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792~794) 설원의 티베트 땅에서 성불에 대한 대승의 견해를 놓고서 중국선종과 인도의 중관불교가 대립했던 쌈예사(無邊不壞天成寺)의 논쟁은 후일 티베트 불교의 흐름을 결정짓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 논쟁은 동일한 대승을 표방하는 중국 선불교와 인도불교가 견(見). 수(修). 행(行)의 세 방면에 대한 각자의 교리적 입장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중대한 논쟁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북아의 대승불교사에서 중차대한 의미를 갖는 역사적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게도 우리 불교계는 물론 중국과 일본 등에서조차 1200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동안 제대로 거론된 적이 없는 방치된 사건이기도 하였다.
인도불교 vs 중국선종, 티베트서 ‘이론승부’
정치적 의도보다는 成佛 교리적 시각차서 비롯
선종 돈오돈수 제창 혼란…왕명으로 교리 논쟁
# 논쟁 발생의 역사적 배경
먼저 쌈예의 논쟁이 발생하게 된 근본원인은 풍문처럼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사건이기 보다는, 불교의 기반이 허약한 상태에서 한꺼번에 대소승과 밀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서 야기되는 교리적 혼란과, 깨달음의 구현에 필수요소인 선정과 반야에 대한 인도불교와 중국선종의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타당하다.
사진설명 : 티베트에 밀교를 전한 파드마삼바바는 8세기 말 오늘날 총림의 역할을 하는 쌈예사를 건립했다. 만다라를 닮은 쌈예사원의 전경. 사진제공=〈티베트 역사산책〉저자 다정 김규현
티베트에 실제적으로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쏭짼감뽀(629~650 재위) 왕이 대신인 투미쌈뽀타를 인도에 파견하여 범어를 본떠 만든 4개의 모음(母音)과 30개의 자음(子音)으로 이루어진 티베트 문자를 제정한 뒤, <보운경(寶雲經)>등의 불경을 번역해 내면서부터이다. 더욱이 중국의 문성공주와 네팔의 티쭌공주를 왕비로 맞이하여, 조캉과 라모체 등의 사원을 건립하면서 왕실을 중심으로 불교신앙이 뿌리를 내리게 된다. 그러나 티베트 불교가 토착종교인 뵌교의 세력을 축출하고 오늘날과 같이 확고한 기틀을 다지고 발전하게 된 것은 티쏭데짼(755~797 재위) 왕이 등장하면서부터이다.
티베트에서 3대법왕의 한 분으로 추앙받는 티쏭데짼 왕은 성년이 되자 숭불의 서약을 세운 뒤 본격적으로 불교를 도입하게 된다. 그는 당시 중관자속파(中觀自續派)의 창시자인 ㅆㅑㄴ따락시따(寂護論師)와 진언사인 파드마삼바바(蓮花生)를 초청한 뒤, 그들과 상의하여 오늘날 총림의 역할을 하는 쌈예사를 건립한 뒤 예시칠인(豫試七人)을 출가시켜 티베트 승단을 출범시킨다. 동시에 각 처에 가람을 건립하여 민간사회에 불교를 전파하고, 인도와 중국 등지에서 고승들을 초빙하여 현밀(顯密)을 망라하는 방대한 분량의 삼장(三藏)을 번역하고 강설하여 불법을 확립하게 된다.
이러한 정착과정에서 티베트 불교는 ㅆㅑㄴ따락시따(寂護)가 전승하는 중관불교를 기반으로 해서, 파드마삼바바(蓮花生)가 전승하는 밀교를 수행방편으로 삼는 현밀을 겸수하는 길로 나아가게 된다. 이것은 후기 인도불교의 자연스런 풍조로서 뒷날 티베트에 보리심 사상을 전수하는 아띠ㅆㅑ(982~1054)가 현밀과 대소승의 가르침을 삼사도(三士道)의 차제에 따라 일체의 불법이 그대로 성불의 교계임을 제시한 <장춥람된(菩提道燈論)>을 저술하면서 절정에 달한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친 티베트 불교는 동일한 대승의 기반 위에 성립한 중국과 한국, 일본 등지의 불교와는 달리 특정한 교리에 근거하는 종파불교가 처음부터 성립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티베트 불교는 대소승과 현밀을 망라하여 배우고 실천하는 진정한 통불교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대소승을 거쳐 밀교로 발전해 가는 인도불교의 흐름을 그대로 수용하여 정착시켜 나가는 와중에서, 역경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입국한 중국의 마하연(大乘) 화상이 돌연히 선종의 돈오돈수의 교설을 제창하고 나서자 미처 교학적 기반이 정립되지 못한 티베트 불교계는 일시에 큰 교리적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 결과 복혜의 자량을 쌓아서 성불하는 바라밀다승의 점수의 길을 버리고, 대신 신구의(身口意)의 선행을 닦을 필요가 없이 단지 마음을 깨치는 것으로서 성불한다는 중국선종의 돈수의 가르침을 대부분 따르게 되었다.
