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라마 · 보리심 수행

과연 내 허물의 무게를 단다면?

수선님 2020. 5. 31. 12:19

과연 내 허물의 무게를 단다면?


불교에서는 ‘근도과根道果’로서, 바탕을 의지로 삼아 결과를 얻는 체계에 의해 법을 논한다. 과보가 생겨나게 된 원인과 조건에 따라 연기하는 순리이다. 무착보살은 <장엄론>에서 부동, 힘 그리고 무상의 세 가지 조건을 논하였다. 존재하는 것의 움직임과 결과를 파생시킴 그리고 항상 함이 없음을 이르기 위함이다.

21세기 불자는 잘 알아야 한다. 지금 이 순간의 의식이 붓다를 만들어 간다는 것을. 가히 비할 바 없는 붓다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현재의 나는 꾸준하게 선한 원인과 조건의 합을 모색해야 한다. 따라서 번뇌는 닦아서 없앨 수 있다. 이제는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 수 있다는 증명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붓다는 대론을 즐겼다. 반야경에 드러난 바와 같이 정화되고 수승한 근기를 지닌 사리불과 같은 제자와의 법담은 흥겨운 리듬을 타고 경쾌하게 전개된다. 달라이라마의 법문 역시 항시 유쾌하다. 법회가 시작되면 버터차와 빵이 대중공양되고 차와 함께 세기의 선지식과 여유롭게 조우한다. 세계 각국에서 나름의 목적을 지닌 여행자들과 순례자들이 다람살라의 법회에 동참했다. 이 시간은 그들 생애 두 번 다시 성사되기 쉽지 않은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이다.

달라이라마는 유연한 법문을 즐긴다. 한 예로 법문 중간에 본인이 딱타린포체로부터 출가했을 당시를 회상했다. 갓 출가 당시 린포체는 자주 멍하니 앉아 계시곤 해서 많은 이들이 그 모습을 보고 의아해 했다고 한다. 붓다의 경전에서 이해를 구해, 당시 린포체는 불보살과 친견을 하고 계셨던 것으로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다. 많은 세간인들이 얻지 못한 것을 얻었노라 말하고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았노라 거짓을 행하고 기록하며 수세기 후에 진실을 왜곡한 역사를 믿고 따르는 부조리함을 본인의 경험에 비춰 비유해 역설하신 것이다.

달라이라마는 보살을 두고 어떻게 정의할까? 한국불교도에게 가장 흔한 호칭인 보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본뜻을 제대로 알고 있는 이들은 많지 않다. 달라이라마는 “보살이 굳이 출가 사문일 필요는 없다.”는 견해를 보였다. 또한 “보살이라고 하여 반드시 출가사문의 계율을 지녀야 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국불교에서 보살의 뜻과 행이 바로 정립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는 부분이다. 이 때문에 일부 불교학파에서는 보살과 공空을 논하는 대승불교를 두고 비불설이라고 비약하기도 한다.


<다음은 법문의 요지>

대상 그 자체가 공함을 알아차리는 의에 대해서는 용수보살의 <보만론>에서 대승의 수행법을 통해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붓다께서 인도 바이샬리에서 <여래장경>을 설법할 당시에 불성 즉, 여래장으로서 멸성제에 이를 수 있음을 보이셨습니다. 이어서 용수 보살과 아리아데바는 대승의 논서를 서술함에 있어 현관 공성을 강조 하셨습니다. 미륵보살과 무착보살은 깨달음에 나아가는 차제를 비밀스럽게 보인 은희차제로서 반야부를 성립하였습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기에 모두가 공함 그 자체를 지니고 있으나 미세하고 거친 의식에 대해서는 논하고자 후에 금강승으로 전개됩니다. 금강승의 가장 미세한 의식을 ‘정광명’이라고 합니다. 이 의식이 후에 붓다의 사신을 구족하는 의식이 되었습니다. ‘정광명’을 통해 원만 차제로서 사신을 성취할 때 붓다가 될 수 있습니다. ‘정광명’을 알아차릴 때, 붓다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대승의 불교 수행자라면 차제를 따라 금강승을 수행해야 합니다.

현재 중국과 대만 등지에서는 ‘정광명’을 두고 비불설의 논쟁이 오가고 있습니다. 처음 ‘정광명’의 흥행 당시 불교가 쇠망의 길로 접어든 것과 연관이 깊습니다. 인도불교가 쇠퇴하게 된 원인으로서 첫 번째로 재물로 인한 승가의 타락을 근거로 삼고 있는 시기의 일입니다. 결국 인간, 우리에 의해 벌어진 안타까운 역사의 질곡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용수보살의 논전과 제자인 아리아데바의 논전을 비롯해 월칭보살의 <입중론> 이후 나가보디에 이르기 까지 반야부와 금강승의 주석서들을 참구하며 대승 수행을 해야 할 것입니다.

다수의 티베트인들이 불교를 수행하며 어찌나 어리석은 짓을 많이 했는가를 회자해 보면 염려심이 큽니다. 이전 나란다승원의 학자들의 논서를 학습하고 경전을 논하는 것에 중점을 두기보다 북치고 춤추는 것에 더욱 감흥을 느끼는 재가불자들의 모습을 보고 있을 때 드는 회의감입니다. 마치 용수보살께서 북을 치고 아리아데바께서 나팔을 불고 있는 모습이 상상되어 혼자 헛웃음을 짓기도 합니다. 법 아닌 법은 최대한 빨리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7세기 송첸캄포 왕에 의해 티베트의 불교는 중국 그리고 인도와 어울려 융성하게 되었고 8세기 티송데체 왕에 의해 인도 문화의 교류가 번성하게 됩니다. 나란다승원의 학장 샨트락시타는 왕의 권청으로 티베트로 오셔서 주로 반야부를 설법하셨고 티베트 내의 출가 사문의 계율을 구축하셨습니다.

