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과 수행

불교의 세계관

수선님 2020. 10. 1. 11:41

1. 반야의 마음에서 본 세계관
불교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주적인 세계관과 인생관의 교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종교로서 뿐만 아니라 철학, 예술, 학문, 정치, 경제, 사회, 과학, 윤리, 교육 심지어 건축, 민속 등에 이르기까지 동양의 전 역사, 전 문화에 그 영향을 끼치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
그러므로 동양의 불교사는 곧 동양문화사의 중핵을 이룬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물론 유교나 도교적인 문화가 거기에 비견될 만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들 역시 불교와의 상호습합 내지 연관 속에서 발전되어 왔다.
인도권은 물론이며 한국이나 전 아시아에 있어서 불교가 창생된 이래 문화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고적이나 유물치고 불교문화의 성격을 띠지 않은 것은 거의 없을 정도로 불교문화는 질과 양에 있어서 가히 세계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불교의 세계관은 우리가 불교문화의 유적만 가지고도 알고 남음이 있다 할 것이다. 문제는 문화와 사상을 심도있게 관찰하고 알고자 하는 의욕과 지향성의 결핍이다. 한마디로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불교의 인간관에 있어서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마음과 의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깨닫지 않고서는 어떠한 이해나 성불도 불가능하다고 본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색·수·상·행·식의 ‘오온설’도, 무명·행·식… 노사의 ‘12연기설’도, 6근·6경·6식의 ‘12처 18계설’도, 사성제·팔정도도 모두 인간의 마음과 의식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들이다. 6식 외에 7식인 ‘말나식’이나 8식인 ‘아라야식’설도 역시 인간의 마음의 심층구조를 나타내는 것들이다.
인간의 마음의 세계, 다시 말해서 의식세계는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주관과 객관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분별지의 의식과 직관적으로 통일적으로 조견하는 반야의 마음 즉 무분별지의 심층의식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다.
유식설(唯識說)에 의하면 불교의 경전을 ‘정법계 등류의 교법(淨法界等流의 敎法)’이라고 한다. ‘법계(法界)’의 계(界 : dhatu)는 광맥(鑛脈)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말로 거기에서 여러 가지 존재의 진리가 발굴된다는 뜻에서 진여(眞如)라는 말의 다른 명칭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등류(等流)의 원어인 니샨다(ni-syanda)라는 말을 사전에서 보면 ‘흘러들어옴’, 혹은 ‘필연적인 결과’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정법계등류(淨法界等流)란 진여가 우리들 속으로 흘러들어 오는 것을 뜻하며 그때 흘러들어 온 진여는 필연적으로 우리의 사상과 언어의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여기서 사상과 언어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주관과 객관의 두 형태로 분화되어 사물을 분별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필연적 결과를 뜻한다. 말하자면 ‘정법계등류’란 우리가 무엇을 인식하려면 불가불 사물을 대상화하여 주관과 객관을, 분리할 수밖에 없는 진여의 세간화(世間化)를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주관과 객관이 각각 독립된 둘이 아니라 진여의 양면성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일이다. 요컨대 주관과 객관의 분리가 있을 때 인간의 분별적 인식이 가능한 것이지만 그것이 곧 실재(實在)는 아니라고 하는 것을 자각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반야(prajna)는 무이지(無二智), 혹은 지혜라고도 표현되는데 무이지의 ‘이(二)’는 소위 능취(能取)와 소취(所取)를 가리키는 것으로 구체적인 존재로서의 나에 있어서 주체적인 면과 객체적인 면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무이(無二)는 주체적인 것과 객체적인 것이 둘이 아니라는 뜻이며, 무이지는 그러한 둘이 아니라고 인식하는 지혜, 곧 반야를 의미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불교의 반야를 이렇게 간단하게 설명했다고 해서 그것을 다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소위 듀알리즘적인 이분법적(二分法的) 사고라고 하는 것은 주체적인 것과 객체적인 것을 둘로 나누고 그 둘 중에서 주체적인 것이 먼저 존재하기 때문에 객체적인 것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관념론과 객체적인 것이 먼저 존재함으로써 주체적인 것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유물론과의 두 가지 이론을 낳게 한다.
