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法性偈) 강론(講論)
▶ 의상스님께서 지엄화상의 입적 3개월전에 저술한 이 법계도는 화엄경의 사상을 한편의 시로 압축한 것이다. 가운데 부분의 法자에서 시작, 글자 사이의 붉은 줄을 따라 7자씩 읽어가면 法자 바로 아래에 있는 佛자에서 끝나도록 되어 있다. 법계도는 좌측과 같이 전체적으로 배치되어 하나의 圖印 형태를 띠고 있다.
法性圓融無二相 법과 성품은 원융하여 두가지 모양이 없나니
諸法不動本來寂 모든 법이 움직임이 없어 본래부터 고요하다
無名無相絶一切 이름없고 모양도 없어서 온갖 경계가 끊겼으니
證智所知非餘境 깨달은 지혜로만 알 뿐 다른 경계 아니로다
眞性甚深極微妙 참된 성품 깊고 깊어 지극히 미묘하나
不守自性隨緣成 자기 성품 지키잖고 인연따라 이루더라
一中一切多中一 하나 중에 일체있고 일체 중에 하나있으니
一卽一切多卽一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라
一微塵中含十方 한 티끌 그 가운데 시방세계 머금었고
一切塵中亦如是 일체의 티끌 속도 또한 다시 그러해라
無量遠劫卽一念 끝이 없는 무량겁이 곧 일념이요
一念卽是無量劫 일념이 곧 끝이 없는 겁이어라
九世十世互相卽 구세 십세가 서로서로 섞였으되
仍不雜亂隔別成 잡란없이 따로따로 이뤘어라
初發心時便正覺 처음 발심 하온 때가 정각을 이룬 때요
生死涅槃相共和 생사와 열반이 서로 서로 함께 했고
理事冥然無分別 이와 사가 그윽히 조화하여 분별할 것 없으니
十佛普賢大人境 열 부처님 보현보살 큰 사람의 경계더라
能仁海印三昧中 부처님의 해인 삼매 그 가운데
繁出如意不思義 불가사의 무진법문 마음대로 드러내며
雨寶益生滿虛空 보배의 비로 생명을 이롭게 한 일 허공에 가득 차니
衆生隨器得利益 중생들이 그릇따라 갖은 이익 얻음이라
是故行者還本際 이 까닭에 수행자들은 마음자리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파息妄想必不得 망상을 쉬지않곤 얻을 수 없네
無緣善巧着如意 인연 짓지않는 좋은 방편으로 마음대로 잡아쓰니
歸家隨分得資糧 마음자리에 돌아가매 분수따라 양식 얻네
以陀羅尼無盡寶 이 다라니 무진법문 끝이 없는 보배로써
莊嚴法界實寶殿 온 법계를 장엄하여 보배궁전 이루고서
窮坐實際中道床 영원토록 법의 중도 자리에 편히 앉아
舊來不動名爲佛 억만겁에 부동함을 이름하여 부처라하느니라.
1. 화엄사상의 극치
일승원교 화엄사상(一乘圓敎 華嚴思想)은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도리를 밝힌다. 모든 법의 덩치(體)와 꼴(相)을 구명(究明)하고 주인(主)과 손님(伴)이 주인될 때도 있고 주인이 손님될 때도 있어 주객이 구분없고 걸림(無碍)없음을 연설하며 결과(果)와 꼴(相)이 두루 갖추었음을 보이고 있다.「사사무애」란 다른 대로 존재하는 사물(事物)들이 아무런 걸림도 없음을 뜻하는 말이다.「결과적인 꼴(果․相)」이란 말은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로서 그 깨달음 속에는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음을 알리는 것이다. 이러한「일승원교」의 극치를 엿볼 수 있는것이「연으로 일어나는 열가지 진리」십현연기(十玄緣起)와「여섯꼴의 둥글둥글한」상태를 나타냄이란 것이다.
(가) 신십현과 고십현의 연기론
우주간에 나타나 있는 사사물물(事物) 만상전체(萬象全體)가 둥글고 원만하여 걸림없는 관계에 있음을 열가지 관점에서 설한 것이 십현연기무애문(十玄緣起無碍門)이란 법문인 것이다. 그런데「십현문」에는 두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지엄선사의 일승십현문(一乘十玄門)이다. 법장스님의 화엄오교장(華嚴五敎章)에 실린 십현문(十玄門)의 명칭에 어긋남이 있다. 전통적으로 앞의 것을 고십현(古十玄) 뒤에것을 신십현(新十玄)이라고 불러왔다. 가장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은「고십현」의 아홉째「유심회전선성문(唯心回轉善成門)」인데「신십현문」에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심(唯心)이나 일심(一心) 또는 진여심(眞如心)등을 우주만법(宇宙萬法)의 실체(實體)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이니 범하지 말라고 법장스님이 일부러 없앴다고 전한다. 그러면「신십현」에 기초해서 의심되는 실마리를 풀어보자.
(제1)「동시구족상응문」이란 무엇인가?
십현문의 총설(總說)이며 나머지 9문까지는 별설(別設)이라고 한다. 이제부터 「제1문」의 의미를 들것 같으면 우주만유(宇宙萬有)는 시간과 공간을 통하여 상즉상입(相卽相入)해서 연기(緣起)하는 것으로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삼세현상(三世現相)은 반드시 동시에 서로 응하며 과거에도 현재와 미래를 구족하였고 현재에도 미래에도 또한 동일하게 과거 현재 미래를 구족히 하여 앞과 뒤, 시작과 끝의 분별이 없이 서로 구족히 응하여 마침내 한덩치(一體)의 관계를 지어서 연을 일으켜 나타난다.(緣起現顯)는 것이다. 한 예를 들면 금으로 만든 금사자가 있다면 금과 사자가 동시에 성립하여 두루 구족한 것과 같다. 즉 바닷물 한방울에도 백천강물의 맛이 갖추어 있는것과 같다는 법문이다.
(제2)「광협자재무애문」이란 무엇인가?
「고십현」의「제장순잡구덕문」에 해당하는 법문이다.「제장순잡구덕」의 현상(現相)을 설하는 것으로서 인연으로서 일어나고(緣起)있는 모든 법은 순수한 것과 잡박한 것이 섞여 있으나 그러나 순수한 것은 순수한 대로 잡된 것은 잡된대로 곧 금은 금대로 은은 은대로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제자리(本位)에 의지하여 있다. 이것이 동시일념(同時一念)으로「광협」이 자재하여 걸림없는 것을 설하는 법문이다.
(제3)「일다상용부동문」이란 무엇인가?
현상세계의 일체사물의 작용(作用)에서 무진연기(無盡緣起)를 설한다는 것이다. 이 우주간 모든 존재를 상호역학관계(相互力學關係)에서 보게되면 하나(개체)는 전체에 들고(一入多) 전체는 개체에 들어있어(多入一) 걸림없이 자재한다. 그러면서도 각각 나름대로의 개성을 잃지않고 본래의 면목(面目) 곧 금은 금모습 빛이있고 은은 은모양의 빛을 보유하고 본분에 의지하면서 개성과 전체가 혼란되지 않는 것이 마치 한방에 일천등불의 광명이 비취되 서로서로 걸림없는 것과같이 상입무애(相入無碍)의 소식을 전하는 법문이다.
(제4)「제법상즉자재문」이란 무엇인가?
연기(緣起)는 공(空)과 유(有)에 바탕하여 상즉(相卽)함을 열게된다. 일즉일체(一卽一切) 하나가 일체법을 통섭하고 일체법이 하나에 통섭되어 두루걸림 없는 것을 설하는 것이니 마치 금으로 만든 금사자의 팔이나 다리 4지와 털한개라도 다 사자의 전체인 것과 같다. 이를 다시 말하면 적은 영주가 대한민국에 통섭되고 대한민국이 곧 적은 영주를 통섭하는 다시 말하면 한분의 대통령이 많은 국민을 통섭하고 많은 국민들이 하나의 대통령에게 통섭되는 것과 같아서「자재원융」하다는 법문이다.
(제5)「은밀현요구성문」이란 무엇인가?
고십현법문에서 설하는「비밀은현구성문」에 해당한다. 모든「연기법」은 각각 은(隱)과 현(顯)의 관계가 있어서 파악이 된다. 은(隱)이란 말은 숨는다는 것이고「현」이란 말은 늘어난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1)가 들어나면 많은(多)것은 숨고 많은(多)것이 들어나면 하나(1)는 숨는다. 상즉(相卽)이란 것이 겉(表)이되면 상입(相入)이란 것은 속이되고 또 상입(相入)이란 것이 겉이되면「상즉」이 속이되는 것이다. 법장스님은 이 법문을 설명하기 위해 금사자의 예를 들었다. 마치 금으로 만든 사자를 바라보는 것과 같아서 사자로만 보면 사자만 있고 금은 숨는다. 금으로만 보면 사자는 숨는것과 같은 것이다. 사물(事物)을 파악하는 법이 두가지가 있다. 안에서 내다보는 법과 밖에서 들여다 보는 법이 그것이다. 인생의 진실도 마찬가지로 숨은것과「들어남」의 두가지 측면이 있다. 한쪽만 고집해서는 진실을 놓친다. 그러지 아니해야만 진실에 접근한다는 법문이다.
(제6)「미세상용안립문」이란 무엇인가?
모든 연기법(緣起法)은 크고 작은 것을 해치지 않고 더욱이 한법문(一法門)안에서 동시에 구족하게 들어남을 설하고 있다. 개체(一)가 능히 전체(多)를 포함하고「전체」가 능히 개체를 거두는 것이 마치 겨자씨 한알속에 수미산(須彌山)을 용납하고 한티끌속에 대천세계를 수용하면서 티끌만치도 현상태를 파괴하지 않고 각각 그 분수를 지켜 서로 수용하고 서로 안립(安立)한다. 얼핏보면 잡되고 무질서한 외양(外樣)을 갖추고 있더라도「속알」은 침범할 수 없는 스스로의 질서가 엄존(儼存)한다는 것을 알리는 법문이다.
(제7)「인다라망법계문」이란 무엇인가?
이 우주간에 모든 존재가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얽히고 설켜서 즉입(卽入)하는 관계를 들어낸다는 말씀이다.「인다라망」이란「인드라신」곧 제석하늘을 지칭(指稱)하는 것으로서 제석궁전을 장엄한 그물이란 말씀이다. 그 보배그물은 보배구슬로 낱낱이 광채를 내면 무수한 보배 부슬빛이 서로서로 비추어서「중중무진」한 것과 유사(類似)하게 세계의「사사물물」도 서로 융합융통(融合融通)하며 끝없는 큰광명에 휩싸여서 걸림없다는 법문을 설한 것이다.
(제8)「탁사현법생해문」이란 무엇인가?
이 우주간의 모든 연기법(緣起法)이 개체(一)가 전체(多)이고, 전체(多)는 곧 개체(一)로서「중중무진」으로 상즉(相卽)하며 상입(相入)하되 주인과 손님이 분명하여 참으로 설명을 다할 수 없고 참으로 어떻게 생각으로는 알 수 없는 경계를 말씀하신 것이다.「탁사현법」이란 속이 항상 사법(事法)에 의탁하여 다함없는 법문을 들어낸다는 말씀이다. 한떨기 꽃에서 화엄법계(華嚴法界)의 진상(眞相)을 느껴본다는 것이 여덟째 구절의 법문이다. 현상에 의탁하여 진리를 들어내려는 발상(發想)은 후에 밀교(密敎)에서 결실을 맺는다.「만다라」가 부처님의 생명임을 강조하는「밀교」는 화엄사상의「탁사현법」을 발전시킨 법문이다.
(제9)「십세격법이성문」이란 무엇인가?
시간적 관점에서 무애의 도리를 논설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三世)에다 또 과거 현재 미래의「삼세」를 설정(說定)하면(3×3=9) 9세(九世)가 된다. (과거의 과거, 과거의 현재, 과거의 미래 식으로) 이 9세를 통합하는 절대적 현재를 추가해서 십세(10世)가 된다. 이 십세가 동시에 나타나「연기」를 이룩함이 화엄사상으로 본 시간의 진상이다. 아홉째 법문구절의 성립근거는 화엄경에서 설하는 과거겁(劫)이 미래겁으로 들어 간다든가 한점 티끌에 넓이 3세(三世)의 모든 부처님세계(佛刹)를 나툰다는 상즉원융(相卽圓融)의 사상이다. 현재의 한 사건에 과거 현재 미래의 전부가 비추어 나타난다는 관법(觀法)에 기초하고 있다는 법문이다.
(제10)「주반원명구덕문」이란 무엇인가?
「고십현(古十玄)」의 유심회전선성문(唯心廻轉善成門)을 없애고 그 자리를 대신메운 법문이다. 우주간에 현성(現成)하고 있는 모든 존재는 어느것도 홀로 일어나지 않는다. 단독자란 있을 수 없다. 사람이란 글자(人)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다른 한쪽이 없으면 일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짝이 필요하다. 한사람의 명배우가 있기 위해서 주위에 많은 조연(助演)이 필요한 것처럼 북극성(北極星) 곁에 뭇별들이 둘러있어 빛나는 것처럼 그물코 한 개만 들면 그물전체가 따라 오는 것 같으니 주인과 손님(主伴)이 두루 분명하여 만가지 공덕(功德)을 갖추었다는 법문이다.
이제까지 간략하게 나마 십현문(十玄門)의 하나 하나의 법문을 살펴 보았다.「십현문」은 처음에 지엄선사가 일승십현문(一乘十玄門)에서 논설했다. 그것을 법장대덕스님이 체계화(體系化)하고 조직화(組織化)해 놓은 것이다. 이 법문은 화엄사상의 극치(極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화엄사상의 배후에는 깊은 종교적 체험도 깔려있다. 이러한 무진연기(無盡緣起)는 실천적 체험적으로는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수행(修行)이 선행(先行)되어야만 비로소 가능하다. 여기서 수행이란 말은 「발심(發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마지막 10번째의「십세격법」에서 설하는 법문을 좀더 알기쉽게 풀어보면 10세(世)의 논법은 화엄오교(五敎章)가 선택한 독특한 방식이다.
이렇게 3×3=9인데 이 전체를 일세(一世)로 통괄하면 10세(世)가 된다.
어째서 이러한 특이한 분석을 하고 있는가? 시간을 잘게 짜개면 무한에 이른다. 이 무한의 시간을 일세(一世)가 통합하고 있다. 통괄하면 영원히 현재인 일세(一世)가 되고 짜개면 무한 시간임을 밝히고자 하는 법문이다.
시간성(時間性)은「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포착하면 하나이다. 자연과학적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직선구조(直線構造)를 갖고 있지만 불교적 시간은 영원의「지금 그리고 여기」만이 존재한다. 옛날에도 그런 현재가 있었다. 그것이 과거이다. 앞으로도 그만한 현재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미래이다. 그러나 과거는 벌써 흘러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있는 것은 다만 현재뿐이다. 다만 시간은 존재에 빌붙어 사는 우연성을 지닌다. 존재가 있어 시간이 있다. 시간이 있어 존재가 제자리를 찾는 것이 아니다. 존재의 변화를 통해서만 시간이 무엇인가가 알려지는 것이다.
(나) 여섯꼴의 둥근이야기(六相圓融論)
여섯꼴(六相)의 둥근이야기란 무엇인가? 무진연기(無盡緣起)의 실상(實相)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앞에서 설명한 십현연기(十玄緣起)와 함께 중요한 가르침법문이 육상원융(六相圓融)이다. 여섯꼴(六相)은 화엄경속에 있는 명칭으로서 그것으로써 철학적 논리(論理)를 전개(展開)한 논리가 세친보살(世親)의 십지경론(十地經論)이란 것이다. 지론종(地論宗)의 남도파(南道派)인 정영사(寺)의 혜원법사는 세친보살의「십지경론」을 받아들여 여섯꼴(六相說)을 설명 형성(形成)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혜원법사의 학설을 더욱 발전시킨 사람이 화엄종에 제2조 지엄선사이고 법장대덕스님에 이르러서 여섯꼴(六相說)설명은 완전히 조직된 모양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첫째 여섯꼴(六相)이란 무엇인가?
육상(相)이란 총(전체)과 별(개체)(總․別)이 한쌍이고 동(같고)과 이(다름)(同․異)가 한쌍이고 성(이루고)과 괴(무너짐)(成․壞)가 세쌍으로서(3)서로 대립되는 개념을 말한다. 이들이 서로서로 원융둥글하여 걸림없는 관계에 놓여있어 하나에 다른 다섯이 포함되면서도 여섯꼴이 나름대로의 제모습을 잃치않으므로 법계연기(法界緣起)가 성립한다는 법문이다.
둘째「총상과 별상」이란 무엇인가?
