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과학 1

불교의 무아사상에 대한 신경정신의학적 고찰 - 최 훈 동

수선님 2020. 4. 26. 13:13

불교의 무아사상에 대한 신경정신의학적 고찰1)

최 훈 동2)

 

1. 들어가는 말

 

무아 사상은 불교의 핵심 사상으로 후기 대승불교의 공사상으로 발전하며 중국의 간화선의 기반이 되는 중요한 사상이다. 힌두교를 포함한 여러 종교들이 이기적 자아(에고)를 없애야만 진정한 자아로서 아트만이나 절대자를 만날 수 있다는 신앙관을 갖지만 불교의 무아는 그러한 절대적 자아마저 부정한다는 점에서 불교에 고유한 혁신적 사상이라 하겠다. ‘나’라는 개념은 우리가 갖고 있는 신념 중에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가장 확고한 신념 체계이다. 그런 점에서 무아사상은 파격적이다. 불교의 무아사상은 후대에 실체론적 도전을 받아 신격화되기도 하였다. 실체론적 자아의식은 워낙 견고하여 붓다 당시에도 혼란과 저항을 불러일으킨 바 있고,3) 오늘날 불교의 정체성에도 혼란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어 여전히 혁신적 주제임에 틀림없다.

불교와 정신치료가 여러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고통의 해결 방법에서는 접근 방식이 전혀 다른 부분도 있다. 믿음에 의하지 않고 성찰을 통하여 고통을 내면적으로 해결하는 점은 불교와 정신치료가 같으나, 정신치료에서는 자아의 역할이 필수적인데 반해, 불교는 고통의 원인으로서 번뇌의 근저에 자아의 실체를 고집하는 잘못된 견해가 있다고 본다. 따라서 고통의 해결 과정에서 무아의 의미를 정신의학적으로 조망하는 것은 붓다의 근본정신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도 기여하고 정신치료의 심화 발전에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본 논문에서는 후기 대승 불교의 공사상으로 발전하는 초기경전(니까야)의 무아사상의 내용과 현대정신의학(신경과학과 정신치료)에서 보는 자아 개념의 생성과 발전 및 자아의 역할을 간단히 살펴본 후, 무아 사상의 정신치료적 가치를 고찰하고자 한다.


2. 무아사상


1)무아의 성립 배경

서양과 마찬가지로 인도 사상가들의 주된 관심사는 현상의 배후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실체의 탐구였다.『바가바드기타』에 의하면 우주의 궁극 실재로서 브라흐만과 함께 이 우주의 궁극적 실재를 주체화한 것으로서 아트만이 등장한다. 인도 사람이면 누구나 철석같이 믿고 있던 아트만의 존재를 부정하고 붓다가 무아를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모든 종교가 믿음에 바탕을 두나 불교는 알고 보는 깨달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4) 붓다의 가르침은 언제나 ‘와서 보라’(ehipassika)이지 ‘와서 믿으라.’가 아니다. 붓다는 모든 고통은‘나’라는 존재가 실체적 존재로서 있다는 착각(無明)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한다. ‘나’라는 신념은 모든 욕망의 뿌리이며 고통의 씨앗이므로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착각을 타파하면 이기심과 욕망, 불안과 공포, 슬픔과 비탄 등의 고통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의 선언은 바라문교의 정통성이 유일한 진리로서 신봉되던 시대에 혁명적인 것이었다.

 

2)불교의 자아관

니까야에 의하면 붓다는 우리가 생각하는 자아는 오온이라고 규정한다. 오온-물질(色)․느낌(受)․지각(想)․형성(行)․의식(識)―은 몸과 마음의 모든 과정으로서 자아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존재다발이다. 붓다는 ‘오온이 곧 괴로움이다’ 하였고, 이 오온에 근거하여 ‘이것이 나이고 이것이 세상이며, 내가 죽은 후에도 항상하고, 영원하고, 변함없이 존재할 것이다’는 견해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하였다.5) 또한 오온을 보다 깊이 분석하여 여섯 가지 감각기관(내육입처)과 여섯 가지 감각대상(외육입처)으로 세분하고, 이 내외의 육입처가 접촉함에 따라 발생하는 느낌(감수)과 그 느낌을 사랑하고 미워하는 갈애가 자아의 근원이고 탐욕과 분노와 무명의 씨앗이 된다고 설명한다.6) 또한 이러한 분석으로부터 12연기가 완성된다. 자아는 고이므로 고의 소멸(해결)로서 무아는 필연적인 논리라 하겠다.


