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 불교

티벳 반야심경

수선님 2020. 10. 25. 11:29

티벳 반야심경

 

 

티베트 반야심경강설 1

 

 

 

반야심경은 지혜바라밀의 정수

 

반야심경은 불자들이 가장 애송하는 경전입니다. 많은 해설서들이 출간되었지만, 제대로 뜻을 새기기 녹록치 않은 공성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티벳에서는 반야심경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지난해 11월 열렸던 티벳 소남스님의 반야심경 강설을 모두 5차례에 나눠 연재합니다. 편집자주

 

지금 여러분에게 반야심경과 관련하여 세 종의 문서를 나눠 드렸습니다. 첫 번째는 티베트어 반야심경을 한국어로 옮긴 것입니다. 두 번째는 돈황본 반야심경입니다. 티베트에서 읽는 반야심경과 한국에서 흔히 읽는 반야심경은 좀 다르지만, 돈황본과 티벳본은 많이 가깝습니다. 세 번째는 티베트의 고승 잠양 가외 로되의 반야심경 해설목차입니다. 반야심경이 짧은 경전이지만, 경전의 형식을 다 갖추고 있어 그 목차별로 내용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먼저 티벳어본 반야심경을 한글로 옮겨놓은 것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반야바라밀다심경

 

산스크리트어로 방가와띠 빠르쨔 빠라미따 시따야

티벳어로 좀댄데마 세릅기 파롤뚜 친베닝보

한국어로 박가범의 어머니 반야바라밀의 정수

 

 

한 때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박가범(薄伽梵)께서 왕사성 영축산에서 비구 대중과 보살 대중과 함께 머무셨다. 그 때 박가범께서는 밝고 깊은 삼매에 들어 계셨다. 또한 그 때 보리 향한 큰마음 갖추신 관자재보살께서는 반야바라밀의 깊은 행을 관찰하고, 오온(五蘊)조차도 자성이 없음을 명확히 보셨다.

 

곧이어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장로 사리불은 보리 향한 큰마음 갖추신 관자재보살께 이렇게 여쭈었다. “어떤 선남자가 반야바라밀의 깊은 행을 닦기 원할 때 어떻게 배워야 합니까?”

 

 

 

이렇게 여쭈었을 때 보리 향한 큰마음 갖추신 관자재보살께서는 장로 사리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리자여!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의 깊은 행 닦기를 원할 때 그는 명확히 알아야 한다. 오온조차도 자성이 공함을 철저하게 알아야 한다. 색은 공이고, 공성은 색이다. 색 이외 공성이 다르게 있지 않으며, 공성 이외 색도 다르게 있지 않다. 이와 같이 수 상 행 식 모두 공이다. 사리자여, 이와 같이 모든 법이 오직 공이다. 정의가 없다. 생겨남이 없고, 소멸함도 없다. 더러움도 없고, 더러움을 여읨도 없다. 줄어듦도 없고, 늘어남도 없다.

 

사리자여, 그러므로 공성에는 색(色)도 없고, 수(受)도 없고, 상(想)도 없고, 행(行)도 없고, 식(識)도 없다.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코도 없고, 혀도 없고, 몸도 없고, 의식도 없다. 형상도 없고,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고, 맛도 없고, 촉감도 없고, 의식의 대상도 없다. 안계(眼界)부터 의계(意界)까지 없고, 의식계(意識界)까지도 없다. 무지 없는 것과 무지의 소멸 없는데 서부터 늙음과 죽음 없고, 늙음과 죽음의 소멸까지도 없다. 이와 같이 고(苦) 집(集) 멸(滅) 도(道)도 없다.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고, 얻지 못함도 없다.

 

사리자여, 이렇게 보살들은 얻음이 없기 때문에 반야바라밀에 의지하고 머물러, 마음에 장애 없고 두려움이 없다. 뒤집힌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 구경열반에 든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 또한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여 위없는 원만구족한 깨달음을 얻으셨다. 그렇기에 반야바라밀의 만트라, 큰 밝음의 만트라, 위없는 만트라, 동등하지 않은 것과 동등한 만트라, 일체의 고통을 완전히 멸하는 만트라를 거짓 아닌 진실로 알아야 한다. 그러한즉 반야바라밀 진언은 이와 같다.

 

다야따 가때 가때 빠라가때 빠라삼가때 보디 소-하

 

사리자여, 보리 향한 큰마음 갖춘 보살은 이와 같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닦아야 한다.”

그 때 박가범께서 밝고 깊은 삼매에서 나와 보리 향한 큰마음 갖춘 관자재보살에게 그렇다라고 칭찬하시고, “옳도다, 옳도다. 선남자여! 그래 그와 같다. 선남자여! 그래 그와 같다. 네가 말한 바와 같기에 깊은 반야바라밀을 닦아야 한다. 일체의 여래들 역시 뒤따라 기뻐하셨도다.”

 

박가범께서 이렇게 설하실 때 장로 사리불과 보리 향한 큰마음 갖춘 관재재보살마하살, 일체 세간의 천신, 사람, 아수라, 건달바 등이 박가범의 말씀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믿음으로 지녀 받들었다.

 

 

반야심경은 반야부의 경전으로 ‘바라밀’을 담고 있는 경전들입니다. ‘바라밀’은 티벳말로 ‘파르도 친빠’ 라고 하는데, 티벳에서는 두 가지로 뜻을 나누어 설명합니다. ‘디 바르도 친빠’하면 저 언덕 넘어로 가고 있는.. 그래서 수행하는 과정도 포함하여 말합니다. 즉 부처를 이루기 전 보살들이 바라밀 수행을 닦는 것도 바라밀에 포함됩니다. 반면 그냥 ‘파르도 친빠’ 하면, 지혜바라밀을 완전히 이룬 부처님이 얻으셨던 경지만을 말합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과정에 있는 보살님들은 아직 바라밀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이 입장에서는 부처 이루기 전에는 반야바라밀은 없다고 설명합니다. 바라밀에 대한 설명이 경전에 나올 때는 이렇게 두 가지로 쓰이니, 의미를 혼돈해서는 안됩니다.

 

바라밀에 대해 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보시부터 지혜까지 육바라밀 가운데 지혜바라밀을 4가지로 나눠 십바라밀이라 합니다. 10바라밀과 보살의 10지가 연결됩니다. 보살의 1지는 보시바라밀을 특별히 닦고, 2지는 지계바라밀을... 이렇게 상응합니다.

 

티벳에서 반야심경을 따로 공부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는 경전 배우기 전에 먼저 논서 중심으로 배우기 때문입니다. 논서도 바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티베트 스승들이 쓰신 논서에 대한 해설을 먼저 배웁니다. 예를들어 <입중론>이라 하면, 중론의 해설서인데.. 이것도 게송이라 뜻으로 바로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입중론을 문장으로 풀어 설명한 논서의 해설서들을 위주로 공부하게 됩니다.

 

티벳에서 반야경은 십만송반야바라밀경(12권), 2만송반야바라밀경(3권), 팔천송반야바라밀경(1권), 반야심경은 짧은 편이고, 한 단어로 된 반야경도 있습니다. 티벳말로 ‘아’라는 한단어로 구성된 경전입니다.(웃음) 어쨌든 반야심경은 이런 긴 반야경들을 간추려서 만든 경전입니다.

 

우리가 경과 논 할 때 구분하는 법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경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내용이고, 논은 부처님의 제자들이 후대에 해석해 놓은 것입니다. ‘제자들의 번뇌 없애기 위해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 이것이 경의 정의입니다. ‘논’ 하면 ‘어떤 경을 해설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 정의입니다.

 

그런데 경이나 논 하면 우리가 책으로 보는 경전을 말하는 것인가요? 글자로 쓰여진 이것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입으로 말하는 소리를 반야심경이라 합니까? 반야심경은 무엇입니까?

 

먼저 물어볼까요? 반야심경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고 말해야하겠죠. 그러면 있는 것 가운데, 무상법(無常法)입니까? 유상법(有常法)입니까? 변하는 것이므로 무상법이라고 말해야겠죠. 무상법 가운데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모든 무상한 존재는 색(色), 식(識), 행(行) 이 셋에 다 들어갑니다. 예를 들면 사람은 색입니까? 식입니까? 행입니까?

 

사람은 색도 아니고, 식도 아니고, 행이라 말합니다. 무상 자체도 행이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좋은 습, 나쁜 습 할 때 습도 식, 색이 아니고 행입니다. 그러면 반야심경은 이 세가지 가운데 무엇입니까?

 

대중) 색입니다.

