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화선은 화두를 통한 선 수행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스승이 화두를 제기하여 제자로 하여금 화두를 보게끔 하는 선 수행이다. 반면 제자가 스승에게 화두를 들어 질문하는 형식을 통하여 그 답변의 행위에서 스스로 어떤 의미와 행위를 터득하는 선 수행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화두는 깨침으로 나아가기 위한 도구이면서 스스로가 타파해야 하는 도구의 대상이기도 하다. 곧 화두는 한편으로 도구로서 유지해야 하는 것이면서 한편으로 그 자체가 타파해야 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이것이 화두가 지니고 있는 양면성이다. 이 양면성은 선종 자체에서 일어나는 변질 또는 변혁의 과정과 그것에 대응하기 위한 방식으로 표출되어 갔다. 곧 수행과 깨침에 대한 입장 또는 견해와 자체의 입장을 견지하기 위한 모색으로 나타났다. 입장 또는 견해의 차이는 당나라 말기의 선풍의 흐름에서 나타났고, 자체의 입장을 견지하기 위한 것은 송 대에 선 수행법의 차이와 당시 선종계의 폐풍에서 나타났다. 전자가 종적인 이유라면, 후자는 횡적인 이유이다. 후자의 경우에 다시 묵조선법에 대한 것과 당시 선종계의 일반적인 폐풍에 대한 것을 들 수가 있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점이 각각 간화선의 대두 또는 성립 배경과 관련되어 있다.
어느 사상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불교의 경우도 그 목적을 구현해 나아가는 데 있어서 양면적인 모습이 있다. 간화선법의 경우 번뇌를 없애는 데 중점을 두어 번뇌의 퇴치가 곧 본래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묵조선법의 경우 본래부터 없애야 할 번뇌가 없다는 입장에서 처음부터 지니고 있는 본래의 성품을 제대로 드러내는 행위에 중점을 두고 그것에 대한 자각에 힘쓰는 것이다. 전자가 본격적인 수행을 위한 예비 수행에 해당하는 방편수행(方便修行)의 성격이라면, 후자는 본격적인 수행에 해당하는 정수행(正修行)의 성격이다.
방편수행의 성격이 인간이 번뇌로 뒤덮인 현실을 통찰하는 것이라면, 정수행의 성격은 인간에 내재하는 본래의 자성 또는 불성에 대한 자각이다. 인간이 지니고 살아가는 모든 고뇌의 원인이 무명(無明)과 집착(執着)과 갈애(渴愛)라는 것은 불교의 기본적인 상식이다. 그 가운데 무명을 제거해 나아가는 것이 이념(離念)의 측면이라면, 그 무명의 실상을 깨치는 것은 무념(無念)의 측면이다. 이념이 망념을 전제로 하고 그것을 벗어난다는 의미라면, 무념은 망념의 존재를 처음부터 부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념과 무념의 개념은 당나라 시대에 등장한 소위 북종(北宗)과 남종(南宗)의 성격을 구분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기도 하였다.
깨침의 과정을 이념에 두었던 북종의 주장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청정하고 진실하며 평등하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뇌에 찌들어 있기 때문에 그 번뇌를 좌선 수행을 통하여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념을 강조했던 남종의 선자들은 본래의 청정성 그 자체에 입각해 있고 아예 본래부터 번뇌가 없다는 입장이기 때문에 벗어나야 할 번뇌조차 없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것을 이념과 무념으로 설명하자면, 분별 의식의 상념을 그친다는 의미에서 북종선이 이념을 주장했다는 것에 상대하여, 남종선은 본래적인 분별 의식의 부정에서 출발하는 무념을 설한다. 이념은, 비유하면, 거울의 때를 없애는 입장이고, 무념은 거울에 본래 없애야 할 때가 없다는 입장이다.
이와 같은 이념과 무념의 입장은 어느 점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그 수행 방식에 차이가 났다. 간화선 성립의 종적인 원인으로 당나라 시대에 일반적으로 수용되고 있던 남종선에서의 수행과 깨침에 대한 하나의 부정적인 견해를 들어 볼 수가 있다. 그것은 본래의 순수한 삶의 모습 그대로가 부처이며 깨침이고 선이라는 의미의 즉심시불(卽心是佛)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일상의 생활에서 번뇌가 없이 인간의 청정한 본성 그대로 살아가는 선의 입장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당나라 말기에 이르면 국가의 혼란과 더불어 점차 보통 중생들이 욕심 부리고 화내며 어리석게 살아가는 것을 그대로 무사선이라는 이름으로 잘못 간주하는 추세로 흘러갔다.
