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과학 2

삼국시대의 불교교학과 치병활동의 관계

수선님 2020. 8. 2. 13:15

삼국시대의 불교교학과 치병활동의 관계*

여 인 석**

 

1. 서 론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은 제한된 세한 사료로 그 시대의 모습을 그려내 어야 한다는 점에 있다. 특히 잦은 전란으로 기록의 산일이 심해 이용할 수 있는 사료가 빈곤한 우리나라의 경우는 이러한 문제가 더욱 크다고 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 각훈(覺訓)이 왕명을 받들 어 삼국시대에 활동한 고승들의 전기인 해동고승전 을 편찬하면서(1215년) 벌써 사료의 부족을 안타까워하고 있는 형편이니1) 그보다 700여년이 지난 오늘날의 경우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료부족의 문제는 일반사의 역이 아니라 의학사와 같은 분야사의 연구로 들어가면 한 층 더 심각해진다. 다만 한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김두종의 한국의학사 와 같은 선구적인 업적이 있어 우리나라 고대의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특별히 이 시대에 관해 획기적인 새 로운 사료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김두종이 발굴해 놓은 사료들이 우리나라 고대 의학사에 관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사료의 거의 전부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한국의학사 의 고대 부분은 김두종의 서술을 넘어서기 힘든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동일한 사료를 보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 있고, 그에 따라 다른 모습의 상(像)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의 불교의학을 다룬 이 논문에서는 삼국시대 불교와 의학의 관계를 일관성 있게 서술 하면서도 다양한 측면을 함께 드러내려고 노력하다. 이러한 시도의 성공여부와는 별도로 한국 의학사 의 고대 부분을 면히 검토하는 과정에서 서술상의 몇가지 오류를 발견하여 바로잡을 수 있었고, 또 그 동안 이루어진 불교사학계의 연구 성과들을 의학사 연구에 활용할 수 있었던 것도 나름대로 의미있는 일이었다. 이 논문에서 가장 주의를 기울인 부분은 삼국의 불교교학과 의학의 관계를 설명한 부분으로, 단순히 불교와 의학의 관계를 평면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각 불 교교학의 내용이 치병활동이나 의학적 실천과 관계를 맺게 되는 양상을 보이려 하다.

 

2. 불교의학의 개념

질병은 인류가 등장함과 동시에 인간에게 제기된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고, 따라서 이를 해 결하기 위한 노력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질병을 치료하고 건강을 유지 하기 위한 목적으로 생겨난 의학 지식은 그 시대와 그 사회가 가지는 여러 모습과 깊은 관련을

* 이 논문은 1996년도 大韓醫史學會 가을철 학술대회(1996.11.22)에서 구연된 것임 “본 논문은 보건복지부에서 시행한 연구개발사업의 연구결과임” ** 국립환경연구원 1) 覺訓. 海東高僧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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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고 있다. 과학적 의학이 생겨나기 이전의 치료행위는 주로 그 사회에서 통용되는 주술이나 종 교를 통해 이루어졌다. 특히 치병 기능은 거의 모든 종교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각 종교에 서 중심적인 신앙의 대상은 일반적으로 치료자의 모습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점에서는 불교도 예 외가 아니다. 그렇다면 구태여 ‘불교의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때 그것이 지칭하는 바는 무엇 일까? 엄하게 말하자면 의학은 체계화된 학문만을 의미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치료활동에 관련된 모든 것들을 의학이라는 범주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이 논문에서는 불교와 관련된 치병활동의 여 러 측면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 불교의학이란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구별 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전통적인 인도의학, 즉 아유르베다 의학의 내용이 불교의 경전 중에 들어간 것이다. 두번째로는 승려의 치료활동을 의미한다. 치료의 방법에는 의학적 방법, 기도, 독 경, 주술 등이 모두 포함된다. 세번째로는 약사신앙과 같이 치병을 목적으로 하는 신앙활동을 의 미한다.

 

3. 아유르베다 의학

여기서 잠시 불교의학의 근간을 이루는 아유르베다 의학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자. 아 유르베다 의학은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인도 고유의 의학으로 그 발전과정은 대개 다음과 같이 나 누어 살펴볼 수 있다. 아유르베다 의학은 기원전 1,500년에서 800년에 이르는 시기, 즉 초기의 베 다 경전이 성립되던 시기로부터 시작되다가 기원전 6세기에서 서기 1,000년에 이르는 시기에 큰 발전을 하게 된다. 이 시기의 아유르베다 의학은 세 명의 위대한 의학자들의 저술로 특징지어진 다. 먼저 차라카는 기원전 5세기 경에 활동한 의사로 탁실라 대학에서 가르쳤고, 그와 비슷한 시 기에 활동한 수스트라는 뛰어난 외과의사다. 수스트라가 저술한 책에서는 여러 질병과 치료법 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특히 수술기법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여러가지 수술도구들에 대 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이들보다는 훨씬 후대인 서기 7세기 경에 활동한 박바타는 이들 양자의 견해를 종합하여 독창적인 이론을 내어놓았다. 또한 당시에 이미 내과, 소아과, 정신과 등 8개의 전문과목이 확립되어 각 분야별 연구가 깊이있게 이루어지는 등 이 시기는 아유르베다 의학의 최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2) 이 시기의 아유르베다 의학은 불교의 전파경로에 따라 중국과 동남아시아에 전해져서 많은 향을 미쳤다. 중국을 비롯한 여러 주변국가들에서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인도에 온 많은 승려들 이 불교와 더불어 아유르베다 의학을 공부하고 본국에 돌아갔다. 당대(唐代)의 유명한 의사던 손사막(孫思邈)의 의학이론도 아유르베다 의학에 뿌리를 둔 불교의학에 많은 향을 받았다. 8세기 이후의 아유르베다 의학은 별다른 발전없이 답보상태에 있게 된다. 특기할 점은 이전까 지는 거의 쓰이지 않던 광물성약제, 특히 수은을 여러가지 질병에 폭넓게 쓴 점이다. 그리고 11세 기경 절정에 달했던 아랍의학이 13세기 경에는 인도에 들어와 왕실의 후원하에 유행하게 되는데 이를 우나니 의학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나니 의학은 왕실의 후원이 중단되자 이내 쇠퇴하고 만 다.3) 19세기 이후 국의 식민지 지배 하에서 아유르베다 의학은 국의 정책에 따라 상반된 대 우를 받게 된다. 식민지 통치 초기에 국은 아유르베다 의학을 장려하다. 이는 기존의 전통의 학을 보건의료 정책에 그대로 활용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유르베 다 의학을 가르치는 학교를 설립하기도 하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는 이러한 정책에 변화가 와 인도사회에 서양의학을 주류 의학으로 도입하게 되었다.

2) Udupa KN and Singh RH. Science and Philosophy of Indian Medicine. Calcutta : Baidyanath, 1990 : 11- 13 3) 같은 책.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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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불교와 의학

앞서 설명한 대로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서는 일찍부터 의학이 발달했고, 그 의학의 내용이 불교로 들어가 불교 경전의 상당한 부분을 이루었다. 특히 불교에서는 석가모니를 대의왕(大醫王) 이라고 부를 정도로 의학을 중요시했다. 또한 석가모니 자신이 태자로 있을 때 제왕학의 일부로 서 의방명(醫方明)4)을 배워 의학에 대한 지식도 갖추고 있었다. 석가모니의 제자던 기파(耆婆) 는 뛰어난 외과의사로서 그는 당시에 이미 개복수술과 뇌수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한다. 의학적 내용을 담고 있는 불경으로는 불의경(佛醫經), 의유경(醫喩經), 요치병경(療痔病經), 치선 병비요경(治禪病秘要經), 주치경(呪齒經), 주시기병경(呪時氣病經), 제일체질병다라니경(除一體疾病 陀羅尼經),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등 여러 경전이 있다. 모든 종교들이 인간의 가장 큰 괴로움 중 하나인 질병을 고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나 대부분 기도를 그 방법으로 택하는 반 면, 불교에서는 당시에 발달한 인도의학을 종교 안에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종교 와 차별점을 보인다. 물론 불교에서도 교(密敎) 계통에서는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주문을 외기 도 한다. 주치경(呪齒經), 주목경(呪目經) 등과 같이 ‘주(呪)’자로 시작되는 경전이 대개 교 계통 의 경전으로 이들은 구체적인 의학적 내용을 담고있기보다는 아플 때 외는 주문을 기재하고 있 다. 이러한 경전들 외에 계율서들 가운데도 많은 의학서적이 있다. 사분율(四分律), 오분율(五分律), 십송율(十誦律), 마하승지율(摩訶僧祗律), 유부율(有部律) 등 율전에는 질병의 종류나 원인, 그 치 료법, 약제 등에 관한 내용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5)

 

5. 삼국시대의 불교와 의학

우리가 의학에 대해 말할 때에는 이론과 실천, 다시 말해 의학이론과 임상이라는 양자를 따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 둘은 분리될 수 없는 의학의 중요한 부분들이지만 이들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삼국시대의 의학을 생각할 때도 마찬가 지로 이 점에 유의해야 한다. 삼국시대에는 많은 불전이 들어와 읽혔고, 그러한 과정에서 인도의 학의 내용을 담은 불교의학서적들도 읽혔으리라고 추정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그러나 승려를 비롯한 당시의 지식인들이 그러한 의학이론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실제로 보통 사람 들에 대한 일반적인 치병행위가 그러한 이론에 기반을 둔 의료행위로 이루어졌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이들 양자는 분리시킬 필요가 있다.

