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스님

현대사회의 위기와 대안의 패러다임으로서 원효의 화쟁사상- 이도흠/한양대 국문과 강사

수선님 2021. 1. 3. 11:47

현대사회의 위기와 대안의 패러다임으로서 원효의 화쟁사상

 

 

이도흠/한양대 국문과 강사

 

 

1강-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 자연과 인간의 공존은 가능한가: 생태이론 對 不一不二

 

연재를 시작하며-지혜의 마당을 바라며

 

현재 세계 인류는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 인간성의 상실과 이성의 도구화, 미국문화의 세계화, 소외와 갈등의 심화와 보편화, 공동체의 파괴, 억압과 폭력의 구조화 등 위기를 맞고 있다. 이런 위기를 맞아 인류는 하루하루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면서 새로운 사회를 꿈꾸고 있다. 제3의 길, 공동체 운동, 생태운동 등 많은 대안들이 모색되고 있지만 근본적인 것은 대안의 패러다임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전에는 그 어떤 것도 미봉책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에 따라 새로운 원리와 가치관을 정립하고 그에 합당한 사회와 체계를 구성하고 모든 실천의 준칙과 지표를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7세기 원효가 외친 화쟁 사상이 대안의 패러다임이 될 수 있을까? 있다면 무엇이 대안의 길을 제시할 것인가? 선언적, 당위적으로 동양사상이 대안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다. 공리공론을 면하려면 모든 질문과 답은 지금 우리가 맞고 있는 현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보편성을 띠려면 서양의 철학과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단순히 동서양의 철학을 비교하는 데서 넘어서서 그런 위기와 모순에 대해 짚어보고 서양 철학은 이런 대안을 내세웠는데 원효의 대안은 이런 식이라는 방식으로 서술해 가야 할 것이다. 이런 취지로 필자는 《동양철학에세이-왜 착한 사람이 더 고통받을까≫(정음문화사, 2000)을 썼고 한겨레문화센타에서 <현대사회의 위기와 대안의 패러다임-원효의 화쟁사상을 중심으로>라는 강의를 지난 3월 14일부터 해 오고 있다. 이를 이 지면을 통하여 연재한다. 워낙 무거운 주제를 한정된 지면에 쉽게 쓰면서도 핵심을 잃지 않아야 함은 정녕 어려운 일이다. 그보다는 필자의 근기가 약하여 여러 한계를 드러낼 것이다. 그 때마다 좋은 비판을 해 주신다면 이 자리가 풍성한 지혜의 마당이 될 터이다. hwajeang@chollian.net)

 

필자는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한양대출판부, 1999)에서 《금강삼매경론≫ 등 원효의 원전만을 대상으로 하여 화쟁사상의 형이상학적 의미를 여섯 가지로 정리하였다. 거기서는 원효의 一心에 다가가고자 철저히 正典을 고증하였다면 여기서는 이를 바탕으로 자유로운 해석을 하겠다. 오독이라기보다 어두운 현실 속에서 길을 찾기 위한 모색, ‘실천불교학’이나 ‘응용불교학' 쯤으로 생각하시기 바란다.

 

 

죽음으로 가는 완행열차, 매일 백 여종의 생물이 멸종하고 있다

 

전 지구가 환경위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 1초 동안 0.6 헥타아르의 열대우림이 파괴되고 하루에만 100여종의 생물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2050년까지 80%의 이산화탄소의 양이 증가하여 2100년까지 지구의 평균온도는 3도, 해수면은 0.65미터나 상승할 것이라고 과학자들은 예측한다. 오늘도 수억의 생명체가 제 명보다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살아남은 자라 해서 얼마나 더 나을까? 오염된 공기와 물과 토양을 먹으며, 또 이를 먹고 자란 생물을 포식하며 지구상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이미 오래 전에 자연스러운 삶을 상실하였다. 8천 미터 설산을 나는 새나 북극의 백곰까지도 환경오염으로 신음하고 있다. 살충제에 죽은 벌레를 새가 먹고 한 쪽 날개가 없는 새를 낳고 그 새를 잡아먹은 독수리가 고공을 날다가 갑자기 떨어져 죽듯, 중금속은 지구상의 모든 살아있는 것의 몸에 조금씩 축적되고 있다. 소라 수컷을 암컷으로 변화시킨 농약 속의 환경 페르몬이 도시에까지 날아와 극히 미량으로도 도시 남자들의 정자 수를 감소시키고 여성화를 촉진시키고 폐암을 유발하듯, 그것은 소리도 없이, 서서히, 그러나 분명한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환경위기는 어느 지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지구 위의 모든 생명체가 이 모순 속에 던져진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이기에 사태의 심각성이 더하다. 이것은 중국의 먼지와 대기오염물질, 바이러스가 편서풍을 타고 한국으로 날아와 황사현상을 일으키고 산성비를 내리고 병을 퍼트는 데서 잘 알 수 있듯, 세계적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다. 대기오염이 산성비와 산성안개를 만들고 이것이 토양과 수질을 오염시키고 이로 산림이 파괴되고 동식물이 멸종한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산림파괴로 홍수와 가뭄이 일고 이로 토양과 수질이 오염되며 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인간은 더 많은 문명의 이기들을 부려 대기를 더욱 오염시킨다. 이처럼 환경위기는 구조적이고 순환적이다. 자동차 배기가스가 한편으로는 대기를 오염시켜 호흡기 질환을 유발하고 이 속의 이산화탄소는 온실효과를 만들어 지구의 온난화를 강화하고 산화합물은 산성비를 만들어 토양과 수질을 오염시킨다. 이렇듯 환경위기는 하나의 동인이 여러 문제를 낳는, 곧 복합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환경위기는 특수한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매일 매일 겪어야 하는 ‘일상’이며 원상이 절대 회복되지 않는 불가역적 성격을 갖는다.

 

몇몇 학자들은 인류가 금세기 안에 제3의 인종의 탄생을 볼 것이라고 경고한다. 지금도 환경오염으로 기형아는 속출하고 있다. 에 나오는 외계인처럼 파충류를 닮은 아기가 지구 곳곳에서 태어나면, 지구가 기상이변을 일으켜 인류의 반 이상을 단번에 몰살시키는 천재지변을 일으키면 인류의 환경파괴는 멈출까?

변한 세상을 보고 싶다면 우리가 변해야 한다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대안은 과연 있는가? 왜 이런 환경위기가 초래되었을까? 위기는 하나이지만 이를 야기한 원인은 보는 시각에 따라 여러 가지이다.

 

가장 먼저 꼽는 것이 산업화와 도시화이다. 산업화를 감행하면서 인류는 화석연료를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화석연료는 오염물질을 배출하였다. 산업화는 ddt와 같은 독성물질, 플래스틱이나 비닐처럼 자연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물질들을 수도 없이 쏟아내었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확대되면서 숲은 도시와 목장, 공장으로 바뀌고 서식지가 파괴되자 이를 터전으로 삼았던 수많은 생명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2,000년 현재 세계 인류 중 거의 절반에 달하는 29억명이 도시에 살고 있다. 2007년에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도시에서 산업 쓰레기를 양산할 도시 생활자가 농촌생활자를 초월할 것이며 2030년에는 60%인 49억명에 달할 것이다.

 

인구 문제 또한 커다란 원인이다. 과학기술, 특히 의료기술 발달로 영유아 사망률이 현격히 감소하였고 인간의 수명이 연장되었으며 경이적일 정도의 식량 증산이 이루어졌다. 유엔인구기금(unfpa)에 따르면 세계 인구는 매년 7, 700만 명씩 증가하고 있다. 지난 1999년 10월 60억명을 돌파한 세계인구가 오는 2050년에는 93억 명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 특히 현재 49억명에 이르는 개발도상국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 2050년에는 82억명에 이르면서 세계인구의 85%를 차지할 것으로, 2070년경 세계 인구가 100억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런가 하면 지난해 열린 유엔인구억제 특별총회에선 2050년 세계 인구가 120억명에 이를 것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대한가족보건복지협회는 2001년 7월 10일 유엔이 정한 세계인구의 날(11일)을 맞아 유엔인구기금의 세계인구전망 등을 토대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협회는 세계인구의 20%를 차지하는 고소득층이 전 세계 민간 총소비의 86%를 차지하는 등 소득불균형이 심각하며, 이 고소득층의 5분의 1이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방출량의 53%를 점유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환경문제는 근본적으로 인구문제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계산에 따르면 지구가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인간 개체의 수, 다시 말해 인류가 폐기물을 쏟아내고 다른 동물을 잡아 섭취해도 자연정화가 되고 동물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인류 개체의 수는 2억 명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 계산대로라면 지금 현재의 상황으로만 추산하여도 60억에서 2억을 제한 58억 명의 인류가 매일, 생태계를 파괴하는 폐기물을 쏟아내고 생존하기 위하여 자연을 개발하고 다른 생명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환경주의자들은 청정기술을 통하여 통제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유조선이 유출한 기름을 제거하기 위하여 화학약품인 유분산 처리제를 뿌리면 그것이 다시 바다를 오염시킨다. 이 예에서 보듯 환경주의적 대안들은 기계적 세계관과 인간중심주의를 바탕으로 하였기에 근시안적이고 미봉책이며 국부적이다.

생태주의자들의 입장은 다르다. 그들은 인간이 전 지구의 중심에 서서 자연을 착취하고 개발하는 것을 문명으로 여긴 인간중심주의와 자연을 인간이 이용하는 대상으로 간주해버린 기계적 세계관에서 환경위기가 비롯되었다고 본다. 이들은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아우르는 통합적이고 유기적인 세계관 속에서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을 통하여 인간과 모든 생태계의 조화를 추구한다. 이들은 뉴턴의 기계론적 물질관과 데카르트의 心身二元論을 비판한다. 이것이 오늘날의 과학기술이 빚은 병폐의 근본 동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기계론적 세계관은 세계를 분석적, 환원주의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태론자들은 기계론적 세계관이 파기해버렸던 서구와 비서구의 전통사상을 결합해 대안을 모색한다.

 

미국의 한 주에서 있었던 일이다. 멸종 위기에 놓인 사슴을 보호하고자 사람들이 모여 회의를 하였다. 천적인 퓨마를 없애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하여 유명한 사냥꾼들을 불러모았다. 천적이 사라지니 민가 가까이에서도 사슴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해 봄 엄청난 숫자로 늘어난 사슴들은 닥치는 대로 식물의 새순을 먹어댔다. 곧 숲은 사라지고 사슴들은 먹이가 없어 굶주려 죽어버렸다. 사슴을 보호한다면서 사슴을 죽인 것처럼 기계론적 세계관은 인간과 자연을 모두 파괴한다. 생태적 세계관은 사슴과 숲과 퓨마와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파악하여 사슴과 숲과 퓨마가 적정 규모에서 공존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기계론적 세계관이 발전이란 이름으로 실은 자연과 문명의 쇠망을 이끈다면 생태적 세계관은 균형 속에서의 공존을 모색한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으로 보면 생성이 존재를 빚어내기에 자연은 끊임없이 자신을 새로이 창조해 가는 과정이다. 한 마리의 벌레가 기어가는 데도 중력이 작용하듯이 우주의 섭리는 자연의 모든 생명체에 두루 깃들여 있다. 세계는 그 자신의 활동성과 다양성을 상실해 가는, 꾸준히 하향하는 유한한 체계의 장관을 우리에게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 자연에는 물리적 해체의 측면에 역행하는 어떤 상향의 기운이 있다. 자연은 자기 스스로를 조직하는 거대한 생태계(ecosystem)이며 지금도 새롭게 갱신되고 있다. 퓨마와 사슴에서 바이러스에 이르기까지 온 생명들이 고정되고 고립된 것이 아니라 우주의 목적에 따라 서로 소통하고 의존하고 서로를 보완하는 가운데 자신을 창조하고 초월하면서 보다 나은 수준으로 진화해 가는 하나의 시스템이다. 조그만 개미 한 마리가 죽고 새로운 유충이 태어나는 것도 우주 전체의 어떤 목적과 섭리에 따라 일어나는 전체 속의 부분, 그러나 전체를 담고 있고 전체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부분이다. 서로 서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세계 속에서 하나 하나의 주체는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초월체로서 창조적으로 전진한다. 모든 주체는 끊임없이 소멸되지만 객체적 불멸성(objective immortality)을 통하여 새로움에 참여한다. 그러기에 모든 존재는 주체적으로는 끊임없이 소멸되지만 객체적으로는 불멸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과학의 객관성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며 과학적 활동은 합리적이고 가치중립적(value-free)이며 과학은 누적적으로 발전한다는 과학관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임을 깊이 깨닫게 된다. 카프라의 말대로, 총체적, 유기체적, 생태적 사고는 우주를 역동적이고 나눌 수 없으며 언제나 본질적인 방식으로 관찰자를 포함하는 전체로서 체험하곤 한다.

 

생태주의자들은 이 점을 공유하고 있으나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는다. 에코 페미니스트들은 기존의 생태론과 다른 대안을 내세운다. 에코페미니즘에서 보면 여성과 자연은 동격이다. 남성들에게 자연과 여성은 똑같이 착취와 개발의 대상이었다. 인간중심주의와 이성중심주의는 인간의 자연정복에 기반을 둔 남근중심주의적인 사고방식의 산물이다. 남성중심주의는 가부장적인 제도 속에서 내재화하여 이성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를 내세우며 근대 과학의 이름으로 자연과 여성에 대한 지배와 폭력을 정당화하면서 개발프로젝트를 수행하였다. 여기서 여성과 자연은 남성, 힘을 가지고 부리려는 자가 한껏 소비하는 상품이며 마구 폭력을 휘두르고 배제를 하여도 무방한 타자이다. 그러니 가부장주의의 자연 파괴에 맞서서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며 이를 보호하고 양육하는 여성성에 바탕을 둔 대안이 자연과 생명을 보호하리라 본다. 그러나 에코페미니즘은 페미니즘과 생태론을 결합한 것이기에 독립적인 영역을 갖는 이론이라기보다 양자의 절충으로 봄이 더 타당할 것이다.

 

1973년에 노르웨이의 철학자 아르네 네스는 기존의 생태이론을 ‘표층생태론(shallow ecology)’이라며 ‘심층생태론(deep ecology)’을 주장하였다. 표층생태론은 인간과 자연을 대립적으로 파악하여 자연 그 자체를 위하여 자연을 보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유용한 이익이 있을 것이라는 면에서 보존하기에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 심층생태론은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생태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자기를 실현할, 즉 생존하고, 번성하고, 자기 나름의 형태에 도달할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생명평등주의(biospherical egalitarianism)의 입장에서 생태계 전 구성원을 바라본다. 이들은 모든 생명체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각각의 평등성과 다양성을 인정하고 생명체끼리의 공생의 원리를 추구한다.

 

전 지구 규모의 환경문제는 바로 현재의 사회체제와 문명이 잉태한 것이므로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체제와 문명 그 자체를 변혁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먼저 현대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바꿔 의식개혁을 하여야 하며 지금과 같은 생활방식을 지양하여 새로운 생활방식을 기초부터 만들어 나아가야 한다. 이들은 인간과 자연이란 처음부터 하나라는 명제 아래 다양성과 공생의 원칙 속에서 모든 생물권이 평등하게 살아갈 것을, 그러기 위하여 인간이 상실한 ‘자연의 소리’, ‘지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감수성을 다시 회복할 것을 천명한다.

 

네스는 죠지 세션즈와 더불어 심층생태론을 8개의 강령으로 요약한다.

1) 지구상의 인간과 인간 이외의 생명의 복리와 번영은 그 자체로 가치 (소위 내재적 가치 또는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 이 가치들은 인간 이외의 생명의 세계가 인간의 목적을 위해 얼마나 유용한가 하는 문제와는 별개의 것들이다.

2) 생명 형태의 풍부함과 다양성은 이 내재적 가치의 실현에 공헌하며 또한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다.

3) 인간은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것을 제외하고는 생명의 풍부함과 다양성을 훼손할 권리가 없다.

4) 인간의 생명과 문화의 번영은 실질적으로 보다 작은 인간 개체군과 양립할 수 있다. 인간 이외의 생명이 번창하려면 인간은 작은 개체군이 되어야 한다.

5) 오늘날 인간은 인간 이외의 생명에 대해 지나치게 개입하고 있으며,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하고 있다. 6) 따라서 정책들을 바꾸어야 한다. 기본적인 경제적, 기술적, 이데올로기적 구조들에 영향을 미칠 이러한 정책들은 현재의 상황을 매우 다르게 변화시킬 것이다.

7) 이데올로기의 변화라는 것은, 생활 수준 향상의 표준을 지향하기보다는 더욱 더 삶의 질에 대한 평가의 표준을 지지함을 뜻한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큰 것과 위대한 것 사의의 차이에 대하여 깊은 자각을 할 것이다.

8) 이상의 논의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필요한 변화들을 직․간접적으로 시도할 의무를 갖는다.

 

이에 대해 사회생태학자들은 심층생태론의 신비주의적이고 반과학적인 정신을 비판하는 동시에 이미 지배적인 사회를 비위계적인 협력사회로 전환시키려는 환상에서 출발한다고 비판한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면서 인간이 자연을 개발하고 착취하였으므로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를 개혁하지 않고서는 생태의 균형이란 공허한 목표다. 생물주의는 ‘인간성’을 ‘자연법’으로 영원히 축소시켜버림으로써 이 뒤에서 작업하고 있는 것이 추상적인 ‘인간’도 ‘사회’도 아닌 바로 자본주의란 사실을 얼버무리고 있다. 이러한 권위주의적인 사고 방식은 때때로 다양한 영성에 대한 경건한 호소와 더불어 공존하고 있는데 이것은 부르조아적인 탐욕에서 등장한 무분별한 이기주의에 성인의 가면을 씌워놓고 있는 형상이다. 이성중심주의가 지금의 위기를 불러온 것은 타당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이성을 무시하고 직관과 영성을 중시한다면 인간의 의식이란 동물의 본성과 같은 것으로 전락한다. 인간 중심주의가 인간의 자연에 대한 파괴를 정당화하였다는 주장은 타당하고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우열이 아니라 다름과 차이의 눈으로 보아야 하지만, 인간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 가운데 지적 능력이 가장 뛰어난 특성을 가진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를 인식하고 대안을 세우고자 하는 것 또한 인간이고 그가 가진 이성이다. 그러기에 한 마리의 바이러스와 인간이 동등하다는 생명평등주의는 실제적으로 에코파시즘으로 전락한다. 생물권에 모욕을 가하는 인간들간의 차이, 즉 가난한 자와 부자, 남자와 여자, 백인과 유색인, 착취자와 피착취자를 구분하지 않은 채 무조건 ‘인간’을 공격하는 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가능하겠는가?

 

심층생태론의 한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바로 제3세계의 환경위기이다. 제3세계에서 환경위기의 근본 원인은 서구화,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이다. 서구 문명이 들어오기 전까지 제3세계의 사회는 자연과 완벽하게 공존하며 사람끼리도 서로 평화스럽게 살았다. 그들은 신이 보내준 짐승만을 사냥하였고 화살촉에서 대변과 집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쓰고 버린 모든 것은 자연으로 돌아갔다. 레비스트로스는 서양의 한 선교사를 통하여 경쟁이 아니라 공존이 삶의 목표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선교사가 원주민들에게 축구를 가르치고 시합을 시켰더니 양 팀이 서로 비길 때까지 하였다. 이 예는 서양과 제3세계 사이의 패러다임이 얼마나 다른 것인 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서양 사회는 이 ‘야생의 사고’를 미개와 야만이라 하였으며 문명의 이름으로 서구화와 산업화를 단행하였다. 이로 제3세계는 자연이 파괴되고 공동체가 해체되었으며 가난과 내전에 시달리고 있다. 이들 사회는 “서구적 산업모델의 수용과 서구식 근대화→산림의 개발과 비료와 농약 사용→산림파괴, 토양의 사막화와 토양오염, 지하수 오염→가뭄 등 천재지변→농촌공동체 파괴와 기근→내전→서구 종속 강화”의 악순환을 겪고 있다. 에티오피아가 서구적 산업화를 단행하자 국토의 40%에 달하였던 삼림은 1%로 축소되었다. 숲이 물을 품어주고 기후를 조절하지 못하자 가뭄이 40여 년간이나 지속되면서 농토는 거의 모두 사막으로 변하였고 하천과 샘들은 말라버렸다. 대기근이 발생하고 인간과 생물은 말라 죽어가고 있다. 삼림으로 우거졌던 루와다가 내전을 겪고 기근으로 수백만의 어린이가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 것도 서구적 농법을 도입하고 산업화를 단행하여 삼림을 파괴한 데 기인한다.

 

에티오피아나 루완다에서 서구의 제3세계, 제3세계 종속자본과 권력의 제3세계 하층에 대한 지배구조를 변화시키지 않고서 그들 국민의 영적인 태도를 바꾼다고 해서 환경파괴는 멈출까? 이 예들과 함께, 심층생태론이 제기한 자연과의 일체화 체험이 여러 신흥 종교가 범람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고 환경교육과 명상이 환경위기 시대의 새로운 상품으로 변질된 예들은 이 이론의 한계가 어디에 있는 지를 잘 보여주는 실례이다. 영성의 힘을 무시해서도 안되지만 토대의 변화 없는 영성 운동만으로 사회변화를 이끌어낼 수는 없다.

 

사회생태론자들이 볼 때 환경위기의 근본 원인은 자본주의의 체제에 있다. 이 사회는 진보를 협력보다는 경쟁과 동일시하고 사회를 정교화한 인간 관계의 영역이라기보다 사물들을 소유하는 영역으로 파악하며, 균형과 억제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에 기반하는 윤리를 창조한다. 인간사에서 최초로, 사회와 공동체는 거대한 쇼핑센터로 축소되었다. 작년에 100을 생산하였으면 올해 110을 생산하여야 망하지 않듯 자본주의는 ‘확대 재생산’을 해야만 살아남는 체제이다. 자본주의는 과잉생산을 추구하고 과소비를 조장한다. 그러기에 자본주의 체제는 자연을 더욱 더 황폐화시키고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소외시키는 동시에 쓰레기만 양산한다. 확대재생산의 원리는 자연이 무한할 것이라는 전제에서 번영과 발전을 약속하는 것인데 자연은 유한하였다. 10, 20년 전만 해도 자연의 여분이 있어 (세계의) 산업화가 300여 년 단행되었어도 오염은 국부적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그곳마저 개발하여 버리는 바람에 환경위기는 전 지구 차원에서, 인류가 절멸할 정도의 지경에까지 치닫는 것이다. 그러니 자본주의 체제를 해체하거나 혁신을 가하여 확대재생산의 원리를 자연과 문명간의 균형의 원리로 바꾸지 않으면 그 어느 것도 미봉책이다.

 

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논리가 변증법적인 이성이다. 변증법은 세계가 합리적인 한에서 자의식과 정교화가 커 가는 진보의 철학이다. 변증법은 추상으로부터 구체성의 분화를 지향하는 진화의 논리이기에 현실적인 것과 잠재적인 것, 일차 자연-실제 자연-과 이차자연-인간문화 전반-을 종합하여 새로운 차원의 ‘자유로운 자연’을 이룩할 수 있다. 자연은 종들의 자유로운 자기 선택에 의한 진화과정 그 자체이며 진화과정은 유기체적이고 발전적이고 변증법적이기에, 1차 자연과 2차 자연이 자유롭고 합리적이며 윤리적인 자연으로 용융되면서도 일차 자연과 이차 자연 그 어느 것도 자신의 특수성과 통합성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참여적 진화가 일어나는 자연, 곧 제3의 자유로운 자연은 생명이 변증법적, 유기체적으로 진화를 거듭하여 다산성과 다양성, 생물종들간의 상보성, 모든 구성원들의 참여가 증대되고 생활형태를 끊임없이 분화하는 사회이다.

 

사회생태론은 구체성에 바탕을 둔 것이기에 현실성을 갖는다. 신비주의와 반과학주의를 지양하여 변증법적 이성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객관적 보편 타당성 또한 획득한다. 공동체 건설과 시민포럼, 인간적 필요에 따른 소비 개념 재정립 등 사회운동을 대안으로 내세우기에 힘을 가지며 영적인 인간 자아의 변화에도 초점을 맞추므로 영속성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변증법은 이분법을 초월한 무엇이기보다 이분법을 더욱 정교화한 틀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한 변증법들은 이미 그 자체에 자와 타의 대립과 투쟁을 통한 종합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사회생태론이 구체성과 힘을 갖지만 그 패러다임 자체는 아직 자연을 파괴한 사회의 이분법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럼 이분법을 넘어서서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를 극복할 패러다임이 원효의 화쟁사상에 있을까?

 

화쟁의 연기론: 씨는 죽어 열매를 맺는다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적 사유에는 하나가 다른 것보다도 우위를 차지하고 지배하는 폭력적 계층질서가 존재한다.” 데리다는 이성중심주의에 바탕을 둔 서구의 형이상학은 정신/육체, 이성/광기, 주관/객관, 내면/외면, 본질/현상, 현존/표상, 진리/허위, 기의/기표, 확정/불확정, 말/글, 인간/자연, 남성/여성 등 이분법에 바탕을 둔 야만적 사유이자 전자에 우월성을 부여한 폭력적인 서열제도이며, 처음과 마지막에 “중심적 현존”을 가정하려고 하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홍수를 막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댐을 쌓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물이 흐르는 대로 물길을 터주는 것이다. 서구 사회는 인간과 자연을 이항대립으로 나누고 인간에게 우월권을 주었기에 전자의 방식을 택하였다. 댐을 쌓듯 인간 주체가 자연에 도전하여 자연을 개발하고 착취하는 것을 문명이라 하였고 이것으로 그들은 17세기 이후 전 세계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댐은 물의 흐름을 방해하여 물을 썩게 하고 결국 거기에 깃들여 사는 수많은 생물을 죽이고 심지어는 주변의 기후를 변화시키고 지진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렇듯 이항대립에 바탕을 둔 서구의 패러다임은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를 비롯하여 거의 모든 현대성의 위기의 동인이었다.

 

댐을 쌓는 것이 근대적, 서구적 패러다임에서 비롯된 대안이라면, 물길을 터서 물을 흐르게 하고 나무를 심는 것은 화쟁의 不一不二의 패러다임에서 비롯된 대안이다. 화쟁의 패러다임을 가졌던 최치원은 홍수를 막기 위하여 물길을 트고 나무를 심었다. 지금도 지리산 자락의 함양군 함양읍 대덕동에 가면 낙엽활엽수림으로선 유일하게 천연기념물(제154호)로 지정된 上林이란 숲이 있다. 1,100년 전 신라 진성왕(887년~896년) 때 이곳의 태수인 고운 최치원은 홍수로 툭하면 넘치는 위천의 물길을 돌리고 이 숲을 조성하였다. 下林은 사라져버렸으나 지금도 폭 200~300미터, 길이 2킬로미터에 걸쳐 200년 된 갈참나무를 비롯하여 114종, 2만여 그루의 활엽수목이 원시림과 같은 깊은 숲을 이루고 있다.

 

댐은 물을 썩게 하고 생명들을 죽이지만 숲은 빗물을 품었다가 정화한 다음 서서히 내보낸다. 사람이 걸어다녀 다져진 토양은 시간당 10밀리의 비를 품는 반면에 잘 가꾼 숲은 시간당 200밀리 이상의 강우를 가둔다. 고운 최치원은 왜 활엽수를 심었을까? 임업연구원이 광릉수목원에서 실험하였더니 활엽수 천연림은 사방공사를 한 침엽수와 활엽수가 섞인 숲에 비하여 우기에는 헥타아르 당 28.4톤의 물을 머금고 반대로 건기에는 2.5톤의 물을 더 흘려보내는 것으로 밝혀졌다. 고인 물은 썩지만, 흐르는 물은 산소를 머금고 이온 작용으로 자연 정화를 하며 온갖 생명들을 품는다.

 

이런 화쟁의 불일불이 원리에 대하여 원효는 다음과 같이 씨와 열매의 비유로 쉽게 설명한다.

 

“열매와 씨가 하나가 아니니 그 모양이 같지 않기 때문이요, 그러나 다르지도 않으니 씨를 떠나서는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또 씨와 열매는 단절된 것도 아니니 열매가 이어져서 씨가 생기기 때문이요, 그러나 늘 같음도 아니니 열매가 생기면 씨는 없어지기 때문이다. 씨는 열매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니 열매일 때는 씨가 없기 때문이요, 열매는 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씨일 때는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않기 때문에 生하는 것이 아니요, 늘 같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기 때문에 滅하는 것이 아니다. 멸하지 않으므로 없다고 말할 수 없고, 생하지 않으므로 있다고 말할 수 없다. 二邊을 멀리 떠났으므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하나 가운데 해당하지 않으므로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말할 수 없다.”(元曉: 《金剛三昧經論≫, <無生行品>, 《韓國佛敎全書≫(이하 《韓佛全≫으로 약함), 제1책, 625-중-하 : “菓種不一 其相不同故 而亦不異 離種無菓故 又種菓不斷 菓續種生故 而亦不常 菓生種滅故 種不入菓 菓時無種故 菓不出種 種時無菓故 不入不出故不生 不常不斷故不滅 不滅故不可說無 不生故不可說有 遠離二邊故 不可說爲亦有亦無 不當一中故 不可說非有非無”)

 

화쟁의 일곱 가지 의미 가운데 하나인 불일불이는 차이를 통하여 공존을 모색하자는 사유체계다. 씨는 스스로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으나 열매와의 “차이”를 통하여 의미를 갖는다. 씨와 열매는 별개의 사물이므로 하나가 아니다[不一]. 국광 씨에서는 국광사과를 맺고 홍옥 씨에서는 홍옥사과가 나오듯, 씨의 유전자가 열매의 거의 모든 성질을 결정하고 열매는 또 자신의 유전자를 씨에 남기니 양자가 둘도 아니다[不二]. 씨는 열매 없이 존재하지 못하므로 空하고 열매 또한 씨 없이 존재하지 못하므로 이 또한 공하다. 그러나 씨가 죽어 싹이 돋고 줄기가 나고 가지가 자라 꽃이 피면 열매를 맺고, 열매는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지만 땅에 떨어져 썩으면 씨를 낸다. 씨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면 씨는 썩어 없어지지만 씨가 자신을 공하다고 하여 자신을 흙에 던지면 그것은 싹과 잎과 열매로 변한다. 空이 生滅變化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세계는 홀로는 존재한다고 할 수 없지만 자신을 공하다고 하여 타자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씨는 스스로 공하나 썩어 열매를 맺는 것처럼 이것이 없으니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으니 이것이 있다. 또 씨가 있어 열매를 맺고 열매가 있으니 씨가 나오는 것처럼 이것이 있으므로 해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해서 이것이 있다. 열매일 때는 씨가 없으므로 씨는 열매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씨일 때는 열매가 없으니 열매는 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않으므로 존재한다고 할 수 없고 늘 같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으므로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멸하지 않으므로 존재하지 않는다 할 수 없고 나지 않으므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이중부정을 통해 공한 것이 공한 것이기에[空空] 오히려 존재를 긍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랑이 깊으면 얼굴마저 닮는다

 

이처럼 화쟁은 우열이 아니라 차이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고, 투쟁과 모순이 아니라 자신을 소멸시켜 타자를 이루게 하는 상생의 사유체계이다. 서구의 이항대립의 철학이 댐을 쌓아 물과 생명을 죽이는 원리를 이룬다면, 화쟁의 불일불이는 그 댐을 부수고 물이 흐르는 대로 흐르며 물은 사람을 살게 하고 사람은 물을 흐르게 하는 원리이다. 화쟁의 불일불이는 이항대립적 사고, 우열과 동일성을 해체한다는 점에서는 데리다의 철학과 통하나 데리다는 해체는 하되 대안은 약한데 화쟁은 차이와 상생을 결합한 사유체계이다.

 

사랑이 깊고도 깊으면 얼굴마저 닮는다고 한다. 우리 주변에서 금실이 좋은 부부를 보면 부부라기보다 오누이 같다. 고등어 소리만 들어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던 이가 상대방이 맛있다고 하니 그 비린내가 생선의 독특한 맛으로 느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풋사랑하는 이들은 상대방을 소유하려 하지만, 참사랑하는 이들은 내가 그리로 물처럼 흘러 그를 이루려 한다. 내 방식이 아니라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함께 바라보는 것이 참사랑이다. 레비나스는 사랑하는 이들은 상대방의 얼굴에서 신의 모습을 본다 했다. 그러니 왜 얼굴인들 닮지 않겠는가? 그리 나를 소멸시켜 상대방을 이루려 하는 것이 참사랑이요 화쟁의 불일불이이다.

 

미봉책의 대안은 아무런 소용이 없지만 지금의 문명을 송두리째 부정한 대안은 실현 가능성이 없다. 하지만 인간과 자연이 씨와 열매처럼 자신을 소멸시켜 상대방을 이루려 한다면, 그 원리에 따라 사회를 재편하고 가치관을 혁신하고 모든 생산을 차츰차츰 이 원리에 따라 해낸다면 인간은 함양의 상림처럼 자연의 원리를 거스르지 않는 문명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인드라 생명공동체처럼 연기법이나 화쟁의 패러다임에 따른 생태공동체가 여기 저곳에 생기다 보면 이 지구 전체가 그런 공동체로 왜 변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동강 댐을 놓느냐 마느냐로 시비할 때 미국 정부는 ‘미국의 강들’ (www. americanrivers. org)이라는 시민단체의 운동에 굴복하여 이미 지어진 댐 스무 개 정도를 파괴한 것을 아는가? 화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로부터 화쟁 식의 대안은 서서히 모색되고 있다. 그런 행동을 낳은 원리가 화쟁의 불일불이라고 알려준다면 화쟁의 대안은 좀더 힘과 구체성을 갖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서양의 대안을 폐기하라는 것은 아니다. 고운 선생은 숲을 조성하기 전에 둑을 쌓았다. 화쟁의 패러다임은 서양과 동양, 현대와 탈현대의 대안 또한 하나로 아우른다.

 

이처럼 화쟁의 불일불이는 심층생태론이나 사회생태론을 초월하여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화쟁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낀다. 화쟁은 신비주의도 반과학주의도 아니다. 화쟁은 이성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서 인간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지금의 환경위기를 낳은 근본 원인과 모순에 대한 첨예한 인식과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위적, 선언적이라는 점이다. 그러기에 동양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전제왕권 사회나 농업사회로 퇴행하는 것이 아니라면, 불일불이는 一心二門의 順不順의 논법을 따라 ‘화쟁적 합리성’-과학적 보편타당성을 가지면서도 생물종의 다양성과 진화발전을 추구하고 변해진 21세기의 사회문화의 현실맥락에 바탕을 두면서도 인간과 생물의 삶의 질을 확대하는 가치를 지향하는-으로 보완하여야 한다.

 

불일불이는 21세기의 사회의 현실이란 맥락에서, 이 땅위에서 호흡하고 있는 우리 몸을 바탕으로 우리 몸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런 면에서 화쟁의 불일불이는 화쟁의 또 다른 개념인 眞俗不二와 결합할 때 비로소 올바른 생태이론이 될 수 있다. 眞俗不二는 생태론적 관념에만 머물지 않고 모든 생명체가 공존할 수 있는 실천인 慈悲行을 행하는 사유이다. 지식인들만 공허한 외침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생태적 열망이 잠재되어 있으나 다만 산업화와 인간중심주의, 기계론적 세계관의 이데올로기에 조작되어 감추어져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여 그들로 가서 그들 속의 부처님이라 할 생태적 사고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니 眞俗不二는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에서 억압당하고 신음하는 민중들, 그 지배체제로 인하여 착취되고 개발되며 종의 절멸로 치닫고 있는 생명체들을 모두 보듬을 수 있는 방편과 실천을 제시한다.

 

2강 과학기술의 도구화

 

게놈프로젝트, 과학기술은 구세주인가, 악마인가: 신과학운동 對 一心의 體用相

 

손빨래를 할까요, 세탁기를 돌릴까요?