 

그러면 색 가운데 안의 색입니까, 바깥의 색입니까? 내부의 색은 안이비설신이고, 색성향미촉은 바깥 색입니다. 계도 색입니다. 비구계, 사미계 할 때 계도 색입니다. 반야심경은 바깥의 색입니까? 안의 색입니까?

 

 

 

대중) 반야심경은 바깥의 색입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색성향미촉 가운데 반야심경은 어디에 속합니까? 부처님의 말씀이니 소리입니다. 모든 경전과 논서들은 다 소리(聲)에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눈으로 보는 종이로 된 경전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글은 소리를 표현해 놓은 것일 뿐이지, 글 자체가 반야심경은 아니라고 봅니다. 반야심경은 소리입니다. 육경의 색경에 해당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식하고 구체적으로 따지는 것하고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반야심경은 경전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부처님말씀을 담은 경전 가운데는 부처님께 허락을 받고 설해진 경과 부처님의 가피로 설해진 경,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경, 이렇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티벳에서는 경을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눕니다. 이거 전부다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부처님 입으로 직접 안 나오더라도 부처님께서 허락을 하셔서 아난존자나 관세음보살이 설하시게 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것이 경전입니다.

 

티벳에서 공부할 때 우리 입으로 나오는 이 경전의 소리가 반야심경인가, 아닌가? 하고 논쟁을 하기도 합니다. 제가 물어볼까요. 지금 여러분들이 외는 경전은 반야심경입니까? 아닙니까? (웃음)

 

 

가피로 설해주신 경에는 부처님께서 몸으로 가피를 주신 경, 어떤 제자들에게 가피를 베푸시어 제자들에게서 저절로 나오게 하는 경, 부처님께서 말로 가피를 주신 경, 부처님께서 마음으로 가피 주신 경 이렇게 세가지로 나눕니다. 마음으로 가피 주신 경도 또한 세 가지로 나눕니다. 복잡해지니까 이정도까지만 하겠습니다.

 

 

자 다시 묻겠습니다. 우리 입으로 나오는 반야심경은 반야심경이라고 말하면 좋겠습니까? 아니라고 말하면 좋겠습니까? 우리 입으로 나오는 이 경전도 반야심경입니다. 이렇게 묻는 이유는 경전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기 위해서입니다. 경전이라면 제자의 번뇌 없애기 위해 부처님께서 설하신 최상의 말씀을 담은 것이 경이라 했는데... 우리가 경전 읽는다 할 때, 문자를 보고 있지.. 소리, 즉 부처님의 말씀을 듣듯이 잘 하지 못합니다. 이런 점을 잘 생각하면서 경전을 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반야심경이 무엇을 말합니까? 하고 깊이 따져보면 사실은 찾을 수 없습니다. 글로 된 책이 반야심경입니까? 2천5백년전 부처님께서 설하신 말씀을 반야심경이라고 합니까? 아니면 지금 우리가 입으로 외는 이것이 반야심경입니까? 반야심경 역시 깊이깊이 따져가면 찾을수 없습니다. 부분 속에서 전체는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찾을 수 없어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그런 부분을 통해서 무언가 영향을 받고 변화가 있기 때문에 찾을 수 없는 것만으로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고 하는데... 있다, 없다.. 이 둘을 벗어난 무언가는 없습니다. 없는 것도 아니다 있는것도 아니다.. .말은 멋집니다만... 있는 것 아니라면 곧 없는 것입니다. 없는 것 아니라면 곧 있는 것입니다. 있다, 없다를 결정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마차에 비유해봅시다. 마차는 바뀌 등 여러 가지로 구성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오온으로 구성된 존재에 대해 사람, 또는 중생이라고 이름 붙인것입니다. 마차는 있습니다. 마차가 있기에 탈수도 있고 짐을 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차의 부분만 있다 했을 때 이것을 마차가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부분, 예를 들어 나의 몸, 나의 팔, 나의 마음 이런 것들은 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온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부처님께서 다 없다고 하셨을까요? 오온도 육근도 사성제도 십이연기도 다 없다고 말씀하셨을까요?

 

 

대중) 자성으로 없다는 뜻입니다

 

 

‘오온 자체도 자성이 없음을 명확하게 보셨다’고 반야심경에 있습니다. 밑에 없다는 전부 그냥 없는 것이 아니고, 자성이 없음.. 즉 자성이란 단어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약설로 해 놓으시고는 상설로 뒤에 풀어놓고 계십니다. 부처님께서 없다고 한 뜻은 “있는 것”과, “있지만, 자성이 없는 것”, “없는 것”, “자성이 없지만 있는 것” 이 네 가지로 정확히 구분해야 합니다.

 

 

반야심경도 따지면 찾을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반야심경은 무상법에 속하고, 색수상행식의 오온 가운데 색온, 색온의 색성향미촉법 가운데 성, 즉 소리에 속합니다. <구사론>에서는 소리에도 8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6경 가운데 색은 모양과 색깔 두 가지로 나뉘고, 모양은 8가지, 색깔은 12가지로 합쳐서 모두 스무가지의 색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모양 가운데는 평평한 모양과 평평하지 않은 모양, 긴 모양과 짧은 모양, 높은 모양과 낮은 모양, 네모 모양과 동그란 모양.. 이런 식으로 8가지로 분류합니다. 색깔은 근본색깔과 가지 색깔로 나누고 근본색깔은 네 가지로 가지 색깔은 8가지로 나눕니다. 이렇게 해서 색성향미촉 중의 색은 모두 20가지라고 말합니다. 소리는 8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향은 여섯 가지 종류, 미는 4가지 종류가 있고, 촉은 11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티벳에서는 게송으로 외워서 이런 것들을 먼저 배웁니다. 반야심경에서 없다고 말하는 여러 가지 것들이 대체 무엇을 없다고 하는 것인지, 이런 것들의 정의를 제대로 아는 것도 간단치가 없습니다. 너무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하나에 매우 구체적인 뜻들이 있습니다.

 

 

 

오온의 색온 가운데 눈으로 보는 안식의 대상이 가장 중요하기에 색이라 중복하여 붙였듯이 육경 모두가 법이지만, 이 가운데 의식의 대상을 중복하여 또 법이라 하였습니다. 의식의 대상 가운데 열반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색성향미촉도 다 법이지만, 중요하기 때문에 따로 떼 내어 의식으로 아는 모든 대상을 중복하여 또 법이라 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반야심경은 색온에 들어갑니다. 색온 가운데 소리입니다.

 

 

경전 첫머리의 ‘박가범’은 부처님을 말합니다. 산스크리트어로 ‘반가왼’을 음차한 것 같습니다. 티벳어는 이것을 뜻으로 옮겼는데 ‘좀댄데’입니다. 좀은 제거하다, 댄은 갖추다, 데는 벗어나다라는 뜻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좀은 번뇌장과 소지장을 제거하다, 댄은 지혜의 공덕과 자비의 공덕 등 일체의 공덕을 갖추다.. 데는 윤회에서 벗어나다라는 일반적 뜻과 윤회의 가, 열반의 가 등 양변에 떨어지지 않는다, 즉 윤회에도 떨어지지 않고 열반에도 떨어지지 않고의 깊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성문이나 연각 아라한은 열반에 떨어져있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 위해 해탈 얻은 상태를 열반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 둘 다에서 벗어난 분은 부처님이십니다. 윤회에도 떨어지지 않고 일체중생위해 해탈하시어 열반에도 떨어지지 않은 분입니다. 좀댄데의 데는 이렇게 양변에서 벗어나신 분이라고 합니다. 많은 분들이 부처님 하면 2500년전 석가모니 부처님, 역사적인 부처님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좀댄데 즉 붓다는 역사적인 부처님만 아니고, 모든 부처님을 말합니다.

 

 

부처님도 논리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무조건 자비로운 분이라고 알면.. 대체 어떤 것이 자비로운 것인지.. 어떤 존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부처님에 대한 생각도 추상적인 것에 머무릅니다. 인명학에서는 부처님이 귀의의 대상인 이유 8가지를 논쟁을 통해서 우리가 귀의해야 할 이유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부처님이 정말로 우리가 의지할 분인지 아닌지를 분명히 밝혀놓습니다.