5.1. 삼국시대에 통용된 의학이론

4) 의방명이란 다섯가지 명(明)의 하나이다. 다섯가지 명이란 당시의 여러 학술을 다섯가지로 분 류한 것인데, 고대 중국에서 선비들이 습득해야 할 교양으로 육예(六藝)를 설정한 것과 같은 것이다. 다섯가지 명은 성명(聲明), 인명(因明), 의방명(醫方明), 공교명(工巧明), 내명(內明)을 말한다. 여기서 성명은 쓰기나 산수 등을 말하고, 인명은 만물의 원인을 추구하는 것을 의 미하며, 공교명은 성의 축조, 농업, 상업, 음악, 점치는 일, 천문, 지리 등 인간의 실용적인 생 활에 필요한 여러가지 기술을 말한다. 내명은 도덕적인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의 방명은 당연히 의술을 말한다. 5) 服部敏良(이경훈 역). 불교의학. 서울 : 경서원, 1987 : 248-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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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한 대로 불교가 융성했던 삼국 통일신라시대에는 많은 불전이 읽혔고, 더불어 인도의 학의 내용을 담은 불전들도 읽혀졌다. 이러한 사실은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 에 대한 원효의 주석에서 드러난다. 금광명경 은 인왕호국경(仁王護國經) 과 함께 호국경전의 하나로 우 리나라에서는 매우 존숭을 받은 경전으로, 이 경전을 강설하는 법회가 따로 열리기도 하다.6) 또한 원효를 비롯하여 신라의 여러 승려들이 금광명경 에 대한 주석서를 저술하기도 하다.7) 원효는 금광명경소(金光明經疏) 8권을 저술했는데 지금 전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 소(疏)는 일찌기 일본에 전해졌고, 그 내용의 일부가 일본에서 편찬된 금광명최승왕경현추(金光明最勝王 經玄樞) 에 실려 전한다. 금광명경 중 의학적 내용을 서술한 부분은 제병품(除丙品) 인데 여기 에 대한 원효의 주석을 통해 우리는 원효가 이해하고 있던 의학이론을 알 수 있다. 제병품 에서는 인도의학의 대표적인 병리이론인 사대부조설(四大不調說)을 중심으로 인연설 등 불교의학의 이론들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원효는 이러한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한의학의 음양오행설을 이용하여 이들 이론을 해석하고 있다. 즉 사계절의 변화나 기후의 변화와 질병의 관계를 논하는 곳에서는 음양론을, 그리고 사대(四大)에 대한 설명은 오행론을 통 해 해석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8) 이러한 해석방식에 다소 무리가 따르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인도의 의학이론이 그대로 통용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불교가 삼국의 문화 전체에 커다란 향을 미치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의학이론에 있어서는 불교 의학의 이론이 아니라 한의학의 음양오행설이 보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원 효를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다른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의심방(醫心方) 에 인용된 방서(方書)로 제 목상 신라의 승려가 저술한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법사방(新羅法師方) 에는 약을 먹을 때 외우는 다음의 주문이 실려 있다: “동방에 계시는 약사유리광여래, 약왕, 약상보살, 기파의왕, 설산동자에 게 귀의하오니 약을 베풀어 환자를 치료해 사기가 소멸되어 없어지고 착한 신이 도와서 오장 (五臟)이 평화롭게 되고 육부(六府)가 순조롭게 되며 70만 맥(脈)이 저절로 통하고 펴지며 - - - .” 이 방문을 지은 승려는 약사여래, 기파의왕 등 불교의 신앙대상에 병이 낫기를 기원하고 있지만 그가 갖고 있는 인체에 대한 개념은 오장, 육부, 맥으로 대표되는 한의학적 개념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들을 토대로 우리는 삼국 통일신라시대에 통용되던 의학이론에 대해 잠정적 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즉 불교는 당시의 사회와 문화에 심대한 향을 미치고 있었으나 적어도 의학이론 분야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다. 물론 많은 불전들이 들어오는 과정에 서 불교의학에 관한 경전들도 함께 들어왔고, 또 그것을 읽은 승려들이 불교의학의 내용을 알고 는 있었으나 그것이 당시 지식인들에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고 보여진다. 그보다는 음양오행론을 비롯한 한의학의 이론이 인체에 관한 보다 지배적인 설명체계던 듯하다.

5.2. 불교와 치료활동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에는 주로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질병의 치료를 담당했을까? 우선 여 러가지 이유로 오늘날처럼 전문화된 의료인 집단이 있어 이들이 질병치료를 담당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거기에는 아마도 전문적인 의료인 집단이 등장할 만큼 사회분화가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

6) 불광교학부 편. 경전의 세계. 서울 : 불광출판부, 1991 : 697- 698 7) 김상현. 역사로 읽는 원효. 서울 : 고려원, 1994 : 201 8) 자세한 내용은 여인석 박형우. 우리나라 고대 불교의학의 한 단면: 원효의 경우. 醫史學 1995 ; 4 : 159- 164를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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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가지 이유가 될 것이다. 또한가지 중요한 이유는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질병에 대한 지배적 인 관념과 관계가 있다. 일반적으로 고대인들의 관념에서 질병이란 의학이라는 합리적인 대응방 식으로 치료가능한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주술적인 현상이었다. 예컨대 처용설화에서 등장하는 역신(疫神)의 개념이나9) 당나라 공주가 병에 걸렸을 때, 신라승려 혜통(惠通)이 술법으로 병마를 쫓았더니 이 병마가 교룡(皎龍)으로 변하여 신라에 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혔다는10) 등 의 기사는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던 질병에 대한 개념을 잘 말해 준다. 앞서 언급한 신라법사방 의 내용이 약을 복용할 때 외는 주문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당시 사람들은 약이 가지는 어 떠한 약리작용에 의해 병이 낫는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약에 주술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복용하던 듯하다. 따라서 치병활동을 담당한 사람들도 주로 이러한 주술의 전문가들, 다시 말해 토착적으로 존재하던 무(巫)다고 할 수 있다. 무당, 즉 샤만이 치병활동을 담당하는 것은 어느 문명에서나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삼국사회에 불교가 도입되면서 이러한 치병기능은 상당부분 승려들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승려들이 무(巫)들의 치병기능을 완전히 대체했 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21세기를 눈앞에 둔 오늘날에도 여전히 병굿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에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삼국 통일신라시대에 이루어진 치료활동에서 무(巫)와 승려들이 차지하는 각각의 비율을 정확 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초창기에서 후기로 갈수록 승려들의 역할이 더욱 커진 것은 사실일 것이 다. 지금까지 이 땅에 남아있는 불교유적의 규모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불교는 당시 사람들의 삶에 지대한 향력을 행사했으며, 불교가 교를 통해 토속적인 무속의 기능들을 흡수하면서 그 향력은 더욱 확대되어 나갔을 것이다. 여기서 승려들이 치병활동의 상당부분을 담당할 수 있었던 배경을 살펴보자. 먼저 일반적으로 모든 종교는 치병활동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거기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없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의학지식의 습득과 관련하여 승려들이 당시 사회와 문화에서 차지 하던 위치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당시 사회에서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계층은 한정되어 있었다. 지배층에 속한 일부 지식인들과 승려들이 주로 중국의 문물을 들여오는 역할을 담당했다. 승려들은 불교라는 종교를 통해 선진문물을 받아들으며 신라사회에서 가장 큰 지식 인 집단을 형성했다. 삼국시대에 일본에 선진문물을 전한 사람들이 대부분 승려들이었다는 사실 은 그들이 당시 문화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음을 말해 준다. 특히 일본에 많은 것을 전해준 백제의 승려들이 일본에서 치병활동을 했다는 기록들이 적지않게 전한다.11)

 

6. 삼국의 불교교학과 의학

6.1. 고구려

고구려에 불교가 처음 도입된 것은 소수림왕 2년(서기 372년)의 일이며, 불교 도입 이후 많은 고구려 승려들이 불교교학의 발전에 공헌했다. 불교에는 여러가지의 교학이 있는데 그 중 고구려 에서 가장 지배적인 교학사상은 삼론종(三論宗)이었다. 삼론(三論)이란, 인도 쿠차 출신의 역경승(譯經僧) 구마라즙(鳩摩羅什, 344- 413)이 장안에 들어 와 번역한 반야경을 비롯한 초기 대승경전과 이에 입각한 용수 계열의 중관론서(中觀論書) 가운 데 용수(龍樹)의 중론(中論) , 십이문론(十二門論) 과 제바(提婆)의 백론(百論) 등 세가지의 논

