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혜원 스님께서 승가지에 기고하신 티벳에서의 수행이야기를 옮겨왔습니다.
티벳불교 수행 이야기
지금도 눈을 감으면 법상에 오르신 달라이라마 존자님의 청아하고 그윽한 그리고 경전을 많이 읽으신 공덕으로 어느 날부터인가 아무리 오랫동안 법문을 하거나 경전을 큰소리로 하루 종일 읽어도 시종일관 변함없고 힘 있는 목소리로 변했다는 존자님 특유의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가슴속에 울리고, 수많은 군중들의 법에 대한 신심과 헌신으로 가득 찬 법회의 감동이 떠올라 가슴이 벅차오른다.
나의 티벳불교와의 인연은 講院 가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불교에 대해 전반적인 넓은 안목이 없는 초학자다 싶었는지 강원에 입학 할 때 쯤 인연 있는 비구니 스님이 어느 비구스님을 뵙도록 안내해주었다. 그 비구스님은 오롯이 제방에서 20년 넘게 참선수행을 한 후 위빠사나, 티벳수행 등 다방면에 걸쳐 다양한 수행경험과 교학적으로도 풍부한 지식을 두루 겸비한 분이라고 하였다. 스님의 첫 인상은 소탈하면서도 편안했지만 무언가 상대를 꿰뚫어 보는 듯 한 맑고 예리한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같이 간 비구니 스님이 곧 강원에 갈 초학자인데 좋은 말씀 한 마디 해 달라고 청하자 대뜸 하시는 말씀이 강원을 마친 후에 기회가 되면 꼭 티벳의 스승님들을 찾아가서 수행 할 것을 권하셨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티벳에 대해 아는 거라곤 ‘티벳에서의 7년’이란 책 한권 읽은 것이 전부인 상태라서 티벳이라는 나라가 내게는 너무 멀게 느껴지고 낯설어서 크게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다. 다만 티벳에는 평생을 동굴수행이나 무문관 수행 등을 통해 크게 성취한 분들이 많고 내가 티벳불교에 대해 유일하게 아는 티벳을 대표하는 스승 달라이라마처럼 원력(願力)으로 환생 하신 분이 한 분이 아니고 수 없이 많다는 말씀이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런 스승님들을 뵙고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생각은 간절했지만 그 당시엔 너무 요원해 보이는 꿈과 같았다. 그리고는 정신없이 흘러가는 강원 4년과 율원 2년을 보내는 동안 잊고 지냈다.
하지만 그 스님은 일찍이 나와 티벳 스승님들 간의 인연의 고리를 보았는가 보다. 봉녕사 금강율원 졸업을 앞둔 마지막 여름방학에 말로만 듣던 티벳불교를 대표하는 스승님들 몇 분을 직접 뵐 수 있는 기회가 행운처럼 찾아왔다.
나는 항상 수행함에 있어 선지식 발원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나의 근기에 맞게 나를 이끌어 줄 나로빠에게 띨로빠와 같은 그런 스승님 뵙기를 간절히 발원해 왔다. 그런데 그 여행에서 그런 스승님을 만날 것 같다는 뭔지 모를 기대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저 가슴밑바닥에서부터 뜨거운 눈물이 치고 올라오는 것은 숙세에 맺은 스승님과 만나거나 天生緣分인 因緣을 만났을 때라고 하던가!
정말 그 여행에서 그 누구에게도 마음 다해 진정으로 숙여지지 않던 내 마음을 말 한 마디 하지 않고도 서로의 눈빛이 교환되는 순간, 순한 양처럼 나를 조복시키고 울컥 저 가슴밑바닥에서부터 뜨거운 무엇이 올라오면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지게 하는 그런 스승님을 만났다.
북인도 달람살라에서 동남쪽으로 차로 두 시간 거리의 캉그라에 위치한 ‘길상한 마을’이란 뜻을 가진 따시종, 그곳에 자리 잡은 캄파카 사원의 수장(首長)이신 캄튤린포체와의 만남 !!!
