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인들이 깨닫기 힘든 이유는? 아라한이 되는 무아(無我)의 가르침
무아에 대하여 얼마나 아는가?
사람들은 불교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까? 불교가 매우 심오한 교리를 가진 종교로 알려져 있다는데 과연 세상사람들은 어느 정도 알고 있을까? 그 중에서도 ‘무아’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까?
불자들이라고 하여 불교의 교리에 대하여 모두 알고 있다고 볼 수 없다. 일반불자들이 불교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불교의 교리에 대한 지식은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설령 불교의 근본가르침이라 일컫는 사성제와 팔정도와 십이연기에 대한 항목은 알아도 무아의 가르침을 이해 하는 불자들은 극히 드믈다.
불교의 교리 중에 가장 알기 힘든 것이 무아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이는 불교에 대하여 ‘무아의 종교’라고도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무아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무아라 하여 ‘내가 없다’라는 뜻으로 문자적으로 이해 한다. 내가 없다는 것이 무아일까? 내가 없다는데 이렇게 글을 쓰고 생각하는 나는 누구일까? 이처럼 문자적으로만 파악하다 보면 오리무중에 빠진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말씀 하신 무아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교리에 대하여 의문이 날 때
무아를 이해하려면 초기경전을 보아야 한다. 국가에서 헌법이 기본이듯이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원음이 담겨 있는 초기경전이 헌법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래서 시시비비를 가릴 때 법조문을 열어 보듯이 마찬가지로 교리에 대하여 의문나는 사항이 발생하면 초기경전을 열어 보아야 한다.
무아와 관련하여 초기경전에서 명확하게 정의 되어 있다. ‘무아상경’이라 불리우는 경전에 무아에 대하여 부처님이 문답식으로 설명해 놓은 것이다. 그런 무아는 어떤 것일까?
진리에 막 눈을 떴을 때
율장대품에 따르면 오비구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모두 수다원이 되었다. 이에 대한 표현이 “티끌이 없고 때가 없는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라는 정형구로 표현 되어 있다. 오비구중에 존자 마하나마와 존자 앗싸지에게 진리의 눈(법안)이 생겨 났을 때 흐름에 든자가 되어 모두 수다원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진리의 눈이 생겨 난 것에 불과 하다. 이제 진리에 막 눈을 뜬 것이다. 이렇게 진리의 눈이 생겨난 것은 “무엇이든 생겨나는 것은 그 모든 것이 소멸한 것이다.”라는 무상의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무상, 고, 무아 이렇게 세 가지 특징 중에 가장 먼저 무상의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래서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고 하였고, 이에 대하여 흐름에 든 자, 즉 수다원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준비된 수행자들은
수다원이 되었다는 것은 수행의 본격적인 시작이라 볼 수 있다. 아라한이 되어야 수행의 완성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무상의 진리를 깨달아 수다원이 된 오비구는 모두 구족계를 받았다.
오비구들에게 진리의 눈이 생겨 나자 공통적으로 요청한 사항이 있다. 그것은 구족계를 받고자 함이다. 그래서 율장대품에 따르면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세존께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라고 요청한다. 이에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오라! 가르침은 잘 설해졌으니 그대들은 괴로움의 종식을 위해 청정한 삶을 살아라!”라고 말씀 한다.
구족계를 주는 것은 매우 간단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오비구는 준비된 수행자이었음을 말한다. 부처님과 함께 수행한 동료수행자로서 한마디만 들으면 곧바로 이해 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자들이다. 이렇게 준비된 수행자들을 위하여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궁극적 진리를 설한다. 그것이 무아의 가르침이다.
아라한이 되기 위한 가르침
무상의 가르침이 수다원이 되기 위한 가르침이었다면, 무아의 가르침은 아라한이 되기 위한 가르침이다. 그런 아라한은 부처님도 해당된다. 여래십호 중에 아라한이 부처님의 별칭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오비구들에게 아라한이 되기 위한 가르침을 펼쳤다. 아라한이 된다는 것은 결국 부처님이 깨달은 궁극적 경지와 같은 경지에 이르게 함을 말한다. 오비구들이 부처님이 깨달은 경지에 이르게 된다면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는 진리로서 입증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예를 들어 학자가 새로운 이론을 발견하였는데, 이를 실험적으로 증명하는 것과 같다.