 

 

지혜는 어머니, 방편은 아버지라고 하는데, 아버지와 어머니가 같이 있어야 자식이 나오듯이 지혜와 방편(보리심) 함께 있어야 부처이룰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어머니는 지혜입니다. 반야바라밀입니다. 부처님의 아버지는 보리심입니다. 왜 지혜는 부처님의 어머니이고, 보리심은 부처님의 아버지인가요? 아버지가 한국사람이면 자식들은 어머니가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한국사람 이듯이 보리심 없으면 아무리 다른 공덕 크게 지어도, 신통 있고, 해탈을 얻더라도 보살, 부처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보리심입니다. 공성을 깨닫는 지혜는 성문, 연각, 보살 아라한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보리심 없이는 절대로 부처 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 이루는 원인 가운데 아버지와 같은 주원인이 보리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리심을 아버지와 같다고 합니다. 지혜는 어머니와 같습니다.

 

 

 

‘정수’라고 할 때 여러 반야바라밀을 요약하여 핵심만 기록했기에 정수라고도 하고. 또한 육바라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혜바라밀이 정수이기에 이렇게도 설명했습니다. 제목의 의미 간단히 풀면 이것입니다.

 

 

 

티벳불교산책 2009 07,08월호

 

 

티베트 반야심경강설 2

 

 

반야바라밀

 

반야심경은 불자들이 가장 애송하는 경전입니다. 많은 해설서들이 출간되었지만, 제대로 뜻을 새기기 녹록치 않은 공성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티벳에서는 반야심경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지난해 11월 열렸던 티벳 소남스님의 반야심경 강설을 통해 알아봅니다. 편집자주

 

 

앞에서 반야심경의 제목의 의미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드렸습니다. 반야심경은 ‘박가범(薄伽梵)의 어머니 반야바라밀의 정수’라는 뜻이 있습니다. ‘정수’라고 말한 뜻은 여러 반야바라밀을 요약하여 핵심만 기록했기에 정수라고 표현하였고, 또 바라밀 가운데 지혜바라밀이 가장 중요하기에 정수라고도 하였습니다.

 

 

박가범의 어머니 반야바라밀에 귀의합니다.

 

이것은 산스크리트어에는 없는 내용으로 티벳의 역경가가 옮기면서 넣은 것입니다. 반야심경과 같이 매우 깊은 뜻을 가진 경전은 산스크리트어에서 티벳어로 옮기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장애 없이 제대로 번역하기를 기원하면서 먼저 예경문을 쓴 것입니다. 보통 불보살님에게 예경을 표하기도 하고, 여기서처럼 반야바라밀(지혜)에 예경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장애를 막고 번역이 잘 되도록, 티벳에서 경전을 옮길 때는 역경가들이 늘 이런 식으로 예경을 먼저 하고 나서 번역을 시작하였습니다.

 

 

부처님 말씀을 담은 경전은 모두 경·율·론 3장 안에 들어가는데, 티벳에서 역경가들과 왕이 번역을 하며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경전의 첫머리만 보아도 경율론 3장중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했습니다. ‘일체지 갖추신 분에게 예경합니다’ 로 시작하면 율장입니다. 경장은 ‘부처님과 보살들에게 예경합니다’로 시작합니다. 마지막으로 ‘문수보살님에게 예경합니다’ 로 시작하면 논장입니다. 율은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것이고, 3학 가운데 계학을 다룹니다. 경장은 주로 선정에 대한 부처님 말씀으로, 성문 연각 보살이 정학을 닦도록 설하신 것입니다. 선정을 가장 깊이 닦으신 분들은 부처님과 보살님들입니다. 그래서 경장은 ‘부처님과 보살님께...’로 시작합니다. 논장은 혜학을 닦게 합니다. 문수보살이 지혜의 상징이시기에 문수보살에게 예경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경전을 티벳말로 옮길 때 이런 식으로 규칙을 정했습니다. 반야심경은 경장, 율장, 논장 가운데.... 지혜 늘어나게 하는 경전이므로 논장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한 때 이와같이 내가 들었다.

 

반야심경도 짧은 경전이지만, 다른 경전과 마찬가지로 ‘여시아문’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중국, 한국 등 한역경전에서는 이것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나눠드린 돈황본 한문경전에는 나와 있습니다. 돈황본 반야심경은 티벳본과 비슷합니다. 이 대목은 경전의 유래를 담은 서문에 해당하는 데 보통 서문은 공통적인 서문과 특별한 서문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 공통적인 서문은 네 가지의 원만함을 말하는데, ‘한 때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가 바로 공통적인 서문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한 때’는 때의 원만함을 말합니다. ‘박가범’께서 설하신 것을 말하고 있으므로 설법자의 원만함을, ‘왕사성 영축산에서’는 장소의 원만함을, 듣는 이의 원만함은 ‘보살들과 비구대중께서 함께 머무시면서 들으셨다고 뒤에 나와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원만함이 경전의 머리에 나옵니다. 이것은 모든 경전들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서문이므로 공통 서문이라고 합니다.

 

 

‘한 때 이와같이 내가 들었다’를 한문으로 옮긴 것이 여시아문입니다. 현교 경전, 밀교경전 모두 여시아문으로 시작합니다. 여시아문 이 자체로도 뜻이 엄청나게 많이 있습니다. 뜻을 풀 때 4가지로 풉니다. 이 부분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여시아문은 이 경전이 부처님에게 직접 들은 내용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난후 얼마간 제자들이 공부하고 토론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나중에 문제가 생겨 논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러자 가섭존자가 주도하여 “부처님 법의 보호를 위해 빨리 법을 정립해야겠다”고 하여 경전결집을 하게 됩니다. 처음에 가섭존자가 주도한 경전결집에서는 사리불존자, 가섭존자, 아난존자 세 분께서 경 율 론을 다 외우셨다고 합니다. 2차 결집까지는 부처님께서 들은 것을 말로 합송하였는데, 나중에는 글로 남겨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3차 경전결집에서부터 글로 옮겼다고 합니다.

 

 

한때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에서 설법자는 부처님이시고, 법문이 설해진 장소는 왕사성 영축산입니다. 그런데 지금 영축산에 가보면 너무 좁아 많은 대중들이 어떻게 들을 수 있느냐? 고 의문을 갖기도 합니다. 그 많은 비구대중, 보살대중이 앉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2천5백년전과 지금의 장소가 많이 달라졌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대승의 입장에서 보면 ‘대승경전은 주로 보살들을 중심으로 설하셨다’고 하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통 상식으로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일예로 6대 달라이 라마의 전기에 보면, 달라이 라마께서 인도 성지순례 중 영축산에 올라가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산 밑에서 보니 영축산 밑에서부터 정상까지 경전이 가득 쌓여 있어 도저히 올라가지 못하고, 결국 밑에서 참배만 하고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영축산에 수많은 대중이 모이셨다는 경전의 기록을 일반적 시각으로만 재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때 박가범께서 밝고 깊은 삼매에 들어 계셨다. 또한 그 때 보리 향한 큰 마음 갖추신 관자재보살께서는 반야바라밀의 깊은 행을 관찰하고, 오온 조차도 자성이 없음을 명확히 보셨다.

 

 

박가범은 앞에 말씀드린대로 부처님이십니다. 부처님께서 깊은 삼매에 들어계셨고, 관세음보살님도 공성을 닦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보리 향한 큰 마음 갖추신’... 이것은 보살의 특징에 대한 설명입니다. 완전한 깨달음을 추구하는 마음이 보리 향한 마음이고, 또한 ‘큰 마음’이라 하면 나 자신 위해 깨달음을 얻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일체중생 돕기 위해, 일체중생의 깨달음이라는 큰 뜻 이루기 위해 닦는 마음이라는 의미입니다. 무간지옥에서부터 십지에 있는 보살까지 다 합쳐서.. 일체중생이라고 합니다. 일체중생 위해 수행하겠다는 마음이 큰 마음입니다. 관자재보살(관세음보살)은 티벳말로 ‘젠레식’이라고 하는데 ‘자비의 눈으로 보다’는 뜻이 있습니다. 모두를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자비심을 갖추신 분입니다.

 

 

이렇게 보리 향한 큰 마음 갖추신 관자재보살님께서 반야바라밀을 깊이 닦고 있을 때, 오온조차도 자성이 없는 것을 보셨다고 하신 데까지 특별한 서문입니다.

 

 

곧이어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장로 사리불은 보리 향한 큰 마음 갖추신 관자재보살게 이렇게 여쭈었다. “어떤 선남자가 반야바라밀의 깊은 행을 닦기 원할 때 어떻게 배워야 합니까?”

 

 

사리자가 관음보살님께 여쭙는데, 그것이 자기 힘으로 질문한 것이 아니라는 설명이 ‘부처님의 위신력으로..’라는 표현입니다. 부처님께서 밝고 깊은 삼매에 들어가셔서 사리자가 묻고 관세음보살이 답하게 하신 것입니다. 어떤 선남자가 반야바라밀의 깊은 행 닦기를 원할 때 어떻게 배워야 합니까? 이것이 사리자가 관자재보살에게 한 질문입니다.