화엄5교장에서는 이것을 집(家)에다 비유하여 해설하고 있다. (1) 총상(總相)은 전체로서의「집이라고 또는 국가라고 한다면」 (2) 별상(別相)은 집의 각 부분적인 기둥, 헛가래 주초 창문등, 국가로 말하면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에 각부장관 국장, 과장실장, 청장 등이다.「총상」은 전체적 통일을 말하고 「별상」이란 부분적인 천차만별(千差萬別)의 차이를 가르친다. 곧(하나속에 만덕을 갖춘다)가「총상」이고「개체」속에도 개체개체를 갖춘다는 것이「별상」이다. 다시말하면 하나가 축이되어 여럿을 포괄하고 있다는 뜻, 곧 집을「총상」으로 한다면 그 집을 구성하고 있는 기둥, 헛가래, 주초돌, 창문, 기와등이「별상」이 된다. 차별된 현실세계에서 보면 일체가「별상」으로 보이고 통일전체에서 보면 일체가 한꺼번에「총상」으로 들어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전체로 보면「총상」이고 눈, 귀, 코, 입에 포인트를 맞추어 보면「별상」이 된다. 그러나 이들은 떨어질수 없다. 그래서 둥글원융하다고 하는 법문이다.
세 번째 동상(同相)이란 무엇인가?
「동상」이란 : 사람으로 말하면 그 형태를 구성하고 있는 눈, 코, 귀, 입, 손, 발등이 함께 인체구성에 참가함을 뜻한다. 여러의미가 서로 어긋나거나 틀리지 않아 함께 하나라는 전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서로 차이나는 종종의 물상(物相)이라 하더라도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점에서「동상」이라 하는 법문이다.
네 번째「이상(異相)」이란 무엇인가?
「성상」과는 달리 기둥은 기둥, 헛가래는 헛가래, 기와는 기와, 주초돌은 주초돌, 창문은 창문이라 서로 고집해서 본래의 자리에 머물자고 한다면 합칠방도가 없어 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미 지은 집이라도 각각 제대로 고집하여 분쟁이 일어난다면 그 집은 와르르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이것이「괴상」이다.「여러뜻이 각각 자법(自法)에 주착(主着)하여 옮기지 않는다.」그래서「괴상」이 성립된다고 말한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제자리 맡은 자리랄까 개체의 입장이랄까 뭐 어떤 그런 입장에서 사태를 보고 처리함이 괴상이란 법문이다.
이렇게 하여 여섯꼴(六相) 가운데 총상, 동상, 성상(總․同․成相)은 모두 같은 시점에서 논의되고 또 별상 이상 괴상(別․異․壞相)도 공통된 관점에서 파악되고 있다.「총․별․동․이․성․괴」라는 반대개념이나 대립개념으로 사물을 설명하는 것이 육상원융(여섯꼴 둥근) 법문이다. 이「여섯둥근모양」도「화엄사상 법계연기」의 진실상을 설명하려는 것이지만 이 사상의 배경에는 실천적 요구가 깔려있다. 다시 말하면 초발심(初發心)을 할때가 바로 화엄경의 방편품에서 설하는 정각(正覺)이라든가 일행이 일체행(一行一切行)이고 일단이 일체단(一斷一切斷)이라는 수행론(修行論)을 떠나서는 화엄의 지극한 경지가 꿈꾸어 질 수 없는 까닭이다. 화엄사상 또한 종교적 신앙적 실천의 논리화(論理化)라는 사실을 놓아 버려서는 아니된다.
이상(以上)에서 열거한 내용을 다시 간추려 요약해보면 먼저「십현문」은 모든법이 걸림(無碍)없음을 제시한 것으로「사사물물」이「상즉상입」하여 있는 것을 말씀한 법문이고 이 여섯(六相) 둥근모양은 여섯꼴의 걸림없음을 제시한 것이다.
「총」과「동」과「성」은 평등상(平等上)에서 본것이요「별」과「이」와「괴」는 차별상으로부터 본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평등과 차별의 둘이「원융무애」한 것이「사사무애」의 묘리(妙理)라고 하겠다. 그러므로「총(總)」을 여이고 별상이 없으며 동상을 여이고「이상」이 없으며 성상을 여이고는 괴상이 없는 법이다.
이 육상중에「평등무차별」한 것을 원융문(門)이라 이르고 차별된 것을 행포문(行布․行列뜻)이라고 이르는바 이 원융중에 행포가 들어있고 행포중에 원융이 들어 있어서 서로 곧 들고 나서(相卽相入) 여기서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묘한 이치를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다) 법성문(法性門)이 열린다.
석가세존님의 49년간 가르치신 경전말씀을 결집한 후 이를다시 다섯단계로(5敎) 분류 조직하였으니 첫 번째가 소승교(小乘敎)이고 두 번째가 대승시교(大乘始敎)이다. 세 번째가 대승종교(大乘終敎)요 네 번째가 대승돈교(大乘頓敎)이며 그리고 다섯 번째가 대승원교(大乘圓敎)이다. 이중에 화엄경을 일승원교(一乘圓敎)라고도 칭하여 가장 경중에 수승한 경전으로 지목하고 있다. 이 경전사상(經典思想)의 조직된 내용을 대별(大別)하면 대개 네가지 법계관(法界觀) 곧 세계관과 둥글고 묘한 여섯꼴(六相圓融)과 그리고 열가지 법문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있어 참으로 깊고 묘하고 넓고 높은 교리(敎理)로써 그 종지(宗旨)를 삼고 화엄교종을 창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리로는「법계연기」와「사사무애」와「중중무진연기(重重無盡緣起)」의 우주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화엄사상의 일심연기(一心緣起)와 업감연기(業感緣起)의 뜻을 원효대사는 다음같이 노래를 하였다.
① 산하대지(山河大地)와 사생고락(死生苦樂)이 내마음의 조작이라 콩심어 콩이나고 팥뿌려 팥거두니 인과응보(因果應報)가 내뒤를 따르는양 몸가는데 그림자요 소리에 울림이라 업보의 끄는힘이 황소보다 더 세어라 눈깜박 한숨결에 마음에 이는 생각 아뿔사 천만겁에「생사고락」씨가되니 어허 두려운지고 인과응보(因果應報) 두려워라.
② 그러나 인과있어 범부(凡夫)도 성인(聖人)되고 천지(天地)가 넓다해도 선(善)을 위해 있아오며 터럭같이 작은「선」도 잃어짐이 없을네라. 방울방울 물이 모여 큰다바를 이루듯이 날마다 작은공덕 쌓아 큰 공덕되니 하잘 것 없는몸이 무상보리(無上菩提) 이루는 법 여덟가지 바른길을 밟아 적선(積善)함이로다. 어허 고마운지고 인과응보 고마워라…고 읊으시었다.
이렇듯 우리들의 작은 한가지 착한 행업이라도 그대로 만선만행(萬善萬行)이 되며 우리들의 조그마한 악한행위 또한 그대로 만악(萬惡)의 지옥을 짓는다는 업감연기를 설하였다.
공사상(空思想)을 연설한 반야 600부의 방대한 사상의 축소판(縮小版)의 경전이 260자로 이룩된「반야심경」이라면 의상조사의 법성게(法性偈)는 전부가 7언 30구절 210자(七言三十句二百十字)로 구성된 육십화엄경(六十)의 축소판의 화엄경이라 할 수 있다.
이 법성게의 깊고넓은 뜻을 이해하려면 화엄경의 전문연구를 적어도 10년은 해야 할 것이다. 이 법성게는 분량으로 가장 작은 글이지만 그속에 함축되어 있는 이치는 바다와 같아서 범부들의 식견(識見)으로는 도저히 측량하기 어려운 화엄경의 핵심판(核心)이다. 그래서 이 법성게의 뜻을 마치 수박겉 핥기라도 이해를 돕기위해 먼저 그 참고지식으로 앞에서 화엄철학의 중요한 십현연기(十玄緣起)와 여섯꼴론(六相圓融論)을 들어 설명한 바 있지만 더 알기쉽게 할 목적으로 화엄철학중의 유사한 네가지 법계관(四法界觀)의 요지(要旨)를 강론하는 바이다.
(라) 화엄철학의 요지
화엄철학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란 소설(所說)에 의거하여 이루어진 학설이요 법문이다. 인간들이 살고 죽고하는 이 세계가 이루어진 인연(因緣)과 이루어진 세계는 서로 걸림없는 사사무애의 우주론을 전개하는데 앞에서 인용한 원효성사의 법어송의 일단과 같이 우리들의 한가지 착실한 행위는 그대로 만가지의「선행」으로 변현(變現)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가 완성되면 일체가 완성되고(一成一切成) 하나의 진리만 깨치면 일체의 진리를 얻는(一證一切證)다는 철학을 설명한 것이다.
이러한 화엄철학의 연혁을 참고 삼아 대략 살펴보면 인도에서는 천친보살(天親)이 십지론(十地論)을 지어서 화엄사상의 일부분을 부연하여 화엄종지 선양(宣揚)에 도움을 하였고 중국에서는 동진안제(東晋安帝) 때에 삼장법사 각현(三藏法師 覺賢)스님이 60화엄경을 번역출판한 이래로 자주 연설하신바 있었고 다시 수나라말 두순대사(杜順大師)를 비롯한 여러 대덕스님께서 화엄종의 기강(紀綱)을 확립하였다. 그후 지엄선사를 거쳐서 현수법사에게 이르러 크게 융성하였고 다음으로 철양증관법사와 규봉종밀선사(淸凉證觀法師․宗密禪師)에 이르러 더욱더 선양되었다.
그 후 한국에 들어와서는 신라의 원효성사와 의상조사에 이르러 화엄종이 크게 떨쳐 흥성하였다. 불교에서는 우주삼라만상의 사물과 체상(體相)이 어떻게 하여 성립되었다는 것을 설하고 있다. 저 바라문교에서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바와 같은 어떤 조물주(造物主)나 창조신(神)이 있어서 천지만물을 만들어 냈다는 것도 또는 자연론(自然論)을 주장하는 학자가 말하듯 천지만물은 자연히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들을 불교에서는 모조리 부인하게 된다.
불교에서는 우주만유(宇宙萬有)의 생성기멸(生成起滅)의 모든 꼴들이 오직 업감연기(業感緣起)나 법계연기(法界緣起)로서 시간과 공간을 통하여 시간적 계기(繼起)의 인과(因果)와 공간적 존재(存在)의 인과(因果)에 의한 곧 인연화합(因緣和合)으로서의 이루어진 것이라고 설하고 있다. 그러므로 상즉상입(相卽相入)하는 진리가 곧 현상세계(現相)이며 현상세계가 곧 진리자체로서 그 묘용(妙用)이 자유자재(自由自在)하여 체(體), 상(相), 용(用)이 곧 진리(理)와 현실(事)이 무애 걸림없는 법계연기로서「우주삼라만상」이 형성(形成)된 것이라고 교시(敎示)하신다. 또 불교에서는 우주만유는 우리들의 일심중(一心中)에서 출발하여 있게 되었다고 하는바 이 핵심법문이 화엄철학의 중심골자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화엄론에서는「일심법계(一心法界)」가 만유(萬有)를 총괄하고 있다고 한다. 비유로써 말하면「심수(心水)」가 깨끗하면 삼라만상이 그속에 나타난다. 마치 큰바다가 청정하면 우주만상이 그 가운데 다 나타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一心法界는 總該萬有하야 心水淇然하면 森羅萬象이 實現其上하나니 此如大海澄淸하면 天邊萬象이 不問細大하고 皆現其中) 이것이 바로 화엄철학의 「우주관」이다.
(마) 4법계관이란 무엇인가?
화엄철학에서는 우주만법(萬法)을 관찰하는데 4단계의 방법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일반에서「진리」라고 하는말을 화엄사상에서는 「법계(法界)」라고 말한다. 법(法)은 「사물」이란 의미와「진리」라는 의미가 동시에 들어있다. 이러한 4법계는 사물의 세계와 진리의 세계와의 관계를 설한 가르침이다. 4법계의 명칭은 다음과 같다.
첫째(1)은 사법계관(事法界觀)이요
둘째(2)는 리법계관(理法界觀)이다.
셋째(3)은 이사무애법계관(理事無碍法界觀)이요
넷째(4)는 사사무애법계관(事事無碍法界觀)이다.
첫 번째「사법계관(事)」이란 무엇인가?
사(事)법계관이란 현실의 세계 곧 천차만별(千差萬別)된 사실의 세계라고도 하며 철학적인 용어(用語)로는 현상 곧 객관세계(客觀世界)라고 부른다. 이 현상세계로부터 우주삼라만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런데 삼라만상은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사람은 사람대로 모양이 다 다르고 짐생은 짐생대로, 산은 산대로, 강은 강대로, 나무는 나무대로, 꽃은 꽃대로, 바위는 바위대로, 돌은 돌대로 각각 다른 특수한 차별상을 가지고 있어 바다는 깊고 얼음은 차고 불은 뜨겁고 새는 날고 뱀은 기고…등등의 모양과 성질 온갖것을 상대하며 경험하는 세계 곧 현상세계가 그대로 사법계관(事)이란 법문이다.
둘째번 이법계관(理)이란 무엇인가?
「이법계관」이란 이성의세계(理性世界) 곧 공(空)의 세계이다. 다시말하면 본체(本體)의 세계란 뜻이다. 교리(敎理)의 입장에서 말하면 오교중(五敎中)에 해당된다.「공시교」란 중관(中觀) 또는 공간(空間)불교를 말하는 것이다. 공간불교는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색즉시공(色卽是空)과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삼라만상 모든 존재의 근저에는 그야말로 천태만상(千態萬象)이요 형형색색(形形色色)으로 한폭의 장관(壯觀))을 이루고 있는 그야말로 금강산이다. 그래서 사법계관(事)이란 차별된 삼라만상을 생긴 그대로 보고 생각하며 이해하고 인식(認識)하는 것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지금 존재하는 사물(事物) 전체를 우리가 바라보고 느낀다. 곧 바람은 불고 강물은 흐르고 고기는 띄고 산은 높고 나무는 푸르다. 그런데 이것들은 반드시 공성(空性)이 내포(內包)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삼라만상을 표면적 차별로 본다면 남자, 여자, 아이, 어른, 소, 개, 돼지, 말, 구렁이, 뱀 내지 온갖 짐승, 산천초목, 바다, 강 등이 각양각색으로 다 다르지만 이면적(裏面的)인 무차별성(無差別性), 차별성을 떠나서 보편성(普遍性) 또는 평등성(平等性)으로 본다거나 현상세계에 대한 이법계(理) 곧 실체적세계(實體的)나 초경험적세계(경험하지 못한세계)의 입장에서 볼 것 같으면 소나무와 홍도화는 비록 다르지만 식물(植物)이란 입장에서는 다같은「식물」이요 사람이나 개는 같지 않지만 동물(動物)이란 입장에서는 동일한 동물이다. 또 생물학상(生物學上)으로 보면 사람이나 개나 소나무나 홍도화는 다같은 생물(生物)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주만유가 평등하다는「이법계」의 안목으로 본다면 하늘이나 땅이 한뿌리(天地同根)이요 만물(萬物)이 일체(한덩치)(萬物一體)이다. 이와같이「이법계」의 평등한 진리로 보는 것이「이법계관」이란 법문이다.
셋째번「이사무애법계관」이란 무엇인가?
이사무애법계관이란 사법계(事)에서 말한바 현상세계와「이법계」에서 말한 본체계가 따로 뚝 떨어졌거나 구분되어 있는 세계가 아니라 둥글고 묘하여 걸림없다. 고로 현상세계가 곧 진리세계이고, 진리세계가 곧바로 현상세계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평등이 곧 차별이고 차별이 곧 평등이란 말이다. 이 말뜻을 알기쉽게 비유하면 물이 곧 파도이고 파도가 곧 물(水不離波․波不離水)이다. 물과 파도는 둘인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둘이 아닌 것이다.
이와같이 걸림없는 진리를 관찰하면 현상세계가 곧 진리세계이고 진리세계가 곧 현상계인 것임.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 말씀하시되 불변진여(不變眞如)와 수연진여(隨緣眞如)가 있다. 한 예를 들어보면「이법계」와「현상계」가 서로 관철(貫徹)하고 있음을 알린다. 곧「이법계」가「현상계」의 근저를 관통(貫通)하고 있다는 것이다.「진리는 곧 공(空)이다」(理卽空)↔(사물(事)→현상세계↔공의세계(空)로 이(理)와 사(事)의 관계가 원융하고 묘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현상계중에 본체계가 있어 원융하고 묘하여 걸림없음을 관찰하는 것을 곧「이사무애법계관」이란 법문이다.
넷째번「사사무애법계관」이란 무엇인가?
