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

실천과 현실개혁의 선풍(禪風) / 방남수

수선님 2020. 10. 1. 11:24

실천과 현실개혁의 선풍(禪風)

참회 강조한 인욕보살의 화신

 

청담스님의 선(禪) 수행 바탕은 보살행의 실천과 현실개혁의 선풍(禪風)이라 할 수 있다. 스님은 간화선(看話禪)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었지만 현실과 떨어져 산 속에서 화두(話頭)만 참구하는 것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불교의 현실 속에서 수행을 멀리하고 막행막식(莫行漠食)하며 자신의 이권을 쫒아가는 수행자의 모습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잘못된 폐해를 극복하고자 진력하였다. 청담스님은 마음을 찾는 일에 수행의 역점을 두었다. 간화선을 바탕으로 수행에 전념한 청담은 만공(滿空)선사에게 깨달음을 인가(印可)받고 보임(保任)에 나섰지만 그 기간은 오래지 않았다. 한국불교의 현실이 스님의 힘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결국 청담스님은 한국불교의 중심에 서서 정화운동을 이끌었다. 하지만 스님이 한국불교의 현실개혁에만 매달린 것은 아니다. 전법교화에 있어서도 그는 보살의 삶을 살았다. 무엇보다 인욕적인 삶을 살며 이를 마음에 둔 선풍을 실천하였다. 그중에서도 선 사상을 정착시키기 위해 수행자의 삶을 살면서도 한국불교 현대화와 중생구제의 원력을 지닌 보살의 삶도 살았다.

유심(唯心)의 선풍

청담스님은 불교에 귀의하고 출가한 동기가 마음에 있다. 일체의 분별사량(分別思量)과 번뇌망념(煩惱妄念)을 떠난 마음, 우주를 주재하고 불생불멸하는 마음, 생각의 주체가 되고 업보(業報)의 주체가 되는 마음을 통하여 수행과 깨달음의 토대를 확고히 하고 있다. 청담스님은 《화엄경(華嚴經)》의 유심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모든 것을 마음으로 통찰할 때 나타나는 경계로, 마음을 통해 생명이 항상 충만해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청담스님은 모든 번뇌(煩惱)와 안락(安樂)과 행복(幸福)과 불행(不幸), 천당과 지옥도 마음이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마음이 유위(有爲)의 마음이며 일체유심조의 마음이다. 유위의 마음이란 여러 인연과 계합하여 만법을 창조한다는 뜻이다. 이는 범부로 태어나서 깨달음을 이루는 것도 모두 마음이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화엄경》에 “만약 사람이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알고자 한다면 응당 마음이 모든 여래를 조성한다는 것을 관찰하라”는 구절이 있다. 여래(如來)를 조성한다는 것은 깨달음을 얻기 이전의 수행과정을 말하는 것으로, 깨달음 후에는 조성의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에 유위가 아닌 무위(無爲)의 경지인 것이다. 이와 같이 청담스님은 마음 사상을 분명히 깨달아 무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간화선에서 주장하는 화두 또한, 이 분별심(分別心)과 알음알이 즉, 지해(知解)의 병통, 유위의 마음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분별을 떠난 지혜(智慧)를 반야(般若)라고 하듯 오직 마음만이 지해의 병통이 떠난 실상선(實相禪)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유심의 선풍이 스님의 마음과 마음자리를 찾아가는 철학으로 나타나고 선사상과 결합하여 정착하게 된다.

무위의 선풍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마주할 때 드러나는, 일체에 걸림이 없는 것을 무위의 세계라 말 할 수 있다. 《아함경(阿含經)》에서는 무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비구들이여, 무위란 무엇인가. 탐냄의 소멸, 성냄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이다. 비구들이여, 바로 이것이 무위이다.” 무위란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가라앉은 대자유의 경지임을 알 수 있다.

무위란 말로 나타낼 수 없는 법의 본성(本性)으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깨달음을 성취하도록 하기 위해 이름을 붙인 용어이다. 진여법성(眞如法性)을 설명하기 위해 가설적으로 명명한 말이다. 무위란 인연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인연에 의해 형성되지 않고 생멸(生滅) 변화 등의 작용을 갖지 않는 상태이다. 생멸 변천 현상을 초월한 상주불변(常住不變)하는 절대의 법이 무위이다. 이는 탐(貪)·진(瞋)·치(癡)가 소멸돼 온갖 분별망상과 번뇌가 끊어진 상태이며, 윤회로부터 해탈한 열반의 경지, 즉 대자유를 의미한다.