 

우리가 어렸을 적 겨울은 몹시도 추웠다. 안방 머리맡에 둔 자리끼가 꽁꽁 얼었으니 밖은 얼마나 더 시린 겨울이었을까? 무명바지 헤진 사이로 칼바람은 잘도 헤집고 들어와 여린 살을 꽁꽁 얼려놓고 도망갔고 잔뜩 곱은 손으로 팽이를 돌리고 얼음을 지치다 보면 손등은 어느덧 쩍쩍 갈라져 코끼리 등이 되었다. 한강이 얼마나 깊이 얼었으면 강물이 풀리는 봄날에 그를 배 삼아 타고 놀았을까?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겨울 날 가장 골칫거리 가운데 하나가 이불을 빠는 일이다. 볕이 제법 포근한 날을 골라 커다란 함지박에 이불을 넣고 물을 가득 퍼담고 양잿물을 푼 다음 발로 콱콱 밟는다. 그러면 시커먼 구정물이 금세 함지박을 채운다. 새 물을 붓고 다시 밟고 또 물을 바꾸는 일을 오전 내내 하다보면 그 추운 날에도 가슴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다리는 천여 미터 산을 오른 이마냥 후들거린다. 안쓰러워 그만 하라고 외치는 어머니와 좀더 원하는 목표치에 도달하려고 이를 악무는 아들 사이에 몇 차례 실랑이를 벌인 끝에 빨래를 멈추고 물을 짠다. 짜고 또 짜도 솜은 왜 그리 물을 많이 먹었는지 팔에 경련이 일도록 짜도 주먹만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물 짜는 일만큼은 에누리가 없다. 빨랫줄이 무게를 못 이겨 끊어지면 모든 일이 허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꽤 말끔히 짜서 널면 이불은 설악산 용대리 황태처럼 얼었다 풀렸다를 되풀이하면서 날이 계속 좋으면 사나흘, 그렇지 않으면 족히 대엿새는 걸려서야 다시 안방으로 돌아갔다. 그러다 밤새 도둑눈이 소복소복 이불 위에 내려 빨랫줄을 끊고 이불을 진창에 패대기치면 어머닌 아침 아궁이를 지피시며 눈 오는 소리를 듣고도 깨지 못한 당신을 연신 나무라셨다.

이불 하나 빠는 일만도 이리 어려운 일인데 세탁기와 캐시미론 이불은 어머니와 우리 가족을 얼마나 행복하게 해 주었는가? 일손만 덜어준 것이 아니다. 세탁기로 빨래를 돌리는 일은 남자도 할 수 있으니 가사를 공동 부담하면서 가정의 평등이 이루어진다. 가사노동에서 해방된 여성들이 사회로 속속 진출하니 여성들은 수천 년 동안 그들을 억압하고 통제하였었던 가부장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기실현을 이룬다.

 

이처럼 과학기술은 인류의 구세주였다. 인류를 중세의 무지몽매함에서 해방시키고 60억이 먹고 살 만한 물질적 풍요를 안겨 주었던 것도, 산업혁명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도, 인류가 한 마을[global village]이 되고 지구 밖 외계로 나아가게 한 것도, 안방에 앉아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월드컵 축구경기를 관전하고 뉴욕의 증시에 투자할 수 있게 된 것도, 노동의 구속에서 벗어나 여가를 즐기게 된 것도 모두 과학기술의 힘이다.

 

그러나 세탁기는 소음을 낸다. 중성세제는 강물을 오염시킨다. 여가시간이 엄청 늘었는데도 세탁기 탈수조처럼 모든 것이 빨리 돌아가니 자신을 돌아볼 시간은 없다. 양심과 도덕과 정의는 달리기 선수의 발목에 매달린 모래주머니에 지나지 않는다. 기계로 대체된 노동은 빨래를 하며 오순도순 나누었던 모자간의 대화를, 이불을 밟고 짜면서 부딪혔던 그 살의 부드러움을 허기진 그리움으로 바꾸어 버렸다.

인간이 업을 주재할 수 있을까?

 

과학기술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잘 알 수 있는 것이 최근에 깊은 관심을 끌고 있는 게놈프로젝트이다.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의 이중 나선구조를 발견한지 47년 만에 인류는 30억 쌍의 유전자 지도를 손에 넣게 되었다. 인류는 이제 생명의 비밀에 거의 근접하였으니, dna칩을 이용해 질병을 진단하고 예방하며, 유전자에 담긴 정보를 풀어 암과 알츠하이머 병 같은 난치병을 치료할 수도 있으며, 인간의 간이나 폐를 돼지나 원숭이에게 키워 다시 인간에게 이식할 수 있다. 인류는 자신을 고통과 불안으로 몰아넣은 질병을 거의 정복할 단계에 이른 것이다. 더 나아가 복제인간을 합성할 수도 있고, 얼굴은 디카프리오, 몸은 마이클 조던, 머리는 아인슈타인 식으로 맞춤아기를 생산할 수도 있다. 기독교식으로 보면 인간이 인간을 창조하는 신의 경지에 올랐다고, 불교로 보면 業(karma)의 주재자가 되었다고 착각할 만한 일이다.

 

유전공학자들의 말대로라면 인간이 업의 질서에 간섭하겠다고 덤비는 꼴인데 그것이 가능한 일이고 그럴 경우 우주 삼라만상의 질서는 어찌 되겠는가? 필시 부처님 손바닥에 놓인 손오공 꼴이 되리라. 그러기에 유전자 공학은 장밋빛 미래만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유전자 공학은 우주 삼라만상의 질서를 깨는 일이며, 인간의 질서에도 근본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 우선 인간의 개념이 모호해지고 인간과 동물의 구분이 희미해진다. 유전자로 마구 인간을 복제하고 半獸半人을 만들고도 사람들은 인간 존재를 존중하고 생명을 존엄한 것으로 여기겠는가? 배아 간세포를 이용해서 실험하다가 필요한 부분만 절단해서 쓰고 나머지를 버린다면 생명체를 죽인 것인가, 아닌가? 실수로 인간의 내장을 달고 있는 돼지를 잡아 순대를 만들어 먹었다면 이는 짐승의 고기를 먹은 것인가, 인육을 먹은 것인가? 이렇게 경계와 구분이 모호해지는데 과연 생명존엄이나 인간 존중의 정신이 깃들이겠는가?

 

유전자 공학은 더욱 갈등과 불평등을 첨예화하고 사회적 차별을 강화할 수 있고 전체주의로 가는 지평을 연다. 남보다 뛰어나고자 하는 욕구와 이를 바탕으로 열등한 자를 경멸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이 유전자공학과 결합할 경우 나치즘의 우생학과 같은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 열등한 유전자, 질병의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산업시대의 인종, 민족, 성별 이상으로 시험, 면허, 보험, 복지 혜택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차별을 받을 것이다.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자가 엘리트 그룹을 형성하여 혼인이든 아니든 그들끼리 유전자를 교환하면서 열등한 유전자를 가진 자들을 영구히 지배하는 사회가 도래할 수 있다.

 

선진국과 약소국의 격차와 갈등도 더욱 심화할 것이다. 유전자 지도 자체가 인류의 공동 유산임을 들어 이의 공유를 표명하였지만, 이를 응용한 기술에는 특허를 부여하고 있다. 벌써 셀레라 제노믹스사는 6,500여 건의 특허권을 가지고 있다. 유전자 공학이 신약개발이나 장기 공급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가치를 지녔기에 선진국과 후진국의 격차는 더욱 심화할 것이다.

 

인간의 획일화 또한 강화한다. 어머니의 유전자와 아버지의 유전자가 업의 원리에 따라 섞이면서 다양한 개성과 능력을 가진 사람이 태어나 이들이 다채로운 문화를 창조한다. 쌍둥이마저도 다름을 가지고 태어나며 지문과 홍채도 제각각 달라 이것으로 사람을 식별할 정도이다. 20세기에 다른 육체와 정신을 가진 인간도 쉽게 획일화하였는데 같은 몸과 정신을 가진 인간은 얼마나 더 그럴까?

 

유전자 공학은 한 예일 뿐이다. 과학기술은 더 이상 구원이 아니라 악으로 나타나고 있다. 로봇 공학은 생산성을 증대하고 위험하거나 불필요한 노동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지만 인간의 노동을 빼앗고 지배할 수 있다. 핵무기는 지금도 언제나 지구 전체를 날려버릴 수 있다. 유전자 조작식품은 수십 억 년 간 유지돼 온 지구 사회의 생태계를 송두리째 파괴할 수 있다. 실험실에서 잘못 합성된 신종 바이러스가 전 인류를 사망시킬 수 있다. 컴퓨터 공학은 개인을 더욱 소외시키고 있으며 인간을 감시하고 관리, 통제하는 시스템을 강화하며 아주 사소한 실수로도 수억 명의 목숨을 앗아갈 위기를 언제나 내포하고 있다.

 

더구나 고도 산업사회에 접어들면서 과학기술은 도구화하여 인간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이데올로기이자 메커니즘으로 전락하였다. 나치주의자들이 유태인 수용소에서 인간을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대량으로 죽일 수 있는 방편을 모색할 때, 자본가들이 몰래카메라를 장치하고 전자감응센서를 달아가면서 노동자들을 감시하고 철저히 통제하여 생산성을 최고로 높이는 방안으로 활용할 때, 국가가 대중들을 조작하고 관리, 통제하는 기제로 이용할 때, 미국이 md를 강행하여 다른 나라의 도전을 무력화시키고 안으로는 군산복합체를 살찌우고 밖으로는 유일한 초강대국으로서 약소국을 마음대로 수탈하고 유린할 수 있는 교두보로 삼을 때 과학기술은 더 이상 구세주가 아니다. 이제 정치기구와 밀접하게 결합된 과학기술은 인간의 무의식마저 지배하고 관리하고 통제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전체주의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신과학운동: 아무리 좋은 것도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신과학운동론자들은 뉴턴의 기계론적 물질관과 데카르트의 心身二元論을 비판한다. 이것이 오늘날의 과학기술이 빚은 병폐의 근본 동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기계론적 세계관은 세계를 분석적, 환원주의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과학운동은 기계론적 세계관이 파기해버렸던 서구와 비서구의 전통사상을 결합해 대안을 모색한다.

 

미국의 한 주에서 있었던 일이다. 멸종 위기에 놓인 사슴을 보호하고자 사람들이 모여 회의를 하였다. 천적인 퓨마를 없애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하여 유명한 사냥꾼들을 불러모았다. 천적이 사라지니 민가 가까이에서도 사슴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해 봄 엄청난 숫자로 늘어난 사슴들은 닥치는 대로 식물의 새순을 먹어댔다. 곧 숲은 사라지고 사슴들은 먹이가 없어 굶주려 죽어버렸다.

 

달과 지구의 인력에는 가까이 있는 화성을 비롯하여 우주에 있는 수조개의 별들과 암흑물질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근대의 과학자들은 다른 것은 무시하고 달과 지구만을 대상으로 삼아 달과 지구 사이의 인력이 얼마라고 자랑스레 내놓았다. 이처럼 분석적으로 부분만을 보는 것이 근대적, 기계론적 세계관이라면 모든 것을 서로 영향을 주고 영향을 맺는 시스템으로 보고 전일적, 유기체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신과학운동이요, 생태적 세계관이다. 사슴을 보호한다면서 사슴을 죽인 것처럼 기계론적 세계관은 인간과 자연을 모두 파괴한다. 생태적 세계관은 사슴과 숲과 퓨마와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파악하여 사슴과 숲과 퓨마가 적정 규모에서 공존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기계론적 세계관이 발전이란 이름으로 실은 자연과 문명의 쇠망을 이끈다면 생태적 세계관은 균형 속에서의 공존을 모색한다. 우주를 역동적이고 나눌 수 없으며 언제나 본질적인 방식으로 관찰자를 포함하는 전체로서 체험하곤 한다(capra: 1975, 81).

 

화이트헤드(A.N. Whitehead)의 과정철학으로 보면 자연은 현재라는 시간에 적응하기 위해 움직이는 과정과 형태이다. 자연은 자기 스스로를 조직하는 거대한 생태계(ecosystem), 퓨마와 사슴에서 바이러스에 이르기까지 온 생명들이 고정되고 고립된 것이 아니라 우주의 목적에 따라 서로 소통하고 의존하고 서로를 보완하는 가운데 자신을 창조하고 초월하면서 보다 나은 수준으로 진화해 가는 하나의 시스템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과학의 객관성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며 과학적 활동은 합리적이고 가치중립적(value-free)이며 과학은 누적적으로 발전한다는 과학관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임을 깊이 깨닫게 된다.

엔트로피 이론은 발전 지상주의나 과학기술만능주의에 경종을 울린다. 사막에 빌딩이 들어서고 길이 바둑판처럼 들어차면 우리를 이를 발전이라, 질서라 불렀다. 그러나 이 빌딩에 난방을 하고 자동차를 달리게 하려면 다른 곳에서 나무를 캐고 석탄과 석유를 가져와 태워야 한다. 한 곳에서 엔트로피를 감소시키려면 외부에 그보다 더 큰 정도로 엔트로피를 증가해야 한다. 엔트로피 이론을 통해 우리는 자연세계에서 인공적 변화란 사용 가능한 에너지를 불가능한 형태로 바꾸면서 주위의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방향으로밖에 일어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닫는다. 그러므로 전지구가 경쟁적으로 벌이는 경제성장이란 사용 가능한 자원을 사용 불가능한 쓰레기로 바꾸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결국 모든 것이 쓰레기가 되는 종말로 치닫는 질주일 따름이다. 이처럼 엔트로피 법칙은 우주의 어느 곳에 질서와 발전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다른 곳에 그보다 더 큰 무질서와 쓰레기가 생긴다는 것을 절대진리로 천명한다.

 

우리는 신과학운동과 엔트로피이론으로부터 두 가지 진실을 발견한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많을수록 무조건 더 좋은 것은 아니다”와 “전체 시스템이 원활하게 순환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 안의 모든 생명체를 살리는 길이요 진정한 발전이다”라는. 퓨마와 사슴의 관계에서 보듯 어느 한 부분의 효율만을 극대화하면 이것은 다른 부분의 파괴로 나타난다. 그런 것을 알았다면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경제구조와 사회구조를 전체 시스템의 차원에서 적정한 규모의 수준으로 조절하여 재편성하여야 한다. 대형 댐을 건설하여 주변의 산과 숲, 공동체를 파괴하고 강물과 거기에 사는 생물들을 죽이고 이를 관리하기 위하여 한국전력과 같은 관료체제를 만들어 유지하기 위하여 엄청난 비용을 소모하면서 생산한 전력의 평균 30%를 낭비하는 것이 전자의 방식일 것이다. 공동체나 주변 자연과 공존하는 마을 댐을 지어 자급자족식으로 전력을 사용하는 것이 후자의 대안일 것이다. 대량생산, 대량소비로 엄청난 쓰레기를 낳았던 것이 전자의 문명이라면 소규모 공동체를 바탕으로 빗물은 냇물로 보내고 생활하수는 자연 정화하여 밭으로 돌리듯 모든 것을 순환체제의 속에 놓는 것 후자의 문명일 터이다.

 

體는 用을 통해 드러나고 用은 相을 만든다

 

며칠 전 경주 남산의 불상을 찾았다. 골짜기마다, 바위마다 부처를 새긴 신라인의 불심을 읽어보았다. 용장사 마애여래좌상 앞에 섰다. 부처님께선 구름처럼 덩실 솟아오른 연꽃 대좌 위에 결가부좌를 한 채 항마촉지인을 하고서 계셨다. 당당하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곱게 흘러내린 승기지와 가사의 옷자락으로 하여 부드러움이 조화를 이루고 두툼한 두 뺨은 보름달과 같은 턱의 곡선을 타고 원융미를 드러낸다. 지긋이 감은 눈, 눈썹을 타고 맵시 있게 흘러내린 코 아래로 꽉 다문 입, 그 입가로 잔잔히 파문처럼 번지는 미소! 말로, 인간이 내는 짓으로는 眞如의 實體에 다다를 수 없음을 알고도 이를 방편으로 삼아 불법을 드러내려 한 신라인의 마음이 가슴에 다가온다. 그들은 돌에 부처를 새긴 것이 아니라 돌 속의 부처를 드러낸 것이라는 어느 시인의 표현이 하나도 과장이 아니었다. 산을 내려와서도 그 파문은 연하여 가슴에 밀물져왔다. 이처럼 돌도 佛性을 담고 있는데 생명체야 말하여 무엇하리? 크든 작든 모든 생명체가 業에 따라 빚어지고 서로 緣起되어 있는데 덜 중요한 것은 무엇이며, 업과 연기의 질서를 깨고 생명체를 죽이는 과학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신과학운동은 기존의 기계론적 세계관을 넘어서서 많은 대안을 제시한다. 하지만 가장 큰 약점은 업과 연기처럼 이를 뒷받침할 철학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또 이를 체계화할 사유구조나 원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럼 우리의 원효 사상에 그것이 숨어 있을까?

 

《大乘起信論≫ <立義分>에서 馬鳴은 一心을 진여문과 생멸문으로 나누고 진여문에 體大, 생멸문에 用大와 相大를 두어 一心 二門 三大의 체계를 정립하였다. 원효는 이를 더욱 발전시켜 세계를 구조적, 전일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방편을 열었다.

 

“만약 常住를 논한다면 다른 것을 따라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體라 하고, 無常을 논한다면 다른 것을 따라서 생멸하는 것을 相이라 하니 체는 常이요 相은 無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일심이 무명의 연을 따라 변하여 많은 중생심을 일으키지만 그 일심은 항상 스스로 둘이 없는 것이다.…비록 심체가 생멸하나 늘 심체는 상주하여 이는 심체가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른바 이는 심체가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닌 성질이며 움직임과 머뭄이 같지도 않으면서 다른 것도 없는 성질인 것이다.”(《大乘起信論 別記≫, <解釋分>)

 

體는 증감은 물론 늘 변함이 없으며 앞에서 나는 것도 뒤에서 멸하는 것도 아니어서 大智慧光明, 自性淸淨心, 常樂我淨의 뜻이 있는 모든 불변을 여읜 것이다. 여래장 중에 한량 없는 性功德의 相을 잘 나타내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相大의 뜻이며, 또 여래장의 불가사의한 業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用大의 뜻이다. 둘째는 진여가 일으킨 染相을 相이라 이름하고 진여가 일으킨 淨用을 用이라 이름한다.

 

세계는 원래 하나이나 常하여 이루어지지 않고 궁극적인 것과 無常하여 이루어지고 찰나적인 것으로 나누어진다. 전자가 眞如의 모습인 體이며, 후자는 生滅因緣하는 相과 用이다. 體는 영원불멸한 것이며 늘지도 줄지도 않으며 시작도 끝도 없는 세계의 실체를 나타낸다. 따라서 體는 相과 달리 사물이 드러내고 있는 것을 넘어서서 사물의 실체로 깨달은 것이다. 반면에 세계의 경험되고 드러나 나고 멸하는 것을 相이라 한다. 相은 體가 드러나 生滅因緣하는 바다. 또 세계는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운동한다. 인간으로 보면 실천이, 진정한 깨달음의 측면에서 보면 자비와 덕을 베푸는 것이 用이다. 따라서 用은 한 사물과 다른 사물과의 관계, 다른 사물에 대하여 작용하고 기능을 한 것이며, 사물이 시공간에서 운동한 것이다.

 

그럼에도 體用相의 원리는 서구철학처럼 대립적이지 않다. 體用相이 세계의 각각의 모습이나, 모두 一心에 의한 것으로 일심의 세 가지 의미에 불과한 것이다. 원효는 이에 대해, “一心이라 하는 染과 淨을 포괄하는 法은 그 本性이 둘이 아니요, 참되고 참되지 않음에도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一이라 하는 것이다. 이 둘이 아닌 곳에 여러 법이 적중하여 열매를 맺어 허공과 같지 않아 本性이 스스로 신비한 이해력을 갖고 있어 心이라고 한다.…따라서 일심은 일체 世間의 법과 出世間의 법을 포괄한다.”라고 말한다.

우주 삼라만상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 참 과학이다.

 

그럼 一心의 體用相을 과학기술과 관련지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갈릴레이나 아인슈타인이 그랬던 것처럼 기존의 패러다임을 벗어나서 물질의 실체에 좀더 가까이 다다르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도 기존의 본질에 비하여 조금 더 실체에 이른 것뿐이지 물질의 진정한 실체에 접한 것은 아니다. 연구를 진행할수록 새로운 소립자가 계속 발견되어 원자의 구조 또한 달라지고 이에 따라 물리나 천체의 원리가 달라진다. 그러니 지구과학이 앞으로 수만 년 더 발달한다 하더라도 물질의 진정한 실체인 참에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다. 이처럼 진정한 깨달음의 세계에서 보면 누구도 궁극적 진리에 이를 수 없다.

 

봄날의 산은 나에게 혼돈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것은 취나물이고, 이것은 얼레지라고, 취 중에서도 요것은 개미취요, 요것은 참취며 이것은 곰취고 저것은 미역취라고 가르쳐 주신다. 그러나 나의 눈에는 다 비슷한 풀일 뿐이다. 나에게는 온통 혼돈이지만 어머니는 그 풀을 이파리 모양과 빛깔, 줄기의 생김 등에 따라 취, 얼레지, 질경이 등으로 가르고, 다시 이것은 날로 먹으며 저것은 못 먹는다고 구분한다. 이렇듯 원래 풀은 하나이지만 우리가 허상이나마 인간의 틀로 범주를 만들어 나누어 놓아야 세계를 이해할 수 있고 이용할 수 있다. 세계의 실체는 원래 하나이지만 우리는 그러면 알 수 없으니 이를 주/객, 본질/현상, 이성/감성 등 둘로 나누어 인식한다. 그러나 실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고 이용하기 위해 그리 나눈 것뿐이다. 분별이요 허상이다. 그러니 하나를 둘로 나누는 것이 用이라면 셋을 통하여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 體이다.

 

나무의 실체는 영원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탄소동화작용이나 광합성 작용을 통하여 나무의 실체를 잠시나마 엿본다. 그리고 탄소동화작용이나 광합성 작용이 나무의 형상을 꼴 짓는다. 잎은 햇빛을 충분히 받아들이도록 넓게 벌어지고 바람에 살랑거리며 공기를 내뿜고 열을 발산하도록 부채 모양에서 참새 혀 모양에 이르기까지 가지가지 형태를 갖는다. 나무는 자신이 서 있는 자연 속에서 두 작용을 가장 수월하게 할 수 있는 형상을 갖는다. 이처럼 體는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이나 用을 통하여 드러나고 用은 相을 만들고 相은 쌓여 體를 이룬다.

 

일심의 체용상을 통하여 우리는 현대 과학기술이 빚은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석굴암의 예는 21세기의 과학기술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 지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석굴사(석굴암)의 불상을 부식시키는 습기를 제거하기 위하여 현대과학의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지금도 습기 제거기를 돌리고 있으나 그 진동으로 석굴사의 그 아름다운 불상들은 하나 둘 부스러지고 있다. 그러면 천여 년 동안 그것은 어떻게 해풍이 강한 동해 변에 있으면서도 조금의 마모도 허용하지 않았을까?

 

답은 지하샘이었다. 사람들은 석굴사를 하필 차디찬 샘물이 솟는 곳에 앉힌 이유를 몰랐다. 그러나 동해에서 불어온 습기 많은 해풍은 석굴사에 들어왔다가 샘물로 냉각된 바닥의 돌을 지나면서 이슬을 맺는 것이었다. 지상의 공기는 수분을 빼앗겨 건조해진다. 이러니 본존불을 비롯한 모든 유물들은 자연스레 보존되는 것이다. 엔트로피가 거의 제로의 상태인 방안일 뿐 아니라 완벽한 순환의 체제이다. 8세기의 신라인들이 어찌 현대과학보다 높은 지혜에 도달하였을까? 업과 연기의 원리에 따라 우주 삼라만상의 體, 一心에 도달하려 하였기에 그런 깨달음이 온 것이 아니겠는가?

 

서양의 과학자들은 나뭇잎을 떼어내 현미경 앞에 놓고 분석하여 이를 생물학이라 내놓는다. 그러나 살아서 생동하면서 숲의 다른 나무, 같은 나무의 다른 잎들과 서로 의존하며 인과의 다발로 맺어졌던 관계에서 떨어져 나와 이미 죽은 나뭇잎 하나가 나무 전체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줄까?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과학이 아니다. 석굴암처럼, 업과 연기의 원리를 알아 그 順理를 따르는 것이 진정 새로운 과학의 길이 아니겠는가? 우주 삼라만상을 인간의 잣대로 억지로 질서화할 것이 아니라 用을 통하여 그 무질서에 가까이 가려해야 21세기의 과학은 실증적 사실을 넘어 진정한 실체에 다다를 것이며 인간과 전 우주가 하나로 공존하는 길을 열 것이 아닐까? 우주 삼라만상의 알 수 없는 體를 用을 통하여 터득하여 그 원리에 부합하는 과학기술을 개발하는 것, 그것이 진정 21세기 과학기술이 지향해야 할 참다운 길이 아니겠는가?

 

제3강: 인간성 상실과 소외의 심화

 

우리는 어떻게 소외와 불안, 고독에서 벗어날 것인가:

 

프랑크푸르트철학 對 三空과 緣起

 

당신은 왜 사무치는 고독에 몸부림을 칩니까?

우리의 삶은 왜 늘 고독하고 불안한가? 독거노인처럼 가난하고 헐벗고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사람만이 아니다. 돈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들, 한 번 뜨면 수십만 대중들이 환호를 보내는 스타조차 언뜻 돌아보면 혼자이다. 당신은 왜 혼자입니까? 다른 이들을 위하여 그리 많은 일을 하였고 재산도 넉넉하며 당신을 사랑한다고, 존경한다며 따르는 사람들도 주위에 많은데 이 밤 당신은 왜 뼈에 사무치는 고독에 몸부림을 칩니까?

 

당신은 왜 주위 사람으로부터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합니까? 덜 먹고 덜 입으며 그리 베풀었는데도 그들은 왜 은혜를 원수로 갚습니까? 당신이 높은 자리에 있을 때는 쓸개까지 내줄 것 같았던 이들이 왜 지금은 당신을 애써 외면합니까, 그들이 숭배한 것은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자리란 말입니까? 직장처럼 약육강식하는 장은 그렇다 치고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마저 왜 당신을 무시합니까?

 

카프카의 <<변신>>이란 작품이 있다. 평범한 샐러리맨 그레고르 잠자는 잠을 자다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한다. 그러자 그가 가장 사랑하였고 그를 사랑하였던 가족들은 그를 징그러워하고 혐오스러워 한다. 그가 그토록 사랑하였던 누이마저. 그는 끝없는 소외와 고독 속에서 죽어간다. 마침내 그가 죽자 가족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소풍을 떠난다.

 

사람이 벌레로 변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이는 현실성이 없는 소설이다. 그러나 이 소설만큼 우리 사회가 얼마나 인간을 소외시키고 있는 가에 대하여 극명하게 보여준 작품도 드물다. 우리 모두는 벌레가 아닌가? 벌레 같은 존재이면서도 위엄이 있는 인간이라고, 모두에게 사랑 받고, 인정받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잠자가 죽었을 때 오히려 가족들이 피크닉을 떠난 것처럼 내가 죽었을 때 내 주변의 사람들은 그리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살아가지 않겠는가, 나 또한 다른 이들에게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하는 존재인 것은 아닌가?

 

소외란 따돌림이 아니다

 

널리 보면 요새 유행하는 따돌림, 왕따도 소외의 일종이다. 무슨 일인가 같이 하고 싶은데 “넌 빠져.”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다들 정장을 입고 왔는데 나만 허름한 차림으로 모임에 나타났을 때, 모두들 잘 하고 있는데 나만 못하여 그것을 지켜보는 대상으로 머물 때 우리는 소외를 느낀다. 그러나 소외는 따돌림 이상의 것이다. 20세기에 와서 왜 사람들은 서로를 소외시키고 자기 스스로도 소외되어 끝없는 고독과 상실감에 몸부림을 치고 때로는 소외를 못 이겨 히틀러의 파시즘 같은 것에 열광하는가?

 

프랑크푸르트 철학자들은 이에 대해 깊이 있게 연구하였다. 따돌림이란 인간 집단이 형성되면서부터 생긴 것이라면, 소외는 엄격히 말하여 자본주의 체제가 등장하여 고도 산업사회로 발전하면서 보편화한 것이다.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하버마스 등은 20세기 고도 산업사회 속의 인간 문제를 탐구하기 위하여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현상학과 헤겔을 종합한 독특한 사회철학을 폈으니 그를 일러 프랑크푸르트 철학, 또는 비판철학이라 명명한다.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마르크스, 6백만을 학살하는 히틀러에게 환호를 보낸 독일 국민처럼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는 대중들의 무의식을 분석하는 도구로 프로이트를, 사회현상을 하나의 텍스트로 놓고 실증주의를 넘어 주체의 자유의지에 따라 분석하는 틀로는 현상학을 종합하여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들은 비판에 머물지 않고 이런 상황에서 인간주체가 갖추어야 할 이성의 지표는 헤겔에게서 끌어왔다.

 

이들이 볼 때 자본주의 체제는 사용가치를 교환가치로 뒤집어버린 사회이다.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나는 십 년이 넘게 쓴 만년필을 한 자루 가지고 있다. 이제 펜촉이 닳고닳아 글씨는 쓰는 족족 번지고 뚜껑은 너덜너덜해져 쓸 때마다 소음을 낸다. 남들은 이제 버리라고 하지만 이 펜에는 버릴 수 없는 역사가 스미어 있다. 나는 이 펜으로 편지를 써서 한 여인의 마음을 사 그를 아내로 삼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좌절해 있는 후배에게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기도 하였다. 그러기에 나에게 이 펜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고급 만년필보다도 소중하다. 이것을 다른 물질, 특히 화폐와 교환하여 얻는 가치는 단돈 몇 십 원에 불과하지만 나는 수십 만원에 달하는 고급 만년필과 이것을 바꾸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내 만년필에나 해당할 뿐, 다른 영역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것을 들고 백화점에 가서 이것과 몇백 원 짜리 볼펜 몇 자루와 바꾸어 가겠다고 하면 점원은 나를 미친 놈으로 알 것이다. 그는 만년필에 담긴 역사를 모른다. 그 만년필이 잉크만 주입하면 아직 얼마나 많은 글을 쓸 수 있고 이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지 잘 알지 못한다. 그에겐 사용가치는 보이지 않고 오로지 교환가치만 따져지는 것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는 교환가치가 지배하는 사회,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보다 우월한 사회다.

 

교환가치와 사용가치가 전도된 사회에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이 물화(物化, reification)다. 자본주의 사회는 교환가치를 우선시하여 모든 것을 물질로, 돈으로 대체하여 바라보기에 사람들의 관계가 사물의 성격을 지닌다. 노동은 진정한 자기를 실현하는 것도, 자기 앞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인간 주체의 실천 행위도 아니다. 돈 버는 수단일 뿐이다. 그저 돈을 벌기 위하여, 돈을 벌어 더 많은 물질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육체를 소진하고 마음에 없는 아부를 하기도 하고 남을 곤경에 빠트리기도 한다. 인간 주체가 노동을 기획하고 다른 이들과 토론을 하고 협동을 하며 생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기계의 한 부속품이 되어 아무 생각 없이 기계적인 일을 반복할 뿐이다.

 

스무 너댓 살까지는 좀더 많은 돈을 벌 능력을 키우고 자격을 갖추기 위하여 인생의 황금기를 코피를 흘리며 밤을 새워 공부하는 것으로 보내고, 그리 하여 학벌을 따면 그 간판으로 좀더 많은 연봉과 더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던지고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그러다 몇몇은 그리 빨리 달려온 탓에 병을 얻어 도중 하차하고 남은 자들은 종착역까지 달려가지만 그때서야 그렇게 얻은 것이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는다. 온통 물화한 삶의 연속이다.

 

물화한 개인은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물질의 눈으로, 상품관계로 바라본다. 그래서 우리 집에 대해 묻는 이들에게 우리 집 창으로 아름다운 관악산 능선이 보이고 뒤뜰에는 과꽃이 흐드러졌다고 하면 그들은 잘 알아듣지 못한다. 평당 얼마짜리 아파트의 몇 평 아파트라 해야 금세 이해한다.

 

온갖 삶들이 이렇듯 물화되어 있으니 우리는 서로를 소외시킨다. 배우자를 고를 때조차 그 사람의 교환가치를 따진다. 돈이나 권력이 있는 가문이냐, 그렇지 않으냐, 몇 평의 아파트와 몇 개의 열쇠를 가지고 오느냐, 연봉은 얼마인가가 중요한 척도이다. 좀더 약은 사람이라면 지금은 가난하더라도 미래의 가치, 학벌은 어떠며 머리는 좋은 지, 성실성은 있는 지 따진다. 인품은 그 다음이다. 더 심한 경우는 자신의 아내가 결혼 때 가져온 지참금이 작다고 폭행을 하고 이혼을 해 버린다. 결혼해서 해로하는 부부라고 예외는 아니다. 사랑은 이미 식어버리고 “그냥 산다고”들 말한다. 아내는 남편을 돈 벌어 오는 기계로, 남편은 아내를 살림하는 가정부쯤으로 생각한다. 남편은 승진과 출세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가정을 유지하고 아내는 홀로는 부양 능력이 없어서, 아님 애써서 자식들의 성공에 자신의 삶의 목표를 맞추고 가족을 끌어안는다. imf 때 직장에서 잘렸다고 가장 따스하게 보듬어줄 줄 알았던 아내가 이혼하자고 제안했을 때 그는 과연 어디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까?

 

가장 믿고 의지해야 하는 부부관계가 이런데 다른 인간관계야 어떻겠는가? 가족이든, 친구든, 동료든 서로 경쟁의 대상일 뿐이다. 나 스스로가 인간성을 상실하였으며 타인 또한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다. 현실은 카프카의 <<변신>>보다도 비극적이다. 거기선 그래도 죽이지는 않고 죽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몇 푼돈을 얻기 위하여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부모나 자식, 아내나 남편, 친구들을 살해하기도 한다. 우리는 나를 가장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몇몇 물질을 얻고자 나를 죽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현대인들은 물질적 풍요에 있으면서도 모두가 고독하고 항상 불안하다.

 

현대인을 병들게 하는 소외가 더 있다. 동일화의 소외. 현대인들은 매스미디어가 던지는 환상에 젖어 주체를 상실하고 자신을 그들 환상과 동일화한다. 서민 주부들은 연속극의 스타들에 자신을 동일화하여 그들과 같이 울고 웃는다. 그러는 가운데 드라마 속의 가난한 여주인공이 갖은 고생 끝에 재벌 2세와 결혼하여 고급 차 타고 특급 호텔에서 감미로운 클래식을 들으며 캐비어를 먹으면 자신이 주인공이 된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는 사이에 서민 주부가 가졌던 불만과 갈등은 사라진다. 동일화의 소외가 기존체제를 유지시키는 기제로 작용하는 것이다.

 

자기로부터, 정확히 말하여 자기 동일성으로부터 소외되는 것 또한 문제이다. 어떤 행동을 한 후 그런 자기 자신이 굉장히 낯선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행정고시에 합격하였다는 소식을 듣는 그 순간 “야, 이제 고급 공무원이 되었으니 무지막지하게 뇌물을 받아 부귀영화를 누리고 그것을 상납도 하여 출세 좀 해야겠다.”라고 맹세한 사람이 있을까? 촌지를 받지 않는 선생이 없다고 한국 사회가 온통 난리를 칠 때 필자는 사범대 졸업반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단 한 명도 그럴 눈빛을 가진 학생은 없었다. 거의 대부분 선생을 천직으로 생각하는 이들이었고 그렇지 않은 학생들도 그 또래 대학생에 비하여 유달리 선한 눈을 가진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왜 청렴한 공무원이, 올곧은 선생님이 몇 년 지나지 않아 타락할까?

타락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남보다 더 돈을 좋아하여 뇌물을 받는 것도, 남보다 더 악해서 촌지를 가져오지 않는다고 제자들을 괴롭히는 것은 아니다. 한 마디로 착한 사람을 병들게 하는 구조 때문이다. 언론계나 교육계로 진출한 내 제자들 가운데 몇몇이 그런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촌지 받지 않고 버티는 방법 좀 알려 주세요.” 그 중 한 학생은 촌지를 받지 않고 버텨서 심한 왕따를 당하고 있고 정신병이 걸릴 지경이라고 하였다. 동료들과 술이라도 한 잔 걸칠라 치면 “김선생, 이거 더러운 돈으로 술 먹으러 가는데 깨끗한 양반이 왜 끼십니까?”하더란다. 그 선생이 동료들과의 유대를 위하여 촌지를 받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선생은 그 순간 자기로부터 소외당한다. 자기가 아는 자기는 청렴하고 학생들을 자식처럼 아끼는 선생인데 촌지를 받는 나는 그런 나와는 동떨어진 모습이다. 내가 여태까지 아무리 가난하여도, 여러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여도 나 자신은 청렴한 공무원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버텨왔는데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 외부의 압력에 못 이겨 뇌물을 받은 자기 모습을 발견하였을 때 그는 얼마나 충격에 휩싸였을까? 얼마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낯선 기분을 느꼈을까?