사사무애법계관이란 현상세계와 본체계의 원융하고 묘하여 걸림없다는 것이니 현상계의 우주만유와 형형색색의 천차만별이로되 그러나 그 하나하나가 서로서로 걸림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본체계와 현상계가 걸림없음으로 현상계가 또한 본체계와 걸림없는 것이다. 또 이것을 알기쉽게 비유하면 물과 파도는 걸림이 없다. 또 파도와 파도끼리도 아무런 걸림이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현상계의 걸림없는 이치를 관찰하는 것이 곧「사사무애법계관」이란 법문이다. 이「사사무애」의 학설에 의하여 일심법계(一心法界)의 교설(敎說)을 세운 것이 곧 화엄경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이를 좀더 말한다면「사사무애법계관」은「이사무애법계관」을 거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사(事)법계는「이사무애법계」를 거치지 않고도 보이는 상식(常識)의 세계로서 현실적 대상은 같으나 사(事)법계와 전혀달리 나타나는 세계가 곧「사사무애법계관」이다. 사(事)법계에서는 산과 물이 따로따로 분리 되었다. 거기에 사람이 끼더라도 산따로 물따로 사람따로여서 동상(同相)연결의 고리를 찾지 못한다. 그러나「사사무애법계관」에서는 사정이 달라진다. 사람이 산도되고, 산이 사람도 되고, 산이 물도되고, 물이 산도되고, 사람이 물도되고, 물이 사람도 된다. 이렇게 서로 통하여 맺어진다. 이런 세계를 깨닫기 위하여「이사무애법계관」을 먼저 통과한 다음에「사사무애법계」로 들어가게 된다. 인심(人心)과 사물(事物)이 이「법계」에서는 오로지 하나가 된 세계 그 세계에는 너는 송장이나 나는 아직 살아있다는 식의 분별이 도무지 의미를 잃고마는 것이된다. 이 소식은 걸림없기 때문이다. 이런 세계를 유물론적(唯物論的)으로는 도저히 이해될 수가 없다. 오직 인간의 진리를 깨달아야만「사사무애」의 세계를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게 되면 내가 곧 꽃이요, 산이요, 물이요, 불이요, 바람이고 바위며 나무이니 곧 바로 나의 세계이다.
이에대한 잔소리를 더해보면「일과일들」이 모두「한진리」의 표현이라면 그 일에 대하여 겁낼 것 없이 자세히 그 이치를 관찰하면 무애자재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예컨대 물과 얼음 수증기는 각기 다른 것이지만 그 근본원리는 H2O이므로 이 도리를 아는 이는 얼음이 없으면 물을 냉장고에 넣고 물이 필요하면 얼음을 녹이면 되고 수증기를 보고 싶으면 물을 열(熱)에 가하면 된다. 몰라서 그렇지 이미 다 안 이상에는 겁낼 것도 없고 걸릴 것도 없다.「자성」을 확실히 깨달은 사람은 사람이지만 때를따라 바위도 되고, 사람도 되고, 짐승도 되고, 나무도 되고, 물도 되고, 불도 되고, 산도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제불보살이 신통변화(神新通變化)로서 무량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기대용(大機大用)이다. 마음을 크게 깨달은 사람은 거기 작용에 걸릴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화엄철학에서 말하는 것은 그대로「진리」아닌 것이 없다. 소승불교(小乘)에서는「사법계(事)」상에서 교설을 세운것이기 때문에 예를들면 성내는 것이 가장 나쁜 것이다 하였는데 이 화엄사상에서는 성내는 것이 곧 진리의 표현이라 하였다. 대관절 이게 무슨 말이냐? 그런데 어린손자가 연장을 들고 할아버지의 상투를 자꾸 친다면 그때 할아버지는 큰소리로「이놈 할아버지 상투를 치는놈은 나쁜 놈이다」하며 화를 낸다. 그러면 그 손자는 다시는 할아버지의 상투를 치지 않게 된다. 그런데 그 손자가 귀하다 하여 그대로 가만히 놓아두면 할아버지 상투를 치는 재미에 나중에는 사람을 치고 가산재물을 치는 악인이 된다. 그러므로 이런때는 성내는 것이 진리가 될 수도 있다. 탐욕심도 마찬가지의 이치다.「아함경」이나 방등경에서는 탐심을 내는 것이 큰병통이라 하였는데 화엄경사상에서는 탐욕심이「진리」라고 설하고 있다.
옛날 어느절 스님한분이 신도가 돈만 주면 좋아라 하였다. 돈을 아무리 주어도 누구에게 돈한푼 빌려주는 일이없고 돈이 그손에만 일단 들어가면 어디다 숨겨두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신도들은「스님이 어디 마누라가 또 생겼나, 자식을 낳았나, 아니면 다 먹어치우나, 어디가서 노름을 하나」하고 비밀히 조사해봐도 그런일이 전혀없었다. 그러나 그 스님에게 돈을주면 너무도 천진난만하게 돈을 헤아리고 감추어 두기 때문에 신도들은 더 돈을 갖다주었다. 그런데 세월이 약 20년이 지났는데 어느날 갑자기 천지가 캄캄해 지더니 큰바람이 불기시작하고 장대같은 소낙비가 막 쏟아진다. 삽시간에 한동네가 물바다가 됐다. 집도 살림살이도 길도 논밭도 모두 다 잃었다. 그때는 정부에서도 어찌할 대책이 없었다. 이때에 이 스님이 차곡차곡 모아둔 큰 돈통을 내놓았다. 사람들은 그 돈을 받아다가 집을짓고 살림살이를 장만 하였다. 신도들은 그제서야「스님이 돈에미친 스님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홍수(洪水)가 날 것을 미리 알았던 것이 아닌가」하고 모두들 칭송이 자자 하였다. 이런때는「탐욕심이 진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점은 성내고 않내고 탐심내고 안내고 하는데 있는 것이다. 개인이익을 위해서 성내고 탐내는 것이 아니라 온 중생을 위해서 탐욕을 냄으로 그것은 진리가 되는 것이다. 만일 개인 자신만을 위해서 욕심을 내고 성내고 했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라 삿된 도적놈이 되고만다. 음치도 마찬가지다. 색좋아하는 사람치고 어리석지 않는 사람이 없으므로 음치(淫痴)라고 한다. 그런데 화엄경의 53선지식중에「바슈밀녀」같은 이는 매음(賣淫)으로서 중생을 깨우쳐 옳은사람이 되게한다 아니하였든가.「광액도아」는 소잡다가 불교를 깨달았다. 그러므로 살생 도적질 간음은 작용(作用)여하에 따라 간음 살생이 아니라 적극적인 보살행이 되는 수도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대승시교의 법상종(法相宗)이나 삼론종(三論宗)은 「이(理)법계상에서 교설을 세운 것이고 그리고「대승종교」에서는「이사무애법계」상의 교설에까지만 추진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화엄원교에 와서는「사사무애법계관」을 설하여 불교철학상 최고봉에 도달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사사무애」를 주장하는「일심법계」에는 무진연기(無盡緣起)가 들어있는 것이니 대승불교의 오묘한「진리」는 곧바로 여기서 더욱더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피운다고 할 것이다.」
2. 일승화엄법계도
「화엄일승법계도」를 또는 약칭하여「법계도」라고도 한다. 이 법계도장(章)에는 지은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않다. 다만 이 책 끝에 인연으로 생겨나는 모든 것에는 주인이 따로있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하여「법계도 지은이 이름을 기록하지 않는다」라고 하여 그 이유를 설명했을 뿐이다. 이렇기 때문에 뒷날 이책의 지은이를 당나라의 지엄선사 혹은 현수대사(賢首大師) 또는 진승(珍崇)대사라고 하는등의 설이 생겨나기도 했었다. 그러나 均如대사가 밝힌것과 같이 이책 지은이가 의상조사란 것은 의심할 것 없다. 균여대사는 그의「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記)」에서 최치원선생(崔致遠先生)이 지은 의상전(義湘傳)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인용하여 이 책을 지은이가 의상조사임을 밝히고 있다.
「참고: 의상조사가 그 스승 지엄선사의 문하에서 화엄경을 수학할 때 마다 꿈속에 형상이 매우 기이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의상조사에게 네자신이 깨달은 바를 글로 지어서 사람들에게 베풀어줌이 마땅하다고 했다. 또 꿈에 선재동자(善財)가 총명약(聰明藥 십여제(10餘劑)를 주심을 받았다. 그리고 또 꿈에 청의동자(靑衣)가 세 번째로 비결(秘訣)을 주는 것을 받았다. 그 스승 지엄선사는 이꿈 이야기를 듣곤 신인(神人)이 주는 신령스러운 것을 받았음이 나에게는 한번 있었는데 그대에게는 세 번이구나 널리 수행하여 그 통보(通報)를 곧 표현하도록 하라」고 했다. 명(命)을 따라 그 터득한바 깊고 묘한 경지를 순서에 따라 부지런히 써서 대승장(大乘章) 열권을 엮었고 그 스승님께 잘못된 곳을 지적해 주기를 청했었다. 지엄선사는 그 글뜻은 매우 아름다우나 말은 오히려 옹색하다고 했었다. 이에 물러나 번거롭지 않고 어디에나 걸림없게 했었다. 바꾸어 글뜻을 세우고 그윽함을 숭상했다고 말할 수 있으니 대계 스승이 지은 탐현분재지의(探玄分齊之義)를 존중한 것이다. 지엄선사와 의상조사는 함께 불전(佛前)에 나아가 지은「대승장」그것을 사루면서 부처님의 뜻에 계합함이 있다면 원컨대 타지말기를 바랍니다고 서원하였다. 불에타고 남은 나머지에서 210자를 얻었다. 의상조사로 하여금 그것을 줍게해서 다시 불전에 올리고 간절히 서원을 말하면서 그것을 맹렬한 불길속에 다시 던졌다. 마침내 그것은 타지 않았다. 지엄선사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칭찬 하였다. 의상조사는 그것을 연결하여 게송(偈頌)이 되게하려고 몇일동안을 문을 걸고 지냈다. 마침내 삼십(三十)구절을 이루니 삼관(三觀)의 깊고 오묘한 뜻을 포괄하고 여섯꼴의 원융(6相圓融)과 열가지 진리문(10玄門)의 아름다움을 들어내었다. 이처럼「법계도」는 의상조사 자신이 스스로 깨달은 바(自內證)를 지어 기록한 것이고, 그 스스로 깨달은 바(自內證)는 완전히 부처님의 뜻에 계합한 것이기에 참으로 만고불휴(萬古不朽)의「지음」이라 하겠다.「법계도」가 이루어진 것은 그 스승 지엄선사가 열반하시기 몇 달전인 총장원년(總章元年, 단기 3003년) 7월이었다. 이것은 이 책의 끝에 밝혀져 있고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의상조사는 이「법계도」의 첫머리에 이것을 짓게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혀놓았다. 「이(理)에 의거하고 교학(敎學)에 근거하여 간략한 반시(盤詩)를 만들어 이름에만 집착하는 무리들로 하여금 그 이름마저도 없는 참된 근원으로 되돌아 가게 하고저 함이었다」고 의상조사가 지은「반시」란 이백열자(210자)로 된 간결한 시(詩) 법성게(法性偈)를 오십사각(五十四角)이 있는 도인(圖印)에 합쳐서 만든 것으로 곧 법계도(法界圖)이다. 이것을 삼국유사에서는「법계도서인(法界圖書印)」이라고 하였고, 이밖에 화엄일승법계도장(華嚴一乘法界圖章) 또는「화엄법계도」, 「일승법계도」,「법계도장」법성도(法性圖), 해인도(海印圖)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특히 이것을「해인도」라 할 때 거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불교에서는 흔히 마음을 바다에 비유한다. 바다는 깊고도 넓다. 그리고 바다는 한없는 보배를 간직하고 있으며 만상(萬像)을 비추기도 한다. 마음의 바다 또한 이와 같다. 마음의 바다에 진실한 세계가 비추기를 바랄 때 거기에 불고있는 바람을 잠재워야 한다. 바람이 자면 파도 또한 자는법 파도가 잠든바다 거기에 진실한 세계가 나타나고 그 세계를 일러「해인」이라 한다.
번뇌(煩惱)의 바람이 잠든 마음의 바다, 그것을 해인삼매(海印三昧)라 이름하고「해인삼매」를 따라 진리세계는 그 모습을 들어낸다. 의상조사는 이름에만 집착하는 무리들에게 보여주고자 한 세계는「해인삼매」를 쫓아 나타나게 되는「가지가지의 꽃으로 장엄된 일승의 진리다운 세계의 모습이 화엄일승법계도」이다.「법계도」를 "해인도"라고도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법계도"를 직관적(直觀的)으로 밖에는 깨달(證得)을 수 없는, 스스로 깨달음(自內證)의 내용을 상징하는 하나의 표정으로 사용 되었다. 의상조사가 그의 제자들중에서 공부가 다된 사람에게 그 깨달음을 인증하는 증표(證表)로서「법계도」를 수여하던 것이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의상조사는 그 근기(根機)가 낮은 사람들에게 대한 배려(配慮)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법계도"를 지은다음 다시 약소(논문)을 지어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 놓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의상조사 자신의 해설과 후대의 주석서(주를내고 해석한 것)를 참고 하면서「법계도」의 내용을 구경하기로 하자.
의상조사의 논문인 도인(圖印)의 뜻에 대한 전체적인 해석과「도인장」의 모양에 대한 개별적인 풀이의 두 부분으로 되어있다.
(가) 해인의 큰 뜻을 다 밝힘(總釋印意)
「해인」의 큰뜻을 밝힘에서는 도장이란 형식을 취하여「법계도」를 짓게된 까닭을 밝힌다. 곧「교법(敎法)」이 포괄하는 삼종(三種)의 세간(世間)을 「해인삼매」를 쫓아 들어내어 나타내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해인삼매」에 들었을 때 나타나는 삼종의 세간은 ①기세간(器世間), ②중생세간 그리고 ③지정각세간(智正覺)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특히「법계도」는 백지(白紙)위에 붉은 도장의 길과 검은 글씨를 써서 만들었는데 이는「삼종세간」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대기(大記)에서는 다음같이 설명하고 있다.
「백지(白紙)란 기세간(器世間)을 표현한 것이다. 백지에는 본래 염색이 되어있지 않다. 먹으로 경전을 찍으니 검고 주사(朱砂)로 점을 찍으니 붉다. "기세간"도 이와 같다. 깨끗하거나 더러운 어느 한쪽에 치우쳐 있지않다. 중생이 처하면 더러움에 물들고 성현군자가 처하면 밝고 깨끗하다. 그러므로 검은 글자는 중생세간을 나타낸다. 검은 글자는 모두다 검고 하나 하나는 다 같지않다. 중생도 또한 이와 같다. 무명번뇌가 모두 자신을 어둡게 덮고있고 온갖 차별을 나타낸다. 그런가 하면 붉게 그린 길(줄)은 "지정각세간"을 나타낸다. 붉게그린 한길(줄)은 처음부터 끝까지 끊어짐이 없이 모든 글자들 속에서 연속된 교리를 그 빛과 색을 분명히 하고 있다. 부처님의 지혜도 또한 이와 같아 넓고 크고 평등하여 두루 중생의 마음에 미친다. 십세(10世)가 서로 응하여 둥글고 차게 밝게 비춰준다. 이런 까닭에 이「도장」은 삼종(三種)의 세간을 다 비추고 있다. 계속하여 대기(大記)에서는 백지와 검은 글자와 붉은 줄이 상호관계 속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것과 같이 세가지 세간이 서로 융통하고 포섭하여 혼연히 한 덩어리를 이루지만 그러면서도 들고 나는 문이 각각 달라 분명하고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
세간(世間)이란 말은 세계란 말로 이해해도 괜찮다. 뉘앙스의 차이는 있지만 두가지가 다 시간과 공간에 의해 한계(限界)지어진 경계를 의미한다. 세(世)란 시간을! 간(間)이나 계(界)는 공간(空間)을 뜻한다. 원의범 박사에 의하면 인도말로는 세간이나 세계가 한뜻으로 다 로카(loka)로 통한다고 들었다. 어쨌든 대기(大記)의 풀이를 주의 깊게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물질세계(기세간․器世間)와 인간세계(중생세간․衆生世間) 그리고 정각(正覺)에 의한 부처님세계가 별개의 것이 아니면서 각각 따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나) 해인모양에 대한 풀이(別解印相)
도장모양에는 다시 인장(印章)에 내재(內在)한 글의 양상(印文相)과 자상(字相) 그리고 문의(文義)를 구분해서 해설하고 있다.
