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

석주 큰스님과 교육불사

수선님 2020. 10. 1. 11:54

석주 큰스님과 교육불사

 

 

 

 

차례

 

I. 들어가는 말

II. 석주보살의 사상형성 배경

1) 큰스님의 생애

2) 보살사상의 형성배경

III. 석주보살의 사상

1)자실인의(慈室忍衣)의 원(願, praṇidhāna)

2)무상행(無相行)

3)화안애어(和顔愛語)

4)오유지족(吾唯知足)의 삶

IV. 석주보살 하화중생으로서의 교육불사

1) 어린이회 육성불사

2) 청소년 교화연합회 육성불사

3) 중앙승가대학 육성불사

V. 맺음말

 

 

 

I. 들어가는 말

 

고결한 사상을 가진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어려운 일이요, 그것을 생활에 몸소 실천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요, 그러한 인격이 된다는 것은 참말로 어려운 일이다. 고결한 사상과 고결한 생활과 고결한 인격의 삼자가 하나의 질서 속에 아름답게 조화된 인간을 가리켜서 불가(佛家)에서는 ‘보살’이라고 한다. 필자가 논하려고 하는 석주(1909~2004) 큰스님은 한국 근현대불교사의 ‘보살(菩薩, bodhisattva)’로 우리에게 왔다가 가셨다.

 

석주 큰스님은 1600여년 한국불교 법통의 법등(法燈)을 지켜 평생을 중생교화와 불교의 현대화를 위해 헌신한 보살이었다. 큰스님은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1971년, 1978년, 1984년 3차례 역임했을 뿐만아니라 강남의 봉은사에 1969년 주지, 1988년부터 입적(2004년 11월 14일)까지 조실로 불교계의 도재양성·역경·포교에 온 몸을 바쳐 큰 덕화를 끼치신 분이다. 큰스님은 자실인의(慈室忍衣)·무상행(無相行)·화안애어(和顔愛語)·오유지족(吾唯知足)의 삶으로 한국 근현대불교의 중심에 굳건히 서 있으면서, 그 당시 민족이 불교에 부여한 역사적 사명을 보살도(菩薩道)로 실천한 분이시다. 큰스님은 자신의 해탈에 앞서 남부터 구원한다는 자비의 원(願, praṇidhāna)을 세워서 열반을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사바세계를 정토화하는 데 위법망구의 삶을 솔선수범하신 분이다. 그야말로 큰스님의 삶은 보살의 삶 자체였다. 그래서 필자는 스님의 도풍 즉 석주보살의 사상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스님의 사상의 내용은 무엇이고, 교육불사로 어떻게 회향(廻向, pariṇāmanā)했는가를 탐구함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서 논자는 한국불교사에서 큰스님의 위상을 정립해 보고자 한다.

 

 

한국불교선리연구원,  「그리운 석주 큰스님-석주 큰스님 탄신 100주년 기념문집」 2009년 3월.

II. 석주보살의 사상형성의 배경

 

1) 큰스님의 생애

 

스님은 경술국치 바로 전 해인 1909년, 경북 안동군 북후면의 금계산 기슭에 있는 옹천마을에서 신심 깊은 아버지 강대업과 어머니 유복임 사이에서 5형제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속명은 계술(啓述)이다. 옹천마을은 400여 호가 모여 사는 진주 강(姜)씨의 집성촌이다. 그 마을 부근에는 신라 31대 신문왕 때 건립된 봉서사(鳳捿寺)라는 고찰이 있어 어릴 때 종종 참배했는데, 그것이 금생에서 불교와 첫 인연이었다고 한다.

 

옹천마을에는 조선 정조 때 세운 사익재라는 서당이 있어 계술은 일곱 살 때부터 『천자문』·『동문선습』·『사략』·『통감』 등을 차례로 익혔다. ‘형제가 다섯이나 되니 한 사람은 스님으로 만들겠다’는 부모님의 원력으로 15세 되던 해 1923년 서울 선학원에 주석하던 남전(南泉, 1868∼1936)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면서 불문에 귀의했다. 남전스님은 서산 휴정(西山 休靜 1520∼1604) 문하의 편양언기(鞭羊彦機) 선사의 법손으로 선종의 정통 맥을 이은 고승이었다. 남전스님은 1921년 10월에 석왕사 경성포교당의 도봉스님, 범어사 경성포교당의 석두스님과 함께 수행풍토 진작을 위해 선종의 중앙기관으로 선학원을 설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선학원의 창건에는 남전·도봉·석두스님이 각각 3천 원씩을 출연하였고, 용성·만공스님도 뜻을 같이 하였다고 한다.

 

스님은 선학원에 입사한 지 몇 달 만에 은사스님으로부터 ‘정직하고 바르게 수행하라’는 뜻의 정일(正一)이라는 법명도 받았다. 이후 6년 간의 행자생활을 선학원에서 마친 스님은 1928년 2월 1일 범어사에서 남전스님을 은사로 이산스님을 계사로 사미십계를 받고 득도하였다. 스님은 선학원 행자시절 남전 노스님을 비롯, 석두·도봉·만공·용성 선사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고승 대덕들과의 교류, 그 중 만해 한용운(1879∼1944)스님과의 각별한 인연은 민족관을 세우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 후 스님은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인 금정산(金井山) 범어사에서 보낸 강원공부 6년이 스님 일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유익하고, 또 값진 시간이었다’고 회고하였다. 당시 범어사의 강원교육 과정은 6년이었다. 스님은 1933년 3월 18일 범어사 강원 대교과를 모두 마치고 졸업하였다. 

 

주위의 권유는 선방에 가서 참선공부를 하라고 하였지만, 당대의 선지식이요, 문장가이면서 선필(禪筆)로 일가(一家)를 이룬 고승이었던 은사이신 남전 노스님께 시봉해 드리기 위해 스님은 선학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남전스님께서는 선학원으로 돌아온 제자를 가상히 여겨 ‘석주(昔珠)’라는 법호를 내려 주시면서 다음과 같이 당부하셨다고 한다. “석주라는 말은 옛 구슬, 곧 항상 변치 않는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지혜를 뜻하느니라. 너는 이 법호처럼 지혜를 밝히며 사는 훌륭한 사문이 되도록 하여라.” 법호를 받은 스님은 은사스님을 시봉하는 한편, 선학원의 회계 일을 맡아 사중의 운영에 참여하였다.

