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15-17일 인도 다람살라 남걀사원 대법당
한국인 불자를 위한 달라이라마의 특별법회가 9월 15~17일 인도 다람살라 남걀사원에서 열렸다. 한국인을 비롯한 대만, 유럽 등 3500여명의 내외국인 불자들이 동참, 예불을 시작으로 <반야심경>을 봉독 후 하루 두 차례씩 3일간 진행됐다. 그간 한국인 불자들을 위해 <입보리행론> <보리도등론> 등을 설법해 온 달라이라마는 이 자리에 처음 참석한 대다수의 불자를 감안해 기초적인 불교 지식과 함께 대승의 진정한 보리심을 발현하는 용수보살의 저술서 <보리심석>을 설했다. 달라이라마와의 인연을 9년간 이어온 진옥 스님(여수 석천사 주지)은 법회를 열며, “이곳에는 수행하는 분들이 많다. 나 스스로가 재발심의 계기가 되고 있다. 수행에 매진하는 많은 분들과 존자님을 뵈면서 그분들을 통해 내 수행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다. 참석하신 신도님들이 바른 법에 들어서 모두가 번뇌를 버리고 실제 이익을 찾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반야경, 멸성제를 설하다.
부처님께서 영취산에서 설하신 반야부경의 정수 <반야심경>을 봉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바로 대승의 법통을 잇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야경은 제법이 공성(空性)이고무자성(無自性)임을 설합니다. 무자성이라는 것은 모든 존재의 법성이 영원성을 가진 스스로의 변치않는 핵심을 갖고 있지 못함을 말합니다. 이는 부처님의 모든 위신력 또한 무자성임을 말합니다. <반야심경>의 ‘아제아제바라아제바라승아제모지사바하’ 마지막 진언 또한 저편의 피안으로 가자는 의미로 제자리에 안주하지 않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 또한 공으로 향하게 하는 말로서 아무것도 없음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있음에서 시작해 더 높은 단계로 차츰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현재 지금 우리가 머무는 곳에서 피안으로 향함에 대해서는 부처님의 초전법륜에서 잘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사성제 법문입니다. 도성제와 멸성제는 피안으로 향하는 방법을 제안하고 있지요. 다양한 수행 과정을 통해 열반을 이룬 고통의 사라짐이 바로 멸제이며 이를 열반적정이라고 합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수행하는 방법이 바로 도성제입니다.
현재 형성된 범부의 상태를 바꾸어 나가는 과정을 통해 궁극의 열반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자성공’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고집멸도는 각자 모든 이들에게 있습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주체로 존재하며 수행과정을 통한 소멸과정 또한 존재합니다. 이를 설명한 것이 바로 ‘사성제’이며 그 핵심의 실상이 ‘무자성’입니다. 부처님께서 최고의 깨달음인 무상정등정각을 얻으시고 성불하신 후 얼마지 않아 처음 법을 설하신 내용이 사성제이며 이것이 바로 불교의 근본입니다. 바로 반야경은 사성제 가운데 멸성제를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지닌 부정적 요소 즉 번뇌들이 사라진 상태로서 멸이라는 것이 반드시 이뤄질 수 있는 것이라고 티베트 불교는 보고 있으며 이것이 불교의 보편적인 믿음입니다.
집착이 일어남의 뿌리는 무명(無明)으로 12연기의 첫 번째입니다. 무명은 무지(無知)로 실상을 알지 못하는 상태이며 사실을 거꾸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무지는 모든 바른 법을 잘못알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인식은 윤회의 근본원인이 됩니다.
제법의 실상을 바로 알 때 무지는 사라집니다. 실상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분석해서 실상의 진리를 알았을 때야만 비로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생깁니다.
무명은 실상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반야경에서 멸성제를 반드시 이룰 수 있음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나아가 <해심밀경>과 <대방광여래경>에서 ‘우리의 마음이 본래 청정하기 때문에 번뇌를 없앨 수 있는 멸제는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일체 법계와 마음이청정하여 밝은 빛과 같다는 이치입니다.
초전법륜의 해설서인 용수보살의 젓 <보리심석>은 법륜에 대한 해설서로서 본래 인간의 마음은 청정하며 밀교의 가르침과 같은 것으로 마음의 허물을 없앰을 관건으로 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미세한 의식 상태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 밀교의 수행 방식입니다.
법을 설하고 듣는데 있어 믿음의 뿌리와 심성의 기틀은 매우 중요합니다. 설법자와 법을 듣는 이 모두 굳은 신심을 가지고 부처님의 법을 유지하고 받들어 성취하겠다는 마음으로 법을 설하고 제자 역시 신심으로 듣고 닦아야 합니다. 그 중심에는 항상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앞서 이야기한 멸성제 즉 번뇌의 허물에서 벗어난 열반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불교 수행을 해야 합니다. 비폭력 선행으로도 인간 이상의 선취에 들 수 있지만 반드시 지혜가 있어야만 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다.