인문상(印文相)해설에는 인장(印章)에 내재(內在)한 글의 양상이 문답형식으로 해설되고 있다. 의상조사 자신의 해설을 함께 묶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인문(印文)이 다만 하나의 길로 되어있는 것은 여래(如來)의 한말씀(一音)을 표시하기 위함이다. 그 길이 번거롭게 많은 굴곡을 나타내고 있는 까닭은 중생들의 근기(根器)가 같지않기 때문이니 삼승분교(三乘分敎)가 이에 해당된다. 그리고 이 하나의 길에 시작과 끝이 없음은 부처님의 선교방편(善巧方便)에는 일정한 방편이 없고 상대(相對)하는 중생세계에 알맞게 융통성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는 일승원교(一乘圓敎)에 해당한다. 사면(四面)이 사각(四角)으로 되어 있는 것은 사섭법(四攝法)과 사무량심(四無量心)을 나타낸 것이다. 이 인문(印文)은 삼승(三乘)에 의하여 일불승(一佛乘)을 드러내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 시문풀이(명자상․明字相)
시문(時文)에는 시작과 끝이 있는데 그것은 수행(修行)하는 방편을 나타내는 것이니 원인(因)과 결과(果)가 다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가운데 많은 굴곡이 있음은 삼승(三乘)의 근기(根器)에는 차별이 있고 꼭 같지 않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첫글자와 끝글자가 중심(中心)에 와있느냐 하면 인․과(因․果)의 두자리가 법성가내(法性家內)의 진실한 공덕과 대용(大用)을 표현함인데 그「법성」이 중도(中道)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도인(圖印)의 전체적인 해석과 아울러 인문(印文)과 시문(詩文)의 양상을 밝혔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법계도」는 깊고도 넓은 의미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3. 법성게의 한글말씀과 본문
(가) 깨달은분(證得分)
①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둥글고 둘이아닌 법성의 모습이여
②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고요뿐 동작없는 삼라의 만상이여
③ 무명무상절일체(無明無相絶一切)
이름도 꼴도없고 일체가 다없거니
④ 증지소지여경(證智所知非餘境)
불보살 아니고는 이 경계를 뉘알소냐
강론 (1)구절부터 (2) (3) (4)구절까지 합론
이 법성게는 위에서 말씀하신바와 같이 신라시대 의상조사께서 지으신 게송으로서 7언(七言) 30구절 이백열(210) 글자로 화엄경사상을 통째로 표현한 철학적이요 종교적인 시구(詩句)이다. 그래서 이 게송은 무릇 세계적으로 찬송받는 명시(名詩)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법성게는 형상세계의 우주삼라만상과 본체계(本體界)의 심성(心性)이 어떻게 연기(緣起)하고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는 경전이다.
먼저 법성게(法性偈)란 제목부터 그 출처가 화엄경의 어느 품중에서 나왔는가를 살펴 보기로 한다.
화엄경 야마천궁 게찬품 각림보살 찬송중(華嚴經 夜磨天宮 偈讚品 覺林菩薩 讚頌中)에 이런 사구게(四句偈)가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과(過) 현(現) 미래(未來) 삼세간(三世間)의 모든 부처님 경계를 알고저 할진데 마땅히 화엄법계의 성질을 관찰하여라. 우주간의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짓는다. 약인욕요지(若人欲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였다. 이 네귀글중에 넷째줄「응관법계성」의 구절중에 있는 계(界)자를 빼고, 법성(法性) 두자를 발취하여 제목(題目)으로 지은것이「법성게」가 아닌가 생각한다.(이것은 필자의 사견임).
그리고 화엄경중에 게찬품송이 한량없이 많은데 어찌하여 특히 이 「유심사구게」만을 「대방광불화엄경, 제일게」라 하여 칭송하는 소이가 무엇일까?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화엄법계성(法界性)을 통하여 관찰하니 천지만물일체는 자기 심성이 짓는다는 것을 깨닫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셨다네.
이 법성게는 일심(一心)과 현상(現相)을 표리(表理)로 하여 연기(緣起)를 설하고 있다.
법성(法性)이란「법」자는 곧 「다르마」라는 불교에서는 대단히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의상조사는 이 부분의 해석을 생락하고 있다. 스스로 깨달음(自內證․자내증)의 내용을 천명하는 부분이기에 설명이 필요없는지 모른다.
후학(後學)들을 위하여 상기원문(上記)을 다시 직역하여 두는바 원문과 대조 참고하기 바란다.
① 법성은 원융하여 두모양이 없다.
「법성」이란 심색(心色)을 말한다. 만유(萬有)의 본덩치로서 진여(眞如)법계(法界)라고도 한다.「원융」이란 마음덩치를 말함이니 현실(事과 진리(眞理)가 차별이 없이 둥글둥글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다.「무이상」이란 상대성(相對性)을 말한 것이다. 심성(心性) 자체가 넓고 크고 무변하여 걸림이 없다. 곧 비유하면 허공이 넓고 커서 가시없고 크기에 상대가 없어서「둘이 없다」는 뜻이다.
② 모든법이 움직임이 없이 본래 적적하다.
「제법」이란 우주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事物)을 말씀하는 것이다.「부동」이란 생주이멸(生住異滅)의 사상(四相)이 없음을 말씀하는 것이다. 곧 천지만물이 무상(無常)하여 생(生)이 있으면 멸(滅)함이 있어 모든 사물은 변하지만 그러나「제법의 성」은 상주불멸(常住不滅)하고 항상 적적하다는 뜻이다.
③ 모양도 없고 이름도 없어 일체가 끊어졌다.
「무명」인데 명(名)이란 사람들이 무슨 대상에 이름을 붙인것이지 그 자체는 본래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무상」이란 모양이라는 뜻을 말씀한 것인데 모양이란 본래부터 진실한 것이 없다는 뜻이다.
④ 증지와 소지가 다른 것이 아니다.
「증지」란 후득지(後得智)를 뜻하고 수도(修道)로 증득(證得)하는 지혜를 말한다.「소지」란 근본지혜를 뜻함이니 일체중생이 본래부터 부처님성품을 갖고 있는것이「근본지혜」이다.「비여경」은 근본지혜와「후득지」가 다른 것이 아니란 뜻이다. 마치 황금이 채굴되기 전에는「근본지혜」요 채굴된 후에는「후득지혜」에 비유한다.
그런데 법성게기(法記)에는 다음같이 풀이하고 있다.
묻는다 : 무엇이 「법」인가?
답한다 : 인분(因分)을 빌어 나타낸 것이다. 만약 억지로 지적하라 한다면「네몸과 마음이 그것이다」하였다.
법(法)이라고 하는것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나 대체로 보면 규범(規範)이란 의미와 임지(任持)란 의미가 있다. 규범이란 말은 무엇을 가르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곧 인간윤리(人間倫理)와 인간지혜(人間智慧) 그리고 인간의 온갖 생활복덕을 발생케하는 것이고,「임지」란 말은 그 자신이 어떠한 기본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니 곧 사람들에게 큰 깨달음의 눈을 열어주는 기연(機緣)을 지어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법(法)이란 것은 다 훌륭하고 좋은 것만을 이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법」에는 어떠한 것이든지 다 그 가운데 들어간다. 다시 말하면 내적존재(內的存在)거나 외적존재(外的存在)거나 착한것이나 악한것이나 깨끗한 것이나 더러운 것이거나간에 모두를 다 포함할 수 있는것이「법」이다.
이러한「법」의 세계를 곧 법성게의 내용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주위에 벌어져 있는 세계가 곧「법계성」이란 것이다.
이 법계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 성품이 무질서 하거나 난잡하거나 흐트러져 있는 세계가 아니다. 거기에는 통일성이 있고, 조직이 있어서 하나도 무용(無用)한 것이 없고 부족한 것이 없는 오로지「하나」의 세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세계는「一心」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법성게는 거의 전부가 일심법계를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일심법계를 떠나서는 어떠한 것이든지 이세상에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일심법계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법성게를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법기(法記)에 묻기를 무엇이 성(性)인가?
답한다 : 원융 곧 둥글둥글 한 것이 성이다.
묻는다 : 그러면 어떤 것을 둥글둥글(원융)한 것이라고 하는가?
답한다 : 무이상(無二相) 곧 둥글고 둘이 아닌 모습이기 때문이다.
묻는다 : 그러면 하나인 까닭에 무이(無二)라고 하느냐 둘이면서도 무이(無二)란 말이냐?
답한다 :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무이(無二)이고, 두 모습(二相)이 곧 무이(無二)이다.
그러므로 화엄론(華嚴論)에 말씀하기를 일심법계가 우주만유를 총괄하여 있는지라 마음의 물이 담연하면 우주삼라만상이다. 만상이 다 그가운데 나타난다. 다시 비유하면 마치 큰바다물이 맑고 깨끗하면 허공도 해와 달도 별도 구름도 내지 크고 작은 모든 물상이 다 그 가운데 나타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정한「법계성(法界性)」에는 두모습(無二相)이 없다는 것이다.
자! 여러 법성자(法性子)들이여, 이제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끝이없는 허공을 바라보자! 모양없는 허공을! 허공의 성질이 하나냐 둘이냐? 태양도 달도 별도 지구도 사람도 짐승도 모든 삼라만상이 다 허공성(虛空性) 중에서 돌아가고 있드시「일심법계」중에는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우주만상을 다 포함하고 있지만 조금도 걸림없음이 마치 허공과 같은 것임. 그래서 처음도 끝도없는 일심법계 곧 법성(法性)은 두모양이 없다는 것이다. 이 일심법계에 있는 모든만상은 서로 서로 걸림없고 평화롭고 고요하여 동요가 없다는 것이 제법이 부동하여「본래적」이란 말이다.
법기에 묻기를 무엇을 제법이라 하느냐?
답한다 : 법성(法性)이 그것이다.
묻는다 : 어째서 부동(동작없다)이라 하는가?
답한다 : 원융 곧 둥글기 때문이다.
묻는다 : 어째서 본래적(삼라의 바탕)이라 하는가?
답한다 : 무이상(無二相)(둘이 아닌꼴)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알기쉽게 비유하면「두모양 없음과 모든 법」이 물이라면 물은 때로 구름, 증기, 비, 안개, 우박, 눈, 서리등등의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한다. 그러나 물의 본성(本性)인「에너지(H2O)」즉 산소, 수소, 습기만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구름, 물, 증기, 비, 안개, 우박, 눈, 서리등이 곧 물의 고향으로 되돌아 가게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두모양(無二相)이 없음이란 마치 물과 같고 모든법(諸法)이란 비, 눈, 구름, 우박, 안개와 같은 것이다. 고요하다(본래적, 本來寂)함도 또한 구름, 비, 안개, 눈, 우박등이 곧 물이 되는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남자나 여자나 그 생김새, 모양은 각각 다르지만 그러나 남자 여자의 몸으로 생기기 이전 그「에너지(H2O)」곧 흙, 물, 불, 바람, 공기등은 인간남녀의 구별이 없이 남녀의 두 꼴이 없듯 오직 일심법계는 변동이 없어 항상「고요」본래적 하다는 말이다.
또 다시 말하면「전기는 뜨겁다」하면「전기는 차다」고도 말할 수 있다. 전기에 온풍기를 꼽으면 더운김이 나지만 전기에 선풍기를 꼽으면 찬바람이 나기 때문이다. 또「전기는 움직인다」하면「전기는 움직이지 않는다」고도 대답할 수도 있고, 「전기는 움직이지 않는다」하면「전기는 움직인다」고도 말할 수 있으니 움직이는 장치에 전기를 넣으면 역시 전기는 고정되어 있다. 그렇다고 전기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다. 전기는 언제나 전기로되 그 작용을 따라 이와같이 천차만별의 차이를 낼수가 있다. 전기의 본성(本性)이 원융하여 두 모양이 아니기 때문이며 또는 두 모양이 아니기 때문에 두 모양을 나타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전기본성은 어느 곳 어떻게 흘러가던지 변동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이와같이 모든법은 본래부터 고요하여 변동하지 않는 것이라 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진리 곧 법성자리에는 원래 법성(法性)이니 진여(眞如)니 무슨 제법(諸法)이니 하며 이름을 지어 붙일도리가 없는 것이다.
예를들면「어린이」의 이름을 짓는다. 진리니 개똥이니 뭐니하고 부르게 되면 그 어린이는 그 이름으로 자신을 삼고마는 것이되듯 만일「법」에 진여니 법성이니 하고 무슨 이름이 붙게되면 벌써 법성자체(法性自體)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법성자리」에는 그 명상이 다 끊어졌다는 것이다.
「법성계기」에 묻기를 본래적(本來寂)한 곳에도 이름을 붙일 수 있는가?
답한다 : 이름을 붙일 수 없다. 무명(無名) 곧 이름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묻는다 : 어째서 무명(無名)인가?
답한다 : 무상(無相)이 곧 꼴이 없기 때문이다.
묻는다 : 어째서 무상(無相)인가?
답한다 : 절일체(絶一切) 곧 모든 것을 여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일체의 유위성(有爲性)과 조작성(造作性)이 없어졌다는 말이다.
다시 예를들면「불(火)」이라든지「물(水)」이라든지 바람이라는 그 이름은 본래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생활용법(生活用法)에 따라서 그 이름을 붙혀 부르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처님께서 일체중생을 제도(濟度)하시기 위한 방편으로 억지로 무엇이라고 이름을 지어 부를 뿐이다. 즉 부처님이니 중생이니 천국이니 지옥이니 극락이니 예수니 공자이니 귀신이니 하며 칭하는 것은 하나같이 가명(假名)에 불과한 것이다.
꼴모양도 마찬가지다. 원래 법성자체(法性自體)에는 人法이 공(空)하여 아무런 꼴이 있는 것이 없지만 미개한 인연을 따라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니 불상(佛像)이니 예수님상이니 개상이니 소상이니 무슨 지옥 아귀 축생등 사성육범(四聖六凡)내지 천태만상이 우리의 눈앞에 벌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모든상(諸相)」이 진짜모습이 아니라 필경에는 전부가 헛되고 망령되어 진실함이 없는(虛妄無實) 가짜모습(假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착한사람, 악한사람이란 이름이나 모양(名相)이 따로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악한마음을 내서 악한 행동을 하면 나쁜별명이 붙고 도적질을 자꾸하면 저놈은 도적놈 같다는 인상을 받게된다. 그러나 반대로 착한 마음을 일으켜서 착한 행동을 하게되면 따라서 악명인 도적놈이란 인상이 지워지는 것이니 이것이 곧 절일체, 모든 것이 다 끊어 없어진 소식이다.
그러므로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의 서문을 지으신 함허득통선사가 이르기를「여기에 한물건이 있으되 이름이나 모양이 다 끊어졌으나 옛과 지금에 통한다」고 하셨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성 곧 진리는 우리들의 불완전한 말씀으로나 지식으로나 생각으로서는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조사어록(祖師語錄)에 이르기를 언어도단(言語道斷)하고 심행처멸(心行處滅)이라 하였다. 즉 어떤 말씀으로나 생각자리가 딱 끊어진 극단적인 표현을 하였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들 무명업식(無明業識)에 가리워진 것을 해탈못하고 있는 구박범부(垢縛凡夫)로서 어찌감히 불심(佛心)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법성게기」에 여기에는 수증(修證)도 여이었다고 한 것이다.
묻는다 : 실제로 수증(修證)이 없는가?
답한다 : 실제로 없다.
묻는다 : 그러나 성인(聖人)도 수증(修證)을 구하는 것인데 어떻게 수증(修證)을 하는가?
답한다 : 만일 가르칠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교분(敎分)이기 때문이요 오직 대장부는 일심자리를 잘 깨달아야 할뿐 별다른 경계가 없다.
묻는다 : 이 수분(修分)중에 일체제법(一切諸法)이 갖추어져 있는가 없는가?
답한다 : 갖추어져 있다면 변계비법(遍計非法)도 갖추고 있는가?
답하다 : 무엇을 갖추고 무엇을 갖추지 않는다는 말인가?
말하자면 한가지 물건에도 보편적인「법」이 아닌 것이 없으니 무엇을 갖추겠는가? 동작업는 변계비법(遍計非法)은 곧 만족한 법이다. 어찌 그것을 갖추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지엄선사가 말씀하였다.
묻는다 : 일승(一乘)중에 무슨법이 없겠는가?
답한다 : 비법(非法)이 없다.
묻는다 : 무슨법이 없지 않겠는가?
답한다 : 비법(非法)이 없지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말하면 공중에 전기의 성질이 가득하고 바닷물에는 짠맛이 가득하여 분명히 있지만 일체의 이름이나 형상이 없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고 뜻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모든 이름과 형상이 없기 때문에 본래 없다고 말하나 분명히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한물건도 없어서 마음도 부처도 법도 스승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다. 그러나 지극히 크고 신령하여 그야말로 부사의(不思議)한 경계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깨친 사람 아니고는 뉘가 알소냐 한 것이다.
(나) 연기의 체성(緣起體性)
⑤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묘하고 깊고깊은 극미한 진성이여
⑥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제자리 벗어나듯 세계를 나툼이여
강론 (5)구절에서 (6)구절까지 합론
깨달은 분은 일체를 여이었으므로 오직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근기(根機)가 낮은 사람들에게는 깨달음의 경지를 직접 가르쳐 줄 수 없다. 이런까닭에 한걸음(一步)를 양보하여 그런 소식을 보여주고자 앞에서의 법성(法性)을 이제부터는 진성(眞性)이란 말씀으로 바꾸어 설명하게 된다.
⑤ 진성이 매우깊고 지극히 미묘하다.
「진성」이란 가짜성품의 상대한 말씀이니 불생불멸(不生不滅)한 진실성(眞實性)이란 뜻이다. 「극미묘」란「극」은 절대로서 더이사 위가 없다는 뜻이고「미」는 우리인간들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아주 적은 것을 뜻하고「묘」는 말할 수 없이 훌륭하다는 뜻이다. 다시말하면 우리눈으로는 볼 수 없는 티끌속에 3천대천세계가 들어있는 극히「극미묘」란 말이다.
⑥ 자성을 지키잖고 연을따라 이룬다.
