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의 관점에서 본 원효사상
이유나(제주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석사학위논문 - 2013 년 2 월
I. 서 론 ▲ 위로
이 연구는 원효(元曉, 617-686)의 사상을 오늘날 동아시아 불교의 주류를 이루는 선불교(禪佛敎)의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시도이다. 원효는 중관(中觀)ㆍ여래장(如來藏)ㆍ유식(唯識)ㆍ화엄(華嚴)ㆍ정토(淨土)ㆍ선(禪) 등 당시 동아시아 불교에 유행했던 여러 불교 사상을 포괄적으로 수용하여 자신의 불교관을 세웠다. 이 점은 원효사상의 강점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동시에 원효사상의 특징이 무엇인지 파악하기를 어렵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하다. 원효는 각각의 사상들이 모순 없이 서로 통할 수 있으며, 일승적(一乘的) 관점에서 본질적으로 의미가 동일하다는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선행 연구에서는 일반적으로 다음 두 가지를 기본 관점으로 취해 원효사상을 이해해 왔다. 하나는 원효 연구사에서 가장 오래된 관점인 ‘화쟁(和諍)’이다. 화쟁이란 원효가 여러 불교 사상을 아우르면서도 특정한 견해에 치우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각 사상들 간의 모순과 논쟁을 평론하여 회통(會通) 하는 것을 지향했다는 의미이다.1) 그런데 이 관점은 원효사상을 특징짓는 주요한 관점임에도 불구하고 화쟁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고,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출발했다는 점 등에서 꾸준히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2)
다른 하나는 원효의 대표 저술인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疎, 이하 소)와 대승기신론별기(大乘起信論別記, 이하 별기)를 기초로 원효사상의 핵심을 기신론의 일심(一心), 또는 일심이문(一心二門) 사상으로 보는 것이다. 원효사상에서 대승기신론 (大乘起信論, 이하 기신론)이 차지하는 위상이 대단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기신론은 복합적인 사상들이 함축되어 있어서 기신론 의 사상을 단적으로 추출하기란 쉽지 않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선행연구에서는 유식, 여래장, 화엄 등 특정 사상과의 연관성 속에서 원효의 기신론 사상을 다루고 있다.3)
그러나 이러한 연구들은 각각 원효의 일심사상의 중요한 내용을 지적하고 있지만, 유식, 여래장, 화엄 등 복합적인 성격을 총체적인 관점에서 설명해내는 데 한계를 가지고 있다. 각 관점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유식으로 보는 관점은 원효가 별기에서 유식의 교학에 대해 ‘세우기만 하고 깨뜨리지는 못했다’4)며 비평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적받는다. 또한 여래장으로 보는 관점에 대해서는 법장(法藏, 643-712) 교학의 틀을 그대로 받아 들여 원효에게 적용시키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며, 화엄으로 보는 관점은 화쟁 사상의 연장에서 원효사상을 종합주의로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한편 교학적 해석의 한계 외에 기존의 연구에서 원효의 실천수행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부진하다는 점도 원효사상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라고 볼 수 있다. 원효사상에서 실천수행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행이론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는 것은 이미 반복적으로 지적되어 온 원효 연구의 문제점 중 하나이다. 여기에는 원효 연구의 여러 난점이 얽혀 있지만 연구 경향으로 볼 때 가장 주된 이유로는 수행에 관한 원효의 주요저술인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 이하 경론)이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이하 경) 및 초기선종과 불분명한 연관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경 과 경론, 그리고 선종의 관계에 얽힌 문제는 두 가지로 축약된다. 하나는 경에 선종의 초조인 보리달마(菩提達磨)의 ‘이입사행설’(二入四行說)이 포함 되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송고승전(宋高僧傳)에서 경의 등장을 신라, 그리고 원효와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만약 경의 이입사행설이 달마보다 먼저 등장한 이론이라면 경과 그 최초의 주석인 경론은 초기 선종과 직ㆍ간접적인 연관관계가 있고, 송고승전의 기록을 따라 경이 원효, 혹은 원효의 주변 인물로부터 성립된 위경이라면, 초기 선종에 원효가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5)
그러나 현재 경과 초기선종과의 영향 관계를 증명할만한 추가적인 문헌 자료나 송고승전의 기록을 수긍할만한 부수적인 자료도 없기 때문에, 경이 위경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이후 팽팽하게 맞섰던 신라찬술설과 중국찬술설은 미지근한 대립관계를 유지하는 데 머물러 있으며, 특히 초기 선종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더 우세하다고 할 수 있다.6) 또, 경과 경론 사이의 사상적 차이에 대한 문제도 제기되었지만 경의 출현지가 확고하지 않기 때문에 본격적인 논의로 이어지지는 않았다.7)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경론 등에 담긴 원효사상에는 선의 색채가 뚜렷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파악하는 문제는 ‘잠정적 보류’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경의 사상적 전거를 파악하는 작업이나, 경과 경론 사이의 차이에 관한 문제는 미루어 두고, 경론에 집중하여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경의 찬술 문제와 별개로 경론의 사상을 원효의 선사상(禪思想)으로 파악한 몇 편의 연구가 있지만,8) 여기에 대해서도 원효사상이 신라에 선종이 전래되기 이전의 사상이라는 점에서 원효의 사상을 선사상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시간적 선후관계에 입각하여 원효사상을 선사상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은 논의의 여지가 있다. 원효 당시 선(禪)에 대한 논의는 충분히 성숙해 있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지만 이미 법랑(法朗)이 4조 도신(道信, 580-651)의 선법(禪法)을 전수받아 귀국한 일이 있고, 원효의 생몰연대(617-686)에 해당하는 4조 도신-5조 홍인(弘忍, 601-674) 시기의 선종은 종파적 정체성은 갖추었다고 보긴 어렵지만 상당한 규모의 문파(門派)를 이루고 있었다. 비록 직접적인 연관 관계는 확인할 수 없지만 원효의 시대는 실천 수행 중심의 불교로서 선불교가 흥기하던 중요한 시기였고, 적어도 원효사상을 선(禪)으로서 논하기에 이른 시기는 아닌 것이다.
원효를 해석하는 관점이 교학적 테두리나 선종의 법통주의적 관점9)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원효의 사상을 온전히 파악하기 어렵다. 또, 선의 관점에서 원효를 재조명하는 작업 없이는, 선불교가 주류를 이루는 오늘날의 불교에서 원효사상의 의미와 역할은 제한적으로 수용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원효사상을 선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작업이 보다 적극적으로, 풍부하게 이루어질 때, ‘원효의 눈으로 한국 선불교 바라보기’도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 그러한 방법을 통해 현재의 한국 선불교에 대한 검토와, ‘선불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새로운 고찰도 이루 어질 수 있으리라고 본다.
선불교의 관점에서 원효사상을 해석하는 일반적인 방법은 위에서 살펴 본 바 와 같이, 기존의 연구에서 시도했던 대로 경론의 선사상과 선불교에서의 경론의 역할을 분석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존하는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러한 연구 방법을 통한 논의는 한계에 부딪혀 있다. 그래서 이 연구에서는 기존 연구 의 한계를 극복하여 원효 사상을 선불교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음을 논증하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원효의 일심사상, 수증론(修證論)을 비롯하여 대중교화의 방편이었던 정토사상, 계율관 등을 고찰함으로써 원효사상이 선불교의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음을 논증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선종(禪宗)의 종지(宗旨)를 요약하여 직지인심(直指人心)ㆍ견성성불(見性成佛)ㆍ교외별전(敎外別傳)ㆍ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말로 일컫는다. 이것은 ‘교’(敎)로 지목되는 경전 또는 교설 전체에 대한 마음[心]의 우월성을 선언한 것이다. 즉 지금 여기에 있는 각각의 마음이 부처와 다름이 없으며, ‘말로 전달되 는 가르침’[敎]은 곧 진리와 동일시되는 ‘부처의 마음’을 오롯이 전달할 수 없기 때문에, 가르침은 경전의 밖에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수된다는 의미이다.
‘마음’은 선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선불교에서 바라본 불교의 핵심 그 자체이다. 그런데 선불교에서 인간의 마음에 주목하고, 그 본성을 청정한 것으로 이해한다는 이유에서 선불교의 마음은 불교적 전통이 아니라 중국전통사상의 영향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10) 또, 수증론이 노장사상의 영향으로 탄생했다는 주장도 제기되는데, 이러한 주장들은 극단적으로 전개 될 때, ‘중국’불교라는 특이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선(禪)이 중국전통사상의 영향으로 탄생한 것이며 불교적 전통과는 다르다고까지 말하게 된다.11)
선불교가 다른 어떤 종파불교보다 현실 중심적이고, 인간 본위적인 중국 사상의 색채를 강하게 띠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을 ‘중국적’이라고 지나치게 강조하면 선불교가 계승하고자 한 대승불교적인 맥락을 놓치게 된다. 선불교의 독특한 수증론은 대승불교가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했던 심식설(心識 說)에 대한 고민을 밑바탕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우선 2장에서는 선(禪)의 의미를 능가경과 기신론의 심식설을 통해 고찰하고, 이를 통해 원효사상과의 접점을 모색하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원효 사상에서 핵심적인 개념은 ‘일심’(一心)이며, 이 개념은 기신론에서 도출된 것이다. 이 점에서 본 연구는 기신론이 능가경의 심식설(心識說)과 맥락을 같이 한다는 점에 주목할 것이다. 즉 능가경과 기신론에서 제시하는 심식설이 대승불교의 수행론의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보고, 이와 관련해서 선불교의 대표적 개념인 ‘돈오’를 중심으로 선불교의 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3장에서는 우선 그동안 화쟁의 원리로 여겨졌던 일심의 의미를 실천수행적 관점에서 살펴볼 것이다. 원효가 기신론과 능가경의 심식설에 주목했던 이유는 직접적인 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체득[自利] 및 깨달음의 내용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대중교화에 나설 수 있는[利他] 이론적 기반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은 경론의 해석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지는데, 원효는 경론의 구조 자체가 수행의 두 가지 측면을 포괄하는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2장에서 살펴본 선불교의 수증론에 비추어서 고찰한다.
4장에서는 원효의 정토사상과 계율관을 선의 관점에서 살펴본다. 정토사상은 원효가 대중교화의 방편으로 적극 수용한 사상이다. 정토사상은 타력신앙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자력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선과 대비된다. 그러나 정토사상은 염불선이라는 형태로 선종에서도 수용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원효의 정토사상이 단순한 타력신앙이 아니며, 엄밀히 말해 자력신앙과 타력신앙의 구분을 뛰어넘는 것임을 고찰한다. 정토사상이 대중교화를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듯이, 원효의 파계 역시 대중교화를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원효가 과감히 파계를 행할 수 있었던 것은 계율의 상(相)에도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대승보살계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원효의 계율관은 선불교 윤리와 유사하다고 평가되는데, 계율관의 목적과 의의에 대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II. 선불교(禪佛敎)의 심식설(心識說)과 수증론(修證論) ▲ 위로
선(禪)이 다른 불교 사상 사이를 가르는 개념은 단연 ‘돈오’(頓悟)라고 할 수 있다. 돈오는 ‘즉심시불’(卽心是佛)로 일컫는 선종의 ‘마음’[心]이 발현되는 방식, 즉 깨달음이 구현되는 방식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즉, 돈오는 선불교 수증론의 핵심 개념이다. 그런데 수증론은 심식설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수행의 출발점이 되는 수행주체의 본질적인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수행을 통해 나아 가야 하는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만약 마음이 본래 오염된 것이라고 한다면 수증은 오염된 마음을 정화시키는 것이고, 마음이 본래 청정한 것이라면 수증은 그 마음으로 회귀하는 과정이 된다. 따라서 ‘마음이 본래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대승불교 수행이론의 가장 원론적인 문제이다. 이 장에서는 능가경과 대승기신론을 통해 문제를 파악하고, 그 내용에 입각하여 선종의 ‘돈오’를 고찰하기로 한다.
1. 능가경(楞伽經)과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마음의 구조 ▲ 위로
능가경 (楞伽經)12)과 대승기신론 (大乘起信論)의 공통점이자 가장 큰 특징은 아뢰야식(阿賴耶識, ālaya-vijñāna)과 여래장(如來藏, tathāgata-garbha)을 융합 시키고 있다는 점이다.13) 아뢰야식과 여래장은 대승불교의 유식사상과 여래장사상에서 마음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문제는 이 두 가지 개념이 서로 정반대의 관점에서 인간의 상태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ālaya’란 저장[藏]을 의미하는데, 심리적 경험활동에 의해 산출되는 잠재적 형성력, 즉 종자를 간직하는 식이라는 의미이다.14) 불교에서는 무아(無我)를 주장 하지만 단순히 찰나생멸(刹那生滅)만을 주장한다면 기억과 행위 등의 연속성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업을 상속하고 경험과 인식의 주체가 되는 무엇을 요청하게 된다. 아뢰야식은 인식과 경험의 연속성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유식에서는 우리가 실재한다고 믿는 인식 대상들도 모두 잠재심인 제8식 아뢰야식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할 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唯識無境].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 manas)은 찰나적으로 생겨나 상속하는 아뢰야식을 보고 ‘아’(我)라고 집착하는데,15) 아뢰야식이 전변(轉變)하여 만들어낸 범부의 인식은 매 순간 ‘필연적으로’ 주관과 객관으로 분열하며, 안으로는 자아에 집착하고, 밖으로는 인식 대상에 집착한다. 이러한 인식은 허망분별(虛妄分別)한 인식에 지나지 않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중생이 체감하는 고통의 근원으로 작용한다.16)
아뢰야식이 잠재심으로서 번뇌의 근원으로 설정된 것과 반대로, 여래장은 모든 중생에게 잠재적으로 여래와 똑같은 본성이 갖추어져 있다고 본다. ‘tathāgata-g arbha’란 원래 ‘여래의 태아’라는 뜻으로, 본래 여래가 될 수 있는 요인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이다. 한역에서는 여래를 감추고 있다는 비유적인 의미에서 이를 여래장이라고 번역했다.17) 여래장경 (如來藏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부처의 눈으로 보니, 탐욕, 분노, 어리석음 등 갖가지 번뇌에 빠져 있는 모든 중생의 안에는 여래의 지혜와 여래의 눈과 여래의 몸이 있어서 결가부좌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비록 윤회하는 중생의 몸에 있지만, 여래장은 절대로 더럽혀짐이 없어서 덕상을 갖춤이 나와 다르지 않다.18)
여래장사상은 두 가지 동기에 의해서 성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첫째는 중생 안에 부처와 같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 결과인 성불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러한 대승의 성불론(成佛論)을 비대승교도나 비불교도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그들을 포함한 일체 중생에게 성불의 가능성인 여래의 태아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여래장사상의 목표는 수행 내지는 수행의 결과인 열반이 가능한 근거를 설명하고, 이를 일반 대중들에게 확산시키고자 했던 맥락에서 기인한 것이다.19)
유식에서 바라보는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이 찰나멸을 거듭하는 폭류(瀑流)와도 같아서 필연적으로 번뇌를 발생시키는 것이며, 반대로 여래장에서 보는 인간의 마음은 절대로 번뇌에 물들지 않는 불변의 청정한 마음이다. 이러한 두 관점은 깨달음을 서로 다르게 이해하게 된다. 유식에서의 깨달음이란 번뇌를 발생시키는 인식이 바른 인식 주체인 부처의 식(識)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의식의 질적 변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을 ‘소의(所依)의 변화’를 뜻 하는 전의(轉依)라고도 일컫기도 한다.
반면 여래장사상에서는 번뇌가 마음의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라 객진(客塵)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깨달음은 질적 변화가 아니라 본래 갖추어진 청정한 마음이 현현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 두 사상은 각각 내포하고 있는 수증론의 한계 때문에 융합을 모색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유식에서 주장하는 깨달음의 경지는 허망분별의 인식대상이 사라지고, 인식대상이 사라지므로 그 의지처인 식(識)도 따라 멸하는 경지[境識俱泯]이다. 하지만 인식내용이 허망분별이라고 하는 것은 곧 현실의 인식[識]도 허망하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식으로부터 지혜가 생기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20)
반대로 여래장사상은 이론적으로 체계를 갖추는 과정에서 생사윤회의 근거를 제시해야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여래장을 중생의 내부에 있는 성불의 인(因) 이자 생사윤회의 인(因)으로서도 지목하게 된다. 이 문제는 승만경(勝鬘經), 보성론(寶性論) 등을 거치면서 점차 구체화되고, 여래장을 본래의 취지와 다르게 윤회의 주체로서 유위법(有爲法)과 염오(染汚)의 의지처로 규정하게 된다.21)
수증론은 깨달음의 필연성을 확보하기 위해 깨달음의 근거를 수행자의 내면에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그리고 동시에 미혹한 범부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만 한다. 특히 이 조건들은 생사(生死)가 곧 열반(涅槃)이며, 모든 중생이 보살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하면서 소승불교를 힐난했던 대승불교의 수증론에서는 포기할 수 없는 전제조건이다. 그러나 유식의 아뢰야식은 미혹에 사로잡힌 범부의 현실을 설명하는 데는 탁월하지만 상대적으로 깨달음의 근거와 가능성을 제시하는 부분에서 취약하다고 할 수 있고, 여래장사상은 수행의 내적인 가능성을 제시해줄 수는 있지만 번뇌에 대해서 설명이 부족하기 때문에 수행의 방법을 제시하는 데에는 취약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사상의 한계는 마침내 능가경 에서 ‘아뢰야식이라고 하는 여래장(如來藏名識藏, tathāgatagarbha ālayavijñāna-saṃśabdita)’이라는 절충된 형태로 나 타나게 된다.22) 아뢰야식과 여래장의 일치는 수증론에 있어서 중요한 관점의 변화를 야기한다. 일반적으로 수증(修證)이란 미혹에서 출발해서 깨달음에 도달하는 단선적인 노정으로 이해된다. 이것을 아뢰야식과 여래장이라는 개념으로 말한다면 수행은 중생의 본성을 아뢰야식에서 여래장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능가경에서는 아뢰야식과 여래장 사이에는 간극이 없기 때문에 ‘아뢰야식=여래장’의 구도가 설정된다.23) 미혹과 깨달음의 의지처가 동일한 것이라면 이 번뇌와 지혜는 동전의 앞면과 뒷면과 같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이 점은 다음의 글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대혜야, 이 여래장식장(如來藏識藏)은 모든 성문ㆍ연각에게 심상(心想)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는 비록 자성이 청정함에도 불구하고, 객진(客塵)에 덮여 있어서 오히려 부정하게 보인다. 그러나 여래에게는 그렇지 않다. 대혜야, 여래의 현전(現前)의 경계에서는 마치 손바닥 안에 있는 아마륵(阿摩勒) 열매를 보는 것과 같다. …… 여래장식장은 오직 부처와 더불어 이지(利智) 에 의지하는 보살 지혜의 경계이다. 그러므로 너희 보살마하살들은 여래장 식장을 열심히 배우고 닦아야 한다. 들어서 깨닫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된다.24)
이렇듯 아뢰야식ㆍ여래장의 일치로부터 능가경은 일체가 ‘자심소현’(自心所現)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이를 확인하면 ‘자각성지’(自覺聖智)를 얻게 된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 두 가지는 여러 가지 내용이 다기(多技)하게 얽혀 있는 능가경에서 가장 빈번하게 다루어지고, 또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는 것으로서, 경의 중심주제라고 볼 수 있는 요소이다. 그리고 이것은 무엇보다 선불교의 수증론에서 핵심적인 두 가지 내용을 시사하고 있다. 하나는 미혹과 깨달음, 번뇌와 지혜 의 본성이 서로 다르지 않기 때문에 깨달음에서 ‘자각’이 무엇보다 중요한 조건 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자각은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어서야 이를 수 있다는 점이다.
이 내용은 대승기신론에서 보다 유명해지는 바다와 파도의 비유로도 나타난다. 바닷물이 출렁여 파도가 되듯이 여래장식장으로부터 갖가지 식이 전변하여 일어난다는 것이다.25) 이 비유는 번뇌 그 자체가 원래의 마음과 별개의 것이 아니고,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면 그 자체로 청정한 마음 그대로가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능가경 에서 부처는 ‘일상적 언어’[世間言論]가 우리로 하여금 변하지 않고 상주하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게 하고, 우리를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의 굴레로 인도하여 오히려 미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기능을 한다고 설명한다.26) 따라서 “나는 정각을 얻은 뒤로부터 한 마디의 설법도 한 적이 없다”27)는 부처의 말은,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은 일상적 언어를 사용하는 이해의 차원에서는 불가능하고, 언어를 뛰어 넘은 직관이 되어야 함을 드러낸다.28)
이상의 두 가지 관점을 바탕으로 능가경의 수증론은 돈(頓)ㆍ점(漸)의 두 측 면을 모두 포용하게 된다. 대혜가 부처에게 ‘어떻게 자심소현의 흐름을 청정하게 합니까? 단박에[頓] 하는 것입니까? 점차로[漸] 하는 것입니까?’라고 묻자 부처는 ‘암라과가 성숙하듯 점차로 정화하는 것이지 돈(頓)이 아니다’와 같은 비유들을 통해 일단 점(漸)이라고 대답하고, 곧바로 이어서 ‘거울이 일시에 모든 색상과 영상을 비추듯 단박에 하는 것이지 점(漸)이 아니다’를 비롯한 여러 가지 비유로 서 깨달음은 돈(頓)이라고 대답한다.29)
여기에서 점(漸)은 닦음[修]의 측면을 말하는 것으로서, 수행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것이고, 돈(頓)은 깨달음[證]의 측면, 또는 깨달음으로서 얻게 되는 지혜의 성질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30) 그런데 깨달음이 단박에 이루어진다는 설명은 능가경이 전통적인 수증론의 견해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능가경에서 번뇌와 깨달음은 각각 별개의 실체가 아니라, 동일한 마음의 두 측면이다. 전통적인 수증론은 부단한 수행의 결과로 깨달음을 이해했지만, 능가경에서는 미혹과 깨달음 사이의 간극이 사라졌기 때문에 깨달음이 단박에 이루어진다고도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번뇌나 깨달음이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또 다른 실체론적 사유에 불과한 것이어서, 수행의 필요성은 인정되지만 수행을 통해서 번뇌를 줄여간다거나, 깨달음의 내용을 증장시키는 과정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일체가 자심소현에 불과하다고 함으로써 이 양자를 총괄하는 마음은 불변하는 실체적 자아, 즉 ‘아론’(我論) 또는 ‘외도(外道)의 설(說)’이라고 불리는 아트만(ātman)사상과 닮은 것처럼 보인다. 칼루파하나(D. J. Kalupahana)는 이 점에 주목해서 능가경의 사상은 불교적 전통에 반하는 절대주의적인 관념론에 불과하다고 강력하게 비판한다. 특히 능가경의 언어관이 개념의 의미를 해체하기만 하고 재건하지는 않음으로써 금강경과 같은 전통적 불교의 언어관과 달라졌다고 지적한다. 개념의 의미를 해체하기만 하는 언어관은 곧 ‘부정주의’(회의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고, 그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긍정적인 내용을 간직하되 어떠한 개념화나 분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를 상정해야만 한다.