 

 

이렇게 여쭈었을 때 보리 향한 큰 마음 갖춘 관자재보살께서는 장로 사리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리자여,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의 깊은 행을 닦기 원할 때 그는 명확히 알아야 한다. 오온조차도 자성이 공함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

 

 

관음보살님이 사리불의 물음에 먼저 “오온조차도 자성이 공함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라고 간략하게 줄여서 답을 하십니다. 오온이 자성으로 공하다는 말은 티벳말로 ‘똥바’인데, 비어있다는 뜻도 있지만, ‘아니다’는 뜻도 있습니다. 있지 않음, 혹은 없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자성(自性)으로 없다는 뜻입니다. 자성으로 비어있다, 자성으로 없다, 자성으로 공하다.. 다 같은 의미입니다. 그냥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성으로’ 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온개공이라는 것은 오온의 자성이 공하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성이 공하다의 반대되는 자성으로 있다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의 화가 자성으로 있다면,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화가 나야 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자성으로 없기 때문입니다. 화가 없다고 안하고, 자성으로 없기 때문이라고 해야 합니다. 자성으로 탐심이 있다면 어떤 것, 누구를 봐도 탐심이 일어나야 자성으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상에 따라 있기도 없기도 하다면 자성으로 없다고 말해야 합니다. 실제가 없다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자성이 공하다는 말은 독립적으로 없다, 실제적으로 없다, 절대적으로 있는 것 아니다, 자기 스스로 없다라는 식으로 티벳에서도 여러 표현을 사용해서 설명합니다. 공성에 대해서는 이런 것들을 여러 면에서 논리적으로 생각해봐야 알 수 있습니다. 공이라는 것이 그냥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알아야 합니다. ‘연기이기 때문에 자성으로 없다’ 없는 것 아니다, 있지만 자성으로 없다.. 이런 정도를 알아야 합니다.

 

 

없다, 있다, 자성으로 없다, 자성으로 있다.... 이 4가지의 차이가 무엇인지는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처음에 오온조차도 자성이 공하다 라고 관재자보살께서 간략하게 줄여서 말씀하시는 이것을 약설이라고 합니다. 한문 반야심경에서는 ‘오온개공’이라고 언급되어 있는데, 티벳에서는 오온조차도 자성이 공함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라고 풀어서 설명합니다. (다음호에 계속)

 

티벳불교산책 2009 09,10월호

 

 

티베트 반야심경강설 3

 

‘색즉시공’은 색의 자성에 실제가 없다는 의미

 

반야심경은 불자들이 가장 애송하는 경전입니다. 많은 해설서들이 출간되었지만, 제대로 뜻을 새기기 녹록치 않은 공성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티벳에서는 반야심경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지난해 11월 열렸던 티벳 소남스님의 반야심경 강설을 통해 알아봅니다. 편집자주

 

 

 

 

 

욕계, 색계의 사람은 오온 모두에 의지합니다. 무색계의 사람은 색온을 제외한 수 상 행 식의 네 가지 온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무색계에 태어나면 수명이 엄청나게 길다고 합니다. 8유가 10구족에 오래 사는 신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이유가 오래 사는 신은 태어날 때 태어났다는 생각 정도만 있고, 죽을 때 죽는다는 생각 정도만 있을 뿐 살아 있을 때 아무런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매우 오랜 세월을 보내게 되므로, 거기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무색계에서 다시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좀 바보스럽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아무 생각 없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서입니다.

 

대중) 저희가 아마 무색계에 왔나 봅니다.(웃음)

 

문) 무색계에서도 미세한 색온은 있는 것 아닌가요?

 

답) 맞습니다. 거친 색온은 없지만 미세한 색온은 있습니다. 미세한 식온과 함께 가는 바람(風)이 있다고 합니다.

 

문) 아라한이 되면 미세한 풍도 없어집니까?

 

답) 아라한의 경우도 미세한 풍, 색온은 있습니다. 미세한 의식도 있습니다. 그러나 설일체유부와 경량부의 견해에서는 아라한이 되면 미세한 색온도 없어진다고 간주합니다. 그러나 유식학파와 중관학파에서는 미세한 번뇌가 사라지지만, 미세한 의식은 있다고 합니다. 생각을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라,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은 남아 있다는 견해입니다.

 

색은 공이고, 공성은 색이다. 색 이외 공성이 다르게 있지 않으며, 공성 이외 색도 다르게 있지 않다.

 

이 구절의 뜻을 알려면 색하고 색의 공성에 대해 먼저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공성(空性)이라 하면 색온의 공성도 있고, 수온의 공성도 있고, 사람의 공성도 있고, 물질의 공성도 있고... 매우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공(人無我), 법공(法無我)을 이야기합니다. 색의 공성이라 하면 색이 실제로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색의 공성은 유상법(有常法)입니다. 항상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색은 무상법(無常法)입니다. 이렇게 색은 무상하고 색의 공성은 유상하기에 색과 색의 공성은 따로 따로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색과 색의 공성은 불과 물처럼 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같은 하나도 아닙니다. 자성(自性)으로 하나입니다. 여러 가지 모습으로 다르지만 자성으로 하나입니다. <해심밀경>에서는 색과 색의 공성을 차별 없는 하나라고, 100% 똑같다고 말하면 네 가지 허물이 있다고 말 합니다. 색의 공성은 색의 궁극적 자성입니다. 색의 공성 이외 색도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색의 자성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찰나찰나 변하는 등의 여러 성품이 색의 자성입니다. 그렇지만 색의 공성이라 하면 색의 궁극적 자성입니다. 색이 여러 가지 모습과 특성이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실제가 없다는 그것이 바로 색의 궁극적 자성입니다. 제가 들고 있는 이 컵의 자성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모양, 색깔... 그러나 이 컵의 궁극적 본성은 이 컵이 실제로는 없다는 것입니다.

 

공성은 색이다(空卽是色)라는 뜻은 “공성은 색의 자성이다.”입니다. ‘자성’이라는 표현이 생략되었습니다. 티벳말로도 이렇게 생략되어 있습니다. 바로 뒤에 나오는 “색 이외 공성이 다르게 있지 않다”에도. 공성 앞에 ‘색의’ 라는 것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색의 본성이라는 것, 색의 궁극적 자성이라는 것은 색과 분리시킬수도 없고, 완전히 같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색과 색의 공성이 완전히 100% 하나라고 하면 색만 알아도 색의 공성을 안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여러 모습으로 다릅니다. 색은 변하는 모습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색의 공성, 궁극적 자성은 변함이 없습니다. 항상 변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색과 색의 공성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다르지만, 따로 있지 않고, 자성으로 하나입니다.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예를 더 들어 보겠습니다. 앞에 계시는 보살님의 경우, 누군가 보살님의 몸, 보살님의 마음 이렇게 부를 때 따로 따로 있는 것처럼 표현하지만, 보살님과 보살님의 몸은 자성으로 하나입니다.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보살님의 몸을 보면서, 지금 보살님을 보고 있다고 말해야지, 몸만 보고 있기 때문에, 보살님을 보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이 방을 볼 때 한 부분만 봐도 방을 보았다고 하지, 전체를 다 못 보았기 때문에 방을 보지 않았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아프다 할 때, 내 몸이 아프지만, 나는 아프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나와 내 몸은 전체와 부분의 관계입니다. 나와 내 몸은 하나는 아니지만, 자성으로 하나라고 말합니다. 분별심으로 따로 있다고 할 수 있고, 말로만 나눌 수 있을 뿐, 자성으로 실제로는 나눌 수 없습니다. 무분별심으로는 따로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색과 색의 공성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가지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르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네 가지 측면에서 색의 공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질문) 반야심경에서는 왜 색의 자성은 공이고, 공성은 색의 자성이라는 식으로 그렇게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았을까요?

 

답) 부처님께 여쭤보아야 됩니다.(웃음) 왜 이렇게 간단하게 말씀하셨을까요? 무언가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없는 것에 대해 늘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공성을 말로 표현하기 참 어렵다고 합니다.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한계가 있습니다. 음식의 맛도 정확히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말로 공성을 100%로 표현할 수 있는 것 아닙니다. 한마디로 이것이다... 이렇게 정의하는 게 어렵습니다. 말로 그렇게 표현해도 생각이 못따라 갑니다. 우리가 대상에 대해 반대로 생각하는 무지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나하고 남할 때 두 대상에 대한 생각이 다릅니다. ‘나’라고 할 때 무언가 튼튼하게 실제가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걸 아집이라고 합니다. 삼독이라고 하는 모든 잘못은 다 거기에서 출발합니다. 부처님께서 이걸 고치는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무자성, 공, 이런 개념을 만든 것입니다. 공하다는 말은 쉽지만 그 뜻은 너무 깊고 심오합니다. 논리적 사유가 없으면 깨달을 수 없습니다.