밝지 못한 업인 무명을 없애기 위한 방편이 바로 수행입니다. 수행하여 일어나는 지혜에는 사유해서 얻어지는 지혜가 있어야 하며 그 이전에 들어서 아는 지혜가 바탕이 돼야 합니다. 닦아서 일어나는 지혜를 수해라고 하는데 공성을 사유해 스스로 호가신을 이끌기 위함입니다. 많이 듣고 공부하는 문(聞)을 시작으로 사유와 수습의 과정은 반드시 인과의 관계로 성립됩니다. 지금 이 자리는 우리가 성불하기 위해 거쳐야하는 과정이며 이 자리에서 법을 듣기 위해 모인 동기를 반드시 세워야 합니다.
#바른 보리심을 聞하다.
티베트의 전통을 지닌 다양한 형태의 가르침 가운데 하나는 스승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제자에게 가르치며 제자가 스승에게 경험을 즉시 이야기 하고 다음날 바로 점검을 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몇 달 혹은 몇 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제자에게 특별한 원인과 조건이 없는 상태여서 경지에 오기기는 쉽지 않지만 스승의 지도에 의해 어느 정도 성과는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과 스승들의 말씀에는 경장과 논장이 있습니다. 경과 논을 의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티베트에도 이 맥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 전승의 맥은 매우 중요합니다. 저의 생각에는 실질적인 맥(구전, 법맥)이 없다 하더라도 경장과 논장으로 법을 충분히 이어 받을 수 있다고 봅니다. 부처님의경장과 논장은 불교 수행의 교재입니다. 물론 티베트에는 인도 논사들의 논서와 티베트 논서가 있습니다만 이 둘은 차이가 있습니다. 티베트 스승들에 의해 쓰인 논서는 티베트인 문화 상황에 맞춰 쓰인 논이기 때문에 인도 논서와 차별됩니다. 인도 논사들의 논서는 다양한 철학들이 넓게 포진한 반면 티베트 논사들의 논서는 대단히 깊은 논의여서 인도의 광범위함과 비교됩니다.
논쟁을 할 때 인도의 경우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티베트는 논사들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티베트 논서 <삼정론> 2장을 보면 처음에 사성제를 말합니다. 대승에서는 붓다의 사성제와 <해심밀경>의 공(空)의 이치를 이야기 하고 사성제를 이어서 규명해갑니다. 자신의 견해와 논사들의 견해가 부딪혀 논파되어 밝혀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것이 바로 용수보살의 저서 <보리심석>입니다. 제가 설명하는 입장에서 최선을 다해 용수보살의 논을 전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금강살타(持金剛)에 귀의하며 시작되는 <보리심석>을 보겠습니다.
#중관, 붓다의 궁극적 견해
5온 12처 18계가 분리됐다는 견해와 능취‧소취를 끊음은 법무아와 같으니
자신의 마음은 무시이래 생함이 없는 공의 자성이네
윤회에서 벗어나 일체 종지를 이룬 몸을 남성의 몸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월칭보살의 저서 <밀교현>에 의하면 밀교에서는 성불함에 있어 3아승지겁의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또한 여성도 성불할 수 있다고 이릅니다.
수행보살 청신사와 청신녀는 무상요가를 통해 성불할 수 있습니다. 거친 의식과 미세한 의식으로 구분하는 무상요가는 거친 의식을 통해 공성을 수습해 집착의 근원인 무명을 다룹니다. 시간적으로 3아승지겁 없이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보며 이치적으로 가능하다고 규명합니다. 남녀 성별을 떠난 정광명의 청정 상태가 존재하고 무명을 없애가면서 정광명 상태에서 무지개 같은 몸이 되어 남녀의 몸을 구분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깥의 거친 몸은 남녀를 구분하지만 청정한 마음의 섬세함은 성별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이로서 밀교에서 여성의 성불이 가능한 것입니다.
‘세존과 대보살들께서 대보리심의 마음을 일깨우신 것과 같이 나 또한 자유롭지 못한 중생을 자유롭게 하고, 해탈하지 못한 중생을 해탈케 하며, 숨 쉬지 못하는 이들을 숨 쉬게 하고, 완전한 열반에 이르지 못한 이들을 완전한 열반에 이르기 위해, 지금 이 시간 이후로 보리의 정수를 얻을 때까지 대보리심을 일으키리라’는 용수보살의 저술동기로 말미암아 일체자성과 공의 자성을 붓다께서 경장에서 밝힌바 차례로 이야기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외도의 가르침과 다름을 의미하는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궁극적인 붓다의 견해가 바로 중관임을 확실히 드러내고 있는 부분입니다. 다양한 근기에 맞춰 다양한 무아를 말씀해온 붓다가 궁극의 열반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속제의 보리심과 진제의 보리심을 구분한 것은 공을 깨달은 지혜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제법의 존재를 보았을 때 각각의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 눈에 비춰 지지만 선정에 있어서는 이 모든 제법이 공성의 무자성이며 한 맛(一味)입니다. 갖가지 견해를 적멸한 이것이 바로 승의 보리심입니다. 자성이 없는 모든 존재를 깨달았더라도 반드시 속제의 보리심을 구하고자 하는 보리심이 밑받침 된 상태에서 지혜를 이행할 때 진정한 승의 보리심이 됩니다. 이 두 가지가 불교 수행에 있어서의 핵심이며 밀교 수행의 뿌리가 됩니다.