무아의 가르침의 시작
부처님은 흐름에 든 오비구들에게 구족계를 주고 아라한이 되게 하기 위한 무아의 가르침을 설하였다. 이 무아의 가르침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Rūpaṃ bhikkhave, anattā, rūpañca hidaṃ bhikkhave, attā abhavissa nayidaṃ rūpaṃ ābādhāya saṃvatteyya, labbhetha ca rūpe evaṃ me rūpaṃ hotu, evaṃ me rūpaṃ mā ahosī'ti. Yasmā ca kho bhikkhave, rūpaṃ anattā, tasmā rūpaṃ ābādhāya saṃvattati. Na ca labbhati rūpe "evaṃ me rūpaṃ hotu, evaṃ me rūpaṃ mā ahosī"ti.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이 물질이 나라면 이 물질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물질에 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니므로 수행승들이여, 이 물질이 질병이 들 수가 있고 이 물질에 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가르침의 바퀴를 굴림에 대한 이야기, 율장대품 Vin.III.6, 전재성님역)
이것이 무아의 가르침의 시작이다. 오온 중에 물질에 대한 설명으로서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라든가.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라 선언하였다. 바로 이것이 무아의 가르침에 대한 핵심이다.
왜 무아(無我)라 하는가?
물질, 느낌 등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이라고 여긴다면 어떻게 될까? 이 몸이 진정으로 나의 것이라면 나의 뜻대로 되어야 할 것이다. 진짜로 몸이 나의 것이라면 병이 나서도 안되고 늙어서도 안된다. 또 죽어서도 안된다.
그러나 나의 것이라 여겼던 몸은 나를 배신하고 만다. 나의 의지와 상관 없이 늙어가고, 때로 병에 걸리고, 결국 죽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이 몸이 나의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나의 것이라 여겼던 이 몸이 나의 통제권 밖에 있다면 나의 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느낌도 마찬가지 이고, 지각, 형성, 으;식도 마찬가지이다. 한마디로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무아(無我)라 한다.
세상사람들은 왜 자아(自我)가 있다고 생각할까?
무아와 반대 되는 개념이 자아(自我)이다. 불교에서는 무아를 말하지만 세상사람들은 자아를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는 세상사람들의 흐름과는 반대 되는 종교임에 틀림 없다. 그렇다면 세상사람들은 왜 자아가 있다고 생각할까? 이에 대하여 맛지마니까야 ‘삿짜까에 대한 작은 경(M35)’에서 자이나교도 삿짜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Seyyathāpi bho gotama ye kecime bījagāmabhūtagāmā vuddhiṃ virūḷhiṃ vepullaṃ āpajjanti, sabbe te paṭhaviṃ nissāya paṭhaviyaṃ patiṭṭhāya evamete bījagāmabhūtagāmā vuddhiṃ virūḷhiṃ vepullaṃ āpajjanti. Seyyathāpi vā pana bho gotama ye kecime balakaraṇīyā kammantā karīyanti, sabbe te paṭhaviṃ nissāya paṭhaviyaṃ patiṭṭhāya evamete balakaraṇīyā kammantā karīyanti. Evameva kho bho gotama rūpattāyaṃ purisapuggalo rūpe patiṭṭhāya puññaṃ vā apuññaṃ vā pasavati. Vedanattāyaṃ purisapuggalo vedanāyaṃ patiṭṭhāya puññaṃ vā apuññaṃ vā pasavati. Saññattāyaṃ purisapuggalo saññāyaṃ patiṭṭhāya puññaṃ vā apuññaṃ vā pasavati. Saṅkhārattāyaṃ purisapuggalo saṅkhāresu patiṭṭhāya puññaṃ vā apuññaṃ vā pasavati. Viññāṇattāyaṃ purisapuggalo viññāṇe patiṭṭhāya puññaṃ vā apuññaṃ vā pasavatī"ti.