 

 

 

공성을 깨닫지 못하면 무지를 없앨 수 없습니다. 물질적으로 추위와 더위, 밝음과 어두움은 어느 하나가 커지면 어느 하나가 사라집니다. 덥게 불을 때면 추위 사라집니다. 어두운 방에 불을 밝히면 어둠이 사라집니다. 물질로 이것을 비유하면 많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쉽습니다. 정신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실제가 없다는 쪽으로 생각이 가까워지면, ‘나 있다’고 하는 아집이 약해지고 사라집니다. 쉬운 비유로 설일체유부에서는 허수아비를 예로 듭니다. 멀리서 허수아비를 볼 때는 허수아비를 보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가까이 갈수록 허수아비라는 생각이 커지고 사람이라는 생각은 줄어듭니다. 허수아비라는 대상은 하나입니다만, 그 대상에 대해 바르게 생각하는 것과 뒤집힌 생각이 있습니다. 바른 생각이 커지면 뒤집힌 생각은 줄어듭니다.

 

 

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힘이 약하지만, 뿌리가 튼튼하다고 합니다. 뒤집힌 생각은 익숙해진 힘이 세지만, 뿌리가 튼튼하지 않다고 합니다. 생각과 실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뒤집힌 생각(무지)이 사라지면 집착과 화냄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성을 깨달으면 뿌리까지 해결되는 것입니다. 공성을 배우는 반야심경이 매우 중요한 이유입니다. 공성도 깨달았다고 해서, 그것으로 모든 게 그친 것이 아닙니다. 공을 깨닫고 나서도 자량도, 가행도, 견도, 수도, 무학도 등 오도를 닦아가야 합니다. 한번 깨달았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문) 색과 색의 공이 100% 같다고 하면, 네 가지 허물이 있다고 하셨는데요. 그 점에 대해 설명해주십시오.

 

답) 컵과 컵의 공성이 완전히 하나라고 하면, 컵의 공성도 컵처럼 모양과 색깔이 있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색과 색의 공성이 하나라고 하면 공성도 모양과 색깔이 있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허물이 됩니다. 컵과 컵의 공성은 자성으로 하나이지만, 일반적으로 다릅니다. 색은 변하는 것이요, 색의 공성은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색이 공과 완전한 하나라면 우리가 공을 깨닫지 못한 사람도 깨달았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됩니다. 셋째, 색과 마찬가지로 공성에 대해서도 보고 집착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고 말하는 허물이 생기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색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는 그 뒤집힌 마음이 문제가 안되게 되어, 아라한들도 그 뒤집힌 마음을 제거하지 않았다고 말하게 됩니다. <해심밀경>에 있는 이렇게 네 가지 허물을 설명합니다. 색과 색의 공이 완전히 다르다고 하면 또한 네 가지 허물이 있다고 합니다.

 

 

문) 색이 사라지면, 공성도 사라지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공성도 무상한 것 아닌가요?

 

이 컵이 사라지면 컵의 공성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컵은 없는데, 컵의 공성만 따로 있는 것 아닙니다. 먼저 공성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봅시다. 이 컵은 찰나찰나 원인과 조건 때문에 변화합니다. 컵의 공성은 원인 때문에 이뤄진 것도 아니고, 찰나찰나 변하는 것도 없습니다. 컵의 공성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합니다. 컵의 공성은 무엇입니까? 색의 공성이라는 어디에, 어떻게 있습니까? 어떤 모습으로 있습니까? 색의 공성을 생각할 때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대중) 연기적으로는 있고, 실제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만, 그것보다는 좀 더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래서 법공(법무아)보다 아공(인무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합니다. 나의 실제가 없다고 하는 아공에 대한 것 말입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는 아공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전부 법공만 말하고 있습니다. 오온, 십이처, 십이연기 이런거 공하다고 말합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사람은 오온 바탕으로, 이름만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오온은 사람이라 이름 붙이는 것의 바탕, 즉 기준입니다. 오온이 공하다고 하면, 오온 바탕으로 이뤄진 사람도 공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으므로 부처님께서 아공 말씀안하시고, 법공 위주로 말씀하셨습니다. 나라고 하는 것의 요소가 공하다면, 나가 공하다는 것은 더 알기 쉬운 이치입니다.

 

 

반야심경 안에는 수행의 단계가 숨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야경이 가장 수승한, 최상의 법문이라고 말합니다. 겉으로는 공성을 이야기 하면서, 안에 숨어있는 내용은 수행의 단계에 대한 실천적 방법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을 완전히 배우려면 바깥의 공사상도 배워야 하지만, 그 안에 숨어있는 수행의 단계에 대해서도 잘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티벳에서 반야심경을 해석할 때 심오한 법맥의 스승인, 용수보살 법칭보살 등은 공사상으로 반야심경을 해석하셨다고 보고, 광대한 법맥의 스승들인 미륵보살, 무착보살, 세친보살들께서는 수행의 단계에 대해 가르쳤다고 봅니다.

 

티벳에서 반야심경을 따로 배우지는 않습니다. <중론>이나 <현관장엄론>을 배우면 결과적으로 반야심경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따로 배우지 않습니다. <람림>도 결국 반야심경 공부하는 것입니다. 직접 설하신 공사상과 숨겨져 있는 실천수행법에 대해 깊이 공부하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문) 공성을 깨치려면 오도(五道) 안에 들어있을 때 가능합니까?

 

답) 공을 깨우친다 해서, 오도 안에 들어가는 것 아닙니다. 우리같은 사람들도 공에 대해서 생각하면 깨칠 수 있다고 합니다. 자량도 가행도 들어가기 전에도 공성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문) 4대학파에서 공성을 이해하는 차이는 무엇입니까?

 

 

답) 제법무아에 대해서 불교의 4대학파가 다 같이 말하지만, 설일체유부와 경량부는 아공만 인정하고 법공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공과 법공 둘 다 인정하는 것은 유식학파와 중관학파입니다. 유식학파와 중관학파도 제법무아라는 점에 이해가 같습니다만 견해는 조금 다릅니다. 유식의 견해보다 중관의 견해가 더 깊고 심오하다고 말합니다. 유식파에서는 궁극적인 것까지는 설명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유식의 견해를 대강 말씀드리면 색(외경)은 보이지만,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의식상에서 나타나는 것뿐이고, 외경이 밖에 있다고 보는 견해는 잘못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꿈 이야기를 합니다. 작은 방 안에서 자다가 꿈속에서 코끼리 1백 마리가 있는 꿈을 꿀 수 있습니다. 그 방안에 코끼리가 실제 들어갈 수 없지만, 꿈을 꿀 수 있습니다. 이러하듯이 우리가 보는 외부의 대상도 다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유식의 견해입니다. 어떤 유식학파는 외부의 대상도 있다고 하지만, 대개 유식에서는 오직 의식뿐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중관학파를 계승한 쫑카빠 대사님은 마음도 있고, 색도 있다고 말합니다. 마음과 색이 따로 있는 것 아니지만, 색과 공이 자성으로 하나이듯이 의식과 대상이 자성으로 하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중관학파에서 볼 때 유식학파는 외경은 없다고 하면서 마음에는 실제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틀렸다고 봅니다. 중관학파에서는 의식과 외경 모두 있지만, 자성으로 없다고 봅니다.

 

불교의 4대 학파 모두 무아라고 똑같이 쓰지만 학파의 기준에 의해서 기준과 해석이 다릅니다. 불교의 학파는 견해가 깊어지는 순으로 만들어져있지, 근본적인 차이에 따른 종파가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4대학파 모두 부처님께서 설한 경전적 근거가 있습니다. 반야심경은 대승경전이고, 유식학파와 중관학파 모두 인정하는 경전입니다. 해석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때 어느 것이 논리적이고 바른 근거를 갖고 있는지를 스스로 생각해봐야 합니다. 누가 옳다고 하여 무조건 따르는 것은 지혜로운 태도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결국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 법에 의지할 때도 내용에 의지하라고 합니다.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 아공과 법공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답) ‘나’라고 할 만한 실제가 없다는 것이 아공입니다. 이 책이 공하다 할 때처럼 나 말고 다른 것들이 실제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법공입니다. 오온이 공하다는 것도 법공입니다. 오온으로 구성된 나 없다는 것이 아공입니다. 그냥 공 하나면 되지, 왜 아공, 법공을 나누었을까요? 생각해 보세요. 공성을 아공 법공의 둘로, 혹은 4개로, 16개로 이렇게 나누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윤회할 때 나와 나의것(나의 소유)에 대한 집착 때문에 윤회하기 때문이고, 나와 나의 것에 대한 집착 없어질 때 해탈하기 때문입니다. 나와 나의 것(요소)에 대한 공성을 정확하게 닦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문) 컵이 사라지면 컵의 공성이 사라지는 것인가요?

