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몸이 부서지기 전에, 게으른 비구와 부지런한 비구
내일이 올지, 내생이 시작될지
인간의 수명은 오래 살아 보았자 100년 안팍이다. 그 중 잠자는 시간등을 빼고 나면 깨어 있는 시간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시간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업대로 사는 인간은 언제 죽을지 모른다.
인간은 수명이 보장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지은 업이 익으면 그에 대한 업보를 받는 것으로 본다. 하필 그 때 그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죽은 경우도 마찬가지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 밤 잠을 잘 때 ‘내일’이 올지 ‘내생(來生)’이 시작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부처님은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死念)’ 할 것을 권하였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중에 ‘시간이 한정된 것으로’ 생각하여 닦는 방법이 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게으른 비구와 부지런한 비구에 대하여 ‘아라까의 가르침(Araka's Teaching)’ 의 예를 들어 가며 설명하였다.
게으른 비구
죽음은 언제든지 올 수 있다. 몇 년후에, 몇 달 후에, 또는 몇일 후에 올수 도 있다. 그런데 하루 낮과 하루 밤 밖에 살지 못한다면 어떠할까. 그 때 부지런히 정진할 것이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부처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마음집중함으로서 많은 것을 배울 것이다.
그런데 하루는 고사하고 밥먹을 동안 밖에 살지 못한다고 가정하면 어떨까. 이때도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에 집중하면서 짧은 순간에 많은 것을 깨달을 것이다.
더 나아가 네 다섯 입의 음식을 삼키는 동안 밖에 살지 못하는 경우는 어떠할까. 이때도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가르침이 머리에 쏙쏙 들어 올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부처님은 위의 세 가지 예의 경우에 대하여 게으르게 사는 것이라 하였다. 번뇌를 소멸시키기 위하여 둔하게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을 한다는 것이다. 그럴다면 부처님이 말하는 부지런한 비구는 어떤 조건일까.
부지런한 비구
부처님은 “참으로 나는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 쉬는 동안밖에 살지 못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비구가 ‘부지런한 비구’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비구들이야말로 “부지런히 살고, 번뇌를 멸하기 위하여 예리하게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는다(A.iii.305-6)”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인간의 목숨은 짧아 네 다섯 입의 음식을 씹어 삼키는 동안도 확신할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오늘 밤 잠이 들면 내일이 올지 내생이 새로 시작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지런한 비구는 ‘숨을 들이쉬고 내 쉬는 동안’ 밖에 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머리가 불타듯이’ 정진해야 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 몸이 부서지기 전에
사람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매우 짧다. 수명대로 살아 보았자 100년 이쪽 저쪽이다. 태어난 자에게 죽음은 반드시 닥치게 되어 있는데, 그 기간동안 청정범행을 닦아 해탈과 열반에 이르러야 하는데 초기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짧구나, 인간의 목숨은!
선한 사람들은 이것을 무시하면서
그의 머리가 불타듯이 수행해야 할지라.
죽음은 반드시 오고야 말리니!
(상윳따니까야, S.i.108)
“나는 잘못된 길을 헤메고 있잖아!
갈애의 손아귀에 끌려 빗나갔구나!
남은 삶은 짧아! 늙음과 병마가 인생을 부수고 있구나.
이 몸이 부서지기 전에 게으름 떨 시간이 없지!”
나는 몸과 마음을 구성하는 다섯 무더기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온전히 해탈하여 우뚝섰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마침내 성취되었다.
(테리가타, 94-96 맛따깔리 비구니)
2011-04-19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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