이렇듯 성불의 방법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인해 티베트 승단은 친교사 보디싸따(寂護)를 따르는 쩨민(漸門)과 마하연 화상을 따르는 뙨민(頓門)의 둘로 갈라져 다투게 된다. 양측이 서로 각축하던 차에 왕명으로 선종을 금지하게 되자, 선종 측에서 자살 등의 격한 방법으로 저항하고 나서자 고심 끝에 티쏭데짼 왕은 양측의 주장을 공개적인 대론을 통해 승패를 결정지어 순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후일 쌈예의 논쟁이라 불리는 역사적인 돈점(頓漸)의 교리논쟁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不思의 선정만으로도 성불 가능” 선종 주장에
“공성증득엔 위빠사나 필요” 맞서 정설로 수용
# 논쟁서 제기된 주요한 쟁점
다음 쌈예의 논쟁에서 인도불교와 중국선종이 대립한 주요한 쟁점을 요약하면, 첫째, 성불에는 선업(善業)의 닦음이 필요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둘째, 법성 또는 공성의 증득에는 반야에 의한 관찰 또는 위빠사나(觀修)가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단지 불사(不思)와 부작의(不作意)와 같은 선정(禪定)만으로도 성불이 가능한 것인가? 하는 두 가지로 크게 귀결된다.
이렇듯 성불에 대한 상이한 견해를 놓고서 양측이 벌인 대론의 요점을 <최중캐빼가뙨(智者喜宴)>에서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즉, “마하연 화상이 말하되, ‘모든 유정들이 마음의 분별로 야기한 선과 불선에 의해서, 선취와 악취 등의 과보를 받으면서 삼계에 윤회하는 것이다. 어떤 이가 ‘일체를’ 전혀 사유하지 않고, 전혀 행하지 않는다면 그는 윤회에서 완전히 해탈하게 된다. 그러므로 ‘일체를’ 전혀 사유하지 않는 것이다. 보시 등의 십법행(十法行)을 행하는 것은, 범부로서 선근이 없는 우둔한 자들을 위해서 설해진 것이다. 미리 지혜를 닦아서 근기가 날카로운 자들에게는, 흰 구름이든 검은 구름이든 그 둘 전부가 또한 태양을 가리는 것과 같이, 선악의 두 가지도 역시 장애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를’ 전혀 사유하고 않고, 전혀 분별하고 않고, 전혀 관찰하지 않는 것은, ‘제법을’ 가히 보지 않고 곧바로(찍짜르, 頓超) ‘법성에’ 들어감으로써 십지보살과 같다”라고 주장하였다.
사진설명 : 마하연과 까마라씰라와의 논쟁에서 인도측이 승리했다는 기록을 담은 ‘흥불서약비’.
아사리 까말라씰라가 반론하되, “그와 같이 ‘일체를’ 전혀 사유하지 말라고 하는 그것은, 여실히 분별하는 반야를 버리는 것이다. 제법의 본성인 그 무분별의 법계는 여실히 관찰하는 반야로써 마땅히 깨닫는 것이다. 또 여실지(如實智)의 근본은 여실히 관찰하는 반야인 것이므로, 그것을 버림은 출세간의 지혜 또는 반야도 역시 버리는 것이다. 참으로 여실히 관찰하는 반야가 없이 유가사가 어떠한 방법으로 무분별에 안주할 수 있겠는가? 설령 일체의 법을 억념(憶念)함이 없고, 작의(作意)함이 없다 할지라도, 이미 경험한 법들을 가히 억념하지 않고, 작의하지 않음은 불가능한 것이다. 만약 내가 모든 법을 전혀 억념하지 않고, 작의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더욱 억념하고, 더욱 작의하는 것이다.
