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없는 가르침

악마는 내 마음 속에도

수선님 2020. 7. 19. 12:37

악마는 내 마음 속에도

 

 

 

 

 

미인이라도 화내는 모습을 보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시기와 질투 하는 모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영화 백설공주에서 계모왕비는 미녀이다. 미녀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보았을 때 마녀(魔女)처럼 보인다. 마녀는 다름 아닌 악마의 다른 이름이다. 남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제아무리 미남이라도 분노하는 분노하는 모습을 보면 악마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마음의 거울이 있다면

 

 

 

분노를 먹고 사는 존재가 있다. 야차(yakkha)는 분노의 대명사와 같다. 그래서일까 이미지가 매우 추악하고 흉폭하다. 상윳따니까야 ‘추악한 용모의 경’(S11.22)에 야차와 제석천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야차가 제석천이 앉는 자리에 앉았다. 이를 본 삼십삼천의 신들은 화가 머리 끝까지 올랐다. 그런데 신들이 화를 내면 낼수록 추악하고 흉폭해 보이는 야차가 점점 멋있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그는 참으로 존자여, 분노를 먹고 사는 야차일 것입니다.” (S11.22)라고 했다.

 

 

 

마음에도 거울이 있다면 어떻게 보일까? 불교에서는 마음을 보는 거울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비담마라는 마음의 거울이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마음을 매우 자세하게 분류해 놓았다. 일종의 마음의 지도 같은 것이다. 그 중에 마음부수(cetasika: 心所)가 있다.

 

 

 

마음부수는 ‘마음의 작용’이라고 부르는데 이 마음부수에 따라서 아름다운 마음도 해로운 마음도 된다. 아름다운 마음으로는 믿음, 사띠, 부끄러움, 창피함 등 19가지가 있다. 해로운 마음으로는 어리석음, 양심없음, 수치심없음, 탐욕, 자만 등 14가지가 있다. 이런 마음을 거울에 비추어 본다면 어떤 모습일까? 해로운 마음부수에 영향을 받는 마음은 마귀, 야차, 악마처럼 추악하고 흉측한 모습일 것이다.

 

 

 

수행자로 상징되는 백조(白鳥)

 

 

 

내가 화를 낸다면 내 안의 마성(魔性)이 발현된 것이다. 그때 거울을 보면 분명히 악마의 형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누구나 자신의 내면에 악마가 있다. 실제로 부처님은 그렇게 말씀했다.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백조들이 태양의 길을 따라서

 

초월적인 힘으로 허공을 날 듯,

 

악마와 그 군대를 물리치고

 

현명한 님들은 세상에서 벗어난다.” (Dhp 175)

 

 

 

 

 

 

 

게송에서 백조는 수행자를 상징한다. 이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발견된다. 숫따니빠따 ‘성자의 경’(Sn1.12)에서는 “하늘을 나는 목이 푸른 공작새가 백조의 빠름을 따라 잡을 수 없는 것처럼, 재가자는 멀리 떠나 숲속에서 명상하는 수행승, 그 성자에 미치지 못한다.”(Stn.221)라고 되어 있다. 게송에서 공작새는 재가자를 상징하고 백조는 출가자를 상징한다. 이밖에도 법구경에서는 “백조들이 늪지를 떠나는 것처럼 그들은 집마다 그 집을 떠난다.” (Dhp.91)라고 했다.

 

 

 

부처님을 백조로 묘사한 경우도 있다. 시인 수행승으로 잘 알려진 방기싸는 부처님에 대하여 “백조가 목을 빼고 천천히 우는 것처럼, 잘 다듬어진 원만한 음성으로 말씀해주십시오.”(Stn.350)라고 말했다. 시인 수행승은 부처님 목소리에 대하여 찬탄했다. 그렇다면 경전에 묘사되어 있는 부처님 목소리는 어떤 것일까? 경에 따르면 “존자 고따마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여덟 가지 요소를 갖춥니다. 또렷하고, 명료하고, 감미롭고, 듣기 좋고, 청아하고, 음조 있고, 심오하고, 낭랑합니다.”(M91)라고 했다. 부처님의 목소리는 천상의 목소리로 묘사된다. 특히 심오하다는 것은 공명하는 것을 말한다. 비구름의 북소리처럼 크게 울림을 말한다.

