나 결합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극미 들은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가장 미세한 물질(색)이면서 어떤 기본적인 단위의 크기를 갖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상좌의 생각이다. 경량부의 기원으로 알려져 108) 『순정리론』, 182.; 『阿毘達磨順正理論』: 此中上座作如是言。五識依緣俱非實有。極微一一不成所依 所緣事故。眾微和合。方成所依所緣事故。(T29.350c5 - 7) 109) 『순정리론』, 343.; 『阿毘達磨順正理論』: 然彼上座。於此復言。諸極微體。即是方分。如何有體。言 無方分。(T29.372b6 - 8) - 51 - 있는 비유자의 논사 각천(Buddhadeva)에 따르면 4대종만이 실재성을 지니며, 그 것들이 결합하여 만들어내는 색, 향, 미, 촉 등의 소조색은 실재성을 지니지 않는 다.110) 아비다르마 단계에서 대종과 극미의 통합은 이미 완성되었으므로, 여기서 우리는 이 4대종을 극미와 내용적으로 동일시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경량부의 주장은 극미들은 물질적 존재이며, 최소한의 크기를 갖고, 항상 4대종극미가 함께 모여서 나타나며, 접촉을 통해 결합할 수 있는 것이다. 경량부 상좌는 이같은 극 미개념을 통해 더 이상 분석되지 않는 물질의 기본단위를 설정함으로써 형이상학 적 극미개념이 야기하는 무한소급의 위험성을 피한다. 세친의 극미개념에서 『비바사론』과 『순정리론』에 나타난 설일체유부의 입장과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점은, (1) 극미는 미세한 물질(색)이며, (2) 변화하고 파괴 되며, (3) 개별극미가 독자적으로 머무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111) 그리고 아비다 르마의 정설과 마찬가지로 (4) 개별극미는 감각기관을 초월해 있다. 비록 [개별적인] 극미는 감각기관을 초월해 있지만, [그것들이] 결합한 것들은 직접지각의 대상이 된다.112) 여기까지는 상좌 슈리라타, 중현, 세친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세 논사는 극미의 실재성, 방분과 접촉의 유무, 극미집적의 방식 등에서 여러 가지 견해의 차이를 드러낸다. 110) [문] 계경에서 설한 바와 같이, 모든 물질(색)은 4대종과 4대종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은 어떤 주장을 차단하기 위하여 말한 것인가? [답] 각천 등의 주장을 차단하기 위하여 설한 것이다. 붓다께 서 미래를 관찰하는 중에 각천 등이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주장할 것을 관찰하였다. [각천 등은] “4 대종 외에는 별도의 만들어진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阿毘達磨大毘婆沙論』: 問如契經 說。諸所有色。皆是四大種及四大種所造。此為遮止何宗所說。答此為遮止覺天等說。謂佛觀察未來世 中。有覺天等當作是說。四大種外無別所造。(T27.383b2 - 6). 각천(覺天, Buddhadeva)는 서기 약 1세기 경의 아비다르마 논사로써 비유자(譬喩者)계통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Akira Hirakawa (1990) A History of Indian Buddhism: From Śākyamuni to Early Mahāyāna. Translated and edited by Paul Groner. Electronic reproduction. Boulder, Colo.: NetLibrary, (2000), 136. 111) 『阿毘達磨俱舍論』: 有說。變礙故名為色。若爾極微應不名色。無變礙故。此難不然。無一極微各處而 住。眾微聚集變礙義成。(T29.3c1 - 3) 어떤이는 설하기를, “변애(變礙)하기 때문에 색이라고 이름한 다”고 하였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극미(極微)는 응당 색이라고 이름해서는 안 될 것이니, 변애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다. 즉 어떠한 극미도 각기 다른 처소에서 머무는, 다시 말해 한 극미가 독립적으로 머무는 일은 없으며, 여러 극미(眾微)가 취집(聚集)하여 머물기 때문에 ‘변애’의 뜻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112) AKBh 100ab (189.24.): paramānvatīndriyatve pi samastānāṃ pratyakṣatvaṃ | - 52 - 2. 하나와 다수 설일체유부는 존재의 층위에 걸쳐서 온처계의 연속적 실재성을, 세친은 입처 (入處)를 중심한 온(蘊)과 처(處)의 실재성을, 그리고 경량부 상좌는 계(界)만의 실 재성을 옹호하는 입장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113) 입처(入處, āyatana)의 실재 성에 대한 논란에서 세친은 극미들이 집적한 입처 하나 하나가 바로 인식의 대상 이 되기 때문에 그것의 실재성을 인정할 수 있다는 논리를 구사한다. (세친) 따라서 바로 그 적취(rāśi)와 같이 오온(五蘊)도 가설적 존재이어야 할 것이다. (유부) 만약 그렇다면 온갖 색처들도 가설적 존재(prajñaptisanti)라고 인정해 야 할 것이다. 눈 등의 다수의 극미들[로 만들어진 감각기관들]이 발생하는 문(門)이기 때문이다. (세친) 그렇지 않다. 취집된 것들의(samagrānām) 하나 하나가 원인의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감각기관은 대상과 함께 작용하기 때문에 각각 의 입처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114) 세친은 먼저 오온은 적취이기 때문에 가설적 존재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온 가운데 물질적 존재는 색온(色蘊) 하나이고 나머지는 심리적 존재들이다. 이것은 모든 물질적 사태들을 색온, 즉 ‘물질의 덩어리’라는 하나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물질적 존재인 개별적인 극미에서 미취(微聚), 그리고 다수의 극미들이 집적한 항아리와 같은 조대한 사물까지가 모두 색온의 범주에 포함된다. 이를테 면 우리의 몸도 하나의 색온으로 간주할 수 있다. 세친은 이와 같은 ‘조대한 물질 의 덩어리’는 지각의 기본단위로 분석될 수 있기 때문에 실재성을 지닐 수 없다 고 본다. 그러나 안, 이, 비, 설, 신, 의처(意處)와 그에 상응하는 여섯 가지 대상 을 포함하는 12처는 경험세계를 구성하는 기본요소들이다. 이 기본요소들은 물질 의 궁극적 기본요소인 4대종극미로 구성되어 있다. 각천의 주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비유자-경량부 전승에서 실재성을 가진 존재는 4대종뿐이며, 상좌 슈리라타 113) 12처의 실유문제에 관련해서는, 권오민 (1994), 박창환 (2010), 이규완 (2016)을 참고할 수 있으며, 이하 3장 2절 3.에서 상세한 검토가 이루어진다. 114) AKBh I.20ab (14.2 - 4.): tasmād rāśivad eva skandhāḥ prajñaptisantaḥ. rūpīṇy api tarhy āyatanāni prajñaptisanti prāpnuvanti | bahūnāṃ cakṣurādiparamāṇūnām āyadvārabhāvāt, na ekaśaḥ samagrāṇāṃ kāraṇabhāvāt viṣayasahakāritvād vā nêndriyaṃ pṛthagāyatanaṃ syāt. | - 53 - 에게 4대소조는 4대종과 독립적으로 허구적인 감각지각의 영역에 속한다.115) 세 친은 바로 4대소조색의 독립적 영역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 극미들의 집적으로 만들어진 입처의 영역은 감각지각의 차원에서는 경험세계를 구성하는 기본단위가 되는 것이다. 4대종이 집적하여 만들어진 색, 성, 향, 미, 촉 등의 하나 하나가 지 각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비유자-경량부는 인식론적인 존재영역의 독립성은 인정 하지만 그것을 허구적인 존재로 한정하는데 반해, 세친은 이미 인식론적 존재를 독립적인 실재의 영역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설일체유부가 물질적 존재, 심리적 존재, 관념적 존재를 공존시킬 때 발생하였던 개념적 충돌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세친이 이렇게 존재론적 실재와 인식론적 실재를 양 립시키는 것은 실재와 현상의 연속성을 확보하고, 경험세계의 토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을 지니지만, 두 상이한 존재론적 층위의 연속성을 논증하는 데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세친은 『구사론』단계에서 이미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식론적인 존재론으 로 이행을 시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sarvasūkṣmo hi rūpasaṃghātaḥ paramāṇur ity ucyate | yato nānyataro vijñāyeta | 가장 미세한 색취를 극미라고 하며, 그것 보다 더 미세한 것은 인식되어질 수 없다.116) 이 본문은 세친 자신의 극미개념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중요성을 지닌 다. 박창환은 본문의 함의에 주목하여 상세한 분석을 제시하였다.117) 요약하면, 115) 어떤 이는 비방하여 말하기를, “대종과 조색(造色)은 별도의 자성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으 며, 혹은 다시 비방하여 말하기를, “촉처와 소조색은 그 자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 다. 혹은 다시 비방하여 말하기를, “일체의 미취(微聚)가 모두 일체의 [대종]을 갖춘 것은 아니다”고 하였으며, 혹은 다시 비방하여 말하기를 “그 수(數)는 결정된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순정리론』, 437.; 『阿毘達磨順正理論』: 多誹謗者謂或謗言。大種造色。無別有性。或復謗言。無別觸處所造色體。 或復謗言。非一切聚皆具一切。或復謗言。數不決定。(T29.384a3 - 6). 여기서 “어떤 이”의 주장은 비 유자-경량부 계열의 논사로 알려져 있는 각천(覺天, Buddhadeva)의 주장과 유사하다. 『阿毘達磨大 毘婆沙論』: 有覺天等當作是說。四大種外無別所造。(T27.383b2 - 6). [각천 등은] “4대종 외에는 별 도의 만들어진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116) AKBh II.22. (52:24). 문자적인 번역으로는, “가장 미세한 색취를 극미라고 하며, 그 [가장 미세한] 것과 다른 것은 인식되어질 수 없다.”가 될 것이다. 여기서 비교급(-tara)의 의미를 살리면 ‘가장 미 세한 것 보다 더 미세한’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Cf.; 『阿毘達磨俱舍論』: 色聚極細立微聚名。 為顯更無細於此者。(T29.18b22 - 23) 117) 박창환은 AKBh II.22ab의 분석에서 지각의 범위에 들어오는 복합극미 중심의 극미개념정의 등을 - 54 - 세친의 극미개념은 아비다르마의 취극미 혹은 중현의 실극미에 해당하는 것으로, 세친은 사극미 혹은 가극미의 개념 자체를 부정하고 취극미개념을 단순히 ‘극미 paramāṇu’로 정의한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은 진제의 번역118)과 세친이 “색취를 극미”로 파악하고 있다고 비판한 디팡카라의 지적에 근거한 것이다.119)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취집을 ‘가장 미세한 물질’이라고 정의할 때만 가능한 독법으로 ‘가장 미세한 물질의 기본단위’라는 극미의 개념에 모순되는 것으로 보인다. 때문 에 야쇼미트라는 여기서 ‘극미(paramāṇu)'는 취극미(saṃghātaparamāṇu)를 의 미한다고 주석하였으며,120) 현장은 ’취집(saṃghāta)‘을 물질(색)과 극미 모두에 적용하여 ’색취(色聚)‘와 ’미취(微聚)‘로 번역하였다.121) 문제의 발단은 『구사론』 본문의 rūpasaṃghātaḥ를 하나의 복합어로서 색취로 읽을 것인가, 아니면 rūpaṃ saṃghātaḥ로 해석할 것인가와 관련이 있다.122) 야 쇼미트라의 해석을 배제하고 문자적인 의미 중심으로 보면, 앞의 경우에 ‘극미는 가장 미세한 색취’로 해석되어서 극미가 물질의 적집 가운데서 가장 미세한 것이 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반면에 두 번째의 독법은 ‘적집된 극미는 가장 미세한 물질’이라고 번역되어 물질 중에 가장 미세한 것이 취극미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 다. 논란은 필사본과 교정본의 차이뿐만 아니라 본문이 함축하는 의미에 대해 후 대의 주석서들도 상이한 해석을 채택하고 있는 것에 기인하였다. 따라서 이곳에 서는 문법적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문장의 내적논리에 따른 분석을 제시하고자 세친의 혁신성으로 평가한다. 박창환 (2010), 246. 118) 『阿毘達磨俱舍釋論』: 釋曰。極細色聚說名隣虛。欲令知無餘物細於彼者. (T29.177c17 - 18). 석왈: 가장 미세한 색취를 이름하여 인허(극미)라고 한다. 그것보다 더 미세한 사물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하 고자 하는 것이다. 119) ADV 110 (65.15 - 17): kośakāras tv āha - "sarvasūkṣmo rūpasaṃghātaḥ paramāṇuḥ" iti | tena saṃghātavyatiriktaṃ rūpamanyad vaktavyam | yadi nāsti saṃghātao'pi nāsti | ataḥ siddhaṃ 'sarvasūkṣmaṃ rūpaparamāṇu' iti || 그러나 구사론주는 말한다. - “극미은 가장 미세 한 색취”이다. 그렇다면 [색]취를 제외한 다른 물질(색)이 [존재한다고]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다른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색]취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물질(색)의 극미는 가장 미세한 것이다’라는 것이 확립된다. 120) AKVy II.31 (123. 14 - 19).; Cf. 박창환 (2010), 244. fn. 42. 121) 현장은 “색취의 극히 미세한 것(色聚極細, sarvasūkṣmo rūpasaṃghāta)을 미취(微聚, saṃghātaparamāṇu)라고 한다”고 하여, 이 두 측면을 절충하는 방식으로 번역하였다. 『阿毘達磨俱 舍論』: 論曰。色聚極細立微聚名。為顯更無細於此者。(T29.18b22 - 23). 『구사론』, 156.: 논하여 말 하겠다. 색취(色聚)로서 지극히 세밀한 것을 건립하여 ‘미취(微聚)’라고 이름하니, 이는 이보다 더 이 상 미세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122) Pradhan에 따르면 본문의 필사본에는 rūpaṃ saṃghātaḥ로 되어 있다. AKBh II.22 (52). fn. 5. - 55 - 한다. 본문에 대한 문자적 번역과 주석서의 번역은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 째는 “(1) 극미는 가장 미세한 물질(색)의 취집이다.”이고, 다음은 “(2) 가장 미세 한 물질(색)을 취집극미라고 한다.”이다. 여기서 혼란을 야기하는 문제는 ‘물질 (色)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만약 1) 물질(색)이 사대종 등 가장 미세한 물질을 의미한다면, 극미가 “가장 미세한 물질의 기본단위”라는 정의에 따라 ‘극미는 가장 미세한 물질(색)의 취집’이라는 문장(1)은 모순이다. 문 장(2)의 “가장 미세한 물질(색)” 즉 극미를 취집극미라고 한다는 해석 또한 모순 이 된다. 이 두 문장은 문장(1)의 경우 ‘극미’가 ‘취극미’로, 문장(2)의 경우에는 ‘취집극미’가 ‘극미’로 치환될 때에야 타당한 의미를 지니는 명제가 된다. 따라서 ‘가장 미세한 물질’로서 물질을 상정할 때에 가능한 독법은 야쇼미트라의 제안에 따라 “취극미는 가장 미세한 물질의 취집”으로 읽거나 혹은 아비다르마의 정의에 따라 “가장 미세한 물질(색)은 극미”라고 읽는 두 가지 경우만이 타당성을 지닌 다. 만약 2) 물질(색)을 분할가능하고 저항이 있는 물질로 본다면, (1)의 해석은 극 미가 이미 크기를 가진 물질의 취집이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성립하지 않는다. 대신 가장 미세한 색이 극미의 취집이라는 (2)번 해석을 채택해야 할 것이다. 그 런데 여기서 문장(2) “가장 미세한 물질(색)을 취집극미라고 한다.”라는 명제 자체 가 설일체유부의 정설에 위배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123) 만약 가장 미세한 물질 (색)을 취집극미라고 한다면, 개별극미들은 물질(색)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게 될 것이다. 그것은 비물질적인 어떤 존재나 속성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물질을 초월한 존재의 근거를 상정하는 것은 바이셰시카 등의 외도가 주장했던 바와 유 사하게 실체와 물질(색)을 구분하는 결과에 떨어질 위험이 있다. 이것은 모든 불 교철학에서 용납할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에 바로 배제될 것이다. 이 명제가 타 당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논의영역이 인식론적 범주로 한정되어야 한다. 다시 말 해 ‘지각될 수 있는 물질(색)의 범주에서 말한다면’이라는 조건이 부가될 경우에 한해서 (2)번 명제는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지각의 영역에 포착 되는 물질(색)은 취극미의 단계이고, 개별적인 극미들의 존재는 지각을 초월해 있 기 때문에 감각세계의 물질로 경험될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123) Cf. 『순정리론』, ‘지극함’이란 물질(색)을 분석하여 궁극에 이르렀다는 것이고, ‘미세함’은 오직 혜안 (慧眼)에 의해서만 인식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극미라는 말은 ‘미세함이 지극함’이라는 뜻을 나타 낸다 『阿毘達磨順正理論』: 微謂唯是慧眼所行。故極微言。顯微極義。(T29.522a11 - 12) - 56 - 따라서 앞의 두 가지 분석에서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는 경우는 1) ‘[취]극미 ([saṃghāta]paramāṇu)는 사대종극미 등 가장 미세한 구성요소들의 취집이다.’ 는 것과 2) ‘분할하여 가장 작은 단위에까지 이른 물질(실극미)을 취집극미라고 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결론 1)은 보다 설일체유부적인 관점을 잘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실재하는 개별극미가 최초로 인식을 발생시킬 수 있는 대상인 취극 미를 구성한다는 명제의 재확인인 셈이다. 두 번째 명제 2)는 조대한 물질을 분석 하여 갈 때 인식적 차원에서 가장 미세한 단위인 물질에 도달한 것이 취극미(聚 極微)라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명제는 내용적으로 충돌하지 않는다. 두 명제를 연결하면, 일반적인 사물(個物)을 분할하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가장 미세한 단계(聚極微)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것이 실극미(實極微)이다. 다시 이것을 사유에 의해 분석해 보면 개념적으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형이상학적 극미(事 極微)에 도달하는데 이것은 관념적 추론에 의한 존재, 즉 가극미(暇極微)인 것이 다. 그리고 본문에서 세친이 암시하는 것은 통상적으로 극미(paramāṇu)라고 할 때, 그것은 취집극미(saṃghātaparamāṇu)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경량부 전통을 계승하였다고 주장하는 야쇼미트라의 해석도 이것을 지지한다.124) 그리고 디팡카 라의 비판적 주석에 근거하여 박창환이 주장한 바와 같이, 세친이 단수형의 극미 (paramāṇu)라는 용어를 채택한 것은 취집극미에 보다 실질적인 의미를 두어 실 재하는 극미로 보려는 세친의 경향이 반영된 것이라 하겠다. 반면 디팡카라나 중 현은 개별극미들, 즉 사극미의 실재성에 근거를 두고서야 취집극미의 실재성이 확보된다는 점에서 사극미의 실재성을 중요시한다고 평가할 수 있다. 3절. 형색(形色)의 가실(假實)문제 형태의 속성을 가진 극미(형색극미)의 실재성 문제는 ‘개별극미와 조대한 물질 의 형태 사이에 존재론적 연속성’에 대한 논란 그리고 ‘행위에 의한 업(業)과 과 보의 발생’이라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때문에 비유자-경량부와 설일체유부간의 철학적 공방이 벌어진 핵심주제인 동시에 세친이 유식으로 이행하는 사유의 흐름 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124) AKVy II.31 (123. 14 - 19). - 57 - 1. 극미의 세 가지 종류: 현색, 형색, 표색 『유가사지론』은 대상 세계에 대한 시각적 분석에서 물질(색)을 세 가지 종류, 즉 색깔과 형태와 운동의 속성을 가지는 현색(顯色), 형색(形色), 표색(表色)의 세 가지로 분류한다. 안식의 인식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보이는 성질과 저항을 가진 물질(색)이 다. 그것에는 또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 요약하면 현색(顯色, varṇa)과 형색 (形色, saṃsthānam)과 표색(vijñapti)이다.125) 시각적 감각지각의 대상은 저항을 가진 물질(색) 가운데 보이는 성질을 가진 것이 다. 그리고 이것에는 다시 세 가지 구분이 가능하다. 현색은 물질의 색깔(varṇa) 로 파랑, 노랑 등의 일반적인 색깔과 그림자, 어둠 등도 포함된다. 형색은 길다, 모나다, 굵다 등과 같은 형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표색은 물체의 운동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표색vijñapti란 무엇인가? 바로 그것(현색 or 형색)이 취집된 물질(색)의 생멸 이, 방해하는 원인 때문에 [처음] 발생한 바로 그곳에서 생겨나지 않고 다른 곳에서, 간격이 없이 혹은 간격이 있게, 또는 가까운 곳 혹은 먼 곳에서 발생 하지, 바로 그곳에서 그것의 생기(生起)가 변화되지 않는 것이 표색'이라고 말 해진다.126) 표색(表色, vijñapti)이란 어떤 형태와 색깔을 가지고 시각적으로 지각되는 대상이 처음 찰나에 존재하였던 바로 그곳에 발생하지 못하고 그곳과 다른 곳에 생겨나 는 것을 말한다. 이는 찰나(刹那)로 생멸하는 존재들의 운동, 즉 공간적 변화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운동은 찰나적으로 개별 존재들이 좌표를 달리하며 발생하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하며, 물질존재에 내재하는 그러한 속성을 표색이라 한다. 물론 『유가사지론』에서의 세 가지 물질의 종류는 심리적 존재를 의미한다. 본 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물질(색)의 종류들은 안식(cakṣurvijñāna)의 인식대상 125) YBh 4.12 - 13: cakṣurvijñānasyālambanaṃ katamat | yad rūpaṃ sanidarśanaṃ sapratighaṃ | tat punar anekavidhaṃ | samāsato varṇṇaḥ saṃsthānaṃ vijñaptiś ca || 126) YBh 5.3 - 5.: vijñaptiḥ katamā | tasyaiva pracitasya rūpasyotpannaniruddhasya vairodhikena kāraṇena janmadeśe cānutpattis tadanyadeśe ca nirantare sāntare vā sannikṛṣṭe viprakṛṣṭe vā tasmineva vā deśe'vikṛtotpattir vijñaptir ity ucyate || - 58 - (ālambana)에 포함된다. 따라서 여기서 표색(表色)이라는 것은 심리적 차원에서 운동으로 인식되는 것을 구성하는 인지적 요소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127) 그 러나 이 표색의 개념은 다찰나에 걸친 작용을 전제해야 한다는 난점이 있다. 첫 찰나에 한 지점에 있던 존재가 다음 찰나에 다른 지점에서 발생한다고 할 때, 적 어도 그 두 찰나에 공통적으로 작용하는 어떤 요소를 상정해야 이 운동 혹은 변 화의 인과성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오직 한 찰나에서 완결된 일체세계의 존재를 해명하고자 하였던 설일체유부에게는 불만족스러운 것이다. 중현은 물체의 움직임을 굳이 상 정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무언가 움직인다는 지각은 ‘달이 구름 사이를 지나 갈 때’나 ‘몸을 회전할 때 세계가 도는 것으로 보이는 것처럼’ 상대적이고 허구적 인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는 어떤 욕망이나 의지 등이 조건이 되어서 신 체 등의 형태로 존재하는 물질이 다음 찰나에 다른 곳에 발생하도록 하는 것일 뿐이다. 때문에 유위는 다 행동을 갖지 않으며, 행동을 갖지 않기 때문에 앞서 설한 신 표업은 바로 신체적 형태의 차별[일 뿐]이다.128) 중현에게 인식대상은 단순히 심리적 존재가 아니라 외부에 존재하는 물질대상이 다. 찰나적으로 존재하는 이 물질대상에서 시간에 따라 좌표를 달리하는 운동의 존재를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일체의 대상이 가지고 있는 운동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어떤 특정한 대상의 형태가 시간과 공간을 달리해서 나타나는 것일 뿐 이다. 여기에서도 한 찰나를 중심으로 일체존재를 규명하고자 하는 설일체유부의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 대상의 행위와 움직임은 정확히 영사기와 필름의 유비로 설명할 수 있다. 매 찰나는 하나의 정지사진(film still)일 뿐이기 때문에 필름 자 127) 현대 뇌과학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뇌가 시각적 정보분석할 때, 색깔, 형태, 동작을 담당하는 부 분이 구분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특정한 뇌의 부위에 손상을 입은 환자의 경우, 색깔을 보지만 형태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아예 대상을 보지는 못하면서도 움직임은 감지하는 등의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연구결과는 인지과정에 대한 유가사들의 분석이 현대과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매우 치밀한 분석에 도달하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개괄적인 연구논문을 위해서는 다음을 참고할 수 있다. Cf. Zeman, Adam. (2008) "Consciousness: Concepts, Neurobiology, Terminology of Impairments, Theoretical Models and Philosophical Background." Handbook of Clinical Neurology, Vol. 90 (3d Series), 3 - 31. 128) 『순정리론』, 1612.; 『阿毘達磨順正理論』: 是故有為皆無行動。無行動故。所說身表。是形差別。 (T29.535c14 - 15) - 59 - 체에는 운동이 존재하지 않는다. 설일체유부는 이렇게 서로 별개의 독립적인 찰 나들을 관통해서 어떻게 행위, 행위의 연속성, 그리고 행위의 결과, 즉 업의 과보 가 성립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욕(欲, 뭔가를 행하고자 하는 심소) 등의 연(緣)의 힘이 능히 신체의 형태로 하 여금 무간에 다른 방소로 전전하며 생겨나게 한 것으로, 자세히 살피지 않을 경우 증상만을 일으켜 ‘실로 행동이 존재하여 지금 바로 취할 수 있다’고 말한 다.129) 설일체유부에서 심리적 존재와 물질적 존재가 직접적으로 상호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전제된 분석이다. 인간의 욕망 등의 특정한 조건이 형성되 면 물질적 존재인 신체(身)에 영향을 주어 무간(無間)으로 다른 장소에서 발생하 게 하는 신체의 운동으로 나타난다. 때문에 일상적인 감각경험의 차원에서 보면 실제로 행동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주의 깊게 살피(審 察)면, 연속적인 행위나 운동과 같은 다르마는 실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대상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따로 ‘표색’을 상정할 필요가 없다. 설일체유부가 대상의 시간적 연속성을 의식의 허구적 구성이라고 판단하였다 면, 이제 경량부는 물질의 형태와 같은 공간적 연장도 의식의 허구적 구성이라고 논증한다. 또한 존재하는 모든 유대(有對)의 실색(實色)은 반드시 개별적으로 실재하는 극 미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만 극미를 ‘길다(長)’는 등으로 말할 수는 없기 때문 에, 다수의 사물(극미)이 이와 같이 안포(安布, 배열)되어 차별된 상에 대해 ‘길 다’는 등으로 일시 설정하는 것이다.130)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모든 물질은 개별적인 극미들이 집적하여 만들어진다. 그 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극미를 ‘가장 미세한 물질의 기본단위’와 같은 것으로 정의 하였다. 그렇다면 가장 미세한 기본단위는 길이와 형태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길다’와 같은 형태는 가장 미세한 기본단위인 극미들이 특정한 형태로 배 129) 『순정리론』, 1162.; 『阿毘達磨順正理論』: 欲等緣力。能使身形無間異方展轉生起。不審察者。起增上 慢。謂有實行。現前可取。(T29.535c10 - 12) 130) 『구사론』, 601.; 『阿毘達磨俱舍論』: 又諸所有有對實色。必應有實別類極微。然無極微名為長等。故 即多物如是安布差別相中假立長等。(T29.68b22 - 24) - 60 - 열한 것을 언어적으로 가설한 것일 뿐이다. 이에 대해 중현은 모든 물질대상은 개별극미 단독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없다. 다수의 극미가 집적할 때에야 비로소 물질의 색깔이 나타나며 그를 통해 현색극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형색극미도 물질의 형태가 나타나는 것을 통해서 그 존재가 확인될 수 있다고 주 장한다.131) 그렇다면 ‘길다’ 또는 ‘동그라미’ 등의 형태를 가진 형색극미가 더 이 상 쪼개질 수 없다는 극미개념에 부응하는 것인가? 중현의 적대자는 형색극미이 면서 더 이상 세분화되지 않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지를 묻고, 설일체유부의 정의 에 따라 극미에 방분(方分)이 없다면 형태를 가지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반박 한다. 그러나 중현은 그와 같은 논리라면 현색(顯色)도 마찬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 고 지적한다. 현색극미처럼 부분을 가지지 않는 것이 저항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은 타당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현색극미는 무방분이고 저항을 가진다고 설 명한다. 또한 현색의 극미에 색채의 상(相)이 존재하지 않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형색의 극 미이면서 형태의 상(相)을 갖지 않는 것도 역시 존재한다고 한들 어떠한 지극 한 이치에 위배될 것인가? 132) 이 본문은 소위 ‘가장 미세한 물질’인 극미에 대한 설일체유부의 독특한 개념을 잘 보여주는 문장이다. 극미가 비록 색깔이나 형태 등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그것 이 특정한 색깔이나 형태의 형상을 가진다는 말은 아니다. 이런 해석은 비록 상 주성(常住性)은 인정하지 않지만, 바이셰시카의 실체개념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133) 형태극미의 형태라는 것은 공간적 크기를 갖는 어떤 형상화된 모 양이나 크기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극미 속에 실체 혹은 속성으로 존재하지만, 극미들이 특정한 크기와 형태로 배열하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중현에 따르면 이런 형색극미는 현색극미와 뒤섞여 생겨날 때에도 현색극미로 구성된 물 131) 『순정리론』, 1619.; 『阿毘達磨順正理論』: 如諸顯色。一一極微。無獨起理。設有獨起。以極細故。非 眼所得。於積集時。眼可得故。證知定有顯色極微。形色極微。亦應如是。寧獨不許自相極成 。 (T29.536b27 - c2) 132) 『순정리론』, 1620.; 『阿毘達磨順正理論』: 如顯極微顯相非有。如是亦有形色極微。而無形相。違何至 理。(T29.536c18 - 20) 133) Umesha (1987), 여기서도 원자들의 형태 등을 공간적 연장을 가지지 않는 실체 개념으로 설명한 다. - 61 - 질의 가장자리를 경계로 하여 현색을 포섭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푸른 구슬을 깨뜨리면 푸른색은 남게 되지만 구슬의 원형은 소멸하게 된다. 푸른색과 노란색 의 차이처럼 그 차이가 쉽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형태의 차이에 따른 자상 의 차이가 존재한다. 이런 설명은 니야야-바이셰시카의 전체상에 대한 비판에서 와 마찬가지로 깨지거나 마모된 구슬이 무한한 형태의 가능성에 따라 모든 경우 에 해당하는 형태극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다. 어떤 항 아리의 경계선 부분에는 이 항아리의 형태가 변화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 다시 말해 무한한 숫자의 형태극미를 가져야 한다는 문제가 발생하게 될 것이다. 세친은 『구사론』에서 현색극미의 실재성에 관한 설일체유부의 또 다른 해명을 소개하였다. 어둠 속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에 대상의 형태를 알 수 있지만 그것의 색깔을 볼 수 없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 형색을 어떻게 현색의 배열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134) 그러나 세친은 오히려 그런 예에서 볼 수 있 듯이, 어둠 속에서나 멀리 있는 대상을 볼 때에는 단지 ‘길다’거나 ‘군대의 무리’ 라는 등의 집합체만을 지각할 뿐, 그것들의 구체적인 형태나 색깔을 보지 못한다 고 반박한다. 여기서도 세친이 화합의 결합방식을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 된다. 중현은 지금 어둠 속에서 보이는 ‘나무’의 형태를 통해서 색깔과는 구분되 는 형태의 극미가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세친에게 어둠 속에서 흐릿 하게 보이는 ‘나무’의 형태는 현재의 지각이 실재에서 그만큼 멀어졌다는 것을 의 미할 뿐이다. 그것은 마치 멀리로부터 개별적인 병사들은 보이지 않고 단지 ‘군대 의 행렬’만이 보이는 것과 유사하다. 바로 이와 같이 우리가 극미들의 집적을 통 해서 세계를 볼 때, 개별적인 극미들의 실재가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이나 먼 거리와 같은 제한적 조건 하에서 그것들로부터 발생된 특정한 형상을 보는 것 이 우리의 지각경험인 것이다. 2. 현색(顯色)극미와 신체의 행위작용 『유가사지론』에서 신표(身表)로 설명되었던 행위나 운동은 설일체유부에서는 형색(形色)의 찰나적 발생에 대한 가설적 구성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경 량부에서는 이 형색도 현색 134) 『阿毘達磨俱舍論』: 豈不闇中或於遠處觀杌等物了形非顯。寧即顯等安布為形。(T29.68c3 - 5) - 62 - (顯色)의 특정한 배열에 대한 관념적 구성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렇다면 물질적 신 체의 행위 작용은 단지 가설적인 것으로 설명될 뿐인가? 이 질문은 ‘어떠한 행위 에 대한 윤리적, 수행적 결과물을 인과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와 관 련되어 있다. 설일체유부에서는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은 물질적 신체이고, 때문에 바로 그 신체가 그 행위의 과보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신체의 행위가 단지 가설 적이라면 행위의 작용은 어떻게 지속되고 그 결과는 누가 맺을 것인지 알 수 없 게 된다. 때문에 행위를 설명하는 형색의 존재가 반드시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경량부의 대답은, 몸을 여러 다양한 형태로 운동하게 하는 ‘사(思)’가 몸을 매개(身門)로 하여 작 용하기 때문에 ‘신업’이라 이름한 것이다.135) 마찬가지로 사(思)가 입(口)을 매개로 하면 구업(口業), 의(意)를 매개로 하면 의업 (意業)이 되는 것이다. 결국 행위에 대한 책임주체는 사(思)가 되는 것이다. 이는 물론 행위에 대한 윤리적 판단에서 신체적 행위(身表)보다는 의지적 판단(思)을 근거로 삼는 대승 계율의 기본정신과 일치한다. 그러나 경량부 계통의 이런 주장 은 모든 행위와 책임을 심리화하는 문제를 낳게 되어 구체적인 수행적 행위를 추 동하지 못할 위험성이 있다. 설일체유부는 교학적인 측면에서도 실천적인 측면에 서도 이런 주장을 용인할 수 없었다. 먼저 중현은 ‘신업’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 다. 색처에 가행의 마음이 생겨날 경우, [신업]은 색취의 가장자리에 두루 일어나 능히 경계가 되어 현색과 격별(隔別, 차별)되는데, 이는 현색과 동일한 법이 아 니기 때문에 모든 대법자(大法者)는 이를 형색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였다.136) 물질적 영역에 마음의 작용이 가해질 경우 신체의 행위작용은 그 신체의 가장 자리의 경계선을 따라 발생한다. 이것은 신체를 구성하는 색깔 등과는 구분되는 형태의 윤곽과 같은 것이며, 아비다르마 논사들은 그것을 형색이라고 이름하였다 는 것이다. 행위라는 것은 일련의 개별적 찰나의 형색들의 집합을 개념적으로 구 상한 것이다. 135) 『阿毘達磨順正理論』: 謂能種種運動身思。依身門行。故名身業. (T29.537b14 - 15) 136) 『순정리론』, 1622.; 『阿毘達磨順正理論』: 然有色處。加行心生。於色聚邊。周遍而起。能為壃界。隔 別顯色。此與顯色。非同法故。諸對法者。立以形名。(T29.537a13 - 15) - 63 - 그러므로 다찰나에 걸친 행위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한 찰나의 행위, 즉 현색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모든 행위는 한 찰나의 형색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이 고 그 행위의 결과도 한 찰나의 형색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형색 을 부정한다면, 어떻게 신체적 표상 혹은 행위(身表)를 설명할 수 있을까? 상좌 슈리라타는 설일체유부 논사들과 마찬가지로 신표(身表)는 형색이라고 할 수 있지 만, 그것은 다만 가설적인 것으로 실재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137) 형색이 비실재 한다는 상좌 슈리라타의 주장과 그에 대한 중현의 반론을 통해서 설일체유부의 실재개념과 실재의 연속성에 대한 이해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길다’는 등의 형태가 바로 가설적인 것으로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인 가? 길이 등을 성취하는 종자와 같은 극미를 설하여 형색이라 이름하니, 이것 이 바로 가설적인 것으로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인가?138) 중현의 질문은 두 가지 방향으로 제시된다. 첫째는 ‘길이’ 등의 형태가 가설적인 것으로써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동의할 수 있다. 개별적인 극미 에 ‘길이’나 동그라미 등의 특정한 ‘형태’가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중현의 가극미 개념과 마찬가지로 가설적으로 상정되는 것이다. 극미 자체가 대상의 지 각에서 경험되는 것과 같은 특정한 길이나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런 차원에서 현색극미가 가설적이라고 주장한다면 설일체유부에서도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길이나 형태를 구성하는 대종극미와 같은 것을 137) 『阿毘達磨順正理論』: 又若遮遣行動及形。汝等經部宗。立何為身表。此中經主。辯彼宗言。身表即 形。然假非實。(T29.537a24 - 26).; 『순정리론』, 1623. 138) 『阿毘達磨順正理論』: 為長等形是假非實。為成長等如種極微說名為形。是假非實。若長等形。是假非 實。與對法者所說無違。若成長等。如種極微。說名為形。是假非實。則不應理。由彼所宗以顯成形。顯 非假故。(T29.537a27 - b2).; 『순정리론』, 1624. 그림 1 : 경계선의 찰나적 형색과 개념적 구성 - 64 - 가설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반론자인 경량부에서도 현색극미 는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궁극적 존재요소로서의 극미를 부정한다면 자기모순에 빠질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중현은 상좌의 논증방식을 비판하면서, 구성요소와 구성물 간의 관계에 대한 설일체유부의 관점을 보여준다. 만일 형색(形色)은 다수 의 현색극미들이 특정하게 배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형색과 현색은 본질적 으로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형색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만일 경량부의 주장대로라면, 오히려 현색(顯色)도 가유이고 그 가유의 현색과는 별도로 형색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형색도 실유가 아니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중현의 논리적 전제는 현색극미가 모여서 형색극미 가 된다면 그 양자는 실재론적 관점에서 연속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전제는 정확히 가극미와 실극미의 실재성에 대한 중현의 해석방식과 일치한 다.139) 이와 같은 일련의 비판에서 중현이 염려하고 있는 것은 일체법의 실재성을 부 정하는 견해로 떨어지는 것이다. 만약 형색극미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받 아들인다면, 설일체유부의 관점에서 현색극미도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논리적 귀결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현색이 만약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경부(經部)는 괴법론(壞法論) 즉 ‘법을 파괴하는 논’과 같아서 [그들과] 함께 말할 수 없을 것이다.140) 일단 현색극미의 실재성을 부정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일체법을 부정하는 파괴적 인 결과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설일체유부와 대승사상에서 가장 첨예한 대립지 점이 바로 이곳이다. 설일체유부는 일체법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반면 대승사상은 일체법무아를 기치로 내걸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설일체유부의 관점에서 본다 면 상좌 슈리라타와 같이 형색의 비실재성을 주장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법을 파 괴하는 자들의 무리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중현의 이런 염려 혹은 비판이 특히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세친을 통해서 실제로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139) 중현의 전제에 따르면, 극미들의 결합에서 개별극미와 극미들이 취집은 존재론적 연속성을 지녀야 한다. 그런데 경험적으로 관찰되는 물질을 분석하여 최소단위에 도달한 미취(微聚)는 실재한다. 사유 에 의해 분석해 보면 그 미취를 구성하는 극미(極微)라는 존재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서 미취(微聚)와 극미(極微)는 실재론적 관점에서 연속성을 지녀야한다. 따라서 비록 개별극미의 존재는 추론에 의해 도달한 가극미(暇極微)이지만 그것의 실재성은 의심할 수 없다. 140) 『순정리론』, 1624.; 『阿毘達磨順正理論』: 顯若非實。是則經部。同壞法論。不可與言。(T29.537b2 - 3). - 65 - 4절. 극미의 접촉 다르마의 분석에 있어서 설일체유부는 서로 분별(分別)되는 다르마들이나 개념 적 범주를 명확히 구분하지(clear and distinct) 않고 ‘뒤섞어 버리는(雜亂)’ 논의 방식을 대단히 경계한다.141) 따라서 물질적, 심리적, 관념적 차원에서 궁극적인 단계에까지 분석된 다르마들을 분명하게 개념적으로 정의하고 또 그것들 사이의 차별성을 선명하게 하는 것이 아비다르마철학의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극미들의 접촉과 결합에서도 그것이 극미들의 개별적 특성을 상실하는 결과를 야기하고 서 로 뒤섞인 어떤 형태를 만들어 버린다면 설일체유부적인 방식은 아니다. 설일체 유부의 접촉문제는 이처럼 극미들의 개별성을 확보하면서 동시에 접촉 혹은 결합 한 물질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데 있다. 극미의 접촉(接觸)은 극미논쟁에 있어서 학파간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부분인데, 그것은 접촉의 해석에 따라 극미의 결합과 조대한 물질의 구성원리 등 이 전혀 다르게 설명되기 때문이다. 먼저 극미의 접촉은 극미가 방위(方位)와 부 분(部分)을 가지는가 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비유자-경량부 계통의 주장에서처럼 극미가 방분(方分)을 가지는 경우에는 일단 접촉의 난점은 해소된 다. 대신 부분을 가지는 극미가 어떻게 ‘가장 미세한 물질(색)의 기본단위’일 수 있는지 등 극미개념 자체에 대한 추가적인 해명이 요구된다. 그러나 더 이상 쪼 갤 수 없는 형이상학적 극미의 개념에서는 접촉의 성립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난점이 발생한다. 만약 제 극미가 전체적으로 서로 접촉하는 것이라면, 실유의 극미 자체가 서로 뒤섞이고 마는 허물이 있게 되며, 만약 부분적으로 접촉하는 것이라면, 극미가 부분을 갖는다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142) 극미들이 접촉한다고 하면 부분으로 접촉하거나 전체적으로 접촉해야 할 것이다. 141) 한역 경전에서 ‘잡난(雜亂)’이라는 표현은 빈번히 등장하는 번역어이기는 하지만, 특히 아비다르마 논서들, 『구사론』, 『순정리론』 등에서 집중적이고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비유자-경량부 논사들이 존재의 범주를 단순화하고자 하는데 반해 상세하게 다르마의 종류를 나열하 는 설일체유부의 분별적 경향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142) 『阿毘達磨順正理論』: 若諸極微遍體相觸。即有實物體相雜過。若觸一分。成有分失。(T29.372b5 - 6).; 『순정리론』, 343 - 344. - 66 - 그런데 만약 전체적으로 접촉한다면 모든 극미들이 하나의 극미의 위치에 모두 적집되어 결과도 단지 하나의 극미의 크기가 되며, 때문에 하나의 극미의 자리에 다수가 뒤섞이는 혼란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반면 부분적으로 접촉한다면, ‘가장 미세한’ 극미에 그 보다 미세한 부분이 존재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모순이 발생한다. ‘따라서 극미들의 접촉이 불가능하다’는 이 주장이 설일체유부에 의해 제기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후 『유식이십론』, 그에 따 라 『성유식론』 등에서 설일체유부나 경량부의 극미설을 비판하면서 가져오는 논 거가 정확히 이 주장의 반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주장은 설일체유부가 자신들의 형이상학적 극미설을 옹호하면서 접촉을 부정하기 위하여 사용한 논증의 한 부분이다. 반론자는 ‘만약 극미들이 접촉하지 않는다면 극미들 사이에 간격이 있다는 말 인데 이것들이 어떻게 흩어지지 않고 유지되는가?’라고 묻는다. “극미는 서로 접촉하며, 차례대로 배열되어(次第安布) 능히 서로를 포섭하여 유지(攝持)한다”고 말한 것처럼 나 또한 “[서로 접촉하지 않지만] 풍계의 힘으 로 말미암아 근접 배열(隣近安布)되어 능히 서로를 포섭하여 유지한다.”고 말 한다.143) 경량부는 만약 극미들이 서로 접촉하지 않으면 극미의 집적이나 조대한 물질이 상태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본다. 조대한 물질이 구성될 수 있는 것은 극미 들이 특정한 배열로 나열되고 접촉하여서 서로를 포섭하고 그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중현은 만일 경량부 상좌가 자신의 방식대로 주장 한다면, 중현 자신도 마찬가지로 타당한 답변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개별극 미들은 간격을 가지고 떨어져 있지만 이 풍계(風界)의 작용력에 의하여 흩어지지 않고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144) 이렇게 하여 경량부와 설일체유부는 극미접촉 에 대해 긍정과 부정으로 평행선을 그린다. 그렇지만 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극미 자체가 부분 혹은 가장 미세한 공 143) 『阿毘達磨順正理論』: 如汝所言。極微相觸。次第安布。能相攝持。我亦說言。由風界力。隣近安布。 能相攝持。(T29.373a5 - 7).; 『순정리론』, 349. 144) 앞의 4대종에 대한 논의에서 본 바와 같이, 지수화풍의 4대종 가운데에서도 보다 근원적인 하나를 설정하려는 노력들이 있었다. 견고한 물질성을 기반으로 하여 점차 유연한 방향으로 순서를 두는 방 식과, 보다 거친 형태의 지(地)에서부터 점차 더 미세하고 가벼운 것을 궁극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었다. 여기서는 바람(風)의 흩어지게 하고 끌어들이는 힘을 가장 근원적인 것으로 제시한다. - 67 - 간적 기본단위라고 보는 경량부에서 접촉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명확하지 않 다. 설일체유부의 경우에도 풍계가 유지시켜주는 극미들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 고 함께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이 문제는 『구사론』에서 대덕(大德)이 제시한 대답으로 수렴한다. 일체의 극미는 실로 상호 접촉하지 못하며, 단지 그 사이가 무간(無間)이기 때 문에 일시 ‘접촉’이라는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145) 공간적인 측면에서 극미의 접촉을 말할 때 대덕의 해석은 경량부와 신유부에서 모두 받아들일만한 것이다. 세친도 대덕의 주장을 지지한다. 비유자-경량부적인 관점에서 극미는 공간적 크기를 가지며 자기 공간에서 저항하는 성질을 가진다. 극미가 중첩되는 것을 불가능하다. 따라서 극미들이 중첩되는 부분이 없이 서로 접촉한다는 것은 중간에 어떤 빈 공간도 없이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중현의 경우에 극미는 접촉하지 않는다. 그러나 극미들이 흩어질 정도로 극미들 사이에 빈공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극미 사이에] 색과의 접촉이 일어날 만한 극미 크기의 간격도 없기 때 문에 ‘무간’이라 이름하였다. 곧 대종극미가 이와 같은 무간으로 가까이 근접 하여 생겨날 때를 일시 설하여 ‘접촉’이라 한다”는 뜻이 성취될 수 있으며, [그 럴 때 극미는] 머무는 공간(住處)이 동일하지 않지만, 혹은 무간으로 머무는 것 이지만 가히 유대(有對)이며, 부분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 성립한다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146) 본문에서 중현은 물질(색)과 대종극미의 두 층위에서 해명을 제시한다. 극미가 무 간(無間)으로 접촉한다는 것은 조대한 물질(색)이 접촉할 때 그 접촉하는 대상들 사이에 공간이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무간은 대종극미 즉 가장 미세한 개별적인 극미도 끼어들 수 없다는 의미이다. 설일체유부에서 극미는 부분을 갖지 않는 존 재이기 때문에 크기의 측면에서 영(零, śūnya)과 마찬가지이다. 즉 어떤 두 개의 145) 『阿毘達磨俱舍論』: 然大德說。一切極微實不相觸。但由無間假立觸名。(T29.11c23 - 24). AKBh I.43d. (33.2 - 3): na spṛśanti nirantare tu spṛṣṭasaṃjñeti Bhadantaḥ | 이 대덕의 설(說)은 『비 바사론』에서 인용한 것이다. 『阿毘達磨大毘婆沙論』: 大德說曰。一切極微實不相觸。但由無間假立觸 名. (T27.380a20 - 21). 여기서 등장하는 대덕(大德, bhadanta)에 대해서는 각천(覺天, Buddhadeva)으로 보는 입장(木村泰賢)과 법구(法救, Dharmatrāta)로 보는 견해(宮本正尊)가 있다. 146) 『阿毘達磨順正理論』: 是故所言無極微量。觸色所間。故名無間。如是無間。大種極微。隣近生時。 假說為觸。其義成就。非住處同。或無間住。可許有對無分義成。(T29.373c11 - 14).; 『순정리론』, 355. - 68 - 물질이 접촉한다는 것은 그것들이 개별극미의 차원에서도 둘 사이에 공간이 없이 머무르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 개별극미는 서로의 공간을 방해하지 않고, 동일한 공간에 중첩되지도 않으며, 완전히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무간으로 나란히 존 재한다는 것이다. 세친은 대덕의 해석이 극미가 방분을 가지건 가지지 않건 모든 경우에 극미의 접촉을 문제없이 잘 설명해 준다고 풀이한다.147) 그러나 내용적으 로 거의 동일해 보이는 해석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입장에는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중현에게 극미들은 결코 접촉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대덕의 설은 무 간비접촉설이라 해야 마땅할 것이지만 가설적으로 접촉한다고 할 수 있을 뿐이 다. 반면 경량부적인 입장에서는 그것은 정확히 무간접촉을 의미하며, 세친에게는 무간으로 나란히 있는 것을 접촉이라고 가설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접촉의 해명 은 신근(身根)과 촉경(觸境)의 접촉에서처럼 이후 지각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 된다. 5절. 극미의 결합방식: 결합, 취집, 화합, 화집 1. 『니야야수트라』의 극미설 먼저 니야야학파의 원자설에 대하여 가우타마(Gautama)의 『니야야 수트라』 (Nyāyasūtra)148)와 바챠야나(Vātsyāyana)의 주석 『니야야수트라바시암』 (Nyāyasūtrabhāṣyam)을 중심으로 점검해 보도록 하겠다.149) 『니야야 수트라』는 원자에 대한 논리적 분석의 경향이 뚜렷하고, 바챠야나의 주석서에는 원자론과 관련된 핵심적인 주제들이 대부분 다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이후 인도철학에서 147) 『구사론』, 99. fn. 116. 148) 『니야야 수트라』의 저술시기에 대해서는 서기전 4세기를 상한선으로 잡는 보다스(Bodas)의 가설에 서부터 서기 200 - 500 CE를 최종적인 편집시기로 보는 야코비(Jacobi)의 주장까지 추정의 폭이 넓 고 확정적이지 않다. 다스굽타(Dasgupta)는 『바이셰시타경』이 붓다 이전까지 소급할 수 있을 것이라 는 견해와 함께 늦어도 서기 80년 경에 생존하였던 차라카(Caraka)보다 이전에 쓰여진 것은 확실하 다고 본다. 어느 경우이건 『바이셰시카경』이 『니야야 수트라』보다 앞선다고 보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Cf. Gangopadhyaya (1980), 121. 149) 기간의 불교극미론 연구는 주로 바이셰시카와의 연관성에 집중하였기 때문에 『니야야수트라』와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니야야수트라』는 극미개념과 관련된 분석적이고 논리적 인 탐구에 관한 가장 고대의 산스크리트 문헌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는 그 중요성이 간과되어 온 것이다. 이 장에서는 Nyāyasūtra & bhāṣyam의 2장과 4장에 나타나는 극미논의를 중심으로 극 미개념과 관련된 주제들에 대한 니야야학파의 견해와 타 학파에 대한 비판을 검토해 보도록 한다. - 69 - 전개되는 ‘가장 미세한 물질의 기본단위’로서의 원자에 대한 논의의 구도가 늦어 도 이 시기에는 어느 정도 완결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이런 정황증거는 『니 야야 수트라』를 산출한 정리학파(正理學派, nyāyavāda)에서 형이상학적 원자론 이 기원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강하게 시사한다.150) 초기 바이셰시카는 4원소설을 중심으로 물질의 질료적 근원과 구성원리에 집중하면서, 궁극적 실체인 특수 (viśeṣa)의 해명과정에서 원자(aṇu) 개념을 수용하였다. 바이셰시카의 원자론이란 4원소설을 중심으로 원자개념을 통합하는 체계를 발전시킨 결과물이라 할 수 있 다. 반면 니야야의 원자론은 정확히 ‘가장 미세하고 궁극적인 존재의 기본단위’에 대한 탐구라는 방향으로 전개되며, 사유의 방식에 있어서는 분석적이고 논리적이 다. 극미개념의 논란에 있어서 몇 가지 핵심적인 주제들, 즉 극미개념의 정의, 형 이상학적 극미와 무한소급의 문제, 부분과 전체, 결합의 방식 등에 관한 『니야야 수트라』와 주석의 견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극미는 분할에 의해 도달하는 가장 미세한 단위이다. [어떤 것이] 거기에서 가장 작은 것으로 [분할되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 [그래 서] 그 보다 더 작은 부분이 존재하지 않는 그것을 극미라고 부른다.151) 반론자는, 그렇다면 부분이나 방분에 토대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분할되 는 것은 비존재로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논주는 극미는 더 이상의 작은 부분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의 분할은 이루어지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완전히 소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극미가 더 이상의 부분을 가지 지는 않지만, 일정한 기본단위로서의 크기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할 수 있 150) 『니야야 수트라』의 저술시기에 대한 가장 늦은 추정치가 서기 200 - 500년이고, 『니야야 수트라』 에서 제기되고 있는 주제들을 다루고 있는 『대비바사론』의 저술시기는 나가르주나(Nāgārajuna, ca. 150 CE)이전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분석적 원자개념의 기원 문제는 『니야야 수트라』의 저술연대의 상하한선을 어디로 잡느냐에 따라 니야야학파 혹은 다른 제3의 학파의 영향으로 결론지어질 수 있다. 이 논문에서는 바챠야나(Vātsyāyana)의 『니야야수트라바시얌』을 서기 약 300년 경으로 추정하는 견 해에 따라, 『니야야수트라』의 저술은 그 이전 혹은 바챠야야 자신의 저술 가능성도 염두에 둔다. Cf. Gangopadhyaya, Mrinalkanti (1980), 121, 126. 따라서 Nyāyasūtra & bhāṣyam의 저술시기는 무 착(Asangha)과 세친(Vasubandhu) 이전으로 확정할 수 있지만, 『비바사론』과의 전후관계는 불명확 한 것으로 판단한다. 151) NySBh 4,2.16. (266.14 - 15): yaḥ paramālpastatra nivartate. yataś ca nālpīyosti, taṃ paṛamāṇuṃ pracakṣmahe iti || 16 || - 70 - 다. 2) 극미는 감각기관을 초월한다. 극미(paramāṇu)는 [단순히] 함께하는 상태에서는 감각지각의 대상이 아니다. 원자들은(aṇūnām) 감각기관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전체의 존재는 다른 실체 이고, [원자들 자체는] 감각지각의 대상이 아니다.152) 개별적인 극미들이 감각기관의 지각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불교 극미설과 일 치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개별극미들이 함께 있는 상태(samavasthānaṃ)에 있다 고 하더라고 그것이 바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는 니야야학파의 입장을 드러낸 다. 개별적인 극미들이 함께 결합하여(saṃyoga) 전체(avayavi)를 이룰 때 그것은 개별적인 것들의 양적누적과는 다른 별도의 실체성(dravyāntaram)을 획득한다. 이렇게 개별극미들은 함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전체로써 단일한 실체성을 지닐 때 지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부분은 극미의 결합(saṃyoga)에 관한 문 제에서 니야야학파의 특수한 입장을 대변한다. 3) 삼중체 이상의 결합상태에서만 감각지각되는 물질로 나타난다. [감각지각되는 물질로 나타나는 것은] 삼중체 이상에서이다. 부분과 방분이 [최종적으로 확정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무한한 수의 실체 들이 [존재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삼중체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153) 극히 미세한 극미들은 그 자체로는 감각지각의 대상이 아니지만, 그것들이 모여 서 전체라는 실체성을 획득하게 되면 감각지각의 대상이 된다. 이 때 극미들의 결합은 먼저 두 개의 극미가 모여서 이중체(dyad, dvyaṇuka)를 구성하며, 다시 이것들이 세 개가 모여서 삼중체(triad, tryaṇuka, or truṭeḥ)를 이룬다. 다시 말 해 총 여섯 개의 극미가 모여서 하나의 삼중체를 이루며, 이 삼중체는 전체로서 독립적인 실체성을 지니며, 감각지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만약 극미가 더 이상 의 부분을 갖지 않는다는 앞의 정의가 없을 경우, 부분이 최종적으로 확정된 상 태가 아니게 될 것이며 따라서 개별적인 극미는 무한히 분할을 거듭할 것이다. 152) NySBh 2,1.34. (75.12 - 13): paramāṇusamavasthānaṃ tāvad darśanaviṣayo na bhavati-- atīndriyatvād aṇūnām. dravyāntaraṃ cāvayavibhūtaṃ darśanaviṣayo nāsti. 153) NySBh 4,2.17. (266.17 - 267.2): paraṃ vā truṭeḥ || 4.2.17 || avayavavibhāgasyānavasthānād dravyāṇāmasaṃkhyeyatvāt truṭitva nivṛttir iti | - 71 - 그렇다면 감각지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가장 작은 물질도 무한한 부분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에, 삼중체라는 개념 자체의 성립이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4) 부분과 전체 전체가 인정되지 않는다면, 일체는 파악될 수 없다. 일체에 대한 감각지각이 인식되기 때문에, [구성요소와는] 다른 실체성을 지닌 전체는 존재한다.154) 니야야-바이셰시카의 학파철학에서 일체(一切, sarvam)는 6구의(句義), 즉 실체, 속성, 작용, 보편, 특수, 내속의 여섯 가지로 요약된다. 4원소들은 특수로서 실체 이며 영원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이들 개별적인 실체들은 감각지각의 대상이 될 수 없고, 그것들이 모여서 이룬 조대한 물질들(gross objects)만이 감각지각된다. 이 때 지각되는 조대한 물질은 명백히 개별적인 구성요소들과는 성질을 달리한 다. 그렇다면 이들 조대한 물질의 지각은 어떻게 가능한가? 먼저 어떤 대상이 파 악되기 위해서는 그것들의 기체(基體, adhiṣṭhāna)가 존재해야 한다. 항아리에 대해서는 “검은색,” (숫자의) “1,” “큰 것,” “결합,” “움직임,” “존재함,” 그리고 “진흙” 등과 같은 속성들이 파악되기 때문에, 항아리의 구성요소들과는 구별되는 실체성을 지닌 전체, 즉 “항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양한 요소들이 모여서 항아리라는 전체를 이루는 것은 결합(samyoga)이라 는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 [구성요소와는] 다른 전체라는 대상이 존재하게 된다. 실로 유지와 견인에서 결집(saṃgraha)이 일어난다. 결집이라는 것은 결합(saṃyoga)과 수반하고, [별도의] 다른 속성을 가지며, 점성과 유동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굽지 않은 토 기에서는 물과 결합으로 인해, 구운 토기에서는 불과의 결합(saṃyoga)으로 인 해 [이루어진다].155) 먼저 전체라는 것은 부분들이 '결집된 것(saṃgraha)'이다. 이 결집이 발생하는 것은 부분을 이루는 구성요소들에 대한 견인(karṣaṇa)과 그것의 유지(dhāraṇa) 154) NySBh 2,1.34. (75.10): sarvāgrahaṇam avayavyasiddheḥ || 2.1.34 || (75.16 - 17): tena sarvasya grahaṇāt paśyāmo 'sti dravyāntarabhūto 'vayavīti | 155) NySBh 2,1.35 (76.3 - 5): avayavyarthāntarabhūta iti, saṃgrahakārite vai dhāraṇākarṣaṇe, saṃgraho nāma saṃyogasahacaritaṃ guṇāntaraṃ snehadravatvakāritam apāṃ saṃyogādāme kumbhe agnisaṃyogāt pakve | - 72 - 에 의해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결집은 다른 속성 이를테면 점성(snehatva, viscidity)이나 유동성(dravatva, fluidity) 등의 속성과 결합(saṃyoga)을 수반한 다. 진흙과 물의 결합에 의해 토기가 만들어지고, 불(agni)과의 결합에 의해 구운 토기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여러 가지 구성요소들이 결집한(saṃgraha) 전체로서 의 토기(kumbha)는 실체성을 지니는 지각의 대상이 된다. 이와 같이 결집에 의 해 별도의 실체를 발생시키는 니야야 학파의 결합개념은 아비다르마철학의 집적 의 개념과 차별되는 것이다. 5) 극미의 결합, 화합, 화집 극미의 결합방식은 학파들간에 첨예한 이론적 대립을 불러일으킨 논란의 쟁점 이 되었다. 그것은 각각의 극미개념에 조응하여 철학적으로 일관된 결합의 방식 을 규명하는 것에서부터, 결합한 극미들이 구성한 집적물의 실재성 여부와 그것 에 대한 인식가능성의 문제 등까지 연결되면서, 존재론과 인식론적 논란의 핵심 으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니야야학파의 결합방식과 아마도 비유자- 경량부와 설일체유부로 추정되는 반론자들과의 논란을 통해 결합의 개념과 용어 의 의미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니야야수트라』 2장에는 니야야학파의 적집개념에 반대하는 반론자의 주장이 등장한다. 이들은 원자의 화합(aṇusañcayam)156)을 감각지각의 대상으로 가설한 다. 전체[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자는 ‘직접지각의 착오가 없어야 한다’라고 주장하 기 때문에, 원자의 적집(aṇusañcayam)을 감각지각의 대상으로 가설하는 것이 다. 무엇이 물어져야 하는가? 라고 하면, “이 하나는 실체”이기 때문에 하나의 인식의 대상에 대해 분명하게 물어져야 한다.157) 반론자들은 니야야의 실재하는 전체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직접지각은 착오가 없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원자들은 화합(sañcaya)을 통해서 156) sañcaya 혹은 saṃcita는 “화합(和合)”, samudāya 혹은 samudita는 “화집(和集)”이라는 전문적 인 용어로 번역되었다는 사실은 이곳 2장 5절에서 입증하려고 하는 주제이지만, 개념적 혼란을 막기 위한 편의상 결론으로 제시할 용어를 처음부터 사용하기로 한다. 157) NySBh 2,1.35 (76.7 - 9): athāvayavinaṃ pratyācakṣāṇakaḥ 'mā bhūt pratyakṣalopaḥ' ity aṇusañcayaṃ darśanaviṣayaṃ pratijñānaḥ kim ayam anuyoktavyaḥ?, 'ekam idaṃ dravyam' ity ekabuddherviṣayaṃ paryanuyojyaḥ | - 73 - 가설적 지각의 대상이 된다. 이들의 주장에 대해 니야야논사는 원자의 화합에 의 해 만들어진 가설적인 그 대상이 ‘하나의 실체’이기 때문에 하나의 인식대상이라 는 점을 해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론자는 전체라는 개념은 부정하지만, 인식 의 대상이 되는 어떤 조대한 물질의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원자의 화합 (aṇusañcaya)’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원자의 화합’은 그 조 대한 물질에 대한 하나의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서 그 실재성이 물어져야 할 것이다. 『니야야수트라』는 만일 그것이 분할되지 않는 하나의 대상으로 존재 한다면, 그것은 니야야의 전체와 다를 것이 없게 될 것이고, 그것이 더 작은 부분 으로 쪼개지는 것이라면 하나의 인식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한다. 반론자는 여전히 전체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158) 만약 그 대상이 실재성을 지닌 전체가 아니라, 멀리에서 바라본 군대(senā)나 숲(vana)과 같은 것이라면, 개별적인 병사들이나 개별적인 나무들이 모인 적집(saṃcita)이 군대나 숲이라는 하나의 인식을 발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까운 거리에서 보면, 군대나 숲이라는 것들은 사실 개별적인 병사 혹은 나무들로 보일 것이다. 물론 이 때에는 군대나 숲이라는 하나의 인식은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군대나 숲에 대한 인식은 가설적인 것이다. 바로 여기서 반론자가 주장하는 결합의 방식이 화 합(saṃcita)159)이다. 감각기관에 포착되는 조대한 물질대상은 하나의 인식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관찰자의 상황에 따라서 병사나 나무로 분석되고, 다 르게 관찰될 수 있기 때문에 가설적인 존재이다.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사물 을 구성하는 궁극적인 구성요소인 극미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극미는 감각지관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개별 병사나 나무처럼 상황에 따라 포착되는 것도 아니다. 158) NySBh 2,1.36 (76.13 - 15): senāvanavad grahaṇamiticet ? nātīndriyatvādaṇūnām || 2,1.36. || 군대(senā)나 숲(vana)과 같이 파악/인식된다고 하면? 아니다. 원자들(aṇūnām)은 감각기관을 초월 하기 때문이다. yathā senāṅgeṣu vanāṅgeṣu ca dūrādagṛhyamāṇapṛthaktveṣu 'ekam' ity upapadyate buddhiḥ evam aṇuṣu saṃciteṣv agṛhyamāṇapṛthaktveṣu 'ekam' ity upapadyate buddhir iti | 군대의 경우와 숲의 경우에서와 같이, 멀리서 각각이 인식되지 않는 성질을 가질 때 ‘하나’의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그와 같이 각각의 [개별적인] 성질로는 파악되지 않고, 화합(saṃcita)된 원자들에 대 해서 ‘하나’라는 인식에 도달하는 것이다. 159) 이 특정한 결합의 방식에 대한 산스크리트어 표기는 문헌에 따라 saṃcita 혹은 sañcita를 취하고 있는데, 이하 인용문과 그에 대해 해설에서는 해당 문헌의 표기에 준하여 사용하도록 하겠다. 그러나 문헌 본문의 인용이나 해설이 아닌 맥락에서는 『니야야수트라』와 『구사론』의 용례에 따라 화합(和合) 을 saṃcita로 표기하도록 한다. - 74 - 바로 이 감각지각의 대상은 결합된 하나로 관찰되기 때문에 그것은 관념 (pratyaya)이 지각되는 것이라고 관찰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다른 실체성을 지닌 대상인가? 아니면 원자의 화합(saṃcaya)에 의한 대상인가?.... 원자들이 각기 별도로 존재하는 경우에 각각이 파악되지 않고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라는 표현은 기둥에 대해서 사람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어떤 것이 아닌 것에 대해 그것이라고 하는 관념이다.160) 니야야학파의 반론자는 그들의 결합방식인 화합에 의해서 지각대상이 결합된 하 나로 관찰되며, 그것은 일종의 관념(pratyaya)에 대한 인식이라고 주장한다. 여기 서 ‘하나’의 관념은 기둥에 대해서 사람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것이 아닌 것에 대해 그것이라고 하는 관념과 같은 종류의 것이다. 따라서 이 하나의 관념은 대상을 구성하는 개별적인 구성요소들과는 다른 가설적인 존재일 뿐이다. 이런 반론자의 주장은 ‘직접지각에 착오가 없어야 한다’는 자신들의 주장과 모순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감각지각은 실재하는 대상을 직접 지각하지 못하지만, 다섯 가지 감각대상에 대한 감각지각은 무분별이기 때문에 분별된 의 식과는 구별된다고 하는 경량부 상좌 슈리라타의 관점에서는 쉽게 이해될 수 있 다. 이에 대해 신유부의 중현은 상좌 슈리라타가 주장하는 다섯 가지 감각지각은 분별의식과 다른 것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이 인용문에서 특히 흥미로운 점은 감 각지각의 대상에 대해 관념(pratyaya)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pratyaya는 ‘확신’이나 ‘확증’, 또는 ‘개념,’ ‘근거’등의 의미영역을 가지고 있으 며, 불교에서는 ‘근본적 개념’이나 ‘상호의존하는 조건’ 등을 의미할 수 있다. 따 라서 『니야야수트라바시얌』의 해당 문구는 불교도들에게, 가설적 개념의 존재라 는 의미 뿐만 아니라, 이를테면 감각을 초월하는 극미들이 ‘상호의존하는 조건’에 의해 발생하는 하나의 현상으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해석은 단순히 언어적 유희를 넘어서, 모든 연기적 존재들은 그 실재성이 없는 가설적인 존재들 일 뿐이라는 『중론』의 심오한 의미를 함축할 뿐 아니라 다수의 원인이 함께 조건 이 되어 현상으로 나타난다는 아비다르마철학의 구생(俱生) 개념과도 연결된다. 160) NySBh 2,1.36 (77.8 - 12): darśanaviṣaya evāyaṃ parīkṣyate yoyam ekam iti pratyayo dṛśyate sa parīkṣyate-- kiṃ dravyāntaraviṣayo vā ? athāṇusaṃcayaviṣayaḥ ? iti, atra darśanamanyatarasya sādhakaṃ na bhavati | nānābhāve cāṇūnāṃ pṛthaktvasyāgrahaṇādabhedena 'ekam' itigrahaṇam atasmiṃstaditipratyayo yathā sthāṇau puruṣa iti| - 75 - 『니야야수트라바시얌』에는 또 다른 적대자로부터 제기된 제3의 결합개념인 화 집(samudāya)에 대한 분석과 비판도 제시되고 있다. 결합하는 두 개에서 기체가 화집(samudāya)한다고 하면? 이 화집은 무엇인가? 다수의 [구성요소들이] 획득(prāpti)[에 의한 결합을 하는 것]인가? 또는 다수가 획득에 의해 하나의 화집[을 이룬다는] 것인가?161) 이 반론자는 기체(基體)에서의 결합을 주장한다. 어떤 물질의 결합이 있을 때, 그 것은 그것을 구성하는 기체의 단계에서 결합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 구성요 소들은 직접 접촉의 방식으로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획득(prāpti)라는 다르마의 작용에 의해 결합된다. 이것을 화집(samudāya)라고 한다. 따라서 이 화집의 방 식에서는 기체를 이루는 개별적인 구성요소들의 구분이 인정된다. 강가나타 쟈 (Gaṇgānāṭha Jhā)는 해당 본문에 대한 주석에서 Vartika의 해석을 바탕으로 화 집(samudāya)이 “단순히 여러 요소들의 무리(그룹)”162)이라고 평가하였다. 