 

그 후 1934년, 스님은 본격적으로 참선 수행을 결심하고 오대산 상원사에 주석하고 계셨던 한암 중원(漢岩重遠, 1876∼1951)선사를 찾아 나섰다. 한암선사는 근세 선종(禪宗)을 개척한 경허성우(鏡虛惺牛, 1849∼1912)선사의 법을 이은 만공월면(滿空月面, 1872∼1946)·혜월혜명(慧月慧明, 1861∼1937)선사와 더불어 전법제자였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만든 조계종의 초대 종정으로 1936년에 추대되신 존경받는 고승이었다. 한암선사는 한국전쟁 당시 초토(焦土)작전으로 인해 소각될 위기에 처해있던 상원사를 지켜내기 위하여 생사를 초월한 경지를 보여 주신 유명한 일화도 남기신 스님이시다. 한암스님으로부터 ‘마삼근(麻三斤)’ 화두를 받은 스님은 고양이가 쥐 잡는 마음으로 면벽참선을 하며 하안거를 마쳤지만, 상원사에 한 달 가량 더 머물며 한암스님께 『범망경』을 배웠다. 『범망경』을 배운 뒤 스님은 마음의 깊은 곳에 보살의 길과 출가 생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각인(刻印)하게 되었다. 스님은 상원사에서 선학원으로 돌아와 은사스님을 시봉하였다. 이즈음 은사스님은 항상 병을 안고 사셨다. 은사스님은 워낙 청빈한 구도자라서 당신을 위해서는 돈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근검절약으로 모은 정재(淨財)를 좋은 불사(佛事)에만 쓰셨다고 한다. 그러던 중 남전스님께서는 1936년 4월 28일에 세수 69세, 법랍 54세로 열반에 드셨다. 석주스님께서는 은사스님에 대해 회고하기를 “그 어떤 면모보다도 말씀과 행동으로 불법(佛法)의 정도(正道)를 가르쳐 주신 영원한 스승이셨다”고 하였다.

 

석주스님은 은사스님이 열반하신 이후 1937년,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의 석우(石友)선사 회상, 1938년 덕숭산 정혜사의 만공(滿空)선사 회상, 1939년에 묘향산 보현사 등 제방 선원에서 효봉·혜암·청담 스님 등과 함께 수선안거를 하며 목숨을 건 참선 정진을 거듭했다. 이렇게 스님은 강원 교육과 참선 수행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낀 바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셨다.

 

“서산대사의 『선가귀감(禪家龜鑑)』에 ‘경(經)은 부처님의 말씀이요,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다’고 하셨는데, 나는 6년 동안의 강원 교육을 받으며 부처님의 말씀에 젖어들었고, 연이은 안거 기간 동안 선풍을 쐬며 우리 모두에게 구비되어 있는 부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느껴 볼 수 있었지. 그리고 그 시절 동안 나는 수행자로서 미래에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자세와 원력을 바르게 세울 수 있었어.” 스님은 1949년 7월 15일,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 250계를 수지하였다.

 

스님은 광복(光復) 이후 어지럽고 혼탁했던 한국불교를 올바른 반석 위에 올려놓으시기 위해 1946년 6월 경봉·용담·대의·석기스님 등과 함께 불교혁신연맹을 만들어 불교개혁에 앞장섰다. 1953년 10월에는 선학원에서 효봉·동산·금오·청담·자운스님 등과 함께 불교정화운동을 위한 촉구 결의에 나섰고, 1954년 5월 30일 대의·종익·재열·정영스님 등과 불교정화운동을 발의했다. 정화운동은 긍정적인 면이 있기는 하였으나,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채 불교계가 조계종과 태고종으로 양분된 것이다. 통합종단이후 스님은 정화운동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당시에 정화운동을 둘러싸고 몇 가지 입장들이 불거져 나왔어. 동산·청담스님을 위시한 대부분의 스님들은 대처승을 완전히 배제하자는 강경론적 입장이었고, 효봉스님과 나는 자질을 갖춘 승려를 길러내는 교육기관을 갖추고 대처승도 포용하자는 온건론적 입장을 취하였지. 결국 회의에서는 강경론이 받아들여지게 되었지.” 그 때 이후 스님은 항상 불교정화사태 수습을 화합과 청정수행가풍을 세우는데 헌신하였다.

 

자신의 깨달음을 위해 수행에 전념하던 스님은 1958년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본사 불국사 주지에 임명되면서 종무행정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1961년 선학원 이사장, 1975년 제10교구본사 은해사 주지, 1977년 조계종 초대 포교원장, 1971년, 1978년, 1984년 조계종 총무원장을 3차례 역임하는 동안 실로 한국불교의 기초(基礎)를 세우시는 일에 선봉장(先鋒將)이셨다. 이밖에도 종단이 누란의 위기에 휩싸일 때마다 주요요직을 맡아 종단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특히 1994년 종단이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선뜻 개혁회의 의장을 맡아 종단 개혁의 버팀목이 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스님은 평소 온화한 자비보살이지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파사현정의 진면을 보이는 올곧은 도인이시다.

 

스님께서 하신 중생교화 불사 중 가장 보람된 일은 불경(佛經)을 한글화하는 역경사업이었다. 선학원에서 용성 진종(龍城 震鍾, 1864∼1940) 스님을 시봉하면서 역경의 중요성을 깨닫고 경전의 한글 번역을 통해 불교의 대중화·현대화를 위해 노력했다. 1949년 운허(耘虛)스님과 의기를 투합한 스님은 국문선학간행회(國文禪學刊行會)를 만들어 운허스님은 원장, 스님은 부원장을 맡아 불서를 간행하게 되었다. 국문 ‘선학간행회’에서 최초로 번역하여 출판한 책은 용담스님의 『선가구감』이었다. 그 뒤 스님은 불교정화운동의 와중에서도 꾸준히 불경번역사업을 독려하고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아, 1960년까지 우리말로 된 『법망경』·『한글금강경』·『정토삼부경』·『사미율의요략』·『사분비구니계본』·『보현행원품』·『유마힐경』을 차례로 간행하였다. 운허스님은 번역을, 스님은 재정과 출판을 맡은 것이다.

 

1961년 불교정화운동이 일단락된 이후부터 운허(耘虛, 1890∼1980)스님과 함께 현재의 동국역경원 전신인 법보원(法寶院)을 설립하여 역경불사에 본격적으로 몰두하였다. 운허스님 번역의 『부모은중경』·『승만경』·『무량수경』·『수능엄경』·『화엄경(40권본)』·『열반경』·『묘법연화경』·『금광명경』과 탄허스님 번역의 『보조법어』·『육조단경』 등을 발행하여 무상으로 법보시 하였다. 법보원에서 빛나는 업적은 우리나라 최초로 편찬한 운허스님 편 『불교사전』이다. 당시 이 일에 관여했던 이들은 “석주스님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불교사전 간행불사는 불가능했다”고 입을 모았었다. 실로 스님은 운허스님과 함께 이 나라 역경사업의 대표적인 인물로 간주된다. 1964년 7월 21일 동국대학교 부설로 동국역경원이 개원되어 운허스님은 원장, 스님은 부원장의 책무를 맡으셨다. 1980년에 운허스님이 입적하신 후에도 스님은 줄기차게 역경사업을 독려하셨다. 81세였던 1989년에는 동국역경사업진흥회 이사장, 1995년부터는 동국역경원 한글 팔만대장경 역경사업 후원회 회장을 맡아 스님은 37년 만인 2002년 9월 318권의 한글대장경 완간의 회향불사에 온 정성을 쏟았다. 이렇게 스님의 역경불사 원력은 남달랐다. 주석하시던 칠보사 대웅전의 현판을 손수 ‘큰법당’이라고 바꾼 스님은 역경이 포교의 첫 사업이라고 확신하였던 선구자이시다. “둥글고 가득 찬 지혜의 해, 캄캄한 번뇌 없애 버리고, 온갖 것 두루두루 비추며, 모든 중생들 안락케 하는 여래의 한량없는 그 모습, 어쩌다 이 세상 오시나니.” 위의 내용은 칠보사 ‘큰법당’의 주련에 스님께서 한글로 쓴 글귀이다. 이것은 스님께서 불경의 한글화에 원력을 쏟았던 표상이다. 가히 스님의 크신 원력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스님의 먼 훗날을 예견하시는 혜안(慧眼)은 역경(易經)불사를 일으켜 모든 불자들에게 감로(甘露)의 문을 열어주셨다.