 

 

 

청정도론에도 백조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청정도론 제4장 ‘땅의 두루채움’편을 보면 “마치 어린 백조들이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하면서부터 조금씩 짧은 거리를 날면서 연습하여 차례로 해와 달 가까이로 나는 것처럼, 이와 같이 수행승은 앞서 말한 방식으로 인상을 한정한 뒤에 확장하면서 철위세계의 경계까지 확장하거나 그보다 더 확장할 수 있다.”(Vism.4.127)라고 되어 있다. 또 청정도론 제21장 ‘행도에 관한 앎과 봄의 청정’편을 보면 “마치 찟따꾸따 산의 기슭을 즐기는 금색백조왕이 부정한 천민마을의 입구에 있는 구정물웅덩이를 즐기지 않고 칠대호수를 즐기듯, 이와 같이 백조왕인 수행자도 위험을 완전히 보고 부서지는 형성의 장을 즐기지 않고, 단지 수행을 즐기고 수행의 기쁨을 갖추는 까닭에 오직 일곱 가지 관찰을 즐긴다.”(Vism.21.43)라고 했다.

 

 

 

청정도론에서는 백조는 수행자의 상징이다. 왜 그럴까? 첫째로 겉모습이 희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수행자의 청정을 상징한다. 둘째로 하늘 높이 멀리 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수행자의 해탈을 상징한다. 그래서 ‘싫어하여 떠남의 관찰로 이루어진 앎’에 대하여 ‘일곱 가지 관찰을 즐긴다’라고 했다.

 

 

 

일곱 가지 관찰은 무엇일까? 청정도론 주석에 따르면 “(1) 무상하다고 관찰하면서 영원하다는 지각을 버리고, (2) 괴롭다고 관찰하면서 즐겁다는 지각을 버리고, (3) 실체가 없다고 관찰하면서 실체에 대한 지각을 버리고, (4) 싫어하여 떠남으로 환희를 버리고, (5) 사라짐으로 탐욕을 버리고, (6) 소멸로서 생성을 버리고, (7) 놓아버림으로 취득을 버린다.”(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 3483번 각주)라고 되어 있다.

 

 

 

악마의 군대(mārasenā)란?

 

 

 

게송에서 악마의 군대(mārasenā)를 물리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다름 아닌 오온이라는 악마의 군대를 말한다. 초기불교에서는 악마(māra)에 대하여 (1) 신으로서의 마라(devaputta-māra), (2) 번뇌로서의 마라(kilesa-māra), (3) 오온으로서의 마라(khandha-māra), (4) 업으로서의 마라(kamma-māra), (5) 죽음으로서의 마라(maccu-māra) 이렇게 다섯 가지로 보고 있다. 이 중에서 번뇌로서의 마라, 오온으로서의 마라, 업으로서의 마라는 자기자신과 관련이 있다. 자신의 내면에 악마가 있다는 것이다.

 

 

 

오온으로서 악마가 있다. 이는 경전적인 근거가 있다. 부처님이 설법하고 있을 때 갑자기 악마가 땅이 갈라지듯이 무섭고 두려운 큰 소리를 냈다. 그러자 수행승들이 매우 놀랐다. 이에 부처님은 “물질도 느낌도 지각도, 형성과 또한 의식도 내가 아니고 나의 것이 아니니 이렇게 거기서 탐착을 벗어나네”(S4.16)라고 말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님을 안다면 무섭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님을 안다면 두려움이 있을 수 없다. 이어서 부처님은 “이렇게 탐착에서 벗어나 안온하게 모든 얽매임을 뛰어넘은 자는 어떠한 곳에서 찾더라도 악마의 군대가 발견할 수 없네.”(S4.16)라고 말했다. 오온이 내것이 아니라고 여기면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반면 오온이 내것이라고 여기면 악마의 손아귀에 있음을 말한다. 그런 오온은 다름 아닌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의 다발에 대한 것이다.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한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의 몸, 나의 느낌, 나의 지각, 나의 형성, 나의 의식이라고 여기고 있는 한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오온을 악마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물거품을 보는 것처럼, 아지랑이를 보는 것처럼, 이 세상을 보는 사람을 죽음의 사자는 보지 못한다.”(Dhp.170)라고 했다.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님을 알았을 때 악마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알면 사라지게 되어 있다