여기에 자성(自性)이란 심성 자성이 아니고 만물상(萬物相)의 자성 곧 연성자성(緣成自性)을 뜻한다. 원각경에「마니보배」에 다섯빛깔을 비추면 비추는대로 5색(色)이 나타난다. 이에 어리석은 사람은 구슬 자체에서 5색이 난다고 한다. 이 맑은구슬은 자체상(自體相)이 없으므로 다른물체의 형상을 나타낸다. 사람의 자성도 또한 이와같아 자체상이 공하였으므로 말미암아 구슬이 5색을 비추듯 거울이 물상을 비추는 것과 같이 자기자성은 따르지않고 밖으로 물색연(物緣)만 따라 이룬다. 또다시 법기(法記)에는 이것을 이렇게 말씀하였다.
「맹인(盲人)이 비단짜는 법을 배우려고 함에 먼저 지도하려는 기술선생님이 맹인에게 자료와 도구일체를 거두어 모아오도록 했으나 맹인이 새끼줄을 가지고 온다」라는 비유를 새끼로써 비단을 짜겠다고 덤비는 이 맹인과도 같이 더구나 8식(識)의 망령된 생각(妄心)으로 달음(證入)에 들려는 사람을 위해 임시로 진성(眞性)이란 이름을 빌려 그 깨달음의 경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계속해서 심심극미묘(甚深極微妙)를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매우깊다」는 것은 진성(眞性)에 들어가는 관문(門) 즉 화엄세계(華嚴世界)가 매우깊고 또 미륵누각(樓閣)이 하도깊고 깊다는 도리를 말하는 것이다. 화엄세계가 깊고깊다는 것은 하나하나의 티끌중에서 법계(法界)를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티끌에 관련시켜 그안과 밖을 찾아도 다 얻을수가 없는 것이다. 또 미륵누각이 심심하다는 것은 미륵보살이 손가락 한번튕겨 누각의 문을 활짝연 것을 말한다.
그리고 선재동자(善財童子)가 그 문으로 들어가자 삼세(三世)와 자신과 법(法)과 여러좋은 친구(도반)들을 갑자기 다 만나본 까닭이다.
극미묘(極微妙)란 것은 이변(二邊)에 치우치지 않되 그 두 극단을 여인것도 아닌 중도(中道)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이 진성(眞性)이야말로 이름과 형상이 없으되 옛과 지금을 꿰뚫었으며 육합(六合)을 에워싸고 하늘과 사람과 지구(天地人)의 주인공(主人公)이 되고 만법(萬法)의 王이 됨이라 탕탕무애하여 비롯함이 없고 천지보다 먼저있고 천지보다 뒤에있어 끝이없다. 이「진성」곧 참성품에서는 너와 나와 천지가 한 근원이요 너와 나와 만물과 한덩치로다.
이 진성 곧 참성품이야말로 성현들에 있어서도 더하지 않고 범부에 있어서도 덜하지 아니하며 살거나 죽거나함이 없고 모나거나 둥글거나 길거나 짧거나 크거나 작거나 한 모양과 이름이 모두 하나에도 걸림이 없다.
그러나「진성」이 하늘에 있으면 능히 하늘이 뒤고 사람에 있으면 능히 사람이 되고 지구(땅)에 있으며 능히 땅지구가 된다고 하였다. 金은 본래가 金일지라도 단련하지 아니하면 진금이 되지못하지만 일단 한번 진금만 되면 다시는 변하지 아니함과 같이「진성」곧 참성품자리도 그와같다 하였다. 그러므로 진성이 깊고도 미묘하여 연(緣)을 따라 일체만법(一切萬法)을 성취한다 하였다. 천지, 사람, 세계, 옛과 지금 모든 것이 오직 마음(唯心造)이 지은 것이고 아는(식. 識)것으로 이룬 것이다.
「진성」은 넓고 크고 갓이없고 깊고깊어 밑이 없어서 허공으로도 비유하지 못하거던 어찌 하늘이 덮거나 땅에 실을 수 있으랴. 항상 고요한 체성(體性)은 지극히 공허하여 다함이 없어 옮겨가지 아니하고 늘 밝은 묘용(妙用)은 지극히 신령하여 변하지 아니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갓없는 허공이 깨친사람 마음에서 생긴 것이 비유하면 한쪽각 구름이 허공에 뜬것과 같다」고 하였다.「참마음」진성은 크고 반대로 허공은 적은 것이며 또 허공은 크고 세계는 적다는 말씀이다.
이 묘하고 밝은마음 진성이 심히깊고 미묘하여 제자성(自性)을 지키지 않고 연(緣)을 따아 일체사업(一切事業)을 성취하지만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라「진성」의 본능(本能)이라고 할 것이요 또「진성」은 본분을 지키지 아니하고 밝아서 어두운 마음으로 화하나니 이것이 곧 무명(無明)이 되는 것이다.
비유하면 청정한 바닷물이 외면상으로 보면 항상 머물고 동하지 않는 것 같지만 속으로 미세히 잠복하여 흘러 머물지 아니한 것과 같아서「진성」이 미세한 인연(因緣)을 따라 발생하는 것도 이와같다 할 것이다. 미세하게 요동하는 것을「아뢰야식」이라 한다. 이미 앞에서 유식의 예를 들었지만 이 식(識)이 움직임에 속으로는「진성」을 은폐(隱蔽)하고 밖으로는 일만형상을 연기(緣起)하나니 이것은 허공 세계 일체형상이 성립되기전에 오직「진성」이 아뢰야식(阿賴耶識)으로 변체(變體)된 것을 말한 것이다. 이「아뢰야식」을 세상 사람들은 아는이가 없고 오직 부처님만이 대적광삼매(大寂光三昧)에서 발명하신 것이다. 허공중에 허공중에 미세한 티끌이 항상 요요부주(不住)하지만 평시에는 보이지 않다가 밝은아침 햇살이 문틈으로 비추오면 가는 티끌이 낱낱이 보이는 것 같아서「대적광삼매」를 증득하여야만「아뢰야식」이 요요부주함을 보는 것이다. 이「아뢰야식」의 본체는 맑아서 허공과 같으므로 맑은식(淨識)이라고도 하며 또 모든 형상을 내는고로 심왕식(心王識)이라고도 한다. 이 「아뢰야힉」이 아득하고 비어서 허공이 되고 또 움직이며 유주하는 까닭에 모든 空氣가 되는 것이다.
이「아뢰야식」이 모든 공기의 원소와 유정무정(有情無情)의 종자(씨)를 머금어 있는 까닭에 함장식(含藏識)이라고도 하고, 또 달리 익히는 성질이 많은 까닭에 이숙식(異熟識)이라고도 한다.
이것을 비유한다면 태양이 떠 올라오면 허공과 우주만상이 모두 밝은 광명으로 변현(變現)하였다가 해가지면 우주전체가 어두운 밤이 되는것과 같이「진성」이 「아뢰야식」으로 변화하는 것도 이와같다. 허공중에 어두운 기운이 여러 가지 분자(分子)를 발생한다. 이 공기파동이 변하므로서 한량없는 세계가 건랍되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의「진성」이 심심미묘하여「연기변화」가 끝없음을 인하여 무수한 세계와 유정동물(有情動物)이 계기연속 하는것인데 어찌 하나님의 창조설이나 어떤 자연설의 미신에 현혹당하거나 집착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제법(諸法)이 무엇을 인하여 있으며 무엇으로 인하여 없어지는 것일까? 또 4대(大)를 예로들어 보자. 티끌이 모여 합치면 땅이되고 티끌이 흩어지면 지구는 없어진다. 지구의 성질이 있거나 없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시방세계가 허공에 가득하여 인연을 따라 세계국토를 이루고 인연이 흩어지면 없어지는 것이다.
또 물의 인연은 어떠한가. 능엄경에 이와같은 말씀이 있다. 방저(蚌渚)라는 구슬을 달여 견주어 달빛을 받으면 맑은 물이 흘러나오고 방저구슬을 치워버리면 물이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물이 달에서 오는것도 아니다. 만일 물이 달에서 온다고 할 것 같으면 방저구슬이 없어도 물이 항상 달빛있는 곳곳마다 흐를것이요 또 만일 방저구슬에서 물이 흘러 나온다고 할 것 같으면 달빛이 방저구슬에 비추지 아니해도 방저구슬에서 항상물이 흘러나올 것이다. 이것을 보면 연(緣)이 모음으로 물흐름이 있고「연」이 흩어지면 물흐름이 없는 것이다 내지 천하 여러나라의 사람마다「방저구슬」을 가져 달광명을 비추면 방저구슬 가진곳에는 다 물이 흘러 나올것이니 이것은 처소 시간도 없는 것이다. 그 물의 성품이 법계에 가득하여 이름과 형상이 없으나 다만「연」을 따라서 있고「연」을 따라서 없는 것이다. 물은 그러하려니와 불도 그러하다. 성냥가치나 당황을 뜯어보아도 불을 볼 수 없는데 성냥을 딱 그으면 불이 번쩍 일어나고 확불어 끄면 불이 온데간데 없어진다. 다만 인연을 따라서 있기도하고 없기도하며 생하고 멸할 뿐이다.
불의 성리가 마치 허공과 같아서 시간 공간이 없어서 다만「연」을 따라 불이있고 불이 없는 것이로되 그 불의 본성은 있고없는 것이 아니다. 불과같이 바람도 그러하다. 한사람이 부채를 부치면 바람이 나고 동일 동시에 세계사람이 다 부채를 부치면 동시에 바람이 일어나나니 바람성품은 처소도 시간도 명상도 없으나 온법게에 가득하여 인연 합친곳에 일어나고 인연이 흩어진 곳에는 없어지는 것이다. 또 매월당 김시습법사(梅月當 金時習法師)는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의 법문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풀이 하였다.
일체법(法)은 본래로 성(性)이 없다. 모든성질은 본래 머무름이 없다. 머무름이 없기 때문에 이것은 곧 주체(主體)가 없으므로「연(緣)」을 따라 걸림이 없다.「연」을 따라 걸림이 없으므로 자성(自性)을 고수할 수 없고 시방세계를 이룩한다.「자성」이란 제법(諸法)이 무상(無相)하고 본래 맑고 깨끗한 본체(本體)가 그것이다.
이것을 좀더 알기쉽게 또 비유하면 전기(電氣)는 허공에 가득하되 이름과 형상이 없고 과거 현재 미래의 옛과 지금이 없으나 전파(電波)가 연(緣)을 따라서 전등불로도 켜고, 전보도 치고, 전화도 하고, 라디오도 듣고, 텔레비전도 보고, 무선통신(無線通信)으로 몇백만리 밖에서도 서로 수화기를 귀에 대고 온갖 이야기를 할 수 있듯이 우리의 본래진성(本來眞性)이 법계에 충만하여 다만「연」을 따라 일체를 성취하는 것도 또한 그와 같은 것이다.
「수연성(隨緣成)」에 대하여 한마디 더하고 넘어가야 겠다. 예를들면 봄가고 가을되고 낮가고 밤되는것과 꽃피고 열매맺는 것이 누가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고 모두 인연에서 되는 것이다. 가을되고 겨울되는 것은 해가 하지(夏至)날로부터 남쪽으로 점점 내려감을 따라 양기가 점점 약해짐으로 음기(陰氣)가 점점 더 성해서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는 것이다. 다시 동지(冬至)날로부터 해가 점점 북쪽으로 올라감을 따라 태양기운이 점점 뜨거워지므로 인하여「음기」가 점점 약해지기 때문에 봄되고 여름이 되는 것이다. 어떤 하나님의 신통이나 귀신의 술법이 아니다.
꽃피고 잎피고 열매맺는 것은「양기」가 오면 피는 것이고,「양기」가 가면 지는것이니 하나님이 일부러 그렇게 하는일이 아니다. 아무리 땅과 물과 증기가 있더라도 따뜻한 양기를 받지못하면 꽃피고 열매맺을 수 없는 법이니 어찌 인연이 아니랴.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법이「연」을 쫓아 생하고 연을 따라 멸한다고 하셨다. 다시 성냥불을 그어 불을 켜고 보자. 이불이 나뭇가지와 성냥과 약과 딱 긋는것과 그리고 사람의 손과 여러 가지 인연으로 불이 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천지 세계 만상이 모두 인연을 떠나 자연히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또 그릇에 물을 떠놓고 보라. 허공에 달이 그릇가운에 비추는데 그 물을 쏟아버리고 보자. 방금 보이던 달이 어디로 갔는지 달이 없어 안보이고, 달은 있지만 물이 없어 안보이는 것인가? 그러므로 인연이 합치면 나타나는 것이고 인연이 흩어지면 그만인 것이다. 달이 없어 안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나 짐승이나 모두가 인연따라 나고죽고 하지만 그들의 본「진성」은 나고 죽고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없다. 마치 사람의 그림자가 물가운데 나타나면 그 그림자가 사람을 따라 굴신동작을 하다가 사람이 그 곳을 떠나 다른곳에 가서 자신을 거울에 비추면 그 형체와 동작이 조금도 다를것이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우리인간의 심식(心識)이 부모의 인연화합을 따라 이 육체에 의해 나타났다가 이 육에의 인연이 흩어지면 다른곳으로 떠나가는 것이다.
벌레는 푸른숲을 의지하여 나는것도 있으니 풀을 여이고는 벌레가 없을 것이다. 풀과 인연이 화합되어 생기는고로 벌레빛이 푸르다. 소똥이나 대추나 소락등은 벌레가 아니지만 소똥이나 대추나 소락의 인연화합에 의하여 벌레가 생기는고로 소똥벌레는 빛이누르고 대추버레는 빛이 붉으며 소락벌레는 흰것이니 모두가 인연따라 희고, 검고, 누루고, 붉은 것이다.
능엄경에 아난과 세존과의 대화가 나온다. 종소리가 들여왔다. 세존께서 아난에게 묻는다.
아난아「이 종소리가 어디서 나느냐?」
「종에서 납니다」
아난아「종을 치는 방망이가 없어도 저절로 종소리가 나겠느냐?」
「제가 생각해보니 종소리가 방망이에서 납니다」
「방망이에서 종소리가 아무리 난다고 하더라도 사람에게 듣는 귀가 없다면 그리도 소리가 나겠느냐?」
그러고 생각해보니「아 종소리는 귀에서 납니다」
「귀로 종소리를 들었다 할지라도 이것이 종소리라고 분별하는 생각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아난.「예. 그렇습니다. 생각이 없으면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종소리는 생각에서 납니다.」
「그러면 그 생각은 어디에 매여 있느냐?」
아난「예. 마음에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있다면 어디에 마음이 있느냐?」
아난이 마음을 찾아 보았다. 그러나 마음은 실체가 없었다.
아난이 세존께 여쭈었다.
「마음은 실체가 없습니다.」
아난아「그럼 허공가운데서 종소리가 나는구나.」
이것인「진성」곧 진공묘유(眞空妙有)이다. 진성(眞性)은 인연(因緣)이고 묘유(妙有)는 존재이다. 우주간의 모든 존재는 인연속에서 난다는 말이다. 종소리가 아무리 아름답다 하더라도 손과 방망이와 귀와 생각과 마음이 서로 어울려서 묘한 소리가 존재하나니!
(다) 다라니의 진리와 작용(理作用)
⑦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하나에 모두있고 많은속에 하나있어
⑧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하나곧 전체이고 전체곧 개체이다.
강론 (7)구부터 (8)구까지 합론
⑦ 하나가운데 많은수가 있고 많은수 가운데 하나가 있다.
「일중일체」란 (一)로부터 千만수가 벌려져 나간다는 뜻이고「다중일」은 千만수가 본래는 (1)로부터 벌어져 나왔으니 千만이 아무리 많다해도 도루 하나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그래서 화엄경의 진리가 넓고 크다. 하나 일체 차별상이 없으므로 크고 적은 모양이 없다.
⑧ 하나가 많은데서 즉(卽)하고 많은 것이 곧 하나에서 속했다.
「즉(卽)」이란 「한뭉치」라는 뜻이다.「하나」라 했지만 실로 하나라는 명상(名相)도 없다.「진기」에는 이렇게 풀이한다. 위의「일중일체」등의 2구절은 연(緣)을 따라 이루어짐을 나타내 그 뜻을 분명히 하였다.
첫구절의「일중」이란「인과의 도리」를 여는 문(門)이다. 다시말하면 하나를 얻으면 열(10)을 얻고 열(10)을 얻으면 결정코 하나(1)를 얻으며 원인(因)을 얻으면 곧 결과(果)를 얻고「결과」를 얻으면 또 씨(因)를 얻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열가지(10) 연(緣)은「원인」이 되며 이루어진 하나는「결과」이다. 이 원인과 결과는 곧 일시중(一時中)에 있으되 이 두 지위(二位)는 움직이지(不動)않는다. 이러한 까닭에「인과도리문(因果道理門)」이라고 한다.
「이것이 곧 그것」이요「그것이 곧 이것」이니 서로가 장애되지 않고 또 서로가 치우치지 않기 때문에 덕용자재문(德容自在門)이라 한다.
이 두구절의 듯이 달리 해석되고 있는 것은 하나는 중(中)으로 다른 하나는 즉(卽)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진기(眞記)에서는 이것은 중문(中門)과 즉문(卽門)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중문」과「즉문」을 도신장(道身章)에서는 물결에 비유하여 풀이했다.