아! 이것이 숙세의 인연이란 것인가!
비록 이 생에 나의 전부를 바쳐 의지할 수 있는 스승님을 갈구했지만 언어도 통하지 않고 환경도 낯선 이런 인도에 와서 말로만 듣던 그런 가슴 떨리는 스승 인연을 만나다니!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뻤지만 한편으론 환생을 하셨다고는 하나 나보다 나이도 어린 눈앞의 스승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리고 이렇게 짧은 순간에 일어난 반응을 얼마만큼 신뢰해야 할지........
이런 저런 혼란스럽고 의심스런 마음이 스승님에 대하여 분별심을 내게 하여 스승님한테 마음을 여는 것을 방해했다. 그러나 이 혼란스런 마음은 티벳불교에서 최초로 환생원력을 세우셨다는 17대 까르마파 존자님을 친견하고 나서 불식되었다. 나의 혼란스런 마음의 자초지정을 들으신 까르마파께서 잠시 선정에 드시더니 나의 한국불교와 티벳불교와의 인연에 대해 말씀을 해주셨다.
그 후 율원 졸업을 한 달여 남겨 놓은 어느 날, 기도하는 중에 스승님 곁에서 딱 100일만이라도 정진하고 싶다는 열망이 날 사로잡았다. 그 당시 나는 인도라는 외국에 나가서 수행할 여건이 어느 것 하나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발원은 너무나도 간절했다. 티벳불교에선 스승님에 대한 믿음과 헌신의 마음이 순수하고 간절하면 반드시 스승님의 가피가 따른다고 한다. 티벳인들은 이 믿음을 목숨처럼 여긴다. 이런 믿음의 방식이 내게 낯설긴 했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스승님과의 인연을 반신반의 하는 마음이 저변에 있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그 인연과 스승님의 가피라는 것을 한번 확인하고 싶은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했다. 그런데 기도 시작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말 누군가 요술방망이 한 번 휘둘러서 요술을 부린 것처럼 성수기라서 이미 모든 예약이 끝난 비행기표가 마치 나를 위한 것처럼 내가 지정한 날에 딱 한 장 취소되는 등 비행기표와 수행할 공간, 생활비등 모든 것이 단시간 내에 저절로 이루어졌다. 오직 수행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혀 이렇게 겁없이 감행한 낯선 이국땅, 낯선 스승님 곁에서의 수행은 처음에 100일을 작정하고 갔는데 3년이라는 행복한 시간으로 채워졌다.
티벳불교는 인도 나란다 대학(5-12세기)의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불교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인도의 대승 후기불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소승 부파불교와 중관, 유식, 인명론에다 당시 성행했었던 밀교수행까지 가미된 것이 바로 티벳 불교이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 아래 종파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11-12세기라고 하는데, 주요 종파는 닝마파, 까규파, 사캬파 그리고 겔룩파이다. 각 종파들의 가르침에는 큰 차이가 없으나 특정한 수행법을 선호한다든지 수행의 방편상 4파로 나누어졌을 뿐 검은 소, 흰 소, 누런 소들이 털의 색깔은 다 다를지라도 우유의 색깔은 한결 같이 다 흰색이듯이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인 깨달음의 세계는 같기 때문에 티벳불교의 4파는 수행의 교류가 유연한 것 같다. 한 예로 달라이라마는 겔룩파를 대표하는 수장이지만 닝마파의 큰 성취를 이루었다는 딜고켄체 린포체를 스승으로 모시고 법을 전수 받기도 했다. 또한 달라이라마의 대표적 사원이라고 할 수 있는 남걀사원 법당에는 달라이 라마를 상징하는 천수천안관세음 보살과 닝마파를 대표하는 파드마삼바바가 같이 모셔져 있기도 하다. 달라이 라마께서 속해 있는 겔룩파와 사꺄파는 교학에 좀 더 중점을 두는 전통이 있고, 닝마파와 까규파는 족첸 수행이나 마하무드라, 혹은 나로육성취법 같은 무상요가 수행에 중점을 두는 전통이 있다. 특히 까규파는 우리에게도 “밀라래빠의 십만송”이라는 책을 통해 어느 정도 알려진 밀라래빠가 속한 띨로빠-나로빠-마르빠-밀라레빠-감뽀빠로 전승맥이 이어지는 흔히들 수행위주의 파라고 한다.