능가경에서 제시하는 여래지(如來地), 또는 여래선(如來禪)은 이러한 이유에서 제시된 개념으로서 초월적인 인식상태를 뜻한다는 것이다.31)
그런데 능가경에서 언어에 대한 극도의 경계를 나타낸 것은 언어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분별적인 성격이 곧 식(識)의 성격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능가경 에서 나타나는 언어의 부정은 그러한 인식의 해체를 위한 수사적 전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32) 실체적으로 생각했던 ‘나’를 깨뜨린다는 의미에서 보면 능가경의 심식론도 여전히 불교의 무아론(無我論)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능가경 에서는 이 문제를 분명하게 거론하고 있다. 부처는 불생불멸로 설명되는 여래장이 무아를 단멸론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을 계도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명시한다.33) 방편이란, ‘임시로 이름을 세우는 것’[假說]을 말한다. 능가경이 유독 ‘자신’[自, sva]을 강조하여, 자심(自心)이나 자각(自覺)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도 번뇌와 깨달음에 대한 존재론적 설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것들이 실재한다는 생각을 깨뜨리기 위해서이다. 자심이나 자각은 불멸하는 마음을 지칭하기 위해서 제시된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소박한 의미에서 경험적으로 인식되는 수행주체의 마음을 가리키고 있으며, 수행의 실천을 위해 강조되는 개념이라고 보는 편이 더 합당할 것이다.34)
또, 칼루파하나의 지적과 같이 능가경의 수증론이 초월적 성격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초월의 목적지가 구체적인 현실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을 유의해야 하며, 능가경의 수행 목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일상적으로 인식하는 ‘나’는 ‘나’와 ‘세계’가 실재한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관점을 따라 세계를 구성한다. 불교에서는 이렇게 구성된 세계는 실제 세계가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인식이 만들어낸 세계이며, 이것이 세간에서 느끼는 고통의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초월을 뜻하는 출세간(出世間)은 이 세계에서 벗어나서 여기가 아닌 또 다른 세계로의 이행을 의미하지 않는다. 초월이란 바로 실체론적 사유가 구성한 세계와, 자기중심적인 인식으로부터의 탈출이며, 깨달음이란 일종의 인식론적 전회라고 할 수 있다.35)
한편, 대승기신론에서 아뢰야식과 여래장의 불일불이(不一不異)는 보다 구체적인 설명으로 제시된다. 기신론에서 마음은 일체법(一切法)을 총괄하는 일심 (一心)이라는 개념으로 지목되며, 이 일심이 곧 중생심(衆生心)이라고 한다. 일심을 바라보는 관점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진여문(眞如門)이고 둘째는 생멸문(生滅 門)이다.36) 眞如(tathāta)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뜻으로, 진여의 측면에서 바라본 마음은 생멸하지 않으며 ‘본래적정’(本來寂靜)한 것이어서, 언어나 개념으로 인식하는 사유에 의해서는 파악되지 않는다. 그런데 마음은 무명(無明)에 의해 동요를 일으켜서 생멸하는 모습으로 전개되고, 생멸하는 마음의 본성에 대해 깨달으면 다시 마음의 원천으로 돌아온다. 이와 같이 마음을 가역적인 구조로 바라본 것이 생멸문이다.37)
심생멸(心生滅)이란 여래장(如來藏)에 의해서 생멸하는 마음이 있게 되는 것이다. 불생불멸(不生不滅)과 더불어 생멸이 화합하여 같지도 않고[非一] 다르지도 않은[非異] 것을 일컬어, 아리야식(阿梨耶識)이라 한다38)
위의 인용문과 같이, 앞에서 살펴 본 능가경의 ‘아뢰야식=여래장’ 구도는 생멸문 안에서 나타난다. 미혹과 깨달음의 구별을 생멸문에 배속시킨 이유는 이 두 가지가 분별적 의식의 논의이며 서로 상대적인 개념일 뿐,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일심이 아뢰야식이나 여래장보다 더 포괄적인 상위의 개념으로서 제시되지만, 진여문과 생멸문이 일심 안의 분리된 두 부분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진여문과 생멸문의 이문(二門)은 각각이 일체 법을 포괄하는 마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기신론의 일심ㆍ이문 구조는 능가경의 수증론을 바탕으로 하되, 보다 중요한 논의를 더하고 있다. 능가경과 기신론에서는 일체가 마음의 소산이라는 점을 꿈에 비유하여 일상적 인식을 꿈속에 빠진 것으로, 그 사실을 자각하는 깨달음은 꿈으로부터 깨어나는 것과 같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문제는 꿈을 꾸고 있는 범부로서는 그것이 꿈인지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꿈인지 모르기 때문에 깨어날 생각을 내지 못한다는 데 있다. ‘대승의 믿음을 일으킨다’는 논(論)의 제목이 함축하고 있는 문제의식은 바로 ‘어떻게 중생이 꿈으로부터 깨어나려는 생 각을 낼 것인가’라고 할 수 있다. 원효의 해석을 참조하면 아래와 같다.
스스로 두구대사(杜口大士)와 목격장부(目擊丈夫)가 아닌데, 누가 능히 말이 떠난 곳에서 대승을 논하고, 생각이 끊어진 곳에서 깊은 믿음을 일으킬 것인가. 그런 이유로 마명보살이 무연대비로서, 저 허망한 무명의 바람이 이지러져서 마음의 바다가 요동치고 본각(本覺)의 진성(眞性)이 긴 꿈에 들어 깨지 못하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 동체지력(同體智力)으로 이 논을 지은 것 이다.39)
따라서 진여문과 진여문에 근거한 본각(本覺)은 이러한 요청에 대한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진여문이란 생멸하는 마음이 돌아가야 하는 근원으로서 원래 그 자리에 있는 것, 깨달음을 희구하는 마음의 원동력이다. 진여문은 분별적 의식이 일어나기 이전의 측면이기 때문에 기신론에서는 원래 ‘말할 수 없는 것[離言眞如]’이라고 먼저 명시한 다음, ‘수순하여 깨닫는’ 길을 알려 주기 위해 부득이하게 ‘말로써 표현되어야[依言眞如]’하는 것이라고 다시 설명한다.40) 진여는 여실 공(如實空)과 여실불공(如實不空) 두 가지로 표현되는데, 이는 각각 부정적 논법과 긍정적 논법으로 진여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간략히 요약하면, 여실공은 진여의 본성이 ‘공’이라는 것을 뜻하고, 여실불공이란 비록 ‘공’이지만 무한한 공능(功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여실불공으로서 진여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공능이 바로 본각이다. 본각은 말 뜻 그대로 본래 갖추어진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본각은 진여가 인간 속에 내재한 것을 가리키는 의미인데, 여기에도 양면이 있어서 진여문 내의 물들지 않는 ‘청정한 자성으로서의 각성’[性情本覺]과, 생멸문 내에서의 ‘무명에 따라 물듦이 있는 각성’[隨染本覺]이 있다.41) 무명에 따라 물든 마음은 스스로 본래 청정한 자성이라는 것을 모르게 되는데, 이것을 불각(不覺)이라고 부른다.
‘불각(不覺)’이라고 하는 것은 진여의 법이 하나라는 것을 여실하게 알지 못함을 말한다. 불각의 마음이 일어나서 생각의 일어남이 있지만, 생각은 자상(自相)이 없으므로 본각과 떨어지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길을 잃는 사람이 방향에 의지해서 길을 잃었다고 하는 것과 같다. 만약 ‘방향’이라는 생각을 끊으면 곧 ‘길을 잃음’도 없다. 중생도 또한 이와 같다. 깨달음에 의지해서 미혹함이 있게 되니, 만약 각성(覺性)을 떠나면 곧 불각도 없을 것이다.42)
기신론에서 보는 불각이란 각(覺)과 불각이라는 상대적 관념을 설정하고,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고 하는 생각 자체를 말한다. 이 사실을 직시하여 지혜를 드러내고, 본각에 부합하게 되어 열리는 깨달음을 시각(始覺)이라고 한다. 시각에는 범부각(凡夫覺)ㆍ상사각(相似覺)ㆍ수분각(隨分覺)ㆍ구경각(究竟覺)이라는 네 가지 형태가 있다.43) 네 가지 각(覺)은 각각 멸상(滅相)ㆍ이상(異相)ㆍ주상(住相)ㆍ생상(生相=初相)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중 구경각은 ‘마음의 본원을 깨달은 것’으로 정의되며, 무념(無念)이 실현된 부처의 지혜와 같고, 곧 본각과 완전히 일치하는 깨달음이다.
기신론 에서 말하는 본각, 불각, 시각의 관계는, ‘본각→불각→시각=본각’으로 도식화 해볼 수 있다. 여기에는 수행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마음을 작위적으로 차단하거나 억압하지 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44) 앞의 인용문에서와 같이 깨달음과 미혹은 상대적 관념에 지나지 않고, 마음의 두 측면이기 때문에 부처와 범부 사이에는 사실 아무런 간극이 없다. 그래서 참된 깨달음은 ‘부처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문득 ‘내가 이미 부처이다’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기신론의 저자가 말하는 ‘믿음’이란 이러한 자기 확신이고, 수행은 곧 믿음으로부터 출발하여, 마침내 물러나지 않는[不退轉] 믿음을 성취하는 것이다.45)
믿음은 기신론에서 제일의 수행원리를 담당하고 있다.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에서는 사신(四信)과 오행(五行)을 수행의 방법으로 제시하는데, 사신이란 진여인 일심에 대한 믿음과 불법승 삼보를 더한 것이다. 이 중에서 진여인 일심에 대한 믿음은 제일 먼저 소개되며 삼보에 대한 믿음보다 우선한다. 오행은 육바라밀(六波羅蜜), 즉 보시(布施)ㆍ지계(持戒)ㆍ인욕(忍辱)ㆍ정진(精進)ㆍ선정(禪 定)ㆍ지혜(知慧)의 내용과 동일한데, 여기서 선정[定]과 지혜[般若, 慧]를 ‘지관문’(止觀門)으로 합쳐서 다섯 가지를 만든 것이다.46) 일심에 대한 믿음과 지관의 합치는 기신론의 수행이론이 가지는 독특한 특징이며, 기신론의 수행은 자기 확신[信]을 바탕으로 하는 정혜(定慧)의 불이(不二)라는 관념을 제시하고 있다고 요약할 수 있다.
능가경과 기신론은 미혹과 깨달음이 마음의 양면적인 모습일 뿐, 각각에 대해서는 비실체적인 것이기 때문에 깨달음의 문제를 본래 청정한 자기인식의 문제로 전환시켰다. 미혹과 깨달음 사이의 간극이 사라지므로 이러한 심성론을 바탕으로 한 수증론은 철저한 내성을 요구하면서도 깨달음이 이미 완성되어 있다는 점을 역설한다. 능가경에서는 ‘자각성지’와 ‘단박의 깨달음[頓]’이라는 용어로 표현되었고, 기신론에서는 ‘본각=시각’과 ‘믿음’에 대한 내용으로 표현되 었다. 이러한 특징이 바로 능가경과 기신론이 선종에서 핵심적인 경(經)ㆍ론 (論)으로 자리매김하는 근간이라고 볼 수 있다.
2. 돈오(頓悟)와 믿음[信] ▲ 위로
속고승전 (續高僧傳)의 기록에 따르면, 선종(禪宗)의 초조(初祖)인 보리달마 (菩提達磨)는 2조 혜가(慧可)에게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guṇabhadra, 394-46 8)가 번역한 4권본 능가경 ( 楞伽阿跋多羅寶經 )을 전수하며 “내가 보건대, 중국 땅[漢地]에는 오직 이 경뿐이니, 어진 사람이 의지해서 닦으면 스스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47)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 는 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48) 마조도일(馬祖道一)이 달마의 사상을 능가 경 에 근거한 것으로 천명하고 있는 점에서49) 적어도 선종에서는 초조인 달마와 능가경 의 관계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선종이 능가경 의 사상을 결정적으로 수용했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능가경 에서 최상승선(最上乘禪)으로 지목되는 여래선(如來禪)이다. 능가경 에서는 여 러 가지 선을 우부소행선(愚夫所行禪)ㆍ관찰의선(觀察義禪)ㆍ반연여선(攀緣如禪) ㆍ여래선(如來禪, 如來淸淨禪) 네 가지 종류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 여래 선은 여래지(如來地)에 증입(證入)하는 선으로서 소승 및 외도의 선 뿐만 아니라 모든 대승 선 중에서도 최상승선이라는 지위를 갖는다. 선종에서는 이 선의 명칭 을 따라, 자성청정심에 근거한 돈오(頓悟)의 선수행(禪修行)을 여래선이라고 불렀 다. 남종선(南宗禪)의 개조(開祖)라고 불리는 6조 혜능(慧能, 638-713)의 여래선 이라는 명칭과 위계 구분 역시 능가경 을 따른 것이다.50) 규봉종밀(窺峰宗密, 780-841)의 선원제전집도서 (禪源諸詮集都序)에서도 여래선에 대한 이해는 똑같이 나타나 있다.
무엇을 여래선(如來禪)이라고 하는가? 여래지(如來地)에 들어가 자각성지 상(自覺聖智相)의 세 가지 즐거움[三種樂]에 머물고 중생의 불사의(不思義) 한 일을 이루는 것이니, 이를 여래선이라 한다.51)
만약 자심(自心)이 본래 청정하고, 원래 번뇌가 없으며, 무루지성(無漏智 性)이 스스로 갖추어져 있음을 단박에 깨닫는다면[頓悟], 이 마음이 곧 부 처와 다르지 않다. 이에 의지하여 닦는 것이 최상승선이다. 또한 이를 여래 청정선이라고도 하고, 또 일행삼매, 진여삼매라고도 한다.52)
여래선이 다른 대승선(大乘禪)과의 차별성을 확보하는 부분은 ‘본래 갖추어진 깨달음[本覺]’을 자각(自覺)하여 가장 완전한 깨달음인 불지(佛智)를 획득하는 선 (禪)으로 정의된다는 것이다. 여래선은 기존의 선정[定]에 비해 수행 주체의 자 각성과 능동적인 선수행을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혜능의 제자인 하택신회(荷澤神會, 684-754)는 여래선의 자각성을 부각시켜 달마를 능가경의 ‘체득자’로서 선양하고, 그 선리(禪理)를 선종 정통의 상징으로 표방했다. 달마에 대한 신회의 평가는 당시 선종에서 능가경 의 ‘전등자’로서 달마를 이해했던 것과는 다른 새로운 인식이었다.53) 신회는 혜능의 선법이 달마 로부터 이어지는 선맥의 정통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돈오’(頓悟)라는 개념을 남종 선과 북종선을 가르는 기준으로 등장시켰다. 북종의 선은 점차로[漸] 닦는 것이 기 때문에 불완전하며 수승하지 못한 선이고, 혜능의 선은 단박에[頓] 닦는 것으로서 완전한 선(禪)이라는 것이다.
신회의 노력으로 ‘돈오견성’(頓悟見性)은 남종선의 선법이자 정통 선법으로서 선종의 기치가 되었다. 그러나 북종은 점(漸)이고 남종은 돈(頓)이라는 신회의 구 분이 타당하다고만은 할 수는 없다. 오히려 북종에도 돈(頓)의 측면이 있어서, 수 증론에 관한 한 돈오는 선종 전체를 아우르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54) 더욱이 신회의 사후에는 북종계에서도 돈오를 표명하기까지에 이르러서,55) 돈오는 선불 교의 전체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개념으로 자리매김한다.
돈오는 본각(本覺)의 관점을 강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육조단경 에서 혜능은 자신의 사상에 대해서 “선지식이여, 나의 법문은 이전부터 무념(無念)을 종(宗)으로 삼고, 무상(無相)을 체(體)로 삼으며 무주(無住)를 본(本)으로 세운 것 이다”56)라고 하였다. 상(相)과 주(住)는 대상의 실체성과 불변성을 전제로 마음 이 일으키는 집착이다. 이렇게 집착을 일으키는 것은 마음의 순일하지 않은 모습 이지만, 그것 역시 마음이므로 제거해야 할 또 다른 대상이 아니다. 생각을 일으 키지 않는다는 것은 상(相)과 주(住)에 대한 집착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과 같 고, 혜능은 이를 ‘무념’이라고 부른 것이고, ‘무념’일 때 곧 본래 갖추어진 깨달음 이 드러나는 것이다.
법(法)에는 돈점(頓漸)이 없지만, 사람에는 이근(利根)과 둔근(鈍根)이 있 다. 미혹하면 점차로 합치한다고 하지만, 깨달은 사람에게는 단박에 닦음일 뿐이다. 자기 본래 마음을 아는 것이 곧 본성을 보는 것인데, 깨달으면 원래 차별이 없는 줄 알지만 깨닫지 못해 오래도록 윤회하는 것이다.57)
본래 자기에게 갖추어진 깨달음을 확인한다는 것을 혜능은 ‘돈’(頓)이라고 보았 다. 위의 인용문에서 혜능은 돈(頓)ㆍ점(漸)의 차이를 ‘단박’과 ‘점차’, ‘이근’과 ‘둔근’, ‘깨달음’과 ‘미혹’으로 대별하고 있다. 여기에서 돈(頓)은 ‘신속하게’와 같 은 시간적인 의미가 아니라, 점(漸)에 비해 ‘완전함’ 또는 ‘수승함’의 의미를 강조 하고 있다. 본각에 근거한 돈오의 관점에서 중생은 ‘이미 그대로 부처’이다. 그렇 기 때문에 수행의 과정에 어떠한 ‘매개’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매 개는 이미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방해가 된다. 직접적으로 자기 본성을 확인하는 것만이 ‘완전하다’는 것이며, 직접 체험 안에서 수행과 깨달음은 하나의 ‘동시적’ 사건이 된다.58)
수행과 깨달음의 동시성이 강조된다는 것은 심식설의 관점에서는 ‘본각’을 더 욱 부각시킨다는 의미이다. 혜능과 신회 이후 돈오가 선종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개념으로 입지를 굳히면서 본각의 중요성은 더욱 더 강렬한 표현으로 강조된다. 그것이 가장 극단적으로 표출된 경우가 마조도일과 임제의현(臨濟義玄, ?-867) 의 사상이다.59) 마조는 ‘평상심이 곧 도’[平常心是道]이고, ‘마음 그 자체가 부처’[卽心是佛]라고 하여, 현실적인 마음 전체가 바로 불성의 작용이라고 주장했다. 마조가 말하는 평상심은 곧 마음의 본각적 측면을 가리킨다. 일상 속에서 모 든 순간순간 이미 본각으로서의 마음이 나타나 있기 때문에, 평상심이 곧 부처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도는 수행이 필요하지 않으며’[道不用修], 마음 밖의 부처나 깨달음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아야 하고, 한시도 부처의 깨달음 따위를 구하지 않는 자유자재한 생활을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했다.60) 임제가 말하는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나 ‘살불살조’(殺佛殺祖)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읽 을 수 있다.
그런데 ‘평상심’이나 ‘수처작주 입처개진’ 등의 주장이 아무리 일상성을 극도로 긍정하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은 말 그대로의 일상적 관점과는 극단에 있는 본원 적 마음에서 바라 본 일상일 뿐이고 중생의 관점에서 보이는 세계를 초월한 영 역이다.
따라서 선불교의 수증론이 자신의 본각에 근거한 직접적이고ㆍ완전하며ㆍ쉬운 깨달음을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이게도 돈오는 ‘기연’(機緣)을 기다려야 하 는 요원한 것으로 간주된다. 깨달음이라는 사건은 어떠한 과정이나 매개를 거치 지 않는 불연속적인 경험이다. 이러한 경험은 예고되지 않은 채 어느 날 문득 찾 아오는 것이다.
돈오는 곧 무념을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작위적인 수행과정도 허용 하지 않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신론 에서 깨달음 을 문득 꿈에서 깨어나는 것으로 묘사하며 꿈으로부터 깨려는 마음을 낼 것을 촉구했듯이, 돈오의 수증론 속에서도 수행자에게 허용되는 것은 최초의 촉발, 즉 발심(發心)뿐이다.
돈오의 수증론에서 깨달음은 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이미 갖추어진 ‘본각’이 다. 따라서 발심은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의 마음을 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미 부처이다’는 사실에 대해 믿는 것[信]이 전부이며, 다른 외부의 어떤 대상이 아니라 수행주체가 자기 자신을 믿는 것[自信]이다. 물론 이러한 자신은 맹목적 자기 우월이 아니라, 체오(體悟)를 바탕으로 해야만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은 선불교를 관통하는 수행원리라고도 할 수 있다. 소 실육문 (少室六門)에 수록된 달마의 「이종입」(二種入)에서는 이입(理入)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불교의 근본적인 취지를 깨닫는 것’이라고 하고 그 깨달음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지목하여 ‘중생은 성인과 동일한 진성을 지니고 있음을 깊이 믿는 것 [深信]’이라고 했다. 심신(深信)의 신(信)과 이입의 깨달음[悟]은 표리관계라고 볼 수 있는데, 신은 자각(自覺)을 대상화시켜서 표현한 행위이다.61)
자심(自心)이 곧 불성(佛性)과 다르지 않다는 점은 혜능의 불성론(佛性論)에서 도 거듭하여 강조된다. 혜능은 상근(上根)의 사람은 자심이 불성이라는 것을 믿 어 의심이 없지만, 근기와 지혜가 적은 사람은 법을 들어도 믿지 못한다고 했다. 법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는 의미 이다. 상근기의 수행자와 하근기의 수행자는 본질적으로 모두 부처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자신(自信)하지 못하는 차이일 뿐이라는 것이다.62) 특히 임제는 수행자 가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것을 가장 큰 병통으로 지적했다.
요즘 학인이 얻는 바가 없는 병통이 어디에 있는가? 바로 자신을 믿지 못 하는 곳에 병통이 있다. 만약 스스로를 믿는 데 이르지 못하면 …… 자신으 로부터 비롯하지[自由] 못할 것이다. 만약 생각 생각마다 (밖에서) 구하려는 마음을 능히 그칠 수 있으면 바로 네가 조사나 부처와 다르지 않다.63)
달마와 혜능이 말하는 믿음은 분별적인 생각을 일으키지 않을 때[無念], 본각 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으로서, 믿음을 무념의 토대로 삼는 것이다. 믿음을 일 으킨다는 것은 곧 본각의 지혜로 증입하는 것이다. 달마와 혜능의 믿음이 ‘수행=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임제는 믿음을 수행자의 자발성 내지는 능동성의 토대로서 부각시켰다. 임제의 선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자재’(自在), 즉 수행자의 자발성이다. 임제는 자발성을 확보하는 출발점으로 ‘자신’(自信)을 지목했고, ‘자신’에서 ‘자유’를 거쳐야 비로소 ‘살아있는 조사의 뜻’[活祖意]을 얻게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수행자가 자신을 믿지 못함[不自信]는 것이 바로 만악의 근원이라고 하였다. 스스로 당당하지 못하니 남이 만들어 놓은 조사의 뜻을 재생 할 뿐 자발성을 갖추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64)
믿음을 수행주체의 자발성을 되살리는 원리로 세운 임제의 사상은 간화선을 주창한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에게 이어진다. 대혜는 당시 선불교가 수 행의 자발성을 잃은 문제상황에 처해있다고 보았고, 이를 되살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자발성에 기초한 수행에서 바른 믿음과 바른 의지는 공부의 출발점이자 관건이 된다. 대혜는 묘원도인(妙圓道人)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권하 고 있다.
여래의 경지를 알고자 하면 믿음[信]만 지니고 있으면 됩니다. 이미 믿음 을 지니고 있다면 일부러 마음을 일으켜 생사를 벗어나고자 하지 않아도 됩 니다. …(중략)… 이 일은 남녀, 귀천, 대인과 소인을 막론하고 평등일여(平 等一如)합니다. 세존은 법화회상에서 여성 한 명만을 성불시켰을 뿐이고, 열 반회상에서는 광액도아(廣額屠兒)만을 성불시켰을 뿐입니다.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이 두 사람의 성불에 특별한 공용은 없습니다. 단지 곧바로 믿게 하 였을 뿐, 제이념(第二念)은 없었습니다.65)
믿음은 정적인 개념으로 오해될 수 있는데, 고봉원묘(高峰原妙)는 믿음의 역동 성을 살리기 위해 간화선의 요체로 대신근(大信根), 대분지(大憤志), 대의정(大擬 情)을 제시했다. 역동적인 믿음은 긍정과 부정, 믿음과 회의와 같은 변증법적인 긴장을 내포하고 있다. 즉 ‘나는 이미 부처’라는 당위에 대한 믿음[大信根]과 ‘나 는 부처가 아니다’라는 현실적인 자기에 대한 정직한 고백[大擬情] 사이에서 갈 등과 긴장이 생겨나는 것이다. 대분심은 의문을 반드시 풀고 말겠다는 마음으로써, 믿음을 역동적으로 유지하는 동력이 된다.66)
위의 내용에서 믿음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수행 그 자체를 가 리키는 것으로서 무념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즉, 믿음의 내용은 본각 외 에 다른 것이 아니므로, 마음의 본래 상태[本覺]으로 돌아가기 위해 분별적인 생 각이나 깨달음을 구하겠다는 작위적인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이 올바른 믿음이라 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수행자의 능동적인 수행태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본각’ 또는 ‘돈오’가 모든 중생에게 주어지는 깨달음의 원칙이라면, 그 원칙을 현실적으 로 구현해내고, 완성시키는 마음이 믿음이다.