 

더 무서운 것은 이 소외감도 차츰 면역이 되어 버리고 기존 질서에 동화되어 버린다는 점이다. 처음엔 갈등도 하고 심한 소외감을 느끼겠지만 그는 곧 그를 느끼지도 못한다. 기자가 된 몇몇 제자들은 촌지를 받지 않으면 취재가 되지도 않고 동료들과 불화도 심하여 결국 촌지를 받기로, 대신 동기인 누구에게 곧바로 보내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을 돕는데 쓰기로 하였다고 한다. 참 아름다운 결정이기도 하고 고육지책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절대 동화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서면서도 과연 이들이 언제까지 그런 절충안으로 부조리한 세상에 맞설 수 있는지 적이 걱정되었다. 그들이 세상에 결국 져선 촌지를 받고, 졸업하면서 꿈꾸었던 올곧은 기자상과 거리를 확인하고는 곧 그 충격에서 벗어나 그도 또한 물화한 인간이 되어 모든 이들을 물적 관계로 대하며 기존질서에 편입되는 날이 언제일까, 그리 사람을 잡아먹는 거대한 공룡, 자본주의 체제의 미래에 대해서 곰곰 생각해 보았다. 그러기에 마르쿠제는 이 체제가 인간을 더 철저하게 억압하는 전체주의로 갈 것이라고 단언한다.

 

1차원적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어떤 대안이 있을까?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철학자 중 한 사람인 마르쿠제는 ‘일차원적 인간’에 대해 언급한다. 그래도 20세기 초반에는 노동자들이 나서서 인간다운 사회를 펼쳐보자고 일어섰다. 지구의 한 편에서는 그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열었다. 그러나 왜 사회주의에서조차 인간은 소외되어 있는가?

 

일요일 날 흔들의자에 앉아 캔 맥주를 마시며 메이저리그 야구를 시청하고 있는 미국의 노동자를 상상해보자. 그는 일상의 안락함에 젖어 행복감을 느낀다. 자신을 행복하다고 생각하니 불만과 갈등은 없다. 그러나 불만과 갈등이 없으니 노동자로서의 의식, 즉 계급의식 또한 없다. ‘사이비 행복의식’이 그의 계급의식과 반역을 향한 동경을 앗아갔다. 텔레비전이 만들어주는 환상에 마취되어 그에 따라 울고 웃는 愚衆만 있다. 엄청나게 먹어대고 그로 인한 비만을 줄이기 위하여 우리나라에서만 1년에 2조원의 천문학적 비용을 다이어트로 낭비하는 것에서 잘 드러나듯, 광고 이미지에 속아 변혁을 향한 욕망은 억압당하고 헛된 욕망만 부풀려 과잉소비를 행하고 있는 육체만 있다. 이것이 1차원적 인간의 참모습이다. 현재에 만족하기에, 계급의식을 잃어버리고 그 자리를 허위의식으로 채웠기에, 주체는 사라지고 맹목적인 자아만 남았기에, 이성 대신 국가와 자본과 대중문화가 조장하는 감성과 욕망에 따라 행동하기에 일차원적 인간은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도 못하며 사회의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 오늘의 행복과 향락만 유지되면 그 뿐, 사회의 변화나 도덕의 달성은 쓸데없는 일이다.

 

그럼 대안은 없을까? 마르쿠제는, 물화와 소외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를 뒤엎지 않는 한, 이미 계몽의 힘을 상실하고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과학기술에 덜 조작 당하고 산업사회와 대중문화의 도구적 합리화에 아직 덜 길들어져 1차원적 인간으로 전락하지 않은 국외자와 학생들이 혁명의 불길을 활활 타오르게 하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미봉책이라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6, 70년대에 프랑스를 필두로 하여 세계 곳곳에서 마르쿠제 등의 비판에 고무된 학생들이 일어났다. 고도 산업사회의 모순이 첨예화한 서양 사회는 물론 일본과 멕시코에서도 소외를 강화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와 억압을 강화하고 있는 기존체제의 모든 구조를 뒤엎고자 하였다.

 

68혁명은 막을 내렸으나 사회 전반에 대해 혁신을 가져왔다. 노동자를 억압하고 소외시키던 포디즘에 메스가 가해지고 노동자의 참여와 자치가 속속 보장되었다. 학교와 언론 등 사회 모든 부문에서 억압적이고 관료적인 양식이 무너지고 수평적이고 평등적이며 민주적인 소통양식이 자리잡게 되었다. 억압된 성이 해방되고 여성의 지위가 상승되었다. 기존의 가치체계, 상상력을 뒤엎고 새로운 가치와 상상력을 펴나갔다. 이는 페미니즘, 녹색운동, 노동자의 자치운동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문화운동만으로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없다. 청년들의 낭만적인 운동은 자본가에 저항하는 노동운동으로 전화하지 못하였다. 청년 학생들의 급진적인 부정의 상상력은 계급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다. 결국 이에 대한 반혁명이라 할 신자유주의가 나타나 68혁명이 이루었던 성과들을 집어삼키며 전 세계에 걸쳐 억압과 소외를 더욱 심화하고 있다. 그럼 원효의 사상에 소외를 극복하는 대안이 있을까?

 

공해진 그 공도 또한 공이다

 

“三空이란 空相도 또한 空이요, 空空도 또한 공이요, 所空도 또한 공이라는 것이다. 이런 공은 3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나 진실이 없는 것이 아니니, 글과 말의 길이 끊어져 불가사의한 것이니라. ‘공상도 또한 공이다’고 한 것은 공상이 바로 俗諦를 버리고 眞諦의 평등한 상을 나타낸 것이요, ‘또한 공했다’란 곧 진제를 녹여 속제를 만든 것이다. ‘공공’이란 순금을 녹여 장엄구를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이니, 열반경의 말과 같다. 즉 있다고 하고 없다고 하는 이것을 ‘공공’이라 하며 ‘이것은 옳고 그르다’고 하는 이것을 ‘공공’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속제의 有無와 是非의 차별의 상을 밝힌 것이다. 이 ‘공공’의 뜻은 평등에서 공한 것이니, 이 공은 속제의 차별을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차별의 ‘공공’이라 하는 것이다. ‘공공도 또한 공이다’라고 한 ‘공공’은 곧 속제의 차별이며, ‘또한 공이다’한 것은 이 속제를 녹여 진제로 만든 것이니, 이것은 장엄구를 녹여 다시 금병으로 환원시키는 것과 같다. 셋째 ‘소공도 공하다’라고 것은, 처음 공 가운데의 공이 나타낸 속제와 둘째 공 가운데의 공이 나타낸 진제의 이 두 가지가 다름이 없기 때문에 ‘또한 공한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二諦를 융합하여 일법계를 드러낸 것이니 일법계라는 것은 이른바 일심이다.”(<<金剛三昧經論>>, <入實際品>)

 

하늘에 반달이 떴다. 스승은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반달이라고 대답하자 스승은 일갈한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햇빛을 받지 않아 보이지만 않을 뿐 반달의 어두운 부분도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데 햇빛에 반사되는 부분만 보고 반달이라 할 수 있느냐고.

 

그토록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본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은 허상이다. 반달의 밝은 부분은 어두운 부분과 관계를 통하여 드러난다. 어두운 부분 없이 밝은 부분 스스로는 공하다.[關係性] 어두운 부분을 의지하여 밝은 부분이 드러난 것을 보고 반달이라 한다. 어두운 부분을 의지하지 않고는 반달은 드러나지 못하니 공하다.[相依性] 지구를 따라 돈다는, 태양 빛에 반사된다는, 더 멀리로는 이 우주가 생긴 인연이 있었기에 달은 지금 반달로 있는 것이다.[因果性] 또 달은 스스로는 무엇이라 할 수 없다. 지구가 있기에 달은 존재한다. 지금이라도 지구가 사라진다면 달은 주위에 중력이 강한 어느 별엔가 이끌려 그리로 가게 된다. 달은 또 스스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달을 달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달 때문이 아니라 태양이나 지구와 대비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태양이 있기에 태양이 왕이라면 달은 왕비가 되고, 태양이 광명의 세계를 뜻하면 달은 어두움의 세계를 의미한다. 달 스스로 아무런 본질도 존재의 실재도 나타낼 수 없으니 공하다.[無自性] 달은 또 그대로 지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차고 기울며 오늘 하루의 반달도 머무르지 못하고 끊임없이 변한다.[無常] 또 달은 달 스스로 달인 것이 아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 투사한 것이자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삼라만상을 갈라 그리 부른 것이다. 그러니 달은 카르마의 총합일 뿐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공하다.[畢竟空]

 

인도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장님에게 어떻게 흰 색을 알려 줄 것인가? 그것을 알려 주기 위하여 눈과 종이와 흰 털을 가진 토끼를 가져갔다. 그러나 장님은 그것으로 흰 색을 알 수 없다. 장님은 눈의 차가움과 만진 후의 축축함, 종이의 평평함, 토끼 털의 복슬복슬함을 느꼈을 뿐이다. 우리 모두 장님과 같다. 공(흰색)은 알 지 못한다. 다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존재의 경계(눈, 종이, 토끼)에 휩싸여 그것들의 현상(차가움, 평평함, 복슬복슬함)을 그것으로 아는 것이다.

 

다음 날 달이 다시 떴다. 스승은 다시 물었다. 저 달이 무엇이냐고? 어제 반달이라 하였다가 혼난 제자는 대답하였다. 온달이라고. 스승은 그런 제자에게 일갈을 한다. “예끼! 너는 왜 반달로 보이는 것을 온달이라 거짓말을 하는가?”라고. 반달은 반달이다. 반달은 스스로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고 존재하지 않기에 공하나, 어두운 부분을 통하여 밝은 부분이 드러나고 밝은 부분이 있어 어두운 부분이 나타난다. 처음에 반달이라 말한 것이 속된 인식에서 반달이라 한 것이라면 나중에 반달이라 한 것은 평등공조차 공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반달이다. 현상계의 차별적인 모습을 부정하여 반달을 부정하는 것이 空相이라면 차별이 없이 평등한 세계를 부정하여 반달이라 하는 것은 空空이다. 삼공의 눈으로 보면 다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우리는 무엇을 일러 반달이라 하는가? 정확히 50%만 햇빛에 반사되어 환한 달이 존재하는가? 반달은 0%인 달과 100%인 달 사이에서 움직이니 반달은 반달인 동시에 반달이 아니다. 처음의 반달이건 나중의 반달이건 우리의 인식 속에서 그리 생각한 것인데 우리의 인식 자체가 공이다. 달이 ‘지구의 위성’이란 것을 부정하면, 달이 높이 떠서 산과 들을 가리지 않고 비추니 귀족과 서민을 가리지 않고 자비의 빛을 뿌리는 관음보살임이 드러난다. 다시 이를 부정하면 달빛 아래 모든 차별이 사라지고 하나를 이루니 달은 만다라이며, 달의 빛은 서로를 헤살 놓지 않고 무수한 빛들이 서로를 비추고 있으니 화엄이다. 그리고 이 모두 마음 속에서 빚어진 것이며 말로 드러낸 바다. 그러니 一心으로 보면 空相도 空하고 空空도 空하다. 空相은 차별상을 떠난 것이므로 眞諦다. 공공은 평등상을 부정한 것이므로 俗諦다. 공상과 공공은 모두 반달이라 했지만 그 내용은 다르다. 이렇듯 所空에서 보면 공은 같지도 다르지도 않으며 眞도 아니고 俗도 아니다. 둘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박테리아 한 마리도 지구 대기의 균형에 관여한다

 

공은 부정의 사유가 아니다. 이중부정을 통하여 긍정하는 사유이며, 이것이 공이라 하면 저것이 드러나고 저것이 공이라 하여 이것을 드러내는 사유이다. 自性에서 벗어나 우리 앞의 세계를 서로 서로 연기가 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며, 나타나는 것과 감추는 것을 동시에 보려는 총체성의 철학이다.

 

1991년 미국은 애리조나주 오라클에 유리로 밀폐시킨 가상지구 바이오스피어2(biosphere ⅱ)를 14만 평방피트에 달하는 너른 땅에 지었다. 흙과 물, 공기, 들과 언덕을 갖추고 동, 식물 또한 살게 하였다. 빛만 빼놓고는, 산소도 바람도, 꽃가루받이도 모두 자체적으로 이루어지게 하였다. 8명의 사람들이 이 작은 지구에 들어가 외부와 완전히 고립된 채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였다. 그러나 18개월만에 바이오스피어2는 치명적인 불균형 상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산소 농도가 처음 21%에서 14%로 떨어져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가 없었다. 대신 가상지구에 충만하게 된 이산화탄소와 질소로 인해 잡초만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자랐다. 바퀴벌레와 개미 같은 몇몇 곤충들만 번창하게 되었고, 25종의 작은 동물들 가운데 19종이 전멸하고 말았다. 식물의 꽃가루받이를 대신해 주던 곤충들이 죽자 식물들도 번식할 수 없게 되었다.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여러 모로 조사가 이루어졌다. 건물의 콘크리트 벽이 산소를 흡수하고는 방출하지 않았고 농사용 토양에 함유된 박테리아가 산소를 많이 소비하는 통에 산소농도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현미경으로나 보이는 하찮은 박테리아가 대기의 균형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앞에 떠다니는 미세한 먼지보다 작은 박테리아 한 마리도 다른 모든 생명의 균형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세계가 인연의 비늘로 철저히 겹쳐있는데 홀로 존재한다 할 수도 없거니와 홀로 무엇이라 내세울 수도 없으며, 홀로 삶을 영위할 수는 더 더욱 없는 것이다. 나는 없다. 그러나 네가 있어서 나는 있다. 우리는 홀로 남겨진 존재가 아니다. 인연의 사슬이 깊어 수천억년 가운데 같은 시대에 수조개의 별 가운데 같은 별에 살아가는 것이다. 그들이 있어서 내가 있고 내가 있어서 그들이 있는 것이다.

 

서양 속담에 “여섯 다리를 건너면 모두 아는 사이다.”라 한다. 나는 방송국의 한 드라마 pd와 친한 선후배 관계이니 두 다리만 건너면 그가 연출한 드라마의 탤런트들과 만나 식사할 수 있다. 한 사람이 대략 3,000명의 사람을 소개받고 300여명과 가깝게 지낸다고 한다. 그러니 한 다리를 건너면 나는 300명을 알고 있으며, 여기서 한 다리를 건너면 내가 아는 300명에 각자 300명씩을 곱하게 되니, 9만명의 사람을 알게 되고, 또 한 다리를 건너면 2,700만명의 사람을 알게 되고, 네 다리를 건너면 81억명을 알게 된다. 물론 여기에 지역과 문화의 제약을 상정하지 않은 것이지만, 산술적으로 볼 때 인류는 네 다리만 건너면 모두가 친구인 셈이다. 열 다리도 아니고 네 다리만 건너면 모두 아는 사이인데 종교나 이데올로기가 다르다고, 서로 피가 다르고 생활양식이 다르다고 으르렁거리고 서로 총을 겨누어야 할까?

 

신자유주의가 휩쓸고 지나가면서 중산층은 해체되고 세계의 가난한 나라, 가난한 백성은 더욱 가난해졌다. 한 켠에서는 산해진미를 가득 쌓아놓고 그 가운데 1/10도 채 먹지 않은 채 쓰레기로 버리는데 다른 켠에서는 밥 한 숟가락만 먹어도 살릴 수 있는 어린이들이 1년에도 4백만 이상씩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다 죽어가고 있다. 97년 6월 현재 인류 가운데 13억이 하루에 1달러도 채 안 되는 돈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세계 10대 갑부들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은 1천3백30억 달러로 최빈국 총수입의 1.5배에 달한다. 그럼에도 이것은 개선되기는커녕 더욱 악화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중심국가는 거의 모든 것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공세를 취하며 더욱 착취를 강화하고 있다. 굶주려 죽어가는 어린이들을 나라고, 내 아이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이런 불평등과 부조리가 계속 야만을 범하고 있는 것을 방관하겠는가? 우리 모두가 이웃이고 우리 인류 모두가 서로 관련을 맺고 있는데 굶어죽어 가는 어린이의 고혈을 짜서 내 배를 불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이제 동일성의 철학에서 연기의 철학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여야 한다. 베이징에서 나비가 팔랑이면 뉴욕에서 폭풍이 분다는 것은 황당함을 말하는 비유이다. 그러나 베이징의 기온과 기압이 임계상태일 경우 한 사람의 기침으로도 그 균형은 깨져 대기를 혼란시키며 이것은 차례로 고공의 대기마저 불안정하게 하여 그 영향으로 뉴욕에서 폭풍이 불 수도 있다.

 

지난 세기에는 폐수를 몰래 버려 정화비를 아낀 사람이 유능한 경영자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폐수를 먹은 물고기를 그 자신이 먹고 그 폐수로 더럽혀지고 더워진 바다가 이상기온을 만들고 이로 돌풍이 일어 그 사람의 공장을 무너트릴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날아다니는 새에서 한갓 돌이나 이끼에 이르기까지 지구상의 모든 사물이 나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데 버릴 것은 무엇이고 파괴할 것은 또 무엇인가? 세상 삼라만상이 나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믿음이 있는데 고독하고 소외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태양계와 같은 것이 수억 개 모여 은하계를 이루고 이 은하계가 또 수억 개 모여 우주를 이룬다. 우리가 고개를 들으면 수조개의 별이 반짝인다. 그 별 가운데는 태양에서 명왕성에 이르는 태양계 전체를 포개도 전혀 미치지 못할 만큼 어마어마하게 큰 별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별을 모아도 보이는 것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우주를 이루고 있는 대부분은 별이 아니라 암흑물질이다. 이는 빛을 내지 않지만 질량을 가지므로 주변에 중력을 미쳐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주변의 별의 운동을 관찰하여 그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반짝이는 별만 보고 우주라 하면 드러나지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암흑물질을 부정하게 된다. 별들과 은하계의 집합을 우주라 할 수 없다. 어두운 부분을 통하여 빛나는 별들이 드러나고 별을 통하여 어두운 암흑물질이 드러난다. 너와 나도 마찬가지이다. 본래 내가 없는데 나를 내세우면 나를 더욱 부정하는 꼴이 된다. 그러나 너를 통하여 내가 드러나고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면 모든 타인은 내가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초기불교부터 있어온 공과 연기 사상을 응용한 것이다. 그러면 원효의 공 철학을 응용하면 어떤 대안을 모색할 수 있을까? 일심에서 보면 공은 같지도 다르지도 않으며 眞도 아니고 俗도 아님을 어떻게 우리 현실에 적용할까?

 

라깡은 욕망이란 타인을 지향하는 것이기에 욕망할수록 자아는 자기에게서 멀어지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나를 채우려는 것은 타인의 돈과 권력, 향락을 빼앗는 것을 뜻한다. 나에 집착하면서, 부자는 가난한 자를 더욱 고통에 몰아넣고 있고,(1960년대에 미국 대기업 지원과 최고경영자 사이의 연봉 차이는 1 대 41이었으나 99년에는 1대 457로 벌어졌다. 97년 6월 현재 인류 가운데 13억이 하루에 1달러도 채 안 되는 돈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세계 10대 갑부들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은 1천3백30억 달러로 최빈국 총수입의 1.5배에 달한다.)인간은 자연을 파괴하였고, 남성은 여성을 억압하였으며, 서양은 동양을 착취하였다. 대신 인간은 극심한 소외감에 몸부림을 치고 있다. 소외는 개인의 심리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소외감을 못 이겨 자신을 마약, 향락 등 자신을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트려 해체하거나 타인에 대한 극도의 폭력으로 드러낸다. 때로는 히틀러의 파시즘 같은 전체주의적 폭력에 열광적으로 환호를 보낸다.

그러나 씨가 자신을 죽여 싹을 내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공이 생성변화의 조건이다. 나무는 스스로는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하나 풀과의 차이를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이란 의미를 갖는 것처럼 공은 다른 것과의 관계를 통해 나를 드러내는 사유이다. 나를 부정할 때 우리는 소외감에서 벗어나 세계의 모든 인류, 더 나아가 전 우주상의 모든 생명체들과 굳건한 유대를 맺을 수 있다.

 

심우도의 여덟째 그림은 동그란 원 뿐이다. 왜 소라는 깨달음을 얻었는데 빈 원이 이어지는가? 이는 人牛俱忘, 곧 자기와 소를 다 잊는다는 것인데 본디 제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返本還源과 궁극의 광명 자리에 든다는 入廛垂手가 이어진다. 나를 비워야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통찰이 가능하다. 산은 산이며 물은 물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통찰이 가능한 후에야 나와 너의 구분을 허물고 세상의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는 것이다. 그를 통해 대중을 소외에서 벗어나게 하고 나도 또한 소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연기의 패러다임이 없는 68혁명은 신자유주의에게 먹히고 대중들은 더 혹독한 소외를 겪고 있다. 연기의 패러다임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야금야금 내부로부터 파열시킬 수 있다. 영성의 힘은 물성의 힘을 이길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시장의 원리에 종속되어 수행을 닦기보다 입장료 수입과 시주 액수를 올리는 데 더 혈안이 된 스님에게 먼저 자기부터 비우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암자에서 고고하게 무소유의 행을 실천하고 있는 스님을 개인적으로는 존경한다. 이 분들의 공력으로 인하여 많은 대중들이 소외를 극복하고 ‘眞我’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성불은커녕 소외나마 극복하게 할 수 있는 대중의 수는 기껏 10%나 될까? 그러면 나머지 90%의 대중은? 차원 높은 공의 철학을 설파한다 해서 얼마나 많은 대중들이 해탈을 이룰 것인가? 그토록 자본주의 체제를 만만히 보았는가? 오히려 자본주의의 원리는 산사의 깊은 암자까지 파고들어 수행자까지 물화시키고 그들 스스로를 대중으로부터, 그가 알고 있는 스님의 참 형상으로부터, 진아로부터 소외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시주 액수에 연연하는 오늘의 나의 모습이 下化衆生을 위하여 나를 버리겠다고 서원한 젊은 날의 나의 모습에서 꽤나 멀리 낯설게 느껴진 적은 없는가? 스님조차 소외시키는 것이 자본주의의 힘이다.

 

사찰이 진제라면 시장은 속제이다. 이미 사찰에도 시장의 원리는 들어와 있다. 사찰의 공과 시장의 공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사찰의 공이 관념적이라면 시장의 공은 삶이다. 사찰의 공이 없음과 비워둠의 사유라면 시장의 공은 무소유의 행이다. 사찰의 공이 연기의 사유라면 시장의 공은 타인, 또는 다른 생명체와의 연대와 사랑이다.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 구조 자체를 전면적으로 바꾸지 않는다면 산사 속의 절마저 시장원리에 종속당할 것이다. 더불어 스님 또한 시장의 원리를 알고 시장의 공과 사찰의 공을 하나로 아울러야 한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불사에 시주하였으나 자신을 비우지 못한 보살이 천박하다면 마음에서는 자기를 비웠으나 그 깨달음을 자비행으로 옮기지 않고 있는 스님은 현학적이다.

 

 

제4강: 인간 주체의 죽음과 폭력의 일상화와 구조화

 

나와 타자는 어떤 관계인가: 차이의 철학 對 辨同於異

 

이제 폭력은 일상이 되었다

 

21세기, 인간주체는 여기저기서 죽어가고 있다. 한 엄마는 배고파 우는 자신의 아기를 울음 소리가 싫다며 집어던져 영원히 울음을 그치게 하였다. 마치 오뉴월에 개구리를 패대기치듯. 미국 유학을 갔다 온 한 청년은 용돈 몇 푼을 탐내 아버지를 살해하였다. 마피아 두목처럼 멋진 폼으로.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가 보험금을 타내기 위하여 아내를 살해한 후 불에 태웠다. 헐리우드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면서. 전선을 지키던 한 장군은 포문을 돌려 천여 명의 무고한 시민을 학살하고서 원대로 제왕이 되었다. 무심코 달려가는 비무장 민간인을 토끼 사냥하듯 하고선. 유일무이한 초강대국의 대통령은 신무기를 팔아먹기 위하여 전쟁을 일으켜 수천 명을 살상하고선 경제를 살린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다. 세계 평화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약소국에게 전쟁 수행비까지 챙기며.

 

폭력은 비단 ‘정신 나간 놈’만의 행위는 아니다. 정상인이라고 자부하는 이들조차 자신의 이익이나 편리를 위하여 다른 이의 육체나 마음을 다치게 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별다른 망설임도 죄책감도 없이, 순진한 여학생이 뱃속의 아이를 지워버리고 의사들은 환자에게 나쁜 것을 알면서도 수가를 올릴 수 있는 처방을 내놓고 관료들은 수많은 국민들이 고통을 당할 것이 뻔한데도 떡고물이 더 많이 떨어지는 정책을 채택한다. 모두들 돈, 권력, 향락, 또는 이미지를 향하여 타인을 짓밟으며 삶을 질주한다.

 

성수대교, 삼풍 백화점, 씨랜드, 인천호프집 등 생명의 소중함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탐욕과 부패가 연일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아도 한국 사회는 요지부동이다. 건물이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매출 감소를 걱정하여 안내방송을 하지 않았다. 불에 타 청소년들이 아비규환을 외치는 데도 술값을 받지 못할까 문을 닫아버렸다. 이처럼 악마나 할 수 있는 짓거리라고 여긴 일들이 우리 주변의 인간에 의해 버젓이 저질러졌다. 이런 지옥과 같은 상황에서도 과연 무엇 때문에 인간은 생을 유지해야 하는가?

 

인간이 술값 몇 천원 만큼 가벼운 존재가 되면서 인간에 대한 폭력은 일상화, 구조화하였다. 더 강한 권력, 더 많은 자본, 더 깊은 향락, 더 높은 명예를 위해서 나 아닌 다른 인간을 죽이고 이용하는 것은 별스런 일이 아닌 것이 되었다. 툭하면 타인에 대해 폭력을 휘두르는 사이에 폭력은 이제 생활의 한 부분! 집에선 아버지가 걷어차고 학교에 가면 선생들이 매를 들고 급우들조차 이지메를 가한다. 학교를 빠져나와 사회로 가면 지나는 사람들이 시비를 걸고 폭력을 저지하라고 부른 경찰 또한 곤봉을 휘두른다. 공중전화를 오래 한다고 칼을 휘두르고 아내가 밥을 늦게 주었다고 재떨이를 머리로 집어던지는 등 점잔은 사람도 별 것이 아닌 일에 발끈하여 화를 내고 상대방에 가슴에 영원히 상처를 새길 말들을 손쉽게 내뱉는다. 맞지 않는 날은 왠지 불안해 잠이 오지 않는 것은 군대만이 아니다. 남편이나 아버지에게 맞고 나야 편안히 잠들 수 있다는 집들이 차츰 늘고 있다. 아힘사가 존재근거라 할 수 있는 山門에서조차 나와 주장이 다르다고, 그것도 하안거를 깨면서까지 폭력을 행하는데 다른 곳을 말하여 무엇하리?

 

당신은 지금 평안하십니까?

 

당신은 지금 평안하십니까? 나 홀로 암자에 앉아 새소리를 들으며 바람이 살결을 타고 흐르는 감촉을 느끼다가는 텅 비어있는 상태에 이르면 평안하다고 하는 것인가? 산사가 너무도 깊어 중생들의 아비규환이 들리지 않더이까? 흐르는 물소리에 묻혀 버렸더이까, 어느새 내 귀가 어두워졌더이까?

소극적 평화가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면 적극적 평화는 경제적 복지와 평등, 정의, 자연과 조화 등이 달성되어 인간의 기본적 욕구가 충족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거꾸로 이들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평화는 요원함을 뜻한다. 그러니 진정한 평화란 구조적 폭력이 제거된 상태이다.

 

21세기, 폭력의 과격함이 문제가 아니다. 중세 시대에 사람의 네 사지를 말에 묶어 달리게 하여 찢어 죽이기도 하였고 사람의 코나 귀를 잘라 젖을 담그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특수한 몇몇에나 해당하는 것이었다. 폭력을 직접 목도할 수 있기에 폭력에 대해 혐오할 수 있었고 폭력을 휘두른 세력에 대해 증오심을 품을 수도, 그들에 저항할 수도 있었다. 오늘날 폭력은 정녕 온순해졌다. 겉으로는. 그러나 누구나 쉽사리 행하는 일상이 되었으면서도 폭력은, 폭력을 행하는 자는 보이지 않는다. 더한 폭력을 당하면서도 아무도 분노하지 않고 아무도 저항하지 않는다. 21세기, 폭력의 구조화와 구조적 폭력이 문제인 시대이다.

 

당신이 오늘 누구에겐가 화를 내었다면,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 큰소리를 질렀다면 그것은 무더운 날씨 때문입니까, 아니면 당신의 급한 성질 때문입니까? 그도 영향을 미쳤겠죠. 그러나 상자 안에 쥐의 숫자를 두 배로 늘리면, 다시 말하여 쥐의 밀도를 높이면 쥐의 폭력성도 비례하여 증가하는 것을 아십니까? 당신은 그처럼 무언가 보이지 않는 유리상자 속에 갇혀 있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으셨나요? 아버지가 폭력을 휘두르는 가정에서 아들 또한 대를 이어 폭력 가장이 된다는 사실을 아시죠? 5공화국 때 폭력을 통해 집권한 정권이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법을 만들고 이를 제도화하면서 폭력은 구조가 되고 그 안의 사람들, 심지어 그들의 폭력을 반대하는 운동권 학생들조차 폭력을 모방하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분명 그보다 나아지기는 하였지만 폭력은 구조화하여 그 안의 인간 주체들을 폭력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구조적 폭력 또한 문제이다. 한 가장이 굶주려 죽어 가는 자신의 아이를 두고 볼 수 없어 지나가는 우유 배달 자전거를 습격하여 우유 몇 통을 강탈하였다면 그 폭력만 폭력입니까? 그를 생존조차 하지 못하게, 가장으로서 자존심과 권위를 송두리째 앗아간 것 또한 폭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전라도 사람과 경상도 사람이 서로 멱살을 쥐고 주먹을 휘두르는 것은 폭력이고 그들을 서로 분열시킨 정치는 폭력이 아니더란 말입니까? 신자유정책으로 졸지에 거리로 내몰린 노동자가 성조기를 불태우는 것은 폭력이고 세계의 10억에 달하는 인류가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데 제3세계의 외채를 20여년 만에 2조달러로 32배나 늘어나게 한 것은 ‘폭력’이라는 어휘를 제쳐놓고 무엇으로 부르겠습니까?

 

이처럼 구조적 폭력은 눈에 보이지 않게 인간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하고 (생존욕구), 보다 나은 삶을 살려하고(복지에 대한 욕구), 타인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려 하고 (정체성에 대한 욕구), 모든 구속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자유에 대한 욕구) 욕구들에 대해 “피할 수 있는 모독”을 가하는 것이다. 자원을 불평등하게 분배하고 착취하는 것, 피지배층의 자율성이나 자치권 확보를 저지하는 것, 피지배층을 서로 분열시키고 갈등하게 하는 것, 피지배층을 사회에서 일탈시키고 소외시키는 것, 더 넓게는 강대국이 약소국을 종속의 관계로 놓고 수탈하는 것, 가부장주의로 여성의 사회진출과 활동을 막고 안방에 가두는 것이 모두 구조적 폭력의 양상들이다. 그러기에 노르웨이의 평화학자 갈퉁(johan galtung: 1930-)은 구조적 폭력을 “인간이 지금과 다른 상태로 될 수 있었던 잠재력과 현재 처해있는 상태와의 차이를 제공하는 요인”으로 정의한다. 제3세계의 농부가 서구인이나 도시인에 비하여 특별히 게을러서 가난한가? 여성들이 남성보다 현저히 열등해서 장, 차관과 국회의원에, 절의 주지스님 자리에 단 10%도 차지하지 못하는 것인가? 그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구현할 교육으로부터 소외시킨 것은 누구이고 자신의 능력을 실현할 기회를 봉쇄한 것은 무엇인가?

 

구조적 폭력이 苦이다

 

왜 인간은 이리도 가벼운 존재가 되었는가. 저번 호에서 말한 대로 자본주의와 산업화로 교환가치를 사용가치보다 우선시하면서 物化가 인간을 지배하였고 서로를 소외시킨 데, 소외된 인간들이 돈과, 물질, 자본의 가치를 한 사람의 생명보다 중요한 것으로 여기게 된 데 주요 원인이 있다. 그럼 왜 폭력이 일상화하고 구조화하였는가?

 

폭력의 두 축은 국가와 자본이다.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배층은 양자를 행하여만 지배층을 유지할 수 있다. 정당하지 않을 것을 하면서도 저항을 받지 않고 지배를 유지하는 것, 그것이 지배의 요체이다. 피지배층이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을 때 지배는 공고하다. 허나 그를 의심할 때 피지배층을 가장 쉽게 통제하는 방법은 폭력이다. 그러나 모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마오쩌뚱의 말은 항상 옳은가? 모든 권력이 총구에서 나온다 하더라도 총구에 의존할수록 권력의 헤게모니는 약해진다. 피지배층은 채찍을 무서워하기도 하지만 채찍을 가로채기도 한다. 심지어는 채찍을 빼앗아 대신 휘두르기도 한다. 이에 21세기의 지배층은 겉으로나마 폭력을 숨긴다. 은폐된 폭력은 제도적 폭력으로 변형되고 제도적 폭력은 구조화한다.

 

자본은 폭력을, 폭력의 이미지를 이용한다. 자본의 지배를 정당하지 않다고 보아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자본은 구사대를 부르고 경찰을 호출하고 군대를 동원한다. 자본은 때로 미국의 다국적 기업처럼 기업의 이윤을 확보하기 위하여 전쟁도, 쿠데타도, 학살극도 서슴지 않는다. 석유 등 원자재를 싼값에 확보하기 위하여 합법적인 제3세계 정부를 전복시키기도 하고 중금속이 든 약이나 식료품을 판매하여 수만의 사람들을 불치의 병에 걸려 죽게도 한다. 원유를 바다에 쏟아 부어 수많은 동물들을 죽이고 폐수를 방류하여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도 이들이다.

 

국가와 자본의 폭력을 잘 매개하는 것은 대중문화이다. 야만적인 폭력은 직접적인 대신 국부적이다. 그러나 문명화한 폭력은 확대재생산되기에 그 피해는 깊고도 넓다. 문명화한 폭력은 법과 질서라는 이름으로 간접적으로 자행되기에 겉으로는 폭력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텔레비전에서 보여준 폭력의 이미지는 대중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가 그들의 폭력을 부추긴다. 그럼에도 대중문화는 폭력을 아름다움으로 포장하고 문화산업은 이를 상품화하여 팔아먹는다. 최근에 각종 기록을 갈아치울 정도로 전대미문의 흥행을 한 영화 <친구>에서 조직폭력배가 보낸 자객이 동수(장동건)에게 달려들어 펌프질을 하듯 30여 회나 칼로 찌른다. 이류 인생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친 동수는 그토록 칼을 맞으면서 “고만해라 많이 묵었다 아이가?”라 한다.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던 이순신 장군이 떠오르지 않는가? 이류 양아치가 갑자기 성인으로, 폭력이 숭고미로 비약하는 순간이다. 준석(유오성)은 자신의 부하들을 향하여 말한다. “밟을 땐 어설프게 해선 안 된다. 아주 병신을 만들던가 내편을 만들어라.” 이토록 폭력과 폭력을 구조화하는 패거리주의를 과장하고 미화한 영화에 600만 이상의 관객이 환호를 보냈다. 영화를 본 청년이 자신의 애인에게 손찌검을 할 때 폭력의 이미지는 실천으로 변형된다. 극히 일부겠지만, 한 소년이 조직폭력배를 멋지게 보아 학교를 나와 조직폭력배에 가담한다면, <친구>의 흥행 성공에 고무된 영화감독들이 너도나도 깡패영화를 양산한다면, 그리하여 폭력은 아름다운 것이고 깡패가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대중들이 다수가 된다면 국가와 자본은 너무도 좋아서 길길이 뛸 것이다. 이제 자신들이 노골적인 폭력을 휘두르더라도 이미 길들여진 대중들이 반발을 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럼 대안은 무엇일까? 자본주의 체제가 문제라면 이 체제 자체를 뒤집어엎어야 할 것이다. 국가와 자본이 폭력을 조장하고 일상화, 구조화하고 있다면 시민운동을 더 활성화하여 이들을 견제해야 할 것이다. 21세기는 국가와 자본에 시민이 또 한 축으로 자리하여 삼자의 균형을 鼎立하는 시대이다. 허나 과연 그러면 인간은 존엄해지고 인간에 대해, 자기 주변의 자연에 대해 폭력을 휘두르지 않을 것인가? 그럼 자본주의 체제가 아닌 사회주의에서는, 중세 봉건제도 하에서는 그러했던가?

