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집착할 만한 자아란 없다”
중국의 3대 석굴의 하나인 운강석굴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여행코스에 운강석굴이 들어가 있을 때에는 우리여행의 주목적지가 아니므로 그냥 ‘양념’으로 집어넣었으려니 짐작하고, 애초부터 기대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심드렁한 기분으로 운강석굴에 들어갔는데, 제1굴에서 놀라고, 제2굴에서 탄복하고, 제3굴에서 17미터에 달하는 커다란 불상을 보고는 그 웅장함에 그만 기가 꺾여버렸습니다. 그리고 제5굴과 제6굴의 불상은 이런 것도 보았냐는
듯이 그 웅장함과 정교함을 한껏 뽐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더 큰 충격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자랑으로 삼고 있던 불교미술이 대부분 운강석굴에서 그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 너무도 실망을 했습니다. 그 예로, 한국불교미술의 최고의 자존심인 ‘석굴암’도 이 석굴에서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 당당한 대한남아의 기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 때, 저는 ‘무아’(無我)를 생각했습니다. 무아는 우리가 집착하는 자아·영원한 실체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는 ‘내’가 없고, ‘나의 소유’라고 하는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의 소유’라는 것이 확장되면 바로 ‘우리의 소유’가 되고, 그것은 한국만의 독자적인 그 무엇이 있다는 자존심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운강석굴을 보면서, 그 동안 한국적인 것에 남다른 색깔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온 것이 그대로 ‘우리의 소유’라는 허구적 관념과 연결되어 있음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허망하기도 했지만, 시꺼먼 구름이 거치고 새파란 하늘이 나타나듯이, 더 넓은 지평을 맛본 감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자아가 없다고 하면 이것은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여기 분명히 ‘자아’인 자기는 있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저는 자아가 어디에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마도 대답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 뿐 일겁니다. 마음이거나 육신이라고. 먼저 마음이 ‘자아’라면, 이것은 변하지 않고 어느 정도 계속성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은 아침저녁으로 바뀌고, 그것도 모자라서 하루에도 수없이 바뀌는 것입니다. “화장실 갈 때와 올 때가 다르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의 마음은 자주 이리저리 출렁입니다. 이렇게 보면, 마음이 자아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면 우리 육체가 자아입니까? 대부분의 사람이 암묵적으로는 이 육신이 자아라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느 누가 나의 얼굴을 때리면, ‘얼굴’을 때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때렸다고 생각합니다. 있는 그대로 보면, 얼굴이 맞은 것이지, 나와는 관계가 없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맞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이 육신이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통사고를 당해서 ‘다리’가 잘려나간 경우를 가정해 봅시다. 그 때 그 환자에게 “이 잘린 다리가 당신의 ‘자아’이니, 가져가라”고 한다면, 대부분 기겁을 할 것입니다. 사고 나기 전까지는 그토록 애지중지 하던 ‘다리’였는데, 이제는 쓰레기보다 못한 존재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육체도 자아가 아닙니다.
곰곰이 돌이켜보면, 자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있다고 누구나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자아’의 덫에서 벗어날 때, 먼지 낀 창문을 닦아낸 것과 같이,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있는 그대로 관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병욱/고려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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