산스크리트 계열이 가장 포괄적으로 번성한 곳이 인도의 날란다 대학입니다. 남걀 사원 대법당에 모셔진 분들은 모두 날란다 출신의 대 성직자입니다. 중국의 대승불교 역시 날란다의 법통을 중심으로 합니다. 날란다의 대학자 샨타라크쉿타가 티베트로 건너 오셔서 불교의 초석을 다지고 그의 제자 카말라쉴라가 그 뒤를 이어 넓리 불법을 홍포했으며 인도의 대성취자 아티샤가 불교의 중흥에 힘썼습니다.
샨타라크쉿타는 중관과 인명학의 대가였습니다. 그의 영향으로 티베트에서 중관과 인명학이 동시에 전해졌습니다. 불교의 이상이라고 생각되는 무분별지를 단순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체법은 무자성이다’라는 명확한 공성의 지를 수습함으로써 점차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현교와 밀교를 두루 갖춘 티베트불교
불교에서 대승과 소승에 있어 근간이 되는 요소가 5온 12처 18계입니다. 이것은 대소승의 공통점입니다. 그러나 속제와 진제의 2제에서 다룰 때 차이가 납니다. 또한 궁극의 목표나 결과물의 과정인 도에 대해서도 구별됩니다. 최종의 과에 있어서는 더 큰 차이가 나는데 그 예가 대승의 10지 개념입니다. 처음에 이러한 과를 가져다주는 원인이 어떤 식으로 쌓였는가에 따라 결과물도 다양한 것입니다. 이런 이류로 도와 과의 차이는 현저합니다.
빠알리 전통에서는 37보리분법과 3아승지겁을 통해 부처님께서 보드가야에서 성도하셨다고 이릅니다. 부처님의 성불이전 단계는 중생이었다고 붓다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대승의 견해는 다릅니다. <현관장엄론>에는 자성신, 화신, 보신, 법신을 다룹니다. 대승에 서는 부처님께서 도솔천의 보살로 계시다가 인간계에 내려와 보살의 과정을 거친 것을 부처의 행장으로 봅니다. 보신에서 나툰 색신으로서 일반 중생이 뵌 부처님의 모습인 것입니다.
소지장과 번뇌장을 모두 끊은 최승의 자리에서 보신이 나옵니다. 자성이 청정한 마음자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자성청정 열반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객진번뇌를 대치법으로 모두 없앴을 때 자성의 청정함이 드러나는데 비로소 이때 자성청정의 열반이 가능합니다. 자성신에는 자성청정신과 객진청정신이 있습니다. 허물을 대치한 것이 객진 청정신이고 객진이 청정히 되어 드러난 것이 자성청정신이며 이것이 드러나 지혜법신이 되면 그 이전에 발심과 원력으로 인해 이타행하는 보신과 그로 화현한 색신이 부처님의 몸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중생들이 실제 뵌 부처의 모습은 화신입니다. 보신은 중생 가운데 근기가 되고 업이 어느 정도 청정한 가운데 보이는 모습입니다. 지혜의 법신을 이룰 수 있다는 것과 객진을 반드시 없앨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이치뿐만 아니라 밀교의 궁극적인 정광명의가장미세한의식이드러났을때거친의식은모두사라집니다. 그러한 정광명의상태에계속머무른다면궁극의성불은가능하다고밀교는말합니다.
<보성론>에는 사대와 오대의 요소들에 의해 이것들이 생멸한다고 이르는데 사라질 때는 지에서 물 불 바람 공으로 사라지지만 발생에서는 공에서 풍 화 수 지로 미세함에서 거침으로 발생합니다. 밀교에서는 지수화풍식 중에서 거친 의식들이 무너지고 마지막에 미세한 의식이 존재하게 되는데 미세한 의식은 4가지의 공화 상태가 된다고 일컬으며 이에 관해 무상요가에서 가장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소멸하고 발생하는 일체의 모든 것의 불교적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대승비불설에 대한 밀교의 입장
대 승과 소승의 엇갈린 견해 때문에 대승비불성까지 나오게 됩니다. 용수보살은 대승이 불설임을 이치적으로 파헤칩니다. 뿐만 아니라 인도의 많은 논사들도 대승의 불설을 논합니다. 소승의 빠알리 전통 입장에서는 대승이 비불설임을 주장하는 근간으로 대승은 인도에서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하고 별해탈계보다 보살계를 더 높은 계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에 의심해 대승이 비불설이라고 주장합니다. 대승의 현교뿐만 아니라 밀교는 외도의 가르침이라고 까지 주장했습니다. 현교 밀교 대승의 가르침이 불설이 아니더라도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나오는 주장입니다.