이에 따르면 이쪽의 물결이나 저쪽의 물결이나 그것은 다 한강물위에 일어난 물결이다. 동쪽바람이 일으킨 물결과 서쪽바람이 일으킨 물결은 물론 그 형태가 같지않다. 그러나 한물결은 또다른 물결없이 물결일수가 없다. 동쪽바람에 의한 물결이나 서쪽바람에 의한 물결이나 그것은 모두 바람이라는「연」을 따라 생멸(生滅)하는 것 뿐이다.
이와같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것도 그 홀로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두가 상대적인 관계에 의해서만 존재유지되고 있다. 이를 더 알기쉽게 비유하면 빈방안에 촛불을 하나켜고 이 촛불하나로부터 백천만개의 촛불로 나누어 켜면 하나인 촛불이 백천만개를 이루나니 그 촛불이 낱낱이 다르지 아니한것과 같이 하나가 전체가 되고 전체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육도사생(六道四生)의 차별이 다중(多中)하나 그 진성(眞性)은 다르지 아니하여 다만 업력차별로 각각 다를지언정 그「진성」은 매양 불이(不二)가 되어 결국 일체중생이 다 진성을 깨치면 한덩치를 이루는 것이다.
이를 또 알기쉽게 더 비유하면 수은(水銀) 한 병을 가져다가 방안에 퍼드리면 백천개가 될 것이다. 이를 다시 한곳에 쓸어 모으면 하나가 되듯 세계 일체중생이 다「진성」을 깨친다면 한덩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 과거 모든 성인이 모두 한덩치가 되었다가 퍼뜨려 놓으면 여러 불보살이 되고, 과거 모든 성현이 모두 하나로부터 여럿이 되어 나온 것이다.
또한 예를 들어보자. 어느 시골에 살고있는 부모가 있어 아들 삼형제를 두었다. 맏아들은 중국에서 살고, 둘째는 일본에서 살고, 셋째는 미국에서 살고 있다. 사랑 깊은 부모심중에는 중국에 있는 자식이든, 일본에 있는 자식이든, 미국에 있는 자식 전부를 포함하고 있는것과 같은 것이다. 아들 삼형제를 부모 가슴속에 품고 있으나 그렇다 해서 그 부모의 신체가 더 커진것도 아닌 것과 같다. 그리고 부모의 자식사랑하는 마음은 三人자식 전부가 가고있지만 그 부모가 살고있는 위치를 옮기지 않고 신체도 감하지 않는다. 그 자리에 있으면서 부모의 마음전체가 중국에 있는 자식, 일본에 있는 자식, 미국에 있는 자식에게 보내고 있으니 이것이 곧(一)이 일체(一切)에 주편하는 관계이다.
이러한「연기」의 도리를 전제로 하고「하나」와「전체」와의 관계를 다시한번 생각해 본다면 이 구절의 의미는 분명해질 것이다.
(라) 현상계의 관련법
⑨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한티끌 작은속에 세계를 머금었고
⑩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
낱낱의 티끌마다 우주가 다들었네.
강론 (9)구절부터 (10)구절까지 합론
⑨ 한티끌 작은속에 十方세계를 머금었다.
티끌이라고 작은것이 아니고 시방이라 하여 많은 것이 아니다. 모든법이 분별상(分別相)이 없기 때문이다.
⑩ 낱낱티끌마다 또한다시 이와같다.
낱낱티끌이라 한 것은 많은 티끌중의 하나하나에도 모두 시방세계가 들어있다는 뜻이다. 이상에서는 덩치의 성질을 말씀하시고 다음으로는 공간(空間)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를 다시 강론하면 이 두구절(2句節)의 뜻을 비유하면 티끌이 산이고 산이 티끌이라는 말이 된다. 많은 티끌을 모으고 모으면 태산이 되고 태산을 낱낱이 부수워 놓으면 티끌이 되고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티끌이 곧 산이요 산이 곧 티끌이다. 물방울도 하나를 놓고보면 한물방울이 되지만 여러개를 모아놓고 보면 강물이 된다. 그러므로 강물과 방울물은 즉(卽)해 있는 것이다.「도신장」에서는 이 구절에 관한 문답이 다음같이 수록되어 있다.
의상조사가 말씀하시기를「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이란 뜻은 다 꼭같이 머무름이 없는 까닭에 그렇다」고 하셨다.
이에 대하여 원사(元師)가「미진(微塵)은 적은데 소(小)에 머무름이 없고, 시방세계(十方世界)는 큰데(大)에 머무름이 없습니까?」하고 물었다. 의상조사는 한가지「량(量)이다」고 답했다. 원사(元師)는 또「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티끌(塵)은 작고 시방세계는 크다고 합니까?」하고 물었다. 의상조사는 다음같이 답했다.
「미진(微塵)과 시방세계(十方世界)가 각각 자성(自性)이 없고 다만 무주(無住)할 따름이다. 티끌은 작고 시방세계는 크다고 말하는 것은 그래야 할때와 장소에서 그러는 것 뿐이다. 이것이 작기 때문에 작다고 하고, 크기 때문에 크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티끌은 작고 세계는 크다는 것 조차도 알지 못하는 근기로 하여금 그것을 알게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한 것 뿐이다. 이는 언제나 한결같이 티끌은 작은 자성(自性)이요 세계는 큰 자성(自性)인 것은 아니다. 또 티끌이 크고 세계가 작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도리(道理)는 골고루 한결같이 머무름이 없는 것 그것이 곧 실상이다.
이를 다시 알기쉬운 예를들면 솜씨가 비록 작지만 낙낙장송(落落長松)이 그 가운데서 나오고 고기알이 비록 작지만 거기에서 나온 고기가 커서 장강대해(長江大海)에 헤엄치며 파도를 일으키는 고래가 있는가 하면 매알이 작으나 창공을 훨훨나는 송골매가 나오나니 참으로「일미진중함시방」의 소식이로구나」
위의 한결같은 설명의 결론적인 머무름이 없는 것 그것이 곧 도리의 실상(實相)이라한 의상조사가 말씀은 중요하다. 이 말씀은 실재론적(實在論的) 사고방식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이다.
(마) 시간성의 분별(時間性分別)
⑪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
한없는 긴시간도 눈깜박 일념이고
⑫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時無量劫)
찰나의 한생각도 끝없는 긴겁일세
⑬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
삼세와 구세십세 응킨 듯 한덩인 듯
⑭ 잉불잡난격별성(仍不雜亂隔別成)
그러나 따로따로 뚜렷한 만상이여
강론 (11)구부터 (12) (13) (14)구까지 합론
⑪ 한량없는 먼시간도 한생각에 달려있고,
⑫ 한생각 한량없이 먼시간에 미처있다.
「무량겁」이란 아승지겁을 뜻함이다. 그러나 아승지겁이 비록 멀다하나 그 또한 한생각에 달렸으니 가직하고 멀다는 뜻이 없다는 것이다.
⑬ 구세와 십세가 서로 한뭉치다.
⑭ 이것이 서로 섞여도 어지럽지 않고 각각 이룬다.
이는 한량없는 중생들 마음이 우주간에 꽉차 있지만 마음과 마음이 서로 섞여도 어지럽지 않고 각각 따로 이룬다는 뜻이다. 여기 11구에서 14구절까지는 시간성(時間性)에 관련지어 진리를 설하는 대목이다.
겁(劫)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아주 어마어마하게 오랜 긴시간 세월을, 그리고 일념(一念)이란 가장 순간적인 눈깜박할 사이도 못되는 찰나의 시간을 두고 말한다. 사방 60리되는 성안에 개자씨를 가득 채워놓고 우리현재 인간시간으로 백년만에 한번씩 그 성중에 와서 개자씨 한알씩을 집어내가서 완전히 그 성안을 비우게 될 때를 일개자겁(一芥子劫)이라 한다. 그것을 현재 우리인간의 시간으로 따진다면 몇백억만년이 될 것이다. 몇백억만년씩 되는「겁」이 한량없이 많은「겁」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하는 것을 무량원겁(無量遠劫)이라 한다. 그렇게 오랜시간이 곧 한생각이다 하였다.
이것을 좀더 알기쉽게 다음같은 비유를 들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친구를 따라 카바레를 갔다. 아름다운 선녀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유혹에 빠져 날새는줄 몰랐다. 친구녀석이 등을 두들기며「야! 어서가자. 출근시간이 되었다.」
「뭐 벌써 그렇게 되었어」하고 자리를 떴다. 그는 그 자리를 뜨면서 그의 파트너에게 어디서 몇시에 만나자고 약속했다. 그는 퇴근시간에 부랴부랴 달려가서 정한 장소에서 기다렸는지 아직 그가 나오지 아니하였다. 어찌나 몸이 달았던지 일초가 여삼추(一秒如三秋)였다. 1분 2분이 가고 3분 5분이 지난뒤에 만나서 벌컥 화를 내면서 10년도 더 기다렸다 하면서 팔짱을 끼고갔다. 같은 시간인데도 어제밤 시간은 14시간이 벌써라는 말로 표시되었는데 여기서는 5분이 십년으로 표현 되었다. 길고 짧은 것이 모두가 마음이요 환경이다.「극락세계의 일주야의 시간」이 현재 우리인간세계의 시간으로 따지면「일억팔천만년」이 된다고 한다. 그래 마음에 한 생각을 일으켜 멀고 먼 시간관념을 일으키면 일념속에 무량겁이 형성되고 무량겁속에서도 한생각없이 지내면 일념이 곧 무량겁이 된다.「초초분분」의 생각이「시시일일(時日」을 이루고「시시일일」의 생각이「월월녀년(月年)」을 이루고「월월년년」의 생각이「겁겁의 세월」을 형성하는 것이므로 이렇게 하여「9세10세」가 서로 즉하여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깊고 묘한 철학인가? 만일 거기에 생각이 끊어진다면 시간도 겁도 없을 것이니 시간과 공간 또한 모든 것이 일심(一心)의 소현인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시간에 속아사는 사람, 공간에 속아사는 사람이 얼마나 가련한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시간의 단위를 과거, 현재, 미래의 3세로 나눈다. 9세란 3세마다 각각 그속에 3세가 있다고 생각하여 시간의 단위를 아홉으로 세분한 것이다. 과거의 과거(1), 과거의 현재(2), 과거의 미래(3), 현재의 과거(4), 현재의 현재(5), 현재의 미래(6), 미래의 과거(7), 미래의 현재(8), 미래의 미래(9) 이렇게 9세인데 이 전체를 일세(一世)로 통괄하면 10세(十世)가 된다.
어째서 이런 특이한 분석을 하고 있는가, 시간을 잘개 쪼개면 무한에 이른다. 이 무한의 시간을 일세가 통합하고 있다. 통괄하면 영원의 현재인 일세(一世), 쪼개면 무한임을 설하는 것이「무량원겁즉일념」이다.
지엄선사는 의상조사에게 9세의 도리를 다음과 같은 예로서 설명한 일이었다.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지붕위에 올라가 있고 아들과 손자가 밑에서 기와를 나르는데 자기가 그 중간에서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있는 것을 보았다. 할아버지는 과거이다. 과거이기에 오직 한자리 일뿐이다. 아버지는 과거의 현재며 현재의 과거이다. 그러므로 두지위가(二位)된다. 중간몸인 나는 과거의 미래요 현재의 현재며 미래의 현재이므로 삼위(三位)를 갖추고 있다. 아들은 현재의 미래요, 미래의 현재인 까닭에 두 위를 갖춘다. 손자는 미래이므로 오직 일위(一位)뿐이다. 이들중에서 기와를 날라주는 사람을 본위로 생각하면 나머지 8세는 간단해진다. 그러므로 현재의 현재이다.
꿈속에 다섯사람 그들을 통괄해 보면 어느 한편에 치우침이 없다. 그러므로 이 두사람에게는 두가지 뜻이 다 있다.
이와같이 총(總)과 별(別)로써 때(時),「법」을 나누어 볼 수 있다.
우리가 지금 여기 살아있는 것을 결코 현재 여기만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현 존재란 현재와 동시에 과거도 미래도 함께 살고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절된 시간 즉, 9세에 통일을 주고 영원한 순간의 의미를 정확하게 인식하기 위해 다시 한번 위의 구절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를 요약하여 비유하면 과거 무량겁으로 부터 오늘까지라도 성냥을 딱 그으면 불이 번쩍 일어난다. 미래억천만년후라도 성냥을 딱 그으면 불이 날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오늘 불씨는 과거무량겁전의 불씨인 것과 같다. 이를 다시 말하면 불은 마찰력 즉 인연상대에 의하여 전기가 발생하는 것이다. 전기는 본래 우주간에 가득한 것으로서 이것을 사용하는 인연상대에 따라 전화 등 백천가지로 사용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시간의 영원과 순간속에서 우주간의 삼라만상이 그 형용체상을 갖추기전 그 성질이 법계에 가득하여 서로 잡란치 아니함이 마치 백천등불을 한방안에 켰으되 여러등불이 서로 잡란치 아니한 것과 같이 단절된 시간. 곧 9세에 통일을 주고 시간의 영원성과 순간성에 걸림없이 우리생명의 본원(本源이 영원무궁(永遠無窮)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하였다.
이를 다시 더 뒤풀이 한다면 청산에서 무의식적(無意識的)으로 잠들고 있는 바위들에게는 과거도 없고, 현재도 없고 그리고 미래마저 없다. 여래(如來)는 안다. 과거도 현재, 그리고 미래마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여래」는 시간이 아니다. 영원에 살고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짜 현재다. 현재는 결코 과거와 미래의 사이에 끼어있는 그 가상 공간이 아니다. 사전에 찾아보면 현재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현재란 과거와 미래사이에 끼어있는 그 가상공간(假想空間)이다.」그러나 이것은 결정한 의미에서의 현재는 아니다. 무슨 현재가 이런가. 그것은 이미 과거다.「현재」라고 부르는 그 순간 그것은 이미 과거로 흘러가 버렸다. 존재의 외각으로 나가 버렸다. 그러므로 현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도 마찬가지다. 미래라고 부르는 그 순간 그 미래는 현재가 되면서 곧 과거쪽으로 흘러가 버린다. 이런 현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재가 아니다. 미래와 과거사이의 현재란 과거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고 미래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의 진행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재란 어떤 것인가?「여래」는 알고 있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현재마저도 없다는 것을! 거기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의 구분이 없다는 것을 부처님은 알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영원의 차원이다. 이 영원의 차원에서는「지금여기」가 있을 뿐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그대신「지금여기」가 있을 뿐 영원 그 자체로 부처님이 있을 뿐이다.
(바) 수도의 단계(修道段階)
⑮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첫발심 했을때가 부처를 이룬때요
(16)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
생사와 열반경계 바탕이 한몸이니
강론 (15)구부터 (16)구절까지 합론
⑮ 마음을 처음 일으킬 때 문득 부처님.
화엄경의 이치는 시작과 끝이없고 깨침과 못깨침이 없어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본래 차별이 없는 이치이니 모든중생이 본래 부처님이라는 뜻이다.
(16)생사와 열반이 서로 바탕이 한몸이다.
이는 一心이 주인임을 가르친다. 그리고 위의 2구절은 수도(修道)의 단계에 의한 법의 분별을 설한다.「법기」에는 다음같이 기록되었다.
「문」어째서「구세십세호상즉」다음에「처발심시변정각」이라고 말하였는가?
답한다 : 증분(證分) 곧 깨달은 분의「법성」은 불가득(不可得), 가히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법성을 진성(眞性)으로 바꾸어서 지금까지 설해왔다. 일체의 법에는 무자성(無自性) 즉 그 스스로의 고유성이 없다. 하나의 티끌에도 또 무량겁(無量劫)에도 그 자성은 없다. 이것이 진성(眞性)이다. 이러한「진성을 확실히 깨닫는 것, 그것을 초발심(初發心)이라고 한다.」
이와같이 발심(發心)하는 까닭에 곧 그 결과를 만족시키게 된다. 따라서 열반에 머무를 때 생사(生死), 죽고 삼에 노닐며 생사(生死) 죽고삶에 노닐 때 항상 열반에 머물게 된다. 이때문에「생사열반상공화」라고 한다.
그러면 무엇이 생사(生死)이고 무엇이「열반」인가?「진기」에는 이렇게 기록하여 있다.
「생사(生死)는 곧 너의 몸이요 열반도 곧 너의 몸이다」라고 했다. 이말씀은 우리들 각자와 무관한 개념이거나 어떤 다른 대상으로서의「생사」와「열반」이 있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이에 대해「도신장(道身章)」에는 우리들 인간은 옛적부터 이미「부처님」이다. 그러나 발심과 더불어 그것을 알게된다. 마치 꿈속에 뛰어 다닌다. 그러나 꿈은 깨면 허무할 뿐 아침에 깨어나서야 꿈에 뛰어 다닌 것이 바로 누워있었던 것임을 알게된다고 풀이한다.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와서 물었다.
「개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그런데 조주스님은「없다」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듣고 그 스님은 그대로 곧 도(道)를 통달하였다 한다. 이것이「초발심시변정각」의 소식이다.