 

한국불교의 장래는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있다고 강조한 스님은 종단이 아직 어린이 포교에 역량을 투입하지 못했던 1965년 3월 26일, 칠보사 어린이회를 창립, 어린이 포교의 개척자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1일에 “불교칠보어린이 합창단”을 창단하여 새로운 불심(佛心)을 꽃피웠다. 1970년 8월, 청소년 교화연합회의 총재가 되신 스님은 사찰 단위의 학생회 조직을 확대 개편하여 각 중·고등학교에 많은 불교학생회를 창립할 수 있도록 경비를 지원하셨다. 이 같은 어린이·청소년 포교에 대한 관심은 학생회 수련회에 빠짐없이 참석해, 취침시간이면 아이들의 이불을 덮어 주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스님의 이러한 열정은 포교당·교도소·군법당 등의 열악한 곳까지 확대되어 갔다. 스님은 포교활동에 도움이 된다면 자신의 휘호 써 주기를 즐겨했다. 스님의 휘호는 수많은 불자들의 가정과 산사(山寺)의 벽에, 관공서와 여러 직장의 사무실에, 나아가 전후방의 군대 막사 안에도 걸려있다. 그 모든 곳에서 스님의 휘호는 사람들의 마음을 맑게 밝히는 청량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스님은 평생 청소년 교화와 경전의 한글화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1989년 제2회 대한불교조계종 포교대상을 수상하기도 하셨다.

 

한국불교선리연구원,  「그리운 석주 큰스님-석주 큰스님 탄신 100주년 기념문집」 2009년 3월.

스님은 세상에 인재양성(人材養成)처럼 중요한 것이 없다고 하시면서 중앙승가대 집중육성에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스님께서 교육에 헌신하신 시기는 1980년 중앙승가대학 초대 학장과 2대 학장을 맡았던 8년 동안이다. 스님은 종단의 원로와 중진스님들을 찾아다니며 ‘이 시대에 승가대학의 설립이 왜 꼭 필요한가’를 역설하신 공덕으로 종단에서 스님의 간곡한 청원이 받아들여져 영화사를 학인들의 기숙사로 얻게 되었고, 안암동 개운사의 3층 건물을 학사(學舍)로 인수받아 중앙승가대학의 규모를 갖추었다. 스님은 학장을 역임하시면서 현대식 승가교육의 정착에 지대한 공헌을 하셨다. 중앙승가대학의 기반이 잡히자 스님은 1988년 4월에 혜성스님에게 제3대 학장의 자리를 인계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모든 이들에 의해 명예학장으로 추대되셨고, 그 뒤에도 물심양면으로 오늘의 중앙승가대학교를 만드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중앙승가대학의 학예지인 「승가(僧伽)」 창간호에서 스님은 다음과 같은 법어로 스님의 교육관을 피력하셨다.

 

“승려란 학문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외형적인 태도만으로 되는 것은 더구나 아니다. 한 마디로 부처님의 인격에 닮아지고 부처님의 덕행이 몸과 마음 속에 배어서 오늘의 한국불교계 중흥의 기수가 되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세수 85세가 되었을 때 스님께서는 금생에 꼭 하고 갈 마지막 불사(佛事)를 준비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진심을 말씀하셨다.

 

“내가 평생을 포교하다보니 참으로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이 하나 있었어. 그것은 불자들 가운데 평생을 사찰에 다니면서 보시를 하고 화주를 하였는데도, 노년에 돌보아 줄 자손이 없어 어려운 처지에 있는 분들이 많다는 것이야. 그러한 분들이 함께 모여 생활하고 수행할 수 있는 곳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

 

스님께서는 외로운 신도 노인들의 복지를 위하여 충남 온양에 보문사를 1995년에 창건하고 불교사회복지시설인 지하 1층, 지상 3층, 연건평 550평의 초현대식 건물, 안양원(安養院)을 설립해 운영하며 보살행을 실천한 자비보살이었다. 아, 누가 스님처럼 한평생을 이토록 자비원력으로 사셨을까?

 

스님께서는 입적 한 달 전인 10월 16일 봉은사 개산대제에 참석하는 등 아흔이 훨씬 넘은 연세에도 봉은사의 종루에 걸 주련을 쓰시다가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한수의 시를 지으셨다.

 

“구십 육년 세월을 되돌아보니(廻顧九十六年事) 마치 왕자가 구걸 다니듯 했네(一似懷珠傭作擔) 오늘 아침 무거운 짐 내던지니 (貧今朝放下煩重) 옛 모습 오롯이 본 고향이구나(本地風光古如今)”

 

그리고 3일 뒤인 11월 14일 오후 4시경(음 10월 3일) 스님께서는 안양 보문사에서 열반에 드셨다. 스님의 영결식은 2004년 11월 18일 오전 11시 출가 본사인 범어사 보제루에서 원로회의장(元老會議葬)으로 엄수됐으며, 연화대에서 한줄기 불꽃으로 화해 적멸(寂滅)에 들었다. 범어사 주지 대성스님은 “입적 후 큰 스님은 수중에 돈 1000원도 남기지 않을 만큼 무소유의 극치를 보였다”고 했다. 이튿날 다비장에서 정골사리를 비롯한 수백과의 영롱한 사리가 나왔으나, 문도들은 ‘사리를 공개하지 말라’는 스님의 유지에 따라 수습하여 보관하였다. 온양 보문사에서는 스님 입적 2주기 법회일에 스님의 사리탑과 비석 건립불사를 봉행했다.

 

2) 보살사상의 형성배경

 

큰스님의 생애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석주스님은 한 세기를 사시면서 불교발전을 위한 일이라면 몸을 나투지 않으신 곳이 없었다. 도제양성의 현장에서, 포교의 현장에서, 역경의 현장에서, 사회복지의 현장에서, 불교혁신의 현장에서 스님은 항상 여실지견(如實知見, yathābhūta-jnāna-darśana)으로 보살도를 실천하셨다. 이런 보살도의 실천은 스님께서 중생을 위해 살고자했던 보현보살의 원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큰스님과 함께한 인연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부분 느끼는 심정일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보살의 사상이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석주스님의 사상은 한국의 스님으로 한국불교의 문화적 기반 위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한국불교는 전통적으로『금강경』·『화엄경』·『법화경』등을 주요경전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경전을 통해서 스님의 보살사상이 형성되었다고 인지된다. 그러면 다음 장에서 스님의 보살사상이 초기대승경전으로부터 형성된 내용이 무엇인가를 고찰한다.