밀라래빠의 제자인 감뽀빠에게 3명의 수제자가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감뽀빠는 제자들의 근기를 알아보기 위해 3명의 수제자들에게 천을 한 조각씩 주면서 각자 원하는 대로 천을 사용하고 다음 날 모이라고 했다. 다음 날 모인 3명의 제자 중 까르마빠는 모자를 만들어서 쓰고 왔다. 스승인 감뽀빠는 까르마빠에게 “앞으로 네 법맥은 전 세계에 퍼질 것이다”라고 예언을 하셨다. 감뽀빠의 예언대로 현재 서양에서는 까르마빠 법맥의 수행센터가 제일 많다고 한다. 전 세계인들이 달라이 라마의 따뜻한 자비에 감동을 하면서 또한 까르마파의 카리스마 넘치는 법력에 매료되고 있다고 한다. 또 한 제자는 스승이 주신 천이 너무 소중해서 윗저고리 안주머니에 꿰매고 왔다. 그것을 보고 스승은 “앞으로 네 법맥의 제자들은 은둔수행자가 많이 나올 것이다”라고 예언을 하셨다. 이 법맥을 이은 것이 바로 따시종의 둑빠까규파이다. 전생 16대 까르마파와 전생 8대 캄튤린포체 그리고 닝마파의 큰 성취자로 부탄왕국의 국사(國師)이면서 달라이라마의 스승이시기도 한 딜고켄체 린포체께서 절친한 도반이셨다. 역사적으로 캄튤린포체의 무문관 수행자들은 뛰어난 수행력으로 명성이 나 있다. 어느 날 16대 까르마파께서 캄튤린포체에게 나의 제자 30명과 당신의 제자인 독댄 1명과 바꾸자고 할 정도로 캄튤린포체의 무문관 수행제자들을 부러워하셨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제자는 술과 바꿔 마시고 왔다. 스승은 그에게 너는 네 한 몸만을 생각하였기 때문에 네 법은 후대로 이어지지 않고 너는 바로 정토에 태어날 것이라고 하였다.
내가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한 캄튤린포체는 까규파 중 특히 은둔수행의 전통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둑파까규의 전승을 잇고 있으며 9번째 환생하셨다.
전생 제 8대 캄튤린포체께서 열반에 드시자 가장 가까운 도반이셨던 두 선지식, 제 16대 까르마파께서 환생할 부모님의 이름과 탄생연도 그리고 장소와 날짜를 직접 알려주시고 딜고켄쩨 린포체께서 예지의 말씀으로 정확한 탄생지를 말씀해주신 것이 일치하고 또 호법선신이 지정하신 환생자가 같았으므로 성인의 땅, 동인도 아루나찰주내의 24성지 중의 하나인 ‘붐데라’에서 캄튤린포체의 제 9대 환생자로 인정이 되어 1982년 12월에 북인도 따시종으로 모셔오게 되었다. 딜고켄체 린포체께서 1983년 2월에 그를 제 9대 캄튤린포체로 즉위시키는 착좌식을 거행할 때, 한 살 남짓한 아기가 그 오랜 시간의 의식을 견딜 수 있을지, 대중들에게 축복을 해 주실 수 있을 지, 혹여 계속해서 울지나 않을지, 울면 어떻게 달래야 할지 그의 제자들은 불안해서 법좌 옆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좌하며 초긴장을 했는데 오래지 않아 부질없는 걱정임이 드러났다.
