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와 의상에게 배웁니다 (2002. 11)
(김상현 교수는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경상대학교를 졸업하고 단국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동국대학
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및 한국교원대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동국대학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중이다. 성천아카데미의 <동서인문고전강좌>에서‘ 원효와 의상’을 강의했다. 저서로『신
라화엄사상사』, 『역사로 읽는 원효』, 『한국불교사 산책』, 『신라의 사상과 문화』, 『한국의 차시』등이
있고, 한국차문화사 및 불교사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 일전에 선생님께서 하신 말이 생각
납니다. 역사학자로서 동북아를 개관해 볼 때, 한∙중∙일을
통틀어 7세기가 특히 격동적인 시기여서 그 시대에 활동했
던 원효와 의상, 김춘추와 김유신 등을 주인공으로 해서 소
설을 한 번 써보면 우리 민족의 정신을 고양하는 훌륭한 서
사시가 될 것이라는 말씀 말입니다.
사실은 저기 제 서재의 책장 두 칸을 차지하고 있는 서
류 뭉치들이 모두 그것에 관해 주제별로 정리해놓은 자료
들입니다. 7세기는 한반도에선 우리나라 최초로 통일이
이루어지는 때로, 끝없는 전쟁의 와중에서 수많은 영웅호
걸들이 출현하는 시대입니다. 중국도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하여 토대를 다지는 시대로 현장과 지엄,
법장 등의 정신적 거인들이 출현하여, 그 사상이 우리나
라와 일본과도 상호 긴밀하게 교류되던 격동의 시기였습
니다. 당시엔 동아시아 전체가 큰 소용돌이에 빠져있었는
데, 특히 우리 한반도에선 민족이 하나로 통합되는 과정
에서 정치, 전쟁, 국제관계의 갈등이 끊이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여러 인간 군상의 신의와 배신, 사랑과 증오가
장대한 파노라마들 이룹니다.
▶ 그렇게 정치, 사상적으로 흥미로운 시대지만, 일반인들은 원
효와 의상, 혹은 김유신과 연개소문에 관해 이름만 들어왔지
자세한 내용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중국의『삼국지』나 일본
의『도쿠가와 이에야스』등의 역사소설이나, 아니면 시오노
나나미의『로마인 이야기』같은 책이 있으면, 우리도 민족의
긍지와 함께 자랑스런 역사의 교훈을 배울 수 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일반인의 입장에서 신라의 삼국통일 전후의 역사에 관
해 좀 알아보려 해도, 그에 관한 책이 거의 없는 것이 작
금의 실정입니다. 그래서 저라도 그 시대 영웅호걸의 이
야기를 소설이나 픽션의 형식을 빌어 한 번 써볼까 해서
오래 전부터 자료를 수집해 왔지만, 다른 잡다한 일에 떠
밀려 집필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세월의 흐름에 떠밀려온
형편입니다. 다만 가슴속에 꿈으로 접어두고 있는 것이지
요. 그 일을 실현하려면 문장력과 문학적 상상력, 문헌 사
료의 뒷받침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지를 답사하여 역사지
리에 대해 밝아야 하는데, 너무 엄청난 일이라…
▶ 분단시대를 사는 역사학자로서 전문적인 학문 연구 외에 앞
으로 닥칠 통일을 대비하는 마음자세와 정신을 학생들과 일
반인들에게 길러주기 위해서라도 그런 작업은 대단히 의미
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 성천아카데미 회원들이 이번 봄
에 일본의 명치유신을 공부하고 현지를 답사하고 돌아왔습
니다. 오사카에서 일본의 국민작가로 불리는 시바 료타로의
기념관을 들렀을 때, 그의 대표작『료오마( )가 간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감명 받았습니다. 시바는 2차 세계대전
후에 패망의 아픔 속에서 의기소침해 있는 국민들에게 용기
를 주고 희망을 북돋아주기 위해, 명치유신의 혼란기에 일본
근대화의 비전을 제시한 유연한 정신의 청년 료오마의 삶을
소설화함으로써 전후 일본인들을 다시 일어서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책이 수천만 권이나 팔렸다니 놀랍습니다. 그
런 책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마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통일이 이루어질 가능성
이 큽니다. 그런 의미에서 7세기에 신라가 통일을 이룩한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며, 미래 한국에도
중요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역사 속에는
극적인 인간 드라마도 너무나 풍부합니다. 예를 들어, 오
늘의 합천 지방인 대야성 전투의 경우‘검일’이라는 인물
이 겪게 되는 충성과 반역, 사랑과 복수의 일화가 너무나
생생합니다. 또한 얼마 전에 출토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
게 한 백제 향로에 얽힌 이야기도 흥미진진합니다. 신라
와 백제간의 치열한 관산성 전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일본서기에 나오는데, 일본에 불교가 본격적으로 전래된
것도 이 전투와 연관이 있습니다. 그 모든 이야기가 백제
향로를 축으로 전개됩니다.