 

 

III. 석주보살의 사상

 

1)자실인의(慈室忍衣)의 원(願, praṇidhāna)

 

큰스님은 평소 휘호를 쓸 적에 ‘자실인의’를 자수 쓰셨다. ‘자실인의: 자비의 집, 인욕의 옷’은 『법화경』의 「법사품」의 교설(敎說)이다.

 

필자가 결혼할 때 큰스님을 주례로 모셨는데 인생항해에서 꼭 새겨야 할 좌우명으로 ‘자실인의’라는 법문과 휘호를 주셨다. 그 휘호를 지금도 가보(家寶)로 모시면서 나는 인생살이의 이것저것을 헤쳐 나가는 내 삶의 좌표로 삼는다. 인간은 누구나 불성(佛性)에서 보면(一切衆生悉有佛性) 다 같이 한 몸이라는 관념이 떠오르게 된다(萬人一体觀). 모든 중생은 모두 한 몸이기 때문에 자기와 같이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眞諦). 그러므로 타인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과 다투어선 안되며, 모든 생명에게 자비의 마음으로 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중생은 한 몸이기 때문에 나 스스로의 제도보다도 중생의 제도를 먼저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 대승보살의 근본정신이다. 우리가 자비 속에 살 때 우리의 마음은 기쁘고 평안하다. 자비는 우리 정신의 집, 마음의 집, 인격의 집, 가정의 집, 우주의 집이다. 우리는 인욕바라밀의 수행을 통해 죽는 날까지 자비를 배우고 익히고 실천해야 한다. 이런 자세로 삶을 살 때 인생의 대업을 성취하고 사회에서 큰 업적을 쌓고,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큰스님의 ‘자실인의’의 법문으로 곤란이나 난관에 부딪혔을 때 모든 것을 삼세인연의 법칙으로 생각하고 회광반조(廻光返照)하며 증오를 사랑으로 극복(忍辱)하는 눈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한국불교선리연구원, 「그리운 석주 큰스님-석주 큰스님 탄신 100주년 기념문집」 2009년 3월. p.320.

2)무상행(無相行)

 

무상행(無相行)은 집착함이 없이 참여하여 스스로 이분법의 상(相, lakṣaṇa)을 여의는 행이다. 『금강경』의 「이상적멸분 제14」에서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여의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해야 한다. 마땅히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며, 소리와 냄새와 맛과 느낌과 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한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는 그 마음을 내야 한다.”라고 하였다. 또 「묘행무주분 제4」에서 “보살은 마땅히 법에 머무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할지니라. 이른바 색에 머물지 않는 보시며, 소리(聲)․냄새(香)․맛(味)․느낌(觸)과 법(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여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하여 상()에 머무르지 말 것이니라. <중략> 수보리야! 보살이 상(相)에 머물지 않고 행하는 보시의 복덕도 또한 이와 같이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다만 마땅히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지니라.” 라고 했고, 「장엄정토분 제10」에서 “모든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 Bodhisattva-mahāsattva)은 마땅히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마땅히 색(色)에 머물어서 마음을 내지 말며, 마땅히 소리(聲)와 냄새(香)와 맛(味)과 느낌(觸)과 법(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고, 마땅히 머무는 바(집착함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라고 하였다.

 

위에서 인용한 『금강경』의 교설을 석주스님은 자신의 패러다임으로 해석하고 구상하여 스님의 인격과 생활 속에 구현하여 무상행(無相行, aniketa-cārin)으로 나타냈다. 무상행은 마치 연꽃이 진흙에 머물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큰스님은 수행자답게 아상(我相)을 갖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누구라도 높이 보고 비굴하거나 얕히 보고 교만하지 않았다. 대종사 품계를 받으실 때 일화는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스님의 무상행을 보살의 행이라고 할 수 있다. 큰스님께서는 어디에 참여하여도 참여하는 일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예를 들면 큰스님은 대한 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의 직위에 1971년, 1978년, 1984년에 걸쳐 세 번을 취임했으나 모두 합쳐도 재임기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종단이 어려울 때 참여해서 어느 정도 수습이 되면 바로 떠나시는 모습이 석주 큰스님의 도행(道行)이었다. 스님은 자신의 뜻에 의해서 지위에 집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공로에도 집착하지 않으셨다. 스님께서는 오직 종단의 회합과 번영을 위해서 회향의 도행을 실천하셨다.

 

필자는 인생 한 나절에 깊은 실의에 빠져 큰스님을 찾아뵙고 나의 상황을 설명하고 조언을 구하였다. 큰스님은 나에게 『금강경』을 주시면서 매일 수지·독송·사경하면 육체의 눈(眼)에서 불안(佛眼)이 열릴 수 있다면서 다음과 같은 『금강경』의 사구게를 교시하였다.

 

“모든 형상은 다 변화하는 것이다. 모든 형상을 보되 인연의 법칙에 의해 잠시 머무는 것(假想)으로 참된 실상(實相)이 아닌 것으로 직관한다면 곧 진리를 보고 여래(如來)를 본다(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큰스님께서는 『금강경』의 제일 사구게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해설해 주셨다. 그래서 필자는 인생의 이치나 일에 막힘이 있을 때 이 사구게를 염송하면서 생활한다. 이 사구게는 땅에서 엎어진 자가 땅을 딛고 일어서는 것과 같이 실의(失意)와 역경(逆境)을 지혜와 복덕으로 쌓는 계기로 삼게 하는 나의 경구(警句)가 되었다. 이 사구게는 내 삶의 등불이다. 이런 생명의 진리를 깨우쳐 준 큰스님의 사랑이 아직도 내 마음 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나는 큰스님의 이런 자비스런 가르침의 은덕으로 수업수생(隨業受生)의 삶에서 수의왕생(隨意往生)의 삶을 사는 좌표를 확립할 수 있었다.

 

출처:  한국불교사진연구소

3)화안애어(和顔愛語)

 

50대 후반에 대학의 중요한 보직을 받아 큰스님께 인사를 갔다. 큰스님께서는 기뻐하시면서 중국 오조법연(五祖 法演, ?∼1104)의 사계(四戒)와 ‘화안애어(和顔愛語)’라는 성구로 공직자의 마음가짐과 태도에 대해서 법문 해주셨다. 사계는 법연스님이 그의 제자 원오극근(圓悟 克勤, 1063∼1135) 스님이 서주(舒州)의 태평사(太平寺) 주지를 맡게 되자, 스승으로서 큰스님이 될 제자에게 일러준 매우 간곡하고 요긴한 경책이다. 그 첫째는, ‘권력을 다 쓰지 말라(勢不可盡)’는 말이다. 이는 주지가 되거나 남의 윗자리에 있는 책임자(長)는 자신이 행사할 수 있는 힘이나 권세를 모두 다 쓰지 말 것이며, 조직의 안녕과 발전을 위하여 봉사하는데 사용하라는 것이다. 둘째는, ‘복을 다 누리지 말라(福不可受盡)’는 말이다. 이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의식주 등 넉넉한 재력을 자기 자신을 위하여 모두 다 쓰면서 살지 말고 검소와 절약으로 생활하면서 저축하여 보다 큰 복을 짓는데 사용하라는 것이다. 셋째는, ‘모범(법도)을 다 행하지 말라(規矩不可行盡)’는 말이다. 이는 법도가 좋은 것이긴 하지만 항상 모범을 앞세우고 솔선수범만 강조한다면 주변의 사람들이 부담을 느껴서 그를 멀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관리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은 어딘가 빈틈이 있어서 주위 사람들에게 숨구멍을 열어 줘야 훨씬 인간적으로 존경받게 된다는 것이다. 넷째는 ‘좋은 말을 다 말하지 말라(好語不可說盡)’는 말이다. 이는 아무리 좋은 말과 교훈이 되는 말이라도 전부 그것을 다 털어놓으면 사람들이 쉽고 가볍게 여긴다는 뜻이다. 여운이 남는 알맞은 양의 말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계의 법문은 내가 공직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바로잡게 하는 기준이 되었다.