아기 린포체는 울지 않을 뿐 아니라 여섯 시간 동안 허리를 세우고 정면을 응시하며 바르게 앉아 마치 선정력이 높고 깊은 노스님처럼 시종일관 여법한 위의를 보여 주어 대중들로 하여금 탄복케 했다. 또한 그 아기는 능히 전생의 제자들을 다 알아보는 등 전생 캄툴린포체의 환생자라는 믿음이 절로 생기게 했다.
언제나 겸손하고 친근감 있는 부드럽고 고요한 미소로써 모든 사람들을 대하시며 일상생활 중에도 항상 고요한 선정 속에 머물러 계시므로 누구든지 린포체 곁에만 있어도 고요한 평화가 저절로 느껴진다. 가까이 모시는 제자들조차도 이제까지 린포체께서 화를 내시거나 부정적인 표현을 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다고 한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린포체를 직접 친견하고 나면 누구나 린포체의 고요한 기운에 매료되어 수긍을 하기 마련이다.
따시종 캄파카사원에는 철조망을 치고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 채 머리도 자르지 않고 평생 무문관 수행을 하는 무문관센터가 두 곳 있다. 문수보살 분노존을 상징하는 ‘야만타까 무문관’과 뚬모(배꼽불)수행 등을 포함한 나로빠육성취법을 수행하는 ‘팍모 무문관’ 이다.
팍모 무문관에는 손가락 한마디 정도 공중에 떠 있기로 유명한 바즈라요기니 불상이 있는데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전생 8대 캄튤린포체께서 42세 때 제자인 무문관 수행자 독댄들과 함께 부탄에 법을 설하러 가셨다가 허공에 떠있는 바즈라요기니(금강해모)를 친견하게 되었다. 그 때 특별히 독댄 암틴이 그것을 보고 큰 신심을 내는 것을 보고 캄튤린포체께서 암틴에게 “자네가 화주하여 불상을 조성하면 공중에 뜨는 것은 내가 책임지겠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듣고 암틴이 신심이 나서 열심히 화주하여 불상을 조성하여 무문관에 모실 준비를 하고는 “린포체! 전에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시지요?”하고 여쭈었더니 린포체께서 빙그레 웃으시면서 “오야~(오냐)”하셨다. 드디어 불단위에 바즈라요기니를 모시는 날 무문관스님 네 명이 들어 올려 불단위에 놓고 보니 약간 왼쪽으로 치우친 듯 해서 다시 연화대를 들어 올리려고 하는데 약 다섯 자 정도 크기의 입불상(立佛像)의 연화대가 기름 위를 미끄러지듯이 아무 무게감이 없이 스르르 대중이 생각한 대로 자리를 잡았다. 불단과 바즈라요기니를 받치고 있는 연화대 사이가 어른 손가락 한마디 정도 떨어져서 부탄의 바즈라요기니 불상 보다 더 높게 공중에 떠있는 상태로 안치되었다. 캄튤린포체께서 무문관에 올라오셔서 점안의식을 주재하심에 스님들이 놀라서 보고를 하니 캄뚤린포체는 다만 머리를 끄덕이며 웃으시기만 했다고 한다.
팍모 무문관의 주요 수행법인 나로육성취법(Six dharmas of Naropa)은 나란다대학의 학장이었던 나로빠가 인도의 성취자 띨로빠(Tilopa) 밑에서 12년간 수행한 후 체계적으로 정리한 수행법으로 까규파의 핵심수행법이다. 이 수행법은 첫째, 몸속에 내재된 신비한 열을 일으켜서 몸을 정화하고 각 기맥(氣脈)과 차크라를 열어 절대적 경지로 들어가는 뚬모수행, 둘째는 뚬모수행의 성취로 인해 미세한 氣로 幻身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환신수행, 셋째는 꿈을 수행의 한 방편으로 사용하는 꿈수행, 넷째는 중음 속에서 무명의 어둠을 밝히는 바르도 수행, 다섯째는 의식의 천이(遷移)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포와 수행 그리고 마지막 여섯째는 자성광명을 인지하는 마하무드라(大手印) 수행이다.