밀교연구는 더욱 심도 있게 접근합니다. 공성을 깨달은 지혜를 이야기하는 상황에서 본존 관상을 하도록 합니다. 공성을 깨달은 지혜가 소지장을 끊기 위해서는 보리심이 바탕이 돼야 합니다. 의식에서 안이비설신의 오감이 감지하는 의식이 존재함에 대해서는 논란이 없습니다. 의식이라는 것은 오감에 대해 좋고 나쁘다는 간택을 의미합니다. 실적적으로 과장자들은 오감을 논하지만 의식은 잘 다루지 않다가 근래에 와서야 대상 분별에 대한 의식을 다루고 있습니다. 거친 의식 가운데 현재의식이나 수면의식 가운데 미세한 의식이 포함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이라는 것이 하나의 흐름에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모양과 색을 지니고 있지 않아 바깥 물건처럼 분명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남인도의 간덴사 큰 스님께서 21일 간 몸이 부패되지 않은 기이한 일(툭담)이 있었는데 사후 의식이 여전히 육체에 머물고 있음을 증명합니다. 10일 경과 후에 전자파 기계 장치가 연결 됐을 대 미세한 전자파동이 일어났습니다. 실질적으로 몸에 의식을 지닌 상태에서 뇌 활동을 멈춘 죽은 몸이지만 뇌 파동이 확인됐고 과학자들은 설명할 수 없었지만 이것은 실제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은 미세한 의식의 존재 가능성을 긍정하게 합니다. 삼보의 밀교 가르침 가운데 최상의 무상 요가의 가르침을 수집하고 경험적으로 검증되고 증득됐을 때 밀교의 가르침을 비로소 사실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티베트의 이러한 밀교 가르침이 모두 존재하는데 밀교 수행자라 하더라도 깊은 사유의 과정으로 붓다의 말씀을 열쇠로 삼아 실천해 나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대승의 밀교 금강승에 대해서도 수행자들은 깊이 참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승 경론의 핵심은 중관과 인명
인명학이 없으면 궁극의 해탈을 이룰 수 없습니다. 실질적으로 사성제를 깊이 있게 이야기 하는 것은 오히려 대승이 더 자세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승의 37각지인 보리분법을 이치적으로 규명한 것이 대승입니다. 용수보살이 밀교의 가르침에 다양한 주석서를 저술하셨는데 학자들은 용수의 동명이인까지 거론합니다.
불교의 기둥은 중관철학과 인명입니다. 용수보살의 <해심밀경>이 불요의인가 요의인가를 논할 경우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요의인가를 월칭보살은 불요의로 취급했습니다. 이분들의 성향이 다양한 중생의 근기에 맞춰 설하셨다는 시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궁극의 이치라고 하는 부처님의 말씀 규명은 금을 다루듯 하나하나 분석해야할 것입니다.
사캬학파는 바른 교법에 의해서 바른 논이 존재하고 그로써 바른 스승이 나오며 이로써 바른 체득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은 용수와 무착을 비롯한 대 학자를 통해 궁극적으로 부처님의 교법은 바른 것이며 바른 신심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총카파 대사는 “많은 세월동안 부처님의 말씀을 문사수로 공부하고, 공성을 깨달음에 의해서 부처님에 대한 남다른 확신을 지니게 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가리고 따지는 용수와 무착 보살이 부처님의 말씀을 실질적으로 수행하고 경험으로 깨달아 확신을 얻어 밀교의 저술이 가능했으며 대승의 불설을 증명했습니다.
나는 용수보살보다 뛰어나지 못합니다. 오늘은 컴퓨터가 널리 보급돼 있어 용수 보살에 대해 더 자세히 말해줍니다. 더 뛰어나 수승히 깨달았을 때야 용수보살을 확실히 해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금강승의 열쇠, 속제보리심
일체법은 무자성하며 공성이라고 하여 외도의 견해와 달리하는 것은 그들의 견해를 깨는 것입니다. 설일체유부와 경량부의 견해를 차단하는 것은 5온 12처 18계이며, 능취와 소취를 끊는 법무아는 유식의 견해를 끊습니다. 이는 일체가 법무아라는 견해로서 중관의 견해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견해의 차이를 이야기하면서 대보리심을 일깨우신 바와 같이 거듭 악도에 떨어진 중생의 고통을 구제한다는 의미입니다. 자유롭지 못한 중생을 해탈케 하는 것은 업의 과보에 떨어진 중생을 구제하며 숨 쉬지 못하는 이를 숨 쉬게 하는 것은 성문연각에서 적정의 단견에 떨어진 이들을 보리도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보살을 성취했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거친 의식이 남아 있습니다. 이로부터 구제해 금강승으로 이끌어 깨달음의 정수를 이룰 때까지 대보리심을 일으키는 것이 속제의 보리심입니다. 승의는 궁극이며 진여입니다. 속제의 보리심을 바탕으로 서원의 본체인 보리심을 일깨우게 됩니다.