 

 

 

오온은 악마의 군대와 같다. 악마의 군대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숫따니빠따 ‘정진의 경’(Sn3.2)을 들 수 있다. 경에 따르면 여덟 군대가 있다. 그래서 “그대의 첫 번째 군대는 욕망, 두 번째 군대는 혐오라 불리고, 그대의 세 번째 군대는 기갈, 네 번째 군대는 갈애라 불린다. 그대의 다섯째 군대는 권태와 수면, 여섯째 군대는 공포라 불리고, 그대의 일곱째 군대는 의혹, 여덟째 군대는 위선과 고집이라 불린다.”(Stn.436-437)라고 되어 있다. 대부분 해로운 마음부수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지금 탐욕의 마음이 일어나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 났을 때 악마의 군대에 정복당한 것이다. 권태와 무기력도 마찬가지이다. 무료하여 하품을 하거나 외롭다고 하여 즐길 거리를 찾는다면 악마의 군대에 정복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정복당하지 않을까? 이는 상윳따니까야 마라상윳따(S4)에서 후렴구로 알 수 있다. 각 경에 실려 있는 후렴구를 보면 공통적으로 “그러자 악마 빠삐만은 ‘세존은 나에 대하여 알고 있다. 부처님은 나에 대하여 알고 있다.’라고 알아채고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그곳에서 즉시 사라졌다.”(S4.19)라고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다름 아닌 알면 사라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모르기 때문에 악마의 지배를 받는다. 오온을 나의 것으로 생각하는 한 악마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심지어 여섯 감역도 악마의 영역이라고 했다. 악마 빠삐만은 “수행자여, 시각은 나의 것이고 형상도 나의 것이며 시각의식도 나의 것이다. 수행자여, 그대가 어디로 간들 내게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S4.19)라고 말했다. 여섯 가지 감각의 문을 단속하지 못했을 때 악마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악마는 저 멀리 욕계육욕천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악마는 내 마음 속에도 있다. 부정적인 마음, 해로운 마음을 가지면 악마의 마음이 된다. 분노했을 때 거울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것은 나의 모습이 아니다.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발현된 것이다. 그래서 번뇌가 악마라고 했고, 오온이 악마라고 했고, 업이 악마라고 했다. 그런데 악마는 알면 사라진다는 것이다.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님을 알았을 때 악마는 더 이상 발을 붙이지 못한다. 마치 캄캄한 밤에 불을 켜는 것과 같다.

 

 

 

깨어 있음에 전념했을 때

 

 

 

방에 전등을 켜면 어둠은 일시에 사라진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린다면 욕망, 혐오, 기갈, 갈애, 권태, 공포, 의혹, 위선이라는 악마의 군대는 사라진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싸띠(sati)해야 한다. 어떻게 싸띠하는가? 하루종일 깨어 있음에 전념하는 것이다. 잠 잘 때까지 싸띠하고, 죽을 때까지 싸띠 하는 것이다. 싸띠하면 악마가 발을 붙이지 못한다. 알아차리면 사라지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깨어 있음에 전념하는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들은 낮에는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 밤의 초야에도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 밤의 중야에는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사자의 형상을 취한 채, 한 발을 다른 발에 포개고 새김을 확립하여 올바로 알아차리며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여 눕는다. 밤의 후야에는 일어나 거닐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정화시킨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은 깨어 있음에 전념한다.”(S35.239)

 

 

 

 

 

2019-09-18

 

담마다사 이병욱

 

 

 

 

 

 

 

 

 

악마는 내 마음 속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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