▶ 그 당시 동북아 삼국에 큰 인물들이 쏟아져 나온 것에 무슨
시대적 배경이 있었을까요?
신라에선 김춘추와 김유신, 그리고 후자의 동생인 김흠
춘 같은 화랑 출신 영웅들과 원측과 자장, 원효와 의상 등
의 불교 고승들이 나왔죠. 고구려에선 연개소문과 담징,
그리고 백제에선 성왕과 경흥 등의 걸물들이 쏟아져 나왔
습니다. 당나라에서는 현장, 지엄, 법장, 규기 등의 고승
들이 나왔죠. 그런 뛰어난 인물들이 배출된 시대적 배경
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사회가 극히 혼란스러
웠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역시 평화로운 시대보다도,
8 진리의 벗이 되어
어둡고 고통스런 시대일수록 송죽 같은 인물들이 두드
러지는 것이지요. 위기를 기회로 바꿔 가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라면, 어려운 시절일수록 영웅이 돋보이게 마련이
죠. 만일 소설이 쓰여진다면, 아마 김유신과 원효의 이야
기가 축을 이루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저에게는 참으
로 매력적인 주제이지만, 현실 여건상으로는 그 꿈을 이
룰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선생님이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온 원효대사를 간
략히 소개해 주십시오.
우리나라의 여러 인물 중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창의적
인 사상을 이룩한 분이 역시 원효와 의상이지 않을까 생
각합니다. 그 중에서도 원효는 나라 밖으로 한 발짝도 나
가지 않았으면서도 가장 높은 사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 경이롭습니다. 원효의 핵심은‘화쟁 사상’인데,
인간 사회의 여러 갈등과 다툼을 화해시켜서 조화로운 질
서를 만들어 나가자는 생각입니다. 원효는 젊은 시절을
전쟁과 분열의 소용돌이 속에서 보내고, 말년에는 삼국통
일이 이루어진 시대를 살았는데, 원효의 고민도 어떻게
하면 어려움에 빠진 백성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는가 하
는 것이고, 그런 그의 사상이 자연스럽게 통일신라의 정
신적 기반을 이루게 되는 것이죠.
▶ 의상의 사상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의상의‘화엄사상’도 역시 전체적인 조화를 지향하는
데 그 특징이 있습니다. 원효와 의상, 두 분이 살았던 시
대 자체가 대립과 분열에서 통합과 조화로 나아간 때였습
니다. 화엄사상은 부분과 전체가 어떻게 조화롭게 일치를
이루는가 하는 생각이니까, 두 분의 사상은 그 시기에 대
단히 적절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상은 오늘의 우리
에게도 유효하며, 어떻게 현실에 적용하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들의 몫입니다.
▶ 화엄경은 불교 최고의 철학을 집대성한 것인데, 원효와 의상
이 그 사상에 정통했다는 것은 당시 가장 선진 사상을 체득
하고 최고봉에 올라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화엄
사상의 의의에 대해 좀 더 설명해 주십시오.