니야야 논사의 비판은 아마도 아비다르마철학에서 획득(prāpti)이 지니는 특수 한 속성을 무시하였기 때문에, “다수의 획득”을 “다수의 극미들이 단순히 함께 있는 것”으로 해석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반론자, 아마도 아비다르 마 구유부논사들의 입장에서도 그 “다수의 획득”이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 에 여전히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이 때 각각의 구성요소들이 단순히 다수가 모여서 지각의 대상이 된다는 화집의 결합방식은 감각기관을 초월하는 각각의 구 성요소들, 예를 들어 두 개의 극미가 함께 있다고 하더라도 개별적인 두 극미가 함께 있을 뿐이기 때문에 각각의 극미가 관찰되어야 할 것인데, 실제 사물의 관 찰에서는 그런 식의 개별적인 극미들이 관찰되는 것이 아니라는 문제가 있다. 반 론자의 주장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난점은 『비바사론』에 나타나는 구유부의 문제 161) NySBh 2,1.36 (78.15 - 17): dvau samudāyāvāśrayaḥ saṃyogasyeticet ? | 18 | koyaṃ samudāyaḥ ? prāptiranekasya ? anekā vā prāptirekasya samudāya iti cet ? 162) "It is clear that the second alternative meant by the Bhāṣya is that the Mass is anekasamuhā - i.e. simply the group of several components; and this is just what the second alternative is represented in the Vārṭika." Jha, Ganganatha, ed. (1984) The Nyāya-Sūtras of Gautama: with the Bhāṣya of Vātsyāyana and the Vārtika of Uḍḍyotakara. ed. by Jha, Ganganatha, Sir, translated into English, with notes from Vachaspati Mishra's `Nyāya-vārtika-Tātparyatīkā, Udayana's `Parishuddhi', and Raghūttama's Bhāṣyachandra 3. Delhi: Motilal Banarsidass, 184. - 76 - 점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무가 원자의 화집이라고 지각되었을 때, 거기에서 나무의 다수성이 지각될 경우에는, 나무의 성질이 파악되는 원자의 화집에 있어서 각각의 부분에서 나 무가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화집은 비논리적이다) 따라서 화집된 원자의 토대와는 다른 대상이 유형(jāti)의 특수가 현전하는 대 상성을 가지기 때문에, 전체로서의 다른 대상이 발생한다.163) 화집의 결합방식에서는 개별적 구성요소들에 대한 지각이 이루어지고, 그것을 통 해 관찰되는 현상의 존재론적 토대를 확보한다. 어떤 조대한 대상이 다수의 부분 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대상의 지각을 통해서 그 각각의 부분들이 모두 파악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화집의 결합방식이다. 이는 부분과 전체의 연속성을 주장하 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니야야논사에 따르면, 그런 방식의 사유에 의하면 나 무를 구성하는 부분 각각에서 나무가 파악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비합리적이 다. 그러나 이같은 니야야의 비판은 그들의 전체상과 비슷한 관점에서의 비판이 기 때문에 다소 논점을 호도하는 경향이 있다. 아비다르마철학에서는 만물을 구 성하는 기본적인 구성요소로 다르마를 제시하고, 그 가운데 물질(색)에 해당하는 11종의 다르마가 존재한다고 본다. 그런데 이 다르마들의 실재성이 궁극적 구성 요소인 극미들의 실재성과 직접적인 연속성을 지닌다는 것이 화집의 결합방식인 것이다. 이 분석에서 조대한 물질, 즉 ‘나무’와 같은 전체상이 극미와 존재론적 연속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화집(samudita)의 결합개념은 개별적으로 감각지각의 대상이 아닌 것들이 화 집하였을 때 그 구성요소들로부터 지각의 힘이 발생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때 문에 지각을 초월하는 개별적 극미들이 화집하였을 때 대상성을 획득하게 되는 이유에 대한 해명이 요구된다. 이에 대해 반론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실로 이 극미들은 모였을 때 감각기관을 초월하는 성질이 제거되어, [대상으 로] 파악된다. [그러나] 분리된 것들은 파악되지 않으며 감각기관의 대상성을 획득하지 못한다.164) 163) NySBh 2,1.36 (79.14 - 18): evaṃ ca sati yo 'ṇusamudāyo vṛkṣa iti pratīyate tatra vṛkṣabahutvaṃ pratīyetau yatra yatra hyaṇusamudāyasya bhāge vṛkṣatvaṃ gṛhyate sa sa vṛkṣa iti, tasmāt samuditāṇusamavasthānasyārthāntarasya jātiviśeṣābhivyaktiviṣayatvād avayavyarthāntarabhūta iti | 164) NySBh 4,2.14 (265.10 - 11): te khalvime paramāṇavaḥ saṃhatā gṛhyamāṇā atīndriyatvaṃ - 77 - 반론자는 극미들이 모인 것(saṃhatā)은 감각기관을 초월하는 성질이 제거되기 때문에, 극미들이 모인 상태에서는 지각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개별적으로 분리된 것들은 감각기관의 대상성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화합(saṃcaya)과는 구분되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화합은 개별적인 구성요소들과 는 별도의 결합한 존재이기 때문에, 화합을 통해서 개별적 구성요소들에 대한 파 악은 불가능하다.165) 화합의 결합방식에서는 개별적인 극미가 지각의 근거가 되 는 능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화합한 것이 인식의 토대를 제공한다. 따라서 인 식되는 것은 극미들의 화합인 이 인식의 토대(āsraya)이다.166) 6) 극미의 형태와 접촉 ‘극미가 형태와 크기를 가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가장 미세한 기본단위’ 를 어느 지점에 한정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니 야야-바이셰시카와 설일체유부의 대답은 극미는 크기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극미는 크기를 가지지 않지만 형태를 가지며, 그 극미들로 형태를 가진 조대한 물질들이 구성된다고 본다. 그러나 니야야학파에 대해 어떤 반론자는 이러한 주 장이 자기모순적이라고 지적한다. 가장 미세한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 무한히 쪼 개야 한다면, 극미의 존재는 무한소급에 떨어지게 될 것이며,167) 동시에 무한히 쪼개어서 소멸의 단계에 도달한 극미가 모여서 조대한 물질을 구성하는 것이 가 능해야 하는 모순적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따라서, [반론] [원자는] 부분을 가진 존재이다. 왜냐하면 물질성(mūrtimat)을 지닌 것 jahati viyuktāścāgṛhyamāṇā indriyaviṣayatvaṃ na labhante | 165) NySBh 4,2.14 (265.13 - 14): sañcayamātraṃ viṣaya iticet? na-- saṃcayasya saṃyogabhāvāt tasya cātīndriyasyāgrahaṇād ayuktam| 화합만이 대상이라고 한다면? 그렇지 않 다. 화합은 결합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의 감각기관을 초월해 있는 것, [즉 개별적 구성요소 들]은 파악되지 않기 때문에 이치에 맞지 않다. 166) NySBh 4,2.14 (265.14 - 15): saṃcayaḥ khalv anekasya saṃyogaḥ sa ca grahyamāṇāśrayo gṛhyate nātīndriyāśrayaḥ. bhavati hīdamanena saṃyuktam' iti. tasmād ayuktam etad iti| 화 합은 다수가 결합samyoga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파악/인식의 토대가 파악되는 것이며 [인식의] 토대aśraya는 감각기관을 초월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그것들이 결합해 있다고 한다. 167) NySBh 4,2.25 (270.9 - 10): mūrtimatāṃ ca saṃsthānopapatteḥ | saṃyogopapatteś ca paramāṇūnāṃ | sāvayavattvamitihetvoḥ--- 물질성을 가진 것들은 형태를 가지고, 극미들은 결합한 것이기 때문에, 부분을 가진다는 것이 논리[적 귀결이다]. - 78 - 들은 형태를 지니기 때문이다. 분할되고 접촉성을 지니는 것들은 [다음과 같은] 형태를 지닌다; 예를들어, 삼 각형, 사각형, 평평하거나 동그라미 등이다. 그리고 그런 형태는 부분의 특수 한 배열이고, 원자들은 동그란 형태이다. 따라서 [원자들은] 부분을 가진다.168) 경험적 관찰에 의해 지각되는 모든 조대한 물질들은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 물 질을 끊임없이 쪼갠다고 하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물질이 존재하는 한 그 것은 형태를 지닐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형태를 가지기 위해서는 크기가 있어야 한다. 크기를 가지지 않는 것이 형태를 지닌다는 것은 우리의 직관에 반하는 것 으로 보인다. 따라서 반론자의 주장은, 물질이 존재하는 한 어떤 형태이건 형태를 지닐 수밖에 없고, 또 형태를 지닌 물질이 존재하는 한, 그것은 크기를 지니는 것 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물질의 가장 미세한 기본단위인 극미는 크기와 형태를 가 져야 한다. 극미들은 동그란 형태(parimaṇḍala)이며, 그것들이 특수한 배열에 의 해 결합하여 조대한 물질을 구성한다. 이 극미들은 형태를 가지기 때문에 부분을 가지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 부분들이 결합하기 때문에 극미의 결합에 논리적 문 제를 야기하지 않는다. 극미들이 앞뒤로 결합 할 경우에 원형의 극미 앞뒤의 두 부분에서 결합이 일어나며, 혹은 극미들이 여섯 부분을 가지고 동서남북과 상하 의 여섯 방향에서 모두에서 결합이 이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169) 이상으로 『니야야수트라』에 나타난 극미관련 논점들과 그것에 대한 니야야학 파와 반론자들의 입장을 고찰해 보았다. 그 외에, 『니야야수트라』에서는 극미 (paramāṇu)라는 용어가 등장하지 않고 원자(aṇu)만이 사용되는 반면, 바챠야나 168) NySBh 4,2.23 (269.7 - 10): mūrtimatāṃ ca saṃsthānopapatteravayavasadbhāvaḥ || 4,2.23 || paricchinnānāṃ hi sparśavatāṃ saṃsthānaṃ trikoṇaṃ caturasraṃ samaṃ parimaṇḍalam ity upapadyate yat tat saṃsthānaṃ so 'vayavasaṃniveśaḥ parimaṇḍalāścāṇavastasmāt sāvayavā iti | 169) NySBh 4,2.24 (269.13 - 16): saṃyogopapatteś ca || 4,2.24 || madhye sann aṇuḥ pūrvāparābhyāmaṇubhyāṃ saṃyuktastayorvyavadhānaṃ kurute. vyavadhānenānunamīyate-- pūrvabhāgena pūrveṇāṇunā saṃyujyate parabhāgena pareṇāṇunā saṃyujyate. yau tau pūrvāparau bhāgau tāv asyāvayavau. evaṃ sarvataḥ saṃyujyamānasya sarvato bhāgā avayavā iti | [원자가 부분을 가지기 때문에] 결합이 발생한다. 가운데 있는 원자가 다른 두 개의 원자와 결합할 때, 그것은 앞쪽과 뒤쪽에 있는 서로 다른 원자들 과 결합하게 될 것이다. 이 때 두 개의 다른 원자와 만나는 바로 그 지점들은 두 개의 부분이 될 것 이다. 원자는 모든 부분에서 다른 원자들과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각 방향에 해당하는 부분을 가 져야한다. - 79 - 의 주석(Bhāṣya)에서는 두 용어가 모두 사용되고 있다. 주석에서의 두 용어는 특 별한 의미의 함축이 없이 자주 상호교체 가능한 개념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보인 다. 『니야야수트라』와 바챠야나의 주석을 통해 확인되는 점은, 약 3세기로 추정되 는 바챠야나의 생존시기에는 극미와 관련된 다양한 철학적 주제들이 명확히 제시 되고, 그에 따른 학파적 해법이 논의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본문에서 니야야학 파의 논적으로 등장하는 이들의 주장은 단일한 것이 아니라, 서로 상이한 두 학 파의 입장을 일괄해서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 두 학파들은 아비다르 마 불교철학의 비유자-경량부와 설일체유부의 입장에 평행하는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구사론』과 『순정리론』에서 제기된 학파적 대립의 연원을 바챠야나의 주 석이 성립되기 이전까지 소급할 수 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를 통하여 기간에 극미의 결합과 관련하여 화합(saṃcaya)과 화집(samudāya)이라는 결합용어가 확 정되지 못하고, 개념적으로도 다소 불명확하였던 부분들이 『니야야수트라바시얌』 에 나타난 논쟁을 통해서 보다 명확해질 수 있었다. 2. 제 학파의 취집설: 화합과 화집 극미의 결합방식에 관한 논증은 극미론의 관점에서는 꽃이나 열매에, 불교인식 론의 관점에서는 씨앗이나 뿌리에 비유될 수 있는 핵심적인 주제이다. 이번 장에 서는 앞에서의 극미개념에 대한 논란들이 어떻게 극미의 결합에 대한 학파적 견 해로 나타나는지 검토해보도록 하겠다. 앞서 『니야야수트라』의 극미론 단계에서 이미 세 가지 상이한 결합 방식이 제시되고 그것의 인식론적 의미가 탐구되었음 을 확인하였다. 니야야학파는 단지 개념상으로만 구분될 뿐이지 실제로는 항상 함께 존재하는 6구의(句義) 실체들의 결합은 samavāya(和合)로 나타내고, 개별적 으로 분리된 대상들의 결합을 의미할 때는 samyoga(合)로 표현하였다.170) 같은 논서에서 바챠야나(Vatsyāyana)는 sañcaya와 samudāya라는 두 가지 결합방식 을 분석비판하였다. 반면 불교의 『비바사론』에서는 다소 소박한 형태의 결합만이 소개되고 있을 뿐 아니라, 현장이 번역한 화합(和合), 취집(聚集) 등의 역어(譯語) 로만 알려져 있어서 산스크리트 원어는 확인되지 않았다. 『구사론』에서는 세친 자신이 결합과 관련되어 다양한 용어를 채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장의 번역 170) 두 용어에 대한 현장역 화합(和合)과 합(合)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기 바란다. 권오민 (2010), 155 - 156. fn. 34. 이 논문에서 니야야학파의 ‘결합’을 논할 때는 이 samyoga를 의미하며, 화합(和 合)은 비유자-경량부, 상좌 슈리라타의 결합개념을 나타내기 위한 전문적인 개념어로만 사용한다. - 80 - 어도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순정리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이 화합(和合)과 화 집(和集)이라는 용어는 현장역의 『관소연론』과 규기(窺基, 632 - 682 CE)의 『유 식이십론술기』, 그리고 『성유식론』에서만 용례가 발견되었다. 세친의 『유식이십 론』에서는 게송 11에서 “집합 등”이라고 압축된 형태로만 등장하는데, 규기가 그 것이 화합과 화집이라는 두 가지 포함하며 각각은 경량부와 신유부의 결합방식을 의미한다고 설명하였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규기의 주석이 법상종의 입장을 투사 한 해석으로 보는 경향이 존재하였다.171) 야마구치 스스무(1931)는 화합과 화집에 상응하는 용어가 세친의 『유식이십론』의 게송에서는 물론 비나타데바의 주석에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였다.172) 티베트어 주석에서는 극미들의 결합에 대한 용어로 'dus pa가 사용되는데 그것은 찬드라끼르띠(Chandrakīrti)의 『중관 론소』에서 근경식의 '화합(和合)'을 뜻하는 용어로 'dus par gyur ba가 등장하 며, 삼사화합에 대한 산스크리트 상응어가 trayāṇām saṃnipāta인 점, 『구사론』 과 『번역명의집』에서도 saṃnipāta가 'dus pa로 정의하고 있다는 근거를 들어 화합은 'dus pa= saṃnipāta라고 주장한다. 그는 또한 『관소연론』의 티베트역에 서 화집의 대응어도 결국은 'dus pa이기 때문에 원래 하나의 용어로 설명되었던 경량부와 신유부의 결합방식을 구분해서 드러내기 위해 법상종에서 채택한 표현 이라고 추정하였다. 또한 우이 하쿠주(1953)는 『유식이십론』 게송11에서 화합으 로 번역된 산스크리트어 saṃhata만이 등장하고 화집에 상당하는 단어가 발견되 지 않으며, 그 용례는 모두 세친의 『유식이십론』 이후에 저술된 『순정리론』, 『관 소연론』, 『성유식론』과 같은 논서들에만 나타나기 때문에 현장의 번역과정에 추 가된 것으로 보았다. 한편 가토 준쇼는 설일체유부와 경량부의 접촉의 방식에 대한 문제를 중심으 로 극미의 화합과 화집을 비교하는 논문을 발표하였으며,173) 『순정리론』의 연구 171) 야마구치 스스무(1931)와 우이 하쿠주(1953)의 연구를 비롯하여 『순정리론』연구 이전의 『유식이십 론』, 『관소연론』 연구는 대부분 이런 입장을 견지하였다고 볼 수 있다. 山口益 (1931) 「唯識二十釋論 注記」in 『唯識二十論の對譯硏究』. 佐佐木月樵; 山口益 共譯. 東京: 國書刊行會, (再刊, 1977), 12 - 14.; 야마구치는 여기서 화합의 티베트 번역어를 'dus pa로 확인하고, 다시 이것의 산스크리트 대응 어로 삼사화합에서 화합을 의미하는 saṃnipāta로 추정하였다. 山口益 (1941) (佛敎における)無と有 との對論: 中觀心論入瑜伽行眞實決擇章の硏究. 東京: 山喜房佛書林, (再刊, 1975), 408 - 410.; 宇井 伯壽 (1953) 『(四譯對照)唯識二十論硏究』. 東京: 岩波書店, (再刊, 1990), 162 - 163. 172) 山口益 (1931) 「唯識二十釋論注記」in 『唯識二十論の對譯硏究』. 佐佐木月樵; 山口益 共譯. 東京: 國 書刊行會, (再刊, 1977), 12 - 14. 173) 加藤純章 (1973) 「極微の和合と和集 -有部と経部の物質の捉え方」. 『豊山教学大会紀要』. 東京: 豊 - 81 - 를 기반으로 하여 경량부의 정체성을 탐색한 방대한 저술에서 극미의 화합과 화 집의 특성을 정리하였다.174) 이 가운데 가토는 『관소연연론』에 대한 비니타데바 (Vinitadeva)의 주석을 통해 화합과 화집에 대응하는 티베트번역어가 'dus pa와 'dus pa rnam pa라는 점에 주목하였다. 이 두 티베트어는 각각 saṃcita (또는 saṃghāta)와 saṃcitakāra (또는 saṃghātakāra)에 상응한다. 그런데 안혜(安 慧, Sthiramati)의 『유식삼십송석』에는 화집과 화합이 각기 saṃcita(또는 saṃghāta)와 asaṃcita(또는 asaṃghāta)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고 보았다.175) 반면 『아비다르마디빠』 (Abhidharmadīpa)에서 세우(世友, Vasumitra)가 실유론 의 관점에서 paramāṇusaṃcayavāda, 즉 극미의 saṃcaya를 주장하는 학파를 비판하고 있기 때문에, 이 saṃcaya는 설일체유부설이 아니라 경량부설이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를 종합하여, 카토는 설일체유부의 화집은 saṃcita, 경량부 의 화합은 saṃcaya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다소 유보적인 제안을 하였다.176) 이후 화합과 화집의 산스크리트 원어에 대한 논의는 정체되었고, 관심은 화합 과 화집의 성질과 학파철학 귀속성에 대한 문제 등으로 전개되었다.177) 극미의 결합방식과 의미에 대한 논의전개를 위하여 『순정리론』에 나타난 화합과 화집의 내용에 대해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중현이 전하는 상좌 슈리라타의 화합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5식의 소의(즉 5근)와 소연(즉 5경)은 다 같이 실유가 아니니, 극미 하나하나는 소의와 소연이 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며, 다수의 [극]미가 화합할 때 비로소 소의와 소연이 되기 때문이다.178) 앞서 4대종과 12처에 대한 고찰에서 5근과 5경은 4대종극미들이 취집하여 만들 山教学振興会, 129 - 137. 174) 加藤純章 (1989) 『經量部の硏究』. 東京: 春秋社, 148 - 183. 175) 이하에서 논하겠지만, 실제로는 saṃcita와 그것이 아닌 결합방식(asaṃcita)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 다. 176) 加藤純章 (1989), 179 - 181. 177) 박창환은 “법칭의 감각지각론은 과연 경량부적인가?”라는 논문에서 화합을 samudāya와 동일화하 고 있지만, 그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고 있다. 박창환 (2009) 「法稱(Dharmakīrti)의 감각지각 (indriyapratyakṣa)론은 과연 輕量部적인가?- 上座 슈리라타(Śrīlāta)의 감각지각 불신론과 이에 대 한 世親의 절충론을 통해 본 경량부 前5識說의 전개과정」. 『인도철학』 제27집, 5 - 51. 178) 『阿毘達磨順正理論』: 五識依緣俱非實有。 極微一一不成所依所緣事故。 眾微和合。 方成所依所緣 事故。 (T29.350c5 - 7).; 『순정리론』, 182. - 82 - 어진 소조색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179) 설일체유부에서는 색, 향, 미, 촉의 소조 색도 실유(實有)로 인정하는 반면 경량부에서는 4대종의 실재성만을 인정하기 때 문에 10처에 해당하는 5근과 5경은 가설적 존재(假有)가 된다. 왜냐하면 개별적 인 극미 하나하나는 감각지각을 초월해 있어서 지각의 대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 이다. 그러나 극미들이 화합(和合)이라는 특수한 결합의 형태를 통하여 지각의 근 거와 감각기관의 대상이 되는 능력을 획득하게 된다. 이같은 상좌 슈리라타의 견 해는 중현에게 정통 아비다르마 철학의 근간을 부정하는 논리로 이해되었다. 5식은 실유가 아닌 경계 대상을 조건으로 삼지 않으니, 화집(和集)된 극미를 소연으로 삼기 때문이다. 또한 5식신은 무분별이기 때문에 여러 극미의 화합 (和合)을 소연의 경계로 삼지 않는 것이다.180) 전5식은 헤아려 판단하는 작용(計度)이 없이 오직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을 삼사화 합을 통하여 인식의 영역으로 수용하는 기능만을 한다. 이 전5식은 오직 실재하 는 대상만을 인식대상으로 삼는다. 그리고 대상의 수용에 있어서 어떠한 분별작 용도 개입하지 않기 때문에 무분별이라고 한다. 설일체유부에서는 4대종과 소조 색이 모두 실유의 존재이고, 따라서 12처의 인식영역에서 발생하는 5식은 실유하 는 대상을 조건으로 삼는다는 점에 문제가 없다. 그러나 상좌는 4대종의 실재성 만을 인정하기 때문에 4대소조색에 해당하는 12처의 가유설을 주장한다. 그렇다 면, ‘화합’이란 말은 어떠한 법에도 별도로 근거하는 것이 아니며, 보여지고 내지 접촉된 것의 분별(즉 안식 내지 신식)과 관계없이 성취되는 것으로, 그러한 화 합은 개별적인 실체(別法)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계탁분별에 의해 파악될 뿐이다.181) 신유부 중현의 관점에 볼 때, 화합은 실재하는 대종극미들이 취집하여 만들어낸 179) 『비바사론』은 여러 곳에서 “모든 물질(색)은 4대종과 4대종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阿毘達磨大毘 婆沙論』: 諸所有色皆是四大種及四大種所造。(T27.383a24 - 25))라고 주장한다. 이 물질(색)을 12처 의 관점에서 보면, 10색처의 5근(根)과 5경(境), 그리고 무표색을 포함하는 물질적 존재를 의미한다. 180) 『阿毘達磨順正理論』: 五識不緣非實有境。和集極微為所緣故。又五識身無分別故。不緣眾微和合為 境。(T29.350c19 - 21).; 『순정리론』, 14. 181) 『阿毘達磨順正理論』: 非和合名別目少法。可離分別所見乃至所觸事成。以彼和合無別法故。唯是計度 分別所取。(T29.350c21 - 23).; 『순정리론』, 183. - 83 - 가설적 존재이고, 인식은 실유하지 않는 5근과 5경에 의해 산출되는 것이다. 여 기까지는 상좌 슈리라타도 당연히 동의하는 지점이다. 문제는 설일체유부철학의 전제가 경량부와는 완전히 상이하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중현의 시각에서 화합은 실재하는 대상과 존재론적 연속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화합된 것에 대 한 인식이란 단지 개념적 분별에 지나지 않는다. 개별적인 극미의 단계에서 존재 하지 않았던 어떤 형상이 다수의 극미들이 취집하였을 때 새롭게 만들어졌다면 그것은 실재에 기반하지 않은 관념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러나 중현의 화집(和集)은 그런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극미의 본성과 양태는 안립(결정)되어 있지만, 안식이 그것에 대해 결정적으로 바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즉 [안식이] 그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상을 능히 보지 못하는 것은 [그것들이] 모여서 만나지(和會) 않았기 때문이지 상(相)을 갖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다.182) 다수의 극미들이 특정한 형태로 배열할 경우에 개별극미들이 이미 가지고 있던 성질(相)이 지각의 대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개별적인 극미들이 감각기관을 초 월해있다는 것은 그것들이 개별적으로 흩어져 있는 조건에서 말하는 것이지, 개 별적인 극미들이 지각되는 형상이나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은 아니다. 극 미들이 취집하여 구성된 어떤 물질적 존재의 형상, 예를 들어 ‘항아리’를 인식하 였다면 그것은 관념적인 구성물일 뿐이다. 그러나 눈 등의 감각지각은 그와 같은 관념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실재만을 지각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 역시 능히 화합을 소연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있는 것 이다. 그러나 5식신은 그렇지 않으니, 그것은 오로지 실유의 경계만을 반연(攀 緣)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극미는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안식은 실유 [의 극미]를 소연의 경계로 삼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이러한 주장은 옳지 못 하니, 이는 바로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요별하지 못하는 것 은, 그러한 안근은 경계(극미)를 취하는 것이 거칠기 때문이며, 또한 그 같은 안식은 무분별이기 때문이다.183) 182) 『阿毘達磨順正理論』: 極微性相安立。彼於眼識為所緣定。眼識於彼非定現行。不能一一別相見者。不 和會故。非非相故。(T29.351b6 - 8).; 『순정리론』, 187. 183) 『순정리론』, 186.; 『阿毘達磨順正理論』: 亦有能緣和合為境非五識身。以彼唯緣實有境故。若執極微 不可見故。眼識不緣實有為境。此執不然。是可見故。而不了者。由彼眼根取境麁故。又彼眼識無分別 故. (T29.351a28 - b3) - 84 - 중현에 따르면, 우리의 감각주체는 실재하는 존재만을 지각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렇지만 극미가 감각기관을 초월해 있다는 명제를 상기하면, 안식(眼識)에 의한 시각적 인식은 실재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심이 든다. 이에 대해 중현은 안근이 극미와 같은 실재하는 대상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 제에 있어 안식이 대상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안근이 대상을 취하는 능력이 정 밀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또 안식은 어떤 분별적인 사유가 없이 대상을 파악하기 때문이다. 감각기관을 초월해 있는 개별적인 극미들은 화집(和集)이라는 특수한 결합방식의 조건하에서 지각될 수 있다. 화집을 통해 지각하는 것은 ‘화집의 관 념’과 같은 것이 아니며, 화집(和集)은 그것 자체가 인식의 토대와 인식대상이 되 는 것이 아니다. 인식을 발생시키는 힘과 형상은 대상자체, 즉 극미로부터 오는 것이다. 개별적인 극미의 단계에서는 감각지각의 영역에 포착되지 않다가 화집하 였을 때 비로소 감각지각에 포착되는 능력이 발생한다. 그리고 극미는 항상 화집 한 상태로만 존재하기 때문에,184) 모든 극미는 지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화합과 화집 양자의 차이는 개별극미와 극미의 취집 사이에 존재론적 연속-불 연속의 문제에 놓여있다. 화합은 실재하는 개별극미들과는 존재론적으로 불연속적 이며 지각의 대상이 되는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낸다. 반면 화집에서는 어떤 형상 이 지각되었다면 그것은 이미 개별극미들에 존재하던 것이 특정한 계기에서 지각 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상좌와 중현의 맹인 비유와 해석은 흥미롭 다. 상좌 슈리라타는 ‘지금 현재 지각경험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과 ‘극미들은 감각지각을 초월해 있다’는 두 가지 전제에서 출발한다. 다수의 맹인들이 모였다 고 해서 개별적인 맹인에게 없던 시각능력이 생기지는 않는다. 그런데 지금 지각 의 경험이 발생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각을 초월해 있는 극미들이 다수가 결합하 는 과정에서 특정한 질적 변화가 발생해야만 할 것이다. 이처럼 지각의 대상이 되는 형상을 만들어내는 질적 변화를 산출하는 결합방식을 화합(和合, saṃcita) 이라고 한다. 중현도 같은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중현은 맹인의 비유를 뒤집 어서 해석한다. 다수의 맹인이 모인다고 해서 보는 능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 데 지금 지각의 경험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애초에 극미들이 개별적으로는 보이 지 않았지만, 지각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가지고 있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 184) 『阿毘達磨順正理論』: 謂無極微不和集故。既常和集。非不可見。(T29.351b5 - 6) - 85 - 다면 다수의 맹인처럼 극미들이 모인다고 해도 지각능력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화합(和合)과 화집(和集)의 두 가지 결합방식은 내용적인 측면에서 볼 때 『니야야수트라』의 분석에 등장하였던 saṃcita와 samudita에 각각 대응한다. 개별적인 나무들은 보이지 않지만 ‘숲’은 보인다거나 개별적인 병사들은 보이지 않는데 ‘군대의 행렬’은 보이는 것과 같은 가설적인 대상을 산출하는 것이 saṃcita이다. 반면 samudāya는 나무가 지각되었을 경우 나무를 구성하는 각각 의 부분에서도 나무가 지각되어야 하는 방식의 결합이다. 숲과 나무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숲이 보였다면 우리는 이미 나무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나무들이 없 다면 숲은 결코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은 saṃcita개념에서 지각되는 ‘하나의 형상’이 니야야-바이셰시카의 전체상과는 전 혀 반대라는 사실이다. 전체상은 어떤 대상, 예를 들어 ‘항아리’라고 하는 실체가 존재하며, 그것이 항아리의 모든 부분에 내속한다. 그러나 화합(saṃcita)에서 어 떤 ‘하나의 형상’은 실체가 아니라 가설적 존재(prajñaptisat)이다. 따라서 화합은 궁극적 구성요소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실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궁 극적인 차원에서 보면 ‘어떤 것이 아닌 것에 대해 그것이라고 지각하는 관념’인 것이다. 요약하면 화합(和合), 즉 saṃcita는 개별적 구성요소와 취집한 대상 사이 에 불연속을 전제하는 결합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각지각의 존재영역인 12 처는 이 화합에 의해 구성된 세계이기 때문에 실재성을 결여하고 있다. 화집(和 集), 즉 samudita는 개별적 구성요소와 대상 사이에 연속성을 전제하는 결합방식 이다. 따라서 감각지각의 존재영역인 12처는 이 화집에 의해 구성된 세계이기 때 문에 실재성을 지닌다. 이것과 관련된 대상과 인식의 연속성 혹은 직접성 문제는 다음 장에서 고찰해 볼 것이다. 이제 이같은 분석을 바탕으로 『구사론』에서의 결합의 개념, 그리고 여러 논서 들에서 결합방식의 이해에 혼란을 야기한 해석들을 재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먼 저 『구사론』에서 산스크리트어로 취집의 의미범위에 포함되는 단어들에 대한 한 역의 사례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86 - 『구사론』의 현장역에서 화합(和合)은 samagra, saṃghāta, sannipāta, prayuktatva등의 번역어인데, 극미와 관련해서는, samgara와 saṃghāta에 한정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saṃghāta는 『비바사론』과 『구사론』에서 모두 취집(聚集) 혹은 극미와 복합어로 극미취(極微聚)등으로 사용되었다. 구유부의 취 극미(聚極微)는 saṃghātaparamāṇu의 번역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장은 많은 곳 에서 이 saṃghāta(聚)의 번역어로 화합(和合)도 함께 사용하였다. 구유부의 결합 방식은 누차 살펴본 바와 같이 사극미와 취극미의 결합관계에서 사용된 saṃghāta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이 saṃghāta의 번역어 가운데 화합(和合) 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순정리론』에서 거론하고 있는 결합방식인 화합(和合)과 화집(和集) 가운데 하나인 화합으로 혼동할 가능성이 발생한 것이다. 실제로 윤영 호는 구유부의 결합방식이 경량부와 같은 화합(和合)이라고 파격적인 주장을 하였 다.185) 그러나 그것은 한역의 문자만 동일할 뿐 실제 결합방식의 내용에 있어서 두 학파의 결합방식은 판이하게 다르다. 그렇다면 『구사론』에서 세친이 옹호하는 결합의 방식은 무엇이고 그에 상응하 는 용어와 개념은 어떤 것인지 확인해 보겠다. 먼저 AKBh I. 35d와 주석부분에 서 세친은 12처 가운데 5근과 5경을 포함하는 10색처(色處)가 화합(saṃcita)이라 고 설명한다. 185) 윤영호 (2015), 75. 이하에서 그의 논지를 다시 검토하도록 하겠다. 범어 현장 진제 의미 텍스트 (Pr.) cf.현장역 samagra 和 合 / 積 聚 和合 만남, 극미 p.7.13; 14.3; 54.19, etc. saṃghāta 眾微聚集 和合 p.9.17. 和合 微聚物 극미 p.33.5; 281.19. etc. -聚 眾 p.24.16; 52.23. etc. saṃyoga 和 和合 결합 p.6.25; NS sannipāta 和合 和合 3사화합 p.54.21; 72.23. etc. prayuktatva 和合 聚集 상응 p.62.6. samudāya (聚)集 緣和合 고제(苦諦) p.135.6. sañcita 聚集 聚集 p.195.9; 積集 微聚 극미 p.24.15-17; 34.1; -聚 -和合 극미- p.300.2. samūha 集 聚集 『이십론』 Vimś. - 87 - kati saṃcitāḥ, katy asaṃcitāḥ | saṃcitā daśarūpiṇaḥ ||35d|| pañcendriyadhātavaḥ pañca viṣayāḥ saṃcitāḥ | paramāṇusaṃghātatvāt | śeṣā na saṃcitā iti siddhaṃ bhavati ||186) 무엇이 saṃcita이고 무엇이 saṃcita가 아닌가? 10색계가 saṃcita이다. ||35d|| “5근(根)과 5경(境)의 [색]계(色界)는 saṃcita이다. 극미들이 취집(saṃghāta) 한 것이기 때문에. [그 외] 나머지는 saṃcita가 아니다.”라는 것이 확정된 교 설(siddhanta)이다. 이 게송은 오온, 12처, 18계의 가실(假實)에 대한 논쟁의 결론에 해당한다. 개 별적인 구성요소(界)들이 취집을 통해 10처를 형성하고, 그것이 다시 색온(色蘊) 을 조성하는 층위를 상정할 때 어느 층위까지를 실재하는 것으로 볼 것인가에 학 파적 견해가 갈라진다. 그런데 세친은 12처에서 물질적 범주에 해당하는 5근과 5 경의 10색처를 구성하는 취집의 방식이 saṃcita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saṃghāta는 saṃcita라는 결합방식을 설명하는 술어로써 사용되고 있다. 다시 말해 세친 이전까지의 결합방식을 논하는데 있어 설일체유부의 공통의 술어로써 취집이라는 의미로 saṃghāta가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서술어를 통해 서 saṃcita라는 결합방식의 내용을 확인할 수는 없다. 화합(samcita)이라는 결합방식의 의미는 12처 가실(假實)논쟁의 맥락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설일체유부는 개별극미들이 3과(科)의 어느 층위에 있건 자신 의 성질을 잃지 않고, 개별극미와 극미의 집적이 연속성을 지니는 것으로 파악한 다. 따라서 개별극미가 실재한다면, 실재하는 것들이 집적한 12처, 오온도 실재성 을 지닌다. 그러나 세친은 오온은 집적된 것이고, 집적된 것은 실재성을 지니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러자 설일체유부의 논사는 오온이 집적된 것이기 때문에 가설적인 존재라면, 그것은 12처도 마찬가지라고 반박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 에서 세친의 독창적인 12처해석이 제시된다. 극미들은 취집(samagra)되었을 때, 그 '취집된 것들' 하나 하나(ekaśaḥ samagrāṇāṃ)가 원인의 작용을 하기 때문 에, 12처 하나 하나의 개별적인 실재성이 인정되어야 한다.187) 12처에서 감각기 186) AKBh I.35d (24.14 - 17). 187) 본문에 대한 권오민의 번역은 "다수의 적취 중에 존재하는 각각의 극미에 원인의 작용이 있기 때문 에"이며, 박창환도 같은 맥락에서 " [인식영역을 통해] 집적된 극미 하나하나가 [인식발생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본문에서 적취(samagra)가 소유격 복수형태(samagrāṇām) 이기 때문에 그것들의 각각(ekaśah)을 "집적된 극미들에 속하는 개별 극미들의 하나 하나"라기 보다 - 88 - 관(오근)과 지각대상들(오경)은 『아비담심론』의 개념에 따르면 취극미, 중현에 따 르면 실극미(實極微)에 해당하는 극미들의 집적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 이런 집 적물이 색깔(색) 등의 감각정보를 형성하고, 바로 그 감각정보들은 인식을 발생시 키는 원인으로 작용력을 가지기 때문에 실재성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설일체유부와 세친은 12처의 실재성을 인정하는 점에서는 동의한다. 그러나 설일체유부에서는 인식을 발생시키는 원인의 작용이 개별적인 극미들로부터 나오 는 것인데 반해 세친은 ‘취집된 것들(samagra)' 하나 하나가 원인의 작용을 한다 고 본다. 여기서 이 취집된 것들이 10처의 물질적 영역을 의미하기 때문에 I.35d 에서 saṃcita와 동일한 대상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saṃcita는 그렇게 취집된 단위 하나 하나가 인식을 작용을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 있는 것 이다. 결론적으로 세친이 사용하는 saṃcita의 개념은 『니야야수트라』에서 등장하 는 반론자의 saṃcita, 그리고 『순정리론』에서 상좌 슈리라타의 주장으로 소개되 는 화합(和合)과 유사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차이점은 세친이 동일한 saṃcita를 실재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AKBh I.44ab에 대한 주석의 결론부분에는 개별극미가 아니라 saṃcita의 결 합방식에 의해 인식대상이 성립한다는 세친의 언급이 등장한다. na caika indriyaparamāṇur viṣayaparamāṇur vā vijñānaṃ janayati | saṃcitāśrayālambanatvāt pañcānāṃ vijñānakāyānām | ata evānidarśanaḥ paramāṇur adṛśyatvāt || 188) 하나의 근(根)의 극미나 하나의 대상의 극미가 식(識)을 발생시키지 못한다. 오 식신은 화합(和合, saṃcita)된 의지처를 인식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렇기 때문에 [개별적인] 극미는 시각의 대상이 아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이 다.189) 설일체유부에서는 동일 찰나에 근(根), 경(境), 식(識)의 삼사(三事)가 화합(和合, sannipāta)하는 방식으로 인식이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세친에 의하면 이 3사화합은 개별적인 극미차원에서는 일어나지 못한다. 감각기관에 속하는 하나의 는 "극미들이 적집된 그 집적물 『자체의』 하나 하나"라고 읽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이 때 적집된 것 각각의 입처(入處)들이 인식 발생의 원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인식의 원인으로써 그 실재성을 인정 할 수 있다는 것이다. Cf. 『구사론』, 39.; 박창환 (2009), 32. 188) AKBh I.44ab (34. 1 - 2). 189) 『阿毘達磨俱舍論』: 以無根境各一極微為所依緣能發身識。五識決定積集多微。方成所依所緣性故。即 由此理亦說極微名無見體。不可見故。(T29.12a26 - 29) - 89 - 극미와 감각대상에 속하는 하나의 극미가 동일 찰나에 하나의 의식을 발생시키는 것과 같은 일을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식신(五識身) 즉 지각경험의 주체인 신체는 오직 화합(和合, saṃcita)이 토대가 된 인식대상(ālambana)만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극미는 시각을 비롯한 감각지각에 의해 포착되지 않 는다. 개별극미 자체는 지각대상이 되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취집하 여서만 지각의 대상이 되는 결합방식을 화합(saṃcita)으로 묘사하고 있다. 개별 적인 극미들이 인식작용의 토대로써 작용하지 못하고 단지 극미의 화합만이 인식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은 중현의 화집과는 명확히 구분된다. 우리는 앞에서 『니야야수트라』에 등장한 saṃcita와 『순정리론』에 나타난 경 량부의 화합(和合)개념이 내용적으로 유사하다는 점을 확인해 왔지만, 상좌 슈리 라타의 화합(和合)에 대응하는 산스크리트 용어가 saṃcita인지를 확정할 수는 없 었다. 이제 『구사론』에서 세친의 주장과 『순정리론』에서 중현의 해석을 통해 saṃcita가 상좌 슈리라타의 화합(和合)이라는 증거를 확인해 보기로 한다. [AKBh 번역] 하나의 근(根)의 극미나 하나의 대상의 극미가 식(識)을 발생시키 지 못한다. 오식신은 화합(和合, saṃcita)된 의지처를 인식대상으로 하기 때문 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개별적인] 극미는 시각의 대상이 아니다. 보이지 않 기 때문이다. 『구사론』 (A) 以無根境各一極微為所依緣能發身識。五識決定積集多微。方成所 依所緣性故。(B) 即由此理亦說極微名無見體。不可見故。 근(根)과 경(境)은 각각 하나의 극미로 소의나 소연이 되어 신식(身識)을 발생 할 수 없다. 오식은 결정코 다수의 극미가 적집(積集)하여야 비로소 소의와 소 연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극미는 본질에서 무견이라고 하는데, 불가 견이기 때문이다. 『순정리론』 中上座作如是言。 (C) 五識依緣俱非實有。(D)極微一一不成所依所緣事故。眾微和合。方成所依所 緣事故。 그런데 여기서 상좌(上座)는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5식의 소의(즉 5근)와 소연(즉 5경)은 다 같이 실유가 아니니, 극미 하나하나 는 소의와 소연이 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며, 다수의 [극]미가 화합(和合)할 때 비로소 소의와 소연이 되기 때문이다.”190) 190) 『순정리론』, 182.; 『阿毘達磨順正理論』: 此中上座作如是言。五識依緣俱非實有。極微一一不成所依 - 90 - 본문에서 (A)와 (D)는 내용적으로 완전히 일치할 뿐만 아니라 구문적으로도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동일한 산스크리트 본문에 대한 번역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 두 문장에서 극미의 취집을 의미하는 단어는 “다수 극미의 적집(積集多微)”과 “다 수 극미의 화합(眾微和合)”이다. 그리고 문장 (A)에서 다수 극미의 적집에 해당하 는 산스크리트 원문이 saṃcita임을 확인할 수 있다. 중현에 의하면 『순정리론』의 문장은 상좌 슈리라타의 것이고, 『구사론』의 문장은 세친이 스스로의 입장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친이 극미의 결합방식에 있어서 상좌 슈 리라타의 기본개념과 용어를 따르고 있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이상의 논의 를 다시 정리하면, 경량부 상좌의 화합(和合)개념은 다음과 같다. (a) 개별적인 극미는 지각의 대상이 되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지각되지 않는 다. 그러나 (b) 극미가 화합(和合, saṃcita)하면 비로소 오식신의 토대와 인식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런데 (c) 이 소의와 소연은 다수의 극미가 모여서 만들 어진 것이기 때문에 실유(實有)가 아닌 가유(假有)이다. 세친은 『구사론』에서 명제 (c)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가 『구사론』을 저술할 당시 에 처실유설을 주장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구사 론』에서 『유식이십론』으로 전이하는 기간에 세친은 화합(和合, saṃcita)이 가유 (假有)라는 부분(c)을 수용하는 대신, 감각지각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개별극미 (a)의 실재성을 포기하면서 유식(唯識)으로 진입하게 된다. 일관되게 변하지 않은 것은 극미의 화합상이 인식의 토대와 인식대상이 된다는 설명방식이다. 화합과 화집이라는 두 가지 결합방식에 대한 표준적인 설명을 제공하는 동시 에 두 개념에 대한 다소 불명료한 소개로 인해 논란을 야기한 논서가 바로 규기 의 『유식이십론술기』이다. 규기는 여기서 극미의 화합(和合)은 경량부설로, 극미 의 화집(和集)은 신살바다(新薩婆多)의 주장으로 소개하였다.191) 이들 결합방식에 대한 규기의 해설은 다음과 같다. 所緣事故。眾微和合。方成所依所緣事故。(T29.350c5 - 7). 박창환은 본문의 ‘다수의 극미의 화합(眾 微和合)을 특별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paramāṇūnām samudāyaḥ로 재구성하고 있는데, 이는 중현이 주석하고 있는 『구사론』 본문의 원어를 벗어난 것이다. 이 부분은 아래서 상세히 분석하도록 하겠다. 박창환 (2009), 17 - 18. 191) 『唯識二十論述記』: 此敘經部。 新薩婆多正理師義。 經部師說。 多極微和合。 正理師說。 多極微 和集。(T43.992c16 - 18) - 91 - 경량부 논사는 말한다. 실유하는 극미는 5식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5식에는 극미의 형상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극미) 일곱이 화합(和合)하여 [하나의] 아누 (aṇu, 원자)물질(색)을 이루며, [이 원자 이상의] 조대한 물질이 현현한다. 그것 (화합)의 본질은 비록 가설적이지만 5식에 그것의 형상이 있기 때문에 5식의 대상이 된다. 하나 하나의 실재하는 극미는 [인식]대상으로 현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화합하여 만들어진 하나의 조대한 [물질이] 가설적으로 만들어질 때, 5 식의 [인식]대상이 된다.192) 규기가 전하는 경량부설을 요약하면, 먼저 극미는 실유하는 존재이다. 이 극미는 감각기관에 직접 지각되지 않는다. 극미들이 화합이라는 결합방식을 통해 취집하 였을 때 그에 상응하는 형상이 5식 가운데 나타나서 5식의 지각대상이 된다. 이 런 규기의 설명은 지금까지 논의해 온 화합(和合)과 내용적으로 차이가 없다.193) 같은 단락에서 규기는 화집(和集)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정리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물질(색) 등의 온갖 존재(諸法)는 각기 다수의 형상이 존재하는데, 그 중에 일부가 직접지각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온갖 극 미는 서로 도와서 하나의 화집상으로 존재한다. 이 형상은 실재하는 것으로 각 기 자신의 형상과 유사한 인식을 발생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5식의 소연연이 된다.194) 온갖 물질적 존재들은 각각이 다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제법의 개별적 인 구성요소들이 각각의 형상(形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195) 그러나 이런 형 192) 『唯識二十論述記』: 謂經部師。實有極微。非五識境。五識上無極微相故。此七和合。成阿耨色。以上 麁顯。體雖是假。五識之上有此相故。為五識境。一一實微。既不緣著。故須和合成一麁假。五識方緣。 (T43.992c20 - 24) 193) 규기는 『술기』에서 AKBh III.86 - 87 (276)이하에서 극미의 취집을 7의 승수(乘數)로 설명하는 것 과 동일한 방식을 채택한다. 따라서 이하 극미의 결합에서는 반복적으로 7극미가 결합하여 aṇu를 만 드는 방식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극미의 취집을 7승수의 양적 누적으로 파악하는 것, 4대종과 8사구 생과 같은 구생(俱生)의 개념, 그리고 분석적 취집의 관계 등은 서로 다른 맥락에 있다. 따라서 극미 의 취집을 양적 누적으로만 파악하는 것은 이해를 제한하거나 오해를 야기할 위험이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지적은 미즈노 고겐(水野弘元)을 참고하기 바란다. Cf. 水野弘元 (1951). 194) 『唯識二十論述記』: 遂復說言。色等諸法。各有多相。於中一分是現量境。故諸極微相資各有一和集 相。此相實有。各能發生似己相識。故與五識作所緣緣。(T43.992c27 - 993a1) 195) 여기에서 ‘형상(形相)’으로 번역한 相은 산스크리트어의 형상(ākāra), 원인(nimitta), 자성(自性, svabhāva)의 의미영역을 함축하기 때문에 어떤 번역어를 채택하건 다소 유보적인 해석으로 한정해야 한다. - 92 - 상들이 모두 지각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고, 특정하게 결합한 방식에 의하여 그 중 일부가 직접지각의 대상이 된다. 『비바사론』에서의 4사구생이나 8사구생의 개념에서 보았듯이 다수의 구성요소들이 항상 함께 발생하지만, 특정한 요소의 강약에 따라 화집의 성질이 결정된다. 이때 그 화집된 대상의 성질은 새롭게 만 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성요소들에 내재하고 있던 것들 중의 일부가 화집 을 통해 지각의 대상으로 드러난 것이다. 여기서 화집된 것은 5식의 소연연이 될 수 있다. 이때 소연연(所緣緣)은 소연 (所緣, ālambana)과 연(緣, pratyaya)의 합성어인데, 이 복합어의 성격을 동격복 합어(dvandva) 혹은 한정복합어(tatpuruṣa)로 볼 것인가를 고찰해 보아야 한다. 『관소연론』에서는 화집에 대하여 인식발생의 조건(緣, pratyaya)은 되지만, 인식 발생의 대상(所緣, ālambana)은 제공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이 경우에는 소연 연(所緣緣)을 한정복합어로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현의 논증맥락에서 보면, 화집은 소연도 되고 인식발생의 조건도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 경우에는 동격복합어로 읽어야 할 것이다. 화집이 두 가지 특징을 모두 가진다는 점은 구 유부의 취집과 비교해 보면 분명해진다. 『이십론술기』에서 화집에 대한 설명 전 후에 대비시키고 있는 구유부의 취집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만약 구유부에 따른다면 디그나가가 말한 것처럼 5식 상에 극미의 형상이 없 기 때문에 소연이 되지 못하는 과실이 있다..... 안식 등의 5식은 산 등을 인식대상으로 할 때 실재하는 다수의 극미가 서로 도와서 [나타난] 산의 형상과 5식을 함께 획득한다. 그렇지 않다면 [구유부와 같이] 인식대상이 되지 못하는 과오가 생길 것이다. [구유부는 5식의] 단지 실 재 자체(dravya)만이 인식의 조건이 된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196) 구유부의 물질관에서 가장 미세한 것은 사극미(dravyaparamāṇu)이다. 이 사극 미만이 인식을 발생시키는 원인으로서 작용력을 가진다. 그런데 이들 사극미들이 모였을 때 인식대상의 형상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단지 눈에 보이지 않던 머 리카락이 다수가 모였을 때 보이게 되는 것과 같은 비유가 제시되고 있기는 하지 만, 다수의 머리카락 뭉치를 본다고 하여 개별적인 머리카락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개별극미가 인식작용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는 점은 명확하지만, 196) 『唯識二十論述記』: 若順於古。即有陳那。五識之上。無微相故。非所緣失。.... 眼等五識。緣山等 時。實有多極微相資山相。五識並得。故成所緣。不爾即有非所緣失。許有實體。但為緣故。 (T43.992c26 - 993a4) - 93 - 인식대상으로서 형상의 존재에 대해서는 불명확한 단계에 있었고, 디그나가는 구 유부의 취집은 소연성을 가지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구유부의 결합관계와 대비시켜 화집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극미들이 화집의 방식 으로 결합하였을 때, 그것들은 서로 도와서 인식대상으로서의 형상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각에서 이 구유부의 취집설이 경량부의 화합설과 동일하다는 주장이 있어왔다. 우이 하쿠주(1953)는 화합과 화집의 용어가 등장하는 『순정리론』의 저 자 중현이 세친 이후의 인물이라는 점과 『순정리론』 외에 화집이 언급되는 문헌 은 법상종계통의 번역 및 저술에 한정해서 발견된다는 점 등을 들어서 두 개념의 구분을 법상종의 창작물로 평가하였다.197) 그는 특히 『순정리론』 4권과 『성유식 론술기』에서 화합이 설일체유부의 설로 지지되고 있다고 보고, 때문에 화합은 원 래 설일체유부의 학설이었으며 경량부의 학설이 아니라고까지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극미론의 전개맥락에 대한 이해의 부족과 『순정리론』에 대한 명백한 오독 (誤讀)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198) 연구사의 정리에서도 보았듯이 우이 하쿠주의 197) 宇井伯壽 (1953) 『(四譯對照)唯識二十論硏究』. 東京: 岩波書店, (再刊, 1990), 159 - 163. 198) 우이 하쿠주는 이곳에서 정확한 문헌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그런데 최근 윤영호(2015)가 우이 하쿠주의 입장을 지지하며 『성유식론술기』와 『유식이십론술기』의 문구를 근거로 제시하였다. 먼 저 윤영호는 『유식이십론술기』에서 다음 문구를 들어 화합이 구유부의 학설이라고 주장한다. 『唯識二十論述記』: 又諸極微。隨所住處。必有上下四方差別。不爾便無共和集義。和破古薩婆多師。集 破新薩婆多正理論師。(T43.995c21 - 24) 또 극미들은 머무는 곳에 따라 반드시 상, 하, 사방의 차별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공히 화와 집의 뜻이 없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화(和)는 구유부 논사[의 설]을 논파하는 것이고, 집(集)은 신유 부의 순정리사 논사[의 설]을 논파하는 것이다 규기는 극미개념을 논파하면서, 극미에 방향의 차이가 없다면 ‘화(和)와 집(集)’ 혹은 ‘화집(和集)’이 성 립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설일체유부의 정의에 따르면 극미는 방향과 부분(方分)이 없 다. 그러므로 극미가 방분이 없다는 사실은 ‘화(和)와 집(集)’을 논파하는 근거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 고 여기서 화(和)는 구유부를 논파하는 것이고, 집(集)은 신유부를 논파하는 것이다. 그런데 윤영호는 본문에서 화(和)를 화합(和合)으로, 집(集)을 화집(和集)으로 번역하여, 각각이 화합이 구유부를 비판하는 것이기 때문에 화합이 구유부의 학설이라는 주장을 편다. 이런 주장은 먼저 구문론 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화합과 화집을 평행구로 보았을 때 合破古薩婆多師。集破新薩婆多正理論師 와 같은 구문이라야 그같은 해석이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성유식론술기』에서 들고 있는 인 용문의 해석도 마찬가지 문제를 보여준다. 『成唯識論述記』: 又若無方分。即不能或和或集。和對古薩婆多師。集對新薩婆多順正理師。極微。應不 和.集成麁大物。以無方分故。如虛空等 然經部師說有方分。(T43.267c18 - 22) 만약 방분이 없다면 화(和) 또는 집(集)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화(和)는 구유부를 논박하 - 94 - 저술시기에는 아직 극미설과 『순정리론』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극미개념과 결합방식이 지닌 학파철학의 인식론적 함의 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199) 이제 세친 이후의 논서에서 화합(和合, saṃcita)과 화집(和集, samudita)의 개념이 어떻게 구분되어 사용되고 있는지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극미의 결합에 관련된 산스크리트어 용례를 확인할 수 있는 논서로는 안혜의 『유식삼십송석』 (Triṃśikāvijñaptibhāṣyaṃ), 야쇼미트라(Yaśomitra)의 『구사론』주석, 디팡까라 의 『아비다르마디빠』 (Abhidharmadīpa), 진나의 『집량론』 (Pramāṇasamuccaya), 다르마끼르띠(Dharmakīrti)의 『양평석』 (Pramāṇavārttika) 등을 들 수 있다. 안혜의 『유식삼십송석』 TrBh 1c이하에는 두 가지 형태의 결합관계에 대한 유식적 비판이 이루어진다. 첫 번째 주장은 AKBh I.35d이하에서 세친의 주장과 동일한 극미의 결합방식에 대한 비판이다. sañcitālambanāś ca pañcavijñānakāyās tadākāratvāt |200) 고 집(集)은 신유부의 순정리론사를 논박한다. [따라서] 극미는 허공 등과 같이 무방분이기 때문에 화 (和)와 집(集)이 아니면서 조대한 물질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서 경량부는 유방분을 설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화(和)’와 ‘집(集)’은 화합과 화집이 아니라 구유부에서 주장하는 극미들의 취집과 신유부의 화집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해석의 근거는 같은 『성유식론술기』에서 찾을 수 있다. 유부논사는 말한다. [앞에서 설명한] 이것은 화합이기 때문에 5식의 대상이 아니다. 5식은 반드시 실재 를 대상으로하여 발생하기 때문이다. [화합과는 달리] 지금 여기서 설해진 이것은 서로 도와서 각각 별 도의 극미들이 능히 5식을 발생시킨다. 하나의 장소에 서로 근접하는 것을 화(和)라 하고, 일체를 이루 는 것이 아닌 것을 집(集)이라 한다. 그것은 서로 접근하여도 본체가 각기 구별되고 실재이기 때문에 식을 발생시키는 힘이 있다. 『成唯識論述記』: 薩婆多云。彼和合故非五識境。五識必依實法生故。今者所說此相相資。各別極微能生 五識。一處相近名和。不為一體名集。即是相近。體各別故。是實法故有力生識。(T43.271a16 - 20) 본문은 앞서 경부의 결합에 대한 유부논사의 평가로 시작한다. 경부의 화합은 5식의 대상이 아니다. 반면 각각의 극미들이 서로 도와서 개별적으로 5식을 발생시키는 능력을 가지기 때문에 화집은 5식의 대상인 된다. 여기서 규기는 화집의 개념을 화(和)와 집(集)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화(和)는 단 순히 서로 근접하여 모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화합에서와 같이 일체성으로 보일 가능성은 배제하는 것이 집(集)의 의미이다. 화집의 극미들은 가까이 접근해 있지만 각각의 본체를 잃 지 않고 구별되어 식을 발생시키는 능력을 지닌다. 이상의 본문분석을 통해 『유식이십론』에서 규기가 언급하고 있는 ‘화(和)와 집(集)’의 논파는 화집과 화합이 아니라, 구유부의 취집을 화(和)로 신유부의 취집을 집(集)으로 구분하여 구유부와 신유부의 특성을 대비시키고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Cf. 윤영호. (2015), 75; 100, fn. 27.; 101, fn. 36. 199) Cf. 권오민 (2010a), 159 - 161 참조. - 95 - 그리고 오식신은 화합을 인식대상으로 한다. 그것(화합)의 형상을 가지기 때문에. 앞서 『구사론』과 『순정리론』에서 극미결합의 방식에서 핵심을 함축하고 있는 동 일한 문장들을 살펴보았다. 『구사론』에서는 세친이 열 가지 물질적 범주(5근과 5 경의 有色界)를 논하는 부분에서 물질세계의 적집의 방식에 대한 정의로 등장하 였다. 그리고 『순정리론』에서 중현은 이것을 상좌 슈리라타의 주장으로 비판하였 다. 그런데 이와 동일한 결합방식의 정의와 그것에 대한 비판은 이곳 『유십삼십 송석』을 비롯해서, 『집량론』과 인도논리학의 논서들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먼저 안혜가 생각하는 화합(sañcita)이라는 결합방식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화합[이라는 결합방식]은 부분의 집합과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부분을 배제 하고 화합의 형상을 가지는 식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합은 부 분과는 다른 전체의 형상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외부의 대상이 없이도 식이 화합된 형상을 가지고 발생한다. 화합한 바 로 그 극미들이 [식의] 인식대상인 것은 아니다. 개별적인 극미들은 그것(식)의 형상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화합하지 않은 상태이건 [혹은] 화합한 상태에 있건 [개별적인] 극미들은 어떤 것도 결코 자체를 초월하지 못한다. 따라서 화합하지 않은 [상태에서]처럼 화 합에서도 [개별] 극미들은 결코 인식대상이 아니다.201) 화합을 주장하는 상좌의 견해는 개별적인 극미들과는 별도로 화합의 형상이 존재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전체도 부분을 배제하고는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부분과는 별도의 어떤 형상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그에 상응하는 외부의 대상이 없이 발생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좌에 따르면 개별적인 극미들은 형상을 지 니지 않기 때문에 인식대상이 될 능력이 없다. 따라서 화합하지 않았을 때에도 인식대상이 될 수 없고, 화합하였다고 하여도 그것은 외부대상이 없이 화합의 형 상으로 발생한 식(識)에 지나지 않는다. 이 결합방식에서는 개별극미들이 어떠한 200) TrBh 1c. (44.1.). 201) TrBh 1c. (44.1 - 8): na ca sañcitam avayava-saṃhatimātrād anyad vidyate | tadavayavān apohya sañcitākāravijñānābhāvāt | tasmād vinaiva bāhyenārthena vijñānaṃ sañcitākāram utpadyate | na ca paramāṇava eva saṃcitās tasyālambanaṃ paramāṇūnām atadākāratvāt | na hy asañcitāvasthātaḥ sañcitāvasthāyāṃ paramāṇūnāṃ kaścid ātmātiśayaḥ | tasmād asañcitavat sañcitā api paramāṇavo naivālambanam | - 96 - 인식대상이 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과 화합의 형상은 부분과 는 관계없이 발생한다는 점에서 『순정리론』에서 비판한 화합과 일치한다. 이 비 판에 바로 이어서 안혜는 또 다른 그룹의 결합방식을 거론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이는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하나하나의 극미는 다른 것(극미) 에 의존하지 않는(nirapekṣya) [한] 감각을 초월해 있지만, 그러나 다수의 [극 미들은] 서로 의존하는(apekṣyo) 한에 있어서는 감각기관에 의해서 파악될 수 있다.202) 앞에 화합(saṃcita)과는 다른 결합방식을 주장하는 자는 개별적인 극미들은 감각 지각을 초월해 있지만, 그것들 다수가 모였을 때 다수의 극미들이 서로 의존하여 (apekṣya) 감각기관에 파악되는 능력이 생긴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안혜는 극미 들이 서로 의존해 있건 아니건 상관없이 개별적인 극미와 다수의 극미의 경우에 동일하게 감각기관을 초월해 있거나 아니거나 일관성을 지녀야 한다고 비판한 다.203) 또한 개별적인 극미들이 서로 의존하여서 식의 대상(viṣaya)이 된다고 하 면, 사물의 종류를 드러내는 형태의 형상이 존재하지 않게 되어 물병이나 벽 등 의 구분이 되지 않을 것이다.204) 앞에서 인용한 TrBh 1c. 인용문과 매우 유사한 분석이 『집량론』 PS 1.3이하 에서 발견된다. kathaṃ tarhi sañcitālambanāḥ pañca vijñānakāyāḥ, yadi tad ekato na vikalpayanti. yac cāyatanasvalakṣaṇaṃ praty ete svalakṣaṇaviṣayā na dravyasvalakṣaṇam iti.205) 그러면 어떻게 오식신이 화합(sañcita)을 소연으로 [하는가]? 만약 그것이 하 나라는 관점에서 분별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들 자상의 대상들에 대해서 입처 202) TrBh 1c. (44.9 - 10): anyas tu manyate | ekaika paramāṇur anyanirapekṣyo 'tīndriyo bahavas tu parasparāpekṣā indriyagrāhyāḥ | 203) TrBh 1c. (44.10 - 12.): teṣām api sāpekṣanirapekṣāvasthayor ātmātiśayābhāvād ekāntenendriyagrāhyatvam atīndriyatvaṃ vā | 204) TrBh 1c. (44.13 - 15.): yadi ca paramāṇava eva parasparāpekṣā vijñānasya viṣayībhavanti | evaṃ sati yo 'yaṃ ghaṭakuḍyādyākārabhedo vijñāne sa na syāt praramāṇūnām atadākāratvāt | 이것은 형색극미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설일체유부의 관점에서 보면 정당한 비판이 아니다. 이곳에서 안혜의 비판은 현색극미만을 인정하는 세친의 극미정의에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5) PS I.3. (2.21 - 22). - 97 - (āyatana)의 자상은 실재하는 자상이 아니다.206) PS에서는 디그나가도 이 화합(sañcita)의 결합방식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것으 로 보인다. 본문에서 화합에 대한 디그나가의 분석은 다음과 같다. 만일 화합상이 ‘하나(ekam)’라는 관점에서 분별(vikapayanti)된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인식대상 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순정리론』에서 중현이 상좌의 화합에 대해서 하였 던 비판과 동일하다. 이에 대해 디그나가는 실재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화합에 의한 입처(āyatana)의 자상은 실재하는 자상이 아니라는 답변을 제시하였다. 물 론 이는 입처의 화합상을 가설적 것으로 보았던 경량부 상좌의 주장과 일치한다. 이 화합의 방식에서는 다수의 실체가 함께 발생하기 때문에 그것은 자신의 입처 (āyatana)에서 공통으로(sāmānya) 대상(viṣaya)이 되지만, 하나하나로 분리되면 분별되지 않는다.207) 이 때 다수의 실체를 근거로 발생하는 화합상이 감각기관의 인식영역(indriyagocara)이 되는데, 이것은 다수의 실체를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영역에 들어온 감각대상 그 자체가 자기인식된 것(svasamvedyam)으로서 언 어로는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208) 입처(āyatana)에서 지각의 영역, 즉 색성향미 촉 등이 자기인식된 것이라는 것은 그것이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입처에서 직 접적으로 인식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다섯 가지 감각기관(5根)은 직접지각 (pratyakṣa)의 인식을 발생시키며 그것은 어떤 언어적 개념이 부가되기 이전의 무분별(nirvikapa)의 인식이 된다.209) 이와 같은 설명을 통해서 디그나가가 채택 하고 있는 sañcita가 상좌 슈리라타에 의해 주장되었던 화합(和合)이라는 것을 재 206) PS의 이 문장과 관련하여 PV는 매우 정밀한 분석을 제공하고 있다. Cf. 토사키 히로마사 (1979) 『불교인식론 연구: 다르마끼르띠의 『쁘라마나바릇띠까』 「현량론」 (現量論)』 박인성 옮김. 서울: 길. (2015). 그러나 PV는 이 논문의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에 그에 대한 서술을 생략한다. 단지 PV 게송 194 (355 - 356)에서 samudāya를 sañcita의 서술어로 사용하여, 두 용어 사이에 개념적 차이가 소 멸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을 언급해두고자 한다. sañcitaḥ samudāyaḥ sa sāmānyaṃ tatra cākṣadhīḥ ||194ab|| 화합은 『극미들이』 집적된 것이며 그것은 공상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 공상에 대해』 감관지가 있 다. 물론 sañcita를 samudāya로 설명하는 방식은 『구사론』에서도 발견되었던 것으로, 이는 설명하는 개념 samudāya가 보다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던 용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PV단계로 들 어오면, sañcita의 정설이 확립되고, samudāya가 흡수되어 가는 과정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 같다. 207) PS I.3. (2.25 - 26): anekadravyotpādyatvāt tat svāyatane sāmānyaviṣayam uktam, na tu bhinneṣv abhedakalpanāt. 208) PS I.3. (3.3): svasaṃvedyam hy anirdeśyaṃ rūpam indriyagocaraḥ || 5cd || 209) PS I.3. (3.4): evaṃ tāvat pañcendriyajaṃ pratyakṣajñānaṃ nirvikalpam. - 98 -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구사론주 세친은 동일한 방식의 논증을 통해 입처(āyatana)에서 인식 론적 차원의 대상을 실재하는 것으로 주장하였었다. 적집한 극미 중심의 관점에 서서, 개별적인 극미들과는 달리 지각의 대상이 된다는 불연속적인 측면에 주목 한다면 결합의 방식은 sañcita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개별적인 극미와 같이 입처(入處)단계에서 극미들의 집적도 실재성을 지닌다는 측면에 주목한다면 samudita의 결합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세친 철학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이 중성은 이후 결합방식에 대한 두 가지 개념들이 통합되는데 기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디그나가의 경우에 sañcita를 samudāya로 서술하는 방식을 취하 고 있으며, 야쇼미트라(Yaśomitra)의 주석에서는 본문을 주석하면서 sañcita를 설명하기 위하여 취집을 의미하는 용어로 samudāya를 사용하고 있다. (a) 적집(samudāya)의 성질을 가지기 때문에 5온처럼 가설적 존재이어야 할 것이다. (b) 5식신은 화합을 토대로 한 인식대상을 가지기 때문에 그렇지 않 다. (c) [극미들의] 취집 하나 하나가 원인이 되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는 것이 다. 어째서 그런가? (d) [극미들이] 취집하여 적집한 것들의 하나 하나가 원인 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210) 이 본문에서는 야쇼미트라가 AKBh I.20ab와 I.35d이하의 논지를 연결하여 인식 대상과 결합방식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I.20ab이하에서는 세친은 온, 처, 계의 실재성을 지지하는 설일체유부를 비판하고 온(蘊)과 처(處)의 실재성만을 옹호하 였다. 이에 대해 설일체유부는 만일 온(蘊)이 실재가 아니라면 처(處)도 실재가 아 니어야 할 것이라고 반박한다. 12처도 5온처럼 적집의 성질을 가지기 때문이다 (a). 『구사론』에서는 반론자가 곡식 무더기처럼 적집한 것, 즉 “다수의 사[극미]가 결합한(samuha) 것이기 때문에”211) 입처(入處)도 온(蘊)과 마찬가지로 가설적 존 재가 되는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비판하는 부분이다. 세친은 여기서 다수의 극 미들이 적집한 것들 각각이 인식대상의 기능을 하기 때문에 5온과는 달리 입처 단계에서의 적집은 실재성을 지닌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야쇼미트라는 바로 이 ‘[극미들] 다수의 적취들 각각이 [인식의] 원인이 된다’(c)는 문장을 I.35d이하의 210) AKVy 45.2 - 4.: samudāya-lakṣaṇatvāt skandhavat prajñapti-santi syuḥ. saṃcitāśrayālambanā hi paṃca-vijñāna-kāyā iti. na. ekaśaḥ samagrāṇām kāraṇa-bhāvād iti. naitad evaṃ. kasmāt. ekaśaḥ pratyekaṃ samagrāṇāṃ samuditānāṃ kāraṇatvāt. 211) AKBh 20ab (13.22.): anekadravyasamūhatvāt - 99 - “오식신은 화합(saṃcita)을 토대로 한 인식대상을 가진다”(b)는 문장과 평행시키 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문장 (d)에서는 화합(saṃcita)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samagrānām을 samuditānām에 병렬시킨다.212) 이를 통해 야쇼미트라의 단계 에서는 saṃcita와 samudita가 서로 큰 충돌없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경향은 화합과 화집의 특징을 전제하고 있는 비유가 무분별하게 사용되는 것을 통해서도 일정정도 확인된다. 왜냐하면 이 눈 등을 구성하는 다수의 원자들이 서로에게 의존할 때에 (apekṣyamāṇānām) 그 하나하나가 [인식발생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 만 결합(saṃhata)되지 않으면 [원인이 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원목을 끌어 나 를 때에, 다수의 일꾼들 하나하나는 힘이 부치지만, 함께 모인 것들이 (samuditānāṃ) 서로 의존하면(apekṣyamāṇānām) [원목을 끌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과 같다.213) 이 일꾼의 비유에는 맹인의 비유와 명확히 구분되는 한 가지가 있다. 맹인의 비 유에서는 개별적인 맹인에게 보는 능력 자체가 없기 때문에 다수가 모이더라도 보는 능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데 일꾼의 비유에서는 각각의 일꾼들이 물건 을 드는 능력은 가지고 있지만, 커다란 원목을 들지는 못한다. 그러나 다수가 모 이면 어떤 숫자에 이르는 순간 커다란 원목을 들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커다란 나무가 들리는 것을 통해 전체의 능력 속에 각각의 일꾼들의 드는 능력이 파악된 다. 다시 말해 원목의 비유는 ‘드는 능력’이 실제로 발휘되는 것과는 무관하게 개 별적인 일꾼들의 능력이 전체의 힘과 연속성을 띠고 있는 방식으로 결합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세친은 첫째 결합을 saṃhata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유 식이십론』에서도 채택하고 있는 용어이다. 