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

광덕스님 사상의 개요

수선님 2020. 10. 1. 11:56

광덕스님 사상의 개요

 

 

 

 

Ⅰ. 들어가는 말

Ⅱ. 광덕스님 사상의 내용.

1. 선(禪) 사상.

2. 반야 사상.

3. 화엄 사상

Ⅲ. 실천으로서의 법등운동.

Ⅳ. 맺음말.

 

 

 

 

Ⅰ. 들어가는 말

 

 

광덕스님(1927 - 2009)은 현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전법보살(傳法菩薩)이다. 스님은 1950년 범어사에서 동산(1890-1965) 큰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간화선 수행에 진력하여 득력하신 뒤로는 공(空, śūnya)사상에 바탕 하여 보현행원을 널리 펼치셨다. 초기에는 『금강경』의 반야사상 즉 공사상을 널리 펴기 위해 소천 선사(韶天 禪師)의 뜻을 따라 함께 『금강경』독송운동을 펼치며 『금강경』을 통하여 구세(救世)․구국(救國) 운동을 전개했다.

 

스님에게 불교의 생명성을 체득케 한 은사였던 하동산, 그가 반야사상에 눈뜨게 된 데에 결정적인 계기를 주었던 신소천의 영향은 지대하다. 이들은 수행, 포교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불교의 민족운동, 불교재건으로서의 정화운동 등에 일생을 바친 당사자들이었다.

 

특히 스님의 은사인 하동산은 불교정화운동(1954 - 1962)을 최일선에서 추동한 이력이 있다. 스님은 은사를 보필하면서, 정화운동의 이면, 고뇌, 지향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출가 이후 수행에 전념하다가 1955년 교단 정화불사가 시작되자 불교 중흥의 횃불을 들고 정화에 선두에 서서 위법망구로 활약하였다. 스님은 정화불사의 불꽃이 잦아들자 비구 종단의 기틀을 잡아 안정시키는데 서무국장직을 시작으로 종단 행정 실무에 참여한 이후 총무부장 등으로 종단 행정을 공고히 하는 데 일조하였다. 이후에는 종회부의장 등을 역임하며 종헌 종법의 제․개정에 힘을 쏟고 종단을 안정시키는 데 공헌하셨다. 뿐만 아니라 스님은 정화운동의 이념을 계승하려는 구도에서 나온 선림회와 영축회의 간부로 참여하였던 것도 주목 할 내용이다. 스님은 종단 소임을 보면서 대소사에 있어 대화와 타협을 통하여 화합을 강조하고, 논리적이면서 합리적인 자세로 대안을 제시하며, 통합 종단의 이(理)․ 사(事) 간의 정통성 수호에 투철한 안목을 보이기도 하셨다.

 

그러나 스님이 혼신의 힘을 다해 맡았던 교단은 혼미의 연속으로 의도한 대로 나가지 못했다. 1970년대 초반부터 서서히 드러난 교단 내부의 갈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스님은 교단내부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방하착(放下着)하고 혼자서라도 그를 해결하기 위한 길로 종단 제도권의 외부의 활동을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불광(佛光)의 선언이었다. 스님의 고백은 『불광』 231호(1994년 1월호)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그때 여건과 상황으로는 월간 『불광』을 만들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1954년부터 시작된 불교정화운동은 1962년 통일종단의 시작으로 10여 년 동안 우리 불교계는 안정을 찾아 갔습니다. 그 일이 1972년에 끝나자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불교 포교와 교육이었습니다.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떳떳하게 내놓고 이렇다 하게 포교하는 사람이 없었지요. 그 당시 불교 월간지가 2개가 있었는데 그것도 내다 말고 했지요.

 

불교정화가 한국 불교의 정맥을 찾고자 한 일이었는데 만약 자체의 내실화와 포교가 확충되지 않으면 그동안의 불교정화가 한낱 종권탈취였다는 지탄을 면키 어려웠습니다. 불교의 존재 이유가 이 땅의 빛이 되고자 하는 것인데 그것의 당위성만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만큼 포교와 교육이 절실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월간 불광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1년쯤 뒤에 불광법회가 생기게 되었지요.

 

 

월간『불광』의 발간, 불광법회의 등장이 모두 당시 시대상황, 즉 불교 정화운동의 계승, 한국불교의 정맥을 찾는 것, 불교가 마땅히 해야 할 포교와 교육에 대한 사명감의 자각에서 나온 것이다. 스님의 이 같은 자각․실천은 한국불교가 사회, 조국, 역사, 시대상황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각성에서 나온 것이다. 스님은 1975년 10월 16일 불광법회를 창립 할 당시 다음과 같이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

 

 

행동으로 뛰어나오지 못하는 불법은 불법이해의 지식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불광은 행동을 통하여 인간 본성의 무한성을 소리높이 외쳐왔지만 그것은 아직은 지상을 통한 절규 밖을 넘지 못했다. 그래서 그동안 수행위주의 불광법회를 가질 것이 요청되어 형제들의 노력으로 우선 주 1회의 법회를 갖기로 했다. 모이는 날은 매주 목요일 오후 6시 30분. 이 모임이 불광을 우리의 심신에 체달하는데 힘있는 도량이 되기를 염원한다(『불광』1975년 12월호, 96면).