9) 一然. 三國遺事 卷2. 紀異 處容郞 望海寺 10) 三國遺事 卷5. 神呪 惠通降龍 11) 日本書記 卷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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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를 말한다. 언제부터 이 삼론이 용수계의 반야중관사상을 대표하는 핵심적인 논저로 간주되기 시작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중국의 삼론학은 고구려 출신의 승랑을 거쳐 길장(吉藏, 549-624)에 이르러 이론적인 완성을 보아 중국불교의 한 중요한 종파로 자리잡게 되며 인도의 중 관학파(中觀學派)에 대한 중국측 명칭으로 통용된다.12) 구라마즙 사후 약 100년, 즉 승랑이 활동을 시작할 무렵 삼론학은 당시 맹위를 떨치던 소승계 교학인 성실론(成實論)과 혼용되어 그 진정한 뜻이 거의 단절된 상태다. 이때 승랑(僧朗, 생몰 연대 미상)이 나타나 삼론을 성실론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삼론의 원 의미를 회복시키기에 이른다. 승랑은 중국 유송(劉宋, 420- 479) 말기 강남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삼론종(三論宗)의 새로운 전기 를 마련하는데13) 이러한 과정에서 승랑은 용수의 중관사상을 재차 강조했다. 그런데 승랑 이후 중국의 삼론종은 법랑(法朗, 507- 581) 때부터 열반경(涅槃經)을 강조하기 시작했고 삼론종의 집대 성자 길장에 이르러서는 반야중관사상과 열반불성사상의 융합이라는, 인도의 중관사상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성격을 띠게 된다. 한편 중국에서 활동한 승랑이 다시 고구려에 돌아왔다는 기록은 없지만 고구려의 삼론종은 승 랑이 강조한 용수의 중관사상에 충실하게 남아있게 된다. 고구려의 교학은 삼론학뿐 아니라 그 후에 들어오는 천태학(天台學), 열반학(涅槃學)까지도 용수의 중관사상에 바탕을 두게 된다.14) 중 국과는 달리 용수의 저작을 위주로 하는 삼론종의 전통은 고구려 불교사를 통해 면면히 이어진 다. 예를 들어 일본에 불교를 전한 고구려 승려로 기록에 남아 있는 혜자(慧慈), 혜관(慧灌), 도등 (道登) 등은 모두 삼론가(三論家)들이었다. 먼저 혜자는 양왕 6년(595)에 일본으로 건너가 백제 의 승려 혜총(慧聰)과 더불어 쇼오토쿠 태자(聖德太子, 574- 622)의 스승이 되었고, 이듬해 법흥사 (法興寺)가 완성되자 그곳에 머물면서 불법을 전하다가 양왕 27년(616)에 귀국하다.15) 또 혜 관과 도등은 일본에 건너가기 전에 모두 중국에서 삼론의 대성자 길장에게 직접 삼론학을 배웠기 때문에 이들의 교학적 배경이 삼론이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고구려 교학의 근저에서 주류를 형성하는 것이 용수의 사상이란 점은 고구려의 불교교 학과 의학의 관계를 살펴보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그것은 용수가 불교사상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이지만, 불교의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용수는 인도 바라문의 성전에 통달했을 뿐 아니라 당시의 학술 분야, 즉 천문, 지리, 의학 등 여러 분야의 지 식을 폭넓게 습득한 대학자다.16) 특히 그가 저술한 대지도론(大智度論) 은 불교의 교리 외에 천문, 지리 등 당시의 과학을 총망라한 저작으로 그 안에는 의학에 관한 내용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수서경적지(隋書經籍志) 에는 용수의 이름이 붙은 의방서가 세가지(龍樹菩薩藥方 4 권, 龍樹菩薩和香法 2권, 龍樹菩薩養性方 1권) 기재되어 있어 용수와 의학과의 관련성을 짐작케 한다. 대지도론 은 삼론에 포함되지는 않지만17) 적어도 6세기 후반에는 고구려에 들어와 있었으며,

12) 高翊晋. 韓國古代佛敎思想史. 서울 : 동국대학교출판부, 1989 : 99 13) 같은 책. 94쪽 14) 같은 책. 122-123쪽 15) 같은 책. 119쪽 16) 김두종. 한국의학사. 서울 : 탐구당, 1981 : 39 17) 불교 교학사에서는 중론 , 12문론 , 백론 의 삼론에 대지도론 을 덧붙여서 사론(四論)이라 고 한다. 여기서 대지도론 은 용수의 저작이기는 하지만 앞서의 삼론과 교학적인 강조점이 다르다. 삼론종은 부정주의적 관념론으로 상당히 기울어져 있는 반면 대지도론 은 용수가 다른 어떤 문헌보다 자신의 일원론적 견해를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책이다. 따라서 사론 종은 삼론종의 부정주의적 편향을 중화시키기 위해 대지도론 을 기존의 삼론에 덧붙이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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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않은 사람들이 거기에 관심도 가진 듯하다. 6세기 후반 고구려의 재상이었던 왕고덕(王高德) 은 고구려의 승려 의연(義淵)을 통해 북제의 고승 법상(法上)에게 몇가지 질문을 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대지도론 을 지은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었다.18) 즉 이 기사를 통해 우리는 6세기 후반의 고구려에는 대지도론 이 들어와 있었고, 재상이 그 책에 관해 물을 정도로 비교적 관심을 끈 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지도론 을 지은 사람을 모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삼론종 - 용수’의 관계로 인해 대지도론 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닌 듯하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용수의 논저를 근간으로 하는 삼론종이 고구려의 지배적인 교학이었고, 인도의학의 내용을 담고 있는 대지도론 이 고구려에 들어와 읽혀졌다면 그를 통해 인도의학의 이론이 알려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고구려 사회에서 의료활동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졌는 가 하는 측면이라든가, 승려들이 의료활동에 얼마나, 또 어떤 형식으로 관여했는가 하는 문제는 현존하는 사료로는 밝히기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불교교학과 의학의 관계라는 측면에서만 본다 면 용수의 저작들을 통해 인도의학이 고구려 승려들에게 알려졌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편 김두종의 한국의학사 에는 삼론종의 전래와 관련된 사실의 언급에서 한가지 오류가 보인 다. 김두종은 “최초 高句麗에 佛法을 가지고 온 順道 및 阿道法師는 秦王 符堅이 보내온 바로서, 그 秦의 地는 당시 인도의 명승 鳩摩羅什 三藏이 來住하여 불경, 특히 三論宗旨의 書를 飜譯傳授 케 한 원산지이다. 따라서 고구려에 전해온 불경이 역시 삼론종지일 것이 추정되며 - - -”19)라고 하고 있다. 즉 고구려에 처음 불법을 전한 순도와 아도는 전진왕 부견이 보냈는데 당시 전진의 수도가 장안(長安)이었고 바로 이 장안에서 구마라즙이 용수계의 불전들을 번역했기 때문에 순도 와 아도가 가지고 온 불전들이 용수계열의 삼론(三論)이었으리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서 이들 사건이 일어난 연대를 살펴보면 이러한 추측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전진왕 부 견이 보낸 승려 순도(順道)가 고구려에 처음 불교를 전한 것은 소수림왕 2년 즉 서기 372년이다. 반면 쿠차의 명승 구마라즙이 장안에 들어와 역경 사업을 시작한 것은 서기 401년으로 순도와 아 도가 고구려에 온 것보다 약 30년 후의 일이 된다.20) 더구나 용수의 中論 이나 제바의 百論 등의 논저는 이전에 번역된 적도 없고 구마라즙에 의해 처음 번역된 것들이므로 순도와 아도가 용수계의 삼론을 갖고 왔을 것이라는 추측은 잘못된 것이다. 여기서 잠시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고구려에 불교를 전한 전진왕 부견은 대표적인 명군(名君)으로 원래부터 불교를 깊이 숭앙한 왕이었다. 그는 일찌기 서역 쿠차에 있는 구마라즙의 명성을 듣고 그를 장안으로 청 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장군 여광(呂光)으로 하여금 쿠차를 점령하고 구마라즙을 장안으로 데려오도록 하다. 여광은 그 명령을 충실히 수행해 구마라즙을 대동하고 돌아오는 도중 부견이 역도들에 의해 살해당하고 전진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384년). 이후 여광이 세운 후량 (後凉)에 머물다가 장안에 들어가 역경사업을 시작한 것은 401년의 일이다. 그렇다면 순도와 아도가 고구려에 전한 불전은 어떤 것들이었을까? 물론 기록이 없으므로 정확 한 것을 알기는 힘들지만 격의적인 성격의 초기 경전들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삼론의 고구 려 전래는 이보다 훨씬 뒤인 100여년 뒤에나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것은 중국에서도 구마라즙의 사후 용수계의 삼론은 거의 단절된 채로 있다가 앞서 말한 고구려의 승랑에 의해 삼론의 원뜻이 복원되고 하나의 종파로서 성립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구려에 삼론이 전해진 것은 아마도 승랑의 활동시기나 혹은 그보다 조금 뒤인 6세기 초가 될 것이다. 또한 고구 려의 승려들이 일본에 삼론을 전한 시기가 대개 6세기 말부터 7세기 초이므로 시간적인 간격을