보리심의 실제 주인이신 구족지금강에게 정례를 드리며 보리심 수행은 윤회를 부수니 그러한 보리심을 내가 말하노라. 부처님의 보리심은 나와 오온들을 구분하는 분별로 가려있지 않으니 항시 공의 성품을 지니고 있네.
승의보리심은 궁극의 진여를 깨달은 지혜로 속제보리심에 기반 합니다. 진제보리심이 바탕이 됐을 때 보살지의 초지를 성취합니다. 충만한 자비의 마음으로 보리심을 수행해야 하는 이유는 자비의 주존이신 삼세 부처님께서 성불을 위해 보리심을 수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로서 소지장과 일체장애를 끊어 일체 종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진제보리심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소지장을 끊는 대치법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밀교에 서는 자성신(自性身)을 보생신(報生身)이라고 합니다. 원래부터 갖춰진 몸이라는 의미며 본초불(本初佛)이라고 닝마에서는 말합니다. 선정 상태의 지혜에서는 희론이 모두 적멸합니다. 덧붙여서 외도들은 상일주제의 아트만을 주장합니다. 실유론자들이 집착하는 분별로부터 멀어져 있으며 유식에서 마음의 짓이라고 하는 분별을 여의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물에 물을 섞은 듯 분리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밀교에서는 본래의 보생신을 자성신으로 설명합니다.
법신과 보신 그리고 색신인 화신과 보신이 본래 청정한 정광명입니다. 소승에서는 이것을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현교 입장에서 궁극의 사실을 입증하기가 힘듭니다. 지혜 법신에서 보신이 나오고 화신이 나퉈 부처는 다양한 몸이 되는데 밀교에서 이것이 이치적으로 밝혀집니다.
#나(我)
외도들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나라는 것이 오온과 달리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그들이 말한 나를 생각해볼 대 오온인 몸과 마음을 보면 유아기의 몸과 성인의 몸과 동일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듯이 변화하고 늙어 가는 몸과 상관없이 항상 존재하는 느낌입니다. 아트만은 몸과 마음이 의지하지 않은 단독적 개념이 됩니다. 오온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에 주체로서 자유롭고 유일한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나라고 하는 것은 다양한 모습이 아니라 하나로 여기며 상일하고 유일한 상일주제의 아를 외도들은 주장하는 것입니다.
중관은 외도들이 이야기 하는 상일주제의 나를 논파합니다. 이치로서 따졌을 대 어떤 것이 분명이 존재하는데 오온과 분리돼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어디에 있는가를 묻습니다. 그러나 대답할 수 없습니다. 아트만의 실체를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온인 몸과 마음은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트만의 실체가 아닙니다. 의지하는 바탕과 의지하는 자 또한 실체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실체가 몸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나를 규명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나는 몸과 마음을 떠나 실체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몸과 마음에 의지돼 이름 붙여진 것일 뿐입니다. 몸과 마음에 의지한 나의 변화성이 증명됩니다.
‘나’ 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오온에 의지한 행위자도 존재하지 않으니 결국 무상합니다. 향유하는 주체 대상이 있어야만 세상에서 따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원불멸의 무상하지 않은 대상이 어떤 작용을 하는 것 자체가 이치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원인에 의해 결과는 발생합니다. 우리가 실질적으로 현상계를 봤을 때 원인이 조건과 만나 결과로 발생하지만 그 원인 역시 변화성을 가집니다. 현상계에서 무상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원인에 의해 생성된 모든 것은 무상합니다. 항상 찰라 생멸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생성과 소멸 가운데 소멸은 2가지로 되는데, 거친 무상과 미세한 무상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몸의 변화 가운데 흰머리가 생겼다면 그것은 거친 무상입니다. 10년은 1년의 변화에 의해 이루어지면 1년은 12개월로 이루어짐을 알아야 합니다. 아주 미세하게 들어가면 찰나멸인데 이는 어떤 대상이 존재함과 동시에 사라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온에 의지한 나라는 것 자체도 무상합니다.
부처님의 가피가 담긴 <보리심석>은 나라는 생각의 상태에서 대상을 보며 펼쳐지는 다양한 행복과 불행을 노래합니다. 중생에게 정신적인 행불행의 존재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이 정신적 행복과 불행을 조절하는 역할을 합니다.