사람이 부처가 되리라 결심하고 나서 성불하기까지 상좌부 불교에서는 4아승지겁(四阿僧祇劫)이라는 긴 시간이 걸리고 대승불교에서는 3아승지겁(三阿僧祇劫)이 걸리는데 밀교수행에서는 한 생(一生)에 성불이 가능하다고 한다. 밀교에서 그렇게 자신있게 말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幻身수행때문이라고 한다. 즉 환신(幻身)이란 여러 몸을 나투는 것을 말하는데 밀라래빠처럼 한 몸이 아래 동네에서 중생을 제도하고 있을 때 동시다발적으로 또 한 몸은 정토에 나투어 부처님 법문을 듣고 또 한 몸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며 무량공덕을 짓는 등 3승지겁에 걸쳐 나툴 수 있는 여러 몸을 한 생에 나투어 모든 공덕을 짓기 때문에 한 생(一生)에 성불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티벳불교 수행에 입문하면 종파와 상관없이 누구나 처음에 네 가지로 이루어진 4가행(四加行)이라는 예비수행을 각각 10만 번 이상씩 해야 한다. 4가행(四加行)이란 첫째, 불보살님께 귀의 예배하는 오체투지 절로써 몸으로 지은 과거의 악업을 참회하고 정화하는 수행이다. 두 번째는 금강살타 백자 진언으로 입과 마음으로 지은 숙세의 업을 정화하는 수행으로 모든 수행자에게 업장소멸을 하기 위해 이 수행을 적극적으로 권한다. 세 번째는 불보살님께 만달라 공양 올리는 수행으로 수행 길에 복덕자량을 쌓는 방편수행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수행하는데 있어 지혜자량과 복덕자량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지만 공덕자량을 쌓는 수행방편이 이렇게 시설되어 있지 않다. 다만 막연하게 복을 지으려면 대중처소에서 공양주를 살라는 말을 한다. 네 번째는 나를 비우고 스승의 본성과 자신의 마음을 계합하는 구루요가 수행이다. 이런 수행을 통해서 수행자의 악업이 정화되고 나면 깨달음에 대한 확고한 열망이 생기고 스승에 대한 신심과 헌신의 마음이 생겨 본수행을 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고 한다.
이 4가행 수행이 예비단계의 수행이라고 하나 질적으로 수준이 낮아서 예비단계의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나로육성취법 등 무상요가에 해당하는 본수행에 들어가기에 앞서 누구나 공가행(共加行)으로 해야 하는 ‘귀의-참회-공덕쌓기-스승님과의 합일’을 위해 거쳐야 하는 단계라서 예비수행이라고 한다. 티벳의 고승 중에는 이 4가지 수행 중 어느 하나를 자신의 평생수행으로 삼아 크게 성취하신 분도 있고 겔룩파의 쫑카파 대사는 만달라 공양판인 돌이 세 개가 닳도록 부처님께 만다라공양을 올리셨다고 한다. 그 공덕으로 제자들이 공부해 나가는데 생활의 어려움이 해결되었다고 한다.
티벳에는 이런 말이 있다. “혼자 열심히 수행하는 사람이 이 생에 성취할 수 있을지는 의심의 여지가 있지만, 스승에 대해 온전한 헌신을 내는 사람은 금생에 반드시 성취할 수 있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 “스승을 부처로 대하면 부처의 축복을 얻고, 스승을 인간으로 대하면 인간의 축복을 얻게 된다”고 한다. 이처럼 티벳 불교는 스승의 역할과 스승에 대한 제자의 절대적 헌신을 매우 강조하는 전통이 있다. 그래서 구루요가 수행은 또한 티벳 불교의 진수라고도 한다.