 

 

위의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광덕스님이 불광(반야바라밀)결사에 나섰음을 알 수 있다. 혜담스님은 “광덕스님에게 있어서 불광은 수행자로서의 삶의 전부였다. 불광을 위해서 수행을 시작했고, 불광을 위해서 잡지를 만들었고, 불광을 위해서 절을 창건하고 법회를 이끌었다.”(금하 광덕 스님 전집 발간 기념 토론회, 2009년 65면)고 밝혔다.

 

앞에서 논구한 바와 같이 스님은 간화선을 통해 득력하신 후 반야바라밀에 대한 확신으로 큰 원을 세워 보현행원을 실천하시면서 차안과 피안이 둘이 아닌 경지를 깨닫도록 하는 의미에서 마하반야바라밀을 대중들에게 염송할 것을 주창하셨다. 광덕스님의 사상은 선 사상, 반야사상 그리고 화엄사상에 바탕한 스님의 구상이 작용하여 불광사상으로 창조되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래서 필자는 본고에서 스님의 사상 즉 불광사상이 위의 세 가지 사상으로부터 창조된 내용이 무엇이고 어떻게 실천했는가를 탐구함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연구는 오늘의 불광운동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과 오늘의 한국 불교가 나아가야 할 신행모델 제시라는 점에서 필요성이 있다고 논자는 생각한다.

 

본 논문에서는 광덕스님 전집 1-10권과 대승불교의 불전을 중심으로 광덕스님 사상의 개요를 고찰하고자 한다.

 

 

 

Ⅱ-1. 선(禪) 사상.

 

 

한국불교는 전통적인 수행방법으로 참선(參禪), 간경(看經), 염불(念佛), 송주(誦呪)를 하고 있다. 스님은 범어사 선방에서 불법을 만난 직후에 불법의 본질에 접하였다고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저는 원래 불법을 알고서 절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참선 구경하는 것이 남자로서 해볼 만한 일이라고 권하는 분이 계셔서 석달 예정으로 선방 구경 간다고 절에 갔습니다. 그런데 지나다보니 한 40년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느낀 것이 첫 번째로는 바로 “불법은 종교적인 특수한 계층의 사상이나 철학이 아니라 인간 생명을 키우는 가르침이다. 인간 개개인의 생명을 키우는 가르침이다.”라는 사실이었습니다.(『호법총람』103면.)

 

 

저는 당초 절에 들어갔을 때 참선하는 선방에 갔습니다. 참선은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해서 문자를 배

우는 것이 아니고 직접 진리를 봐서 체득하는 것입니다. 즉 문자를 보지 않는 것이 선방입니다. 참선해서 불교의 실지를 체득해야 하는 선원에서 10여년을 보내면서 믿음을 얻은 것이 바로 이 불멸의 부처님입니다.(『호법총람』50~51면.)

 

 

이와 같이 스님의 사상적 첫 출발은 선방이었다. 스님은 범어사 선방에서 스님의 은사인 하동산스님으로부터 지도를 받아 10여년간 불교의 생명성 등을 체득한 과정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가끔 출가동기를 묻는데 제게는 특별한 동기가 없습니다. 건강상 문제, 선생님의 권유도 있고 해서, 선방에 구경갔다가 거기서 훌륭한 지도자를 만나고 생활하는 가운데 새로운 세계, 인간이 범범한 인간이 아닌 위대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 문을 한번 열어봐야겠다, 물러설 수 없다 해서 그 생활을 한 것이 3년, 30년, 40년이 되어 갑니다.(『불광』1999년 5월호, 138면.)

 

 

선은 인간의 근원적인 주체성, 우주의 근원적 실재성을 주체적으로 파악하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그 문제를 알게 하기 위해서 맞대면하자마자 들이댄 것입니다. 이게 꿀이다. 이런 식입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하루 한번씩 인사를 드리고 쫒겨나곤 했습니다. 비참했지요. 그때만 해도 건방져서 세상에 안하무인으로 고개를 들고 다녔을 때입니다.(중략)

 

그러니까 건방질대로 건방졌었는데, 거기 와서 말을 할 수가 없어요. 모두들 생각 갖고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 생각도 없고, 꿈도 없고, 생각이 끊어졌을 때, 너 자신이 무엇이냐? 들이대라 하는데 말이 소용없어요. 말은 생각이 아니냐, 말은 논리이자 개념의 조합이나 분석내지 그런 이론의 전개인데, 그걸 가지고는 안 먹혀 들어요.(중략)

 

큰스님께서는 처음부터 실물을 가지고 저를 닦달해 주셨습니다. 일 주일만에 저도 한마디 할 말이 있을 거 같아요. 그때는 나도 그 뜻을 몰랐거든요. 아침에 청소를 하고 들어가니, 그때는 큰스님께서 일정한 시간에 붓을 들고 쓰시는 게 있었습니다. 그때도 글을 쓰고 계셨습니다. 절을 막 마치고 한마디 입을 벌리려고 하는 찰나에 붓을 딱 들고 눈앞에 확 들이댔습니다.