아마도 세친은 학파적 특성을 포괄하 여 다수가 결합하여 인식대상의 능력을 발생시키는 두 가지 결합방식을 모두 결 212) 여기서 samagrānām과 samuditānām이 ‘적집의 화집’과 같은 수식으로 읽을 것인지 아니면 ‘적 집 즉 화집’과 같은 동의어 반복으로 읽어야 할지에 따라 약간의 해석상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서 로 상이한 화합(sañcita)과 화집(samudita)이 어떻게 개념적으로 통합되었는지는 세친 이후의 인식논 리학의 전개과정을 통해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논문의 범위를 벗어나기 때문 에 다음 기회에 다루어 보기로 하겠다. 213) AKVy 45.5 - 8.: yasmād bahūnām eṣām cakṣurādiparamāṇūnām parasparam apekṣyamāṇānām ekaikaśaḥ kāraṇabhāvaḥ | na tv asaṃhatānāṃ | tadyathā dārvākarṣane bahūnām ākraṣṭīṇāṃ pratyekam asāmarthyaṃ | samuditānāṃ tu parasparam apekṣyamāṇānāṃ sāmarthyaṃ |. 박창환의 번역을 취지에 맞게 부분적으로 수정하였다. Cf. 박창 환 (2009), 32 - 33 참조. - 100 - 합(saṃhata)으로 통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 본문의 비유에서 다수 의 일꾼들이 모이는 방식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화집(samudita)을 사용하고 있다. 이 결합방식의 특징은 비유의 분석에서 보듯이 개별적인 일꾼들도 일정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모였을 때 개별적인 능력과 연속성을 지니는 능력, 즉 커 다란 원목을 드는 힘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결합에서 이런 힘이 발생 하는 것은 개별적인 일꾼들이 ‘서로 의존(apekṣyamāṇa)’하기 때문이다.214) ‘서로 의존’하여 발생시키는 능력은 앞서 안혜의 『유식삼십송석』에서 sañcita와는 다른 결합방식을 주장하는 이들의 특징으로 언급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화합(和合) 과 대비되어, 안혜가 개별적인 극미들이 ‘서로 의존’하여 지각능력을 발생시키는 결합방식으로 언급하였던 것이 야쇼미트라에서는 samudita로 설명되고 있는 것 이다. 지금까지의 추적을 통해서 우리는 『니야야수트라』에서 sañcita와 samudita로 대비되었던 적대자들의 결합방식이 『순정리론』에서 화합(和合)과 화집(和集)의 내 용과 유사하며, 『구사론』과 『순정리론』의 평행구에서 발견되는 화합(和合)이 sañcita로 지칭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 sañcita는 개별적인 극미들과 는 달리 5식신의 감각기관에 의해 지각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인식의 단계 에서는 기본적인 요소에 해당한다. 그런데 설일체유부와 상좌 슈리라타, 그리고 세친은 sañcita의 실재성과 관련해서 미묘한 해석상의 차이점을 드러내는데, 이 는 실로 학파철학의 특징을 결정짓는 차이이기도 하였다. 신유부의 중현은 극미 와 화집(和集, samudita)은 그 실재성에 있어 연속적이며, 우리가 지각할 수 있 는 것은 단지 다수의 극미들이 화집하였을 때 그것들이 서로 도와서 자신의 실재 를 드러내기 때문이라고 본다. 반면 상좌 슈리라타에게는 물질적 차원에서 실재 하는 것은 극미들 뿐이다. 그것들이 화합(和合)하였을 때, 그것은 개별적인 극미 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형상(形象, ākāra)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개별극미와 화합 (和合)은 불연속적이며, 화합은 실재와는 분리된 것이기 때문에 가설적인 존재 (prajñaptisat)일 뿐이다. 이에 대해 구사론주 세친은 타협적인 해석을 취한다. 극 미들의 화합(sañcita)은 개별적인 극미들이 가지고 있지 않는 형상을 드러낸다. 이런 점에서 세친의 극미해석은 상좌 슈리라타의 화합을 수용하였다. 반면 세친 은 인식론적 차원에서 이 sañcita의 실재성을 인정하였다. 이는 설일체유부의 화 214) 이 ‘서로 의존(apekṣyamāṇānām)’하는 관계는 『성유식론』 등에서 극미 화집의 특성으로 ‘상자(相 資)’, 즉 ‘서로 돕는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Cf. 『成唯識論』: 不和集時非五識境。共和集位展轉相資有 麁相生。為此識境。彼相實有。為此所緣。(T31.4b16 - 18) - 101 - 집(samudita)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지만, 세친은 형색극미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 에 여기서 sañcita의 실재성은 현색극미의 차원에서만 확보되는 것이다.215) 6절. 대상과 인식 대상과 인식의 문제에서 학파적 견해를 가르는 핵심적인 차이는 인식주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境)과 인식적 차원에서의 인식대상(所緣)에 대한 해석에서 출발한다. 대상과 인식대상에 대한 설일체유부의 정설은 다음과 같다. 대상과 인식대상의 차이는 무엇인가? 어떤 x에 대하여 y의 작용이 미칠 때, x 는 y의 대상(viṣaya, 境)이다. 마음과 마음작용이 어떤 대상 x를 취할 때, 그 x는 인식대상(ālambana, 所緣)이다.216) 『니까야』와 『아함경』의 전승에서부터 일체존재는 내적인 감각주체와 외적인 감각 대상으로 구분되어 왔다. 그런데 초기부터 이미 감각주체를 감각기관과 마음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등장하였는데, 이것이 감각기관과 감각대상, 그리고 의식의 삼사 화합(三事和合) 개념이다. 그런데 설일체유부의 정설에 따르면 삼사화합은 동일 찰나에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들 셋에는 내용적 차이가 발생하지 않는다. 따 라서 어떤 지각대상(x)에 대해서 감각기관(y)의 작용이 미칠 때의 대상(viṣaya)과 마음이 어떤 대상을 취하였을 때의 인식대상(ālambana)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 이다.217) 이같은 철학적 전제에서는 대상과 인식은 필요충분조건의 관계를 가진 다. 대상은 인식될 수 있으며, 인식되었다면 그것의 대상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識必有境). 그러나 상좌 슈리라타에 따르면 대상과 인식대상에는 간극이 존재하 며, 감각기관에 의한 인식대상의 지각은 세속적 차원에 국한된다. 215) 이 문제는 이하 ‘형색극미와 현색극미’ 장에서 고찰해 보도록 하겠다. 216) AKBh 29bc (19.15 - 16): kaḥ punar viṣayālambanayor viśeṣaḥ | yasmin yasya kāritraṃ sa tasya viṣayaḥ | yaḥ cittacaittair gṛhyate tad ālambanam || Cf. 이종철 (1997), 194. 참조.; 『阿毘達磨俱舍論』: 境界所緣復有何別。若於彼法此有功能。即說彼為此法境界。心心所法執彼而起。彼 於心等名為所緣。(T29.7a26 - 28) 217) 『구사론』에 대한 『순정리론』의 주석에는 대상과 인식대상의 범위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보충설명이 추가된다. 다섯 가지 감각기관 자체는 마음의 상응하는 심소법이 아니기 때문에 인식대상 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Cf. 『阿毘達磨順正理論』: 若法所緣有對定是境界有對。心心所法。境界 若無。取境功能定不轉故。有雖境界有對而非所緣有對。謂五色根非相應法。無所緣故。(T29.348b9 - 12) - 102 - 5근에 의해 일어난 식은 오로지 세속유를 반연할 뿐이니, 무분별이기 때문으 로, 마치 맑은 거울에 온갖 색의 영상(像)이 비친 것과 같다. 바로 이같은 이치 에 따라 [5]식은 의지할 만한 것(依)이 되지 않는 것으로, 불세존께서 ‘지(智)에 의지하고 식(識)에 의지하지 말라’고 말한바와 같다. 그러나 의식은 세속유와 승의유를 모두 반연하기 때문에 그 자체 의지할 만한 것이 되기도 하고 의지 할 만한 것이 되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218) 상좌 슈리라타는 다섯 감각기관에 의한 인식은 오직 세속적인 존재들을 인식대상 으로 할 뿐이다. 박창환(2009)은 이것을 ‘감각지각 불신론’으로 칭하였지만,219) 이 러한 평가는 지나친 단순화와 일면적 고찰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상좌 슈리라타 는 감각지각은 궁극적 존재를 지각하지는 못하지만, 경험적 현상세계에서 감각지 각된 정보들은 일관성을 지닌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5근(根)을 통해 발생하는 인식은 무분별이기 때문에 어떤 개념적 분석이 끼어들지 않은 그 자체 로 인식된다. 따라서 비록 궁극적인 실재를 직접 지각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감각 지각의 한계가 명확하지만, 일단 12처의 영역으로 던져진 화합(和合, sañcita)의 형상(形象)은 현현한 그대로 인식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거울에 비친 영상(影 像, *pratibimba)과 같아서 비록 대상 자체(bimba)와는 완전히 성질을 달리하는 것이지만, 물질적 외부 대상이 의식적 형태로 의식에 던져진 것이라는 점에서 대 상대응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인식대상의 이런 성격은 초기 유식사상에서 대상 의 해석과 매우 유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유식사상의 발전과정에 의식에 현현 한 이 형상의 진실성와 허위성이 문제가 되었던 것처럼, 거울의 영상에 대한 평 가는 보다 깊이 있는 철학적 탐색으로 발전되어 간다. 그러나 외계의 대상에 실 재성의 근거를 두고 있는 상좌의 입장에서는 이 영상과 같은 인식을 궁극적인 지 혜와 구분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다. 감각지각에 의존하는 인식은 ‘지각 의 범주’안으로 제한된다. 따라서 궁극적 실재에 대한 지식은 경험적 지각이 아니 라 합리적 추론에 의해 ‘대상의 있는 그대로에 대한 확고한 지혜’가 획득되는 것 이다. 이런 합리적 추론을 행하는 것이 의식(意識)이다. 그러나 의식이 파악하는 것이 모두 진리인 것은 아니다. 의식은 궁극적인 존재를 인식대상으로 하기도 하 218) 『순정리론』, 1231 - 1232.; 『阿毘達磨順正理論』: 謂上座言。五根所發識。唯緣世俗。有無分別故。 猶如明鏡照眾色像。即由此理。識不任依。如佛世尊言。依智不依識。意識通緣世俗勝義。故體兼有依及 非依。(T29.486c21 - 25) 219) 박창환 (2009), esp. 17 - 27. - 103 - 지만 가설적이고 허구적인 존재들을 인식대상으로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상좌 슈리라타의 인식론은 개별극미와 극미의 화합관계에서 충분히 예 견된 것이었다. 개별적인 극미들은 감각지각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지각으로 파 악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화합(和合, sañcita)이라는 결합방식에 의해 다수의 극 미들이 산출해 내는 어떤 형상(ākāra)은 지각의 대상이 된다. 이 지각의 대상은 12가지 영역(12處)으로 분석되고, 그것은 열 가지 물질적 존재(10色處)와 법처(法 處), 의처(意處)를 포함한다. 따라서 오감에 의해 파악되는 세계는 개별적 극미 층 위의 궁극적 실재성을 직접지각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허구적이지만, 그것은 외부의 대상을 조건으로 하여 발생한 것이라는 점에서 토기뿔과 같은 비존재는 아니다. 또한 이렇게 발생한 ‘하나의 화합의 형상(一合相)’은 개념적 구성에 의하 지 않고 그 자체로 일관성 있게 지각된다. 이 ‘일합상’의 문제는 이후 불교인식논 리학에서도 대상의 인식과 관련된 논쟁의 중심주제로 부상하였다. 중현은 다수의 다르마에 근거하여 ‘일합상’을 갖는 지식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궁극적인 존재에 대한 지식이라고 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다수의 다르 마를 조건으로 한 화합의 형상은 분별의 산물이기 때문에 개념적 특성을 가지며 따라서 의식의 대상이다. 만약 다수의 다르마를 대상으로 삼아서 형상이 발생하 였지만 무분별이기 대문에 ‘단일한 형상’을 취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5식이 다수의 다르마의 형상을 대상으로 인식을 발생하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는 인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220) 그리고 바로 그것이 화집(和集, samudita)의 결 합방식이라는 것이다. 구유부에서는 다소 소박하게 이 개별적인 극미들이 다수가 모이기만 하면 지각의 대상이 된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타 학파의 비판과 화합 (和合)개념의 도전에 따라, 중현은 극미들이 다수가 모였을 때 ‘서로 의존하여’ 지 각의 대상이 되는 작용을 일으킨다는 화집(和集)의 결합방식으로 이론적 보완을 이루었다. 화합은 ‘하나의 화합의 형상’을 특징으로 한다면, 화집은 다수의 다르 마가 ‘서로 의존하여’ 지각의 대상이 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화합은 니 야야-바이셰시카의 전체상과 같은 실체가 아니다. 하나의 화합의 형상은 다양한 색깔을 가진 나비가 있을 때 아직 ‘나비’라는 이름을 갖지 않은 무분별 상태에서 의 한 마리의 나비의 형상을 의미한다. 이 때 나비의 형상은 직접적으로 지각된 형상으로 아직 개념적으로 파악되지 않은 나비이며, 바로 다음 찰나에 ‘나비’로 220) 『阿毘達磨順正理論』: 若謂此智雖緣多法生。而不於諸法取一合相。眼等諸識。應亦許然。謂彼雖緣多 法為境起。無分別故。不取一合相。如是應許五識唯依意識。貫通依非依性。有取一合相。有緣勝義故。 (T29.487a9 - 13)
인식된다. 이에 반해 화집에 의해 지각되는 나비는 각각의 구성요소들이 실재로 부터 연속성을 띠고 드러나기 때문에 마치 나비의 모자이크와 같은 것으로 설명 될 수 있다. 실재하는 다양한 색깔과 형태가 ‘서로 의존하여’ 나비를 구성하며, 그것이 ‘나비’로 인식된다. 상좌 슈리라타는 극미대종과 같은 실재하는 대상은 지각을 초월해 있으며, 인 식의 대상은 12처의 영역에서 형성되기 때문에 양자간에 불연속성이 존재한다고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가사(瑜伽師)들은 인식대상의 실재성에 보다 주목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그것은 아마도 명상 체험 가운데 완전히 감각지각이 단절된 입 정(入定)의 경험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요가수트라』 명상수행전통의 확립과정의 후반기에 불교에서도 요가수행과 그에 따른 명상체험을 철학적으로 재정립하려는 학파들이 등장하게 되는데,221)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유가사지 론』을 성립시킨 초기유가행파를 들 수 있다. 요가 수행의 전통에 있는 불교수행 자들은 명상과 선정체험에서 보게 되는 대상의 진실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 었다. 부정관(不淨觀)과 같은 명상의 방법에 의하면 초기 단계에서는 외부대상에 대한 생생한 관찰이 중심이 되지만, 점차 명상이 깊어지면서 외부의 대상이 없이 도 선명한 이미지(nimitta)를 떠올리고 관찰하다가 더욱 깊은 선정(禪定)의 단계 에서는 오감의 감각지각이 끊어진 상태에서 대상을 관찰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유가사들은 외부대상(viṣaya)과 인식대상(ālambana)의 차이점을 인 식하고, 실재성에 의문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미륵보살이 세존께 여쭈었다.]222) “세존이시여. 비파사나 삼매의 영역인 영상, 그것은 무엇입니까. [비파사나를 행하는 이의 삼매의 경계인 영상은] 그 마음과 다르다고 불려집니까 혹은 다르 지 않다고 불려집니까?” 221) Cf. Schmithausen (1976). 슈미트하우젠은 요가 수행자들의 명상체험의 경험이 선정에서 깨어난 이후의 이론화 작업을 거쳐 초기유식사상과 문헌의 성립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이 논문의 주제는 이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곳에서 상세한 논의는 생략하기로 한다. 그러 나 이 논문이 슈미트하우젠의 주장을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명상체험 자체가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전의 지적 전통의 전이해를 조건으로 하여 발생한다는 점에서 명상 전후 는 일종의 연속성을 지닌다고 보는 것이 이 논문저술의 일정한 방향이다. 슈미트하우젠에 대한 반론 과 그에 대한 재반론을 위해서는 다음을 참고하기 바란다. Schmithausen, Lambert (2014) The Genesis of Yogācāra-Vijñānavāda : Responses and Reflections. Tokyo: International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of the International College for Postgraduate Buddhist Studies, Kasuga Lectures Series; 1. esp. Part IV, 597 - 642. 222) 『해심밀경』 「분별유가품」의 번역은 안성두 교수 강독팀의 결과물을 기준으로 인용하였다. - 105 - (세존께서 설하셨다.) “미륵이여. [비파사나를 행하는 이의 삼매의 경계인 영상은 마음과] 다르지 않 다고 불려져야 한다. 무엇 때문에 [비파사나를 행하는 이의 삼매의 경계인 영 상과 마음이] 다르지 않다고 하느냐면, [마음의] 그 영상은 단지 표상일 뿐 (vijñaptimātra, 唯識)이기 때문이다. 미륵이여. 식(vijñāna, 識)은 인식대상이 단지 표상일 뿐에 의해 특징지어진다라고 나는 설했다.”223) 『해심밀경』의 「분별유가품」은 사마타와 위파사나를 행하는 요가 행자들에게 네 가지 인식대상(dmigs pa, ālambana)은 무엇인가에 관한 해명으로 시작되고 있다. 각각의 인식대상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부기한 후에, 삼매의 상태에서 인식 의 대상은 '오직 표상(rnam par rig pa tsam)'이라는 유식학파의 정형구가 등장 한다. 의식이 집중된 삼매의 상태에서 의식에 떠 올라 있는 대상은 일종의 영상 이며, 그것은 결코 의식과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어떤 외부대상의 존재를 상 정할 경우에는, 이 영상은 외부의 대상(viṣaya)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식(vijñāna, 識)은 인식대상이 '표상된 것일 뿐(vijñapti)', 즉 '그렇게 인식된 것일 뿐'이라는 의미가 된다. 여기에서 외부존재의 부정을 전제한다면, 이 주장은 단지 ‘인식은 인식일 뿐이다’는 동어반복적 명제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 다. 따라서 마지막 문장은 외부대상의 부정이라는 후대의 개념을 투사하는 방식 이 아니라, 삼매의 대상처럼 우리 눈앞에 현전(現前)해 있는 인식대상(ālambana) 들은 어떤 대상(viṣaya)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단지 '표상된 것' 혹은 '그렇게 인식된 것'(vijñapti)일 뿐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유가사지론』의 「본지분」에도 이와 유사한 입장을 보여주는 구절이 발견된다. 안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눈에 의지하여 물질(색)에 대해 표상된 것(vijñapti) 이다.224) 이곳에서도 물질(색)이나 외부대상의 부정이 문장의 주제인 것은 아니다. 이 문장 223) SNS 8.7 (90 - 91): | bcom ldan ’das | rnam par lta bar bgyid pa’i ting nge ’dzin gyi spyod yul gzugs brnyan gang lags pa de ci lags | sems de dang tha dad pa zhes bgyi’am | tha dad | | pa ma lags zhes bgyi | byams pa | tha dad pa ma yin zhes bya’o | | ci’i phyir tha dad pa [ma] yin zhe na | gzugs brnyan de rnam par rig pa tsam du zad pa’i phyir te | byams pa | rnam par shes pa ni dmigs pa rnam par rig pa tsam gyis rab tu phye ba yin no zhes ngas bshad do || 224) YBh 4.5.: cakṣurvijñānaṃ katamat | yā cakṣurāśrayā rūpaprativijñaptiḥ || - 106 - 의 핵심은 눈이라는 감각기관을 통해 인식된 것은 물질(색) 자체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표상(vijñapti)이라는데 초점이 있다. 이로써 인식대상은 외부의 대상인 물질 (색)과 구분되며, 인식대상이 인식과 동일시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 식 (vijñāna)이 대상(viṣaya)을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표상(vijñapti)이 현현 하는 바로 그것이 인식된다. 여기에서 다시 이 표상(vijñapti)의 진실성에 대한 질 문을 제기할 수 있는데, 그것은 12처의 실유성에 대한 문제와 상응한다. 온처계 를 관통하여 대상의 실재성을 인정하는 설일체유부에서는 10색처의 표상 (vijṇapti)과 대상(viṣaya)에 내용적 차이가 없기 때문에 표상은 대상의 실재성으 로 귀결된다. 그러나 12처의 가유(假有)를 주장하였던 상좌 슈리라타의 관점에서 는 실재하는 대상(viṣaya)과 그것에 대한 표상(vijñapti)은 불연속적으로 구분되기 때문에 표상은 허구적 존재이다. 그러나 감각지각의 무분별한 특징으로 인해 인 식(vijñāna)은 그 표상(vijñapti)을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 다시 말해 대상(境, viṣaya)과 인식대상(ālambanan)인 표상(vijñapti)은 불연속적이지만, 표상 (vijñapti)과 인식대상(ālambana)은 동질적이기 때문에 표상과 첫 찰나의 인식에 는 차이가 발생하지 않는다. 구사론주 세친은 이처럼 존재론적 차원에서는 대상의 실재성을 그리고 인식론 적 차원에서는 12처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다층적 실재론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 해 세친은 상좌 슈리라타와 중현의 장점을 모두 취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동 시에 양자 모두의 단점을 노출한 것으로 비판될 수도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다음 장에서는 세친이 어떻게 이러한 문제들에 해법을 찾아갔는지를 극미개념을 중심으로 추적해 보도록 하겠다. - 107 - 3장. 구사론주 세친의 극미론과 아비다르마철학 1절. 세친(世親, Vasubandhu)의 삶과 철학적 전이 『구사론』의 저자 세친(世親, Vasubandhu, ca. 400 - 480)은 설일체유부로 출가하여, 경량부 상좌 슈리라타의 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유식사상의 확 립에 핵심적인 기여를 하였다. 세친의 연대에 대하여 서기 4세기와 5세기에 비정 하는 두 가지 전승이 존재한다.225) 프라우발너(1951)는 이러한 시대적 격차의 문 제를 두 명의 바수반두를 가정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하였다.226) 그는 첫 번째 바 수반두가 320년 경에 출생한 아상가의 동생이며, 처음에는 유부의 논사였다가 이 후 대승으로 전향한 인물로 380년 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반면, 젊은 바수반두는 점차 경량부적인 색채를 지녔으며, 『아비달마구사론』과 『유식이십론』, 『유식삽십송』을 저술하였던 인물이라고 보았다. 프라우발너와 지지자들의 주장은 설일체유부로 출가하여 유식으로 전향한 세친(elder Vasubandhu)과 경량부로 경도되었던 세친(younger Vasubandhu)를 구분하면서도, 유식논서인 『유식이십 론』과 『유식삼십송』을 구사론주 세친의 저술에 포함한다. 슈미트하우젠(1967)은 세친의 『유식이십론』과 『유식삼십송』에서 경량부철학의 전거들을 제시함으로써 경량부 세친과 유식세친의 연속성을 입증해 보였다. 경량 부 연구가 진행되면서 경량부 철학에 경도된 구사론주 세친과 유식으로 전향한 세친을 동일인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크리처(Kritzer)는 한층 더 나아 가 이미 대승으로 전향한 유식가 세친이 『구사론』을 저술하였다는 파격적인 주장 을 하였다.227) 이에 반하여 박창환(2007)은 종자설에 대한 재검토를 통해 비유자 225) 바수반두의 생몰연도에 대해서는, 1) "불멸 후 900년," 즉 300년대와 "불멸 후 천 년," 즉 400년대 로 보는 두 가지 설로 요약되는데, 1)은 진제의 『바수반두법사전』에 의에 주장되는 설이고 (『婆藪槃 豆法師傳』: 至佛滅後九百年中有外道. (T50.189b24 - 25)) 2)는 현장의 『대당서역기』 (『大唐西域記』: 論師以佛涅槃之後一千年中利見也。(T51.880c6 - 7))나 규기의 『성유식론술기』 (『成唯識論述記』: 佛 滅已後千一百年。天親菩薩出生造論依今所傳諸部說異 今依大乘。 九百年間天親菩薩出世造此頌本。 (T43.231b28 - c2))에서 전하는 설이다. 세친의 연대와 관련된 논란의 상세하고 압축적인 개괄을 위 해서는 자이니(1958), esp. 48 - 49를 참고하기 바란다. 226) 이같은 주장은 자이니(1958)를 필두로 즉각적인 반론에 직면하였다. 자이니는 구사론주 세친이 경 량부적 견해를 가졌으며 대승에 경도되었다는 디팡카라의 비판을 근거로 젊은 세친, 즉 구사론주가 유가행파로 전향한 세친이라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227) Kritzer, Robert. (2005) Vasubandhu and the Yoācārabhūmi: Yogācāra Elements in the Abhidharmakośabhāṣya. Studia Philologica Buddhica Monograph Series XVIII Tokyo: The - 108 - -경량부의 철학적 개념이 세친의 경량부적 해석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주 장하였다. 한편 권오민은 『上座 슈리라타와 經量部』에서 세친의 학파귀속성에 대 해 처음에는 간다라 계통의 설일체유부 논사였다가, 이후에 비유자-경량부 계통 의 상좌 슈리라타 철학의 영향을 받아 『구사론』을 저술하였다고 주장하였다.228) 『순정리론』에서 중현은 상좌 슈리라타를 공화론자(空花論者)로 비판하였으며, 세 친에게 상좌의 주장이 괴법론(壞法論)이며 도무론종(都無論宗)에서 한 치 밖에 떨 어져 있지 않다고 경고하였다. 결국 세친은 대승사상으로 전향함으로써 중현의 비판이 현실화하게 된다. 이로써 세친이 설일체유부에 출가하여, 경량부에 경도되 었다가 유식으로 전향하였다는 전통설이 재확인된 셈이다. 이 논문에서는 이같은 세친철학의 전향과정과 특징을 극미개념을 통하여 추적 한다. 불교극미론 연구에서 세친의 위치는 절대적이다. 우선 세친의 『구사론』은 극미론에 대한 풍부한 문헌적 자료를 제공한다. 세친은 설일체유부의 철학을 서 술하면서 논쟁적인 주제가 등장하는 부분마다 극미개념을 끌어들여 설명을 시도 하고 있다. 이같은 극미개념의 채용은 세친의 매우 특이한 논증 전략이었다. 둘째 로 세친은 자신의 철학적 입장이 변화되어 감에 따라, 『구사론』과 『유식이십론』 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극미개념에 대한 자신의 해석도 바꾸어간다. 때문에 세 친의 극미개념의 변화와 그것에 대한 철학적 동인을 파악하는 것은 각 학파적 극 미설의 특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세번째로 세친의 극미해석 이 촉발한 타 학파들의 반박을 통해 극미해석과 관련된 학파적 특성을 보다 명확 히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구사론』에 대한 방대한 주석서인 중현의 『순 정리론』을 통해, 우리는 경량부 극미론에 대한 보다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또한 세친은 자신의 철학적 논변을 위해 극미개념을 사용함으로써, 극미에 대 한 상이한 해석들이 여타의 철학적 개념과 분석에 어떻게 조응하는지를 보여준 다. 12처의 가실(假實)문제를 논하면서, 감각경험의 대상과 그것의 토대에 대한 논증을 위해 극미의 집적(集積)문제와 연결시킨 것은 난해한 철학논변을 구상적으 로 해명하는 매우 탁월한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세친은 『구사론』과 『유식이십론』에서 불교철학적인 주제들에 대한 자신의 철학적 해석을 제시할 때, 극미론의 쟁점과 논쟁방식을 적절히 채택하여 추상적 논의를 보다 구체적이고 구 International Institute fro Buddhist Studies. 박창환은 이런 입장을 "크리처-하라다 가설 "(Kritzer-Harada Hypothesis)로 칭하고 이들이 주장에 대한 상세한 검토를 하였다. Park (2007), 10 - 23. 228) 권오민 (2012) 『上座 슈리라타와 經量部』. 서울: 씨·아이·알. - 109 - 상적인 형태로 서술하고 있다. 극미논쟁의 철학적 가치에 대한 세친의 이러한 실 용주의적 접근은 극미해석과 학파철학의 상관성을 고찰하고자 하는 이 논문의 목 적과도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세친은 『구사론』에서 총 12가지 철학적 논변의 맥락에서 극미개념을 끌어들여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2절. 구사론주 세친의 철학과 극미론 이곳에서는 세친의 동시대에 해당하는 『구사론』, 『순정리론』을 중심으로 그의 철학적 관점과 극미해석의 상관성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설일체유부의 경우에는 고전적 설일체유부(구유부)의 『비바사론』에서부터 『구사론』에 대한 중현(衆賢)의 비판적 주석서인 『순정리론』까지 방대한 문헌이 존재한다. 유식계 문헌으로는 『유가사지론』과 세친 자신의 『유식이십론』을 통해서 유식계의 극미설을 추적해 볼 수 있다. 경량부의 극미설은 『비바사론』에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비유자의 주 장, 『구사론』에서 세친이 언급하는 경량부설, 그리고 『순정리론』에서 비판의 대상 이 되는 비유자-경량부설과 상좌 슈리라타의 주장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설일체유부와 비교하여 경량부의 가장 두드러진 철학적 관점은 사태의 발생과 소멸을 찰나로 분석되는 시간의 연속성 안에서 파악하였다는 점이다. 그것이 대 상세계이건 그것에 대한 인식이건 어떤 하나의 사태를 한 찰나에서 완결되는 것 으로 보고자 하였던 설일체유부에 비해서, 경량부 논사들은 모든 사태의 현상은 계시(繼時)적으로 매 찰나 변화하면서 상속하고, 그 변화의 상속과 축적이 특정한 계기에서 질적 전환을 이루며 발생 또는 현상한다는 관점에 기반하였다.229) 이러 한 철학적 입장은 경량부의 모체가 되는 비유자(譬喩者, dārṣṭāntika)의 종자(種 子, bīja)설에 기반하여 발전된 개념이다.230) 마치 하나의 씨앗이 발아하여 잎이 나고, 꽃이 피고, 과일을 맺는 것과 같은 연속과 불연속의 과정이 대상과 인식의 발생과정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친은 많은 부분에서 상좌 슈리라타 의 경량부의 철학적 관점을 계승하고 있으며, 그의 설일체유부 비판은 기본적으 로 상좌의 비판의식에 근거하는 경우가 많다. 『구사론』 단계에서 세친의 이런 작 업은 이후 유식철학으로 전향하기 위한 일종의 이론적 탐색과 분석의 과정으로 229) 경량부의 상속전변차별(sañtatiparināmaviśeṣa)의 개념에 대해서는 加藤純章 (1989), 245 - 259.; 권오민 (1994), 239 - 251. 230) Park (2015), 229 - 354. - 110 - 이해된다. 이제 『구사론』에서 거론되는 12가지 철학적 주제에 대한 세친의 해석 과 극미설의 상관성에 대해 차례로 고찰해 보겠다. 1. 유정물(有情物)과 무정물(無情物)의 존재론적 동질성231) 『구사론』 게송1은 귀경게(歸敬偈)로써 이 논서의 궁극적인 목적을 성취한 붓 다에 대한 찬탄으로 시작한다. 바로 여기서 제시되고 있는 궁극의 목적은 “일체 종의 어둠과 온갖 어둠을 멸하시고(yaḥ sarvathā sarvahatāndhakāraḥ), 중생 을 건져 올려 생사의 늪에서 나오게”232)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일 체종의 어둠과 온갖 어둠을 멸하시고”에 대한 세친 자신의 해설을 다음과 같다. 오로지 불세존만이 일체 경계의 어둠과 일체의 종류의 어둠에 대한 영원한 대 치(對治)를 획득하시어 그것의 불생법(不生法)을 증득하였기 때문에 ‘멸하셨다’ 고 일컬은 것이다.233) 여기서 세친은 이 논서의 목적이 ‘일체의 알려져야 할 대상(jñeya)에 대한 어 둠(andhakāra)을 모든 측면에서 모든 방식으로(sarvathā sarvatra) 영원히 대치 (對治, pratipakṣa)하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진제(眞諦, paramārtha)는 이것을 ‘무명(無明)의 대치를 통한 일체법(一切法)의 불생(不生)’으로 해석하였다.234) 이 목적의 성취는 당연히 설일체유부의 일차적이고 핵심적인 과제이었으며, 이에 따 라 『구사론』도 일체의 존재에 대한 해명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불교철학에서 일체법은 오온, 12처, 18계의 3과(科)로써 설명이 되는데, 그 중에서도 일차적인 관심은 물질(색)에 대한 해명이다. 이 3과(科)가 통합된 아비다르마의 철학체계에 따르면, 물질(색)은 오온의 색온(色蘊)에 해당하고, 12처에서는 5근(根)과 오경(五 境), 그리고 법처(法處)의 무표색(無表色)을 포함한다. 설일체유부의 학설에 의하 면 이 물질(색)은 다시 두 종류의 극미, 즉 색깔을 나타내는 현색(顯色)과 형태를 231) Cf. AKBh 6.21 - 7.1.; T29.2c11 - 19.; 『구사론』, 17.7 - 15. 232) 『阿毘達磨俱舍論』: 諸一切種諸冥滅 拔眾生出生死泥. (T29.1a8) 233) 『阿毘達磨俱舍論』: 唯佛世尊得永對治於一切境一切種冥。證不生法故稱為滅。(T29.1a14 - 16).; Cf. AKBh 1 (1.11.): tac ca bhagavato buddhasya pratipakṣalābhenâtyantaṃ sarvathā sarvatra jñeye punar anutpattidharmatvād dhatam | 234) 불세존께서는 구경의 증득을 통해 대치하기 때문에 일체종의 일체법이 영원히 생겨나지 않기 때문 에 ‘멸하셨다’고 하였다. 『阿毘達磨俱舍釋論』: 此無明於佛世尊。由得究竟通對治故。一切種於一切法。 永不生為法故。故稱為滅。(T29.161c13 - 15) - 111 - 드러내는 형색(形色)의 극미를 포함한다.235) 『구사론』에서 첫 번째로 극미(極微, paramāṇu)개념이 등장하는 것은 존재의 층위와 종류에 대한 해명의 맥락에서이다. 설일체유부의 철학에서 하나의 실체는 하나의 자성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어떤 하나의 대상이 두 가지의 실재성을 지닌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하나의 실체(一事, eka dravya)가 현색(顯色)과 형색(形色)의 두 가지 실재성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대론자] 그렇다면 하나의 실체(一事, eka dravya)에 어떻게 현색과 형색이 함 께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비바사사] 이러한 하나의 실체 가운데 두 가지가 모두 알려질 수 있기 때문에 [이같이 설한 것으로], (a) 이 같은 하나의 실체 가운데 [현ㆍ형의 두 색이] 존 재한다고 한 것은 유지의(有智義) 즉 인식론적 의미에서이지 유경의(有境義) 즉 존재론적 의미에서가 아니다. [대론자]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신표업 중에도 역시 마땅히 현색에 대한 앎이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236) 현장의 번역에 따르면, 하나의 실체가 어떻게 두 가지 실재성을 지닐 수 있느냐 는 대론자의 질문에 대해, 비바사사의 대답은 존재에 두 가지 층위가 있다는 주 장이다. 이에 대해 다시 대론자는 그렇다면 신표업에도 현색에 대한 앎이 존재해 야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비바사사의 대답은 인식론적 대상 과 존재론적 대상을 구분하고, 인식론적 측면에서의 대상은 두 가지 실재성을 지 닌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해석으로 보인다. 그런데 같은 본문에 대한 진제의 번역은 완전히 궤를 달리하고 있다. [대론자] 어떻게 하나의 사물에 대해서 두 가지 인식의 대상이 있을 수 있겠는 가? [비바사사] 이 두 가지 물질(색)이 하나의 대상에 대해 발현하기 때문이다. 235) 극미와 관련된 철학적 논변들은 모두 일정정도 상호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분리해서 논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곳에서 유정, 무정물의 존재의 동질성이라는 주제는 현색과 형색의 논의 가운데 놓여 있으며, 그것은 다시 만물의 변괴와 고통이라는 보다 근원적인 주제의 틀 안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런 일체만물에 대한 분석은 12처설의 해명으로 집약된다. 그러나 논문의 서술방식과 목적상 가급적 해당주제에 한정해서 논하면서 필요한 경우에 그 배경과 다른 주제와의 연 관성을 언급해 두도록 하겠다. 236) 권오민 (2002) 『구사론』 1, 16.; 『阿毘達磨俱舍論』: 如何一事具有顯形。由於此中俱可知故。此中有 者是有智義非有境義。若爾身表中亦應有顯智。(T29.2c8 - 10) - 112 - [대론자] (b)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 어떤 주장에 따르면, 신업에서도 그래야 한다고 반문하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237) 양자의 번역에서 의미상의 차이는 (a), (b)에서 발생한다. 먼저 현장은 (a)를 비바 사사의 주장으로 보는데 반하여, 진제는 (b)를 대론자의 반론으로 보고 있다. 현 장은 하나의 사태에 대해 인식론적 측면에서의 대상과 존재론적 측면에서의 대상 을 상정하는 것이 가능하고, 인식론적 측면에서 보았을 경우에는 하나의 실체에 두 가지 실재성을 부여한다고 해도 무방하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진제는 동일한 본문을 대론자의 입장에서 “그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요약한다. 해당 본문의 산 스크리트어 원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원문에서는 동사 vidyate의 이중적 의 미해석이 문제가 된다. [대론자] 어떻게 하나의 실체가 두 가지 방식으로 vidyate하는가? [비바사사] 두 가지 방식의 존재가 인식되기 때문이다. [?] [여기서] 이것은 어근 vid에 대해 인식의 대상/의미이지 존재 차원에서의 대상/의미로 [해석된 것이] 아니다.238) [대론자] [만약 그렇다면] 신표업에서도 그렇다는 모순이 발생할 것이다.239) 하나의 실체가 현색과 형색이라는 두 가지의 존재방식으로 알려졌다(vidyate)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의 실체에 두 가지 실재가 존재한다(vidyate)라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도 비바사사와 대론자 모두가 지지할 수 있는 해석 이라는 점에서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대론자는 실재론을 주장하는 설일체유부 의 관점에서 실재(sattva)가 아니라 인식(jñāna)의 관점에서 두 가지 실재성을 주 장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할 것이다. 그러나 설일체유부의 입장에서는 5위 75 법의 체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물질적 외계대상의 존재뿐만 아니라 심리적 존재 237) 『阿毘達磨俱舍釋論』: 云何一物二知所緣。 此二色於一塵中現故。 是義不然。 於有教身業。 則成反 質難故。(T29.163a28 - b1) 238) Cf. Subhadra Jha (1983) The Abhidharmakośa of Vasubandhu, Chapters I & II. Patna: Jayaswal Research Institute, 28 - 32. 239) AKBh 10a2 (6.19 - 20): kathaṃ punar ekaṃ dravyam ubhayathā vidyate | asty ubhayasya tatra prajñānāt | jñānārtho hy eṣa vidir na sattārthaḥ | kāyavijñaptāv api tarhi prasaṅgaḥ | Cf. Dhātupāṭha의 2.55: vida jñāne; 4.62: vida sattāyām으로 해석된다. Yasunori Ejima, ed. (1989) Abhidharmakośabhāṣya of Vasubandhu, Chapter I: Dhātunirdeśa. Tokyo: The Sankobo Press, 9. - 113 - 와 관념적 존재의 실재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 하나의 실 체에 대하여 두 가지의 인식론적 실재성이 주장될 수 있다고 하는 점에서 대론자 와 설일체유부는 의견이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단지 대론자는 그것이 실재론자 인 설일체유부의 철학체계에서 일관성을 상실한다고 비판하는 반면에 비바사사는 자신들의 다르마체계의 존재론과 잘 부합한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가 번역자들의 해석에서도 드러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진제는 두 층 위의 존재론을 주장하는 것이 모순이라고 지적하지만, 현장은 비바사사의 입장이 두 층위의 해석에 따라 현색과 형색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 다. 이와 같이 동일한 사태판단 혹은 분석에 대해 상이한 해석적 관점을 취하는 자세는 이후 설일체유부와 경량부의 논쟁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기 때문 에 특별히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이어서 현색과 형색의 실재성에 대한 논란 가운데 유정물과 무정물의 존재론 적 동질성 문제에 대한 논의가 이어진다. 문제제기는 소리의 성질에 대한 고찰에 서 다루어진다. 어떤 논사는 손과 같은 유정물의 소리와 북과 같은 무정물의 소 리의 토대를 구분하는 입장을 피력하는데, 세친은 유정물과 무정물의 소리가 토 대를 달리한다고 볼 수 없다고 비판한다. 그렇지만 [비바사들이] 하나의 현색극미가 [내외의] 두 가지 종류의 사대소조 (四大所造)라고는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소리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240) 본문은 『구사론』에서 극미(極微)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하는 곳이다. 앞에서 현색 과 현색은 현색극미와 현색극미의 존재에 대한 논란의 배경에서 묵시적으로 극미 와 관련되었다면, 이곳에서는 현색극미(varṇaparamāṇu)가 직접적으로 언급되면 서, 극미와 4대종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적시된다. 본문에는 두 가지 중요한 해석 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는 현색극미는 4대소조, 즉 지수화풍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는 해석적 주장이다. 두 번째는 유정물이나 무정물이나 물질(색)은 내외의 구분이 없이 모두 4대소조색이라는 점에서 동질적이라는 점이다. 안근의 대상은 색깔이 고, 그 색깔을 이루는 궁극적 구성요소인 현색극미는 4대종으로 만들어진 복합물 240) 『阿毘達磨俱舍論』: 如不許一顯色極微二四大造。聲亦應爾。(T29.2c18 - 19) AKBh 10b (6.25 - 7.1): sa tu yathaiko (7) varṇaparamāṇur na bhūtacatuṣkadvayam upādāyeṣyate, tathā naivaiṣṭavya iti | - 114 - 이다. 따라서 지각의 영역에서 주어진 대상은 취극미(聚極微) 혹은 중현의 실극미 (實極微)에 해당하는 개념인 것이다. 두 번째는 생명력을 가진 것이나 무정물이나 모두 그것을 구성하는 물질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질적으로 차이가 있지 않다는 점이다. 사람이 목으로 내는 목소리와 북에서 나는 소리는 모두 동일한 4대종에 토대를 둔 소리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2. 고통과 만물의 변괴(變壞)241) 앞서 『구사론』의 저술목적이 무명의 대치(對治)를 통해 생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현상세계의 고통은 물질적 존재 자체의 속 성에 기인한 것이다. 물질에는 두 가지 특성이 있다. 하나는 취집하여 존재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변화하고 파괴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물질의 속성은 고통의 근원 적인 토대가 된다. 다시 말해 고통은 욕망하고 집착하는 것이 변화하고 파괴되기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다. 온갖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항상 그것에 대한 희망을 일으키게 되나니, 만 약 온갖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면 그 허물어짐에 괴로워함이 마치 화살을 맞은 것과 같다.242) 모든 변화하고 만들어진 존재를 유위법(有爲法)이라 한다. 오온의 관점에서 보자 면, 물질적 존재인 색온(色蘊)을 포함해서 일체(一切)는 모두 유위법에 해당한다. 이 유위법 중에서 유루법(有漏法)이 존재한다. 유루법이란 이를테면 집착(取, upādāna)이 개입된 존재들이다. 오온의 존재는 집착과 번뇌가 개입함으로 인해 오취온(五取蘊)이 된다. 또 유위(有爲)의 존재들에 대해 집착이나 번뇌가 스며든 것이 유루법(有漏法)이다. 따라서 유루법은 고통을 초래하게 되기 때문에, 집(集, samudaya)라고도 이름한다.243) 여기서 4성제의 하나인 집(集)이라는 용어가 유 루법을 설명하는 용어로 채택되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산스크리트어 samudaya는 불교에서 4성제의 집(集) 외에, “함께 모으다” 혹은 “결합하다”는 241) Cf. AKBh 9.7 - 10.5.; T29.3b20 - c20.; 『구사론』, 24.8 - 27.14. 242) 『구사론』, 25. 243) 『阿毘達磨俱舍論』: 亦名為苦(dhukha)。違聖心故。亦名為集(samudaya)。能招苦故。(T29.2b1 - 2).; AKBh 8b (5. 16): samudety asmād duḥkham iti samudayaḥ | 이것이 모여서 고통이 발생하 기 때문에 집(集)이라고 한다. - 115 - 등의 일차적 의미를 지니며, 그렇게 “결합한 것”을 samudāya로 표현한다. 그런 데 이 동일한 samudāya가 『니야야수트라』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종(大種)의 결 합관계를 나타내는 전문용어로 채택되고 있으며, 『구사론』에서는 물론 이후 불교 인식논리학에서도 결합관계를 설명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유위법의 속성은 유루법의 번뇌와 유비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모여서 형성되고 파괴되는 물질의 속성 자체가 유정의 고통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물질(색)은 어째서 고통을 [일으키는가]? 어떤 이는 말하기를, “물질(색)은 변화가 일어나고, 저항을 가지기 때문이다.” [고 하였다.]244) 물질의 변화와 저항은 논쟁의 당사자들이 모두 동의하는 바이다. 문제는 물질의 궁극적인 구성요소인 극미도 변화와 저항을 가지는가 하는 점이다. 논적의 질문 은 ‘극미는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물질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바이셰시카 의 극미 개념처럼 상주불변하는 것은 물질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물질은 정 의상 변화하고 저항을 지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물질 가운데 상주불변하는 것이 존재한다면, 일체는 무상한 것이고 무상하기 때문에 고통이 있다는 전제가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세친이 제시하는 아비다르만의 정설에 따르면, 극미 는 변화를 본질로 하는 물질(색)에 포함시키는 것에 문제가 없다. [논적] 그렇다면 극미색은 물질(색)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물질의 특성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세친] 어떤 극미색도 하나가 개별적으로 있는 것은 없고, 취집(聚集, saṃghāta)한 상태로 있으며, 바로 그것이 [변화와 저항 등] 물질의 성질을 가지는 것이다.245) 여기서 개별적인 극미들의 물질성 등은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유보된다. 단 지 극미들의 물질성이라는 것은 극미들이 취집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변화와 저항 244) AKBh 13 (9.15 - 16): rūpasya punaḥ kā bādhanā | vipariṇāmotpādanā | pratighāto rūpeṇety apare |. 에지마는 Ms 와 PR의 rūpeṇety를 제시한 후에 자신은 rūpaṇety라고 읽었지만, 여기서는 Ms와 PR의 독법을 따른다. 또 어떤이(apare)의 주장이 어디까지 미치는지에 대해서 한역과 티베트역을 대조하면서, “변화”와 “저항”을 물질의 두 가지 다른 성질로 보는 것이 더 나은 이해라고 평가하였다. Yasunori Ejima, ed. (1989), 14. 245) AKBh 13 (9.16 - 17): paramāṇurūpaṃ tarhi rūpaṃ na prāpnoty arūpaṇāt | na vai paramāṇurūpam ekaṃ prthagbhūtam asti | saṃghātasthaṃ tu tad rūpyata eva | - 116 - 등의 물질의 특성을 통해 확인되는 것이다. 색온에는 오근과 오경, 그리고 무표색 이 포함된다. 오근과 오경의 변화와 저항이라는 물질성은 취극미에 대한 설명으 로 충분히 설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설일체유부에서 개별극미와 취집한 극미는 본질에 있어서 연속성을 지닌다는 일관된 관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취극미가 변화하고 저항을 가진다면, 개별극미도 당연히 그와 같은 성질을 지녀야 한다. 그 러나 이렇게 극미도 변화하고 저항하는 성질을 가진다는 것이 확립되면, 과거와 미래의 물질(색)과 무표색(無表色, avijñaptirūpa)은 물질(색)에 포함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반론이 제기된다.246) 왜냐하면 설일체유부의 교설에서 그것들은 변 화하거나 저항하는 성질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비바사사는 과거의 물질은 이미 변화하였고 미래의 물질은 앞으로 변화할 성질을 가지고 있는 종류 에 속하기 때문에 물질(색)이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무표색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설(異說)들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첫 번 째로 제시된 견해는 나무가 움직일 때, 그림자가 따라서 움직이는 것과 같이 표 색(表色, vijñaptirūpa)이 변화하는 것에 따라 무표색(無表色, avijñaptirūpa)도 변화한다는 주장이다. 세친은 이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물질적 존재를 표색(vijñaptirūpa)과 무표색(avijñaptirūpa)으로 대비시켜 포괄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근과 오경에 포함되는 10처의 색들은 표색(表色)에 포 함되고, 법처에 포함되는 물질이 무표색인 것이다. 또 다른 견해는 무표색의 토대 가 되는 대종(大種)이 변화하기 때문에 무표색을 물질(색)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 다. 세친은 무표색을 물질(색)이라고 할 수 없다는 문제제기에 대해 여러 가지 견 해를 나열하고 있지만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정리하고 있지는 않다. 대신 그는 비바사의 종의(宗義)에 모순이 있다는 점을 드러내 보인다. 비바사의 종의에 따르 면, 한편으로는 그림자 등의 현색극미가 4대종에 의지한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 로는 대종이 소멸하여도 무표색은 그에 따라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는 점 을 지적한다.247) 세친은 이곳에서 중현과 달리 다소 불명확한 상태로 논의를 마 무리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여러 견해에 대한 비바사사의 답변이 불충분 하다는 점을 들어 앞의 질문에서와 같이 무표색은 물질(색)에 포함될 수 없고, 따 라서 단지 가설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논지를 펴는 것으로 보인다. 248) 246) 『구사론』, 26 - 27. 247) 『阿毘達磨俱舍論』: 此影依樹光依寶言。且非符順毘婆沙義。彼宗影等顯色極微。各自依止四大種故。 設許影光依止樹寶。而無表色不同彼依。彼許所依大種雖滅而無表色不隨滅故。(T29.3c12 - 16) 248) 세친의 무표색 부정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권오민 (1994), 175 - 183.을 참조하기 바란다. - 117 - 3. 12처가유설과 1법처설249) 『구사론』에서 극미에 관련된 세 번째 논의는 온, 처, 계 3과(科)의 실재성과 3 과(科)의 존재론적 위상에 관한 문제에서 등장한다. 이 3과(科)문제는 학파 간에 의견을 달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친 자신의 입장도 단계에 따라 변화를 보이고 있다. 특히 12처(處)의 가실(假實)문제를 놓고 상좌 슈리라타와 설일체유부의 대 립이 있었는데, 여기서 제기된 12처 해석의 문제가 이후 세친의 『유식이십론』에 서 12처설로 전개되기 때문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1) 온(蘊), 처(處), 계(界)의 실재성 논란 『니까야』와 『아함경』 전승에서 12처는 일체의 대상세계를 설명하는 가장 뛰어 난 체계로 설명이 되었다.250) 12처설에서는 일체세계를 감각기관과 그것의 대상 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경험주의적 특성을 지닌다.251) 즉 일체세 계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과 그것에 상응하는 대상, 그리고 감각되지 않는 물질들 과 마음의 요소들을 포함하는 법처와 마음(의처)로 분석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 체의 존재는 지각된 것(esse est percipi)"이라는 경험주의적 관점이 지각된 세계 가 지각된 그대로 실재하는지 혹은 단지 지각된 경험의 관념만을 남기는 것인지 를 결정해 주지는 못한다. 때문에 불교철학에서도 이 경험된 세계의 실재성에 대 하여 학파들의 입장이 갈라진다. 온, 처, 계 3과(科)의 해석에 있어서 설일체유부와 상좌 슈리라타, 세친은 존재 의 층위와 인식대상의 범주에 대해 견해를 달리하였다. 『구사론』단계에서는 세친 도 외부대상의 실재성을 인정하였기 때문에, 대상의 실재성은 의문시 되지 않았 다. 문제는 학파적 정설의 개념정의에 따르면서 일관성있는 실재의 범주를 어디 249) Cf. AKBh 13.19 - 14.9.; T29.5a7 - b3.; 『구사론』, 37.22 - 40.10. 250) 『阿毘達磨大毘婆沙論』: 然佛所說十二處教最上勝妙非餘法門。何故此教最上勝妙。答此是處中說攝一 切法故。十八界教雖攝一切法。而是廣說難可受持。五蘊教非唯略說難可解了。而亦不能攝一切法。以蘊 不攝三無為故。(T27.378c17 - 21) 붓다께서 설하신 12처의 교설은 최상승의 현묘한 법문으로 그 외에 다른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문] 어찌하여 이 교설(12처설)이 가장 뛰어나고 미묘한 것인가? [답] 이 교설은 입처(入處)로 일체의 모든 법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18계의 교설도 비록 일체의 모든 법을 포함하기는 하지만, 장황하게 설하기 때문에 수지(受持)하기 어렵다. 오온의 교설은 간략히 설해 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일체의 모든 법을 다 포함하지 못한다. 오온으로는 세 가지 무위 법(無爲法)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251) 박창환 (2010), 283. - 118 - 로 설정할까 하는 점이었다. 보광(普光)의 『구사론기』에서도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학파들 간에 견해가 갈리었음을 전하고 있다.252) 비유자-경량부 계통을 대표하는 상좌 슈리라타는 가장 기본적인 구성요소인 계(界)만이 실재한다고 보았으며, 그 외의 12처와 오온은 4대종의 구성물로써 실재성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설일 체유부의 주장은 앞서 통합에 이른 3과 모두의 실재성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세 친은 두 학파의 중간지점에 선다. 그는 계(界)의 실재성은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설일체유부와 상좌 슈리라타의 견해에 동의하지만, 온(蘊)의 실재성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설일체유부와 차이가 있고, 12처의 실재성은 인정한다는 점에서 슈리라타 와 거리를 둔다. 이 3과의 위상분화와 그것의 해명이라는 철학적 과제를 수행하 는데, 극미개념의 분석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8계에서 각각의 개별적인 계 (界, dhātu)인 '하나의 사극미'는 4대종과 극미에 상응하는 궁극적 구성요소이며, 오온과 12처는 극미들의 집적에 의해 만들어진 것(소조색)이다.253) 그러나 오온과 12처는 집적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서로의 존재론적 위상이 다르다. 12처 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과 대상의 접촉에 의해 발생하는 지각의 기본단위이다. 다 시 말해 12처는 인식의 기본단위들이기 때문이다. [세친] 그런데 만약 적취(rāśi)의 뜻이 바로 '온'의 뜻이라고 한다면 온은 마땅 히 가유(假有)가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그것은 다수의 실체가 적집하여 함께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으로, 마치 [곡물의] 무더기(聚)와도 같으며, 자아와 도 같은 것이다. [유부]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으니, 하나의 실극미(實極微)도 역시 '온'이라고 이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친]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응당 마땅히 '적취의 뜻이 바로 온의 뜻'이라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 하나의 [실극미(實極微)]는 적취의 성질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254) 252) 『俱舍論記』: 若言聚義至如聚如我者。毘婆沙宗。蘊等三門皆是實法 經部所立。蘊.處是假。唯界 是實 今論主意。以經中說略一聚言。許蘊是假。餘二是實. (T41, 29a24 - 27) 만약 취집의 뜻이 적취와 같은 것인지 자아와 같은 것인지 말한다면, 비바사종은 '온' 등 세 문이 모 두 실법이라고 주장하지만, 경부는 '온'과 '처'는 가법이고 오직 '계'만 실법이라고 건립한다. 지금 논 주(세친)의 의도는 계경에서 집약해서 하나의 적취로 본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 '온'은 가법이고, 그 밖의 둘은 실법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253) 『阿毘達磨順正理論』: 如是極微一一各住。無依緣用。眾多和集。此用亦無。故處是假。唯界是實。(T29.350c16 - 17) 이와 마찬가지로 극미 하나하나는 소의가 되는 일도 없고 소연이 되는 일도 없으며, 다수의 [극미]들이 화집하여 있을 때에도 역시 이같은 작용은 갖지 않는다. 따라서 처는 가유이며, 오직 계만이 실유이다. 254) 『阿毘達磨俱舍論』: 若言聚義是蘊義者。蘊應假有。多實積集共所成故。如聚如我。此難不然。一實極 - 119 - 3과의 위상에 차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극미개념이 도입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후 개별극미와 극미의 취집, 그리고 결합의 방식에 따른 존재와 인식에 대한 논란을 예고한다. 세친은 온(蘊)이 집적의 의미를 가진다면, 그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 라 가설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고 비판한다. 앞서 오온의 두 가지 층위의 문제를 분석한 곳에서 개별적 사물로써 취집한 물질 대상을 색온으로 볼 가능성이 제시 되었던 것처럼, 세친은 이곳에서 적집으로써의 오온은 '곡물의 무더기나 자아와 같은 것'이 될 것이기 때문에 가유(假有)라고 주장한다. 설일체유부는 7개의 극미 가 적집하여 만들어진 실극미(實極微)를 온(蘊)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적집인 온(蘊)이 실재한다고 해도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세친은 다시 만일 실 극미를 온(蘊)이라고 주장하려면, 온(蘊)의 뜻이 적취한 것(rāśi)이라고 말하지 말 아야 한다고 반박한다. 적취한 것이라면 온은 실재하는 것이 될 수 없다. 이러한 학파들의 해석 차이는 각 학파의 철학적 전제에 따른 논리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으며, 각 학파들은 자신들의 철학체계 내에서 일관되고 정합적인 해석의 결과 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3과에 대한 세친의 해석도 결코 단순히 중간선 을 취하는 류의 "절충주의"255)는 아니며, 기존의 해석전통에 충실하면서 경험주의 에 기반한 자신의 인식존재론을 확립하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인 것이다. 2) 12처의 가실(假實)문제와 1법처설 설일체유부는 학파명에 걸맞게 온, 처, 계 삼과(三科) 모두의 실재성을 인정한 반면256), 비유자-경량부 계통257)의 논사들은 18계의 실재성은 인정하지만, 12처 微亦名蘊故。若爾不應言聚義是蘊義。非一實物有聚義故。(T29.5a11 - 14) AKBh 20ab (13.21 - 23): yadi rāśyarthaḥ skandhārthaḥ, prajñaptisantaḥ skandhāḥ prāpnuvanti | anekadravyasamūhatvāt rāśipudgalavat | na | ekasyāpi dravyaparamāṇoḥ skandhatvāt | na tarhi rāśyarthaḥ skandhārtha iti vaktavyam | na hy ekasyāsti rāśitvam iti | 여기서 ekasyāsti를 위의 댓구를 평행시켜서 실극미(dravyaparamāṇu)를 첨가하여 ekasya dravyaparamāṇoḥ asti 읽는 것이 의미를 명확히 하는데 도움을 준다. 255) 박창환은 법칭(法稱)의 인식론을 고찰하면서 세친의 극미해석이 상좌 슈리라타와 중현(衆賢)의 입장 에 대한 “절충주의적” 해석이라고 분석하였다. 박창환 (2009), 5 - 51. 256) 일체(一切) 존재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온, 처, 계의 3과(科)의 설명체계가 있지만, 아비다르마 철학 에서는 전통적으로 12처를 가장 뛰어난 설명방식으로 인정하고 있다. 『阿毘達磨俱舍論』: 若欲善說一切有者。應如契經所說而說。經如何說。如契經言。梵志當知。一切有 者。唯十二處或唯三世。如其所有而說有言. (T29.106a23 - 26) 만약 참으로 일체가 존재한다고 설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계경에서 설한 것과 같이 설해야 할 것이 - 120 - 와 오온의 실재성은 부정하였다.258) 설일체유부의 관점에서 보면, 궁극적으로 존 재의 토대를 이루는 계(界)와 그것들이 집적되어 만들어진 입처(入處)는 모두 실 재성을 지니고 존재론적으로 연속적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하나의 실재로써 진 리를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각된 표상(表象, vijñapti)은 지각된 대상과 직접 적으로 연속성을 지니며 인식론적으로 동일시 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경량부는 존재론적 차원과 인식론적 차원에서의 실재성을 명확히 구분하기 때문에, 지각된 것은 궁극적 실재를 반영하지 못한다고 해석한다. 궁극적 실재는 감각지각에 의 해 포착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은 단지 이성적 탐구와 논리적 추론을 통해서 획득될 수 있는 것이다. 논란의 초점은 12처의 가실문제로 압축된다. 다시 말해 경험적으로 지각된 대 상세계의 실재성을 인정할 수 있느냐에 따라 대상과 인식의 연속성이 확보되는가 하는 문제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순정리론』에서 중현이 거듭하여 상좌가 12처설의 비실유성을 주장하였다고 비판259)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친은 다. 경전에서는 어떻게 설하였는가? 계경에서 설한 바와 같다. "바라문이여, 일체의 존재라는 것은 오 직 12처 혹은 오직 삼세(三世)로서 그것이 존재하는 바와 같이 [존재하는 것을] 존재한다고 말한다." AKBh V.27 (301.6 - 8): evaṃ tu sādhur bhavati-- yathā sūtre sarvam asti ity uktaṃ tathā vadati| kathaṃ ca sūtre sarvam asti ity uktam? “sarvam asti iti, sarvam astīto brāhmaṇa, yāvad eva dvādaśāyatanāni” iti | adhvatrayaṃ vā | yathā atra tad asti tathā uktam | [만약] 경전에서 일체가 존재한다고 설한 바와 같이 그와 같이 말한다면 참되게 [설]한 것이 될 것이 다. 경전에서는 어떻게 일체가 존재한다고 설하는가? "일체가 존재한다고 할 때, 그 일체의 존재는, 브라만이여, 12처이다." 바로 그처럼 삼세(三世)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과 같이 그와 같이 존재한 다고 말해진다. 257) 경량부의 학파적 정체성과 학파의 존재여부는 자주 의문시되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독립된 학파의 집단을 형성하지 못하였고, 스승과 제자 혹은 저술의 형태로 전승되었던 특정한 학문적 전통 에 대한 비판자들의 명칭을 통해 사후적으로 정체성이 주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권오민, 박창 환, 카토쥰쇼 등의 근래의 연구를 통해, 비유자-경량부와 상좌 슈리라타의 학파적 연속성이 확인되었 고, 『대비바사론』, 『순정리론』등의 문헌에 언급된 반론자들의 인용을 통해 핵심적인 논점들에 대한 경량부의 주장이 비교적 상세하게 알려지게 되었다. 加藤純章 (1989); 권오민 (1984), (2012); Changhwan Park (2007). 258) 『阿毘達磨順正理論』: 又彼所說。如契經言。一切法者。謂十二處又契經言。此十二處。皆有戲論。皆 是無常。契經復言。眼色眼識。廣說乃至。意法意識皆是無常。(T29.434a24 - 27) 또 그(상좌)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계경에서 '일체법이란 12처이다'고 말하였다. 또 계경에서는 ' 이 12처는 모두 희론이며, 모두 무상한 것이다'고 하였다. 또한 계경에서는 '안(眼)과 색(色)과 안식 나아가 의(意)와 법(法)과 의식은 모두 무상한 것이다'고 하였다." 259) 『순정리론』, 191 - 192.; 『阿毘達磨順正理論』: 上座此論便違經說。如契經說。喬答摩尊餘處說言。 我覺一切。依何一切言我覺耶。唯願為開勝義有法。世尊告曰。梵志當知。言一切者。謂十二處。此勝義 有。餘皆虛偽。世尊不應依不實法說勝義有。又亦不應唯證假有成等正覺。空花論者可說此言。稱佛為 師。不應黨此。故十二處皆是實有。非於假法可說勝義。(T29.352a6 - 13) - 121 - 『구사론』에서 오온의 실유성을 비판하면서 12처의 실재성을 지지한다. 세친의 이 러한 관점은 계(界)의 실재성만을 인정하는 상좌와 온, 처, 계 3과의 실재성을 모 두 인정하는 설일체유부 모두에게 불만족스러운 것이었으며, 이론의 통합성을 약 화시킬 위험이 있었다. [세친] 따라서 바로 그 적취(rāśi)와 같이 오온(五蘊)도 가설적 존재이어야 할 것이다. [유부] 만약 그렇다면 온갖 색처들도 가설적 존재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눈 등의 다수의 극미들[로 만들어진 감각기관들]이 발생하는 문이기 때문이다. [세친] 그렇지 않다. 취집된 것들의 하나 하나가 원인의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감각기관은 대상과 함께 작용하기 때문에 각각의 입처는 존재 하지 않게 될 것이다.260) 설일체유부는 세친이 오온의 실재성은 부정하면서 12처의 실재성을 주장하는 것 은 논리적 일관성이 결여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다시 말해, 오온이 집적된 것이 기에 실재성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라면, 마찬가지 논리로 12처 또한 집적에 의 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실재성을 결여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상좌와 같이 다수의 극미들이 집적하여 만들어진 색처(處, rūpāyatana)도 가설적인 존재 라고 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일관된 입장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설일체유부는 개별극미들은 3과의 어느 층위에 있건 자신의 성질을 잃지 않 고, 개별극미와 극미의 집적이 연속성을 지니는 것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개별극 미가 실재한다면, 실재하는 것들이 집적한 12처, 오온도 실재성을 지닌다. 그러나 세친은 오온은 집적된 것이고, 집적된 것은 실재성을 지니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세친의 독창적인 12처 해석이 제시된다. 극미들은 취집 (samagra)하였을 때, 그 '취집한 것들' 하나하나(ekaśaḥsamagrāṇāṃ)가 원인의 작용을 하기 때문에, 12처 하나 하나의 개별적인 실재성이 인정되어야 한다.261) 260) AKBh I.20ab (14.2 - 4): tasmād rāśivad eva skandhāḥ prajñaptisantaḥ. rūpīṇy api tarhy āyatanāni prajñaptisanti prāpnuvanti | bahūnāṃ cakṣurādiparamāṇūnām āyadvārabhāvāt, na ekaśaḥ samagrāṇāṃ kāraṇabhāvāt viṣayasahakāritvād vā nêndriyaṃ pṛthagāyatanaṃ syāt. | 261) 본문에 대한 권오민의 번역은 "다수의 적취 중에 존재하는 각각의 극미에 원인의 작용이 있기 때문 에"이며, 박창환도 같은 맥락에서 " [인식영역을 통해] 집적된 극미 하나하나가 [인식발생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본문에서 적취(samagra)가 소유격 복수형태(samagrāṇām) 이기 때문에 그것들의 각각(ekaśah)을 "집적된 극미들에 속하는 개별 극미들의 하나 하나"라기 보다 는 "극미들이 적집된 그 집적물 [자체의] 하나 하나"라고 읽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이 때 적집된 것 - 122 - 12처에서 감각기관(오근)과 지각대상들(오경)은 『아비담심론』의 개념에 따르면 취 극미, 중현에 따르면 실극미(實極微)에 해당하는 극미들의 집적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 이런 집적물이 색깔(색) 등의 감각정보를 형성하고, 바로 그 감각정보들 은 인식을 발생시키는 원인으로 작용력을 가지기 때문에 실재성을 인정할 수 있 다는 것이다. 상좌 슈리라타가 12처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감각경험에 의해 파악되는 인식대상을 실재하는 대상세계와 구분하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순정리론』에서 중현은 상좌의 12처 가유설을 비판하면서 맹인의 비유를 거론한 다. 먼저 상좌가 제시한 맹인의 비유는 보지 못하는 자들이 여럿이 모인다고 해 서 보여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 않는 극미들이 모인다고 해서 그것이 보여 지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각각의 개별적인 극미는 토대와 인식대상 이 될 수 없으며, 다수의 극미가 ‘화합’하였을 때에만 토대와 인식대상이 된다는 것이다.262) 이 화합에는 개별적인 극미들이 단순히 양적으로 모여서는 인식의 대 상이 될 수 없으며, 화합이라는 특정한 결합방식에 의해 토대와 인식대상이 되는 어떤 질적인 도약을 한다는 주장을 함축한다. 중현은 계(界)와 상응하는 개별극미의 층위에서의 대상세계와 12입처(入處)에 상응하는 경험적 현상세계의 층위에서 모두 실재성을 인정하면서 상좌의 맹인 비 유를 역으로 이용한다. 애초에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라면, 양적으로 아무 리 많이 축적한다고 하더라도 질적인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어떤 현상이 지각된다고 하는 사실은 그것이 지각될 수 있는 능력이 이전부터 존재했 기 때문이다. 바로 이렇게 특정한 단계에서 그 이전의 지각될 수 있는 능력을 드 러내 보이는 결합의 방식이 ‘화집’이다. 화집은 개별극미들이 가지고 있는 실재성 을 드러내서 지각될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에, 개별극미 차원에서 지각되지 않 았던 극미들이 화집하여 지각의 토대와 대상으로 작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다.263) 따라서 경험적 세계에 존재하는 감각적 주체인 오식신(五識身)은 화집을 통하여 실재하는 존재들을 지각하는 것이다. 중현에게 있어 우리의 감각경험은 착란이 개입하지 않는 한, 존재의 궁극적 실재성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264) 각각의 입처(入處)들이 인식 발생의 원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인식의 원인으로써 그 실재성을 인정 할 수 있다는 것이다. Cf. 『구사론』, 39.; 박창환 (2009), 32. 262) 『阿毘達磨順正理論』: 一一極微非依緣體。眾微和合成依緣論. (T29.352a15 - 16) 263) 『阿毘達磨順正理論』: 和集極微為依緣論。此對盲喻理不相違。許一一微是依緣故. (T29.352a16 - 18) 264) 『阿毘達磨順正理論』: 故五識身。決定不用和合為境。然必有境。故以實法為境義成。(T29.352a19 - - 123 - 그러나 상좌의 입장에서는 개별적으로 볼 수 없는 극미가 모여서 어떤 형상으 로 지각된다는 것은 개별극미들과는 다른 인식대상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하 며,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화합’이라는 결합의 방식이다. 따라서 오식신이 지 각하는 대상은 개별적인 극미 차원의 궁극적인 실재가 아니라 화합에 의해 새롭 게 드러난 형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12처를 통해 펼쳐지고 지각되는 세계는 궁극 적인 실재와는 구분되는 가설적인 세계이다. 이런 상좌의 입장은 그가 12처에서 물질세계에 대응하는 10처를 1법처에 포함시키고, 나아가 의처와 1법처로 단순화 하면서 더욱 강화된다. 12처설에는 두 가지 상이한 범주가 중첩되어 있다. 하나는 정신적 요소(의처와 법처의 심소)와 물질적 요소(10처와 심소를 제외한 법처)로 구분되는 범주이고, 다른 하나는 감각기관(내처)과 감각대상(외처)이라는 인식론적 범주이다. 설일체유 부의 존재분류체계에서 일체(一切)는 다섯 가지 범주에 속하는 약 75종의 다르마 를 포함한다. 이들은 크게 물질적 존재, 심리적 존재, 관념적 존재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경량부에서는 관념적 존재를 가설적인 개념으로 분석하기 때문에 실재 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심리적 존재들도 마음과 마음작용의 차별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체의 존재는 물질적 존재와 심리적 존재, 인간의 경우 몸과 마 음으로 요약된다. 