어느 수행에서나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티벳불교에서는 스승을 중요하게 여긴다. 수행자에게 스승은 곧 부처님과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스승을 중요하게 여기고 헌신하기를 당부한다. 그래서 어떤 수행자이든지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스승을 정하고 그 스승에 의지하여 수행에 들어가라고 모든 스승님들은 한목소리로 당부하신다. 달라이라마께서도 스승을 정하기 전에 오랜 시간을 두고 요리조리 끊임없이 살펴보라고 강조하신다. 남들이 다 훌륭한 스승이라고 해서 무조건 가서 엎어질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내가 의지할 만한 분인지 그 분의 수행력과 덕행 등을 곁에서 오랜 시간을 두고 여러 면에서 잘 살피라고 당부하신다. 그렇게 살핀 후에 진정으로 의지할 만한 스승이라고 한 번 마음속에 정했으면 그 이후엔 설사 스승의 허물을 볼 지라도 마음을 다해 믿고 따르고 스승님을 부처님과 같이 생각하고 헌신하라고 강조한다. 그렇게 스승에 대한 금강 같은 믿음이 있어야 스승께서 전수해 주시는 법을 성취 할 수 있단다.
따시종 캄파카 사원에서 내가 수행하던 곳은 이 도량의 산꼭대기 두 무문관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새벽에 눈을 뜨면 여기저기서 기도를 시작하는 다마루와 요령의 청아한 소리가 색벽의 어둠을 가르며 온 우주에 가득차고 무문관 수행자들이 결가부좌로 공중에 떴다가 내려앉는 등의 요가를 하는 쿵! 쿵! 하는 소리로 하루를 시작하였다가 다시 밤에 기도를 마무리하는 다마루와 요령소리로 하루를 마감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행복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따시종은 무문관과 사원을 중심으로 마을 전체가 그야말로 수행하는 기운으로 하나가 되어 있는 마을이었다.
온 몸을 던져서 하는 기본 10만 배의 오체투지 대배(大拜)를 비롯한 사가행을 마치고 본수행에 들어가면 어느 단계에선 선택의 여지없이 반드시 해야 하는 무문관 수행까지 3년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렸다. 3년 동안 사가행부터 본수행 무문관까지 여러 단계의 수행을 했는데 그 중 사가행의 오체투지와 무문관 묵언수행이 가장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봉녕사 강원과 율원 6년 동안 3천배 내지는 천배기도 그리고 늘 능엄주와 예불대참회 절이 일과기도로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오체투지 대배를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온 몸을 땅바닥에 대고 쭉~ 쭉~ 뻗었다가 일어나는 대배(大拜)는 생각보다 너무 힘들었다. 보통 한국식 절은 일주일을 넘기면 몸에 탄력이 붙어서 하루에 삼천배는 쉽게 하기 마련인데 이 대배는 111,111배의 마지막 일 배까지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40년 이상을 중노릇하면서 이렇게 몸의 고통이 심한 것은 처음 경험해 본다는 어느 한국 비구스님의 말씀처럼 잘못된 방식으로 하면 담까지 들 정도로 힘든 수행이지만 그 성취감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크다. 그리고 이 수행은 구부렸다 온몸을 쭉~ 펴주는 반복적인 행동 속에 막힌 중맥을 뚫어주고 단전의 힘을 키워주므로 다른 수행을 하는데 있어 혼침과 망상에 떨어지는 것을 막아준다고 한다.
또한 40~50도를 육박하는 인도 건기의 살인적인 무더위 속에서 일체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정해진 좁은 공간 안에서 똑같은 자리, 똑같은 자세로 똑같은 시야와 똑같은 수행으로 밥 먹고 잠자는 시간 외에 24시간을 장식해야 하는 무문관 묵언수행은 나 자신과의 처절하고도 외로운 싸움이었다. 어느 날은 그 외로움이 눈덩이처럼 커져 공포로 다가올 때도 있었다. 또 어느 날은 수행하는 자리에 앉는 것조차 질려서 어디론가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때도 있었다. 외부의 일상생활을 모두 차단하고 오직 자신하고만 상대가 될 때 인간이 이렇게 외롭다는 것을 그 때 처음으로 절절하게 느꼈다. 아니 늘 이 상태가 우리에게 그림자와도 같이 존재했는데 외부의 일상사에 가려져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리라. 마치 같은 소리라도 낮에는 안 들리던 소리가 주위가 고요해진 밤에는 또렷이 들리는 것처럼.