이후 나란다승원의 논전을 번역하는 초석이 마련되었습니다. 샨트락시타는 불교학의 네 가지 학파 가운데 중관학파였으며, 외경을 인정하지 않는 유가행 중관학파의 학승이셨습니다. 후대 티베트에서 다수의 ‘보만중관론’과 ‘인명론’을 저술하셨고 티베트불교의 축으로 확립되었습니다. 그의 제자 까말라쉴라 역시도 명중관론과 인명에 관련한 논서를 저술하였으며 두 분 모두 티베트에서 돌아가셨습니다. 티베트불교의 겔룩, 샤카, 닝마, 까규에서 모두 중관과 인명을 소의논전으로 하고 있습니다.

티베트불교의 수행법은 나란다승원의 공부법을 기초로 두고 있습니다. 티베트불교가 혼란기를 겪은 이후 티베트불교 학파는 신교로서 새로운 도약을 하게 됩니다. 까규는 나로빠 이후 마르빠 그리고 밀라레빠로 전승되었습니다. 겔룩은 아띠샤로부터 까담파를 구축한 후 후대에 쫑카파에 의해서 꽃을 피웠고, 인명학으로 유명한 샤카는 나란다의 학승 다르마빨라와 비바빠로부터 받아들였으며 금강승의 구야삼마자를 본수행으로 삼아 나란다승원의 게쉬였던 나로빠로부터 전승받아 까담을 전승하게 됩니다. 여러분, 각 학파의 모자색이 다르다고 하여 법이 다른 것이 아님을 알고 불법을 실천하십시오. 무지의 허물은 매우 큽니다.

누군가 당신에게, “어떤 종교를 믿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붓다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불자입니다. 나란다의 불교를 전승한 가르침을 믿으며 교리는 연기법에 실천은 비폭력에 두고 있습니다.”라고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보리도등론>은 11세기의 불교 학자 아티샤존자에 의해 완성된 현교와 금강승을 아우른 논서입니다. 보리를 증득하기 위해 행해 나가야 할 길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모든 끊어야 할 허물을 청정히 하여 깨달음을 이루고자 할 때 대상을 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구족하는 차제를 본문으로 합니다. 따라서 <람림>과 비교하면서 보면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치의 힘에 의해 허물은 청정히 될 수 있습니다. 많이 닦을수록 깨닫고 알아차려야 할 바가 명확해집니다. 기원하고 뜻한 바가 다르기에 후에 과보가 다릅니다. 따라서 후에 성문 연각 독각으로 구분이 됩니다. <보리도등론>의 서론에서 보리를 거론한 것은 지금까지 그릇되게 알아차렸던 것을 바로잡기 위함입니다.

‘삼독의 번뇌를 정화하고 지혜의 광명을 더욱 밝혀 보살의 행으로 들어가게 하소서.’

허물을 정화함과 동시에 알아차리는 바른 지혜를 통해 소지장과 번뇌장의 번뇌를 멸하게 되니 이로서 중생을 위하고자 보살행에 들어갑니다. 나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의심의 어둠을 밝히고자 빛을 보이니 그것이 바로 한 권의 <보리도등론>입니다. 바른 동기로서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여 가피를 받도록 하는 것은 충실한 계행입니다. 이로서 공덕을 받은 것이 지혜입니다. 이는 순환하며 그 영역의 힘은 점차 증장하게 됩니다.

대승의 수행자는 일승一乘을 향합니다. 이를 농축한 말씀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스바하’입니다. 선한 마음에 습을 들임으로써 무엇을 버리고 선택해야 하는지 힘을 키우십시오. 불교에서는 이를 비량이라고 합니다. 이는 추론으로써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반드시 자각으로써 확신을 세울 때에만 가능합니다. 이러한 앎을 통해서 붓다의 지혜인 일체지에 이르게 됩니다.

마음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용기를 내십시오. 버릴 것과 얻을 것을 선택하십시오. 우리는 대승의 자량도 위에 있습니다. 붓다의 일체지를 확실히 증득키 위해서는 공성을 깨우친 지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존재의 실상을 바로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공성에 대한 추론이 증가하여 얻는 깨달음이 ‘아제아제’입니다. 공성을 바로 자각하는 지관쌍수의 견도에 이르게 되면 거친 번뇌장이 소멸됩니다. 자량도와 가행도 그리고 견도로서 이른 수도에서는 앞서 얻은 공성의 지혜와 다섯 가지 바라밀을 거듭 쌓은 힘으로 수행을 하게 되었을 때 초지(견도)에서 칠지(불청정지)에 이르는 번뇌장을 모두 소멸하게 됩니다. 팔지부터는 서서히 소지장을 끊어가게 되면 이를 일컬어 ‘바라승아제(피안으로 안전히 감)’라고 합니다. 이후에야 붓다의 일체지를 증득하게 되니 ‘모지스바하(피안에 안착함)’입니다.

중생에서 붓다에 이르는 것은 매우 점차적인 정진에 의해 완성되는 이루어짐입니다. 우리의 의식, 마음 그 자체는 청정합니다. 본래 청정하기에 잠시 가려진 번뇌에 의해 어리석을 뿐입니다. 그래서 번뇌를 손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붓다의 법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붓다가 될 수 있음을 알아 공유하기를 바랍니다.

 

 

 

 

 

[출처] 허물의 무게|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