유위법(有爲法)은 번뇌 속에서 하는 일체 법을 뜻한다. 무위법(無爲法)이 번뇌가 하나도 없이 하는 일체 법을 뜻하는 것이라면 이에 상대되는 개념이 유위법인 것이다. 반면 유위법으로 사는 사람은 번뇌 때문에 모든 일에 집착(執着)과 장애의 괴로움을 받는 중생이다. 무위법으로 사는 사람은 번뇌가 없어서 모든 일에 집착하지 않고 근심도 없는 해탈(解脫)의 삶을 누린다. 그러므로 중생이 괴로움을 소멸하기 위해서는 유위법에서 벗어나 무위법을 얻어 자유로워야 하며, 유위의 중생이 무위의 부처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곧 선 수행임을 청담스님은 설법 곳곳에서 가르친다.

청담스님은 무심(無心)이 있는 곳에 마음을 두고 적멸을 통해 해탈의 자유를 얻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有)와 무(無)를 보지 않는 그 자리가 텅 빈 고요한 참 마음이요 올바른 깨달음이며 대자유의 세계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우리의 마음에서 주관과 객관의 상대적인 세계를 떠나는 것이 다름 아닌 걸림이 없는 대자유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주관을 쉬라고 설한다. 일체의 상대적인 세계를 떠나있는 마음의 본래면목의 자리가 다름 아닌 청정무위(淸淨無爲)한 마음이기에 무위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스님의 무위의 선풍은 주관과 객관의 세계를 떠난 진여본성(眞如本性)을 주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생각도 없고, 조작도 없고, 생겨남도 없고, 머무름도 없고, 소멸함도 없으며, 안팎으로 구함도 없으므로 별다른 수행이 없다. 사람 사람에게 본래로 고유한 천진자성(天眞自性) 그대로가 진여(眞如)이며, 실상(實相)이며, 열반(涅槃)이며, 피안(彼岸)인 것이다. 그와 같은 이치가 바른 길이며 근본이며 으뜸인 것이요, 이러한 경지가 대자유의 경지이다.

무위란 아무런 행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행위를 함에 있어 물고기가 물속을 가듯이, 새가 창공을 날듯이, 걸림 없이 하는 행동을 말한다. 청담스님은 시간적인 생멸변화(生滅變化)를 초월하는 상주(常住)·절대 진실의 경지인 대자유의 선풍을 견지하고 있다.

원융(圓融)의 선풍

현실세계를 융합하는 것을 원융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불교사상 가운데 모든 사상을 분리시켜 하나라고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에서 하나로 엮는 교리통합론이 바로 원융이다. 한국불교에 있어 일찍이 원효(元曉)스님과 지눌(知訥)스님, 그리고 보우(普愚)스님 등이 원융회통(圓融會通)한 전통을 세워 놓았다. 청담스님에게 있어 선은 마음이고 불성(佛性)이자 법(法)이다. 바로 이 마음이 모든 것을 융합하고 포용할 수 있는 이론적 기초가 된다.

스님의 선풍 가운데 또 하나의 특징은 이상과 현실을 화합하고 있다는 점이다. 선과 교(敎)에 치우치지거나 구애(拘碍)되지 않을뿐더러 성(聖)과 속(俗)의 구별이 없다.

청담스님은 철저히 원융 사상에 입각하여 하나가 만물이 되어 두루 통해 있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구별을 하여서도, 되어서도 안 된다며 중생과 부처를 구분하는 것, 번뇌와 해탈을 구분하는 것 등은 원융한 삶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원융한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임을 설한다. 이 마음이 허공처럼 넓은 것으로만 알았는데 깊이도 또한 깊고 모든 것에 대해 평등하다는 것이다. 즉 원융무애(圓融無碍)하고 염정(染淨)에 융합되고, 진속(眞俗)이 평등하며, 동정(動靜)이 이루어지므로 승강(昇降)이 가지런하고 감응(感應)의 길이 통하며, 진속이 평등하므로 생각하는 길이 끊어져 원융무애하여, 있고 없음에 걸림이 없어서 이사무애(理事無碍)하고 사사무애(事事無碍)함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있고 또한 없으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어서 중도(中道)라고 한다. 마음은 우주법계의 어느 곳에나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스님은 심성(心性)과 불성(佛性)에 바탕을 두고 형성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선수행은 심성과 불성을 뜻하는 ‘마음을 깨닫는 수행’이라 보고 있다. 하지만 그 마음자리만은 변하지도 옛것도 아닌 원융한 자리임을 밝히고 있다. 청담스님에게 있어 삶의 모든 공간은 수행의 공간이요, 교화의 공간일 수밖에 없다. 수행(修行)과 교화(敎化)가 둘이 아닌 원융한 세계가 바로 선의 세계이다.