3)무상으로서 무아

물질도 무상하고 느낌과 지각과 형성과 의식도 무상하며, 무상한 것은 괴롭다. 그런데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으로서 오온에 집착하여 ‘이것이 나이고 이것이 세상이고 죽은 후에도 영원하고, 불변하게 존재할 것이다’는 견해를 일으키는 것은 잘못이라고 붓다는 주장한다. 무아의 전제 조건은 자아를 구성하는 정신적 신체적 요소를 포함하여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것이다. 특히 의식이 영속하여 윤회하는 것이라는 견해에 대해 자아를 불빛에 비유하여 자아의 영속성이 허구임을 비판한다.7) 또 물질로서 여섯 가지 내적 감역도 무상한데 여섯 가지 내적 감역을 조건으로 체험하는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나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영원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때그때의 조건에 따라서 그때그때의 느낌이 생겨나고, 그때그때의 조건이 소멸함에 따라서 그때그때의 느낌이 소멸하기 때문에 영원할 수 없다고 한다.


4) 중도로서 무아

고유한 자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함은 자아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자아(아트만)가 있는가라는 질문과 자아가 없는가라는 질문 모두에 붓다는 응답하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자아는 있다’라고 대답한다면 유론(有論) - 실체가 있다는 영원주의적 견해-에 동조하는 것이고 ‘자아는 없다’라고 대답한다면 무론(無論) - 실체가 없다는 허무주의적 견해 -에 동조하는 것이다.”고 설명한다.8) 이는 무아가 단순히 내가 없다는 관점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있다 없다가 아닌 유무중도의 관점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개념적으로 신체와 정신을 가리킨다. 자아와 타자라는 호칭이나 구분은 절대적이기보다는 일종의 약속이다. 붓다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이것들은 세상에서 공통적(관습적)으로 사용되는 호칭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진리를 터득한 사람은 이것들을 사용하되 흐트러지지 않는다.”


5) 연기와 공으로서 무아

붓다의 깨달음은 조건에 의해 발생하는 연기(緣起;patticcasamuppadā)의 이치를 근간으로 한다. 연기법을 본다는 것은 이 세계의 모든 현상과 존재, 사물들을 조건적 관계로 보는 것이다.9) 연기 자체가 공성(空性)으로 특징지어지는 것은, 오온이 각각 허망함을 잘 표현한 다음과 같은 초기경전의 진술에서도 잘 드러난다. “수행승들이여, 물질(色)은 무아(無我)이다. 물질을 발생하는 원인도 조건도 무아이다. 수행승들이여, 무아에 의해서 발생된 물질이 어떻게 자아일 수 있겠는가?”10) “물질(色)은 포말과 같고, 감수(受)는 물거품과 같고, 지각(想)은 아지랑이와 같고, 형성(行)은 파초와 같고, 의식(識)은 환영과 같다.”11) 포말(pheṇapiṇḍu), 물거품( bubbuḷa), 아지랑이(marīcika) 등은 무실체(asāra)로 정의되는데, 연기적 존재로서 오온의 공성(空性: suńńatā)을 표현하는 말이다.12) 대승불전의 핵심경전들 가운데『금강경』의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이나 『반야심경』의 ‘五蘊皆空’이 모두 초기불교의 무아를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붓다의 삼법인(三法印) 가운데 ‘모든 법은 무아이다(諸法無我 sabbe dhammā anattā)’에서, 법은 조건지어진 것뿐만 아니라 조건지어지지 않은 열반까지 포함한다. 세상에 아무것도 절대적인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조건적이고 상대적이고 상호의존적이라는 것이 연기요 무아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무아이다.’라는 진술은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뿐만 아니라 그 밖의 어디에서도 자아 또는 아트만은 없다는 것이고 그것은 열반도 포함됨을 알 수 있다.13)

 