III. 원효사상의 선적(禪的) 특성 ▲ 위로
주지하다시피 원효사상은 일심(一心)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2장에 서 살펴본 것과 같이, 능가경 의 자각성지(自覺聖智)나 기신론 에서 일심이라 는 개념이 제시된 맥락은 깨달음이 자각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일 심은 보편적 원리로서도 지칭되지만, 구체적으로는 지금 여기에서 수행하는 수행 주체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원효는 기신론 에 대한 주석을 지으며 여러 차례 능가경 에 대한 주석서를 저술했을 만큼 기신론 과 능가경 을 동일한 맥락에서 파악했다. 즉 원효는 이 두 경(經)ㆍ론(論)의 중심주제라고 할 수 있는 자각적인 깨달음과, 그것을 제시하 는 마음[心]에 몰두했던 것이다. 이 점을 분명하게 밝히기 위해, 이 장에서는 원효가 말하는 일심을, 기존의 논의와 같이 보편적 원리로서가 아니라 실천수행 의 근거로서 수행주체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금강삼매경론 을 중심으 로 수증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일심의 실천수행적 성격 ▲ 위로
베르나르 포르(Bernard Faure)는 기존의 원효 연구에서 교학적 측면에만 치중 하고 원효의 삶과 사상을 연관시켜 탐구하지 않았던 점을 원효 연구의 문제로 지적한다. 포르의 말에 따르면, 비록 생애에 관한 기록이 후대에 저술된 것이라 고 하더라도 직접적인 저술에 비해 평가절하 될 이유는 없다. 결국 전기의 목적 이란 그 가르침, 또는 연구하는 인물의 깨달은 마음의 상태를 설명해주는 데 있 기 때문이다.67)
그러나 '사상'에 대한 지나치게 협소한 정의는 생애와 사상 사이에 간격이 생기게 하여 양면 사이에 모순을 낳게 된다. …… 傳奇的 자료들이 그의 순수한 교리적 논서들보다 불교 거장의 '사상'에 관해 더 많거나, 적어도 그 정도만큼은 우리들에게 알려 줄는지도 모른다. 원효의 경우에는 그의 학문 적인 업적과 奇人的인 성격간의 대조가 종종 주목을 끌었다. 학자들은 대개 후자의 측면을 간과하고 언급하였으며, 학문적인 면에 치중하는 데 만족하 였다. 그들은 원효에 대한 설화들을 조사하는 데 그들의 시간을 쏟는 것은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상가로서 원효의 명성은 주 로 불교도의 이상형이었던 그의 대중적인 인기에서 비롯되었고, 그의 양면 적인 모습, 즉 주석학자와 기인('bon vivant': 쾌활한 사람)적인 두 성격이 서로 나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두 측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그것들이 동일한 진리의 두 가지 표현인지, 아니면 그와 반 대로 모순된 것이며 원효의 '생애'와 '사상'에 있어서 긴장과 결점을 낳았는 지에 대해 분별하고자 시도해야만 한다.68)
의상과 함께 떠난 구법(求法)길에서 원효는 문득 기신론 의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멸하면 갖가지 현상 또한 멸한다’[心生則種種法 生 心滅則種種法滅]69)는 구절의 의미를 깨닫고 신라로 돌아와 저잣거리로 뛰어 들었다. 구법길에서의 오도(悟道)를 통해 ‘세간에 있어도 세간에 물들지 않을 것’ 이라는 확신을 얻은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세간에서의 원효의 행적은 파격적이 다. 언행이 사납고 거칠었으며, 거사와 함께 주막집을 출입하는 한 편, 산이나 강 가에서 좌선을 하는 등 법식에서 어긋나는 행동을 일삼았다. 그렇게 세간에서 어 울려 지내며 아미타불 칭명염불을 가르침으로써 대중들을 교화했다.70)
포르의 지적처럼, 후대의 기록자들은 이러한 풍모에 주의를 기울여 원효를 이 해했다고 할 수 있다. 종경록 (宗鏡錄)의 저자인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 는 원효를 ‘활연대오’(豁然大悟)한 인물로 평가했고, 연수의 관점을 계승한 송고 승전 (宋高僧傳)의 저자 찬녕(贊寧, 919-1002)은 원효를 배도(杯度)와 지공(誌 公)과 같은 부류의 산성(散聖)으로 평가했다.71) 배도와 지공은 선어록에서 사자 상승관계 밖에 있는 신이한 선승들로 빈번하게 거론되는 인물들인데, 원효를 이들과 마찬가지로 선문 밖에 있는 활연대오한 선승(禪僧)으로 인식한 것이다. 원효의 기행은 단순한 파계행이 아니라 대중교화를 위한 ‘방편’으로 이해되었다. 실제로도 원효의 기행은 다분히 의도적인 파계였다고 할 수 있는데, 소 에서 기록하고 있듯이 이타행이 대승불교의 본령(本領)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뒤집 어 말하면 이타를 위한 대비심(大悲心)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 수행자의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법을 의심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이 의심하는 것을 말한다. 대승의 법체는 하나인가? 여럿인가? 만약 하나라고 한다면 곧 다른 법이 없는 것이다. 다 른 법이 없다는 것은 모든 중생이 없다는 것이다. 보살은 누구를 위하여 넓 은 서원을 발할 것인가. 만약 법이 여럿이라면, 곧 일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체가 아니라고 한다면 물(物)ㆍ아(我)가 각기 다를 것이다. 그러면 어찌 동체대비(同體大悲)를 일으키게 되겠는가? 이러한 의혹 때문에 발심하지 못 하는 것이다.72)
원효는 대승불교에 대한 의심을 모두 이 두 가지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았다. 이 문제는 대승불교의 대표적 개념인 ‘공’(空)의 의미를 오해한 데서 생 겨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승불교의 공(空)사상에서는 현상적 유(有) 의 배후에 존재론적 본질 또는 형이상학적 실체를 상정하는 것을 ‘상견’(常見)이 라고 하고, 존재론적 본질이나 형이상학적 실체가 없다고 해서 현상적 유(有)조 차 없다고 부정하는 것을 ‘단견’(斷見)이라고 해서 이 두 가지를 모두 잘못된 주 장이라고 본다.73) 상견이나 단견은 세계를 실체적으로 보는 사유에서 비롯된 것 이다. 공(空)은 세계를 연기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으로서, 상견이나 단견으로부 터 벗어난 중도(中道)의 인식을 지향한다.
인용문의 물음 역시 공(空)을 ‘없다’는 의미로 해석해서 실체론적 사유와 결합 한 것에 불과하다. 공(空) 의미를 현상적 차별이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해석한 견해는 현상 너머에 단일한 실체가 있을 것이라고 오해하게 된다. 즉 개별자 전체가 사실은 하나의 실체라는 것이다. 반대로 단일한 형이상학적 실체가 없다는 의미로 공(空)을 해석하면서 단견의 허무주의를 피하고자 한다면 현상적으로 드 러나는 각각의 개별자들이 실체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 문제는 자리(自利, 內行)의 수행에서 보자면 마음의 염(染)ㆍ정(淨)의 관계 에 대한 것이며, 이타행(利他行, 外行)의 측면에서는 보살행이 가능한가의 문제가 된다. 다시 말하면, 수행의 측면에서 마음의 염ㆍ정 관계에 대한 문제는, 부처와 중생의 존재론적 차이를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 대승의 법체가 하나라면 중생과 부처는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수행의 필요성이 사라진다. 반대로 대승의 법체가 여럿이고 부처와 중생이 서로 다른 존재라고 한다면 이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간극이 벌어져서 수행의 가능성 또는 완결성을 확보할 수 없 게 된다.
한편 이타행의 측면에서는 보살이 어떻게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 가 제기된다. 보살은 중생을 향해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마음을 내고, 중생을 성 불로 이끄는 존재이다. 보살이 중생을 향해 대비의 마음을 낼 수 있는 것은 현상 적 차원에서는 보살과 중생의 구별이 있지만, 사실 그러한 차별적 의식은 허상에 불과하며, 본래 구별이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살과 중생, 자신 [自]과 타인[他]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면, 대비의 마음을 내는 것 자체가 불가 능하게 된다. 대비의 마음을 내는 주체와 대비의 대상이 하나의 동일한 실체라면 사실상 존재하는 것은 ‘나’ 뿐이므로 대비의 작용이 있을 수도 없고, 대비라고 할 수 조차 없다. 만일 실체가 하나 이상이라면 실체와 실체 사이는 단절된 것이기 때문에 대비의 마음을 내거나, 작용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렇게 되면 대승불교의 정체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보살이 설 자리는 사라지고 만다.
원효가 중생이 깨닫지 못하는 두 가지 의혹으로 지목한 이 문제는 원효 자신 의 경험이 투영된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의상과 함께 떠난 구법길에서 품고 있었던 의문은 이것이었고, 이 의문을 해소하여 스스로 ‘깨달았다’는 확신을 얻어 신라로 걸음을 돌렸던 것이다. 더불어 여기에는 원효가 대승불교의 요체를 무엇으로 보았는지에 대한 견해도 담겨있다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자각적인 깨달 음의 완성과 구체적인 현실에서 체현되는 보살행이 바로 그것이다.74)
주지하다시피, 대승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보살’사상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파불교에서 수행의 최종목표는 아라한이었으며, 아라한과 부처의 지혜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 간주되었다. 부처란 세계에 단 하나 밖에 있을 수 없는 존재 이고, 보살은 부처가 되기로 수기를 받은 자로서 부처가 되기까지 중생을 제도하 는 역할을 자처한 존재로, 누구나 될 수 있는 대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대승불교 에서는 중생 각각이 곧 보살, 즉 부처가 될 수 있는 자질을 이미 갖추었다고 주 장한다.75) 모든 중생의 성불 가능성을 인정함으로써, 대승불교에서는 무여의열반 (無餘依涅槃)이 아니라 세간 속에서 끊임없이 이타(利他)를 추구하는 무주처열반 (無主處涅槃)을 목표로 삼게 되고, 위에서 제시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과제 를 끌어안게 되었던 것이다.
이 두 가지 요소, 즉 수행, 곧 중생의 성불 가능성과 보살행은 원효의 저술 속 에서 끈질기게 반복되며 강조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본다면, 원효의 일 심이 대승불교내의 여러 가지 사상을 종합하거나 회통하려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일반적인 주장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원효의 일심은 분명하게 깨달음 과, 깨달음을 바탕으로 체현하는 보살의 삶이라는 실천의 문제를 겨냥한 것이다. 원효는 이 문제의 해답을 기신론 과 능가경 의 마음[心]에서 찾았다.
처음 중에 ‘일심법에 의하여 두 가지 문이 있다’고 한 것은, 경( 능가경 )에서 ‘적멸이란 일심이라고 하고, 일심이란 여래장이라고 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이 논(論)에서 말한 ‘심진여문’(心眞如門)은 저 경(經)의 ‘적멸이란 일 심이라고 한다’는 부분을 해석한 것이고, ‘심생멸문’(心生滅門)은 경(經)에서 ‘일심이란 여래장을 이름한다’고 한 것을 해석한 것이다. …… 이는 경(經) 에서 말하기를, “여래장이란 일체 선(善)과 불선(不善)의 원인으로서 일체의 취생(趣生:중생)을 두루 잘 일으켜 만든다. 비유하자면 기아(伎兒: 악사)가 여러 가지 취(趣)를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고 한 것과 같다.76)
위 인용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원효는 일심을 능가경 의 심식설로 해석하고 있다. 능가경 에서는 여래장이 염(染)ㆍ정(淨) 모두의 원인으로 작용하며, 기신 론 에서는 능가경 에서 제시된 ‘아뢰야식=여래장’의 구도를 생멸문 안에 배속시 켜서 염(染)ㆍ정(淨)의 문제가 곧 현상적 차원의 문제라는 것을 부각시킨다. 그리 고 이것은 모두 일심이라고 불리는 마음이 가진 양면적인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그 바탕이 되는 일심은 존재론적 근거로서 제시되는 실체가 아니라 단지 ‘적멸’ (寂滅)이라고 불린다.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적멸이 단멸(斷滅)적인 무(無)이기 때문이 아니라 생멸현상의 기저에 있는 진여의 비실체성을 뜻한다.
원효는 대승의 법체에 대한 두 가지 의심이 염ㆍ정을 각각 실체로 보는 오류 에 빠져 있다는 것을 통찰했다. 서로 상대적인 두 개념 중 하나를 비본래적인 것 으로 보면 나머지 하나는 결국 실체적인 것으로서 염ㆍ정의 존재론적 근거가 되 고 만다. 그렇게 되면 미혹에서 깨달음으로, 중생에서 부처로 가는 길은 차단된 다. 논리적으로 부처는 부처일 수밖에 없고, 중생은 중생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 다. 따라서 원효에게 ‘일심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공란으로 남겨두어야만 한 다. 사실은 일심이라는 이름조차 ‘이언절려’(離言絶慮)‘인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부른 것’[强號]에 불과한 것이다.77)
능가경 과 기신론 은 염(染)ㆍ정(淨), 즉 미혹과 깨달음, 진제(眞諦)와 속제(俗諦), 중생과 부처의 대립구도를 의식의 존재론적 차원에서 인식론적 차원으로 전환시키고자 했다. 각각을 실체로 인식하는 것은 존재론적 문제가 아니라 의식 이 가지고 있는 경향성이다. 일상적인 의식은 본성적으로 이들 각각을 실체로 간 주하려고 한다[別體之執]. 존재론적 차원에서 이 대립구도를 읽는다면 양자 사이 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간극이 생겨서 깨달음은 아예 불가능해지거나, 가능하다 고 하더라도 수행주체의 능력을 뛰어넘은 것이 되어서 외부에 있는 요소를 필요 로 하기 때문에, 수행과정에서의 자발성을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원효는 염(染)ㆍ정(淨) 사이의 가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도 실체 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 점에서 이들을 융합하여 의식의 문제로 전환시킨 능가경 과 기신론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것이고, 또 경(經)과 논(論)이 의도했던 바를 명확히 짚어낸 것이기도 했다. 원효는 기신론 의 진여문과 생멸 문을 수평적 구조로 설정하고, 현상에 대한 차별적 인식은 생멸문에 귀속시킨 뒤, 진여문과 생멸문의 관계가 불일불이(不一不異)임을 강조함으로써 진여문과 생멸문 사이의 긴장감을 유지시킨다. 진여문과 생멸문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 문 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현상적 차별이 실재한다거나, 현상 일체를 궁극적 실재의 화현(化現)으로 동일화 시켜버리게 된다.78)
진여문과 생멸문, 이문(二門)의 구도를 바탕으로 원효가 수행의 자발성을 강조 하는 부분은 일심의 성질을 ‘신해’(神解)라고 일컫는 대목이다.
어째서 일심이라고 하는가? 염(染)ㆍ정(淨)과 제법은 그 본성이 둘이 없고, 진(眞)ㆍ망(妄)의 두 문이 다름이 없기 때문에 ‘일’(一)이라 이름하고, 이 둘이 없는 곳이 제법중의 실(實)인지라, 허공과 같지 아니하여 본성이 스스 로 신해(神解)하기 때문에 ‘심’(心)이라고 이름한다.79)
신해란 진여문과 생멸문을 아우르는 일심의 성질이다. 염(染)ㆍ정(淨)의 문제를 인식론적 차원의 문제로 바꾸었지만, 그것을 알아차리는 능력만큼은 부여해야만 한다. 그 능력이 곧 신해이며, 원효의 신해 개념은 일심이 허무의 적멸(寂滅)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신해는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 가는 마음의 가역성을 확보하고, 수행주체의 자각에 의한 깨달음을 제시하는 장 치인 것이다. 이점은 본각(本覺)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별기 에서는 ‘만약 본각을 본래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사실상 범부란 없는 것이고, 새롭게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본각은 깨달음의 근거가 될 수 없다’80)는 물음이 제기되는데, 이에 대해 원효는 본각과 범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답한다. 단지 어두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밝게 비추는 점도 있다. 비 추는 성질이 있음으로써 미혹을 끊음도 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만약 잠 자고 있다가 뒤에 깨어나는 것을 각(覺)이라고 말한다면 시각(始覺)에는 각 (覺)이 있고, 본각 중에는 (覺이) 없다. 만약 본래 잠들지 않는 것을 각(覺) 이라고 한다면, 본각(本覺)은 각(覺)이고, 시각은 곧 각(覺)이 아니다. (번뇌 를)끊는다는 뜻도 이와 같다. 앞에 존재하던 것이 뒤에 없어지는 것을 단 (斷)이라고 한다면 시각에는 단(斷)이 있고, 본각에는 단(斷)이 없다. 본래 미혹함을 떠나 있는 것을 단(斷)이라고 한다면 본각은 단(斷)이고, 시각은 단(斷)이 아니다. 만약 이런 뜻에 의한다면 본래 끊은 것이기 때문에 범부란 없다. 아래의 글에서 ‘모든 중생이 본래부터 열반과 보리의 법에 들어가서 상주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러나 비록 본각이 있어서 본래 범부란 없다고 말하지만, 아직 시각이 나타나지 않아서 범부란 존재하 는 것이다.81)
원효는 중생의 미혹을 자주 꿈에 비유했다. 대승육정참회 (大乘六情懺悔)에서는 이 비유로 미혹과 깨달음의 관계를 자세히 서술하기도 했는데, 특히 원효가 좋아하는 표현이 ‘일여의 침상에 누워 있다’82)는 것이다. 꿈의 비유는 중생의 미 혹을 표현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는 것이지만 경론 에서는 역으로 보살이 중생 을 제도하기 위해 입전수수(入廛垂手)하는 것을 두고 ‘일여의 침상에 눕는다’83) 고 표현하기도 한다.
꿈의 비유를 가지고 위의 인용문을 다시 해석해보자. 원효는 중생이 ‘이미 부 처’라는 점을 강조하지만 그만큼 꿈에서 깨지 않았을 때는 범부에 지나지 않는다 는 사실도 강조한다. 꿈을 꾸고 있는 나 자신[本覺]과 꿈속의 나[不覺]는 서로 다르지 않지만 잠에 빠져 있는 동안에 꿈속의 나는 꿈을 꾸고 있는 나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꿈을 꾸는 ‘나’ 자체가 없는 것도 아니고, 꿈은 어디 까지나 꿈일 뿐이다. 이 상황이 깨뜨려져서 꿈에서 깨었을 때, 꿈에서 깨어난 나 [始覺]는 비로소 ‘꿈을 꾸는 나’, ‘꿈속의 나’, ‘꿈에서 깨어난 나’ 셋이 다르지 않 음을 알게 된다[本覺=不覺=始覺].
이 세 가지 모습은 부정할 수 없는 중생의 현실이며 상호 의존적으로 성립한 다. 그리고 이 셋을 매개하는 것이 바로 깨어난다는 사건, 혹은 꿈으로부터 깨어 나는 자각이다. 여기에서는 각조(覺照)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사건은 본래 ‘꿈 을 꾸는 나’를 정점으로 한다. 그래서 ‘각조’가 시각이 아니라 본각에 속한다고 한 것이고, 본각은 어둡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밝게 비추는 점도 있다고 한 것이 다. 앞서 말한 일심의 신해성도 이것이다.
신해 혹은 본각의 각조는 수행주체의 자발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자발성 은 단지 자리의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보살행에 있어서도 중요한 요소이다. 무명 이라는 긴 꿈을 뒤흔들고, 자리의 수행이 이타의 보살행으로 전환되는 일들은 어 떠한 조건이나 원인에 의해 촉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신해는 원효사상의 적극적이고 실천적 측면을 드러내는 중요한 개념이자 출발점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2. 원효의 수증론(修證論) ▲ 위로
여기에서는 원효의 수증론(修證論)을 세 단계로 나누어 보고자 한다. 첫째는 수행의 출발로서 발심에 관한 부분을, 둘째는 수행체계의 구성을, 셋째는 수행의 완성인 깨달음의 검증을 살펴보기로 한다.
원효사상에서 깨달음이란 일심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歸一心源]을 의미한 다. 일심의 근원으로 회귀하는 것은 수행을 통해 중생의 마음에 원래부터 갖추어 진 깨달음[本覺]에 부합하는 것이다. 원효는 능가경 과 기신론 의 심식설에 따 라 번뇌나 깨달음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생각[別體之執]이 본래 갖추어진 깨달음 을 가리고 있을 뿐이라고 보았다. 이미 앞에서 언급했던 내용이지만, 이러한 심 식설을 바탕으로 하는 수증론에서 깨달음은 이미 내부에서 완결되어 있어서 지 극히 가까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연에 기대야 하는 어려움을 안고 있다.
그래서 기신론 에서는 믿음을 수행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선택했고, 선종에서 도 믿음은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으로 간주했다. 원효 역시 깨달음에 장 애가 되는 것이 대승의 법에 대한 ‘의심’이라고 생각했고, 의심을 제거하여 믿음 을 회복하는 것이 수행의 관건이자 깨달음이라고 보았다. 원효는 기신론 의 제 목을 풀이하며 믿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믿음을 일으킨다[起信]고 한 것은 이 논(論)의 글에 의해 중생의 믿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기신’(起信)이라고 한 것이다. ‘신(信)’은 결정코 그러하다 는 것을 이른다. 이치가 실제로 있음을 믿고, 닦아서 얻을 수 있음을 믿고, 닦아서 얻을 때에 무궁한 공덕이 있음을 믿는 것을 말한다. 이 중에서 ‘이치 가 실제로 있음을 믿는다’는 것은 체대(體大)를 믿는 것이니, 일체의 법을 얻을 수 없음을 믿고, 그럼으로써 곧 평등법계가 실제로 있음을 믿는 것이 다. ‘닦아서 얻을 수 있음을 믿는다’는 것은 상대(相大)를 믿는 것이다. 성공 덕(性功德)을 갖추고 중생을 훈습(熏習)함인데, 그럼으로써 곧 서로 훈습하 여 반드시 마음의 근원에 돌아가게 됨을 믿는 것이다. ‘무궁한 공덕의 작용 이 있음을 믿는다’는 것은 용대(用大)를 믿는 것이니, 하지 않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이 능히 이 세 가지를 믿는다면, 불법에 들어가서 모든 공덕을 내고, 모든 마경(魔境)에서 벗어나 무상도(無上道)에 이를 수 있다. 경(= 화엄경 )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믿음은 도의 으뜸이요 공덕의 어머니 라, 일체 모든 선근(善根)을 증장하고 일체 모든 의혹을 제멸해서, 무상도를 열어 보인다. 믿음은 여러 마경을 뛰어넘어 벗어나 무상해탈도(無常解脫道) 를 나타내어, 모든 공덕의 깨지지 않는 종자로 무상보리수를(無相菩提樹)를 낸다”라고 한 것과 같으니, 믿음은 이와 같은 한량없는 공덕이 있다. 이 논 에 의해 발심하게 되므로 ‘기신’이라고 하는 것이다.84)
기신론 은 믿음에서 출발해서 믿음을 완성시켜 가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믿음이 출발선이 된다는 것은 기존의 불교적 전통, 특히 유식 사상과 확연히 차 이를 보인다. 유식에서는 ‘이해하여 믿는다’[解信]고 한다. 이는 믿음이 수승한 이해를 원인으로 믿음이 증득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믿음을 출발로 하는 여래 장계열 사상에서는 부처와 중생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믿음으로부 터 이해[解]로 나아간다.85)
경 에서도 이와 같은 수순을 확인할 수 있다. 「진성공품」(眞性空品)에서는 천 제에서 여래에 이르는 사이를 신위(信位)ㆍ사위(思位)ㆍ수위(修位)ㆍ행위(行位)ㆍ 사위(捨位) 다섯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제일 처음 자리에 신위가 오는 것이 다. 신위는 “이 몸 가운데 있는 진여 종자가 허망한 것에 가려져 있지만, 망심을 떨쳐 버리면 청정한 마음이 깨끗해지고, 모든 경계가 의언 분별임을 아는 것이 다.”86)라고 한다.
비록 경 에서 신위를 오위 가운데 제일 앞에 두고 불퇴전(不退轉)의 계위는 아니라고 했지만, 믿음이 단지 출발선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믿음의 대상이 본래 갖추어진 깨달음이며, 믿는 즉시 그 사실을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믿음 은 단지 본각을 믿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믿음이 완전해지는 것은 단지 내 안의 불성을 확인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비라는 형태로 구현해 낼 때 완성된다. 위의 인용문에서 원효는 믿음의 공능을 무한한 것으로 보았다. 이 점에서 본다면 경 에서 믿음의 계위를 제한한 것도, 자리(自利)의 영역에 있 는 믿음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원효의 수행체계 구성 내용은 금강삼매경론 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경론 에서 원효는 이례적으로 경의 품차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는데, 여 기에는 특히 기신론 의 사상을 포함해서 원효사상의 체계와 목표가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다.87) 이 경의 정설분(定說分)은 다음 6품(六品)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상법품(無相法品)ㆍ무생행품(無生行品)ㆍ본각리품(本覺利品)ㆍ입실제품(入實際 品)ㆍ진성공품(眞性空品)ㆍ여래장품(如來藏品)이다. 원효는 이 품명이 각각 관행 의 여섯 가지 특징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고, 품명간의 관계를 설명함으로써 관행 에 대한 포괄적인 구도를 제시하고 있다.