 

또 ‘화안애어’의 성구를 통해 큰스님께서는 『금강경』의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起心)’의 진리로 마음과 행동을 태양처럼 밝은 마음, 밝은 얼굴, 밝은 표정으로 사랑스러운 말을 하라고 깨우쳐 주셨다. 우리의 얼굴에는 화기(和氣)가 충만해야 한다. 화기는 온화(溫和)한 기색(氣色)이다. 우리의 얼굴에서는 봄바람처럼 훈훈한 기운이 감돌아야 한다. 우리는 부드러운 얼굴, 인자한 얼굴, 품위가 있는 얼굴을 가져야 한다. “사람은 나이 40이 되면 자기 얼굴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는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의 명언이 있다. 얼굴은 그 사람의 인품과 성격을 표현한다. 인생을 부처님의 법대로 성실하게 산 사람은 자연히 얼굴에 성실의 빛이 풍긴다. 

 

말은 그 사람을 나타낸다. 그래서 불가(佛家)에서는 화안애어(和顔愛語)를 강조한다. 평화로운 얼굴에 인자한 말로 사람을 대하라는 것이다. ‘화안애어’는 보살(菩薩)이 중생을 대하는 표정이요, 부처가 사람을 대해는 자세이다. 우리는 화기애애한 얼굴로 모든 사람을 대할 때에 부처님을 대하는 마음으로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화엄경』이 설하는 보현행원이다. 이것이 대인(對人)관계의 이상적 자세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사사불공(事事佛供)이라고 한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건, 일마다 곳곳마다 부처를 섬기고 부처를 대하듯이 하라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복잡한 사회에서 원만한 인간관계를 가지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서로 간에 밝은 마음의 얼굴과 말과 행동이 오갈 때 우리를 동지로 만들고, 지기를 만들 수 있다. 인생은 주고받는 것이요, 산다는 것은 오고가는 것이다. 필자는 큰스님의 가르침으로 봄바람처럼 화기(和氣)가 넘치는 미소의 얼굴로 사람을 접하고,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말을 주는 인간관계로 실천하는 사람으로 살아야겠다는 원(願)을 세우게 되었다.

 

4)오유지족(吾唯知足)

 

큰스님은 평소 휘호를 쓸 적에 ‘오유지족(吾唯知足)’을 자주 쓰셨다. 스님의 ‘오유지족, 나는 만족을 알 뿐이다.’는 작품은 유명하다. 우선 작품의 배열이 특이했다. 네 자의 한(漢)자가 모두 입구 자(字)라고 부르는 네모 글씨가 있는데, 큰스님은 ‘口(입 구)’를 한 복판에 두고, 위로 ‘吾’, 아래로 ‘足’, 오른쪽으로 ‘唯’, 왼쪽으로 ‘知’를 써서 멋진 작품을 구성하셨다. 이렇게 ‘오유지족’ 등의 성구(聖句)를 인연있는 사람들에게 써 준 것에서 우리는 자비하심과 만족을 아는 스님의 도심세계를 인지할 수 있다. ‘오유지족’은 ‘수분지족’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수분지족은 자기의 분수를 지키고 자기의 생활에 만족하는 것을 말한다. 항상 수분지족의 신(身)·구(口)·의(意)를 통하여 나타나는 스님의 여여한 일상은 나로 하여금 진리의 향기를 깨닫게 하였다. 큰스님의 일생은 수분지족의 생활을 실천한 삶이었다. 큰스님은 종단의 위기나 화합이 필요할 때, 종단의 총무원장이나 포교원장으로서 봉사하시고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직책을 내놓으신 후, 수행자의 본분인 수도와 교화에 몰두하셨다. 

 

명예, 권력, 지위에 탐착하지 않고 수도자의 본분을 지켜 오신 조계가풍(曹溪家風)의 명안종사(明眼宗師)의 삶을 실천하신 분이다. 그래서 나는 스님의 삶을 통하여 수분지족하는 학자의 삶을 살려는 원(願)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자실인의·무상행·화안애어·오유지족의 스님의 사상은 스님이 초기대승경전의 법문을 일생동안 각고면려한 체험에서 우러나온 산 교훈이다. 자실인의와 오유지족의 사상은 『법화경』으로부터 체현되었고, 무상행은 『금강경』으로부터 체현 되었으며, 화안애어의 실천은 『화엄경』보현행원으로부터 형성되었음이 인지된다.

 

IV. 석주보살 하화중생으로서의 교육불사

 

대승불교의 특징은 보살사상이다. 대승불교에 의하면 보살은 수없이 많이 있으며 이 세상뿐만 아니라 十方世界의 곳곳에 살아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결코 스스로를 위하여 열반은 구하지 않고 생사의 세계에서 고통을 당하는 중생들을 도우기 위하여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석주 큰스님은 한국 근현대 불교사의 중심에서 교육불사로서 보살행을 실천하기 위하여 위법망구의 삶을 사셨다. 스님께서는 노블리스 오블리지(noblesse oblige)의 윤리를 종단의 교육불사로 당신의 삶을 일관하셨다.

 

부처님의 일생에 힘쓴 일이 교육이었던 것처럼 큰스님께서도 교육불사에 온갖 정성과 모든 정열을 다 쏟았다. 교육은 사람농사요, 인재양성이다. 위대한 나라는 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다. 인재가 많은 교단은 훌륭한 교단이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 인재양성(人才養成)처럼 중요한 것이 없다. 일찍이 중국의 관자(管子, ?~BC645)는 이렇게 말했다. “일년의 계획은 곡식을 심는 것이 제일이요, 10년의 계획은 나무를 심는 것이 제일이요, 종신(終身)의 계획은 사람을 심는 것이 제일이다(一年之計 莫如樹穀 十年之計 莫如樹木 終身之計 莫如樹人).”라고 말했다. 그러려면 올바른 교육을 하는 도리밖에 없다. 위대한 철학자 임마뉴엘 칸트(1724-1804)도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교육에 의해서만 인간이 될 수 있다. 인간에서 교육의 성과(成果)를 제거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그래서 교육은 인간의 능력 계발이라고 한다. 배운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아는 것이요, 우리의 정신의 눈을 새로 뜨게 하는 것이요, 인생과 세계를 올바로 보는 마음을 넓히는 것이요, 나의 능력이 성장하는 것이요, 나의 인격이 부처님의 인격으로 바뀌는 것이다.