이와 같은 폐풍을 바로잡고 무사선 본래의 순수한 입장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송 대에 들어와 활발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직접적인 이유는 당 대에 최고조로 발전한 선사상이 수백 년이 흘러가자 후대로 갈수록 더 이상 새로운 사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이전의 사상에 안주하면서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추세의 시대가 되었던 것 때문이다. 그와 같은 시대에 이전의 순수한 선풍을 되살리고 계승하려는 움직임이 소위 묵조선과 간화선의 출현이었다. 일반적으로 묵조선은 오로지 좌선 수행을 하는 것으로 수행과 깨침이 불이(不二)임을 강조함에 비하여, 간화선은 깨침을 중시하여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화두를 드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묵조선과 간화선의 입장은 좌선과 깨침의 관계를 어떻게 간주하느냐 하는 수증관의 차이로 나타났다. 달리 말하면 자신이 구비하고 있는 본래의 마음이 곧 부처라는 즉심시불(卽心是佛)의 사상을 실제적으로 어떻게 수용하고 전개시켜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세 가지 형태가 있다.
첫째, 본래 자성이 청정한 부처이기 때문에 일체의 행위는 다 본래부터 깨침의 현현이다. 둘째, 본래 자성이 청정한 부처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그에 걸맞은 좌선을 필요로 한다. 그리하여 좌선하는 바로 그곳에 반드시 깨침이 드러난다. 셋째, 이치적으로는 본래 자성이 청정한 부처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미혹한 중생으로 있기 때문에 그 미혹으로부터 벗어나 깨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가운데 첫째의 경우는 당나라 시대 순수한 선풍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그래서 임제종의 개조인 임제 의현의 말을 빌리자면, 깨침은 애써 노력할 필요가 없다. 다만 일상의 생활에서 피곤하면 잠을 자고 배고프면 밥을 먹으면 그만이다. 바로 이와 같은 예들은 첫째의 대표적인 사고방식을 보여 주는 말이다.
그러나 둘째의 입장은 다르다. 그와 같은 순수하고 청정한 바탕이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그야말로 그와 같은 본질을 깊이 확신하고, 그것을 좌선 수행을 통하여 충분히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번뇌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인데도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아무리 천성적으로 갖추어져 있다고 해도 저절로 성취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묵조선의 입장이었다.
나아가서 셋째의 경우는 비록 그와 같이 본래부터 부처와 동일한 자성이 개개인에게 구비되어 있을지라도 현실적으로 보자면 욕심 부리고 화내며 어리석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 번뇌를 타파하고 청정한 본심을 회복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것이 간화선의 입장이었다.
모두 본래부터 청정한 자성을 구비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모두 동일하다. 그러나 현실에 비추어 보면 그것을 어떻게 실현하느냐의 차이가 나뉜다. 곧 묵조선은 둘째의 입장에 서 있으면서도 첫째의 입장을 계승하고 있다. 첫째와 둘째의 차이는 미묘하다. 그러나 둘째가 깨침을 얻기 위한 수행의 필요성을 강조함에 비하여 첫째는 깨침을 얻기 위한 수행마저 필요치 않다는 입장이다. 그리하여 간화선의 입장이 깨침을 위한 수행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데 비해 묵조선은 깨침을 얻기 위한 수행마저 필요치 않다는 입장이다. 말하자면 깨침이 본래부터 구비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간화선과 묵조선 사상의 바탕이 되었던 이와 같은 즉심시불(卽心是佛)이란 본래 당나라 시대에 순수한 선풍으로 출발하였다. 즉심시불에서 즉심은 본래의 청정한 마음에 계합된 행위를 말하고, 시불은 즉심의 결과가 드러난 것을 말한다. 그러나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송 대에 와서는 즉심시불에서 시불이라는 그 결과에만 집착하여 본래의 즉심이라는 행위에 대해서는 까마득하게 무시해 버리는 무사선에 떨어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즉심은 곧 본래심에 계합된다는 원인에 해당하고, 시불은 그와 같은 결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첫째의 입장에 대하여 즉심시불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초극하려는 것이 둘째와 셋째의 입장에 서 있는 묵조선과 간화선의 역사적인 과제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간화선과 묵조선의 출현 배경 (화두와 좌선-선불교의 수행법, 2008. 1. 20., 김호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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