 

“일러라, 일러” 말해라 이거에요. 저는 진땀이 확 났습니다. 너 말로 꾸며대서 이론으로 이러쿵 저러쿵 하려는 것, 그것 가지고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말과 이론 이전에 너의 생명 자체, 참으로 있는 것, 궁극적인 너의 생명을 생명이라고 하는 그 물건 내놔라” 이거에요. 저는 그말 한마디에 완전히 깨져 버렸어요. 쫒겨 났어요.

아 내가 이제까지 생각으로 알려고 했구나. 이론으로 꾸며 대려고 했구나. 그래서 집에 있는 책을 가져 왔으면 책을 보고 해명했을 텐데 하는 생각까지 했구나. 그때부터 선방에 들어가서 공부를 했습니다. - 참선하는 방을 선방이라고 합니다. 그때 6.25사변 나던 해, 그 해에는 30년쯤 참선하는 스님들도 있었습니다만 거기서 명예롭게도 한자리를 주셔서, 거기 들어가서 참선을 하고, ‘정말 생각하지도 않는 생각’이라고 하는 것의 내용이 되는 참선생활을 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불광』1999년 5월호, 141~142면.)

 

 

스님은 참선생활을 통해서 체득한 선에 대한 인식을 스님 선사상의 요체를 전하는 『선관책진』(불광출판부, 1980)의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선은 그릇된 이기적 눈을 돌려 본분지에 사무치게 세계와 역사를 자신 생명 속에서 관통하는 눈을 열어준다. 이런 점에서 선은 영원한 인간회복의 바른 길이다. 영원한 평화와 번영의 지혜를 여는 길이다. 세계와 중생 위에 진리의 꽃을 가득 피우는 보살의 땅인 것이다. 스님은 선이 “반야안(般若眼)”이 밝혀 낸 최상의 인간회복의 길이라고 하면서 그의 『선관책진』증보판(불광출판부, 2008)에 부치는 말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선이란 무엇인가? 이에는 여러 말이 당치 않다. 선은 언어와 사량이 끊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태여 말한다면 선은 근원에 사무쳐 절대적 주체를 자각한 행이라고 말하겠다. 인간 진면목을 자각하여 참된 주체성을 확립한다는 말이다.(『선관책진』 29면.)

 

 

스님은 범어사 선방에서 10여 년간 참선 수행하면서 자신의 사상적 구경처(究竟處)를 찾았다고 다음과 같이 밝혔다.

 

 

반야바라밀은 참선을 통해서 밝혀진 세계입니다. 참선을 통해서 밝혀진 궁극적인 진리의 세계, 원천적인 부처님의 세계, 그것이 반야바라밀입니다.(『호법총람』150면.)

 

 

여기에서 논자는 스님의 선교겸수관(禪敎兼修觀)을 발견할 수 있다. 선종의 실제 창시자라고 하는 육조 혜능(六祖 慧能, 638-713)대사가 대범사(大梵寺) 강당에서 승니도속(僧尼道俗) 천여 명을 상대로 첫 법문을 펼칠 때, 맨 먼저 던진 한마디가 “선지식들이여, 모두 마음을 깨끗이 하여 마하반야바라밀을 생각하라(善知識, 總淨心念摩詞般若波羅蜜)” (광덕역주, 『법보단경』, 불광출판부, 1975, 57면.)고 설하셨다. 『육조단경』에서 혜능스님이 ‘항상 마하반야바라밀을 생각합시다.’라고 한 주장과 스님의 저술이나 설법에서 강조하는 ‘항상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자’는 것과 거의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스님의 ‘마하반야바라밀’의 주창은 조사돈오선종(祖師頓悟禪宗)의 ‘염 마하반야바라밀(念摩詞般若波羅蜜)’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광덕스님이 주창한 ‘마하반야바라밀’ 염송은 선가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여 모든 사람을 깨닫게 해서 세상에 진리가 충만하게 만들고 사람들 가슴 가슴마다에 진리가 용솟음치게 하는 불광(佛光)운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논리의 예증으로 스님은 고려의 보조 지눌(1158-1210)과 조선의 서산 휴정(1520-1604)의 선교겸수관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현대의 문제까지 회통하는 전법보살의 전형이라고 논자는 생각한다.

 

 

 

 

Ⅱ-2. 반야 사상.

 

 

광덕스님사상의 주조(主潮)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Prajῆāpāramitā)사상으로 볼 수 있다. tm님의 어록, 여러 저서의 내용에서 나타난 내용의 주조는 '반야바라밀'로 나타난다. 스님 자신이 반야바라밀을 어떻게 표현하였는가를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부처님 법의 핵심은 반야바라밀입니다.

이 법문에서 삼세제불이 출현하시며, 일체 중생이 성불하며, 일체 국토가 불국장엄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 최상법문이 능히 국가를 진호하며 세계를 평화 위에 확정시키는 것입니다.

불광법회는 마하반야바라밀의 법문을 받들어 이 법문을 행하고 펴는 것이 본의입니다. 이러한 불광의 신앙이 능히 오늘의 우리 국가와 사회에 안녕의 토대를 불들어 가고 조국의 영원한 번영을 형성하는 것을 확신합니다.(광덕, <불광법당 건립 모연문> 1981.10.)