화엄경은 부처님의 깨달은 내용에 관한 책으로 한편으
론 그 깊은 오의 와 거대한 사유체계를 설명하면서, 다
른 한편으론 일반인들이 어떤 수행의 과정을 거쳐 그 깨
달음에 도달할 것인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철학적으로
는 대단히 어렵고 까다롭지만, 신앙적으로는 쉽고 자상하
게 해설되어 있습니다. 의상이 중국의 화엄종 2조인 지엄
밑에서 공부한 뒤—나중에 3조가 되는 법장은 그 당시 행
자로 의상의 후배였지요—, 화엄경을 210자로 압축한 <
화엄일승법계도>에 화엄사상이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의상이 제자들과‘화엄육상’인 전체와 부분, 동질성과 이
질성, 이루어짐과 무너짐의 양상에서 상호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하는 문제를 심도 있게 토론하는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우주의 화엄적 원리에 대한 신라인의 깊은
이해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불국사와 석굴암입니다. 혹
자는 화엄사상이 전제왕권의 강화를 위한 철학이라고 오
해를 하지만, 그것보다는 이질적인 삼국민들을 통합하는
정신적 기반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 의상과 원효가 함께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원효는 중
간에서 깨달음을 얻어 되돌아오고 의상은 화엄학의 본산에
가서 법을 이어 받고 온 것이 비교됩니다. 원효도 방대한
화엄경소를 남길 정도로 화엄경을 깊이 연구했고, 가장 좋
아했던 불경 구절도 화엄경의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나, 일
체 걸리지 않는 자유인이 된다( )>라
고 할 정도로 화엄에 통달하지 않았습니까. 두 사람 모두
화엄경을 압축하여 게송을 지었는데, 그 제목이 보여주는
바대로, 화엄에 대한 해석의 입장이 다른 것이 재미있습니
다.
의상은「법성
게 偈」라 하여
진리의 본체( )를
중시했고, 원효는
「유심게 偈」라
하여 마음의 작용
( )을 중시한 것
같습니다.
두 분의 결정
적인 차이는 의
상이 전적으로
화엄학에 몰두했
던 반면, 원효는 화엄뿐만 아니라 불경 전체를 두루두루
공부했다는 점입니다. 원효도 화엄에 대해선 의상에게서
배우기도 했습니다. 또 의상은 방대한 화엄을 공부했지만
표현은 아주 상징적이고 함축적으로 간략히 한 반면, 원
효는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면서 많은 작품을 남긴 차이가
있습니다. 의상은 한국 화엄종을 창시하면서 제자 양성에
힘썼고, 원효는 성속 에 구애받지 않고 대중불교를 전
파하는데 힘썼습니다. 아무튼 성 이든 심 이든 간에, 의
상이나 원효가 말했던 의미는 철저히 현실에 바탕을 둔
것이었는데, 요즘 현대인들은 자칫 관념론으로 흐르기 쉬
워서, 그것은 조심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에서는 여러 불경 중에서 유독 화엄경
을 중시한 것 같습니다. 해인사나 부석사 등 화엄경과 관계
된 사찰도 많구요. 그것은 원효와 의상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우리의 심성과도 연관이 있지 않나 생각됩니
다. 화엄경은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이 주불로 현실보다는 형
이상학적 원리를 상징하지 않습니까. 일본에선 상대적으로
법화경을 중시하는 것을 보면, 우리의 기질이 좀 더 철학적
이고, 원리 지향적인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융성했던 불교사상을 꼽으라면 역
시 화엄사상을 먼저 들게 됩니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법
화경이 유행하지만, 그 이외에는 전통적으로 화엄경이 중
시되었습니다. 문자에 의지하지 않는 선가 家에서도 역
시 금강경과 함께 화엄경을 소중히 여기지요. 여기에는
의상이 세운 화엄종과 화엄십찰이 크게 교세를 떨친 것도
영향이 큰 것 같습니다. 어쨌든 한국 유학이 중국이나 일
본 유학보다 명분을 중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 인간의 지성과 사유가 다다를 수 있는 최고봉이면서 지금의
서구현대철학과 견주어볼 때 조금도 손색이 없는 철학이 화
엄경에 담겨 있다고 볼 때, 지금으로부터 무려 천삼백년 전
에 원효와 의상이 그런 경지에 도달했었다는 것은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불교가 전래되고 백 수십 년 남짓한 시간 안에 원효와
의상 같은 분들이 나왔다는 게 정말 신기할 정도입니다.