 

『화엄경 보현행원품』의 「광수공양장」에서는 “모든 공양 가운데는 법공양이 으뜸이니라.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들은 법을 존중하기 때문이며,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함이 많은 부처님을 출현케 하는 일이며, 만일 보살들이 법공양을 행하면 이것이 곧 부처님께 공양함과 다름이 없는 것이며, 이와 같이 수행함이 참된 공양이기 때문이다.”고 설하고 있다. 또 『육조단경』의 「반야품」에서는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십이부의 경전들이 사람의 성품가운데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다.”고 교시하고 있다. 이런 가르침을 믿고 대원(大願)을 품고 먼 앞날을 바라보면서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을 조기 발굴 양성하기 위하여 스님께서는 순차적으로 1) 어린이회 육성불사, 2) 청소년 교화연합회 육성불사, 3) 중앙승가대학 육성불사를 하셨다. 그럼 먼저 어린이회 육성불사를 어떻게 하였는가를 알아보도록 한다.

 

1) 어린이회 육성불사

 

큰스님께서는 한국불교의 장래는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있다고 강조하시면서 종단이 아직 어린이 포교에 역량을 투입하지 못했던 1965년 3월 26일, 칠보사(七寶寺) 어린이회를 창립하시어, 어린이 포교에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셨다. 스님은 항상 “어린이에게 부처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은 지혜의 씨앗을 심어 자비의 싹을 틔우는 일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큰스님의 교육사상의 이념이며 실천의 밑바탕이다. 그런데 스님의 어린이 교화 운동에는 중요한 특징이 있다. 그것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위하듯이, 어린이를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은 부처님 마음 같이 자비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부처님의 마음이 곧 부모의 마음이라는 설법은 간절하기 이를 데 없다. 제 자식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넓혀 모든 자식을 제 자식처럼 사랑하는 것이 곧 부처님의 마음이고, 이러한 마음으로 어린이들을 대하라는 것이 스님의 가르침이다. 그럼 한 예를 들어보자. 어린이 운동을 1960년대 초부터 전개했던 운문스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1960년 중반에 내가 어린이를 데리고 안국동 선학원으로 설날세배를 하러 갔었다. 아이들이 수십 명 모이다 보니 자연 떠들썩했다. 나는 큰스님과 선학원 대중스님들께 미안한 감이 들어서 “조용! 조용!”하면서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시키고 있었는데 큰스님께서는 내 생각과 달랐다. 스님께서는 “아이들은 떠드는 것이 본능이니 그냥 두라”고 하셨다. 참 오래된 옛날 일이다. 그 후 칠보사에 스님을 뵈러 가면 칠보사 법당 앞이나 큰스님 방에 학생들과 어린이들이 드나들기도 하고 놀기도 하였다. 특히 칠보사 대웅전 앞 정자나무 아래에서 아이들과 공기놀이를 하는 큰스님의 모습은 세수와 법랍은 다 어디로 갔는지 방금 태어난 어린 동자로 보였다. 왜냐하면 나는 스님과 같이 어린이를 위한 포교를 하고, 어린이를 위한 찬불가도 만들고, 어린이와 함께 부르며 같이한 세월이었지만 세수와 법랍은 저리가고 동자의 모습으로 어린이와 동화될 수 있는 큰스님의 모습이 나를 그 자리에 머물게 했다. 이것은 큰스님께서 청소년들을 사랑하고 이해하심이 아니겠는가.

 

석주 큰스님은 1972년, 동국대학교 이사로 계시던 그 해 어린이날에 담화문을 발표하고 『부모은중경』1만부를 배포하신 적이 있다. 본래 부모는 자식을 선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랑한다. 이 사랑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 이러한 받아들임이 곧 부처님의 자비가 아니겠는가? 『부모은중경』은 부모님의 순수한 받아들임의 사랑이 잘 표현되어 있어, 꼭 불자가 아니더라도 그 말을 보고 들으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린다. 스님께서 이 1만부나 배포하신 뜻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심어주자는 의도이다. 그것은 어린이에게 자비의 싹을 심는 일이라고 하셨다.

 

스님께서는 효를 강조하시는 것은 부처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천에 서원을 세운 것이 스님의 어린이 교화운동 육성불사의 요체다. 결국 스님의 어린이 교화 육성불사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마음이 깨끗해야 한다는 선불교의 핵심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유마경』의 「불국품」에서 설하고 있는 “만약 보살이 정토를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자기의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 자기의 마음이 청정하면 불국토가 청정하다”는 설법과 같은 입장이다. 스님의 어린이 교화 육성불사는 깨끗한 마음을 찾고 그것을 지속하기 위한 구체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부터 스님은 사회와 국가, 전 인류에게도 확대하여 온 세상을 불국토로 만들고자 하는 서원의 실천이었다. 이런 실천의 예로 1980년 한국 사찰에서는 최초로 칠보합창단을 창립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공연까지 하여 그 당시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1985년 칠보유치원을 설립하여 어린이 인성교육에 전력투구하셔서 칠보학생회에서 성장한 지도자로 하여금 유치원 운영을 하도록 배려해 주셨다.

 

2) 청소년 교화연합회 육성불사

 

이러한 서원의 연장선상에서 큰스님께서는 한국불교의 미래를 할머니 위주의 불교로부터 보다 젊어지는 불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청소년 교화 육성불사를 주창하셨다. 큰스님께서는 대의스님, 운문스님, 안병호 법사 등과 함께 청소년 교화연합회를 1965년 5월에 발족시켰다. 그리하여 어린이 불교운동과 함께 포교 일선에서 불교음악 보급과 사찰 단위의 청소년 불교학생회를 조직하여 청소년 포교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셨다. 큰스님께서는 1967년 5월에 33명의 어린이로 조직된 합창단을 구성하여 삼일당에서 예술제를 봉행하였다. 여기에서는 한국불교 역사상 최초의 불교음악을 발표하였다. 이 때 운문스님이 작사한 동요를 발표하였는데, 약 1000여명 이상의 대중참여로 대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런 운문스님의 말씀을 인용해보자.

 

특히 한국불교음악협회 현판을 써 주시면서 “이제 운문스님도 꿈을 이루셨네. 젊어서부터 누구도 알아주지도 않는 찬불가를 홀로 애쓰더니 이제 많은 스님과 불제자들이 모여서 찬불가활동을 한다니 매우 흐뭇하시겟구먼. 또한 신도용 찬불가를 편찬한다니 이제는 전 불자들이 한 목소리로 부처님의 말씀을 음성공양하니 생활 속에 포교가 되겠네그려. 그래도 찬불가는 운문스님의 공이 많지. 은사스님께 꾸지람도 많이 듣고 하더니 은사스님과의 약속을 이제는 지키게 되어 매우 기쁘겠구먼. ......큰스님께서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계실 때 나를 재무부장으로 임명하여서 불교음악활동에 힘을 실어 주셨기에 한 동안 침묵 속에 있었던 조계사 연화 어린이회 합창단을 재설립∙운영할 수 있었다. 또한 조계종 총무원에서 찬불가 선정위원회를 설치하여 1971년 불교연합회 주최로 찬불가 공모도 하고 시상을 하면서 많은 불자들이 부르고 있는 삼귀의, 사홍서원이 당선되어 불교법인 동국대학교 총장님께서 상금과 상장을 줄 수 있는 기틀을 만들어 주신 분이 바로 큰스님이시다.