 

 

부처님은 진리의 몸이시고 법신입니다. 이 부처님을 우리는 반야바라밀이라고도 합니다. 진리 전체가 반야바라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본체는 반야바라밀입니다. 일체의 부처님은 반야바라밀에서 나왔고 그래서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라고 하는 것입니다.(광덕,『메아리 없는 골짜기』불광출판부, 1991, 239면.)

 

 

삼세제불이 무엇이냐 하면 마하반야바라밀입니다. 절대성이 근원적인 진리로 나타나는 분이 삼세의 제불입니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은 이 마하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절대성이 부처님이라고 하는 상대적 화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일체 제불이 마하반야바라밀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마하반야바라밀이 삼세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라고 그러는 것입니다.(광덕,『메아리 없는 골짜기』불광출판부, 1991, 303면.)

 

 

마하반야바라밀을 바로 알자. 항상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자. 마하반야바라밀에서 일체 장애와 재앙이 즉시 소멸되며, 일체 불보살의 위신력이 자신에게 충만한다. 일체 불보살과의 거리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마하 반야바라밀을 생각하는 곳에 불보살의 위덕과 은혜는 넘쳐나고 일체 소망은 성취된다. 마하반야바라밀을 생각하며 나의 생명의 바라밀상을 관하자. 환희와 용기는 넘쳐나고 끝없는 조화와 창조는 힘 있게 펼쳐진다.(광덕,『반야심경 강의』불광출판부, 173면.)

 

 

주지하는 바와 같이 『반야경』은 보살의 존재방식으로서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음‘을 강조한다. 이 무집착은 불(佛)도 포함하여 모든 개념설정을 부정한다. 그 근저에 있는 것은,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法)은 모두 그러한 고정된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空), 그 실체는 불가지(不可知, 不可得, 無所得)라는 견해이다. 이와 같이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아는 것(眞如, 諸法의 實相, 法性)이 ‘반야바라밀(Prajῆāpāramitā)’이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에 의해 깨달음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이타행(利他行)에 매진한다.

 

『반야경』에는 송(頌)의 수에 따라 길고 짧은 여러 개의 경(經)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제일 먼저 성립되었다고 간주되는 것은 『팔천송반야(Aṣṭasāhaśrikā)』이며 이것이 확대되어 25,000송의 『대품반야』가 성립되었다. 그 외에도 18,000송, 100,000송으로 된 것도 있었으며 짧은 것으로는 『금강반야바라밀다경, Vajracchedhikā-prajῆāpāramitā-sūtra』의 500송,『반야심경, prajῆāpāramitā-hṛdaya-sūtra』의 300송과 같은 것이 있다.

반야경전의 주요사상은 공(空)사상이다. 공관(空觀)에 의거한 보살의 수행을 『금강경』에서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起心)’이라 표현하고 있다. 『반야경』의 공관은 연기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스님의 저서에 나타난 위에서 인용한 사조(思潮)들은 『금강경』의 제 8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과 제 10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그리고 제 14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의 영향으로 스님의 방식으로 구상되어 특색이 작용하여 창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광덕스님은 자신의 불교의 믿음, 수행, 불광운동, 부처님, 삼세제불 등을 ‘반야바라밀’로 확고부동하게 주창하셨다. 그러면 스님은 어떤 시점에, 어떤 연유로 불교의 진수를 반야바라밀로 파악하여 자신의 사상으로 만들게 되었을까? 그러한 연유와 시점을 스님의 회고를 통해서 알아보자.

 

 

6.25가 일어난 지 3년 뒤 53년 무렵에 신소천(申韶天) 큰스님을 모시고 『금강경』을 번역해서 널리 퍼트리고 독송하는 불사를 했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번역된 『금강경』이 없었습니다. 경을 번역한다고 하면 경도 번역하느냐고 반문하던가, 또는 번역하면 경의 존엄성이 깨진다든가 뜻이 바뀐다든가 하면서 이해하지 않던 시절입니다. 그러나 그때 제가 모시고 배운 소천큰스님께서는 “나라와 세계 평화를 위해서 『금강경』을 독송하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는 말이나 문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 있는 것이 아니냐? 깨달음, 이것은 만인의 마음에 함께 하고 있는 진리다. 인도 말에도 진리가 있고 중국 한문에도 진리가 담겨 있는데 우리 한글에 진리가 담겨 있지 않다는 말이냐? 만인의 마음이 진리의 마음이기 때문에 진리를 움직이고 운영하는데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로 해야 된다느니 한문으로 해야 된다느니 하는 그런 법은 없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의 종식과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 우리말로 된 『금강경』을 읽자.”

 

(중략) 그때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금강경을 읽자. 이 세상의 전쟁은 물질적인 것, 육체적인 것, 감각적인 것에 집착해서 견해를 일으키고 대립하는 데서부터 수많은 파괴와 죽음과 불행이 양상되는 것이다. 이 중생의 대립감정 미혹한 감정을 깨뜨려서 모두가 참으로 평화롭고 진리로써 하나가 되고 진리가 가지고 있는 공덕을 한 결 같이 누리자면, 육체에 물질에 감각에 타성에 매달린 관념들을 다 깨버려야 한다. 그것은 반야(般若), 반야사상 밖에 없다. 반야의 진리가 능히 일체 대립, 일체 고난, 일체 투쟁, 일체 악의 요소를 뿌리부터 무(無)로 돌려서 모두를 소멸시켜 버린다. 그래서 이 땅에는 전쟁의 불이 꺼지고 평화가 오고 세계평화로 이어진다.