그 분들 이전에는 불교사상가나 학자가 안 보이고, 원광
법사나 자장율사 같은 분들이 있었지만, 이 분들은 당시
의 환경에 의해 정치적인 성격이 강했던 분들이지 대학자
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원효 같은 분이 불교의 시작과
함께 불쑥 솟아버린 것입니다. 아마 원효보다 일이십 년
전에 많은 신라 스님들이 당나라 현장 문하로 유학을 떠
났다 돌아오면서 최신 학문성과를 담은 서적을 많이 가지
고 들어왔고, 원효가 그 책들을 읽었던 게 한 원인이 아닌
가 추측해볼 수는 있겠습니다. 그래도 원효라는 인물 자
체의 천재성이 그만큼 뛰어났던 것입니다.
▶ 당시 중국 사상계의 동향은 어땠습니까?
현장이 십칠 년 간 인도에 유학하고 돌아와 경전들을
번역하여 유포하면서 신학문을 펼쳤는데, 그 새 번역본들
은 바로 신라로 수입되었습니다. 원효와 의상도 처음에는
현장 문하로 가기를 원했을 정도로 신라에 큰 영향을 끼
쳤습니다. 현장과 그 제자인 규기가 유식학을 널리 떨쳤
고, 특히 규기와 신라에서 건너간 원측 사이에 큰 토론이
일어납니다. 지엄과 그 제자인 법장도 일세를 풍미하는
저술을 펴내지요. 지엄은 가장 중요한 두 제자인 의상과
법장을 일러, 전자는‘의지 ’, 후자는‘문지 ’라고
불렀습니다. 역시 의상은 실천신앙 쪽으로 갔고, 법장은
50권이 넘는 저술을 남긴 대학자가 되지요. 이렇게 중국
의 영향으로 신라에선 8세기 후반까지 유식학과 화엄학
이 널리 성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원효의 위대성은 이런
수입 학문을 소화함과 동시에 거기에 머물지 않고 자신의
독특한 학문을 펼친 데 있습니다. 원효는 구마라집의 구
역 불경과 현장의 신역 불경을 두루 섭렵하고, 화엄과 유
식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국내에만 머물러 있으면서 국
제적인 학문 수준을 뛰어넘는 대학자가 되었다는 게 정말
놀랍습니다. 또한 편안히 앉아서 공부만 한 게 아니라, 그
시절의 위급한 국내외 정치상황과 수많은 전쟁의 와중에
휩쓸리면서도 큰 학문적 성취를 이뤄냈다는 걸 생각하면,
원효는 정말 우뚝 솟은 큰 봉우리입니다.
▶ 선불교는 언제 한국에 들어왔습니까?
당나라에서 선풍을 떨치던 남종선이 도의에 의해 들어
온 것은 9세기 이후입니다. 선종을 확립한 혜능과는 상관
없이 원효의 경우『금강삼매경론』에서‘삼매’를 통하여
선에 관한 깊은 이해를 가집니다. 원효의 선사상은 중국
과는 다른 것으로, 독자적인 연구 대상입니다.
▶ 당시 일본의 형편은 어땠습니까?