장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사론종은 곧 삼론종에 자리를 양보하고 만다. 18) 覺訓. 海東高僧傳. 義淵 19) 김두종. 위의 책. 38쪽 20) 토오도오 교순, 시오이리 료오도(차차석 옮김). 중국불교사. 서울 : 대원정사, 1992 : 91-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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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안하면 6세기 초가 가장 사실에 부합할 것으로 생각된다.21)

6.2. 백제

백제에는 침류왕(枕流王) 원년(384년) 동진의 승려 마라난타가 처음 불교를 전한 것으로 기록되 어 있다. 초창기의 과도적인 수용단계를 거친 후 백제 나름의 독자적인 교학연구는 6세기에 들어 서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백제의 경우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대승교학의 연구는 삼론학을 바탕 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일본에 불교를 전한 백제의 승려들이 대부분 삼론종이라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백제의 교학사는 한가지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대승교학으로서 삼론학 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기 전에 율학(律學)이 크게 일어난 점이다. 백제에 율학을 일으킨 가장 큰 공로자는 겸익(謙益)이다. 겸익은 백제 성왕(526) 4년에 율(律)을 구하러 해로로 중인도에 간다. 거기서 5년간 산스크리트어를 익힌 후 겸익은 인도의 승려와 함께 산스크리트어본 阿毘曇藏 五部律文 을 갖고 귀국한다(531). 이에 성왕은 이들을 맞아 흥륜사(興 輪寺)에 있게 하고, 당시 백제에 있던 명승 28인을 불러 율부 72권을 번역케 하다. 여기서 말하는 오부율(五部律)은 1)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2) 법장부(法藏部) 3) 대중부(大衆 部) 4) 화지부(化地部) 5) 음광부(飮光部) 등 다섯 가지를 말하는데 이것이 모두 백제에 전해졌으 며 번역까지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로 율부의 산스크리트어 원본은 당시 중국에도 전부 전해지지 않은 상태기 때문이었다. 당시까지 중국에서 번역된 율서로는 1) 유부 (有部)의 십송률(十誦律) 2) 법장부(法藏部)의 사분율(四分律) 3) 대승부(大僧部)의 마하승지율(摩 訶僧祗律) 4) 화지부(化地部)의 오분율(五分律) 등이다. 실제로 중국에서 ‘율종(律宗)’이 성립되는 것은 당나라 시대에 도선(道宣, 596- 667)이 종남산에서 사분율을 강설하는 데에서 시작한다(624년 이후). 이에 비하면 겸익을 중심으로 하는 백제의 율학은 그보다 1세기 이전에 이미 하나의 학파, 혹은 종파로서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22) 이상에서 백제의 율종 성립을 강조한 이유는 불전 속에 많은 의학 서적이 있지만 가장 많은 내 용이, 그리고 가장 자세하게 설해진 내용들은 앞서 언급한 계율서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계율서들은 불교의 발전 초기에 승단으로서 성립되기 시작할 무렵, 다시 말해 교단 형성과 그 교 단에 속한 성원들의 행동을 규정할 계율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다양한 측면에 걸쳐 있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승려들의 일상생활의 각 부분을 규정하는 부분이다. 율서는 승려들의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절제, 청결, 음식물 섭취 상의 주의점 등에 관한 내용을 상세히 규정하고 있는데, 이를 의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치료보 다는 예방의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십송률(十誦律)에서는 목욕의 다섯가지 공덕을 말하고 있다. 1) 때를 제거한다. 2) 몸이 깨 끗해진다. 3) 몸 안의 한냉병을 없애준다. 4) 풍(風)을 제거한다. 5) 편안함을 얻게 한다. 이 외에 도 목욕과 관련해 욕실의 건축법이나 욕실의 관리요령까지도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23) 또 세수와 양치질에 관해서도 강조하여 콩비누를 사용해 세수를 하고 식사후에 양치질을 하도록 쓰도록 권 하고 있다. 또 술의 여러가지 폐해를 열거하여 승려들로 하여금 금주토록 하지만, 다른 한편으 로는 약으로서 술을 써야 할 경우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계율에서는 술에 못지않게 조심해야

21) 김두종의 한국의학사 에는 삼론종의 역사와 관련해 잘못 기록된 내용도 보인다. 한국의학 사 에는 승전법사가 승랑에게 대지도론, 중론, 백론 등을 전수했다고 되어 있으나(38쪽) 삼론 종의 계보에 따르면 승전이 승랑의 제자이므로 이것은 잘못 기록된 것이다. 22) 고익진. 위의 책. 123-128쪽 23) 服部敏良. 위의 책. 68- 69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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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것으로 과식을 들고 있다. 물론 과식에 대한 금지는 종교적인 절제라는 측면에서도 요구되지 만 건강의 측면에서도 요구된다. 과식을 하면 기가 급작스럽게 몸 안에 꽉 차서 맥박이 고르지 않고 심장을 답답하게 하며 누워도 편안치 않다고 말하고 있다. 그 외에도 음료수로 마시는 물은 깨끗이 걸러서 마시도록 하는가 하면 대소변을 비롯하여 침이나 가래와 같은 배설물을 함부로 처 리하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 특히 타구(唾器)의 사용을 권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계율서들에서 승려 각자의 행동에서 절제와 청결을 강조하고 있다 면 율학을 대대적으로 받아들인 백제에서도 그 내용들을 수용하고 지켰음에 틀림없다. 물론 백제 의 불교에 대한 자료가 세한 만큼 구체적으로 계율서의 위생관념들이 얼마나 일반에게까지 향을 미쳤고, 승단 생활에서 어떻게 지켜졌는가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율학은 이론적인 추상적 논의가 아니라 행동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므로 단순히 불교를 통해 인도의학 이론을 알게 되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실제적으로 위생적인 생활을 강조하고 그대로 지키도록 했을 것이라 는 추정이 가능하다. 또한가지 백제의 불교의학에 관련해 주의를 끄는 것은 ‘주금사(呪禁師)’라는 관직이다. 주금사는 주문을 외워서 병을 치료하는 임무를 맡은 관리로 이러한 관직은 삼국 중 백제에만 있었다. 이때 외는 주문이 단순히 무속적인 성격의 것인지 아니면 불교와 관련이 있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577년에 백제에서 일본에 파견한 승려와 불교관계 기술자(불상제조공, 사찰건축공 등)에 주금사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주금사도 불교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 다.24) 그 외에도 일본에 건너간 많은 승려들이 거기서 치병활동을 하여 병자를 낫게 한 기록들이 적지않게 전하는 것으로 보아 백제의 불교의학은 상당한 수준이었고, 백제사회 전체의 의료에서 승려들이 차지한 비중이 상당히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6.3. 신라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것은 법흥왕(法興王) 14년(527년)이나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신라에도 불교가 전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나 백제와는 달리 한반도의 한쪽 구석에 위치 하여 상대적으로 고립된 상태에 있던 신라에서는 토착세력이나 토착신앙이 깊이 자리잡고 있어 외래의 사상인 불교가 들어와 정착하기까지에는 많은 갈등이 있었고 또한 적지않은 시간이 걸렸 다. 그러나 일단 불교가 신라 사회에 자리잡은 이후 신라의 불교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의상 이나 원효와 같은 뛰어난 사상가들을 배출하기도 하다. 한편 교학사의 측면에서 본다면 신라도 백제와 마찬가지로 대승교학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이 전에 율학에 대한 연구가 선행했다. 6세기 말에 활동한 지명(智明)은 四分律 磨記 를 저술하 고, 유명한 원광(圓光)의 세속오계(世俗五戒)도 불교 계율의 세속적 적용이라는 측면에서 신라 율 학의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7세기에 활동한 자장(慈藏)도 十誦律木叉記 와 四分律 磨私記 와 같이 율학에 관한 책을 저술하다.25) 초창기의 교단성립 과정에서 계율에 대한 필요성이 대 두되고 그에 따라 율학이 발달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청결한 생활을 강 조하는 계율서의 각종 규정들이 당시의 위생관념에 적지않은 향을 미쳤으리라는 것은 앞서도 지적한 바 있다. 신라 불교의 교학사 전체를 통해 신라 교학의 주류는 유식(唯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유식 학의 대가던 원측(圓測)만이 아니라 특별히 어느 한 종파에 속하지 않은 원효의 경우도 그가

24) 孫弘烈. 三國時代의 佛敎醫學. 伽山 李智冠 스님 華甲紀念論叢刊行委員會 編纂. 韓國佛敎文化 思想史 (卷上). 서울 : 伽山佛敎文化振興院, 1992 : 129 25) 고익진. 위의 책.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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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긴 저술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유식관련 저술이다. 그런데 유식은 지극히 추상적인 이론이어서 지금 여기서 문제로 삼고 있는 불교의학과 어떠한 직접적인 관계를 이끌어 내기는 힘들다. 그것은 유식학만이 아니라 의상(義湘)의 화엄종(華嚴宗)이나 신라 후대의 선종(禪 宗)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한가지, 그동안 우리나라 불교사 연구에서 무시되어 온 교(密 敎)는 삼국시대, 특히 신라의 불교의학과 관련해 상당히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6.3.1. 교와 치병활동