 

이런 공덕으로 큰스님께서는 1907년 8월 제11차 정기총회에서 청소년 교화 연합회의 제2대 총재로 선출되었다. 대한불교 청소년 교화연합회의 총재가 되신 스님은 사찰 단위의 학생회 조직을 확대 개편하여 각 중∙고등학교에 많은 불교학생회를 창립 법회 지원비를 자비로 지원하셨다. 석주 큰스님께서는 청소년지도자 양성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시고 여름과 겨울방학을 이용해 청소년지도자 연수교육을 실시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그래서 1971년 전국의 불교학생 지도자들을 위한 지도자 강습회를 실시하였다. 이때의 교육내용은 어린이 포교와 중∙고등학생 포교 및 지도 방법 등이었다. 연수 교육시 스님께서는 일주일 내내 함께 자리를 지키고 계시면서 강사들을 격려해 주셨다고 한다. 또 청소년 수련회시 모든 사람들에게 음식에 대한 고마움을 일깨워 주시고 농부의 수고를 생각해서 음식을 남기지 않고 자기 몸에 알맞게 먹도록 교육하셨다. 이것은 환경문제에 대한 스님의 특별한 관심의 표명이었다. 이 같은 청소년 교육에 대한 관심은 학생회 수련회에 빠짐없이 참석해, 취침시간이면 아이들의 이불을 덮어주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1977년 4월 유관순기념관에서 ‘전국 불교 청소년 윤리강령 선포대회’를 가졌다. 여기에는 불자 학생 4000여명과 불교계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참석하여 청소년윤리에 대한 법문을 경청하기도 하셨다. 1983년 8월 대성리 유스호스텔에서 제18차 청소년 지도자 연수회를 개최하여 전국 지도자교육을 실시하였다. 큰스님께서는 ‘칠보장학회’를 설립하여 학비가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내놓으셔서 큰스님의 장학금을 받아 공부한 스님들과 불자들이 많으며, 이들이 교계에서 큰 활동을 하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984년 6월 큰스님께서는 15년 동안 재임하셨던 총재직을 관응 큰스님께 물려주셨다. 정말로 큰스님이 아니셨다면 지금의 청소년 불교활동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큰스님의 원력은 ‘수미산을 넘어’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큰스님의 청소년 교화연합회 육성불사는 ‘불교계의 소파 방정환’ 같은 분이라고 기억된다. 이는 큰스님의 개화된 사고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법하고자 하는 큰 원력과 신심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불교청소년지도자 세미나 및 지도자 연수교육(불기 2529년 3월 16 - 19일) 한국불교선리연구원, 「그리운 석주 큰스님-석주 큰스님 탄신 100주년 기념문집」 2009년 3월. p.317.

 

 

3) 중앙승가대 육성불사

 

1962년 4월 10일에 통합종단이 탄생한 후 종단은 불교발전을 위한 3대사업이라는 목표를 설정하였다. 소위 도제양성∙포교∙역경이 그것이었다. 이 세 가지 불사에 큰스님의 자비로운 체취가 남아있다. 큰스님은 세상에 인재양성(人才養成)처럼 중요한 것이 없다고 하시면서 중앙승가대 집중 육성불사에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 도제양성의 가장 큰 도량이 중앙승가대학이다. 중앙승가대학은 석주스님이라는 큰 그늘이 있었기에 시금석을 놓을 수 있었다. 현재 중앙승가대학교의 총동문회 회장이시고 월정사의 주지이신 정념스님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석주 큰스님이야말로 오늘의 중앙승가대학교를 세우신 창립주이십니다. 범어사, 해인사, 금산사, 월정사 등 각 사찰에서 젊은 학인들이 나서서 근대화된 승려들의 교육기관을 만들고자 했을 때 처음에는 다들 의욕만을 앞세우고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의욕은 실제와 달랐습니다. 이 사찰 저 사찰로 옮겨 다니며 중앙승가대학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가 좌절되고 있을 때 석주 큰스님께서 나서 주시면서 개운학사를 중앙승가대 근본 도량으로 삼았고 그로 인하여 오늘의 중앙승가대학이 우뚝선 것입니다. 스님께서는 종종 “중앙승가대학이야말로 한국불교의 허파, 도제양성의 요람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근대교육을 제대로 받은 승려들이 제대로 배출될 때 한국불교가 젊어지고 힘 있어진다는 판단이셨습니다. “열 명만이라도 공부하는 학인이 있다면 중앙승가대학은 그 의미를 갖는다”고 하셨습니다. 눈푸른 납자 하나가 온 세상을 희롱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올곧은 정신이 오늘의 중앙승가대학을 이룬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도제양성의 가장 큰 공로자가 바로 석주 큰스님이라고 단언하는 것입니다.

 

스님께서 교육에 헌신하신 시기는 1980년 중앙승가대학 초대 학장과 2대 학장을 맡았던 8년 동안이다. 그럼 중앙승가대학의 4대학장으로 1994년에 소임을 맡은 송산스님의 그간의 경과를 들어보도록 한다.

 

중앙승가대학교는 1979년 2월 의정부 쌍용사에서 승가교육의 혁신과 현대사회의 호흡에 맞추는 교육의 필요성에 뜻을 같이하는 젊은 스님들이 중앙승가학원을 설립할 것을 발기하고, 3월 돈암동 소재 보현사를 학사로 사용하면서 연수부 30명, 교양부 30명을 모집하여 개강하였다. 그 후 1980년 1월 중앙승가학원을 중앙승가대학으로 개칭하면서 석주 큰스님께서 초대학장으로 취임하셨고, 학교는 눈부시게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980년 10.26법란이 일어나면서 종단과 제방 불교계에서는 인재양성의 시급함을 인식하고 서둘러서 현대 교육기관 설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런데 종단 재정 형편상 금방 어디에다가 부지를 마련하여 인가받아 건물을 지을 만한 사정이 되지 않자, 우선 개개인이 모여 설립한 중앙승가대학을 종단이 인수하여 그 학사를 1980년 12월 보현사에서 영화사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81년 3월에는 교실과 기숙사 등 생활공간이 협소한 영화사에서 개운사 안에 있는 개운회관(현재 자비관)을 강의실과 기숙사로 수리하여 이전하였다.

이렇게 중앙승가대학이 발전하는 과정 속에서 교육의 필요성은 누구나 공감하면서도 막상 학교로 사용될 당해 사찰에서는 반대가 많았다. 하지만 학장이신 석주 큰스님께서 노구를 이끌고 학교발전에 전력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큰스님의 덕화에 감화를 받아 무사히 이전하게 되었다. 그 후 스님께서는 같은 해 12월, 2년제 대학을 4년제로 개편하고 불교학과만 있던 곳에 사회복지학과를 증설하였다. 1982년에는 성라암(성북동 소재)에 있던 비구니 대학을 흡수 병합하셨고, 1983년에는 무려 97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는 기적을 보이셨다. 1984년 스님께서는 중앙승가대학 제2대학장으로 재임하게 되었고, 학장이 당연직인 개운사 주지로도 취임하게 되었는데, 개운사와 보타사는 승가대학 본교 부속 사찰로 귀속하게 되었다. 그 해 6월 개운학사(기숙사, 강당, 도서관) 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10월에 기공식을 갖게 되었는데, 그 때 큰스님께서는 동분서주하시면서 맹활약을 하시었다.