 

이렇게 해서 금강경 독송을 시작하고 절에 찾아다니면서 법문을 하고 금강경을 읽게 하였는데 마산에서 처음 시작하여 부산, 진주, 대구, 울산 등은 물론 서울에서도 대각사 등 여러 군데를 다녔습니다. 1955년 불교정화불사가 일어나기 전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법당에 들어오면서, 형제들이 이 같이 모여서 호법발원을 하신다고 하는 것은, 53년도에 시작했던 『금강경』독송운동, 『금강경』의 반야사상을 가지고 세계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그 당시 큰스님의 원이 끊어지지 않고 지금 여기에 이어져서 피어나고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마음속에서 흐뭇하고 여러분에게 새삼 감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법어총람』92~94면.)

 

 

위의 회고담에 나오듯, 광덕스님의 ‘마하반야바라밀’사상은 소천스님의 영향을 받아 『금강경』의 반야사상에서 창조되었다는 것을 아래의 어록에서 찾을 수 있다.

 

 

『금강경』 반야의 진리가 참으로 일체의 어둠과 불행과 장애를 다 쓸어 버리고 온 세계를 밝히고 따뜻하게 일체 생물을 성장시키는 진리의 근원이다 하는 소천스님의 가르침을 지금도 제 마음속에 새기고 있습니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 3천여 명의 호법발원 형제들이 반야의 가르침을 가지고 부처님의 법으로 생활하고 원을 발하고 정진하는 것은 바로 이 땅을 지키는 것입니다.(『호법총람』97면.)

 

 

위와 같이 스님의 사상은 반야사상에 상당히 경도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Ⅱ-3. 화엄 사상.

 

 

대승불교의 근본사상은 보살불교이므로 이러한 보살의 이념을 가장 잘 교설한 경전은 초기 대승경전 중 수법행의 경전인 『반야경』과 『화엄경』이다. 앞에서도 고찰한 바와 같이 『반야경』 계통은 보살의 ‘지(智)’에 『화엄경』은 보살의 ‘행(行)’에 역점을 두고 설하고 있다. 『반야경』을 계승하면서 보살의 존재방식을 더욱 깊이 탐구하며, 불(佛)의 본질과 보살과의 관계를 질문하는 것이 『화엄경』이다. 그 제명(題名)은 상세히는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으로서 ‘대방광’은 ‘대승’을 ‘불화엄’은 불(佛)의 세계를 꽃으로 장엄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원래는 몇몇 단행의 경전을 집성․조직한 것으로, 그 주요한 것에 「정행품(淨行品)」․「십지경(十地經)」 ․「여래성기품(如來性起品)」․「입법계품(入法界品)」등이 있다.

 

「입법계품」은 선재동자(善財童子)의 구도이야기로서 유명하다. 동자는 문수보살의 권유로 갖가지 직업의 사람들을 찾아 가르침을 얻고, 최후로 보현보살아래에서 깨달음에 들어간다. ‘법계(法界)’는 법의 본질, 진리로서 입법계(入法界)는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보현행원품의 갖춘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입부사의 해탈경계 보현행원품(大方廣佛華嚴經入不思議 解脫境界 普賢行願品)」이다. 보현행원품은 화엄경 80권 밖의 별행본으로 화엄경 법문의 총결이라 할 수 있는 화엄사상의 진면목이다. 보현행원품에서는 부처님의 깨달으신 내용, 광대한 공덕을 성취할 방법을 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광덕스님의 실천사상은 보현행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면 스님은 보현행원을 어떻게 인식하였는가를 알아보자.

 

 

보현행원은 과연 원왕(願王)이다.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하는 결정적 행이기 때문이다. 보현행원을 통해서 제불여래가 출현하고 정불국토가 열려 간다. 보현행원을 통해서 부처님을 이루고 불국토를 이루거늘 그 밖의 것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처럼 보현행원은 일체를 이루는 불가사의의 방망이다. 가정의 평화를, 사회의 번영을, 국토의 안녕을, 역사의 광휘를 그리고 필경 성불하는 대도인 것이다. 어째서 그럴까. 보현행원은 그 본질이 법성신(法性身)의 윤리이며 법성신의 전일적 자기실현 방식이기 때문이다.(중략)

 

비록 지혜가 태양처럼 빛나고 서원이 수미산 같이 지중하고, 자비심이 바다같이 넉넉하다 하더라도 하나의 바라밀행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결단적 각행이 필경의 대도를 굴리는 것이다.(광덕,『보현행원품 강의』불광출판부, 1989, <머리말>.)

 

 

우리는 보현행원에서 오늘의 현실에 영원을 실현하며 낱낱 행에 완전무결한 진리를 창조하여 필경 정불국토로 나아가는 대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보현행원품을 읽고 배우고 행하여 오늘의 인류세계를 평화와 번영의 영원한 보살 국토로 바꾸기를 기약하여야 할 것이다.(광덕,『보현행원품 강의』불광출판부, 1989, 15면.)