세계는 인식주체인 마음과 그것의 대상인 감각기관과 감각대상 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상좌 슈리라타는 ‘12처를 모두 열거하지 않고, 의처(意處, manāyatana)와 법처(法處)만으로 압축하더라도 충분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 을 제기한다.265) 『순정리론』에 의하면, 일체법(一切法, sarvadharma)은 모두 의 처의 대상이기 때문에 모두 하나의 법처(法處)에 다 포함되고 나아가 의처조차도 법처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12처는 실제로 하나의 법처(一法處)로 설명 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법처 안에도 서로간의 차별성이 존재하는 것을 나 타내기 위하여 12처로 분류하였다는 것이다.266) 이러한 과감한 해석은 존재의 분 21) 그러므로 오식신은 결정코 화합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식신은] 반드시 대상을 가지 기 때문에 실재하는 다르마가 대상이 된다는 뜻이 성립하는 것이다. 265) 『순정리론』, 261 - 267. 266)『阿毘達磨順正理論』: 又上座說。諸法無非意所行故。皆法處攝。若爾唯應立一法處。以一切法皆意境 故。 此但有言。無定量證。又彼所言。雖實一處。而於一中據差別相。立餘十一。謂初眼處亦名法處。 乃至意處亦名法處。最後法處唯名法處. (T29.344b14 - 19) 또 상좌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모든 법은 의처가 행한바가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모두 법처에 포섭된다. (신유부) 만약 그렇다면 오직 1법처만을 세워야 할 것이다. 일체법은 모두 의처의 대상이기 - 124 - 석을 보다 단순하고 명확하게 하려는 경량부의 철학적 경향을 잘 보여준다. 설일 체유부의 다섯 범주를 비판하여 세계를 물질적 요소와 심리적 요소로 단순화하 고, 그것들도 궁극적으로 감각된 세계(入處)에서 하나의 법(法, dharma)으로 포 괄할 수 있다.267) 경량부의 체계에서 12입처(入處)는 실재성이 없는 가유(假有)이 기 때문에, 앞의 주장은 감각주체를 포함한 일체의 현상세계가 가설적이고 임시 적인 존재라는 주장이 된다. 이는 불교전통의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의 관점에서 보아도 설득력이 있는 해석이라 하겠다. 그러나 중현은 상좌 슈리라타의 주장이 『순별처경』의 교설에 위배될 뿐 아니 라 대상과 감각기관의 구분을 혼란스럽게 하는 오류가 있다고 비판하였다. 만일 1법처에 오근과 오경의 10처가 포함된다면, 의근의 대상인 법처에 다섯 가지 감 각기관이 포함되게 될 것이다. 오근(五根)은 의근(意根)과 마찬가지로 감각기관임 에도 불구하고 1법처설에서는 의근의 감각대상이 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 다. 중현에 따르면, 이와 같은 문제는 12입처를 설하는 목적 자체를 폐기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12처설의 목적은 대상과 대상을 파악하는 감각기관을 뒤섞임이 없이 설정하고, 그것들이 서로 혼동되지 않고 개별적인 특수성을 가지고 작용한 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268) 같은 문제에 대한 세친의 설명은 『구사론』의 「분별계품」과 『석궤론』에서 제시 된다. 『구사론』 「분별계품」에서 세친은 논점을 두 가지 질문으로 요약한다. 첫째 는 10처가 모두 색온에 포함된다면 무슨 이유로 오직 하나에 대해서만 색처라는 이름을 붙이는가? 둘째는 궁극적으로 12처(處)가 다르마(法)인데 오직 하나에 대 해서만 법처(法處)라는 이름을 붙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세친은 자신이 세운 질문 에 대해 세 가지의 답변을 제시한다. 10처 가운데 오직 하나의 입처(入處)만을 색 처라고 하는 이유는, 첫째는 대상(境)과 대상을 가지는 것(有境)에 차이가 있음을 정확하게 인식시키기 위해서고, 둘째는 오근과 오경의 색법(色法) 가운데 색처(色 處)가 “가장 뛰어난 것”이기 때문이고, 세번째는 세간의 관습에 따르면 색처만을 색(色)이라고 하지 안처 등을 색(色)이라고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12 때문이다. 이것은 다만 말만 있을 뿐 논리적 증명이 없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경부』 비록 실제로는 1처이지만 1처 가운데의 차별된 특징에 의거해서 나머지 11처를 건립한다. 이를테면 처음의 안처도 역시 법처라고 하고 나아가 의처도 역시 법처라고 해야겠지만, 최후의 법처만을 오직 법처라고 이름한다. 267) 권오민은 이처럼 다르마, 즉 현상의 실재성만을 인정하는 경량부의 철학적 입장을 유법(唯法, dharamamātra)설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권오민 (1994), 328 - 342. 268) 『阿毘達磨順正理論』 (T29.344b14 - c15).; 『순정리론』, 134 - 135. - 125 - 처가 모두 다르마(法)임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하나에 대해서만 법처(法處)라고 하 는 이유에 대해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논증한다.269) 세친은 『석궤론』에서 문법적인 방식을 동원하여 의처와 법처를 각각 감각기관 과 대상에 국한시키는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270) 이종철은 『석궤론』 (Vyākhyāyukti) p.109a7 - b7의 분석에서 세친이 어떻게 한정사 eva에 대한 기 술적인 적용을 통해서 법처의 대상성 문제를 해결하였는지를 설명하였다.271) 감 각기관에는 오근(五根)과 의처(意處)의 여섯 가지가 있다. 그런데 법처는 '오직 의 처만' (manāyatana eva)이 대상으로 취하는 것이다. 따라서 법처는 다섯 가지 내처(內處) 즉 안, 이, 비, 설, 신처(處)가 대상으로 취하는 색, 성, 향, 미, 촉처와 는 구분된다. 그러나 1법처설에 따르면, 의처의 대상은 다섯 가지 내처(內處)도 포함하기 때문에 '오직 의처만' (manāyatana eva)이 대상으로 취하는 것으로는 5근을 배제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번에는 법처의 대상성을 한정하기 위하여 '오직 대상일 뿐' (viṣaya eva)이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일체법을 포괄하는 1법처설의 법처가 아니라 12처에서 의처(意處)의 대상인 특수한 하나의 법처(法處)는 ‘의처 만에 의해 인식되면서, 오직 대상일 뿐’인 범주로 한정된다. 『석궤론』을 저술하는 당시에 세친이 어떤 관점에서 법처의 대상성을 설명하고 자 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상좌의 1법처설을 받아들이면서도 아비다르마 전 통의 12처설이 설해진 이유를 밝히려는 시도로 볼 수도 있으며, 반대로 12처실유 설의 입장에서 각각의 개별적인 입처의 하나로써 법처의 의미를 한정하려는 것으 로 이해할 수도 있다. 『구사론』 단계에서 12처의 실재성을 지지하였던 세친을 고 려하면 두 번째 해석의 가능성이 높겠지만, 이후 『유식이십론』에서 전개되는 해 석의 변화를 참고하면 1법처설 관점에서의 해석이 보다 타당해 보인다. 세친이 학파적 당파성을 넘어서 어떤 주장이건 타당하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철학체계에 흡수하고자 하였던 사실을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세친은 서로 상충하는 상좌 슈리라타와 중현의 학설에서 나타나는 모순적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어 떤 사유의 경로를 탐색하였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보기 위하여 앞서 살펴 본 『구사론』의 「분별계품」에서 세친의 두 가지 질문을 다시 한번 검토해 보 269) T29.6a8 - 26.; AKBh 16 - 17. 270) 『석궤론』은 『구사론』과 『유식이십론』저술의 중간 단계에 세친의 철학을 대표하는 저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아직 유식으로의 철학적 전이가 이루어지기 이전으로 경량부와 설일체유부의 아비다 르마 철학을 통합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법처 해명이 『순정리론』에서 중현의 비판에 대한 세친의 응답의 형식으로 저술된 것인지는 판정하기 어렵다. 271) 李種徹 (2001), 191 - 194.; 李種徹 (1996), esp. 193 - 196. - 126 - 도록 하겠다. (1) 십처가 모두 색온에 포함된다면 무슨 이유로 오직 하나에 대해서만 색처라 는 이름을 붙이는가? (2) 궁극적으로 12처(處)가 다르마(法)인데 오직 하나에 대해서만 법처(法處)라 는 이름을 붙이는 이유가 무엇인가?272)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세친의 답변은 앞에서 제시되었다. 여기서는 이 질문 자 체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설일체유부의 다르마 체계는 물 질적 존재(10처와 무표색)와 심리적 존재(의처와 법처의 심소법), 그리고 관념적 존재(무표색과 심소법을 제외한 법처)로 구성되어 있다. 십처(十處)가 모두 색온에 포함된다는 것은 아비다르마의 정설이기 때문에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상 좌의 12처 가유설 관점에서 본다면, 이 물질(색)들은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세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열 가지로 구분되는 개별적인 입처들은 사실 하나의 색처(色處)로 단일화할 수 있으며, 그것들은 외부대상과 직접적으로 연결 되지 않은 가유(假有)이다. 상좌는 무표색도 가설적인 존재로 보고 그것의 물질적 존재성을 인정하지 않는다.273) 그리고 설일체유부에서 심소법은 법처에 포함되는 것이지만, 상좌 슈리라타는 심소법이 심법(心法)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간 주한다. 그렇다면 1법처설의 관점에서 유의미한 다르마의 구분은 의처(意處)와 법 처(法處) 두 가지로 압축될 것이다. 여기까지의 12처설의 구도를 간단히 도표화해 보면 다음과 같다.274) 설일체유부의 5위 75법에 따라 12처설을 재해석해 보면, 색법은 10색처와 무표색 (avijñapti)를 포함하고, 심법은 의처에 해당한다. 나머지 심소법과 심불상응행법, 272) 『阿毘達磨俱舍論』: 何緣十處皆色蘊攝。唯於一種立色處名。又十二處體皆是法。唯於一種立法處名。 (T29.6a8 - 10) 273) 권오민 (1994), 175 - 184. 274) 이 부분의 논의와 아래의 도표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에서 고찰한 바가 있다. 이규완 (2016), 68 - 74. 유부 6내처 안처, 이처, 비처, 설처, 신처 의처(의근) 6외처 색처, 성처, 향처, 미처, 촉처 법처 12처설 6내처 10색처 의처(의근) 6외처 법처 상좌 6내처 법처 의처(의근) 6외처 법처 - 127 - 그리고 무위법은 모두 법처에 포함되는 것들이다. 이 때 법처는 심법을 제외하고 는 모든 범주의 일부 혹은 전부를 포함하고 있다. 이는 제법을 서로 뒤섞임이 없 이 분석하고 분류하려는 설일체유부의 목적과는 달리, 법처에 과도한 범주의 혼 합 양상이 드러나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상좌 슈리라타는 무표색, 심불상응 행법, 무위법을 모두 가설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심소법은 독립적인 별도의 존재 로 인정하지 않고 심법에 귀속시킨다. 따라서 상좌 슈리라타의 해석에 따르면 10 색처는 물질(색), 의처는 심심소를 포괄하는 마음, 그리고 법처의 세 범주를 인정 한다. 그런데 상좌 슈리라타의 12처가유설에 따르면, 물질(색)과 법처는 모두 실 유하는 존재가 아니며, 모두 의[근]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동일하기 때문에 특별히 따로 구분해야 할 필요도 없다.275) 또한 세친의 해석에 따르면 법처는 ‘인식대상일 뿐’이라고 설명된다. ‘외부대상 이 아닌 것을 대상으로 하여 발생하는 식’(緣無境識)을 설명하는 가운데 세친은 법처의 개념을 밝힌다. 세친은 먼저 ‘의[근]이 법[처]를 조건으로 발생하는 것이 의식(manovijñāna)이다’는 것에서, 의[근]이 그런 것처럼 그와 같이 법[처]도 발생의 조건(pratyaya)이 [되는가]? 아니면 법[처]는 오직 인식대상일 뿐인가?276) 라고 묻고, 만약 설일체유부에서 “법처가 오직 인식대상일 뿐(ālambanamātra)” 이라고 주장한다면, 자신의 입장과 차이가 없다고 설명한다.277) 여기서 세친은 분 명히 인식대상(ālambana)을 외부에 실재하는 대상(viṣaya)과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세친과 상좌 슈리라타에게 과거와 미래 등은 실재하는 대상은 될 수 없지 만, 인식의 대상인 것은 인정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법처는 인식대상일 뿐이다. 그런데 상좌 슈리라타의 12처 가유설에 따르면 10색처도 모두 인식대상일 뿐이지 275) 또 상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법이 의[근]의 대상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모든 법은 법처 에 포함된다. 만약 그렇다면 단지 하나의 법처만을 설립해야 할 것이다. 일체법은 모두 의[근]의 대상 이기 때문이다. 『阿毘達磨順正理論』: 又上座說。諸法無非意所行故。皆法處攝。若爾唯應立一法處。 以一切法皆意境故。(T29.344b14 - 16) 276) AKBh V.27 (299.17 - 18): yan manaḥ pratītya dharmāṃś cotpadyate manovijñānaṃ kiṃ tasyayathā mano janakaḥ pratyaya evaṃ dharmā āhosvid ālaṃbanamātraṃ dharmā iti | 277) 만일 다르마(法)가 인식대상일 뿐이라면 우리도 과거와 미래도 역시 인식대상이라고 말한다. AKBh 5.27 (299.20 - 21): athālaṃbanamātraṃ dharmā bhavanti | atītānāgatam apy ālaṃbanaṃ bhavatīti brūmaḥ | 이곳에서는 근경식 삼사화합에 의한 식(vijñāna)의 발생을 설명하는 맥락이기 때문에, 의(manaḥ)는 의근(意根), 법(dharma)은 법경(法境) 혹은 법처(法處)로 이해될 수 있다. - 128 - 외부에 실재하는 대상성을 지닌 것은 아니다. 따라서 상좌 슈리라타는 물론 구사 론주 세친도 의근(意根)과 법처(法處)라는 이원적 구도에 매우 가까이 서 있는 것 이다. 상좌 슈리라타의 1법처설에 따르면 인식의 대상세계는 모두 하나의 법처로 포괄될 수 있으며, 그 1법처는 ‘단지 인식대상일 뿐’이다. 4. 지각영역과 극미의 집적278) 『구사론』에서 극미에 대한 네 번째 언급은 18계(界) 가운데 대종성과 소조(所 造)성에 대한 논란 가운데 등장한다.279) 현장(玄奘)은 이 질문을 “어떤 것이 적집 될 수 있는 것이고, 몇 가지가 적집(積集)될 수 없는 것인가?”라는 보충적인 설명 을 삽입하였다. 그러나 논의의 결론부분에서 세친이 화합(和合, saṃcita)이라는 용어를 적극적으로 채용하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현장은 논의맥락을 오도하는 것으로 보인다. 게송 35d에 대한 세친의 주석부분을 살펴보면 문제가 분명해진 다. 무엇이 화합이고, 무엇이 화합이 아닌가? 열 가지 유색계가 화합이다. |35d| 18계 중에서 오근과 오경이 화합이다. 극미들의 적집이기 때문이다. 그 외의 것들은 화합이 아니다.280) 물질이 사대(bhūta)와 사대소조(bhautika)로 만들어진다는 것은 『비바사론』 단계 에서 아비다르마철학의 정설로 확립된 것이다.281) 여기서 4대종만이 아니라 4대 소조를 별도로 상정해야 하는 이유는 사대의 견고, 습윤, 온난, 유동성의 성질과 는 전혀 다른 색, 향, 미, 촉의 속성을 포함해야 하는 필요성 때문이다. 4대소조 의 성질이 4대종과 직접적으로 연속적이라면 양자를 따로 세울 필요가 없을 것이 다. 이 지점에서 제기되는 실재성과 지각에 대한 복잡한 문제에 대해 세친은 ‘화 합(和合, saṃcita)’으로 간명하게 해답을 제시한다. 『구사론』단계에서 세친은 12 278) Cf. AKBh 24.14 - 19.; T29.8c26 - 9a4.; 『구사론』, 70.7 - 71.1. 279) 『阿毘達磨俱舍論』: 十八界中幾大種性幾所造性。幾可積集幾非積集. (T29.8b28 - 29) 280) AKBh 35d (24): kati saṃcitāḥ, katy asaṃcitāḥ | saṃcitā daśa rūpiṇaḥ || 35d || pañcendriyadhātavaḥ pañca viṣayāḥ saṃcitāḥ | paramāṇusaṃghātatvāt | śeṣā na saṃcitā iti siddhaṃ bhavati || 281) 이 문제는 8사구생설로 요약되는데, 이하 해당 항목(3장 2절 6.)에서 자세히 논술하도록 하겠다. - 129 - 처실유설을 따르고 있었다. 따라서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을 포함하는 열 가지 물 질적 감각정보들은 4대종과는 구분되는 별도의 실재성을 지닌 것으로 간주되었 다. 감각기관에 의해 포착되는 물질세계(유색계)가 4대종의 차원과는 별개로 실재 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화합(saṃcita)의 방식으로 결합하였기 때문이 다. 다섯 가지 감각기관과 다섯 가지 감각대상은 모두 4대종의 화합이라는 특수 한 결합방식에 의해 산출된 것들이다. 일반적인 술어로는 ‘극미들이 적집한 것이 기 때문’으로 설명된다. 나머지 6식계와 의계(意界), 법계(法界)는 물질적인 극미 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화합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해당 결론부에 대한 현장의 번역을 다음과 같다. 18계 중에서 오근과 오경의 열 가지 유색계는 적집(積集)될 수 있는 것이다. 극미의 취집(聚集)이기 때문이다. 이 뜻이 준해서 볼 때 나머지 여덟 가지는 적집(積集)될 수 없다. 극미가 아니기 때문이다.282) 전체적인 맥락은 동일하지만, 현장은 화합(和合, saṃcita)을 술어적인 의미에서 적집(積集)으로 번역하고, “극미의 취집(paramāṇusaṃghāta)”을 유색계의 특징 을 설명하는 전문용어처럼 취급하고 있다. 우선 번역상으로 볼 때, 질문으로 제기 된 특정한 개념을 술어적으로 풀고, 그것에 대한 이유로 주어진 답변을 전문용어 로 해석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의 복잡성은 현장이 채택한 번역용어가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개념적 혼란을 야기한 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순정리론』의 번역에서 결합의 방식에 관한 전문적인 개 념으로 등장하는 ‘화합(和合)’이 현장의 『구사론』에서는 saṃghāta, sannipāta, prayuktatva, samudaya 등의 번역어로 무차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구체적으 로 saṃghāta는 취집(聚集), 화합(和合), 취(聚) 등으로 saṃcita는 취(聚), 적집 (積集), 집(集)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반면 『구사론』과 동시에 번역을 진행하였던 『순정리론』에서 현장은 ‘화합’과 ‘화집’을 명백히 구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사론』에서 이런 용어의 난맥상을 보이는 이유는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 다. 282) 『阿毘達磨俱舍論』: 十八界中。 五根五境十有色界。 是可積集。 極微聚故。 義准餘八非可積集。 非極微故。(T29.8c27 - 29) - 130 - 5. 극미의 무간(無間)접촉과 대상의 인식283) 『구사론』에서 극미의 접촉에 관한 논의는 대상에 대한 지각의 문제를 설명하 는 맥락에서 등장한다. 안근과 이근(耳根)은 직접 접촉하지 않고 일정한 간격을 가지고 떨어져 있는 대상을 인식한다. 그러나 나머지 비(鼻), 설(舌), 신근(身根)은 대상을 접촉하여 지각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이 때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을 구성 하는 극미들은 접촉한다고 해야 할까? 카슈미르 비바사사들은 서로 접촉하지 않는다고 설한다. 어째서 그런가? 만약 온갖 극미들이 전체적으로 접촉한다면 실재하는 사물 자체가 서로 뒤섞 이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일부분이 접촉한다면 부분을 갖는다는 과실 이 있게 된다. 그러나 극미는 더 미세한 부분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284) 극미는 더 이상의 미세한 부분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극미의 부분이 접촉하는 일 은 발생할 수 없다. 이 비판은 극미부정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테제이다. 형이 상학적 극미는 더 이상의 미세한 부분을 갖지 않는 존재이다. 따라서 극미는 부 분적으로나 전체에 있어서 접촉한다고 할 수 없다. 극미들이 접촉하지 않고 모여 서 사물을 이룬다면 지각은 대상을 직접적으로 지각한다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은 설일체유부와 경량부철학의 전체계를 관통하는 상이성을 드러내는 질문이다. 먼저 세친이 받아들일만한 것으로 인정한 대덕(大德, bhadanta)285)의 설을 살펴보면, 일체의 극미는 실로 상호 접촉하지 못하며, 단지 그 사이가 무간(無間)이기 때 문에 일시 ‘접촉’이라는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286) 극미들이 직접 접촉하지 않고 중간에 공간이 없이 함께 하는 것을 ‘접촉’이라고 가설한다는 대덕의 주장은 세친과 중현(衆賢)도 거의 동의하는 부분이다.287) 그렇 283) Cf. AKBh 32.6 - 34.7.; T29.11c2 - 12b4.; 『구사론』, 95.9 - 102.16. 284) 『阿毘達磨俱舍論』: 迦濕彌羅國毘婆沙師說不相觸。所以者何。若諸極微遍體相觸。即有實物體相雜 過。若觸一分成有分失。然諸極微更無細分。(T29.11c4 - 7) 285) 대덕(大德)의 정체성에 관해서는 권오민 (2002), 98. fn. 113. 참조. 286) 『阿毘達磨俱舍論』: 然大德說。一切極微實不相觸。但由無間假立觸名。(T29.11c23 - 24) 287)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현은 그 중간의 공간에 대해 극미 하나도 들어갈 수 없는 지극히 미세 한 공간으로 규정하지만, 크기를 갖지 않는 극미의 개념을 고려하면 무의미한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 - 131 - 다면 대상의 지각은 직접적인가? [제 극미가 상호간에 접촉하지 않는 것이라면] 어떻게 ‘세 가지 근(비, 설, 신 근)은 [대상과 어떠한 간격도 없는] 무간이 생겨남으로 인해 직접 접촉하는 대 상(지경)을 취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즉 무간으로 말미암아 직접 접촉하는 대상을 취한다고 일컬은 것이니, 말하자 면 그 중간에 어떠한 조그마한 조각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화합색 (和合色)은 부분을 가지는 것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서로 접촉한다 하여도 여기 에는 아무런 허물이 없다.288) 대답은 두 가지 층위로 주어지는데, 첫째는 무간접촉의 가설이라는 정의에 따라 무간으로 접촉하기 때문에 대상을 직접적으로 인식한다고 인정한다는 설명이다. 다음으로 극미차원을 넘어서 적집된 사물에 대해서는 화합색(和合色, saṃghāta) 이 부분을 갖기 때문에 접촉에 대한 논란이 필요없다는 것이다. 대상과 무간(無 間)으로 접촉한다고 가설한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세친과 상좌 슈리라타, 중현의 입장에 큰 차이가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상좌 슈리라타와 중현은 대상의 지 각에 있어서 거의 정반대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 세친은 그 사이에 서있다. 그렇다면 이들의 완전히 상반된 지각이론은 무엇에 기인한 것일까? 대상과 인식, 즉 감각대상과 감각기관이 무간으로 접촉한다는 해석이 극명하게 갈라지는 지점은 설일체유부는 무간(無間)을 공간적 차원에서 이해하는 반면 경량 부는 시간적 차원에서 전후찰나 사이의 무간을 상정하기 때문이다. 설일체유부의 시간 속에서 모든 사태는 한 찰나에 완결되는 것이며, 동시에 한 찰나에 안에 일 체의 사태가 모두 포함되어야 한다. 일체의 개별적으로 분류되는 다르마들은 독 립적으로 실재하며, 그것들은 아직 현행하지 않은 상태에 있거나 이미 현행하였 던 상태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모두 현재의 한 찰나에 현행하고 있어야 한다. 이 것은 마음과 마음의 작용(심심소)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데, 마음과 마음의 작용 은 서로 별개의 실체성을 지니는 것이지만, 항상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라고 주장 한다. 그리고 마음이 일어나는 그 찰나에 항상 함께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을 일 컬어 대지법(大地法, mahābhūmi-dharma)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수(受), 상(想), 는다. 만일 극미보다 더 작은 공간적 단위를 상정하는 것이라면 극미개념을 부정하고 무한소급에 빠 져 들어가게 될 것이다. 288) 『阿毘達磨俱舍論』: 云何三根由無間生名取至境。即由無間名取至境。謂於中間都無片物。又和合色許 有分故相觸無失。(T29.11c12 - 14) - 132 - 사(思), 촉(觸), 욕(欲), 혜(慧), 염(念), 승해(勝解), 삼마지(三摩地)의 10가지가 포 함된다. 다시 말해 한 순간의 마음이 발생하는 순간에는 동시에 좋고 나쁨 등의 감각, 개념적 표상작용, 선이나 불선 등에 대한 의지작용, 감각기관과 대상과 의 식의 접촉, 욕구하는 마음작용, 기억작용, 마음의 주의가 기울어지는 작용, 인가 (認可)하고 결정하는 의식작용, 마음을 집중하는 의식작용 등이 함께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 외에 선한 마음이나 불선한 마음의 발생과 함께 여러 가지 마음작용 들이 항상 또는 경우에 따라서 더불어 발생한다. 이것은 하나의 인식이 발생한다 는 것은 바로 한 찰나에 완결된 인식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해야 하는 설일체 유부의 전제가 강제하는 이론적 결과이다. 온갖 마음과 마음작용은 특징이 다르고 미세하여서 하나 하나의 상속을 분별 하기가 어렵다. 하물며 한 찰나에 동시에 발생에 [있어서야 말해 무엇하겠는 가?] 물질성을 지닌 온갖 약물을 감각기관으로 파악하는 것도 그 맛의 차이를 구별하여 알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물질이 아닌 다르마들을 오직 관념으로 파 악함에 [있어서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와 같이 10대지법에 대하여 설명하였 다.289) 한 찰나에 이처럼 많은 마음의 작용이 동시에 발생한다는 것과 그것을 인식하고 설명한다는 것은 한 순간의 마음에 지나치게 과도한 부담을 지우는 것처럼 보인 다. 그러나 설일체유부 논사들은 자아의 다섯 계기라고 이해되는 오온에서 색온 과 함께 수, 상, 행온이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물질에 대한 인식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나의 인식은 한 찰나에 발생하고 완결되는 것이기 때 문에, 인식의 과정으로 분석되는 작용들도 그 한 찰나에 모두 이루어져야 인식이 발생하는 것이다. 설일체유부에서 현행하는 세계는 한 찰나에 국한되고 공간적으로 무한하게 펼 쳐진 것이다. 따라서 대상과의 접촉은 ‘한 찰나’ 안에서 대상들 간에 공간적 접촉 의 문제로 귀결되고, 현재의 대상인식은 현재 찰나의 대상과 관련된 것으로 한정 된다. 이러한 설일체유부의 주장은 '모든 인식은 대상을 가진다' 다시 말해 '인식 이 있으며 그것의 대상이 있다 (인식 → 대상)'이라는 명제에서 기인한다.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인식이 존재하는 한, 과거와 미래는 현재 찰나에 직접적인 인식의 289) 『阿毘達磨俱舍論』: 諸心心所異相微細。一一相續分別尚難。況一剎那俱時而有。有色諸藥色根所取。 其味差別尚難了知。況無色法唯覺慧取。如是已說十大地法. (T29.19a22 - 26) - 133 - 원인으로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상좌 슈리라타는 설일체유부와 완전히 관점을 달리한다. 상좌에게 대상 세계는 찰나적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색온이 인식에 이르는 과정은 찰나적으로 수, 상, 사의 마음(작용)을 거치면서 최종적인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이 때 인식 의 과정에서 전후찰나로 다르게 발생하는 마음들을 마음의 작용이라고 이름할 뿐 이지, 마음과 마음작용이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290) 상좌 슈리라타 도 인식에는 인식대상(所緣, ālamabana)이 있어야 한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리고 인식대상은 외부의 대상(境, viṣaya)을 가진다. 그러나 인식과 대상은 인식대상을 매개하기 때문에 동일 찰나에 함께 존재하지 않으며 직접적으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대상은 추론에 의해 입증되는 존재일 뿐이다. 설일체유부의 완결된 찰나와 상좌 슈리라타의 과정적 찰나 개념은 두 학파의 존재와 인식에 관한 모든 이론들의 근본적인 차이를 내포하고 있다. 때문에 설일 체유부와 경량부의 대상과 인식에 대한 논쟁은 전제의 차이에 기인한 것으로 논 의가 접점을 찾지 못하고 항상 평행선을 달리게 된다. 설일체유부에게 다섯 감각 기관과 다섯 가지 대상, 그리고 다섯 가지 인식은 동시에 이루어진다. 따라서 현 재 한 찰나에서 오식은 대상을 직접지각하며, 대상에 대한 인식은 그 대상의 현 존을 보증한다. 그러나 상좌의 경우에는 대상과 인식은 계시적으로 찰나를 달리 하며 발생한다. 전 찰나의 대상이 바로 다음 찰나에 남기는 형상(이미지)이 지각 될 뿐이다. 따라서 대상의 인식은 전후찰나를 타고 계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기 때문에 지각되는 찰나에 그 대상의 실재를 보증할 수 없다. 대상은 인식을 통 해 단지 추론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현재 찰나의 의식으로 던져진 형상은 의 식과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직접지각의 대상이 된다. 상좌의 주장에 의하면, 의 식의 주체(오식신)는 바로 이 형상을 직접지각하고, 그런 점에서 5식(識)은 무분별 이다. 따라서 중현이 상좌 슈리라타가 대상이 없는 인식을 주장한다고 비판(무경각 설)하는 것은 현재 찰나에 대상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현재의 인식이 있다고 주장 하는 것을 문제삼는 것이다. 상좌의 관점에서 보면, 대상은 과거로 소멸하였고, 인식은 전찰나의 대상에 대해 무간으로 발생하는 인식대상을 인식하는 것이다. 극미분석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상과 지각은 시간적인 측면에서 무간으로 연속성 을 지니는 것이다. 그러나 설일체유부의 시각에서 볼 때, 상좌의 대상 인식은 과 290) 권오민 (1994), 156 - 158. - 134 - 거의 인식과 비슷한 것이다. 상좌가 주장하는 대상인식은 이미 소멸하여 없는 대 상에 대한 기억이나 회상과 같은 성격을 지니며, 관념화된 인식대상이다. 설일체 유부에게 이것은 대상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의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상 좌 슈리라타에게 이런 지적은 비판이 되지 못한다. 대상의 지각은 과거의 기억과 유사하지만, 직전 찰나에서 던져진 형상을 통해 형상의 인식이 직접성 (immediacy)을 준다는 점에서는 기억과 다르기 때문이다.291) 그리고 설일체유부 의 방식에 의하는 한 대상에 대한 직접지각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상좌 철학의 이율배반(antinomy)이 아니라 상좌 슈리라타가 주장하는 핵심적 논지이다. 감각 주체는 언제나 감각대상과 시간적으로 따라서 공간적으로도 구분되며, 단지 무간 으로 연속성을 지닐 뿐이다. 따라서 지각은 대상과 동일성을 확보할 가능성을 상 실한다. 이것은 상좌 슈리라타가 감각지각에 대해 명확한 한계설정을 하고 있음 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의 차이는 인식 자체의 발생에 대한 해석에서도 중요한 차이점을 유발한다. 아비다르마철학에서 인식의 발생은 감각기관과 대상이라는 두 가지 조 건을 가지고 이루어진다. 설일체유부의 관점에서는 여기서 감각기관, 대상, 인식 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인식의 발생이 가능하다. 이것을 세 가지 사태의 화합(삼사 화합, sannipata)에 의한 인식의 발생이라고 하며, 세 사태들 간의 접촉과 감각 작용(受), 상(想), 사(思) 등의 마음작용들이 모두 동시에 일어나면서 하나의 인식 작용이 이루어진다고 본다. 이 때 세 가지 사태의 화합을 일으키는 접촉(觸, sparśa)은 독립적인 실재성을 지닌 다르마로 간주된다. 그러나 계시(繼時)적 관점 에 따르는 상좌에게 일련의 마음작용은 시간적일 전후관계로 연속적으로 발생하 는 것이며, 세 가지 사태의 화합을 가설적으로 이름붙인 것이 접촉이다. [유부] 마치 안식 등은 안(眼)-색(色)과 동시에 존재(俱有))하며, 4대종은 소조 색과 동시에 존재하는 것과 같다. [비유자-경량부] 여기서도 역시 먼저 감각기관(根)과 감각대상(境)이 조건(緣)이 되고서 능히 뒤에 식을 낳으며, 먼저 대종이 조합 취집하고 나서 뒤의 소조색 291) 설일체유부의 삼세개념에서는 모든 과거에 대한 인식은 기억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설일체유부에 게는 작용을 마친 모든 다르마들은 과거라는 무한한 평면으로 들어가고, 그것에 대한 인식은 시간의 장단에 관계없이 기본적으로 기억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리고 그 기억은 현재에 직접지각되는 것 이 아니기 때문에 그 직접성과 무분별성을 보증할 수 없다. 경량부와의 인식의 차이는 시간의 연속적 흐름의 문제에서 발생하고, 그 중에서 바로 직전 찰나의 사태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극 명하게 대립된다. - 135 - 을 낳는다고 인정하니, 어떠한 이치로 이를 능히 부정할 것인가? 그림자와 싹과 같은 것은 어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촉이 생겨난 뒤에 비로소 수가 생겨난 다. 즉 근과 경이 먼저 있고 나서 다음에 식이 일어나며, 이 세 가지가 화합하 기 때문에 이름하여 '촉'이라 한 것으로, 제3찰나에 이러한 촉을 조건으로 하 여 수(受)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292) 상좌 슈리라타의 대상과 인식에 대한 분석은 찰나적 시간의 단위와 상속의 연속 성에 매우 민감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감각기관과 인식대상은 자신들의 상속의 흐름과 마찬가지로 이전 찰나로부터 진행해 오는 의식과 만나서(觸), 이전 찰나의 대상에 대한 현재 찰나의 지각을 촉발한다.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한 지각 의 촉발은 감각(受) 등의 마음작용의 계시적 흐름을 따라 하나의 의식을 형성한 다. 설일체유부의 삼사화합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흥미로운 사실은 의근(意根), 즉 감각주체로서의 의식이 대상으로 삼는 법경(法境)은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포괄한다는 점이다. 설일체유부의 학설에서 법경은 12처설에서 법처에 해당하는 것으로, 지각되지 않는 물질(無表, avijñapti)과 언어적 개념에 속하는 것들, 그리 고 마음작용 등을 포함한다. 경량부에서는 이 가운데 마음작용은 마음과 동일한 실체로 파악되고, 나머지 법처에 속하는 것들은 가설적인 존재(prajñapti-sat)로 간주된다. 따라서 상좌의 관점에서 가설적이거나 심적인 요소로 파악되는 것들에 대해서 설일체유부에서는 과거나 미래 등의 실유하는 존재를 인식한다고 본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외부에 실재하는 물질대상의 현재성일 뿐이다. 설 일체유부의 전제는 현재 찰나의 직접지각은 바로 ‘같은 찰나에 동시에 존재하는 물질대상의 존재’를 보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좌는 그런 물질대상의 현재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던져진 형상에 대한 인식만을 주장하기 때문에 모 든 인식이 가설적인 대상에 대한 인식과 같은 것이 된다. 따라서 두 학파의 분기 점은 대상과 인식 사이에 무간을 시간적으로 보는가 공간적으로 보는가 하는 문 제로 귀결되는 것이다. 설일체유부에게 물질적 대상에 대한 직접지각은 감각지각 292) 『구사론』, 468 - 469. 『阿毘達磨俱舍論』: 如眼識等眼色等俱。四大種俱有所造色。此中亦許前根境緣能發後識。前大造聚生後 造色。何理能遮。如影與身。豈非俱有。有說。觸後方有受生。根境為先次有識起。此三合故即名為觸。 第三剎那緣觸生受。(T29.53a16 - 21) - 136 - 과 대상(artha)의 동시성에 의해서만 확보된다. 그리고 상좌도 이 전제에 동의할 수 있다. 상좌 슈리라타에게 문제는 대상(viṣaya)에 대한 어떤 지각도 동시적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유정의 지각은 대상으로부 터 분리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 지각이 대상과 어떤 연속성과 안정성을 지니는 것은 지각이 한 찰나 이전의 대상에 무간으로 토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상좌의 철학체계에서는 지각의 범주를 넘어서 있 는 계(界)만이 실재하며, 우리의 경험세계를 산출하는 12처는 가설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 가설적인 12처가 만들어내는 인식대상에 대한 감각지각은 분별적 사유 에 의한 것이 아닌 직접적인 것이다. 이 감각지각은 그 토대와 완전히 분리된 것 은 아니다. 그것은 토대의 존재에 감각지각이 수반한다는 점으로 입증된다. 토대 가 존재할 때 지각이 존재할 수 있고, 토대가 사라지면 지각이 불가능하기 때문 이다. 따라서 감각지각이 제공하는 이 세계는 일정한 일관성을 유지한다. 그러나 비판적 사유에 의하지 않고 감각에 따라 경험된 이 세계는 실재하는 세계가 아니 라 단지 그것으로부터 12처라는 문을 통해 투사된 현상세계일 뿐이다. 6. 팔사구생293) 팔사구생(八事俱生, aṣṭadravyaka)은 물질(색)의 발생을 여덟 개의 기본요소 (事)의 구생(俱生)으로 해명하는 설일체유부의 설명체계이다. 앞에서 아비다르마철 학이 4대종의 구생에 대한 합의에 도달한 것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팔사구생의 개념에 의하면 욕계에 존재하는 물질(색)은 여덟 가지 구성요소가 함께 하여 만들 어진 것이다. 이 8사(事)는 4대종과 색향미촉의 소조색을 포함한다. 여기에 감각 기관이 개입하거나 소리가 더해질 경우에 물질은 아홉 가지에서 열한 가지의 구 성요소로 만들어진다.294) 그런데 소조색은 대종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4대 소조를 추가하는 것은 서로 다른 층위를 동일화하거나 물질의 구성요소를 중복하 여 계산하는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8사(事)를 통해서 구성되는 것이 ‘가장 미세한 물질의 기본단위’인 극미를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8사가 모여서 물질(색)이 형성된다는 것인지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아 보인다. 때문에 설일체유 부의 8사구생 개념은 자기모순적인 것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295) 그러나 팔사구 293) Cf. AKBh 52.18 - 53.24.; T29.18b14 - c25.; 『구사론』, 155.3 - 160.11. 294) 『구사론』, 155 - 160. 295) 吉元信行 (1971) 「有部の八事倶生説」. 『印度學佛教學研究』 Vol. 20. No. 1, 331 - 336. - 137 - 생 개념은 극미의 층위와 극미의 취집을 통한 물질의 구성과 깊은 관련이 있으 며, 설일체유부 아비다르마철학의 존재 개념의 전체적인 구조 안에서 개념적 위 상이 확보된다는 사실을 확인해 보도록 하겠다. 팔사구생(aṣṭadravyaka)라는 용어는 『구사론』에서 처음 등장하지만, 이 개념 을 『비바사론』 단계에서 이미 그 맹아가 발견되며,296) 『아비담심론』에서는 『구사 론』과 유사한 형태로 나타난다. [안, 이, 비, 설]의 4근에서는 극미가 열 가지라고 알아야 한다. 이를테면 안근 중에는 극미가 열 가지, 즉 지, 수, 화, 풍과 색, 향, 미, 세활(촉), 그리고 안근 종과 신근종이다. 이, 비, 설의 극미도 역시 이와 같다.... 나머지 근이 아닌 물 질(색)에는 여덟 가지가 있다.297) 이 본문은 『구사론』 II.22 게송과 주석에 나타나는 내용과 유사하게 여덟 가지의 개별 사태들을 직접적으로 극미와 동일시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지각대상이 아 니라 지각을 통해 대상을 받아들이는 감각기관에 극미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해석 이다. 감각기관이 아닌 물질 자체는 4대종과 4대소조의 여덟 가지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예를 들어 안근(眼根)은 그 여덟 개의 극미에 신체를 구성하는 신근대종과 눈을 구성하는 안근대종이 더해져서 열 개의 극미가 모여서 이루어진다. 본문에 대한 『잡아비담심론』에서의 해석에서도 이 열 가지 혹은 여덟 가지의 극미들이 “함께 발생한다(共生)”는 언급이 추가된다.298) 법구(法救)는 이어서, 만일 열 가지 극미들이 함께 발생하는 것이라면 어째서 아비다르마논서에서는 안근이 하나의 구성요소(界, dhātu)에 포함된다고 했느냐는 질문에 대답한다. [답] 극미에는 2종이 있다. 사극미와 취극미이다. 사극미는 이를테면 안근극미 를 말한다. 즉, 안근에서 나머지 극미들을 제외한 자신의 사태만을 이른다. [이 안근극미는] 사극미이기 때문에 아비다르마에서는 안근은 하나의 계(界), 하나 의 입처(入處), 하나의 온(蘊)에 포함된다고 하였다. 취극미는 다수의 사극미가 296) 요시모토 (1971), 331. 297) 『阿毘曇心論』: 極微在四根十種應當知者。謂極微在眼中是知有十種。地種水火風種。色種香味細滑 種。眼根種身根種。耳鼻舌極微亦如是。身根有九種者。謂餘身根極微九種彼有一根種餘如上說。餘八種 者。於中餘非根色中極微有八種. (T28, 811b7 - 12) 298) 4근의 10종의 극미들은 함께하여 4대, 색, 향, 미, 촉과 안근, 신근으로 나타난다. 『雜阿毘曇心論』: 四根十種極微共生四大色香味觸。眼根身根(T28, 882b6 - 7) 본문의 의미가 다소 불명확하지만, 이후 전개되는 주석을 보면 4대와 4소조색을 8종의 극미로 보는 것에는 틀림이 없다. - 138 - 모인 것을 일러 취극미라고 한다.299) 다시 말해 눈이라는 감각기관을 통해 포착되는 세계는 외부세계를 구성하는 여덟 개의 극미들과 감각기관으로 들어오는 몸의 신근, 감각기관인 눈의 안근이 함께 할 때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감각기관이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는 여덟 개 의 극미만으로 대상세계가 구성된다. 눈으로 구성되는 세계는 10종의 사극미(事 極微, dravyaparamāṇu)들을 포함하며, 안근극미도 이 중의 하나로 사극미에 해 당한다. 따라서 8사의 개별적 구성요소들은 사극미에 해당하고, 그것들이 모두 함 께하여 발생한 물질적 요소, 이를테면 물리적 색, 향, 미, 촉 등은 취극미에 해당 한다고 하겠다. 바로 이 부분이 세친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험주의 적 경향이 강하였던 세친은 12처실유설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감각지각의 대상이 되는 색, 향, 미, 촉 등의 취극미를 실재하는 극미(실극미)로 정의한다. 개별적인 사극미들이 팔사구생한 취극미는 바로 중현이 주장하는 실극미(實極微)에 상응하 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지점에서 세친은 중현과 의견이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300) 『구사론』의 「분별근품」에서 세친은 일체의 유위법, 즉 세속적 존재의 발생에 관해서 논하는 가운데 팔사구생에 의한 물질의 발생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 서 세친은 극미설에 기반하여 설일체유부의 팔사구생설을 분석하고 있다. 이 논 의의 유부적 전제는 일체의 존재는 모두 함께 발생한다(俱生, niyatasahotpādā santi)라는 점이다. 유부의 존재론에서는 과거, 미래, 현재의 존재들은 실유하는 것으로, 이들이 모두 함께 인연이 되어서 현재의 한 찰나의 작용과 현현을 불러 일으킨다. 마찬가지로 물질(색법)은 기본적으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들이 함께하여 발생(八事俱生)하는 것이다. 욕계에서 소리(śabda)와 감각기관(indriya)이 아닌 극미(paramāṇu)는 팔사구 생(aṣṭadravyaka)한다.301) 본문은 아비다르마 논서에서 유일하게 팔사구생이라는 정형화된 표현이 등장하는 299) 『雜阿毘曇心論』: 答二種極微。事極微。聚極微。事極微者。謂眼根極微。即眼根微餘極微皆說自事。 以事極微故。阿毘曇說。眼根一界一入一陰攝。聚極微者。眾多事此中說聚極微。住自相故法相不雜亂。 (T28, 882b16 - 20) 300) 세친과 중현의 극미론 가르는 분기점은 이 실극미의 실재성 문제와 사극미에 대응하는 형이상학적 원자의 성질에 대한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다. 이 문제는 다소 복잡한 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다른 글에서 고찰해보도록 하겠다. 301) AKBh II.22ab (52:23): kāme 'ṣṭadravyako 'śabdaḥ paramāṇur anindriyaḥ | - 139 - 곳이다. 요시모토(1971)가 이 본문에 나타난 팔사구생설의 의미를 소개한 이래, 카토(1989), 박창환(2010)이 본문을 중심으로 팔사구생과 극미설의 관계에 주목해 왔다. 요시모토는 설일체유부의 팔사구생설이 아비다르마철학 단계에서 발전되어 온 두 개념, 즉 4대종의 적집과 같은 물질의 적취(色聚, rūpa-saṃghāta) 개념과 일곱 개의 극미가 모여서 하나의 미취(微聚, aṇu)를 형성하는 극미개념의 융합을 특징으로 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302) 가토는 해당본문에 대한 분석에서 극미 (paramāṇu)가 단수로 사용된 것에 주목하여 그 의미를 분석한다. 문제는 가장 미세한 물질인 극미가 다시 여덟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는 모순적 상황에서 비롯 된다. 카토는 결론적으로 4대종의 개념을 5위 75법의 체계에 억지로 맞추기 위해 무리한 논리가 강제된 것이 팔사구생이라는 비판적 견해를 피력하였다. 박창환은 속성화한 팔사의 구생에 의한 가장 미세한 물질, 즉 극미의 산출이라는 설명으로 해법을 모색하였다.303) 설일체유부에서 취극미에 해당하는 것만이 세친이 실제로 인정되는 극미(paramāṇu)이고, 사극미(dravyaparamāṇu)는 속성으로서의 작용 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취지이다. 본문에서 흥미로운 점은 감각주체가 완전히 배제된 상태에서의 물질적 존재가 팔사구생이라는 점이다. 아직 소리도 존재하지 않고 감각기관으로 감각되지도 않 은 상태이지만, 여덟 가지 구성요소가 결합하면 물질의 발생이 이루어진다. 모든 감각주체를 떠나서 물질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이 설일체유부의 실재 론적 존재론의 기반을 이룬다. 또 본문의 해석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곳 에서 다루고 있는 일체의 존재가 욕계에(kame)에 한정된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모든 물질적 존재와 그것에 대한 인식은 유정들의 욕망이 지배하는 세속적인 현 상세계에 관련된 것들이다. 여기서 취극미(실극미) 개념은 4대종과 소조색의 취집에 의한 물질의 발생과는 논의의 맥락이 다르다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바이셰시카의 원자설에서 극미는 감각기관을 초월해 있으며, 최초의 단계에서 두 개의 극미가 모여서 이중 체(dvyaṇuka)를 이루고, 이것이 다시 세 개가 모여 삼중체(tryaṇuka)를 형성하 는데 이때에 이 삼중체가 처음으로 감각지각될 수 있는 영역으로 들어온다.304) 따라서 바이셰시카에서는 여섯 개의 극미가 모여서 지각 가능한 물질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아비다르마 철학에서는 7배수의 체계를 도입하여, 처음 일곱 302) 요시모토 (1971), 331 - 335. 303) 박창환 (2010), 279 - 280. 304) Gangopadhyaya (1980), 1 – 2. - 140 - 개의 극미(paramāṇu)가 모여서 아누(塵, aṇu)를 만들고, 다시 그것이 일곱 개가 모여서 금진(金塵, loharajaḥ)을 이루는 등 7배수로 누적되어 간다.305) 이것은 이 미 존재하는 극미들이 어떻게 집적체를 구성하는가에 대한 설명방식이었으며, 이 가운데 첫 번째 단계에서 감각을 초월해 있는 극미가 감각지각의 영역으로 들어 오게 된다. 다시 말해 가장 미세한 물질의 기본단위들이 특정한 숫자와 배열로 모여서 처음으로 감각지각의 대상이 되는 단계를 취극미 혹은 실극미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미세한 사극미(事極微, dravyaparamāṇu)를 대종(大種, mahabhūta)과 동일시 할 경우, 사극미가 모여서 첫 번째 취극미(聚極微, saṃghātaparamāṇu)를 만드는 단계는 4대종이 함께 하여 소조색을 이루는 4사 구생 혹은 4대종과 4대소조색이 모여서 물질을 구성하는 8사구생에 대응하는 것 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팔사구생의 개념이 확립되는 단초가 발견되는 것이다.306) 그러나 바로 4대종의 구생(俱生)과 7배수 극미의 누적이라는 상이한 맥락이 혼합됨으로 인해 팔사구생 개념에 대한 혼란과 비판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었다. 4대종과 함께 소조색도 모두 함께 발생한다는 주장은 설일체유부의 특수한 존 재론에 기인하는 것이다. 먼저 궁극적 존재인 지, 수, 화, 풍은 열 가지 종류의 물질적 요소(10色)와 무표색(無表色, avijñaptirūpa)의 토대가 되며, 일체에 대한 존재론적 근거가 된다. 따라서 소조색인 색, 성, 향, 미, 촉은 궁극적 존재와 존재 론적인 연속성을 지닌다. 이 때 여덟 가지 사태들이 함께 하여 발생하는 하나의 물질적 사태, 즉 극미는 경험적 대상으로서 색, 성, 향, 미, 촉 등을 지니게 될 것 이다. 그러나 이것이 팔사구생의 일부로서 색(色) 등의 위에 다시 옥상옥을 세우 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설일체유부의 특이한 결합방식에 관한 설명과 관련이 있 다. 4대종이 하나의 특성만을 나타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8사(事)도 구생할 때 하나의 성질을 지닌 물질(색)을 산출한다. 그것에 대해 디팡까라는 각각이 실유하 는 일곱 개의 구성요소와 나머지 하나의 구성요소가 서로 분리되지 않으면서, 제 8의 극미를 형성한다고 해석한다.307) 305) 『阿毘達磨俱舍論』: 極微為初。指節為後。應知後後皆七倍增。謂七極微為一微量。積微至七為一金 塵。積七金塵為水塵量。水塵積至七為一兔毛塵。積七兔毛塵為羊毛塵量。積羊毛塵七為一牛毛塵。積七 牛毛塵為隙遊塵量。隙塵七為蟣。七蟣為一虱。七虱為穬麥。七麥為指節。三節為一指. (T29.62b1 - 7) 306) 물론 이 때에도 최초의 구성에 참여하는 극미의 개수가 일곱 인가(극미의 7배수 누적) 여덟 인가(팔 사구생)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307) 박창환 (2010)은 243 - 244에서 야소비트라의 주석에 대한 분석을, 249 – 251에서는 Dīpa의 해 당본문과 그에 대한 상세한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 141 - 극미는 물질이 모여 취집하여 적집된 것을 분석하였을 때 가장 미세한 것의 궁극에 도달한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나머지] 일곱 개의 실체 와 분리될 수 없다. 이 여덟 번째 [극미는] 네 가지 대종과 세 가지 소조색, 또 는 세 가지 대종과 네 가지 소조색과 분리되지 않는다.308) 여기서 7사(事)와 나머지 1사(事)의 관계를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실유 의 7사가 모여서 제8의 극미를 만든다면, 이것은 어떤 질적 도약을 상정하게 된 다. 일곱 개의 실체가 모인 덩어리와는 전혀 다른 제8의 실체가 발생한다는 의미 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에는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는 8사 구생의 기본틀에서 제8의 실체가 제외되어 7사구생이라고 칭해야 할 것이라는 점, 둘째는 일곱 개의 덩어리와 질적으로 다른 실체의 발생을 상정한다는 점이다. 첫째는 유부의 8사구생 개념을 무력화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바이셰시카의 전체 (avayavi)개념을 인정한다는 혐의를 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7개가 모인 다는 것은 첫 번째 실체 x1에 나머지 실체 x2~8이 모인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가운데 세력이 강하고 지배적인 어떤 x1이 항상 나머지 일곱과 함께 해서 하 나의 취극미로 현상하는데, 이 때 이 취극미는 지배적인 x1의 속성을 띠게 되고, 나머지는 잠복하게 된다. 그러므로 8사의 하나 하나는 실재하며, 드러난 현상X1 도 실재하는 x1이 현상한 것이기 때문에 실재한다. 그리고 드러난 현상에 대한 정확한 관찰은 궁극적 차원에서 그것의 자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경량부 상좌 슈리라타(Śrīlāta)는 소조색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 문에 당연히 팔사구생과 같은 개념을 상정하지 않는다. 『순정리론』에서 중현은 “배움이 부족한 상좌”는 소조색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에 의하면, 상좌는 “[소조색은] 바로 온갖 대종이 배열된 형태의 차별이기 때문에” 촉처(觸處) 가운데는 소조색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309) 그렇게 되면, 대 종과 소조를 모두 포함하는 유부의 촉처 개념에 대하여, 상좌의 감각적 대상세계 는 4대종만을 실유로서 인정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와 같은 4대종 중심의 존재론 은 『구사론』의 팔사구생설이 논의되는 곳에서도 발견된다. 세친은 팔사구생에 관 308) ADV 110 (65:11 - 14.): sarvasukṣumaḥ khalu rūpasaṃskāropādānasaṃcayabhedaparyantaḥ paramāṇur iti prajñāpyate | sa tu saptadravyāvinirbhāgī caturbhir bhūtais tribhiś copādāyarūpais tribhis tribhir vā bhūtaiś caturbhiś copādāyarūpair avinirbhāgavarty asāv aṣṭam iti | 309) 『순정리론』, 198. 이하 234쪽까지 대종과 소조색에 관련된 논의를 참고하기 바란다. - 142 - 한 간단한 설명 중간에 4대종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함께 발생하는 것이라면 어 떻게 하나의 성질만을 드러내고 다른 것은 나타나지 않는가?310)라는 질문을 제기 한다. 이 질문은 앞서 『비바사론』에서 제기되었던 질문과 동일한 것이다.311) 조대 한 물질이 발생하였을 때 그 물질의 성질과 변화를 해명할 수 있는 결합의 상태 가 문제되었는데, 세친은 이곳에서 세력과 작용이 우세한 것을 명료하게 인식하 게 된다는 주장을 지지한다. 4대종만이건 혹은 4대종과 소조색을 포함한 팔사이건 그것들이 모두 함께 하 여야 발생한다(俱生)는 점에서는 상좌와 중현 모두 동일하다. 그 구성요소들 중에 세력이 우세한 것이 명료한 인식을 촉발하기는 하지만, 다른 구성요소들이 사라 지는 것은 아니다. 유부의 팔사구생설에서 각각의 사태들은 실체로서 존재하며, 팔사가 함께 한다는 조건하에서, 그것들이 모여서 이룬 조대한 물질에서도 그 실 체들이 지각의 대상이 되는 힘을 획득하여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조대한 물질의 청색을 보는 순간 관찰자는 동시에 실재로서의 청색을 보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개별적인 실재로서의 청색은 감각기관을 초월하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것이 아니 다. 반면 나머지 사극미들의 상태는 분명하지가 않다. 이에 대해 『구사론』에서 세 친은 작용을 드러낸 대종을 제외한 나머지 대종의 상태에 대한 경량부의 주장을 소개하였다. 그 밖의 실체는 종자(種子)로서만 존재하여 아직 그 자체의 상(相)을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계경에서도 설하기를, ‘나무라고 하는 구체적인 물질(木 聚) 중에는 여러 가지의 계(界)가 있다’고 하였으니, 여기서 ‘계’란 이를테면 종 자를 말하는 것이다.312) 따라서 관찰되는 물질에는 세력이 강하여 작용이 드러난 실체가 있고, 나머지는 잠재태로서 종자로 내재한다는 것이 구사론주 세친의 결론인 셈이다. 물질의 생 성에 관한 설명은 『비바사론』의 4대종 구기설에서 출발하여 4대종과 소조색이 구 310) 『阿毘達磨俱舍論』: 若四大種不相離生。於諸聚中堅濕煖動。云何隨一可得非餘。(T29.18c2 - 3) 311) 『阿毘達磨大毘婆沙論』: 應作是說。 一四大種但能造一造色極微。 問如何不成因四果一。 因多果少 理不應然。(T27.663c12 - 14) [비바사사] 마땅히 다음과 같이 설해야 한다. 하나의 4대종은 단지 하나의 조색극미를 만들 수 있다. [반론자] 그렇다면 서로 네 가지 원인에 하나의 결과가 되지 않겠는가? 다수의 원인에 적은 결과는 이치에 맞지 않다. 312) 『阿毘達磨俱舍論』: 於此聚中餘有種子未有體相故。契經說。於木聚中有種種界。界謂種子。 (T29.18c9 - 11) - 143 - 기(俱起)한다는 팔사구생으로 진화하였다. 여기서 8사의 구생은 극미들의 결합으 로 설명되는데, 중현의 경우에는 극미의 화집상에까지 극미의 실재성이 관철된다. 반면 상좌 슈리라타의 화합에서는 4대종의 화합에 의해 색향미촉 등 감각대상이 출현하며, 그것은 4대종극미 차원의 실재성을 지니지 못한다. 세친은 상좌 슈리라 타의 화합(和合)방식을 수용하면서도 8사(事)의 이중적 층위를 모두 인정하는 입 장을 취한다. 그는 비유자 계통의 종자설을 받아들여, 화합상으로 드러나지 않은 극미(종자)들은 잠재하여 있으며 화합상만이 감각지각의 대상으로 현현한다는 해 석적 관점을 취한다. 이로써 세친은 『유식이십론』의 12처 해석에서 법처(法處)와 의처(意處)를 종자(개별적인 극미)와 현행(극미의 화합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철 학적 근거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7. 시간, 공간, 언어의 기본단위313) 『구사론』 「분별세품」에서는 삼계(三界)와 기세간(器世間)의 구성형태와 그것들 의 구성방식에 관해서 상세히 논하고 있다.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들의 기본단위 와 그것들이 양적으로 무한한 시간과 공간에 무량한 법문으로 확대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무한해 보이는 세계는 극소의 구성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무상(無 常)의 근본교설에 따라 그 구성요소들은 모두 생멸하는 것들이다. AKBh III. 85bc이하의 본문에서는 존재의 최소단위에 대한 분석을 공간, 시간, 언어적인 세 가지 측면에서 고찰하고 있다. 극미, 음절(字), 찰나는 색(色)과 언어와 시간의 극소단위이다.314) 게송85bc 이하의 논의에서 세친은 공간적 극소단위인 극미를 시간, 언어적 극소 단위인 찰나, 그리고 음성과 상호연관되어 있는 개념으로 분석한다. 아비다르마철 학에서 물질(색)과 시간, 언어의 극소단위가 각각 극미(極微, paramāṇu), 음절 (字, akṣara), 찰나(刹那, kṣana)로 분석된다는 사실은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 본 313) Cf. AKBh 176.9 - 21.; T29.62a17 - b8.; 『구사론』, 548.14 - 550.21. 314) AKBh III.85bc (176.10 - 11): paramānvakṣarakṣaṇāḥ / (85b) (10) rūpanāmādhvaparyantāḥ (85c) (11) 『阿毘達磨俱舍論』: 極微字剎那 色名時極少. (T29.62a17) - 144 - 문에서의 특징은 이 셋이 서로 상관적인 개념으로 묘사된다는 점이다. 추상적인 시간의 극소단위는 물질적 존재인 극미의 생성-소멸의 계기와 관련지어 설명된 다. 다수의 연(緣)이 화합하여 어떤 법이 그 자체의 존재를 획득하는 순간, 혹은 운동하고 있는 어떤 법이 한 극미에서 다른 한 극미로 변천하는 순간(行度)을 말하다.315) 두 가지 설명은 시간적 측면에서는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발생의 관점에 서 볼 때, 다수의 조건이 완성되는 시점에서 하나의 결과인 다르마로 나타나는 시점까지로 설명한다. 6인(因) 4연(緣)의 특정한 조건이 완성되었을 때 그 결과로 한 순간의 사태가 현재에 현현한다. 따라서 잠재태인 미래가 특정한 조건에서 현 재로 나타나는 한 순간, 그리고 현재가 그 한 순간이 지나서 소멸하고 과거로 떨 어지는 순간은 모두 한 찰나에 해당하게 된다. 더 이상 분할되지 않는 극미의 방 식으로 해석한다면, 다수의 조건이 화합(samagra)하여 어떤 특정한 하나의 다르 마를 획득하는 순간 사이에는 시간적 분할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다수 의 집합이라는 조건과 특정한 다르마의 발생이라는 한 찰나의 시간 사이에 질적 인 변화가 있다는 말이 된다. 이런 해석은 이후 비유자-경량부계통, 나아가 불교 인식논리학에서 대상에 대한 인식의 발생과정을 설명하는데 핵심적인 개념이 된 다. 연기적 조건이 완성되는 순간 생성되는 세계가 인식으로 들어오는 과정은 다 수의 조건이 무간(無間)으로 다음 찰나의 의식에 형상을 남기는 인식과정과 평행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음 찰나에 발생한 형상은 같은 종류에 속하는 인식능력 에 의해 동일 찰나에 감각지각된다. 두 번째 부분의 설명은 하나의 극미가 소멸하고 다른 극미가 나타나기까지 생 멸하면서 변화하는 단위로 설명한다. 이것은 앞의 설명을 개별극미의 생멸과 변 화과정으로 묘사한 것으로, 이를테면 종자(種子, bīja)의 전변(轉變, pariṇāma)에 서 시간적 기본단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15) 『阿毘達磨俱舍論』: 眾緣和合法得自體頃。或有動法行度一極微。(T29.62a21 - 22).; 권오민 (2002), 549. - 145 - 1) 시간의 흐름316) 시간적 흐름에 따른 존재의 생성과 변화라고 하는 문제는 경량부 인식존재론 의 핵심적인 명제인데, 바로 이 문제에 있어 설일체유부 철학체계는 해명의 어려 움을 지니고 있다. 미래, 현재, 과거라는 삼세의 모든 조건들이 화합하여 현재의 한 찰나를 현행시킨다는 것이 설일체유부의 기본개념이다. 그렇다면, 이미 완결적 으로 이루어진 현재의 한 찰나가 소멸해야 하는 조건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 다. 만일 일체가 찰나적으로 소멸하는 내적조건을 가지고 있다면, 다음 찰나에 발 생하는 현재는 이전 찰나에 현행하였던 현재와 전혀 차이를 지니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매 찰나 동일한 현행을 반복해야 할 것이다. 비유자-경량부 계통의 상속 의 전변과 차별 개념은 사태의 인과적 연속성과 변화가능성을 해명하기 어려운 난점을 내포하고 있는 설일체유부의 철학체계에 대한 도전이자 대안으로 제시되 었다고 할 것이다. 사태의 상속(相續, saṃtati)에 대한 논의의 진행을 위해 몇 가지의 시간 개념 을 가정해 보기로 하자. 첫째는 고정된 절대적 시간 개념으로 시간은 대상의 변 화와는 무관하게 절대적 시점을 지닌다. 따라서 대상은 어느 시점으로든, 예를 들 어, 과거나 미래의 어떤 순간으로 이동 혹은 직접적인 관찰이 가능하다.317) 두 번 째는 독립적으로 흐르는 시간개념을 들 수 있다. 이 시간 개념에서도 시간은 대 상의 존재나 변화와는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흐른다. 따라서 대상의 변화가 전혀 없이도 무한히 긴 시간이 흐를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은 일방향으로 흐르기 때 문에 대상이 시간을 선택할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시공간이 결합한 시간개념을 들 수 있다. 현대물리학의 등장 이후에 확립된 개념으로 시간과 공간적 변화 혹 은 행위작용은 동시적이며 같은 현상의 두 가지 양태에 불과하다. 일반적으로 설 일체유부의 시간 개념은 필름 영사기에 비유되어 왔다. 찰나의 시간에 따라 한 장면씩의 슬라이드 영상을 가지는 긴 필름의 두루마리를 과거와 미래로 하고, 영 316) 불교의 제학파 철학이나 문헌에 나타난 시간개념에 대해서는 오형근(1994)을 참고하기 바란다. 吳 亨根 (1994) 『佛敎의 物質과 時間論』. 서울: 瑜伽思想社, esp. 291 - 327. 오형근은 이곳에서 다양 한 문헌에 언급된 시간개념들을 소개하고 있지만, 그것들의 내적 연관관계나 철학적 함의에 대해서는 논구하고 있지 않다. 한편 보다 일찍 발표된 사사키 겐쥰(1974)의 연구에서는 불교의 시간론을 보다 철학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고 이를 기반으로 시간과 존재의 문제를 탐구하였다. 사사키 겐쥰 (2016) 『불교 시간론: 아비달마불교의 시간과 존재에 대한 체계적 이해』. 황정일 역. 서울: 씨아이알. (佐佐 木現順 (1974) 『佛敎に於ける時間論の硏究』. 東京: 淸水弘文堂. 昭和49). 317) 이 개념이 야기하는 악순환의 문제는 지금 논의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기 때문에 일단 논외로 치기 로 한다. - 146 - 사기의 빛에 비추어지는 한 장의 사진을 현재로 보는 방식이다. 그러나 삼세실유 의 관점에서 설일체유부의 시간개념을 분석해 보면, 첫 번째 유형의 시간개념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차이점은 현재의 한 찰나에 과거의 모든 시점과 미 래의 모든 시점이 바로 맞닿아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무한한 미래로부터, 찰나의 현재, 무한한 과거로 이어지는 시간이 아니라, 미래와 현재와 과거를 각각 한 단 면으로 하는 세 개의 무한한 평면과 같은 것이다. 무한한 다르마들이 펼쳐진 한 장의 막(membrane)이 미래이고, 현재 한 찰나의 작용을 마치고 다른 한 장의 무한히 펼쳐진 막(幕)으로 들어간 다르마들이 과거이다. 과거와 미래의 막 사이에 는 한 찰나의 간극만이 존재하며, 삼계의 현재는 그 간극에 드러난 현상인 것이 다. 과거에 대한 기억이나 과거의 업이 현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직접적으로 인식의 대상이 되거나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간이 흐른다 고 상정할 경우에 성립 가능한 아주 오래된 사건에 대한 기억이나 그것을 원인으 로 하는 결과가 설일체유부의 시간개념에서는 현재로부터 한 찰나 떨어진 과거에 모두 함께 있는 것이다. 또 아직 일어나지 않은 모든 사태들도 그 시간의 연장을 상상하는 것과는 달리 모두 현재로부터 한 찰나 떨어져 있는 미래에 포함된다. 보다 단순화하면 미래, 현재, 과거를 각 각 한 찰나로 압축해서 보아도 무방할 것 이다. 이같은 시간 개념에서는 기대하는 것과는 달리 시간의 흐름이 발생하지 않 는다. 모든 미래의 가능성과 현재의 조건, 과거로 떨어진 결과들이 함께 원인과 조건이 되어 현재의 한 찰나에서 완결되어 드러난 것이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그들의 의도와는 별개로 설일체유부에서 삼세는 일종의 고정된 절대 적 시간 개념에 해당한다. 세우(世友)의 해석을 정설로 하는 설일체유부에서 일체 의 다르마는 실체로서 존재하고, 그것이 작용을 일으키고 있는 ‘한 찰나’를 현재 라고 이름할 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시간은 작용하고 있는 현재만이 존재할 뿐 이다. 이 한 찰나의 시간 위에서 현재찰나의 주체는 과거로 소멸한 모든 다르마 와 언젠가 작용을 일으킬 미래의 다르마들을 마주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한 찰나는 모든 가능성 혹은 잠재태들과 이미 인과적으로 연결된 상태로 모든 사태 들의 한 가운데에 존재한다. 이것은 현재가 과거와 미래의 중간에 한 찰나로 고 정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니면 정확하게 동일한 사태들이 매 찰나 반복해 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처럼 삼세가 현재의 한 찰나에 고정 될 때, 현재 한 찰나에서는 어떠한 변화도 불가능하게 된다. - 147 - 설일체유부논사들도 이런 문제의 가능성은 인지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해소하 기 위하여 다소 작위적인 해석을 제시하였다. 그것이 소위 유위사상(有爲四相 ),318) 즉 만들어진 존재(유위)들의 네 가지 작용에 관한 설명이다. 변화를 설명하 기 위해서는 현재에 생, 주, 이, 멸의 변화과정이 설명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 찰 나는 네 가지 다른 작용이 순차적으로 발생할 수 없다. 이런 문제에 대해 유부논 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런 비난은 옳지 않다. [4상이] 작용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생(生)은 미래에 대하여 작용한다. 현재에 이미 생겨난 것은 다시 생겨나지 않 기 때문이다. 온갖 다르마는 생겨나서 이미 현재의 시간이 정해진 때에 주(住) 등의 3상이 두루 일어나는 것이지, 생겨나는 작용이 있는 때에 나머지 3상의 작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비록 함께 존재한다고는 하지만 모순은 없는 것이다.319) 설일체유부 논사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이라는 네 가지 작용이 서로 다른 찰나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한 찰나에 동시에 발생하지만 그 대상을 각기 달리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현재 찰나에서 ‘발생(生)’의 성질은 미래를 대상으로 하고, ‘소멸(滅)’은 현재를 대상으로 하는 등이다. 따라서 한 찰나에 함께 존재한다고는 하지만, 그것들은 대상을 달리하여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설명이 다. 이런 해설은 삼세(三世)가 모두 실재하고 본질에서 차이가 없지만, 현재 작용 하고 있는 것을 현재, 이미 작용을 마친 것을 과거라는 부른다고 하는 삼세실유 설의 해석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320) 그러나 서로 시간을 달리하는 삼세의 차 이점을 작용으로 설명하는 방식을 한 찰나에서 생주이멸이라는 네 가지 작용의 상태에 적용하는 것에는 무리가 따른다. 이 한 찰나의 부분에서 발생과 소멸과 같은 작용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그것은 시간의 극소단위가 찰나보다 더 작은 부 분으로 소급된다는 의미가 된다. 설일체유부 논사는 이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 318) 황정일(2004)은 유위사상의 가실(假實)문제와 그것의 불교철학적 의미를 설일체유부와 세친의 논란 을 중심으로 논하였다. 설일체유부에게 있어 유위(有爲)의 4상(相)은 “실질적인 힘을 가진 작용”인 반 면에 세친의 관점에서 보면 유위의 4상은 가설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황정일 (2004) 「세친의 유위 4상 비판에 대한 중현의 반론-4상과 관련한 몇 가지 쟁점을 중심으로-」. 『인도철학』 제16집, 171 - 199. 319) 『阿毘達磨俱舍論』: 此難不然。用時別故。謂生作用在於未來。現在已生不更生故。諸法生已正現在 時。住等三相作用方起。非生用時有餘三用。故雖俱有而不相違。(T29.28a23 - 26) 320) 삼세실유의 문제는 이하 3장. 2절, 10.에서 고찰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 148 - 단지 한 찰나 안에서 네 가지 작용이 서로 대상을 달리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설 명이다. 이것은 원인과 결과가 한 찰나에서 완결된다는 설일체유부의 시간개념에 일치하는 해석이다. 그러나 바로 이 점 때문에 미래를 대상으로 한 작용, 그리고 그 결과인 현재, 현재를 대상으로 소멸하고, 과거로 떨어진 다르마의 존재는 모두 인과적으로 완결된 것이다. 따라서 사상(四相)개념은 기대와는 달리 현재에 변화 를 일으킬 수 있는 어떤 동인도 제공하지 못한다.321) 이같은 문제는 설일체유부 철학에서 심각한 수행론적, 윤리적 문제를 야기하게 될 이론적 결함임에 틀림없 다. 2) 언어적 존재 시간과 공간, 언어의 극소단위에 대한 『구사론』 III.85bc의 명제는 언어의 기 본단위인 명(名, nāma), 구(句, vākyam), 문(文, vyañanam)의 실재성에 대한 질문과 관련되어 있다.322) 이곳에서는 언어적 존재의 실재성이 어떻게 시간의 연 속성과 물질적 존재의 실재성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지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언 어적 개념(명(名)에 대한 비바사사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명(名) 등의 신(身)이라고 하는 개별적 실체(別物)가 존재하니, 이것들은 심불상 응행온에 포섭되는 것으로서, 실유의 존재(實)이지 가설적 존재(假)가 아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일체법이 모두 심(尋)과 사(思)에 의해 능히 요별되 는 것이기 때문이다.323) 설일체유부 논사들의 주장은 언어적 존재는 심불상응행에 포함되는 실유(實有) 이며, 그 이유는 분석적 사유에 의해 언어적 존재가 파악되기 때문이다. 언어는 음절(문), 단어(명), 문장(구)으로 구성되며,324) 이 언어의 구성요소들은 소리 321) 철학적 체계면에서 상당부분 설일체유부를 따르고 있는 법상유식에서 종자와 현행의 관계도 동일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한 찰나에 완결되는 것으로 설명되는 종자생현행, 현행훈종자의 한 사이클은 자기완결적이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 따른 새로운 원인이나 조건의 개입과 변화의 가능성을 설명하 기 어렵다. 322) 아비다르마철학에서 ‘언어와 의미’의 관계에 대한 연구로는 Cho, Eun-su의 연구를 참조하기 바란 다. Cho, Eun-su (1997) Language and Meaning: Buddhist Interpretations of "the Buddha's Word" in Indian and Chinese Perspectives. Michigan: A Bell & Howell Company. 323) 『阿毘達磨俱舍論』: 毘婆沙師說。有別物為名等身。心不相應行蘊所攝。實而非假。所以者何。非一切 法皆是尋思所能了故。(T29.29b29 - c3) 324) 명(名, nāma)은 색, 성, 향, 미 등의 개념을 설하는 것과 같은 개념작용(作想)을 말하고, 구(句, pada)는 ‘제행은 무상하다’는 등 궁극적인 의미를 드러내는 문장을 말하며, 문(文, vyañjana)은 음절 - 149 - (śabda)나 문자와는 구분되는 행온(行蘊), 즉 어떤 관념적 존재에 해당한다. 언어 적 구성요소인 음소(音素), 단어(單語), 문장(文章)은 개별적으로 실재성을 지니며, 그것은 물질적인 차원의 소리(聲)나 문자와는 층위를 달리하는 독립적인 존재이 다. 이같은 설일체유부의 해석은 관념적 존재의 실재성을 인정하는 자파의 입장 에 충실하지만, 상좌 슈리라타나 세친의 해석과는 충돌하는 것이다. 관념적인 존 재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는 경량부는 언어적 존재를 심불상응행의 실재로 규정 하려는 비바사사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실로 이들 [문, 명, 구 세 가지는] 말(vāc)을 자성으로 가지기 때문에 소리 (śabda)를 본질로 하는 것이고, [따라서] 물질(색)을 자성으로 하는 것인데, 어 찌하여 심불상응행이라고 하는가?325) 세친은 독립적인 언어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며, 언어(말, vāc)라는 것은 다섯 가지 감각대상에 포함되는 소리(śabda)를 본질로 하기 때문에 물질의 범주에 포 함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질문한다. 이러한 세친의 가상적 물음에는 관념 적인 것들과 인식을 가설적인 존재로 보고 그것의 궁극적인 토대를 물질적 구성 요소에서 찾는 시각이 전제되어 있다. 이에 대해 비바사사는 그 세 가지는 언어 를 자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며, 언어는 음성(音聲, ghoṣa)인데 음성 자체는 의미 를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언어가 반드시 소리와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고 반 박한다. 오직 의미를 지닌 소리만을 언어라고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가 단어 를 발생시키고 또 단어의 의미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소리라고 해서 모두 언어가 되는 것은 아니고, 발화자에 의해 의미가 한정된 소리라야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범어의 ‘go’라는 소리는 방위, 소(牛), 땅, 빛 등 아홉 가 지 의미를 지니는데, 이것이 특정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발화자가 가능한 의미를 한정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326) (字, akṣara)이나 음소(音素)를 의미한다. Cf. 『阿毘達磨俱舍論』: 名謂作想。如說色聲香味等想。句者 謂章。詮義究竟。如說諸行無常等章。或能辯了業用德時相應差別。