[삿짜까]
“존자 고따마여, 마치 그들 성장, 번영, 성숙에 이르는 모든 종자류, 식물류가 땅에 의존하고 땅에 기초하여, 이와 같이 성장, 증가, 성숙에 이르듯이, 존자 고따마여, 마치 힘 드는 일이 행해진다면, 어떠한 일이든지 그 모든 일들이 땅에 의존하고 땅에 기초하여 행해지듯이, 이와 같이 존자 고따마여, 사람은 물질을 자아로 가지고 있고, 그러한 물질에 기초하여 혹은 선 혹은 악을 일으키며, 사람은 느낌을 자아로 가지고 있고, 그러한 느낌에 기초하여 혹은 선 혹은 악을 일으키며, 사람은 지각을 자아로 가지고 있고, 그러한 지각에 기초하여 혹은 선 혹은 악을 일으키며, 사람은 형성을 자아로 가지고 있고, 그러한 형성에 기초하여 혹은 선 혹은 악을 일으키며, 사람은 의식을 자아로 가지고 있고, 그러한 의식에 기초하여 혹은 선 혹은 악을 일으킵니다.”
(Cūḷasaccakasutta- 삿짜까에 대한 작은 경, 맛지마니까야 M35, 전재성님역)
삿짜까는 자아에 대하여 ‘땅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초목이 땅에 의존하여 성장하듯이 이 몸과 마음 역시 자아에 의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자아가 있기 때문에 삶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삿짜까가 얼버무린 이유
이와 같은 삿짜까의 자아론에 대하여 부처님은 “악기베싸나여, 그대는 ‘물질은 나의 자아이다. 느낌은 나의 자아이다. 지각은 나의 자아이다. 형성은 나의 자아이다. 의식은 나의 자아이다.’고 말하는 것입니까?”라고 묻는다. 오온이 자아이냐고 묻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삿짜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Ahaṃ hi bho gotama evaṃ vadāmi: rūpaṃ me attā, vedanā me attā, saññā me attā, saṅkhārā me attā, viññāṇaṃ me attāti. Ayañca mahatī janatā"ti.
“존자 고따마여, 저는 참으로 ‘물질은 나의 자아이다. 느낌은 나의 자아이다. 지각은 나의 자아이다. 형성은 나의 자아이다. 의식은 나의 자아이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많은 사람들도 그것을 말합니다.”
(Cūḷasaccakasutta- 삿짜까에 대한 작은 경, 맛지마니까야 M35, 전재성님역)
니간타 나따뿟따를 스승으로 하는 자이나교도 삿짜까는 자아론에 대하여 명쾌하게 답을 하지 못한다. 다만 “많은 사람들도 그것을 말합니다(Ayañca mahatī janatā)”라고 얼버무린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많은 사람들이 그 길로 간다는 것을 말한다. Ayañca에서 ‘ayana’라는 말은 ‘path’를 뜻한다. 또 ‘간다(going)’는 뜻도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mahatī janatā)이 가는 길(ayana)”라는 뜻이 된다.
다수가 그 길로 간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이 지아이다. 또는 실체가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배치 되는 것이지만 대충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그것이 진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맛지마니까야 631번 각주, 전재성님)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Ayañca mahatī janatā)’에 대하여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대충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하니 그것이 옳은 것과 같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상의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옳다고 여기는 것이 반드시 진리가 될 수 없다.
다수가 말한다고 하여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깔라마들이여, 소문이나 전승이나 여론에 끄달리지 말고, 성전의 권위나 논리나 추론에도 끄달리지 말고, 상태에 대한 분석이나 견해에 대한 이해에도 끄달리지 말고, 그럴듯한 개인적 인상이나 ‘ 이 수행자가 나의 스승이다’라는 생각에 끄달리지 마십시요. (A3:65)”라고 말씀 하셨다.
경전에 너무 의존하지 말라고?
깔라마의 경에서 말하는 성전의 권위는 불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당시 지배종교인 베다를 말한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이 문구를 잘못 해석하여 불교경전 마저 의존해서는 안된다고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것을 보았다.
만일 부처님이 자신의 가르침에 대하여 의존하지 말라고 하였다면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S22:43)”라고 말씀 하신 것에 위배 된다.
그러면 또 어떤 이들은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D16)에 실려 있는 “이것이 가르침이고 이것이 계율이고 이것이 스승의 교시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들의 말에 동의 하지도 말고 배척하지도 말아야 한다.(D16)”라는 문구를 들어 경전에 너무 의존하지 말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을 모아 놓은 경전은 헌법과도 같기 때문에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된다. 또 부처님은 다른 것에 의지 하지 말고 가르침에 의지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부처님의 원음이 실려 있는 초기경전이야말로 불자들에게 강력한 의지처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의 말을 법문과 대조해 보고, 계율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D16)”라고 당부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불자들이 믿고 의지해야 될 대상은 초기경전임을 말한다.