교는 인간의 현세적인 욕구를 주술적인 방법을 통해 충족시키려는 동기에서 시작된 불교의 한 갈래로 일찌기 인도에서부터 유래되어 여러 경로를 통해 중국, 한국, 일본 등으로 전파되었다. 이 초기의 교는 주로 불교의 입장에서 전통적인 토속신앙을 수용하는 방편으로 이용되었다. 따 라서 이 초기의 교에는 주문을 통해 악신(惡神)을 쫓거나 병을 치료하고 재앙을 물리치는 기능 이 주종을 이룬다. 이러한 초기의 교를 잡(雜密)이라 하고, 7세기 중엽 대일경(大日經)과 금강 정경(金剛頂經)이 성립되면서 교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이처럼 후대에 새롭게 성립된 교를 순(純密)이라 하는데, 순은 사상적으로 중관(中觀)과 유식(唯識)이라는 두 대립적인 대승 사상을 하나로 종합하고, 이를 만다라라는 도상에 구체적으로 구현하며, 이에 따라 다라니를 염송 (念誦)케 하는 체계적인 주술의례로 조직된다. 따라서 의례의 목적 또한 단순히 재앙을 쫓고 복을 구하는 데에서 벗어나 성불(成佛)이나 중생을 구하는 것으로 승화된다.26) 교학사적으로는 후대에 성립된 순이 중요하지만 불교의학과 관련해서는 오히려 앞서 성립된 주술적 성격이 강한 잡이 중요하다. 불경 중에는 불교의학과 관련된 경전이 많은데 그 중에는 인도의학의 이론을 담고 있는 경전도 있지만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주술적 방법에 의한 치병을 목적으로 하는 교 계통의 경전이다. 의학과 관련된 교 계통의 경전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佛說呪時氣病經 1卷 失譯 佛說呪小兒經 1卷 東晉 竺曇無蘭譯(381- 395년) 佛說呪齒經 1卷 東晉 竺曇無蘭譯(381- 395년) 佛說呪目經 1卷 東晉 竺曇無蘭譯(381- 395년) 療持病經 1卷 唐 義淨譯 除一切疾病陀羅尼經 1卷 唐 不空譯(705- 774년) 能淨一切眼疾病陀羅尼經 1卷 唐 不空譯(705- 774년)

여기서 앞서 나열된 4가지 주경(呪經)은 모두 4세기에 번역된 잡 계통의 경전이다. 뒤에 나열 된 경전을 번역한 불공(不空)은 중국 교의 집대성자로27) 순을 대표하지만 치병에 있어서는 잡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문을 외우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불공의 제자로는 서역기행문 往五天 竺國傳 으로 유명한 신라의 혜초(慧超)가 있어 당시 교가 신라 불교에 미친 향을 짐작케 한 다. 그렇다면 신라에 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언제일까? 海東高僧傳 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 27년 (605년)에 처음으로 서역의 승려 毘摩羅眞諦, 農伽陀, 佛陀僧伽 등이 황룡사에 와서 머물면서 檀香火星光妙女經 을 번역해 출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8) 이 때에 번역된 경이 전하지 않기 때

26) 같은 책. 384쪽 27) 토오도오 교순 등. 위의 책. 3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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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에 자세한 내용을 단정해 말하기는 어렵지만 제목으로 보아 교 계통의 경전으로 생각된다.29)

6.3.2. 신라 교승의 치병활동

三國遺事 에 기록된 신라의 대표적인 교승은 본(密本, 善德王代), 명랑(明朗, 文武王代), 혜 통(惠通, 孝昭王代) 등 3인이다.30) 이들은 신라 초기불교의 강한 교적 흐름을 본격적인 교의 구체적인 형태로 체현했다고 볼 수 있다.31) 그런데 이들에 의해 신라의 교가 구체적 모습을 띠 기 이전에도 교적 전통은 이미 존재해 왔는데 우리는 그것을 원광(圓光)에서 찾아볼 수 있다. 원광(555년경- 638년)은 진평왕 11년(589) 수나라에 들어가 아함, 성실, 반야, 섭론 등을 수학하 고 귀국하여 항상 대승경전을 강의하고, 보살계를 설한 대표적인 대승사상가로 알려져 있다.32) 그 러나 그에게는 이러한 대승교학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교적 색채도 상당히 짙게 나타난다. 그것 은 무속적인 점복술(占卜術)을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에 입각한 점찰법으로 대체한 사람 이 바로 원광이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또한 다음과 같은 원광의 치병기사도 주목할 만하다.

진평왕이 병들어 의(醫)가 치료하여도 병이 낫지 않아 원광을 청하여 궁궐에 들게하고 따로 있 게 하여 밤에 두 차례 심오한 불법을 강설하게 하니 왕이 계(戒)를 받고 참회하여 불법을 크게 신봉하다. 어느날 밤에 왕이 원광의 머리를 보자 후광이 그를 따라왔다. 왕후와 궁녀도 이를 같 이 보고 마음에 감동을 받았다. 원광을 임금의 처소에 머무르게 하니 오래지 않아 차도가 있었 다.33)

여기서 사용된 치병 방법에 주술을 썼다는 직접적인 표현도 없고, 특별히 교적인 치료방법을 썼다고 단정할 단서가 보이지는 않으나 독경이나 강설, 기도를 통한 치병활동이 대체로 교적인 배경을 갖고 있다고 볼 때 원광의 치료법도 넓은 의미에서 교적이라고 할 수 있다.34) 또한 원 광이 거처하던 곳은 삼기산(三岐山) 금곡사(金谷寺)로 전하는데 원광이 수도할 당시 이미 삼기산 에는 주술승, 즉 교승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아 금곡사가 교 계통의 사찰 일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케하고 있다.35) 더구나 다음에 언급할 신라의 대표적 교승 본 또한 삼기산 금곡사에 머물고 있어36) 원광과 본 사이에 교를 매개로 하는 일종의 사승 관계가 형 성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다.37)

다음으로 본(密本)의 치병기사는 여러가지 면에서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는데 三國遺事 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28) 海東高僧傳 卷2 29) 徐閏吉. 韓國密敎思想史硏究. 서울 : 불광출판부, 1994 : 12 30) 三國遺事 卷5. 神呪 31) 고익진. 위의 책. 387쪽 32) 三國遺事 卷4. 義解 圓光西學 33) 海東高僧傳 卷2. 圓光 34) 金在庚. 新羅의 密敎受容과 그 性格. 불교사학회편. 新羅彌陀淨土思想硏究. 서울 : 民族史, 1993 : 293 35) 같은 책. 290쪽 36) 三國遺事 卷5. 神呪 密本 邪 37) 고익진. 위의 책. 3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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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왕 덕만이 병이 든 지 오래 되었다. 흥륜사(興輪寺) 승려 법척(法 )이 불려가서 병구완을 하는데 오래도록 효과가 없었다. 이 때에 본법사의 덕행이 나라에 들려져 바꾸기를 청하다. 왕이 불러들이니 본은 침실 밖에서 약사경을 읽었다. 경을 다 읽자마자 소지하고 있던 육환장 (六環杖)이 침실 안으로 날아들어 늙은 여우 한마리와 법척을 찔러 뜰 아래로 거꾸로 내던지니 왕의 병이 이에 나았다.38)