 

이어서 송산스님은 큰스님의 법륜상전(法輪常轉)을 위한 위법망구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석주 큰스님은 전국에 인연 있는 비구니스님들과 큰 사찰 주지스님들을 손수 방문하셔서 화주책에 시주금을 적어 오셨다. 평소 큰스님께서 붓글씨를 써 주신 사찰, 법문을 해 주신 사찰 또 큰스님을 존경해 오던 여러 스님들이 동참하여 아마 화주책 서너 권 될 정도로 엄청난 금액의 화주를 해 오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누구보다도 화주를 많이 해 오신 것은 물론 개운학사 건립에 큰 힘이 되었다. 그리하여 큰스님을 위시하여 교수, 동문, 학인스님들까지 일심으로 협력하여 개운학사는 지하1층, 지상3층, 연건평 480평이라는 거대한 건물을 완성하여 1985년 11월에 준공식을 갖게 되었다. 1986년 지금 중앙승가대학교 총장으로 계시는 종범스님이 총무처장을 맡고, 내가 학교 교학처장의 소임을 보고 있을 때의 일이다.

 

이러한 큰스님의 노력에 힘입어 1990년 2월 27일 4년제 대학 학력을 인정받은 각종 학교 인가를 교육부로부터 받게 되었으며, 1994년 학교 이전을 추진하게 되었고, 1996년 10월 28일 정규대학으로 승격되었으며, 2001년 3월 16일 김포학사가 완공되어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게 되었다. 중앙승가대학교는 2000년 대학원 석사과정을, 2005년 박사과정을 개설하여 명실상부한 대학교육기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중앙승가대학교가 발전하는데 석주 큰스님의 원력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중앙승가대학교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송산스님은 큰스님을 존경한 것은 단순히 학교일 때문만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기술하기를 “1971년 청담 큰스님께서 열반하시고 석주 큰스님께서 총무원장을 맡고 계실 때, 큰스님께서는 승려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시고 동국대학교에 승가학과를 설치하여 스님들만이 입학할 수 있는 학과를 만드신 것이다. ....... 이 승가학과 설치야말로 큰스님의 큰 업적이고 나도 그 덕분으로 동국대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이런 사실들을 통해서 볼 때 큰스님은 도제양성의 산 증인이시다.

이러한 큰스님의 공덕에 대하여 현 중앙승가대학교 총장 종범스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찬탄 흠모하면서 기리고 있다.

1988년 4월 16일, 큰스님께서는 2대에 이르는 임기를 마치고 학장의 직위를 사임하셨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석주 큰스님을 ‘명예 학장님’이라 하기도 하고, 그냥 ‘석주 큰스님’이라 하기도 했다. 중앙승가대학에서의 큰스님에 대한 호칭은 ‘초대, 2대학장님’, ‘명예학장님’, ‘석주 큰스님’ 등이다. 이는 석주 큰스님께서 ‘중앙승가대학의 큰스님’으로 덕화가 널리 미쳤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략>.

석주 큰스님은 우리 중앙승가대학교에서 참으로 높은 자리를 점유하고 계신다. 개교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승가인의 마음에 큰스님의 자비가 깊게 새겨져 있다. 그리고 스님의 필적과 법어는 큰스님의 가르침을 언제나 새롭게 느끼게 한다. 뿐만 아니라 큰스님의 기념식수인 보리수는 넓은 그늘이 되어 앞으로 승가인의 뜨거운 더위에 항상 맑고 시원함을 제공해 줄 것이다.

 

중앙승가대학 신축 기공식 한국불교선리연구원, 「그리운 석주 큰스님-석주 큰스님 탄신 100주년 기념문집」 2009년 3월. p.315.

 

V. 맺음말

 

석주 큰스님(1909-2004)의 발자취는 한국 근현대불교의 역사이다. 석주 큰스님은 한국 근현대불교사의 중심에서 대승보살도의 살아 있는 실증을 3대사업 중 특히 교육불사 실천을 보이신 자비보살이었다. 조계종의 ‘도제양성∙포교∙역경’의 삼대사업에 가장 헌신적으로 실천하신 분이 바로 큰스님이시다. 이러한 기적같은 스님의 헌신이 어떻게 나왔을까? 그것은 스님의 위법망구의 정진으로 체현된 스님의 사상으로부터 나왔다. 스님의 사상은 자실인의(慈室忍衣)의 원(願)·무상행(無相行)·화안애어(和顔愛語)·오유지족(吾唯知足)으로 분석할 수 있다.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지실인의와 오유지족의 사상은 『법화경』으로부터 체현되었고, 무상행은 『금강경』으로부터 체현되었으며, 화안애어의 실천은 『화엄경』보현행원으로부터 형성되어 실천한 것으로 필자는 해석하고자 한다. 석주 큰스님은 한국불교 전통의 법등(法燈)을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그 시대의 문제까지 회통한 자비보살의 전형이다. 한국 근현대불교의 역사에서 석주 큰스님과 같이 누가 한국불교를 그의 피와 살로 느끼면서 보살행을 한 분이 얼마나 될까? 오늘날 한국불교는 석주 큰스님과 같은 구도자를 갈구한다.

 

우리의 민족과 역사는 큰 인재를 갈망하고 있다. 한 지방의 지도자, 한 나라의 지도자가 나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계적 인물, 국제적 인물이 나오도록 환경과 여건을 조성하는 데 역할을 하는 것이 노블레스 오블리지의 윤리이다.

 

20년 전에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서 아시아 교육자 대회가 열렸다. 그 때에 가장 감명을 많이 준 준 케리 여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현대인이 저지르기 쉬운 세 가지의 정신적 범죄가 있다. 첫째는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것이요, 셋째는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이다.” 평범하고 간결한 표현 속에 깊은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항상 배워야 한다. 나만 알고 남을 가르치지 않는 다는 것은 지식의 이기주의이다. 아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을 겸손한 마음으로 가르쳐야 한다.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은 의무의 태만이다. 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의 의무를 부지런히 해야 한다.

 

우리가 정말 해볼 만한 가치 있는 일은 글로벌 시대를 이끌어 갈 인재불사를 하는 운동에 동참하는 일이 아닐까. 옛말에 천리 길도 일보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했다. 선인(先人)들은 이소성대(以少成大)라고 했다. 적은 것이 수 없이 모여 큰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큰스님과 같은 인물을 육성하기 위하여 먼저 큰스님의 생애와 사상을 연구하는 ‘학술사상 연구소’를 개원(開院)하는 것이 당위가 아닐까?

 

 

 

 

 

[출처] 석주 큰스님과 교육불사|작성자 만남 창조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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