무아의 가르침, 무아상경(無我相經)
삿짜까는 다수가 가는 길이 바른 길로 보았다. 이는 막연한 추측일 뿐이다. 이렇게 근거 없이 막연하게 자아론을 이야기 하는 삿짜까에게 부처님은 무아의 가르침을 설한다. 그 가르침은 율장대품에서 오비구에게 설한 무아의 가르침과 일치 한다. 이런 무아의 가르침은 상윳따니까야 ‘다섯 명의 경(Pañcavaggiyasutta, S22.59)’에서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무아의 가르침에 대하여 ‘무아상경(無我相經)’이라 한다. 이런 가르침은 정형화 되어 있어서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부처님의 영토이야기
막연하게 자아론을 이야기하는 삿짜까에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영토이야기를 들려 준다. 그래서 “통치권을 가진 왕족의 왕은 마치 꼬쌀라 국의 빠쎄나디 왕이 그런 것처럼, 마치 마가다 국의 비데하 비의 아들 아자따쌋뚜가 그런 것처럼, 자신의 영토에서 살해되어야 하는 자를 살해하고 박멸되어야 하는 자를 박멸하고 또는 추방되어야 할 자를 추방할 힘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지배력을 말한다.
고대인도에서 십육국의 왕들은 자신의 영토내에서 지배력을 행사 하였다. 고대국가에서는 요즘과는 달리 자신의 왕국은 자신의 소유물이나 다름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영토 내에서 일어난 모든 것에 대하여 지배권을 행사 할 수 있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통제권을 행사 할 수 있는 것이다.
영토에서 통제권을 행사 하지 못한다면
만일 왕이 자신의 영토에서 통제권을 행사 하지 못한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자신의 영토가 아닐 것이다. 이는 마가다의 아자따삿뚜왕이 꼬살라국에 통제권을 행사 할 수 없는 이유와 같은 것이다. 이렇게 영토이야기를 한 부처님은 삿짜까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세존]
“악기베싸나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는 ‘물질은 나의 자아이다.’고 말합니다. 그대에게 그 물질에 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어야지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권한을 행사할 수 있습니까?”
(Cūḷasaccakasutta- 삿짜까에 대한 작은 경, 맛지마니까야 M35, 전재성님역)
이 물음에 대하여 삿짜까는 어떻게 답하였을까? 경에 따르면 “쌋짜까는 침묵했다”라고 하였다. 세상사람들이 모두 자아가 있다고 하길레 자신도 자아가 있다라고 알고 있었는데, 부처님이 영토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것이다.
오온에 대한 통제권이 없다
부처님이 말씀 하고자 한 요지는 오온에 대한 통제권이 없다는 것이다. 만일 오온이 진실로 내 것이라면 오온은 내 뜻대로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없다.
물론 작은 범위 내에서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조금만 범위를 벗어 나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 몸이 나의 몸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늙어 가고 병이 들어 가는 것은 나의 통제 밖에 있음을 말한다. 그런 몸이 나의 몸이라는 것은 맞지 않는다.
지금 즐거운 느낌이 일어 났는데, 이 느낌이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조건이 바뀌면 언제든지 느낌도 바뀔 수 있기 때문에 느낌 역시 내 느낌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확장 하다 보면 모든 감정, 지각, 의식 등도 내 것이 아니다. 어는 것 하나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아라 한다.
부처가 출현한 이유는?
일반적으로 부처님의 첫 번째 설법에 대하여 ‘초전법륜경(S56.11)’이라 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두 번째 가르침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무아의 가르침이다. 이를 무아상경이라 하는데, 상윳따니까야에서는 ‘다섯 명의 경(S22.59)’이라 한다.
부처님은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증득하였다. 이런 깨달음은 오로지 부처님 자신 혼자서만 알고 있었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부처가 이 땅에 출현하였다고 한다.