강원 다닐 때부터 무문관수행을 꼭 한 번 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처음에 무문관을 시작할 때는 순풍에 돛단배 가듯 그렇게 순조롭고 행복하게 나아갔다. 어느 날은 스스로 느껴지는 수행의 기쁨에 취해 너무 행복하여 눈물이 날 정도였다. 그런데 무문관 수행이 중간 쯤 갔을 때 서서히 역경계가 오기 시작했다. 수행에 들어가기만 하면 마치 북풍한설이 앞에서 휘몰아치는데 나는 작은 어린아이가 되어 앞으로 전진하려고 해도 한 발자욱도 떼지 못하는 것과 같은 상태가 며 칠 동안 계속되었다. 잠시 팽팽하게 조인 수행강도를 조금 느슨하게 해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묵언까지 공언을 하고 들어 간 상태라서 누구한테 도움을 요청할 상황도 못되었다. 숨을 고르기조차 힘들게 살인적인 무더운 날씨와 무문관 수행이라는 중압감 그리고 나름대로 정해 놓은 수행 목표량 때문에 나의 한계가 최고조에 달해 폭발직전에 있던 어느 날 “너무 애쓰지 말고 쉬엄쉬엄 해라. 이런 인도의 무더위 속에서 너무 애쓰면 미쳐버리거나 죽을 수도 있다.” 라는 스승님의 메시지를 누군가 문틈에 살짝 끼워 놓고 갔다. 스승님과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으나 나를 훤히 꿰뚫어 보고 계신 듯 한 이 한마디 말씀은 그동안의 모든 역경계를 훌쩍 뛰어 넘게 하고 공포스런 외로움은 더 이상 외로움이 아닌 여유있게 즐기는 도반으로 무문관 수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했다. 예전에 무문관 수행 중에 정신이 이상해지는 수행자가 생기기도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무문관 수행을 직접해보니 정말 그 말이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티벳에는 스승과 제자의 이런 특별한 관계 속에 스승이 어떤 방법으로든 그 경계를 풀어주기 때문에 그런 수행자가 없다고 한다.
나는 평소에 꿈이 많지 않은데 무문관 수행하는 동안에는 스승님이 나타나는 꿈을 자주 꾸었다. 티벳불교는 무문관과 같은 특별한 수행 중에 나타나는 꿈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꿈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스승님 꿈을 꾸고 일어나면 그 꿈들이 항상 선명하였고 시원한 물을 한 모금 마신 것처럼 몸이 가볍고 기분이 좋아서 수행이 잘되었다.
무문관 수행을 비롯하여 스승님의 가르침 아래 3년간의 수행은 나 자신을 철저히 바로 볼 수 있게 하고 나의 인생관과 수행관을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큰 바위가 자리한 것처럼 마음은 외부의 희노애락에 예전보다도 크게 동요되지 않는 변화를 스스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보리심을 가지고 항상 이타행(利他行)을 하라. 自他相互 교환법에 의해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그 상대를 이해하고 도와라. 염리심을 가지고 항상 육도윤회의 괴로움을 관하고 이 육도윤회를 벗어나고자 수행한다는 것을 잊지 마라. 인색한 업을 버려라. 남이 잘되는 일에 시기 질투하는 업을 버리고 수희찬탄하는 업을 길러라” 등등......