그런데 그 깨달음을 얻지못한 사람들은 의심을 자아내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이 불성(佛性)이 있고 심지어 산천, 초목, 돌바위까지도 다 불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조주스님은「불성」이 없다고 하였는지?
인생의 몸은 물거품과 같고 마음은 바닷물과 같아서 물거품은 없어지더라도 물은 항상 있는것과 같이 몸은 없다가 다시 있기도 하고 있다가 없어지기도 한다. 허공의 구름은 항상 일어나고 멸하나 허공은 언제나 텅 비어서 동하지 않는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대오온(四大五蘊)의 본질은 곧 금강계(金剛界)라 하셨으니 금강은 생멸(生滅)이 없다는데 비유한 것이다. 그러므로「생사(生死)와 열반」이 둘이면서 둘이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바닷물이 청정하게 보임으로 그 물이 아주 맑은줄로 알지만 그 물에는 반드시 짠맛이 있는 것이다. 또 허공이 텅비어 보임으로 아주 비인 허공인줄로 알겠지만 그 허공의 본원(本源)에는 대각성(大覺性)이 곧「열반성」이 있다는 것이다.
중생들은 무엇이나 눈에 보이지 않으면 아주 없는것으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불은 뜨겁고 물은 젖는다. 고추는 매우며 소태는 쓰다. 이 형색등이 다 자기의 성질이 있으나 그냥두고 우리의 육안으로는 보기 어려운 것이다. 이런 형색이 있는 물건도 그냥두고는 그 성질을 알수 없거든 하물며 일체만물이 형체없는 기운으로부터 생겨나고 형체없는 기운은 형체없는「아뢰야식」의 업종자(業種子)로부터 생겨나며 형체없는「아뢰야식」은 일체명상(名相)이 없는 대원각성(大圓覺性) 곧 열반성은 어떤 말씀으로나 생각으로서는 표현할 수 없어서「일체명상」이 없음으로 있고, 없는 것이 마치 전기가 우주에 가득하나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허공에 구름이 일어나고 멸하고 바람이 일고 그치며 자구만물이 허공을 의지하여 가지고 변태무쌍 하지만 그러나 허공은 언제나 동하지 아니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바닷물이 곧 파도요 파도가 곧 물이다. 물과 파도는 둘이 아닌 것과 같이 마음밖에 따로 부처없고 부처밖에 별로 마음이 없다. 이와같이 생사(生死)와 열반이 둘이 아닌 소식이다.
임제스님이 모처럼 발심하여 황벽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발심이란 최초로 자기를 알고 싶어하는 마음을 일으킨 것을 말한다.」내가 누구인가 어디서부터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생각해보니 앞길도 막막하고 뒷길도 막막하였다. 아버지의 아버지도 아버지이고, 아버지의 아버지도 아버지이며, 어머니의 어머니도 어머니이고, 어머니의 어머니도 어머니여서 캐고 들어가도 결국은 한 아버지 한어머니라 차라리 하나님이라 해버리고 마는 것이 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다고 결국 하나님은 누가 낳은 자식이란 말인가? 계란속에서 닭이 나오고 닭속에서 계란이 나와 계란이 곧 닭이요 닭이 곧 계란이라 구분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면 아버지가 아들같고 아들이 곧 아버지 같아 전혀 구분할 수 없게된다. 이런 경지에 들어가서 3년을 꼬박앉아 찾고 찾았는데도 결말이 나지 아니 하였다. 입승스님이 가만히 뒤에서 보니 참으로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
「저 사람을 어떻게 좀 도와야지…」생각하고 가서 물었다.
「무엇을 그렇게 생각하고 앉았오?」
「참선하고 있습니다.」
「문답을 한번이라도 해보았오.」
「무엇을 알아야 물을것이 있지요?」
「하기야 그렇기는 하겠지오마는 위의를 갖추고 황벽스님에게 찾아가서 불법(佛法)의 적적대의(寂寂大意)를 한번 문의하여 보십시오.」
「그럴까요.」
그거야 별로 어려울것이 없는 것 같았다. 임제스님은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나 가사 장삼을 입고 위의를 갖추어 황벽스님에게 찾아가 넙죽이 절을 하였다.
황벽스님이 물었다.
「무엇하러 왔느냐?」
「불법의 적적대의가 무엇입니까?」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황벽스님은 들고있던 주장자로 30방을 내리쳤다. 한두방도 아니고 30방망이를 맞고나니 등어리가 누구러 지는 것 같았다.
「도대체 이게 웬일인가? 내가 무슨행동을 잘못했다는 말인가? 아니면 물음을 잘못했다는 말인가?」잔뜩 의아심을 품고 내려오니 입승스님이 물었다.
「뭐라고 하십디까?」
「뭐는 뭡니까? 말도 마십시오. 죽을고비를 겪었습니다.」
「그래요. 거 참 안되었군요. 그렇지만 그 이유를 모르고서는 안되니 내일한번 더 가보십시오.」
임제스님은 그 까닭을 알 필요가 없다 생각하고 그 이튿날 또 의의를 단정히 갖추고 전날과 꼭같이 물었다. 그랬더니 또 다짜고짜로 30방망이를 내리친다. 키가 8척에 육덕이 좋은 임제스님이기는 하지만 선머슴 매치듯 30방망이를 맞고나니 정신이 핑돌았다.
「저 영감이 미쳤나 왜 나를 이렇게 때리나…?」하고 속이 상당히 부르트기는 하였지만 아직 그 내력을 모르는 이상 그냥 반기(反旗)는 들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이유를 알만한 틈을 준다면 혹 한번 화를 내볼 여지가 있는데 전혀 짬을 얻지 못한데다가 또 무슨 말을 했다가 다시 또 더 맞지나 않을까 겁이나서 도망치다시피 뛰쳐나왔다. 임제스님은 무척 분했다. 코를 씩씩거리고 눈물을 흘리며 나오니 또 입승스님이 묻는다.
「무슨 말씀이 없던가?」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등어리에 피가 맺히도록 맞았습니다.」
「거 참 이상도 하네. 이유없이 매를 때릴 리가 없는데… 삼세번이니 내일 한번 더 가보게…」
그리하여 임제스님은 3번째 황벽스님을 찾아갔다. 그런데 황벽은 여지 없었다. 여전히 30방망이를 내리친다. 연3일 90방망이를 맞고나니 아주 정이 뚝 떨어진다.
「이런 노가다판에서 공부는 무슨 공부냐?」
하고 그는 바로 지대방으로 들어가서 짐을 챙겼다. 입승스님이 왔다. 이제는 쳐다보기도 싫었다.
「무엇 하는가?」
「짐을 챙깁니다. 가야지요. 이런 절에서 어떻게 삽니까?」
「이런 쑥맥 가르쳐 주어도 알지 못하니 별 수 없군.」하고 혀를 찼다.
「이절 하고는 인연이 없으니 가야지 그러나 3년동안 밥만 얻어먹고 떠나게 되었으니 큰스님에게 인사나 드리고 가게…」
하고 입승스님이 곧바로 황벽스님께 나아가 길을 잘 인도하여 주시도록 간청하였다.
「임제가 떠난다고 합니다. 바른길을 인도하여 주십시오.」
황벽스님은 아무말씀 하지않고 있다가 임제가 와서 절하자.
「어디로 갈것인가?」
물었다. 임제는 화가난 듯 말했다.
「집없이 떠나는 사람이 정한 장소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북쪽 대우(大愚)스님에게 찾아가라.」
정작 갈곳이 없어 떠난다고는 했지만 매우 걱정하였는데 마침 길을 인도하여주니 매를 때리긴 하였어도 고마웠다. 몇일을 걷고 걸어서 겨우 대우스님이 계신곳에 나아가니 대우스님께서 보고 물었다.
「어데서 왔느냐?」
「황벽스님 절에서 왔습니다.」
「그래 황벽스님께 무슨법을 물었더냐?」
「3년 좌선중에 3일동안 90방망이만 맞았습니다.」
하고 매우 언짢아 하는 기색이었다. 그런데 그 스님은 노바심절(老婆心切)이 그토록 친절하던가? 하였다. 임제스님은 그말아래 당장 깨닫고 말하였다.
「황벽스님의 법문이 몇품어치 되지 않는군요.」
「뭐 이놈. 황벽스님 법문이 몇푼어치 되지 않는다고…」하면서 대우스님이 임제스님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자 임제스님은 형형한 눈빛으로 대우스님을 바라보고 큰 주먹으로 대우스님의 옆구리를 세 번「쾅, 쾅, 쾅」하고 내리친다. 대우스님은 큰소리로 말하였다.
「너 이놈, 누구에게 주먹질이냐 어서가서 황벽스님께 감사하라.」
하는 수 없이 임제스님은 그곳에서 무엇을 깨달았는지는 모르지만 멱살을 잡힌체 대우스님의 옆구리만 세 번 쥐어박고 돌아왔다. 황벽스님께 문안드렸다.
「스님 돌아왔습니다.」
「응, 그래 올 줄 알았다.」
스님께서는 이미 올 줄알고 계셨기 때문에 조금도 대수럽지 않게 생각 하였다.
「그래, 대우스님께서 뭐라고 하더냐?」
「스님께서 그렇게까지 친절하게 가르쳐 주시더냐」고 하시면서
「노파심절이 지나치시다 하셨습니다.」
「뭐, 그놈의 늙은이가 입이 싸가지고 그만…」
하면서 황벽스님께서 화를 벌컥 내었다.
「내 이놈 오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으리라.」
「가만두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한대 때려주지…」
「뭐 그때까지 기다리실 것 있습니까?」
하고 임제스님은 황벽스님을 한 대 갈겨댔다.
황벽 스님이 화를 벌컥내면서
「야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손찌검을 하느냐?」
하니 황벽스님께서 일어서면서
「여기가 바로 호랑이 굴이다. 호랑이 굴속에 들어와서 호랑의 수염을 건드리는구나」
그때 임제스님 벌떡 일어나「어흥 어흥」하고 호랑이 흉내를 내면서 황벽스님을 잡아 먹을 듯이 달려 들었다. 황벽스님은 급히 자리를 피하면서 소리소리 질렀다.
「애들아, 이 미친중을 법당으로 끌고 가거라」
하며 법상을 차리고 대중을 모와 법을 전하니 이것이 황벽선사의 이심전심(以心傳心), 곧 초발심(初發心)이다.
자기를 깨닫고 세상을 구하는 일, 이것을 화엄사상에서는 초발심(初發心)이라 하고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라 한다.
(사) 총론
(17)이사명연무변분(理事冥然無分別)
있는듯 이사분별 그러나 걸림없고
(18)십불보현대인경(十佛普賢大人境)
비로자나 보현보살 대인의 경계로세
강론 (17)~(18)까지 합론
위의 두구절은 연기분(緣起分) 이의 결론에 해당한다.
이(理)와 사(事)가 밝아서 따로 분별이 없다.
이(理)는 심성(心性)이고 사(事)는 현상계의 뜻이다.
십불의 보현은 大人의 경계로다.
앞에서 설하신 바가 비록 많다고는 할망정 이(理), 사(事) 곧 진리와 현실을 벗어나지 않는 까닭에 이와 같은 결론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理)와 사(事)란 무엇인가?
「법기」에서 밝힌바와 같이 생사(生死) 곧 나고 죽음과「생사」없는 영원한 평화 곧 열반의 성질(性)없음을 이(理)라 하고, 성질(性)없는 생사(生死)와 열반이 곧 사(事)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연기(緣起)는 성질(無性)없음이 곧 이(理)라 하고 성업(無性)는 연기(緣起)는 곧 사(事)란 말이다.「진기」에서는 진리(理)라는 부처님의 내향심(內向心)이므로 십불(十佛)이 곧 진리(理)에 해당하고 사(事)는 부처님의 외향심(外向心)이므로「보현보살의 경계」가 곧 이것이라고 했다.
십불(十佛)이란 부처님의 실상을「화엄경에서 열가지로 설명한 것이요, 따로히 열분의 부처님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보현보살은 부처님의 외향심(외향심(外向心)의 화현(化現)임을 뜻한다.」 그러므로 십불(十佛)이란 부처님의 깨달음 지혜의 상징이라면 보현보살이란 부처님의 자비로운 덕행(德行)의 상징으로 이해하면 괜찮을 것이다. 지혜와 자비 그것은 둘이 아니니기 때문에 이치(理)와 현실(事) 또한 둘이 아니다. 이 이치(理)와 사실(事)에 대한 설명은 앞에서 여러번 되풀이 하였기 때문에 다음장으로 넘어가서 이야기하기로 한다.
(아) 도장 모양의 비유
(19)능인해인삼매중(能人海印三昧中)
세존님 해인삼매 그속에 나툼이여
(20)번출여의부사의(繁出如意不思議)
쏟아진 여의보배 그속이 부사의여
(자) 이익 얻음
(21)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허공을 메워오는 거룩한 진리비는
(22)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
중생들 그릇따라 온갖원 얻게하네.
강론 (19) (20) (21) (22)까지 합론
(19)능인세존께서 해인삼매중에서
(20)여의주(如意珠) 부사의법(不思議法)을 한량 없이 나타낸다.
「여의」란 여여부동(如如不動)한 진리요「부사의」는 형언할 수 없는 묘한 법을 말한다.
(21)중생을 이롭게 하는 보배를 허공에 가득히 비오듯 내린다.
(22)중생의 그릇을 따라 이익을 얻게한다.
중생의 근기에 따라 대소승의 3근(根)이 나누어지고 차별상이 생긴다는 뜻이다. 중생을 교화 제도하는 부처님을 뜻한다.
이 능인(能人)이 해인삼매(海印三昧)로 나와 어떻게 중생들을 이익하게 하는지 의상조사의 설명을 듣기로 하자.
도장(印)이라고 한 것은 비유로써 이름한 것이다. 왜냐하면 큰바다는 지극히 밝고 맑아 밑바닥까지 다 드러나 보일 정도이다. 하늘에 제석천왕(帝釋天王)이 아수라(阿修羅)무리와 싸울때에 모든 병사의 무리들이 그속에 분명히 드러나는 모습이 꼭「도장(印)」에 글씨가 나타나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해인(海印)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번」이란 번성하다는 뜻이다. 마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듯한 까닭이다. 날출(出)이란 용출무진(涌出無盡) 곧 연기(緣起)가 끝없이 솟아나와 그칠줄을 모른다는 뜻이다. 여의(如意)란 비유로써 이름한 것이니 여의보 임금님(如意寶王)은 불심의 보배를 비오듯 뿌려 중생을이롭게 함이 연(緣)을 따라 무궁무진하다. 석가세존님의 선교방편(善巧方便)도 또 이와같아 49년간하신 일음설법(一音說法)이 시방삼세(十方三世)에 퍼저가면 중생계에 호응이 있어 나쁜마음을 없애고 착한 마음을 일으켜 중생세계를 이롭게 하니 어디에서나 쓰는 곳에 따라 뜻과 같지 않음이 없기에 여의(如意)라고 한다. 또 진기(眞記)에는「어째서「해인삼매」가 다른이을 이익케 한다는 뜻이 첫머리에 왔는가 하면 다른이를 이익케(利他)하는 시방세계 부처님(十佛)이 깨달으신바「해인」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법기(法記)에는「해인」중에는 참된 자신의 이익(自利)과 다른이의 이익이 있다고도 하였다. 자리(自利)란 세상의 내면적 깊이를 깨닫는 것이고 이타(利他)란 말은 세상으로 넓이 뛰어나가는 것이다. 여기서 또 자리(自利)란 부처님의 마음이고 이타(利他)란 부처님의 교화방편으로 알면 될 것이다. 자리(自利)에 바탕두지 않은 이타(利他)를 수반하지 않는 자리(自利) 또한 마찬가지 이치이다.
이 뜻을 다시 말하면 허공에서 세차게 쏟아지는 보배의 소낙빗물도 자기가 가진 그릇만큼 밖에 더 못받는 법이다. 예를들면 한 대담을 그릇이면 한 대만큼, 한말담은 그릇이면 한말만큼 한섬담을 그릇이면 한섬만큼밖에…세상을 내다보는것도 자기안목이상은 더 바라보지 못하는 법이다. 이것이 곧「중생수기득이익」이란 법문이다.
(차) 수행법
(23) 시고행자환본제(是故行者還本際)
행자여 돌아가라 진리의 고향으로
(24) 파식망상 필부득(息妄想必不得)
망상을 쉬고가라 헛길을 가지말라
(25) 무연선교착여의(無緣善巧捉如意)
교묘한 절대방편 그길로 찾아가라
(26) 귀가수분득자량(歸家隨分得自糧)
여의주 자량얻어 부처님 고향으로
강론 (23) (24) (25) (26) 구까지 합론
(23) 이론고로 수행하는 사람이 본원에 돌아가면
(24) 다못 망상을 쉬어야만 반드시 얻는 것은 아니다.
이사(理事)가 명연(冥然)해서 분별없은 자리에서 망상을 제거하고 얻는다면 이는 사상(事上)의 도리요 화엄종지에는 어긋나는 것이다. 여기서는 진망(眞妄)을 구별하는 경지가 아니다.