 

결국 해인사의 폭력을 잠재운 것은 실상사의 아힘사였다. 수천 캐럿의 다이아몬드라 할지라도, 아름다운 금강산 전체를 준다 할지라도 자기 목숨과 바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든 이들이 자기를 그리 소중히 여기니 다른 이들을 해하지 말라는 것이 아힘사의 정신이다. 겉으로 보면 소극적인 정신 같지만 간디의 비폭력주의가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이겼듯 아힘사는 다른 이를 나처럼 사랑하여 보듬는 것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을 나처럼 소중하게 여길 때 (타자들에 대한) 폭력은 자연스레 사라지리라. 자신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려면 우리는 폭력에 물든 우리의 심성을 아힘사의 정신으로 개발하여야 하리.

 

단 苦를 ‘개인적 고’에만 국한시키지 말자. 태국의 불교환경, 평화 운동가 술락 시바락사(sulak sivaraksa)의 말처럼 이제 구조적 폭력이 바로 苦이다. 반야를 얻으려는 이들은 현실의 고통을 근원적으로 탐구하는 이들이다. 단지 피지배층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가난과 억압과 착취, 소외를 짊어져야 하는 이들의 뼈마디 시린 고통, 사회적인 모순이 낳는 고통에 대해서는 왜 애써 눈을 감았는가? 부당하게 채찍질을 받으면서도 나무아미타불을 외치면 그는 행복한가? 그것조차 개인의 문제로 돌리고 노예의 삶을 개선할 꿈을 헛된 욕망으로 간주하여 버린다면 그들의 삶이 행복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박탈하는 것이 아닌가? 진과 속이 하나인데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설사 정토에 가서 왕생을 누린다 하더라도 그것이 살아서 이 고통을 받는 것보다 얼마나 더 나은가? 마음의 해탈과 사회개혁이 하나가 될 때 진정한 해탈이지 않을까? 술락의 지적처럼 반야로 구조적 폭력을 인식하고 연기적 세계관으로 세계를 바라보아 심성을 개발한 이들끼리 연대를 하여 인간이 모두 소중한 사회, 폭력이 없는 사회를 이룬다면 그야말로 모두가 해탈을 이룬 사회가 아니겠는가? 그때 서 있는 내 발 밑이 바로 도솔천이라고 노래하지 않겠는가?

 

동일성의 철학은 배제와 폭력을 낳는다

 

이렇게 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는 걸까? 폭력은 나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에게 가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상관이 없다는 남에게 가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주체에 대한 폭력이 근본적으로 나와 남을 구분하는 데서 기인함을 의미한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고 선언한 이후 서양의 현대철학은 나와 남을 명백히 구분하고 세계를 이항대립적으로 바라보았고 주체의 동일성을 명료하게 인정하였다. 그러니 자연이든 세계이든 인간 밖의 것들은 모두 주체가 해석하거나 변화시키는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나를 주체, 인간, 남성, 서양으로 동일화하자 주체에게 객체, 인간에게 자연, 남성에게 여성, 서양에게 동양은 개발하고 착취하는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기에 나를 동일화하는 것은 타자에 대한 배제와 파괴로 나타났다.

 

20세기는 배제의 담론이 지배한 역사였다. 폴 포트(pol pot)를 만난 이들은 그가 아주 온화하고 지적이며 상대방을 설득하는 능력이 뛰어나면서도 겸손하고 과묵하며 따스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캄보디아 인구의 1/4에 달하는 170만 명을 킬링필드로 보냈을까? 그의 뜻만큼은 숭고하였다. 캄보디아 농촌을 보고서 그는 캄보디아 전체를 농촌처럼 서로 사랑하고 연대하며 순박한 인심을 가진 공동체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도시와 시장, 학교를 없애버리고 안경을 낀 사람도 ‘도시스러움’을 갖고 있다고 처형할 정도로 ‘도시적인 것’을 철저히 배제하고서 절대 순수한 농촌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나치즘의 유대인 대학살과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 스탈린주의와 수용소군도, 미군의 밀라이 대학살, 유고의 인종 청소 모두 “너는 우리편이 아니다.”라는 배제의 담론의 소산이다.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불 속에 던져버린 일본 군인들이 악마의 화신이었을까? 아니다. 그들도 소설을 읽고 엉엉 울어버리고 첫사랑에 온밤을 설렘으로 지새우고 키우던 강아지의 죽음에 눈물을 훔치던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 다만 “저들은 우리편이 아니야. 남이야. 저들이 사라져야 우리가 행복해.”라는 식의 배제의 담론이 그들을 그렇게 악마로 바꾸어버렸던 것이다.

 

나는 언제 어디서나 같은 모습을 가지며, 나는 나를 명료하게 드러낼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이 보통 땐 멀쩡한데 새 중에서도 작은 새인 참새만 나타나면 벌벌 떨며 소리를 질러댔다. 그의 정신을 분석하였더니 젊은 날 ‘참새’라는 별명을 가진 경찰관에 혼수상태가 되도록 맞았던 경험이 있었다. 이성을 가진 나는 그를 잊었지만 무의식의 나는 그를 별명으로 대치시켜 기억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나는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나의 안에 리비도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리비도를 분출하려는 ‘거시기’[id]와 이를 통제하려는 자아[ego]와 승화시키려는 초자아[super-ego]가 서로 팽팽히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리비도를 억압하고 이성을 내세우기도 하지만 욕망의 포로가 되기도 한다.

 

자각몽(lucid dream)이라는 꿈이 있다. 꿈 안에 내가 있는 꿈이다. 돼지꿈을 꾸었는데 돼지가 도망가자 꿈속에 내가 나와 “돼지가 도망가면 아무 소용이 없어.”라며 돼지를 잡으려 다니며 꿈까지 바꾸려 한다. 그러면 이 순간 잠을 자는 나와 꿈을 꾸는 나, 돼지를 잡는 나 가운데 누가 진정한 나인가? “나는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할 때, 어느 여자를 좋아하는 나와 그런 존재를 생각하는 나, 두 자아가 존재한다. 둘은 다른 무엇이니 하나가 아니고, 또 그렇다고 전혀 다른 존재도 아니니 둘도 아니다.

 

그럼 누가 참 나인가?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라깡(jacques lacan: 1901-1981)은 데카르트 이래 나를 동일성을 가진 존재로 인식해 온 서양 철학을 뒤엎는다. “나는 내가 존재하는 곳에서 생각하지 않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라고 당당히 선언한다. 나는 18개월 이전의 아기였을 때 거울에 비친 환영을 보고 비로소 어머니에서 분리되어 나를 형성한다. 거울을 보기 전까지 나는 어머니의 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나를 형성하는 것은 거울 속에 비친 영상, 타자를 통해서인 것이다. 이후 “아버지의 이름 (the-name-of-the-father)”, 언어기호와 상징, 이 뒤에 있는 사회의 도덕과 법과 윤리를 받아들이면서 나를 형성한다. 나는 내 밖의 타자들과 소통하면서 사회화한다. 그러니 나는 타자가 내재화한 것이며 타자는 다른 장소에 나타난 나의 다른 모습이다. 욕망이란 것도 타인의 권력과 향락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욕망이란 타자를 지향하는 것이요, 인간은 욕망할수록 나에게서 멀어져 남이 된다. 그러니 라깡에 와서 데카르트 이래 나와 남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여 본 동일성의 철학은 무너진다.

 

‘해체’라는 말을 빠리에서 동경에 이르기까지 유행어로 만든 장본인인 프랑스의 철학자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는 동일성을 차이로 전복시킨다. 차이가 동일성에 선행하며 형이상학이 근원으로 내세우는 동일성은 차이작용의 결과로서 생산될 뿐이다. 데리다는 이를 형이상학적으로 발전시켜 동일성에 바탕을 둔 서구 철학을 비판한다. “恣意性(arbitrariness)은 기호의 체계의 충만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요소들 사이의 차이에 의하여 구성될 때만 일어나는 것이다.(j. derrida, “differance," in speech and phenomena and other essays on husserl's theory of sign: 139) 의미작용은 낱말이나 사물의 충만한 본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차이, 구조 속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철학은 차연 속에서 그리고 차연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배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동일성, 상응성이 배제된 차연성을 동일성이라 믿는 우를 범하였다. 동일성은 하나의 다른 것이 또 다른 것으로, 대립의 한 용어가 다른 용어로 옮겨가는, 전복되고 모호한 통로에 불과한 차연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동일하다고 믿은 것은 차연 속의 타자이며, 타자 속의 차연에 불과하다. “같은 것은 다른 것의 다른 것이고, 다른 것은 자기와 같은 것이다.(j. derrida, writing and difference: 127)" 즉 ‘무한적 타자’, ‘절대적 타자’라는 표현은 동시에 말해지고 생각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다름은 다름이 되는 것을 그쳐야 같음의 절대적 외부에 있을 수 있다. 이는 결국 같음은 자기 자신에게서 닫혀진 전체성이 아니며, 레비나스가 경제, 작업, 역사라고 부르는 것 가운데서, 타자성의 현현하고만 작용하여 그 자체로 유희하고자 하는 동일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타자성 자체가 동일자 속에-속이라는 낱말이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포섭의 의미에서-이미 들어있지 않다면, 어떻게 ‘동일자의 유희’가 있을 수 있을까? 동일자 속에 타자성이 없다면, 놀거나 작동하는 기계, 또는 유기적 전체성 속에서, 이탈하거나 유희를 즐기는 행위의 의미 속에서, 어떻게 ‘동일자의 유희’가 일어날 수 있을까?(ibid., 126-127)

 

“동일성이란 본질적인 차이와 특수한 역사적 ‘분할’을 초월하는 일반적 범주-그 자체로 차이의 동일화-로 관념화할 수 있는 것인데, 사회적 관계는 결코 이런 동일성-개인-으로 환원할 수 없는 타자성을 구성한다.…단순히 한 ‘사물'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하나의 “관계”라고 말하는 것은, 이타성이 동일성에 선행하며 이를 생산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무’의 본질과 속성은 나무 안에 없으며 나무는 풀과 차이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나무를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풀'이란 타자와의 관계와 차이로부터 생산된다. 그럼 원효에게도 동일성의 폭력을 극복하는 철학, 차이의 철학이 있을까?

 

같다는 것은 다름에서 같음을 분별한 것이요

 

“같다는 것은 다름에서 같음을 분별한 것이요, 다르다는 것은 같음에서 다름을 밝힌 것이다. 같음에서 다름을 밝힌다 하지만 그것은 같음을 나누어 다름을 만드는 것이 아니요, 다름에서 같음을 분별한다 하지만 그것은 다름을 녹여 없애고 같음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로 말미암아 같음은 다름을 없애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같음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다름은 같음을 나눈 것이 아니기에 이를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단지 다르다고만 말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것들이 같다고 말할 수 있고 같다고만 말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것들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에는 둘도 없고 別도 없는 것이다..”

(同者辨同於異 異者明異於同 明異於同者 非分同爲異也 辨同於異者 非銷異爲同也 良由同非銷異故 不可說是同 異非分同故 不可說是異 但以不可說異故 可得說是同 不可說同故 可得說是異耳 說與不說 无二无別矣: <<金剛三昧經論>>, <無生行品>, <<韓國佛敎全書>>, 제1책, 626-上)

 

외국인들은 뜨거운 국을 먹으면서 시원하다고 말하는 한국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나라 학자들도 이에 대해 뭐라 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는 辨同於異의 和諍의 사유가 우리 민족의 사유구조이자 문화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뜨거움은 홀로 존재하는 것도 홀로 의미를 갖는 것도 아니다. 찬 것이 있기에 그와 차이를 통하여 뜨거움을 분별한 것이다. 차다는 것 또한 홀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뜨거운 것이 있기에 차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둘 사이가 대립적인 것이 아니다. 뜨거운 것은 찬 것을 없애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찬 것은 뜨거운 것을 증발시켜 버리고 얻어내는 것은 더욱 아니다. 뜨거운 것이 있어서 찬 것이 드러나고 찬 것이 있어서 뜨거운 것을 느끼기에 가장 시원한 맛은 “뜨거운 시원함”이다.

 

現前과 不在의 관계 또한 대립적이 아니라 차이적이다. 누구인가가 몹시 그리운 것을 두고 한국인은 “눈에 밟힌다.”라고 표현한다. ‘눈에 밟힘’은 어떤 대상이 없어서 몹시도 그리워 환상으로 만들어진 대상이 구체성을 띠고 나타났다가 눈에 밟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났다가는 사라지는 반복이 끊임없이 되풀이될 때 사용하는 말이다. ‘눈에 밟힘’은, 一心이 있는 것이면서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면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면서 보이지 않는 것이며 보이지 않는 것이면서 보이는 것이다. 없어서 그리우면 눈에 선한 법이다. 不在가 눈앞에 現前을 드러내고 눈에 선해지는 현전은 더욱 부재를 실감케 한다. 이렇게 양자가 不一不二의 관계로 만나면 눈에 밟히게 된다. 눈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형체가 없는 것인데 “밟힌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밟힌다는 것은 구체적 사물에나 해당되는 것이다. 추상이 쌓이고 쌓여 눈에 밟힐 정도로 구체로 전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밟히는 순간 구체는 사라지고 추상 - 이미지만 남는다. 이렇게 부재와 현전, 만남과 헤어짐, 추상과 구체가 하나로 아우러진다. 추상의 한 관념에 구체적 형상을 입혀 추상이 空華로 전락하는 것을 막고 관념이 왜곡을 낳는 것을 막으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한다. 형이상학적인 것을 형이하학적인 것으로 드러내면서도 형이상학이 갖고 있는 보편성과 깊이를 해치지 않는다.

이처럼 세계의 근원이요 만물의 始原, 지극하고 절대적인 도리요 당연한 이치인 일심은 眞如門과 生滅門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두 측면의 통일체로 有無의 법이 이루어지지 않는 바 없고 是非의 뜻이 미치지 않는 바 없다. 一心과 眞如, 혹은 道라는 것은 이성으로는 알 수 없어 방편으로 둘로 나누어 보지만 이것과 저것이 동일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저것으로 하여 이것이 있게 되고 이것으로 하여 저것이 있게 된다. 眞如門과 生滅門이 하나이지만 진여문은 생멸문이 있기에 진여문인 것이며 眞俗이 하나이면서도 眞은 俗이 있기에 俗과 차이를 통하여 眞如實相을 드러낸다. ‘동쪽’이라는 낱말이 ‘서쪽’과 차이를 통하여 의미를 갖듯, 원효의 말대로 동일성이란 것은 타자성에서 동일성을 갖는 것을 분별한 것이요, 타자성이란 것은 동일성에서 다름을 밝힌 것이다. 동일성은 타자를 파괴하고 자신을 세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동일성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타자성은 동일성을 해체하여 이룬 것이 아니기에 이를 타자라고 말할 수 없다. 主와 客, 현상과 본질은 세계의 다른 두 측면이 아니라 본래 하나이며 차이와 관계를 통하여 드러난다. 주체에는 이미 타자가 들어와 있고 타자 또한 주체를 형성한다.

 

화쟁은 주와 객, 주체와 타자를 대립시키지도 분별시키지도 않는다. 양자를 융합하되 하나로 만들지도 않는다.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중간도 아니다. 주와 객, 주체와 타자가 서로를 비춰주어 서로를 드러내므로 스스로의 본질은 없고 다른 것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진리란 것은 진리가 아닌 것과 차이를 통하여 진리를 드러내고 진리가 아닌 것은 진리와 차이를 통하여 진리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 상당수가 동남아나 아프리카 사람들을 멸시한다. 몇몇 악덕 기업주는 그곳 출신의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임금을 착취하고 신체를 불구로 만들고도 치료는커녕 보상금도 한 푼 주지 않은 채 불법체류자임을 악용하여 국외로 추방한다. 제3세계를 수탈하고 억압한 일본이나 서구 열강을 탓할 일이 아니다. 우리 민족만큼 민족의 동일성을 내세우는 민족도 드물다.

 

동일성, 우열의 철학은 갈등과 대립을 낳으며 우열을 설정하는 순간 타자에 대한 폭력을 부른다. 한국 사회의 올바른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지역주의와 패거리주의도 동일성의 철학에서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차이의 철학은 양자를 우열로 보지 않는다. 피부가 검은 것은 다름과 차이일 뿐 열등함이 아니다. 타자에게서 자기를 발견하며 타자와 차이를 통하여 자기를 찾는다. 독일의 문학가 루이제 린저(luise rinser: 1911-)는 “가장 진정한 사랑이란 내 방식을 그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의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처럼 辨同於異의 사유는 나는 타자로 인하여 나이고 타자가 곧 나임을 자각하여 타자를 나처럼 끔찍이 보듬어주고 사랑하는 것, 나와 타자 사이에 평화스러운 공존을 모색하는 것이다.

 

제5강: 도시화, 산업화와 공동체의 파괴

 

진정한 제3의 길, 혹은 새로운 공동체는 가능한가:

 

마르크시즘 對 饒益衆生

 

저미도록 그리운, 그 날 그 골목의 사람들

 

뉴질랜드에 가 있는 제자로부터 뜻밖의 답장이 왔다. 무더운 여름을 탓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더니 오히려 이역만리 타향에서 가슴 저미게 그리운 것이 바로 한국의 여름이라는 답신을 보내왔다. 열대야가 기승을 부린들 어떠리? 성규네 엄마, 길수네 엄마, 돗자리를 들고, 없으면 작년에 이사 오면서 갈아버린 헌 장판을 들고 골목으로 나선다. 어? 문실이는 시멘트 포장지를 들고 나왔네. 제법 펑퍼짐한 곳을 찾아 자리를 펴고 우물물에 담가 두었던 수박을 썩썩 썰어선 동네 사람들 불러모은다. 지나는 길손까지 소매를 잡아 붙들어 기어이 수박 한 조각을 먹인 후에야 보낸다. 창수네 아저씨는 어느 틈에 모깃불을 피우고 개구쟁이들은 난리법석을 떠는 것 같더니 어느새 코를 곤다. 아줌마들은 주저리주저리 수다꽃을 피우고 아저씨들은 시국이 어떠네 하며 나라 걱정, 경제 걱정으로 밤을 지샌다.

 

시골 이야기가 아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서울 한 복판에도 골목 문화란 것이 있었다. 우리 집이 제천에서 이사 와서 터를 잡은 신길동은 서울이지만 거기는 분명 공동체였다. 생일날이면 으레 그 집에 모여 아침 식사를 같이 하였고 그것으로 흥이 차지 않은 어른들은 밤늦게까지 술판을 벌였다. 설날이면 가장 나이 드신 분부터 시작해서 동네 전체를 세배 다녔고 대보름날이면 이 집 저 집 아홉 그릇을 채우러 다녔다. 농악대가 마을을 훑고 지나가면 어른들은 동네 공터에 모여 윷판을 벌렸다. 저녁을 먹자마자 한 애가 “애, 애, 애들 나와라.”라는 노래를 부르면 아이들은 쏟아져 나와 달 밝은 날은 성 빼앗기나 오징어 가위생 같은 놀이를, 별이 반짝이는 날은 다방구나 숨바꼭질을 하였다. 누가 이사를 가거나 오면 골목부대 모두가 동원되어 하루종일 이삿짐을 날랐다. 1원에 서너 개 하던 바가지 과자를 받아들고는 우리들은 행복해 하였다.

 

김장과 연탄 나르기, 잔치 음식 준비하기 등 큰 일은 모두 내 일, 네 일 구분 없이 품앗이로 하였다. 새로 이사 온 집은 고사를 지내고 동네 어른을 모셔 술대접을 하고 고사떡과 고기를 돌렸고 거기엔 불문율이 있었다. 그 접시와 그릇을 반드시 무엇인가로 채워 돌려주어야 한다는. 없는 살림에 그 그릇을 채우려고 일부러 별식을 만드는 적도 많았다. 그릇은 일년 내내 마을을 돌았다. 품앗이로 김장을 하면서도 김치를 담아, 명절 땐 가래떡과 송편을, 여름엔 콩국수와 수박과 부침개를, 가을엔 시골서 올라온 농산물을, 겨울엔 팥죽과 동치미와 만두를, 봄이면 나물과 쑥떡을 꾹꾹 눌러 담아 노인이 계신 집이나 가난한 집부터 돌렸다. 단 한 집도 문을 닫고 사는 집이 없었고 누구도 서로의 경사와 슬픔을 나누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대학 다닐 때까지도 공동체는 이어졌다. 도로 정비 명목으로 철거를 하기 전까지는. 서울 살림이 이랬는데 당시 우리 농촌은 얼마나 더 했겠는가?

 

그리 서로를 보듬고 기쁨을 함께 하고 슬픔을 나누었기에 사람들은 가난했어도 행복할 수 있었고 불행이 있었어도 그 시절이 진정 행복한 때였다고 되새길 수 있었다. 노도처럼 밀려들던 산업화와 도시화도 골목문화를 없애지 못하였는데, 도시재개발로, imf 한 방으로 골목문화는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골목문화는 이제 허기진 그리움으로, 우리들의 가슴에만 남아있다.

 

이게 어디 나 하나뿐이랴? 우리에겐 어느덧 돌아갈 고향이 없다. 동무들과 미역을 감으며 버들치를 잡던 시냇물엔 시커먼 폐수가 흐르고 잠자리와 나비를 좇던 푸른 언덕은 골프장으로, 가든으로, 러브호텔로 변하였다. 말없이 서서 청빈과 검소, 安分의 지혜를 알리던 건너 편 산 허리를 덥썩 잘라내고 흉물스런 아파트가 들어섰다. 사람이라도, 사람 사는 온기라도 있으면 그래도 견디련만 모두들 떠나고 빈들엔 휑한 바람만 훑고 지나간다.

 

자본주의 사회는 죽음의 욕망이 꿈틀대는 거대한 쇼핑센터

 

산업사회로 이행하면서 토대가 변화하자 수천 년 간 지속되어 온 농촌 공동체는 급속히 해체되었다. 공장은 농지를 야금야금 삼켜버렸고 농민들을 노동자로 전환시켰다. 도시화 또한 산업화와 함께 급속히 단행되었다. 2,000년 현재 세계 인류 중 거의 절반에 달하는 29억 명이 도시에 살고 있다. 2007년에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도시 생활자가 농촌생활자를 초월할 것이며 2030년에는 그 60%인 49억 명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 2000년 12월 현재 한국에서 농촌에 사는 사람은 10%도 넘지 않는다(8.7%). 젊은이들은 돈 벌러, 공부하러, 출세하러 도시로 가버리고 노인들만 남아 새우등처럼 굽은 허리를 힘겹게 펴며 밭을 일구고 있다. 도시로 온 90% 사람들이 일터에선 구더기처럼 오글거리다가도 삶터로 돌아오면 콘크리트 상자곽에 서로를 가둔 채 고독을 되씹고 있다. 아파트에서 사람이 죽어 몇 달이 지나서야 썩는 냄새가 진동하자 발견되는 일은 이제 뉴스도 아니다. 돈 몇 푼에 가족을 살해하는 일은 뉴스로 보도되기는 하나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자본주의가 이들과 결합하면서 공동체는 완전히 붕괴하였다.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으로부터 생산자를 분리하기에, 사람들은 대지로부터, 그 대지에 터를 두고 살아가던 사람들로부터 소외된다. 생산자들은 노동력을 판매하는 자이기에 인간은 물론 노동 자체가 상품화한다. 인간은 노동으로부터, 노동하는 대상으로부터, 함께 노동하는 사람으로부터 소외당한다. 왜, 어떤 목적으로 생산을 하는 지 거의 모른 채 노동을 하고 자신의 생산물을 익명의 상품으로 내놓는다. 20승을 하는 투수에게 2,000만불을 준다면 10승을 하는 선수에게 700만 불 정도를 주고자 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이다. 그러니 능력이 있는 자는 떵떵거리며 살고 없는 자들은 빈곤과 기아에서 허덕인다.

 

기회가 균등하다면 그리 커다란 불만이 없다. 능력이 없는 데도 아버지를 잘 두어서 누구는 호화 별장에 요트를 가지고 평생을 손가락 까딱하지 않고 환락 속에서 보내고, 누구는 뛰어난 능력이 있으나 학교 갈 돈이 없어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하루하루 고통이기만 삶을 마지못해 연명한다. 그래도 모두에게 똑같은 규정이 적용된다면 한이 맺히지는 않는다. 자기보다 빨리 달리는 자가 손을 휘두르며 달리는 것을 보고 손을 휘두르며 달리면 반칙이라는 규정을 만드는 것처럼, 먼저 권력을 잡은 이들이 계속 지배층으로 남을 수 있도록 모든 법과 제도를 자기네들에게 유리하게 짜 맞추었다. 이 틀 속에서 가진 자들은 가지지 못한 자의 잉여노동을 마음껏 착취한다. 그리고도 불만을 가지지 못하도록 각종 이데올로기 공세를 퍼붓는다. 문화와 예술을 동원하여 일하는 자, 순종하는 자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그들의 저항의식을 서서히 거세한다. 학교를 통하여 지배층의 먹이를 잘 물어다주는 방법을 가르치고 주인에게 순종하는 미덕에 대해 어릴 때부터 세뇌시킨다. 미디어는 그들의 대변자 노릇을 하고 그들에게 유리한 정보를 제공하고 때로는 조작도 서슴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잉여노동을 착취하고 상품을 판매하여 자본을 축적하는 사회이기에 과잉생산을 추구하고 과소비를 조장한다. 모든 부문에서 교환가치를 더 우선시 하면서 생산과 소비가 분리된다. 생산과정에서는 포드시스템을 동원하고 연봉, 승진 따위로 적당한 보상을 하여 노동을 통제하고 관리하며 생산성을 높인다. 소비자들에겐 구조적 통찰이나 현상의 본질을 꿰뚫을 의지와 능력일랑 버리게 하고 오로지 상품광고와 유행에 의존하여 미친 듯 상품을 소비하도록 유도한다. 노동자들 스스로도 이 체제 속에서 자본주의적 인간이 된다.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강한 권력을 소유하고 더 높은 명예를 얻는 것이 그들의 꿈이다. 욕망이란 이미 점유하고 있는 타자의 권력과 자본과 명예를 자신의 것으로 하는 것이기에, 이 구조 속의 인간들은 나와 타자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 타자를 토끼와 거북이식으로 밀어내는 것을 자연스런 생존방식으로 받아들인다. 상대방을 무너트려야 내가 더 강한 권력과 더 높은 명예, 더 많은 돈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이웃을 반드시 물리쳐야 할 적으로 삼는 곳에서 어찌 공동체가 자리하리? 자본주의 사회 전체가, 겉모습은 화려하지만 정글법칙대로 생존이 결정되고, 저 밑에서는 삶이 아니라 죽음으로 향하는 욕망이 꿈틀대는 거대한 쇼핑센타로 전락하였다.

 

정의란 나 아닌 다른 이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

 

자본주의 사회가 무엇보다도 인간을 소외시키며 서로를 적으로 만들어 공동체를 해체하는 것을 혐오한 마르크스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사회주의 공동체를 내세운다. 그가 꿈을 꾼 세상은 피의 혁명과 숙청을 통한 공산주의 건설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그룬트리쎄≫에서 “정의란 나 아닌 다른 타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공산당선언≫에선 적극적 자유는 사회적 개인들의 자기발전이므로 각 개인이 타자를 더 많이 향상시켜 줄수록 그들 각자의 발전의 여지는 더욱 커진다며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된다.”라고 선언한다.

 

어느 책에선가 읽은 이야기이다. 영국군의 한 소대가 사막의 여우 롬멜장군(erwin johannes eugen rommel: 1891-1944)의 대전차 군단에 패하여 패잔병으로 사막을 방랑하고 있었다. 폭양은 뜨거운 모래 위로 이글거리는데 상처투성이 다리를 끌며 걷고 또 걸어도 오아시스도, 아군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몇 날을 헤매다가 소대장은 소대원을 향하여 외쳤다.

 

“여러분! 제군들은 그 동안 뜨거운 조국애와 전우애로 롬멜의 대전차군단도, 사막의 폭양도 잘 견뎌주었다. 그러나 이제 양식도, 약도 모두 떨어졌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이란 고작 이 수통의 물뿐이다. 여러분이 짐작하다시피 우리는 아마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제군들을 만나서 나는 행복한 장교였다. 감사한다. 이제 우리 수통의 물을 한 모금씩 마시며 마지막으로 전우애를 나누자.”

 

소대원들은 하나 둘 수통을 건네 들었다. 수통은 소대원을 돌아 다시 소대장에게로 왔다. 그 순간 소대장은 수통의 물보다도 더 많은 눈물을 쏟았다. 수통의 물이 그대로였던 것이다. “나도 마시고 싶지만 옆의 00일병은 다리의 출혈이 심하니 더 갈증이 심할 거야.” “아니야, 00병장은 노모가 계시다는데 그가 살아남아야 해.”라며 이들은 죽음의 전선에서 서로 양보하였던 것이다. 나 아닌 다른 이들의 갈증을 더 마음 아파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하여 살아남았고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모든 사람들이 영국군 소대처럼 나 아닌 다른 이를 좀더 행복하게, 자유롭게 하려고 서로 서로 갖은 실천을 다하는 사회를 꿈꾸었다. 가진 자, 못 가진 자 없이 모두가 모여 함께 할 일을 정하고 일하는 자가 땅과 공장을 가진다. 이곳에서 노동은 더 이상 소외된 노동이 아니다.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경지이자 자기 앞의 장애를 극복하고 진정한 자기를 실현하는 방편이다. 더 나아가 나의 노동을 통하여 타인을 자유롭게 하는 利他的인 동시에 對自的이고 적극적인 자유를 실현하는 수단이다. “각자의 능력을 따름에서 각자의 필요에 따름으로”라는 마르크스가 제시한 원칙에 나타난 대로 사람들은 우열이 아니라 차이에 따라 존재의의를 가지며 능력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 생산하고 분배한다. 타인을 자유롭게 하여 나는 더 자유롭게 되고 자유로와진 나로 하여 타인은 더욱 자유롭게 된다.

 

인간은 이미 “사회 관계 속에 있는 개인(individuals in social relation)”이다. 나는 수많은 타인과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니 나의 자유는 이들과 함께 공유할 때 완성된다. 그러니 진정한 자유는 나 아닌 다른 타인을 구속과 압제에서 벗어나게 할 때 완성된다. 빈곤의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에게 양식을 줄 때, 나를 위한 삽질이 아니라 나보다 더 가난한 이를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하루에 500평의 밭을 갈던 이가 600평을 밭을 갈고자 할 때 나 자신은 진정 자유로운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유는 정의와 결합한다. 개인의 자유는 공동선과 부합한다.

 

바로 이 때문에 수십만의 젊은이들이 영광과 명예와 환락의 길을 버리고 자신보다 더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삶을 구원하려고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쳤고, 노동자들은 혼신을 다해 망치질을 하여 기적적인 생산증대를 이루어냈던 것이다. 모두들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한 사람의 열 걸음이 아니라 열 사람이 한 걸음을 내딛었다. 인류역사상 종교가 아니라 하나의 사상을 위하여 수십만이 자발적으로 피를 흘린 사상이 마르크시즘 말고 또 있었던가? 오랜 동안 몽고의 지배를 받던 유럽의 삼등 국가 러시아가 미국과 맞먹는 소련으로 거듭난 것은 바로 이런 힘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의기양양하였다. 인간을 서로 소외시키고 부자가 가난한 자를 착취하는 탐욕스러운 자본주의가 곧 붕괴하고 전 세계가 사회주의로 돌아서리라고.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생겼다. 다시 굶어죽는 인민이 생겼고 소련은 미국의 식량 지원이 없이는 국가 자체가 위기에 놓일 지경이 되었다. 집단 농장의 배추는 썩어 가는데 개인 텃밭의 배추는 싱싱하였다. 모스크바 국제공항에 휴지가 없을 정도로, 장작이 없어 마르크스 책을 땔감으로 삼을 정도로 물자가 모자라고 남아도 유통이 되지 않아 많은 인민들이 고통에 찬 생활을 하였다. 굶주림을 면하려 다른 나라에 가서 몸을 파는 인터걸까지 생겼다. 예술은 혁명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하였고 언론은 새로운 지배층의 나팔수가 되었다.

 

왜 사회주의는 실패하였는가? 먼저 이야기할 것은 사회주의의 실패가 마르크스주의나 레닌주의의 실패라기보다 마르크시즘을 왜곡한 스탈린주의의 실패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주의의 역기능을 이야기할 때 획일화, 전체주의화, 통제와 억압 심화, 관료화, 국가의 비대화와 정당성 상실을 꼽는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공동체적인 생산 및 분배활동 내에서, 목적과 절차의 공동 결정은 공동체의 각 성원이 다른 성원의 목적, 필요, 개별적 차이점들을 감안해 주는 과정을 통해서만 달성된다고 보았다. 레닌은 소수라 할지라도 반대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진리에 수렴될 수 있다며 민주주의의 원칙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제국주의에 포위된 상황에서 혁명을 완수하려면 모든 것이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며 소련을 전체주의화하였다. 당은 더 이상 인민의 대표기관이 아니었다. 인민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관료기구로 바뀌었다. 비밀경찰은 인민 모두를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는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국가기구, 하지만 인민의 일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유령이 되었다. 소련 전체가 ‘수용소군도’로 전락하였다고 표현할 정도로 인민의 자유,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억압당하였고 인간의 존엄성은 박탈되었다. 지하신문, 사미즈다트(samizdat; 검열을 피해 솔제니친 등이 스스로 발행하여 몰래 돌린 출판물)를 통해서만 진실을 접할 수 있었다. 사회주의의 획일성은 개인의 욕망과 창조성, 문화와 사상의 다양성을 훼손하고 억압하였다. 자연스레 사회와 문화는 퇴보를 하였고 생산성이 떨어지면서 다시 굶주리는 사람이 생겨났다. 계급 없는 사회가 아니라 노멘클라투라라는 신종 계급이 등장하였다. 그러기에 사회주의를 개혁하자는 페레스트로이카 철학을 제시한 렉토르스키나 이를 구현하고자 한 소련의 초대 대통령 고르바초프(mikhail s. gorbachyov: 1931-)는 다같이 “레닌으로 돌아가자!”라고 외쳤던 것이다.

 

과연 스탈린만이 사회주의의 실패의 짐을 지어야 할까? 사회주의자들은 수요와 공급이 저절로 이루어지고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절로 조절되는 시장을 무시하였다. 지금 용량의 수만 배 되는 슈퍼컴퓨터가 있더라도 당이 시장을 대체할 수 없다. 한 곳에서는 철근이 산처럼 쌓여 녹이 슬고 있는데 다른 지역에서는 철근이 없어서 다리를 놓지 못하고 집을 짓지 못하여 많은 인민들이 고통에 찬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사회주의 체제의 풍속도가 되었다.

 

패러다임 자체가 인간중심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중앙집권적인 통제경제를 실시하는 바람에 사회주의에서도 환경파괴는 극심하였다. 노동을 자연의 장애를 극복하고 인간이 자기를 실현하여 자유를 쟁취하는 수단으로 정의하였듯 마르크시즘 또한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지 못한다. 중앙집권적인 통제 경제를 실시하였고 실제로는 인민을 소외시킨 계획경제였기에 목표 달성과 혁명 완수의 구호 속에 누구도 자연파괴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더한 것은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이 악이 아니라 창조의 원동력임을 간과한 데 있다. 왜 개인 텃밭의 배추는 싱싱할까? 그것을 개인의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행위, 사회의 공동선에 해악을 끼치는 것으로 간주하여 강력한 사상교육을 시켜야 할까, 아니면 모든 이들이 공동으로 자극을 받도록 인민재판을 해야 할까?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인 미국의 성공 비결은 개인이 마음껏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개발하고 그런 만큼 철저히 보상해 주는 데 있다. 10여 년 이상의 세월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연구에만 몰두하여 새로운 발명품을 만들었는데 그것으로 얻어지는 이익을 사회 전체의 몫으로 한다면 과연 몇 명의 과학자가 혼신을 다해 연구에 몰두할까? 개인의 이기심과 욕망은 자기의 사리사욕만 채워 공동체를 해치는 악으로 규정하여 철저히 없애버려야 할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과학적이고 예술적인 창조의 원동력이었다. 자신의 연봉이 늘어나고, 자신의 명예와 권세가 높아지기에, 그것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도 혜택이 돌아가기에 피땀을 흘리며 일하고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었다.