세세생생 살아오면서 우리는 얼마나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베푸는 것에 인색하고 옆 사람이 잘되는 것을 저 마음 깊은 곳에서 진정으로 함께 기뻐하지 못하고 배 아파했던가! 오죽하면 우리 속담에 이웃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을까!! 이것이 진정으로 내가, 우리가 육도윤회를 하는 원인인 줄을 뼈저리게 느끼지 못하고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인색함과 질투심에 사로 잡혀 살아 왔던가!
나라는, 우리라는 이 아집에 사로잡혀 얼마나 무수한 세월들을 불, 보살이 되는 길에 다가가지 못하고 엄한 길에서 헤매왔던가!
夜夜胞佛眠 (야야포불면) 밤이면 밤마다 부처님을 안고 자고
朝朝還共起 (조조환공기) 아침이면 아침마다 같이 일어난다.
起坐鎭相隨 (기좌진상수) 앉으나 서나 서로 함께 하며
語默同居止 (어묵동거지) 말하고 안 하는 것도 같이 한다.
纖毫不相離 (섬호불상리) 털끝만큼도 서로 떨어지지 않으니
如身影相似 (여신영상사) 마치 몸에 그림자 따르는 거와 같구나.
티벳인들은 3살 먹은 어린아이부터 80살 노인까지 누구나 아침에 눈 뜨자마자 기도로 시작하여 잠들 때까지 기도로 하루를 장식한다. 나라 잃은 힘없고 서러운 망명인이고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도 않지만 그들의 새까맣게 그을리고 주름진 얼굴에 맑게 빛나는 자애로운 눈빛과 평화로움 그리고 누구에게나 도움을 주고자 하는 친절한 마음은 이미 그들의 생활 깊숙이 스며들어 하나가 되어 있다. 베푸는 자의 행복과 여유가 늘 그들과 함께 함을 느낄 수 있다.
결코 길다 할 수 없는 3년이지만 스승님과 스승님의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며 살아가는 티벳인들과 생활하면서 나는 많은 부분에서 부끄러움을 느껴야했다. 달라이라마 존자님을 비롯하여 티벳에서 처음으로 중생제도의 원력(願力)을 가지고 환생을 시작한 17대 까르마파 존자님, 평생 무문관 수행으로 깊고 그윽한 내면의 향기가 나는 캄툴린포체, 어떠한 질문에도 막힘없이 경전에 의거해 명쾌한 답변을 풀어내주시던 최연소로 당대 최고의 학자들을 대론에서 제압한 일화로 유명한 캉싸르린포체와 수행과 이론을 완벽하게 갖추신 도르종린포체등 수많은 스승님들....
제악막작 중선봉행 諸惡莫作 衆善奉行
자정기의 시제불교 自淨其意 是諸佛敎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말을 3살짜리 어린 아이도 알지만 그 실천은 80살 노인도 어렵다고 했던가!
스승님들의 온 몸에서 묻어 나오는 자비심과 자비행은 그동안 이론적으론 잘 알고 있으면서도 행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도록 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래서 스승님들과 함께 한 3년의 시간은 30년이 걸려도 변화하지 못했을 다생 겁에 쌓인 나의 악업을 바로 보고 끊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이것은 나 뿐 만이 아니라 같이 수행하던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었다. 이것이 바로 스승님들의 수행의 공덕의 힘이 아닌가 싶다.
한국의 선방수좌들이 달라이 라마를 친견한 자리에서 수행에 대해 좌담을 한 적이 있다. 그 때 달라이 라마께서 오랫동안 앉아 있는 것으로 성불의 척도를 잰다면 장독대는 이미 다 성불했을 것이다 라는 농담을 하신 적이 있다.
수행이란 무엇인가?
얼마나 많은 안거수를 성만하고 얼마나 오랫동안 좌선하고 장좌불와 일종식 등 얼마나 많은 고행을 하는가는 더 이상 나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수행자라고 하면서 앞의 마음보다 선(善)한 마음, 자비로운 마음, 평등한 마음이 증장하지 않는 수행은 그 어떠한 수행도 이젠 더 이상 나에게 매력이 없다. 이것은 각자 본인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점검해 보면 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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