따라서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에 입각하게 되면 주체적인 것과 객 체적인 것 중의 어느 쪽의 것도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되게 되며, 관념론과 유물론은 서로 대립된 상태에서 각기 자기의 주장만을 강변하게 된다. 사실상 넓은 의미에 있어서 인류문화가 시작된 이래 관념론적인 측면과 유물론적인 측면의 싸움은 계속되어 왔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날 좌우의 충돌과 동서 양진영간의 싸움도 바로 이 두 이데올로기 간의 대립에 연유하는 것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아무튼 주체적인 것이 먼저 있다고 하는 관념론적인 것과 객체적인 것이 먼저 존재한다고 하는 유물론적인 것을 불교에서는 소위 선주론(先住論)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마땅히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에 있어서는 이와 같이 주객을 나누어 개념적으로 설명하는 관념론이나 유물론에 반대하여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실상의 세계를 직접 경험하고 만나게 되는 직관지를 중요시 하는 것이다. 어느날의 저녁놀의 아름다운 정경에 대한 경험은 오직 그날의 공간적·시간적 상황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요, 두번 다시 그와 동일한 감정을 느낄 수는 없는 것이다. 미국의 심리철학자 제임스가 인생은 변화하면서 연속한다고 말한 것과 같이 인생은 새롭게 다가오는 사건의 발생에 의하여 비등하며 순간 순간 생멸해 가는 역동적 유동성의 존재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가 반야를 통하여 무엇을 경험하고 의식한다고 하는 것은 불변적·절대적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지혜와 삼라만상이 서로 반응하고 조응하는 상호관통과 조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를테면 어머니의 마음에 있어서 아들에게는 아들로 반응하고, 딸에게는 딸로 반응하고, 자식들이 괴로워 할 때에는 괴로움으로 반응하고, 기쁠 때는 기쁨으로 반응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흘러가는 구름을 보았을 때는 흘러가는 구름으로 반응하고, 궂은 비가 내리는 날은 궂은 날로 반응하고, 아름다운 국화를 대할 때는 아름다운 국화로 반응하는 것이 본래 마음의 본성이다.
하늘이나 허공이 궂은 날이나 청명한 날에 관계없이 언제나 여여(如如)하게 그날 그날의 기상과 일기를 실상 그대로 현성(現成)하듯이 인간의 지혜의 마음은 여여하게 우주의 삼라만상을 경험하는 그때 그때마다 반응하고 현성하는 것이다.
만물을 비로자나불의 현현으로, 혹은 절대정신은 불성의 마음을 형식에 있어서의 공(空)으로 형상으로 조견하는 것이 결국 마음과 세계정신과 물질을 하나도 아니요, 둘도 아닌 소위 ‘색심불일불이(色心不一不二)’의 실상으로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반야의 세계관을 새겨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2. 원각(圓覺)의 마음에서 본 세계관
인도 철학에서는 인간의 영혼을 무시간적인 것으로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이라고 여겼다. 과연 그것은 전생의 죄와 운명 때문에, 시간의 과정 속으로 흘러 들어와 육체적 삶에서 죽음으로, 다시 죽음에서 삶으로 옮겨가는 윤회전생을 계속하게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인도의 철학(哲學)들은 영혼이 생사의 윤회를 계속하여 하나의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하나의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지게 되는 것은 그것을 운반해 가는 수레와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일종의 정신적 요소로서 영혼이 존재했던 이전의 상태에서 그가 행한 일들이 합쳐져 삶의 성격·자질·성품을 형성하여 영혼을 운반해 가는 수레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도 철학이나 불교에서는 이 준엄한 법칙을 카르마(karma), 즉 업(業)이라고 불렀다.
카르마는 행위와 행위의 결과를 동시에 의미한다.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과 처지는 과거의 우리의 행위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앞으로 미래에 다가올 우리의 환경과 처지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은 현재의 우리의 행위가 어떠한 것인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리사드 우파니샤드경에서는 “사람은 선한 행위에 의하여 선한 사람이 되고, 악한 행위에 의하여 악한 사람이 된다.”고 쓰고 있다.
따라서 『원각경』의 「금강장보살장」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모든 세계의 시작과 끝, 생과 멸, 앞과 뒤, 있음과 없음, 모이고 흩어짐, 일어나고 끝마침이 모두 생각 생각에 계속되어 돌고 돌아오고 가는 것이니 갖가지로 취하고 버림이 모두 윤회인 것이요,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원각(근본마음)을 알려고 하는 것은 원각의 성품까지도 함께 윤회케 하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이 윤회를 면하려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마치 눈을 깜박이면 잔잔하던 물이 흔들리는 것과 같고, 눈앞에서 횃불을 돌리면 불의 고리가 생기는 것과 같으며, 구름이 흐르면 달도 움직이고, 배가 가면 물가의 언덕도 올라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움직이는 마음을 쉬지 않고서는 변화하는 대상을 멈추게 할 수 없는데, 생사에 윤회하는 때묻은 마음을 깨끗이 하지 않고 어떻게 부처의 원각을 보라 하는가.”라고.

 

 

 

 

 

 

[출처] 불교의 세계관|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