부처가 출현하였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이전에도 부처가 있었음을 말한다. 이전에도 부처가 출현 하였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르침이 변질 되고 잊혀져 갔음을 말한다. 그러다 마침내 가르침이 사라졌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과거에도 무수한 부처님이 출현하였음을 말한다. 그러나 정법이 오래 지속 되지 않아 무정법의 시대가 오래 지속되었음을 뜻한다. 이에 대하여 ‘과거에 부처님들이 여럿 출현한 이유는? 정법(正法)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2014-05-16)’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한 것은 무상정득각을 성취하였기 때문으로 본다. 그런 깨달음은 과거에 출현하였던 부처님이 깨달은 것과 동일한 내용이다. 이렇게 시대를 달리 하면서 끊임 없이 부처가 출현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정법이 결코 오래 가지 않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출현한 목적은 무엇일까?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니다”
해마다 사월초파일이 되면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무엇일까?”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천상천하유아독존 등의 한문게송으로 이야기 하지만 그다지 남는 것이 없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한 진짜 목적은 무엇일까? 부처님의 두 번째 설법이라 불리우는 무아상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Tasmā tiha bhikkhave, yaṃ kiñci rūpaṃ atītānāgatapaccuppannaṃ, ajjhattaṃ vā bahiddhā vā, oḷārikaṃ vā sukhumaṃ vā, hīnaṃ vā paṇītaṃ vā, yaṃ dūre santike vā, sabbaṃ rūpaṃ,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 so attā'ti, evam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aṭṭhabbaṃ.
[세존]
“그러므로 수행승들이여, 어떠한 물질이든 과거에 속하든 미래에 속하든 현재에 속하든 내적이건 외적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탁월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그 모든 물질은 이와 같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이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올바른 지혜로서 관찰해야 한다.”
(Pañcavaggiya suttaṃ-다섯 명의 경-無我相經, 상윳따니까야 22:59, 전재성님역)
오온 중에서 물질에 대한 것이다. 핵심구절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이 나의 자아가 아니다(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 so attā)”라는 말이다. 이와 같은 인식을 하려면 ‘올바른 지혜’로 관찰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올바른 지혜란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라 하였다. ‘있는 그대로(yathābhūta)’ 현상을 관찰하라는 말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연기법을 말한다.
있는 그대로, 야타부따(yathābhūta)
연기법에 대하여 부처님은 깟짜야나곳따의 경에서 “깟짜야나여,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S12:15)”라 하였다. 이 문구가 연기법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다. 이 연기법으로 인하여 부처님 당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가 타파 되었다. 그리고 이 연기법을 통찰함으로 인하여 괴로움과 윤회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연기법은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서 관찰해야 한다. 이때 정형구가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이다. 이런 정형구가 무아상경 뿐만 아니라 깟짜야나곳따의 경에서도 사용되었다. 여기서 핵심은 ‘있는 그대로’이다. 즉 빠알리어 ‘야타부따(yathābhūta)’를 말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들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이는 보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느끼고 싶은 것만 느끼고, 인식하고 싶은 것만 인식한다. 그래서 ‘제 눈에 제안경’이라 한다.
‘제 눈의 안경’이라는 말은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도 제 마음에 들면 좋아 보인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승희가 애인 자랑을 하도 하기에 엄청 멋진 사람인 줄 알았더니 그냥 그렇더라”라는 말이다. 제 눈으로 보면 보통인물도 미인으로 보임을 말한다.
제 눈으로 보면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빨강색 안경을 끼면 세상이 온통 빨갛게 보이고, 파랑색 안경을 쓰면 온통 파랗게 보이듯이 제 눈으로 보면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함을 말한다.
왜 탐진치로 사는가?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을 모두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 보게 된다.
자신의 뜻대로 하고자 한다. 이것이 탐욕이다. 그러나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면 화를 낸다. 이것이 성냄이다. 이렇게 자신의 뜻대로 거머쥐려 하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밀쳐 내려 한다. 이렇게 탐욕과 성냄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것이다. 그래서 일반사람들은 매일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살아간다.
싫어 하여 떠난다는 것
부처님의 무아의 가르침을 설하였을 때 오비구는 곧바로 알아 들었다. 이는 준비된 수행자들 이었기 때문이다. 또 무상의 이치를 깨달아 성자의 흐름에 들어간 자들 이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무아상경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Evaṃ passaṃ bhikkhave sutvā ariyasāvako rūpasmimpi nibbindati. Vedanāyapi nibbindati, saññāya'pi nibbindati, saṃkhāresu'pi nibbindati, viññāṇasmimpi nibbindati, nibbindaṃ virajjati, virāgā vimuccatī, vimuttasmiṃ vimuttamiti ñāṇaṃ hoti: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tī'ti.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보고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물질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느낌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지각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형성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의식에서도 싫어하여 떠나며,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고 사라져서 해탈한다. 해탈하면 '나는 해탈했다' 는 지혜가 생겨나서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라고 그는 분명히 안다."