此章稱句。文者謂字。如說阿壹伊 等字。(T29.29a11 - 15) 325) AKBh 47ab (80): nanu caite vāksvabhāvatvāc chabdātmaka iti rūpasvabhāvā bhavanti / kasmāc cittaviprayuktā ity ucyante | 『阿毘達磨俱舍論』: 豈不此三語為性故用聲為體色自性攝。如何乃說為心不相應行。(T29.29a22 - 24) 326) 『阿毘達磨俱舍論』: 此三非以語為自性。語是音聲。非唯音聲即令了義。云何令了。謂語發名。名能顯 義。乃能令了。非但音聲皆稱為語。要由此故義可了知。如是音聲方稱語故。何等音聲令義可了。謂能說 者。於諸義中已共立為能詮定量。且如古者於九義中共立一瞿聲為能詮定量。(T29.29a24 - b1). - 150 - 이에 대한 비유자-경량부 논사의 비판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단어가 의미를 드러낸다는 점은 모두 인정하지만 그 의미는 합의에 의한 결정된 것이다. 그리고 단어 자체가 소리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자성을 가진 존재라고는 할 수 없다. 둘째는 단어가 말(언어)로부터 발생하거나 말(언어)에 의해 드러나거 나 어느 경우에도 언어가 소리를 본질로 하는 한, 단어를 따로 설정할 이유가 없 다. 만일 말에 의해 단어의 의미가 드러내거나 발생한다고 하면, 말은 소리를 본 질로 하기 때문에 당연히 소리가 단어의 의미를 드러내거나 발생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단어를 중간에 개입시키지 않고 소리만으로도 의미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327) 따라서 별도로 단어(명칭) 개념을 설정할 필요가 없 다. 세 번째는 찰나 단위의 소리와 다찰나에 걸쳐 이루어지는 단어, 문장 등과의 관계이다. 소리들이 찰나에 하나로 결합하여 취집(聚集, sāmagryam)되지도 않으며, 하 나가 각각의 부분으로 발생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다. 그런데 어떻게 말이 단어(명칭)를 발생시킬 수 있겠는가?328) 소리는 시간을 따라서 발화되기 때문에 한 찰나에 모든 소리가 취집할 수 없다. 여기서 세친이 사용하는 취집(samagra)이라는 용어는 앞에서 하나의 단위로써 극미의 취집을 의미할 때 채택하였던 단어이다. 극미가 취집하여 하나의 덩어리 를 이루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소리가 취집하여 하나의 의미단위를 만들 수 없 다. 또한 하나의 단어가 찰나 찰나 각각의 음절을 누적하여 하나의 명칭을 발생 시킬수도 없다. 예를 들어, ‘소나무’라는 말이 단어로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소 나무’가 한 찰나에 취집하여 소나무라는 의미를 드러내거나, 아니면 매 찰나 ‘소’, ‘나’, ‘무’를 누적하여 마지막 찰나에 ‘소나무’라는 명칭을 얻고 소나무의 의미를 드러내어야 할 것이다.329) 실제 비바사사는 그와 비슷한 방식의 답변을 제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330) 과거에 모든 표업의 찰나(vijñaptikṣaṇa)들을 근거로 해서 327) Cf. 『阿毘達磨俱舍論』, T29.29b4 - 12. 328) AKBh II.47ab (81.10 - 11): na khalv api śabdānāṃ sāmagryam asti kṣaṇaikamilanam | na caikasya bhāgaśa utpādo yukta iti katham utpādayantī vāṇnāmotpādayet | 329) 음성과 언어에 상세한 설명과 ‘소나무’의 비유에 대해서는 권오민 (2002), 257 - 263. 특히 주석 140 - 146을 참고할 수 있으며, 언어와 진리로서의 불설(佛說, buddha-vacana)의 관계에 대한 연 구로는 조은수 (2015)의 논문이 있다. Cf. 조은수 (2015) 「인도와 중국 불교 경론을 통해 본 ‘Buddha-vacana’개념의 의미 변천」. 『인도철학』 제44집, 127 - 159. 330) AKBh II.47ab (81.12): kathaṃ tāvad atītāpekṣaḥ paścimo vijñaptikṣaṇa utpādayaty - 151 - 최후의 마지막 찰나에 무표업(avijñaptim)을 낳는다고 하는 방식의 설명이다. 그 러나 이런 설명은 설일체유부의 실재와 시간 개념으로 인해 모순에 봉착한다. 설 일체유부에서 모든 작용은 현재찰나에서만 일어나고 그 찰나 안에서 완결된다. 따라서 개별적인 ‘소’, ‘나’, ‘무’는 마지막 찰나에 누적될 수 없으며, 만일 마지막 찰나에 의미가 생겨난다면, 그것은 최후의 찰나에 ‘무’라고 하는 한 음절에 의해 서 ‘소나무’의 의미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네 번째 비판은 단어와 의미가 항상 함께 발생(俱生)하는 경우이다. 그렇다면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 의미를 가진 단어 들은 존재할 수가 없다. 이를테면 미래는 현재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미래’와 같은 단어는 현재에 말해질 수 없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유위(有爲)의 세계에 포 함되지 않는 무위법(無爲法)들도 말해질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비판의 결론으로 세친은 게송(偈頌, gātha)과 같은 문장은 실체가 아니라 가설적인 것이라고 정리한다. 소리에 의미를 설정한 것이 단어(명칭)이고, 그 단어들이 특정하게 배열한 것이 게송이다. 따라서 그것은 게송의 5운율(韻律) 이나 마음[이 발생하는] 순서(paṇktivac cittānupūrvyavac ca)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명(名), 구(句), 문(文)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친의 질문에 따르면, 언어는 소리에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물질(색)에 토대를 두고 그것으로부터 발 생하는 가설적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언어의 기본적 구성요소의 관 점에서 본다고 하더라도 음소(音素)만을 실체로 인정할 수 있을 뿐이다. (a) 아니면 음소(vyañjana)만이 실체(dravya)로서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parikalpana)하는 자들이 있다. (b) 바로 그 [음소]가 집합(samūha)한 것 들이 명신(名身) 등이기 때문에 그것(tat)에 대한 가설(prajñapti)은 무용한 것 이다.331) 언어의 구성방식으로 볼 때, 문장은 단어로 구성되고 단어는 음소로 이루어진다. 하나의 단어나 문장은 마치 구성요소들이 집합하여 조대한 물질을 이루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분석할 수 있다. 따라서 독립적인 자성을 지니는 것을 실체라고 할 경우 실체로서 인정될 수 있는 것은 음소밖에 없다. 문장 (b)에는 극미들의 적 집(積集)에 대해 사용하였던 집합(集合, samūha)332)과 함께 가설(prajñapti)이라 avijñaptim | 331) AKBh II.47ab (81.22 - 23): astu vā vyañjanamātrasya dravyāntarabhāvaparikalpanā | tatsamūhā eva nāmakāyādayo bhaviṣyantīty apārthikā tatprajñaptiḥ | 332) Cf. AKBh I.20ab (13.22.): anekadravyasamūhatvāt rāśipudgalavat. 무더기인 뿌드갈라와 같이 - 152 - 는 용어가 사용되어 관심을 유발한다. 특히 “그것(tat)에 대한 가설”에서 tat를 무 엇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해석의 양상이 달라진다. ‘그것(tat)’이 음소를 지시하는 것이면, 음소에 대한 가설이 무용하다는 의미가 되며, ‘그것’을 명신(名身) 등으로 보면 집합하여 만들어진 것들에 대한 가설이 무용하다는 주장이 된다. 진제는 해 당부분을 “음소 등이 모인 것을 명취(名聚), 구취(句聚), 자취(字聚)라고 하는데, 이것은 단지 가설일 뿐이기 때문에 바른 작용을 가지지 않는다.”333)고 번역한 반 면, 현장은 “바로 이것이 집합한 것이 명신 등이기 때문에 다시 다른 것들이 존 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용한 것이다”334)고 번역하였다. 두 번역은 모두 ‘그것’ 을 ‘명신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 경우 문장의 뜻은 비유자-경량부적인 해석으로 귀결될 것이다. 다시 말해, 가장 기본적인 단위의 실제성은 인정하지만, 그것들로 구성된 명신 등의 집합은 가설적인 것이고 실체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구사론주 세친의 비 유자-경량부적 경향을 반영하는 해석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음소 (vyañjana)를 지시하는 것으로 보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 경우 ‘언어적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음소를 가설(prajñapti)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 는 반문이 된다. 왜냐하면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명신 등(nāmakāyādaya) 의 실체성인데, 그것들은 집합(samūhā)이기 때문에 이미 실체라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바사사들은 그것들이 실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음소의 실체성을 주장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음소와 단 어가 사극미(dravyaparamāṇu)와 취극미(saṃghātaparamāṇu)에 대비될 수 있 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사극미는 직접적인 지각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 에, 중현의 『순정리론』에서는 추론에 의해 가설되는 존재(*prajñaptisat)로 설명 된다. 설일체유부는 물론 경량부도 합리적 추론에 의해 도출된 존재의 실재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세친은 극미의 개념에 있어서 취집된 존재로 지각의 영역에 들 다수의 실체가 집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구는 세친이 온(蘊)의 성질이 다수의 실체가 집합한 것이기 때문에 실재성이 없고, 가설적인 것 이라고 논증하는 맥락에서 사용되었다. 지금 이곳에서도 세친은 정확히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여 언어 분석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333) 『阿毘達磨俱舍釋論』: 是字等總集。說為名聚句聚字聚。此但假說無有正用。(T29.187c28 - 29) 334) 『阿毘達磨俱舍論』: 或唯應執別有文體即總集此為名等身。更執有餘便為無用。(T29.29b28 - 29). 한 글번역으로는 권오민의 『구사론』에서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혹은 오로지 ‘문자(文, 즉 음소)’만이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마땅히 주장해야 할 것이니, 바 로 이것의 집합(總集)이 명(名) 등의 신(身)이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그 밖의 것(명, 구)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권오민 (2002), 263. - 153 - 어온 취극미의 실재성도 인정하는 입장에 서있다. 이 취집극미의 결합방식인 화 합(saṃcita)을 여기에 적용하면, 이 해석의 함의는 더욱 커진다. 즉 개별적인 음 소 등이 모여서 특정한 기호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를테면 ‘소나무’가 소나무라 는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은 말소리의 ‘소나무’에서 의미로서의 소나무로 질적 도 약이 이루어져야 한다. ‘소나무’ 등의 명칭은 소나무와는 별개의 관념적 존재가 되었으며, 그것은 물질적인 소나무와는 완전히 구분되는 존재이다. 경량부와 세친 에게 이 ‘소나무’라는 개념은 소나무에 토대를 두고 단지 가설된 존재일 뿐이기 때문에 실재성이 없다. 그리고 소나무라는 물질적 존재는 다시 기본적인 구성요 소인 극미로 분석될 수 있다. 8. 극미의 분석: 실체와 물질(색)335) 『구사론』 「분별세품」에서 기세간(器世間)의 공간적 구조와 시간적 연장에 대해 논의한 후, 마지막 주제는 ‘최후의 순간에 무엇이 남게되는가?’에 대한 논란이 이 루어진다. 세친의 결론적 언급은 “기세간이 파괴되고 나아가 극미(極微)도 역시 남김없이 파괴된다”336)는 것이다. 이에 대한 어떤 외도(外道)의 반론과 함께 이 외도와 세친 간에 극미론에 대한 논쟁이 전개된다. 양자의 극미논쟁은 부분과 전 체, 실체와 속성, 결합의 방식과 인식의 문제 등으로 이루어진다.337) 어떤 외도들(tīrthaṃkarā)은 극미는 상주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 때에는 [기세간이 파괴되지만] 나머지 극미들은 존재한다”고 한다.338) 이들이 이같이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에 물질적 세계가 생겨날 때 그것의 종자(種 子)가 될 원인(nimitta)이 남아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극미가 기세간을 구 성하는 물질이라면, 기세간이 파괴되어 소멸할 때 극미도 당연히 함께 소멸해야 할 것이다. 335) Cf. AKBh 189.1 - 190.8.; T29.66a28 - c23.; 『구사론』, 579.15 - 586.2. 336) 『阿毘達磨俱舍論』: 此三災力壞器世間。乃至極微亦無餘在. (T29.66b5 - 6) 337) 구사론 연구자들 사이에서 이 외도는 승론(勝論), 즉 바이셰시카(Vaiśeṣika)를 지칭하는 것으로 알 려져 있지만, 본문에서 논쟁의 주제와 철학적 관점은 앞서 살펴 본 『니야야수트라』의 내용과 유사하 기 때문에 이 외도는 니야야학파(正理論) 혹은 니야야-바시셰시카 논사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극미론에 직접적인 주제들은 앞에서 논의하였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단지 이 논의 맥락에서 새롭게 등 장한 문제만을 고찰해 보도록 하겠다. 338) 『阿毘達磨俱舍論』: 一類外道執極微常。彼謂。爾時餘極微在。(T29.66b6 - 7) - 154 - [세친] 바로 이 물질(색)등에 대해 극미라는 개념을 세운 것이기 때문에 물질(색)이 파괴될 때 극미 역시 파괴된다. [정리론사] 극미는 물질(색) 등과는 다른 실체이기 때문에 그것들(물질)이 파괴될 때 그것(극미)은 파괴되지 않는다고 알아야 한다.339) 정리사의 주장에 대한 『구사론』의 반박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이 외도들도 지 (地) 등이 감각기관의 대상이라고 하는데 지(地) 등의 대종극미가 어떻게 다섯 가 지 감각대상과 다른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느냐는 지적이다. 니야야-바이셰시카 는 궁극적인 구성요소로서 극미 차원의 지수화풍과 경험적 차원의 물질적 지수화 풍을 구분하고 있다. 안근의 대상이 되는 지수화풍은 세속에서 경험되는 물질적 차원을 의미한다. 이는 『구사론』에서도 인식하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앞의 비 판은 정당한 것이 아니다. 두 번째는 어떤 대상이 불에 타는 등에 의해 소멸하면 지각도 소멸한다. 감각경험의 대상에 의해서만 대상이 파악되고 그것이 사라지면 그것에 대한 인식도 사라진다. 따라서 물질과 구분되는 다른 실체는 확인할 수 없다. 논의 말미에 현색(顯色)과 형색(形色)의 차이를 통해 감각대상에 대한 차별 적인 인식을 해명하는 논주의 설명은 다소 의외라고 할 수 있다.340) 왜냐하면, 세 친은 상좌 슈리라타의 주장에 따라 형색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 러 곳에서 상당히 긴 분량의 극미관련 논의를 한 후 임에도 블구하고 세친은 이 곳에서 ‘극미가 물질(색)과는 실체가 다르다’는 대단히 논쟁적인 주제에 대해 다 소 미온적인 반응을 보인다. 이것은 아마도 이 주장이 내포하고 있는 다양한 해 석의 가능성에 대해 세친이 판단을 유보하고 있기 때문으로 추측할 수 있다. 사실 정리론사의 주장은 매우 특이하면서도 도전적이다. 지금까지 모든 논의는 극미가 물질의 가장 미세한 기본단위라는 관점에서 다루어왔다. 바로 이 때문에 극미가 크기와 저항을 지니는 물질적 특성을 가져야 한다는 비판이 가능했고, 형 이상학적 극미의 크기가 영(零)으로 소멸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으며, 그것들의 접 339) AKBh III.100ab (190.2 - 4): rūpādiṣv eva ca paramāṇusaṃjñā(3)niveśāt tadvināśe siddhaḥ paramāṇuvināśaḥ | dravyaṃ hi paramāṇur anyac ca rūpādibhyo dravyam iti na (4) teṣāṃ vināśe tadvināśaḥ sidhyati 340) “또한 모전(毛氈, 털로 짠 양탄자)이나 붉은 꽃 등이 불에 타면 그것에 대한 지각이 없어진다. 따라 서 모전 등의 지각은 다만 색 등의 차별을 연으로 하여 일어난 것일 뿐이다. 또한 비유컨대 항오(行 伍, 대열)[가 형태에 따라 인식되는 것]처럼 숙변(熟變)이 생길 때 형태나 양이 동등하기 때문에 항아 리나 분(盆)으로 인식되는 것이니, 만약 행태를 보지 않으면 인식되지 않기 때문이다.” 『구사론』, 585. - 155 - 촉과 집적이 논의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극미가 물질(색) 등과 다른 종류의 실체 라면 논의방향은 완전히 달라져야 할 것이다. 니야야-바이셰시카의 철학체계에서 는 인간의 의식을 포함하는 모든 세계가 어떤 근원적 물리적 요소에 의해 구성된 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물질적 존재(色)로 동일한 속성을 가진다는 의미 는 아니다. 물질에도 요소적 물질(bhūta)과 물성적 물질(mūrta)에 차별이 있고, 의식적 요소들은 이 양자와도 다른 것이다. 따라서 니야야-바이셰시카와 아비다 르마 논사들은 물질(색)로 구성된 세계에 대한 이해를 달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트만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불교철학에서의 물질적 존재와 의식적 존재의 범주 가 니야야-바이셰시카에서는 아트만과는 구분되는 단일한 세계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었다. 따라서 니야야-바이셰시카에서 실체로서의 극미는 이 현상세계의 궁 극적 구성요소로서 주장된 것이지만, 불교철학에서는 의식적 세계에 대비하여 물 질적 세계, 즉 니야야-바이셰시카의 요소적 물질세계에 해당하는 세계의 구성요 소로서 극미를 설정하였던 것이다. 니야야-바이셰시카에게는 물리적 세계 전부가 다양한 종류의 원자적인 실체로 구성되어 있다. 반면 설일체유부는 불교의 물질(색)에 포함되는 표색(表色, vijñapti)과 무표색(無表色, avijñapti)은 극미로 만들어졌지만, 의식은 극미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상좌 슈리라타는 나아가 무표색(avijñapti)을 물질 의 영역에서 배제하였으며, 지수화풍의 4요소(대종)의 단계에 해당하는 극미들만 을 궁극적인 실제로 인정하였다. 상좌의 해석에 따르면, 물질로 지각된 현상세계 는 극미차원의 실재하는 세계가 아니다. 유식철학은 여기서 이 요소적 존재들의 실재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 물질적 존재의 궁 극적 구성요소는 직접지각되는 물리적 존재가 아니라 추론에 의해 획득되는 어떤 관념적인 것(prajñapti)이며, 지각에 의해 경험되는 현상세계는 본질적으로 의식 과 동질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판단된다. 물리적 세계 궁극적 존재 NV 요소적 물질 물성적 물질 의식 아트만 설일체유부 요소적 물질 물성적 물질 의식 X 경량부 요소적 물질 X 의식 X 유식 X X 의식 X - 156 - 9. 형색극미와 표색(表色, vijñaptirūpa)에 대하여341) 1) 형색극미의 부정 극미의 종류와 실재성 논증은 행위의 업(業)과 과보에 대한 문제와 밀접한 관 련이 있다. 설일체유부에서 행위(karma)는 실재하는 물질의 형태를 본질로 한다. 따라서 몸의 형태가 움직임을 통해 만들어낸 행위는 구체적인 작용을 일으키고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받게 된다. 그러나 만일 10색처와 같은 물질적 영역이 가 설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행위도 허구적인 것으로 해석될 것이며, 따라서 행 위의 작용과 그 과보에 대한 새로운 방식의 적절한 해명이 요구될 것이다. 세친 은 상좌의 견해에 따라 이 행위의 물질적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해 석의 근거는 모든 현상세계를 구성하는 10색처가 극미의 화합에 의해 구성되어 비실재한다는 점에서 찾는다. 저항을 가진 물질(색)은 어떤 것이든 항상 극미를 가지고 존재한다. 그것은 극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3c| 극미에는 길이 등의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다수[의 극미]가 바로 그 와 같이 배열한 것에 대해 길이 등이라고 가설(prajñapti)하는 것이다.342) 저항을 지닌 모든 물질은 극미를 가지겠지만, 상좌 슈리라타와 세친은 형태를 가 진 형색극미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행위가 행색극미를 본질로 한다 는 설일체유부의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세친은 형태극미라는 것은 현색극미가 특정한 형태로 배열하여 나타난 것을 가설한 것(prajñapti)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343) 항아리와 같은 사물을 볼 때, 특정한 색깔은 동일성을 유 341) Cf. AKBh 195.6 - 196.2.; T29.68b22 - c25.; 『구사론』, 601.2 - 604.8. 342) AKBh IV.3 (195.5 - 7): yac cāpi kiṃcit sapratighaṃ rūpam asti tad avaśyaṃ paramāṇau vidyate || na cāṇau tat (3c) || na ca saṃsthānaṃ paramāṇau vidyate dīrghādi | tasmād bahuṣv eva tathā saṃniviṣṭeṣu dīrghādiprajñaptiḥ | 게송에서 aṇu는 개별적인 극미(paramāṇu) 들이 7개가 모여서 만들어지는 미취(微聚, aṇu)라는 의미가 아니라, 극미와 치환가능한 동의어로 사 용된 것으로 보인다. 343) 여기서 극미들이 배열하여 모이는 것은 화합에 의한 결합방식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항아리 등의 특정한 형태는 원래 개별적인 극미에 존재하는 형태가 아니라 특정한 배열에 의한 화합을 통해서 만 들어진 형상인 것이다. 세친을 이곳에서 이러한 결합방식을 설명하면서 화합(saṃcaya)을 명시적으로 사용한다. AKBh IV.3c (195.9): siddhasvalakṣaṇānāṃ hi teṣāṃ saṃcayo yujyate | 만약 자상들이 확립된 다면, 그것들은 화합한 것이라는 것이 인정된다. - 157 - 지하지만 항아리의 형태는 보는 방향 등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설일체유부의 논사는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한다. 첫째는 만약 형색극미가 없다면, 어두운 곳에서 어슴푸레하게 형태만 보이는 것은 어떻게 설 명할 것인가? 둘째는 몸으로 짓는 업(身表業)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하는 문 제들이다. 세친은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어두운 곳에서 형색을 보는 것이 아 니라 현색을 정확히 보지 못하기 때문에 형태에 대한 지각조차도 불분명한 분별 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신표업에 대해서는 몸(身)과 말(語)로 짓는 업은 모두 마음의 의도(思, cetanā)가 몸과 말을 통하여 드러난 것이라고 주장한 다. 이 때 마음에서 일으킨 행위작용은 사업(思業)이라 하고 마음의 의도가 몸과 말을 통해서 드러난 것을 사이업(思已業)이라고 한다.344) 이제 일체의 행위작용을 의미하는 표색(表色, vijñaptirūpa)에 대한 학파적 견해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2) 표상(表象, vijñapti)에 대하여 vijñapti는 아비다르마 철학에서 표업(表業, vijñaptikarma), 표색 (vijñaptirūpa), 표상(表象)과 요별(了別) 등의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 이종철은 vijñapti의 어원분석을 통해 『구사론』에서 사용되는 vijñapti가 적어도 두 가지 상이한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논증하였다.345) 우이 하쿠주(宇井伯壽, 1953)가 vijñapti를 vi-⎷jñā + apa(사역형) +ti로 분석하고 그 의미를 ‘알게 하는 것(知ら しめること)'으로 추정하였는데, 이종철은 그것이 『구사론』에서 사용된 vijñapti의 또 다른 용례는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하였다. AKBh I.16a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vijñapti의 다른 용례는 진제(眞諦)에 의해서는 ’보다(視)‘346), 현장(玄奘)에 의해서는 요별(了別)로 번역된 것을 지칭한다. 결론적으로 이종철은 vijñapti의 다 른 의미는 vijñāna(知ること)와 동의어로 판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언어 분석은 『유식이십론』에서 vijñapti가 심의식과 동의어로 상정된 것에 대해 사후적 인 문법적 해석은 제공할 수 있겠으나, 아비다르마철학의 맥락에서 vijñapti가 가 관련하여 AKBh IV.103d이하에도 표상(vijñapti)을 극미의 화합(saṃcita)로 설명하는 존자 묘음의 언 급이 소개된다. AKBh IV.103d (263.11 - 12): paramāṇusaṃcita(12)tvād vijñaptir api dvidheti bhadantaghoṣakaḥ | 103d |. 극미가 화합한 것이기 때문에, 표(vijñapti)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고 존자 묘음이 말하였다. 344) 『구사론』, 601 - 604. 345) 李鍾徹 (2004) 「vijnaptiの語形について」. 『印度學佛敎學硏究』 Vol.53 No.1 (105), 346 - 341. 346) 이종철은 진제가 ‘보다’(視)로 번역한 것인 ‘인식하다(식(識)’에 대한 착오일 것으로 의심한다. 李鍾 徹 (2004), 136. - 158 - 지는 철학적 의미를 밝혀주지는 못한다. 이곳에서는 대상과 인식의 관점에서 vijñapti의 의미에 대한 몇 가지 가능성을 탐색해 보도록 하겠다. 먼저 vijñapti를 ‘알게 하는 것’이라는 해석과 ‘아는 것’이 라는 상이한 의미가 가능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철학적 배경을 검토해 볼 필 요가 있다. 설일체유부의 존재론에서는 외부의 대상(viṣaya)과 인식대상 (ālambana)은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무엇인가 정보를 제공하여 ‘알게 하는 것’ 의 주체인 대상은 인식되는 대상과 차이가 없다. 그러나 상좌 슈리라타의 경우에 는 ‘알게 하는 대상’, 즉 인식의 원인이 되어 인식을 발생시키는 대상과 ‘알려지 는 것,’ 즉 인식대상은 명확히 구분된다. 여기서 대상에 대하여 ‘알게 하는 것’이 인식의 측면에서는 ‘알려지는 것’이 되며, 이 알려지는 인식대상은 인식과 본질적 으로 동일한 심적요소에 포함되는 것이다. 세친은 『구사론』에서 이미 상좌 슈리 라타의 이런 해석적 관점을 수용하고 있기 때문에 설일체유부와는 다른 해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의식은 [어떤 것에] 대하여 알게 하는 것이다. (16a) 대상 각각에 대하여 ‘알게 하는 것’이 지각된 것을 식온이라고 한다.347) 게송에 대한 세친의 해석은 식온(識蘊)은 각각의 대상에 대한 지각(upalabhi)이라 고 설명한다. 문제는 인식이 vijñapti를 매개로 일어난다는 점이다. 설일체유부의 관점에서라면 대상은 직접적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대상을 알게 하는 것’을 대상 과 별도로 상정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vijñapti는 인식과 관련하여 대상의 특정 한 작용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좌 슈리라타의 관점에서 보자 면, 대상과 인식대상은 구분되기 때문에 대상과 ‘대상을 알게 하는 것’은 존재론 적 층위가 다르며, ‘대상을 알게 하는 것’은 인식대상을 의미하게 된다. 그리고 이 인식대상은 인식과 질적인 차원에서 동등한 것으로 인정된다. 유식의 관점에 서라면 외부에 실재하는 대상은 부정되기 때문에, ‘알게 하는 것’이라는 해석은 무의미해지며, 따라서 vijñapti는 대상과 유사하게 나타난 인식대상을 인식 347) AKBh I.16a (11.6 - 7): vijñānaṃ prativijñaptiḥ (16a) viṣayaṃ viṣayaṃ prati vijñaptir upalabdhir vijñānaskandha ity ucyate | 현장은 세친의 주석을 “각각의 대상에 대한 요별을 총괄적으로 취한 대상의 상(相)을 식온이라고 한 다”고 해석하였다. 여기서 요별(了別)은 『유식이십론』에서도 채택하고 있는 역어인데, 『구사론』에서 vijñapti를 요별로 번역하는 것은 유식적 투사(投射)일 가능성에 유의하여야 한다. 『阿毘達磨俱舍論』: 論曰。各各了別彼彼境界。總取境相故名識蘊. (T29.4a22) - 159 - (vijñāna)이 스스로 ‘아는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vijñapti가 요별(了 別)로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은 어떤 어원적 기원뿐만 니라 학파철학적 해석의 상이점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상의 차이점은 vijñapti의 다양한 용법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 타난다. 업(業)의 성립과 관련하여 『성업론』에서 세친의 설명은 vijñapti를 사역형 으로 해석하는 입장을 지지한다. 그것은 무엇 때문에 vijñapti(表)라고 하는가?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지각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것을 발생시키는 마음에 대해 알게 하기(*vijñāpayati) 때문이다.348) 몸(身)과 말(語)과 같은 외부의 행위는 내적인 마음의 의도에 관해 알게 해 준다. 마치 물결이 일렁이는 것을 보고 물고기가 움직이고 있음을 아는 것과 같다. 이 렇게 몸을 통하여 외부적으로 행위를 드러내는 것이 표상(表象, vijñapti)이며, 이 표상은 형색(形色)을 본질로 한다.349) 설일체유부에서는 물질적 존재의 기본단위 로 현색과 형색의 실재성만을 인정하고, 표색은 형색의 축적으로 분석하였다. 반 면 상좌 슈리라타는 현색만이 실재한다고 보기 때문에 형색과 표색은 모두 가설 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성업론』에서 세친은 상좌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세친 은 이곳에서 극미개념을 끌어들여 vijñapti의 문제를 논의한다. 만약 표상 (vijñapti)이 형색을 본질로 한다면, 그것은 ‘길이’ 등의 성질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길이’ 등은 (1) 현색(顯色)과 같은 특수한 극미[의 일종]인가? (2) 특수한 극미 들의 취집인가? 아니면 (3) 별도의 하나의 물질이 물질(색) 등의 취집에 두루 퍼져있는 것인가?350) 348) Lamotte, Etienne (1987), 42.; 『大乘成業論』: 何故名表。此能表示自發業心令他知故。 (T31.781b12 - 13) 무엇 때문에 표(表, vijñapti)라고 하는가? 이것이 자신이 지은 업의 마음을 나타 내어 다른 이들이 알 게 하기 때문이다. 349) 『大乘成業論』: 今於此中何法名表。且身表業形色為性。緣此為境心等所生。(T31.781b3 - 4) 지금 이 가운데 어떤 다르마를 표(表, vijñapti)라고 하는가? ‘몸을 표상하는 행위’(身表業, *kāyavijñaptikarman)는 형색을 자성으로 가진다. 이것을 조건으로 하여 대상에 대한 마음 등이 발 생한다. 350) 『大乘成業論』: 長等為是極微差別猶如顯色。為是極微差別積聚。為別一物遍色等聚。(T31.781b19 - 20) - 160 - 이 세 가지 질문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상좌 슈리라타와 세친이 형색(形色)극미 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이 현색(顯色)극미가 양적으로 집적한 것으로 보 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형색극미는 설일체유부에게는 실재하는 개별적인 극미의 종류에 관한 문제이지만, 경량부계통에서는 개별적인 [현색]극미의 집적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업론』에서 형색극미에 대한 질문은 『구사론』, 『순 정리론』, 『유식이십론』에서 극미의 집적을 논할 때 등장하는 질문들과 유사하다. 세친은 위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나씩 검토한다. 첫째, 만일 형색이 현색 과 같이 특수한 극미의 종류라면 모든 물질의 덩어리에는 ‘길이’의 형색이 포함되 어 있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긴 막대기를 짧게 잘랐을 때 이 짧은 막대기의 부분에 ‘길다’는 성질이 있어야 한다는 불합리가 발생한다. 둘째, 만약 색취 가운 데 하나 하나의 미세한 부분이 ‘길이’ 등을 가질 수 있고, 특정한 극미들이 별도 로 적집한 것이라면, 그것은 현색극미가 적집하여 형색을 이룬다는 설명과 동일 한 것이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 이는 경량부 상좌가 주장하는 바이기도 하 다. 세 번째 만약 하나의 별개의 사물이 색취 등에 두루 퍼져있다면, 단일한 것이 고 두루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 하나의 부분 가운데 모두 취할 수 있어야 할 것이 다. 모든 부분이 각각 별도로 있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가 아니어야 할 것이다. 이 러한 주장은 10처가 모두 극미의 적집이라는 주장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다수 극 미의 복합체가 독립적인 단일체(ekadravya)를 산출한다는 바이셰시카의 주장을 지지하는 결과가 된다.351) 형색에 대한 세친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형색은 독립적인 실재성을 가진 것이 아니며, 온갖 현색들이 여러 방 면으로 배열하고 서로 상이한 길이 등에 대한 개념을 일으키는 것이다. 마치 나무나 개미 등이 행렬을 이룬 것과 같이, 여기에는 과오가 없다.352)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숲과 개미는 화합(和合)을 설명할 때 등장하였던 전형 적인 비유들이다. 개별적인 나무나 개미들과는 별도로 숲이나 개미의 행렬이 인 식되는데, 바로 그와 같이 개별적인 것을 넘어서는 어떤 인식의 대상을 묘사하기 351) 『大乘成業論』: 設爾何失。長等若是極微差別應如顯色。諸色聚中一一細分。長等可取。若是極微差別 積聚。此與顯色極微積聚。有何差別。即諸顯色積聚差別。應成長等。若別一物遍色等聚。一故遍故。一 一分中應全可取。於一切分皆具有故。或應非一。於諸分中各別住故。又壞自宗十處皆是極微積集。又應 朋助食米齊宗執實有分遍諸分故。(T31.781b20 - 28) 352) 『大乘成業論』: 是故形色無別有體。即諸顯色於諸方面安布不同起長等覺。如樹蟻等行列無過。 (T31.781c6 - 8) - 161 -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화합상이 실재성과 분리된 것인 것처럼 형색도 또한 가설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몸의 형태를 띠고 이루어진 행위의 업(業)은 허구적인 것일 뿐인가? 상좌 슈리라타와 세친은 행위의 업(業)은 이 행위 자체에 있는 것 이 아니라 그것을 촉발한 의도(cetanā)에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너희 경부종에서는 무엇을 설정하여 신표업을 본질로 삼는가? 형색 (形色)을 설정하여 신표업이라 하지만, 그것은 다만 가설적인 것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몸을 여러 다양한 행태로 운동하게 하는 ‘사(思)’가 몸을 매개(身門)로 하여 작용하기 때문에 ‘신업’이라 이름한 것이다.353) 몸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업(業, karma)은 극미들의 화합상처럼 실재성을 띠는 것 이 아니며, 때문에 그 형색이 다양한 형태로 운동하게 하는 의도(思)에게 책임이 주어진다. 의도(cetanā)는 실재들이 허구적인 형상을 만드는데 기여하며, 그것이 드러나서 인식되는 결과를 산출한 것이 형색과 같은 화합상인 것이다. 12처설의 맥락에서는 10색처가 모두 화합상이라는 정설에 따라, 업(業)을 짓는 의도가 감각에 지각되는 형태로 표출된 것이 화합상인 형색(形色)이며, 이것은 바 로 10색처를 의미하는 것으로 환원될 수 있다. 마음의 의도에 의해 지어지는 업 (業)은 10색처의 물질(색)을 통해 표면화하여 관찰될 수 있는 것이다. 상좌과 세 친은 무표색(avijñaptirūpa)을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물질(색)은 10색처로 한정된다. 그리고 이 10색처는 극미들의 화합상이며, 형색(形色)에 상응 한다. 표상(表象, vijñapti)은 형색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행위의 업(業)을 일으키 는 표상(vijñapti)은 10색처와 동일한 외연을 지니는 것이다.354) 따라서 10색처를 vijñapti로 규정할 때, 이 vijñapti는 실재하는 외부대상의 측면이 아니라 그것들 이 집적한 화합상으로서 형색(形色)과 같은 인식대상들이다. 여기서는 아직 외부 대상의 존재 자체가 부정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vijñapti를 사역적 의미로 해석한 다고 하여도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상좌 슈리라타의 철학에 따르면 외부 대 상과 인식대상을 구분하고, vijñapti가 외부에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것들의 353) 『阿毘達磨俱舍論』: 汝等經部宗立何為身表。立形為身表。但假而非實。既執但用假為身表。復立何法 為身業耶。若業依身立為身業。謂能種種運動身思。依身門行故名身業。語業意業隨其所應立差別名當知 亦爾。(T29.68c8 - 13) 354) 보다 단순하게는 물질을 표색(表色, vijñaptirūpa)과 무표색(無表色, avijñaptirūpa)으로 나누고, 무 표색을 제외한 모든 물질(색), 즉 10색처를 vijñapti와 동일화하는 방식의 설명을 채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 162 - 화합상인 인식대상으로 한정된다. 상좌 슈리라타의 비판적인 철학적 해석을 따르 면서도 설일체유부 철학체계의 통합성을 재구성해보고자 하였던 세친은 매우 좁 은 길에 들어선다. 상좌는 인식되는 현상세계가 모두 허구적이라는 혁신적인 해 석을 제시하면서도 실재하는 토대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현은 이런 상좌 의 주장을 '공화론자(空花論者)'라거나 '도무론종(都無論宗)에서 단지 한 찰나만 떨어져 있을 뿐이라고 비판하는데,355) 바로 중현이 염려하는 그 한 찰나의 진전 이 『유식이십론』에서 세친에 의해 감행된다. 그리고 바로 그 한 걸음의 진보를 위해서 상좌가 토대로 삼은 극미의 실재성이 부정되어야 할 운명에 놓이게 된다. 10. 삼세실유와 무소연식356) 삼세실유설은 설일체유부의 명칭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학파철학의 정체를 확인시켜 주는 개념인 동시에 타학파의 집중적인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모든 [바른] 인식은 대상을 지닌다(識必有境)'는 유부의 철학적 전제에 따르면, 과거와 미래에 대한 바른 인식이 존재하는 한, 과거와 미래의 어떤 대상이 존재해야 하 는 것이다.357) 그러나 이 명제가 모든 인식이 항상 실재하는 대상을 가진다는 의 미는 아니다. 그것은 바로 자아라고 하는 관념과 같은 것을 통해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즉, 허위에 기반한 허위의 의식들이 있을 수 있는 것이며, 그것들은 모 두 허망한 분별적 사유들이다. 따라서 허망하지 않은 진실한 대상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필요하고, 그것은 일체의 대상세계를 궁극적인 구성요소로 분석하는 작업 을 통해 이루어진다. 설일체유부의 분석에 따르면, 일체 존재는 다섯 범주에 속하 는 총 75종류의 다르마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이제 이 다르마는 확실하게 존재하 는 것이고, 바로 모든 바른 인식은 이 다르마를 대상으로 하는 것들이다. 5종의 다르마는 물질 뿐만 아니라 마음과 정신적 요소들, 그리고 관념적 요소들을 포함 하고 있다. 따라서 설일체유부의 외계실재론은 일방의 유물론이나 관념론과는 전 혀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다. 다르마는 물질적, 심리적, 그리고 어떤 관념적 존재 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355) 『阿毘達磨順正理論』: 以此與彼都無論宗。唯隔一剎那見未全同故。(T29.631a2 - 3) 356) Cf. AKBh 263.6 - 17.; T29.93c23 - 94a20.; 『구사론』, 812.11 - 815.15. 357) 삼세실유설에 대한 개괄적인 연구로는 황정일(2006)을 참고하기 바란다. 황정일 (2006) 「說一切有 部의 三世實有說 硏究: 三世實有說에 대한 世親의 批判과 衆賢의 反論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박 사학위논문. - 163 - '세존께서도 과거와 미래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설하였다는 설일체유부의 경증에 대해서 상좌 슈리라타는 '우리도 과거와 미래를 인정한다'고 맞받아친다. 그러나 비유자-경량부 계통에서 인정하는 과거와 미래는 현재와 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원인과 결과로써 과거에 '있었다'는 사실과 미래에 '있을 것 이다'는 라는 사실을 의미할 뿐이다.358) 상좌 슈리라타와 세친은 현재에 현현하는 찰나적 세계의 배후에 과거, 미래, 현재를 관통하여 존재하는 어떤 대상세계를 상 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비유자-경량부 계통에서 시간을 계기적이고 연속적으로 파악하는 특징과 관련이 있다. 상좌 슈리라타에게 현재는 매 순간의 한 찰나를 의미하고, 그 매 찰나에 존재하는 사태만이 실재이이다. 따라서 과거와 미래의 사 태는 이미 사라졌거나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대상이 다. 물론 과거와 미래의 대상들도 사유의 대상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실재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 찰나에서 과거에 대한 회상이나 미래 에 대한 관찰과 같은 형태로만 존재할 수 있다. 이처럼 현재 찰나에 실재하지 않 는 대상에 대한 인식을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난 의 식(緣無境識)'이라 한다.359) 만약 다르마가 단지 인식대상이 될 뿐이라고 한다면, 나는 과거와 미래도 역시 인식대상이 된다고 말한다. 만약 그것이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인식대상이 되겠는가? 나는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 인식대상이 되는 것과 같다 고 말한다. 어떻게 인식대상이 되는가? 이를테면 '있었다'거나 '있을 것이다'와 같은 것이다...... 만약 현재와 같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마땅히 현재가 될 것이 다. 그러나 만약 그 자체가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땅히 비존재 를 조건으로 해서 의식이 존재한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360) 계시(繼時)적 시간의 연장 속에서 현재의 실재성만을 인정하는 비유자-경량부에게 과거와 미래는 인과적으로 현재와 연결된 사태들에 대한 추론적이고 가설적인 성 358) 『阿毘達磨俱舍論』: 又彼所言世尊說故。去來二世體實有者。我等亦說有去來世。謂過去世曾有名有。 未來當有。有果因故。依如是義說有去來。非謂去來如現實有。(T29.105b4 - 7) 359) 『구사론』, 919.; Cf. 권오민 (2007); (1994), 272 - 282. 360) 『阿毘達磨俱舍論』: 若法但能為所緣境。我說過未亦是所緣。若無如何成所緣境。我說彼有如成所緣。 如何成所緣。謂曾有當有。非憶過去色受等時。如現分明觀彼為有。但追憶彼曾有之相。逆觀未來當有亦 爾。謂如曾現在所領色相。如是追憶過去為有。亦如當現在所領色相如是逆觀未來為有。若如現有應成現 世。若體現無。則應許有緣無境識。(T29.105c3 - 11).; Cf. AKBh V.27 (299.25): atha nāsti | asad apy ālambanaṃ bhavatīti siddham | - 164 - 격을 띠게 된다.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 지금 인식의 대상이 되고 있는 과거는 비존재이고, 그런 비존재를 인식대상으로 하여서 인식이 발생한다는 결론에 도달 한다. 결국 삼세실유론의 부정은 비존재에 대한 인식가능성이라는 비유자-경량부 의 해석적 지평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비존재는 인식이 발생하는 찰나에 그에 상응하는 외부대상(소연경)의 비존재를 의미하는 것일 뿐이지, 과거의 기억 이나 미래의 관찰과 같이 현재에 인식을 발생시키는 인식대상의 비존재를 의미하 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해서 상좌 슈리라타와 세친은 설일체유부의 삼세실유설 을 부정하고, 현재 한 찰나의 실재성과 과거, 미래의 비존재로 전환한다.361) 상좌 슈리라타와 세친의 존재론에서 현재의 한 찰나로 축소된 대상세계의 실 재성은 궁극적으로 물질(色)과 마음(心)의 이원적 체계로 단순화한다. 상좌 슈리라 타는 5위의 체계에서 물질적 범주(색법)와 심리적 영역(심심소)의 일부만을 실재 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나머지는 모두 가설적이고 허구적인 존재로 해석하였다. 상좌의 주장에 따르면, 조작되거나 만들어진 것이 아닌 무위법(無爲法)은 유위(有 爲)의 소멸을 의미할 뿐이지,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결과 상좌는 현재에 실재하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인식도 가능하다(무경각론)'는 명제에 도 달하였다. 이것은 이후 '인식은 외부 대상을 가지지 않는다(유식무경)'는 유식적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중간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한다. 경량부 논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일체의 무위는 모두 물질(색)이나 감 각(수) 등과 같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의 사태가 아니다. 그것이 비존재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허공 등이라 이름하는가? 단지 접촉하는 바가 없는 것을 이름하여 허공이라 한다."362) 설일체유부는 무위법으로 허공, 택별, 비택멸 3종의 다르마를 상정한다. 허공은 변화하고 저항을 가지는 모든 물질(색)들이 점유하는 공간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361) 신유부의 중현은 전통적인 유부의 해석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다. 『순정리론』에서는 삼세에 실유한 다는 말은 현재에 있는 감각주체(오식신)가 삼세를 모두 지각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생명체들의 지각 은 오직 한 찰나의 현재에 국한될 뿐이다. 중현(衆賢, Sanghabhadra)은 『순정리론』에서 경전에서 설한 것은 "과거, 미래, 현재의 안식에 의해 인식된 색에 대해" 말한 것이지, "안식이 능히 과거와 미 래[의 색]을 지각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설명한다. Cf. 『순정리론』, 189. 362) 『阿毘達磨俱舍論』: 經部師說。一切無為皆非實有如色受等別有實物。此所無故。若爾何故名虛空等。 唯無所觸說名虛空。(T29.34a12 - 15) AKBh II.55 (92.3 - 5): sarvamevāsaṃskṛtam adravyam iti | sautrāntikāḥ — na hi tad rūpavedanādivat bhāvāntaram asti | kiṃ tarhi ? spraṣṭavyābhāvamātram ākāśam | - 165 - 경량부 계통의 철학에서 허공은 실재하는 공간성이 아니라 단지 물리적으로 접촉 하는 것이 없는 것을 뜻한다. 즉 어떤 것의 존재가 아니라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지시하는 것이다. 이제 허공(虛空, ākāśa)은 ‘허공이라는 다르마’의 존재가 아니라 ‘어떤 것의 공(空, śūnya)’으로 해석된다.363) 문제의 심각성은 같 은 무위법에 포함되는 택멸과 비택멸의 부정이 주는 충격에서 야기된다. 택멸은 불교의 핵심적인 교설인 4제, 즉 고 집 멸 도의 힘에 의한 번뇌의 소멸을 의미하 고, 비택멸은 아직 현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택멸할 필요도 없는 무위(無爲)의 다 르마들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경량부 상좌의 주장은 열반(涅槃, nirvāna)은 어 떤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 즉 고통이 소멸한 상태’를 의미할 뿐 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경전의 뜻은, 마치 등불의 열반이 다만 등불의 불꽃이 사라진 것일 뿐 그 밖의 별도의 실유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세존께서는 마음의 해탈을 획득한 것도 다만 온갖 온(蘊)이 소멸하여 더 이상 존재하지 않 는다는 사실을 설한 것이다.364) 열반이란 등불이 꺼지는 것을 '등불의 소멸'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온갖 온(蘊)이 소멸하여 비존재가 된 상태를 지칭하는 것일 뿐, 별도의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즉 해탈은 번뇌에 대하여 그것의 소멸이라는 부정적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을 뿐이지, 어떤 긍정적 방식으로 그 존재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 다. 이것은 열반이나 깨달음의 어떤 궁극적인 상태나 존재를 상정하고자 하는 실 재론자들에게는 충격적인 선언이었음에 틀림없다. 경량부의 상좌 슈리라타는 여기 서 더하여 심법과 심소법을 별도의 존재로 보지 않고, 동일한 마음의 계기적 사 태로 이해하였다. 또한 심불상응행의 다르마들도 가설적인 존재로 해소해 버린다. 결과적으로 상좌 슈리라타에게는 물질(색법)과 마음(심법)만이 최종적으로 실재성 을 인정받는다. 그러나 인식의 측면에서 대상이 없는 인식이 가능하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의 363) 타공설적 개념의 등장, 즉 공(空)이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대상의 공(空)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떤 x 의 공(空)이라는 것은 ‘어떤 것 y에 x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련하여 자공(自空, rang stong)과 타공(他空, zhan stong)개념에 관한 논의를 위해서는 안성두(2011)를 참고하기 바란다. 안성두 역 (2011), 53 - 64. 364) 『구사론』, 312.; 『阿毘達磨俱舍論』: 此經意說。如燈涅槃唯燈焰謝無別有物。如是世尊心得解脫。唯 諸蘊滅更無所有。阿毘達磨亦作是言。(T29.35a1 - 3) - 166 - 실재성을 입증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대상 자체는 그와 별도로 삼세에 실재할 수 도 있는 것이 아닐까? 세친은 이런 관점에서 극미의 취집과 산란으로 과거와 삼 세의 물질의 상태를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었음을 전한다. (1) [만일] 바로 그것은 [물질(색)]의 산란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렇지 않다. 산 란[한 것]은 파악되지 않기 때문이다. (2) 만약 [미래와 과거의] 물질(색) 그것은 단지 [현재의] 물질(색)이 개별적인 각각의 극미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라고 한다 면, 그 때에 극미들은 상주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또한 (3) 그와 같이 극미의 화 합(samcaya)과 분해(vibhāgam)만이 획득된다면? 그것은 발생하는 것도 소멸하 는 것도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명외도(邪命外道, ājīvikavāda)를 지지하는 것 이다.365) 세친은 이미 기세간의 최후에 극미들의 소멸에 대한 논란에서 극미의 상주성을 부정한 바가 있다. 기세간의 최후는 시간의 흐름에서 특수한 한 지점이라면, 지금 본문은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적 흐름과 그것의 실재성 여부에 대한 질문을 다 루고 있다. 전통적으로 설일체유부는 존재상태(位, avasthā)의 변화에 따라 시간 을 구분한다는 위부동설(位不同說)을 정설로 한다.366) 본문에서 첫 번째로 소개되 는 극미의 산란과 상주성의 아이디어는 니야야학파의 극미설에 기반한 것으로 보 인다.367) 그러나 이곳에서 세친이 비판하는 세 가지 관점은 아비다르마 학파들을 365) AKBh V.27 (299.25 - 300.4): tad eva tadvikīrṇam iti cet | (300) na | vikīrṇasyāgrahaṇāt / yadi ca tat tad eva rūpaṃ kevalaṃ paramānuśo vibhaktam | evaṃ sati paramāṇavo nityāḥ prāpnuvanti | paramāṇusaṃcayavibhāgamātraṃ caivaṃ sati prāpnoti | na tu kiṃcid utpadyate nāpi nirudhyata ity ājīvikavāda ālambito bhavati | 366) 권오민 (1994), 184 - 199. 367) 『니야야수트라』와 바챠야나의 주석은 모두 기세간이 완전히 붕괴되는 때에도 원자의 존재는 남게 된다고 주장한다. 원자의 부정은 완전한 존재의 소멸로 이어지고, 그것은 기세간의 생성과 소멸의 연 속이 불가능하게 한다. Cf. NyS 4,2.16: na pralayo 'ṇusadbhāvāt || avayavavibhāgamāśritya vṛttipratiṣedhād abhāvaḥ prasajyamāno niravayavāt paramāṇornivartate na sarvapralayāya kalpate| niravayavatvaṃ khalu paramāṇorvibhāgairalpataraprasaṅgasya (abhāvāt) yato nālpīyastatrāvasthānāt| 『니야야수트라』의 본문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위해서는, Gangopadhyaya (1980), 126 - 127을 참 조하기 바란다. NyS 4,2.16: 원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완전한 소멸은 아니다. 부분과 분해의 토대가 성립하는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지금 그것과 관련된 비존재, 즉 일체 존재의 소멸(pralaya)은 발생하기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극미는 부분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 167 - 염두에 둔 것이다. 첫 번째는 개별적인 극미가 감각기관을 초월해 있다는 아비다 르마 철학의 공통적 전제에 대한 것이다. 극미는 항상 함께 모여서 존재하며, 오 직 함께 모여있을 때에만 감각기관의 지각대상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흩어져 있 는 개별적인 극미는 지각될 수 없다. 그렇다면 극미들이 흩어진 상태가 물질(색) 의 과거나 미래라는 설명은 과거나 미래가 인식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두 번째 주장은 과거와 현재의 물질(색)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극미들이지만 현재는 그것들 이 어떤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고, 과거와 미래는 결합이 끊어져 있는 (vibhakta) 상태이다. 여기에서 ‘끊어져 있는’ 혹은 ‘나누어져 있는’은 첫 번째의 ‘흩어져 있는’ 상태와는 구분된다. 흩어져 있는 것은 다수의 극미들이 개별적으로 어디에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 반면 결합이 ‘끊어져 있는’ 극미들은 같은 장소에 함께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개별적인 머리카락이 함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 다. 그러나 그것들은 결합한 상태는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방식의 설명을 ‘다수 의 극미가 함께 있는 상태’ 즉 고전적 설일체유부의 취집 개념인 saṃghāta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다수가 결합하지 않고 함께 있는 방식은 결합에 의해 지각대 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 뿐만 아니라 개별극미들의 상주성을 주장하게 되 는 결과에 빠질 것이라는 것이 세친의 비판이다. 세 번째는 ‘화합과 분해만’이 현 상적 존재와 비존재를 설명한다는 주장이다. 세친은 이것을 쟈이나에 귀속된 아 지비카의 주장으로 설명한다. 쟈이나에서 실체인 극미는 속성이 없고 상호구분할 수 없는 가장 미세한 물질의 구성요소이며, 모든 현상과 속성은 극미들이 특정한 수와 배열에 의해 만들어내는 것이다.368) 쟈이나의 교설에서 물질은 인식과 영혼 의 완성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이러한 관점은 감각기관에 의한 지각의 한계를 명확히 하는 상좌 슈리라타의 입장과도 유사하기 때문에 본문에서 결합의 방식으 로 사용된 samcaya가 주목된다. 그러나 이곳에서 세친은 아지비카에 대해 발생 하고 소멸하는 것을 부정하는 자들도 비판하고, 이어서 대상을 가지지 않는 인식 의 가능성을 논증한다. 본문의 비판을 통해서 세친은 한편으로 상좌의 견해에 따 라 외부에 실재하지 않는 현상의 발생과 소멸에 대한 인식을 긍정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그것을 단지 허구적이라고 이해한 상좌의 견해에 일정한 비판의 자세를 노정한 것으로 평가된다. 결론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는 인식이 반드시 대상을 가진다는 인식론 무방분의 성질은 극미가 더 작게 분해되는 방분[을 갖는다는] 모순이 없다는 것이다. 그처럼 거기에 는 더 작은 상태가 없기 때문이다. 368) 뿔리간들라 (1991), 41 - 42. - 168 - 적 측면에서의 해명도, 물질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요소인 극미들이 존재하는 양 태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는 몇 가지 해석들도 모두 부정된다. 특히 본문에서는 비실재하는 대상에 대한 인식을 논증하면서, 외부에 실재하는 대상과 인식대상을 구분하고 있다. 과거와 미래는 인식대상으로는 인정할 수 있지만 실재하는 대상 은 아니다. 그런데 현재에 현현하는 인식대상은 항상 극미들이 화합(saṃcita)이 라는 것이 상좌 슈리라타와 세친의 공통된 견해이다. 상좌 슈리라타는 감각지각 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극미의 실재성을 존재론의 토대로 삼고 있다. 그러나 세친 은 이곳에서 개별극미들의 상주성을 강하게 부정함으로써 극미실재성에 대한 도 전을 시작하는 것으로 보인다. 11. 대상과 지각: 이제(二諦)설의 관점에서369) 대상과 지각의 직접성에 관한 견해의 차이는 진리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이어진 다. 설일체유부의 중현은 세속제(世俗諦)와 승의제(勝義諦)라는 이원적 진리의 층 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온(蘊), 처(處), 계(界)가 존재론적 층위를 달리함에 도 불구하고 모두 실재하는 것으로 인정하였던 설일체유부 해석적 관점의 연장이 라고 할 수 있다. [주장] 모든 세속제는 승의의 이치에 근거한 것이다. [문] 그렇다면 세속은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 다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마땅히 ‘제’는 오로지 한가 지라고 해야 할 것이며,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제’는 마땅히 두 가지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답] 이에 대해서는 결정코 “존재한다”고 판별하여 말해야 할 것이[다].370) 중현은 세속제도 승의의 진리에 근거한다고 전제한다. 이것은 세속적 진리가 승 의의 진리와 진리라는 점에서 연속성을 지닌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세 속적 존재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할 때, 그것은 승의적 차원에서의 존재와 진 리의 관점에서 연속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세속제와 승의제 의 구분은 불필요한 것이 된다. 반대로 세속적 존재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369) Cf. AKBh 299.21 - 300.8.; T29.105b26 - c23.; 『구사론』, 918.18 - 921.1. 370) 『순정리론』, 2698.; 『阿毘達磨順正理論』: 諸世俗諦依勝義理。世俗自體為有為無若言是有諦應唯一。 若言是無諦應無二此應決定判言是有. (T29.667a9 - 11) - 169 - 면, 세속제라는 말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세속과 승의의 2제(諦)를 설하는 이유 는 바로 “승의제 중의 일부를 별도의 이치에 의해 세속제로 설정한 것일 뿐, 그 자체로 말미암아 세속제로 설정한 것은 아니다.”371) 이같은 중현의 주장은 존재 의 궁극적 기본요소인 극미와 극미들이 집적하여 만들어진 소조색(所造色) 혹은 입처(入處) 등의 실재성을 옹호하였던 설일체유부의 기본입장을 반영한다. 중현은 실제로 2제(諦)에 대한 논의 맥락에서 바로 온처계 3과(科)의 실재성에 대해 다시 언급하고 있다.372) 따라서 궁극적 존재에 대한 실재성이 확보되면 그것에 근거를 두고 있는 존재들의 실재성도 확인된다는 관점이야말로 극미의 실재성에 대한 탐 구의 동인(動因)이 되는 것이다. 개별적인 극미들이 집적하여 만들어진 화합물 가운데는 (1) 파괴되어 세분될 수 있는 것과 (2) 사유에 의해 분석되어 제거되는 것의 두 종류가 있을 수 있는 데, 이런 것들을 일러서 세속적 존재라고 한다. 세속적 존재들은 파괴되지 않았을 때 명칭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세속적 차원에서 지금 여기에 항아리가 존재한다면, 그것을 세속적 진리라고 하는 것이다.373) 이에 반해 승의적 진리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분석되었을 때에도 그것에 대한 인식(buddhi)이 그대로 존재하고, 사유에 의해 (buddhyā) 다른 다르마가 제거되었을 때에도 존재하는 바로 그것이 승의적 존재이다. 예를 들어 물질(색, rūpa)이 분석되어 개별적인 극미(pramāṇuśaḥ) 로 되었을 때 그리고 사유에 의해서 물질(색)의 맛(味, rasa) 등의 다르마들이 제거되어도 물질(색)의 자성에 대한 인식(buddhi)이 존재하는 바로 [그 것]이 다.374) 본문을 통해 확인되는 첫 번째 승의적 진리는 어떤 사물을 쪼개었을 때에도 그것 371) 『순정리론』, 2699.; 『阿毘達磨順正理論』: 既爾何故立二諦耶 即勝義中依少別理。立為世俗非由體 異。(T29.667a15 - 16) 372) 『순정리론』, 2689. 온갖 유(有)로서 선설한 온(蘊)․처(處)․계(界) 등과 상응하는 언교는 다 승의제에 포섭되니, 이는 제법의 실상(實相)을 드러내어 분별하기 위한 것으로, 일합(一合)이라는 관념[想]과 유 정(有情)이라는 관념 등을 파괴(破壞)하여 능히 참된 이치[眞理]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제’라고 이름하였다.; 『阿毘達磨順正理論』: 諸有宣說蘊處界等。 相應言教皆勝義攝。 此為詮辯諸法實相。 破 壞一合有情想等。 能詮真理故名為諦。(T29.665c25 - 27) 373) 『순정리론』, 2691.; 『구사론』, 1013. 374) AKBh VI.4 (334.7 - 9): tatra bhinne 'pi tadbuddhir bhavaty eva, anyadharmāpohe 'pi buddhyā tat paramārthasat | tadyathā rūpam | tatra hi paramāṇuśo bhinne vastuni rasādīnapi ca dharmān apohya buddhyā rūpasya svabhāvabuddhir bhavaty eva | - 170 - 에 대한 인식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경우이다. 물질적 존재를 분석하였을 경우 가 장 미세한 기본단위인 극미에 도달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맛을 가진 물질, 이를 테면 소금에서 짠맛을 제거한 후에도 그것의 흰색은 여전히 남아서 인식될 때 그 것이 승의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세친은 인식(buddhi)이라는 용 어를 선택하고 있다. 설일체유부의 경우에는 인식은 반드시 대상을 수반하기 때 문에 인식은 감각지각과 차이가 없으며 대상의 존재를 전제한다. 또한 물질적 존 재와 심리적, 관념적 존재의 존재범주를 모두 실재하는 것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물질적 존재와 인식적 존재를 모두 실재하는 것으로 수용할 수 있다. 그러나 상 좌 슈리라타의 입장에서는 개별적 극미들은 실재하는 것으로 인정하는 반면에 인 식적 차원의 개념적 존재들은 가설적인 것으로 판단하며, 외부의 대상을 가지지 않은 인식도 가능한 것으로 주장한다. 따라서 대상에 대한 인식(buddhi)이 존재 한다는 것이 대상의 실재성을 보증하는 것도 아니며, 인식을 승의적 진리로 인정 하는 것은 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개별적 극미들이 가지는 실재성과 그것 이 승의적 차원에서 진리라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세친은 설일체유부의 2 제설에 대한 분석에 바로 이어서 선대궤범사의 2제설을 소개한다. 출세간의 지(智)와 아울러 그 후에 획득한 세간의 정지(正智)에 의해 파악된 제 법과 같은 것을 승의제라고 이름하며, 그 밖의 지에 의해 파악된 제법과 같은 것을 세속제라고 이름한다.375) 선대궤범사는 서방의 경량부 계통에 속하는 세친의 스승으로, 세친 당시에는 서 방의 경량부와 비유자-경량부 계통의 상좌 슈리라타의 사상이 결합하거나 또는 동일한 철학적 지평에 속하는 학파로 여겨진 것으로 보인다.376) 따라서 선대궤범 사의 승의제에 대한 해명도 넓은 의미에서 경량부 계통의 합리주의적 관점을 반 영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개별적인 극미들은 감각지각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감각지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승의적 존재들은 감 각지각의 영역에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간을 떠난 지혜(jñāna)나 무 루의 선정(禪定)에서 출정(出定)한 이후에 획득하는 지혜에 의해서 확인되는 것이 다. 이와 같은 차원의 지혜가 아닌 사유에 의해 파악된 일체의 존재는 모두 세속 375) 『구사론』, 1013.; 『阿毘達磨俱舍論』:先軌範師作如是說。如出世智及此後得世間正智所取諸法名勝義 諦。如此餘智所[9]聚諸法名世俗諦。(T29.116b26 - 28) 376) 권오민 (2012), 890 - 959. - 171 - 제이다. 이는 아주 제한된 영역의 인식을 통해 획득된 지혜를 제외하고 일체 사 물에 대한 인식은 세속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12. 4념주수행과 극미377) 극미와 연관된 『구사론』의 논변에서 마지막으로 극미 개념이 언급되는 부분이 4념주 수행에 관한 것이다. 4념주 수행은 신(身), 수(受), 심(心), 법(法)을 자상(自 相)과 공상(共相)의 측면에서 관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자상과 공상은 불교인식론에서 대상의 인식과 관련된 개념이 아니라 4념주라는 수행의 범주에 한정된 설명이다. 다시 말해 이곳에서 자상이란 신, 수, 심, 법이 각기 차별성을 갖는 별도의 념주라는 것이고, 공상은 네 가지 염주가 모두 가지고 있는 공통적 인 성질인 비상(非常), 고(苦), 공(空), 무아(無我)를 의미한다.378) 그런데 몸(身)의 자성은 대종과 소조색이다.379) 앞에서 8사구생의 논의를 통해 대종과 소조색을 통한 물질의 구성 문제와 4대종이 극미 개념과 통합되는 과정을 고찰하였다. 따 라서 몸의 자성을 관찰한다는 것은 몸을 이루는 4대종과 소조색을 정확하게 파악 하는 것이며, 4대종과 소조색을 관찰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몸을 이루는 극미들 을 관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친은 바로 이 점을 주장하였던 아비다르마 논사 의 주장을 '전설(傳說, kila)'로 소개하고 있다. 이는 보통 세친이 동의하지 않는 주장을 소개할 경우에 사용하는 용어이다. 전설에 의하면, 선정에 든 자가 개별적인 극미들과 찰나의 관점에서 몸을 관찰 하는 것을 신념주가 원만하게 성취되었다고 한다.380) 앞서 선대궤범사의 주장에서 본 바와 같이 경량부 계통에서 극미와 같은 궁극적 실재는 출세간지 혹은 후득지(後得智)에 의해 파악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는 선정에서 개별적인 극미들을 관찰할 수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양 자의 입장 차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문을 통해 일군의 4념주 수행자들이 377) Cf. AKBh 341.9 - 16.; T29.118c21 - 29.; 『구사론』, 1033.6 - 1034.3. 378) 『阿毘達磨俱舍論』: 如何修習四念住耶。謂以自共相觀身受心法。身受心法各別自性名為自相。一切有 為皆非常性。一切有漏皆是苦性。及一切法空非我性名為共相。(T29.118c21 - 24) 379) AKBh VI.14cd (341.13): kāyasya punaḥ kaḥ svabhāvaḥ | bhūtabhautikatvam | 380) AKBh VI.14cd (341.13 - 14): sāmāhitasya kila kāyaṃ paramāṇuśaḥ kṣaṇikataś ca paśyataḥ kāyasmṛtyupasthānaṃ niṣpannaṃ bhavati | - 172 - 몸을 구성하는 가장 미세한 기본 단위인 극미에 대한 관찰까지를 관찰의 목표로 설정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상좌 슈리라 타와 세친 등의 관점에서는 극미를 관찰하는 것, 즉 '보는 것'(paśyataḥ)은 불가 능하다. 그것은 감각기관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추론의 대상일 뿐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서 세친에 『구사론』에서 자신의 철학적 관점을 피력하는데 극미개념을 매우 긴요하게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세친의 극미해석은 개별극미와 극미의 화합에 대하여 중현과 상좌 슈리라타를 선별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12처설에서 보듯이 개별극미와 집적에 모두 실재성을 부여하지만, 극미들의 화합상이 개별극미와는 별개의 형상을 지닌다는 상좌 슈리라타의 해석을 따른다. 그는 또한 외부의 대상과 인식대상을 구분하는 상좌의 입장을 수용하지만, 경험 주의적 관점에서 인식대상에 보다 주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도 덕적 행위와 과보의 문제, 수행의 문제에 관한 철학적 해명에서도 극미개념을 분 석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극미개념이 대상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 에서, 대상에 대한 인식, 수행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방면에서 기본요소이자 분석의 도구로 기능하였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4장. 극미부정의 논리와 『유식이십론』의 철학 1절. 대승불교철학에서 극미 부정 극미부정의 논증은 소위 소승과 대승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었던 법무아(法無 我, dharmanairātmya)의 확립을 위한 철학적 근거의 확보라는 점에서 초기 대 승불교 철학의 핵심적인 주제로 부상하였다. 설일체유부 등 상좌부계통의 학파들 은 인무아(人無我, pudgalanairātmya)확립과 물질적 존재의 실유성(法有)의 논증 에 주력하였으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극미의 실재성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였 다.381) 반면 소위 대승불교는 자아의 부정을 인무아와 법무아로 명확히 구분하고, 무아(無我)의 범주를 유부의 5위 75법이나 12처, 18계와 같은 일체의 대상세계로 확대하여 법무아를 확립하는 것을 학파적 특성으로 삼았다.382) 따라서 일체 대상 세계의 실재성 문제는 상좌부 계통의 불교와 북방 대승불교의 정체성을 판가름하 는 논쟁의 중심으로 진입하게 된다. 법무아 사상은 초기 대승사상의 토대를 이루 는 『반야경』계 경전에서 강조되었으며, 그것을 극미부정의 논리로 전개한 것은 381) 극미개념이 초기불교에 낯선 외래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중현은 불교전통 안에서 경증(經證)과 이 증(理證)을 제시한다.; 『阿毘達磨順正理論』: 以何為證知有極微。以阿笈摩及理為證。阿笈摩者。謂契經 說。諸所有色。或細或麁。細者謂極微。更不可析故。餘有對色。說名為麁。(T29.522a12 - 15) 무엇에 근거하여 극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게 된 것인가? 『아급마』(阿笈摩)와 정리(正理)에 근거하 여 알게 되었다. 먼저 『아급마』에 근거하였다고 함은, 이를테면 계경에서 “존재하는 온갖 색으로서 혹은 미세하거나 혹은 거칠거나....”라고 설한 것을 말한다. 권오민(1994)은 여기서 언급한 『아급마』로 『장아함경』 제 55경의 구절을 예를 들었다. 『雜阿含經』: 若所有諸色,若過去、若未來、若現在,若內,若外,若麤、若細,若好、若醜,若遠、若近,彼一切總 說色陰. (T02, 13b15 - 17). 사실 『잡아함경』에는 물질(색)의 무아(無我)성을 설하는 부분에서 앞의 본문과 평행을 이루는 텍스트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잡아함경』22경, 23경, 24경, 25경, 33경, 34경, 110경, 120경, 121경, 261경, 265경 등등). 『잡아함경』에서 해당 본문들이 거의 대부분 (인)무 아의 증명에 대한 근거로 등장하고 있다. 382) 인무아와 법무아가 병렬적으로 등장하는 경론은 거의 대승경론에 한정될 뿐만 아니라 『능가경』이나 무착의 저술로 알려져 있는 『金剛般若波羅蜜經論』과 같은 유식계 혹은 유식논사들의 문헌에서 주로 등장한다. 세친은 『유식이십론』을 저술하면서 12처설 비판을 인무아의 가르침, 극미설 비판을 법무아 를 확립을 위한 이론적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유식삼십송』의 주석을 쓴 안혜는 주석의 첫 문장 에 저술의 목적을 '인무아와 법무아를 가르치기 위한 것'으로 단언한다. TrBh (15.2 - 3): pudgaladharmanairātmyayor apratipannavipratipannānām aviparītapudgaladharmanairātmyapratipādanārthaṃ triṃśikāvijñaptiprakaraṇārambhaḥ | 인무아와 법무아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거나 잘못 이해하는 이들에게 전도되지 않은 인법무아(人法 無我)를 가르치기 위하여 『유식삼십론』(triṃśikāvijñaptiprakaraṇā)을 시작한다. - 174 - 나가르주나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대품반야경』의 주석서인 『대지도론』에 서 처음 등장한다. 1. 『대지도론』의 극미설 전승에 의하면 『대지도론』은 나가르주나(Nāgārjuna)에 의해 저술되었으며, 구 마라집(鳩摩羅什, Kumārajīva, ca. 344 - 413)에 의해 한역되었다.383) 그러나 『대지도론』의 저자문제는 아직 확정되지 못하고 있다.384) 한역자인 구마라집은 후량(後涼)에서 16 - 17년 가량 머문 후에 후진(後秦)의 왕 요흥(姚興)에 의해 401년 12월에 장안(長安)으로 들어갔다. 그는 요흥의 적극적인 후원하에 입적할 때까지 방대한 번역활동을 하였는데, 『대지도론』도 이 기간에 번역되었다. 