 

보현행원은 나의 영원한 생명의 노래이며, 나의 영원한 생명의 율동이며, 나의 영원한 생명의 환희이며, 나의 영원한 생명의 위덕이며, 체온이며, 광휘이며 그 세계입니다.

 

나는 이제 불보살님 전에 나의 생명 다 바쳐서 서원합니다. 보현행원을 실천하겠습니다. 보현행원으로 보리를 이루겠습니다. 보현행원으로 불국토를 성취하겠습니다. 대자 대비 세존이시여, 저희들의 이 서원을 증명하소서.(광덕,『보현행원품 강의』불광출판부, 1989, 187면, <보현행원자의 서원>의 序分.)

 

 

스님은 이와 같이 보현행원을 개인적으로 부처를 이루고 사회적으론 불국토를 성취하는 서원의 왕으로 인식하였다. 그래서 스님은 불광법회에서 형제들에게 “보현행원을 실천하고,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고, 보현행원으로 불국토를 이루겠다”는 서원을 세워서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자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보현행원은 그 본질이 법성신(法性身)의 윤리이며 법성신의 전일적 자기실현 방식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인도의 모든 윤리적 실천은 형이상학적 깨달음에서 유래한다(Radhakrishnan, The Bhagavadgītā, p.11.)"는 패러다임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스님은 언제부터 보현행원의 사상을 접하여 주창하였던가? 먼저 스님의 회고를 알아보자.

 

 

필자는 다행히 일찍이 수승한 인연을 만나 행원품을 근친하였고, 여러 번 번역 출판도 하였으며 법회에서 형제들과 함께 행원을 공부한 것도 여러 차례다.(광덕,『보현행원품 강의』불광출판부, 1989,187면.)

 

위의 글에서는 그 연유, 전후사정이 명료하지 않지만, 필자는 1965년 9월 12일 대학생 수도원에 입사하여 스님으로부터 보현행원품에 대한 강의와 구도자의 자세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이런 사정으로 본다면 1960년 경 스님은 보현행원품에 대한 사상적 탐구가 본격화 된 것이라고 논자는 유추해 본다. 이 같은 보현행원품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스님이 번역한 보현행원품이 1968년 1월 해인사판으로 성철스님의 서문을 달고 출판되었다. 이것은 스님께서 보현행원품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여 체득된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1978년에 간행된 『보현성전』서문에서 찾을 수 있다.

 

 

필자는 불법이 인간을 그의 실존 차원에서 확립시키고 무한한 긍정의 평원으로 해방시키는 지혜이며 힘이라고 믿고 있다. 그것은 마하반야바라밀이라는 무상법(無上法)의 현전에 대한 믿음에서 본 결론이다. 그리고 ‘보현’이야말로 마하반야바라밀의 개현자이며 실천자인 것이다.(광덕, 『보현성전』, 1978, 3~6면.)

 

이와 같이 스님은 사회와 역사에 있어서 불교가 담당해야 할 사명은 보현행원으로 나아가야 함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행원의 실천은 우리가 자기의 생명의 문을 여는 일입니다. 나의 생명 가득히 부어져 있는 부처님 공덕을 발휘하는 거룩한 기술입니다. 나의 생명을 부처님 태양 속에 세우는 일이며, 내 생명에 깃든 커다란 위력을 퍼내는 생명의 숨결이며, 박동(迫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원에는 목적이 없습니다. 어떠한 공덕을 바라거나, 부처님의 은혜를 바라거나, 이웃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행원 자체가 목적입니다. 행원은 나의 생명의 체온이며 숨결인 까닭에 나는 나의 생명껏 행원으로 살고 기뻐하는 것 뿐입니다.(광덕, 『지송보현행원품』불광출판부, 1999, 101~102면.)

 

 

스님은 또 차안과 피안이 둘이 아닌 마음으로 “우리 모두 나의 사업, 나의 직업을 보살도라고 하는 신념을 굳게 갖자. 그리고 보다 순수한 양질의 봉사, 무아의 헌신으로 보살국토를 이룩해 가자(『반야의 종소리』, 2006, 도피안사, 77면.)”고 다음과 같이 그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을 노래하였다.

 

 

보현행원은 나의 진실 생명의 문을 엶이어라.

무량위덕 발휘하는 생명의 숨결이러라.

보현행원은 나의 영원한 생명의 노래

나의 영원한 생명의 율동

나의 영원한 생명의 환희

나의 영원한 생명의 위덕

체온이며 광휘이며 그 세계이어라.

내 이제 목숨 바쳐 서원하오니

삼보자존이시여 증명하소서

보현행원으로 수행하오리

보현행원으로 불국 이루리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

나무 대행 보현보살 마하살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광덕,『보현행원품 강의』불광출판부, 1989,214면, <보현행원송>.)

 

 

위에서 논구된 바와 같이 스님의 화엄사상은 『화엄경』의 「보현행원품」에서 유래되어 스님의 해석학적 입장에서 창조된 것이다. 또한 스님의 사상에는 회통성이 두드러지는데 그러한 예는 스님의 어록에서 다음과 같이 예증된다.