그 무렵 일본은 당나라보다 신라에 유학승을 더 많이
파견하여 신라불교를 수입해 갑니다. 일본 화엄을 일으킨
사람은 심상 스님인데, 그를 신라 출신으로 일본에 건너
갔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아니면 일본 출신의 신라 유학
승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대적으로는 원효의 제
자쯤 되는 그는 동대사에서 화엄을 강의하며 일본불교의
토대를 닦습니다. 7세기에서 8세기를 거쳐 살았던 원효,
의상, 원측, 경흥, 의적 등 신라 불교의 수준은 가히 당나
라와 어깨를 나란히 겨누는 국제적인 수준이었고, 일본은
그보다 늦은 8세기 중반 이후에 학문적 열매를 맺기 시작
합니다. 화엄에서 의상은 법장과 토론하고, 유식에서 원
측은 규기와 토론합니다. 더불어 원효는 중국에선 볼 수
없는 화쟁사상을 독자적으로 전개시킵니다. 한마디로 불
국사와 석굴암의 예술적 경지에, 그분들은 사상적으로 도
달했던 것입니다.
▶ 한국에선 분실된 원효와 의상의 저서가 일본에서 더러 발견
된다고 들었습니다.
가마쿠라 시대에 교토 고산사의 명혜 스님은 원효와
의상을 너무 존경한 나머지 두 분의 생애를 두루마리 그
림으로 그렸는데, 그것들이 지금은 일본의 국보로 남아있
죠. 한편, 의상은「법성게」외에는 남긴 글이 없고, 다만
의상이 강의한 내용을 제자인 직통이 잘 정리하여 책「추
동기」를 냈다고 하는데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
본에『화엄경문답』이란 책이 있는데, 그 저자가 법장으로
알려졌었습니다. 하지만 그 문장이 너무 서툴러 중국인이
썼다고 할 수가 없어 계속 논쟁이 되어 왔습니다. 그러다
가 그것이 의상의 강의를 받아 적은 바로 그「추동기」라
는 것이 거의 95% 이상 확실히 밝혀진 것이죠. 의상의
저술이 남겨진 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자료입니다.
▶ 원효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원효는 백 점 가량의 저서를 남겼는데, 대각국사 의천
이 속장경을 간행할 때 그 중에서 37종을 수록했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그마저 다 없어지고, 우리나
라에는 단 4종만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일본에는 13종이
온전히 남아있고, 불완전한 것까지 합치면 23-4종이 됩
니다. 그런데 제가 원효의 없어진 저서를 찾으려고 노력
하다보니까, 일본의 고승 대덕 중에서 원효의 저서를 읽
지 않은 사람이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많고, 따라서 그
들이 저술을 할 때 많이들 인용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
어, <대일본불교전서> 같은 전집 속에서 원효의 글이 인
용되어 있는 것을 찾고 있는데, 참 까다로운 작업입니다.
다만 요즘 <신수대장경> 같은 경우는 색인 작업이 마쳐져
서, 찾기가 좀 편리해졌습니다. 그 중 <원효운…>, <원효
『십문화쟁론』운…>, <원효『화엄경소』운…>, <원효『승만경
소』운…>, <원효『금강명경소』운…> 등을 찾아냈습니다.
특히 일본의 원효라고 불리는 분이 원효의『금강명경소』
를 너무 많이 인용하여, 그것을 정리하니까 방대한 분량
이 찾아진 경우도 있습니다. 원효는 심지어『황제내경』까
지도 읽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동대사에 있었던 응연은
『승만경상현기』라는 주석서를 쓰면서 원효의『승만경소』
를 팔십 번도 넘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새로운 자료
들을 묶으니 벌써 책 한 권은 족히 낼 수 있는 분량이 모
여서, 분황사에 있는 <원효연구원>에서 내기로 하고 준비
중에 있습니다.