 

 

 

유상법, 무상법과 관련된 것입니다. 항상 존재하는 법이 있습니까? 항상하고 변하지 않는 존재를 우리가 확인할 수 있습니까? 공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뒤집히게 생각해서 힘들어 하기 때문에, 현실과 틀리게 보고 생각하는 것을 바로 잡으려고 함이 공성을 배우는 이유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부정적이고 틀린 인식들부터 고쳐야 합니다.

 

 

컵 사라졌기 때문에 컵에 대해 공성이라고 할 만한 대상이 없어진 것입니다. 컵의 공성만이 아니라, 컵의 모든 것이 사라졌기 때문에, 연기니 공성이니 이런 것을 다룰 대상 자체가 없어졌다는 의미입니다. 공성은 변함이 없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원인에 의해서 생멸하고 변화하지 않는 것이 컵의 공성입니다.

 

공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해심밀경에 있는 하늘, 티벳말로 ‘남카’를 이해해야 합니다. 허공이 없으면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습니다. 허공은 무상입니다. 계속 변하고 있습니다. 물질에 따라 달라집니다.

 

티벳말로 하늘은 저 밖에 하늘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방에도 하늘이 있습니다. 불교 경전에서 허공과 하늘은 늘 함께 가야합니다. 색과 공처럼 같이 갑니다. 허공 바탕으로, 허공을 대상으로 있으면서 잡을 수도 부딪칠 수도 없는 그 자체를 하늘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경전에서 말하는 하늘입니다. 하늘 맑다 할 때 그 하늘 말고요. 빈 곳이 있고 비어있는 바탕으로 부딪치거나 만질 수 없는 그 자체를 하늘이라고 합니다.

 

 

 

문) 하늘은 유상법입니까?

 

하늘은 유상법입니다. 컵의 실재 없는 그 자체가 공입니다. 하늘은 허공의 자성 가운데 하나이고, 궁극적 자성은 아닙니다.

 

(다음호에 계속)

 

티벳불교산책 2009 11,12월호

 

 

 

티베트 반야심경강설 4

 

 

 

 

색수상식에 의존하는 ‘나’는 행온에 속해

 

 

반야심경은 불자들이 가장 애송하는 경전입니다. 많은 해설서들이 출간되었지만, 제대로 뜻을 새기기 녹록치 않은 공성의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티벳에서는 반야심경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지난해 11월 열렸던 티벳 소남스님의 반야심경 강설을 통해 알아봅니다. 편집자주

 

 

공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해심밀경에 있는 하늘, 티벳말로 ‘남카’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남카’는 저 밖에 있는 하늘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방에도 하늘이 있습니다. 불교 경전에서 허공과 하늘은 늘 함께 가야합니다. 색과 공처럼 같이 갑니다. 허공 바탕으로, 허공을 대상으로 있으면서 잡을 수도 부딪칠 수도 없는 그 자체를 하늘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경전에서 말하는 하늘입니다. 하늘 맑다 할 때 그 하늘 말고, 빈 곳이 있고 비어있는 바탕으로 부딪치거나 만질 수 없는 그 자체를 하늘이라고 합니다.

 

 

문) 하늘은 유상법입니까?

 

답) 하늘은 유상법입니다. 컵은 여러 원인과 조건으로 존재하지, 컵 자체 내에서 자성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컵의 실재 없는 그 자체가 공입니다. 하늘은 허공의 자성 가운데 하나이고, 궁극적 자성은 아닙니다.

 

 

문) 허공의 공성이 하늘입니까?

 

답) 하늘이 허공의 궁극적 자성은 아닙니다.

 

문) 부딪치거나 잡을수 없는 것이 하늘이라고 하셨는데, 거친 오온도 그런 것이 있지만, 미세한 오온 가운데 우리가 잡거나 만질 수 없는 것, 미세한 것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어떻게 우리가 알 수 있습니까?

 

답) ‘무위 하늘’이라고 합니다. 의사들이 쓰는 말 가운데 우리가 모르는 말 엄청나게 많듯이 경전에만 특별히 쓰는 말입니다. 경전에서 나오는 단어들은 자기 식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문) 허공은 무상하고, 하늘은 유상한 것인가요?

 

답) 예. 경전에서 말하는 하늘은 유상한 것입니다. 경전에서 설명하는 하늘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저 하늘이 아닙니다.

 

 

문) 허공도 색입니까?

 

답) 허공도 색입니다.

 

하늘뿐만 아니라 어떤 것이라도 말로 다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무지, 무명은 우리가 보지 못하지만, 마음속에서 장애가 되는 것으로 있다고 생각하듯이 그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고통을 원하지 않으면 고통의 원인을 줄여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행복을 원한다면 행복의 원인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실제로는 행복의 원인은 원수처럼 물리치고, 고통의 원인은 친구처럼 끊임없이 만들어냅니다. <입보리행론>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모든 고통의 뿌리는 공성과 반대로 생각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큰 수행, 큰 공덕을 쌓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용수보살의 <중론>에 대해 쫑카빠 대사님의 해설서를 보면 “복 부족하고, 복 없는 사람들은 공이라는 이야기조차 듣기 싫어한다. 만약 공에 대해 생각하거나, 작은 의심이라도 생긴다면 윤회의 뿌리를 자르는 것과 같이 큰 이익과 공덕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공덕의 측면에서 생각할 때 오늘 여러분이나 저나 조금 이익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일전에 오셨던 중론 스승께서 말씀하셨듯이 ”행복하기 싫으면 아래를 보고, 불행하고 싶으면 위를 보라“고 합니다. 위를 보면 늘 불안한 마음으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자기보다 아래 사람들을 보면 내가 참 복 많이 받고 있구나 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문) 오온조차도 자성이 있다고 할 때, 조차도 라고 쓴 것은 보통 사람들이 오온에 자성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표현한 것입니까?

 

답) 티벳말로는 “오온도” 이런 뜻입니다. 오온 또한 자성이 공하다... 이런 뜻입니다.

 

우리가 반야바라밀이라 할 때 공성의 지혜도 반야바라밀이라고 할 수 있고, 보살들이 바라밀을 닦는다 할 때는 육바라밀 가운데 지혜바라밀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얻어야 할 목적으로 바라밀을 생각하면, 부처님이 얻은 일체지가 반야바라밀입니다. 또한 경전도 반야바라밀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십만송, 팔천송반야경, 이만오천송 반야경, 반야심경 같은 경전도 반야바라밀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반야바라밀을 네 가지 측면에서 말합니다. 자성, 경전, 도, 결과의 측면에서 반야바라밀을 말합니다. 자성의 반야바라밀은 공성을 말합니다. 그 다음에 경전의 반야바라밀은 반야심경과 같은 경전을 말합니다. 도의 반야바라밀은 보살이 닦는 자량도부터 수도까지를 말합니다. 결과의 반야바라밀은 대승의 무학도, 일체지, 부처님의 지혜를 말합니다.

 

 

 

네 가지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 진짜 반야바라밀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결과의 반야바라밀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도, 경전, 자성의 반야바라밀은 그냥 반야바라밀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지, 진짜 반야바라밀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성의 반야바라밀, 즉 공성은 어느 정도는 말로 표현할 수 있지만, 공성의 뜻 그대로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생겨남이 없고, 멸함이 없다고 할 때의 반야바라밀은 자성의 반야바라밀로, 이것이 경전에서 말하는 ‘하늘’과 같습니다. 이 때 하늘은 세속적으로 말하는 하늘과 다릅니다.