 

사회주의의 실험은 실패로 끝났고 자본주의 체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체제가 아님은 분명하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심의 동물이다.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이 좀더 행복을 누리기를 바란다. 남의 것을 빼앗아 와서라도 자기의 것을 채우고자 욕심을 부린다. 물론 인류 모두가 나를 버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하지만 대중들에게 이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중 모두를 깨닫게 하면 된다고 하더라도 그럴 때까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가득한 사회를 방치해야 할까? 모든 이들이 깨달음에 이르지 않는 한, 개인의 이익과 자유는 집단의 공동선과 마주친다. 그럼 모든 인민이 더불어 잘 사는 길은 무엇일까? 안토니 기든스의 제3의 길이 절충에 불과함은 블레어의 실험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원효의 사상에 그 씨앗이 있을까?

 

연꽃은 저 높은 산록에서 피지 않는다

 

“空相이 또한 공하다”라 한 것은 ‘공상’이 바로 俗諦를 버리고 眞諦의 평등한 상을 나타낸 것이요, “또한 공하다”란 곧 진제를 융합하여 속제로 삼은 “空空”의 의미이니, 순금을 녹여 장엄구를 만드는 것과 같다. …… “또한 공하다”라 한 것은 이 속제를 다시 융합하여 진제로 삼은 것이니, 이것은 장엄구를 녹여 다시 금덩이로 환원시키는 것과 같다. …… 또 처음의 門에서 “속제를 버려서 나타낸 진제”와 제2의 공 가운데 ‘속제를 융합하여 나타낸 진제’인 이 2문의 진제는 오직 하나요 둘이 아니며, 진제의 오직 한 가지로 圓成實性이다. 그러므로 버리고 융합하여 나타낸 진제는 오직 하나이다.(《金剛三昧經論≫, <入實際品>, 《韓國佛敎全書≫, 제1책, 639-하-640-상: “空相亦空者 空相卽是遣俗顯眞 平等之相 亦空卽是融眞爲俗 空空之義 如銷眞金作莊嚴具 …… 亦空還是融俗爲眞也 如銷嚴具 還爲金ꝛ ……又初門內 遣俗所顯之眞 第二空中 融俗所顯之眞 此二門眞 唯一無二 眞唯一種 圓成實性 所以遣融所顯唯一”)

 

석가모니는 《금강경≫에서 “만약 보살이 我相이나 人相이나 衆生相이나 壽者相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구원의 주체인 나나 대상인 타인이 있다는 생각, 중생이든 다른 존재이든 이보다 위에 서서 그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보살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의 대상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어서, 그들보다 높이 깨달아서, 그들보다 시간이 많아서, 그들보다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베푸는 것이 아니다. 보살행은 내가 그보다 높이 서서 나의 佛性을 그들에게 불어넣어 주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부처님과 같은 성품을 지녔다. 유리창만 닦으면 하늘이 다시 청정함을 드러내듯, 無明만 없애면 본래 청정한 중생 속의 불성이 스스로 드러나니 그 먼지만 사알짝 닦아내면 된다. 그러니 중생과 깨달은 자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화쟁의 목표는 한 마디로 말하여 一心의 本源으로 돌아가 중생을 풍요롭고 이익이 되게 하는 것이다[歸一心之源 饒益衆生]. 원효는 이를 위하여 진과 속이 하나가 아니라는 眞俗不二를 외친다. 우리 미천한 인간들이 속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끊임없이 수행 정진하여야 완성된 인격[眞]에 이를 수 있고 또 이에 이른 사람은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들을 이끌어야 비로소 깨달음이 완성될 수 있다. 높은 깨달음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열반에 머물지 않고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중생을 구제해야 비로소 깨달음의 완성에 이른다. 이것이 眞俗一如이다. 원효는 열반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不住涅槃을 추구하였고 이를 몸소 실천하고자 중생 속으로 내려갔다. 티벳의 승려는 수천 리 길을 맨발로 5체투지를 하며 걷고 영하 삼, 사십 도의 찬바람이 살을 에는 수천 미터 설산에서 맨몸으로 잠을 잔다. 이렇듯 범인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고행을 하며 중생을 구원하다 그는 결국 그 업보로 궁극적 존재인 부처가 되어 해탈을 이룬다. 그러나 가장 존귀한 존재인 부처가 되었어도 그들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다시 인간의 몸으로 환생한다. 원효의 표현대로 금을 녹여 장엄구로 만들듯 眞諦를 녹여 俗諦를 만들며, 다시 장엄구를 녹여 금덩이로 환원시키듯 속제를 녹여 진제로 만든다. 금덩이를 녹여 금반지를 만들고 금반지를 녹여 다시 금덩이를 만들지만 둘은 모두 금으로 하나이다. 그러니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圓成實性], 부처와 중생,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 엘리트와 대중이 둘이 아니요 하나이다.

 

연꽃은 저 높고 아름다운 산록에서 피어나지 않는다. 왜 저 아름다운 연꽃이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고 향기로운 바람이 스치고 지나는 높은 언덕에 피지 않고 냄새나는 수렁의 진흙 속에서 피어날까? 왜 가장 더러운 진흙 속에서 줄기를 뻗어 청정한 하늘 위로 가장 아름다운 꽃 송아리를 틔울까?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이 저 높은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고 반야의 바다를 완전히 갖추었어도 열반의 성에 머무르지 않고 무량한 겁 동안 온갖 번뇌를 버리지 않고 온 중생을 구제한 뒤에 비로소 열반을 얻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나 혼자만의 깨달음이 아니라, 중생들을 열반의 언덕으로 나아가도록 할 때 진정한 깨달음의 세계에 이를 수 있다. 구원은 그를 위하여 나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리로 가 그를 완성시키고 그를 통해 다시 나를 완성하는 행위이다. 조금만 숲 속으로 발을 옮겨도 연꽃보다 예쁘게 생긴 꽃은 허다하다. 그러나 진흙 수렁 속에서 피어나기에 연꽃은 가장 아름다운 꽃이 아닐까?

 

그럼 진속불이를 통한 饒益衆生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할까? 마르크스의 사상에 공과 연기의 사상을 종합한다면 모든 인민이 인드라망의 구슬처럼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서로가 서로를 자유롭게 하고, 타자를 통하여 내가 드러나는 공동체가 되었으리라. 지구상에 이런 곳이 실재하니 작은 티벳이라고 불리는 불교 공동체, 라다크이다. 히말라야의 혹독한 기후와 척박한 땅을 안고 사는 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종족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보다도 행복하였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들은 불법의 가르침에 따라 물질의 풍요보다 마음의 평안을 더 소중히 여긴다. 그들은 공의 철학에 따라 나를 비우니 탐욕과 어리석음과 분노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물과 사람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나와 너, 나와 세계, 인간과 자연을 서로 서로 연기된 것으로 여기니 그가 있어서 내가 있는 것이요, 깨달음과 자비심은 하나이다. “말을 1백 마리 가진 사람이라도 채찍 하나 때문에 다른 사람의 신세를 져야 할 때가 있다.”라는 이들의 속담처럼 이들은 상대방이 어린이든, 가난하고 굶주리는 사람들이든, 장애인이든 모두를 부처님과 같이 존귀한 존재로 보고 존중한다. 하기는, 땅 속의 지렁이도 소중한 생명체로 여겨 그를 피해 쟁기질을 하는 이들인데, 자신이 기른 가축을 죽일 때도 간절히 용서를 구하고 부처로 다시 태어나기를 기도하는 이들인데 사람에 대해선 오죽하겠는가? 서로가 서로를 완벽한 인격체로 대하니 이들에게 소외감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들은 개인의 이익이 전체 공동체의 이익과 맞서지 않는다. 가족과 이웃에서 다른 마을 사람과 낯선 사람에 이르기까지 라다크 사람들은 남을 돕는 것이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리라는 것을 안다. 농사일을 더불어 하며 사유재산도 함께 사용한다.

 

그들은 모든 사람과 짐승의 오줌과 똥을 비료와 연료로 쓸 정도로 낭비를 하지 않고 거의 완전에 가까운 재활용을 하며 자연과 철저히 공존하는 삶을 산다. 이들은 질병이 이해의 결핍에서 생긴다며 상대방을, 자기 앞의 세계를 늘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감싸려 하기에 스트레스는 없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열심히 일하면서 느슨하고 편안한 생활을 하기에, 일과 놀이를 구분하지 않고 언제나 노래를 부르며 일하기에 이들은 모두가 건강하다. 모두가 삶에 대해 충만한 행복감을 가지고 있으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늘 웃음을 띤다. 그러니 그들은 자신들을 16년간 관찰한 이방인 학자에게 묻는다. “모든 사람이 우리처럼 행복하지 않단 말입니까?” 그 이방인 학자, 노르베리 호지는 결론을 내린다. 협동과 공생과 자연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항상 웃음과 행복으로 가득한 라다크야말로 서구 산업사회가 지향해야 할 사회, ‘오래된 미래’라고.

 

라다크는 홀로 존재할 때 완벽한 공동체였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라다크에 마저 침투하여 라다크를 서서히 해체하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대응 없이 어떤 공동체도 환상에 지나지 않음을 의미한다. 밖이 자신에 대한 집착과 욕망으로 불타는 자본주의 사회인데 자신의 공동체만은 이에서 떠나 고고한 성을 유지하는 것은 그 공동체를 신비적 종교의 성채로 유지하자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실제로 자본주의의 침투 속에서도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으나 자본주의 사회와 전혀 교류가 없는 공동체들을 보면 대개가 사이비 종교, 혹은 교조적 광신적 종교집단의 공동체이다. 다른 사회나 집단과 소통하지 못하는 공동체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자본주의를 뒤엎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19세기식 혁명은 가능하지 않다. 자본주의를 그리 만만하게 보았는가? 그럼 어떻게?

 

미시적으로는 우선 자본주의의 모순을 철저히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본주의가 소련을 해체시키고 거의 전 세계를 점령하고 승리를 선언한 상황에서 이를 비판하기는 쉽지 않다. 대다수 사람들이 이 체제의 모순을 모른 채 욕망의 흐름대로 흘러가고 있다. 어느 정도 아는 자들조차도 그 정도 문제는 다른 장점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 한다. 모순에 대한 인식이 없이 모순의 극복은 없다.

 

빠름에서 느림으로, 채워짐에서 비워짐으로, 욕망을 향해 달리는 삶에서 조절하는 삶으로 우리의 삶의 양식을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욕망은 신기루이다. 이르려고 하면 할수록 욕망의 완성에서 멀어진다. 하지만 사람들은 욕망을 향하여 질주한다. 아직 1년에만 4백만 이상의 어린이가 굶어죽는 땅에서 한껏 먹고 욕망의 포화상태에 이른 현대인들은 각종 성인병, 현대병에 시달리면서 다이어트를 하느라 뼈를 깎는 고통을 겪음은 물론이거니와 이 비용으로 한국에서만 2조원의 막대한 대가를 지불한다. 이는 이 사회가 왜 건강하지 못하며 모순과 부조리에 차 있는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포만감에 이르기 전에 숟가락을 놓아야 자신의 체중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한국인들은 굶주리는 상황에서도 나무 우듬치에 연 과일을 까치밥으로 남겨 놓았다. 이 나무, 저 나무의 까치밥을 따먹을 때 까치는 반가운 손님이 오심을 제일 먼저 알리는 익조였고 길조였다. 그러나 농약을 뿌려 까치의 먹이가 되는 벌레가 사라지고 까치밥 또한 없애면서 까치는 가장 단맛 나는 과일만 골라 해를 입히는 해조로 변하였다. 욕망은 영원히 누구도 달성할 수 없으며 욕망을 채우는 것이 행복이 아니다. 결혼 기념일이라고 특급 호텔에서 캐비어를 먹는 것보다 뒷산의 약수터로 걸어가 노인들과 싸간 김밥을 나누며 더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욕망을 채우려는 것보다 욕망을 조절하는 것이, 타인을 위하여 욕망의 여분을 남겨두는 삶이 행복한 삶일 수 있음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체득하게 한다면 우리의 삶은 많이 변화하지 않을까? 패스트후드 대신 곰삭인 음식을 대화를 하며 천천히 먹고 사랑하는 이들과 산책을 하며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삶을 하루하루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많이 달라지지 않을까?

 

자본주의를 강화하는 이미지와 상징을 벗어나고 이에 대항하는 이미지와 상징들을 만들어야 한다. 지펠 냉장고 광고를 보자. 한 여인이 고급 냉장고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남편을 기다리면서 퐁듀 요리를 한다. 이내 남편이 들어오고 남편의 품에 안겨 여인은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이 광고는 말한다. 지펠 냉장고를 살 수 있는 사람만이 중산층의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이 광고에 조작 당한 대중들은 얼마 쓰지 않은 냉장고를 버리고 지펠을 경쟁적으로 사들인다. 이처럼 자본주의 체제는 여러 이미지와 상징을 만들고 이들은 대중들에게 과잉 소비를 부추긴다. 그리하여 확대 재생산해야만 자본주의를 번성시키고 자본가를 살찌운다.

 

지배체제가 양산하는 수많은 담론들에 맞서서 그에 담긴 이데올로기를 분석하고 ‘다시쓰기’를 감행하여 조작 당하는 대상에서 읽고 쓰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주체로 거듭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왜 수많은 우화 가운데 이솝우화가, 이솝우화 중에서도 왜 유독 <토끼와 거북이> 우화가 어린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아는 지배적 담론이 되었을까?

 

초등학교 3,4 학년을 데리고 실험을 하였다. <토끼와 거북이> 우화를 읽고 거기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어린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을 향하여 말했다. “얘들아, 토끼와 거북이 우화를 잘 읽으면 거기에서 잘못을 찾을 수 있을 게다. 그것을 한번 찾아보아라.” 아이들은 처음엔 어리둥절하더니 이내 “산에 사는 토끼가 물에 사는 거북이와 느닷없이 만나는 것은 이상하다.”에서부터 “토끼가 잠을 자는 새에 거북이가 달려가 일등을 한 것은 비겁하다.”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적이 나왔다. 그것을 발표를 시킨 다음 다시 아이들을 향하여 말하였다. “자, 발표 잘 들었지? 어느 것은 여러분이 옳다고 생각할 것이고 어느 것은 그르다고 생각할 것이다. 자. 이번엔 너희들이 이솝이라고 생각하고 잘못을 고쳐 토끼와 거북이를 다시 쓰지 않겠니?”

 

아이들은 금세 눈을 반짝이며 신이 나서 썼고 그 이상으로 신명나게 발표를 하였다. 이 중 가장 많은 이야기가 거북이가 토끼를 깨우고 토끼는 이에 감동을 하여 같이 어깨동무를 하고 들어가는 것으로 고친 이야기였다. 그 전의 <토끼와 거북이>가 경쟁심을 부추기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품고 있는 담론이었다면 후자는 이와는 정반대로 그런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부정하는 담론이다. <토끼와 거북이>를 어깨동무하고 가는 것으로 결말을 바꾸었거나 그런 이야기를 들은 어린이가 세상을 보는 눈은 엄청 다르리라고 본다. bagaup이라는 시민단체는 말보로 광고에 낙서를 하여 그 광고 텍스트에 숨어있는 이데올로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하였다. 이 운동으로 미국의 모든 출판물은 담배 광고를 싣지 못하게 되었다.

 

이처럼 다시쓰기는 텍스트를 단순히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의 신화에 조작되던 대상이 주체로 서서 세계를 다시 구성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쓰기를 포함하는 읽기를 수행하여야 한다. 그럴 때 텍스트의 의미는 맑고 환한 별로 반짝인다.

 

더불어 10여 년 써서 낡았지만 사연과 추억이 있는 내 만년필을 수십만 원 짜리 만년필과 바꾸지 않듯 사용가치가 교환가치보다 더 중요한 영역을 늘리는 것도, 더 나아가 사용가치보다 존재가치를 중요시하는 것도 대안일 것이다. 물화를 극복하고 모든 것을 교환가치보다 사용가치로 바라보며 내가 먼저 인간이 되어 다른 이들을 참다운 인간으로 대하는 것도, 그런 이들과의 만남과 연대를 늘리는 것, 연기의 원리에 따라 구체적인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도 좋은 방안이다. 이렇게 자본주의 체제 내부에 자본주의 원리와 다른 영역을 야금야금 만들다 보면 자본주의는 안으로부터 해체될 수도 있다.

 

‘나무전략’, ‘기생전략’, ‘잉크전략’ 또한 하나의 대안이다. 나무 전략이란 큰 나무 옆에 아무리 조그만 나무라도 다른 나무가 자라 햇빛을 막고 영양분을 빼앗아간다면 큰 나무가 언제인가는 새로운 나무에 자리를 내주어 숲이 침엽수림에서 활엽수림으로 바뀌듯 구조 밖에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 구조를 교체하는 것이다. 기생전략이란 나무 안에 들어가 나무를 안으로부터 썩게 하는 것이다. 잉크전략이란 잉크처럼 스며들어 안으로부터 색깔을 바꾸는 것이다. 학교로 예를 들면 이곳저곳에 대안의 학교를 만들어 기존의 학교들이 창의성과 다양성의 보장과 연기적 사고를 하게 하고 민주주의와 생태적 가치, 인간적 가치들을 지향하는 교육장으로 변하게 하는 것이 나무 전략이다. 진보적 선생들이 교육부와 학교로 들어가 선생들을 변하게 하고 학생들에게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라면 교과서, 커리큘럼을 바꾸고 나중에는 학교 자체를 변하게 하는 것이 기생전략이다.

 

그러나 인드라망의 <귀농,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기획>에서 성여경 사무처장이 털어놓은 것처럼 농사를 지어서 연봉이 300여만 원밖에 안되고 문화시설이나 교육시설은 전무하다고 하면 사람들은 귀농 학교를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신념이 강한 몇몇이 아니라 수많은 대중들을 끌어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기심과 욕망이 본질인 인간에게 그것을 없애버리고 공동체로 오라고 하는 것은 신이 나서 장관 자리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 대뜸 모두 부질없는 짓이니 스님이 되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기심과 욕망을 발현할 장을 마련하는 한편 이를 공동체의 테두리 안에서 융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화쟁의 진속불이 패러다임 속에서 다산 정약용이 제시한 閭田制를 응용하여 사회주의의 집단농장과 자본주의의 기업의 장점을 조화시킬 수 있다. 다산은 사회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를 내다보고 여전제를 대안으로 내세운다. 그는 촌락의 공동경작과 노력보수제를 조화시킨다. 그가 <田論> 7장에서 밝힌 대로, “노력의 많고 적음에 따라 분배의 후하고 박함이 결정되므로 농부는 힘을 다하고, 田地는 地利를 다하게 될 것이요 地利를 잘 이용하면 民山이 富饒하고 민산이 부요하면 風俗이 淳厚하고 풍속이 순후하면 백성이 孝悌를 행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전법은 田制의 上策이다.”

 

그전에 고무신을 1만 켤레 생산하는 공장이 1만 켤레를 공동 생산하고 분배하여 소련과 같은 문제를 야기한 것이다. 그러나 여전제는 그 중 5천 켤레는 공동의 몫으로 하여 공동의 가치를 추구하게 하고 그 중 3천 켤레는 개인의 능력별로 나누어주어 개인의 창의력과 능력에 따른 보상을 하여 그들의 활기찬 참여를 이끈다. 나머지 2천 켤레는 자신의 노동이 타인을 자유롭게 하였다는 것을 구체화할 수 있도록 그 공동체와 연관이 있는 주변의 장애인이나 양로원 등에 보낸다. 물론 구성원간 상호주체성을 높이기 위하여 노동의 목적과 방법에서부터 분할 비율에 이르기까지 전체 과정을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여 자유토론으로 정한다. 외적으로는 不一不二의 패러다임을 따라 공동체와 다른 집단을 네트워킹하고 내적으로는 眞俗不二의 원리에 따라 구성원간 상호주체성과 상보성을 높이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공동체 안에서 화쟁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서로가 서로를 보듬으려 한다면,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 구분 없이 나 아닌 다른 이를 자유롭게 할 때 내가 진정 해방되고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실천한다면, 세상의 삼라만상과 내가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보아 생산에서 소비체제에 이르기까지 순환의 원리를 적용한다면, 가진 자 못 가진 자 없이, 환경파괴 없이 깊은 연대와 사랑 속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제6강: 이성의 도구화와 언어와 진리의 불확정성

 

이성은 해방의 빛인가, 굴레인가: 포스트모더니즘 對 因言遣言

 

현대화가 이루어질수록 이성은 더욱 도구화한다

 

얼마 전에 한 아이의 부모가 세상 사람들을 안타깝게 한 적이 있다. 그들은 병원에 가서 간단한 수술만 하면 살릴 수 있는 아이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부족하여 그런 것이라며 병원을 거부하고 기도만 하였다. 중세 말기 유럽에서도 그랬다. 두통이 심한 환자가 찾아가면 신부는 악마가 깃들어서 그렇다며 악마를 쫓는다는 구실로 정으로 머리에 구멍을 뚫어주었고 환자는 당연히 죽음을 맞았다. 2천 5백만 명이 페스트로 죽어갔다. 온 유럽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고 시체 썩는 냄새가 마을을 뒤덮었다. 자고 나면 여기저기서 통곡의 소리가 들렸다. 성직자들은 기도가 부족하다며 대중들을 교회로 내몰아 페스트가 더 빨리 번지게 하였고 가난한 농부들에게 싼 면죄부를 사서 병이 걸린 것이라며 더 비싼 면죄부를 살 것을 강권하였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이다.”란 <<성경>>의 말씀대로 전지전능한 신, 신의 대리자인 교황만이 모든 진리와 허위를 가리는 유일한 준거였다. 아무리 신앙심이 강한 신부라도 교황청에서 파견한 심판관이 이단이라고 결정하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아온 처녀라도 마녀라고 심판을 내리면 화형을 당해야 하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페스트에서 인류를 구원한 것은 기도가 아니라 이성이었다. 시체를 불에 태우고 시체를 만진 사람들의 손을 알코올로 소독한 곳에서는 더 이상 페스트가 번지지 않았다. 이처럼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였으며 이 이성으로 허위와 진리를 판단할 수 있고 궁극적 진리, 혹은 이데아에 이를 수 있다. 이런 인식에 이르자 인간은 신의 종속에서 벗어나서 그 스스로 세계를 바라보고 그가 주체가 되어 세계에 대응하였고 그의 뜻에 따라 세계를 새로이 구성하였다. 중세가 마감하고 현대가 열린 것이다. 수억의 인류가 60억으로 급팽창하여 먹고 살 수 있도록 생산의 대혁신이 일어난 것, 5%의 귀족만이 아니라 대다수 대중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문화를 향유하며 자유를 누리게 한 것, 악마가 부리던 마술을 퇴치하여 대다수 질병을 정복하고 평균수명을 두 배로 늘린 것, 그것이 바로 ‘이성의 힘’이다.

 

이처럼 세상이 암흑과 무지몽매함 속에 빠져 있을 때 이성은 계몽의 빛이자 해방의 빛이었다. 과거만이 아니다. 아직도 무지몽매함이 지배하는 장에서 이성은 계몽의 힘을 갖는다. 수백 만원을 받고 푸닥거리를 하는 무당에게 바이러스를 죽이는 약을 먹이면 간단히 병이 낫는다고 깨우칠 때, 더 악랄한 고문을 해야 비밀이 나올 것이라는 고문 경관에게 그래서 터져 나올 말 몇 마디보다도 더 소중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며 진실은 뼈와 살 속에 들어있지 않다고 설득할 때, 수만 명을 학살하고 권력을 잡고자 하는 위정자에 맞서서 자유와 인권의 이름으로 항의하고 설사 권력의 정점에 오른다 해도 정당성을 갖지 못하기에 곧 무너질 것이라고 직언을 할 때, 이성은 정녕 빛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한 편에서 이성은 도구화하고 있다. 지배자가 국민을 더욱 조작하고 통제하는 정책을 취하면서 국가 전체의 효율적 발전이란 이름을 빌어 합리성을 가장할 때, 오로지 가장 빠른 시간 내에 가장 적은 원료와 인력을 투입하여 가장 많은 생산을 이루고자 노동자들의 작업리듬, 동선, 심리 등을 정확히 계산한 시스템을 운영하여 노동자들의 자율성과 연대를 깨고 그들을 스스로 복종하는 기계 부속품으로 삼을 때, 소비자들의 욕망과 무의식을 고도로 헤아려 그들을 유혹하는 이미지와 상징들로 과잉 소비를 이끌어 낼 때,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자연과 인간을 다같이 파괴하는 복제인간, 유전자 조작식품, 전자감시 시스템을 등을 만들 때 이성은 더 이상 계몽의 빛이 아니다. 인간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현대성이 강화하면 할수록,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이성의 도구화 또한 더 심화한다는 것이다.

 

이성에 대한 회의는 이것만이 아니다. 이성은 더 이상 궁극적 진리를 밝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성을 통하여 유리알처럼 명징하게 진리에 이를 수 있는가? 이성으로 인식하였으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니지 않은가? 진리는 이성과 언어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이것이 진리인지 저것이 진리인지 확정할 수 없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

 

오랜 동안 인류는 언어기호를 통하여 세계, 궁극적 진리를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비트겐슈타인(ludwig j. wittgenstein, 1889-1951: 오스트리아의 철학자)도 처음에는 자동차와 도로 모형으로 어제 일어난 사건을 그대로 재현하듯 언어기호로 진리를 그대로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림이론’을 폈었다. 그러나 그는 언어로는 그럴 수 없음을 깨닫고 “말로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라고 말하였다. 칸트든, 마르크스든, 하이데거든 언어기호를 통하여 궁극적 진리를 표상할 수 있다고 인식하였으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언어의 확정성, 고정성과 동일성에 대하여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왜 언어기호로는 궁극적 진리를 드러낼 수 없을까?

 

다음과 같은 기호의 삼각형을 생각해보자.

 

언어기호(빨강)

세계(무지개 중 첫째 빛) △ 해석소(붉은 색, 열정, 공산당)

세계에 대해 인간은 어떻게 언어기호를 부여하는가? 인간은 세계를 그대로는 이해할 수 없기에 이를 범주화한다. 우주 삼라만상은 무한하다. 무한하기에 그대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 인간은 언어공동체에 따라, 이들의 생활과 문화에 따라 이를 가르고 이에 대해 무엇, 무엇이라 명명한다. 그래야 세계를 구분할 수 있고 그것을 타인에게 전달하며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봄에 산에 오르면 산의 풀들은 나에게 혼돈(chaos)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것은 취나물이고, 이것은 얼레지라고, 취 중에서도 요것은 개미취요, 조것은 참취며 이것은 곰취고 저것은 미역취라고 가르쳐 주신다. 그러나 나의 눈에는 다 비슷한 풀일 뿐이다. 나에게는 온통 혼돈이지만 어머니는 그 풀을 이파리 모양과 빛깔, 줄기의 생김 등에 따라 취, 얼레지, 질경이 등으로 가르고, 다시 이것은 날로 먹으며 저것은 못 먹는다고 구분한다. 이렇듯 원래 풀은 하나이지만 우리가 허상이나마 인간의 틀로 범주를 만들어 코스모스(cosmos)로 바꾸어야 세계를 이해할 수 있고 전달할 수 있으며 이용할 수 있다.

 

무지개가 빨, 주, 노, 초, 파, 남, 보 일곱 가지 색인가? 실제의 색은 무한하다. 무지개를 자세히 보면 빨강과 주황 사이에도 무한대의 색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리 하면 색에 대해 알 수도, 전달할 수도 없으니 이를 분별하여 무엇이라 명명한다. 그러니 빨강과 주황만의 언어를 갖고 있는 언어공동체는 그 사이의 색을 보지 못한다. 유럽 사람들도 근세 초까지 무지개를 네 가지나 다섯 가지로 보았다. 주황이란 언어가 없으니 빨강과 주황을 같이 본 것이다. 멀쩡한 주황을 빨강이라 하면 이것은 허위이다. 그러면 주황을 주황이라 하는 것은 진실일까? 빨강과 주황을 더 자세하게 나누어 보는 자에게 빨강 다음의 색을 주황이라 하는 것은 허위이다. 범주를 세분하여 빨강을 ‘진한 빨강, 아주 진한 빨강, 극도로 진한 빨강’ 등으로 만 가지, 억 가지로 나눈다 해도 그것은 실제의 색에 이를 수 없다. 이처럼 세계는 무한대인데 사람이 편의를 따라 나누었을 뿐이다. 아무리 언어기호를 발전시켜 범주를 세분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세계 그 자체를 드러내주지 못한다. 그러니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늘 도가 아니며 이름 부를 수 있는 이름은 항상 이름이 아니다)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이요, 말로 할 수 있다면 이미 그것은 眞如實體가 아닌 것이다. 분별심으로는 진여 실체에 이를 수 없다.

 

그 다음 빨강을 보고 ‘붉은 색, 열정, 공산당’으로 해석하는 면을 살펴보자.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 1857-1913: 스위스의 언어학자)는 언어기호가 씨니피앙(signifiant)과 씨니피에(signifié)의 결합체임을 밝힌다. “나무”라는 언어기호를 예로 들어 보자. “[namu]”라는 소리를 귀를 통하여 들을 때 이 소리는 귀를 지나 뇌로 와서는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이라는 개념을 떠올린다. 마찬가지로 “사람”이라는 기호가 있을 때 “[saram]”이라는 청각적 이미지는 인간의 머리 속에서 “이성을 가진 만물의 영장”이라는 개념을 떠올린다. 이처럼 언어기호에서 청각 영상(acoustic image)의 면을 씨니피앙이라 하고 언어기호에서 개념(concept)의 면을 씨니피에라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기호가 씨니피앙과 씨니피에를 발생시키며 작용하는 것, 또는 씨니피앙과 씨니피에를 결합하여 의미를 산출하는 것을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고 한다.

 

씨니피앙과 씨니피에의 의미는 소쉬르 이후 의미망이 확대된다. 씨니피앙은 의미의 전달, 또는 운반체[sign vehicle]를 뜻하고 씨니피에는 기호 속에 담겨 있는 추상적 개념, 의미의 운반체에 담겨있는 내용, 메시지를 뜻한다. 예를 들어 철수가 순희에게 장미 꽃 한 다발을 전달하였을 때 순희가 이 꽃을 보고 “철수가 나를 원수처럼 여기는구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철수가 나를 좋아한다.”라든가 “철수가 내 생일을 축하해 주는구나.”라고 생각한다. 장미 꽃 한 다발이 씨니피앙이라면 그 꽃을 받고 “철수가 나를 좋아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씨니피에이다. 佛像이 씨니피앙이라면 이를 보고 떠올리는 佛法은 씨니피에이다.

 

그럼 씨니피앙과 씨니피에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소쉬르는 이에 대하여 자의성과 필연성, 선조성으로 설명하며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 등은 부재성과 산종성을 지적한다. 恣意性(arbitrariness)이란 씨니피앙과 씨니피에간에 필연성이 없음을 뜻한다. 소쉬르 이전의 서양의 철학, 언어학은 언어기호와 사물이 서로 필연적인 것으로, 세계가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나무”가 “나무”인 것은 광합성 작용을 한다든지, 탄소동화작용을 한다든지, 목질의 줄기를 가졌다든지 하는 나무의 본질이나 현상이라 할 만한 것과 관계를 갖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차다”라는 말은 우리가 손을 얼음물에 넣어 손이 시린 느낌과 관계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나무”는 나무 안에 없다. 이는 “풀”과의 차이와 관계를 통하여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차다”라는 말은 “뜨겁다”라는 말과의 차이와 관계를 통하여 “뜨겁다”의 반대 의미를 갖는다. 이처럼 사물 자체가 갖고 있는 실체와 사물의 기호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나무”를 무엇이라 부르든 같은 사물을 지시하며 언어공동체의 약속에 의한 것일 뿐이다. 실제로 나라마다 사물에 대한 기호가 각기 달라 “나무”를 “tree”, “arbre”, “木[mu]” 등 여러 기호로 부르더라도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을 나타내는 것은 동일하다. ‘불, 뿔, 풀’이 음운의 차이로 의미가 갈리고 다른 낱말이 되듯, “언어에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saussure) “이러한 차이들은 이 자체가 실체가 아니라 구조 자체가 만들어내는 효과다.”(derrida) 이렇게 언어는 실체를 가지지 않고 다른 것과의 차이, 관계, 구조를 통하여 의미를 드러내니 언어 자체가 空한 것이다.

 

부재성이란, 기호는 物 自體를 지시하지만 동시에 물 자체를 대체하여 물 자체의 부재를 입증한다는 것이다. 기호는 사물을 대치하여 사물의 자리를 차지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내가 강아지를 학생들에게 설명하기 위하여 매번 강아지를 들고 강의실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 그러나 강아지라는 사물 대신 “강아지”라는 기호를 쓰면 “강아지”는 없다. “강아지”라는 개념만 학생들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이다. 기호는 사물을 대치하는 동시에 사물의 부재를 입증하는 것이다.

 

散種性이란 씨니피앙과 씨니피에는 소쉬르가 본 것처럼 1:1로 대응하지 않으며, 의미는 기호에서 직접적으로 現前(presentation)하지 않고 씨를 뿌리듯 흩어져 있음을 뜻한다. ‘빨강’이 ‘열정’이나 ‘공산당’을 의미하듯, ‘나무’의 의미는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이라고 규정되지 않는다. 이는 자유연상에 의하여 ‘푸르른 이상, 하늘과 땅의 중개자, 자연, 부드러움’ 등으로 의미망을 넓히고 나무를 정의한 글 속의 ‘목질, 줄기, 가지다, 다년생, 식물’의 씨니피에 또한 맥락에 따라 씨니피앙의 사슬 속으로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의미를 延期한다. ‘나무’가 ‘풀’과 대비시키면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이라는 의미를 갖지만 ‘쇠’와 대비하면 ‘자연, 목질의 부드러움’ 등의 의미를 갖는다. 내가 “강아지”라는 사물을 들고 강의실에 나타났다면 거기에는 오로지 한 마리의 강아지만 있게 된다. 그러나 내가 “강아지”라고 말로 하면 어떤 학생은 삽사리를, 어떤 학생은 푸들을, 어떤 학생은 진돗개를, 어떤 학생은 치와와를 연상하는 등 다양한 강아지를 연상한다. “너희들은 강아지야.”라고 말하였다면 어떤 학생은 “선생님이 우리가 강아지처럼 귀엽다고 말씀하시는구나.”, 어떤 학생은 “선생님이 우리들이 강아지처럼 망나니라고 말씀하시는구나.”, 또 어떤 학생은 “선생님이 우리들을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어린아이로 생각하는구나” 식으로 다양하게 의미를 파악할 것이다.

 

“나는 최진실을 좋아한다.”라는 문장이 있다고 치자. 왜 하필 최진실일까? 이 문장에서 ‘최진실’의 가치는 ‘고소영’, ‘이영애’, ‘김혜수’ 등 이 문장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되살려 비교할 때 비로소 드러난다. 고소영과 비교하여 서구적 미인보다는 한국적 미인이기에, 심은하라 하지 않은 것은 미모가 아름다운 여인보다는 귀엽게 생긴 용모를 좋아하기에, 김혜수 대신 최진실을 선택한 것은 글래머보다 호리호리한 여자를 좋아하기에 최진실을 좋아한 것이란 구체적 사실들이 드러난다. 이렇듯 현전한 최진실의 가치는 부재한 고소영, 이영애, 김혜수 등을 되살릴 때 비로소 드러나며 부재한 것은 김희선, 이승연, 전지현 등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므로 최진실의 의미와 가치는 확정되지 않는다. 이렇듯 기호에는 그 기호가 그것이 되기 위하여 배척했던 다른 낱말의 흔적이 깃들어 있다. 기호의 구조는 영원히 不在한 他者의 흔적에 의해서 나타나며 의미는 現前과 不在와의 끊임없는 교차를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다. 의미는 어떤 하나의 기호에 의하여 완전히 현전되는 것이라기보다는 현전과 부재간의 일종의 끊임없는 교차라고 할 수 있다.