단지 억념과 작의가 없음을 행하는 것으로 ‘분별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이치가 아니다. 억념이 단지 없는 것으로써 무분별을 이루는 것이라면, 기절과 만취와 혼절한 때에도 역시 억념이 없는 것이므로 자연히 해탈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실히 관찰함이 없이는 무분별에 들어가는 방법이 없다. 설령 억념을 근사하게 차단할지라도 여실한 관찰이 없다면, 제법의 무자성성(無自性性)에 어떻게 깨달아 들어갈 수 있겠는가? 또한 무자성의 공성을 깨닫지 못한다면, 장애를 제멸하지 못함은 자명한 것이다. 또 공성을 비록 깨닫지 못하여도 단지 무상(無想)에 의해서 해탈하고 열반을 얻는 것이라면, 색계와 무색계의 천신들도 또한 전부가 해탈하고, 열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위의 대론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쌈예의 논쟁은 승패라는 외적인 결과를 떠나서, 여기서 제기된 쟁점들에 대한 옳고 그름의 정확한 판별을 내리기란 대소승 교학의 체계적인 학습과 이해와 내증이 없이는 접근하기 어려운 문제들이다. 그러한 까닭에 훗날 티베트 불교를 대표하는 싸꺄 빤디따(1182-1251)와 쫑카빠(1357-1419) 등은 마하연 화상의 교설이 지닌 오류와 그 해독을 깊이 인식한 뒤, 경론을 근거로 해서 상세한 교리적 비판을 가하게 되고, 그들의 주장은 또한 티베트 불교에서 대승의 정설로서 받아들여지게 된다. 필자는 이들의 주장을 정리해서 <까말라씰라의 수습차제 연구>에서 밝혀 놓았다.
한 가지 부연하면, 위의 논쟁에서 알 수 있듯이 티베트에서 발생한 돈점(頓漸)의 논쟁은 한국선종에서 벌이는 돈점의 논쟁과는 그 교리적 양상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선종 영향 벗어나 인도대승 계승 ‘독특한 발전’
# 티베트 불교에 미친 영향
끝으로 쌈예의 논쟁은 이후 티베트 불교의 흐름을 결정짓는 중대한 사건이 되었다. 즉 역사적인 대론이 끝난 뒤, “단박에 깨쳐 들어간다고 주장하는 중국화상의 선법은 십법행(十法行)을 훼멸하는 법이므로 행하지 말라. (중략) 이제부터 종견(宗見)은 나가르주나(龍樹)의 법을 따르고, 도행은 육바라밀과 십법행을 실천하며, 수행은 삼혜(三慧)를 통해서 마음을 닦고, 방편과 반야를 겸수해서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닦도록 하라”고 왕명을 내린 바와 같이, 중국선종의 가르침은 대승의 이설로 간주되어 정책적으로 더 이상 티베트 불교에 수용될 여지가 없었다.
그 결과 티베트 불교는 중국선종의 영향에서 벗어나 보리심을 중시하는 인도 대승불교의 흐름을 그대로 계승하여, 현밀과 대소승을 망라하는 일체의 불교를 삼사도(三士道)의 차제에 의거해서 모순 없이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체계화된 그들만의 독특한 불교로 발전하게 된다. 쫑카빠 대사는 <람림첸모(菩提道次第廣論)>에서 “대저 설산의 땅 티베트에 불교가 전파되던 전전기에는 길상하신 두 분의 큰 스승이신 보디싸따(寂護)와 파드마삼바바(蓮花生)께서 여래의 교법을 건립하였다. 그러자 공성의 이해가 근원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 방편분(方便分)을 훼멸하고, 일체의 작의(作意)를 무조건 차단하는 중국의 친교사 마하연 화상이 출현해서 청정한 교법을 더럽히고 쇠락시킬 때, 대아사리 까말라씰라(蓮花戒)가 그것을 잘 절복한 뒤, 여래의 의취를 바르게 결택해서 확립시켜 준 그 은혜는 진실로 지극히 깊고 무겁다”고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쌈예의 논쟁이 티베트 불교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의미는 참으로 큰 것이라 하겠다.
서재이 / ‘까말라실라의 수습차제연구’ 저자
[출처] 서재이, 쌈예의 논쟁|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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