 

 

경전과 세간에서 쓰는 표현이 다른 것이 또 있습니다. 지수화풍에서 ‘화’를 세속적으로 말할 때는 ‘빨간 불’을 말합니다. 그러나 경전에서는 이 컵도 지수화풍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불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불이 들어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몸 안에 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속에서 하늘이라면 바깥의 저 하늘을 말하지만, 경전에서 ‘하늘’은 허공 바탕으로 만지거나 부딪칠 수 없는 그 자체를 말합니다. 존재하지만 부딪칠 수 없는 그 자체를 말합니다. 공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이 모든 것들의 실제 없는, 그 자체를 공성이라고 말합니다. 생겨남도 없고 멸함도 없는 하늘의 자성, 이것이 자성의 반야바라밀입니다. 생겨남도 없고, 멸함도 없는 하늘의 자성은 견도 이상의 지혜를 갖추신 분이, 그 지혜를 바탕으로 경험하는 것이지, 우리 같은 범부가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삼세의 부처님의 어머니이신 공에 귀의합니다. 이 공을 깨닫는 지혜는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님의 어머니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 지혜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초기경전, 소승 경전에서 공성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공성을 들을 수 있는 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릇이 아닌 사람에게 공성을 이야기하면 위험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공성 이야기를 아무에게나 막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위험하냐고 하면, 공하다는 것을 일체가 다 없다고 하는 단견에 떨어질 수, 사견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리야데바(적천보살)의 <사백론>에는 그래서 부처님께서 중생을 이끌어줄 때 처음에 복 아닌 것 막아 주셨다고 말합니다. 복 아닌 것은 십불선입니다. 그 다음에 부처님께서는 중관에서 ‘나도 없다’면서 공성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처음부터 공성 이야기 한 것이 아니고, 인과 이야기부터 하셨습니다. 단견에 빠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인과 중심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사도에서 인과를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십악행 막고, 십선행 열심히 하게 하는 것이 하사도의 핵심입니다. 인과법대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나’라고 하는 생각이 잘못됐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나’라고 하는 것을 우리 스스로 어떻게 지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싫어하는 사람, 해치는 사람에게 미워하는 마음 생겼을 때 ‘나’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심장 가운데 튼튼하게, 딱딱하게 모여진 '나‘라는 것이 있는 것처럼 잘못된 생각을 우리는 갖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아집이라고 말합니다. 이 잘못된 생각을 부처님께서 두 번째로 막아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들이 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차례를 제대로 알게되면, 그 분이 바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공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근기와 기초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중론스승께서 말씀하셨듯이, 공성을 제대로 체득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대중) 복덕을 쌓아야 하고, 업장을 소멸하고, 공을 바르게 가르칠 수 있는 스승을 만나야 되고....

 

 

문) 하근기인 저 같은 사람이 공성을 배우면 장애가 된다는 말입니까?

 

답) 근기는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판단하는 것도 여러 가지 기준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저 스스로도 말씀드리자만 반야심경을 말할 수 있는 자격 없습니다. 반야심경을 티벳말로도 잘 알지 못하는데다, 이것을 한국말로 옮기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어렵게 하는 것만으로도 큰 복으로 생각합니다. 저 또한 이론적으로 조금 배웠을 뿐입니다. 깊고 심오한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우리 티벳에서는 반야심경 강의가 따로 없습니다. 저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현관장엄론>을 공부하면서 간접적으로 배운 정도입니다. 간접적으로 배운 것을 치자면 중관학 3년, 현관장엄론을 7년 동안 공부해서... 반야심경 10년을 공부했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반야심경 뜻을 하나하나 풀이하는 것 들어본 적 없고, 구전법회 정도만 들어봤습니다. 우리가 어제 티벳말로 반야심경을 함께 읽었습니다. 꼭 구전법회가 아니라도, 반야심경의 정수를 구전으로 받은 것입니다. 저도 부처님으로터 스승을 통해 내려온 반야심경을 받아 지녀 왔듯이, 여러분도 어제 함께 읽으면서 받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전수를 받고나서 반야심경 외울 때, 이전과는 다르다고 말합니다. 티벳에서 구전(룽균) 있는지 없는지의 차이는 똑같이 반야심경을 외워도 마음 닦는데 백배의 차이가 있다고 말합니다. 구전만 말고, 법맥을 이어 내용까지 풀어서(티균) 가르치고 배우면, 천배의 차이가 있다고 말합니다. 부족하더라도 이런 정도의 설명 듣고 하는 것도 큰 공덕의 차이가 있습니다. 높은 기준에서 보면 우리가 조금 부끄럽고, 창피하기도 하지만... 아래를 보면 우리도 조금은 복 받고 좋은 인연으로 만나고.. 무언가 여러 가지로 기뻐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처럼 바쁘고 복잡한 생활 속에서, 부처님 법에 대해, 특히 반야심경에 대해 공부하겟다고 마음을 모아 함께 하는 것도 어떤 측면에서 보면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우리가 장사라던가 이익 때문에 모인 것이 아니고, 바른 법을 배우기 위해 모인 것도 스스로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공성을 배울 때 세 가지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그것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여러분... 제가 이런 말 물어도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공성을 깨닫고 싶습니까?

 

 

대중) 예...(웃음)

 

 

왜 공성을 깨닫고 싶습니까?

 

대중) 아집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요.

 

 

공성을 깨닫는다고 아집 모두 벗어나는 것 아닙니다. 공성 깨닫고도 더 많이 수행해야 합니다. 아집에서 벗어난 이는 아라한인데... 공성 깨닫는다고 바로 아라한 되는 것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문사수 가운데 공성에 대한 문혜(聞慧)를 닦고 있습니다. 대강 이해한 것이지, 아직 공성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문혜 닦고 있지만, 지혜가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 들음을 바탕으로 사유해서 확신할 때 사혜(思慧) 생긴 것입니다. 그 다음에 수혜(修慧)는 수도의 9가지 단계에서 닦는 것입니다. 사혜까지는 오도 안에 들어가기 전이라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공성을 아는 데 이렇게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내용은 안바뀝니다. ‘실제 없음’ 그것이 공성입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그것을 깨닫는데 여러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말로, 대강 배워 흉내 낼 정도입니다. 마음속에서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고민중입니다. 공성에 대해 고민중입니다. 쓸데없는 고민 말고,(웃음)... 공성에 대해 고민 중입니다. 이것은 쓸데 있는 고민입니다. 경전에 보면 공성을 깨닫지 못하면 무지 없앨 수 없다고 말합니다. 무지의 바다에서 끝없이 치는 파도가 탐욕과 성냄입니다. 무지의 바다에서 나오려면 공성을 깨닫는 것 밖에 없다... 지금 이 정도를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공을 제대로 깨닫기 위해서는 업장 소멸하고, 복을 지어야 합니다. 칠지기도해야 합니다. 업장 많고, 복 없으면 일반적인 수행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결과 하나 이루기 위해 원인은 수많은 것입니다. 원인과 조건 수없이 많습니다. 공성을 깨닫는 지혜 이루기 위해서는 주 원인과 부 원인(조건)이 다 있어야 합니다. 생각만 해서, 사유만 해서 공을 제대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업장이 장애가 되는 것을 핑계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깊이 생각하면 우리에게는 과거 생부터 지은 업장, 기억할 수도 없는 수많은 업장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냥 죄없이 잘 산다고 생각하지만, 깊이 생각하면 지금도 ‘옴마니반메훔’ 기도하듯이 늘 우리는 구업 짓고 있습니다. 번뇌의 마음으로 진언 외워도 구업이 됩니다. 이런 식으로 따지면 우리가 몸 말 마음으로 하는 거의 모든 행들은 번뇌로 합니다. 죄와 불선의 원천과 같습니다. 그래서 티벳에서는 “생각하니 번뇌요, 하는 일은 죄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업장 소멸하지 않고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늘 참회해야 합니다. 참회해야 할 것은 너무도 많습니다. 칠지기도에서 절하고 공양올리고 참회하는 것은 업장소멸을 위함입니다. 수희찬탄하고, 법문을 요청하고, 오래 머물기를 권청하고, 회향하는 것은 복짓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칠지공양에 업장 소멸과 공덕 짓는 방법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법이 법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마음동기를 바로 해야 합니다. 업장 소멸과 공덕 짓기,

 

 

두 번째는 공에 대해 배워야 합니다. 공성에 대한 경론의 해석, 스승의 가르침을 듣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만으로도 공성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세 번째로는 공성에 대해 가르치신 스승과 본존(부처님)을 다르게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둘로 생각하지 않고 같이 생각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청해야 합니다. 그 마음으로 기도 올리고, 스승을 모셔야 합니다. 이 원인 부족하면 공성을 부족하게 깨달을 수 밖에 없습니다. 스승 모시는 구루 요가를 수행해야 합니다. 구루 요가는 스승을 크게 공경하여 정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 원인을 원만하게 갖추면, 공성도 원만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쫑카빠 대사님께서도 36세때 수많은 제자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여덟 분의 특별한 제자들과 함께 티벳의 어느 한 장소에 가서 엄청난 고행을 하셨습니다. 무문관 수행을 하셨다고 합니다. 하루에 3천5백번씩 절하고, 만달라 공양 올리고, 업장소멸하는 수행 하셨다고 합니다. 팔로 돌을 갈아 만달라를 만들어 공양할 때는 뼈까지 드러날 정도였다고 합니다. 쫑카빠 대사님께서는 그 전에 이미 공성에 대해 이미 깊이 이해하고 제자도 많은 분이었지만, 그렇게 하였습니다. 배우기만 해서 되는 것 아닙니다.