(Pañcavaggiya suttaṃ-다섯 명의 경-無我相經, 상윳따니까야 22:59, 전재성님역)
이 문장의 키워드는 ‘싫어 하여 떠남’이다. 오온이 내것이 아님을 알았다면 더 이상 집착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혐오가 들었을 것이다. 그것도 구역질 날 정도로 혐오 하였다면 떠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싫어하여 떠나야 함을 말하고 있다.
구역질 날 정도로 싫어해야
싫어 하여 떠난다는 말은 ‘nibbindati’에 대한 번역어이다. 이는 ‘gets wearied of; is disgusted with’의 뜻으로 구역질 날 정도로 혐오 하는 것이다. 이렇게 오온에 대하여 구역질을 느낄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해탈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싫어하여 떠나서 사라지고 사라져서 해탈한다(nibbindaṃ virajjati, virāgā vimuccatī)”라는 정형구가 등장한다. 이를 한자어로 ‘염오-이욕-해탈’이라 한다.
해탈하기 위해서는 가장 첫 번째 조건이 염오하는 것이다. 이는 오온에 대한 염오이다. 그런데 오온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 결코 해탈할 수 없을 것이다. 오온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놓아 버려야만 가르침이 완성될 수 있다는 말이다.
가르침의 완성은 아라한선언으로
오온에 대하여 더 이상 집착하지 않았을 때 해탈의 지혜가 생겨 난다고 하였다. 이는 해탈지견을 말한다. 이런 해탈의 지혜(ñāṇa)가 생겨 났을 때 아라한 선언을 하게 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정형구로 표현 된다.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전재성님역)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각묵스님역)
“Destroyed is birth,
the holy life has been lived,
what had to be done has been done,
there is no more for this state
of being.”(빅쿠보디역)
(아라한선언)
부처님의 가르침은 아라한선언으로 완성된다. 마치 선사들의 ‘오도송’과 같은 것이다.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가 어는 정도인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또 자신이 얼마나 청정한지는 자신이 잘 알기 때문에, 자신에게 남아 있는 번뇌가 모두 소멸되고 청정한 삶을 실현 하였을 때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스스로 선언하게 된다.
“윤회하지 않는다” vs “어떤 존재로든지 돌아 오지 않는다”
아라한 선언을 보면 전재성님은 “nāparaṃ itthattāyāti”에 대하여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번역하였다. 이에 반하여 빅쿠보디는 “no more for this state of being”이라 하여 “그 어떤 존재로든지 돌아 오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각묵스님은 빅쿠보디의 번역 내용과 같다. 전재성님의 번역에는 윤회하지 않음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지만 빅쿠보디의 번역에는 윤회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전재성님은 ‘의역’한 것이고 빅쿠보디는 ‘직역’한 것이다.
번뇌가 소멸되어 청정한 삶을 완성한 아라한에게 있어서 더 이상 윤회는 없다. 그래서 이번 생이 마지막이다. 게송에서는 “khīṇā jāti”라 하여 “태어남은 다 했다”라는 뜻으로 번역된다. 이렇게 본다면 아라한선언에서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번역된 것은 타당하다.
단멸론자들은 이러한 선언에 대하여 단지 살아 있을 때 적용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한다. 윤회를 뜻하는 삼사라가 들어가 있지 않으므로 현생에서 순간윤회로 본 것이다. 설령 삼사라라는 말이 들어 가도 일생윤회로 보지 않을 것이다. 회의론자들에게 있어서는 내세와 윤회는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언급할 가치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오로지 현세적 가르침만 설하였다고 주장한다.
율장에서 한 줄이 추가 되어
부처님이 무아의 가르침을 설하자 오비구들은 흡족해 하였다. 이를 경에서는 “환희하여 기뻐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왜 기뻐 하였을까? 그것은 윤회로 벗어 날 수 있는 방법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다섯명의 경과 율장대품의 내용이 다르다. 비교 해 보면 다음과 같다.
Idamavoca bhagavā, attamanā pañcavaggiyā bhikkhū bhagavato bhāsitaṃ abhinanduṃ. Imasmiñca pana veyyākaraṇasmiṃ bhaññamāne pañcavaggiyānaṃ bhikkhūnaṃ anupādāya āsavehi cittāni vimucciṃsūti.
