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각을 성취한 부처님이 사슴동산, 즉 녹야원이라는 곳에서 전에 함께 수행한 적이 있던 다섯 사람의 수행자에게 맨 처음 설법을 했다는 것은 소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 하여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이후 다섯 사람은 부처님과 함께 생활함으로써 원시적인 교단의 형태를 이루게 되었으며, 차례차례 모두가 정각을 얻게 됨으로써 부처님을 포함한 여섯 사람의 아라한이 생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전승을 통해서 보면, 애초에 아라한은 부처님과 같은 사람을 가리켰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아라한은 부처님의 칭호로서, 여래의 열 가지 이름 중의 하나가 되어 있다.
나한(羅漢)이라 약칭되기도 하는 아라한이라는 말의 의미는 존경할 가치가 있는 사람, 공양을 받기에 어울리는 사람 존경할 만한 수행자, 수행을 완성한 사람 등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공양을 받기에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뜻은 응공(應供)이라 번역되어 부르기도 한다.
이 아라한은 신자들로부터 의식주 등의 공양을 받음으로써 그 자체가 신자들에게 보다 많은 공덕을 부여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러한 의미에서 응공(應供)이라 번역되는 아라한은 복전(福田)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부파불교에 이르러서는 아라한이 부처님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지 않고 불제자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계위(階位)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나중에 아라한은 소승의 수행을 완성한 사람을 가리키게 되어, 부처와는 구별되기에 이른 것이다. 즉 아라한은 소위 4향(四向)과 4과(四果)라는 8단계로 된 수행의 계위 중에서 최고의 계위가 된 것이다.
아라한과라 불리는 이 계위에 도달하면, 번뇌가 모두 사라지고 다시는 미혹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일이 없게 된다. 따라서 이제 아라한은 더 이상 배우거나 닦을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니며, 이런 의미에서 무학(無學)이라고도 불린다.
한편 이 무학의 아라한을 보다 현학적으로 연구하여, 6종 또는 7종의 아라한이 있다고 분류하기도 한다. 6종의 아라한이란, 아라한이라는 계위를 얻더라도 후퇴해 버리고 마는 자 즉 퇴법(退法) 아라한, 후퇴를 염려하여 스스로를 해침으로써 무여열반(無餘涅槃) 즉 육신을 멸해서 얻는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려 생각하는 자 즉 사법(思法) 아라한, 후퇴하지 않으려고 방호하는 자 즉 호법(護法) 아라한, 후퇴도 증진도 하지 않는 자 즉 안주법(安住法) 아라한, 증진하여 속히 다음 단계에 이르려고 하는 자 감달법(堪達法) 아라한, 일단 아라한과를 얻으면 어떠한 경우를 당하더라도 후퇴함이 없는 뛰어난 자 즉 부동법(不動法) 아라한 등이다.
여기서 앞의 다섯은 성격이 느리고 둔한 아라한이라 하며, 이들이 얻는 해탈에도, 때를 기다려 명상에 들어가 얻는 해탈과 아라한의 깨달음을 애호하여 얻는 해탈의 2종이 있다고 한다.
맨 뒤의 아라한은 성격이 예리한 자로서 때를 기다리지 않고서 해탈한다. 이 마지막의 아라한을 감각기관을 단련하는 수행력에 의해 다섯째로부터 여섯째에 나아가는 아라한과, 그러한 수행력에 의하지 않고 본래의 탁월한 소양에 의해 여섯째에 이르는 아라한의 2종으로 구분함으로써 총 7종의 아라한이 있게 된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아라한을 이런 식으로 복잡하게 규정하는 것을 무가치하다고 본다. 사실 이러한 아라한에 대해서는, 아직 부처와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열심히 노력하여 수행자로서는 상당한 경지에 이른 자를 가리키는 이외의 특별한 의의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대승의 시각인 것 같다. 대승에서는 성문, 연각 또는 독각, 보살의 삼승(三乘)이라는 구별을 강조하고, 보살승의 우위를 설했다.
특히『법화경』에서는 이 삼승은 모두가 부처라는 일승으로 유인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간주한다. 이것이 소위 일승사상(一乘思想)이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아라한 역시 부처의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한 임시의 한 단계가 되므로 아라한 그 자체가 배척되어야 할 대상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관념상 아라한이라는 인간상을 뭔가 저급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대승의 견지에서 생각할 때,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아라한에 대한 지나친 현학적 분석은 수행의 심리적 단계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종교인으로서의 실천적 자세가 고려되어 있지 않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아라한이 바람직한 인간상으로서 경시된다면, 바로 그러한 점 때문일 것이다. 이는 결국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는 보살의 한 측면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참고문헌〕 高崎直道,『佛敎·イソド思想辭典』(→ 문 13), pp. 11∼12.
宇井伯壽,『佛敎汎論』(合本 東京:岩波書店, 1962), pp. 247∼249.
中村 元,『ゴタマブツダ』(→ 문 1), p. 506.
김지견 역,『佛陀의 世界』(→ 문 1), p.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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