법이란 마음의 고통을 줄이는 방법입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어느 정도 의지만 하여도 약간의 행복을 느낍니다. 불교는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창조주는 사람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원치 않는 불행과 원하는 행복이라는 것은 원인과 조건으로 이뤄집니다.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와 기타 자이니즘 등 종교가 창조주인정을 하지 않음에서 같지만 행위의 주체자인 나 자체 역시 원인과 조건의 산물이라는 것에서 차별됩니다.
불교는 인과설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원치 않는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는 고통의 결과물을 가져다 주는 원인과 조건을 확실히 알 때 없애는 것이 가능합니다. 선한 결과와 부정적인 결과는 원인에 대해 바로 성찰해 보아야 하며 이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바로 사성제 입니다.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집성제를 알 때 궁극의 멸성제를 이룰 수 있습니다. 사성제는 긍적적 결과물의 인과와 부정적인 결과물의 인과를 설명합니다. 샨티데와보살의 저서 <입행론>에는 원치 않는 고통과 원하는 고통의 상반된 결과를 설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한 원인을 인식하고 있지만 무시하거나 앎에도 치료하지 않으려 합니다. 마음에 있어 정신적인 고통의 원인의 근본은 번뇌에 있습니다. 번뇌에는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 있는데 이들이 일어날 때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영향을 줍니다.
처음에 나라는 생각이 있고 대상에 대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면 우리 역시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행복을 느끼지만, 부정적인 생각은 불안을 초래합니다. 이러한 모든 대상에 대해 설사 그 사람이 경쟁하는 대상이라 하더라도 그의 장점을 보고 수희찬탄한다면 나의 마음은 편안해 질 것입니다. 이러한 번뇌의 마음은 우리 자신에게 고통을 가져다주는 직접적인 원인이 됩니다. 사람들은 실질적인 고통의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번뇌라는 사실에는 큰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업의 근본인 번뇌는 집중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마음을 다스리면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다양한 번뇌들을 어떻게 정의하느냐면 마음의 평화를 깨는 것이 바로 번뇌 입니다. 그 해결책이 자비와 사랑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외도들 역시 관심이 큽니다. 분노심을 잘못으로 보고서 다스리는 방법을 이야기 합니다. 욕계의 5욕을 허물로 보고 천상계의 공덕을 명상함으로 인해서 욕계의 번뇌를 누르는 선정을 닦는 방법을 외도에서도 다룹니다.
고통의 뿌리 역시 원인과 결과에서 발생합니다. 탐심과 진심의 생기는 원인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나라는 아집과 아견을 바탕으로 번뇌는 일어납니다. 무아는 이러한 어리석음을 깨줍니다. 반야경에서 제법이 무자성이라고 하는 사상은 무자성의 정견을 이야기 합니다. 무아를 깨달은 지견을 통해 아집아견은 없앨 수 있습니다.
고통의 근본은 번뇌이고 그로 인해 아집이 생깁니다. 나만 소중하다는 이기심이 지구상의 모든 문제를 불러일으킵니다. 꿈에서도 나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나라고 하는 실체가 없음에도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아견의 대치법인 무아와 아집의 반대된 생각인 보리심을 내어야 합니다. 이것을 심도 있게 다룬 것이 용수보살의 <보리심석>입니다. 뿐만 아니라 무아의 지혜를 증장시키고 이타심을 키워 나간다면 일시적인 행복이 아닌 지속적인 행복이 찾아올 것입니다. 두려움 없는 행복은 몸과 마음을 평안하게 합니다.
<보리심석>은 무아의 지견을 이야기 합니다. 부처님의 경장에서는 우리의 몸과 마음의 오온에 의지해 존재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인무아입니다. 경량부에서 이야기하는 인무아는 몸과 마음을 좌지우지 하는 주체로서 독립적인 실체로서의 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설일체유부와 경량부에서는 인무아를 향유하는 존재자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음으로 점차적으로 수행하면 아의 집착을 소멸할 수 있다고 합니다. 유식학파와 중관에 있어 인무아와 함께 거론되는 것이 법무아입니다. 아의 집착을 없앨 때는 인무아이지만 반대로 향유하는 주체가 아직 남아 있음으로 법아의 집착은 끊어집니다. 물론 인무아를 수행했을 때 법에 대한 집착도 줄어듭니다. 나와 관련한 집착이겠지요.
#나, 온‧계‧처와 능취와 소취의 견해로서 소멸되네.
설일체유부와 경량부는 외부의 법아가 실제로 없다고 법무아를 이야기 하지 못하고 법아가 실체가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극미 입자를 지속적으로 더 이상 나눌 수 없기 때문에 외경이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의 의식은 쪼개보면 찰나 생멸로 모여 있기 때문에 모두가 실체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온을 비롯한 다양한 법의 인식은 실재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는 존재한다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신기루나 환과 같다는 설명에 대해서는 경량부와 유식에서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부처님께서 그 각각의 근기에 맞게 다양한 법을 설합니다.