 

 

이 ‘마하반야바라밀’, 이 『화엄경』의 일심 도리에는 부처님의 깨달음, 진리 그 자체가 완전 구족한 것입니다. 닦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깨달으면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부처님의 법을 믿는 것이 『화엄경』의 기초이고 이『화엄경』믿음이 믿음의 출발입니다. 나는 경을 공부할 때 『금강경』에서 「보현행원품」을 보고 「보현행원품」에서 반야바라밀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야를 공부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생명의 원 모습이 부처님이 깨달은 바 그 진리 자체라는 것을 확실히 믿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한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이것이 또한 『화엄경』의 말씀인 것입니다.(『만법과 짝하지 않는 자』 39면.)

 

 

 

Ⅲ. 실천으로서의 법등운동.

 

 

‘마하반야바라밀’을 염(念)하라고 해서 생각에만 담아두고 공염불로 소리만 내는 것은 반야바라밀 염송이라고 할 수가 없다. 스님은 반야의 바라밀행이 역사의식, 사회의식으로 나아가는 명분이요, 보살의 행보라고 하셨다. 또한 이런 반야바라밀행이 역사와 사회를 광명화(光明化)하고 활력을 부여한다고 하셨다. 마치 귀중한 보배라도 그것을 찾아내어 그 지닌 값어치를 다할 수 있도록 쓰임새에 알맞게 잘 이용하지 못한다면 보배라고 할 수가 없는 것과 같다. 그와 마찬가지로 종교도 그 진리성을 계발하여 올바르게 활용하지 못한다면 당대의 한시(限時)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반야바라밀 사상으로 전법운동을 행 할 서원을 세워 1976년 5월, 불광법회 초기 시절에 ‘법등오서(法燈五誓)’를 작성, 인쇄하여 불광법회 회원들에게 배포하여 스님 자신만으로도 무소뿔처럼 홀로 가겠다는 의지를 다음과 같이 주창하셨다.

 

 

전법으로 바른 믿음을 삼겠습니다.

전법으로 정정진을 삼겠습니다.

전법으로 무상공덕을 삼겠습니다.

전법으로 최상의 보은을 삼겠습니다.

전법으로 정토를 성취하겠습니다.

 

 

불광법회의 법등(法燈)운동, 전법실천은 참으로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의 바른 법의 등불을 널리 골고루 전하는 일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한 이들은 이렇게 쉽고도 절실한 내용의 전법(법등) 오서(傳法法燈五誓)를 오히려 이해하지 못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스님은 전법이 불광법문(세계)의 생명선이라고 자각한 것이다. 이것은 스님의 사회와 역사에 대한 책임의식의 발로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스님의 구세, 구국으로 향하는 각성의 전개를 읽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사회의식은 반야, 부처님, 개인, 조국, 겨레가 하나라는 스님의 반야안(般若眼)에서 다음과 같이 나온 것이다.

 

 

우리 불자들은 마하반야바라밀 신앙을 기초로 합니다.

 

반야의 지혜로써 본 부처님과 자기와 진리와 세계를 믿는 것입니다. 이 바라밀이 본 생명과 개아(個我)는 단순한 개아가 아닙니다. 진리와 더불어 하나인 개아이고 조국과 겨레가 하나인 개아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 반야바라밀 신앙이 개인의 완성과 사회의 발전과 민족의 번영과 국토의 완성을 한꺼번에 이루는 진리인 것을 알아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이 믿음을 힘써 행하고 널리 펴 나가야 하겠습니다. 우리 믿음의 생활이 진리의 생활인 까닭에 이 믿음과 행에서 개인이 잘 되고 민족이 번영하고 국토의 완성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바라밀 신앙의 행으로써 이뤄진다는 말입니다.

(『메아리 없는 골짜기』95면.)

 

 

불광의 법등 전법실천은 불광회 자체의 존속을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오늘 그리고 영원한 내일의 불국토 성취이며, 바라밀 행원의 대행이요, 참되고 바른 진리실현의 발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스님은 일반 개개인에게 불법을 전하는 것과 사회제도에 불법을 구현하는 것을 호법(護法)이라고 명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셨다.

 

 

모든 생각을 놓아 버리고 저의 근원적인 소망을 말하자면 이 호법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불법을 깨달아서 내 생명 가운데 진리의 태양이, 부처님의 은혜의 태양이 빛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내 생명, 이것은 범부의 생명이 아니라 부처님의 생명, 큰 우주의 생명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희망과 용기를 갖고 부처님의 공덕을 누리는 사람으로 바뀌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기뻐지고 성공합니다. 또한 그 말씀이 이웃 사람들에게도 서로 전해져서 모든 사람들이 부처님의 진리광명을 깨닫고 자기 생명 속에 빛나는 부처님의 위신력을 써서, 그 생활과 시대가 함께 밝아지기를 바라는 소망들은 불자라면 원칙적으로 누구나 가지고 있는 소망입니다. 내가 밝아지고 온 누리 일체 중생이 모두 밝아지면 전법이 완성되기를 바라는 소망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의 바램은 전법은 한 사람 한사람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와 환경, 국토에 흐르고 있는 모든 정치, 경제, 문화 등 온갖 체제를 불법(佛法)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살고 있으므로 내가 생각하고 믿는 대로 결단하고 자신이 결과를 거둡니다. 그렇지만 내가 생각하고 선택하고 결단하는 것이 정말 내 힘만 가지고 되는 것일까요? 내 주변에는 수많은 얼룩진 일들이 있습니다. 거친 바람도 있습니다. 사회가 거칠고 어둡고 힘들게 되어갈 때, 나 혼자 밝은 등불을 가지고 지켜 간다는 것은 정말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이 사회와 국토, 체제, 제도가 불법으로 바뀌어야 합니다.(1989년 1월 4일 어록.)