여기서 처음에 선덕여왕의 병치료를 맡고 있던 인물이 흥륜사의 승려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 가 있다. 흥륜사는 신라 최초의 사찰로 이 절이 세워진 절터는 토속신앙의 성역이었다. 흥륜사의 창건문제를 놓고 불교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채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는 왕의 세력과 토착신앙을 내세운 토착세력 간의 충돌이 일어났으며 그 과정에서 ‘이차돈의 순교사건’이 일어난다. 신라에서 는 외래종교인 불교가 수용되는 과정에서 큰 갈등이 있었으며 불교로서는 토착신앙을 어떤 식으 로 수용해내느냐 하는 문제가 신라사회에 뿌리를 내리는 데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되었다. 그런데 흥륜사에 관련되어 삼국유사 에 나타난 기사를 보면 초기의 갈등관계는 해소가 되고 양자간에 타협점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즉 불교는 현교(顯敎)로서의 기능을 담당하는 한편 토속신앙을 불 교 안에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식을 취한 듯하다. 특히 토속신앙의 성지던 흥륜사가 사찰로 조 성되는 과정에서 흥륜사는 이전의 토속신앙이 담당했던 무교적(巫敎的) 기능을 그대로 존속시켰 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호랑이 발톱에 상한 데에는 흥륜사의 장(醬)을 바르고 흥륜사의 목탁소리 를 들으면 상처가 낫는다는 처방법이 고려때까지 전해내려온 것으로도 알 수 있다.39) 즉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창건된 흥륜사는 불교 공인 이전 시대에 토속신앙이 담당했던 의무적(醫巫 的) 기능을 계승했고 승려들이 그런 역할을 담당했음을 선덕여왕이 병에 걸렸을 때 흥륜사의 승 려가 처음 치료를 담당하고 있었다는 기사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김두종은 이 기사에 대한 해 석에서 병 치료를 담당하던 흥륜사의 승려 법척이 승려로서 의방에 정통하기 때문에 그러한 임 무를 담당했을 것이라고 하고 있다.40) 물론 흥륜사의 승려 법척이 의방에 정통하지 않았다는 증 거도 없지만, 흥륜사의 성격을 고려하건데 흥륜사 승려의 치료 방식은 한의학적 치료라기보다는 전래의 토속적인 치료방식에 가까운 것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토속신앙의 무속적 기능과 불교의 공존상태는 교가 전래됨에 따라 깨어진다. 원래 교는 전 래의 민간신앙을 불교적인 형식으로 수용함으로써 민간신앙이 담당했던 기능을 대신하다. 교 는 민간신앙과 유사한 기능을 가졌기 때문에 손쉽게 그 기능을 흡수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유사한 기능을 갖고 있었기에 경쟁관계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 은 위의 기사에서 교승이었던 본이 흥륜사의 승려 법척을 축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교와 토속신앙과의 갈등관계는 본 이전에도 나타나는데 그것은 원광이 수도를 하던 삼기산의 주술승 (呪術僧), 즉 교승과 그 산의 토속신 사이에서 일어난 대립기사에서도 확인된다.41) 이 기사에서 는 주술승이 토속신에게 패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반면 이보다 나중의 기록인 본의 기사에서는 교승인 본이 토속신앙을 대표하는 흥륜사의 승려를 이기는 것으로 나타나 교 신앙이 토속 신앙을 이기고 어느 정도 자리잡게 되었음을 말해 준다. 다음으로 이 기사에서 주목할 것은 본이 치료에 약사경(藥師經)을 사용한 점이다. 본이 선 덕여왕을 약사경으로 치료한 사건 다음에는 승상 김양도(金良圖)를 치료한 기사가 나온다. 김양도

38) 三國遺事 卷5. 神呪 密本 邪 39) 三國遺事 卷5. 感通 金現感虎 40) 김두종. 위의 책. 63쪽 41) 三國遺事 卷4. 義解 圓光西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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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어렸을 때 입이 닫히고 몸이 굳어지는(口 體硬) 병에 걸리자 무당이 와서 제사를 올렸으나 소용이 없었고, 법류사(法流寺)의 승려가 왔으나 오히려 악귀들에게 맞아죽고 만다. 마지막으로 본을 청하자 악귀들이 본이 온다는 말만 듣고도 무서워 떨고 본이 도착하기 전에 사방에서 천신들이 나타나 악귀들을 미리 잡아간다. 따라서 본이 도착해 약사경을 열기도 전에 양도의 병이 나았다고 한다.42) 여기서 법류사의 승려가 와서 불경을 외웠으나 효과가 없이 악신의 손에 죽고 말았다는 사실은 치병활동에 있어 본의 법력과 아울러 약사경의 위력을 대비적으로 잘 말 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편으로 본의 방법이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치병방법인 무 당이나 승려가 다 동원된 이후에 마지막 수단으로 채택되고 있다는 사실은 당시 사람들에게 약 사경 을 이용한 교적 치병방법이 아직 생소한 것임을 말해 준다고 하겠다.43) 더구나 三國遺 事 에 본의 출신성분이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고, 좌우의 천거에 의해 선덕여왕을 치료하면서도 여왕의 침실 밖에서 경을 외워야했던 점 등을 미루어보아 본으로 대표되는 교는 진골 등 상 층부의 귀족 세력과는 일정한 거리를 취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본이 치병에 성공함으로써 교는 상층부에까지 파고 들어가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본과 같은 교승으 로 뒤이어 나오는 명랑과 혜통의 기사에서도 확인된다. 명랑은 신라 교의 2대 종파인 신인종(神印宗)을 개창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44) 출신이 불분 명한 본과는 달리 명랑의 모계는 진골이었고, 그의 외삼촌은 대국통(大國統)인 자장(慈藏)으로, 신분적인 면에서는 신라사회 내에서 최고위층이었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명랑이 당나라에 유학 을 다녀온 다음 금광사(金光寺)를 호화롭게 창립하고 범국가적인 지원 속에 교식 대법회를 개 최하게 된 것도 이러한 신분적 배경 속에서 가능하게 된 것이다. 본이 개인적인 치병활동에 주 로 관여한 것과는 달리 명랑은 호국활동에 관여한다. 명랑은 문두라(文豆婁, Mundra) 비법을 써서 풍랑을 일으켜, 통일전쟁을 기화로 침범한 당나라 군대를 궤멸시킨다.45) 이처럼 신인종이 외 적을 물리치는 호국적인 면에 중점을 둔 불교라면 혜통에 의해 성립된 총지종(總持宗)은 본을 계승하여 병마의 퇴치에 가장 큰 역점을 둔 교라고 할 수 있다. 혜통도 당나라 유학승으로 귀국하여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명랑보다 30년 후의 일이다. 혜통이 당나라에 있을 때 당 고종의 공주가 병이 들자 삼장(三藏)을 대신해 공주의 병을 치료하으며, 귀국해서도 신문왕(神文王)의 등창과 효소왕녀(孝昭王女)의 질병을 치료하다.46) 혜통이 당나라 공주의 병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흰콩과 검은콩을 각각 신병(神兵)으로 둔갑시켜 독룡을 쫓게 했 다든가, 후에 정치적인 이유로 혜통이 잡혀가게 되었을 때 그를 잡으러 온 병사들을 물리친 주술 법은 단순한 독경차원의 술법이 아니라 한층 더 심화된 교적 주술법이었다. 본, 혜통을 통해 개창된 총지종은 고려시대까지 내려오는데 고려사 에 따르면 혜통이 창건한 총지사(摠持寺)의 주지던 회정(懷正)은 주금(呪禁)으로 고려 의종의 사랑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47) 즉 주문을 위주로 하는 교적 치료법의 전통이 고려시대까지 전해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교가 전면에 드러나는 경우는 드물지만 교는 기층에 자리잡아 민간신 앙을 흡수하며 민중들과의 교감을 유지하는 중요한 방편으로 자리잡았다. 따라서 어떠한 교학사 상도 교를 수용하지 않고는 지속적인 생명력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신라 말에 들어온 선종의 경우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9세기 초에 선종이 처음 신라에 들어왔을 때 선종은 중앙무

42) 三國遺事 卷5. 神呪 密本 邪 43) 金春實. 三國時代의 金銅藥師如來立像 硏究. 美術資料 1985 ; 36 : 7 44) 三國遺事 卷5. 神呪 明朗神印 45) 같은 46) 三國遺事 卷5. 神呪 惠通降龍 47) 高麗史 志2 天文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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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지방이나 변두리로 쫓겨났다.48) 당시 교종이 득세하던 신라에서 “不立 文子 直指人心”을 표방하며 교종과는 이질적인 성격을 보이는 선종은 처음에 마설(魔說)이라 매 도되기까지 하다. 따라서 선종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토착화의 작업이 필요했으며 토착화의 방 편으로 교를 이용했다. 나말여초에 활동한 도선(道詵)이 바로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다. 도선 은 삼한산수도(三韓山水圖)에 점을 찍으며 사람에게 병이 들었을 때 혈맥을 찾아 침을 놓고 뜸을 떠서 그 병을 고치는 것처럼, 산천에 병이 들었을 때는 점찍은 곳에 절과 탑을 세우면 국토의 병 이 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49) 이러한 사탑비보설(寺塔裨補說)은 교적 방법으로 선의 토착화를 시도한 대표적 사례이다. 이처럼 선종은 교적 방편을 수용하며 토착화에 성공하여, 그 이후 우 리나라의 불교계는 계속해서 선종이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교를 분류할 때 주술적 성격이 강한 교를 잡(雜密)이라 하고, 대일경(大日 經) , 금강정경(金剛頂經) 의 성립과 더불어 교학적으로 체계화되고 승화된 형태의 교를 순 (純密)이라고 한다.50) 시기적으로 분류한다면 초기교는 인도에서 4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성립 한, 다라니를 중심으로 한 주술적 성격이 강한 교로서 위에서 말한 잡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신라의 경우도 처음에 전해진 교는 이러한 초기 교로 본, 명랑, 혜통 등이 모 두 여기에 속한다. 다음으로 중기 교는 7세기 경 인도에서 새롭게 성립한 대일경 , 금강정경 등을 기반으로 하는 체계적인 교로서 중국에 전해진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신라에도 전해졌 다. 해운(海雲), 현초(玄超), 의림(義林), 불가사의(不可思議), 혜초(慧超) 등 신라승들이 중국에서 이 새로운 교를 공부해 신라에 전했다. 마지막으로 후기교는 8세기 인도에서 성립한 탄트리 즘의 전개와 함께 성립한 교로서 흔히 탄트라 불교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단계의 교는 그때 까지 거의 취급되지 않았던 성적인 기술을 대담하게 도입하는데 그때문에 좌도(左道)교라고 불리기도 했다.51) 넓은 의미에서는 앞서 말한 잡에 포함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형태의 교가 우리나라에도 전래되었을까? 현재로서는 이를 뒷받침할 결정적인 사료적 증거는 없다. 그 러나 이러한 후기 교의 전래를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는 사료가 존재한다. 그것은 984년 일본에 서 나온 의심방(醫心方) 에 실린 新羅法師流觀秘密要術方 과 新羅法師秘密方 이다. 흔히 이 방문(方文)은 앞서 언급한 新羅法師方 과 함께 신라의 불교와 의학 사이의 접한 관 계를 방증하는 자료로 이용된다. 물론 이 논문에서도 같은 목적으로 이 방문(方文)을 활용하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 이 방문(方文)의 내용분석을 통해 신라의 불교의학과 후기 교와의 관련성을 살펴보고자 한다.52) 新羅法師流觀秘密要術方 의 내용은 여래께서 전한 비방을 서인도의 왕이 얻어 보고 그 방법에 따라 실천한 결과 백만명의 왕비를 거느리게 되고, 왕과의 관계에서 왕비들이 절정의 쾌락을 맛 보았다는 내용이다.53) 또 新羅法師秘密方 의 내용은 노봉방(露蜂房, 벌집)이라는 약재를 써서 남 자의 생식기를 크고 강하게 만드는 방법을 설명한 것이다.54) 김두종은 新羅法師流觀秘密要術方