 

또 의미는 맥락(context)에 따라 달라진다. “달을 그렸다.”라는 간단한 문장의 의미 또한 미술시간이란 맥락에서는 “지구의 위성을 그림으로 그렸다.”이지만, 언덕 위에서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에게는 “남편을 그리워하였다.”의 뜻이다. 한 어린이가 산수 시험을 보고 와서 몇 점을 맞았느냐는 어머니의 질문에 그리 답하였다면 “산수시험에서 0점을 맞았다.”는 의미이며, 화투를 치는 사람이 그리 대답하였다면 “8광 패를 들었다.”이다. 이처럼 같은 낱말, 같은 문장, 같은 텍스트도 맥락에 따라 의미를 달리 한다.

데리다는 언어기호와 진리가 차연(差延)이라고 말한다. 차연(différance)이란 이 철학자가 만든 단어이다. 불어에서 “différer”란 동사의 뜻은 “차이가 나다”와 “연기가 되다” 뜻을 지니나 그 명사형인 “différence”는 “차이”의 뜻만 가지므로 ‘e’자를 ‘a’로 대치해서 “différance”란 낱말을 만들었다. ‘나무’가 스스로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라 ‘풀’과의 차이를 통하여 의미를 가지듯 세계는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 차이의 체계일 뿐이다. 그리고 나무의 의미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자연, 신과 인간의 중개자’ 등으로 의미를 끊임없이 연기한다. 또 ‘나무’를 ‘쇠’와 대비시키면 이의 의미는 ‘자연, 부드러움’ 등의 뜻을 드러내는 것처럼 한 기호에는 배척하였던 다른 낱말의 의미가 흔적으로 남아있어 서로 ‘대리보충’의 관계를 갖는다. 그러니 기호의 의미, 텍스트의 의미, 궁극적 진리는 동일한 것도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듯 “언어기호는 공간화에 따라 차이가 나고 시간에 따라 지연되어 무의미를 생성하기에, 세계는 差延이 드러난 것, 차연의 체계 속에 쓰여져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derrida) 세계가 차연이고 언어기호의 진정한 속성 또한 이럴진대 사람들은 언어기호에 고정성과 동일성을 부여하려고 한다. 고정되고 동일하지 않은 세계를 고정되고 동일한 언어기호로 표현하려 하니 그것 자체가 왜곡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차연의 개념은 노장사상의 ‘도(道)’, 불교의 眞如實體, 원효의 一心과 통한다.

 

석가모니께서는 왜 수많은 군중 앞에서 말씀을 안 하시고 꽃만 들었다 놓았다 하셨는가? 내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합니다.”라고 말을 못한다.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100이라면 아무리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장문의 연서를 쓴다 해도 거기에 표현된 사랑은 7, 80밖에 되지 않는다. 사랑한다 말을 하면 할수록 답답하고 사랑은 저 멀리 달아난 느낌일 것이다. 너무도 아름다운 자연을 대하였을 때 가장 정확한 표현은 “아!”이다. 어떤 낱말을 골라 시적 문구를 써도 그 아름다움에 이를 수 없다.

 

인간은 언어기호에 의하여 세계를 들여다보고 표상하며 전달할 수밖에 없는데 언어기호란 비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원효의 표현대로 자성(自性)이 없이 한갓 가명에 지나지 않아 참 지혜와는 떨어져 있다. 진리란 우리가 환상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환상이다. 그러니 진리의 본체란 근본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오히려 차연에 대한 인식이, 不立文字를 선언함이 진리의 본체를 드러내는 바이다.

어떤 뗏목이 저 언덕에 이르게 할 것인가.

 

모든 법의 진실한 뜻은 일체의 언설을 끊은 것이니, 이제 부처님의 설법이 만약 문자와 언어만이라면 곧 진실한 뜻이 없을 것이요, 만약 진실한 뜻이 있다면 마땅히 문자와 언어가 아닐 것이니, 이런 까닭에 ‘어떻게 설법하십니까?’라고 물은 것이다.(<<金剛三昧經論>>, <眞性空品>, <<韓國佛敎全書>>, 제1책, 653-上: “諸法實義 絶諸言說 今佛說法 若是文言 卽無實義 若有實義 應非文言 是故問言 云何說法”)

 

이처럼 세계의 궁극적 실체는 不可言說이고 離言絶慮이며 不可思議하다. 그러면 불가사의한 참에 어떻게 이를 것인가. 답은 言語道斷을 선언하고 ‘拈華示衆의 微笑’처럼 언어기호를 넘어서서 禪定을 행하는 것이다. 선의 통찰이 아니고서 우리는 어떻게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 것인가?

 

석가모니처럼, 내가 진정 깨달은 것을 말로 하면 왜곡이라는 생각에 강의실에 들어가서 서너 시간 동안 입을 꾹 다물고 하늘만 쳐다보다 나온다면 학생들은 “선생님! 오늘 깨달음이 많았습니다.”라고 인사할 것인가? 한 두 학생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학생은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나의 의무는 강의실에 모인 모든 학생들을 깨우치게 하는 데 있다. 언어 저 너머에 진리가 있음을 알고도 매일 목청이 아프도록 소리를 높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離言絶慮인 줄 알면서도 인간이 진리를 전달하는 보편적인 방법은 언어기호를 이용하는 것이다.

 

혹자는 원효의 화쟁의 본질을 “眞如實相이 언어 저 너머의 있는 것인 줄 알면서도 因言遣言하였다는 것”라고 지적하는 데 이는 화쟁도, 불교도 정확히 모른 데서 기인한 소치이다. 因言遣言은 불교철학에서는 공유된 상식이고 다른 철학에서도 종종 논의되는 바다. 비트겐슈타인도 “지붕(세계의 실체)으로 올라간 뒤에는 사다리(언어)를 던져 버려야 한다.”라 했다. 莊子도 『莊子』 「外物」 편에서 “물고기를 잡은 뒤에는 통발을 버려야 한다. 우리 인간의 말이라는 것은 뜻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그 뜻을 잡으면 말은 버려야 한다”라고 하였다. <<金剛經>> <正信希有分>에서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려라”란 뜻으로 “‘너희 비구들아 나의 설법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아는 자들은 법조차 마땅히 버려야 하거늘 어찌 하물며 법이 아닌 것조차 버리지 못하는가?”(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라고 말한 것도 같은 뜻이다. 여러 성인과 현인들이 궁극적 진리가 언어 저 너머(지붕, 언덕 저 편, 물고기)에 있으면서도 인간이 이를 전달하는 것은 언어(사다리, 뗏목, 통발)밖에 없음을, 대신 언어를 방편으로 이용하여 궁극적 진리에 이른 다음에는 언어를 버리고 세계의 실체를 대할 것을 천명하였던 것이다.

 

<<금강경>>의 관련기록에 대해 선사들은 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圭峰 宗蜜은 “……뗏목의 비유는 말을 빌려서 뜻을 나타냄이니 응당히 말과 같이 뜻도 집착하지 말지니라……”라고 풀이한다. 六祖 慧能은 “法이란 반야바라밀법이요, 非法이란 하늘 따위에 태어나는 법이라. 반야바라밀법은 능히 일체 중생이 生死大海를 건너가게 하는 것이니, 이미 건너가서는 오히려 응당 머물지 말 것이거든 어찌 하늘 등에 나는 법에 즐거이 집착하겠는가.”라고 풀이한다. 豫章 宗鏡 또한 “사람도 空하고 法도 空하니 眞性이 본래 평등하도다. 설사 名과 相이 쌍으로 없어지고 취하고 버림을 둘 다 잊는다 해도 오히려 뗏목으로 남아 있느니라. 손가락을 튕기는 사이에 이미 生死海를 뛰어넘으니 어찌 모름지기 다시 사람 건너는 배를 찾으리오”라고 해석한다. 雙林 傅大士는 我相에 대한 집착과 有無의 二邊을 떠난 깨달음을 취하는 것으로 해석하였으며, 冶父 道川은 “만약 문자에 집착하면 줄기만 보고 근원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요, 문자를 버리면 근원만 보게 되어 줄기를 찾지 못하게 되니 근원과 줄기를 함께 잃지 말아야 바야흐로 法性海에 들어가느니라.”라고 해석한다.

 

선학의 입장에서 해석하면 각 선사들의 해석은 그야말로 선의 혜안일 터이다. 그러나 언어학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의 해석은 옳은 것도 있고 그른 것도 있다. 혜능과 종경은 진여실체와 언어와의 관계를 다룬 이 대목을 생사대해를 건너는 것으로 파악하여 터무니없는 해석을 가하였다. 我相의 집착이나 有無의 二變을 떠나는 것이라는 부대사의 풀이는 耳懸鈴鼻懸鈴식으로 유추 해석이 가능한 것이어서 꼭 틀린다 할 수 없으나 핵심을 비켜가 ‘논점일탈의 오류’를 범한 것은 분명하다. 종밀, 그 중에서도 도천이 정확히 의미를 파악하고 있다. 언어학을 빌리니 어느 것이 현학적인 말장난이고 어느 것이 眞如實體에 대한 因言遣言의 표현인 지가 명쾌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원효 또한 “네가 취한 것과 같은 것은 오직 名言 뿐이므로 나는 언설에 기대어 絶言之法을 제시한다. 이것은 마치 손가락에 의해 손가락을 떠난 달을 가리키는 것과 같다."라고 지적한다. 이처럼 眞如(달)를 그 實相대로 언어기호(손가락)로 드러내는 것은 궁극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지시할 수는 있다. 존재를 실상으로 착각하는 중생들에게 그에 대한 깨달음을 일으키기 위해서 언어기호는 한 방편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의 의문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손가락을 통하여 달에 이르는가에 대한 것이다.

 

불가사의하다는 것은 부처님 말씀을 모두 이해하고 깊이 찬탄하는 말이다. 이 말 다음의 말들은 따로 이해하는 말로서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언어와 문구를 받아들이고 나중에 그 뜻과 이치를 헤아리는 것이다.(元曉, 『金剛三昧經論』, <本覺利品>, 『韓佛全』, 제1책, 636-下-637-上: “不可思議者 摠領歎深 下別領解 於中有二 先領言句 後領義理”

 

부처님의 말씀, 궁극적 진리는 너무도 깊어 우리의 이성이나 언어기호를 통하여 헤아릴 수 없기에 불가사의하다. 그러나 언어기호가 가진 지시적 의미를 받아들인 다음 이에서 머물지 않고 그 지시적 의미를 넘어서는 뜻을 헤아린다면 불가사의의 한 자락이라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원효는 先領言句 後領義理의 방법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義語非文’이라는 것은 말이 마땅히 진실한 뜻에 맞아 단지 공허하게 문자에 얽매인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文語非義’’라는 것은 말이 공허하게 문자에 얽매이기에 진실한 뜻과는 아무런 관련을 맺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부처님 말씀은 곧 뜻의 말이며, 뜻이 없는 범부의 말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元曉, 『金剛三昧經論』, <眞性空品>, 『韓佛全』, 제1책, 653-上: “義語非文者 語當實義故 非直空文故 文語非義者 語止空文故 不關實義故 …所以佛說 乃是義語 不同凡語之非義也”)

 

祖師禪에서 스승이 체험으로 보여준다 하더라도 제자는 일단 그것을 언어로 풀어 언어의 테두리 속에서 고민을 한 다음에서야 언어의 相을 넘어서서 견성체험을 한다. 看話禪은 언어로 된 텍스트를 바탕으로 한다. 그럼 언어기호가 眞如 實體에 대한 왜곡인데 언어를 통하여 이를 드러내고 전달해야 하는 역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어떤 뗏목을 써야 우리는 저 언덕 너머에 이를 수 있을까?

 

방법은 크게 보아 세 가지이다. 부처님과 가섭의 관계처럼 以心傳心을 통한 것이 하나요, 다른 하나는 因言遣言이요, 서양의 기호학자들이나 일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행한 것처럼 언어기호의 원리를 파악하여 텍스트를 해체하여 언어가 왜곡하고 있는 의미를 파헤치고 언어기호와 텍스트 너머의 ‘숨은 진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굳이 무리를 범하여 비유하면, 일자가 남종선[祖師禪], 이자가 북종선, 삼자가 불교 경전을 읽는 것과 통할 터이다.(여기서 언어와 분별을 넘어선 깨달음으로 화두를 내세우지만 화두 또한 언어기호로 만들어진 텍스트임을 상기하면 조사선 또한 전적으로 일자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 모든 스님이 단 한 번의 체험으로 頓悟할 수 있다면 굳이 話頭를 내세울 필요가 없다. 그러지 못하기에 화두를, 분별심을 타파하는 무기로 삼아 분별과 언어 저 너머의 깨달음에 이르려 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대중이 선을 행하고 깨달을 수 있다면, 언어기호로 불법을 알릴 까닭이 없다. 그것이 여의치 않기에 이와 같이 말로써 불법의 진리를 알리는 것이다.

 

들에 홀로 핀 들국화를 외롭다고 노래하는 것은 시가 아니다. 내가 어떤 여인으로부터 연애편지를 받았는데 그 편지에 “당신이 없는 세상은 오아시스 없는 사막이요, 금붕어 없는 어항이요, 팥 없는 찐빵이요” 식으로 쓰여 있는데 손을 부들부들 떨며 감동하여 그 여인을 만나러 달려가겠는가? 정반대일 것이다. 이 편지가 우리를 감동시키지 못하는 것은 ‘상투적’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文語’란, 일상언어의 속성에 집착해 낱말이나 문맥에 얽매이는 세속의 말, 상투적 의미로 언어기호를 이용하는 것을 뜻한다.

 

반면에 우리는 미당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를 읽고 왜 감동하는가? 그것은 미당이 무서리가 내린 뒤에 다른 식물은 파김치가 되어버리는데 오로지 국화만이 함초로이 아름답게 피어있는 모습을 보고 그처럼 인간 또한 좌절과 절망을 이기고 일어설 때 가장 아름답고 위대하다는 생각을 하여 이를 시로 형상화하였고, 우리는 이 시를 통해 국화의 숨은 세계-실존-을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당의 시를 방편으로 삼아 국화의 실상을 잠시나마 들여다 본 것이다. 이처럼 ‘義語’란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와 문맥을 넘어서서 세계의 실체를 파악해 드러내는 말을 이른다. 즉 문어는 세계를 왜곡하지만, 우리는 의어를 통해 세계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고, 또 이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달의 실체를 완전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달을 ‘지구의 위성’이라고 하는 데서 떠나 ‘관음보살’이나 ‘隱密顯了俱成門 ’이라 할 때 인간은 좀더 달의 실체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때문에 言語道斷과 不立文字로 언어기호의 空性을 부정만 할 것이 아니다. 언어기호가 세계의 실상 자체를 표현할 수는 없지만 중생이 세계의 실체에 다가갈 수 있도록, 더 정확히 말하여 중생이 존재를 세계 자체로 착각하고 있는 것을 깨우치도록 하는 방편은 될 수 있는 것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장대가 장애이지만 장대를 통하여 땅의 굴레를 넘어 잠시나마 비상할 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장대높이뛰기에서 장대를 이용하지 않으면 높이 뛰어오를 수 없지만, 장대를 놓아야만 하늘을 비상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하여 세계의 실체가 모두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세계는 드러내는 만큼 감추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앞에서 논한 대로 아무리 새로운 의미를 밝힌다 하더라도 언어기호로 말하는 순간 이는 세계를 왜곡시키게 되어 있다. 의어는 순간적으로 존재하며 아무리 실체를 밝힌 것이라 하더라도 곧 문어로 전락한다. 미당의 국화도 ‘실존’이라는 숨은 실체를 드러냈지만 이것도 “오아시스 없는 사막”처럼 곧 상투적 의미가 되어 국화의 다른 숨은 의미를 감춘다. 장대 높이뛰기를 하여 하늘에 오른 비상을 만끽하는 것은 잠시뿐, 설사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하더라도 우주에 다다를 수는 없다. 한번 하늘에 올랐다고, 세계신기록을 달성하였다고 눌러 앉아 있어야 하는가? 기록이 새로운 장애이듯, 깨달음이 곧 집착이 된다. 부브카가 혼자서 수십 차례 장대높이뛰기 세계신기록을 갈아치웠듯 끊임없이 화두를, 깨달음을 해체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리는 역사 안에서 진리이다

 

인류는 처음엔 원자를 둥근 것으로 알았다. 더 연구를 하면서 원자가 양성자, 중성자 등의 결합체임을 깨달았고 곧 이어 그 주위에 전자가 돌고 있음을 발견하였으며, 이제 쿼크와 같은 소립자가 더 발견되었다. 인류문명이 몇 억 년 더 지속되어 물리학이 계속 발전한다면 원자의 실체는 완전히 밝혀질까? 게놈프로젝트를 진행하여 유전자 지도를 완성하면 생명의 신비가 풀릴 줄 알았다. 그러나 인간과 같은 고등동물과 생쥐와 같은 하등 동물 사이에 유전자 차이는 별로 크지 않았다. 그럼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차이가 나게 만들었을까? 유전자 지도는 유전자의 相에 지나지 않았다. 유전자 하나가 여러 가지 기능을 하고 있었고 인간은 쥐에 비하여 고도의 복잡한 기능을 하는 유전자를 가졌던 것이다. 유전자공학은 유전자의 用을 밝혀야 하는 새로운 과제를 만난 것이다. 그 用을 다 밝힌다 해도 유전자의 體는 완전히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영원히 진리의 실체에 다다를 수 없다.

 

인간이 진리의 실체에 이를 수 없다면 인간은 무엇 때문에 살까? 허상을 실체로 착각하여 이데아를 추구한 데리다 이전의 후설, 하이데거, 사르트르, 마르크스 등은 모두 일거에 쓸어버려야 할 사상들인가? 삶의 목적은 완성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그를 향하여 나아가는 데 있다. 원자의 실체에 이를 수 없지만 연구를 진행시킬수록 우리가 점점 더 실체에 다가가는 것은 사실이다.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사랑하는 것이 아닌 줄 알면서도 필자는 아내에게 종종 사랑한다는 말을 한다. 그래야 아내는 사랑을 확인하고 기뻐하니까. 깨달은 자라 할지라도 항상 眞如門에 머물 수는 없다. 데리다라고 해서 안방에서조차 해체의 언어를 쓰는가?

 

진리는 역사 안에서 진리이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차이를 통하여 드러나기 때문에 아무 것도 확정할 수 없다면, 진리란 끝내 알 수 없는 것이라면, “지금 여기에서” 히틀러, 스탈린, 전체주의 등 악으로 규정되고 있는 것을 비판하고 저항할 수 있는 근거와 지표는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글턴은 “우리는 해체의 미궁 속으로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회의주의적 인식론에 빠지고 만다.”라며 포스트모더니즘의 불확실성에 대해서 비판한다.

 

그럼 대안은 무엇일까? 달의 의미는 “엄마얼굴, 조화, 쪽배, 관음보살……” 등으로 끊임없이 이어진다. 버스를 타고 지나면서 간판에서 ‘달’이라는 낱말을 발견하고 그 의미를 확정할 수 없다며 계속 물음표로 놓아두어야 하는가? 지금 마주친 현실에서 그 가운데 몇몇으로 울타리를 쳐야 할 것이다. “언어를 우리가 행하는 것으로서, 우리의 실천적인 삶의 형식들과 뗄 수 없이 얽혀있는 것으로서 생각한다면, 의미를 ‘정할 수’ 있고 ‘진리’, ‘현실’, ‘지식’, ‘확실성’ 같은 단어들은 그 힘을 상당히 회복하게 된다.”(terry eagleton, 1943: 영국의 문예비평이론가) 원자의 體에 영원히 다다를 수 없지만 지금의 연구보다 더 실체에 다가간 연구를 21세기 오늘 새로운 과학이라고, 그렇지 않은 것을 허위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장대높이뛰기로 우주에 이를 수 없다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세계신기록을 넘어서서 높은 하늘에 이르는 자가 그 기록을 다시 깨는 자가 나타날 때까지는 가장 우주에 다가간 사람이다. 나무가 풀과의 ‘차이’를 통하여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이란 의미를 갖지만 지금 내게 저 나무가 그토록 소중한 것은 그 나무에서 어떤 스님의 설법을 듣고 깨우쳤다는 ‘역사’가 스미어 있기 때문이다. 차이와 역사, 공시성과 통시성, 주체와 구조는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이다.

 

이성과 언어 저 너머에 진리가 있는 것이 확실하지만, 이성의 도구화에 대하여 증오하지만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땅은 멀쩡한 다리와 백화점이 무너질 정도로 비합리적이기에 우리는 이성을 가지고 그를 바라보고 대응을 취한다. 유토피아가 환상임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있어야 우리는 현재를 바라보고 어둠 속에서 길을 찾을 수 있기에 별을 따라 길을 가는 나그네처럼 그를 고대한다.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 독일의 철학자)의 말대로 합리성이 있어야 유토피아를 실현할 수 있기에 이성을 가지고 유토피아에 비추어 현실을 비판하고 그를 향하여 한 발 두 발 나아간다. 우주에 이를 수 없는 것을 뻔히 알지만 장대높이뛰기 선수들은 오늘도 장대를 들고 더 높이 나는 비상을 꿈꾼다. 저 언덕 너머에 진리가 있음을 알고도 '지금 여기에서' 물살에 휩쓸리고 있는 중생을 태우기 위하여 뗏목을 돌린다. 그를 일러 감히 진리라 한다. 욕망은 신기루, 우주 삼라만상은 쉬바신이 빚어놓은 환상, 진리가 허상이지만 그에 이르지 못하기에 나는 그를 향하여 나아간다. 기다리는 것이 정녕 오지 않기에 기다리듯이.

 

 

7강: 미국 시장과 문화의 세계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공세 속에서 제3세계는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세계화론 對 화쟁의 세계체제

 

세계화는 빛인가 어둠인가?

 

테러의 세계화, 전쟁의 세계화, 전세계가 탄저병, 백색공포로 떨고 있다. 세계화(globalization)의 상징인 미국 무역센타 건물이 가미가제식 테러로 폭삭 주저앉았다. 미국과 영국 군대는 아프가니스탄에 폭탄을 퍼부었다. 걸프전에 이어 전 세계의 시청자들은 안방에 가만히 앉아서 전쟁을 중계방송으로 보고 있다. 골을 넣듯 카불의 레이더 기지에 정확히 폭탄이 떨어지고 수비를 하듯 탈레반 군이 이에 맞서 대공포를 쏘는 장면을. 수천 명의 무고한 시민을 죽인 악마로 보든, 초강대국 미국에 성전을 행한 영웅으로 보든 오사마 빈 라덴은 전 세계적 인물이 되었다. 전세계가 탄저병, 백색공포에 떨고 있다. 이것은 최근의 일일 뿐, 세계화는 이미 오지와 성역에마저 손을 뻗쳤다. 아프리카 밀림 속의 원주민들이 코카콜라를 마시며 전통 춤을 추고, 세상과 단절한 채 고독한 수행을 하던 티벳의 승려들이 월드컵 축구경기를 보기 위해서 사원을 뛰쳐나왔고 이를 소재로 한 영화까지 만들어져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세계 시장은 하나로 통일되고 있다. 이른바 ‘국경 없는 세계(borderless world)’가 도래한 것이다. 상품만이 아니라 돈이 인터넷을 타고 빛의 속도로 오고 간다. 테러로 미국 시장의 주가가 폭락하자 한국 시장에서도 주가는 큰 폭으로 내려앉았다. 안방에 앉아 미국의 나스닥에 투자할 수 있으며 캘리포니아의 요트를 구입할 수도 있다. 헤지펀드는 아시아는 물론 굶주림으로 수백만 명씩 죽어 가는 아프리카 시장까지 헤집고 다닌다. 세계자본이동은 1991년에 5,360억달러였으나 4년만에 1조 2,580억달러로 불어났다. 세계유가증권의 유동성금융자산(liquid financial assets)은 1980년에 10조 7,000억달러이던 것이 1994년에는 41조 5,000억달러로 증가하였다. 이제 세계 주요 외환시장에서 하루 동안 거래된 외환규모만도 1조 달러가 넘는다니 이전의 감각으로는 그 위력에 대해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햄버거는 전 지구촌의 주식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며 윈도우 시스템과 인터넷은 전세계 네티즌의 뇌를 하나로 묶고 있다. 프랑스의 문화비평가 기소르망의 말대로 배는 맥도널드 햄버거로, 머리는 매킨토시 컴퓨터로 채우는 맥의 세상, ‘맥몽드(mac-monde)’가 도래한 것이다.

 

거의 빛의 속도로 전 세계가 교류하고 있는데 “우리 것만이 좋은 것이여.”하는 것은 우물 안 개구리를 자초하는 것이다. 그럼 이제 민족주의는 폐기 처분해야 할 구시대의 유물인가? 세계화는 제3세계가 낡은 생산양식이나 문화양식에서 벗어나 모든 분야에서 아주 빠른 속도로 선진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서로 다른 나라의 사람이나 문화를 이해하고 교류를 넓혀 상호공존의 토대를 구축하고 퓨전 문화에서 보듯 상대방 문화의 장점과 지혜를 수용하여 상호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 세계화가 아니라면 어떻게 안방에 앉아 루브르 박물관을 관람할 것이며 한류가 중국과 동남아를 강타할 것인가? 세계화는 이데올로기나 전략이라기보다 테크놀러지 발전에 따른 문화적 추세이다. 항공여행의 발달로 전 세계는 말 그대로 하나의 지구마을(global village)이 되었다. 위성과 인터넷을 통해 세계인의 심장과 머리는 하나로 이어졌다. 나는 이런 면의 세계화는 지지한다.

 

반면에 이데올로기로서, 전략으로 펼쳐지고 있는, 신자유주의자(neo-liberalism)들의 세계화에 대해선 철저히 반대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주장한다. 관세 장벽을 없애고 규제를 철폐하는 등 국가가 만든 여러 보호 장치와 장애를 폐지해야 자본과 상품, 정보가 자유로이 흐르고 이것은 결국 모든 세계인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고. 이렇게 하여 세계의 다양한 상품과 금융, 문화와 정보가 하나의 통일된 시장에서 유통되고 거래되어 세계인은 더욱 빨리, 더욱 정확하게, 더욱 싼값으로 상품과 정보를 대할 수 있으리라 말한다. 자유경쟁의 원리에 입각한 전면적인 자유무역을 실시해야 국내산업의 폐쇄적이고 비능률적인 경영방식을 외국과의 자유경쟁을 통해 개선하고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등 이윤과 효율성의 극대화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93년 gatt를 대체한 wto 협정의 핵심은 상품, 서비스, 자본에 대해 모든 나라에서 내국민대우와 최혜국대우를 받게 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경제적 의미의 국경이 소멸된 것을 의미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의 논리는 얼핏 정당한 것처럼 들린다. 긍정적 요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생산성을 높이고 봉건적인 경영방식을 합리화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정경유착의 폐해가 심하고 천민자본주의, 정실자본주의 단계에 머물고 있는 나라에서는 경제를 선진화, 합리화하고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 국민의 혈세를 어마어마하게 낭비하고 있는 공기업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으며 무지막지하게 노동자를 착취하여 경쟁력을 갖던 경제에서 효율적 경영과 생산관리, 구조조정을 통해 합리적으로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다.

 

하지만 헤비급 세계 챔피언과 플라이급 한국 챔피언이 같은 링에서 아무런 규제 없이 난타전을 벌인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까? 판돈을 수억을 가진 사람이 겨우 몇 만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어울려 도박판을 벌이면 누가 딸까? 신자유주의자들이 추구하는 세계화란 별다른 것이 아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의 자본이 위기를 맞아 국경은 물론이거니와 이념과 문화, 민족적 경계를 넘어서서 시장을 확대하여 이윤을 축적하자는 것이다. 캘리포니아 쌀처럼, 우리나라 것보다 더 좋으면서도 훨씬 더 싼 제품이라도 수입금지품목으로 규정하거나 높은 관세를 매기면 한국 시장에서 팔리기 어렵다. 양담배처럼, 어렵게 시장을 확보하고 좋은 물건을 싸게 내놓았어도 한국인들이 애국심과 민족적 자긍심으로 똘똘 뭉쳐있는 한 이 제품은 일정 수준 이상의 이윤을 얻기 어렵다. 좋은 자리에 터를 잡아 헐값에 노동자를 마구 부려 많은 이익을 내고 상품을 팔았어도 높은 세금을 때리고 환경 등 갖가지 규제로 얽어매는 한 초국적 기업이 이 땅에서 계속 흑자를 보기 어렵다. 그러니 모든 규제와 장벽을 없애고 상품과 자본과 서비스가 국경을 넘어 마음대로 오고 가게 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왜 세계화를 추진한 이후 제3세계는 더 가난하게 되었으며 실업자가 거리를 메우고 중산층은 몰락하였으며 수백만 명의 어린이가 질병과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는가?

 

미국의 초국적 기업과 투기자본이 세계화의 장본인

 

세계화는 비단 오늘날 시작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근본적인 작동원리는 끊임없는 확대재생산과 자본축적이다. 올해 100을 생산하였으면 내년에 110 정도는 생산해야 자본주의 체제의 기업은 살아남을 수 있다. 자본을 축적해야 더 많은 원료와 노동력을 싸게 확보하고 더 많은 제품을 생산하여 더 너른 시장을 확보하여 더 많은 제품을 더 싸게 판매하여 더 많은 이익을 내고 결국 경쟁체제에서 승리할 수 있다. 이 원리에 따라 자본주의는 원료공급과 제품 판매 시장을 끊임없이 확대해 왔다. 이런 원리에 국경이라는 경계는 별다른 장애물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세계화의 과정이다.

 

그런데 왜 요새 와서 세계화가 이슈가 되고 있는가? 서서히 세계화를 단행하던 서구 자본은 1970년대에 와서 위기를 맞았다. 미국과 서방 세계는 이전의 시스템으로는 더 이상 확대재생산을 지속시키고 자본을 축적하는 것이 포화상태에 이르렀음을 깨달았다. 자동차처럼 그들이 비교우위에 있는 제품들에 대해 제3세계는 관세 등의 장벽을 내세워 통제하였다. 한국의 반도체처럼 제3세계의 경제가 발전하고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비교우위를 갖는 제품이 오히려 미국과 서방 시장을 공략하였다. 노동자의 의식이 성장하고 노조활동을 보장하는 제도가 발전하면서 자국의 노동자를 멋대로 착취하는 일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졌다. 그리고 제3세계에서 거의 헐값으로 공급받던 자원과 노동력마저 제3세계의 연대와 제3세계의 민중의 성장으로 마구 착취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1970년대에 들어 미국의 국제수지가 수년간 만성적 역조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달러화는 국제 통화를 주도할 만한 힘을 상실하였다. 경제활동이 위축되고 기업이윤이 급격히 줄어들어 제조업이 공동화 현상을 빚기까지 하였으며 재정의 누적된 적자로 공공투자가 위협을 받아 경제위기가 장기간 지속되었다. 그러자 초국적 기업과 초국적 투기자본을 이끌고 있는 엘리트들과 이들의 이데올로그인 경제학자들은 자유로운 시장원리에 입각한 자유주의를 부활시키는 것이, 이에 따라 세계경제의 판을 다시 짜는 것이 돌파구라는 판단에 이른다.

 

그러던 참에 테크놀러지의 발달, 특히 인터넷의 발달로 문화의 세계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경제학자들은 이를 놓치지 않고 미국과 서방이 변화하는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논리인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전략을 속속 내놓았다. 이 이론을 접한 서방의 자본과 정치세력은 제3세계를 윽박질러 gatt체제를 해체하고 wto체제를 받아들일 것을, 노동력과 자원을 싸게 사들이고 상품을 마음대로 파는 데 장애가 되는 온갖 규제를 해제하라고 압력을 넣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나라에 대해서는 imf체제로 몰고 가 한 방에 세계화를 달성하게 하였다.

 

노드 런던 대학 교수인 피터 고완(peter gowan)교수는 70년대 초 미국이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세계화 전략을 짰으며 이를 위해 세계수출국기구(opec)에 유가인상을 유도했다는 주장을 편다. 브레튼우즈 체제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를 지배할 수 있었던 미국은 70년대 초 달러를 너무 많이 찍어내 달러위기를 맞았다. 이 위기를 맞아 미국은 금태환제(자국 화폐를 일정한 양의 금으로 바꿔주는 금융 체제)를 폐기해버렸다. 71년 8월 닉슨 대통령은 ꡒ더 이상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지 않겠다ꡓ고 선언한 것이다. 그럼 이로 상실한 미국의 패권은 무엇으로 되찾을 것인가? 미국은 경쟁국이었던 독일과 일본이 석유가 나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하여 유가인상을 부추겼다. 독일과 일본이 제1,2차 오일쇼크로 흔들리는 사이에 미국의 석유 메이저 그룹은 정작 산유국보다 더 많은 중간이익을 차지하였고 변동환율제를 채택하여 달러를 마구 찍어내 전세계에 유통시켰다. 유통되는 달러는 미국 민간 은행들의 손을 거쳐나갔으니 미국은 이중으로 이익을 보았고 이를 바탕으로 다시 달러의 패권을 거머쥐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세계의 거의 모든 힘은 중심은 이미 이들 초국적 기업과 초국적 자본으로 옮겨갔다. 온갖 장애와 규제가 약화되자, 주로 미국의 초국적 기업은 가장 금융비용이 저렴한 나라에서 돈을 빌려 가장 원료가 싼 나라에서 원료를 사서 가장 생산성이 높은 지역, 즉 기술력이 있으면서도 가장 노동력이 저렴한 지역에서 생산을 하고 판매와 수출을 최대화할 수 있는 나라에 생산기지를 두고 제품을 팔아 세금이 가장 낮은 나라로 기업소득을 이전시키고, 자본수익과 환차익이 가장 높은 나라로 자금을 이동시켰다.

 

1970년대 7,000개사에 지나지 않던 초국적 기업은 90년대 초반에만 35,000개사로 늘어났으며 이들은 세계무역량 가운데 75%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 최대 초국적기업 200개사의 총매출고는 세계총생산의 약 2/3에 해당되지만 고용자수는 1억 8,800만 명에 지나지 않는다. 초국적 기업은 그 정도로 교묘하게 노동력을 착취한다. 때문에 초국적기업이 공룡화하면서 세계의 실업률은 높아지고 생활수준은 하락하였다. 임시고용, 파트타임제 등을 확대하고 독자계약제로 전환하여 노조는 거의 무용지물이 되었다. 게다가 연봉제 등으로 노동자간 경쟁을 부추겨 노동자의 연대는 급속히 해체되었다. 노조가 힘을 잃자 초국적기업은 해고를 무기로 임금을 무자비하게 삭감하고 노동자 복지를 속속 폐지하였다. 다운사이징(downsizing)을 하고 기업의 흡수 및 합병(m&a)을 자유자재로 하고 국가에 대해서는 모든 규제의 철폐와 복지의 축소를 요구하였다. 이들의 힘은 한 국가의 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를 넘어서서 전 세계의 정치와 경제를 주무른다. wto라는 새로운 판을 짜고 imf를 통하여 거의 전 세계의 경제정책을 좌지우지한다. 예전에 itt(국제전신전화회사)가 칠레의 아옌데 정권을 무너트렸듯 자신의 이윤극대화에 장애가 되는 세력, 특히 자본이나 자원의 국유화를 선언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붕괴시킨다. 미국의 파워엘리트들이 라덴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은 이슬람에 석유를 민족자본화하자는 자, 석유에서 나오는 막대한 이익을 더 이상 미국의 메이저 그룹에게 빼앗기지 않겠다는 자가 정권을 잡는 것이다.