 

 

이와 같이 스님은 법등운동을 불자의 당위라고 생각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셨다.

 

 

반야바라밀법문, 부처님의 진실한 깨달음의 직설이 이 땅에 영원하도록 우리 모두 마음을 가다듬어서 정법을 호지하자. 그리고 이웃이 남이 아니요, 모두가 하나의 진리광명, 진리생명 공동체임을 이해해서 법등(法燈)수행에 철저히 힘쓰자. 그리고 나 자신은 범부가 아니요 육체적 존재가 아니요, 죽거나 병들거나 죄악에 때 묻은 존재가 아니라, 부처님의 빛나는 진리 광명이 충만한 진리 자체다. 이것을 끊임없이 잊지 않고 닦고 발휘하는 반야바라밀염송 정진을 항상 놓치지 말고 힘쓰자.

 

이 부탁을 형제 여러분께서 힘써 행해주시고, 반야바라밀신앙, 호법정진, 그리고 법등 수행 이 세 가지 법문이 이 땅에 오래 머물 때, 정법광명이 만인의 생명에서 빛나고 온 국토가 진리 광명이 충만한 국토라는 깨달음의 실상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1991년 7월 3일 어록.)

 

 

필자는 스님의 법등운동을 한국불교의 새 불교운동, 새로운 물줄기인 르네쌍스 운동이라고 칭 하고자 한다. 오늘도 불광법회에서는 이런 개척자의 정신으로 “우리는 횃불이다, 스스로 타오르며 역사를 밝힌다.”고 서원하고 있다. 스님의 법등운동 정신이 흐르는 물처럼 널리 골고루 퍼져서 뭇 중생들에게 안락함을 주는 운동으로 상속되기를 필자는 기원한다.

 

 

 

 

Ⅳ. 맺음말.

 

 

이상에서 논구한 바와 같이 광덕스님의 사상은 크게 선사상, 반야사상 그리고 화엄사상이 잘 아우러져 통섭되어 불광(佛光)사상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스님의 사상을 분석해 보면 첫째는 선사상이다. 스님은 은사인 하동산스님의 간화선 지도로 스스로 체득한 궁극적인 진리의 세계, 원천적인 부처님의 세계를 ‘반야바라밀’이라고 했다. 이런 체험을 통해서 나타난 스님의 사상은 『육조단경』에서 혜능스님이 ‘항상 마하반야바라밀을 생각하라(總淨心念摩詞般若波羅蜜)’고 한 주장과 같은 맥락이다. 이처럼 선가의 전통을 계승한 스님은 모든 사람을 깨닫게 하여 가슴 가슴마다에 진리가 용솟음치게 하는 불광(佛光)사상을 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논지의 예증으로 스님은 고려의 보조와 조선 서산의 선교겸수관을 계승하여 현대의 문제까지 회통한 실천적 사상가였다.

 

두 번째 스님의 사상은 반야사상이다. 스님의 ‘마하반야바라밀’사상은 신소천스님의 영향을 받아 『금강경』의 반야사상을 창조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스님의 여러 저서에 나타난 마하반야바라밀의 사조(思潮)들을 분석해 보면,『금강경』의 제 8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과 제 10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그리고 제 14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의 영향을 받아 스님의 방식으로 채색되어 창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세 번째 스님의 사상은 화엄사상이다. 스님의 화엄사상은 『화엄경』의 「보현행원품」의 영향을 받아, ‘보현행원’으로 창조되었다. 스님께서 보현행원을 개인적으로는 부처를 이루고 사회적으론 불국토를 성취하는 법성신(法性身)의 윤리라고 해석한 것은 탁견이다. 이러한 논리로 스님은 사회와 역사에 있어서 불자들이 담당할 의무를 보현행원으로 해석하였다. 스님께서 보현행원을 법성신의 윤리로 해석한 것은 회통성의 논리이다.

 

 

 이런 세 가지의 사상이 잘 아우러져 스님은 하화중생(下化衆生)의 길을 법등운동으로 전개했다. 오늘도 불광법회에서는 스님의 사상을 계승해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바라밀 국토 성취한다”고 실천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스님이 ‘마하반야바라밀’ 사상으로 법등운동을 전개한 것은 한국불교에 새로운 ‘신행모델’을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스님을 현대의 ‘전법보살’이라고 칭하고자 한다.

 

 

 

 

[출처] 광덕스님 사상의 개요|작성자 만남 창조 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