세존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다섯명의 수행승들은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에 환희하여 기뻐했다. 그리고 이러한 설법이 행해지는 동안에 다섯 명의 수행승들의 마음은 집착없이 번뇌에서 해탈했다. (니까야, S22.59)
Idamavoca bhagavā. Attamanā pañcavaggiyā bhikkhū bhagavato bhāsitaṃ abhinanduṃ imasmiñca pana veyyākaraṇasmiṃ bhaññamāne pañcavaggiyānaṃ bhikkhūnaṃ anupādāya āsavehi cittāni vimucciṃsu. Tena kho pana samayena cha loke arahanto honti.
세존께서 이와 같이 말씀 하시자 다섯 명의 수행승들은 세존의 말씀에 환희하여 기뻐했다. 그리고 그러한 설법이 행해지는 동안에 다섯 명의 수행승들의 마음은 집착없이 번뇌에서 해탈했다. 이로써 세상에 여섯 명의 거룩한 님이 생겨났다.
(위나야, Vin.III.6)
니까야(경장)과 위나야(율장)에 실려 있는 내용은 일치한다. 다만 율장에서 한 줄이 추가 되어 있다. 그것은 “이로써 세상에 여섯 명의 거룩한 님이 생겨났다 (Tena kho pana samayena cha loke arahanto honti.)”라는 말이다.
상가의 형성에 대하여 설명해 놓은 위나야(율장)
부처님의 무아에 대한 설법을 들은 오비구는 그 자리에서 마음이 청정해져서 “집착없이 번뇌에서 해탈했다”라고 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번뇌가 소멸되었음을 말한다. 이런 사실을 스스로 알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윤회하지 않게 됨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율장에서는 이 세상에 아라한이 여섯 명이 생겨 났다라고 표현 한 것이다.
율장과 달리 경장에서는 여섯 명의 아라한에 대한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경장과 율장의 차이이다. 그렇다면 율장에서 이렇게 부처님의 깨달음에서부터 시작하여 오비구가 구족계를 받는 이야기와 아라한이 된 이야기를 실어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상가의 형성에 대하여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원본과 복제품이 차이가 없듯이
오비구가 구족계를 받음으로서 최초로 상가가 형성되었다. 더구나 오비구가 무아의 가르침으로 아라한이 되었는데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이는 다름 아닌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가 보편적임을 말한다. 누구나 가르침을 실천하면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이다. 마치 개발자가 제품을 개발하여 양상에 적용하는 것과 같다.
양산을 하게 되면 개발제품과 원본과 똑 같은 제품을 대량생산 하게 된다. 마치CD를 복사 하였을 때 원본과 복사본의 내용이 구별이 안될 정도로 똑 같은데, 이는 부처님의 깨달음과 제자의 깨달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율장에 따르면 부처님을 포함하여 “이 세상에는 모두 여섯 명의 아라한이 탄생 되었다”라고 표현 한 것이다. 이로써 부처님의 깨달은 진리, 즉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무상정등정각)은 증명된 것이다.
그런데 율장에 따르면 이후 아라한은 계속 증가한다. 아사의 출가로 인하여 일곱 명이 아라한이 되었고, 이후 아사의 친구 네 명이 출가하여 일열 한명이 되었고, 또 오십명의 친구들이 출가하여 마침내 이 세상에는 “예순 한 명의 거룩한 님이 생겨났다”라고 율장에 기록 되어 있다.
세월무상, 인생무상
사람들은 자연의 변화를 보면서 무상함을 느낀다. 봄이 되어 새싹이 나와 꽃을 피우고 여름에 크게 자라 가을에 열매를 맺는 것을 본다. 그리고 겨울이 오기 전에 잎사귀는 모두 떨어지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았을 때 자연무상과 함께 세월무상을 느낀다.
사람들이 무상하게 느끼는 것 중에 인생무상도 있다. 자신의 늙어 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젊었을 때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서 인생이 무상함을 느낀다. 그래서일까 인생무상에 대한 노래는 많다.
‘바보들의 행진’에서
EBS에서 ‘바보들의 행진’을 보았다. 1975년도 작품이다. 거의 40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세월무상과 인생무상을 느꼈다. 그것은 영화속의 주인공들이 젊은 모습이기도 하지만 무엇 보다 영화속에서 최인호작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그 장면을 디카로 담아 두었다.