6)해탈로서의 무아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자아라는 관념은 있는 그대로의 실재와 일치하지 않는 환상이고 거짓된 신념이다. 그것은 ‘나의 것’ ‘이기적인 욕심’, ‘갈애’, ‘집착’, ‘증오’, ‘교만’ 등 세상의 모든 고통을 낳는 해로운 생각이다. 불교의 입장은 모든 현상이 그 자체 속에 내재하는 실재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명확히 깨닫고 나면, ‘나’라는 존재에 대한 견해(유신견; sakayaditti)로 인해 파생되었던 강한 번뇌들도 일어나지 않게 된다. 무아를 통찰하는 것이 바른 수행이고, 이런 깨달음으로 얻는 자유가 진정한 해탈이다. 붓다의 전도 선언14)을 보면 ‘무아’의 목적은 모든 존재들이 고통이 없는 자유와 행복을 누리게 하고자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자신과 상대방의 행복과 자유다. 불교가 추구하는 목표는 내적 평화와 자유의 실현, 즉 열반과 해탈이다. 그것은 바른 선정과 바른 지혜(반야)에 의해 가능하다.15) 『반야심경』의 ‘관자재보살은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닦아 오온五蘊이 모두 비어 있음을 관조하여 봄으로써 일체의 고통과 재앙을 해결하였다.’라는 구절은 이러한 ‘무아’의 실현 방법과 목적이 압축되어 나타나 있다. 바르게 보고 바르게 사유하는 반야의 지혜로 물질과 정신의 모든 현상의 자성이 비어 있음을 깨달으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내용이다.

 

3. 신경정신의학에서 보는 자아

 

서양철학은 인식하는 주관과 대상으로서 객관이라는 주관-객관 구도와 함께 현상의 안에는 본체가 있다는 현상-본체의 철학 구도를 갖고 있는데 심리학도 그 범주에 속한다. 심리학자마다 자아를 설명하는 관점도 다양하지만 대체로 자아란 현실을 평가하고 판단하며 자신을 외적 내적 불안 요인으로부터 방어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자이다. 무의식을 다루는 심층심리학(정신분석학과 분석심리학)은 외부 현실과 내면의 무의식을 중재하는 ‘나’로서 자아(Ich, ego)라는 말을 사용한다. Freud는 모든 정신현상의 의미를 입증하기 위하여 ‘무의식’의 개념을 최초로 도입하였는데, 의식은 자아가 인식하고 있는 영역이고 무의식은 자아에 의해 인식되지 않고 있는 영역을 말한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과 증상 및 꿈은 드러나지 않은 무의식의 욕구와 감정 및 동기에 의해 일어난다. 정신분석을 통해 무의식의 갈등이 의식화되어 갈등의 의미를 깨달으면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Jung은 전체정신의 중심에 의식과 무의식의 주체로서 자기(Selbst, self)를 추가한다. 분석을 통하여 자기 자신 속의 미지의 속성과 가능성을 자아가 깨달아가는 무의식의 의식화 과정을 자기실현이라 하였고, 전체정신으로서 자기는 ‘모르는 것’, ‘알 수 없는 것’이면서, 신과 불성, 도 등 종교의 궁극적 실체가 자기의 상징적 표현이라 하였다.16)

신경과학에서 살펴보면 ‘나’라고 부르는 자아의식(ego-consciousness)은 개체가 모태와 분리된 후 점차로 형성되기 시작하는데, 뇌를 비롯한 신경계의 발달 및 성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1000억 개에 가까운 신경세포는 각각 1000-2000개의 연결 가지에 의해 다른 신경세포와 그물망처럼 연결되어 뇌를 형성하고, 각각의 신경세포들은 유전자의 지시에 따른다. 뇌의 성장은 환경의 영향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환경은 생물학적 환경과 심리․사회적 환경이 있는데, 유전 인자와 심리․사회적 환경이 상호 작용하여 개체의 심신기능이 형성된다. 자신을 자각하는 능력은 전전두피질(prefrontal cortex)과 우측 해마(hippocampus), 측두엽(temporal gyrus) 하부과 관련이 있고, 거울을 보고 자신의 얼굴을 식별하는 능력은 인간은 18-24개월부터 침팬지는 5-8세부터 가능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17) 인간이 나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은 자립이 이루어지는 5-6세 경이고, 자아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것은 청소년기이다. 물리학이 규명한 최소 자아가 소립자라면, 세포 안에 존재하는 유전자와 단백질이 생물학이 규명한 최소 자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립자나 유전자와 단백질을 자아라고 할 수 없다. 마찬 가지 이유로 뇌 전체를 자아라고 할 수도 없다. 그 이유는 뇌의 영역마다 역할이 다르기 때문이다.18) 이처럼‘나’라는 정체는 어느 하나의 절대자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 현대 물리학이나 정신의학이 도달한 견해이다.

