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묻은 화살의 비유
<중아함中阿含> 전유경箭喩經의 부처님 가르침 중에 ‘독 묻은 화살의 비유’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사밧티의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습니다. 말릉캬 존자尊者는 홀로 조용한 곳에 앉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세계는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한無限한 것인가 유한有限한 것인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없는가? 아니면 마침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는가?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은 전혀 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태도가 못마땅하고 이제는 더 참을 수 없다. 부처님께서 나를 위해 세계는 영원하다고 말씀한다면 수행을 계속하겠지만, 영원하지 않다면 부처님을 비난한 뒤에 떠나야 하겠다.”
말릉캬는 해가 질 무렵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로 갔습니다. 그리고 아까 혼자서 속으로 생각한 일들을 말씀들이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저의 이러한 생각에 대해서도 한결같이 진실한 것인지 허망한 것인지 기탄없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말릉캬의 이 같은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독 묻은 화살의 비유’를 들어 말릉캬를 비롯한 여러 비구들에게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만약 부처님이 나를 위해 세계는 영원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를 따라 도를 배우지 않겠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 문제를 풀지도 못한 채 도중에 목숨을 마치고 말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독 묻은 화살을 맞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받을 때 그 친족들은 곧 의사를 부르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되오. 나는 먼저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야겠소. 성姓은 무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떤 신분인지 알아야겠소. 그리고 그 활이 뽕나무로 되었는지 물푸레나무로 되었는지, 화살은 나무로 되었는지 대로 되었는지 알아야겠소. 또 화살깃이 매털로 되었는지 독수리털로 되었는지 아니면 닭털로 되었는지 먼저 알아야겠소.’
이와 같이 말한다면 그는 그것을 알기도 전에 온 몸에 독이 번져 죽고 말 것이다. 세계가 영원하다거나 무상하다는 이 소견 때문에 나를 따라 수행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세계가 영원하다거나 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생로병사生老病死와 근심 걱정은 있다. 또 나는 세상이 무한하다거나 유한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치와 법에 맞지 않으며, 수행이 아니므로 지혜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고, 열반의 길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가 한결같이 말하는 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이다. 어째서 내가 이것을 한결같이 말하는가 하면, 이치에 맞고 법에 맞으며 수행인 동시에 지혜와 깨달음의 길이며 열반의 길이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마땅히 이렇게 알고 배워야 한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말릉캬를 비롯하여 여러 비구들은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하였다.
부처님의 독 묻은 화살의 비유는 말릉캬의 형이상학적 질문에 부처님께서 단순히 현실을 직시하라고 가르침을 주신 것만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따지기만 하면 환자는 의문이 풀리기 전에 독이 몸에 퍼져 죽고 말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이치와 법法에 맞지 않고 수행도 아니며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것 또한 아니며 더욱이 열반의 길도 아닌데 멋대로 망상하거나 단정적으로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 현실 타개가 지금 현재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데 많은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또는 모 전직 대통령처럼 ‘우째 이런 일이?’하고 현실을 개탄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발생한 현실을 명확히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일어난 현실 그 자체를 곧바로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를 찾게 되는 현실적인 현명함이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 대선 때의 화두가 경제이듯 요즘 부동산 값도 오르고, 게다가 홍수 피해와 코로나19 확산으로 모두들 살기 어렵다며 경제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삶의 어려움을 ‘왜 이 모양이 되었지?’하고 부정적 사고로서 대처할 수가 있고, 한편으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할까?’하고 현실적이며 긍정적 사고로 대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정적 사고를 가진 사람은 이 나라 경제를 망친 책임자를 가려내자고 울부짖을 것이고, 긍정적 사고를 가진 현명한 이는 책임자 추궁 한가지에만 매달리지 않고 경제를 되살리는데 온 국민이 힘을 모아야 한다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점은 ‘어떻게 할까?’하고 긍정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 부정적 사고를 가진 사람보다 훨씬 발전적이고 주어진 현실 여건에 잘 적응하고 세상을 즐겁게 사는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볼 때 부처님 말씀은 참으로 매우 현실적인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지나버린 과거에 집착하여 현실을 부정하는 삶에서 벗어나 빠르게 변화해가는 오늘의 삶을 ‘어떻게 할까?’라는 긍정적 사고로서 대처하며 살아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불교의 모든 교리는 관찰법觀察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존재의 의존관계依存關係를 나타내는 연기사상緣起思想, 사물의 실체가 없음을 나타내는 공사상空思想, 모든 사물이 서로를 포함하고 있다는 성구사상性具思想, 모든 것이 마음의 규정에 의하여 이름 붙여진다는 유심조사상唯心造思想, 우리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찾으려고 하는 선사상禪思想 등이 모든 존재의 실상實相을 관찰하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는 ‘모든 사물이 존재存在하는 실상實相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즉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여실히 관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부처님 가르침은 현실을 부정하는 삶에서 벗어나 현실의 삶을 청정한 육근六根으로서 자기의 입장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의 입장에서 바르게 직시하고 긍정적 사고로서 대처하며 살아가도록 가르치십니다. 이처럼 모든 삶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지혜가 경전 속에 있습니다. 이러한 점이 불교의 매력 아닐까 합니다.
[출처] 독 묻은 화살의 비유|작성자 향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