색이라는 것은 사대 요소의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수화풍의 4대 요소들은 어떤 형상이건 간에 각자 지닌 성질이 있습니다. 지수화풍의 미세한 성질을 인간의 몸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깥의 어떠한 대상이건 간에 서로 각각의 요소들이 조합돼 하나의 대상으로 형성됩니다.
유식학파에서는 인무아 즉 설일체와 경량부에서 이야기하는 것 이상으로 법무아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능취와 소취가 다르지 않고 이들이 공하다는 것입니다. 소취는 실질적인 능취와 식에서의 훈습 종자에 의해 나타나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질적으로 이러한 대상들이 바깥 경계로서 분리돼 그 자체로 성립한다고 인식합니다. 그것이 유식에서는 잘못된 지견이며 이것은 바깥 대상으로 인식되는 소취는 능취의 훈습 종자의 발현일 뿐이라는 것이 유식의 견해입니다.
한대상에 대해서 사람들이 다르게 인식할 때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재로는 그 대상을 인식하는 의식 즉 훈습 종자는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런 이유로 외부 대상의 한 양상에 서로 다른 인식이 생겨나는데 한 여성을 누군가는 어머니로 인식하지만 짐승들에게는 먹이로 인식되고 남성에는 이성으로 인식됩니다. 이 모두는 모두 각자 진실한 인식입니다. 어떠한 대상이 우리에게 인식되는 것은 따로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마음 속의 훈습 종자가 발현되어 다르게 인식되는 것입니다. 외부 대상의 한 양상에 어떠한 매력적인 것도 타인에게는 다른 것입니다. 좋게 보이는 대상이라면 타인에게도 좋은 대상이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바깥의 경계로서 색을 비롯한 것이 의식과 상관없이 바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외경은 인식하는 의식의 나타남일 뿐이지 바깥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유식에서의 이러한 견해에 반박해 외부의 경계가 실체가 없다면 작용은 왜 일어나는가 물을 수 있습니다. 동일한 것으로 작용하는 것은 꿈속에서의 해학과 같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상태의 작용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꿈속에서와 현실의 작용은 차이가 없습니다. 능취와 소취의 실체로서 의식에 나타난 어떤 것이 별개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사물의 실체는 외경의 모든 양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국 본질은 다르지 않습니다. 각각의 의식이 존재하는 한 다양한 훈습 종자가 있을 뿐입니다. 범부의 마음이 미혹하여 환영과 신기루 건달바의 마을 등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작용은 의식상에서만 존재합니다.
아집을 없애기 위해 5온 12처 18계 등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일체 모든 법은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부처님께서 설하셨습니다. 아집이라는 집착의 인연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필요성에 의해서 중생의 근기에 따라 필요에 의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아를 이루는 것이 5온 12처 18계입니다. 아를 안립시키는 근거이지요. 이러한 인아는 실질적으로 실제 있는 것이 아니고 5온을 비롯한 인아를 안립시키는 근거는 실유입니다. 실유론자들이 주장하는 인아는 5온을 통해서 존재합니다. 유식파에 머무르며 큰 선연이 있는 이들은 2취공을 끊음으로써 일체를 끊습니다.
이제 의식의 자성인 진여를 말하겠습니다. 유식에서 ‘삼계는 오직 마음뿐’이며, <능가경>에서 ‘외경은 마음의 현현일 뿐’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월칭보살은 다르게 해석합니다. 부처님께서 ‘마음이 주된 것이다’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설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부처님께서 필요에 의해서 말씀하신 것이지 중관 입장에서는 궁극의 견해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오직 마음이라고 부처님께서 보이신 것은 어리석은 이들의 두려움을 끊기 위해서 이지 진여는 아닙니다. <십지경>에는 유식의 견해와 관련한 말씀이 있지만은 글자 그대로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유식에서 말하는 삼성설은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원성실성으로 차단해야 할 것입니다. 변계소집성이며 변계소집의 바탕이 의타기성입니다.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변계소집성으로 이를 끊은 것이 원성실성입니다.
중관의 자립논증과 귀류논증에서는 삼성설의 해석이 각기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 삼성은 모두 무자성이라고 말합니다. 유식에서는 의타기성과 변계소집성은 성립되지 않고 원성실성만이 성립됩니다. 무자성에 대한 가르침에 대해서 단견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3종 법륜을 굴리니 <해심밀경>이 그 중 하나이지만 중관에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서로 모순되는 여러 가지의 가르침들은 중생이 지닌 관행과 근기에 따라 가리킨 것이며 이로서 성문, 연각, 보살승 등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는 중생 각각이 지닌 의식 수준의 차이에 따라서 다양한 것입니다. 또 다른 경에서는 궁극에는 보살승으로서 오직 일승뿐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모두 대기 설법인 까닭입니다.