먼저 육품 각각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이 제시된다. 무상법이란 모든 망상은 상(相)에 집착하여 분별하는 병 때문에 생긴 것이므로 모든 상(相)을 깨뜨린다는 의미이다. 무생행은 무상법을 관찰하여 모든 상을 없애버려도 관찰하는 마음이 남아 있어서 본각에 부합하지 못하므로 일어나는 마음을 없애는 것을 말한다. 이 두 가지를 통해 본각에 부합하면, 중생을 교화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본각의 이익 [本覺利]을 얻게 한다. 입실제란 중생을 이롭게 하여 중생이 곧 허상으로부터 실 제에 들어가게 됨을 말한다. 진성공은 무상법과 무생행의 내적 수행과, 본각의 이익으로 실제에 들어가게 하는 밖으로의 교화를 모두 갖추되 참된 자성으로부 터 나와서 진성의 공을 따른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진성에 의해 만행(萬行)이 갖추어져 여래장 일미(一味)의 근원에 들어감으로써 대승(大乘)을 두루 포섭할 수 있게 된다.88)
원효는 이 여섯 품을 다시 두 개씩 묶어 세 부분으로 나누는데, 처음의 「무상법품」과 「무생행품」은 ‘관행의 처음과 끝’이라고 해서 내행(內行)을 가리킨다. 가운데 두 품인 본각리품과 입실제품은 외행(外行)으로서 교화의 근본과 지말이라 고 하는데, 생멸문과 진여문을 각각 대응시키고 있다. 「진성공품」과 「여래장품」 은 앞의 두 행을 통해서 깨달음이 완성되는 경지를 설명한 것인데 「진성공품」은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여래장품」은 근본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89) 이 여섯 단계를 합쳐서 일미의 관행이라고 하고, ‘금강삼매’(金剛三昧)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금강삼매는 여러 종류의 삼매 중 최상승의 삼매로서, 오직 부처만 이 얻을 수 있는 삼매를 뜻한다.
품 간 구성에서 보이듯이 원효의 수행체계는 이타행을 수행의 영역으로 적극 적으로 끌어들이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원효는 소 에서 일심의 이문을 해석하 며 진여문에 지행(止行)을 배속시키고, 생멸문에 관행(觀行)을 배속시켰다.90) 진 여문과 생멸문은 일심의 양면과 같은 것이었는데, 이 관계에 지(止)ㆍ관(觀)을 상 응시켜서 정혜(定慧)의 겸수(兼修)를 말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경론 에서는 이타행을 나타내는 한 쌍의 두 품에 진여문과 생멸문을 연관시켰다.
이러한 관계에서 보자면 원효는 정(定)ㆍ혜(慧)와 대비(大悲)를 하나로 묶어 선 수행의 체계를 구성했다고 할 수 있다.91) 이 점은 다음 글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만약 대비를 떠나서 정혜만을 닦으면 이승의 지위에 떨어져 보살도를 장 애하고, 만약 자비만 일으키고 정혜를 닦지 않는다면 범부의 근심에 떨어지 는 것이지 보살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 일을 닦아서 두 경우를 멀리 벗어나 보살도를 닦아야 무상의 깨달음을 성취하게 된다. …… 만일 이 세 가지 일을 함께 행하지 않는다면 곧 생사에 머물거나 열반에 집착하게 되어 네 가지 지혜의 큰 바다에 흘러들어갈 수 없고, 곧 네 가지 마구니에게 휘 둘리게 된다.92)
정ㆍ혜ㆍ대비를 하나로 묶은 선수행이 지향하는 경지는 경론 에서 ‘무주’(無住)라는 용어로 나타난다. 「본각리품」에서 부처와 대화를 하는 인물의 이름이 무 주보살이다. 원효는 먼저 이 품에 대해 ‘보살이 관을 닦아 무생을 얻을 때, 중생 이 다만 본각일 뿐임을 통달하여, 본각의 이익으로 중생을 이롭게 한다’93)고 해 석하고, 무주보살이 바로 그러한 깨달음을 얻은 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무주’란 원효의 수행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경지이며 수행자의 태도를 가리킨 다. 대승불교의 열반은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을 가장 높은 열반으로 본다. 깨달 음을 얻었지만, 오히려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생사와 열반에 대한 집착을 완전 히 내려놓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생사와 열반에 대한 분별과 집착이 남아 있는 깨달음은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자리와 이타를 함께 갖춘 것이 대승불교의 지향점인 보살도의 정체성이고, 이 점에서 「본각리품」에서 등장하는 ‘무주’의 개 념을 긍정한 것이다.94)
이상과 같이 원효사상에서 가장 일관되고, 강력하게 표명되는 것은 ‘대비’의 중 요성이다. ‘대비’는 ‘이타’ 및 ‘보살’ 등의 개념과 더불어 강조된다. 이는 삼국 간 의 전쟁이 치열했던 원효의 시대를 생각해보면 현실적인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 문제의식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보다 사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원효가 수행자로서 추구해야 했던 목표 내지는 오도(悟道) 후에 가지게 된 책임의식으로 보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원효는 기신론에서 불보(佛寶)를 찬탄하면서 ‘부처의 경지에서 갖는 만 가지 덕 가운데 여래는 오직 대비만으로 힘을 삼기 때문에 그것만을 들어서 부처를 나타내었다’고 말하고, 증일아함경 에서 ‘아라한은 한결같은 정진으로 힘을 삼 아 스스로 말하며, 모든 부처와 세존은 대비로써 힘을 삼아 널리 중생을 이익되 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을 인용하여, 부처를 ‘대비한 사람’이라고 정의한 다.95) 즉, 원효는 깨달음의 완성을 대비의 완성으로 간주한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대비는 단순히 선량한 의지와는 다르다. 반드시 세계와 인간의 실상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아무리 선한 의도나 행위라고 하 더라도 집착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또 다른 고통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대비는 오직 부처만이 행할 수 있는 부처의 공능(功能)이다.
같은 맥락에서 방편(方便)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도 원효사상의 한 특 징이라고 할 수 있다. 방편의 이미지는 보살이라는 개념의 출현과 함께 평가절상 되었다. 보살의 정체성은 중생제도인데, 방편으로써 깨닫지 못한 중생을 구제하 기 때문이다.96) 일례로, 경론 에서는 다음과 같이 여래의 선교방편(善巧方便)을 찬탄하고 있다.
여래의 뛰어난 말솜씨는 무애자재하므로 하나의 게송을 설함으로도 모든 불법을 총섭할 수 있다. …… 둔근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의 게송을 외워 지니게 하여 항상 생각하고 사유하게 하면, 곧 일체의 불법을 두루 아는 데 이르니 이것을 여래의 선교방편이라고 한다.97)
이렇듯 원효의 사상 속에는 ‘방편’이 빈번하게 등장하며, 원효 그 자신도 불설 들 간의 차이를 방편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방편을 잘 구사하고, 상(相)에 주착됨 없이 온전한 자비를 구현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깨달음에 대한 검증 수 단이 될 수 있다. 이 점을 박재현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자비는 자신의 지혜가 정말 틀림없는 보리지인지, 혹여 자기도취의 일종 은 아닌지 검증하는 절차이다. 자비란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살 아내는 것이다. 진리를 살아낸다 함은 진리가 한낱 형이상학으로 추상화되 는 것을 막는 장치인 동시에, 모든 진리는 반드시 일상의 삶을 통해 증명될 수 있어야만 유효하다는 사무침의 표현이다. 제 몸으로 살아내지 못하는 진 리라면 그것은 가식이며 허울이다.
자비를 살아낸다는 것은 머릿속의 연기와 무아를 일상화해내는 것이며, 추상을 현실화함이고, 보편을 구체화함이며, 믿음을 검증하는 것으로 마침내 는 이 둘 사이의 경계조차 무너뜨리는 것이다. 믿음이 맹신(盲信)과 갈리는 지점이 여기이다. 불교의 믿음은 그 자체의 이론적 완벽성이나 신심(信心)의 정도로 가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철저히 살아낼 수 있는가에 달 려있다. 믿음은 믿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라 살아냄의 문제, 즉 존재론적 인 문제이다. …… 중생을 위하겠다는 바람이 없는 믿음은 단독자로 서 있 는 ‘나’만의 초월과 구원을 구가하겠다는 뜻이고, 결국 존재의 세계에서 그 누구도 단독자로 존재할 수 없다는 연기(緣起)의 이치에 역행하는 발상이다. 중생과 영원히 함께하겠노라는 서원, 자비심은 타자에 대한 일종의 존재론 적 감수성이다.98)
선불교에서 말하는 돈오는 결국 주관적인 체험이다. 그래서 깨달음이 보편적 진리에 부합한다는 것이며, 구체적인 현실과도 유리(遊離)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 명하기 위한 장치를 요구한다. 선불교에서 이러한 장치로서 배치해 둔 것 중 대 표적인 것이 스승을 통한 ‘인가’(印可)이다. 인가는 법통(法統)을 주장하기 위해 부각된 개념이기도 하지만, 일차적인 의의는 깨달음의 보편성을 증명하는 데 있다.
원효사상체계에서는 대비를 바탕으로 한 보살행이 곧 인가라고 할 수 있을 것 이다. 참된 선[眞禪]은 지혜와 선정의 일치뿐만 아니라 대비까지 갖추어야 한다. 그러면서 모든 행위에서 생각을 일으킴이 없고[無生], 주착하는 바가 없어야 한 다[無住]. 원효에게 깨달음의 경지란 이기심이라고는 조금도 들어있지 않은 순일 한 이타의 마음이며, 그러한 마음으로 삶을 살아낼 수 있으면 곧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는 ‘돈오’가 부딪히는 수증론의 문제에 대한 하나의 해결방법으로서도 중요 한 의의가 있다. 돈오는 모든 중생에게 본래 갖추어진 깨달음, 곧 본각에 근거하 는데, 본각에 무게중심이 치우쳐질 때 수행자의 방일(放逸)함을 부추길 위험이 있다. 그래서 선불교는 그러한 때마다 본각과 수행의 필요성이 공존하는 길을 모 색해왔다. 대표적인 예가 송대 묵조선이나 간화선이다. 묵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좌선을 하고 있을 때 깨달음이 전개된다’고 할 수 있고,99) 간화선의 경우에는 ‘대신심을 회복할 때 미혹이 타파되어 깨달음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원효의 입 장은 ‘모두는 본래 부처이다. 그러나 깨달음은 보살행을 할 때 전개된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묵조선이나 간화선이 자리의 측면에서 수행의 필요성을 회복시 키고 있다면, 원효는 이타의 측면에서 수행의 필요성을 회복시킨다는 점에서 차 별성이 있다.
IV. 선(禪)의 관점에서 본 원효의 대중교화 방편(方便) ▲ 위로
원효사상체계에서 수증(修證)이란, 시각(始覺)을 통해 본각(本覺)에 합치되고, 그것을 세간에서 이타행(利他行)을 실천함으로써 증명하는 것을 말한다. 원효는 이를 아미타불 칭명을 권하는 방법으로 구현했고, 세간에서 대중과 어울리며 파 계라고 불리는 여러 행위들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여기에는 아미타불의 칭명이라 는 단순한 수행도 곧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갈 수 있는[歸一心源] 수행이라는 이 론적 뒷받침과 파계의 행위도 사실은 계를 범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 거가 필요하다. 이 장에서는 원효가 대중교화를 하는 과정에서 보였던 두 가지 특징인 파계와 정토신앙의 적극적인 수용을 선(禪)의 관점에서 고찰하기로 한다.
1. 원효 정토사상의 선적(禪的) 특성 ▲ 위로
믿음[信]은 선 수행에서도 가장 밑바탕이 되는 조건이지만 불교 사상 내부에 서 가장 믿음이 두드러졌던 사상은 단연 정토사상(淨土思想)이다. 정토(淨土)란 청정한 국토라는 뜻으로 번뇌와 고통으로 가득찬 중생의 세계인 예토(穢土)에 상 대되는 이상향의 세계이다. 이러한 이상향의 세계는 불교의 우주관이 확대되면서 수많은 다른 세계와 각각의 세계에 부처가 있다는 생각에서 탄생했다. 동방의 아 촉불(阿閦佛), 남방의 보상불(寶相佛), 서방의 아미타불(阿彌陀佛), 북방의 미묘음 불(微妙音佛)이 대표적인 타방세계의 부처이다. 미래세의 부처로 거명된 미륵불 의 도솔천도 정토의 하나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세계는 자신의 힘으로는 갈 수 없고, 각각의 부처에 의해 인도되어야 하는 세계이다. 미래세인 미륵불의 경우 직접 하강해서 미래사회를 정토로 구현하거나, 그 전에 그 곳에 올라 태어날 수 도 있다. 정토사상의 경우에는 아미타불에 대한 칭명염불(稱名念佛)로써 극락왕 생을 추구한다.100)
그런데 선(禪)과 정토사상의 믿음은 일반적으로 자력수행(自力修行)과 타력신앙(他力信仰)이라는 말로써 대립적으로 이해된다. 선(禪)의 믿음은 중생에게 갖추 어진 본래 청정한 자성, 또는 본각(本覺)을 향한 믿음을 추구한다. 그 외에 마음 밖에 있는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은 번뇌에 더더욱 사로잡히는 것으로서 미혹을 더할 뿐 깨달음의 길이 될 수 없다. 반대로 정토사상에서는 중생인 나와는 철저 하게 다른 아미타불을 믿음으로써 부처의 자비에 의한 구원을 추구한다.
그런데 정토사상은 근본적으로 부처에게 의지할 것을 추구하지만, 선불교에 흡 수되면서 자력수행의 정토사상으로 재구성되기도 한다.101) 이러한 정토사상은 유심정토(唯心淨土), 자성미타(自性彌陀)라고 불린다. 특히 한국 불교에서는 독립 적인 정토학파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선불교가 주류를 이루면서 유심정토 사상 이 주로 나타나게 되는데, 원효의 정토사상이 그 시초로 꼽힌다.102)
이미 선행연구에서 지적되었듯이 원효 정토사상은 자력수행과 타력신앙 두 가지 성격을 모두 갖추고 있어서, 어느 한 편으로 해석하기 어렵다. 여기에서는 원효 정토사상이 가지고 있는 자력수행적 특성과 타력신앙적 특성을 각각 살펴 보고, 대립적인 두 가지 특성이 어떻게 조화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원효 정토사상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자력수행적 특성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정토를 실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유심정토로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중생의 심성(心性)은 융통무애(融通無碍)하여 크기는 허공과 같고 깊이는 큰 바다와 같다. 허공과 같으므로 그 체(體)가 평등하고 차별된 모양을 얻을 수 없으니, 어찌 깨끗하고 더러운 곳이 있으며, 거대한 바다와 같으므로 그 성품이 윤활하여 능히 인연을 따라 어기지 않으니 어찌 움직이고 고요한 때 가 없겠는가. …… 움직임과 고요함이 다 큰 꿈과 같다면, 꿈을 깨서 이를 말하면 차안(此岸)도 없고 피안(彼岸)도 없어서 예토(穢土)와 정토(淨土)가 본래 일심이고 생사와 열반이 마침내 두 경계가 없다.103)
위의 인용문은 무량수경종요 (無量壽經宗要)의 서문이다. 원효는 특유의 일심사상으로 정토사상을 수렴하고 있다. 중생의 심성이 융통무애 하다는 것은 본 래 중생의 마음이 가지고 있는 청정함, 즉 본각을 가리키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본각은 진여문에 근거하는 것이다. 진여문 내에서는 분별지(分別智)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정토와 예토 같은 대립적 관념이 성립할 수 없다. 정토와 예토가 구분되고, 피안과 차안이 있으며, 열반이란 아미타불에 의해 예토에서 정 토로 건너가는 것이라는 생각은 깨닫지 못한 마음의 분별일 뿐이다. 따라서 정토 와 예토의 대립적 분별은 생멸문 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으며, 깨달음과 미혹 의 분별과도 상응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원효에게 있어서 ‘정토에 왕생한다’는 것은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간다’[歸一心 源]는 것, 즉 깨달음과 동일한 의미이다. 2장에서 살펴 본 것과 같이 본각사상을 발전시킨 수증론의 체계 안에서는 다른 수행방법보다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 가 장 중요하다. 정토사상을 선과 마찬가지인 자력수행으로 흡수하는 키워드는 ‘믿 음’이다. 불교에서의 말하는 두 가지 믿음인 신해(信解)와 앙신(仰信)은 서로 다 른 두 차원으로 설명되어 왔던 것이다.104) 그러나 중생의 본각에 대한 믿음이든, 아미타불에 대한 믿음이든, 원효사상에서는 결국 일심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에 이 두 가지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니다.105)
무량수경종요 에서는 믿음을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는 말로 제시하고 있다. 왕생에 이르는 데는 정인(正因)과 조인(助因)이 있는데 발보리심은 왕생의 정인 (正因)이다.106) 발보리심에 대한 설명은 원효가 왕생이 곧 깨달음이라고 보았다 는 점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107)
무량수경종요 에서 말하는 발보리심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수사발심(隨事發心)이고 다른 하나는 순리발심(順理發心)이다. 두 발심의 차이는 믿음이 퇴전(退轉)할 수 있는 믿음인지, 퇴전하지 않는 믿음인지의 여부이다 수사발심은 퇴전할 수 있는 믿음으로서 부정성인(否定性人)이 일으키는 마음이고, 순리발심 은 보살종성(菩薩種性)의 믿음이다.108)
‘이치를 따라 발심한다’고 하는 것은 제법이 모두 환몽과 같음을 신해(信 解)하는 것이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니, 말을 끊고 생각을 끊 은 것이고, 여기에 의지해 신해하니 광대한 마음을 내는 것이다. 비록 번뇌 와 선법이 있다는 견해를 내지 않지만, 끊고 닦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 러므로 비록 다 끊고 다 닦기를 원하지만 무원삼매(無願三昧)를 어기지 않 는다. 비록 무량한 유정(有情)들을 모두 제도하기를 바라지만 제도 함[能度] 과 제도 됨[所度]이 존재하지 않으니 능히 공무상(空無相)을 수순(隨順)한 다.109)
순리발심이란 공(空)과 무상(無相)함에 대해 통찰하여 진여(眞如)로 회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수사발심이 “번뇌가 무수하지만 모두 끊기를 원하고, 선법 이 무량하지만 모두 닦기를 원하고, 중생이 무변(無邊)하지만 남김없이 제도하기 를 원하니 이 세 가지를 결정코 기약하고 바라는 것이다.”110)라고 하여 자리와 이타의 발보리심을 전형적으로 표명하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 수사발심은 생멸문 의 측면에서 자리와 이타의 수행을 바라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비해 순 리발심은 제법은 모두 비실체적이라는 통찰에 다름 아니며, 이것은 곧 무념(無 念)과 무주(無住)를 말하는 것과 같다. 순리발심을 통한 왕생은 본각적이며, 돈적 (頓的)인 왕생인 것이다.
원효 정토사상의 자력수행적 성격은 무량수경종요 의 말미에서 다시 한 번 강조된다. 원효는 네 가지 의혹을 가진 중생[四疑衆生]이 가지는 네 가지 지혜에 대한 의심을 설명하고, 이 지혜에 대한 의심을 해결하지 못하면 정토에 태어나더 라도 변지(邊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혜의 경계를 미처 알지 못하더라도 겸 손히 여래를 생각해서 믿을 줄 알면 변지에 있지 않게 된다고 한다.111)
의심의 대상이 되는 네 가지 지혜는 불사의지(不思議智)ㆍ불가칭지(不可稱智) ㆍ대승광지(大乘廣智)ㆍ무등무륜최상승지(無等無倫最上乘智)인데, 원효는 네 가지 지혜를 각각 성소작지(成所作智)ㆍ묘관찰지(妙觀察智)ㆍ평등성지(平等性智)ㆍ대원 경지(大圓鏡智)에 연결시킨다. 이 중에서 주목할 것은 마지막의 대원경지다.
대원경지의 의심은 깨달음에 관해 단박[頓]에 이루어지는 것인지 점차[漸]로 완성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심이다. 대원경지의 빛이 골고루 비춘다면 모든 중생 이 평등하게 단박에 깨달아 있을 것이고, 점차로 깨닫는다고 한다면 끝이 없는 지혜가 아니게 된다는 의문이다.112) 원효는 여기에 “비유하자면 세계가 끝이 없 지만 허공의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고, 경계가 무한하지만 일심의 안에 다 들 어가는 것이니 불지(佛智)는 상(相)이 없고,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지 혜와 일심은 합수하여 둘이 없다”113)고 해서 가장 높은 지혜와 믿음을 일심으로 다시 회귀시킨다. 원효는 대원경지를 가장 마지막에 배치함으로써 아미타불에 대 한 앙신의 근거가 일심이며 곧 중생심인 수행자의 마음에 있다고 강조한 것이다. 이상과 같이 원효의 정토사상은 유심정토로서, 선과 마찬가지로 수행자의 자력 수행을 강조하는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원효의 정토사상에는 타력신앙적 요소도 있는데, 본원(本願)에 대한 관념이 그것이다. 무량수경종요 에는 다음과 같이 정토와 왕생에 대해 중생이 끼어들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 대목도 있다.
위에서 말한 네 가지 정토의 설은 모두 여래의 원행(願行)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저 곳에 태어나는 자의 자력으로 갖추어진 것이 아니며, 예토 등의 기세계가 오직 중생의 공업으로 이루어진 것과 같지 않다.114)
무릇 왕생인(往生因)에 대해 여러 설(說)이 있지만, 능히 정보장엄(正報 莊嚴)을 감득(感得)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그 의보정토(依報淨土)를 감득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다. 단지 여래의 본원력으로 인하여 수감수용 (隨感受用)되는 것이다. 결코 자업인력(自業因力)으로 판별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왕생인은 없다고 설한다.115)
본원이란 보살행의 목적이 되는 서원으로서, 정토신앙에서는 ‘아미타불의 본원’ 이 정토왕생을 가능하게 한다. ‘아미타불의 이름을 염(念)하는 염불(念佛)의 힘으 로 모든 중생을 남김없이 깨달음에 들게 하겠다’는 본원이 성취되었기에 정토신 앙과 정토왕생이 가능하게 되는 논리가 전개되는 것이다.116)
석효란(釋曉鸞) 등의 선행연구자들은 이러한 대목에 주목해서 원효 정토사상을 아미타의 본원력에 의한 왕생을 추구한 것이고 자력이 아니라 타력이라고 주장 한다. 특히 석효란은 신란(親鸞)의 절대 타력인 본원관과 원효의 본원관이 동일 하다고 지적하고, 원효의 정토사상이 ‘본원염불사상’(本願念佛思想)이라고 주장했 다. 그는 원효 정토사상의 특징이 정토왕생은 곧 아미타의 본원력에 의해 왕생하 는 것이지 자력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117)
석효란의 이러한 견해는 원효 정토사상에 어긋나는 독해가 아니다. 원효는 여 래의 본원능력을 강조하였고, 그가 여래의 본원 능력을 강조하는 것은 누구나 왕 생이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앉은뱅이가 자력으로 부지런히 간다면 지름길로 많은 날에 걸쳐 가도 1 유순에 이를 수 있을 것이지만, 만약 다른 사람이 배에 태워서 바람이 돛을 미는 힘으로써 간다면 하루 사이에도 능히 천리를 갈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런데도 “앉은뱅이의 몸으로 어찌 하루에 천리를 가는가?”라고 말할 수 있 는가? 세간의 뱃사공의 몸으로도 이와 같이 생각을 끊은 일을 짓는데 하물 며 여래법왕의 힘으로 능히 불사의한 일을 짓지 못하겠는가?118)
위 인용문에서 드러나듯이 어떠한 중생도 가리지 않고 여래의 본원력에 의해 성불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는 게 정토사상의 일차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원효가 정토사상을 대중교화의 방편으로 선택한 이유도 그것이었다. 중고기(中古 期) 신라에서 유행했던 또 다른 타방불 신앙은 지배층을 중심으로 성행한 미륵하 생신앙(彌勒下生信仰)이었다. 원효는 주로 미천한 신분의 사람들과 부대끼며 그 들을 교화하기 위한 새로운 타방불 신앙을 고민했고, 기신론 의 영향으로 정토 사상을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원효가 일반민들에게 제시한 정토왕생의 요건은 오직 ‘귀로 경명을 듣고 입으로 불호를 외우는’ 단순한 수행법이었다.119) 이런 단순한 수행방법을 긍정하기 위해서 부처의 본원력을 극단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유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원효 정토사상의 의미를 축소시켜서 이해할 위험이 있다. 물론 기신론 에서 제시하는 염불 수행도, 근기가 낮아서 수승한 믿음을 단번에 내지 못하는 중생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된다.120) 그렇지 만 이 말을 액면 그대로 수용할 경우 정토사상을 근기가 낮은 중생에게 제시하 는 ‘불완전한 방편’으로 오해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자력수행으로서의 정토사상 과 타력신앙으로서의 정토사상은 전자가 더 근본적이고, 후자에 비해 우월한 것 이 되고 만다. 또 부처의 무한한 본원력 역시 삼승(三乘)의 방편으로 전락하고 만다.