따라서 『대지도론』에 등장하는 극미설 혹은 극미부정설의 하한선은 구마라집이 후량으로 들어가기 이전 즉 약 380년 무렵으로 추정할 수 있다. 383) Lewis Lancaster ed. (1979) The Korean Buddhist Canon: A Descriptive Catalogue.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81. “[Mahāprajñāpāramitāśāstra was] translated by Kumārajīva: begun in the summer of the 4th year of Hung Shih (弘始) and completed on the 27th day, 12th month, 7th year of Hung Shih (弘始), Later Ch'in dynasty (後秦) (A.D. 402 - February 1st A.D. 406) in Hsiao-yao Garden (逍遙園).”; Cf. 『大智度論』: 究摩羅耆 婆法師,以秦弘始三年歲在辛丑十二月二十日至長安,四年夏,於逍遙園中西門閣上為姚天王出此釋論, 七年十二月二十七日乃訖。其中兼出經本、禪經、戒律、百論、禪法要解,向五十萬言,并此釋論一百五 十萬言。論初品三十四卷,解釋一品,是全論具本;二品已下,法師略之,取其足以開釋文意而已,不復 備其廣釋。得此百卷,若盡出之,將十倍於此。(T25. 756c9-18) 384) Lamotte (2001). 라모트(Lamotte)는 그의 기념비적인 『대지도론』연구에서 저자를 서기 4세기 초 설일체유부로 출가하여 이후에 대승으로 전향한 서북인도 출신의 학승으로 추정하였다. 라모트는 자 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1) 『대지도론』 22권에서 인용하는 「파아품」이 나가르주나의 제자였던 아리 야데바(Āryadeva)가 저술한 『사백론』 (Catuḥśataka)의 「파아품」이라고 판단되고, 2) 나가르주나는 남인도 출신임에 반해 『대지도론』에서 거론되는 활동무대는 서북인도지역이기 때문에 나가르주나를 저자로 보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으며, 3) 저자가 나가르주나라면, 자신을 일종의 명예칭호인 고좌(高 座)Kao tso로 칭하는 것은 어색하다는 등(pp. 390 - 391)의 이유를 제시하였다. 반면 구마라집의 한 역본에는 구마라집의 어의해석이나 주장의 삽입이 자주 발견되기 때문에, 구마라집이 개작 혹은 직접 저술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 코가쿠 타께다(武田 浩学)가 다시 나가르주나의 진 찬 가능성을 옹호하는 견해를 제시함으로써, 『대지도론』의 저자문제는 여전히 미확정 상태로 남아있 다. 武田浩学(Kohgaku Takeda) (2003) 『大智度論』の著者はやはり龍樹ではなかったのか : その独自 の般舟三昧理解から羅什著者説の不成立を論ずる. (國際佛敎學大學院大學) 『硏究紀要』. Vol.3, 211 - 244. 『대지도론』의 저자 문제는 『한글대장경』 『大智度論』 서울: 東國譯經院, (1994), 9 - 29.에서 비 교적 상세히 다루고 있다. - 175 - 1) 물질(색)의 비실재성 『대지도론』은 존재(有)를 세 가지 종류로 설명한다. 첫째는 서로 짝을 이루는 상반된 개념적 존재(相待有)이고, 둘째는 가설적인 명칭으로의 존재(假名有), 셋째 는 다르마의 존재(法有)이다. 상대유는 이분법적 분별에 의한 관념만이 있을 뿐 어떤 실재성도 지니지 못하는데 (此皆有名而無實也), 색, 향, 미, 촉 등의 감각정 보도 제공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가명유와도 구분된다.385) 가명유란 그 자신의 고 유한 속성(自性, svabhāva)을 가지는 다르마의 존재는 아니지만, 여러 가지 원인 과 조건을 토대로 가지기 때문에 비존재와는 구분된다. 가설적 존재라는 것은 요거트와 같은 존재로써 색, 향, 미, 촉을 가진 것이며, 4가지 감각정보의 원인과 조건이 화합하였기 때문에 가설적으로 이름하여 요 거트라고 한다. 비록 존재한다고는 하지만, 원인과 조건이 되는 다르마의 존재 와는 같지 않고, 비록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토끼뿔이나 거북의 털과 같은 것이 비존재인 것은 아니다. 단지 원인과 조건의 화합[에 의해 발생한 것 이기] 때문에 가설적으로 이름하여 요거트라고 하는 것이다.386) 가설적 존재는 그것의 불변하는 자성을 파악할 수 없으며, 어떤 단일한 원인이나 조건에 귀속시킬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지각에 포착되는 사태들이다. 그것은 요거트와 같이 색, 향, 미, 촉의 네 가지 기본적인 감각정보를 통해 파악 되는 것이며, 여러 가지 원인과 조건이 화합하여 일시적으로 나타난 현상에 대한 이름이다. 따라서 그것은 토끼뿔과 같이 완전히 허구적인 존재와는 구분된다. 가 설적 존재는 비록 항구불변의 자성을 지니지는 않지만, 사태의 토대를 가지고, 감 각경험에 의해 포착되는 현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설적 존재를 비 존재와 구별시키는 것이 색, 향, 미, 촉의 감각정보라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결 국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는 것은 이 감각정보에 국한되어 있으며, 따라서 우리들 이 경험하는 세계는 가설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경험되는 세계는 실재 하는 것도 아니지만, 비실재하는 것도 아니다. 『대지도론』에서 구마라집은 대부분 원자를 미진(微塵)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385) 『大智度論』: 復次,「有」,有三種:一者、相待有,二者、假名有,三者、法有。相待者,如長短、彼 此等,實無長短,亦無彼此,以相待故有名。長因短有,短亦因長;彼亦因此,此亦因彼;若在物東,則 以為西,在西則以為東;一物未異而有東、西之別,此皆有名而無實也。如是等,名為相待有,是中無實 法,不如色、香、味、觸等。(T25.147c5 - 12) 386) 『大智度論』: 假名有者,如酪有色、香、味、觸,四事因緣合故,假名為酪。雖有,不同因緣法有;雖 無,亦不如兔角、龜毛無;但以因緣合故,假名有酪. (T25.147c12 - 15) - 176 - 오직 12권에서만 극미(極微)라는 번역어가 등장한다. 따라서 이 번역이 ‘가장 미 세한 원자’를 의미하는 극미(極微, paramāṇu)를 뜻하는 것인지 혹은 ‘가장 미세 한’(parama-sūkṣma)이라는 수식어 혹은 술어로 사용된 것인지는 분명하지가 않 다. 그러나 다양한 원인과 조건이 화합하여 조대한 물질을 구성해 가는 가장 기 본적인 단위로 색, 향, 미, 촉의 네 가지 감각대상을 들고, 그것에 ‘가장 미세한’ 혹은 ‘극미’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는 사실은 분명하다. 의복이라는 조대한 물질 은 궁극적으로 이 네 가지 ‘가장 미세한’ 감각대상들이 인연화합한 결과물이다. 만약 ‘가장 미세한’ 색, 향, 미, 촉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조대한 세계의 구성과 경험도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387) 『비바사론』에서 네 가지 감각대상은 4대소조에 해당하고, 그것들은 지, 수, 화, 풍의 4대를 구성요소로 한다. 이에 따르면 『대지도론』의 ‘가장 미세한’ 감각 대상들은 실제로는 더 작은 부분으로 분석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대 지도론』의 미진(微塵, 원자)은 더 작은 부분들을 구성요소로 가진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만일 색, 향, 미, 촉 등을 더 이상 쪼갤 수 없고 부분을 갖지 않는 ‘가장 미세한 기본단위’로서 본다면, 4대(大)에 토대를 둔 극미개념과는 달리 감각대상 에 토대한 전혀 다른 물질개념이 상정되는 것이다. 대론자는 일체의 만물이 인연 을 따라 존재한다고 하면, 원자도 인연화합에 의해 존재해야 하고, 그렇다면 원자 도 원인과 조건을 이루는 구성요소들의 부분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모순이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문] 일체 사물이 인연을 따라 화합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극미가 극히 미세하게 되어 부분을 가지지 않는 것처럼 부분이 없기 때문에 [극미 자체에는] 화합이 없을 것이다. 중첩되고 조대한 것이기 때문에 파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원자는 부분이 없는데 어떻게 파괴될 수 있 겠는가?388) 387) 『大智度論』: 復次,有極微色、香、味、觸,故有毛分,毛分因緣故有毛,毛因緣故有毳,毳因緣故有 縷,縷因緣故有疊,疊因緣故有衣。(T25.147c15 - 18) 또한, 가장 미세한 색, 향, 미, 촉이 존재하기 때문에 털의 부분()이 존재하고, 털의 부분이 원인과 조건이 되기 때문에 털이 존재하며, 털이 원인과 조건이 되기 때문에 솜이 존재하며, 솜이 원인과 조 건이 되기 때문에 털실이 존재하고, 털실이 원인과 조건이 되기 때문에 무명이 존재하며, 무명이 원 인과 조건이 되기 때문에 의복이 존재한다. 388) 『大智度論』: 亦不必一切物皆從因緣和合故有,如微塵至細故無分,無分故無和合。疊麁故可破,微塵 中無分,云何可破?(T25.147c21 - 24) - 177 - 여기서 대론자가 전제하는 극미의 개념은 전형적인 아비다르마의 극미개념, 즉 “가장 미세하여 부분을 가지지 않은 것”이다. 만약 이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극미 는 다수의 원인이나 조건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물질이 아니다. 따라서 극미는 파괴되지 않는다. 파괴되는 물질은 구성요소들이 화합을 통해 모여서 이루어진 조대한 물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론자에게 있어 “일체의 사물이 인연에 따 라 화합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주장은 제고되어야 한다. 조대한 물질들은 인연 화합에 의해 생성소멸한다고 하더라도,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미세한 기본단위는 더 이상의 원인과 조건이 없이 존재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지도론』의 물질에 대한 개념은 비바사사와 기본적인 전제를 달리한 다. 『대지도론』 89권에는 앞의 본분과 동일한 극미개념에 근거하여 제기된 질문 에 대한 논주(論主)의 답변이 제시되어 있다. [답] 만약 미진(원자)이 물질(색)이면 [그것은] 마땅히 부분을 가져야 한다. 어 째서 그런가? 일체의 물질(색)은 모두 허공 중에 존재하고, 모두 10방향의 부 분을 가지지 때문이다. 만약 미진(원자)이 물질(색)이라면 바로 10방향의 부분 을 가지게 될 것인데, 10방향의 부분을 가진다면 어떻게 극미라고 하겠는가? 만약 너희가 말하듯이 원자가 부분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물질(색)이 아 니어야 한다. 389) 이 인용본문에서 『대지도론』의 저자가 이해하는 물질은, 첫째 반드시 공간적 연 장성을 지니는 것이어야 한다. 물질은 무한한 공간의 영역(허공) 안에서 특정한 공간적 위상을 차지하는 것이며, 그때에는 논리적으로 반드시 10개의 방향과 부 분을 가지게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만약 원자가 물질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작 다 하더라도 반드시 크기와 부분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대로 원자가 부 분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물질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 부분은 발상의 전환 내지 전도(顚倒)를 예견하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원자가 부분을 가지지 않는다는 아비다르마의 해석에 따르면, 원자는 물질이 아니다. 따라서 원자는 비존재이거나 존재한다면 심리적 혹은 관념적 요소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관념적 요소들을 모두 가설적인 것으로 궁극에 있어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주장하였던 경량부 상좌의 관점에서 보면, 물질이 아닌 극미는 곧바로 정신적 혹은 심적인 389) 『大智度論』: 若微塵是色,則應有分。何以故?一切色皆在虛空中,皆有十方。若微塵是色,則有十 分;若有十分,云何是極微?(T25.691a19 - 22) - 178 - 요소로 치환되어 받아들어졌을 가능성이 농후해진다. 이런 사유전개의 방향은 이 어지는 본문에서도 일정정도 예견되어진다. 『대지도론』에서의 주장은 어떤 것이 물질이라면 반드시 물질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분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것의 물질적 특징을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물질 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원자가 물질이라면 그것은 감각기관의 지각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두 번 째 전제이다. 물질이라면 반드시 크기 등의 형태나 색깔 등의 감각대상으로 인식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390) 감각지각에 포착되지 않는 것을 물질이라고 한다면 감각되지 않은 그 ‘물질’이 물질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2) 극미의 부정 감각지각을 벗어나 있는 물질이라는 것은 “허구적인 명칭,” 즉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극미는 실재성이 없음에도 억지로 그렇게 이름붙인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거 친 것과 미세한 것은 서로 쌍을 이루는 개념으로 거침이 원인이 되기 때문에 미세함이 존재하고, 그 미세함에도 또 다시 [그 보다 더] 미세함이 있어야 하 기 때문이다.391) 만일 극미가 ‘가장 미세한 것’이라고 정의할 경우, 미세한 것에 대해 더 미세한 것, 그것에 대해 더욱 더 미세한 것으로 분석은 무한히 지속될 것이며, 결국 ‘가 장 미세한 것’에는 도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확정될 수 없는 것에 대해 ‘극미’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상반되는 관념에 의한 허구적 존재인 상대유(相待 有)와 같은 것이다. 『대지도론』에서 논쟁은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된다. 하나는 극미가 물질이라 390) 『大智度論』: 若有十分,云何是極微?若如汝說微塵無分者,則非色。何以故?出色相故。又復色名五 情可得,若微塵非五情所得者,云何得知是色?是故微塵但有虛名。眼見麁色,尚可破令空,何況不可 見、不可觸!(T25.691a21 - 26) 만약 너희가 말하듯이 원자가 부분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물질(색)이 아니어야 한다. 어째서 그 런가? 물질(색)의 특징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물질(색)이라는 명칭은 5감각지관이 지각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원자가 감각지각되지 않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것이 물질(색)이라는 것을 알겠 는가? 그러므로 원자는 단지 허구적인 명칭일 뿐이다. 눈은 조대한 물질(색)을 볼 뿐이며, [그것은] 파 괴되어 공(空)이 되어서, 더구나 불가견이고 불가촉이다. 391) 『大智度論』: 至微無實,強為之名。何以故?麁細相待,因麁故有細,是細復應有細。(T25.147c24 - 26) - 179 - 면, 반드시 크기와 지각가능성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설일체유부의 논사들이 주 장하는 바와 같이 극미가 ‘가장 미세하고 부분을 가지지 않는’ 어떤 존재라고 한 다면, 그것은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이어야 한다. 두 번째는 만약 어떤 것이 물질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원인과 조건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며, 크기와 부분을 가진다. 그리고 원인과 조건을 가지는 모든 존재는 실재성이 결여되어 있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물질은 실재성을 지니지 못한 존재이다. 그러 나 원인과 조건을 토대로 한다는 점에서 물질은 토끼뿔과 같은 비존재가 아니라 임시적이고 가설적인 존재, 즉 가명유(假名有)인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비록 한 역에서 용어선택의 일관성을 보증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구마라집이 부분을 가지지 않는 존재를 의미하는 맥락에서는 극미(極微, paramāṇu)를, 통상적인 의 미의 원자적 개념으로 미진(微塵, aṇu)을 번역어로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만약 극미가 존재하고, 그 [극미] 가운데 색, 향, 미, 촉을 가진 부분으로 나뉘어진다면, 그 색, 향, 미, 촉을 가진 부분으로 나뉘어지는 것을 극미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방식의 탐구로는 원자(미진)를 파악할 수 없다. 경 전에 설한 바와 같이, “물질(색)은 거칠거나 미세하거나 안이거나 밖이거나 전 체적으로 볼 때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인 것이다.”고 하였지, 미진(微塵)을 언급하지는 않았다.392) 극미는 가장 미세한 것이며 부분을 가지지 않는다는 정의에 따르면, 그것은 색, 향, 미, 촉 등의 구성요소를 지닐 수가 없다. 만일 극미에 색, 향, 미, 촉 등의 요 소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가장 미세하고 부분을 가지지 않는 정의에 위배될 것이 다. 이런 논증은 무한히 반복될 수 있으며, 그런 방식으로는 원자(극미)에 대한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 『대지도론』에 따르면, 일체의 존재는 물질적 존재와 비물질적 존재로 구분되 며, 그 중에서 물질적 존재를 분석하여 원자(미진)단위에 이르게 되면, 그것은 흩 어져서 소멸한다.393) 미진(微塵)에 대해 물질의 기본단위라는 암시는 여전히 남아 392) 『大智度論』: 復次,若有極微,是中有色、香、味、觸作分,色、香、味、觸作分,是不名極微。以是 推求,微塵則不可得。如經言:「色若麁若細,若內若外,總而觀之,無常無我。」不言有微塵。是名分破 空。(T25.147c29 - 148a4) 393) 『大智度論』: 復次,一切法有二種:色法、無色法。色法分析乃至微塵,散滅無餘. (T25.171a24 - 25) 일체법은 색법과 무색법의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그 중에서 색법은 분석하여 원자에 이르면 흩어져 소멸하여 남는 것이 없게 된다. - 180 - 있지만, 더 이상 가장 미세하다거나 부분을 가지지 않는다는 등의 조건이 부가되 지 않는다. 단지 어떤 기본적인 구성요소의 단계에 이르면 그것은 부서져 소멸한 다. 따라서 원자(미진)는 항구불변하는 바이셰시카의 실체적 개념과는 명확히 구 분해야 한다. 경전에서 “거칠거나 미세한” 물질에 대해 언급한 부분도 원자의 존 재를 입증하기 위한 경전적 근거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그 본문은 ‘모든 물질 (색)은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라는 것’을 해명하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대지도론』의 저자가 이곳에서 물질의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를 언급한 것은, 소 위 대승전통에서 이전까지의 전통적인 무아사상을 인무아(人無我)로 한정하고, 대 승에서 물질적 대상세계의 무상성과 무아성을 확립하고자 하였던 흐름을 재확인 시켜 준다. 설일체유부의 인무아(人無我) 중심의 무아사상이 소위 대승철학에서 일체존재의 무아성, 즉 법무아(法無我)로 확대된다는 사실은 반야중관계의 문헌 뿐만 아니라 유식계 논서들에서도 일차적인 관심사였다. 3) 화합과 조대한 물질의 형성 『대지도론』 41권에는 다르마(dharma, 法)와 다르민(dharmin, 有法)의 관계로 물질의 구성요소와 조대한 물질을 설명한 부분이 등장한다. 또한 다수의 미진의 다르마가 화합하기 때문에 ‘조대한 다르마를 가진 것(有麁 法)’이 발생한다. 미진들이 화합하기 때문에 조대한 물질이 존재하는 것과 같 이. 이것을 이름하여 법바라섭제(法波羅聶提)라고 한다. 다르마(法)를 따라서 ‘다르마를 가진 것(有法)’이 [발생하기] 때문이다.394) 이 인용문은 다르마를 실체로 혹은 속성으로 해석할 것인가에 따라 완전히 상반 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395) 다르마를 실체론적인 차원에서 볼 경우, 모든 조 대한 물질의 결합은 실체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지고, 조대한 물질현상은 실체적 층위에서의 결합의 반영이 된다. 이 경우 다르마는 실체이고 다르마를 가진 것은 조대한 물질 현상이 된다. 반면 다르마를 속성으로 해석할 경우, 다르민은 속성을 394) 『大智度論』: 復次, 眾微塵法和合故有麁法生, 如微塵和合故有麁色, 是名「法波羅聶提」, 從法有 法故。(T25.358b26 - 28) 395) 다르마와 다르민의 문제는 불교철학의 핵심적인 주제로써, 별도의 많은 선행연구가 이루어졌을 뿐 만 아니라 여전히 다양한 불교철학의 해석에 있어서 논란의 핵심개념으로 거론되고 있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피하고, 단지 해석상의 가능성과 그것에 함축을 제시하는 것으 로 한정하고자 한다. - 181 - 가진 것이다. 여기서 ‘속성을 가진 것’은 실체-속성의 구도에서는 실체일 수 있으 며, 속성의 결합에 의한 화합이라는 관점에서는 조대한 물질을 뜻할 수도 있다. 아마도 바로 이 지점이 설일체유부와 경량부 계통의 이론적 충돌지점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설일체유부의 75법에서 물질(색)의 범주에 색, 성, 향, 미, 촉 등 의 감각대상은 포함되지만, 그것들을 구성하는 구성요소, 즉 지, 수, 화, 풍은 포 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바로 이 4대(大)야 말로 물질(색)에 실재성을 제공하는 토대이다. 『대지도론』의 대상에 대한 설명은 실재론자들과는 관점과 범주에서 차이를 드 러낸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이셰시카나 설일체유부의 설명체계에서 지 수화풍은 궁극적 구성요소로서의 4대(大) 차원과 일상적 경험세계의 물질로서의 지수화풍을 구분한다. 따라서 궁극적인 원자 차원의 물질이 조대한 물질을 구성 하는 단계는 (1)4대(大)인 지수화풍 -> (2)감각대상인 색향미촉 -> (3)조대한 물질인 지수화풍 으로 도식화할 수 있다. 설일체유부 철학에서는 세 단계의 물질에 모두 실재성이 내재하는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4대(大)의 극미들이 가지는 실재성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리고 일체의 사물은 (1)과 (2)의 여덟 가지 구성요소들이 화합한 팔사구생 (八事俱生)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상좌 슈리라타는 존재론적 차원에서는 (1)의 4 대를 근거로 한 4사구생(四事俱生)의 입장을, 인식론적 차원에서는 (2)의 감각대 상을 중심으로 한 4사구생의 관점을 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대지도론』에서 물질세계의 발생은 앞서 12권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2)번의 4가지 구성요소들이 화합(四事因緣合)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경험적 계기들만을 물질 세계를 해명하기 위한 구성요소로 인정하는 태도이다. 『대지도론』의 논사는 모든 물질은 크기와 형태를 가지며, 다수의 원인과 조건 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가설적이고 임시적인 존재이다. 그렇다면, 지, 수, 화, 풍과 같은 4대(大)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예를 들어 꿈이나 허공 등은 단지 명칭만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수화풍은 실재하는 다르마인데, 어떻게 단지 명칭일 뿐이라고 하겠는가?396) 396) 『大智度論』: 如夢、虛空等,可但有名字;云何地、水、火、風實法,亦但有名字?(T25.365c20 - 21) - 182 - 물질세계를 포함한 현상세계를 가설적 존재로 설명하는 『대지도론』의 주장에 대 한 실재론자들의 반문이다. 질문에서 이미 다르마가 실체론적으로 해석되고 있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론자들에게 지수화풍 등은 실재하는 다르마(實法)이다. 따 라서 그것을 가설적인 혹은 임시적인 것으로 설정할 수는 없다는 반론이다. 이에 대한 『대지도론』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답] 무지(無智)한 사람들은 지(地)등의 온갖 사물이 실재하는 것으로 말하지만, 성인의 혜안으로 그것을 보면 모든 것은 허망한 속임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가 거울 속의 영상을 보고 실재라고 여겨서 기뻐하여 [그것을] 취하고자 하고, [그것이] 참으로 실재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어른 들은 그것이 단지 사람의 눈을 속이는 것이라고 본다. 모든 범부들은 미진이 화합하여 지(地)가 이루어진다고 보며 그 지(地)가 실재한다고 여기지만, 천안 을 가진 다른 이들은 그 지(地)를 분산하여 단지 미진(微塵)을 볼 뿐이다. 혜안 으로 그 지(地)의 파괴와 분산을 분별하면, 어떤 것도 인식할 만한 것이 없게 된다.397) 인용문에는 세 가지 종류의 안목이 제시된다. 첫째는 무지(無智)한 범부의 눈, 둘 째는 천안(天眼), 셋째는 혜안(慧眼)이다. 지(地) 등은 범부의 눈에 의해 지각되는 일차적인 모습이다. 그것은 일상의 현실에서 경험되는 대상세계의 몇 가지 기본 적인 구성요소를 대표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린아이가 거울 속의 영상을 보고 마 치 그것이 실재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물질적 현상세계는 지수화풍 등의 몇 가지 감각적 구성요소로 경험되지만, 그것을 보다 뛰어난 눈으 로 보면, 지수화풍의 모습은 사라지고 아주 미세한 물질의 기본단위인 미진(微塵, aṇu)과 같은 것으로 관찰된다. 그러나 그 미진(微塵)도 지혜의 눈(慧眼)으로 들여 다 보면, 그것마저 실체가 없고 궁극적으로는 인식될 어떤 것도 남지 않게 된다. 미진(微塵)의 현상적 존재는 혜안으로 관찰 가능한 어떤 실재를 직접적인 원인으 로 하는 것이 아니다. 확정할 수 없는 다수의 원인과 조건의 화합으로 인해 현상 한 것이 미진(微塵)이라는 현재 찰나의 사태일 뿐이며, 현재 찰나의 이 사태를 분 석하여 보다 미세한 어떤 원인과 조건을 확인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궁극적 차원에서의 공성(空性)이라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다. 397) 『大智度論』: 答曰:無智人謂地等諸物以為實;聖人慧眼觀之,皆是虛誑。譬如小兒見鏡中像,以為 實,歡喜欲取,謂為真實;大人觀之,但誑惑人眼。諸凡夫人見微塵和合成地,謂為實地;餘有天眼者, 散此地,但見微塵;慧眼分別破散此地,都不可得。(T25.365c21 - 27) - 183 - 4) 미진(微塵)과 공(空)- 반야바라밀 『대지도론』에 따라 일체의 존재를 두 가지로 분류한다면, 물질적 존재와 비물 질적 존재로 구분해 볼 수 있을 것이다.398) 이 양자의 실재성이 모두 부정될 수 있다면, 일체의 존재는 실재성이 없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이 물질적 존재는 분별하고 부수어져서 미진(微塵)에까지 이르게 되며, 그 미 진(微塵)은 분별하여도 파악될 수 없기 때문에 종국(終局)에는 모두가 공(空)이 된다. 비물질적인 존재는 찰나 찰나에 생멸하기 때문에 모두가 공(空)하다.399) 일체의 물질적 존재는 공(空)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마지막까지 분석하였을 때, 결국 지각의 범위를 넘어서고 지각으로 파악되지 않는 상태로 소멸해 버리기 때 문이다. 또한 일체의 비물질적인 존재, 즉 심리적인 존재들도 공(空)하다. 왜냐하 면 그것들은 매 순간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특이한 점은 물질적인 존재의 공성(空性)은 공간적인 분할을 통해서 매우 미세한 단계를 거쳐 지각의 영 역을 벗어나 소멸한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비물질적인 존재의 공 성(空性)은 시간적인 차원에서의 무상(無常), 즉 매 찰나의 생멸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심리적 혹은 정신적 존재의 비실재성, 다시 말해 자아(自我)의 무 상(無常)과 무아(無我)는 붓다 이래 불교사상의 확고한 뿌리였기 때문에 재론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물질적 존재의 무상(無常)함에 대한 해명이다. 그리고 그것 이야말로 대승사상의 뿌리를 이루는 궁극적인 반야(般若, prajñā)의 획득과 관련 된 것이다. 또한 수보리여! 일체법에 대해 분별하고, 헤아리고 파괴하여 미진(微塵)의 단계 에 도달하여도, 그 가운데서 확고한 실재성을 얻지 못한다. 이것을 일러 반야 바라밀이라 한다.400) 궁극적 지혜에 관해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말해질 수 있겠지만, 물질적 존재에 관 한 궁극적 지혜, 즉 반야바라밀은 물질의 기본단위라고 생각되는 원자의 단계까 398) 『大智度論』: 復次,若有法不空,應當有二種:色法、非色法。(T25.326b20 - 21) 399) 『大智度論』: 是色法分別破裂乃至微塵, 分別微塵亦不可得, 終卒皆空。 無色法, 乃至念念生滅故 皆空。(T25.326b21 - 23) 400) 『大智度論』: 復次, 須菩提! 分別、 籌量破壞一切法, 乃至微塵, 是中不得堅實, 以是義故名般 若波羅蜜。(T25.647a25 - 27) - 184 - 지 분석하고 들어갔을 때, 그것에는 어떠한 실재성도 없다는 사실이다. 『대지도 론』의 관점에서 볼 때, 비바사의 논사들은 다르마의 상주성을 주장하는 오류가 있다.401) 왜냐하면 그들은 물질을 분석하여 극미의 단계에 도달하면, 그것은 더 이상 파괴되지 않으며 상주한다고 주장하고, 또 동시에 일체법이 과거와 현재, 미 래에 존재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야바라밀에서 획득되는 지혜의 눈 으로 보는 일체법은 모두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이 때문에 “제법은 그림자와 같다”고 설한 것이다. 또한 그림자와 같이 공(空)하고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실재를 찾으려 하여도 파악할 수가 없다. 일체법도 이와 같아서 공(空)하고 실재성이 없는 것이다.402) 이렇게 해서 『대지도론』은 일체의 존재에는 실재성이 없으며, 모두가 마치 그림 자처럼 일시적이고 가설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물론 여기서 그 림자로 비유되는 가설적 존재에 원인이 되고 조건이 되는 토대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는 또 다른 질문으로 남게 된다. 추론적 영역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공성 (空性)의 영역은 단지 불가언설로 남겨져야 할 뿐인가? 아니면 어떤 긍정적인 언 설의 방식으로 묘사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물질적인 것에 반 대되는 어떤 심리적인 것 혹은 정신적인 것으로 치환될 수 있는가? 이와 같은 질 문들이 중관과 유식계 사상의 분기(分岐)를 예고되는 문제들이다. 2. 『유가사지론』의 극미설 유가행파의 극미론은 극미의 부정을 통한 유식의 논증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 에, 일종의 반극미론(anti-paramāṇu theories)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403) 『대지도론』에서 극미부정의 모티브들은 대부분 경쟁하는 극미론자들 내부의 논쟁 401) 『大智度論』 : 影實空無,汝言阿毘曇中說者,是釋阿毘曇義人所作;說一種法門,人不體其意,執以 為實。如『鞞婆沙』 中說:「微塵至細,不可破,不可燒。」 是則常有! 「復有三世中法,未來中出至現 在,從現在入過去,無所失。」 是則為常! (T25.104b2 - 7) 402) 『大智度論』: 以是故說「諸法如影」。復次,如影空無,求實不可得;一切法亦如是,空無有實。 (T25.104a22 - 23) 403) 방인은 실재론자들의 극미론을 “적극적 극미론”으로 유가행파의 극미부정의 논리를 “비판적 극미 론”으로 정의하고 설일체유부를 “강한 실재론,” 경량부를 “관념론으로 넘어가는” 단계의 실재론, 그 리고 중관파를 “절대적 부정론” 유가행파를 “가설적 개념”의 극미론으로 정리하였다. 방인. (1998) 「불교의 극미론(極微論)」. 『哲學硏究』. No.65. 51-80. - 185 - 에서 상대방을 공격하였던 논지를 채용하였다. 유가행파의 극미부정도 서로 상이 한 체계에서의 비판과 응답이라는 맥락을 소거하고 논쟁자들의 비판을 대립시키 는 방식을 취한다. 이를 통해 특정한 학파의 철학체계를 논리적으로 붕괴시키기 보다는 극미론자들 사이의 의견 대립 혹은 모순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극미론의 철학적 한계를 입증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유가사지론』에서 극미론은 「본지분」과 「섭결택분」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유 가사지론』은 전문이 한역되어 있지만 산스크리트어 원문404)은「본지분」만이 현존 하고, 「섭결택분」은 티베트어405)로 확인이 가능하다. 설일체유부와 마찬가지로 『유가사지론』 「본지분」의 오식신상응지(pañcavijñānakāyasamprayuktā bhūmiḥ)에서도 일체존재를 다섯 범주로 구분한다. 그 가운데 색법에 상응하는 것이 색취(色聚, rūpasamudāya)이며, 색취에 속하는 일체의 물질적 존재들은 자 신의 종자(svabīja)로부터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여기서 종자는 대종 (mahābhūta)과 동일시되는 것이다. 요컨대 물질적 대상은 대종의 형태인 자기종 자들이 취집(samudāya)하여 만들어진다는 것이다.406) 여기에서 색취(色聚, rupasamudāya)는 개념적으로는 『구사론』의 색취, 즉 rupasaṃghāta에 상응하 는 것으로 보인다. 『유가사지론』에서는 일관되게 적집을 표현하는 용어로 samudāya를 사용한다.407) 그러나 논주는 종자의 적집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설 명되는 이 색취가 극미로부터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고 천명한다. 색취에는 어떤 극미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색취가] 자신의 종자로 부터 지금 발생하고 있다[면], 바로 그 취집(samudāya)은 하나의 원자(aṇu)이 거나 중간 혹은 조대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취집은 극미들이 쌓여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사유(buddhi)에 의해 무한히 분해되기 때문에 극미라 고 가립한 것이다.408) 404) Bhattacharya, Vidhushekhara, ed. The Yogācārabhūmi of Ācārya Asaṅga. Part 1. Calcutta: University of Calcutta, 1957. 405) rnal 'byor spyod pa'i sa rnam par gtan la dbab pa bsdu ba (Yogācārabhūmi Viniścayasaṃgrahaṇī). D4038, P5539, N4307. 406) YBh 52.12 - 13: tatra rūpasamudāyo tāvat sarvadharmāḥ svabījebhya utpadyante | tat kathaṃ | mahābhūtāny upādāyarūpaṃ jāyata ity ucyate | 여기에서 색취와 일체법은 자신의 종자로부터 발생한다. 어떻게 그런가? “대종들이 소조색을 발생시킨다”고 말한다. 407) 여기서 직접적으로 samudāya의 학파적 연관성을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유가사지론』이 ‘종자의 적집’의 맥락에서 samudāya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408) YBh 53.9 - 12.: na ca rūpasamudāye kadācit paramāṇur utpadyate | utpadyamānas tu svabījāt samudāya evotpadyate 'ṇur vā madhyo vā mahān vā | na ca punaḥ - 186 - 사유에 의해 무한히 분해하였을 때에 가설하게 되는 형이상학적 원자의 개념에 있어서는 설일체유부의 정의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설일체유부에서는 그 극미에게 실재성을 부여하는 반면에 유가사(瑜伽師)는 그것에서 물질적 실재성 을 포기하고 가설적 존재로 규정한다. 따라서 『유가사지론』에서 물질은 극미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지만, 물질을 사유에 의해 분석하였을 때 형이상학적 원자라 는 개념을 도출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임시적으로 ‘극미’라고 이름붙인 것일 뿐이다. 그러나 물질의 기본단위로써 극미는 논리적으로도 성립할 수 없는 모순 적 존재이다. 『유가사지론』은 극미 자체가 부분(paramāṇu hi avayava)이며 더 이상의 미세한 부분을 가지지 않는다는 주장과 극미가 부분을 가진다면 극미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나란히 배치하여 모순성을 부각시킨다.409) 극미 자체가 부분 이기 때문에 더 이상 미세한 부분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경량부 상좌의 견해로 알려져 있다. 반면 개별적인 극미들은 크기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설일체유부 의 정설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두 견해는 서로를 배제하기 때문에 공존할 수 없 다. 유가사는 이를 통해 극미론은 내적모순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한다. 유심유사지(savitarkā savicārā bhūmi)에는 상주론(常住論, śāśvatavāda)에 대한 비판에서 극미분석이 이루어진다. 극미상주론자(aṇunityatvagrāhiṇa)는 선 행하는 존재들이 모여서 결과를 이루고, 원자들이 집적하여 조대한 실체가 발생 하며, 그 조대한 실체를 분할하여 원자 상태에 도달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조대한 물질은 무상한 것이지만, 극미들은 영원한 것이다.410) 이같은 주장에 대한 유가사 의 비판은 다섯 가지 항목으로 이어진다. paramāṇubhiḥ samudāyaś cīyate | buddhyā tu parimāṇaparyantaparicchedataḥ paramāṇuḥ pravijñapyate | 409) 취집은 공간을 가지기 때문에 극미도 공간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취집은 부분을 가지지만 극미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극미가 바로 부분이기 [때문이다]. / 취집은 부분을 가지지 만 극미는 그렇지 않다. [만일 극미가 부분을 가진다면, 그 부분에 해당하는] 다른 곳에 [더 미세한] 극미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극미의 개념에 위배된다]. 따라서 극미는 부분을 가지지 않는 다. YBh 53.12 - 15.: tatra samudāyo'pi sapradeśaḥ | paramāṇurapi sapradeśaḥ | samudāyastu sāvayavo na paramāṇuḥ | tat kasya hetoḥ | paramāṇureva hy avayavaḥ | sa ca samudāyasyaivāsti na paramāṇoḥ | punaranye paramāṇavaḥ | tasmān na sāvayavaḥ paramāṇuḥ || 410) YBh 142.4 - 6.: bhāvapūrvakaṃ bhāvānāṃ phalapracayodayaṃ | aṇubhyaḥ sthūlaṃ dravyam utpadyate | sthūlaṃ ca dravyaṃ vibhajyamānam aṇvavastham avatiṣṭhatīti | ataḥ sthūlaṃ dravyam anityaṃ | nityāḥ paramāṇava [iti] | 이 주제에 대한 논의는 YBh 140.6 - 142.9까지 항목별로 이어진다. 아래에 그 내용만을 간추려 간단히 소개하도록 한다. - 187 - (1) 관찰되거나 관찰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2) 공상이라고 하더라도, (3) 근 본 성질의 관점에서도, (4) 발생의 기원의 관점에서도, (5) 근본의 작용의 관점 에서도, 극미의 상주성에 대한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다. 따라서 이것(극미)도 극미설도 모두 타당하지 않은 것이다.411) 이 다섯 가지 주제를 하나씩 부정한 후에 결론적으로 극미개념과 그에 기반한 극 미설은 타당하지 않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이 각각의 주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의 형태로 제시되었다. (1) 극미의 상주성이 관찰되는가? (2) 극미의 상주성은 미세 한 성질 때문인가? 조대한 사물이 구분되는 성질 때문인가? (3) 근본성질은 개별 극미로부터 발생하는가? 적집으로부터 발생하는가? (4) 물질의 처음이 종자와 같 은가? 도공과 같은가? (5) 유정의 발생시키는 힘에 의해 발생하는가? 첫 번째 질 문에 대해서는 관찰할 수 없다고 하면 관찰되지 않은 것에 대해 상주성을 주장하 는 것은 근거를 상실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반대로 관찰을 통해서 상주성을 주장 한다면, 그것은 모든 인식수단에 의한 경험적 사실에 모순되는 거짓 주장일 뿐이 다. 두 번째로 지, 수, 화, 풍 4대종의 성질을 초월하여 동일하지 않은 별도의 결 과가 발생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이는 물론 바이셰시카의 전체상이나 상 좌 슈리라타의 화합상과 같은 결합방식에 대한 부정이다. 세 번째는 그 상주성이 개별적인 극미 혹은 적집한 극미 중 어느 것에서 발생하는가에 대한 논란이다. 개별적인 극미에서 발생한다면 극미로 구성된 일체의 물질에서 상주성이 발생해 야 할 것이다. 반대로 적집해서 발생한다고 하면 그 적집의 기본단위가 분석에 의한 물질을 초월하는 것인가? 만약 초월한다면 역시 경험적 영역을 벗어나게 되 기 때문에 주장의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초월하지 않고 지각의 범위에 국한한다면 그것은 부분을 가지기 때문에 극미라고 할 수 없다. 네 번째로 그 시 작이 종자와 같다면, 그것은 비유자-경량부 계통의 전변하는 종자와 같이 무상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도공과 같다면 극미에 도공의 의지와 같은 것이 존재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 다섯째는 만일 외부의 존재가 유 정의 발생시키는 힘에 의한 것이라면, 조대한 물질들이 유정의 발생시키는 힘에 의한 것이고 조대한 물질을 구성하는 미세한 것들은 유정의 발생시키는 힘에 의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성원리에 어긋나다는 문제가 생긴다. 411) YBh 142.4 - 6.: parīkṣāparikṣaṇato'pi sāmānyalakṣaṇo'pi mūlalakṣaṇato'pi ārambhato'pi mūlaprayojanato'pi paramāṇunitya[tva]vādo'pi na yujyate | tasmād eṣo'pi vādo 'yoga vihitaḥ || - 188 - 그런데 이와 유사한 방식의 극미분석이 「섭결택분」에 다시 등장한다. 이곳에 서도 물질을 구성하는 극미의 종류와 감각기관, 그리고 극미의 소멸 등에 대해 앞서의 「본지분」에서 보다 주제별로 정돈된 형태의 설명을 제공한다. 극미의 종 류는 다섯 가지로 건립한다. [문] 그렇다면 물질의 극미는 몇 종류로 건립한다고 알아야 하는가? [답] 상세하게는, 「본지분」에서 이미 건립되어졌다. 간략히 하면 다섯 종류이 다. 즉 1) 분별, 2) 분석, 3) 독립, 4) 조반, 5) 무분(無分)이다.412) (1) 분별에 의한 건립은 개별극미의 정의에 해당한다. 극미는 사유에 의하여 극한 으로 축소한 물질에 대해 건립한 것이기 때문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겨나지도 소멸하지도 않으며, 조대한 물질은 극미들이 취집하여 만들어지는 것 이 아니다. 극미부정의 기본논리는 「본지분」과 일치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분석에 의한 건립은 일체의 존재를 분석하였을 때, 5근과 5경의 10색처와 4대종 극미, 그리고 법처에 포함되는 물질을 포괄하여 15종으로 분석된다는 의미이 다.413) 이는 대종극미에 기반하여 12처에서 색처를 극미로 구성된 것으로 보는 설일체유부의 입장과 차이가 없다. (3) 독립에 의해 건립한다는 것은 개별적인 극 미, 즉 사극미(事極微)의 개념을 일컫는 것이다. (4) 조반에 의해 건립한다는 것은 사극미에 대응하여 취극미(rdul phra rab 'dus pa)를 확립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지금까지 극미실재론에서 주장하였던 것과 다른 특이한 결합 의 방식이 등장한다. 하나의 지(地)와 동일한 극미의 장소에 존재하는 다른 극미들이 동일한 하나의 장소를 취하지만 서로 배척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으로 인해 취극미를 건립한 다.414) 412) VinSg D49b.6.: de la gzugs kyi rdul phra rab rnam pa dus rnam par gzhag par rig par [6] bya zhe na; smras pa| rgya cher ni sa'i dngos gzhir rnam par gzhag par byas zin to|| mdor bsdu na ni rnam pa lnga ste| 'di lta ste| yongs su gcod pa dang| rnam par dbye ba dang| ma 'dres pa dang| lhan cig pa dang| cha shas med pas so|| 413) 「본지분」에서는 총 14종으로 분석하면서, ‘의근의 대상영역인 물질’ 즉 법처에 포함되는 물질은 제 외하였다. 『瑜伽師地論』: 復次於諸色聚中。 略有十四種事。 謂地水火風。 色聲香味觸。 及眼等五 根。 除唯意所行色。(T30.290b6 - 8). 또한 온갖 색취는 14가지 종류의 사태, 즉 지수화풍과 색성향 미촉, 그리고 5근(根)을 [포함하며] 의처(意處)의 대상영역인 물질(색)은 제외한다. 414) 『瑜伽師地論』: 於一地等極微處。所有餘極微同聚一處不相捨離。是故依此立聚極微。(T30.597c26 - 27) - 189 - 지금까지 극미논쟁에서 극미는 저항성을 가지기 때문에 동일한 장소에 머물수가 없다는 것이 전제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지금 「섭결택분」에서는 극미는 저항을 가지지만 그래도 동일한 장소에 존재할 수 있다는 모순된 주장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특이한 해석은 이하에서 어떤 것에 상응하여(隨順) 발생하기 때문으로 해명한다.415) 한 장소에 분리되지 않고 머무르는 것과 서로 장애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각각의 다르마들이 그에 상응하는 것, 즉 감각기관에 조응하고 그에 의해 확립되기 때문으로 설명된다.416) “모든 취색(gzugs 'dus pa thams cad)는 모든 감각기관에게 공통으로 수용되기 때문에”417) 취극미의 건립이 가능하다. 이런 해 석은 취극미를 실재하는 외부대상의 측면이 아니라 감각기관에 수용된 감각경험 의 차원에서 설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물질적인 존재인 극미들은 하나의 장소를 점유하고 다른 것들에 대한 저항성을 지니기 때문에 다수의 극미들이 한 장소(처) 에 함께 머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그런 성질을 가진 극미들이 다수가 모였을 때, 대응하는 감각기관의 한 영역에 색깔(色) 등의 형상이 현현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이런 설명은 10처(處)의 물질적 범주를 이미 심적요소로 파악하였 다는 점을 암시한다. 이런 해석은 취극미와 12처의 가설적 성격을 주장하였던 비 유자-경량부 계통에서도 동의하였던 입장이다. (5) ‘부분을 가지지 않는다(無分)’ 는 측면에서 극미를 건립하는 것은, 취극미는 부분을 가지지만 개별적인 극미는 더 이상의 미세한 부분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418) 요약적인 설명만으로는 이 무분(無分)의 극미가 기하학적인 점(點)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물리적 최소단위를 415) 『瑜伽師地論』: 答隨順轉故。由彼展轉相隨順生不相妨礙。又由如是種類之業增上所感如是而生。 (T30.597c29 - 598a2), [답] 남에게 의존하여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서로 상대에 따라 생겨나 서 서로간에 방해하거나 장애하지 않는다. 또 그와 같은 종류의 업의 증상력에 의해 감응하여 그와 같이 생겨난다. 416) VinSg D50.a.3 - 4.: thogs pa dang bcas pa'i chos rnams phyogs gcig na tha [4] mi dad par gnas pa dang| thogs pa med pa nyid du 'gyur zhe na| de mngon par 'grub pa ni 'jug pa dang mthun pa'i phyir de dang mthun pa'i lus kyi dbang las de ltar mngon par 'grub par 'gyur ro|| 저항을 가진 법들이 하나의 처(處)에서 분리되지 않고 머무는 것과 장애하지 않는 성질이 되는 것은 그것(처)을 확립하는데 있어서 들어가는 것에 따르기 때문으로, 그것(처)에 따 라 몸의 감각기관이 그와같이 확립하게 된다. 417) VinSg D50.a.4 - 5.:gzugs 'dus pa thams cad ni dbang po thams cad kyi yongs [5] su longs spyod pa thun mong yin pa'i phyir ro|| 418) VinSg D50.a.7 - b.1.: rdul phra rab kyi phyogs gang yin pa de ni de nyid [50b.1] kyi phyogs yin gyi cha shas kyis rab tu phye ba ni ma yin no|| 극미의 장소인 그것이 바로 그것 (극미)의 장소이지만 [그것은] 부분에 의해 완전히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 190 - 의미하는지를 명확하지 않다. 어떤 경우이건 극미는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경우가 없고 항상 적집한 상태로만 생겨나고 소멸하기 때문에 개별적인 극미는 감각지각 에 의해 보여지는 대상이 아니다. 『유가사지론』 「섭결택분」의 저자는 이같이 극미의 개념에 대해 분석한 후에 극미가 성립하지 않는 이유를 다섯 가지로 요약한다. 다섯 가지 특징에 의해, 극미를 사유하는 것은 이치에 합당하지 않다고 알아야 한다. (1) 취색에 극미가 자성을 가지고 머문다고 생각하는 것은 극미에 대한 생각이 이치에 합당하지 않다고 알아야 한다. (2) 극미가 생기고 소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3) 극미와 극미를 가진 것이 분리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4) 취 색이 오직 극미의 상태만이라고 생각하는 것, (5) 극미들이 취집(rdul phra rab rnams tshogs)하여 다른 대상을 발생시킨다고 생각하는 것도 극미에 대 한 생각에 있어서 이치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419) 「본지분」에서 극미비판의 기본적인 관점이 「섭결택분」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1) 물질적 존재들이 자성을 가진 극미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가 장 먼저 부정되는 것은 극미들이 모여서 물질(색)을 구성한다는 기본적인 전제에 대한 것이다. (2) 극미는 찰나생멸하는 다르마의 특징을 가진 것이 아니다. 그것 은 새롭게 생성되지도 소멸하지도 않기 때문에 찰나생멸을 특징으로 하는 다르마 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극미설의 관점에서도 극미는 항상 취극미, 즉 열 가지 감 각영역에 들어 온 존재의 형태로만 생멸하기 때문에 개별적인 극미와 그것의 생 멸은 단지 가설된 것일 뿐이다. (3) 극미를 가진 어떤 극미의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극미의 현현에 대해 그것과 구분되는 어떤 실체의 존재가 상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개별적인 극미와 극미의 집적에 의한 조대한 물질 사이의 관계에 서는 (4) 조대한 물질적 존재들에 있어 개별적인 극미들만이 실재하는 것이라거나 (5) 극미들이 취집하였을 때 어떤 질적도약을 통해 새로운 존재를 발생시킨다는 419) VinSg D50.b.4 - 7.:de la rnam pa lngas [5] rdul phra rab la sems pa ni tshul bzhin ma yin par rig par bya ste| gzugs 'dus pa la rdul phra rab rang gi bdag nyid kyis gnas par 'dzin pa ni rdul phra rab la sems pa tshul bzhin ma yin par rig par bya'o|| rdul phra rab skye ba dang 'gag par 'gyur bar 'dzin pa dang| rdul phra rab dang| rdul phra rab pa dang| [6] bral bar 'dzin pa dang| gzugs 'dus pa ni rdul phra rab tsam gyi gnas skabs yin par 'dzin pa dang| rdul phra rab rnams tshogs nas gzugs 'dus pa don gzhan du gyur pa bskyed par 'dzin pa yang rdul phra rab la sems pa tsul bzhin ma [7] yin par rig par bya'o|| - 191 - 주장이 모두 부정된다. (4)의 입장은 취색에서 오직 개별적인 극미들의 실재성만 이 인정되고 조대한 물질은 실재성의 연장으로 이해하는 화집의 결합방식을 암시 하는 듯하다. 반면 (5)는 극미들이 취집하였을 때 개별극미의 집합과는 달리 다른 색취를 발생시킨다는 주장에 대한 부정인데, 이것은 상당히 분명하게 화합(和合) 의 결합방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420) 이처럼 모든 면에서 극미를 부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가사지론』을 비롯 하여 이후 거의 대부분의 유식논서에서 극미부정의 논증이 논서의 중요한 부분으 로 거듭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유가사지론』은 스스로 극미논증의 효용성을 다섯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또 극미를 건립하는 것은 다섯 가지 이익이 있는데, (1) 유가사들이 매우 원만 한 분석을 안립하는 것에 의해서 인식대상을 현현하는 원인(rgyu)을 만드는 것이 첫 번째 이익이다. (2) 유신견을 제거하는 원인을 만드는 것이 두 번째 이익이다. (3) 유신견을 제거하는 것과 같이 자만을 제거하는 원인을 만들게 되는 것이 세 번째 이익이다. (4) 그와 같이 번뇌의 완전한 결박을 제어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 네 번째 이익이다. (5) 신속하게 영상(mtshan ma, nimitta) 을 파괴하는(rnam par 'jig pa) 원인이 되는 것이 다섯 번째 이익이다. 따라 서 그와 같이 적절하게 그는 극미를 사유하는 것이다.421) 극미개념에 대한 논증이 유용한 다섯 가지 이유는 모두 명상과 관련되어 있다. 극미개념에 대한 이해와 분석은 유가사들이 인식대상을 현현시키고 그것들을 하 나씩 제거하며, 그를 통해 번뇌를 끊고, 궁극적으로 명상 속에서 세운 형상 (mtshan ma)을 완전히 제거하는데 있어서 어떤 근거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명상체험 속에서 떠올리는 영상이나 인식대상에 대해 구상(具象)적인 분석이 가능 하게 하는 것이 극미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일체가 단지 의식의 작용일 뿐이라 420) 여기서 극미의 취집으로 번역한 rdul phra rab kyi tshogs은 paramāṇu-saṃcaya로, saṃcita의 결합방식에 상응하는 번역어로 보인다. 421) VinSg D50.b.7 - 51a.3.: de la rdul phra rab rnam par gzhag pa las phan yon rnam pa lnga yod de ril po rab tu dbye ba rnam par gzhag pas ni rnal 'byor pa [51a.1]| rnams kyi dmigs pa la gsal ba'i rgyu byas par 'gyur te de ni phan yon dang po yin no|| 'jig tshogs la lta ba spong ba'i rgyu byas par 'gyur ba ni phan yon gnyis pa'o|| 'jig tsogs la lta ba spong ba ji lta ba de bzhin du nga rgyal spong ba'i rgyu byas [2] par 'gyur ba ni phan yon gsum pa'o|| de bzhin du nyon mongs pa'i kun nas dkris pa rnam par gnon pa'i rgyu byas par 'gyur ba ni phan yon bzhi pa'o|| myur du mtshan ma rnam par 'jig pa'i rgyu byas par 'gyur ba ni phan yon lnga pa ste| de ltar de lta bu dang mthun pa de ni rdul phra rab [3] bsam pa yin no| - 192 - 할지라도, 물질적 대상의 형태로 인식되는 현상세계의 분석에 있어서 극미개념은 여전히 유용한 분석수단인 것이다. 불교인식논리학에서 극미분석을 통해 다양한 인식론적 문제들을 논리적으로 분석하였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2절. 『유식이십론』의 구조와 주장명제 세친의 『유식이십론』은 유식학파의 철학적 입장을 대론의 형식으로 제시한 대 표적인 논서이다. 『유식이십론』은 유식사상의 핵심적 논제인 ‘오직 표상 (vijñaptimātra)’에 대한 실재론자의 비판에 대응하면서, 일체의 현상세계를 포괄 하는 12처(處)개념에 대한 재해석, 그리고 물질적 존재의 토대를 이루는 극미개념 의 부정, 나아가 대상에 대한 인식의 문제 등에 대한 세친 자신의 진술을 전해준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의 법상종(法相宗)계통에서 『유식이십론』은 『유식 30송』과 『성유식론』에 보조적인 정도로 간주되어 왔으며, 인도-티베트 불교전승 에서도 다르마끼르띠(Dharmakīrti)의 『양평석』 (Pramāṇavārttika)의 그늘에 감 추어진 경향이 있었다. 이 장에서는 『유식이십론』이야말로 세친의 철학적 전이과정을 증거할 뿐만 아 니라, 본격적인 유식철학의 등장을 선포한 논서임을 밝히고자 한다. 『유식이십론』 은 설일체유부에서 출발하여 경량부 상좌 슈리라타의 세례를 받은 세친 철학의 정수(精髓)이며, 이후 동아시아의 법상종(法相宗)이나 인도-티베트의 유식학과 인 식논리학으로의 전개를 예고하는 문제적 논서이기도 하다. 이하에서는 세친이 아 비다르마 불교철학의 고유한 개념들을 재해석하여 유식의 체계로 편입하는 과정 과 그것을 뒷바침하기 위해 어떻게 극미(極微) 개념을 분석하고 있는지를 중심으 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유식이십론』 구조 『유식이십론』은 레비(Levi)에 의한 산스크리트어 교정본422)이 존재하며, 한역 422) Levi, Sylvain. (1925) Vijñaptimātratāsiddhi: Deux Traites de Vasubandhu: Viṁśatikā et Triṁśikā. Levi, Sylvain. Ed. Paris: Libairie Ancienne Honore Champion. 실뱅 레비는 이 산스 크리트본을 출판한 때에도 『유식이십론』의 산스크리트 제목을 하나로 확정하지 않고 Viṁśatikā 혹은 Viṃśikā 둘 중에 하나일 가능성을 열어 두었는데, 최근 카노(Kano)에 의해 원제목이 Viṁśikā로 확 - 193 - (漢譯)으로는 반야유지의 『유식론』423), 진제의 『대승유식론』424), 현장의 『유식이 십론』425)이 있으며, 티베트역426)도 현존한다. 또한 『유식이십론』의 주석서로는 호 법(護法, Dharmapāla)의 『성유식보생론』의 한역427)과 규기(窺基)의 『유식이십론 술기』428)가 전하고, 비니타데바(Vinitadeva)의 티베트어 주석서429)가 남아있다. 이 가운데 호법의 『성유식보생론』은 극미관련 부분에 대한 주석을 생략하고 있는 데, 이는 아마도 호법이 동일한 주제로 『관소연론석』430)을 저술하고 있기 때문으 로 추측된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규기의 『술기』와 비니타데바의 주석을 참조하면 서, 세친의 『유식이십론』의 면모를 고찰해 볼 것이다. 『유식이십론』에 대한 현대적 연구로는 3종의 한역과 티베트역을 대조(對照)하 고 주석을 붙인 사사끼 겟쇼(佐佐木月樵)431)의 연구와 이에 산스크리트어 번역을 추가한 우이하꾸주(宇井伯壽)432), 그리고 야마구치 스스무(山口益)433)의 세친유식 논서에 대한 연구 등이 있다. 이들의 연구는 모두 각각의 판본들에 대한 대조와 문헌적 분석에 주력하고 있기 때문에 『유식이십론』에 나타난 세친 유식철학의 분 석은 소략하게만 다루고 있다. 최근에 출간된 효도 가즈오(兵藤一夫)의 연구434)는 정되면서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이 종결되었다. Kano, Kazuo (2008) "Two Short Glosses on Yogācāra texts by Vairocanarakṣita: Viṁśikāṭīkavivṛti and *Dharmadharmatvāvibhāgavivṛti." In Francesco Sferra, ed., Sanskrit Texts from Giuseppe Tucci's Collection. Part I. Manuscripta Buddhica 1. Serie Orientale Roma 104. Rome: Istituto Italiano per l'Africa e l'Oriente, 343 - 380. 『유식이십론』의 상세한 문헌정보와 최신연구에 의거한 산스크리트 교정본과 영어번역을 위해서는 실 크(Silk)의 다음 연구를 참고하기 바란다. Silk, Jonathan A. (2016) Materials Toward the Study of Vasubandhu's Viṁśikā (I): Sanskrit and Tibetan Critical Editions of the Verses and Autocommentary, An English Translation and Annotations. Harvard Oriental Series; v. 81. MA: Harvard University Press. 423) 『唯識論』 (破色心論). 天親菩薩造 後魏瞿曇 般若流支譯. No. 1588. 424) 『大乘唯識論』. 天親菩薩造. 陳天竺三藏 真諦譯. No. 1589. 425) 『唯識二十論』. 世親菩薩造. 大唐三藏法師 玄奘奉 詔譯. No. 1590. 426) nyi shu pa'i tshig le'ur byas pa = vimśikakārikā (西藏大藏經/ 『南天書局編輯部 編』 第40卷: bsTan 'Gyur. 台北: 南天書局, [1991]. 427) 『成唯識寶生論』 (一名二十唯識順釋論). 護法菩薩造. 大唐三藏法師義淨奉 制譯. No. 1591. 428) 『唯識二十論述記』. 翻經沙門 基撰.. No. 1834. 429) Vinītadeva (dul ba'i lha). rab tu byed pa niy shu pa'i grel bshad. P5566, vol. 113. 430) 『觀所緣論釋』. 護法菩薩造. 大唐三藏法師 義淨奉 制譯. No. 1625. 431) 佐佐木月樵, et al. (1992) 『唯識二十論の對譯硏究』. 佐佐木月樵; 山口益 共譯. 東京: 國書刊行會, (再刊 1977). 432) 宇井伯壽 (1953) 『四譯對照唯識二十論硏究』, 大乘佛敎硏究4, 岩波書店. (再刊 1980) 433) 山口益 et al. (1968) 『世親唯識の 原典硏究』. 京都:法藏館.. 434) 兵藤一夫 (2006) 『唯識ということ: 『唯識二十論』を讀む』. 東京: 春秋社. (김명우 이상우 譯 (2011) - 194 - 규기(窺基)와 비니따데바의 주석을 참고하여 『유식이십론』에서 세친이 주장하는 의미를 상세히 설명하고 저자 자신의 해설도 첨부하였다.435) 효도 가즈오는 일찍 부터 유식무경(唯識無境)의 의미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 왔으며, 『유식이십론』에 대한 저술을 발표한 이후에 유가행파의 극미설에 대한 몇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 다.436)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효도 가즈오를 제외하면 지금까지 『유식이십론』연 구는 대체로 문헌적 연구에 머물러 있었다. 이러한 연구관행은 유식철학을 확립 하기 위해서 세친이 적극적으로 반론자들과 대론을 벌이고 있는 철학적 논쟁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측면이 있다. 먼저 『유식이십론』의 구조를 통해 세친이 전개하고 있는 논리를 간단히 검토 해 보겠다. 『유식이십론』은 총 22게송과 그에 대한 세친의 주석으로 이루어져 있 다.437) 이를 주제에 따라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I. 종지: “삼계유식”의 경증 v.1 II. “삼계유식”의 이증 vv.2 - 21 1. 유식에 대한 논증 1) 시간, 공간, 상속, 작용 vv.2 - 3 2) 지옥중생 vv.4 - 5 3) 식의 상속과 업의 훈습 vv.6 - 7 4) 12처(āyatana)설 vv.8 - 10 2. 극미설: 법무아의 확립 1) 극미설들 v.11 2) 7극미화합 v.12 『유식불교 - 유식이십론을 읽다』. 서울: 예문서원.) 435) 그 외에 다수의 서구어 번역이 있으며, 그 중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K. N. Chatterjee (1980) Vasubandhu's Vijnapti-Mātratā-Siddhi, Vani Vihar Press, Varanasi.; Stefan Anacker. (1984) Seven Works of Vasubandhu: The Buddhist Psychological Doctor, Motilal Banarsidass.; Francis H. Cook (1999) Three Texts on Consciousness only, Numata Center for Buddhist Translation and Research. 436) 兵藤一夫. (2005)「初期瑜伽行派の極微說批判 (一)」, 『佛敎とジャイナ敎: 長崎法潤博士古稀記念論 集.』. 長崎法潤博士古稀記念論集刊行會 編. 東京: 平樂寺書店.; 兵藤一夫. (2006)「初期瑜伽行派の極 微說批判 (二)」, 『佛敎學セミナ―』, 84. 437) 『유식이십론』의 게송의 숫자는 논서의 주장명제를 제시하는 게송1과 결어에 해당하는 게송22를 게 송으로 편입시키는가에 따라 22게송(산스크리트본), 21게송(한역본), 20게송(티베트역본) 등으로 차이 가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출입이 없는 편이다. 여기서는 산스크리트본을 따라 22게송 체제로 설명하 고자 한다. - 195 - 3) 극미화합 (전체와 부분) vv.13 - 14 4) 극미의 성질 v.15 3. 인식 1) 현량 v.16 2) 기억 v.17 4. 타자의 존재 1) 타상속 vv.18 - 20 2) 타심지 v.21 III. 결어: 유식은 불지(佛智)의 영역 v.22 『유식이십론』의 전체적인 구도는 게송1에서 주장명제를 제시하고, 2 - 21게송에 걸쳐 실재론자들의 질문, 12처설의 해석, 극미부정을 통한 법무아 확립, 인식론, 타자의 존재증명과 같은 주제를 놓고 반론자들과 논쟁을 벌인다. 그리고 마지막 게송22에서 궁극적으로 유식성(vijñaptimātrata)은 ‘붓다의 인식영 역’(buddhagocara)에 속하는 것이라는 고백으로 마무리한다. 논문의 주제와 관련해서 이곳에서는 게송1의 명제와 게송8 - 10의 12처설 논 증, 게송11 - 15의 극미설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12처설과 극미설의 주제는 각각 인무아와 법무아의 확립을 위한 것이라고 세친 스스로가 밝히고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논문의 중반에 『구사론』에 드러난 설일체유부와 세친의 12 처설을 비교적 상세히 검토해 보았다. 구사론주 세친은 12처설의 실유성을 주장 하였고, 상응하여 다섯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의 실재성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이곳 『유식이십론』에서 세친은 12처설이 단지 인무아를 설명하기 위한 숨은 의도를 가 지고 설해졌다는 입장으로 선회한다. 또 극미설은 법무아의 확립을 위해 설해진 것으로 해명되는데, 여기서도 역시 세친은 기존의 입장을 완전히 바꾸어 극미존 재의 부정을 그 근거로 삼는다. 세친이 유식철학을 확립하는 전략은 먼저 12처설 의 가설적 성격과 극미존재의 부정을 통해 인무아와 법무아를 확립하는 것이다. 설일체유부는 대상과 인식 사이에 연속성을 옹호한 반면 상좌 슈리라타는 양자 사이에 단절이 있다고 보았다. 설일체유부나 경량부의 단계에서 세친은 인식주체 의 무아는 인정하지만, 법무아 즉 물질적 대상세계의 대해서는 그 실재성을 주장 하였다. 『반야경』계통에서 일체 존재의 공성(空性)이 제기된 이후 대상을 본다는 것은 그것들의 무실재성을 본다는 의미로 전환되었다. 그렇다면 인식주체에게 포착되는 - 196 - 인식대상은 무엇인가? 중관은 그것들에 실재성이 없다는 점에서 공(空)한 것이라 고 주장하고, 유식은 그것이 마음의 현상으로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유식적 관점 에서 외부에 대상이라고 보이는 것들은 사실 마음이 현현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에 집착하는 것은 허망분별일 뿐이다.438) 따라서 대승의 무아성은 인식주체 인 자아(ātman)의 무아(無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대상세계도 무 아(dharmanairātmya)라는 것을 증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유식에서의 법무아는 바로 그 대상세계가 단지 마음의 현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기 유식철학의 대표적인 경전인 『능가경』(Laṇkāvatarasūtra)에는 외부대상의 실재 성 부정을 통한 유심(cittamātra)의 획득이 해탈과 직결되어 있다고 가르친다.439) 외부대상에 대한 생각은 분별에 지나지 않으며, 붓다는 분별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1) 그것은 바로 외부존재가 비존재하기 때문에 집착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에 의해 보여지는 것에만 (svacittadṛśyamātra) 머무르기 때문에 이원론에 떨어지지 않으며, 분별이 작 용하지 않는다. 2) 형상의 영역(대상)이 비존재하고 자신의 마음에 의해 보여지는 것만을 인식 하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에 보여지는 것에 대한 분별(vikalpa)은 발생하지 않 는다. 3) 분별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무형상(animitta)이고, 공성(śūnyata)이며, 무 원(apraṇihita)의 세 가지 해탈(vimokṣa)에 들어가기 때문에 [평등한 마음의] 해탈(mukta, 捨)이라고 한다.440) 438) 대혜여, 일체 중생들은 모든 대상이 자신의 마음이 현현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능취 소 취를 생각하여 허망한 집착을 일으키며, 온갖 분별을 일으켜서 유무(有無)의 견해에 떨어진다. 외도의 잘못된 견해를 키우고 익숙해져서 심심소의 다르마들이 상응하여 일어날 때, 외부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나와 나의 것이라는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허망분별이라고 이름 한다. 『大乘入楞伽經』: 大慧!一切眾生於種種境,不能了達自心所現,計能所取虛妄執著,起諸分別墮有無 見,增長外道妄見習氣,心心所法相應起時,執有外義種種可得,計著於我及以我所,是故名為虛妄分 別。(T16.609b16 - 20) 439) 『능가경』과 세친의 시대적 선후, 사상적 영향관계에 대한 연구로는 박창환 (2011)과 Schmitthausen (1992)를 참고하기 바란다. 슈미트하우젠은 『능가경』의 편집자가 『유식삼십송』을 인 용하기 때문에 세친 이후라고 주장하는 반면, 박창환은 『석궤론』에서 『능가경』 인용이 나타나므로 세 친이 『능가경』을 활용하였다고 주장한다. 이 논문은 사상사적 관점에서 박창환의 견해를 따르고 있 다. 440) LAS III.61. (176.2 - 7): tat kasya hetor yaduta bāhyabhāvābhāvād anabhiniveśāt | svacittadṛśyamātrāvasthānād dvidhāvṛttino 'pravṛtter vikalpasya | nimittagocarābhāvāt svacittadṛśyamātrāvabodhanāt svacittadṛśyavikalpo na pravartate | - 197 - 『능가경』의 본문에서는 첫째로 외부대상의 비존재, 둘째 자신의 마음에 의해 보 여지는 것만을 인식, 셋째로 분별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1)과 2) 는 동일한 내용을 바꾸어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 때 ‘외부존 재’(bāhyabhāva)는 ‘형상의 영역’(nimittagocara)441)과 평행하는 개념으로 설명 된다. 인식론적인 차원에서 볼 때, 어떤 지각되는 대상은 모두 ‘단지 마음에 의해 지각되는 것들일 뿐’이며, 그렇기 때문에 지각되는 대상과 지각하는 주체는 이원 론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마음이 인식대상을 지각하는 것에는 분 별이 개입하지 않고, 바로 자신의 마음에 의해 보여지는 것일 뿐이다. 바로 문장 3)은 마음에 의한 지각에는 분별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지각되는 일체의 존재 들이 모두 자신의 마음에 그와 같이 지각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 자체 가 공성(空性) 등의 해탈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442) 이 『능가경』의 주 장이 흥미로운 것은 외부존재의 실재성 부분을 제외하고 인식론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비유자-경량부 혹은 상좌 슈리라타의 주장과 동일시될 수 있다는 점이다. 역으로 그렇기 때문에 첫 번째 조건만 해소된다면 곧바로 『능가경』의 유심사상으 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며, 실제로 이 한 걸음의 도약이 완결되는 곳이 『유식이 apravṛttivikalpasyānimitta śūnyatāpraṇihitavimokṣatrayāvatārān mukta ity ucyate || 『入楞伽經』: 大慧!我說不同彼外道法。何以故?以不執著外物有無故,建立說於自心見故;不住二處不 行分別諸相境界故;以如實知自心見故;不生自心分別見故;以不分別一切相者,而能入空、無相、無願 三解脫門名為解脫。(T16.547c21 - 27). For English translation, See The Laṅkāvatāra Sūtra A Mahayana Text, Translated for the First Time from the Original Sanskrit by Daisetz Teitaro Suzuki (1932), based upon the Sanskrit Edition of Bunyiu Nanjio (1923). 441) nimittagocara는 동시에 ‘원인의 영역’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번역이건 내용적으로 는 인식되는 대상의 원인이 되는 어떤 외부적 실재의 존재를 함축하는 것이다. 442) 이같은 주장이 논파하고자 하는 논적은 유물론자(lokāyata)와 거래설자(去來說者, āyavyaya)들이 다. Cf. LAS III.61 (175.14 - 16): bhagavān āha | nāhaṃ mahāmate lokāyatam deśyāmi na cāyavyayam | kiṃ tu mahāmate anāyavyayaṃ deśyāmi | 여기서 스즈키는 āyavyaya를 coming-and-going으로 번역하였다. LAS에서 주장하는 것은 이 coming-and-going을 반대하는 것 이다. 이 때 coming은 적집(samūha)하여 흩어지지 않고 [어떤 것들이 모인] 무더기(rāśi)가 만들어 지는 것(utpādarāśiḥ samūhāgamā utpadyante)이고, going은 파괴(vināśaḥ)를 의미한다. 이처럼 모여서 만들어지고 파괴되어 소멸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지 않은 것이 하나의 명칭을 가질 뿐 이다. Cf. LAS III.61 (175.16 - 176.1): tatrāyo nāma mahāmate utpādarāśiḥ samūhāgamā utpadyante | natra vyayo nāma mahāmate vināśaḥ | anāyavyaya ity anutpādasyaitad adhivacanam | 『入楞伽經』: 佛告大慧:「我不說於盧迦耶陀,亦不說言諸法不來不去。大慧!我說諸法不來不去。大 慧!何者名來?大慧!所言來者名為生聚,以和合生故。大慧!何者名去?大慧!所言去者名之為滅。大 慧!我說不去不來名為不生不滅。」 (T16.547c16 - 21) - 198 - 십론』인 것이다. 세친의 『유식이십론』은 정확히 앞의 『능가경』의 논의 맥락과 동일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게송1에서 『유식이십론』의 대명제, 즉 우리가 속한 세계는 비실재하는 것이며 단지 표상일 뿐이라는 주장을 3구(句)로 제시한다. (종) 이것(삼계에 속하는 것)은 오직 표상일 뿐이다. (인) 실재하지 않는 대상이 비슷하게 현현한 것이기 때문에, (유) 눈병 걸린 자가 실재하지 않는 머리카락이나 달을 보는 것과 같이.443) 세친은 『유식이십론』의 종지(宗旨)를 논리식의 형식으로 제시하였다. 