너와 내가 둘 아닌 불이(不二)사상이 원융무애의 사상이다. 우리는 세계일화(世界一花), 우주일가(宇宙一家)를 말한다. 세계는 한 송이 꽃이요, 하나의 가족이다. 꽃은 뿌리와 줄기, 잎과 가지가 있지만 무엇 하나 필요하지 않은 것이 없고, 옳고 그르다고 분별할 수 없다. 그 자체가 꽃 한 송이일 뿐 원융의 마음으로 보면 모두가 하나이다.

청담스님은 정화 개혁 수행에 있어서는 이상과 현실을 원융하고, 삶에 있어서는 고독한 수행자였다. 그렇지만 실천행에 있어서는 보살이었고 무소와 같은 불퇴전의 용맹심을 과시했다.

대승보살도(大乘菩薩道)의 선풍

청담스님에게는 인욕(忍辱)보살의 화신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스님은 중생교화를 펼치는데 있어서는 무엇보다 업(業)의 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참회(懺悔)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보살행을 실천해야 하는데 이는 영원한 행복의 씨앗이며, 깨달음의 지혜를 얻어 어리석음과 갈애(渴愛)를 소멸하여 윤회(輪廻)하는 고통에서 해탈하는 지름길임을 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행복의 씨앗을 심어야 하는데 참회와 보살행을 통해 가능하다. 그러면 마음의 평안이 오게 되는데 이러한 바탕 위에 수행해서 무명(無明)을 소멸하고 지혜를 얻어 어떤 일에도 갈애를 일으키지 않으면 영원한 행복인 열반을 얻게 된다고 강조한다.

대승보살도는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을 목표로 하는 보살의 길로 사홍서원의 발원과 육바라밀 실천을 근본으로 한다. 청담스님은 한국의 불자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대승보살도로 보았다. 위로 깨달음을 구하는 것은 바로 마음을 바로 아는 것이라며 마음을 깨친 바탕 위에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원력을 세워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것이 보살도의 완성이라고 보았다.

스님은 “성불을 한 생 미루는 한이 있더라도 중생제도를 하겠다”, “중생제도를 위해서라면 지옥에라도 가겠다”,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가겠다”는 원력을 세웠는데, 이는 중생제도를 위한 보살심(菩薩心)의 발로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면서 중생의 마음을 깨우쳐 주기 위해 한 평생 마음사상을 법문하였다. 또한 불교정화를 위해 보살행을 실천한 삶과 실천행 그대로가 대승보살도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청담스님은 보살도 완성을 위해선 육바라밀을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평소 육바라밀(六波羅密)을 강조하며 불자들이 보살도를 실천하도록 당부했다. 이것이 스님의 ‘대승보살의 선풍’이라 할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의 가장 기본은 “나쁜 짓을 하지 말고 선하고 옳은 일을 하며, 마음을 항상 깨끗이 하는 것”이라고 한다. 불교의 근본은 악(惡)한 행을 하지 않고 선(善)한 일을 받들어 하며, 스스로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육바라밀은 바로 이 마음의 때를 벗기고, 청정본연(淸淨本然)의 본래 마음을 회복하기 위한 방법이요, 수단이다. 번뇌와 망상이 가득한 삼독(三毒)의 바다에서 열반의 저 언덕에 도달할 수 있는 뗏목과 같은 것이 바로 육바라밀 실천이며, 육바라밀의 실천은 보살도의 완성으로 이어진다.

육바라밀의 실천은 바로 대승보살행의 완성이다. 청담스님은 대승보살의 실천행을 통한 수행을 해야 열반의 경지인 청정본연의 자성(自性)으로 돌아간다고 보았다. 그래서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방법을 밝힌 수행법으로서 대승보살의 선풍을 견지했다.

스님은 주관(主觀)과 객관(客觀), 성(聖)과 속(俗), 출세간(出世間)과 세간(世間), 승려와 신도, 선과 교를 아우르는 마음 사상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철저한 수행과 과감한 현실참여 그리고 중생제도의 대발원은 청담스님의 대승보살행에서 나온 걸림 없는 삶이었다.

청담스님 선의 기초는 마음에 있다. 이 마음을 바탕으로 한 청담의 선풍은 크게 유심의 선풍, 무위의 선풍, 원융의 선풍, 대승보살도의 선풍으로 나눌 수 있다. 근 · 현대 많은 선승들이 간화선을 주창하였다. 따라서 우리가 선을 논할 때 간화선에 경도되어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청담스님은 본래면목(本來面目)의 마음을 찾아 우리가 사는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활발하게 살라고 가르쳤다. 이것이 현대 한국선이 나아가야 할 하나의 지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전통과 현실, 이상과 개혁이라는 화두 전체를 융합한 선사상의 정립이 스님의 또 하나의 특징이다.

방남수 | 불교문예학 박사, 평택 청담고등학교 교장

 

 

 

 

 

 

[출처] 청담스님/방남수|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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