원효에게 일승의 수행주체는 삼승행인(三乘行人)과 사종성문(四種聲聞)을 비롯하여 삼계의 모든 사생중생(四生衆生)을 포함된다. 이들이 모두 다 보살이며, 장차 부처의 지위에 오를 이들이다.121) 그러므로 근기에 따른 수행 방법의 차별이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타력으로서의 본원력을 강조 하는 데에는 일체중생의 성불을 긍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부처의 공능 그 자체를 긍정하기 위한 의미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것은, 원효사상에서 ‘타력’의 주체로 지목하는 불보살은 온 전하고 수승한 이타행을 이루기 위해 지혜를 갖춘 인격을 강조한 것일 뿐, 신과 같은 절대자나 특별한 계층의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본질적으로 모든 중생은 곧 부처이고, 모든 부처는 범부와 다르지 않다. 원효는 평등성지를 설명하는 부 분에서 이 점을 밝히고 있다.
허공이 무변하므로 중생이 무량무수하다. 삼세에 경계가 없고 생사는 시 작이 없다. 중생이 이미 시작과 끝이 없으며, 제불 또한 시작과 끝이 없으 니, 만약 제불이 시작이 있다면 그 전에는 부처가 없을 것이다. …… 비록 실제로 시작은 없으나 한 부처님도 본래 범부가 아니었음이 없고, 비록 모 두 본래 범부였으나 전전(展轉)하여 시작이 없으니 이로써 중생이 끝이 없 음을 미루어 안다. 비록 실제로 끝이 없으나 최후에 남김없이 부처가 되며, 전전하여 끝이 없다.122)
부처와 중생이 서로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아미타불의 본원력은 절대적 존재 로부터 중생에게 일방적으로 흐르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이는 부처와 중생의 관계는 화엄사상에서 말하는 법계(法界)와 의미가 통한다 고 할 수 있다. 화엄의 법계란 현상과 본질, 개체와 전체, 개체와 개체들이 자유 롭게 서로 소통되고 상호 전환되는 원융무애한 관계성의 세계를 의미한다. 선종 에서도 이러한 법계관을 중요하게 수용하는데, 진리의 세계라는 추상적 개념으로 서가 아니라 모든 존재가 상호 관계성의 질서 속에 있는 세계라는 의미에서 이 다.123) 원효가 구상했던 정토 역시 아미타불과 중생이 자ㆍ타의 분별없이 상호관계성의 질서 속에 놓여 있는 세계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소 의 서문에서 원효가 드러냈던 대승불교의 중심 문제인 ‘어떻게 보 살의 동체대비가 가능한가’와 직결된다.124) 원효는 불보살(佛菩薩)의 공능을 관 념적이거나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구현될 수 있는 실제적인 것으로 이 해하고자 했고, 또 확고한 위상을 부여하고자 했다. 그래서 원효는 참된 선[眞 禪] 의 조건으로 정혜의 쌍수에 보살의 자비를 더한 것이다. 그만큼 원효사상에 서 보살행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다.
또, 원효가 일심의 삼대(三大)중 용대(用大)에 대한 믿음을 ‘무궁한 공덕의 작 용이 있음을 믿는 것’이라고 보았던 점에 주목한다면,125) 본원력 역시도 일심의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본원력을 일심의 틀 안에서 이해할 때 원효 정 토사상에서 자력과 타력이 동일한 근거와 동일한 무게중심을 지닌 것으로 자리 매김 될 수 있다.
2. 원효 계율관의 선적(禪的) 특성 ▲ 위로
원효의 행적은 일반적인 계율관에 의하면 명백히 파계 행위이다. 요석공주와 결혼을 했고, 때로는 거사들과 어울리며 술집을 드나들었다. 계율에 얽매이지 않 은 원효의 행적을 두고 일연(一然)은 ‘원효불기’(元曉不覊)라고 적었다. 원효 자 신도 요석공주와 결혼 한 이후에는 스스로를 소성거사(小性居士)로 부르며 재가 자(在家者)의 신분으로 돌아갔다. 여러 파격적인 행위에는 원효 스스로 세운 계 율관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효의 계율 사상은 신라 승려들의 계율 연구 경향의 전환점으로 볼 수 있다. 삼국시대의 신라 계율사상은 주로 사분율(四分律)에 집중되어 있었고, 특히 대승 보살계를 다루는 범망경 (梵網經)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원효 이전에는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대승보살계 중에서도 범망경 의 보살계가 주목받게 되는데, 원효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126)
원효 이전에 주목했던 사분율의 특징은 행위의 규제를 목적으로 한다는 데 있 다. 원래 율(律)의 목적은 초기 불교에서부터 승단이라는 조직의 유지에 있었기 때문이다.127) 삼국시대의 신라 계율사상이 사분율에 집중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 서였다. 신라 불교에서 사분율 연구의 새 장을 연 인물은 도선(道宣, 596-667) 인데, 도선의 사분율 연구는 승단의 부패와 타락상을 소거하고, 부처 당시의 출 가자 집단이 자랑하던 청정한 승단을 회복하는 데 목적을 둔 것이었다.
자장(慈藏, 590-658)은 대국통(大國統)에 취임한 뒤 직접적으로 교단 내부를 숙청하는데 사분율을 적용했다. 자장의 계율관에는 사분율, 그리고 사분율과 내 용이 상통하는 열반경 (涅槃經)이 영향을 끼쳤는데, 사분율과 열반경의 영향을 받은 자장의 계율관은 엄격한 지계주의(持戒主義)의 성격을 띤다.128) 자장의 계 율관은 도선과 마찬가지로 계율을 통한 승단의 정화를 목적으로 삼고 있었기 때 문이다.
범망경 을 중심으로 한 원효의 계율관은 도선이나 자장의 계율관과는 내용이 나 목적의식이 확연히 다르다. 5세기 중후반 경 등장한 위경(僞經)인 범망경 은 불성ㆍ여래장 사상을 수용하여, 보살계를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불성의 발현에서 이루어지는 선행의 적극적 실천으로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특징이 있다. 이점은 또 다른 대승보살계 사상인 유식사상 계열의 보살계가 악한 마음에서 발생하는 악행의 제멸을 제시한 것과 대조된다.129)
도선이나 자장과 같은 원효 이전의 계율 사상과 대비시켜 이해하자면, 원효 계 율관의 특징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행위의 외형이 지계(持戒)와 범계(犯 戒)의 구분이 될 수 없다는 점, 둘째, 그러한 규제를 통해서 승단의 정화나 유지 가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원효사상이 추구하는 진속불이(眞俗不二) 의 관점을 바탕으로 한다. 먼저 보살계본지범요기 (菩薩戒本持犯要記)를 살펴보 면, 원효는 사분율과 같이 행위의 외형을 규제하는 형식적인 계율이 보살계가 될 수 없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보살계란 흐름을 거슬러 근원으로 돌아가는 큰 나루이며, 삿된 것을 버리 고 바른 것으로 나아가는 요문(要門)이다. 그러나 삿됨과 바름의 상(相)은 뒤섞이기 쉽고, 죄와 복의 본성은 구별하기 어렵다. 왜 그러한가? 혹은 속뜻 은 사실 삿되지만 밖으로 보이는 행적은 바른듯하고, 혹은 겉으로 드러나는 업은 물든 것 같지만 속마음은 깨끗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거짓된 도인과 삿된 사문은 (성인과 같은) 행적만 함으로써 참된 바름을 잃고, 늘 심계(深戒)를 조심한다고 하지만 천한 행동만을 구한다.130)
행위를 통해서 삿됨과 바름, 죄와 복을 규정할 수 없다는 주장에 담긴 문제의 식을 시대적인 배경에서 짐작해 본다면, 재가자와 승단 두 방향에서 고찰이 가능 할 것이다. 사분율 중심의 소승계는 일부 계층에게 수계(授戒)를 제한하지만, 범 망경 은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갖추고 있어서 성불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수 계 대상을 제한하지 않는다. 원효는 불교 대중화 운동을 전개하며 일반적인 출가 자의 삶이 아니라 천촉만락을 돌아다니며 하층민과 어울리는 삶을 살았다. 그런 원효에게 재가자와 출가 수행자에게 같은 계율을 적용시켰을 때 생기는 범계(犯 戒)의 문제가 모순적으로 느껴졌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7세기 중반은 삼국간의 전쟁이 날로 치열해지던 시기였고, 당시 일반민들의 삶 은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피폐해진 상태였다.131) 애초부터 사분율 자체가 세간과 출세간의 분리를 전제로 하기도 하지만,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린 채 삶을 유지하는 신라의 재가 신도들에게 사분율을 적용시키는 것은 현실적인 계율관이 라고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승단이 그들만의 계율을 고수한다는 것도 시대적인 흐름을 무시한 위선적인 행태로 비춰졌을 것이다. 원 효는 계율 자체를 무시했던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인 상황을 외면하고 계율만을 고수하는 승단의 태도에 날카로운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
정계(正戒)에 머문다는 것은, 한 무리가 그 성품이 천박하여, 세상의 큰 흐름이 교만하고 느슨한 때에 홀로 그 몸을 바르게 하고, 위의(威儀)가 결함 이 없지만 자기가 높고 다른 사람을 뛰어 넘는다는 생각을 일으켜 급하게 오르고 계는 느슨한 대중을 업신여기고 폄훼하는 것과 같다. 이 사람은 작 은 선을 온전히 했지만, 그로써 큰 금계를 훼손한 것이니, 복이 바뀌어서 화 가 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 비록 성문이 스스로를 제도하는 심계 (心戒)는 따르는 것이나, 보살의 광대한 심계는 거스르는 것이다.132)
이 점에서 요기 는 당시 신라 불교계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표명한 저술이라 고 보기도 한다. 즉, 마음을 닦는다며 명리와 공경을 바라고 탐욕과 교만에 빠져 있거나, 특정한 경론 내지는 교학적 견해에 치우쳐 있는 승려들을 비판했다는 것 이다.133) 승단 조직을 유지시키는 기능을 하는 계율이 오히려 수행자의 본분을 저버리게 만들고 타락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형식적인 계율의 조목에 의지해 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원효는 ‘계를 지킨다’는 생각이 곧 소승의 계율관이며, 이러한 계율관은 오직 자리만을 추구할 뿐 이타의 계율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실계(失 戒)이고 죄가 된다고 비판했다. 반면 계를 어겨도 지계(持戒)이며, 복이 되는 경 우도 있다. 원효가 요기 에서 범망경 10중계(重戒) 중 하나인 자찬훼타계(自 讚毁他戒)에 대해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처음 중 찬(讚)과 훼(毁)에는 네 가지 차별이 있다. 만약 상대방에게 신심 을 일으키고자 자찬훼타(自讚毁他) 했을 때는 복이 되고 범계가 아니다. 만 약 방일하거나 무기심(無記心)으로 자찬훼타 했을 때는 범계이지만 물들지 는 않은 것이다. 만약 타인을 사랑하고 성내는 마음으로 자찬훼타 했다면 물들기는 했지만 (죄가) 무겁지는 않다. 만약 이양(利養)과 공경을 구하기 위해 자찬훼타 했다면 (죄가) 무겁고 가볍지 않다. 134)
첫 번째 중 범계임에도 불구하고 복이 되는 경우는 상대방에게 신심을 일으키 는 것, 즉 중생을 제도하려는 보살행인 경우이다. 앞서 ‘보살의 광대한 심계를 거 슬렀다’는 것은 계를 지키는 사람이 계율을 지키는 데만 몰두해서 중생제도라는 대승 수행자의 본령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경계 구분을 부정하고, 승단과 재가의 엄중한 분리를 거부한다. 보살은 자리와 함께 이타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서 출세간이 아니라, 세간 속에서 중생과 함께 하며 중생을 제도해야 하는 자세 를 갖추어야 한다. 따라서 소승계와 같은 승단 조직을 위한 계율보다 수행자가 보살의 본분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는 계율이 더 중요하다. 특히 대승보살계는 공 (空)사상에 따라 계율의 절대적인 근거를 상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승 단이라는 조직의 유지를 위해 지켜야 했던 형식적인 계율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 은 오히려 계율의 형태[戒相]를 고수하는 것으로서 집착으로 간주된다. 대승보살 계에서는 계와 지혜를 뜻하는 바라밀(波羅蜜)을 결합하여 계바라밀(戒波羅蜜)을 주장한다.
비록 앞에서 설한 법문에 의지하여 능히 가벼움과 무거움의 성품을 능히 알고, 얕음과 깊음의 형상을 아울러 알더라도, 계(戒)의 상(相)을 여실히 이 해하지 못하고, 죄와 죄 아닌 것에 대해서 두 변(邊)을 떠나지 못하면 (계 를) 지켜서 범하지 않는 구경이 아니며, 청정한 계바라밀(戒波羅蜜)에 나아 간 것이 아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계는 스스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반 드시 여러 연에 의탁한다. 그러므로 자성이 없으며 연(緣)에 즉해도 계가 아 니고, 연(緣)을 떠나면 계가 없으며, 즉함과 떠남을 버려도 중간이 아니다.
이와 같이 계를 구하면 영원히 있지 않으니 자성을 성취할 수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 (중략) 계의 상을 설한 것과 같이 죄의 상 역시 그러하고, 계와 죄의 상과 같이 사람의 상[人相]도 그러하다. 만약 이 중에서 있지 않음에 의지해서 (죄의 상이) 도무지 없다고 보면 비록 (죄를) 범하지 않지만 영원 히 실계하는 것이고, 계의 사상만을 비방하는 것이다. 또 이 중에서 없지 않 음에 의지하여 계가 있다고 하는 것은 비록 능히 지계한다고 하지만 지니는 것이 곧 범함이다. 계의 실상을 거스르기 때문이다.135)
계율이나 죄 등은 자성(自性)을 갖지 않는다. “모든 죄는 실제로 있는 것이 아 니라 여러 인연이 화합한 것을 임시로 이름을 붙여 업(業)이라고 하는 것”136)이 다. 그렇기 때문에 죄와 범계가 있게 되는 것이고, 원효는 “다만 업의 실상을 사 유할 줄 모르면 비록 죄의 자성이 없지만 곧 지옥[泥梨]에 떨어진다”137)고 했던 것이다.
“계를 지키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행위가 계율에 들어맞느냐 아니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밖으로 드러나는 행위에 그르침이 없다고 할지라도 마음 안에 계상에 대한 집착이 있다면, 그것은 실계나 다름이 없다. 보살은 절대적 계 상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무에도 집착하지 않아서 연에 의해 형성된 계상을 부정하지도 않는다.”138) 계나 죄의 자성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별 체지집(別體之執)에 빠지는 것이니, 원효가 ‘바른 계를 지키는 것이 죄가 된다’고 했던 근본적인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지극한 생각은 견고하여 마음이 항상 머무름이 없고[無住], 청정하여 더 러움이 없어서 삼계에 집착하지 않으니, 이것이 시바라밀(尸波羅蜜=持戒波 羅蜜)이다.139)
이와 같은 원효의 계율관은 계율의 형태에서 자유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종종 선불교의 윤리와 함께 거론된다. 특히 원효의 무애행(無碍行)은 일상의 모든 행 위를 도(道)의 작용으로서 긍정한 마조의 선풍과 비교되기도 하고, 한국 근대 불 교의 경허(鏡虛, 1846-1912)와도 자주 비교된다. 그런데 계상에 주착하지 말라 는 원효와 선불교의 계율관은 모든 행위에 대한 무차별적 긍정으로 오해 되면서 반계율(反戒律)이나 도덕률폐기론 등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선불교에서 깨달음을 위해 선악무분별과 선악의 초월을 가르친다고 한다. 즉, 선 불교의 윤리를 무도덕주의(amoralism)로 해석한 것이다.140)
원효의 계율관 및 선불교의 윤리가 반계율적이라는 관점은 한편으로 ‘계바라 밀’을 문제의 화근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바라밀’이라는 개념은 지계, 보시 등의 실천수행 덕목을 지혜의 완성을 이루는 데 필요한 요소로 수렴하고, 그 결과 세 간적 윤리행위를 출세간적 지혜의 부차적인 가치체계, 또는 초세속적 가치를 실 현하기 위한 세속적 차원의 도구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141) 이러한 해석들 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관점은 진제와 속제를 이분하고 진제를 초월적인 영 역으로 상정한다는 것, 그리고 방편의 가치를 초월적 세계로 향하는 데 필요한 도구 수준으로 평가절하 한다는 것이다.
한동익의 지적에 따르면, 이러한 초월주의적 관점의 진원지는 20세기 초 일본 의 선불교 해석자들, 특히 스즈키 다이세츠이다. 초월적 해석을 맹목적으로 답습 한 기존의 연구들은 진제를 논리나 지성을 초월한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상정 하여 모든 윤리적 책임을 면책시켰다. 그러나 ‘연기’나 ‘공’(空)이 ‘초월’ 또는 ‘절 대’에 대항하기 위한 개념이었다는 점만 보아도 이들의 해석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방편은 다른 목적을 위한 일시적ㆍ잠정적 조치가 아니라 실체 론적 사유라는 미혹에서 벗어나서 펼치는 윤리적 실천과 수행이다.142)
계상에 주착하지 말라는 주장은 실체론적 사유가 보살의 자비심을 가로막기 때문에 제시된 주장이었고, 방편은 초월로 향하는 데 필요한 도구가 아니라 반대 로 보살의 지혜와 구체적인 현실 사이를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 계상의 해체는 보살의 자비심이 구현되기 위한 초석이다.
보살의 지계는 행위의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머무름 없는’[無住] 마음에 근거한다. “상(相)과 주(住)는 어떤 형태를 띠고 있든 간에 인간의 의지와 의지가 예상하는 목적을 근간으로 한다. 그리고 의지가 개입해 있는 한 의지의 동기나 목적과는 무관하게 그것은 집착이 될 뿐”143)이기 때문이다. ‘계의 형식에 머무르 지 않으며’, ‘세간에 머물더라도 세간에 오염되지 않는다’144)는 것이 원효가 추구 한 계율관의 이상이자 계바라밀의 완성이다.145)
V. 결 론 ▲ 위로
이 논문의 문제의식은 기존의 연구에서 원효사상을 고찰할 때, 실천수행에 전 념해 온 원효의 삶이 제대로 투영되지 않았다는 것이었고, 따라서 원효사상을 제 대로 이해하려면 실천수행적인 측면이 충분히 고려되면서, 그 사상의 특징이 고 찰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에 있어 원효의 시대와 비슷한 무 렵에 중국에서 흥기한 선불교가 유의미한 해석관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 다. 이에 따라 본고에서는 원효의 일심사상을 비롯하여 그의 실천수행적인 측면 과 대중교화의 방편을 고려하면, 원효사상을 선불교의 관점에서 재해석 될 수 있 음을 논의하였다. 앞에서 논의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선불교는 경전에 담긴 사상 대신 부처의 마음[心]을 원형으로 삼아 부처와 같 은 마음을 가질 것을 추구했다. 이러한 주장은 단지 중국사상의 영향이 아니라 대승불교의 심식설과 수행론 논의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범 부가 곧 부처나 보살과 다름없으며, 누구라도 그러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이에 따라 현실의 범부의 미혹과 깨달음의 완결성을 모두 보장 할 수 있어야 했다. 능가경 과 대승기신론 은 유식사상과 여래장사상이 가졌던 장ㆍ단점을 절충하여, 번뇌와 깨달음이 비실체적이며, 마음이 가진 본래의 능력 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을 주장했다.
선불교는 능가경 과 대승기신론 에서 제시하는 본각(本覺)을 ‘돈오’라는 논 리로 심화ㆍ확장했다. 수증론으로서 돈오의 의미는 범부 중생 각자에게 갖추어진 깨달음이 이미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즉각적이고 완전한 깨달음을 무매개적으로 이룰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돈오는 기연(機緣)에 의지해야만 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깨달음이 어렵게 된다. 이 점에서 수행자가 본래 청정한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믿음’을 수행원리로 세웠다.
한편, 원효는 기신론 에서 제시하는 일심(一心)과 이문(二門)을 토대로, 미혹 과 깨달음이 모두 실체가 아니라 의식의 생멸현상에 국한된 내용이라는 점을 주 장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법체를 실체로 간주하는 오염된 의식[別體之 執] 때문에 대승에 대한 의심을 가져서 믿지 못하는 것이고, 이타행에도 장애가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원효는 기신론 의 관점을 따라서 깨달음은 이미 갖추어진 것[本覺]이며,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면 곧 원래 갖추어진 깨달음에 부합하는 것[始覺]이라고 하였는데, 일심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 신해(神解)를 부여하여 수행주체가 그러한 사실을 자각적으로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음을 강 조했다.
원효의 수행은 믿음으로부터 출발한다. 믿음의 내용은 선불교와 마찬가지로 본 래 갖추고 있는 깨달음[本覺]이다. 믿음으로부터 출발한 원효사상은 자리와 이타 를 수행의 두 축으로 삼는다. 원효는 본각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중 생제도로 나아가야 비로소 깨달음이 이루어진다고 하였는데, 이와 같은 내용을 금강삼매경론 (金剛三昧經論)의 「정설분」(正說分) 6품의 구성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경론 의 6품은 무상관(無相觀)과 무생행(無生行)이라는 내행을 거쳐 본 각리(本覺利)와 입실제(入實際)라는 중생제도의 외행으로 이어지고, 진성공(眞性 空)과 여래장(如來藏)에 들어감으로써 깨달음에 이른다는 구도로 되어 있다. 이 러한 수행 구도 속에서 중요시되는 개념이 무주(無住)이다. 원효는 무주를 자리 (自利)를 바탕으로 중생을 제도 할 때 어떠한 상(相)에도 집착하지 않는 이상적 인 수행태도 및 수행자의 인격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중생제도를 핵심에 두고, 정(定)ㆍ혜(慧)ㆍ대비(大悲)의 일치를 주장하는 원효 의 선사상(禪思想)에서 대비는 깨달음을 검증하는 기준이다. 원효는 부처와 보살 이 가진 힘은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는 것으로 보았고, 깨달아서 그러한 지위에 오르면 상(相)에 얽매임 없이 방편을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갖춰지는 것으로 보 았다. 선종에서는 깨달음이라는 주관적인 체험의 객관성과 증명을 위해 스승으로 부터 인가(印可)를 받는다는 형식을 취하는데, 원효에게서는 방편의 구사능력이 인가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원효가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구현했던 방편을 정토사상(淨土思想)과 계율관을 통해 고찰해보았다. 원효가 대중교화를 위한 방편으로 선택한 것은 정토사상이었 다. 일반적으로 선과 정토사상은 자력수행과 타력신앙으로 대비되는데, 원효사상 은 정토를 일심에 귀속시키면서 자력수행(自力修行)적 요소와 타력신앙(他力信 仰)적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원효 정토사상이 갖추고 있는 자력수행적 요소 를 드러내는 개념은 유심정토(唯心淨土)와 발보리심(發菩提心)이라고 할 수 있다.
원효는 정토와 예토가 모두 일심에서 비롯된 것이며, 왕생은 진여문으로 들어가 본각을 깨닫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원효는 정토를 유심정토로 해석함으로써 아미 타불에 대한 앙신(仰信)을 선의 신해(信解)와 같은 것으로 해석했다. 왕생의 정인 으로서 순리발심은 제법이 모두 비실체적이라는 통찰을 말하는데, 순리발심을 통 한 왕생은 본각적(本覺的)이며 돈적(頓的)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강한 자력수행적 요소를 함축하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정토는 아미타 불의 본원력(本願力)에 의해 성립된다는 철저한 타력신앙적 요소를 겸비하고 있 다. 아미타불의 강한 본원력에 의지함으로써 중생의 수행은 쉽고 단순해진다. 원 효의 정토사상에 이러한 두 가지 성격이 섞여 있는 것은 일승적인 자력수행과 방편으로 제시하는 타력신앙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자타가 분리되지 않는 법계 적 세계관 속에서 자력수행과 타력신앙이 모순없이 공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원효의 계율관은 행위의 형식을 규제하는 사분율의 계율관을 대승적 보살계로 해석한 것이다. 진속불이(眞俗不二)의 사상에 따라 세간에서 적극적으로 보살행 을 실천하는 것이 곧 수행이자 깨달음이 된다. 이 때 보살의 지계(持戒)는 계율 의 상[戒相]에 사로잡히지 않는 무주(無住)의 계바라밀(戒波羅蜜)에 도달하는 것 을 목표로 한다. 보살의 자비심이 전제가 될 때는 계를 어겨도 죄가 아니라 오히 려 복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오히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삶에는 자기 자 신을 위한 행위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점을 역설하는 것이기도 하다.