(25) 연이 없어도 교묘함으로「여의」를 잡게된다.
「무연(無緣)에 있어 다른 경전에서는 연법(緣法)과 숙연(宿緣)으로 인과(因果)과 성취되어 불과(佛果)를 성취한다.」했으나 법성게에서는 초발심시가 부처님되는 도리이니 연(緣)으로 성취하는 바가 아니라는 뜻이다.「선교」란 법성의 미묘법문을 말씀한 것이다.
(26) 본분따라 자량얻어 집으로 돌아가라.
「귀가」집으로 돌아가라함은 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뜻이요「분」은 자기본분을 말한다.
위의 네구절은 수행방법(修行方法)을 가르쳐 보인 것으로 법기(法記)에는 다음같이 이 구절을 풀이하고 있다.
행자(行者)란 말은 모든 믿음을 가지고 보현보살의 수행법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가르친다.
본제(本際)란 말은 깨달은 마음(內證) 진리의 고향 해인(海印)이다.
「파식망상필부득」이란 구절은 두가지 아집(我執)을 망상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위에 말한바와 같은 진리의 고향「해인」의 경지에는 무아집(無我執) 곧 아상(我相)을 끊은 사람이라야 능히 도달할 수 있다. 만약「아집」을 남기면 도달할 수가 없다. 마치 바닷가의 우물에는 짠성품이 있기 때문에 먹어서 목마름을 가시게 할 수가 없다.
이와같은 의식(意識)의 인법이아(人法二我)는 말나식(末那識) 및「아뢰야식」의 바다에 숨겨있다가 다시 일어난다.「아뢰야 본식」은 바로 나의 뿌리고 그「말나식」은 바로 나의 줄기이다. 육식(6識) 및 전오식(前5識)은 모두 이 아집(我執), 법집(法)이 출입하는 문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사람이 수미산에 오르고자 하면 팔해(8海), 여덟바다를 말리고 난뒤에야 육지를 따라 가야만 수미산에 오를수가 있다.
이와같이 행자(行者)가 진리의 고향으로 뒤돌아 가고져 하면 점차로「8식망상」의 바다를 멈추게 하고나서야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삼승(三乘)의 뜻이다.
다시 말하면 본제(本際)란 의상조사가 말씀한「진리의 고향」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이 진리의 고향으로 뒤돌아 가기 위해서 철저히 무아(無我)의 경지를 터득해야 한다.「나」에 집착하는 망상을 남겨둔체「진리의 고향」에 도달할 수 없다.「나」에 대한 집착과 내 주위의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이「아집 법집」이 두가지 집착을 이집(二執)이라고 한다. 이「이집」으로부터 자유로와 지는 길은 무연(無緣)해야 한다. 곧 어느 대상에도 의거함이 없어야 한다. 어떤 대상도 변함없는 고유성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귀가(歸嫁)란 말은「진리의 고향」으로 뒤돌아 가는 것이다.
또 자량(資糧)이란 말은 깨달음을 얻는 여러 가지 방편덕목(方便德目)을 말하는 것이다. 수행의 방편을 밝히는 위의「4구절」의 의미는「본제」곧 진리의 고향과 망상(妄想)이라는 두 낱말을 통해 분명해 질 것이다.
옛날 어떤 도둑놈이 도둑질을 하기 위하여 모여관에 들어갔다. 주인에게 문간방을 달라하여 일찍이 죽치고 앉아 들어오는 손님을 하나하나 점검하였다. 누가 무엇을 가지고 들어와서 어느방 어느곳에 놓고자나 살펴보는 것이다. 그런데 밤이 좀 이슥하여 한 노스님이 돈자루를 무겁게 짊어지고 들어왔다. 주인 마님이 반색을 하며 인사를 한다.
「아이고 스님, 스님께서 어찌 이렇게 나오셨습니까?」
「세금내러 가는 길이요.」
「안방으로 모시겠습니다.」
하며 길을 인도하니 스님은 방으로 들어가자마다 돈 자루를 들어 벽장에 넣고 앉았다. 도둑놈은 안심하고「오늘은 내가 꿈을 잘 꾼 날이다.」생각하고 초저녁엔 편히 누었다가 밤중이 되어서 조심스럽게 찾아갔다. 손가락에 춤을 묻혀 창구멍을 뚫고보니 노스님은 그때까지 잠을 자지않고 앉았는데 금시금시 변화를 한다. 방금 황금 덩이 부처가 되었다가 다시 또 사람이 되었다가 계속하여 신통변화를 부린다. 한참동안 들여다 보고 있다가 생각을 돌리ㅕ 돌아왔다.
「옳지 내가 이렇게 남의 눈치를 피해가면서 도둑질을 할것이 아니라 저 신통만 배운다면 걱정없이 살겠다.」
생각하고 그날밤을 편히 잤다. 아침일찍 일어나서 스님을 찾아 뵙고 통성명을 하였다. 그리고 그뒤를 따라갔다. 산재를 넘을 무렵 큰소리로 스님을 부르며 달려갔다.
「스님, 어디로 가십니까?」
「세금을 내러 가는 길이요. 왜 묻소?」
「예, 다른게 아니라 어젯밤 그것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것이라니?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 있지 않아요. 그것」
「아니 그것이라니 알 수 없는 소리를 자꾸하면 어떻게 하나. 사실대로 말을 해보라구」
하며 스님께서 조금 언성을 높이자 도둑놈은 황송한 듯 사정이야기를 다 털어놓았다.
「사실 저는 도둑놈인데 어젯밤 도둑질을 하러 갔다가 스님께서 황금부처가 되는 것을 보고 나도 이젠 도둑질을 그만두고 그것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가르쳐 주어야지.」
「스님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래 시키면 시키는데로 하겠느냐?」
「예, 하구 말구요. 사람이 금부처로만 변할 수 있다면 어떠한 고난도 참고 견디겠습니다.」
「꼭 그렇다면 오늘부터 집에 돌아가서 나무아미타불 금부처만 관(觀)하게…」하고 자세히 그 방법을 일러 주었다.
집에 돌아온 도둑놈은 아무 말도 없이 돌아앉아 벽만 바라보고 나무아미타불 금부처를 관했다. 그 마누라가 보니 이는 필시 정신이 돌지 않고서야 저럴수가 없다. 그전에는 돈을 벌어오면 지저라 볶아라 하고 먹고 놀고 자고 하였는데 먹는것도 자는것도 다 잊어버리고 앉았으니 뭐가 끼이지 않고서야 저럴 리가 없다.
「여보, 당신 거기서 무엇을 찾고 있어요.」
「금부처를 찾고있어.」
「뭐라구요. 금부처는 절에가서 찾아야지 집에서 무슨 금부처를 찾아요.」하고 야단쳤다. 그러나 저러나 남자는 아는체도 하지않고 그저 앉아 벽만 바라보고 있었다.
「돈은 벌어다 주지않고 금부처만 찾으면 장땡인가」
중얼 거렸다.
「가만히 있어. 금부처만 찾으면 돈은 저절로 뭉탱이로 벌리게 될테니까」하고 앉아 있으니 마누라의 잔소리 때문에 공부가 제대로 안되었다. 그래서 그는 골방으로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앉아 있었다. 몇일후에 마누라가 궁금하여 찾아왔다. 그런데 사람이 없어져 버렸다. 사방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골방안을 들여다 보니 골방안에 누른 금부처가 한분 앉아 있었다. 깜짝놀라 문을 벌떡 여는 바람에 도둑놈은 그만 도통을 하였다. 순간 금부처님은 간곳없고 남편이 부스스 눈을 비비고 일어섰다.
「여보, 당신 어찌된 일이요?」
「아무것도 아니여. 금부처가 곧 나로구만」
金부처가 나와 둘이 아닌 경지에 들어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고향가는 수행의 결과이다.
(카) 이익을 말함(결론)
(27) 이다라니무진보(以陀羅尼無盡寶)
끝없이 쓰고쓰는 다라니 무진보로
(28) 장엄법계실보전(莊嚴法界實寶殿)
한바탕 불국토에 법왕궁을 꾸미고서
(29) 궁좌실제중도상(窮坐實際中道宋)
중도의 해탈좌에 앉으면 깨달으리
(30)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
예부터 그랬었네 부동이 부처였네
강론 (27) (28) (29) (30) 구절까지 합론
(27) 이 다라니가 무진보배가 된다.
(28) 실상의 불국토에 보배궁전 꾸미고서.
(29) 몸이 실제로 중도상에 앉았으니.
이는 유무양번(有無兩邊) 즉 세상만물이 무너지지 않고 영원히 존재한다는 고집과 세상만사는 아주 허무하다는 고집을 초월하고 마음가는 곳과 말길이 끊어진 경계에 머문다는 뜻이다.
(30) 옛적부터 부동하는 것은 부처님이라 하네.
마지막 이 네구절은 수행(修行)의 이익을 밝히는 부분이다. 그 이익이란 본래부터 우리들 자신속에 간직되어 있는 참다운 나를 되찾아 가자는 것이다. 그 참다운「나」란 의상조사가 되돌아가기를 염원했던 이름마저도 없는 참된 곧「진리의 고향」이며 원효성사가 말씀하는 한마음고향(一心之源)이다. 이것은 곧 법성(法性)의 그 자리며 부처님의 세계이다.
「진기(眞記)」에서는 실보전(實寶殿)과 중도상(中道床)을 다음과 같이 풀이 하였다.
「실보전」이라? 부처님 세계의 바다이다.
「궁좌실제중도상」이란? 일승(一乘)에 도달한다는 말이다.
마침내 도달한「진리의 고향」 그것은 결코 어느 먼 하늘에 있는 별다른 세계가 아니다. 거기는 내 본래의 자리일 뿐이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본래의 고향」으로 되돌아 간 것 뿐이다. 그래서「구래부동명위불」이라고 한 것이다.
진기(眞記)에는 이것을 비유하였다.
한사람이 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꿈속에 삼십여개의 정거장을 거쳐 돌아 다녔다. 그 꿈을 깨고보니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그냥 누워자고 있지 않는가.
이처럼 근본인 법성(法性)으로부터 30구절을 거쳐서 다시「법성(法性)」에 왔지만 결국은 부동한 그 자리일 뿐이다.
세존께서 다음같은 설법을 하셨다.
아버지와 집을 버리고 나간 어린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낯선 타향 외국을 흐르고 흘러서 이미 30년이 지나갔다. 세월은 덧없이 지나가고 나이는 40고개에 들어 섰지만 그의 생활은 궁할데로 궁해서 사방으로 분주히 돌아 다니며 일자리를 구해 가까스로 입에 풀칠을 해가고 있었다.
한편 외아들을 잃어버린 그의 아버지는 깊은 근심에 잠겨 사방으로 소년의 간곳을 찾아 보았지만 아무런 단서도 잡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 도시에 자리를 잡아 집을 짓고 혹시 자기 아들이 들어 올는지도 모른다는 가냘픈 희망을 품고 화화생활중에서도 늘 쓸쓸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의 재산은 몇백억 몇억조인지 수 많은 보배가 창고에 가득 차 있었고 많은 시봉하는 사람들게 떠받들리어 지냈다. 넓이 여러나라와 무역을 하여 그의 집은 손님과 상인들이 언제나 저자를 이루었고, 이익금도 막대했다. 그래서 항상 국왕에게 사랑을 받고 대신과 부호가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야말로 무엇 한가지 부족한 것이 없는 신세였다.
그러나 아무리 재산이 많고 세력이 있어도 간곳을 알 수 없는 아들을 생각하는 어버이의 마음은 세월이 감에따라 나날이 더해 갈 뿐이다.
이때 집을나간 그의 아들은 이나라 저나라, 이 도시 저 도시로 흘러 다녔다. 그의 발길은 이상스럽게도 고국으로 들어서서 고향땅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직 다하지 않은 부자의 인연 때문일까? 마침내 그는 자기 아버지인 장자의 집 문앞에 이르렀다.
그때 장자는 사좌상에 앉아 천하부귀를 자랑하고 있었다.
대문앞에 들어선 아들은 집이 크고 또 주인의 위엄이 있고 호사한 모양을 멀리서 바라보고는 이 사람은 나라의 왕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하고 갑자기 겁이났다.
「내가 왜 이런곳을 왔을까? 여기는 나같은 사람을 고용할 집이 아니다. 어름하고 있다가는 강제로 붙들어다 일을 시킬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한 그는 그 집을 급히 떠난다.
의좌에 앉아서 이 사나이를 바라보고 있던 장자는 어릴때의 모습을 생각해 보고 장성한 아들의 모습을 속으로 상상해 보다가 갑자기 이상한 충격을 받아 지금 대문밖에 서있는 저 사나이가 자기의 아들임을 깨달았다. 돌아서 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내재산을 상속받을 사람을 찾아냈다. 이제 내소원은 이루어 졌다하고 생각한 장자는 곧 옆사람에게 명하여 아들을 뒤찾게 했다. 명령받은 사람들이 달려가서 아들을 붙잡았다. 아들은 깜짝놀라「까닭없이 나를 붙잡는 것은 죽이려는 것임이 틀림없다. 나는 왜 이런꼴을 당해야만 한단 말인가?」생각하고「나는 아무것도 나쁜짓을 하지 않았는데 왜 잡습니까? 놓아 주십시요.」하고 울부짖다가 기절해서 쓰러졌다. 이 모양을 보고있던 아버지는 하인에게 일렀다.「이제 그 사나이를 빨리 정신을 차리게 하여라.」
장자는 자기 아들이 오랫동안 불우하게 지냈기 때문에 변한 모양을 보고 자기 아들임에는 틀림없지만 지금 내가 네 아버지다라고 일러주어야 믿지 않을 줄 알았기 때문에 하인을 시켜 깨어난 아들에게「너를 놓아 줄것이니 이 집에서 우리와 함께 쓰레기도 치우고, 변소도 청소하고, 마루도 닦는거요. 품삯은 다른이의 갑절을 받을 수 있고.」아들은 이말 듣고 그런 일이라면 자기에게 알맞다 생각하고 두사람을 따라가서 품삯을 미리받고 청소부로 고용되었다. 그는 날마다 온집안 청소를 했다. 그 아버지인 장자는 이렇게 변해버린 자기아들의 모습을 볼수록 측은했다. 장자는 일부러 때가 낀 옷으로 갈아입고 청소기를 들고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말을 붙였다.
「부지런히들 일하는군」하며 장자는 한걸음 그의 아들에게 접근하여 말했다.
「이봐 젊은이. 너는 여기서 일해라. 품삯도 더 줄테니…. 나는 네가 보는바와 같이 늙었지만 너는 아직 젊다. 나는 오늘부터 너를 자식처럼 대하겠다.」이리하여 장자는 곧 그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아들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로부터 장자는 아들에게 십년동안 집청소부를 시켰다. 십년이란 세월은 두사람의 마음을 융합시켜서 서로 아무런 거리낌이 없게 되었다.
「나는 이처럼 너를 믿고 있는 것이니 너도 내마음을 살펴서 모든일에 실수가 없도록 해다오.」
다시 얼마를 지난뒤 아들의 마음은 깨달은바 있어 장자는 곧 자기의 친아버지임을 알았다. 깨달은 줄을 아는 장자는 몹시 기뻐하면서 친척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여러분들, 내말을 들어주시오. 지금 여기 있는 이 사람은 내 피를 받은 외다을 아무게요. 나의 모든 재산은 죄다 이 아들에게 넘겨준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알려드린다. 모든 재산의 출납은 또한 이 아들의 자유라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라오.」
장자의 오랜 소원은 이루어져서 그 둘이 부자간임을 명백히 했다.
이 설화의 내용을 비례하여 보면「이다라니무진보(以陀羅尼無盡寶)」로써 법계를 장엄했듯 거부 장자가 중도상에 앉아보니 잃었던 핏줄이 부자상봉(夫子相逢)하고 가업(家業)을 전하였다. 본래불(本來佛)의 진면목(眞面目)이 여기에서 통하는 소식!
의상조사는「구래부동명위불」의 뜻을 요약해서 다음같이 풀이했다.
「가고가도 본자리에 있고, 오고와도 떠난 그 자리에 있다.(행행본처(行行本處)요 지지발처(至至發處)로다)」
지금까지 법성게(法性偈)를 중심하여 의상조사의 화엄사상을 대강 더듬어 보았다. 의상조사의「법계도」는 이백열자(210자)의 시문(詩文)을 4각(角)의 도장에 합친 하나의 인장(印章)에 불과하지만 이것이 상징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깊고도 묘하고 넓은 것이다.
[출처] 법성게(法性偈) 강론(講論) |작성자 관문
'화엄경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인삼매론 海印三昧論 (0) | 2021.01.17 |
---|---|
화엄사상 [ 華嚴思想 ] (0) | 2021.01.03 |
화엄경 요약 (0) | 2020.10.11 |
화엄경(華嚴經) – 겨자씨 속의 우주 (0) | 2020.10.01 |
화엄경의 수행_20180624, 해주스님, 상도선원 (0) | 2020.09.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