삼지작법의 기본구조는 주장명제(宗)와 그것에 대한 이유(因), 그리고 동일한 종류의 사례(喩) 이다. 인도논리학의 논증에서 일차적 조건은 주장명제의 논의영역이 한정되고, 그 논의영역 안에서 판단의 근거(인)와 동일한 종류의 사례(유)가 찾아져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논의영역은 ‘삼계에 속하는 것’이고 동일한 사례는 ‘눈병에 걸린 자’이다. 따라서 이 전체의 논의는 삼계에 속한 것과 눈병에 걸린 자가 보는 세계 가 동일한 범주에 있다는 전제에서만 가능한 것이다.444) 그러므로 이 삼계는 올 바른 시각에 의해 바르게 파악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 은 눈병에 걸린 자가 두 개의 달을 보는 것처럼 실재성이 결여된 것, 다시 말해 “단지 표상일 뿐(vijñaptimātra)”이다. 따라서 게송1에 제시된 명제에 따르면, 이 세계는 궁극적 실재가 아니며 잘못된 감관에 의한 지각처럼 대상과 유사하게 현 현한 것으로 “단지 표상일 뿐”인 것이다. 여기서 논의영역의 한정으로 인해 궁극 적 차원에서 실재의 문제는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본문의 주장명제에서 는 궁극적 차원에서 대상의 실재성이나 존재여부는 전제되어 있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세친의 주장은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인식은 외부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대상을 조건으로 할 뿐이라는 비유자-경량부의 무경각(無境覺)설과 유사하다 고 할 수 있다. 인식주체가 무언가를 지각한다는 것은 실재하는 머리카락이나 달 의 존재를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눈병 걸린 사람이 머리카락을 보듯이 혹은 두 번째 달을 보듯이 실재하지 않는 어떤 인식대상을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443) Vimś. 1 (3.4 - 5.): vijñaptimātram evedam asadarthāvabhāsanāt | yadvat taimirikasyāsatkeśacandrakādidarśanaṃ ||1abcd|| 444) 물론 반대자들은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세친이 이 논리식을 세우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과, 그렇기 때문에 이 논리식이 성 립하기 위한 전제를 세친이 수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 199 - 예상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대상과 유리된 인식대상의 지각이라는 문제는 12 처의 실재성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12처의 실재성을 주장하였던 세 친이 『유식이십론』에서 12처의 가설적 성격을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 다. 동일한 주제를 극미론의 관점에서 분석하였던 『구사론』 100ab이하의 논란에 서 구사론주 세친은 『유식이십론』의 주장명제와 유사한 명제에 대해 전혀 반대방 향의 논리를 전개하였다. (a) 비록 [개별적인] 극미는 감각기관을 초월해 있지만, [그것들이] 결합한 것들 은 직접지각의 대상이 된다. (b) 그것들이 작용을 일으키는 것은 마치 눈병을 가진 눈 등이 머리카락뭉치를 지각하는 것과 같다.445) (c) 극미와 마찬가지로 그것들 중에서 하나의 머리카락은 감각기관을 초월해 있다.446) 여기서는 개별적인 극미의 층위는 감각기관을 초월해 있는 궁극적인 존재의 영역 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극미들이 결합하여 지각대상이 된 경험 세계는 실재성이 없고 허구적 존재라는 주장은 부차적이다. 그러나 『유식이십론』 의 관점에서 보자면, 감각지각을 초월한 궁극적 존재의 차원은 일차적 관심의 대 상이 아니고, 경험되는 현상세계의 허구성이 논의의 초점인 것이다. 바로 이 측면 만을 한정한다면 위 인용문의 메시지는 『유식이십론』의 주장명제와 정확히 일치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더구나 세친은 여기에서 눈병걸린 자의 머리카락 비유 를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어서, 감각지각에 의해 파악되는 세계가 허구적임을 논 증하고 있다. 지각되는 세계는 극미들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물질의 세계이기 때 문에 항구적이지 않고 실재성을 지니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눈병을 가진 자가 머리카락뭉치를 보는 것과 유사한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 존재인 극미는 감각기 관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지각되지 않는다. 차이점은 『유식이십론』에서는 이 궁 극적 존재의 차원에 대한 논의를 배제하고 대신 지각경험이 일어나는 현상세계에 445) 여기서 vikīrṇa는 ‘흩어진(scattered)’ 혹은 복합어에서 ‘가득한(full of, filled with)’ 등의 의미영역 을 지닌다. ‘흩어져 있는’이라는 의미를 취할 경우에도 눈병걸린 눈이 실재하지 않는 머리카락과 같은 것을 본다는 의미에서 해석할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앞의 '결합하여(samasta)'의 맥락에 유의하여 모여있을 때 지각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현장과 진제도 같은 취지로 번역하고 있다. 446) AKBh III.100ab (189.24 - 190.2.): paramāṇvatīndriyatve ‘pi samastānāṃ pratyakṣatvaṃ (190) yathā teṣāṃ kāryārambhakatvaṃ cakṣurādīnāṃ ca taimirikānāṃ ca vikīrṇakeśopalabdhiḥ | teṣāṃ paramāṇuvad ekaḥ keśo 'tīndriyaḥ | - 200 - 대한 규명에 초점을 둔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친이 이미 해당 『구사론』 100ab의 분석에서 『유식이십론』과 유사한 결론에 도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12처설의 실재성을 주장하였던 세친의 입장보다는 계(界)의 실재성과 12처가유설을 주장하였던 상좌 슈리라타의 입장에 가까운 것으로 파악된다. 세친의 이론에서 이러한 불일치는 세친철학의 점진적 전이과정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온, 처, 계 3과(科)의 실재성을 주장한 설일체유부와 온과 처의 실재성을 옹호한 초기 세친에 대비하여 12처의 경험세계를 가설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계(界)만의 실재성을 인정하는 비 유자-경량부의 입장으로 이행한다면, 다음으로 존재의 궁극적 기본요소인 계(界) 의 실재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물질의 궁극적 기본단위인 극미에 대한 분석과 직결된다. 실 제로 『유식이십론』에서는 이 극미의 부정을 통해 모든 현상세계는 ‘단지 표상일 뿐’이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2. ‘오직 표상일 뿐’(vijñaptimātra)의 해석447) 세친에 따르면 ‘오직 표상일 뿐’이라는 명제는 대승(大乘, mahāyāna)의 정체 성을 규정하는 교설이다. 이것은 인식론적 차원에서 외부대상의 실재성을 부정하 는 상좌 슈리라타의 ‘오직 인식대상일 뿐’과 직결되는 개념이다. 『유식이십론』을 비롯한 대승의 논서들에서 반복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 인무아와 법무아(法無 我, dharmanairātmya)의 확립에 대한 강조이다. 여기에서 인무아의 교설은 초 기불교 이래 확고하게 정립되어 있었던 원칙이었다. 반면 대상세계의 존재는 기 본적으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교설에 따라 무상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일차적 인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설일체유부의 등장으로 대상세계의 실재성이 철학적 논란의 중심주제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반야경전 계열의 논사 들은 일체(一切)의 공성(空性)을 핵심명제로 제시하였으며 그것은 일체법 무아라 고 하는 개념으로 정의되었다. 447) Vimś 1 (3.3 - 4): cittamātram bho jinaputrā yad traidhātukam iti sūtrāt | cittaṃ mano vijñānaṃ vijñaptiś ceti paryāyāḥ | cittam atra sasaṃprayogam abhipretam | mātram ity artha pratiṣedhārthām | 승리자의 아들이여! “삼계에 속하는 것은 오직 마음뿐이다”고 경전에 [설하였다]. 심(心, citta), 의 (意, manas), 식(識, vijñāna)과 요별(了別, vijñapti, 표상)은 동의어들이다. 여기서 ‘심’은 상응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 의도되었고, ‘오직’은 [외계] 대상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다. - 201 - 이 법무아의 명제가 『유식이십론』에서는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된다. 첫째는 “삼계에 속하는 것은 오직 표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경증에 따라 “삼 계에 속하는 것은 오직 마음일 뿐”인데, 여기서 마음(心, citta)은 의(意, manas), 식(識, vijñāna), 그리고 ‘표상(表象, vijñapti)’448)과 동의어라는 것이다. 아함경 전승에서 심의식은 자주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아비다르마철학에 이르러서 는 심의식이 온, 처, 계 3과의 통합이라는 측면에서 의미를 강화하였다. 『비바사 론』 72권에서는 심의식은 표현에는 차이가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차이가 없다고 설명하면서, 그 명칭의 차이를 네 가지 관점에서 분석하였다.449) 첫째는 명칭 자 체가 지니는 차이이고, 둘째는 심의식이 각각 미래, 과거, 현재에 상응하며, 셋째 는 “계(界)에서는 심(心)이라 하고, 처(處)에서는 의(意)라고 하며, 온(蘊)에서는 식 (識)이라” 한다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심(心)은 종족(種族), 의(意)는 문(門), 식(識) 은 적집을 뜻한다는 해석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심의식을 동의어로 간주할 때, 그것에는 온, 처, 계에 상응하는 범주를 포괄한다는 의미가 있다는 점 이다. 3과(科)의 체계에서 인식의 영역에 해당하는 심의식은 이제 하나의 개념으 로 단순화될 수 있다. 세친은 그것이 바로 ‘표상(vijñapti)’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다. 여기서 ‘오직’이라고 하는 것은 의식과 별도로 독립된 대상(artha)의 존재를 배제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앞의 명제는 ‘삼계에 속하는 것은 [외계에 존재하 는] 대상이 아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우리가 경험하고 살아가는 욕망의 세계(欲界), 물질적 세계(色界), 비물질적 세계(無色界)는 ‘오직 표상일 뿐’이며 그 밖에 따로 존재하는 어떤 외부적 대상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이 삼계를 궁극적 실재의 차원에서 본다면, 유식(唯識)은 실재를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448) 현장은 여기서 vijñapti를 요별(了別)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vijñapti를 인식행위나 작용의 측면에 강조점을 두어 번역한 것으로 앞의 심의식이 인식 혹은 인식주체의 명사적 의미에 한정되는 것과는 일관적이지 않다. 449) 계경에 설하기를 심의식 세 가지는 비록 표현에는 차이가 있지만 [의미에는] 차이가 없다. 또 어떤 이는 설하기를, 심의식 세 가지에는 차이가 있다. [첫째는] 이름에 차이가 있으니 심(心), 의(意), 식 (識)이라고 칭하기 때문이다. 또한 시간에 차이가 있으니, 과거를 의(意)라 하고, 미래를 심(心)이라 하 며, 현재를 식(識)이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각각의 개념이] 설립된 체계에 차이가 있으니, 계(界)에서 는 심(心)이라 하고, 처(處)에서는 의(意)라고 하며, 온(蘊)에서는 식(識)이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의미에도 차이가 있는데, 심(心)은 종족의 뜻이고, 의(意)는 발생하는 문(門)의 의미이며, 식은 적집의 뜻이기 때문이다. 『阿毘達磨大毘婆沙論』: 故契經說心意識三。聲雖有異而無差別。復有說者。心意識三亦有差別。謂名即 差別。名心名意名識異故。復次世亦差別。謂過去名意。未來名心。現在名識故。復次施設亦有差別。謂 界中施設心。處中施設意。蘊中施設識故。復次義亦有差別。謂心是種族義。意是生門義。識是積聚義。 (T27.p.371b2 - 9) - 202 - 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삼계를 단지 경험적 세계의 차원으로 한정한다면, 유식 (唯識)은 이 현상세계가 단지 그렇게 표상된 것일 뿐이며 허망한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바로 이 해석이 『유식이십론』에서 세친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3절. 『유식이십론』의 무아(無我)논증 이제 『유식이십론』에서 세친의 변화한 12처해석(vv.8 - 10)과 극미부정(vv.11 - 15)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 세친은 이 두 가지 테마를 각각 인무아와 법무아의 확립이라는 주제와 관련시킨다. 다시 말해 12처설이 가르쳐진 것은 인식주체의 무아성을 깨닫게 하기 위한 방편일 뿐으로 12처의 문을 통해 현현하는 세계가 실 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극미개념의 부정에서는 일체의 물질적 존재의 궁극 적 구성요소라고 하는 극미가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의존하는 물질(색)의 실재성도 부정된다. 1. 12처설과 인무아(vv.8 - 10) 이 본문은 12처설에는 숨겨진 의도를 가지고 설해진 미요의(未了義)설이라는 주장과 유식가로서 세친의 12처해석이라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식이 십론』에서 세친은 12처설이 가르쳐진 이유는 교화되어야 할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한 특별한 의도 때문이라고 설명한다.450) 따라서 12처(處)의 교설이 문자 그대로의 진리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화생(化生)중생이 존재한다 고 설하는 것과 같다. 생명을 가진 존재들인 유정(有情)에는 난생(卵生), 태생(胎 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의 네 종류가 있는데 이를 사생(四生)이라 한다. 이들 은 태어나는 양상과 존재양식에 차이가 있을지라도 모두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점에 동등하다.451) 난생(卵生)은 알에서 태어난 유정을 말하고, 태생(胎生)은 모태 를 통해 태어난 유정이며, 습생(濕生)은 모기 등과 같이 습기(濕氣)에서 태어나는 450) Vimś 8 (5.18 - 19): rūpādyāyatanāstitvaṁ tadvineyajanaṁ prati| abhiprāyavaśād uktam upapādukasatvavat ||8|| 물질(색) 등의 십이처가 존재한다는 것은, 교화를 받아야 하는 자들(중생)을 위하여, 숨겨진 의도를 가지고 설해졌다. 화생중생과 같이. 451) 『阿毘達磨俱舍論』: 謂有情類卵生胎生濕生化生。是名為四。生謂生類。諸有情中雖餘類雜而生類等。 (T29.43c24 - 26) - 203 - 것이고, 화생은 알, 모태, 습기 등과 같은 매개가 없이 갑자기 생겨나는 존재들이 다.452) 『구사론』에서 화생에 포함되는 유정으로 나락가와 천상의 유정, 그리고 중 유의 존재를 상정하였는데, 『유식이십론』의 앞부분에서 이미 지옥유정이나 천상 의 유정에 대해서는 존재를 인정하였다. 따라서 이곳에서 실제는 존재하지 않지 만 숨겨진 의도를 가지고 설해진 화생(化生)은 중유(中有)를 의미해야 할 것이다. 유정은 윤회의 과정에서 태어나는 순간의 생유(生有), 삶을 살아가는 본유(本有), 죽음의 순간의 사유(死有), 그리고 죽음과 다시 태어나는 순간까지의 중유(中有)의 단계가 설정된다. 여기서 중유 단계의 화생(化生)은 완전한 의미에서는 실재하지 않지만 숨은 의도 때문에 존재한다고 설하였다는 것이 게송8의 전제이다. 『구사론』에는 이 중유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유여사(有餘師)의 주장에 대하여 세친이 경증(經證)과 이증(理證)을 들어서 반박하는 부분이 있다. 유여사는 설하기를, “죽음으로부터 생처(生處)에 이르는 사이는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중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453) 유여사의 정체에 대해서는 『비바사론』과 『이부종륜론』등에 같은 입장을 가진 분 별론자 등이 거론되고 있다.454) 효도 가즈오는 『유식이십론』에서 중유의 실재성 을 부정하는 반론자를 경량부라고 추정한다.455) 그런데 『구사론』 단계에서 세친 은 중유의 실재성을 인정하는 아비다르마의 전통적인 입장에 서서 유여사의 주장 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만일 중유의 비실재성이 윤회의 연결고리에서 중간단 계를 부정하면, 윤회의 단절을 의미하게 될 것이며, 나아가 윤리적 행위와 수행에 서 문제가 야기될 것이다. 어떤 선악의 행위가 결과로 연속성을 지니지 못하고 단절된다면 윤리적 책임성도 소멸할 것이고 수행의 노력도 무용한 것이 될 것이 다. 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단견론자(斷見論者)들이 본문에서 언급한 “교화되어야 452) 어떤 곳(즉 앞에 언급한 알, 태, 습기 등)에도 의탁함 바 없이 생겨나는 유정류를 화생이라 이름하 니, 예컨대 나락가나 천(天), 중유 등과 같은 것이다. 즉 감관을 모두 갖추어 결함이 없으면서 수족이 나 마디마디(支分)이 단박에 생겨나니, 없는 듯하다가 홀연히 있기 때문에 화생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권오민 (2002), 388. 『阿毘達磨俱舍論』: 云何化生。謂有情類生無所託是名化生。如那落迦天中有等。具根無缺支分頓生。無 而欻有故名為化。(T29.44a1 - 3) 453) 『阿毘達磨俱舍論』: 有餘部說。從死至生處容間絕。故無中有。(T29.44b15 - 16) 454) 『비바사론』 69권에서는 중유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이들을 분별론자라고 『이부종륜론』에서는 대중 부, 화지부, 일설부, 설출세부, 계윤부 등이라고 소개한다. 권오민 (2002), 393. esp. fn. 84참조. 455) 효도 가즈오, 김명우역 (2011), 125. - 204 - 할 자들”이라는 것이 규기의 주석에서의 설명이다.456) 업의 작용과 심상속이 끊 어지지 않고 이어진다는 사실을 어리석은 자들에게 설명하기 위하여 화생(化生)이 라는 특수한 개념이 교설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문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와 마찬가지 차원에서 12처설이 설해졌다. 『유식이십론』의 세친이 많은 점에서 경량부 상좌 슈리라타의 철학적 관점을 수용 발전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슈미트하우젠에 의해 논증된 바가 있다. 중 유의 존재에 대해서도 세친은 『구사론』에서 중유의 실재성을 수용하는 입장이었 지만, 『유식이십론』의 본문에서는 중유의 비실재성을 전제하고 논의를 전개한다. 불교철학에서 논증은 논지를 전개하는 자와 반대자가 모두 인정하는 예증을 제시 해야 유효한 것으로 인정된다. 따라서 논쟁의 표적은 중유의 비실재성을 주장하 였던 학파들 가운데 하나이며, 설일체유부는 중유의 실재성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유식이십론』 논의의 맥락에서 대론자는 경량부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세친 이 상좌 슈리라타의 철학에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식이십 론』에서 주로 논쟁의 대상으로 상정하는 부분은 상좌 슈리라타의 극미실재성 부 정을 통한 법무아의 확립과 관련이 있다. 세친이 상좌 슈리라타의 철학에서 유식 사상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장애물을 제거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궁 극적 존재의 외계 실재성이다. 따라서 『유식이십론』에서 세친이 일체는 ‘오직 표 상일 뿐’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경량부 상좌의 궁극적 실재, 즉 극미개념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에 초점이 모아지게 되는 것이다. 12처가유설의 논증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세친은 단지 표상일 뿐인 현상세계의 해명에 있어서 상좌 슈리라타의 주장을 수용하였다. 게송9 이하의 12처설에 대한 재해석은 세친의 12처실유설을 다루면서 살펴보았던 상좌 슈리라타의 1법처설 논 란을 염두에 두고 고찰해야 한다. 상좌설에 따르면 물질(색)은 10처에 한정되고, 법처와 의처는 비물질적인 영역에 속한다. 이것은 10처의 가설적(prajñapti) 성격 으로 인해 1법처로 수렴될 수 있다. 먼저 게송9는 12처 전부의 해명에 관심을 두 는 것이 아니라 12처 가운데 물질(색)에 해당하는 10처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 한다. 즉 논의의 범주가 안처(眼處)와 그에 상응하는 색처(色處), 그리고 그에 상 456) 붓다께서 화생유정을 설하신 것처럼. 다시 말해 단견을 교화시키기 위하여 중유가 있다고 설하셨지 만, 실제로 화생유정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경량부의 중유에 대한 주장은 대승의 설과 같다. [중유 는] 단지 가립된 유정일 뿐으로 실재하는 자아는 없다. 『唯識二十論述記』: 如佛亦說化生有情。即是中 有。為化斷見。說有中有。非是實有化生有情。經部中有說如大乘。但假有情。無實我故。(T43.989c20 - 23) - 205 - 응하는 색(色) 나아가 촉(觸)까지의 다섯 감각대상으로 한정된다. 게송1에서 이미 표상(表象, vijñapti)이 심의식과 동의어라고 하였기 때문에 10색처로 한정된 논 의 범주에서는 의식의 영역을 논외로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유식이십론』이 규명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주제는 바로 물질적 영역의 무아성이라는 사실을 재확 인할 수 있다. 비유자-경량부 체계에서 물질(색)의 영역은 10처로 한정되었다. 이제 그 열 가 지 입처는 『유식이십론』에서 종자와 현현으로 요약된다. 물질(색)로써 현현하는 표상은, 특별한 전변에 도달한 자신의 종자로부터 생겨 나는데, 세존께서는 그 종자와 어떤 현현하는 것, 그 둘을 그 식의 안처와 색 처로써 순서대로 설하였다.457) 본문은 두 단계의 설명을 제공한다. 첫째는 표상(表象, vijñapti)이란 물질(색)로 현현한 것(rūpapratibhāsā)이며, 그것은 자신의 종자가 전변하여 특정한 단계에 도달하였을 때 생겨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열 가지 입처(入處)의 영역에서 물질 (색)로 현현하는 것들은 표상이다. 이 표상은 종자에서 발생하는데 어떤 종자가 변화(전변)를 이어가다가(상속) 특정한 단계에서 생겨나는 것(차별)이다. 불교전통 에서 안처에서 색처 등을 설명하였던 12처설은 사실 이 때의 종자와 현현을 분석 적으로 나열한 것일 뿐이다. 이같은 해석을 통해 물질(색)의 10처는 모두 표상 (vijñapti) 하나로 단일화된다. 흥미로운 점은 감각기관을 종자로 감각대상을 현현으로 설명하는 부분이다. 이 후 『유식삼십송』의 유식설에서는 종자는 알라야식의 제8식, 현현은 전5식에 배속 한다. 따라서 『유식이십론』에서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을 종자와 현현으로 설명하 는 것은 매우 특이한 해석이라 하겠다.458) 특히 『구사론』에서 10처의 구성요소로 457) Vimś. 9 (5.27 - 6.1): rūpapratibhāsā vijñaptir yataḥ svabījāt pariṇāmaviśeṣaprāptād utpadyate tac ca bījaṁ yatpratibhāsā ca sā te tasyā vijñapteś cakṣūrūpāyatanatvena yathākramaṁ bhagavān abravīt| 458) 규기는 『술기』에서 이 부분이 “마음 밖에 존재하는 실재하는 물질(색)”을 주장하는 경량부를 논파 한다고 주석하였다. 제8식이 있다고 건립하지 않기 때문에, 종자가 안 등의 근이라고 설하지 않으면, 안 등은 바로 6식을 떠나서 있게 된다. 때문에 종자가 안 등의 근이 된다고 설한다. 『唯識二十論述 記』: 破經部等心外實色。由未建立有第八識。若不說種為眼等根。眼等便離六識而有。(T43.990c17 - 18) 경량부는 6식체계에서 전5식이 5근(감각기관)과 5경(감각대상)의 화합으로 발생한다. 따라서 이 체계 에서 물질적 영역에 해당하는 10처의 외부실재성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5근과 5경이 비물질적 사태임 을 입증해야 한다. 그러나 경량부는 종자들의 흐름을 포함하는 잠재식인 8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 206 - 간주되었던 극미가 이곳에서는 감각기관의 종자(種子)와 감각대상의 현현(顯現)으 로 설명된다. 이는 인식주관과 인식대상이라는 관점에서 의처(意處)와 법처(法處) 로 압축될 수 있으며, 따라서 감각주체인 종자(種子)가 온갖 대상세계의 현상을 만들어낸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해석은 게송10ab이하에서 특별한 부 가적 해명이 없이 종자와 현현을 각각 여섯 개의 표상(vijñapti), 즉 12입처를 포 함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에 의해 입증된다.459) 물질적 영역인 10색처는 모두 표색(vijñapti)으로 포괄될 수 있으며, 그것은 여 기에서 종자(bīja)와 현현(pratibhāṣā)과 평행을 이룬다. 이로써 설일체유부의 표 색(表色, vijñapti)은 경량부와 유식에서 그 물질적 실재성을 잃고 가설적 존재 (prajñapti)이자 표상(表象, vijñapti)으로 새롭게 해석된다. 그리고 이 표상은 어 떠한 작용력의 잠재태(종자)와 현실태(현현)로 나타난다. 따라서 여기에서 종자 개 념은 물질(색)의 해명에 있어서 실재하는 극미의 존재에 토대를 둔 표색(表色, vijñapti)으로부터 가설적 존재인 표상(表象, vijñapti)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종 자(種子, bīja)개념을 채용한 과도기적 증거가 아닌가 판단된다.460) 그리고 최종적 으로 이 종자와 현현은 모두 표상(vijñapti)일 뿐이라는 결론으로 넘어가게 될 것 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서로 상이한 것으로 여겨졌던 식(識, vijñāna)과 표상(表 象, vijñapti)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질임이 밝혀진다. 이어서 세친은 궁극적으로 12처설 분석을 통해서 목표하는 것이 인무아(人無 我)의 확립에 있다고 재확인하고, 법무아의 확립에 대한 문제로 논의를 전환한다. 그것이 전5식의 현상적 차원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즉 다섯 가지 감각주체의 형상으로 존재하는 종자 가 그 감각의 대상을 현현시킨 것이 다섯 가지 감각대상이 되는 것이다. 규기의 관점에서 볼 때, 『유 식이십론』의 적어도 해당본문은 경량부의 철학체계를 전제로 하면서, 그것의 외계실재성에 대한 비판 을 전개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 같다. 459) Vimś 10a (6.6 - 8): tathā hi deśyamāne pudgalanairātmyaṃ praviśanti | dvayād vijñānaṣatkaṃ pravartate | na tu kaścid eko dṛṣṭāsti na yāvan māntety evaṃ viditvā ye pudgalanairātmya deśanā vineyās te pudgalanairātmyaṃ praviśanti | 왜냐하면 이와 같이 가르쳐질 때 인무아에 오입하기 때문이다. [그] 두 가지(종자와 현현)로부터 [각 각] 6개의 표상을 가지는 것이 생기하지만, 오직 보는 자 내지 생각하는 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다고 알고 나서, 인무아의 가르침에 의해 교화되는 사람들이 인무아에 들어간다. 460) 세친의 일체종자식의 전변 개념의 형성과정에 대해서는 梶山雄一 (1984) 「세친의 전변설」, in (『唯 識思想』. 講座 大乘佛敎8. 平川彰 et al. 李萬 譯. 서울: 경서원, (1993), 156 - 193, esp. 165 - 171.) - 207 - 2. 극미의 부정과 법무아의 확립 (vv. 10b - 15) 게송 10b - 15에서 세친은 법무아의 의미규명과 극미부정의 논증을 통하여 최종적으로 유식(唯識), 즉 ‘오식 표상 뿐(vijñaptimātra)’임을 확립한다. 법무아 의 확립에서는 법무아가 일체의 비존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과 유식(唯 識)은 능취, 소취의 분화 이전의 비대상성이라는 점을 설명한다. 그리고 극미의 부정에서는 단일한 전체, 다수의 극미, 극미의 집적이 모두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 을 차례로 논증한다. 1) 법무아의 확립 게송 10bcd와 세친 자신의 주석에서는 “유식의 교설이 어떻게 법무아를 확립 하는가?”461)라는 주제를 고찰한다. 이에 대한 표준적인 대답은 다음과 같다. 오직 표상이 색 등이라는 다르마의 현현으로 생기하지만, 그러나 물질(색) 등 의 특징을 가진 다르마는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아는 것이다.462) 먼저 ‘오직 표상(vijñaptimātra)’이 물질(색) 등의 형태로 현현하지만, 실제에 있 어서 이 물질(색) 등의 특징을 가진 다르마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질(색) 등 으로 현현하고 경험된 것은 ‘오직 표상,’ 즉 그렇게 인식된 것일 뿐이지 그런 특 징을 가진 어떤 실체적 대상이 외부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유식(唯識) 은 두 가지 측면으로 해석된다. 경험된 세계는 ‘오직 표상일 뿐’이라는 것과 경험 된 것과 같은 그런 특징을 가진 다르마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명제의 전반부는 경량부 상좌의 인식론과 일치하지만, 후반부는 상좌 슈리라타와 설일체 유부의 외계 실재론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존재방식에 있어 서 존재의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유식적 존재의 가능 성마저 부정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실로 어떤 방식으로도 다르마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런] 방식으로 법무아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463) 461) Vimś. 10bcd (6.11): vijñaptimātradeśanā kathaṃ dharmanairātmyapraveśaḥ | 462) Vimś. 10bcd (6.11 - 13): vijñaptimātram idam rūpādidharmapratibhāsam utpadyate na tu rūpādilakṣano dharmaḥ ko 'py astīta viditvā | 463) Vimś. 10bcd (6.13 - 14): na khalu sarvathā dharmo nāstīty evaṃ - 208 - 여기서 『유식이십론』의 유식논증이 삼계(三界)라는 존재영역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논의의 범주가 욕망의 세계, 물질적 세계, 비물질적 세계라고 하는 경험적 세계에 속한다는 것이다. 또한 설일체유부의 경 우에는 물질적 존재, 심리적 존재, 관념적 존재로 일체 존재의 범주를 포괄한다. 그런데 세친은 법무아(法無我)라는 교설(敎說)로 일체의 다르마를 모두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체의 다르마가 ‘단지 표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자 한다. 따라서 법무아는 일체법의 비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물질(색) 등으로 현현한 모습 그대로의 다르마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 직 표상’이라고 설명되는 물질(색) 등은 무엇인가? 그것은 ‘허구적으로 구성된 것’ 을 본질로 하는 것이다.464) 게송10d의 주석에서 세친은 평행구의 배치를 통해 ‘오직 표상’의 의미를 다시 한번 명확히 드러낸다. yo bālair dharmaṇāṃ svabhāvo grāhyagrāhakādiḥ parikalpitas tena kalpitenātmanā teṣāṃ nairātmyaṃ [ .... ] evaṃ vijñptimātrasyāpi vijñaptyantaraparikalpitenātmanā nairātmya praveśāt |465) 어리석은 자들은 다르마가 소취와 능취 등의 자성을 가진다고 변계소집하지만, 허구적으로 구성된 것을 본성으로 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무아이다. [ .... ] ‘오직 표상’도 또한 다른 표상에 의해 허구적으로 구성된 것을 본성으로 하기 때문에 무아에 들어간다. 이곳에서 세친의 설명은 매우 압축적으로 간략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세친의 삼 성설(三性說)에 대한 전체적인 면모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의 변계소집과 그에 반대되는 ‘오직 표상’을 통해 의타기의 대강을 확인할 수 있다. 일체의 다르마들이 12처설의 구도에서와 같이 인식주체(능취)와 대상(소취)로서의 자성(自性, svabhāva)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허망한 분별이다. 그것들은 사 실 ‘오직 표상’일 뿐인데, 이 표상들도 다른 표상들에 의해 허구적으로 구성된 것 들일 뿐이다. 따라서 이 표상들도 실재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표상 차원에서의 존재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표상(表象, dharmanairātmyapraveśo bhavati | 464) Vimś. 10d (6.16): kalpitātmanā ||10d|| 465) Vimś. 10d (6.19 - 20). - 209 - vijñapti)’은 외부에 실재하는 대상과 같은 존재는 아니며 본성에 있어서 무아(無 我)이다. [만일 표상이 무아가 아니라면,] 어떤 표상이 또 다른 표상을 대상으로 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유식성이 성립하지 않게 될 것이다. 표상들이 [실재하는] 대 상을 가지기 때문이다.466) ‘표상,’ 즉 인식된 것은 무아이고 따로 대상을 가지지 않는다. 만일 어떤 인식된 것이 그것의 실재하는 인식대상을 가진다면, 그것은 ‘오직 표상’이라는 명제에 위 반되는 것이다. 여기서 ‘오직 표상’을 의타기적인 존재라고 한다면, 그것은 다양 한 원인과 조건들이 상호작용하여 발생하는 사태를 의미하게 된다. 다시 말해 다 수의 원인이 그 원인과는 같지 않은 어떤 결과를 산출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수 의 극미들을 원인으로 하는 화합(和合, saṃcita)이 어떤 창발적인 결과를 발생시 키는 것과 유사하다. 물론 『유식이십론』에서는 바로 이 극미의 존재가 부정되고, 대신 어떤 궁극적인 실재의 차원이 제시된다. 그것은 제불(諸佛)의 인식대상이며 불가언설을 본성으로 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유식이십론』에서 논의영역으로 하는 삼계의 경험세계를 초월하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제불의 대상’이 라는 것이 설일체유부에서 극미를 묘사하기 위한 개념으로 소개되었다는 점이 다.467) 극미는 일반적인 감각기관을 초월해 있으므로 천안(天眼)으로도 볼 수 있 는 영역이 아니고, 오직 혜안(慧眼)으로만 볼 수 있으며 온갖 부처들의 인식영역 이다. 『유식이십론』에서는 이 붓다의 인식영역(buddhagocara)이 개별적인 극미 가 아니라 유식성(vijñaptimātrata)으로 대치되는 것이다.468) 2) 세친의 극미비판 『유식이십론』에서 극미부정의 주제는 이미 대종의 전변에 대한 비판에서 한 466) Vimś. 10d (6.21 - 22): itarathā hi vijñapter api vijñaptyantaram arthaḥ syād iti vijñaptimātratvaṃ na sidhyetārthavatītvād vijñaptīnāṃ || 467) Cf. 2장 1절 3.: 설일체유부의 고전적 극미설, 2장 2절 1. 468) Vimś. 21cd (10.25 - 28): ajñānādyathā budhasya gocaraḥ ||21cd|| yathā tan nirabhilāpyenātmanā buddhānām gocaraḥ | tathā tadajñānāt tad ubhayam na yathārthaṃ vitathapratibhāsatayā grāhyagrāhakavikalpasyāprahīṇatvāt | 붓다의 인식영역은 지(智) 등의 방식으로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언설을 넘어선 본성에 의해 붓다들의 인식영역, 바로 그것처럼 그것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둘은 여실하지 않다. 거짓으로 현현하는 것에 의해 소취와 능취의 분별이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210 - 차례 예고되고 있다. 설일체유부는 지옥유정들이 자신들의 업(業)에 상응하는 특 정한 대종의 발생과 전변을 통해 지옥에 태어나서 옥졸 등으로 불린다고 주장하 였다. 이에 대해 세친은 만일 그것의 업에 의해 거기에 대종(물질요소)들이 생겨서, 그와 같이 전변이 인정된다면, 무엇 때문에 식의 [전변]은 인정되지 않는가? ||6||469) 라는 질문으로 대종(大種, mahābhūta)의 전변을 식전변의 옹호의 논리로 끌어들 인다. 그런데 아비다르마철학에서 대종은 극미설로 통합되면서 형이상학적 극미와 동일한 개념으로 정착하였다. 따라서 대종의 전변이라는 주제는 극미의 전변이라 는 말로 대치될 수 있는데, 여기서 극미의 전변에 의해 지옥유정과 같은 다양한 사태의 현현을 인정한다면, 극미를 대신하여 식의 전변을 주장하는 것은 왜 불가 능한지 묻는 것이다. 앞서 살펴 본 대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가장 미세한 물질 인 형이상학적 극미는 결국 물질성을 상실하고 비물질적인 존재 나아가 공(空, śūnya)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제기되었다.470) 그리고 유식철학에서 바로 그 공성 (空性)은 유식성으로 설명된다. 이처럼 극미부정에 대한 일차적 암시가 이루어진 후, 12처가유설의 해명과 법무아의 의미가 검토되고, 이어서 본격적인 극미비판이 전개된다. 『유식이십론』 게송11은 적어도 네 학파의 극미설을 요약하고 있으며, 이후 논 란이 되는 결합의 방식을 포함한다면 바이셰시카, 구유부, 신유부, 경량부 상좌, 유식학파를 포함하는 다섯 학파의 극미설을 포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곳에 469) Vimś. 6 (5.6 - 7): yadi tat karmabhis tatra bhūtānāṃ sambhavas tathā iṣyate pariṇāmaś ca kiṃ vijñānasya neṣyate ||6abcd|| 470) Bahyarthasiddhi, 『대승광백론석론』, 『성유식론』에도 형이상학적 극미를 공(空)으로 해석되는 부분 이 등장한다. 슈바굽타는 디그나가의 설을 인용하여 형이상학적 극미는 직접지각될 수 없는 것이고, 공(空, śūnya)으로 수렴되기 때문에 마치 의식과 같은 것이 된다는 유식가들의 주장을 소개한다. 그 러나 슈바굽타는 만약 유식가의 주장이 옳다면 감각기관에 의해 직접지각되는 심심소의 존재성도 인 정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반박한다. BS 33 - 34.; 『大乘廣百論釋論』: 諸有礙法以慧析之。皆有眾分 相依而立 。析若未盡 。恒如麁事 。眾分合成是假非實 。析之若盡便歸於空 。如畢竟無越色根境 . (T30.223a23 - 25). 저항을 가진 온갖 다르마를 지혜로 분석하면, [그것은] 모두 여러 부분을 가지고 서로 의지하여 성립한다. 분석이 궁극에 도달하면 항상 조대한 물질과 같이 여러 부분이 결합하여 이 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가설적인 존재이지 실재가 아니다. 만약 그것을 극한으로 분석하면 공 (空)으로 돌아가며, 물질적 감각기관(색근)과 대상(색경)을 초월하여 필경 무(無)와 같다.; 『成唯識論』: 雖此極微猶有方分而不可析。若更析之便似空現。不名為色。故說極微是色邊際。(T31.4c2 - 4). 비록 이 극미는 부피를 가지지만 분해가 불가능하다. 만약 다시 그것을 분해하면 공(空)과 유사하게 나타나 서 물질(색)이라고 이름할 수 없다. 따라서 극미는 물질(색)의 구극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 211 - 서 세친의 주장은 극미개념의 타당성을 부정하는 유식학파의 입장에 서 있다. 그 에 따르면 물질(색) 등으로 나타나는 표상(vijñapti), 그것(대상)은 단일한 것이 아니고, 대상은 극미들 각각의 다수인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집적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극미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 다.471) 이하 게송15까지 극미의 성립 불가능성에 대한 상세한 논변이 이루어진다. 가장 먼저 비판의 대상이 된 문제는 ‘대상의 단일성(tadekam)’이다. 세친 자신의 주석 에서는 이것이 바이셰시카의 전체상 혹은 보편상에 대한 문제임을 지적하고 있 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라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두 가지 측면의 분석을 고 려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개별극미는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불교 제학 파의 공통된 견해를 확인하는 것이다. 정의상 극미는 더 이상 쪼개어질 수 없는 것이며, 감각기관을 초월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개별적인 극미는 물질(색) 등의 표상으로 지각되지 않는 존재이다. 그리고 『유식이십론』에서의 개별극미는 니야 471) Vimś. 11 (6.5 - 6): na tad ekaṃ na cānekaṃ viṣayaḥ paramāṇuśaḥ | na ca te saṃhatā yasmāt paramāṇur na sidhyati ||11abcd|| 해당 게송에 대한 현장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唯識二十論』: 以彼境非一 亦非多極微 又非和合等 極微不成故. (T31.75c16 - 17) 그 대상 은 하나도 아니고 다수의 극미도 아니며, 또 화합 등도 아니다. 극미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이 해석에서 현장은 게송의 saṃhata를 ‘화합(和合) 등’으로 번역하고, 세친의 주석에 등장하는 saṃhata는 “화합 또는 화집”이라고 두 가지 결합방식을 나열한다. (『唯識二十論』: 或應多極微和合及 和集。(T31.75c21)). 마찬가지로 규기도 『술기』에서 본문의 ‘화합 등’을 화합(和合)과 화집(和集)을 의 미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아래의 두 구절은 경량부와 신살바다의 순정리사를 논파하는 것이다. 또 '화합 등이 아니다'는 주장 명제(宗)를 세우고, '극미는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라는 이유(因)를 세운다. 이것을 증거로 하여, 겸하 여 극미의 화집을 논파한다. 이 『유식론』은 세친의 나이가 들었고, 『순정리론』이 [지어진] 뒤에 저술 을 시작하였다. 『唯識二十論述記』: 下二句。破經部。及新薩婆多順正理師 又非和合等。立宗 極微不成故。立因。驗 此兼破極微和集。此唯識論。世親年邁。正理論後方始作也。(T43.992a27 - b1) 화합과 화집이라는 구분된 개념은 『구사론』에서는 등장하지 않지만, 『구사론』에 대한 비판적 주석서 인 중현의 『순정리론』에서는 구분하여 논의된다. 규기는 이 점을 의식하여 saṃhata가 화합과 화집을 모두 의미하며, 그 이유는 『유식이십론』이 『순정리론』이 저술된 이후에 쓰여졌기 때문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세친 자신이 다음 게송12cd의 주석에서 saṃhata를 카슈미르 비바사의 집적에 대한 비판으로 직접 거론하고 있는 이상, 규기의 해명은 자신의 학파적 입장을 투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 212 - 야-바이셰시카의 특수(viśeṣa)의 원자와 같이 단일한 실체도 아니다. 단일한 극미 의 개별적 실제성과 관련된 문제는 게송13 이하 극미가 집적한 대상의 단일한 실 재성을 논하는 곳에서 다시 재론된다. 세친이 비판하고자 하는 ‘하나’는 바로 이 바이셰시카의 보편적 실체(sāmānya)이다.472) 이것을 불교학파에서는 ‘부분을 가 지는 전체상’이라는 의미에서 유분색(有分色, avayavirūpam)으로 해석하였다. 앞 서 니야야-바이셰시카 학파의 원자설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이 전체상은 항아 리의 모든 부분에 내속(內屬)하여 있는 ‘항아리’라는 하나의 실체성을 의미한다. 실체로서의 보편은 물질적인 항아리가 부서진다고 하여도 소멸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항아리 상태의 변화와는 무관하게 실재하는 것이다. 게송11의 두 번째 주제는 단순히 다수의 극미들이 함께 하여 지각가능한 대상 이 된다는 설일체유부의 고전적 해석이다. 단지 다수의 극미들이 모여 있다고 해 서 지각 대상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개별적인 극미들이 감각기관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좌 슈리라타의 설일체유부 비판에서 다수의 맹인이 모였다고 하더라도 보는 능력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논증하였던 것과 같이 단순히 다수가 모였다고 해서 어떤 특정한 개별적 속성이 새롭게 발생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눈에 보이지 않던 개별적인 머리카락이 다수가 모였을 때 다수의 덩어리가 감각 지각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개별적인 머리카락을 보 는 것이 아니라 머리카락뭉치를 볼 뿐이다. 물론 중현은 이에 대해 머리카락 뭉 치가 보이는 것은 개별적인 머리카락을 볼 수 있는 능력이 드러난 것이며, 머리 카락 뭉치를 통해 머리카락의 존재를 충분히 추론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반박 할 것이다. 세친의 논의는 다음에 이어지는 세 번째 극미비판에 집중되어 있다. 극미들이 모여서 집적된 것들(saṃhatā)이 인식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논증이 세친 극미비판의 핵심을 이룬다. 또한 집적된 것들이 대상이 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극미는 하나의 실체 (dravya)라는 것이 확립되지 않기 때문이다.473) 472) Vimś. 11 (6.25 - 26): yat tad rūpādikam āyatanaṃ rūpādivijñaptīnāṃ pratyekaṃ viśayaḥ syāt, tad ekaṃ vā syād yathāvayavirūpaṃ kalpyate vaiśeṣikaiḥ | 저 색(물질)등을 가진 입처가 색(물질)등의 식들의 각각의 대상이라면, 그것은 바이셰시카가 유분색이라고 인정하는 것과 같은 하나 이거나. 473) Vimś. 11 (7.1 - 2): nāpi te saṃhatā viṣayībhavanti | yasmāt paramāṇur ekaṃ dravyaṃ na sidhyati || - 213 - 이하 게송15까지의 모든 논의는 ‘집적된 것의 대상성’에 대한 논증의 연장이다. 그리고 논의에 앞서 제시된 답변은 “극미가 하나의 실체라는 것이 확립되지 않았 기 때문”에 집적된 것들은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논의의 맥락으로 보면, 개별 극미는 니야야-바이셰시카가 주장하는 바와 같은 전체상으로서의 하나의 실체 (eka dravya)가 아님을 이미 논증하였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하나의 실체’ 논란 은 중복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의 ‘하나의 실체’는 니야 야-바이셰시카의 전체상과는 다른 맥락에서 거론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 다. 본문의 게송12 - 13은 개별극미에는 부분이 없기 때문에 결합이 불가능하다 는 논증이고, 게송 14 - 15는 결합한 덩어리가 인식대상으로서 실재성을 가지는 가에 대한 논란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극미가 하나의 실체”라는 언급은 두 층위 를 지니는 것으로 파악된다. 첫째는 개별적인 하나의 극미가 실체성을 지니지 않 는다는 점이고, 두번째는 덩어리(piṇda)를 이룬 극미들의 집적도 하나의 실재성을 지니지 않는다는 의미이다.474) 게송11의 분석에서는 세친이 언급한 ‘집적된 것들(saṃhatā)’의 정체성에 대해 서는 몇 가지 논란이 제기되어 왔다. 사실 본문 하단의 논의과정에서 세친은 ‘집 적된 것들(saṃhatā)’을 주장한 이들이 카슈미르의 바이바시카 (Kāsmīravaibhāṣikā)라고 언급하고 있다.475) 또한 게송 12에서는 카슈미르 바이 바시카의 극미개념에 대한 비판적 성격을 띠고 있는 반면에 게송13에서는 결합 (samyoga)에 의한 단일한 실체성을 주장하는 니야야-바이셰시카에 대한 비판의 성격을 보인다. 세친은 무엇 때문에 이곳에서 갑자기 니야야-바이셰시카의 결합 개념인 samyoga를 끌어들인 것일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니야야-바이셰시 카의 원자론에서 거론되었던 결합의 방식은 결합(samyoga), saṃcita(화합), samudita(화집) 세 가지였다. 일차적으로는 세친이 『니야야수트라바시얌』에서 논 의되었던 결합방식들 가운데 바이바시카(설일체유부)와 니야야학파의 결합방식을 배제하고, 나머지 화합(和合, samcita)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시도하는 것으로 추 정해 볼 수 있다. 나아가 『구사론』에서와 같이 화합(sañcita)의 결합방식을 지지 474) 다시 말해 극미는 특수(viśeṣa, particular)와 보편(sāmānya, universal)의 두 측면에서 모두 실체 (dravya)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475) 그러나 적집된 것들이 서로 서로 결합한다고 하는 자들은 카슈미르 바이바시카인데, 그들에게는 다 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 극미가 취집한 것(saṃghāta)은 그것(극미)들과 다른 대상이 아닌가? Vimś. 12cd (7.10 - 11): saṃhatās tu parasparaṃ saṃyujyanta iti kāsmīravaibhāṣikās ta idaṃ praṣṭavyāḥ | yaḥ paramāṇūnāṃ saṃghāto na sa tebhyo 'rthāntaram iti | - 214 - 하지만 그것이 니야야-바이셰시카의 결합(saṃyoga)이라는 결합방식과 혼동될 가 능성을 제거하기 위해 오해의 여지가 있는 부분에 대한 비판 내지는 엄밀한 개념 정립을 의도한 것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해당 본문에 대한 규기의 주석에서는 『관소연론』과 『성유식론』을 참고 하여 결합(saṃhatā)이 화합과 화집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화합과 화집의 개념은 『순정리론』에서 중현이 상좌 슈리라타의 결합방식을 비판하는 부 분과 『관소연론』 (Ālambanaparikṣa)에서 인식대상의 조건에 관련된 부분에 등 장한다.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두 용어는 명확한 개념적 차이를 가지고 일관 되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현장의 번역적 조어(造語)가 아니라 산스크리 트어의 특정한 용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합(saṃcita)과 화집 (samudita)의 결합방식은 취집한 물질이 개별적인 극미와 실재성의 연속성 문제 에서 상이한 해석을 하지만, 개별적인 극미 차원의 실재성은 인정한다는 공통점 이 있다. 따라서 『유식이십론』의 본문이 개별극미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맥락에서 는 화합과 화집을 모두 비판대상으로 삼는다고 보아도 무방한 것이다. 그러나 개 별극미가 아니라 결합방식에 대한 논의 맥락에서는 화집을 비판하고 화합의 결합 방식을 지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판단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화합의 결합방식이 연기적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현상세계와 그것의 비실재성 혹은 공성 (空性)을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지지된다. 게송12ab의 전형적인 비판은 만일 극미가 부분을 가지지 않는다면 결합이 불 가능하다는 것이다.476) 이는 『비바사론』의 단계에서부터 이미 명확히 인식되었던 문제이다.477) 극미가 여섯 방향의 부분을 가지고 결합한다고 할 때, 그것은 여섯 부분을 가진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부분을 가지지 않는다는 극 미의 개념에 위배된다. 그렇지만 극미가 부분을 가지지 않고 결합한다고 할 경우, 그것은 한 자리에 모두 모여도 하나의 극미의 크기에 변함을 없을 것이므로, 단 지 하나의 극미와 다를 것이 없게 될 것이다. 이 경우에는 극미들의 집적이라 할 지라도 개별극미와 차이가 없고, 따라서 감각지각의 대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 가 476) Vimś 12ab (7.3 - 5): ṣaṭkena yugapad yogāt paramāṇoḥ ṣaḍaṃśatā ||12ab|| 동시에 여섯 [부분]에 의하여 결합되었기 때문에 극미는 여섯 부분을 가진다. ṣaḍbhyo digbhyaḥ ṣaḍbhiḥ paraṃānubhir yugapad yoge sati paramāṇoḥ ṣaḍaṃśatā prāpnoti | ekasya yo deśas tatrānyasyāsaṃbhavāt | 여섯 방향으로부터 여섯극미가 동시에 합쳐졌기 때문에, 극미는 여섯 부분을 가진다. 하나가 있는 어 떤 곳에 다른 것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477) Cf. 2장 1절; 2장 4절. - 215 - 장 미세한 극미들이 모여서 물질을 형성하였다면, 그 가장 미세한 극미가 아무리 작다 하더라도 어떤 크기를 가져야 할 것이다. 따라서 상좌 슈리라타는 극미는 그 자체가 기본단위가 되는 어떤 크기에 도달하면 그 지점에서는 더 이상 분해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사유에 의해 도달하는 극미개념은 무한히 분석하여 부분 이 없는 상태에까지 도달한 극미가 아니다. 상좌에 의하는 한 조대한 물질의 성 립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가장 미세한 기본단위가 어떤 크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 이 논리적 사유에 의한 타당한 결론이 될 것이다. 흥미롭게도 법상유식의 『성유 식론』에서도 동일한 논리를 사용한다. (1) 모든 유가사들이 가상의 지혜로 조대한 물질(색)의 형상에 대해 점차로 제 거하고 분석하여 더 이상 분석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하였을 때 그것을 가설 하여 극미라고 한다. (2) 비록 이 극미는 여전히 방분을 가지지만 더 이상 분 해할 수 없다. (3) 만약 그것을 더 분석한다면 공(空)과 유사하게 현현할 것이 기 때문에 물질(색)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4) 따라서 극미는 물질(색)의 궁 극이라고 한다.478) 본문은 네 문장으로 분석할 수 있으며, 그 가운데 첫 번째 문장은 극미는 가설적 존재라는 유가사의 정의에 해당한다. 두 번째 문장은 상좌 슈리라타의 극미개념 에 해당하는 결론이다. 『성유식론』은 이 상좌설을 유식으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 으로 삼는다. 여기서 물질(색)은 유식의 차원에서 물질로 현현하는 존재를 의미한 다. 만약 어떤 크기를 갖는 가장 미세한 물질인 극미를 사유에 의해 더 분석한다 면 그것은 더 이상 물질이 아닌 단계로 진입하게 될 것이다. 본문에서는 그것은 단순히 공(空)이라 하지 않고 ‘공(空)과 유사한 현현’이라 하여 그것을 식(識)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긴다. ‘극미는 물질의 궁극’이라는 말에서도 역시 더 이상 분석 하였을 때 물질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를 읽을 수 있다. 바이바시카에게 개별극미는 크기를 갖지 않지만 그것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결 합(saṃhata), 즉 화집(和集)하였을 때 그것들은 서로 도와서 지각대상이 되는 능 력을 획득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상좌 슈리라타의 극미개념에 기초하고 그의 바이바시카 비판을 따라가면, 바이바시카의 극미개념은 공성(空性) 혹은 유식과 마주하게 된다. 중현은 스스로 개별적 극미를 가극미(暇極微)로 칭하였지만, 그것 478) 『成唯識論』: 諸瑜伽師以假想慧於麁色相。漸次除析至不可析假說極微。雖此極微猶有方分而不可析。 若更析之便似空現。不名為色。故說極微是色邊際。(T31.4b29 - c4) - 216 - 의 실재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실극미(實極微)로부터 경험되는 인식이 극미의 존재를 입증해 줄 뿐만 아니라 설일체유부에서는 심리적 관념적 존재의 실재성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가설적 존재(prajñaptisat)는 상 좌 슈리라타에게는 비실재의 허구적 존재라는 뜻이며, 유식가에게는 의식 (vijñāna)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격의 존재를 의미한다. 게송13에서 니야야-바이셰시카의 결합(saṃyoga)개념이 등장하는 것은 앞에서 그들의 전체상에 대한 비판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중복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 다. 극미가 결합(saṃyoga)하지 않고, 그것이 집적(saṃghata)하였을 때 무엇이 결 합하는가? 부분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의 결합(samyoga)이 성립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479) 이 난해한 게송은 니야야-바이셰시카의 결합(samyoga)에 대한 비판이라는 관점 에서만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다. 바이셰시카의 입장에서 실체들은 saṃyoga라 는 특수한 결합의 방식을 통해 여섯 가지 범주(6句義)가 실체성을 지니고 공존할 수 있다. 극미들의 집적도 특수(viśeṣa)의 결합으로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saṃyoga의 결합이 없이 어떻게 극미들이 집적할 수 있는가? 니야야-바이세 시카의 극미는 부분을 가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물질(색)의 범주에 포함 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세친은 samyoga의 결합이 성립하지 않는 것은 극미들이 부분을 가지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고 주 장한다.480) 부분이 있는 결합의 방식이건 부분이 없는 결합의 방식이건 어떤 경 우에도 결합(saṃyoga)은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이 핵심적 요지이다. 세친은 이미 앞에서 바이셰시카의 전체상을 부정하였으며, 바이바시카의 결합 방식에 대해서도 비판을 마무리하였다. 그런데 그는 무엇 때문에 이곳에서 니야 야-바이셰시카의 결합개념을 통해 결합의 방식에 대한 논의를 다시 재기하고 있 는 것일까? 그는 극미의 결합을 표현하기 위해 집적(集積, saṃghāta)이라는 용 479) Vimś 13ab (7.12, 14): paramāṇor asaṃyoge tatsaṇghāte 'sti kasya saḥ ||13ab|| na cānavayavatvena tatsaṃyogo na sidhyati ||13cd|| 480) 13cd의 문장은 “x 때문에 y가 아닌 것은 아니다”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것은 다시 “x 때문에 y이 다”의 문장으로 단순화할 수 있고, 그것과 동치인 문장 “y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x때문은 아니다” 로 치환될 수 있다. 따라서 이 문장은, “samyoga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극미들이] 부분 이 없기 때문은 아니다.”로 풀어진다. - 217 - 어를 채택하고 있는데, 집적은 개별극미들에 대하여 다수의 극미가 취집한 취극 미(聚極微, saṃghātaparamāṇu)에 사용되었으며, 『구사론』에서는 극미의 결합방 식을 설명하면서 서술적으로 사용된 용어이다.481) 이곳 『유식이십론』의 해당 본 문에서 아직 비판적으로 분석되지 않은 결합방식은 경량부 상좌 슈리라타의 화합 (和合, sañcita)뿐이다. 이 화합은 개별적인 극미들이 집적하였을 때 개별성을 초 월하여 인식의 영역으로 던져지는 어떤 단일한 형상과 같은 것을 발생시킨다. 극 미의 화합을 통하여 색취(色聚)가 만들어지고 나아가 다양한 색깔을 가진 나비나 나무들이 모인 숲의 형상이 의식에 투영되고 인식되는 것이다. 이런 화합상은 단 일한 실체와 같은 것으로 오해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화합의 방식으로 의식에 투영되는 형상은 단일한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다색의 나비에서와 같이 여러 색 상을 포함할 수 있으며, 들판의 말과 코끼리들과 같이 복합적인 이미지를 가질 수도 있다.482) 만일 눈앞에 현상하는 인식대상이 단일한 실체(eka dravya)라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 여기에서 세친은 명백한 경험적 사실을 먼저 제시하고, 그렇다면 반 론자들이 제시하는 주장들이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는 논증의 방식을 제시한 다. 게송14ab 이하에서는 먼저 개별극미가 방향(dik)과 부분(bhāga)이 있다면, 그것은 단일한 실체일 수 없다. 사실 이 문제는 앞에서 이미 검토한 것이기 때문 에, 여기에서는 다음의 논의를 진행하기 위한 전제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핵심은 이런 개별극미들을 상정한다면 일상적인 경험세계에서 발생하는 “그림자와 저항 이 어떻게 발생하는가?”라는 질문에 있다.483) 개별적인 극미는 시각적인 감각기 관을 초월해 있을(無見) 뿐만 아니라 접촉의 감각기관도 넘어서(無對) 있다. 그렇 다면 사실 『구사론』에서 니야야-바이셰시카가 주장하였듯이 극미는 물질(색)에 포 함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일상의 경험에서 우리는 물질적 존재 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와 저항을 관찰하고 경험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개별극미들이 덩어리를 이루어서 그림자와 저항의 현상이 나타난 481) Cf. 이 논문의 2장 2절. 개별극미와 다수의 극미; 2장 5절. 극미의 결합방식: 결합, 취집, 화합, 화 집. 482) 인식대상에서 하나와 다수의 문제는 진나(陳那, Dignāga)의 『집량론』(集量論, Pramāṇasamuccaya)과 다르마끼르띠(Dharmakīrti)의 『양평석Pramāṇavarttika』에서 심도깊게 논 의되는 인식의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Cf. 토사키 히로마사 (2015) 『불교인식론 연구: 다르마끼르띠의 『쁘라마나바릇띠까』「현량론」 (現量論)』 박인성 옮김. 서울: 길, 353 - 388. 483) Vimś. 14c (7.22): chāyāvṛtī kathaṃ vā ||14c|| 또는 그림자chāyā와 장애āvṛti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 218 - 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왜 덩어리(piṇḍa)가 [그림자와 저항] 그 둘을 가지는 것이지 [개별적인] 극미는 아니라고 인정하지 않는가? [그림자와 저항] 이 두 가지를 가지는 그것이 실로 [개별적인] 극미와는 다른 덩어리라고 인정하는 것인가? ‘아니다’고 말한다.484) 본문은 중현 등의 신유부의 결합방식에 대한 비판이다. 반론자는 먼저 ‘개별적인 극미에는 그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반문한다. 그렇 다면 개별적인 극미에서는 나타나지 않던 현상이 덩어리에서 나타난다는 주장이 된다. 이는 개별적인 극미와 덩어리가 서로 다른 성질을 지닌 것이라고 인정한다 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러나 반론자는 그런 의미는 아니라고 답한다. 즉, 개별극 미와 덩어리는 서로 불연속적인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세친은 상좌 슈리라타와 동일한 형태의 비판을 제기한다. 덩어리가 [개별적인 극미와] 다른 것이 아니라면, [그림자와 저항의] 두 가지 특성은 가지지 못할 것이다.485) 앞의 게송14ab에서 개별극미가 방향과 부분을 갖는다면 불합리하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였다. 그에 따르면 개별극미는 그림자와 저항을 가질 수 없다. 그런데 개별 적인 극미와 덩어리가 다른 것이 아니라 연속성을 지닌다면, 조대한 물질도 그림 자나 저항 등 경험대상이 나타내는 특징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그와 반대이다. 그러므로 극미개념은 타당하지 않다. 이같은 논리 전개는 앞서 맹인의 비유에서 경량부 상좌 슈리라타와 중현 사이에 있었던 논쟁과 동일 한 것이다. 중현은 개별극미와 덩어리의 연속성을 전제하고, 현재의 지각 경험에 기초해서 개별적인 극미들도 지각되는 성질들을 가지고 있다고 추론한다. 반대로 상좌 슈리라타는 개별극미들은 감각기관을 초월해 있는데 우리의 경험에는 지각 현상이 발생한다. 그렇다면 개별극미와 덩어리 사이에는 불연속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앞의 본문에서 세친은 상좌 슈리라타와 유사한 논법을 구사하고 있는 484) Vimś. 14c (8.1 - 3): kim evaṃ neṣyate piṇḍasya te cchayavṛtī na paramāṇor iti | kiṃ khalu paramāṇubhyo 'nyaḥ piṇḍa iṣyate yasya te syātāṃ | nety āha | 485) Vimś. 14d (8.4): anyo na piṇḍaś cen na tasya te ||14cd|| - 219 - 것이다. 개별극미가 그림자와 저항이 없는데, 그것들의 배열이나 구성이 어떠하건 다시 말해 개별극미이건 극미들의 집적이건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는 지적이 다.486) 이어서 세친은 대상세계의 일반적인 경험에 근거하여 인식론적 문제에 대한 논의로 전환한다. 만약 색 등의 특성이 부정되지 않는다면, 왜 그것들이 눈 등의 대상이 되는 성 질과 파랑 등의 색깔의 성질을 가지는가 하는 바로 이것이 [상세히] 검토되어 져야 한다.487) 질문은 먼저 경험적 사실에서 출발한다. 만약 색깔 등의 지각경험이 있고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면, 그것들은 어떻게 눈 등의 감각기관의 대상이 되는가? 그리고 어떻게 파랑 등의 색깔의 성질을 가지게 되는가? 이런 질문은 세친 특유의 경험 주의적 관점을 잘 반영한다. 두 가지 질문은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을 포함하는 10 색처의 특성에 대한 질문으로 환원할 수 있다. 이 질문이 극미비판의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감안하면, 개별적인 극미들이 모여서 감각영역인 입처(入處)를 구성하였을 때 어떻게 색, 향, 미, 촉 등의 성질을 가지게 되는가를 묻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개별극미 차원에서 존재하지 않던 지각대상의 특징들이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는가에 대한 질문, 즉 화합의 결합방식에 대한 질문으로 해 석될 수 있는 것이다. 파랑이나 노랑과 같은 색깔에 대한 감각지각의 경험은 아주 특수한 경우를 제 486) 이곳의 번역에는 효도 카즈오와 카지야마 유이치 간에 견해 차이가 있다. Vim 14cd (8.5 - 7): yadi nānyaḥ paramāṇubhyaḥ piṇḍa iṣyate na te tasyeti siddhaṃ bhavati | saṃniveśaparikalpa eṣaḥ |(1) paramāṇuḥ saṃghāta iti vā | kim anyā cintayā |(2) lakṣaṇaṃ tu rūpādi yadi na pratiṣidhyate | 효도 가즈오는 (1)까지를 세친의 비판으로 보고, “만약 덩어리가 모든 극미와 별도가 아니라고 한다 면, 저 [그림자와 방해의] 둘은 그 [덩어리]에는 없다는 것이 증명된다. [극미와 덩어리는] 양태의 분 별이다.”고 번역하고, 이어서 실재론자의 반론으로 “만약 색형 등의 특질(相)이 거부되지 않는다면, 극미 혹은 [극미의] 집합한 것이라는 고찰에 의해 무슨 도움이 되는가?”라고 해석한다. 반면에 카지야마는 (2)까지를 세친의 일차적인 반론으로 이해하였다. “덩어리가 극미와 다르지 않다고 인정한다면, 그것은 둘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 인정될 것이다. 이 것은 배열에 대한 분별인데, [그것을] ‘극미’라거나 ‘집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 가?” 이어서 “만약 물질(색) 등의 특성이 부정되지 않는다면...”에서는 세친이 주제를 전환한다. Cf. 효도 가즈오 (2011), 167 - 178. 487) Vimś. 14cd (8.7 - 8): lakṣaṇaṃ tu rūpādi yadi na pratiṣidhyate | kiṃ punas teṣāṃ lakṣaṇam cakṣurādiviṣayatvaṃ nīlāditvaṃ ca | tad evedaṃ saṃpradhāryate | - 220 - 외하면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눈 등의 대상이 파랑이나 노랑 등의 색깔을 포함한다면, 다시 그것이 단일한 대상인지 다수의 대상인지를 물을 수 있 다. 이 질문은 4대종의 극미가 결합하여 4대소조를 형성하는 단계에서 논하였던 문제와 유사하다. 색, 향, 미, 촉의 4대소조가 단일한 것인가 다수인가에 대한 재 론이다. 『유식이십론』에서는 이미 앞에서 다수가 모여서 어떤 하나의 대상을 구 성한다는 주장을 비판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색깔 등의 특성을 나타내는 대상 을 단일한 실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단일한 것이라면, (1) 점차적으로 가는 것이 없고, (2) 동시에 파악하는 것과 파악하지 않는 것은 없을 것이며, (3) 분리되어 여럿으로 발생하는 것과 (4) 작 은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488) 게송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명백히 조대한 지각의 대상에 대한 분석이다. 그 위를 걸어 다닐 수 있는 대지, 초원에 있는 코끼리나 말, 물벌레와 같은 것들이 논의의 주제이기 때문이다. 만약 걸어가고 있는 길이 단일한 실체라면 길에서 첫 발을 내디딘 순간에 발은 길의 끝에도 함께 도착해야 할 것이다. 길이 단일한 실 체이기 때문에 한 부분과의 접촉으로 전체와 접촉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 로, 나무 기둥의 한 쪽 면을 보았다면 동시에 그 뒷면도 보여야 할 것이다. 나무 의 앞과 뒤는 모두 하나의 실체이기 때문에 하나의 실체의 한 부분을 보는 것으 로 모든 부분이 관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코끼리와 말이 한 공간에 있을 때의 문제는 더욱 복잡하다. 서로 다른 두 종류의 대상이 한 공간이라는 인식의 대상 안에서 하나의 실체로 주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기에서 세친이 ‘극미’ 개념을 끌어들여 설명하고 있는 대상은 감각기관에 어 떤 형상으로 들어온 인식사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마치 한 장의 사진처 럼 어떤 형상이 눈의 대상으로 주어졌을 때, 니야야-바이셰시카식의 전체상을 적 용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실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세친은 지금 그것이 매우 불 합리한 가정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항아리 사진의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대상의 형상도 다양한 부분을 포함한 이미지 그대로 감각기관에 주어진다. 이 이 미지가 지각되는 순간은 분별이 개입하지 않으며, 단지 지각대상이 감각기관에 의해 직접적으로 경험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숲’이라거나 ‘초원의 코끼리’ 혹 488) Vimś. 15 (8.11 - 12): ekatve na krameṇetir yugapan na grahāgrahau | vicchinnānekavṛttiś ca sūkṣmānīkṣā ca no bhavet ||15abcd|| - 221 - 은 ‘항아리’로 인식되는 순간에 언어적 분별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같은 인식대상 과 인식에 논란은 이후 디그나가의 『집량론』과 다르마끼르띠의 『양평석』 등 불교 인식논리학에서 핵심적인 주제로 심도깊은 고찰이 이루어진다. 마지막으로 세친은 실체(dravya)와 속성(lakṣana)의 관계에 대해 언급한다. 실체는 감각지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고, 단지 그 속성의 현현에 의 해서 파악될 뿐이다. 그렇다면 동일한 실체가 가지고 있는 속성은 동일하게 관찰 될 것이다. 어떤 물고기가 성체가 되었을 때 잘 보이는 것처럼 아주 작았을 때에 도 잘 보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동일한 실체가 크기 때문에 어떤 때는 보이고 어떤 때는 보이지 않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금붕어’라는 어떤 물고기의 실체성은 그것의 크기와 관계없이 동일하다. 때문에 그것이 아주 미세 한 크기에 있을 때에도 실체가 동일하고, 따라서 그것의 속성도 동일하게 나타나 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경험적 사실에 위배된다. 때문에 ‘다양한 색깔을 가 진 금붕어’와 같은 하나의 대상이 관찰된다면, 그것은 다수의 극미들로 구성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대상 혹은 형상은 ‘단일한 실체’라고 할 수 없을 것이 다. 따라서 단일한 실체가 아니며 다양한 색깔을 가진 하나의 형상은 다수의 극 미들로 구성된 하나의 화합상과 같은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화합상은 외부에 존재하는 실재하는 대상과는 별도의 인식대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처럼 물질(색) 등이 눈 등의 감각기관에 대응하는 외부대상과는 구분되는 별도의 인식 대상이라면, 그것은 ‘단지 그렇게 인식된 것,’ 즉 ‘오직 표상일 뿐’이라는 것을 의 미하게 된다.489) 세친이 논의를 끌고 가는 방향은 (1) 인식의 대상인 형상의 존재를 옹호하는 동시에 (2) 극미와 같은 어떤 외부적 실재가 그 인식의 토대가 된다는 주장을 부 정하는 것이다. 인식의 대상은 이미 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인식의 영역에 던져진 관념적 존재라는 상좌 슈리라타의 주장에 따르면 세친의 첫 번째 논지는 문제될 것이 없다. 두 번째 논지인 물질(색)적 토대의 부정은 개별극미의 실재성을 부정 함으로써 입증될 수 있다. 그런데 『유식이십론』에서 세친의 논의에 따르면 개별 적인 형이상학적 극미는 논리적으로 성립이 불가능하고, 오히려 비물질적인 존재 489) Vimś. 15 (8.21 - 22): tasyāsidvau rūpādīnāṃ cakṣurādiviṣayatvam asiddham iti siddhaṃ vijñaptimātraṃ bhavatīti | 따라서 반드시 극미들 각각의 차이가 분별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단일하다고 입증되지 않는다. 그 것이 입증되지 않는다면, 색 등이 눈 등의 [외부]대상이라고 하는 사실은 증명되지 않는다. 따라서 유 식이 증명된다.