앞에서 살펴본 원효사상의 선불교적 관점은 오늘날 한국불교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오늘날 한국 선불교의 지배적인 담론은 ‘돈오주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 돈오주의에는 단독자인 ‘나’의 깨달음과, ‘나’의 자유만을 추구하 는 길로 흐를 수 있는 위험요소가 깔려 있고, 깨달음 자체를 정형화된 목적으로 간주하여, 깨달음 지상주의에 빠지게 된다. 오늘날 한국 선불교는 이러한 비판에 직면해 있다. 이 점에서 원효의 사상을 ‘선’의 관점에서 재구성함으로써 본래 ‘선’의 함의와 ‘돈오’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한 번 상기해 볼 필요가 있 다.
원효사상은 수행주체의 본각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자각적인 깨달음을 추구 하는데, 원효는 이러한 수행의 목표가 오직 타자를 위해 헌신하는 보살행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스로 깨달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이유도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보살행을 권장하기 위해서이다. 원효의 사상은 깨달은 자의 자유란 어떠한 규율이나 제약에도 걸림 없이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자신을 모조리 바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 때에야 비로소 깨달음이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하 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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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Wonhyo(元曉)’s thought in view of Seon Buddhism
Lee, Yu-Na
Department of Philosophy
Graduate School Jeju National University
This study discusses the thoughts of Wonhyo (元曉, 617-686) from a view of Seon Buddhism. Since existing studies have dealt with the thoughts of Wonhyo as ‘Hwajaeng’(和諍) and ‘Hoitong’(會通), they failed to reflect the life of Wonhyo, who concentrated on practice in reality. This study focused on Seon buddhism which developed during his age in China, as a means of interpretation.
The point of contact between Seon Buddhism and the ideas of Wonhyo can be found in the ‘Theories on the Consciousness of Mind’(心識說) of The Laṅāvatāra-sūtra(楞伽經) and The Awakening of Faith(大乘起信論). Their main features assign ālaya theory the both sides, birth and death, nonbirth and immortality.
These texts regard dukkha as a non-substantial thing and assert that ignorance and enlightenment are identical in the mind. furthermore, Seon buddhism specified it as ‘sudden enlightenment(頓悟)’. Since dukkha is non-substantial, if the fact is found instantly, real enlightenment comes out. In light of this fact, Seon Buddhism includes faith as a significant element for completion of practice.
Faith is regarded as the first principle in Ganhwaseon(看話禪). In Seon Buddhism, faith is not unconditional, but the deconstruction of substantial thought and existing decisions is.
In The Awakening of Faith, Wonhyo asserted that ignorance and enlightenment were not the true nature, but were the limited contents of the birth and death of the consciousness based on the one-mind (一心) and the two aspects (二門). He emphasized the ability to spontaneously notice the fact. Wonhyo believed, like Seon Buddhism, that through the one-mind a person could achieve spontaneous enlightenment which lead to the realization of disciple. He also focused on the practical problem that is realization of Bodhisattva conduct by spontaneous enlightenment.
The composition ‘Theories on practice and enlightenment’(修證論) of Wonhyo can be figured out through his A Treatise on the Sutra of Diamond Samadhi (金剛三昧經論). In this treatise, Wonhyo interpreted that only by combining inner practice with the saving of all beings could reach enlightenment. Seon practices include not only inner fulfillment, ‘practicing meditation and wisdom at the right time’(定慧雙修), but also compassion. Saving all beings, as discussed in Wonhyo's 'Theories on practice and enlightenment', serves too, the function of verifying enlightenment. Enlightenment, which is a subjective experience, can be objectively proved by saving all beings and commanding its upaya.
Wonhyo, in his life, actively sought to build a way of saving all beings through the thought of Pure Land and non-obstructive action. The main characteristic of the Pure Land concept is that Pure land are nonexistent, but are brought out from one-mind(一心). Thus, rebirth in a Pure Land is the same as returning back to the one-mind. Wonhyo suggested that people should believe the original faith of oneself, which paralleled the faith of self-practice in Seon Buddhism.
Wonhyo's apostasy, his purpose of edifying people, was based on the perspective that virtue, evil, sin, and luck are nonexistent, just as dukkha is non-substantial.
In light of this fact, Wonhyo asserted not to be tied to the formality of precept and emphasized to practice the altruistic act in Mahayana Buddhism, in which considering the motive of an action is important. He said that someone breaking the principles of Buddhism was not a sin, but rather luck, and that such a break should be regarded as a precondition. Like wisdom or compassion, it is necessary to surpass the principle.
Wonhyo realized that if the ultimate truth and conventional truth, enlightenment and ignorance were all nonexistent, then its discernment and purification should have been the outcome of mind. He also assigned He also assigned to the practice of one-mind the ability to reach enlightenment. What Wonhyo pursued in the one-mind was spontaneity and dynamicity in the disciple as well as enlightenment. Enlightenment not just static wakening, but rather an actual ethical practice that the disciple actively performs.
■ 각 주 : ▲ 위로
1) 근현대 원효 연구사는 이 관점과 함께 출발했다고도 할 수 있다. 최남선(崔南善)은 한국불교의 성격을 ‘통불교’로 규정하는 관점에서 그 시초로 원효를 지목했고, 박종홍(朴鍾鴻)은 원효의 논법을 개합(開合)과 종요(宗要), 입파(立破)와 여탈(與奪), 동이(同異)와 유무(有無) 등으로 설명하 고 이를 화쟁의 논리라고 불렀다. 이후 화쟁적 관점은 점점 구체화 되어 원효가 화쟁의 대상으로 삼았던 구체적 대상이 무엇인가에 관한 논의로 발달했다. 이러한 논의는 부분만 남아 있는 원효의 십문화쟁론 (十門和諍論)의 복원을 시도하여 화쟁 대상을 추론하거나, 별기의 대의문 에 초점을 맞추어 화쟁적 관점에서 기신론관을 규명하는 논의로 전개된다. 화쟁적 관점의 전개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논문들을 참조할 수 있다. 남동신, 「元曉의 大衆敎化와 思想體系」,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김상현, 「元曉 和諍思想의 硏究史的 檢討」, 불교연구 11ㆍ 12, 한국불교연구원, 1995; 석길암, 「근현대 한국의 대승기신론소 ㆍ 별기 연구사」, 불교학 리뷰 2호,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2007.
2) 심재룡은 한국 불교를 통불교로 해석한 시초는 최남선이며, 최남선의 주장은 한국 불교를 폄훼 한 다카하시류(流)의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이 점은 시대적 배경 속에서는 의의가 있지만, 통불교적 해석이 이어지는 것은 해방 이후의 불교 연구가 성급하게 무비판적으로 동조한 결과라고 지적한다. 또 회통은 원효나 한국 불교만의 특징이라고 볼 수 없으며, 다른 불교사상의 회통적 성격에 비교했을 때 원효의 십문화쟁론도 내용적으로 새로운 것이 없다고 한다(「한국불교는 회통불교인가」, 불교평론 3호, 불교평론사, 2000.). 석길암은 심재룡을 비롯한 선행연구의 문제의식을 계승하며, 기존의 연구에서 화쟁의 의미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지 못하고, 화쟁을 단순히 ‘통일’과 ‘종합’으로 해석함으로써 원효의 一心을 궁극적 실재와 같은 형이상학적 개념이라고 오해하게 된다고 비판한다(「원효의 화쟁을 둘러싼 현대의 논의에 대한 시론적 고찰」, 佛敎硏究 제28호, 한국불교연구원, 2008.). 박재현은 ‘화쟁’의 의미를 다툼을 화해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데에는 논리적 비약이 숨어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화쟁적 관점에서 원효사상을 보는 기존의 시각에는 당시 쟁론이 실재했다는 전제가 있지만 이는 원효의 관심 대상이 아니며, 원효의 화쟁은 다양한 불설들간의 소통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해석학적 문제를 중심으로 본 원효의 會通과 和諍」, 불교학연구 제24호, 불교학연구회, 2009).
3) 유식으로 보는 견해에는 구유식설의 입장에서 해석한 박태원의 연구와(박태원, 「“大乘起信論” 思想評價에 관한 硏究 : 古註釋家들의 관점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중 관ㆍ유식의 종합적 지양으로 해석한 은정희의 연구가 대표적이다(은정희, 「元曉의 中觀ㆍ唯識說-大乘起信論의 경우」, 서울교대논문집 18, 1989.). 여래장사상으로 해석하는 견해에는 이평래 의 연구가 대표적이다(이평래, 「여래장설과 원효」, 元曉思想論叢 , 국토통일원, 1987). 고익진의 경우에는 은정희와 마찬가지로 중관ㆍ유식의 종합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하지만, 화엄 으로 규정한다(고익진, 「元曉의 起信論疎ㆍ別記를 통해 본 眞俗圓融無碍觀과 그 성립이론」, 불 교학보 10, 불교문화연구원, 1973.). 석길암 역시 원효사상을 화엄사상으로 지목하지만, 원효의 화엄사상이 중국 화엄종과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삼계교와 연관지어 ‘보법화엄’으 로 규정한다(석길암, 「元曉의 普法華嚴思想 硏究」,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한편 전호 련의 경우에는 원효사상에 보이는 유식, 여래장, 화엄적 성격을 모두 수용하기 위해 ‘유식→여 래장→화엄’ 순으로 원효사상이 변화해 나간다는 관점을 제시하기도 한다(전호련, 「元曉의 和諍 과 華嚴思想」, 韓國佛敎學 제24호, 한국불교학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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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경 의 찬술설에 대한 논의의 전개 과정은 이미 여러 차례 선행연구에서 반복되어 정리되어 있 고, 이 연구에서는 이와 관련한 문제를 우선 배제해 둔 채 진행할 것이므로 상세한 언급은 생략한다. 자세한 내용은 담고 있는 논문들 중, 비교적 최근의 연구로 다음 논문들이 있다. 신규 탁, 「 金剛三昧經 의 학파소속성에 관한 시론」, 元曉學硏究 제9집, 元曉學會, 2004; 석길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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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박태원은 경 과 경론 의 사상적 지향점이 동일하다는 관점에서 경 과 경론 의 사상을 중관 (中觀)ㆍ유식(唯識)의 화쟁적 종합, 大乘禪思想의 천명, 眞俗不二의 대중불교 지향이라고 주장하 였으며,(「 金剛三昧經 ㆍ 金剛三昧經論 과 원효사상(Ⅰ)-中觀ㆍ唯識의 화쟁적 종합을 중심으로
- , 元曉學硏究 제5집, 元曉學會, 2000; 「 金剛三昧經 ㆍ 金剛三昧經論 과 원효사상(Ⅱ)-大
乘禪사상과 眞俗不二를 중심으로- , 元曉學硏究 제6집, 元曉學會, 2001.) 최근 이 논의를 발 전시켜 경론 의 원효 선사상은 무생(無生)/무주(無住)의 일미진선(一味眞禪)이라고 특징지었다
(「원효의 선(禪)사상- 금강삼매경론 을 중심으로」, 철학논총 제68집, 새한철학회, 2012.). 이
종철은 원효 선사상과 초기선종의 선사상을 비교하고, 원효 선사상은 一乘思想을 기반으로 如 來禪을 수용하되 그 한계를 극복하고자 大悲와 定慧의 겸수를 강조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 고 이러한 원효의 선사상은 한국에 이미 선종이 전래되기 이전에 선에 관한 활발한 논의가 있
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한다(「선종 전래 이전 신라의 선- 금강삼매경론 에 보이는 원효의
선학」, 韓國禪學 제2호, 한국선학회, 2002.). 이 외에 다음과 같은 연구들이 있다. 서영애,
신라 원효의 금강삼매경론 연구 , 민족사, 2007; 김호귀, 「 금강삼매경론 의 선수행론 고찰」,
佛敎學報 제58집,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2011.
9) 법통주의적 관점이란, 선종에서 말하는 스승에서 제자로 법이 전해진다는 사자상승(師資相承)의 전통을 인맥주의로서 고수하는 관점을 말한다. 이들은 선종의 법통(法統)을 정통의 기준으로 삼 고, 그 외의 선은 선종에서 말하는 선법(禪法)과 다른 것이라고 단정 짓는다. 문제는, 법통주의 적 관점에서 바라 본 선맥(禪脈)이 실제 사상의 내용과 온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불교 조계종은 선(禪)을 종파적 정체성으로 삼고, 임제종(臨濟宗)의 정통임을 표방하는데, 박해당의 비판에 따르면 법통주의적 관점에서 한국불교는 결국 임제종의 방계 내지는 비정통으 로 자리매김할 수밖에 없다. 실제 한국불교는 순수한 선종이라기보다 여러 불교전통을 흡수한 종합적인 종파임에도 불구하고 법통주의적 관점에 갇혀 한국불교의 뿌리를 스스로 부정했다는 것이다(박해당, 「조계종의 법통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철학사상 11호, 서울대학교 철학사상 연구소, 2000, 71-73쪽). 무엇보다 법통주의적 관점은 원효연구의 장애물로도 지적된다. 박해 당은 앞의 글에서 조계종의 법통주의적 관점이 한국불교의 성격과 닮아있는 원효사상이 들어설 자리를 지워버렸다고 비판했고, 이기영 역시 선(禪) 중심의 불교와 사상적 계보가 달랐기 때문 에 원효의 불교가 우리 불교의 주류가 되지 못했다고 보았다. 이기영은 금강삼매경론 으로써 원효와 선종의 연결고리를 찾고자 했고, 원효를 한국불교의 주류로 되돌려놓고자 했다(김호성,
「텍스트와 현실의 해석학적 순환」, 佛敎硏究 제26호, 한국불교연구원, 2007, 117-122쪽).
10) “(조사선은)중생과 부처의 관계에 대하여 논하며 중생즉불(衆生卽佛)을 강조한다. 이러한 심성 (心性)의 문제는 원래 유학에서 중시한 것인데, 현성(賢聖)을 이루는 가치관은 성선(性善)이 주 도하는 심성이론(心性理論)을 확정하였다. 중국 불교학은 위진(魏晋) 남북조(南北朝) 시기에 비 로소 반야학(般若學)에서 열반심성학(涅槃心性學)으로 변화를 시작하였는데 이 역시 전통적인 중국문화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董群, 김진무 옮김, 祖師禪 , 운주사, 2000, 139쪽.
11) 선을 ‘중국’불교의 정점으로 해석하는 관점에서는 호적(胡適)과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의 견해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호적은 ‘중국의 선은 인도의 쟈나에 대한 반동’으로, 스즈키는 ‘깨달음의 중국식 해석’이라고 평가한다. 스즈키 ‘인도에는 그런 선이 없었다’며 인도불교의 선과 오늘날 우리가 아는 선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하며, 호적과 공통적으로 선의 독창성 은 노장사상의 영향이라고 보고, 선사들을 노장사상의 계승자라고까지 말한다(John C. H. Wu, 김연수 옮김, 禪의 황금시대 , 한문화, 2006, 15-17쪽). 반면 중국‘불교’라고 하여 선불교가 가지는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교적 전통 속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고 보는 관점 에서는 앞의 두 사람의 주요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선불교의 연원을 초기불교에서부터 찾기도 하고, 대승불교의 경전에서 찾기도 하는데, 공통적으로 불교적 전통에 비추어 볼 때 선불교의 사상이 이념적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심재룡은 “선종에 는 교리적 전회란 없었다. 오직 깨침을 향한 기법의 개발만이 있었을 뿐이다”라며 호적과 스즈 키의 견해를 강력하게 비판하고, 선종을 근본주의자들의 복고운동이라고 평가한다.(심재룡, 중 국 불교 철학사 , 철학과현실사, 1998, 197-202쪽.) 칼루파하나(Kalupahana)도 선종의 종지인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의 내용은 이미 초기 아함부터 발견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D.J.Kalupahana, 나성 옮김, 붓다는 무엇을 말했나 : 불교철학의 역사적 분석 , 한길사, 2011.) 김호성의 경우에는 선사상의 보다 직접적인 근거로서 대승경전에 주목해야 한다며 금강경 , 화엄경 , 유마경 , 능가경 에서 선사상의 연원을 찾는다(김호성, 대승경전과 禪 , 민족사, 2002. 21-40쪽). 이 연구에서도 후자의 관점에 동의하여, 선사상의 모태는 이미 대승 불교의 사상 속에 있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논의를 전개할 것이다. 특히 능가경 과 대승기신 론 에서 제시한 독특한 심식론이 선종 특유의 수증론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조명하고자 한다.
12) 능가경 의 한역본에는 443년에 송(宋)의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가 번역한 4권본 능가아발 다라보경 (楞伽阿跋陀羅寶經)과 513년에 위(魏)의 보리류지(菩提留支)가 번역한 10권본 입능 가경 (入楞伽經), 그리고 700-704년에 걸쳐 당(唐)의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 7권본 대 승입능가경 (大乘入楞伽經)이 있다. 이 중에서 선종에서 전수되었던 것은 4권본 능가경 이다. 이종철은 원효가 중요시한 능가경 은 10권본 능가경이며, 이 점에서 선종과 차이가 있다고 지 적하고 있지만(이종철, 앞의 글.), 원효는 4권본과 10권본을 모두 인용하고 있고, 두 판본이 모 두 동일한 원본의 한역서로서 내용상의 차이가 없다고 이해하고 있다. 이 연구에서는 원효의 관점을 따라 4권본과 10권본의 내용이 유의미한 정도의 차이가 없다고 볼 것이다.
13) 여래장사상의 발전은 유식사상과의 교섭의 측면에서 3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 1기는 여래장 사상만 설하는 단계로 여기에 속하는 경전에는 여래장경 (如來藏經)과 승만경 (勝鬘經)등이 있고, 제 2기는 여래장사상과 알라야식의 관계를 설하지만 양자의 관계를 명확히 밝히지 않는 단계로 여기에는 입대승론(入大乘論) , 보성론(寶性論) , 법계무차별론(法界無差別論) 등이 속한다. 그리고 제 3기는 여래장과 알라야식의 융합을 설하는데, 여기에 능가경 과 대승기신론 등이 속한다. 平川彰, 이호근 옮김, 인도불교의 역사 下, 민족사, 1991. 151-152쪽.
14) 김종욱, 「무아에서 진아까지-불교 무아 개념의 형성과 전개-」, 범한철학 제43집, 범한철학회, 2006. 115쪽.
15) 위의 글, 116쪽
16) 平川彰, 앞의 책, 135쪽.
17) 平川彰ㆍ捤山雄一ㆍ高崎直道 編, 종호 옮김, 如來藏思想 , 경서원, 1996. 17쪽.
18) 大方等如來藏經 卷1, 大正16, 457b, 我以佛眼觀一切眾生 貪欲恚癡諸煩惱中 有如來智如來眼如來身。結加趺坐儼然不動 善男子 一切眾生 雖在諸趣煩惱身中 有如來藏常無染污 德相備足如我 無異.
19) 박보람, 「나를 바라보는 두 시각, 여래출현과 여래장」, 불교학리뷰 10권,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2011, 98-99쪽.
20) 이 문제와 관련하여 유식의 관점은 무상유식과 유상유식으로 나누어 전개 된다. 무상유식과 유상유식의 차이는 인식대상[行相]이 식(識) 자체에 내재했는지를 기준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인식대상을 식에 고유한 것으로 보는 유상유식의 견해에서는 식으로부터 인식대상을 제거할 수 없으므로 깨달음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이유로 무상유식으로 분류되는 견해에서는 인식대상은 변계소집성으로서 허망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렇기 때문에 구극(究極)의 단계에서 인식과 대상이 모두 사라지는 경식구민(境識俱泯)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인식내용이 허망한 것이라면 진실지가 생길 수 없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여기에 대해 무상유식의 견해에 서는 식이 자증(自證)이라고 반론한다(平川彰, 앞의 책, 196-197쪽). 무상유식과 유상유식에서 주장하는 깨달음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무상유식이 식의 자증을 주장하여 여래장 사상과 친 밀성을 가진다고 인정하고, 유상유식에서는 깨달음의 내적인 근거를 확보하는 데 한계가 있다 고 지적한는 것이다. 한자경은 이에 대해 유상유식에서도 깨달음은 자증이며, 자성청정심으로서 의 진여를 획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주장한다(한자경, 「無分別智와 眞如- 성유식론 을 중심으로 분별식에서 무분별지에로의 이행을 논함」, 불교학연구 제3호, 불교학연구회, 2001 참조). 그런데 이와 같은 한자경의 반론은 본문에서 ‘식의 본성을 진여로 간주한 점에서 유식은 여래장사상 내지는 일심과 동일하다’고 밝히고 있듯, 여래장과 유식사상 간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고 보는 관점에서 제시되는 것이다. 결국 무상유식이나 유상유식 모두 수행의 내재적 근거 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여래장사상과 근접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통해서 보 이듯이 능가경 과 기신론 에서 이루어지는 여래장사상과 유식사상은 결합은 무엇보다 수행의 문제와 관련해서 요구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1) 여래장이 생사윤회의 소의(所依)를 담당하는 것은 외도의 아론, 즉 아트만과 근접해지며, 여래 장과 번뇌장은 본래 관계가 없어야 하는데, 번뇌장이 여래장에 부착되어 있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平川彰ㆍ捤山雄一ㆍ高崎直道 編, 앞의 책, 55쪽). 여래장사상은 특히 松本史朗을 비롯한 일본의 비판불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다. 松本史朗은 불교의 본질은 연기(緣起)에 있고, 연기 를 바탕으로 실체화된 자아, 즉 아트만(atman)에 대한 비판을 핵심 주장으로 볼 수 있는데, 여 래장사상이나 본각사상은 실체를 바탕으로 하는 자아개념을 받아들인 것이고, 따라서 불교의 본질에서 벗어났다고 비판한다(松本史朗, 혜원 역, 연기와 공-여래장사상은 불교가 아니다 , 운주사, 1994).
22) 능가경 에서는 ‘아뢰야식이라고 하는 여래장(如來藏名識藏, tathāgatagarbha ālayavijñāna-sa
ṃśabdita)’이라고 할 뿐만 아니라 ‘여래장이라고 하는 아뢰야식(識藏名如來藏, tathāgatagarbha
-śabdasaṃśabdita ālayavijñāna)’, ‘여래장ㆍ아뢰야식(如來藏識藏)’이라는 방식으로도 표현된다.
정호영의 경우에는 이와 같은 개념의 여러 형태나 등장 순서에도 의미가 있다고 분석한다(정호
영, 「알라야식과 여래장의 교섭- 능가경 의 경우」, 人文學志 제40집, 충북대학교 인문학 연
구소, 2010, 23-24쪽). 이러한 해석은 능가경 의 수증론적 관점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지만, 여기에는 능가경 이 체계적인 저술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전제되는 것이어서 보다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
23) 정호영은 아뢰야식과 여래장장의 일치는 ‘아뢰야식→여래장’의 논리를 함축하고 있는데, 이를 두 가지로 분석한다. 첫째로 ‘아뢰야식이라고 하는 여래장’의 경우에는 깨달음의 관점에서 본 것이며 ‘알라야식=여래장’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둘째, 첫 번째에 비해 ‘여래장이라고 하는 아뢰야식’은 현실에서 아뢰야식과 여래장이 결합되어 있지 않은 상태, 즉 미혹에 단계에 있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구도는 미혹과 깨달음의 무한한 거리를 수용하면서 동시에 중생과 부처의 존재론적 불이를 인정해야 하는 모순적 상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고 설명한다. (정호영, 위의 글, 23-28쪽.)
24) 楞伽阿跋多羅寶經 (이하 宋譯) 卷4, 大正16 510c, 大慧 此如來藏識藏 一切聲聞緣覺心想所見 雖自性淨 客塵所覆故猶見不淨 非諸如來 大慧 如來者現前境界 猶如掌中視阿摩勒果 …… 如來藏 識藏 唯佛及餘利智依義菩薩智慧境界 是故汝及餘菩薩摩訶薩 於如來藏識藏 當勤修學 莫但聞覺作 知足想.
25) 宋譯 卷1, 大正15 484b, 譬如海水變 種種波浪轉 七識亦如是 心俱和合生 謂彼藏識處 種種諸識 轉 謂以彼意識 思惟諸相義 不壞相有八 無相亦無相 譬如海波浪 是則無差別 諸識心如是.