▶ 참 흥미진진한 내용입니다. 지금은 선생님이 고생하면서 찾
고 계시지만, 이런 작업이 훗날 후학들이 원효를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겠죠. 지금까지 선생님이 원효에 대해 쓰신
저서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원효연구』, 『역사로 읽는 원효』는 이미 냈고, 앞서 말
한 모음집인『원효유문』이 곧 나올 거고, 욕심 같아선 앞
으로 일반인들에게 원효사상을 쉽게 풀어 소개하는『원
효의 가르침』을 쓰고 싶습니다. 그 외 선후배 학자들이
쓴 원효 연구서들도 여러 권 나와있습니다.
▶ 대학생들도 쉽게 읽을 수 있게, 불교 용어를 가급적 사용하
지 않고 글을 써주시기 바랍니다.
만해 스님의『님의 침묵』이 바로 불교 용어 없이 불교
의 진수를 노래하고 있는 전형적인 예이죠. 그런데 쉽게
쓰기가 더 어렵습니다. 많은 독서량과 깊은 사색 그리고
언어감각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 귀족불교를 쉽게 소화해서 대중불교로 전환시킨 게 원효의
가장 위대한 업적 아니겠습니까?
삼국유사 기록에 원효가 천촌 만락을 다니면서 불교를
전파하는데, 대중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무지몽매한 촌부라도 모두‘나무南 ’를
알았다고 전합니다. 오늘날 가장 대중적인 염불인‘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 아마 원효가 퍼트린 것이 아닌
가 생각됩니다. 대중에게는 그 근기에 맞게 정토신앙을
전달했던 것입니다. 그의 저서를 이해하려면 엄청난 지식
이 필요할 정도로 원효는 정밀한 교리체계를 구축했지만,
대중에게는 한없이 간단하게 불교의 진리를 전달했던 것
입니다.
▶ 의상이 세운 화엄종찰인 부석사에도 본존불이 아미타불인
것을 보니, 의상도 정토신앙을 중시했던 게 아닙니까?
의상 스님도 화엄종의 시조이지만, 대중을 교화할 때
는 정토신앙과 관음신앙을 받아들였죠. 그가 세운 낙산사
에선 관세음보살을 모셨지 않습니까? 특히 부석사 가람
배치에서 본당으로 올라가는 축대와 계단들은 정토신앙
의 구품왕생을 상징하고, 그 끝에 안양문을 배치하여 극
락세계로 들어가게 하며, 본전으로는 무량수전을 지어 아
미타불을 모셨습니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아미타불은 특
이하게도 입구의 왼쪽인 서쪽에서 동쪽을 보고 앉아 계십
니다. 제가 기록을 찾아보니, 의상은 평소에도 언제나 서
쪽을 바라보고 앉았다고 합니다. 아미타불이 서방정토에
계시니까요. 그가 얼마나 정토신앙에 투철했던 가를 알
수 있지요. 말하자면 원효나 의상은 모두 학자를 넘어서
서, 종교가들인 것입니다. 대단한 학승이면서도 결국 종
교로 돌아오고, 종교의 본질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철저
한 하심 을 구현한 것이죠. 학자이면서도 종교가였다
는 것이 그 분들의 위대성을 증명합니다.
▶ 최근 선생님의 학문적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그동안 불교사 연구의 불모지였던 조선시대 불교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단순히‘억불숭유’정책으로 불교가
억압받았다고만 알고 있지, 억압 속에서 꽃핀 그 격조 높
은 내용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아 안타까운 실정입니다.
최근 해인사나 통도사에서 개산제를 지내고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 한 문화가 천 몇 백년 간 한 곳에서 끊이지 않고
전해져 내려오는 곳은 사찰밖에 없어서, 그 유구한 전통
을 통시적으로 조망해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
차문화사에 관한 책도 준비하고 있고, 만해 스님에 관한
글도 쓰고 있습니다. 또 그동안 고심해서 매달린 일은 일
종의『속 삼국유사』를 집필하는 것입니다.
현재 약 90% 이상은 마쳤고 마무리를 하는
중인데, 우리나라 고대사에 대한 자료가 워
낙 없어서, 단편적인 자료들이나마 모두 묶
어서 내놓으면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 오랜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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