 

왜 세계화는 90년대에 극에 달하였을까? 가장 주요 요인은 wto체제의 출범과 전 세계에 걸친 외환위기이다. 세계 경제가 wto체제로 접어들자 초국적 기업과 투기자본은 별다른 규제와 장애를 받지 않고 제3세계를 착취할 수 있었다. 아직도 규제와 장벽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엔 투기자본이 들어가 외환위기를 일으키고 그 다음으로 imf가 들어가 imf자금을 빌려주는 대가로 온갖 규제와 장벽의 철폐를 요구하였다. 냉전의 해체도 무시하지 못할 요인이다. 미국 경제에서 군수산업이 차지하는 몫은 1/4 이상이다. 막대한 이윤이 남는 무기를 팔아먹어 손실을 메워왔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냉전이 해체되면서 무기판매가 급격히 줄고 군산복합체의 위기는 그대로 미국 경제의 위기로 다가왔다. 미국은 걸프전을 유도하여 군수산업을 부활시켰고 이는 미국경제를 호황기로 접어들게 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하여튼 wto체제와 imf위기를 통해 널리 뻥 뚫린 길을 따라 초국적 투기자본이 헤집고 다녔다. 하루 1조 달러에 이르는 외환거래 가운데 실질적인 상품무역, 자본이동과 관련된 것은 단 15%에 불과하다. 세계화 속에서 전 세계적으로 민간채무가 공공채무로 속속 전환되고 있다. 공적 자금이란 것이 무엇인가? 은행이나 기업의 부실과 손실액을 국민의 세금으로 메우는 것이 아닌가? 수십 조를 퍼부었지만 효과는 있는가? 그 어마어마한 돈은 어디로 갔는가? 거의 모두 국제 투기자본으로 흘러 들어가고 우리 신문의 사회면을 가끔 장식하는 악덕 기업주와 정치인들이 떡고물을 챙겼다. 80년대 들어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들의 공공외채는 95년까지 13조 달러가 넘었으며, 세계 최대 채무국인 미국도 레이건․부시 정부 집권기에 공공외채가 5배나 증가해 96년에 5조 달러에 이르렀다. 정부의 보조금은 대기업간의 인수합병이나 노동절약형 기술도입에 쓰여 대규모 실업을 낳아 국민경제를 더욱 위축시킨다. 가난한 정부는 한편으로 시민들의 세금에 더욱 의존하게 되고 국민들의 세금은 다시 기업에 돌아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결국 이렇게 하여 기업의 이윤은 국민에게 돌아가지 않고 그 기업들에게 돈을 빌려준 국제채권단에게 돌아간다. 세계화로 살찌는 자는 미국의 초국적 기업과 투기자본뿐인 것이다.

 

세계화는 빈곤과 실업의 세계화로 가고 있다

 

그러기에 캐나다 오타와 대학 교수인 미셸 초스도프스키(michel chossudovsky)의 지적대로 세계화는 실제로는 ‘빈곤의 세계화'를 강화하는 쪽으로 진행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강제 집행자, imf는 시장의 자유란 이름으로 전세계를 외채위기로 몰아놓고 가난한 나라의 부를 빼앗아 그렇지 않아도 배가 터질 지경인 국제금융자본을 더욱 살찌게 하고 있다. 60년에 세계 극빈층 20%의 총소득은 그나마 세계 전체 총소득의 2.3%에 달하였으나 탈냉전과 세계화가 진행된 96년에는 1.1%로 떨어졌다. 1996년 현재 제3세계가 서방세계에 갚아야 하는 외채는 2조달러, 2,400조원에 달하는 천문학적 숫자이다. 1970년에 비하여 32배 증가하였다. 60년에 세계 극빈층 20%의 총소득은 그나마 세계 전체 총소득의 2.3%에 달하였으나 세계화가 진행된 96년에는 1.1%로 떨어졌다. 인류 가운데 13억이 하루에 1달러도 채 안 되는 돈으로 살아가고 있는 반면에 세계 10대 갑부들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은 1천3백30억 달러로 최빈국 총수입의 1.5배에 달한다. 아태지역에 9억5천만 명, 아프리카에 2억2천만 명, 중남미에 1억1천만 명, 시장경제로의 전환이 실패한 옛 사회주의권의 인구의 1/3인 1억 2천만 명 등 14억에 달하는 인류가 하루 4달러 이하의 돈으로 연명하고 있다. 빈곤의 대명사, 수백만 명의 어린이가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소말리아는 세계화가 진행되기 전 70년대까지만 해도 목축을 하고 전통 농업을 하여 자급자족하던 식량자급국이었다. 이제 그 나라 국민들은 죽음을 통해서 굶주림에서 벗어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까지 멕시코를 imf를 극복한 대표적 사례로 들고 있는데, 멕시코는 nafta에 가입하던 첫해에 1천여 국영기업이 민영화되었고 2만여 중소기업이 도산했으며 근로자의 임금이 40~50%나 떨어졌고 생활비는 80%까지 상승하였다. 곧 이어 병원과 철도 같은 공공 시설이 문을 닫아 이 기간에 치료를 받지 못해 수많은 어린이가 질병과 굶주림으로 사망하였다.

 

‘빈곤의 세계화’는 ‘실업의 세계화’로 이어진다. imf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노동비용을 통제하고자 하는데, 노동비용의 감소와 실업으로 인구 상당부문의 소득이 하락하고 그에 따라 구매력이 심각하게 축소되며 이는 더 많은 공장폐쇄와 기업의 도산을 유발한다. 파산을 피하기 위해서 기업은 더욱 낮은 요금을 요구하고 이는 다시 시장의 축소로 이어진다.

 

금융위기를 계기로 세계화가 급속도로, 강제적으로 진행된 나라의 경우 세계화의 대가는 더욱 처절하다. 캐나다와 영국 같은 선진국조차 imf의 강제에 의해 사회복지를 축소하였는데 제3세계야 어련하겠는가? 2조 달러에 달하는 외채 가운데 이자를 3%만 잡아도 제3세계는 원금은 전혀 갚지 못한 채 해마다 72조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이자로 지출해야 한다. 이 돈이면 1천만 명의 굶주려 죽어 가는 어린이를 살리고도 남는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외채 이자가 1천여만 명의 어린이를 굶주려 죽어가게 하고 있는 것이다.

imf 구제 금융만 하더라도 1997년부터 1998년까지 태국은 240억 달러, 인도네시아는 320억 달러, 한국은 imf, 세계은행, 아시아개발은행, 11개 선진국으로부터 570억 달러를 도입했다. 대신 그 대가로 자본과 금융, 국유자원을 완전히 개방하였고 구조조정이란 명분으로 각국의 시장과 기업을 미국의 착취가 용이한 체제로 전환하였다. 왜 이런 일이 빚어질까?

 

외환위기를 겪고 있는 나라들이 자본시장이나 금융시장을 전면적으로 개방하여 외국자본을 유치하지 않고서는 그 위기를 진정시키기 어렵다. 이러한 국가들이 외국자본에 대한 규제조치를 전면적으로 철폐하지 않는다면 외국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보유외환이 고갈되어 국가부도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외환, 곧 달러가 없으면 원유와 기계 등을 사올 수 없게 되고 이를 이용하여 제품을 만들 수 없어 생산은 침체되고 수출이 어려워진다. 경쟁적 우위를 점하던 기업이 차츰 도산하고 실업이 만연한다. 수출을 못하니 달러를 벌어들이지 못해 외환이 고갈되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그러니 환율은 폭등하고 국내통화의 대외가치는 폭락한다. 경제성장은 곤두박질치고 경제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그러니 제3세계는 지금 죽지 않기 위하여 매일매일 피를 팔아 죽을 사먹는 매혈자 신세가 된다. 당장 국가부도 상태를 면하고자 비싼 이자를 물고 imf 구제금융을 비롯한 외채를 들여오고 그 대가로 자원과 금융과 기업과 노동력을 헐값으로 내놓는 것인 줄 알면서도 세계화와 개방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로 인도네시아에선 민중 폭동이, 소말리아에서는 종족간의 갈등이, 유고슬라비아에선 내전이 일어났으며 한국에서는 우량 기업이 도산하고 실업자와 노숙자가 거리를 메웠다. imf체제를 거친 나라의 경우 거의 대부분 실질소득이 급격히 하락하였고 노동비용은 감소하였으며 생필품은 폭등하고 사치성 소비재의 수입이 증대하여 인플레이션이 촉발하였고 중산층과 제조업, 중소기업은 몰락하였다. 어느 나라에서건 자유롭고 행복한 삶, 민주주의와 복지에 대한 국민의 열망은 ꡒ경제를 살려야 한다ꡓ는 천편일률적인 경제 구호에 짓눌려버렸다. 기아와 폭동, 전염병의 창궐과 더욱 억압적인 체제의 등장, 개발논리를 구실로 한 환경의 처참한 파괴 또한 imf를 맞은 상당수 개도국의 풍속도이다. 세계화가 진행된 이후 최소 천만 명 이상의 어린이가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세계화는 지금 넓이의 세계화에서 깊이의 세계화로 진행되고 있다. 세계화의 1차 목표는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통일하는 것과 ‘유연한 착취’를 달성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전략을 통하여 미국의 자본은 넓이의 세계화는 이미 달성하였다. 세계의 비자본주의 국가를 포함하여 마침내 소련과 동구권까지 무너트렸다. 오늘날 세계의 500대 기업이 전 세계 경제생산의 25퍼센트를 차지하고, 세계 50대 상업은행 및 다각화 금융회사가 전 세계 자본의 약 60%를 통제하고 있다. 임시고용, 하청고용, 파트 타임제 등을 동원하여 노조를 무력화하고 노동자들의 저항을 거세하는 데도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 그들은 이제 자본의 마지막 꿈인 ‘깊이의 세계화’를 달성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 꿈이란 서방의 자본이 먹고 마시고 싸는 일에서 놀이, 섹스, 꿈, 이미지의 영역까지 파고드는 것이다. “당신이 좀더 강한 섹스를 원한다면 00을, 좀더 안전한 섹스를 원한다면 00피임약을 복용하라. 그러고도 만족이 되지 않는다면 포르노 사이트에 들어와 미국인의 다양한 체위를 해보아라.” 이것이 서방 자본의 주문이다. 그러기에 세계화 이후 전 세계인의 자유와 행복은 미국의 몇몇 기업과 국제투기자본에게 저당잡혔다. 우리는 이제 그들이 설정한 대로 임금을 받고 상품을 소비하고 생산을 해야 하며 그들이 쳐놓은 그물 안에서 자유롭다고 행복하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김영삼 정권이 세계화를 추진하면서 시장과 금융을 보호하던 장치들을 스스로 해체하는 바람에 300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이 단 며칠 사이에 빠져나가는 것을 막지 못하여 imf 위기를 맞았다. 김대중 정권은 신자유주의자들에 둘러싸여 이들의 주장대로 정책을 집행하였다. 그 결과 상당량의 민족 자원이 서방의 손에 헐값에 넘어가고, 유망한 기업이 ‘껌값에’, 그 중 일부는 일년 매출액에도 못 미치는 가격으로 미국에 팔렸다. 주가가 폭락하고 실질소득이 줄면서 상당수의 중산층이 몰락하였다. 많은 성실한 노동자들이 거리로 내몰리고 연봉제, 파트타임제 등의 도입으로 노동자의 고용은 극도로 불안해지고 가장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자존심과 존엄성은 땅에 떨어졌다. 미국과 호주의 싼 고기와 과일, 중국산 농수산물이 들어오면서 농어민들은 빈자로 전락하고 자살하는 이도 한둘이 아니다. 완전 개방이 되지 않은 상태가 이 지경인데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우리 쌀보다 맛도 더 좋으면서도 가격은 1/10에 불과한 캘리포니아 쌀이 들어온 이후에도 한국 농부는 쌀 농사를 지을까? 어느새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한국 금융시장 점유율은 30%를 넘어섰다. 이들이 한국의 시장을 투자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여, 또는 국가부도 상태로 몰고 가 한국의 자원과 기업, 자본을 다시 싼값에 인수하고자 하여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하면 한국은 언제든 제2의 imf를 맞을 수 있다.

 

세계화는 미국 문화의 동시화로 가고 있다

 

세계화는 문화의 미국화 또한 추구한다. 미국 자본의 공격은 거시적이고 심층적이다. 한국인이 밥에 김치를 먹어야 포만감을 느끼는 한 맥도널드 햄버거가 한국인의 주식을 대체하지는 못한다. 숭늉을 마시어야 시원함을 느끼는 할아버지에게 코카콜라를 팔 수 없으며, 구수한 빈대떡에 소주 한 잔을 좋아하는 아저씨께 피자는 노린내가 나는 이상한 서양 음식일 뿐이다. 이들에게 미국 상품을 팔려면 그들의 입맛을 바꾸어야 한다. 할아버지가 불가능하면 그 아들이나 손자의 문화를 바꾸어야 한다.

 

그러기에 서구 자본은 오래 전부터 제3세계의 서구화를 야금야금 진행시켜 왔다. 분유광고가 텔레비전에 선보이면서 아프리카에 서구 다국적 기업의 분유공장이 세워졌고 아프리카 여성들은 모유를 쏟아 버리고 돈을 주고 분유를 샀다. 미국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흰 피부가 미인이라고 생각한 아프리카의 주부들은 비싼 돈을 주고 열심히 미백 크림을 바른다. 처음엔 상품을 직접 수입해 썼지만 곧 미백 화장품 공장이 세워진다. 이처럼 미국과 선진 제국주의 국가들은 그 나라 국민의 필요가 아니라 제국주의의 이익에 따라 기술적, 사회적, 상징적 양식을 전파하며 이를 통하여 그 나라의 산업과 경제 구조 자체를 식민지 구조로 바꾸고 자원의 배분을 식민지 상태로 몰아간다.

 

미국영화와 서구 영화가 비사회주의권 국가가 구매하는 전 영화량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남미와 아시아 국가 대부분의 국가에서 수입 드라마 중 미국 드라마가 차지하는 비중은 50%를 넘는다. 미국의 팝송은 이미 각 나라의 대중문화가 되었다. 혹자는 우리나라 텔레비전이 예전엔 외화 일색이었는데 지금은 토종드라마가 대부분이지 않느냐고, 한류가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거센 호응을 얻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을 할 것이다. 그러나 탤런트들만 한국인일 뿐 사극을 제외한 대부분의 드라마가 미국화하여 미국식 사랑방식과 갈등 해결방식을 보여준다. 한류가 진짜 한국문화인가? 한 꺼풀만 벗기면 미국의 대중문화를 한국적으로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 무서운 것은 이것이 문화를 미국 문화화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데 있다. 그 속에 담긴 미국식 생활양식을 자연스러이 받아들이게 한다. 미국 영화에서 간단히 토스트에 커피 한 잔으로 아침을 때우는 것을 보며 “미국놈들, 아침부터 저러고 힘을 쓸 수 있느냐?”고 반문하던 우리들의 아침이 그리 바뀌지 않았는가? 서둘러 밀가루와 커피 공장을 세웠고 이제는 미국 밀과 커피의 세계적인 소비국이 되지 않았는가? 서구적 식생활로 쌀이 남아돌고 비만을 줄이는 비용으로만 1년에 2조원을 낭비할 지경에 이르지 않았는가? 전 세계 민중의 꿈은 영화나 드라마, 광고, 인터넷에 제시된 미국의 행복한 중산층처럼 먹고 입고 사랑하는 것이 되었다. 미국식 생활양식을 수용한 이들은 미국의 문화상품에 담긴 이데올로기-판아메리카니즘, 반공이데올로기, 상업주의, 개인주의, 남성우월주의, 영웅주의, 인종주의, 실용주의, 몰계급적 감상주의, 소시민주의-를 자연스럽게 수용한다.

 

더구나 어린이와 청소년은 미국식 생활양식만이 아니라 “미국식 꿈의 양식”마저 받아들인다. 미국의 만화영화를 보며 미국과 미국문화를 동경하게 된다. 만화영화의 주인공이 파란 운동복을 입고 야구를 하였으면 그 색깔을 한 미국의 자동차와 옷들을 좋아하게 된다. 그들은 디즈니랜드를, 메이저 리그 야구와 농구 선수를 꿈 꾸고 맥도널드 햄버거, 나이키 운동화 등 그런 이미지를 담고 있는 미국의 상품을 열정적으로 소비한다. 마텔라르(armand mattelart, 1936-: 벨기에 태생의 프랑스 사회경제학자, 파리제7대학 교수)의 표현대로 이제 대다수 제3세계인들은 그들의 눈이 아니라 미국인이 제3세계를 바라보는 눈으로 자신을 보고 꿈을 꾼다.

 

한 우매한 대통령의 선언 이후 그렇지 않아도 ‘근대화=서구화’로 인식되던 나라에 세계화의 물결은 급속도로 밀려들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다. 비가 내리다 개인 1980년대 초반의 어느 가을날 오후 대학생이던 나는 삼청공원으로 가서 의자에 앉아 이 생각 저 생각하려는데 두 남녀가 산책로를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내 나이 또래의 대학생들이었는데 차마 손을 잡지 못하고 대신 우산 양끝을 쥔 채 걸어가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하면 학생들은 웃는다. 몇 년 전만 해도 설레이기도 하고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하면서 오래된 간장이나 된장처럼 곰삭인 사랑이 정상이었는데 어느덧 인스턴트식 사랑이 우리네 사랑방식이 되었다. 그때 뽀뽀만 해도 반드시 결혼을 하는 것으로 아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는데 어엿한 남편과 자식을 가진 주부가 텔레비전에 나와 “요새 애인 없는 주부도 있나요?”라고 당당히 묻는다. 외식하면 자장면이었고 졸업식처럼 특별한 날에나 먹을 수 있는 것이었는데 피자를 사주어야 가장의 체면이 선다. 학교가 파하면 아이들은 골목으로 쏟아져 나와 공을 차고 술래잡기를 하였었는데 그 자리엔 자동차만 가득하고 아이들은 온라인 게임에 혼을 빼놓고 있다. 회사에선 연봉제니 뭐니 해서 그나마 남아있던 동지애니 의리니 하던 것들도 사라지고 토끼와 거북이식 경쟁이 삶을 옥죄고 스트레스를 가중시킨다. 막걸리 집에 모여 나라 걱정, 민중의 고통에 대한 아픔으로 밤새 토론을 하던 이들은 다들 어디로 가버리고 사랑과 섹스와 취업과 출세욕에 불타는 젊은이들만 가득 마시다 춤추다 떠들다 하며 그들 말대로 덧없이 시간을 죽인다. 서구화 이후 한국 사회의 전통이 급격히 무너지더니 imf 이후 한국 사회의 준거들이 아주 빠른 속도로 해체되고 있다. 대학에서부터 사법부에 이르기까지 전 한국 사회의 전 영역의 사람들이 오로지 물질적 이익과 향락을 위하여 정의나 의리, 도덕심, 명분이나 명예 등 기존의 가치를 스스럼없이 버리고 있다.

 

새로운 세기, 문명의 충돌은 없다

 

정보화와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문화적 동시화”, “미국 문화의 동시화”가 더욱 강화될 것이며 현재의 불평등은 더욱 심화할 것은 뻔한 이치다. 대신 제3세계의 독창적 문화와 사회적 창의성은 혼란을 겪으면서 차츰차츰 파괴될 것이다. 세계화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미국의 지배와 종속을 합리화하는 허위의식이자 미국의 착취에 유리한 체질이나 모델로 구조조정하기를 강요하는 일종의 폭력이다. 6천 명의 무고한 미국 시민을 죽인 것만 천인공노할 폭력이고 1천여 만 명의 어린이를 죽게 만든 것은 폭력이 아니더란 말인가?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 고유의 전통과 역사를 가진 제3세계의 문화와 언어, 종족들이 너무도 쉽게 죽어가고 해체되고 있다.

 

이에 대항하는 것은 쉽지 않다. 세계 4대 통신사가 세계 정보의 흐름을 80%이상 장악하는 것에 맞서서 제3세계의 80여개 나라가 뭉쳐 대안의 통신사 nanap를 건설하였다. 이때만 해도 전 세계의 뜻 있는 사람들은 미국의 정보 독점에서 벗어날 희망에 들떴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미국의 한 통신사인 ap통신이 10억의 독자를 확보하고 110개국을 대상으로 매일 1,700만 단어를 제공하고 있는데 반하여 비동맹 80개국이 참여한 nanap는 겨우 일일 500 단어 정도의 메시지를 보내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이를 통하여 미국 한 나라와 제3세계 모두를 합친 힘이 대략 1,700만 대 500이라 유추하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일까? 거의 그 정도로 미국은 강하다. 뒤집어 생각하면 그만큼 당위론적인 반미운동은 무모하다.

 

그렇다고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보다 더 작은 나라인 월남이 미국에게, 아프가니스탄이 소련에게 이길 줄 누가 알았는가? 작지만 리눅스의 성공은 ‘연대’와 ‘공유’에 있다. 리눅스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의 수 천만 네티즌에 의하여 진화하고 있다. nanap는 연대는 하였지만 공유를 통한 발전의 전략은 미처 차용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우선 우리는 세계화와 새로운 얼굴을 한 제국주의인 신자유주의에 대하여 첨예한 인식을 하고 이를 전파해야 한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한국 사회의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개혁과 통하는 것으로, 21세기의 새로운 문명과 부합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 전도사를 자처하고 있고 한국 언론은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고 한국 정부는 이들을 주요 정책의 브레인으로 삼고 있다.

 

초스토프스키의 말대로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신의 실패를 인정해야 한다. 반대자들은 이를 지탱하고 있는 은행과 초국적 기업, 초국적 자본을 상대로 싸움을 벌여야 한다. 토빈세를 받는다면 투기자본이 마음대로 제3세계 경제를 주무르지 못할 것이다. 나아가 브레튼우즈 기관들의 활동을 감시하고 각국이 중앙은행을 스스로 감독해야 하며, 개도국의 외채를 탕감해야 한다. 각국 정부에 대한 국제채권자들의 압박에 이의를 제기하고 금융시장에 개입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빈곤퇴치와 세계평화를 추구하는, 전세계 사회운동과 시민사회가 광범하게 결집해 연대와 국제주의를 이뤄내야 한다. ꡐ투쟁의 세계화ꡑ가 없이는 ꡐ빈곤의 세계화ꡑ를 막을 수가 없다.

 

이런 대안은 서구식 대안이자 미봉책이다. 새로운 시스템을 짜지 않는 한 어떤 대안도 미봉책에 불과하다. 새로운 체제를 만드는 원리가 원효 철학에 있을까?

 

相入이라는 것에 대해 원효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체 세계가 한 티끌 속에 들어가고 한 티끌이 일체 세계에 들어간다. 삼세 제겁이 한 찰나에 들어가고 한 찰나가 삼세 제겁에 들어간다. 크고 작음, 느리고 빠름이 서로 들어간다.…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이다.(表員, 『華嚴經文義要決問答』, 卷2, 『韓佛全』 366上ː 言相入者 曉云 謂一切世界入一微塵 一微塵入一切世界 三世諸劫入一刹那 一刹那入三世諸劫 如大小促奢相入…一是一切 一切是一)

 

원효는 이어 “지극히 큰 것과 지극히 작은 것은 모두가 하나의 양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물론 화엄의 相卽相入을 설명한 것이나 이를 세계 체제에 응용할 수 없을까? 한 나라는 전 세계와 인다라망의 구슬처럼 서로가 거울이고 그림자가 되어 서로 비추는 것이다. 부분이 전체의 일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포괄한 한 부분이듯 한 나라는 전 세계를 포괄한 한 나라이다.

 

세계화론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름도 없는 아프리카나, 남미, 동남아시아의 원주민이 사라져버렸다고 해서 세계사에 무슨 영향이 있겠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우리나라 지식인 가운데 상당수가 영어 공용화론을 펴고 동조한다. 그러나 한 마리의 미생물이 지구 대기에 관여하듯 수명의 원주민의 삶과 언어는 지구 문명 전체에 관여한다. 서구의 정복자들이 마야와 잉카문명을 그토록 철저히 파괴하지 않았으면 21세기 인류를 구원할 지혜를 거기서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한 종족이 사라진다는 것은 단지 사람이 사라지는 것도, 한 문명의 지혜가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 그를 통해 우리를 바라볼 수 있는 거울이 깨지는 것이며, 그와 더불어 하나의 시스템을 이루던 인류문명에 구멍이 뚫리는 것이다.

 

세계화는 표준화, 동종화, 획일화를 강요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자들과 세계화집단이 간과하고 있는 문제는 문화가 다양성의 조화이며 다가오는 21세기 문화가 차이를 통한 공존이란 점이다. 다양한 목소리가 모여 합창의 하모니를 이루듯, 문화는 다양성의 조화다. 다른 문화가 있을 때 한 문화는 그것과 차이를 통하여 정체성을 갖는 것이며 문화는 다양할수록 건전하고 강하다. 문화란 것이 너와 나, 한국문화와 중국문화, 동양문화와 서구문화의 차이를 통하여 각각 우리 문화, 동양문화, 지구촌 문화를 오롯이 빚어내기 때문이다.

 

원효는 다음과 같이 非同非異의 철학을 편다.

 

그러므로 동조도 말고 반대도 말고 설법하라는 것이다. 동조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말대로 해석하자면 모두 다 허용하지 않는 것이요,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을 따라 말한다면 허용하지 않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반대하지 않기 때문에 그 情에 어긋나지 않고, 동조하지 않기 때문에 도리에 어긋나지도 않는다. 정에 대해서나 도리에 대해서나 서로 어긋나지 않는 까닭에 ‘진여에 상응하는 설법을 한다는 것이다.(『金剛三昧經論』, 「入實際品」, 『韓國佛敎全書』, 제1책, 638-상: “是故非同非異而說 非同者 如言而取 皆不許故 非異者 得意而言 無不許故 由非異故 不違彼情 由非同故 不違道理 於情於理 相望不違 故言相應如說 如者而也”)

 

자기 종교나 이념만이 타당하다고 성전을 부추기는 세력이 비판을 받는 한, 헌팅턴처럼 팍스아메리카나를 이론적으로 옹호하는 사이비 지식인이 언론의 지지를 받지 않는다면, 그 논리에 힘입어 21세기도 미국의 패권을 강요하려는 부시와 같은 인물들에 제동을 거는 사람들이 있는 한, 문명의 충돌은 없다. 아힘사를 본령으로 하는 불교야 당연한 것이지만, 이슬람교에 폭력을 옹호하고 반미항전을 부추기는 교리는 없다. 기독교도 극단화, 교조화한 집단은 테러와 학살을 수행한다.

 

한 종교나 이념에 대한 맹신은 폭력을 낳는다. 한 종교나 이념에 대한 배타심은 증오를 낳는다. 그러니 동조도 말고 반대도 말아야 우리는 그 종교와 그를 믿는 이들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 어둠을 빛의 적이라 하지 않고 어둠이 있어 빛이 있다고 생각하여 기독교도들은 마호메트를 이해하려 하고 이슬람은 예수님을 알려고 한다면 무슨 갈등과 테러가 있고 전쟁이 있겠는가? 테러를 뿌리뽑는 길은, 하나에 2백만 달러 하는 미사일 대신 단돈 2달러 짜리 빵이나 의약품을 투하하고 미국 방송에 이슬람 문화를 이해하는 프로그램을 편성하는 것이다.

 

라덴의 폭력에 대해서는 조금도 비판의 붓을 누그러트리고 싶지 않다. 그러나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 아프가니스탄에 폭탄이 떨어질수록 테러 세력은 겁을 먹는 것이 아니라 증오심을 키운다. 무고한 민간인이 폭격에 죽어갈 때 선량한 이슬람인조차 반미주의자로, 테러리스트로 돌변한다. 이번 전쟁에서 설사 라덴을 생포하거나 암살한다 해도 제2, 제3의 라덴은 속속 등장할 것이다. 폭격이 거세면 거셀수록 라덴은 이슬람인에게 영웅으로 부각될 것이며, 갖가지 테러가 꼬리를 물고 이어질 것이다. 부시도 이것을 왜 모르겠는가? 그는 잃어버린 인기를 만회하기 위하여, 21세기에도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무기를 팔아 군수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하여, 결국 세계화를 완성시키기 위하여 자유와 정의의 이름을 빌어 아프가니스탄에 폭탄을 떨어트리고 있는 것이다. 냉전이 해체되면서 2천 5백억 달러 대에 머물던 국방 예산은 부시 집권 후 3천2백 89억 달러로 다시 급등하였다. 그러나 나는 부시의 아프가니스탄 폭격이 세계화의 완성이 아니라 세계화가 종말을 고하는 기점이 되리라 확신한다.

 

세계화는 실패하였다. 피해자인 제3세계는 물론 가해자인 미국조차 장기적인 경제 침체기에 들어섰으며 미국민의 삶의 질은 이미 최강대국의 그것이 아니다. 제3세계의 연대와 각성으로 세계화는 곳곳에서 도전을 받고 있다. 최대 수혜자인 미국의 엘리트조차 세계화의 실패를 인정하고 있다. 미국 투자은행 모건 스탠리의 수석 분석가인 조 퀸런은 1998년 아시아가 금융위기를 맞자 그 원인을 ꡐ세계화ꡑ로 보고 ꡐ세계화ꡑ란 미국 중심의 체제인 만큼 반발과 문제가 크고 ꡒ결국 머지 않은 장래에 종말을 고할 것ꡓ이라고 전망했다.

 

걸프전이 발전하는 세계화에 발맞추어 미국에 성장과 번영을 주었다면,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쇠멸하는 세계화에 편승하여 미국의 쇠락을 이끌 것이다. 세계화의 종말과 함께 세계인들은 wto와 다른, 정녕 21세기에 맞는 새로운 세계체제를 모색할 것이고 그것이 화쟁이 아니라 해도 이와 유사한 체제가 되리라 본다. 인류는 이제 약육강식의 세계체제를 청산하고 큰 나라와 작은 나라가 서로 공존하고 더불어 번영하는, 한 나라와 다른 나라가 서로 인다라망의 구슬처럼 비추는 새로운 체제를 건설하고, un을 대체할 새로운 국제기구를 건설하고 wto체제를 화쟁의 경제체제로 바꾸어야 한다. 아니, 머지 않아 바뀔 것이다. 인류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을 해서가 아니다.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20세기를 통하여 병원균조차 숙주인 사람이나 동물을 죽이면 자신도 죽는다는 것을 알고 숙주를 죽이지 않는 것으로 진화하였다. 하물며 고등생물인 인간이 그리 하지 못하겠는가? 피를 빨더라도 당사자가 살아 있어야 가능한 것이 아닌가? 지금 세계는 그 지경에 서 있다.

 

제3세계가 완전히 붕괴되기 전에, 제3세계의 가난으로 전 세계가 대공황에 놓이기 전에 새로운 판을 짜야 한다. 전 국민이 하루 스무 시간씩 노동을 해도 원금은커녕 이자를 갚기 어려운 상황에서 미국은 무엇을 해야 할까? 그것은 과감히 그들의 빚을 면제해 주는 것이다. 그것은 약탈로 발생한 것이기에 탕감하는 것이 도덕적으로도 정당하다. 서방세계는 이미 원금의 몇 배 되는 돈을 챙겼지 않은가? 그래야 그들이 먹고살고 남는 돈으로 미국 상품을 소비할 것이 아닌가? 미국 정원 시장에서 최고의 인기 품목인 미스김 라일락은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털개회나무이다. 젠탁은 바위산을 마음대로 뛰어다녀도 관절염이 걸리지 않는 아프리카 원주민이 사용하던 ‘악마의 발톱’에서 추출한 약제이다. 지적재산권을 주장하여 제3세계로부터 철저히 로열티를 받아낸 서구사회가 왜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단 한 푼도 내놓지 않는가? 서구 세계가 서구의 지혜로 자랑하는 합리성의 틀로 보면 이런 것들에 대해 서방세계가 로열티를 내는 것이 정당하다. 그 로열티만으로도 제3세계의 빈곤은 상당 부분 퇴치할 수 있다. 제3세계 사람들은 왜 뼈빠지게 노동을 해도 굶주리는가? 서구 세계가 과감히 기술이전을 하면 그 기술로 제3세계는 생산의 혁신을 가져오고 고용을 창출하고 소득이 오를 것이며 이것은 궁극적으로 미국과 서방세계에도 득이 되지 않겠는가? 만약 이렇게 공존공영하는 체제로 세계체제를 수년 내에 개편하지 않으면 세계의 대공황은, 전 세계 인류의 거의 반이 굶주림에 직면하는 대공황은 필연적이다.

 

이것은 현실 감각이 없는 낭만주의자의 꿈이 아니다. 미국 사회의 시스템만 조금 변화시켜도 이것은 가능하다. 겨울에도 비가 내릴 정도로 포근한 유럽의 호텔에서는 외투를 입고 있어야 하는데 만주보다 훨씬 북쪽에 있는 시카고의 호텔에선 영하 30도가 넘는데도 속옷 차림으로 지내도 왜 땀을 뻘뻘 흘릴 정도인가? 미국 한 나라가 세계 에너지의 2/5 이상을 소비한다. 브레이크 없는 욕망의 소비국, 미국 자본주의는 무조건적으로 확대재생산하고 과잉생산과 과잉소비를 해야 유지되는 체제이다. 이것을 알기 전까지는 그렇게 부강한 미국이 왜 이름도 모르던 중남미나 아프리카 오지의 가난한 나라까지 침공하고 약탈하는 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시스템을 바꾼다면 미국인과 세계인은 훨씬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대다수 미국인은 선량하나 미국이라는 나라는 그렇지 못한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 이슬람인들이 미국에 대한 증오심 대신 사랑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지금 당장 옆에 있는 사람과 마주 보라. 똑바로 상대방을 바라보면 상대방의 눈동자가 보인다. 상대방의 눈동자에 맺힌 내 모습을 눈부처라 한다. 내 모습 속에 숨어있는 부처가 상대방의 눈동자를 거울 삼아 비추어진 것이다. 그 눈부처를 바라볼 때 상대방과 나의 구분이 사라지지 않던가? 아무리 적이라 해도 눈부처를 담고 있는 상대방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이리 다양한 문화와 언어들이 각기 개성을 갖고 표현되고 똑같이 존중되며 서로가 다른 문화와 차이를 통하여 드러나며, 서로가 서로를 비추어주고 서로를 키워주는 지구촌문화, 얼마나 아름다우랴?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인 지구촌 문화, 얼마나 아름다우며 얼마나 건강하랴. 나의 방식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닮으려 하는 것이, 내가 그리로 가 그를 이루는 것이 진정한 세계화이다. 참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제8강 정보화사회의 빛과 그늘

 

정보화사회는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퍼지이론 対 順不順

 

산사에도 인터넷이 들어왔다

 

깊은 골짝 산사에도 인터넷이 들어왔다. 스님은 선방에 앉아 미국의 cnn을 통해 미국 군인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장면을 생생히 본다. 한 미국인은 인터넷을 통해 한국의 산사를 관람한 후 미지의 스님에게 이메일을 보낸다. 인터넷으로 설법을 하고 들으며 시주도 한다. 바야흐로 정보화의 물결은 산사까지 찾아들었다.

 

《디지털이다(being digital)≫의 저자 네그로폰테는 아톰에서 비트로 대전환하는 것의 위력을 설명하기 위하여 재미있는 비유를 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일당 1원 짜리 일을 하는 사람의 급여를 매일 두 배로 올려주면 한달 뒤엔 급여가 얼마일까? 처음엔 1원에 시작하였지만 그의 월급은 28일인 2월이라면 1억 3천여만원, 31일인 달에는 10억 7천여만원에 달한다. 디지털 시대의 우리는 28일에서 31일에 이르는 이 마지막 3일에 살고 있다는 것이 네그로폰테의 지적이다. 그만큼 디지털 시대의 변화는 급진적이다. 그 진폭과 깊이는 아날로그적 감각으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우리는 지금 문명의 교차기에 있다. 산업사회는 탈산업사회, 정보화사회로 급속도로 전환하고 있다. 올드미디어는 뉴미디어로 속속 대체되고 있다. 현실이 아닌 사이버공간에서 쇼핑이 이루어지고 투자 상담이 오가며 성행위까지도 행한다. 도서관이 아니라 인터넷에서 정보를 얻고 교환한다. 아날로그로 저장되었거나 운영되었던 것들, 불경조차 속속 디지털화한다. 그리스 시대이래 모든 것을 진리와 허위, 옳음과 그름으로 나누던 이분법적 패러다임이 해체의 위협을 받고 카오스와 퍼지의 패러다임이 자리를 잡고 있다. 정보화사회, 뉴미디어시대, 사이버와 인터넷 시대, 디지털 시대, 카오스와 퍼지식 패러다임-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용어로 마땅한 것이 없으니 잠정적으로 정보화사회로 명명하고서 논의를 시작하기로 한다.

 

지금의 정보화사회는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삶과 의식, 불교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정보화사회는 서양으로부터, 서양의 과학기술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그러면 동양과 한국은 단순한 문명과 과학기술의 수입국으로 머물 것인가? 원효의 화쟁사상은 이에 대해 뭐라 답할까?

정치영역: 텔레데모크라시인가, 새로운 전체주의인가?