26) 宋譯 卷3, 大正16 503b, 爾時大慧菩薩白佛言 世尊 如世尊一時說言 世間諸論種種辯說愼勿習近 若習近者 攝受貪欲不攝受法 世尊 何故作如是說 佛告大慧 世間言論種種句味 因緣譬喩採習莊嚴 誘引誑惑愚癡凡夫 不入眞實自通 不覺一切法 妄想顚倒墮於二邊 凡愚癡惑而自破壞 諸趣相續不得
解脫 不能覺知自心現量 不離外性自性 妄想計著 是故世間言論種種辯說 不脫生老病死憂悲苦惱 誑
惑迷亂.
27) 宋譯 卷3, 大正16 498c, 我從某夜得最正覺 乃至某夜入般涅槃 於其中間乃至不說一字.
28) 인용문에서 부처가 수행을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지적하는 대목은 단편적이지만 능가 경 전체의 언어관에서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유식에서 수행은 聞ㆍ思ㆍ修를 기본 원리로 삼으며, 특히 유상유식에서 ‘들음’[聞]은 아뢰야식 내의 청정종자를 증장시키고 그로써 염오종자를 소멸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만족해서는 안 된다’라는 부정적인 표현은 단순히 수행의 정진을 촉구하는 문구로 보기에는 다 소 꺼림칙한 인상을 준다. 능가경 에서는 유식에서와 마찬가지로 언어가 식의 전변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데는 동의했지만, 언어는 어디까지나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할 뿐, 그 것이 동시에 수행에서도 핵심적인 원리일 수 있다는 데에는 의문과 비판을 제기한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29) 宋譯 卷1, 大正15 485c-486a, 爾時大慧菩薩 爲淨自心現流故 復請如來白佛言 世尊 云何淨除 一切衆生自心現流 爲頓爲漸耶 佛告大慧 漸淨非頓 如菴羅果漸熟非頓如來淨除一切衆生自心現流 亦復如是 漸淨非頓 譬如陶家造作諸器 漸成非頓 如來淨除一切衆生自心現流亦復如是 漸淨非頓 譬 如大地漸生萬物非頓生也 如來淨除一切衆生自心現流 亦復如是 漸淨非頓 譬如人學音樂書畫種種技 術 漸成非頓 如來淨除一切衆生自心現流 亦復如是 漸淨非頓 譬如明鏡頓現一切無相色像 如來淨除 一切衆生自心現流 亦復如是 頓現無相無有所有淸淨境界 如日月輪頓照顯示一切色像 如來爲離自心 現習氣過患衆生 亦復如是 頓爲顯示不思議智最勝境界 譬如藏識頓分別知自心現及身安立受用境界 彼諸依佛亦復如是(依者胡本云津膩謂化佛是眞佛氣分也) 頓熟衆生所處境界 以修行者安處於彼色究 竟天 譬如法佛所作依佛光明照曜 自覺聖趣亦復如是 彼於法相有性無性惡見妄想 照令除滅.
30) 능가경 의 돈점관(頓漸觀)에 대해서는 첫째, 보살의 계위와 관련시키는 문제, 둘째, 후대 선 불교의 수증론 중 어느 것에 배대할지의 문제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경우는 징관 (澄觀)의 견해인데, 능가경 의 자체의 뜻에 부합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둘째의 경우는 점수(漸 修)ㆍ점수돈오(漸修頓悟)ㆍ돈오점수(頓悟漸修) 세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김호성은 능가경 의 주제인 자각성지에 비추어 볼 때, 자각성지란 언어를 떠나 있는 것이므로 능가경 전체의 입장은 성(性=頓)의 차원에서 상(相=漸)을 융합하는 것이고, 돈오점수에 배대하는 것이 적절하 다고 한다. 김호성, 앞의 책, 295-301쪽.
31) D.J. Kalupahana, 앞의 책, 18장 참조.
32) Edward Hamlin, "Discourse in the Lankavatara-sutra", Journal of Indian Philosophy 11, 1983, 310쪽.
33) 宋譯 卷1, 大正15 489b, 譬如陶家於一泥聚以人工水木輪繩方便作種種器 如來亦復如是 於法無 我離一切妄想相 以種種智慧善巧方便 或說如來藏 或說無我 以是因緣故說如來藏 不同外道所說之 我.
34) 이 점에서 Kalupahana는 여래선(如來禪)의 의미를 축소해서 해석했다고 할 수 있다. 능가경 에서 말하는 여래선이란 “여래지(如來地)에 들어가 자각성지상(自覺聖智相)의 세 가지 즐거움 [三種樂]에 머물고, 중생의 불사의한 일을 이루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생의 불사의한 일을 이 룬다”와 같이 부처가 중생을 위한다는 문구는 대승불교의 경전에서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문구 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여래선의 지향점 역시 깨달음이 중생의 세계인 세간(世間)과 분리될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본다.
35) 초월과 연관한 불교의 출세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인간고의 근원은 자기중심적 사고 및 행동 방식에서 연유한다. 따라서 초월되는 자아는 자기중심적 사고와 행위의 결과이며, 자기중심적 사고가 투사한 假構(projected fiction)에 불과하다. 초월의 가능성은 바로 그 헛된 가상의 자기 를 만드는 원인, 즉 무명 또는 환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결국 깨침의 대상은 없다. 자아 초월은 자기의 눈을 바꾸는 인식의 전회이지 자기 존재가 특별한 무엇으로 바뀌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기를 대신해서 깨침의 소식을 전해줄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을 텅 빈 것으로 표현하는데, 언어는 이를 표현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심재룡, 동양의 지혜와 禪 , 세계 사, 1992, 429-435쪽.
36) 大乘起信論 , 大正32 576a, 依一心法 有二種門 云何爲二 一者 心眞如門 二者 心生滅門.
37) 조은수, 「大乘起信論에 있어서의 깨달음의 構造」,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6. 6-7쪽.
38) 大乘起信論 , 大正32 576a, 心生滅者 依如來藏故有生滅心 所謂不生不滅與生滅和合 非一非異 名爲阿梨耶識.
39) 會本, 韓佛1 733中, 自非杜口大士 目擊夫夫 誰能論大乘於離言 起深信於絶慮者哉 所以馬鳴菩薩 無緣大悲 傷彼無明妄風 動心海而易漂 愍此本覺眞性 睡長夢而離悟 於是同體智力堪造此論.
40) 해석분(解釋分)의 서두에서는 먼저 ‘진여란 말을 떠나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 뒤, ‘그렇다면 어 떻게 중생이 어떻게 수순하여 깨닫는가?’라는 물음이 제시된다. 그 뒤에 ‘설하나 설할 길이 없 고, 생각하나 생각할 길이 없는 줄 알면 곧 수순이고, 생각마저 여의면 깨닫는다’고 답하고, ‘진 여를 언설로서 분별한다’고 하여 여실공과 여실불공을 설명한다. 이러한 문답을 통해 진여는 ‘이언(離言)’일 수밖에 없지만 방편으로써 ‘의언(依言)’ 한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 大乘起 信論 , 大正32 576a, 是故一切法從本已來 離言說相 離名字相 離心緣相 畢竟平等 無有變異 不可 破壞 唯是一心故名真如 以一切言說假名無實 但隨妄念不可得故 言真如者 …… 問曰, 若如是義者 諸眾生等云何隨順而能得入? 答曰, 若知一切法雖說 無有能說可說 雖念 亦無能念可念 是名隨順 若離於念 名為得入……復次,真如者,依言說分別有二種義。云何為二?一者、如實空,以能究竟 顯實故。二者、如實不空. 以有自體 具足無漏性功德故.)
41) 원래 진여란 보편적인 眞理, 理法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인간을 매개할 필요는 없 는 개념이다. 이 진여가 인간 속에 내재할 때 이것을 본각이라고 부른다. 진여문 내에서의 진여 란 더러워지거나 변하는 것이 아니다. 이에 비해 생멸문 내에서의 본각은 인간 내부에 있으므 로 더러워지는 것도 예상하게 된다. 진여로서는 현상적인 미혹을 설명할 수 없으나, 인간 속에 내재해 있는 진여인 본각이라는 개념을 설정함으로써 현실의 타란한 중생의 모습을 설명할 수 잇다. 진여와 생멸의 세계 사이에는 깊은 간격이 가로 놓여 있어서 본각이라는 개념을 통해 진 여와 생멸문이 이어질 수 있다. 조은수, 앞의 글, 36-37쪽.
42) 大乘起信論 , 大正32 576c, 所言不覺義者 謂不如實知眞如法一故 不覺心起而有其念 念無自相 不離本覺 猶如迷人依方故迷 若離於方則無有迷 衆生亦爾 依覺故迷 若離覺性則無不覺.
43) 이 네 가지 상은 일반적으로 ‘단계적 깨달음’이라고 설명된다. 각각의 覺에 대해 수행자의 지 위를 대응시키고 ‘구경각=본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신론 에서는 이 네 가지 모습에 대해 전후 순서가 있느냐고 묻고, 물과 파도의 비유를 들어 일심에는 네 가지 구분이 없으므로 이것 역시 무명의 훈습으로 인해 생긴 분별이라고 대답한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단계적 깨달음’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지만, 사실은 그러한 단계조차 허망한 분별에 불과한 것이므로 ‘단계적 깨달음이 아니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사상에 수행자의 지위를 대응시킨 것도 점 진적으로 나아가는 단계를 설명한 것이 아니라, 수행자의 근기를 분류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44) 고승학, 「 대승기신론 에서 여래장의 수행론적 의미, 불교학리뷰 10권, 금강대학교 불교문
화연구소, 2011. 81-82쪽.
45) 믿음은 의지나 이성 등 어떤 정신적 기능에 의해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일심의 작용이라고 한 다. 불교에서의 믿음의 특징은 그것이 반드시 정진, 자비, 보시 등 닦음으로 드러난다는 데 있 다. 결국 믿음은 일종의 순환적 성격을 갖는데, 믿음이 닦음으로 이어지고, 닦음이 깨침으로 이 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깨침의 내용은 곧 믿음의 내용과 다르지 않다. ‘몰록 깨친다(頓悟)’는 개 념에 입각해서 더 과격하게 말하자면, 믿음이 곧 닦음이요 닦음이 곧 깨침이며 깨침이 그대로 믿음이 된다. 박성배, 윤원철 옮김, 깨침과 깨달음 , 예문서원, 2002, 167-168쪽.
46) 지관을 한 어구로 사용하는 것은 기신론 에서부터 나타나게 되는 특징이다. 지는 선정으로, 이것이 관, 즉 지혜를 낳는다. 여기에서는 정, 혜 두 가지가 동시에 나타나서 체현되는데, 이 지 관을 행함으로써 일체의 선관을 통일할 수 있다고 한다. 기신론 의 지관은 수식관이나 부정관 같은 소승선관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고, 진여연기를 근거로 한 자리와 이타를 삼매법의 체험 을 바탕으로 다룬 것이다. 지와 관은 따로 설명하면 지에서 관으로 나아가는 셈이 되지만, 지와 관이 별도로 실천되는 것은 수행의 미숙한 단계에 있는 사람이 행할 때의 일이고, 이 논서의 목표는 지와 관 두 가지가 동시에 수습되는 데 있다. 田上太秀ㆍ阿部肇一, 최현각 옮김, 인도 의 선, 중국의 선 , 민족사, 1991, 78쪽.
47) 續高僧傳 卷16, 大正50 552b, 初達摩禪師以四卷楞伽授可曰 我觀漢地惟有此經 仁者依行自得 度世.
48) 초기 선종은 ‘능가종’(楞伽宗)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근대 중국의 선종사학자 호적이 능가사자 기 (楞伽師資記)에 근거해서 붙인 이름이다. 호적은 능가종이 북종선(北宗禪) 계열에 해당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곧 북종선이 초기 선종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인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호성은 속고승전 에 의한 달마와 능가경 의 연관성은 역사적 사실로 볼 수 없고, 능가인법지 (楞伽人法志)의 저자인 현색(玄賾)과 능가사자기 의 저자인 정각(淨覺)의 능가경 의 수용은 북종선을 정통으로 만들기 위한 종파적 견해에 따른 것이라고 비판한다. 오히려 능가경 의 사상은 마조가 즉심시불의 근거로 삼음으로써 선종사에서 능가경 을 재조명한 것이고, 혜 능 이래 금강경 에 치우쳤던 흐름을 전복시킨 것이라고 한다. 김호성은 이를 사상사적 수용이라고 부르며, 호적 등이 주장한 법통설적 수용보다 더 유의미한 수용이라고 주장한다. 김호성, 앞의 책, 4장 4절 참조.
49) 景德傳燈錄 (大正51 246a), 達磨大師從南天竺國來 躬至中華 傳上乘一心之法 令汝等開悟 又 引楞伽經文 以印衆生心地 恐汝顚倒不自信 此心之法各各有之 故楞伽經云 佛語心爲宗 無門爲法 門.
50) 최상승선으로서의 如來禪은 이후 祖師禪이라는 명칭이 등장하면서 조사선에 비해 낮은 선으로 폄하된다. 조사선에 상대되는 의미로서의 여래선은 혜능으로부터 시작되는 남종선의 돈오법문 을 제외한 나머지의 선을 가리키는 의미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폄하의 대상이 초기 선종에서 일컬었던 여래선의 의미와 일치한다고 보기도 어렵고, 여래선의 의미가 통일적 으로 사용되지 않아서 조사선과 여래선의 차이도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다. 결국 조사선과 여래선의 대립은 사실 남종 문하에서 정통성을 표방하고, 북종 계통을 배척하기 위해 제시된 개념이며, 남종선을 높이기 위한 일종의 수단인 것이다. 하지만 명심견성(明心見性)과 돈오성불(頓悟 成佛)이라는 의미에서 보면 조사선과 능가경 에 언급된 여래선은 상통한다. 또, 壇經 에서도 혜능도 여래선을 인정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혜능 시대의 사람들도 돈오선을 여래선이라고 불렀다(洪修平ㆍ孫亦平, 노선환ㆍ이승모 옮김, 如來禪 , 운주사, 2002, 17-21쪽 참조). 능가 경 의 여래선이 달마와 혜능, 그리고 그 이후 조사들을 거치는 동안 원형 그대로 계승되었다고 할 수 없지만, ‘돈오를 함의하는 禪’이라는 맥락에서는 이후의 조사선과 같은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와 같은 관점에서 여래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51) 宋譯 卷2, 大正16 492a, 云何如來禪 謂入如來地行自覺聖智相三種樂住 成辦衆生不思議事 是名 如來禪.
52) 禪源諸詮集都序 卷1, 大正48 399a, 若頓悟自心本來清淨 元無煩惱 無漏智性本自具足 此心即
佛 畢竟無異 依此而修者 是最上乘禪 亦名如來清淨禪 亦名一行三昧 亦名眞如三昧.
53) 박종호, 「如來禪에 대한 考察- 능가경 과 신회를 중심으로-」, 佛敎學報 제39호,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11-13쪽. 박종호는 이 글에서 여래선이 능가경 에 의거한 용어라는 점을 밝 히고 있지만, 신회의 사상과 능가경의 사상은 내용이 다르다고 한다. 하지만 박종호가 신회의 여래선의 내용이라고 지적하는 ‘무념’(無念)이나 ‘일체지를 체득하고, 무주나 반야바라밀의 행을 실천하는 것’은 이미 능가경 과 기신론 에서 그 특유의 심식설에 따라 빈번하게 언급되는 내 용이다. 박종호는 능가경 의 가르침은 여래의 관정(灌頂)과 신력(神力)에 의해 여래지에 오르 는 것이라고 파악했지만,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능가경 의 여래선은 무엇보다 ‘자각’(自覺)을 강조하는 데 그 특징이 있다.
54) 신회는 혜능과 신수(神秀)의 선사상을 각각 ‘무념’(無念)과 ‘이념’(理念)으로 대비시켰다. 그러 나 기신론 에 근거한 ‘이념’과 마찬가지로 무념 역시 능가경 , 기신론 에 근거한 것으로 본 래의 의미는 북종의 이념과 다른 것은 아니었다. 신회는 이것을 보다 강화시켜 주체적인 근본 지혜의 의미로 해석했던 것이다(柳田聖山, 추만호ㆍ안영길 옮김, 선의 사상과 역사 , 민족사, 1989, 111쪽). Bernard Faure역시 신수의 ‘이념’(離念)이 혜능의 ‘무념’과 마찬가지로 돈(頓)이 라고 본다. 그러나 완전히 같은 의미의 돈(頓)이라고 한 것은 아니고, 이 둘의 차이를 구분한다 면 매개과정을 통한 깨달음과 매개 없는 즉각적인 깨달음의 차이라고 한다(Bernard Faure, Rhetoric of Immediacy, Princeton University Press: Oxford, 1991, 4-5쪽). Faure가 지적 한 ‘매개’란 곧 ‘방편’을 말한다. 혜능의 선법에서 방편이라는 매개는 점차적 수행방법에서 통용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박재현의 설명에 따르면, 신수는 ‘방편’을 돈오와 연결시키고자 노 력했고, 그 결과로 ‘무생방편’(無生方便)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만들어냈다. 방편이란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개념인데, 이를 무생(無生)이라는 초시간적 개념과 연결시킨 것이다. 이 점은 신수 역 시 중국불교의 돈적(頓的) 패러다임 안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박재현, 앞의 책, 263-264 쪽.).
55) 북종계의 마하연이라는 화상은 티벳의 수도인 리사에서 중국의 돈오선종을 대표하여 카마라시 라 등의 점문파와 대결한 일이 있다. 종밀은 마하연을 신회의 제자라고 보고 있지만, 마하연은 스스로 분명하게 북종계라고 자처했다. 그만큼 후기의 북종선도 돈오화(頓悟化) 하고 있었던 것 이다. 柳田聖山, 앞의 책, 199쪽.
56) 六祖壇經 敦煌本, 大正48 353a, 善知識 我此法門,從上以來,先立無念爲宗,無相爲體,無 住爲本.
57) 위의 책, 338b, 法無頓漸 人有利鈍 迷即漸契 悟人頓修 是見本性 悟即元無差別 不悟即長劫輪 迴.
58) ‘돈’의 의미에 대해 윤원철은 ‘동시적’, ‘완전’(완벽), ‘무매개’로 정의했다. 이는 베르나르 포르 (Bernard Faure)가 ‘돈’을 신속(fast), 절대(absolute), 무매개(im-imediate)로 정의한 것을 수정한 것이다(Bernard Faure, Rhetoric of Immediacy, Princeton University Press: Oxford,1991, 33쪽). 윤원철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동시적이란 망념의 제거와 견성이 하나의 사 건이라는 의미이다. 둘째, 완전이란 돈오란 곧 성불로서 ‘부처가 되었는가 아닌가’를 따질 수 있 을 뿐, ‘얼마만큼 부처가 되었는가’ 하는 담론은 성립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셋째, 무매개란 깨 달음이 “단지 일어날 뿐”인 사건이기 때문에 수행방편에 의해 깨달음이 이루어진다는 인과의식 을 거부하는 것이다(윤원철,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와 오매일여」, 돈오돈수와 퇴옹성철의 수증 론 -성철성철스님 탄신 100주년 기념 제6차 학술포럼 자료집, 2012, 63-66).
59) 정준기에 따르면 선종의 수증론은 세 단계의 변천 과정을 거친다.
① 우리들은 본래 깨달은(本覺) 부처(佛)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전개되는 일체의 모든 행주좌와(行住坐臥)의 행위는 모두 깨달음의 표현이다.
② 우리들이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더더욱 좌선의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좌선 수행을 하고 있 을 때 비로소 깨달음이 전개되는 것이다.
③ 이치상으로는 우리들이 본래 부처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미혹(迷惑)하므로 수행하여 깨달아 본래 부처인 그 사실을 직접 체험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중 ①은 마조도일과 임제의현의 사상이고, ②는 송대 묵조선(黙照禪)의 사상이다. 이 두 사상은 본각문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고, 돈오적 사상이 강하게 주장될 때 나온 소산이다. ③은 간화선(看話禪)의 사상이며 시각문적 태도인데, 전시대의 본각사상이 지나치게 강화된 것에 대 하여 제시된 시각문적 수행방법이다. 정준기, 「看話禪의 始覺門적 수행구조에 대한 소고」, 가 산학보 제7호, 가산불교문화진흥회, 1998, 223-225쪽.
60) 柳田聖山, 앞의 책, 133-135쪽.
61) 김호귀, 「祖師禪의 修行과 信心의 관계」, 정토학연구 제11호, 한국정토학회, 2008,
144-145쪽.
62) 董群, 앞의 책, 322-324쪽.
63) 鎭州臨濟慧照禪師語錄 , 大正47 497b, 如今學者不得 病在甚處? 病在不自信處 爾若自信不及
…… 不得自由 爾若能歇得念念馳求心 便與祖佛不別.
64) 박재현, 「공안(公案)의 기능과 역할에 관한 철학적 연구」, 哲學 제85집, 한국철학회, 2005,
18-20쪽.
65) 大慧普覺禪師法語 卷23, 大正47 909b, 要識如來地麼 亦只是這信得及底 既信得及 不須起心
動念求出生死 …… 此事不論男之與女貴之與賤大之與小 平等一如 何以故 世尊在法華會上 只度得 一箇女子成佛 涅槃會上亦只度得一箇廣額屠兒成佛 當知此二人成佛 亦別無功用 亦只是直下信得及 更無第二念.
66) 박성배, 앞의 책, 146-150쪽.
67) Bernard Faure, 「몇 가지 思索-思想으로서의 元曉의 "生涯"」, 佛敎硏究 11ㆍ12호, 한국불교 연구원, 1995, 175쪽.
68) 위의 글, 173-174쪽.
69) 大乘起信論 , 大正32 577b. 是故一切法 如鏡中像無體可得 唯心虛妄 以心生則種種法生 心滅 則種種法滅故.
70) 宋高僧傳 卷4, 大正50 730a, 無何發言狂悖示跡乖疎 同居士入酒肆倡家 若誌公持金刀鐵錫 或 製疏以講雜華 或撫琴以樂祠宇 或閭閻寓宿 或山水坐禪 任意隨機都無定檢.
71) 석길암, 「중국 선종사에 보이는 원효에 대한 認識의 변화- 金剛三昧經 및 金剛三昧經論 과 관련하여-」, 韓國禪學 제15호, 한국선학회, 2006, 374-376쪽.
72) 大乘起信論疎記會本 한국불교전서(이하 韓佛)1, 言疑法者 謂作此疑 大乘法體爲一爲多 如是 其一 則無異法 無異法故 無諸衆生 菩薩爲 誰發弘誓願若是多法 則非一體 非一體故 物我各別 如 何得起同體大悲 由是疑惑不能發心.
73) 이종철, 중국불경의 탄생 , 창비, 2008, 195쪽.
74) 이 두 가지 요소는 대승불교의 성립배경에서 보이는 대승불교의 본질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와도 동일하다. 학계에서 논하는 대승불교의 성립문제는 크게 두 가지 관점으로 볼 수 있 다. 하나는 ‘불탑신앙’이라고도 불리는 관점으로, 교조(敎祖)인 석가모니를 사모하는 ‘속인신자’ 들이 주가 되어 형성된 것이며, 부처를 초인화ㆍ이상화 하여 많은 부처와 보살을 생각해내었다 는 것이다. 이런 다불(多佛)사상은 불타에 대한 동경이나 신앙의 산물이라는 관점이다. 이 관점 이 부처에 대한 신앙의 관점이라면, 다른 하나의 관점은 석가모니 외의 인간이 실제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현실’이 성립한 데서 대승불교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즉 ‘부처를 믿음’이 아니라 ‘부처가 된다’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고, 누구라도 부처가 되어 현실에 나타날 수 있으므로 시방삼세(十方三世)에 걸쳐 여러 부처가 등장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나아가 대승경전도 정각(正覺)을 이룬 사람이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부처가 될 수 있는 방법과 정각의 내용 등을 말한 것이라고 한다(上田義文, 박태원 옮김, 대승불교의 사상 , 민족사, 1989, 5부 2장 참조.). 도식적으로 대별해 보자면 정토사상이나 밀교의 경우에는 대승불교의 본질을 전자로 이해한 것이고, 선종과 원효의 경우에는 후자를 대승불교의 본질로 이해한 것이 라고 할 수 있다.
75) 平川彰, 이호근 옮김, 인도불교의 역사-上 , 민족사, 1989, 318-320쪽. 부파불교에서는 이러 한 문제는 등장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부파불교에서 수행의 목표로 삼는 것은 아라한이고, 아라한은 육체의 한계를 벗는 무여의열반으로서 깨달음의 완성에 이른다. 또 부파불교에서는 중생을 제도하는 공덕이 원만하게 구족되기 위해서 한 세계에 부처는 한 분밖에 존재할 수 없 다는 ‘시방계일불설’(十方界一佛說)을 주장한다. 권오민, 아비달마불교 , 민족사, 2009, 268-328쪽.