 

 

문) 제자가 많으셨는데도 무문관 수행에 들어가셨습니까?

 

 

답) 예. 수많은 제자들이 울면서 붙잡았지만, 그렇게 하셨습니다. 집중적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35만배를 하시고, 매일 만달라 공양을 하셨습니다. 밀라레빠 스승 이야기도 알려졌습니다. 무언가 몸으로 해야 합니다. 듣고 배우는 것만으로 다 되는 것 아닙니다.

 

 

이와같이 수상행식도 모두 공이다 受想行識 亦復如是

 

앞의 색온에 대한 설명에 이어 이 논리로 남은 온의 자성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입니다. 앞에서 색온의 네 가지 측면에서 설명하였듯이, 수 상 행 식도 똑같습니다. 이렇게 새기면 되겠습니다.

 

수(受)는 공성이고 공성은 수이다. 수 이외 공성이 다르게 있지 않으며, 공성 이외 수도 다르게 있지 않다.

 

상(想)은 공성이고 공성은 상이다. 상 이외 공성이 다르게 있지 않으며, 공성 이외 상도 다르게 있지 않다.

 

행(行)은 공성이고 공성은 행이다. 행 이외 공성이 다르게 있지 않으며, 공성 이외 행도 다르게 있지 않다.

 

식(識)은 공성이고 공성은 식이다. 식 이외 공성이 다르게 있지 않으며, 공성 이외 식도 다르게 있지 않다.

 

여기서 오온에 대해 먼저 알아야합니다. 색과 색온은 같은 것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이 컵은 색이라고 합니다. 이 컵은 색온입니까?

 

 

대중) 색온입니다.

 

스님) 색은 모두 색온입니까?

 

 

대중) 예...

 

 

스님) 맞습니다. 색은 모두 색온입니다. 둘은 같습니다. 다르게 부르지만 같습니다. <구사론>에 따르면, 색은 모두 색온입니다.

 

문) 가장 미세한 원자, 더 쪼갤 수 없는 색은 색이지, 색온은 아니지 않습니까?

 

스님) 그런 미세한 원자 있습니까?

 

대중) 있습니다.

 

스님) 미세한 원자에 대해서 과학에서는 쪼개어 가면 없다고 말한다고 들었습니다. 미세한 원자가 다른 원자와 만나도 커질 수 없습니다. 부분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이에 대해 학파별로 견해가 좀 다릅니다. 설일체유부와 경량부는 나눌 수 없는 원자가 있다고 합니다. 자립논증파도 나눌 수 없는 원자, 극미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귀류논증파에서는 이런 것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다른 논쟁이고... 온이라는 것을 무언가 모여야 되는 무더기로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수온이라하면, 느낌 여러 가지가 모여야 수온입니까? 하나의 느낌은 수온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온은 모였다, 쌓였다는 뜻도 있지만, 모였다는 뜻을 말 그대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색과 색온, 수와 수온은 똑같습니다.

 

문) 미세한 색온 있지만 나눌 수 없다면... 부분으로 나눌 수 없는 존재가 없다면, 색 아닌 것이 색으로 될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 아닌가요?

 

답) <구사론>에서는 부분으로 나눌 수 없는 존재가 있어도 동서남북의 방(方)이 따로 없다면, 그것을 아무리 모아도 커질 수 없게 된다고 합니다. 나눌 수 없는 원자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온에 쌓이다, 모이다 라는 뜻도 있지만, 원인과 조건 여러 가지로 생각하면, 각각의 색수상행식도 온이 됩니다. 색과 색온 100% 똑같습니다. 제가 묻겠습니다. 색수상행식 가운데 색에 들어가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중) 안이비설신, 색성향미촉을 말합니다.

 

문) 그렇다면 소리도 색에 들어간다는 것인가요?

 

대중) 예. 그렇습니다.

 

문) 이 모든 것은 왜 색에 들어갑니까? 색의 개념은 무엇인가요? 이런 것들이 왜 색에 들어갑니까?

 

 

 

대중) 오대가 에너지로 표현된 것이 색이 아닐까요.

 

문) 그러면 처사님도 색입니까?

 

대중) 예. 색입니다.

 

문) 그렇다면 처사님은 수입니까?

 

대중) 수입니다.

 

문) 색도 수도 상도 다 입니까?

 

대중) 그렇습니다.

 

문) 그렇게 답하면 안됩니다. 나는 무엇입니까? 하고 물어보면 행온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나는 무상한, 변하는 존재이면서 남은 네 가지 온, 즉 색수상식 온이 아니기 때문에 행온입니다. 라고 말해야 합니다. 행온은 색수상식을 제외한 모두를 행온이라고 합니다.

 

대중) 행만 아니고, 색수상식도 무상법 아닌가요?

 

스님) 나는 색온도, 수온도, 상온도, 식온도 아니지만 행온입니다. 색온은 있지만 나를 색온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스님) 밥먹고, 말하고, 공부하는 나는 있습니다. 나 아닌 행온도 있습니다. 습기, 습도 행온에 들어갑니다. 그것은 나가 아닙니다. 색수상식을 제외한 무상법 모두 다 행온 안에 들어갑니다. 색온 안에 안이비설신, 색성향미촉 모두 색온 안에 들어갑니다. 수온은 느낌만 수온입니다. 고수, 락수, 불고불락수 모두 수온입니다. 상은 인식입니다. 인식은 상온 안에 들어갑니다. 식온은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까지 해서 6식 모두가 식온입니다. 6식 모두 식온 안에 들어갑니다. 51가지 심소 가운데 수와 상을 제외한 49가지 심소는 모두 행온 안에 들어갑니다. 왜 51가지 심소 중에서 수온과 상온만 따로 뺐을까요?

 

대중) 중요하니까요.

 

스님) 세친보살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속 사람들은 주로 느낌 바탕으로 수온 바탕으로 싸우기 때문에, 또 출가자는 인식 바탕으로 상 바탕으로 싸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51가지 심소 가운데 수와 상을 따로 빼서, 중요하게 취급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심소의 대부분은 행온 안에 들어갑니다. 오온을 줄이면 물질과 정신으로 들어갑니다. 색은 물질, 수상식은 정신, 행은 물질적인 것도 있고, 정신적인 것도 있습니다. 변하는 존재들 모두는 오온 안에 속합니다. 오온에 속하지 않는 변하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상법(有常法) 즉 열반, 공성과 같은 변하지 않는 것들은 오온 안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항상하는 것이기에 오온이 아닙니다.

 

 

 

문) 나가 왜 색이 아니라고 말해야 합니까?

 

스님) 나 자체는 무상하고 변하는, 움직이는 존재라는 점에서 행온이라고 해야지, 색도 되고, 수도 되고 이렇게 인식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나라 할 때 식과 색과 별개로 독립적인 존재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행은 식에도 색에도 수에도 의지하여 존재합니다. 나가 나의 몸, 나의 마음... 이런 것들에 의지하여 존재하듯 행은 나머지 온에 의지하여 존재합니다.

 

오온에 속하지 않는 존재 있습니까? 라고 물으면 있다고 해야 합니다. 유상법입니다. 열반, 해탈, 공성, 무아.. 이런 것들은 모두 유상법입니다. 오온 안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무상법이 아닌, 유상법이기 때문에 오온 안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지복에 이르는 길.... > 학술 / 교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엄경 약찬게(略纂偈) 해설_무비스님  (0)

금강경의 개요  (0)

티벳 반야심경(by 소남스님)  (0)

지장(地藏)신앙의 이해  (0)

대승장엄경론 [大乘藏嚴經論]  (0)

현관장엄론 [現觀莊嚴論  (0)

 

 

 

 

 

티벳 반야심경

티벳 반야심경 티베트 반야심경강설 1 반야심경은 지혜바라밀의 정수 반야심경은 불자들이 가장 애송하는 경전입니다. 많은 해설서들이 출간되었지만, 제대로 뜻을 새기기 녹록치 않은 공성의

blog.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