영화속에서 최인호작가의 모습은 매우 젊다. 최인호의 경우 ‘해방동이(1945년생)’라 알려졌기 때문에 만 30세의 모습이다. 그러나 최인호는 더 이상 이 세상사람이 아니다. 2013년 향년 67세로 타계하였기 때문이다.
40년 전 영화속 인물들은 지금 많이 변해 있을 것이다. 영화속에서는 주인공들이 53년생이라 하니 지금은 모두 환갑이 넘은 나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세월은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영화속에서 배경음악으로 “세월이 가네. 젊음도 가네”라는 노래가 울려 퍼진다. 마치 세월무상 인생무상을 암시하는 듯하다.
존재론적 시간관과 연기적 시간관
영화 속에서 배경음악으로 김정호의 ‘날이 갈수록’에 “루루루루 세월이 가네가네. 루루루루 젊음도 가네”라는 가사는 세월무상을 노래한 것이다. 그런데 40년후의 영화를 보니 노래가사의 이야기대로 젊음도 가버렸다. 그래서 인생무상이 되어 버렸다.
초기경전에서도 인생무상에 대한 게송이 있다. 그것은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vayoguṇā anupubbaṃ jahanti, S1.4)”라는 구절로 표현된다. 유행가에서는 세월이 가서 젊음도 간다고 하였으나, 초기경에서는 세월이 가긴 가지만 젊음이 우리를 버린다고 하였다. 물론 같은 뜻이긴 하지만 받아 들이는 뉘앙스가 다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세월이 가면 늙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시간을 흐르는 개념으로 본 것이다. 시간을 존재론 적으로 보아 늙고 병들어 가는 것으로 보는 인생무상을 말한다.
그러나 초기경에서 “세월은 스쳐가고 밤낮은 지나가니 청춘은 차츰 우리를 버리네.(S1.4)”라 하였을 때 이는 시간을 존재론적으로 보기 보다 사건의 연속으로 본다. 그래서 주석에 따르면 “젊은이는 중년에 도달한 자를 버리고, 젊은이와 중년은 노년에 도달한 자를 버리고, 죽을 때가 되면 젊은이와 중년과 노년이 모두 우리를 버린다.(Srp.I.23)”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연기적 사고이다. 연기법은 선형적 시간의 인과관계라기 보다 사건의 인과관계로 보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이 깨닫기 힘든 이유는?
일반사람들은 계절이 바뀔 때, 특히 가을에 계절무상을 느낀다. 또 노년에 아무 것도 이루어 놓은 것 없이 늙었을 때 지나간 세월을 되돌아 보면서 인생무상을 느낀다. 이렇게 자연무상, 세월무상, 인생무상을 느끼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런 무상이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무아라고 까지 느끼지 못한다. 바로 이런 점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한 자와 차이 일 것이다.
무상함을 느끼는 일반사람들이 불교의 궁극적 깨달음에 도달 할 수 없다. 무상함으로 인하여 일상에서 작은 깨달음을 가질 수는 있지만 부처님의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자아론에 바탕한 무상감으로는 결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는 말이다.
오온은 제어불가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은 무아라 하였다. 이런 무아는 일반사람은 물론 불자들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무아의 가르침은 항상 나중에 설해진다.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다고 부처님은 무상의 가르침 다음에 무아의 가르침을 설하였다.
부처님의 첫 번째 설법이라 일컬어 지는 초전법륜경에서 꼰단냐가 깨달은 것은 무상의 진리이었다. 그래서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진리의 눈이 생겨 났다고 하는데, 이는 부처님의 사성제의 설법을 이해한 것으로 일종의 무상의 진리를 통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무상의 진리만을 통찰하는 것은 수행의 시작에 지나지 않는다. 무아의 진리를 통찰해야 가르침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무상의 진리를 통찰하여 수다원이 된 오비구에게 구족계를 주었다. 그리고 무아의 가르침으로 아라한에 이르게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아의 가르침으로 완성된 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무아의 가르침의 핵심은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이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올바른 지혜로서 관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한마디로 나의 몸과 마음, 즉 오온은 제어불가 또는 통제불가라는 말이다. 그래서 무아라 한다. 이런 사실을 아는 것만 해도 무아를 이해했다고 볼 수 있다.
2014-10-1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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