48) 신라에 처음 선종을 전한 道義禪師는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 설악산 북쪽에 陣田寺를 짓 고 은거할 수밖에 없었다. 49) 서윤길. 위의 책. 26쪽 50) 이렇게 교를 잡과 순로 분류하는 방법은 주로 일본에서 사용하는 방법이다. 51) 요리토미 모토히로(김무생 옮김). 교의 고향 - 인도. 교의 역사와 문화. 서울 : 민족사, 1994 : 16-17 52) 이 方文들에 대한 자세한 주석적 연구는 신순식. 고려시대 이전의 韓醫學文獻에 관한 연구. 醫史學 1995 ; 4 : 45- 66을 참조할 것 53) 자세한 해석은 앞의 같은 57- 58쪽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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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내용에 대해서는 방중술에 관한 것이라고 간단히 언급하고 있고, 新羅法師秘密方 에 관하여 는 여기에 쓰인 노봉방(露蜂房)이 중국에서의 용법과 다른 점을 들어 신라 고유의 의학 전통이 있음을 입증한다고 말하고 있다.55) 한편 新羅法師流觀秘密要術方 에서 유관(流觀)이 전했다는 방 문(方文)의 내용이 방중(房中)에 관한 것이라는 언급에 대해, 승려가 방중의 비방을 전하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지만56) 같은 방문(方文)의 내용 중에 그 방법을 익힌 왕의 정 력이 강해졌다는 내용이 나오고, 또 新羅法師秘密方 에서는 그러한 방법 중 하나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어 승려들이 방중의 술을 의술의 일부로 서술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 렇다면 이러한 방중의 술을 승려들이 전하고 있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거기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그 하나는 불교의학이 도교 방중술의 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또한가지는 후기 교, 즉 탄트리즘의 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먼 저 첫번째의 가정을 검토해보자. 원래 도교는 고구려에 가장 먼저 들어왔고 또한 많은 향을 미 쳤다. 그런데 도교의 향은 고구려에만 그치지 않고 백제와 신라에도 미쳤다. 신라의 김가기(金 可紀)는 당나라에 들어가 도사로서 생애를 마쳤는데 그 이름이 열선전(列仙傳) 에도 올라 있다. 또한 김가기와 마찬가지로 당나라 유학생이었던 최치원은 귀국 후 불우한 생애를 보냈는데 특히 그의 말년의 행적에는 도교의 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김두종은 이러한 사실들을 근거로 新羅 法師流觀秘密要術方 과 新羅法師秘密方 의 내용이 도교 방중술의 향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57) 물론 이러한 가정을 적극적으로 부인할 수 있는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방중 술의 전통이 도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불교 자체에도 있다면 구태여 외부의 향을 상정할 필 요는 없을 듯하다. 특히 新羅法師流觀秘密要術方 에는 약사여래(藥師如來), 용수(龍樹), 마명(馬 鳴) 등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으며, 서인도 왕의 이야기를 하는 등 철저히 불교적인 내용을 배경으 로 하고 있다. 도교의 방중술은 장생의 한 방편으로 하는 데 반해 이 방(方)에는 방중의 술과 장 생의 관계에 대한 언급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다만 성적인 쾌락의 절정만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도교적 방중술보다는 성적인 절정을 종교적 법열과 동일시하는 탄트리즘의 태도와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방서가 단순히 방중에 관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만으 로 도교의 향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오히려 성적 측면을 강조한 후기 교의 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일본의 경우도 성적 요소를 강조하는 진언종의 한 유파 가 헤이안 시대 말기부터 가마쿠라 시대까지 유행한 바 있다.58)

 

7. 신라의 약사신앙

인도에서 대승불교의 발달과 함께 성립된 약사경은 석가여래의 기능 중 질병•기근 등의 재난에 서 구해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경이다. 이 경은 인도에서는 3세기 경에 성립되었고 중국에는 5 세기 경에 한문으로 번역되기 시작하다. 한문번역본은 모두 4가지가 있는데 457년에 혜간(慧簡) 이 번역한 藥師유璃光經 , 616년에 달마급타(達摩 多)가 번역한 藥師如來本願經 , 650년 현장 이 번역한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 , 그리고 707년에 의정이 번역한 약사유리광칠불본원공덕 경 등이 그것이다.59) 이 중 의정의 번역본은 앞의 세 번역본과는 다른 別本을 번역한 것으로 상

54) 자세한 해석은 앞의 같은 59- 60쪽을 참조할 것 55) 김두종. 위의 책. 76- 77쪽 56) 孫弘烈. 위의 . 138쪽 57) 김두종. 위의 책. 71쪽 58) 요리토미 모토히로. 위의 책. 17쪽 59) 鄭承碩 編. 佛典解說事典. 서울 : 민족사, 1991 :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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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히 교화가 진행되어 있어 혼자 있던 약사여래가 7佛로 분화되어 있고 각 부처에 따른 정토와 다라니(呪文)가 나와 있다.60) 약사신앙의 특징은 다음의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현세이익, 현세기복적 특징이다. 이것 은 질병이나 기근, 도적 등의 재난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정토신앙적(淨土信仰 的) 특징이다. 원래 아미타정토신앙은 내세(來世)를 기원하는 신앙이고 약사신앙은 현세에서 기복 하는 신앙이다. 또 약사경 에는 사후의 왕생극락에 대한 언급이 없이 불사(不死)에 치중하고 있 으며, 또 약사경 에는 생명을 연장하는 속명법(續命法)이 나와 있기도 하다. 그러나 아미타 신앙 과 약사신앙은 상충되기보다는 상보적인 관계로 아미타 신앙이 서방을 정토로 보는 데 비해 약사 신앙은 동방을 정토로 보는 등 아미타 신앙의 정토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세번째 호국적 성격 이다. 약사경 에 의하면 큰 질병이나 국난, 외적의 침입 등이 있을 때 약사여래를 잘 섬기면 모 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약사경이 인왕경이나 금광명경과 같은 대표적인 호국경 과 같은 차원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말한다. 네째, 교적 성격이다. 약사경에는 사람이 죽어 갈 때 7층등을 켜고 오색실을 달고 약사경을 외우면 다시 살아난다고 하는 등 교적 의식의 내 용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의정의 번역본이 나온 이후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해져 여러가지 교 적 성격의 의식이나 주문법이 더해지고 상징적인 종교의식이 체계적으로 성립된다.61) 신라의 약사신앙에 관한 문헌자료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 약사경 이나 약사신앙에 관한 기록 은 앞서 언급한 본의 기사에서만 유일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약사여래조상을 통 해 신라시대 약사신앙의 모습을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다. 현재 존재하는 약사불로 가장 초기에 조성된 것들은 7세기 초기의 것들로 이 시기는 본이 약사경을 송경해 선덕여왕의 병을 고친 시 기(637년경)와도 일치한다. 즉 7세기 초에 본의 활동과 더불어 약사신앙이 본격적으로 받아들여 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시대에 조성된 약사불은 대개 20cm 미만의 소형 금동불(金銅 佛)이다. 통일 이전 신라 상대(上代)에 이러한 호신불을 가질 수 있었던 사람은 귀족계층으로 당 시의 약사신앙이 주로 귀족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갔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 후 약사신앙은 현세이익적 성격과 치병을 위한 실천적 방법으로 일반민중에게 도 그 향력을 넓혀나갔다. 특히 통일 후 전제왕권이 강화되는 중대(中代)가 되자 약사신앙은 전 시대부터 이어져온 주술적 치병기능을 간직하는 한편, 경덕왕대(景德王代)에 이르면 약사불은 통 일시대 전제왕권의 상징인 사방불(四方佛) 가운데 동방불(東方佛)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는 약사신 앙의 성격중 정토신앙적 요소와 호국적 요소가 표면화된 것이다.62) 신라 하대(下代)에 이르러 정치•사회적 혼란이 심해지고, 이에 더해 기근이나 도적, 질병 등의 재해가 되풀이되면서 일반 백성들의 생활은 지극히 어려워진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현실적 고통 으로부터의 해탈을 약속하는 약사신앙은 급속히 퍼져나갔고, 그 결과로 신라 하대에 특히 많은 약사불이 조성된다.63) 신라 사회에서 약사신앙이 유행한 사실은 일본인 승려 옌닌(圓仁)이 남긴 여행기 入唐求法巡禮行記 에서도 나타난다. 옌닌은 9세기에 당나라를 순례했는데 당시 당나라에 는 마침 불교에 대한 탄압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는 순례 도중 당시 중국에 와 있던 신라인들 을 만나 많은 도움을 받고 승려에 대한 박해를 피해 신라방과 신라원에서 한동안 머물기도 했다. 그는 이 여행기에서 신라원에서 이루어지는 법회의 모습을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이 의식에 서는 약사경 을 송경하는 절차가 의식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64) 이러한 기록을 통해