<해심밀경>에서 이야기 하는 요의 불요의를 구분하는 방법과 대승 경 <십지경>의 분류 방법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취사하는 구별을 위해서라도 다른 경과의 비교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끝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이치로서만 분류가 가능합니다.
대승의 견해에서는 불요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따지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승법은 무아입니다. 이는 제법이 모두 무아이며 마음은 무시이래 난 적이 없습니다. <무상요가탄트라>에 의하면 외부의 대상이 실체가 없고 무자성의 법성임을 이야기 하지만 마음을 제어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마음의 법성을 수행하는 것이 주된 중심입니다. 외부의 대상이 무자성인 바와 같이 인간의 마음은 객체와 주체 모두가 하나가 됩니다.
유가행자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서 경계에 이른 청정한 마음이 자증분의 대상이라고 합니다. 마음의 특별한 실체가 있다는 것은 훈습 종자의 발현이라고 봅니다. 이는 창조주를 인정하는 외도의 수론학파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마음의 경계가 현상에 불과하기에 마지막에는 아뢰야식만이 남게 됨으로 부처님과 가까이 된다는 것이 유식의 견해입니다.
중관에서는 성천보살의 <400송>에 나온 이치와 같이 지나간 것은 존재하지 않고 미래의 것은 얻음이 없다고 봅니다. 현재의 의식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현재 나를 존재하는 근거가 되는 실제가 바로 제8아뢰야식이라고 유식에서 주장하기 때문에 과연 이것이 현재 의식인가는 명확히 해야 할 것입니다.
<보리심석>의 32번째 게송의 경우에는 정확히 해석하고 있지 않습니다. <대승장엄경론>에 의하면 어떤 조건과 만났을 때 인식과 그에 대한 작용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뢰야식은 진실이 아니면서 진실인듯 하게 하여 윤회의 동력이 됩니다.
의식에 의해서 의식 대상을 알 수 있으므로 인식 대상 없는 의식은 없습니다. 중관의 입장에서 마음이 진실로 성립되고 자성이 있다면 자체에서 의지하지 않고 성립돼야 합니다. 인식하는 대상과 주체는 상호 의존적으로 성립되는 것입니다. 의지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불변의 자성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마음은 이름에 지나지 않으니 이름과 달리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결국은 언어 또한 관념일 뿐이지 변치않는 자성은 없습니다.
마음은 환과 같은 본성입니다. 예를 들어 안식은 경계가 되는 근과 경에 의해 일어납니다. 일반적으로 생각에 우리의 마음과 몸이라는 말에 따라서 실체인양 느껴지지만 실상은 이것이라고 규명하려 할 때 결코 실체는 얻을 수 없습니다. 마음을 비롯한 모든 제법은 의존에 의해 존재하니 본래 자성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일체의 희론이 적멸한 무분별의 지혜가 생기기 이전에는 대상이 마치 진실인양 여겨집니다. 어떤 이에게 분멸이 일어난다면 공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는 승의보리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의지해서 공을 이름붙인 것뿐이지 공 또한 실재하지 않습니다. 보리라는 말은 희론의 적멸을 의미합니다.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든 것이 아니라 모든 허물이 벗겨져 본래가 드러난 것을 의미합니다. 집착하는 의식 또한 적멸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리란 성품이 없고 생함이 없으며 존재한 적이 없어 허공과 같습니다. 공성을 깨달은 승의의 보리심은 분별로는 알 수 없습니다. 깨달음의 정수에 머무시는 부처님은 언제나 공이 허공과 닮았음을 아십니다. 붓다라는 말 속에도 ‘청정하다’ ‘그치다’라고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앞선 보리와 같은 맥락으로 집착의 근거가 모두 적멸한 상태입니다.
희론의 적멸이 바로 공성입니다. 이런 공성을 깨달은 지혜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음과 대치합니다. 반야경에서 제법이 무자성이라는 궁극의 실상을 말씀합니다. 선과 불선의 분별의 흐름을 깬 것이 공입니다. 마음에 의식의 대상이 없는 머무름은 허공의 성품입니다. 인무아에 대한 무아 역시 외부의 대상에 대한 집착들을 완전히 없애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중관의 자립논증에서는 자상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상을 귀류논증에서는 언어에서 조차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견해입니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집착하는 것은 모두 배재되어야 합니다. 공의 사자후에 모든 실유론자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실체가 있는 타력을 부정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외부 조건에 의해 결과물이 발생한다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초전법륜 이후 부처의 궁극적인 목적은 일체 종지를 이루고 이를 위해 승의보리심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자성은 제법의 법성입니다. 사탕의 달콤함과 불의 본성인 뜨거움과 같이 모든 법의 본성을 공으로 인정합니다.
dharamsala INDIA= omflower@dalailam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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