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元曉)는 한국의 대표적인 승려이다. 실로 그는 이론과 실천의 양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대한 불교인이었다. 그의 방대한 저작과 독창적인 저술은 국내에서만 그의 위대함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그가 어느 누구에 못지 않은 뛰어난 학승이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한국불교를 빛낸 많은 승려들이 대개의 경우 중국에 유학하였음에 비추어, 그의 업적은 오로지 국내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의 위대함은 더욱 돋보인다. 바로 그가 주창한 사상이 화쟁사상(和諍思想)이다.
일반적으로 화쟁사상이란 원효의 사상적 근본을 구성하는 화회(和會)와 회통(會通)의 논리체계를 말한다. 그러나 보다 의미의 폭을 넓히면, 원효(617∼686년) 이후 전통적으로 계승되어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온 화회와 회통의 사상을 화쟁이라 한다. 불교의 이론은 대체로 연기론과 실상론(實相論)의 둘을 바탕으로 해서 무궁무진하게 전개되어 왔다. 모든 존재의 진실된 모습을 시간적인 현상에 입각하여 파악해 가는 것이 연기론인 반면, 공간적인 형상에 입각하여 파악하여 가는 것이 실상론이다. 그런데 원효는 그 어느 교설이나 학설을 고집하지도 아니하였으며 또 버리지도 않았다. 그는 매양 비판하고 분석하며 긍정과 부정의 두 가지 논리를 융합해서 보다 높은 차원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아냈다. 모순과 대립을 한 체계 속에 하나로 묶어 담는 이 기본구조를 가리켜 그는 화쟁이라 했다. 통일, 화합, 총화, 평화는 바로 이같은 정리와 종합에서 온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기도 했다.
화쟁은 그의 모든 저서 가운데서 줄기차게 뚫고 나가는 기본적인 논리이다. 그는 화쟁의 원리를 제시하길, 마치 바람 때문에 고요한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지만 그 파도와 바닷물이 따로 둘이 아닌 것처럼, 우리의 한 마음(一心)에도 깨달음의 경지인 진여(眞如)와 그렇지 못한 무명(無明)으로 분열되고는 있으나 그 진여와 무명이 따로 둘인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大乘起信論疏』).
그의 저서 전반에 걸쳐 불교의 온갖 문제들이 화쟁의 관점에서 체계적으로 논해지고 있다. 삼승과 일승의 문제를 비롯하여 대승불교의 거대한 두 흐름인 중관과 유식, 도저히 성불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일천제(一闡提)에게 불성(佛性)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 또 불신(佛身)의 다양한 의미 등이 그러한 화쟁의 대상이다.
그는 나열했다가 합하고(開合), 주었다가 빼앗고(與奪), 세웠다가 무너뜨리고(立破) 하는 논리를 이용하여 불교사상에서 나타나는 온갖 쟁론을 분석하고 총합하여 결국에는 조화롭게 어우러지도록 한다. 분석과 통일 또는 긍정과 부정의 어느 한 측면에서 정의하길 지양하고, 객관적인 논리에 근거하여 총합과 회통을 추구하는 논법이 화쟁의 특질이다. 그가 이런 화쟁의 논리를 펴게 된 사상적 배경으로는 당시의 중국불교에 많은 이념적 또는 학문적 대립이 있었다. 여러 종파들은 각기 자파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원효는 '한 가지 설에 편협되면 부처님의 참뜻을 잃고, 두 가지 설이 각기 자기 것만을 고집하지 않으면 서로가 방해되지 않는다'고 하는 조화의 논법을 이용하여 모든 쟁론을 회통하고 있다.
원효의 화쟁사상의 압권은 그의『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이었을 것이지만, 불행하게도 이 저서의 내용을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그의 모든 저술과 언행 및 전기를 통하여 그 중심사상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는 한 종파나 문헌에 치우침이 없었고, 어느 하나의 특정한 교학을 주장하지도 않았다. 그의 화쟁사상은 불교 안의 모든 사상을 조화시키고 통일함으로써 부처님의 참 정신을 구현하려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부처님의 살아 있는 교훈을 이 땅에서 실현코자 하였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정신은 한국에서 계승되어 갔음은 물론, 중국에도 영향을 끼친 바가 있었으며, 일본의 학승들은 그의 저서를 널리 애독하고 인용한 바가 많았다.
흔히 한국불교의 특징을 대변하길, 불교의 모든 성격들이 융합되었다 하여 통불교(通佛敎)라 하는데, 이는 한국불교가 원효의 이러한 정신을 이어받았음을 뜻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신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있느냐 하는 점에선 반성의 여지가 있다.
어쨌든 수많은 종파나 주의가 저마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던 것은 불교가 교의적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극단과 아집의 타파를 제일의 신조로 삼았던 부처님의 근본취의가 자칫 흐트러질 우려를 낳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일체의 주장을 버리지 않고 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조화와 통일을 이루고자 했던 화쟁사상은 부처님의 진의를 되살리고자 했던 실천적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참고문헌〕 高崎直道,『佛敎·イソド思想辭典』(→ 문 13), p. 497.
안계현,『韓國佛敎史硏究』(同和出版社, 1982), pp. 77∼78.
김영태,『韓國佛敎史槪說』(경서원, 1988), p. 77.
[출처] 원효의 화쟁사상이란 무엇인가?|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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