신경정신의학은 인간을 생물적-심리적-사회적 존재로 본다. 자아에 대해 심리학적 측면에서는 출생 후 점점 역동적으로 형성되는 자아의식으로서 ‘있다’는 입장이나, 신경과학적 측면에서는 어느 특정한 실체로서 자아는 ‘없다’는 입장이다. 특히 사회적 존재라는 의미는 고립적인 개체보다 개체 상호관계를 중시하여 연기적 존재에 가깝다 하겠다.

 

4. 불교와 정신의학의 비교 고찰

 

앞에서 살펴본 대로 불교의 무아의 본래 뜻은 자아가 없다는 것도 아니고 자아 초월도 아니다. 자아의 현상은 있되 실체로서 자아가 없다는 입장이다. 즉 관습적이고 상호의존적인 나는 존재하나 고정된 실체로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아는 자아라는 견해가 소멸됨을 말하는 것이다. 무아는 바른 견해와 바른 사유의 결과이며 이것이 계-정-혜 삼학의 지혜이고 깨달음의 내용이다. 진정으로 깨달으면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고 집착과 분노와 같은 나쁜 감정들의 발생이 소멸된다. 자성의 비어 있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인간은 자신과 타자, 세계와의 상호 연관성을 경험하게 되고 단절감도 사라진다. 고유한 존재에 집착하는 것이 정신적 고뇌의 근원이라고 한다면, 비어 있음(무아)을 자각하기 위해 팔정도를 닦는 것은 불교가 제시하는 근본적 치유의 길이다.

정신치료는 자신이 깨닫지 못하고 있던 무의식적 갈등과 의미를 깨닫게 하는 분석적 치료이다. ‘나’는 무의식에 수많은 나를 거느리고 있으며 부분과 전체, 개인과 집단의 상호의존 관계로서 특징된다. 이러한 관계에서 좌절과 결핍, 애착과 충족의 다양한 함수관계로 발생되는 신경증적 갈등과 고뇌는 분석적 통찰에 의해 치료된다. 어떤 견해나 관점을 가지지 않고 정신적인 투사 없이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려고 노력하는 정신치료는 건강한 자신으로의 회복을 목표로 한다. 내적 욕구와 갈등, 사회적 요구에 의해 사는 수동적 삶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주체적 삶을 지향하는 것이다.

심리학적 관점은 정신을 신체와 분리시키고 정신의 주체로서 자아나 자기 개념을 도입하여 심리기전을 설명하고 있지만, 불멸의 실체로 파악하는 고정된 자아라기보다 역동적인 자아이다. 신경과학의 결론은 정신과 신체의 주인으로서 명령자가 별도로 있다는 생각은 근거가 없는 믿음일 뿐, 뇌 어디에도 (과거에는 심장에 있다고 생각) 명령자로서 영혼이나 자아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양한 조건(전기적 자극, 화학적 변화 등)에 따라 다양한 정신 상태가 일어날 뿐이다. 심신기능 만으로 머물지 않고 사회적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반응하는 역동적인 자아의 개념이다. 인간의 마음을 정태적으로 보지 않고 수많은 조건들에 의해 발생되고 상호 의존관계로 파악하는 불교의 연기론과 부합된다.

불교나 정신치료에 있어서 분석적 통찰은 단순한 지성적 이해에 머물지 않는다. 정신치료에서는 지적 이해(intellectual insight)가 아닌 정서적 깨달음(emotional insight)만이 치료적 변화를 가져온다. 불교도 관념적 이해(解俉)가 아닌 체험적 깨달음(證悟)에 의해 고통으로부터 벗어난다.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을 추구하는 불교수행과 정신치료는 양자 모두 분석적 통찰에 의한 깨달음 없이 진정한 변화(해탈 또는 치료)는 없다는 데 일치하고 있다. 불교는 대상(사물)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게 한다. 정신치료 또한 주관적․신경증적 왜곡을 중지하고 있는 그대로 사건과 인간을 대할 수 있게 한다. 불교와 정신치료는 양자 모두 자기 자신과 대상을 객관적이면서 중도적으로 봄으로써 치료적 변화를 나타내어 마침내 고통의 해결에 이르게 한다. 무아의 정신치료적 의미는 자신의 주관적 감정이나 왜곡된 신념체계로부터 벗어남을 뜻한다. 무아의 체득은 좋고 싫어하는 감정 상태로부터 벗어나 평정의 흔들림 없는 상태를 얻게 되고 보다 자비롭고 긍정적인 마음 상태가 되어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심리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5. 맺는 말