로 판단될 수 있어 보인다. 실제로 감각을 초월해 있고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형 이상학적 극미는 빈번히 공(空)이나 심(心)에 비유되기도 하였다. 인식론적 차원으 로 넘어가면 경량부적 특색은 더욱 강화된다. 상좌 슈리라타에게 인식은 대상을 직접적으로 지각하는 것이 아니며 나아가 인식은 외부에 실재하는 대상이 없어도 발생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앞서 살펴 본 무경각(無境覺)개념인데, 세친은 극미 설의 논파를 마치고 바로 이어서 이 대상이 없는 인식에 관한 논의를 주제로 삼 는다. 인식수단으로부터 존재와 비존재가 확립되고, 모든 인식수단 가운데 직접지각 이 최고의 인식수단일 때, 어떻게 대상이 없는 경우에 이런 직접지각이라는 인 식이 있을 수 있는가?490) 아비다르마철학에서 직접지각(pratyakṣa)은 외부에 실재하는 대상에 대한 직접적 인 지각경험을 의미하였다. 외부대상(viṣaya)과 인식대상(ālambana)은 동일한 것 이며, 인식(vijñāna)은 직접적으로 그에 상응한다. 따라서 외부의 대상이 없다면 직접지각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친은 상좌 슈리라타의 주장을 계승하여 직접지각을 외부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대상에 대한 지각의 문제로 해석한다. 따라서 감각지각은 대상(viṣaya)이 아니라 인식대상(ālambana) 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며, 그것은 인식(buddhi)과 질적인 차원에서 유사성을 지닌다. 불교인식논리학에서 인식수단(pramāṇa)과 인식대상(prameya), 그리고 인식주체(pramātṛ)에 대한 개념적 기원을 이곳에서 찾을 수 있다. 이처럼 게송15 까지 외부 대상으로써 극미가 부정되고 그 자리를 종자가 대신함으로써 일체의 인식대상은 ‘오직 표상’이라는 명제가 확립된다. 그리고 바로 그 토대 위에서 게 송 16이하에서 유식설에 따른 인식론이 전개되는 것이다. 4절. 『유식이십론』의 세친 철학 세친이 『유식이십론』을 통해 주장하는 명제는 “삼계에 속하는 것은 오직 표상 일 뿐(vijñaptimātra)”이라는 것이다. 이 명제는 세친이 학습하였던 아비다르마철 490) Vimś. 15 (8.22 - 24): pramāṇavaśād asitvaṃ nāstitvaṃ va nirdhāryate sarveṣāṃ ca pramaṇānāṃ pratyakṣam pramāṇaṃ gariṣṭham ity asatyarthe kathaṃ iyaṃ buddhir bhavati pratyakṣam iti | - 223 - 학, 특히 상좌 슈리라타의 1법처개념, 그리고 『능가경』이나 『유가사지론』 계통의 유심사상을 가장 압축적으로 통합한 명제이다. 먼저 이같은 선언은 『십지경론』에 등장하는 “삼계유심”491)와 동일한 구조를 이루고 있지만, ‘마음(心)’이 ‘표상(表象, vijñapti)’으로 대치되어 미묘한 관점의 차이를 드러낸다. 세친의 명제가 유심(唯 心)사상 계통을 전면적이고 문자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유심'(cittamātra)을 ‘오 직 표상’(vijñaptimātra)으로 대치함으로써 특별한 의도를 드러낸다. 그는 이어지 는 해설에서 심의식과 표상(vijñapti)이 동의어라고 천명한다. 바로 이 한 문장을 통해 세친은 아비다르마의 온, 처, 계 3과를 하나로 통합하여 자신의 유식설로 끌 어들인다. 『비바사론』에서 심의식은 각각 온(蘊), 처(處), 계(界)에서 심적 요소들 에 대응하는 용어이다.492) 심(心, cittam)이라는 표현을 통해 수온(受蘊)에서 식온 (識蘊)까지, 의(意, mana)로는 12처 가운데 의처(意處, mana-āyatana), 식(識, vijñāna)로는 18계에서 전5식과 제6의식(mano-vijñāna)을 포괄한다. 여기에서 삼계유심(三界唯心)이 삼계유식(三界唯識)으로 번역될 가능성이 열린다. 심의식은 동의어로 사용될 수 있음이 아비다르마 철학의 단계에서 이미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식(識)은 vijñāna를 지칭하는 것이지 vijñapti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지만, 유식사상에서는 식(識, vijñāna)이 vijñapti(표상)와 자주 동일화되고 따라서 둘 다 동일하게 ‘식(識)’으로 번역되기도 한다.493) 이 ‘표상(表象, vijñapti)’은 또한 『유식이십론』 게송1의 현장 번역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식 (vijñāna)의 작용적 측면에서 ‘요별(了別)’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 ‘표상(vijñapti)'는 아비다르마 철학에서 긴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 것은 표색(表色, vijñaptirūpa)으로 동작이나 행위를 표상하는 물질의 기본단위로 여겨지기도 하였으며, 따라서 업(業, karma)이 성립하고 과보를 성취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설일체유부의 5위 75법체계에서는 물질적 영역(色法)에서 무표색 (avijñaptirūpa)의 반대개념으로 10색처를 의미하였다. 10색처로서의 표색은 다 섯 감각기관과 다섯 감각대상, 다시 말해 지각의 주관과 대상의 측면을 포괄하는 것이다. 아비다르마 철학에서 이 10색처는 단지 물질적인 다르마들일 뿐이었다. 근경식의 화합에서 안근과 색경과 안식은 한 찰나에 구생하고 따라서 세 요소는 본질적으로 착오가 없는 것이다. 또한 물질적 차원에서 지각대상은 외부에 실재 하는 대상(viṣaya, 境)이었으며 감각기관(근)과 감각대상(경) 사이에는 내용적인 491) 『十地經論』: 但是一心作者,一切三界唯心轉故. (T26, 169a16) 492) Cf. 논문 3장. 2절. 9. 형색극미와 표색(表色, vijñaptirūpa)에 대하여. 493) Schmithausen, Lambert (2005), 9 - 10, esp. fn. 2. - 224 - 차이가 없다. 그러나 상좌 슈리라타가 외부에 실재하는 대상과 인식대상 사이에 간극을 주장하면서, vijñapti는 설일체유부의 표색(表色, vijñapti)과 상좌 슈리라 타의 표상(表象, vijñapti)으로 의미분화를 하게 된다. 상좌 슈리라타에게 10색처 는 극미들의 화합(和合, saṃcita)에 의해 구성된 허구적 세계이며 가설적 존재 (prajñaptisat)이다. 지각대상은 외부에 실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인식에 주어진 인식대상(ālambana)일 뿐이다. 이 인식대상은 이미 앞서 언급한 심의식과 구분 되지 않으며 의식에 던져진 심적존재이다. 따라서 인식의 측면에서만 본다면 상 좌의 철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던 세친은 이미 심의식과 표상(vijñapti)이 동질 적 성격임을 인정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좌 슈리라타가 개별 극미와 같이 외부에 존재하는 실재와 화합상과 같이 허구적인 인식대상을 이원적으로 구분하였던 것에 반하여, 구사론주 세친은 양자의 연속성을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존재론적 측면에서 개별극미의 실재성과 인식론적 측면에서 화합상의 실재성을 모두 지지하는 통합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상좌의 주장은 빈번히 '공화론자(空花論者)'라거나 '도무론종(都無論宗)‘에서 한 걸음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고 비판을 받았다. 그것은 지각의 영역을 넘어서 겨 우 존재하는 극미의 실재성이 부정된다면 상좌의 주장은 ’삼계유심‘에서 멀리 있 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중현의 입장에서 볼 때, 상좌의 방분을 가지는 극미 개 념을 수용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만약 그 극미 개념이 허물어진다면 바로 상좌 설은 공화론자들과 다를 바가 없게 될 것이었다. 반대로 상좌의 관점에서는 부분 을 가지지 않는 극미는 이미 공(空, śūnya)으로 떨어진 것으로, 그런 극미를 기 반으로 조대한 물질세계를 규명하는 것을 불가능하였다. 이 양자 사이에서 세친 은 상좌의 중현에 대한 극미설 비판을 수용하여 극미의 실재성의 문제를 해소시 킨다. 『유식이십론』 게송8 이하의 인무아의 확립에서 세친은 먼저 10색처 나아가 12처 전부를 종자와 현현(pratibhāsā)으로 설명한다. 세친의 아비다르마 철학에 서 실재하며 극미의 화합으로 설명되었던 물질적 영역은 이곳에서 가설적인 존재 로 재해석된다. 이것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외부에 존재하는 물질, 즉 극미의 실재 성이 포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세친은 극미와 같은 외부실재의 존재 를 부정한 것만 제외하면, 12처의 가유(假有), 종자와 상속전변차별이라는 상좌철 학의 핵심개념들을 모두 수용한다. 나아가 세친은 ‘표상(表象, vijñapti)은 물질 (색)로 현현한 것’(rūpapratibhāsā vijñaptiḥ)이라고 천명한다. 종자(bīja)가 특별 - 225 - 한 전변의 단계에 도달하는 그것이 어떤 형태로 현현하는데 그것이 내처와 외처, 즉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으로 나타나는 설명이다. 특이한 점은 종자와 현현이라는 구도가 아비다르마 전통의 6식설의 맥락에서 설명된다는 것이다. 8식설에서 제8 식의 종자들이 전6식과 7식으로 현현하는 것에 반하여, 이곳에서는 내6처가 종자 이고 그것으로부터 외6처의 물질적 대상세계가 현현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따라 서 『유식이십론』에 나타난 세친의 유식설은 아직 『유식삼십송』단계와는 거리가 있으며, 특히 6식설에 기초한 상좌 슈리라타의 인식론적 체계에 깊이 영향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세친이 본문의 목적을 인무아의 확립이라고 천명 한 것을 감안하면,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자아, 즉 인식주체는 허구적으로 드러난 현현이 물질(색)의 형상으로 나타난 대상세계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세친이 상좌 슈리라타의 철학에서 부정하고자 하는 부분은 외계에 실재하는 극미와 같은 존재이지, 화합상에 의한 인식론적 차원의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유식이십론』에서 극미의 부정도 실재하는 대상세계의 기본적인 구성요소로서 개 별적 극미의 성립 불가능성에 초점이 모아진다. 세친의 극미부정은 『대지도론』과 『유가사지론』의 전통 안에 있으며, 앞에서 살펴본 아비다르마 철학의 10색처에 대한 해석의 변화, 그리고 상좌 슈리라타와 중현의 상이한 극미결합설의 상호비 판을 종합한 것이다. 먼저 극미가 어떤 크기를 갖는다면 그것을 극미라고 칭하는 것은 형용모순이기 때문에 크기를 가지는 극미는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 은 사실 극미비판이라고 할 수도 없다. 다음으로 무한히 분해되는 가장 미세한 물질로서의 극미는 결국 공(空, śūnya)로 해소되고 말 것이므로 그러한 극미는 물질이라고 할 수 없게 된다. 중관계의 『대지도론』은 그처럼 물질의 공성(空性)을 증득하는 것이 반야(般若, prajñā)를 획득하는 것이라고 설하였다. 반면 『유가사 지론』 계통에서는 그처럼 공(空, śūnya)과 같이 크기를 같지 않는 존재라면 그것 은 물질이라기 보다는 심적 존재일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쪽으로 사유가 전개한 다. 그것이 유식에서 법무아(法無我, dharmanairātmya)의 확립이다. 다시 말해 단지 표상이 물질(색) 등으로 현현한 것이지만, 그것들은 극미와 같은 실재에 의 해 구성된 것이 아니며, 물질(색) 등의 특성을 가진 다르마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로써 상좌 슈리라타의 크기를 가지는 극미개념은 중현에 의해 부정되고, 중현 의 무방분의 극미개념은 상좌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공(空)이거나 심적 존재로 해 소되는 것으로 부정된다. 정통 설일체유부의 극미개념에 따른다면, 그것은 공(空) 인 동시에 심적존재로 귀결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세친은 이곳에서도 극미의 실 - 226 - 재성을 부정하기 위해 상좌 슈리라타의 비판적 관점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게송 11이하에서 극미의 결합에 관한 논란이 15절까지 이어진다. 이 극미의 결합방식에 대한 논의는 외부실재의 문제 보다는 인식대상의 규명과 관련 이 있다. 불교철학에서 개별적인 극미는 지각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극미들은 항 상 함께하여 존재하며, 특정한 형태로 결합하였을 때에만 인식의 대상이 된다. 게 송11과 관련된 극미의 결합 개념은 니야야-바이셰시카의 결합(saṃyoga), 구유부 의 취집(saṃghāta), 신유부의 화집(samudita), 상좌 슈리라타와 세친의 화합 (saṃcita) 등이다. ‘결합(saṃyoga)’은 개별적인 실체들이 모여서 전체상을 이루 게 하는 결합방식이다. ‘검은색’, ‘흙’, ‘하나’, ‘불’ 등의 개별적인 실체들이 결합 하여 ‘항아리’라는 실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 ‘saṃyoga'이다. 반면 구유부의 취집 (saṃghāta)는 개별적인 극미들이 한 자리에 모여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것에는 아직 결합의 특수한 능력이 해명되어 있지 않다. 극미들이 함께 있으면 왜 지각의 대상이 되는지는 알 수 없다. 중현은 화집(和集, samudita)이라는 결 합방식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한다. 개별극미들은 지각의 대상이 될 수 없지만, 그것이 화집하였을 때 그 물질(색)은 각각의 극미들이 서로 도와서 발현된 특정한 극미의 성질을 띠게 되며, 그것이 지각의 대상이 된다. 세친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결합방식을 모두 부정한다. 세친은 게송13 - 15에서 인식대상의 단일성에 대한 비판을 집중적으로 검토 한다. 이미 앞에서 바이셰시카의 단일한 전체상을 부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곳 에서 다시 인식대상의 단일성문제를 상론하는 것은 앞에서 논의되지 않은 화합상 (和合相)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인식에 주어지는 화합상 은 외부의 대상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며, 단일한 전체상도 아니고 개 별적인 실재가 취집하여 인식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 소멸한 대상의 형상 (ākāra)이 하나의 이미지로 인식에 주어지는 것이며, 이 때 감각기관은 감각대상 을 이미지 그대로 수용하기 때문에 어떤 분별이 개입하지 않는다. 이 이미지는 나무나 항아리의 형상이 거울에 투영되듯이 인식영역에 투영된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무’나 ‘항아리’가 분별되는 인식과정이 이어진다. 따라서 인식대상은 어떤 단일한 전체상이 아니라는 사실이 반복적으로 강조된다. 그리고 이렇게 단 일하지 않은 이미지를 결코 가장 미세한 물질(색)인 극미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 다. 인식에 주어지는 인식대상인 이 형상은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viṣaya)이 아니 다. 인식되는 대상(ālambana)은 마치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인 것처럼 현현(顯現, - 227 - pratibhāṣa)한 심적인 형상이며, 그것은 “오직 표상일 뿐”이다. 세친은 이런 논증의 경로를 거쳐서 게송16 이하에서 본격적으로 인식의 문제 와 타상속의 존재 문제를 검토한다. 『유식이십론』에서 세친은 아비다르마 철학과 유심사상을 통합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먼저 물질(색)이 ‘단지 표 상일 뿐’이고 그것은 다시 심리적 영역에 해당하는 심의식과 동의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이러한 세친의 과감한 해석은 사실 상좌 슈리라타의 철학체계, 특히 가 설적 존재로서의 1법처 개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이다. 상좌 슈리라타의 극 미설에 따르면 실재하는 개별극미의 차원은 감각지각을 초월해 있으며, 감각기관 에 지각되는 인식세계는 극미들의 특수한 결합형태인 화합(saṃcita)의 결과물이 다. 이 화합상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지만, 무분별로 감각기관에 직접적으로 주어 지는 형상이다. 세친은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하여 인식에 주어지는 형상을 인식론 적 차원에서의 실재성이라는 측면을 강조하여 해석한다. 그리고 개별극미의 실재 성은 부정하거나 논외의 영역을 남겨둔다. 상좌의 철학을 따르면서 그의 개별극 미 개념을 부정하는 순간 세친의 철학은 ‘오직 표상일 뿐(vijñaptimātra)’로 한 걸음 나아가 법무아(dharmanairātmya)를 확립하면서 유식으로의 전향을 완성한 다. - 228 - 5장. 결론 이 논문에서는 극미해석을 통하여 세친의 철학적 전이과정을 추적해 보았다. 진제의 『바수반두법사기』에 따르면 세친은 설일체유부로 출가하지만 형 아상가 (Asaṅga)의 설득으로 대승으로 전향하였다. 그러나 세친의 연대기에 대한 상이한 전승에 따라, 프라우발너(Frauwallner)는 아상가의 동생이며 대승으로 전향한 연 장자 세친과 『구사론』의 저자이며 경량부적 색채를 띤 젊은 세친을 구분하는 세 친 2인설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자이니(Jaini)는 『아비다르마디파』의 비판을 근거로 대승으로 전향한 세친과 『구사론』의 저자 세친은 동일인물이라고 반박하 였다. 슈미트하우젠은 『유식이십론』과 『유식삼십송』의 철학개념들에서 경량부적 전제들을 검토하고, 구사론주 세친과 유식가 세친의 사상적 연속성을 옹호하였다. 이 논문은 구사론주 세친과 유식가 세친이 동일인이라는 맥락에서 구사론주 세친 철학의 연속성과 철학적 전이과정을 극미해석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전통적으로 불교의 극미설은 바이셰시카와의 관련성만이 주목되어 왔다. 이는 세친 자신이 『유식이십론』에서 바이셰시카를 거론하여 비판하는 점에서 기인하기 도 하였다. 그러나 불교의 극미설은 바이셰시카 계통에서 4대종과 원자개념을 통 합하면서 발전한 경로와, 니야야학파에서와 같이 논리적인 분석에 치중하여 형이 상학적 극미론을 발전시킨 두 가지 경로가 있었다 (2장 1절). 『니야야수트라』에는 개별극미 개념에 대한 분석과 극미의 결합에 대한 논의가 소개되어 있다. 그 가 운데 니야야학파의 자설(自說)인 극미의 결합(saṃyoga)와 함께 saṃcita와 samudaya라는 두 가지 이설(異說)이 소개 비판되었다. 이 두 가지 결합방식은 이후 상좌 슈리라타의 화합(和合)과 중현의 화집(和集)에 내용적으로 일치하는 것 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화합과 화집의 산스크리트 원어와 인도철학 맥락에서 초기 논란의 일단을 확인하였다 (2장 5절). 극미개념, 특히 극미의 결합방식에 대한 혼란에는 현장번역의 역어가 일관되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논문에서는 현장번역어의 문제를 검토하였으며, AKBh I.44ab이하의 본문에 대한 현장의 『구사론』번역과 『순정리론』 번역에 주목하였 다. AKBh I.44ab이하의 본문에 나타난 saṃcita에 대해 현장은 『구사론』에서 ‘적 집(積集)’으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같은 문장에 대한 『순정리론』의 번역에서는 ‘화 합(和合)’을 사용하였다. 화합과 화집의 결합방식에 관한 한 『순정리론』이 훨씬 민감하고 일관적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saṃcita를 화합(和合)으로 확정하는데 - 229 - 무리가 없다고 판단된다. 이로써 『구사론』 범어에서 saṃcita가 『순정리론』에서 말하는 화합(和合)이며, 그것은 이미 『니야야수트라』에서 언급되었단 그 saṃcita 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극미의 결합방식에 대한 문제는 대상과 인식에 대한 불교 제학파의 철학적 관 점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개별극미와 극미의 화집에서 실재성의 연속을 주장하는 설일체유부는 대상(境, viṣaya)과 인식대상(ālambana)이 동일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개별극미의 실재성과 구별되는 별도의 형상을 산출하는 화합(和 合, saṃcita)의 결합방식을 따르면, 외부에 실재하는 대상과 인식에 주어지는 인 식대상인 형상은 서로 별개의 존재이다. 그리고 이 형상은 감각지각의 직접적인 대상으로 무분별의 지각이긴 하지만 실재하지 않는 허구적인 형상에 지나지 않는 다. 이런 상좌 슈리라타의 해석은 “외부에 실재하는 대상이 없는 인식(無境覺)” 개념으로 정리된다. 세친은 상좌의 이 개념을 수용하기 때문에 여기서 외부실재, 즉 개별극미의 실재성만 부정되면 법무아(法無我)의 대승사상으로 넘어갈 단계에 진입해 있었다 (2장 6절). 세친은 극미개념의 철학적 함의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자신의 철학적 논변에 적 절히 사용한 대표적인 논사이다. 그는 『구사론』의 12개소에서 다양한 아비다르마 철학의 주제들을 논하는 과정에서 극미개념의 정의, 극미의 접촉, 극미의 적집, 극미존재의 층위와 실재성 문제 등을 논하면서 존재론, 인식론, 수행론적인 주제 들을 망라하여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전개하였다. 세친은 『성업론』에서 표상(表, vijñapti)문제를 제1주제로 선정하고, 행위의 업(業)과 극미의 관계를 분석하였다. 『구사론』과 『성업론』의 단계에서 세친은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경향을 지닌 상좌 슈리라타의 철학적 관점을 따르면서도 여전히 설일체유부의 철학체계를 재해석 내지는 재구성하려는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중 핵심적인 과제로 상좌 슈 리라타의 ‘12처가유설과 1법처설,’ 그에 따른 vijñapti의 해석을 들 수 있다. 상좌 슈리라타는 극미들이 화합하여 만들어낸 12처의 영역을 가설적인 존재 (prajñaptisat)로 판단하였으며, 따라서 12처는 기본적으로 물질적인 실재성을 상 실한 심적요소와 동일화될 수 있었다. 따라서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12처는 모두 1법처(法處)로 단일화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현상세계 일체(一切)를 비실재하는 가유 혹은 속성화한 다르마로 결론지을 수 있다는 의미가 되며, 이 지점에서도 세친은 대승에서 한 걸음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3장 2절 3.) 아비다르마의 5위 75법에서 색법(色法)은 10색처, 즉 5근과 5경 그리고 무표 - 230 - 색(無表色, avijñaptirūpa)로 구성된다. 이 때 10색처는 표색(表色, vijñaptirūpa) 에 상응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설일체유부에서 이 10색처는 실유하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상좌 슈리라타에게 10색처는 가설적 존재이다. 구사론주 세친은 극미의 실재성과 같은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실재성과 화합상의 실재성과 같은 인식론적 차원에서의 실재성을 모두 인정한다. 따라서 세친에게 이 10색처의 표색은 인식 론적 차원에서 실재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10색처가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실 재성을 지니지 않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만약 궁극적인 차원에서 극미의 실 재성이 부정된다면, 12입처는 존재론적 근거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3장 2절 9.) 『유식이십론』은 대상과 인식에 대한 세친의 철학적 여정의 종착지이다. 결론 은 “삼계에 속하는 것은 오직 표상일 뿐”이다. 이 명제는 아비다르마 불교에서 일체를 설명하였던 온, 처, 계의 3과를 포괄하며, 심의식이라는 심적 요소들과 대 상적 측면으로 이해되었던 표상(表象, vijñapti)이 동의어라고 선언한다. 이 지점 에서 세친은 상좌 슈리라타의 외계에 실재하는 극미 개념을 포기하고 마지막 문 지방을 넘는다. 세친은 ‘오직 표상일 뿐(vijñaptimātra)’라는 대명제를 몇 가지 관점에서 입증해 보인다. 첫 번째는 소박실재론자들의 질문에 대한 응답이고, 두 번째는 불교 전통의 12처설에 입각하여 감각지각을 통하여 현상하는 일체의 존재 는 실재성이 없다는 주장을 논증한다. 세친은 여기에서 12처가유설로 전향하는데, 그는 이것을 통해 감각주체인 자아의 비실재성, 즉 인무아(人無我)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세친은 이곳에서 알라야식을 종자로 보고, 종자와 현행이라는 구도를 통 해서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을 포괄하는 유식의 12처가유설을 제시하였다 (4장 2절 2.). 『구사론』에서 12처실유설을 주장하였던 세친은 『유식이십론』 게송8이하에서 12처는 인무아를 설하기 위한 숨은 뜻을 가지고 설해졌으며 가설적인 존재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다시 상좌 슈리라타의 화합(saṃcita)과 그에 의해 구성된 가설 적인 차원의 12처설과 일치한다. 또한 세친은 이곳에서 비유자-경량부의 종자와 현현, 상속전변차별의 개념을 끌어들여 6식설의 체계 안에서 6내처와 6외처를 종 자와 현현의 관계로 설명한다. 이는 아직 8식설로 이행하기 이전의 종자식과 현 현의 모델인 것으로 추정된다 (4장 3절 1.). 이제 외부에 존재하는 대상(viṣaya) 의 실재성은 논의주제에서 탈락하고, 대신 인식의 영역에 주어진 대상 (ālambanan)이 구성하는 현상세계가 중심주제가 된다 세친은 이어서 법무아의 확립이라는 주제를 극미부정의 논리를 통해 해명한다. - 231 - 존재론적 차원에서 개별극미의 실재성 부정은 상좌 슈리라타와의 결별을 의미한 다. 세친의 철학은 전체적으로 아비다르마의 철학체계 안에 있지만, 상좌 슈리라 타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상당수 채용하고 있다. 중현은 『순정리론』에서 이런 상좌의 철학이 공화론자 혹은 도무론종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거듭해서 비판하였 다. 세친은 바로 그 지점에서 상좌의 외계 실재성을 포기함으로써 실제로 유식으 로의 전향을 감행하였다. 세친은 상좌의 혁신적 개념들을 채택하면서도 그와 결 별하게 되는 지점이 바로 극미의 실재성 비판인 것이다. 그러나 극미의 집적과 관련해서 세친은 상좌의 모델을 전적으로 수용하였다. 『유식이십론』에서 세친은 특히 단일한 전체상의 비판에 주력하는데, 이것은 화합상의 이미지가 단일한 전 체상으로 오해될 수 있는 여지를 제거하고, 나아가 다양한 색깔을 가진 나비와 같은 하나의 형상으로서의 화합상의 특징을 규명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런 형상의 인식의 문제는 이후 불교인식논리학에서도 중요한 논의주제가 되었다. (4장 3절, 4절) 세친의 철학적 전이과정은 대상과 인식의 문제에 있어서 경험되는 현상세계에 관심을 집중하였던 세친의 일관된 철학적 경향에 의해 추동되었다. 그는 『구사 론』 단계에서 12처실유설을 주장하면서 설일체유부뿐만 아니라 상좌 슈리라타와 도 입각점을 달리하였다. 아비다르마 전통에서 동일시되었던 외부에 실재하는 대 상(viṣaya)과 인식대상(ālambana)는 상좌에 의해 개념적으로 구분되고, 실재의 연속성이 단절되었다. 세친은 대상과 인식대상의 불연속이라는 상좌의 관점을 수 용한다. 상좌의 철학적 관점은 실재와 현상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고, 궁극적인 차원과 세속적이고 허구적인 현상적 차원의 차이를 인정하는 편이었다. 반면 세 친은 일체의 존재를 하나의 체계 안에서 완결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낸다. 이것은 반드시 상좌 슈리라타의 이원적 경향에 대한 극복을 전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철학적 작업에서 세친은 경험적 현실세계의 일차성에 주목한다. 따라서 경험적으로 지각되거나 확실성을 보장할 수 없는 관념적 존재들을 포기하 고, 오직 경험적 사실의 직접성이라는 측면에 집중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상세계에 대한 해석의 차이는 필연적으로 vijñapti에 대한 상이 한 학파적 해석을 수반하였다. 설일체유부에서 무표색(無表色, avijñaptirūpa)을 제외한 물질적 존재를 의미하였던 표색(表色, vijñaptirūpa)은 상좌 슈리라타에서 물질적 존재의 영역전부를 포함하게 된다. 이는 물질적 존재는 감각지각의 영역 에 한정되는 것이며, 감각지각은 조대한 물질을 대상으로 발생하는 것이며 따라 - 232 - 서 가설적인 존재(prajñaptisat)라는 것을 의미한다. 상좌 슈리라타는 개별극미 차원의 실재성에 주목하고, 극미의 화합으로 만들어진 현상세계를 허구적이라는 이원적 해석을 하였다. 따라서 가장 기본적인 물질적 존재인 대종극미들만이 실 재의 차원에서 인정되고, 이 4대종이 함께 구생(俱生)하여 만들어내는 12처의 현 상의 문(門)은 비실재하는 영역에 포함된다. 따라서 상좌 슈리라타가 이 가설적인 존재는 극미 차원의 실재하는 존재의 영역에 대해 불완전하고 허구적이라는 문제 에 주목하였다면, 세친은 가설적인 세계 자체에 대한 무분별한 경험적 사실의 확 실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이런 경향은 12처실유설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이 때 세친은 이미 물질적 존재의 차원과 인식론적 존재의 차원을 구분하 고 있으며, 12처실유를 통해서 인식적 세계의 실재성이라는 관점에 접근하고 있 다. 이러한 해석은 사실 비유자-경량부 계통에서 발전된 극미의 화합상(和合相)에 근거를 두고 있다. 세친 극미해석은 『구사론』이나 『순정리론』을 통해서 밝혀져 있는 한에서는 상좌 슈리라타의 주장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감각지각 에 의해 포착되는 세계는 모두 다수의 극미들이 화합하여 만들어진 형상이고, 이 것들은 개별적 실재와는 별개의 형상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실재성을 담보하 지 못한다. 그러나 감각지각이 허용하는 현상세계의 경험은 모두 이 화합상이 만 들어내는 형상이며, 그것에 대한 지각은 직접적이며 따라서 무분별이다. 그렇다면 12처의 영역에서 이렇게 경험되는 세계는 비록 허구적이라 하더라도 감각지각에 의존하여 일관된 경험을 할 수 있는 안정성을 제공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 서 상좌 슈리라타는 보다 토대주의적 관점을 취한다면, 세친은 보다 표상주의적 정합설(coherence theory)에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구사론』단계에서 세친은 설일체유부의 아비다르마철학과 완전히 결별한 것도 상좌 슈리라타 철학 의 이원론에서 완전히 독립한 것도 아니다. 다소 모호한 상태로 남아있던 세친의 관점은 상좌 슈리라타에게 남겨져 있던 마지막 한 발자국을 넘어서면서 해소된다. 일체의 실유를 주장하였던 중현은 상 좌 슈리라타의 주장이 일체존재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허무주의와 같은 것으로 떨 어질 수 있다는 경고를 계속하였다. 만일 상좌가 실재로 인정하였던 개별적 대종 극미의 차원이 존재론적 근거를 상실한다면 중현의 경고는 현실이 될 것이다. 문 제는 설일체유부의 무방분의 극미개념을 따를 경우, 개별적인 극미는 공(空, śūnya)으로 해소되고 결국 도무론(都無論)에 떨어지는 것은 논리적 필연에 가까 - 233 - 울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지적은 『대지도론』의 극미 부정에서 이미 제기되었 다. 세친은 존재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는 개별극미의 존재를 부정하는데 있어서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허무주의적 방향으로 진행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 는 『유가사지론』 계통의 해석을 수용함으로써 극미를 가설적인 존재 (prajñaptisat)로 해석한다. 그리고 이 가설적 존재는 ‘오직 표상일 뿐 (vijñaptimātra)’인 현상세계에 포함된다. 세친은 삼계(三界)는 모두 가설적이고 관념적이며 심적인 존재영역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유식이십론』은 이 삼계에 속한 현상세계에 대한 세친의 철학적 해명 이다. 그는 먼저 10색처와 같은 대상세계로 정의되었던 표상(表象, vijñapti)이 실 은 화합한 극미들이 만들어낸 물질세계와 같이 가설적이라는 이전의 논의에서 출 발한다. 그리고 이 표상은 이미 외부의 대상이 의식 속으로 자신의 형상을 투사 한 것이기 때문에 의식적 존재이다. 다시 말해 심의식이나 표상은 모두 본질에 있어 차이가 없는 심리적 존재인 것이다. 이것이 세친이 『유식이십론』에서 제시 하는 대명제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논문에서는 『유식이십론』의 저자 세친이 처음 카슈미르 설일체유부에 출가하였고, 상좌 슈리라타의 영향을 받아 『구사론』을 저술하였으 며, 유식으로 전향한 인물이라는 해석을 지지하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세친은 어 떤 종교적 회심과 같은 방식이 아니라, 철학적 탐구의 결과 점진적인 변화과정을 거쳐 마지막 단계에서 이전의 철학적 관점과 결별하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세친 은 외부실재의 토대가 되는 극미 개념을 부정함으로써 상좌 슈리라타가 건너지 않았던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고, 법무아를 확립함으로써 대승으로의 철학적 전 이를 완성하였다. 이같은 세친의 철학적 여정은 비유자-경량부의 대표적인 철학 개념인 상속전변차별이 그 자신의 삶으로 구현된 하나의 유비(metaphor)로 해석 할 수 있을 것이다. - 234 - 참고문헌 I. 원전 『觀所緣緣論』. 陳那菩薩造. 三藏法師玄奘奉 詔譯. No. 1624. 『觀所緣論釋』. 護法菩薩造. 大唐三藏法師 義淨奉 制譯. No. 1625. 『俱舍論記』. 沙門釋光述. No. 1821. 『大乘廣百論釋論』. 聖天菩薩本 護法菩薩釋. 三藏法師玄奘奉 詔譯. No. 1571. 『大乘成業論』. 世親菩薩造. 大唐三藏法師玄奘奉 詔譯. No. 1609 『大乘唯識論』. 天親菩薩造. 陳天竺三藏 真諦譯. No. 1589. 『大乘入楞伽經』. 三藏法師 實叉難陀奉 勅譯. No. 672. 『成唯識論』. 護法等菩薩造. 三藏法師玄奘奉 詔譯. No. 1585. 『成唯識論述記』 沙門基撰. No. 1830. 『成唯識寶生論』 (一名二十唯識順釋論). 護法菩薩造. 大唐三藏法師義淨奉 制譯. No. 1591. 『阿毘達磨俱舍論』. 尊者世親造. 三藏法師玄奘奉 詔譯. No. 1558. 『阿毘達磨俱舍釋論』 婆藪盤豆造. 陳天竺三藏 真諦譯. No. 1559. 『阿毘達磨大毘婆沙論』. 五百大阿羅漢等造. 三藏法師玄奘奉 詔譯. No. 1545. 『阿毘達磨順正理論』. 尊者眾賢造. 三藏法師玄奘奉 詔譯. No. 1562. 『瑜伽師地論』. 彌勒菩薩說. 三藏法師玄奘奉 詔譯. No. 1579. 『唯識論』 (破色心論). 天親菩薩造. 後魏瞿曇 般若流支譯. No. 1588. 『唯識二十論』. 世親菩薩造. 大唐三藏法師 玄奘奉 詔譯. No. 1590. 『唯識二十論述記』. 翻經沙門 基撰. No. 1834. 『入楞伽經』. 元魏天竺三藏 菩提留支譯. No. 671. 『雜阿含經』. 宋天竺三藏求那跋陀羅譯. No. 99. 『婆藪槃豆法師傳』. 陳天竺三藏法師 真諦譯. No. 2049. 『구사론』. 『아비달마구사론』. 4 Vols. 권오민 역. 서울: 동국역경원 『순정리론』. 『아비달마순정리론』. 권오민 역. 한글대장경. Dhātuvibhaṅga-Suttaṃ. MN 140 (III.239). Sabba-Suttaṃ. SN 35.23. (IV.15). ADV Abhidharmadīpa. Jaini, Padmanabh S., ed. Abhidharmadīpa with Vibhāṣā‐ prabhāvṛtti . Tibetan Sanskrit Works Series 4. Patna: - 235 - Kashi Prasad Jayaswal Research Institute, (1959) 1977. AKBh Abhidharmakośabhāṣya. Pradhan, P., ed. Abhidharmakośabhāṣyam of Vasubandhu. 2nd ed. Tibetan Sanskrit Works Series 8. Patna: Kashi Prasad Jayaswal Research Institute, 1975. AKVy Sphuṭārthā Abhidharmakośavyākhyā. Wogihara Unrai, ed. Sphuṭārthā Abhidharmakośavyākhyā: The Work of Yaśomitra. Tokyo: The Publishing Association of the Abhidharmakośavyākhyā, 1932. AS Abhidharmasamuccaya. Pradhan, P., ed. Abhidharma Samuccaya of Asaṅga. Visva‐Bharati Studies 12. Calcutta: Visva‐Bharati Santiniketan, 1950. ASBh Abhidharmasamuccayabhāṣya. Tatia, Nathmal, ed. Abhidharma Samuccayabhāṣyam. Tibetan Sanskrit Works Series 17. Patna: Kashi Prasad Jayaswal Research Institute, 1976. BS Bāhyārthasiddhi-kārikā, ed. N. Aiyaswami Sastri, Bulletin of Tibetology, Vol.IV, No.2. Namgyal Institute of Tibetology, Gangtok. 1967. LAS Laṅkāvatāra Sūtra. Ed. by Bunyiu Nanjio. Kyoto: The Otani University Press. 1923. NySBh Gautamīyanyāyadarśana with Bhāṣya of Vātsyāyana. Ed. by Anantalal Thakur. New Delhi: Indian Council of Philosophical Research. 1997. SNS Saṃdhinirmocana Sūtra. Ed. by Etienne Lamotte. Universite De Louvain. 1935. TrBh Triṃśikābhāṣya In Vijñaptimātratāsiddhi: Deux Traites de Vasubandhu: Viṃśatikā et Triṃśikā. Levi, Sylvain. Ed. Paris: Libairie Ancienne Honore Champion, 1925. Ts Tattvārthasūtra (Umāsvāti) Vimś. Viṃśatikā In Vijñaptimātratāsiddhi: Deux Traites de Vasubandhu: Viṃśatikā et Triṃśikā. Levi, Sylvain. Ed. Paris: Libairie Ancienne Honore Champion, 1925. VS Vaiśeṣikasūtra of Kaṇāda with the Commentary of Candrānanda. ed. by Muni Śrī Jambuvijayaji. Baroda: Oriental Institute. 1961. - 236 - VS(E) The Vaiśeṣika sūtras of Kaṇāda translated by Nandalal Sinha. 2nd ed. Allahabad: Vijaya Press. 1923. VinSg rnal 'byor spyod pa'i sa rnam par gtan la dbab pa bsdu ba (Yogācārabhūmi Viniścayasaṃgrahaṇī). D4038, P5539, N4307. YBh Yogācārabhūmi. Bhattacharya, Vidhushekhara, ed. The Yogācārabhūmi of Ācārya Asaṅga. Part 1. Calcutta: University of Calcutta, 1957. II. 이차문헌 고익진 (1990)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 서울: 동국대 출판부. 권오민 (1994) 『有部 阿毗達磨와 經量部 哲學의 硏究』. 서울: 경서원. 권오민 (2002) 『아비달마구사론』. 4 Vols. 서울: 동국역경원. 권오민 (2003) 『아비달마불교』. 서울: 도서출판 민족사. 권오민 (2007) 「譬喩論者 (Dārṣṭāntika)의 無境覺(無所緣識)論 -유식학파의 유식무경 설(唯識無境說)의 기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韓國佛敎學』 Vol.49, 7 - 50. 권오민 (2008) 「Pūrvācārya(先代 軌範師) 再考」. 『불교학연구』 No.20, 243 - 288. 권오민 (2010a) 「불교철학에 있어 학파적 복합성과 독단성(I):세친의 『유식이십론』에 서의 외계대상 비판의 경우. 『인도철학』 제28집, 139 - 170. 권오민 (2010b) 「불교철학에 있어 학파적 복합성과 독단성(II): 진나의 『관소연연론』 에서 외계대상 비판의 경우」, 『불교연구』 제33집, 41 - 97. 권오민 (2012) 『上座 슈리라타와 經量部』. 서울: 씨·아이·알. 김성구 역 (1994) 『大智度論』. 서울: 東國譯經院, 1994. 金致溫 (1998) 「外界 對象의 否定에 관한 一考察 : 陳那의 『觀所緣緣論』을 중심으 로」. 『白蓮佛敎論集』 Vol.8. 海印寺 白蓮佛敎文化財團. 321 - 347 김희정 (2001) 「트롭 이론의 두 논증에 대한 비판」. 한국철학회, 『철학』 68권, 231 - 256. 남수영 (1998) 「『유식이십론』의 극미설 비판」. 『印度哲學』. Vol.7, 197 - 218. 朴仁成 (2008) 「『유식이십론』 게송10에 대한 규기의 해석(1)」, 『韓國佛敎學』 Vol.50, 313 - 350. 박창환 (2009) 「法稱(Dharmakīrti)의 감각지각(indriyapratyakṣa)론은 과연 輕量部 - 237 - 적인가?- 上座 슈리라타(Śrīlāta)의 감각지각 불신론과 이에 대한 世親의 절 충론을 통해 본 경량부 前5識說의 전개과정」. 『인도철학』 제27집, 5 - 51. 박창환 (2010) 「구사론주 세친의 극미(paramāṇu)실체론 비판과 그 인식론적 함의」 『불교학리뷰』 8권, 221 - 292. 박창환 (2011) 「구사론주(kośakāra) 세친(Vasubandhu)과 『능가경』 (Laṇkāvatārasūtra) - 『釋軌論』(Vyākhyāyukti)의 『楞伽經』인용을 중심으 로 본 『능가경』과 세친 사상의 영향관계-. 『인도철학』 제32집, 251 - 293. 방인 (1998) 「불교의 극미론(極微論)」. 『哲學硏究』. No.65. (1998.2), 51 - 80. 뿔리간들라 (1991) 『인도철학』. 이지수 역. 서울: 민족사. (Puligandla, R. Fundamentals of Indian Philosophy. Nashville: Abingdon Press, c1975.) 사사키 겐쥰 (2016) 『불교 시간론: 아비달마불교의 시간과 존재에 대한 체계적 이 해』. 황정일 역. 서울: 씨아이알. (佐佐木現順 著. 『佛敎に於ける時間論の硏 究』. 東京: 淸水弘文堂, 昭和49[1974]) 사사키 시즈카(佐左木閑) (2007) 『인도불교의 변천: 왜 불교는 다양화했는가?』. 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석법성 역 (2016) 『대지도론』 1~5. 서울: 운주사. 안성두 (2005) 「‘唯識性’ (vijñaptimātratā) 개념의 유래에 대한 최근의 논의의 검토 - 슈미트하우젠과 브롱코스트의 논의를 중심으로-」. 『불교연구』 20, 159 - 181. 안성두 (2011) 「불교에서 업의 결정성과 지각작용 - 결정론을 둘러싼 논의에서불교의 관점은 무엇인가?-」, 『인도철학』 32집, 133 - 165. 안성두 역 (2011) 『보성론』. 서울: 소명출판. 안성두 역 (2015) 『보살지』. 서울: 세창출판사. 吳亨根 (1994) 『佛敎의 物質과 時間論』. 서울: 瑜伽思想社. 원혜영 (2010) 「부분과 전체에 관련된 원자론 -니야야-와이세시카(Nyāya-Vaiśeṣika) 와 불교를 중심으로-」. 한국선학회, 『한국선학』 26권, 643 - 683 윤영호 (2007) 「표업(表業)의 본질에 대한 고찰 -바수반두(Vasubandhu)와 상가바드 라(Sanghabhadra)의 해석을 중심으로-」. 『한국불교학』, Vol.48, 205 - 237. 윤영호 (2008) 「有部의 極微說 연구」. 『韓國佛敎學』 Vol.50, 39 - 66. 윤영호 (2013) 「說一切有部의 極微說 硏究」. 동국대학교 박사논문. 2013. 윤영호 (2015) 『불교의 원자설: 불교와 현대물리학의 만남』. 씨아이알. - 238 - 이규완 (2016) 「세친의 극미(paramāṇu)해석의 변화와 12처(āyatana)설의 상관성에 대하여」. 『보조사상』 46집, 53 - 97. 李鍾徹 (1991) 「Vyākhyāyuktiのrūpa論」. 『佛敎文化』 第2427号, 69 - 96. 李鍾徹 (1997) 「12處考」. 『伽山學報』, Vol.6, 187 - 201. 李鍾徹 (2001a) 『世親 『釋軌論』 チベット語譯 校訂テキスト』. 東京: 山喜房佛書林. 李鍾徹 (2001b) 『世親思想の 硏究: 釋軌論を中心として』. 東京: 山喜房佛書林. 李鍾徹 (2004) 「vijñaptiの語形について」. 『印度學佛敎學硏究』 Vol.53 No.1 (105), 346 - 341. 이중표 (1988) 「十二處說考」. 한국불교학회, 『한국불교학』13권, 137 - 158 이지수 (1976) 「認識對象의 外界實在性 問題 : Ālambana-parikṣa를 中心으로」. 『印度哲學』 1집, 1 - 60. 이지수 (2003) 「유외경론자(有外境論者)와 유식론자(唯識論者)의 대론(對論): 『유식이 십론(唯識二十論)』 (Viṁśatikā)의 이해를 위하여」. 『인도철학』 Vol.23, 277 - 314. 장 살렘 (2009) 『고대원자론』. 양창렬 역. 서울: 도서출판 난장. 조은수 (2015) 「인도와 중국 불교 경론을 통해 본 ‘Buddha-vacana’개념의 의미 변 천」. 『인도철학』 제44집, 127 - 159. 토사키 히로마사 (2015) 『불교인식론 연구: 다르마끼르띠의 『쁘라마나바릇띠까』「현량 론」 (現量論)』 박인성 옮김. 서울: 길. 하토리 마사아키 (1991) 「유가행파의 철학」. 이만 역. 『인식과 초월』. 서울: 민족사. (服部正明 (1975) 『佛敎の思想 4: 認識と超越』. 服部正明, 上山春平 『共著』. 東京: 角川書店.) 황정일 (2004) 「세친의 유위 4상 비판에 대한 중현의 반론-4상과 관련한 몇 가지 쟁 점을 중심으로-」. 『인도철학』 제16집, 171 - 199. 황정일 (2006) 「說一切有部의 三世實有說 硏究: 三世實有說에 대한 世親의 批判과 衆賢의 反論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デュケンヌ R. (1978) "Heterodox Views on the Elements according to Buddhist Testimonies." 『印度学仏教学研究』 Vol. 26 (1978) No. 2 加藤利生 (1987) 『瑜伽師地論』に見られる瑜伽行派の極微論の特色. 『印度學佛敎學硏 究』. 35卷 2號 (通卷70), 80 - 82. 加藤利生 (1989) 「唯識学派の極微論をめぐる問題 -極微論受容の意図について-」. 『印 度学仏教学研究』. Vol. 38 No. 1. 加藤利生 (1990) 「唯識学派の極微論の起源とその意図」. 『龍谷大学大学院研究紀要』. - 239 - 人文科学 11, 66 - 80. 加藤利生 (1995) 「唯識學派における法處所攝色の取り扱かい」. 『印度學佛敎學硏究』. 43卷 2號 (通卷86), 174 - 177. 加藤利生 (1996) 「『瑜伽師地論』に見られる法処所摂色の取り扱かい」. 『印度学仏教学 研究』 Vol. 44. No. 2. 加藤利生 (1998) 「極逈色の極微について」.『仏教学研究』 通号 54, 39 - 60. 加藤純章 (1973) 「極微の和合と和集 -有部と経部の物質の捉え方」. 『豊山教学大会紀 要』. 東京: 豊山教学振興会, 129 - 137. 加藤純章 (1989) 『經量部の硏究』. 東京: 春秋社, 平成元 加藤純章 (2011) 「補説「極微の和集と和合」 付論:経量部とは何か」. 豊山学報 (54), 1 - 14, 加藤純章 (2012) 「『倶舎論』における「相続の特殊な変化」 (saṃtati-pariṇāma-viśeṣa 相続転変差別): 積集説から転変説ヘ(覚え書)」. 豊山学報 (55), 136 - 122. 加藤精神 (1954) 「有部宗の極微に關する古今の謬說を匡す」. 『印度學佛敎學硏究』. 32 卷 2號 (通卷4) 1954. 224 - 226 (577 - 579). 久我順 (1951) 「極微について」. 『宗敎硏究』 127號. (1951.10), 27 - 28. 宮本正尊 等編 (1951) 『宇井伯壽博士還曆記念論文集: 印度哲學と佛敎の諸問題』. 東 京 : 岩波書店. 吉元信行 (1971) 「有部の八事俱生說」. 『印度學佛敎學硏究』. 20卷 1號 (通卷39), 331 - 336. 吉元信行 (1978) 「阿毘達磨集論における蘊界処建立の特質」. 『印度學佛敎學硏究』. 27 卷 1號 (通卷53), 214 - 220 吉元信行 (1982) 「物質概念の大乗アビダルマ的分析 -色蘊の諸相-」. 『印度学仏教学 研究』 Vol. 31 (1982) No. 1. 那須円照 (1997) 「アビダルマの極微論(1) : 極微が触れるか触れないかという問題を中 心として」. 『佛教學研究』 Vol.53, 1 - 27. 那須円照 (1997) 「アビダルマの極微論(2)--極微が触れるか触れないかという問題を中 心として」. 『インド学チベット学研究』 (2), 60 - 86. 大崎昭子 (1971) 「唯識二十論におけるarthaについて」. 『佛敎學セミナ-』, 14號, 34 - 49. 渡邊매雄 (1963). 「根本佛說における五蘊, 十二處兩存在觀の外延關係」. 東京大學 文 學部 宗敎學硏究室內 日本宗敎學會. 『宗敎硏究』. 36卷 3輯 (174號), 77 - 78. - 240 - 栗原尚道 (1994) 「Tattvasaṃgraha, Bahirarthaparīkṣāにあらわれる形象虚偽論に ついて」. 『印度学仏教学研究』 通号 84, 191 - 197. 栗原尚道 (1999) 「Tattvasaṃgraha, Bahirarthaparīkṣāにあらわれる極微説批判」. 『九州龍谷短期大学紀要』. 通号 45, 171 - 182. 木村誠司 (2001) 「アビダルマの二諦説―序章―」. 『駒澤大學佛敎學部論集』. 第 42 號. 武田浩学 (2003) 「『大智度論』の著者はやはり龍樹ではなかったのか : その独自の般舟 三昧理解から羅什著者説の不成立を論ずる」. (國際佛敎學大學院大學) 『硏究 紀要』. Vol.3, 211 - 244. 武田浩学 (2005) 『大智度論の硏究』. 東京: 山喜房佛書林, 2005. 梶山雄一 (1983) 『佛敎における存在と知識』. 東京: 紀伊國屋書店. (『인도불교철학』. 권오민 옮김. 서울 : 民族社, 1990.) 梶山雄一 (1993) 「세친의 식전변(識轉變)」, 『唯識思想』. 講座 大乘佛敎8. 平川彰 et al. 李萬 譯. 서울: 경서원. 芳村博実 (1978) 「初期唯識論書における Vijñapti をめぐつて」. 『印度學佛教學研究』. Vol. 27. 柏原信行 (1980) 「門 (dvara)」. 『印度學佛敎學硏究』. 29卷 1號 (通卷57), 78 - 81. 兵藤一夫 (1990) 「三性說における唯識無境の意義(1)」. 『大谷學報』 Vol.69 No.4, 25 - 38. 兵藤一夫 (1991) 「三性說における唯識無境の意義(2)」. 『大谷學報』 Vol.70 No.4, 1 - 34. 兵藤一夫 (2005) 「初期瑜伽行派の極微說批判 (一)」, 『佛敎とジャイナ敎: 長崎法潤博 士古稀記念論集.』. 長崎法潤博士古稀記念論集刊行會 編. 東京: 平樂寺書店. 兵藤一夫 (2006) 「初期瑜伽行派の極微說批判 (二)」, 『佛敎學セミナ―』, 84. 兵藤一夫 (2006) 『唯識ということ: 『唯識二十論』を讀む』. 東京: 春秋社. 服部正明 (1975) 『佛敎の思想 4: 認識と超越』. 服部正明, 上山春平 『共著』. 東京: 角川書店, 昭和45[1975]. 福原亮嚴 (1962) 「佛典に見られる物質(色)の硏究: 有部說を中心として」. 『印度學佛敎 學硏究』. Vol. 10. No. 1, 12 - 23. 北野新太郎 (2005) 「Vijñapti についての再考察」. 『印度學佛教學研究』. Vol. 54 (2005) No. 1, 449 - 446. 寺石悦章 (1992) 「Ālambanaparīkṣāにおける原子論批判」. 『印度学仏教学研究』 通 号 80, 178 - 180. - 241 - 寺石悦章 (1992) 「衆賢の極微説」. 『종교연구』 291. 山口益 (1931) 「唯識二十釋論注記」in 『唯識二十論の對譯硏究』. 佐佐木月樵; 山口益 共譯. 東京: 國書刊行會, (再刊, 1977), 1 - 25. 山口益 (1941) 『(佛敎における)無と有との對論: 中觀心論入瑜伽行眞實決擇章の硏究』. 東京: 山喜房佛書林, (再刊, 1975). 山口益 (1940) 「唯識の破析する極微說について」. 『宗敎硏究』. 季刊2年 4輯 (106號), 395 - 400. 山田恭道 (1955) 「有部の極微說について」. 『宗敎硏究』. 146號. 三友健容 (2007) 『アビダルマデイーパの研究』. 京都: 平楽寺書店 上杉宣明 (1976) 「說一切有部の極微論硏究」. 『佛敎學セミナ-』. 24號 (1976.10), 37 - 52 松島央龍 (2009) 「衆賢の剃那滅論証」. 『佛敎學硏究』 65, 21 - 50. 松本成裕 (1994) 『瑜伽師地論』に見られる身表色. 印度學佛教學研究. Vol. 42 (1994) No. 2 水野弘元 (1951) 「佛敎における色(物質)の槪念について」. 『印度哲學と佛敎の諸問 題』. 宮本正尊 等編. 宇井伯壽博士還曆記念論文集. 東京: 岩波書店. 神子上惠生 (1967) 「瑜伽師地論に於ける極微說批判」. 『印度學佛敎學硏究』. 15卷 2 號 (通卷30), 261 - 264. 神子上惠生 (1978) 「物にそなわる普遍的機能 (Sāmānyā śakti)と特殊的機能 (Pratiniyatā śakti)」. 『佛敎文化硏究所紀要』 17輯, 1 - 15. 神子上惠生 (1983) 「シュバグプタの極微說の擁護: 知識の認識對象の問題をめぐっ て」. 『佛敎文化硏究所紀要』. 22輯, 1 - 17. 阿部真也 (2004) 「有部の極微説をめぐって 古代ギリシアとの比較」. 『仏教文化学会紀 要』 Vol. 13, 86 - 105. 桜部 建 (1953) 「俱舍論の論書としての性格の一面」, 『大谷学報』 通号 117, 41 - 52, 櫻部建 (1969)) 『俱舍論の硏究』 京都: 法藏館. (再刊, 1975). 櫻部建, 上山春平 共著. (1969) 『存在の分析 : 阿毘達磨』, 정호영 譯, 『아비달마의 哲學: 존재의 분석』, 서울: 民族社, 1989. 宇井伯壽 (1953) 『(四譯對照)唯識二十論硏究』. 東京: 岩波書店, (再刊, 1990). 宇井伯壽; 水野弘元 解說 (1963) 『大乘佛典の硏究』. 東京: 岩波書店, (再刊, 1990). 宇井伯壽; 中村元 解說 (1958) 『陳那著作の硏究』 東京: 岩波書店, (再刊, 1990). 宇井伯壽 (1952) 『(安慧·護法)唯識三十頌釋論』. 岩波書店. (再刊, 1990). - 242 - 印順 (1993) 『大智度論の作者とその翻訳』. 東京: 山喜房佛書林, 民國82[1993]. 一色大悟 (2015) 「説一切有部の極微論 : 『順正理論』における和集極微の解釈につい て」. 『印度学仏教学研究』 63(2), 957 - 953. 長崎法潤博士古稀記念論集刊行會 編 (2005) 『佛敎とジャイナ敎= Buddhism and Jainism: Essays in Honour of Dr. Hojun Nagasaki on His Seventieth Birthday: 長崎法潤博士古稀記念論集』. 東京: 平樂寺書店. 長澤實導 (1953) 「Vijñapti と Vijñāna」. 『印度學佛教學研究』. Vol. 1. No. 2. 齋藤直樹 (2004) 「知としての「忍」」. 『印度學佛教學研究』 Vol. 52. No. 2. 早島理 (1988) 「『顯揚聖敎論』に見られる極微說」. 『印度學佛敎學硏究』 37卷 1號 (通 卷73), 85 - 92. 早島理 (1989) 「極微説管見 ―瑜伽行唯識学派を中心に―」. 『長崎大學敎育學部人文科 學硏究報告』. Vol. 38, 19 - 36. 佐古年穂 (1985) 「無表色に関する一考察」. 『印度學佛教學研究』. Vol. 33 (1985) No. 2. 佐佐木月樵 (1931) 『唯識二十論の對譯硏究』. 佐佐木月樵; 山口益 共譯. 東京: 國書 刊行會, [1977]. 佐佐木閑 (2009) 「有部の極微説」. 『印度学仏教学研究』. 巻57, 932 - 926. 佐佐木閑 (2000) 『インド佛敎變移論: なぜ佛敎は多樣化したのか』. 東京: 大藏出版, 2000. 舟橋一哉 (1952) 「俱舍論の敎義に関する二三の疑問」『大谷学報』 通号 112, 32 - 44 舟橋一哉 (1954) 『業の硏究』. 京都: 法藏館, 1981 (c1969). 真田康道 (1991) 「提婆の原子論」, 『仏教論叢』 通号 35. (1991-09-10), 24-27. 清水俊史 (2013) 「説一切有部における表(vijñapti)の構造」. 『佛教大学大学院紀要』. 文学研究科篇 第41号. 坂本幸男 (1945) 「極微論」 『中山文化研究所紀要』 通号 5, 173 - 226. 板本幸男 (1981) 『阿毘達磨の硏究』. 坂本幸男論文集, 第1. (坂本幸男論文集刊行会編 集), 大東出版社. 平川彰, 梶山雄一, 高崎織道 共編 (1993) 『唯識思想』. 講座 大乘佛敎8. 李萬 譯. 서 울: 경서원, 戶崎宏正 (1979) 『佛敎認識論の硏究: 法稱著 『プラマ-ナ·ヴァ-ルィカ』の現量論』. 上 卷. 東京: 大東出版社. 戶崎宏正 (1985) 『佛敎認識論の硏究: 法稱著 『プラマ-ナ·ヴァ-ルィカ』の現量論』. 下 卷. 東京: 大東出版社. - 243 - 橫山紘一 (1972) 「唯識無境の理證」. 『印度學佛敎學硏究』 21卷 1號 (通卷41), 369-370. Akira Hirakawa (1990) A History of Indian Buddhism: From Śākyamuni to Early Mahāyāna. Translated and Edited by Paul Groner. Electronic reproduction. Boulder, Colo. : NetLibrary, (2000). Akira Suganuma (1962) "The Examination of the External Object in the Tattvasamgraha." 『印度學佛敎學硏究』. Vol.10. No.2, 732 - 726. Akira Suganuma (1964) "Śāntarakṣita's Criticism on the Paramāṇuvāda in the Tattvasamgraha." 『印度學佛敎學硏究』. Vol.12. No.2, 834 - 828. Anacker, Stefan (1984): Seven Works of Vasubandhu: The Buddhist Psychological Doctor. Delhi: Motilal Banarsidass. Baruah, Bibhuti (2000) Buddhist Sects and Sectarianism. New Delhi: Sarup & Sons. Bronkhorst, J. (2006) "Aśvaghoṣa and Vaiśeṣika." 『佛敎學セミナ―』. Vol.84, 596 - 590. Cho, Eun-su (1997) Language and Meaning: Buddhist Interpretations of "the Buddha's Word" in Indian and Chinese Perspectives. Michigan: A Bell & Howell Company. Coseru, C. (2009) "Buddhist 'Foundationalism' and the Phenomenology of Perception." Philosophy East & West. Vol.59.4, 407 - 439. Coseru, C. (2012) Perceiving Reality: Consciousness, Intentionality and Cognition in Buddhist Philosophy.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Dhammajoti (2015) Sarvāstivāda Abhidharma 5th Edition. Hong Kong: The Buddha-Dharma Centre of Hong Kong. Dreyfus, Georges B. J. (1997) Recognizing Reality: Dharmakīrti's Philosophy and Its Tibetan Interpretations.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Delhi: Sri Satguru Pub. Duckworth, et al. (2016) Dignāga's Investigation of the Percept: A Philosophical Legacy in India and Tibet. NY: Oxford University Press. Dunne, John D. (2004) Foundations of Dharmakīrti's Philosophy. Boston: Wisdom Publications. - 244 - Dutt, Nalinaksha (1978) Buddhist Sects in India. Delhi,: Motilal Banarsidass. Eckel, Malcolm David (2008) Bhāviveka and His Buddhist Opponents: Chapters 4 and 5 of Bhāviveka’s Madhyamakahṛdayakārikaḥ with Tarkajvāla Commentary. Translated and edited with Introduction and Notes by Malcolm David Eckel. Cambridge, Mass. : Harvard University Press, 2008. Feldman, Joel (2005) "Vasubandhu's Illusion Argument and the Parasitism of Illusion upon Veridical Experience." Philosophy East and West, Vol. 55, No. 4 (Oct., 2005), 529 - 541. Fincham, Richard Mark (2011) "Transcendental Idealism and the Problem of the External World." Journal of the History of Philosophy, 2011 Apr, Vol.49(2), 221 - 241. Frauwallner, Erich, (1951) on the Date of the Buddhist Master of the Law Vasubandhu, Rome: Istituto Italiano per il Medio ed Estremo Oriente. Gangopadhyaya, Mrinalkanti (1980) Indian Atomism: History and Sources. Calcutta: K P Bagchi & Co. Gautama. The Nyāya-Sūtras of Gautama: with the Bhāṣya of Vātsyāyana and the Vārtika of Uḍḍyotakara. ed. by Jha, Ganganatha, Sir, translated into English, with notes from Vachaspati Mishra's `Nyāya-vārtika-Tātparyatīkā, Udayana's `Parishuddhi', and Raghūttama's Bhāṣyachandra 3. Delhi: Motilal Banarsidass, 1984. Gough, Archibald Edward tr. (2014) The Vaiśeshika Aphorisms of Kaṇāda: with Comments from the Upaskara of Śankara Miśra and the Vivritti of Jaya-Nārāyana Tarkapanchānana. New Delhi: Dev Publishers & Distributors. Buescher, Hartmut (2007) Sthiramati's Triṃśikāvijñaptibhāṣya, Critical Editions of the Sanskrit Text and its Tibetan Translation, Wien 2007. Hattori Masaaki, (1968) Dignāga, on Perception, being the Pratyakṣapariccheda of Dignāga's Pramāṇasamuccaya from the Sanskrit fragments and the Tibetan Versions.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 245 - Hidenori Sanada (1983) on the Concepts of bīja and indriya in the Ch'eng-wei-shih-lun." JIBS. Vol. 32. No. 1, 180 - 181. Jaini, Padmanabh S. (1958) “On the Theory of Two Vasubandhus.” Bulletin of the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University of London. Vol. 21, No. 1/3 (1958), 48 - 53 Jayatilleke, Kulatissa Nanda (2004) Early Buddhist Theory of Knowledge. London: G. Allen & Unwin, [c1963]. Jha, Subhadra (1983) The Abhidharmakośa of Vasubandhu, Chapters I & II. Patna: Jayaswal Research Institute. Kajiyama Yuichi(梶山 雄一) (1971) "The Atomic Theory of Vasubandhu, the Author of the Abhidharmakośa." 『印度学仏教学研究』. Vol. 19, No.2, 1006 - 1001. Karunadasa, Y. (1967) Buddhist Analysis of Matter. Singapore: The Buddhist Research Society, (rep. 1989). Kano, Kazuo. (2008) "Two Short Glosses on Yogācāra texts by Vaiorcanarakṣita: Viṁśikāṭīkāvivṛti and *Dharmadharmotāvibhāgavivṛti." In Francesco Sferra, ed., Sanskrit Texts from Giuseppe Tucci's Collection. Part I. Manuscritpa Buddhica 1. Serie Orientale Roma 104. Rome: Istituto Italiano per l'Africa e l'Oriente, 348 - 380. Kher, Chitrarekha V. (1992). Buddhism as Presented by the Brahmanical Systems, Delhi, India: Sri Satguru Publications. Kizow Inazu (1966) "The Concept of Vijñapti and Vijñāna in the Text of Vasubandhu's Viṁśatikā-vijñaptimātrata-siddhi." JIBS. Vol. 15. No. 1. Kochumuttom, Thomas A. (1982) A Buddhist Doctrine of Experience: A New Translation and Interpretation of the Works of Vasubandhu the Yogācārin. Delhi: Motilal Banarsidass. Kojiro Kato (2004) on the Terms Vijñaptimātra and vijñaptitathāta as Found in the Samdhinirmocanasūtra (Chpt. VI)." 『印度學佛教學研究』. Vol. 52. No. 2. Kritzer, Robert (2000) "Preliminary Report on a Comparison of the Abhidharmakośabhāṣya and the Yogācārabhūmi." 『印度学仏教学研究』 - 246 - Vol. 49 No. 1. Kundakundacharya, Svami Sri (1920) The Building of the Cosmos: or, Pañcāstikāyasāra (The Five Cosmic Constituents). (Edited with philosophical and historical introduction, translation, notes and an original commentary in English by A. Chakravartinayanar). Kumar Devendra Prasada, The Central Jaina Publishing House. Laërtius, Diogenes (1925) "The Seven Sages: Thales". Lives of the Eminent Philosophers 1:1. Translated by Hicks, Robert Drew (Two volume ed.). Loeb Classical Library. Lamotte, Etienne (1987) Karmasiddhiprakarana: the Treatise on Action by Vasubandhu. trans. by L.M. Pruden. Berkeley: Asian Humanities Press. Lamotte, Etienne (2001) The Treatise on The Great Virtue Of Wisdom Of Nāgārjuna (Mahāprajnāpāramitāśāstra) Vol. 1 - 4. Translated by Gelongma Karma Migme Chodron. Lancaster, Lewis ed. (1979) The Korean Buddhist Canon: A Descriptive Catalogue.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Levi, Sylvain (1925) Vijñaptimātratāsiddhi: Deux Traites de Vasubandhu: Viṁśatikā et Triṁśikā. Levi, Sylvain. Ed. Paris: Libairie Ancienne Honore Champion. Lin, Chen-kuo and Michael Radich (eds.) (2014) A Distant Mirror: Articulating Indic Ideas in Sixth and Seventh Century Chinese Buddhism. Hamburg University Press. Marek Mejor (1989) "The Problem of Two Vasubandhus Reconsidered." Indologica Taurinesia. Vol. 15 - 16. (1989 - 1990), 275 - 283. Matilal, B.K. (1977) Nyāya-Vaiśeṣika. Otto Harrassowitz, Weisbaden. Matilal, Bimal Krishna (1986) Perception: An Essay on Classical Indian Theories of Knowledge. Oxford: Clarendon Pres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Mishra, Umesha (1936) Conception of Matter: According to Nyāya-Vaiśeṣika. Delhhi: Gian Publishing House. (repr. 1987). Nasu Ensho (2013) "A Study of the Theory of "Consciousness-Only with No External Objects" Discussed in Dharmapāla's - 247 - Vijñaptimātratāsiddhiratnasaṃbhava." JIBS 61(3), 1217 - 1223. Nobuyoshi Yamabe (1990) "Bīja Theory in Viniścayasaṃgrahaṇī." 『印度學佛教 學研究』 Vol. 38. No. 2. Nyāyakandalī, J. S. Jetly, ed. (1991) Being a Commentary on Praśastapādabhāṣya with Three Sub‐Commentaries. Vadodara: Oriental Institute. O'Grady, Patricia F. (2002). Thales of Miletus: The Beginnings of Western Science and Philosophy. Western Philosophy Series 58. Ashgate. Park (2007) The Sautrāntika Theory of Seeds(bīja) Revisited: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Ideological Continuity between Vasubandhu’s Theory of Seeds and its Śrīlāta/Dārṣṭāntika Precedents. Dissertation, Berkeley University. Paul, Diana Y. (1984) Philosophy of Mind in Sixth-Century China: Paramārtha's "Evolution of Consciousness". Stanford, Calif. : Stanford University Press. Potter, Karl H. (1998) Encyclopedia of Indian Philosophies : Abhidharma Buddhism to 150 A.D. Vol. 7. Delhi(India): Motilal Banarsidass. Sastri, Aiyaswami (1942) Ālambanaparīkṣā and Vṛtti by Dignāga: With the Commentary of Dharmapāla. Adyar-Madras: The Adyar Library. Schmithausen, Lambert (1967) "Sautrāntika-Voraussetzungen in Viṁśatikā und Triṁśikā". In: Wiener Zeitschrift für die Kunde Süd- und Ostasiens, 11, 109 - 136. (「「二十論」と「三十論」にみられる經量部的 前 提」, (加治洋一 譯), 『佛敎學セミナ―』 37號 (1983), 96 - 73.) Schmithausen, Lambert (1976) on the Problem of the Relation of Spiritual Practice and Philosophical Theory in Buddhism." in German Scholars on India, ed. by the Cultural Department, Embassy of the Federal Republic of Germany, vol. II, Bombay (1976), 235 - 250. Schmithausen, Lambert (1982) "Versenkungspraxis und Erlosende Erfahrung in der Śrāvakabhūmi", Epiphanie des Heils. Zur Heilsgegenwart in Indischer und Christlicher Religion. Wien, 59 - 85. (「성문지」에서의 선정수행과 해탈경험」. 안성두 역. 『불교학리뷰』 Vol.1. 2006.2, 125 - 159.) Schmithausen, Lambert (2005) on the Problem of the External World in - 248 - the Ch'eng Wei Shih Lun(成唯識論)." Studia Philologica Buddhica: Occasional Paper Series XIII. Tokyo: International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Schmithausen, Lambert (2014) The Genesis of Yogācāra-Vijnanavada: Responses and Reflections. Tokyo: International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of the International College for Postgraduate Buddhist Studies, Kasuga lectures series; 1. Sharma, T.R. (1993) Vijñaptimātratāsiddhi (Viṃśatikā), with Introduction, Translation and Commentary. Delhi: Eastern Book Linkers. Silk, Jonathan A. (2016) Materials Toward the Study of Vasubandhu's Viṁśikā (I): Sanskrit and Tibetan Critical Editions of the Verses and Autocommentary, An English Translation and Annotations. Harvard Oriental Series; v. 81. MA: Harvard University Press. Steinkellner, Ernst (2005) Dignāga's Pramāṇasamuccaya, Chapter 1. www.oeaw.ac.kt/ias/Mat/dignaga_PS_1.pdf. Suzuki Daisetz (1932) The Laṅkāvatāra Sūtra A Mahayana Text, Translated for the First Time from the Original Sanskrit by Daisetz Teitaro Suzuki, Based Upon the Sanskrit Edition of Bunyiu Nanjio (1923). Taiken Kyuma (2005) on Dharmakirti's Proof of the Existence of External Objects." 『印度学仏教学研究』. Vol.53, No.2, 974 - 968. Tāranātha (1608) History of Buddhism in India, trans. by Chattopadhyaya, Chimpa, Alaka, (2000) Motilal Books UK. Tournier, Vincent (2014) "Mahākāśyapa, His Lineage, and the Wish for Buddhahood: Reading Anew the Bodhgayā Inscriptions of Mahānāman." Indo-Iranian Journal 57, 1–60. Umāsvāti (2011) Tattvārtha Sūtra. That Which Is. Translated by Nathmal Tatia. San Francisco, London: Harper Collins Publishers. Vinītadeva (dul ba'i lha). rab tu byed pa niy shu pa'i grel bshad. P5566, vol. 113. Prakaraṇaviṃśakāṭīkā : (Explanation of (Vasubandhu's) Auto Commentary on the "Twenty Stanza Treatise." English translation (commentary on stanzas 1 - 20): Gregory A. Hillis. An Introductioin and Translation of Vinitadeva's Explanation of the First Ten Stanzas of [Vasubandhu's] Commentary on His "Twenty - 249 - Stanzas," with Appended Glossary of Technical Terms. Ann Arbor, Michigan: University Microfilms, 1993. Watanabe, Fumimaro (1983) Philosophy and Its Development in the Nikāyas and Abhidhamma. Delhi: Motilal Banarsidass. Williams, D. C. (1953) “On the Elements of Being I,” in Mellor and Oliver 1997, 112 – 124. (First published 1953, The Review of Metaphysics, 7(1): 3–18.) Yasunori Ejima, ed. (1989) Abhidharmakośabhāṣya of Vasubandhu, Chapter I: Dhātunirdeśa. Tokyo: The Sankobo Press. Zeman, Adam. (2008) "Consciousness: Concepts, Neurobiology, Terminology of Impairments, Theoretical Models and Philosophical Background." Handbook of Clinical Neurology, Vol. 90 (3d Series), 3 - 31. - 250 - ABSTRACT The Philosophical Transitions of Vasubandhu Revealed in His Interpretations on the Theories of Paramāṇu Yi, Kyoowan Ph.D. Dissertation Asian Philosophy Division Department of Philosophy Seoul National University The purpose of this dissertation is to trace the philosophical transitions of Vasubandhu through the investigation on the co-relation between the paramāṇu theories and the philosophies of the Buddhist Schools. Vasubandhu, first of all, declares in his Viṁśikā that "the manifestation only" (vijñaptimātra) is existent and the manifestation (vijñapti) is a synonym for the mind (citta), the active mind (manas), and the consciousness (vijñāna). Secondly, he changes his idea on the twelve entrances of sense-data (12 āyatana) from supporting their reality in the Abhidharmakośa to the denial of them, suggesting that the āyatanas are merely nominal existence. But there was a hidden intention why the reality of the twelve entrances were taught, that is, to teach the truth of No Personal Self (pudgalanairātmya). Thirdly, Vasubandhu admits the reality of paramāṇu in the Abhidharmakośa but, in the Viṁśikā, he argues for the no reality of all beings (dharmanairātyma) by refuting the reality of paramāṇu, the basic building block of all material beings. This dissertation aims to investigate such philosophical transitions of Vasubandhu in terms of his interpretative shifts in the theories of paramāṇu, especially revealed in the Abhidharmakośa and the Viṁśikā. The theory of paramāṇu is adopted here as for a concrete example to illustrate the transitions in the philosophy of Vasubandhu, which is the method that Vasubandhu himself used for philosophical debates with other schools on various topics in the twelve places of the Abhidharmakośa. In - 251 - order to accomplish the goal of this writing, it is necessary to clarify the concepts of paramāṇu and the theoretical characteristics of the Buddhist schools including the Sarvāstivāda, the Sautrāntika, and the Yogācāra. This dissertation especially differs in the three standpoints from the pervious studies on the paramāṇu theories. Firstly, this research discusses about the debates on the concept of paramāṇu and the various types of its conglomerates in the Nyāyasūtra & Bhāṣyam. The Sanskrit terms for héhé (和合) and héjí (和集), the two distinct models of atomic combination of the Sautrāntika and the Sarvāstivāda respectively, turn out to be saṃcita (saṃcaya) and samudita (samudāya) compared to the term saṃyoga, the Nyāya-Vaiśeṣika's notion of atomic combination. Xuánzàng (玄奘) translated the term saṃcita, mostly adopted the conglomerate jījí (積集) though, into many different Chinese words, causing confusions on the correct meaning of the term from his followers as well as modern scholars. However, it is proved that the term saṃcita refers in fact to the combination type of the Sautrāntika's Śrīlāta from a comparative study on the text AKBh I.44ab and its parallel paragraph in the Nyāyānusāra (順正理論), where Xuánzàng uses héhé for saṃcita in the context of the harsh debates on the concept of héhé and héjí. From this investigation, the author concludes that the technical term for the translation of saṃcita was héhé in the Nyāyānusāra and the debates on the types of atomic combination, including saṃcita, samudita, and samyoga, dates back to the time when the Nyāyasūtra & Bhāṣyam was compiled by Vātsyāyana. Secondly, this dissertation pays a due attention to the process that the notion of paramāṇu was gradually integrated into the Buddhist traditional ontological system of the three categories (3科) of skandha(蘊), āyatana(處), and dhātu(界), and the Abhidharmic explanation of dharma, or the 75 dharmas in the Five Categories (5位 75法). The Abhidharmic philosophers suggested that, following the theories of mahābhūta in India, the sense data such as Color, Odor, Taste, Touch are formed when the four mahābhūta, Earth, Water, Fire, Air, come together at the same time. Here the mahābhūta, the basic elements, was aptly compared to the concept of paramāṇu, the minutest basic building block of all beings. The question that diverged the Buddhist schools was which level of existence they would - 252 - admit as real. The Sarvāstivāda argued for the reality of the mahābhūta and upādāyarūpa because the latter is constructed by the mahābhūta which is real. But the Darṣṭāntika-Sautrāntika refused to accept the reality of anything that is made of something else so that the individual mahābhūta and therefore paramāṇu was considered real but not the upādāyarūpa. Therefore, the Darṣṭāntika-Sautrāntika thought that the phenomenal world which is constructed by the twelve entrances of sense data, was not real but a mere conventionally existing world (prajñaptisat). Vasubandhu walks through the middle path between the two schools, admitting the reality of the āyatana but not the skandhas in the Abhidharmakośa, where he distinguishes the ontological reality of the dhātu from the epistemological reality of the āyatana. Thirdly, this research extends its examination on the textual evidences for the denial of the existence of paramāṇu to the Mahāprajñāpāramitāśāstra, a Mādhyamika commentary earlier than the Yogācārabhūmiśāstra. This text criticizes the Sarvāstivāda's concept of paramāṇu, the smallest unit of matter infinitely divided by reasoning, contending that the outcome of that infinite division will end up with no-thing (śūnya). Or if the paramāṇu does not occupy any space, then it would be the same as a psychological or a conceptual existence. In any case, such a paramāṇu lies, if exists, beyond human perception, and therefore it is considered as a conventional existence (prajñaptisat) or a conceptual existence inferred from the logical reasoning. Vasubandhu adopted this logic of denial in the Vimśikākārikā where he steps forward the final one step to complete his philosophical transition. Based on the previous researches, the discussion moves onto the scholastic debates on the object and cognition and the philosophical transition of Vasubandhu, especially through analyzing the function of the concept of paramāṇu in the interpretation on the reality of the external object (viṣaya) and the cognitive object (ālambana). Vasubanhu was the most typical and representative scholar who dexterously used the paramāṇu theories in order to provide with more concrete and analytic explanation on rather abstract and complicated issues in the Abhidharmic philosophy. He takes up the notion of paramāṇu to illustrate the point he - 253 - is arguing for in twelve different places in the Abhidharmakośa. Though all of those twelve examples were surveyed here, this dissertation more focuses on tracing the evidences for the philosophical shift of Vasubandhu. In terms of the external object and the cognitive object, the Sarvāstivāda supposes that the two objects are the same in reality, while the Sautrāntika's Śrīlāta insists that only the external objects, or the paramāṇu, are real but the cognitive objects are not. Rather Śrīlāta suggests that the cognitive objects are in fact the appearances of forms (ākāra), that are conventional existents different from the reality of individual paramāṇus. So, the phenomenal world in which we perceive and experience is fictitious and not real but the real world is beyond our perception because the individual paramāṇu, the basic building block of the phenomenal world, can never be perceived. For this reason, Sanghabhadra poignantly criticized Śrīlāta for standing only an inch from falling into the Mahāyāna teachings, which destroy the Buddha vacana. However, Vasubandhu inherited this nominalistic interpretation of the Darṣṭāntika-Sautrāntika and takes the last inch to cross over the border to the Mahāyāna Yogācāra philosophy. In the Vimśikā, Vasubandhu finally reaches the conclusion that everything in the three realms (traidhātuka) is 'mere manifestation (vijñaptimātra).' The term vijñapti refers to the perceptible matter of the 10 āyatanas compared to the non-perceptible matter (avijñaptirūpa) in the Abhidharmic philosophical system. The Sautrāntika Śrīlāta refutes the idea that there exists any non-perceptible matter, arguing that the avijñaptirūpa is merely a conceptual existence. He also regarded the vijñaptirūpa of the 10 āyatanas as the conventional existence because they are composed of smaller paramāṇus, which only are the existents in reality. Vasubandhu inherited the idea of Śrīlāta that the vijñaptirūpa is the conventional existence but denies any possibility that the existence of paramāṇu, the infinitely divided basic unit of matter according to the Sarvāstivāda, can be logically proved. Therefore, the conclusion from the perceptual observation and the logical reason is the non-reality of all dharmas (dharmanairātmya) whether the dharmas are analyzed in the realm of conventional or of ultimate existence. - 254 - After establishing the doctrine of the non-reality of all dharmas, Vasubandhu introduces the concepts of seeds (bīja) and phenomena (pratibhāṣa) to explain the meaning of the sense organs and the sense objects of the twelve āyatanas. He tries to integrate the Sautrāntika's notion of seeds with the Yogācāra's concept of phenomena in the frame of the six consciousness, showing that the theory of the eight consciousness was not developed yet at the time the Viṁśikā was written. He continues his arguments for the non-reality of all dharmas in the following verses 11 - 15, aiming to explain how possibly the nature of the cognitive objects that are perceived if there exists no paramāṇu in reality. Interestingly enough, Vasubandhu disproves the real existence of paramāṇu by the definition of the Sarvātivāda but admits the way the Śrīlāta demonstrates the cognitive world based on the notion of the appearance of form (ākāra) as the compound (saṃcita) of individual paramāṇus. From the observation above, this dissertation assures that Vasubandhu the Kośakāra made the most of the paramāṇu theories in order to practice his philosophical reasoning and the logical analysis, and also traces the steps that Vasubanhu took for his philosophical transitions. Vasubandhu the Kośakāra equipped with the complicated system of the Sarvāstivāda's philosophy was intentionally and heavily influenced by the critical concepts and interpretations of the Sautrāntika Śrīlata in order to create his own integrated philosophical system. For that purpose, Vasubandhu advances one step further from his predecessors, denying the existence of paramāṇu in reality, and eventually ends up with shifting from the Sarvāstivāda's realist view on the object and the Sautrāntika's dualistic exposition of matter (body) and consciousness (mind) to the Mahāyāna's non-reality of all dharmas. His life itself seems like a good metaphor for the Sautrāntika notion of the term saṃtati-pariṇāma-viśeṣa, or the final qualification of the transformation of the life-stream. Key Words: Vasubandhu. paramāṇu. saṃcita. samudita. vijñaptimātra. ālambana. 12 āyatana.
'불교와 인문과학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좌부불교의 염불행 연구 (0) | 2020.05.03 |
---|---|
불교의 무아사상에 대한 신경정신의학적 고찰 - 최 훈 동 (0) | 2020.04.26 |
징관의 해인삼매관 대하여 (0) | 2020.04.05 |
이입사행의 구조와 그 전승 (0) | 2020.04.05 |
반야사상에 있어서 꿈의 비유와 교설 (0) | 2020.04.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