 

한 할아버지가 서울시가 만든 홈페이지에 손자의 도움을 받아 정책 하나를 이메일로 보냈다. 시장은 그것을 보고 좋은 생각이라 판단하여 그 다음 날 회의에서 채택하였고 그런 사실을 다시 이메일로 할아버지에게 보냈다. 그날 그 할아버지는 얼마나 마음 뿌듯하였을까? 몇날 며칠을 걸려 한 자 한 자 입력하다가 그 불경 원문이 어느 사이트에 올라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전문을 고스란히 내려받을 때 스님의 심정은 어떨까? 산업사회에서는 희귀본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원로학자 구실을 할 정도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는 자가 위세를 부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누구라도 몇 번 클릭만 하면 백과사전 수천 권 분량의 정보를 안방에 앉아서 접할 수 있다. 정보화사회는 지식과 권력의 원천인 정보를 공유하고 분점한다. 자연히 권력의 위계질서가 파괴되고 탈중심화한다. 누구든 컴퓨터를 통해 자기 의사를 표현하고 정책을 제안하고 자신이 원하는 후보와 정책에 투표를 하고 곧 바로 답, 또는 피드백을 확인할 수 있다. 직접 민주정치의 길이 다시 열린 것이다. 그러니 이 사회는 텔레데모크라시를 실현하여 대중의 정치참여를 고양하고 다양한 의사와 견해를 수렴할 수 있다.

 

반면에 몇몇 빅 브라더(big brother)가 정보를 독점하고 통제한다면 이 사회는 산업사회보다 훨씬 더 억압이 내재화한 전체주의로 전락할 수 있다. 파워엘리트층은 정보와 채널을 독점하고 몰래 카메라가 개인의 사생활을 엿보듯 개인을 통제하고 있다. 우리의 비밀스런 잠자리까지도 몰래카메라로 감시되고 빅 브라더의 뜻에 어긋날 경우 ‘o양의 비디오’처럼 공개된다고 생각해 보라. 텔레데모크라시는 꿈일 뿐, 우리는 개인의 사생활마저도 철저히 감시되고 통제되는 사회로 가고 있다. 컴퓨터와 인공위성, 로보트공학을 결합한 이 메카니즘의 통제력과 조정력, 수용능력은 가히 상상을 불허한다. 예를 들어 cia가 바늘 구멍 만한 몰래카메라로 제3세계의 한 지식인을 감시한다고 하자. 그의 모든 행위는 인공위성을 통하여 수신되어 미국의 cia 본부에 저장된다. 그러다 어느 날 cia의 한 요원이 그 필름 가운데 한 부분을 보여주며 계속 미국을 비판하는 글을 쓰고 그런 행동을 할 경우 인터넷에 올린다고 협박한다면 그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그리고 디지털 격차(digital devide)는 양적인 면과 질적인 면 모두에서 현실화할 것이다. 양적인 면에서는 컴퓨터와 인터넷을 설치하고 다룰 줄 아는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 사이의 격차가 산업 사회의 계급 격차 이상의 불평등을 야기할 것이다. 질적인 면의 격차는 더욱 큰 문제이다. 디지털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많은 정보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그 정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이다. 인터넷을 아무리 잘 하더라도 거기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양적인 정보를 모으는 데 급급한 집단과 정보를 모아 새로운 지식과 지혜를 창출하는 집단 사이의 격차는 새로운 지배관계를 설정할 것이다. 당연히 후자는 새로운 지식 계급으로 부상할 것이고 이들은 정보를 모아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면서 그렇지 못한 자들을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정보화사회가 진행될수록 현재의 불평등과 독점, 억압구조가 산업사회보다 더 굳건하고 깊게 뿌리를 내릴 가능성 또한 크다.

 

경제영역: 빛의 속도로 거래하고 착취한다

 

경제와 사회 영역도 마찬가지이다. 정보화사회에서는 말 그대로 “빛의 속도로 거래하고 소비한다.” 한국의 사무실에서 나스닥에 상장된 증권에 투자할 수 있다. 인터넷에 오른 남 캘리포니아의 요트를 사이버 머니로 구입하면 며칠 안에 그 요트가 주문자의 집에 당도한다. 정보혁명으로 산업구조가 유통과 전자, 통신 위주로 재편되고 공장자동화(fa), 사무자동화(oa), 가정자동화(ha)가 단행되었다. 세탁기 사용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매일매일 엄청난 양의 가사노동에서 벗어났는데 휴대전화로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는 집의 주부는 얼마나 자유로울까? 노동자들은 중금속으로 가득한 작업실에 로봇을 대신 보내고 남는 시간을 여가로 활용할 수 있다.

 

어둠은 경제의 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발전론자들은 전자매체의 확산으로 근대화와 산업화가 미진하였던 영역에도 이의 혜택이 고루 퍼지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케이블, 위성통신, 컴퓨터를 매개로 선진 중심국가에 의한 주변의 제3세계에 대한 잉여착취와 저발전과 억압과 통제는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빛의 속도로 거래한다는 것은 빛의 속도로 착취를 할 수 있음을 뜻한다. 헤지펀드는 우리나라가 imf사태 때 당하였듯 하루만에 수백 억 달러를 빼내가 한 나라를 언제든 국가 부도의 위기에 놓이게 할 수 있다.

자동화는 노동의 억압에서 노동자를 구출할까? 정보화사회는 계획수립으로부터 작업의 감시, 평가에 이르기까지 전 노동의 공정을 기술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자동화가 지금의 추세로 진행될 경우 20%만이 노동을 하고 80%가 실업의 소외와 좌절감에서 나날을 연명할 ‘2 대 8의 사회’를 형성할 수 있다. 게다가 정보화사회는 아주 사소한 실수로도 핵전쟁과 같은 대형사고가 날 수 있는 위기의 사회이다. 보도가 되지 않을 뿐 지금도 병원이나 공장의 컴퓨터의 미세한 오류로 수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컴퓨터를 사용한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바이러스나 운영체제의 오류 하나로 오랜 세월의 연구나 노력을 한숨에 날려 본 경험이 있다.

 

사회문화영역: 쌍방향 소통을 하는 능동적 주체인가, 고독한 조난자인가?

 

산업사회의 대중문화 속에서 부품화하고 원자화하던 대중들의 위상이 바뀌고 있다. 그들은 영화든 텔레비전이든 작가의 의도대로 감상하고 해독하도록 강요되었다. 그들은 감독의 의도대로 웃고 울고 흥분하는, 욕망의 대상, 조작의 대상, 상품소비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정보화사회에서 그들은 하이퍼텍스트를 만들면서, 쌍방향의 미디어를 활용하면서 스스로 미디어를 선택하고 미디어 텍스트를 창조하는 주체로 거듭나고 있다.

 

인터넷은 말 그대로 정보의 바다이다. 여기서 네티즌들은 항해를 하며 정보를 취합하여 단순히 양적 확대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지식을 창조한다. 인터넷을 통해 무한한 정보를 서로 나눌 수 있고 이로 새로운 정보를 무진장하게 창출할 수 있다. 이것은 인류가 창조한 어떤 매체보다 효과적이고 기하급수적이다.

 

사이버 공간은 익명성과 쌍방향소통으로 인하여 현실 공간에서 작용하던 가부장적 권력이 무너지는 장이기도 하다. 내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니 명예훼손이나 불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마음껏 포르노 사이트에 들어가 열람할 수 있고 특정인과 특정 기관을 비판하는 글을 올릴 수 있다. 어떤 사이트에선 순진하고 고독한 청년으로 행사할 수 있고 어떤 사이트에선 지적이고 예리함을 갖춘 지식인처럼 글을 쓸 수 있다. 이처럼 익명성과 다중정체성이 보장되기에 현실공간의 권력과 권위를 마음껏 조롱하고 풍자하고 공격할 수 있다. <딴지일보>를 비롯한 안티사이트의 등장은 이를 입증한다.

 

반면에 정보홍수는 개인을 무력화하고 소외를 더욱 강화할 수 있다. 인터넷 중독증은 식음을 전폐하고 인터넷 게임을 하다가 벌써 여러 사람이 죽을 정도로 새로운 문명병으로 부상하고 있다. 인터넷으로 원조교제가 확산되고 음란물이 아무런 제재 없이 전 세계적으로 동시에 유통되면서 도덕은 황폐화하고 있다. 진지한 비판이 사라지고 인신공격성 비판과 장난으로 올리는 글들이 정보의 바다에 쓰레기를 떠다니게 한다. 인터넷은 개인의 사고와 삶을 단순화하고 있으며 개인을 더욱 고립시키고 있다. 인터넷을 떠도는 네티즌은 전 세계를 향하여 무한대로 열린 대화를 하는 어엿한 주체가 아니다. 그는 대화를 시도하지만 항상 혼자인, 인터넷 바다의 고독한 조난자일 뿐이다.

 

세계체제: 정보고속도로는 바리케이드 없는 식민고속도로

 

이들보다 더 강력하고 역기능이 심한 정보화사회의 최대 적은 인터넷 제국주의, 혹은 미디어 제국주의이다. 미국의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점유율은 전 세계에 걸쳐 80%에 이르러 컴퓨터를 사용을 하든 사용을 하지 않든 그럴 때마다 엄청난 로열티를 미국에 지불한다. 인터넷은 기본통신규약, 즉 tcp/ip (transmission control protocol/ internet protocol)에 따라 정보를 검색하고 그 정보를 내려 받거나 혹은 이를 통해 상업적 거래를 할 수 있는 세계컴퓨터조직망이다. 원래 인터넷은 1969년 미국국방성과 미국과학재단의 자금지원으로 미국국방성연구계획처에서 만들어진 최첨단 정보통신매체이다. 당초 국방 및 연구목적으로 개발되었으나 최근에는 파일 전송, 다른 컴퓨터 네트워크 및 컴퓨터 게시판에 대한 접속, 검색 서비스를 지원하고 있다. 그리고 인터넷은 이에 필요한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을 제공하고 있다. 인터넷의 정보를 관장하는 호스트 또한 80% 이상을 미국이 점하고 있다. 서부 개척시대에 인디안 땅에 깃발을 먼저 꽂은 백인이 그 땅을 소유하였듯, 미국은 도메인 닷 컴을 독점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한다.

 

비단 이것만이 아니다. 마이크로 소프트, ibm, 엑슨 등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은 컴퓨터, 옥상의 위성통신 수신기, 케이블 등을 통하여 제3세계의 기업과 정부를 자기네가 마음대로 통제하고 조작할 수 있는 네트워크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또 이 네트워크는, 포스트모더니즘 비평이나 신자유주의에서 보듯, 관료와 지식인, 문화산업가와 비평가, 예술인 등 소위 지식인들을 포섭하여 첨병으로 활용하고 있다. 첨병들은 강단에서, 언론에서 미국식 가치, 양식, 상징, 이데올로기, 제도와 체제를 전파하는 전도사 역할을 한다. 이 네트워크에 들어온 자들의 결속은 점점 더 강화되고 이의 대외적 영향력은 점점 더 증가하였다. 이로 이제 제3세계에서는 국가조차 이 네트워크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으며, 오히려 거꾸로 이 네트워크가 제3세계의 국가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를 더욱 강화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미국은 케이블, 인공위성, 컴퓨터를 연계시켜 미국의 군사력과 정보력을 증강시켜 왔다. 미국은 80년에만 군사용 컴퓨터의 소프트웨어 비용으로 30억달러를 지출하였다. 한때 전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던 cobol을 개발한 주된 추진 세력도 미국 국방성이다. 미국 국가안보국(nsa)은 위성통신 감청망인 에셜론(echelon)을 이용하여 전 세계를 대상으로 전화통화, 팩스, 이메일을 시간당 수십 억 건씩 도청하고 있다. 미국은 부인하였으나 미국 국가안보국의 직원인 웨인 메드슨은 에셜론이 정치인뿐만 아니라 고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고 테레사 수녀에서 국제사면위원회나 그린피스 등 영향력 있는 국제단체와 로마교황청도 도청했다고 주장하였다. 안보국의 주된 업무는 전세계에 걸쳐 거의 모든 통신망을 도, 감청하여 국가간, 기업간 그리고 표적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커뮤니케이션을 감시하고 분석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이를 미국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판독이 불가능한 암호를 개발하는 것이다.

 

사실 1960년대 전자기술혁명의 총아로 일컬어졌던 컬러 tv가 세계 각국의 대통령 선출방식을 바꾸고 그 선거결과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처럼 1990년대 정보통신기술혁명이 세계 모든 기업의 경영패턴을 변경시키고 기업경영의 세계화를 몰고 왔다. 이처럼 미국은 정보화사회의 모든 매체를 동원하여 중심에 의한 주변의 문화침투를 빠른 속도로 확대하고 잉여착취, 억압과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보화가 진행될수록 “문화적 동시화”, “미국 문화의 동시화”가 더욱 강화될 것이며 현재의 불평등은 더욱 심화할 것이다. 대신 제3세계의 독창적 문화와 사회적 창의성은 혼란을 겪으면서 차츰차츰 파괴될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여 정보고속도로는 ‘식민고속도로’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이 식민고속도로의 속도는 거의 무한대로, 무역보호정책, 관세정책 등 제한속도가 있던 산업사회에서는 그 속도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고속도로를 거부하면 그 국가는, 산업사회에서 포장도로가 깔리지 않은 곳이 오지로 남은 것처럼, 낙후지역으로 남을 것이다. 문제는 브레이크를 걸거나 적절한 곳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는 것인데 거의 무한대의 속도가 용인되는 곳에서 이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며 불가능하기까지 하다.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저번 호에서 작지만 리눅스의 성공은 ‘연대’와 ‘공유’에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연대와 공유의 원칙 아래 우선 우리는, 미디어 제국주의의 본질, 제국주의와 종속국가와의 관계, 자본의 유입형태, 문화산업의 구조, 제도, 기술도입과정, 생산과정과 분배과정, 이데올로기의 침투과정, 문화생산물의 수입현황, 중심국가로부터 편입된 문화생산물의 내용과 형태, 다양한 계급들과 계층에 의한 문화표현과 상징, 소비양식에 대하여 파헤쳐야 한다. 그리고 헐리웃의 전쟁이나 공상과학 영화에 남성 백인만이 정의를 구현하고 인류를 구원한다는 백인우월주의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밝히듯, 미국의 대중문화 텍스트 속에 담긴 여러 신화와 이데올로기를 분석하고 이에 대하여 대항신화를 형성해야 한다.

 

사이버 공간을 오가는 텍스트에 대하여 정치 해석을 우선하되 다양한 의미를 찾는 열린 읽기를 하여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다시 쓰기’를 감행하여 세계를 다시 구성하여야 한다. 초등학교 3,4 학년을 데리고 실험을 하였다. <토끼와 거북이> 우화를 읽고 거기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어린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을 향하여 말했다. “얘들아, 토끼와 거북이 우화를 잘 읽으면 거기에서 잘못을 찾을 수 있을 게다. 그것을 한번 찾아보아라.” 아이들은 처음엔 어리둥절하더니 이내 “산에 사는 토끼가 물에 사는 거북이와 느닷없이 만나는 것은 이상하다.”에서부터 “토끼가 잠을 자는 새에 거북이가 달려가 일등을 한 것은 비겁하다.”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적이 나왔다. 그것을 발표하게 한 다음 다시 아이들을 향하여 말하였다. “자, 발표 잘 들었지? 어느 것은 여러분이 옳다고 생각할 것이고 어느 것은 그르다고 생각할 것이다. 자. 이번엔 너희들이 이솝이라고 생각하고 잘못을 고쳐 토끼와 거북이를 다시 쓰지 않겠니?” 아이들은 금세 눈을 반짝이며 신이 나서 썼고 그 이상으로 신명나게 발표를 하였다. 이 중 가장 많이 거론된 이야기가 거북이가 토끼를 깨우고 토끼는 이에 감동을 하여 같이 어깨동무를 하고 들어가는 것으로 고친 것이었다. 그 전의 <토끼와 거북이>가 경쟁심을 부추기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품고 있는 담론이었다면 후자는 이와는 정반대로 그런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부정하는 담론을 형성한다. <토끼와 거북이>를 그대로 읽은 어린이와 어깨동무하고 가는 것으로 결말을 바꾼 어린이가 세상을 보는 눈은 엄청 다르리라고 본다. 이처럼 제국주의적 종속을 강화하고 있는 모든 제도적 틀, 제국주의적 신화를 전파하는 대중매체를 끊임없이 비판하고 감시하며 결국에는 해체해야 한다.

 

인터넷이 국가와 문명간의 대화를 늘리고 정보격차와 불평등을 해소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메일을 통하여 상대방의 얼굴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줄 수도 그의 눈물이 마르도록 따뜻하게 포옹해 줄 수도 없다. 광장이 사라진 시대에 노동자들은, 정의를 외치려는 자들은 어디에서 모여 외침을 전할까? 혹자는 마르코스가 성공한 예를 들어 인터넷 시대엔 게시판이 광장이라고 말할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서 전 세계를 향하여 투쟁하고 연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그 공간에서 싸늘한 정보를 볼뿐이지 뜨거운 피와 불거진 목젖을 보지 못하지 않겠는가? 다가오는 미래에 인류는 인터넷과 컴퓨터를 이용하여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의족처럼 따스한 피가 흐르지 않는 창조일 뿐이다. 이것이 정보화사회, 새로운 문명의 빛과 그늘이다.

 

뉴미디어시대, 일방통행에서 쌍방향소통으로

 

라디오, 텔레비전 등 올드미디어는 감독이든 연출가든 시인이든 텍스트를 만든 자의 메시지를 수용자가 일방적으로 해독하도록 강요하는 시대였다. 라디오의 청자나 텔레비전의 시청자는 자동차 안이나 거실에서 방송을 듣고 보며 텍스트에 담긴 제작자의 메시지를 일방적으로 전달받아야 하였다. 대중문화만이 아니다. 대통령후보의 연설도, 석학의 강의도,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소식도 올드 미디어를 통해서 전달받기에 이들에 대해서 일방적 해독을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올드 미디어에서 수용자가 나름대로 해독할 자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올드 미디어의 일방통행 구조는 일상영역에까지 침투하여 수용자의 해독의 자율성이나 자유를 크게 위축시켰다. 일방통행으로 전달되는 방식이 일상화하면서 대중의 일상생활의 영역마저 일방통행의 메커니즘이 지배하게 되었다. 진리를 창달하고 정부와 맞서서 제4부로 기능을 하리라던 언론은 국가를 선전하고 지배층의 이념을 합리화하고 그들의 상징을 확대재생산하는 ‘국가기구’로 전락하였다. 귀족만이 누리던 문화를 대중에게 누리게 하여준 프로메테우스라 여겼던 대중문화는 문화를 상품화하고 물신화하였다. 그리고 거실의 흔들의자에 앉아 캔 맥주를 보며 프로야구 중계를 보는 노동자가 자신이 중산층이라 착각하여 사회변화를 바라지 않듯, 대중문화는 ‘반역을 향한 동경’마저 길들여 노동자를 보수화하였다.

 

그러나 뉴미디어의 가장 큰 특징은 쌍방소통의 미디어라는 점이다. 뉴미디어 시대에서 수용자는 제작자의 의도와 메시지를 전달받는 수동적 대중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해독하며, 이에서 더 나아가 발송자 또는 제작자를 향하여 메시지를 전하고 스스로 제작자가 될 수도 있다. 그는 컴퓨터 채팅을 하듯이 상대방이 보낸 텍스트에 대해서 자신의 해독과 가치평가, 다시쓰기를 곁들여 새로운 텍스트를 만들어 상대방에게 다시 보낼 수 있다. 인터넷에 오른 텍스트에 손질을 하여 다시 하이퍼 텍스트를 만들 수 있으며 디지털 텔레비전으로 송출된 수천 수만 개의 채널 가운데 몇몇 프로그램을 내려 받은 다음 이를 조합하여 자신이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

 

올드미디어 시대에는 패러다임도 실존주의나 마르크시즘, 현상학처럼 이분법적인 패러다임, 주체 중심의 사유가 지배하였다. 나는 나이고 너는 너였으며 주체와 객체는 엄연히 구분되어 있었다. 그러면 뉴미디어에 맞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있을까?

 

사이버공간은 퍼지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

 

사이버공간은 동일성을 해체한다. 이곳에서는 나와 남, 동일자와 타자,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진다. 무수한 네트워킹 속에서 모든 것을 둘로 가르던 이분법은 자연스러이 사라진다. 내가 타인 속의 나와 대화를 하고 타인이 내 속의 그와 이메일을 주고받는 곳이다. 내가 합성하여 만든 비서가 내 문서를 작성해 주고 하루의 일과를 알려주듯 현실이 바로 환상으로 변하고 환상인가 하면 그것은 곧 현실이 된다. 언어기호를 넘어서서 이미지를 통하여 느끼고 생각하기에 상징계를 깨고 상상계를 지향한다. 누구든 마음대로 들어가고 자유로이 나가기에 모든 경계, 영토, 권위, 제도는 무너진다. 익명의 네티즌끼리 소통하면서 누구든 인종, 계급, 성, 사회적 위상, 학력을 묻지 않는다. 현실, 또는 아날로그식으로는 권력을 형성하던 요인들이 작용을 하지 않으니, 권력과 권력의 담론들은 이곳에서 기능을 하지 못한다. 사이버 공간은 해방의 장이자 평등의 장이다.

 

아날로그형 인간이 집단과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충실하고자 한다면 디지털형 인간은 개인과 자아에 탐닉한다. 아날로그 인간이 명령과 위계질서를 따르고자 한다면 디지털형 인간은 이를 깨고 모험을 하고 해방을 하려 한다. 아날로그 인간이 구속에 얽매여 영토를 지키려고 한다면 디지털형 인간은 구속에서 벗어나 유목민으로 떠돌고자 한다. 그래서 미국 미네소타대 심리학과 마크 스나이더 교수는 현실과 가상세계를 넘나드는 사이버 시대의 인간형을 다양한 블록으로 자유자재로 모양을 만들 수 있는 레고와 비유해 ꡐ레고적 인간형ꡑ이라고 규정한다.

 

사이버 세계는 이분법을 비롯한 모든 경계를 넘어서려 한다. 여기서 나온 논리가 퍼지식 논리이다. 원래 디지털과 대립되는 것이 퍼지인데 이진법에 기초한 디지털이 이분법적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아날로그식 사고이고 퍼지의 논리가 사이버시대의 논리인 것은 아이러니하다. 서양은 아리스토텔레스 시대 이래 ‘a or not-a’의 논리를 추구하였다. a가 아니면 나머지는 a가 아닌 것이어야 한다. 동일한 사물이 동일한 사물과 동시에 동일한 점에 속하면서 또한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즉 a이면서 a가 아니기도 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모순율이다. 서구의 거의 모든 철학과 예술은 이 모순율을 인정하는 가운데 전개되었다.

 

그러나 실제 세계는 ‘a and not-a’이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가, 사랑하지 않는가에 대한 질문은 하면 답은 정확히 ‘yes or no'로 갈리지 않는다. 물론 상당수가 손을 들었고 그에 못지 않은 사람들이 손을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손을 들다가 만 사람, 손을 반쯤 들다 내린 사람이 꽤 존재할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다. 사랑한다고 답한 이들도 100% 절대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마음도, 싫어하는 마음도 있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더 강하기에 사랑한다는 쪽에 손을 든 것이다. 싫어한다고 손을 든 이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실제 세계는 a인 동시에 not-a인 것이 아니다. 퍼지이다. 그러기에 세탁기, 진공 청소기, 카메라, 캠코더, 헬리콥터 등에 퍼지의 원리를 응용하였더니 기계의 오류를 줄이고 기계의 지능지수를 높일 수 있었다.

 

따르기도 하고 따르지 않기도 해라

 

화쟁의 논리는 퍼지식의 논리로 이분법적 모순율을 거부한다. ‘a and not-a’의 논리, 곧 둘이 아니면서도 하나를 고수하지도 않으며[無二而不守一], 따르는 동시에 따르지 않는[順而不順] 논리가 화쟁의 논리이다.

 

따라서 하거나 따라서 하지 않고도 말한다’는 것은, 만일 마음에 직접 따라서 설법하면 삿된 집착을 움직일 수 없으며, 또 만일 마음에 따르지 않고 오직 설법만 하면 바른 믿음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바른 믿음을 얻어 본래의 삿된 집착을 버리게 하려면, 혹은 따라서 설하고 혹은 따르지 않고 설법하라는 것이다. 또 만일 직접 道理만 따라서 설법하면 바른 믿음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니, 그것은 그 사람의 뜻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도리에 따르지 않고 설법한다면 어찌 올바른 이해를 낳으리요. 그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까닭이다. 올바른 믿음과 이해를 낳으려면 혹은 따라서 하고 혹은 따르지 않으면서 설법해야 하는 것이다.(順不順說者 若直順彼心說則不動邪執 設唯不順說者則不起正信 爲欲令彼得正信心 除本邪執故 須或順或不順說 又復直理說 不起正信 乖彼意故 不順理說 豈生正解 違道理故 爲得信解故 順不順說也) <<金剛三昧經論>>, <入實際品>, ≪韓國佛敎全書≫, 제1책, 638-상:

 

진리를 그 진리대로 전하면 그 세계는 중생의 이해 세계와는 너무도 멀리 떨어진 것이라 중생이 미처 이를 깨닫지 못하여 미혹한 마음 또한 버릴 수 없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그 뜻을 전하면 그것은 진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므로 진리를 왜곡하여 바른 믿음을 일으키지 못한다.

 

진리에 철저히 입각하여 말하면 그것을 올바로 전달하여 참다운 이해와 믿음은 가져오되, 사람들마다 근기가 각기 다른데 천편일률이 되어 몰이해를 낳을 수 있다. 너무 근본에만 치우쳐 교조로 흐를 가능성도 있다. 소통의 관점에서 보아도 수신자와 발신자가 놓인 상황의 맥락을 무시한 발화는 곡해되기 쉽다. 반면에 전달자가 어떤 진리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자기 나름대로 상황의 맥락이나 수신자의 근기에 맞게 해석하여 전달하면 쉽게 이해시켜 수신자가 가지고 있던 선입관이나 편견을 깰 수 있되, 진리의 실체를 왜곡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진리의 실상을 직시하되 상황의 맥락이나 수신자의 근기에 맞게 順而不順의 논법을 통하여 전하면 참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허위라 하는 것에도 일말의 진리가 담겨 있고 모두가 진리라고 하는 것에도 한 자락의 허위를 담고 있다. 그런데 각기 다른 견해로 맞설 때, 한 의견이 진리라는 이유로 이에 전적으로 동조하면 반대되는 의견에 담겨 있는 진리를 잃게 된다. 또 한 의견이 허위라는 이유로 이에 전적으로 반대하면 반대되는 의견에 담겨 있는 허위를 보지 못하게 된다. 또 두 견해를 모두 옳다고 하면 두 견해가 스스로 모순을 일으켜 다투며 두 견해에 있는 허위를 들여다 보지 못하게 된다. 반대로 두 견해가 모두 그르다고 하면 그 두 견해와 다투게 됨은 물론 두 견해에 담겨 있는 진리를 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올바로 진리를 전달하는 방법은 a and not-a, 즉 동조도 하지 않는 동시에 반대도 하지 않는 것이다. 전적으로 동조하지 않으므로 그 견해에 담겨있는 허위를 받아들이지 않게 되고 반대하지 않으므로 그 견해에 담겨있는 진리를 잃지도 않는다. 반대하지 않으므로 그 견해에 담긴 근본 취지와 목적을 어기는 것이 아니고 동조하지 않으므로 그 견해의 허위를 솎아내고 그에 담긴 도리를 제대로 받아들여 견해의 근본 뜻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순불순의 논법은 진정한 진리에 이르는 길인 것이다.

 

이렇듯 어떤 대립이든 이런 대립과 다툼(諍)을 아우르고(和) 궁극적 진리의 바다에 이르는 방편은 순불순인 것이다. 그러니 화쟁은 서로 다른 것을 차이와 관계로 바라보고 뜻이 서로 통하는 것에 맞추는 회통(會通)의 논법이다. 즉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되 부처의 진정한 뜻을 버리지 않는 것처럼, 여러 견해나 말씀의 핵심의미를 파악하여 하나, 한 맛의 바다로 돌아가는 것이다.

 

마크 스나이더 교수에 따르면 “타인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행동을 꾸미기도 한다.”나 “상황과 만나는 사람에 따라 다른 사람인 것처럼 행동한다.”에 “예.”라고 대답하는 이들은 디지털형 인간이다. 반면에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내 생각이나 행동을 바꾸지는 않는다.”에 “예.”라고 대답하는 이들은 아날로그 인간형이다. 전 시대에는 후자와 같은 志士形 인물이 바람직한 인간형이었다. 그러나 지사는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는 a or not-a의 인간형이다. 그는 세계를 분별하여 보는 인간이다.

 

화쟁은 주와 객, 주체와 타자를 대립시키지도 분별시키지도 않는다. 양자를 융합하되 하나로 만들지도 않는다.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중간도 아니다. 주와 객, 주체와 타자가 서로를 비춰주어 서로를 드러내므로 스스로의 본질은 없고 다른 것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낸다. 진리란 것은 진리가 아닌 것과 차이를 통하여 진리를 드러내고 진리가 아닌 것은 진리와 차이를 통하여 진리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날로그 시대는 동일성에 바탕을 둔 배제의 담론이 지배한 역사였다. 그것의 해악은 폴 포트를 통해서 앞 장에서 논한 바 있다. 동일성, 우열의 철학은 갈등과 대립을 낳으며 우열을 설정하는 순간 타자에 대한 폭력을 부른다. 순불순은 인터넷을 통하여 네티즌들이 타자를 배제하고 폭력을 가하는 동일성의 사유를 깨고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여 평화스러운 공존을 모색하는 것인 동시에, 이것과 저것, 서로 대립되는 것을 가르지 않고 모두를 부정하면서 긍정하고 긍정하면서도 부정하는 퍼지의 논리를 통하여 궁극적 진리에 이르는 사유구조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지금 상대방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라. 그 눈동자 한 가운데 자신의 모습이 들어가 앉아 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그를 ‘눈부처’라 한다. 눈부처가 보이는데 상대방에게 해코지를 할 사람이 있을까? 눈부처가 보이는 순간 너와 나의 분별은 사라진다. 너 아니면 나인 것이 아니다. 너는 나인 동시에 너다. 그처럼 네티즌들이 분별심을 넘어 바라보고 서로를 따르기도 하고 따르지 않기도 할 때 정보화사회는 정녕 희망의 사회로 다가올 것이다.

 

나와 남, 작가와 독자, 발신자와 수신자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인터넷을 통하여 세계의 모든 이들과 네트워킹을 하는 것, 그리하여 내가 전혀 모르던 곳의 사람과 문화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며 내가 정보를 올린 것이 익명의 타인에게 도움이 되고 정보의 바다를 항해하여 정보를 모아 인류를 위하여 새로운 무엇을 창조하는 것, 그것이 바로 뉴미디어 시대에 맞는 패러다임이리라.

 

연재를 마치며

 

화쟁은 진정 새로운 세계의 패러다임이 될 수 있을까? 또 화쟁의 패러다임을 인류가 받아들인다고 세상이 변할까? 많은 사람들이 화쟁의 패러다임이 올바른 길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꿈같은 이야기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상부구조의 변화만으로 토대의 변화가 온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 비과학적 인식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토대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분명 토대는 변하고 있다. 아날로그 텔레비전이 일방향 소통을 하였다면 디지털 텔레비전은 쌍방향 소통을 한다. 자연 일방향의 원리나 패러다임은 무너지고 상생과 화쟁의 패러다임이 이들 토대에 대한 상부구조로 서리라.

 

더불어 필자가 확신하는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이에 대하여 강의하는 날, 필자는 출석부 순서대로 서너 명의 학생의 이름을 부른 다음 “너희는 상놈의 자식이니 내 강의를 들을 자격이 없다. 미안하지만 조용히 나가달라.”라고 말한다. 그러면 학생들은 의아한 표정을 짓고 당사자들은 어쩔 줄 몰라 한다. 교실은 ‘썰렁’ 그 자체이다. 썰렁함이 어느 정도 강의실을 휩쓸고 지나갔다 생각하면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한다. “여러분, 놀랐죠? 선생님이 잠깐 돌았나 생각한 사람들도 있을 게고. 중세의 야만을 조금이라도 맛보라고 그런 것입니다. 바로 200여 년 전만 해도 이런 무지막지한 말이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아니, 상놈은 아예 교육받을 엄두도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보통교육은, 만인이 자신의 지위나 신분에 관계없이 평등하다는 것은 그 누구도 어길 수 없는 대원칙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현대성의 힘’입니다.”

 

차별을 정당화하는 중세적 세계관에 맞서 휴머니즘의 원칙을 외치던 이들은 당시 전 인류를 통틀어 몇 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은 보편적인 원칙이 되었다. 봉건제 생산양식에서 자본제 생산양식으로 토대가 변한 것이 주 요인이지만 어찌 그것만이라고 하겠는가? 화쟁도 마찬가지이다. 현실적 가능성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정당성이다. 정당성이 있으면 힘을 가지며 가능성도 따라간다. 하늘이 어둡다 어둡지 않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거기 별만 반짝인다면 나그네는 그 별을 따라 힘들지만, 더욱 자유롭고 정의롭고 아름다운 세상을 향하여 그리움과 사랑이 가득한 길을 걸으리라. 그것이 인생이요 역사요 예술이다.

 

오늘 세상은 타락의 극이다. 얼마 전만 해도 뇌물을 받은 정치인이 텔레비전에 비춰지면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정치인이 비리를 저지르니 이제 얼굴을 뻣뻣이 들고 정치적 음모라 외친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여학생에서 어엿한 자식과 남편을 둔 아줌마까지 환락에 몸을 던진다. 도덕을 지키는 자가 오히려 조롱의 대상이 되고 정의를 지킨 자가 핍박을 받고 성실한 자가 퇴출당하는 죽음의 시대이다. 그럼에도 나는 새 시대에 대해 희망을 가진다. 아직 무엇을 모르던 청년 때처럼 세상과 인간에 대해 낭만적으로 바라보아서가 아니다. 지금은 정녕 서로가 서로의 악마스러움을 드러내는 시대이지만, 곧 서로가 서로의 佛性을 드러내는 시대로 전환이 되리란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행정고시에 합격하였다는 소식을 듣는 그 순간 “야, 이제 고급 공무원이 되었으니 무지막지하게 뇌물을 받아 부귀영화를 누리고 그것을 상납도 하여 출세좀 해야겠다.”라고 맹세한 사람이 있을까? 촌지를 받지 않는 선생이 없다고 한국 사회가 온통 난리를 칠 때, 한 선생님의 고통에 찬, 그러나 아름다운 선택에 대해 들었다. 그 선생님은 촌지를 받지 않아 동료들로부터 너 혼자 깨끗한 척 하냐며 왕따를 당하였다. 신념과 사직서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를 보고 그의 아내가 묘안을 냈다. 그는 아내가 가르쳐준 대로 다음 학기에는 촌지를 받았다. 그는 받을 때마다 그것으로 책을 사선 ‘00어머니 기증 도서’라 써선 교실의 서가에 꽂았다. 그리 한 학기가 지나니 교실 전체가 책으로 빙 둘러싸더란다. 결국 그 선생님을 압박하고 조롱하던 다른 선생님들도 이에 감화를 받아 촌지를 받지 않기 시작하였고 받더라도 아이들을 위해 쓰더란다. 자신의 상관의 책상에서 그동안 받은 촌지의 명단과 그것을 기부한 고아원을 적은 메모를 보고 그 부서의 모든 기자가 설사 어쩔 수 없이 촌지를 받더라도 자신보다 가난한 자를 위하여 썼다는 이야기도 언론인이 된 제자로부터 들었다.

 

그렇다! 우리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다만 잘못된 정치, 올바르지 못한 지도자를 만나고 인간을 저버린 교육을 받고 타락한 문화를 대하면서 그 불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악마스러움만 서로 조장하지 않았던가? 타락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을 타락하게 하는 구조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그 구조를 화쟁의 구조로 바꾸어야 하지 않은가? 세상을 탓하기보다 내가 먼저 부처가 되려 한다면 세상 모든 이들이 자신 속에 내재한 부처를 드러내지 않겠는가?

 

 

 

 

 

 

 

 

 

[출처] <퍼온 글> 현대사회의 위기와 대안의 패러다임으로서 원효의 화쟁사상- 이도흠/한양대 국문과 강사|작성자 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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