 

인간은 안전함과 불멸을 갈망하여 육체와 마음의 결합체로서 고정적이고 영원한 ‘나’라는 개념을 고안해냈다. 이러한 실체론적인 생각에 의문을 제기하고 연기론적인 사유를 해결책으로 제시한 최초의 사람이 붓다이다. 연기적 성찰의 현대적 전형은 정신의학, 특히 정신치료의 분석 과정에서 볼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부분을 통찰한다는 것은 지적인 작업과 체험적 작업이 동반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은 불교나 정신치료나 같다는 것도 살펴보았다. 불교의 무아에 이르는 연기관과 심리적 조건과 원인을 면밀히 분석하여 현재의 괴로운 마음을 깨닫게 하는 정신치료의 분석과정은 동질적이다. 자아의 근거마저 통찰해가는 불교는 깊이에 있어 정신치료를 뛰어 넘고 있는 것도 사실이나, 자신이 의식하고 있지 못하는 부분을 통찰하는 수준은 정신치료가 보다 탁월하다고 본다. 심리적 원인과 조건을 깊이 분석해 들어가는 정신치료는 사념처관의 심념처와 법념처 수행의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신치료는 고통의 근원적 해결로서 아집에 대한 연기적 성찰을 불교로부터 도입함으로써 정신치료의 깊이를 확장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불교의 깨달음의 전제 조건인 정신적․신체적․언어적 행위를 청정하게 하는 계행과 마음 집중과 깨어있음으로 특징되는 선정 수행의 도입도 정신치료가 연구해야 될 과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주제어

무아(non-self, self-extinction), 자아(ego), 자기(self), 신경정신의학(neuropsychiatry),

신경과학(neuroscience), 정신치료(psychotherapy), 통찰(insight), 분석(analysis)


Neuropsychiatric Considerations on the Buddhist Doctrine of 'Non-self'(anattā)

Choe, Hoon-dong M.D.(Clinical Professor of Seoul National University Medial College)


The Buddhistit doctrine of 'anattā' is based upon mutability and transiency of self. Buddhism and psychotherapy consent that one could be emancipated from sufferings not by belief, but by introspection. Just as the emotional insight may lead to the change of behavior and personality in psychotherapy, so the true insight to Enlightenment in Buddhism. The psychotherapeutic meaning of‘non-self’implies the recognition and extinction of the conscious adherence and the unconscious conflicts. Therefore psychotherapeutic analysis can be introduced into Buddhism and the meditative contemplation of 'Paticcasamuppāda' can be adopted by psychotherapy.



 

<국문초록>


불교의 무아사상에 대한 정신의학적 고찰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로 서술되는 불교의 ‘무아’는 실체적 자아를 부정하고 있으며, 자아의 변화성과 일시성에 기초하고 있다. 신경과학에서도 신경세포들의 연결과 뇌의 여러 영역의 총화로서 정신기능을 설명하고 있어 몸과 마음의 배후 조종자로서 자아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불교와 정신치료는 신앙이나 믿음이 아니라 내면의 성찰과 깨달음에 의해 고통을 해결한다는 점에서 의견을 같이한다. 정신치료에서 정서적 통찰이 환자의 성격과 행동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불교에서 진정한 깨달음만이 고통의 소멸인 해탈로 인도하는 것과 유사하다. ‘무아’의 정신치료적 의미는 의식적인 애착과 무의식적인 갈등을 자각하고 소멸시키는 것을 내포한다. 불교 수행의 계․정․혜 삼학 가운데 지혜는 바른 견해와 바른 사유로 구성되는 지적 작업이자 깨달음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정신치료의 깊이를 위해서 불교의 연기적 성찰을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고, 불교의 사념처관, 특히, 심념처와 법념처 관찰에 정신치료적 분석 과정을 도입하는 것은 불교의 실천 수행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출처: http://www.vmcwv.org/bbs/board.php?bo_table=menu3_3&wr_id=50&pag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