76) 會本, 韓佛1 741上, 初中言依一心法有二種門者 如經本言 寂滅者名爲一心 一心者名如來藏 此言 心眞如門者 卽釋彼經寂滅者名爲一心也 心生滅門者 是釋經中一心者名如來藏也 …… 如經言如來 藏者是善不善因 能徧興造一切趣生 譬如伎兒變現諸趣 如是等義在.
77) 위의 책, 741上-中, 然旣無有二 何得有一 一無所有 就誰曰心 如是道理 離言絶慮 不知何以目之 强號爲一心也. 유식사상과 여래장사상은 각각 염(染)ㆍ정(靜)을 실재로 보아서 ‘수행의 필요성’ 과 ‘깨달음의 본래성’에 대한 존재론적 근거로 제시했었다. 그러나 원효는 이 양자를 모두 정당 화할 수 있는 존재론적 근거는 없으며,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의식현 상의 실재성을 인정하면서 지속적인 자기반성을 통해 인식론적 전회를 모색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박재현, 「해석학적 문제를 중심으로 본 원효의 會通과 和諍」, 불교 학연구 제24호, 불교학연구회, 2009, 388쪽.
78) 일심은 다시 형이상학적 실체로 오해될 위험의 소지를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원효는 기 신론 에서 일심의 삼대를 배대하는 부분에서 다시 한 번 진여문과 생멸문의 분리를 강조함으로 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이 부분에서 원효의 주석은 다른 기신론 주석가들과 차별성을 드러낸다. 기신론에서 일심의 삼대(三大), 즉 체대(體大)와 상대(相大), 용대(用大)를 배대하는 문제에서 원효는 체대를 진여문에 배대하고 나머지 두 개는 생멸문에 배대했다. 법장의 주석과 비교하면, 법장은 일심을 일여래장심이라고 하여 생멸문의 자체를 진여문의 체와 동일시함으로 써 기신론 전체의 구조를 생멸문 속으로 끌어들여서 수직화 시켰다. 이것은 일심을 일여래장심 이라고 하여 생멸문의 비중을 크게 본 것이다. 법장의 관점은 혜원이 일심을 제9 아마라식으로 보고 그것을 진여문으로, 생멸과 불생불멸의 화합인 아뢰야식을 생멸문으로 하여 수직적 구조 로 변형시킨 것과 큰 차이가 없다. 혜원이나 법장은 기신론의 구조를 수직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일심을 궁극적 실재로서 상정하고, 발생론적이고 일원론적인 견지에서 기신론을 파악한 것이다. 원효는 진여문과 생멸문의 구조를 수평화시킴으로써 일심이 궁극적인 실체로서 파악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석길암, 「眞如ㆍ生滅 二門의 關係를 통해 본 元曉의 起信論觀」, 불교학연구 제5호, 불교학연구회, 2002 참조.
79) 會本, 韓佛1 741上, 何爲一心 謂染淨諸法其性無二 眞妄二門不得有異 故名爲一 此無二處 諸法 中實 不同虛空 性自神解 故名爲心.
80) 위의 책, 749上, 問 爲當心體只無不覺 故名本覺 爲當心體有覺照用 名爲本覺 若言只無不覺名本 覺者 可亦無覺照故是不覺 若言有覺照故名本覺者 未知此覺爲斷惑不 若不斷惑 則無照用 如其有斷 則無凡夫
81) 위의 책, 749上-中, 答 非但無闇 亦有明照 以有照故 亦有斷惑 此義云何 若就先眠後覺名爲覺者 始覺有覺 本覺中無 若論本來不眠名爲覺者 本覺是覺 始覺則非覺 斷義亦爾 先有後無名爲斷者 始 覺有斷 本覺無斷 本來離惑名爲斷者 本覺是斷 始覺非斷 若依是義 本來斷故 本來無凡 如下文云一 切衆生本來常住入於涅槃菩提之法 然雖曰有本覺故本來無凡 而未有始覺故本來有凡.
82) 大乘六情懺悔 韓佛1, 843上, 但是一心 臥一如床.
83) 金剛三昧經論 , 韓佛1 629上, 菩薩修觀 獲無生時 通達衆生本來寂靜 直是本覺 臥一如床 以是 本利.
84) 會本, 韓佛1 699下, 言起信者 依此論文 起衆生信 故言起信 信以決定謂爾之辭 所謂信理實有 信 修可得 信修得時有無窮德 此中信實有者 是信體大 信一切法不可得故 卽信實有平等法界 信可得者 是信相大 具性功德熏衆生故 卽信相熏必得歸原 信有無窮功德用者 是信用大 無所不爲故 若人能起 此三信者能入佛法 生諸功德 出諸魔境 至無上道 如經偈云 信爲道元功德母 增長一切諸善根 除滅 一切諸疑惑 示現開發無上道 信能超出衆魔境 示現無上解脫道 一切功德不壞種 出生無上菩提樹 信有如是無量功德 依論得發心 故言起信.
85) 석길암, 「출발점인가 도달점인가」, 믿음, 디딤돌인가 깨달음인가 , 운주사, 2012, 99-103쪽.
86) 經論 , 韓佛1 654中, 信此身中 眞如種子 爲妄所翳 捨離妄心 淨心淸白 知諸境界 意言分別.
87) 이 점에서 송고승전 의 경론 출현 설화에서 원효가 경론 의 편집에 관여했다고 기록한 것 을 어느 정도 신뢰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88) 金剛三昧經論 , 韓佛1, 608中, 如是六門 觀行周盡 所以然者 凡諸妄想 無始流轉 只由取相分別 之患 今欲反流歸源 先須破遣諸相 所以初明觀無相法 雖遣諸相 若存觀心 觀心猶生 不會本覺 故泯 生心 所以第二顯無生行 行旣無生 方會本覺 依此化物 令得本利 故第三明本覺利門 若依本覺 以利 衆生 衆生卽能從虛入實 所以第四明 入實際 內行卽無相無生 外化卽本 利入實 如是二利 以具萬行 同出眞性 皆順眞空 是故第五明眞性空 依此眞性 萬行斯備 入如來藏一味之源 所以第六顯如來藏旣歸心源 卽無所爲 無所爲故 無所不爲 故說六門 以攝大乘.
89) 위의 책, 609上, 又此六品 合爲三門 前二品 攝觀行始終 次二品者 敎化本末 其後二門 攝因成果 又前二品 遣相歸本 中間二品 從本起行 後二品者 雙顯歸起 以此二三 攝大乘盡.
90) 會本,
91) 흔히 선의 본질에 관해서 논의할 때 정과 혜의 관계 여하만을 논하는 경향이 있지만 선에 관 한 원효의 관점은 아예 차원(dimension)이 다르다. 원효의 문제의식은, 중생 제도라는 보살의 대비심(大悲心)이 본질로 자리 잡을 때만이 정혜쌍수(定慧雙修)가 가능하다는 데 있다. 원효가 생각한 ‘참된 선’ 곧 ‘선바라밀’의 완성은 대비의 바탕 위에서 정혜를 같이 닦음으로써 이루어지 는 것이다. 이종철, 「선종 전래 이전 신라의 선- 금강삼매경론 에 보이는 원효의 선학」, 韓國 禪學 제2호, 한국선학회, 2002, 36-37쪽.
92) 金剛三昧經論 , 韓佛1, 662上, 若離大悲 直修定慧 墮二乘地 障菩薩道 設唯起悲 不修定慧 墮 凡夫患 非菩薩道 故修三事 遠離二邊 修菩薩道 成無上覺 故言如是三事 成就菩提 若不俱行此三事 者 卽住生死 及着涅槃 不能流入 四智大海 卽爲四魔所得便也.
93) 위의 책, 629下, 菩薩修觀 獲無生時 通達衆生本來寂靜 直是本覺 臥一如床 以是本利 利益衆生.
94)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본각리품이 생멸문과 관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생멸문에 서 바라본 세계는 진여의 세계가 아니라 생멸현상과 분별이 있는 현상적 세계이다. 생멸문에서 바라본 세계는 개체들이 뒤얽혀 있는 현실적인 세계다. 보살과 중생, 제도하는 자와 제도되는 자가 나뉘는 것도 생멸문 안에서의 이야기라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95) 會本, 韓佛1 700下, 佛地所有萬德之中 如來唯用大悲爲力 故偏擧之 以顯佛人 如增一阿含云 凡 聖之力有其六種 何等爲六 小兒以嗁爲力 欲有所說 要當先嗁 女人以瞋恚爲力 依瞋恚已 然後所說 沙門婆羅門以忍爲力 常念下於人 然後自陳 國王以橋慢爲力 以此豪勢而自陳說 阿羅漢以專精爲力 而自陳說 諸佛世尊以大悲爲力 弘益衆生故 是知諸佛偏以大悲爲力 故將表人名大悲者.
96) 박재현, 앞의 책, 254-255쪽.
97) 金剛三昧經論 , 韓佛1, 如來辯才 無碍自在故說一偈 攝諸佛法 佛法之要 …… 令鈍根者 誦持一 偈 常念思惟 乃至遍知一切佛法 是名如來善巧方便.
98) 박재현, 앞의 책, 181-183쪽.
99) 주 59) 참조
100) 권오민, 인도철학과 불교 , 민족사, 2004, 14장 참조.
101) 일례로 선종의 4조인 도신(道信, 580-651)은 ‘마음이 불생불멸인줄 알면 이것이 바로 불국 토다’라고 하며, 입도안심요방편문 (入道安心要方便門)에서 염불을 능가경 의 ‘제불심제일’(諸 佛心第一)과 동등한 수준의 수행으로 인정하는 태도를 보인다. 안준영, 「念佛禪에서의 깨달음의 문제」, 정토학연구 제20호, 정토학연구회, 2009, 205-206쪽.
102) 한보광, 「한국 정토사상의 특색」, 정토학연구 제13집, 한국정토학회, 2010, 91쪽. 한보광은 유심정토나 자성미타에 대해 ‘변질된 정토교학’이라고 평가한다.
103) 無量壽經宗要 , 韓佛1 553下, 然夫衆生心性 融通無礙 泰若虛空 湛猶巨海 若虛空故 其體平等 無別相而可得 何有淨穢之處 猶巨海故 其性潤滑 能隨緣而不逆 豈無動靜之時 …… 若斯動寂 皆是大夢 以覺言之 無此無彼 穢土淨國 本來一心 生死涅槃 終無二際.
104) 정용미, 「원효의 淨土사상에 있어서 淨土往生의 논리와 수행체계」, 동아시아불교문화 제6 집,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0, 195쪽.
105) “돈적頓的이고 불퇴전적인 정토 신앙이라면 그것이 곧 조신이다. 선 불교에서처럼 ‘나는 부 처이다’라고 하든 정토 불교에서처럼 ‘나는 이미 아미타불의 서원에 의해 구제되었다’고 하든 그것은 상관없다. …… 조신에 의하면, 누구나 다 이미 완벽한 부처님이다. …… 선문은 부처님 의 대지혜의 문이요 정토문은 부처님의 대자비의 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처의 지혜와 자비는 언제나 함께 한다.” 박성배, 앞의 책, 188-189쪽.
106) 無量修經宗要 , 韓佛1 572中, 今此文略辨其生相 於中有二 先明正因 後明助緣 經所言正因 謂 發菩提心.
107) 원효가 보리심을 왕생의 정인(正因)으로 삼는 것은 왕생행(往生行)을 깨달음으로 가는 대승보 살도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藤能成, 원효의 정토사상 연구 , 민족사, 2001, 278쪽.
108) 무량수경종요에서는 중생의 공덕이 많고 적음에 따라 왕생하는 것을 구분하는데 상 중 하 삼 배인으로 분류하고 있따. 상배인과 중배인은 정인을 갖추고 사문이 되거나 발심을 하는 중생을 가리키고, 하배인은 깊은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보정성인과 보살종성으로 나누고 있다 (김경집, 「원효의 정토사상에 나타난 왕생의 원리」, 한국불교학 제22호, 한국불교학회, 1997, 158쪽). 하배인을 부정성인과 보살종성 두 가지로 나누는 것은 중국의 정토교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원효만의 독특한 특징이다(정철호, 「元曉의 淨土信仰과 思想에 대한 硏究」, 동아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7, 128쪽).
109) 無量修經宗要 , 韓佛1 527下, 所言順理發心者 信解諸法皆如幻夢 非有非無 離言綠慮 依此信 解 發廣大心 雖不見有煩惱善法 而不撥無可斷可脩 是故雖願悉斷悉修 而不違於無願三昧 雖願皆度 無量有情 而不存有能度所度 故能隨順於空無相
110) 위의 책, 527中, 言隨事者 煩惱無數 願悉斷之 善法無量 願悉修之 衆生無邊 願悉度之 於此三 事決定期願.
111) 정철호의 해석을 따르면 변지(邊地)라는 개념이 갖는 의의는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원효는 모든 이의 왕생이 가능하다고 역설하며, 그 주장을 신해와 앙신으로 완성시켰다. 그런데 신해와 앙신을 이루는 자와 그것이 결여된 자들의 왕생 가능성에 대한 문제가 남는다. 의혹하 는 자의 불왕생은(不往生) 왕생에서 탈락하는 자를 낳고, 이들에게 의혹해서도 왕생한다는 가능 성을 열어주면 앙신을 강조할 필요가 없어진다. 변지는 이러한 상반된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 는 완충적 개념이다. 변지의 개념이 이론적 근거를 충분히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중생이 앙신으로 왕생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의의가 있다. 정철호, 앞의 글, 159-160쪽.
112) 無量修經宗要 , 韓佛1 561下, 第四疑者 謂疑大圓鏡智 遍昭一切境義 云何生疑 謂作是言 虛空 無邊故 世界亦無邊 世界無邊故 衆生亦無邊 衆生無邊故心行差別 根欲性等 皆是無邊際 云何於此 能得盡知 爲當漸漸修習而知 爲當不修 忽然頓照 若不修習而頓照者 一切凡夫皆應等照 等不修故 無異因故 若便漸修 終漸得盡知者 卽一切境非無邊際 無邊有盡 不應理故如是進退 皆不成立 云何 得普照 名一切種智.
113) 위의 책, 562上, 譬如世界無邊 不出虛空之外 如是萬境無限 咸入一心之內 佛智離相 歸於心原 智與一心 渾同無二.
114) 無量修經宗要 , 韓佛1 555上, 皆是如來願行所成 非生彼者自力所1辦 不如穢土外器世界 唯由 衆生共業所成.
115) 위의 책, 557下, 凡諸所說往生之因 非直能感正報莊嚴 亦得感具依報淨士 但承如來本願力 故隨 感受用 非自業因力之所成辦.
116) 정용미, 앞의 글, 200쪽.
117) 석효란, 佛敎의 傳統信仰(淨土信仰) , 반야회, 1985, 52쪽 藤能成, 앞의 책, 265쪽에서 재인 용.
118) 無量修經宗要 , 韓佛1 561上, 躃者自力勤行 要逕多日至一由旬 若寄他船 因風勢艢 一日之間 能至千里 可言 躃者之身 云何一曰至千里耶? 世閒師之身 尙作如是絶慮之事 何況如來法王之勢 而 不能作不思議事耶?
119) 남동신, 앞의 글, 89쪽.
120) 大乘起信論 , 大正32 583a, 衆生初學是法欲求正信 其心怯弱 以住於此娑婆世界 自畏不能常 值諸佛 親承供養 懼謂信心難可成就 意欲退者 當知如來有勝方便攝護信心 謂以專意念佛因緣 隨願 得生他方佛土 常見於佛永離惡道 如修多羅說 若人專念西方極樂世界阿彌陀佛 所修善根 迴向願求 生彼世界 即得往生 常見佛故 終無有退 若觀彼佛眞如法身 常勤修習畢竟得生 住正定故.
121) 이종철, 「包越의 이념」, 대순사상논총 제17집, 대진대학교, 2004, 81쪽.
122) 無量修經宗要 , 韓佛1, 虛空無邊故 衆生無數量 三世無際故 生死無始終 衆生旣無始終 諸佛亦 無始終 若使諸佛 有始成者 其前無佛 …… 雖實無始 而無一佛本不作凡 雖皆本作凡 而展轉無始 以是淮知衆生無終雖實無終 而無一人後不作佛 雖悉後作佛 而展轉無終.
123) 서재영, 「생태계(生態界)에 대한 선사상적(禪思想的) 이해-법계, 질서, 개체의 상호관계성을 중심으로」, 韓國禪學 제8호, 한국선학회, 2004, 84-87쪽.
124) 주 75) 참조.
125) 주 87) 참조.
126) 최원식, 「신라 보살계 사상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42-43쪽. 원효는 계율에 관해 여러 저술을 남겼는데 특히 범망경 에 대해서는 종요(宗要)와 소(疎), 약소(略疎), 사기 (私記) 등 4종의 저술을 남겼다. 이는 원효가 범망경 의 계율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 해준다.
127) 사분율이 행위의 규제를 목적으로 한다는 것은 다음 일례를 통해 알 수 있다. 부처가 사위성 (舍衛城)에 있을 때 가류타이(伽留陀夷)라는 비구가 자위를 통해 음욕을 해소한 일이 있었고, 이 일로 고의적인 자위를 금하는 계율이 정해졌다. 하지만 음욕을 이기지 못한 가류타이가 여 인을 방안으로 데리고 들어와서는 포옹하고 입을 맞추었고, 이것이 알려지자 다시 고의로 여인 의 몸에 접촉하는 일을 금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욕을 이기지 못한 가류타이는 다시 여 인들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와서는 여성의 성기를 거론하는 음담을 통해 성욕을 풀려 하였다. 이에 여인들에게 음담을 금하라는 계율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도 성욕을 조절할 수 없었던 가 류타이는, 여인들을 자신의 방으로 끌어들이고는 자신의 수행을 칭찬하면서, 그들의 몸을 공양 으로 바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음욕 때문에 여인네들에게 몸을 공양하도록 요구하지 못하게 하는 계율이 생기게 되었다. 만약 마음을 규제하기 위해서라면, ‘음심을 가지지 말라’는 조항만 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위에서처럼 네 번에 걸친 계율의 제정이 있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보 이지 않는 마음은 객관적인 규제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사분율은 승단이라는 조직의 질서유지 를 위해 필요한 것이었고, 행위를 규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던 것이다. 박정록, 「계율에의 불 복종」, 불교평론 15호, 불교평론사, 2003.
128) 남동신, 「元曉의 大衆敎化와 思想體系」,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45-47쪽.
129) 이상엽, 「 범망경』보살계와 유식학파 보살계의 비교 연구 : 인성에 대한 입장 차이를 중심 으로」, 불교학연구 제27호, 불교학연구회, 2010 참조.
130) 菩薩戒本持犯要記 (이하 要記), 韓佛1 581上, 菩薩戒者 返流歸源之大津 去邪就正之要門也 然邪正之相易濫 罪福之性難分 何則或內意實邪 而外迹似正 或表業同染 而中心淳淨 …… 是以專穢道人 剋私沙門 長專似迹 以亡眞正 每剋深戒 而求淺行.
131) 남동신, 영원한 새벽 원효 , 새누리, 1999, 119쪽.
132) 要記, 앞의 책, 582上, 坐正戒者 如有一類 性是淺近 於世大運 多慢緩時 獨正其身 威儀無缺 便起自高陵他之心 慢毁乘急戒緩之衆 此人全其不善 以毁大禁 轉福爲禍 莫斯爲甚也 …… 雖順聲 聞自度心戒 而逆菩薩廣大心戒.
133) 최원식, 앞의 글, 67-68쪽.
134) 要記, 韓佛1 581中, 於一讚毁 有四差別 若爲令彼赴信心故 自讚毁他 是福非犯 若由放逸無記心 故 自讚毁他 是犯非染 若於他人 有愛恚心 自讚毁他 是染非重 若爲貪求利養恭敬 自讚毁他 是重 非輕.
135) 要記, 위의 책, 585上, 雖依如前所說法門 能識輕重之性 兼知淺深之狀 而於戒相 不如實解 於 罪非罪 未離二邊者 不能究竟持而無犯 不趣淸淨戒波羅蜜 其故何耶 然戒不自生 必託衆緣 故決無 自相 卽緣非戒 離緣無戒 除卽除離 不得中間 如是求戒 永不是有 可言自性 不成就故 而託衆緣 亦 不無戒 非如兎角 無因緣故 如說戒相 罪相亦爾 如戒罪相 人相亦然 若於此中 依不是有 見都無者 雖謂無犯 而永失戒 誹撥戒之唯事相故 又於此中 依其不無 計是有者 雖曰 能持 持卽是犯 違逆戒 之如實相故.
136) 大乘六情懺悔 , 韓佛1 842中, 然此諸罪 實無所有 衆緣和合假名爲業.
137) 위의 책, 不能思惟業實相者 雖無罪性將入泥梨.
138) 한자경, 불교철학과 현대윤리의 만남 , 예문서원, 2008, 241쪽.
139) 金剛三昧經論 , 韓佛1 621上, 卷至念堅固 心常無住 淸淨無染 不着三界 是尸波羅密.
140) 안옥선, 「불교의 ‘선악불이(善惡不二)’에 대한 이해」, 불교학연구 제14호, 불교학연구회,
2006, 248-249쪽.
141) 조성택, 「불교계율에 대한 새로운 이해」, 불교학연구 제8호, 불교학연구회, 2006, 246-258쪽. 조성택은 ‘살불살조’(殺佛殺祖)의 레토릭이 단지 권위로부터의 탈피가 아니라 깨달 음에 관한 한 세간적 윤리의 무용성을 지적하는 선불교의 반사회적(anti-social), 반계율적 (anti-nomial) '자기정체성'의 확립을 위한 선언이라고 본다. 또, 도덕 윤리적 행위의 실체성을 부정하는 무상계를 최상위의 계(戒)로 인정함으로써 원효나 경허의 파계 행위가 깨달음의 증명으로 인식하게 했다고 비판한다. 조성택의 비판 역시 깨달음에 대한 초월적 인식이 전제되어 있으며, 무상계의 근거인 자비를 간과하고 있다.
142) 한동익, 「禪佛敎 倫理의 正體性 에 관한 硏究」,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1, 84-93쪽.
143) 박재현, 앞의 책, 151쪽. 이 점에서 원효의 계율관에 대해 종종 ‘행위의 형식보다 동기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고 해석하는 것은 보다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원 효가 행위의 형식으로 실계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고 한 것은 맞지만, 그 대립적 개념으로 동 기가 들어서도 좋은지는 의문스럽다. 그리고 그 ‘동기’ 역시 단순히 선한 의지가 아니라 지혜를 증득한 보살의 자비 외에 다른 것은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원효 계율관에서 외형상 실계(失 計)가 허용되는 경우는 예외적인 상황에서 보살의 자비심으로 판단을 내렸을 때뿐이며, 단순히 ‘선한 의도’를 긍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소 , 그리고 경론 에서 원효가 대승 보살에 대별시 키고 있는 대상이 이승과 범부라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원효사상에서 보살은 이승의 자리만 추구하는 협렬한 마음과, 선한 마음은 있되 지혜를 갖추지 못한 범부의 우환을 극복한 존재로 그려진다.
144) 金剛三昧經論 , 韓佛1, 是明不住凡聖戒相 卽是上言不住戒相 是名出世尸波羅密.
145) 무주(無主)의 계바라밀(戒波羅蜜)을 현대적 윤리관념과 비교한다면 상황윤리(situation ethics)가 가장 근접한 관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황주의 윤리는 율법주의 (legalism, 원리 윤리)와 무율법주의(antinomianism, 윤리 상대주의) 사이의 제 3의 접근 방법 으로 제시된 윤리관이다. 상황윤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 선이 객관적으 로 사물들의 본질 속에 주어진다는 관념을 거부하고 선악에 대한 판단보다 상황에 적합한가를 문제 삼는다. 둘째, 모든 원리들이나 규범들을 인정하지만 그 자체가 선험적으로 보편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셋째, 사랑은 절대적인 삶의 원리로 받아들인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선하고 옳은 삶의 원리는 사랑으로서, 유일한 규범 또는 법칙으로 삼는다.” 박재주, 「狀況倫理로서의 儒家의 中庸倫理」, 동서철학연구 제43호, 한국동서철학회, 2007, 198-199쪽. 첫 번째와 두 번째 조건은 일치한다고 할 수 있지만, 사랑과 자비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고 본다. 보살의 자비는 숭고한 사랑만으로는 부족하고, 반드시 지혜를 동반해 야 하기 때문이다. 이 지혜란 세계의 연기적 실상을 통찰하는 것이고, 그 사실을 깨달은 수행자 에게 자비는 선의(善意)의 발현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따라야 하는 삶의 원칙이 된다. ▲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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