60) 金惠婉. 新羅의 藥師信仰. 千寬宇先生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1985 : 315 61) 같은 . 317-319쪽 62) 같은 . 334쪽 63) 文明大. 新羅下代 佛敎彫刻의 硏究(I). 歷史學報 1977 ; 73 : 28-29 64) 圓仁(신복룡 역). 입당구법순례행기. 서울 : 정신세계사, 1991 :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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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약사신앙이 본국 신라에서만이 아니라 중국에 있던 신라인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널리 신앙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신라의 약사신앙과 교학은 어떤 관계를 갖고 있었을까? 우선 三國遺事 에 나타난 본의 기사에서 보이는 것처럼 약사신앙은 교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등장한다. 그런데 본의 경우는 교와의 관련성이 치병에 약사경 을 독송하는 정도로 나타나는 반면, 혜통에 오면 약사 신앙은 보다 적극적으로 교화된다. 특히 혜통이 창시한 총지종(總持宗)은 약사여래를 주존불(主 尊佛)로 모신다. 이처럼 신라의 교는 의정에 의해 교화된 약사경 이 출현하기 이전에 나름대 로의 방식으로 약사경 을 이용하며 약사신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신라의 교가 약사신앙과 접한 관계를 가지며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약사신앙이 단지 교와 관계가 있는 것만은 아니다. 약사신앙은 신라시대의 주요 교학사상에 모두 수용되는 특징을 보인다. 신라의 경우 대승사상으로 가장 먼저 꽃핀 것은 유식(唯識), 즉 법상종(法相宗)이 다. 유식은 인식의 문제를 깊이 파고드는 지극히 추상적이고 철학적 성격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신라 법상종의 고승들이 약사경 에 대한 저서를 남기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경흥(憬興)과 도륜 (道倫)은 각각 藥師經疏 1卷 씩을 저술했고, 太賢도 藥師本願經古迹記 2卷 을 저술했다. 신라의 학승들이 많은 저술을 남겼지만 약사경 에 대해 저술을 한 학승들은 모두 법상종 계열이라는 사 실에서 법상종에서도 약사신앙을 수용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와 함께 화엄종(華嚴宗)도 약사신앙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원효계65)의 화엄종 사찰인 분황사에서 경덕 왕 14년(755년)에 30만여 근에 달하는 거대한 약사여래동상을 조성한 사실에서 확인된다.66) 통일 후 절정에 달한 법상종과 화엄종 등 교종의 시대가 지나 신라 하대에 이르면 왕권의 약 화, 지방호족 세력의 등장에 발맞추어 선종(禪宗)이 유행하게 된다. 원래 선종은 자기 밖의 어떤 정토나 부처도 부정하고 자기 내면의 부처를 찾는 사상이기 때문에 주술적인 방법으로 교화하는 것을 극히 싫어하지만, 어지러운 신라 하대에 제기된 여러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약사 신앙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신라 말에 성립된 선종 9대산문 가운데 하나인 성주산문(聖住山門)의 수찰(首刹) 성주사(聖住寺)에서 건립된 석탑 4기(基) 중 하나가 약사여래사 리탑이라는 점67), 그리고 마찬가지로 선종 계열의 사찰인 실상사(實相寺), 장곡사(長谷寺)에 약사 여래철불이 조성된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68) 또한 앞서 말한 성주사(聖住寺)의 낭혜화상(郞慧 和尙) 비문에는 경문왕(景文王, 861-874)이 병에 걸렸을 때 낭혜화상을 대의왕(大醫王)이라고 부 르며 그를 청해 치료받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69) 사실상 일반 민중들의 입장에서는 어떤 사찰 이 법상종 계열인지, 화엄종 계열인지, 아니면 선종 계열인지는 큰 의미가 없다. 그들에게는 당면 한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고 그들의 문제를 맡길 수 있는 대상이 필요한 것이므로 약사신앙 은 종파에 관계없이 폭넓게 수용될 수 있었다.70)

65) 원효의 경우는 특별히 어느 한 종파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는 유식학과 화엄사상 모두에 걸쳐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말년에는 자유인으로 살았다. 66) 三國遺事 卷3. 塔像 芬皇寺藥師 67) 文明大. 위의 . 27- 28쪽 68) 金惠婉. 위의 . 333-334쪽 69) 崔致遠. 郞慧和尙碑文. 李佑成 校譯. 新羅四山碑銘. 서울 : 아세아문화사, 1995 : 180, 329. 李智 冠 校譯. 歷代高僧碑文. 서울 : 伽山文庫. 1994 : 161, 193 70) 여기서 신라시대 승려들의 치병활동과 관련하여 흔히 인용되는 사료 가운데 잘못 해석되는 자료가 있어 이를 바로잡고자 한다. 雙谿寺眞鑑禪師大空塔碑에는 “醫門多病, 來者如雲”이라는 귀절이 있는데 김두종은 이 귀절을 병자들이 치료를 받기 위해 구름과 같이 몰려왔다는 것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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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맺는 말

불교는 우리나라 고대사회에 절대적인 향을 미친 종교이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신앙체계 로서만이 아니라 고대사회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 또한 문화의 다양한 측면을 담아내는 그릇 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따라서 삼국시대, 그리고 통일신라시대 문화의 어떤 측면을 이야기하 더라도 불교를 제외시키고는 논의 자체가 성립되기 어렵다. 그것은 의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김두종은 신라의 경우 승의학(僧醫學)이 발달했지만 신라의 의학이 승의(僧醫)에 의해 좌 우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이라고 말하여71) 불교의학에 지나친 비중을 두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물론 당시 불교의학이 전체 의료활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추산하기는 어렵지만 여러 정황을 미루어볼 때 필자는 불교의학이 당시의 의학을 ‘좌우할’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삼국의 직제에는 불교와는 무관하게 순수한 관료로서 의료관련직을 두고 있으나 이들이 전체 의료활동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미미했으며, 국왕 및 소수 귀족과 관련되는 정도을 것이다. 더구나 삼국사기 나 삼국유사 에 나타나는 이들 소수 지배 층에 대한 치병기사조차도 대부분 승려에 의한 치병사실을 기록하고 있어 불교와 무관한 의관(醫 官)들의 활동 역이 그리 넓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중앙의 관직으로서 의관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을 치료하는 독립적인 ‘醫’가 존재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사료적인 근거를 갖고 대답하기는 어렵다. 다만 삼국의 사회분화정도나 이보다 후대의 예로 미루어보아 독 립적인 ‘醫’의 존재를 인정하기는 힘들 듯하며, 백성들의 의료수요는 상당 부분 승려들을 통해 충 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색인어 : 신앙·종교·불교·의학·삼국시대

럼 해석하고 있으며( 한국의학사 , 77쪽), 또 그의 해석을 따라 사찰에 醫門이라는 치료전문 기관이 있었던 것처럼 보는 경우도 있다(손홍렬. 앞의 . 132쪽). 그런데 이 귀절의 정확한 해석은 “醫門(즉 의사의 집 문)에 병자가 많듯이 (진감선사를) 찾아오는 사람이 구름과 같이 많았다”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醫門多病”은 사실의 서술이 아니라 비유적으로 쓰인 표현 일 뿐이다. 이 귀절은 莊子 의 人間世 편에 나온 귀절을 인용한 것이다. 따라서 진감선사 비문의 이 귀절은 불교의학과 관련하여 인용될 성격의 사료는 아니다. 71) 김두종. 위의 책. 78쪽

 

 

 

 

 

 

[출처] 삼국시대의 불교교학과 치병활동의 관계|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