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락인과(不落因果) 불매인과(不昧因果)의 이야기는 그 유명한 백장선사(百丈禪師)의 야호선(野狐禪)의 배경인데, 백장선사 어록에
선사께서 매일 상당하여 설법하는데 늘 한 노인이 법을 듣고는 대중들을 따라 돌아갔다.
하루는 가지 않고 있어 선사께서 물었다.
“거기 서 있는 자는 누구인가?”
“저는 과거 가섭불(迦葉佛) 때에 이산에 살았었는데
한 학인(學人)이 묻기를 ‘많이 수행한 사람도 인과(因果)에 떨어집니까? 떨어지지 않습니까?’하여
제가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대답하여 여우의 몸에 들어가 있습니다.
오늘 화상께 청하오니 한마디로 깨닫게 해주십시오.”
선사가 말했다.
“그대가 물어보시오.”
노인이 곧 묻기를
“크게 수행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떨어지지 않습니까?”
하니 선사께서 말했다.
“인과에 어둡지 않습니다.”
노인은 말끝에 크게 깨닫고 선사께 감사의 말을 하고는
“저는 이제 여우의 몸을 면하여 산 뒤에 있으니 죽은 중을 화장하여 보내주시기 빕니다.”
선사는 유나(維那 : 절의 사무를 맡은 자)의 우두머리에게 명하여 대중들에게 제사를 지낸 후 함께 죽은 스님의 장사를 지내겠다고 알리게 하였는데 대중들은 자세한 내막을 몰랐다.
선사는 대중들을 이끌고 산 뒤의 바위아래에 도착하여 지팡이를 휘저어 한 마리 죽은 여우를 꺼내고는 의전의 예(典禮)를 지켜(依法) 화장을 하였다.
師每日上堂 常有一老人聽法 隨衆散去 一日不去 師乃問 立者何人 老人云 某甲於過去迦葉佛時 曾住此山 有學人問 大修行底人 還落因果也無 對云 不落因果 墮在野狐身 今請和尙代一轉語 師云 汝但問 老人便問 大修行底人 還落因果也無 師云 不昧因果 老人於言下大悟 告辭師云 某甲巳免野狐身 住在山後 乞依亡僧燒送 師令維那白槌告衆 齋後普請送亡僧 大衆不能詳 師領衆至山後巖下 以杖桃出一死狐 乃依法火葬
라고 기록되어 있다.
불락인과(不落因果)는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고, 불매인과(不昧因果)는 인과에 어둡지 않다는 말이다.
백장선사는 불매인과라는 말 한마디로 그 노인의 여우 몸을 벗게 하였다.
사실 불매인과의 뜻을 분명하게 알면 누구나 여우의 몸을 벗는다. 왜냐하면 이 법을 깨닫지 못하면 누구나 여우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역사책인 전국책(戰國策)에 나오는 이야기 호가호위(狐假虎威)는 산중의 여우가 호랑이에게 자신의 위엄을 보여주겠다면서 자신의 뒤를 따라오게 하여 다른 동물이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호랑이를 보고 도망가는 것을 마치 자신을 보고 도망가는 것처럼 호랑이를 속이는, 호랑이의 모양을 빌려 마치 자신에게 위엄이 있는 것처럼 속이는, 약은 여우의 이야기다
일체가 모두 이 한 법이 하여, 우리의 삶과 말과 생각과 행동도 모두 이 한 법이 하는데 생각은 마치 자신이 생각을 하고 있다고 착각을 한다.
이것이 호가호위(狐假虎威)다.
즉,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어 자신의 위엄인 것처럼 하는 것처럼,
일체 만법이 모두 한 법이어서 생각도 이 한 법에 의해 인연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데, 생각은 마치 자신이 생각을 하고 있다고 위세를 떠는 것과 같다.
그래서 생각은 세상의 실상을 알지도 못하면서 약간의 들은 말들을 섞어 세상의 일어나는 일과 사람들의 물음에 상대적으로 해석하여 말을 하거나 대답을 한다.
그 노인이 법을 알지도 못하면서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 말도 역시 생각으로 헤아려서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인이 여우의 몸을 받았다는 말은 의미 있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전생이 있고 윤회가 있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이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본뜻은 저 멀리 던져버리고 삿된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여우는 비유이고, 이 이야기는 내가 볼 때에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백장선사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펼친 한바탕 야단법석(惹壇法席)일 뿐이다.
불락인과(不落因果) 불매인과(不昧因果)의 선문답(禪問答)은 이 법을 공부할 때는 생각으로 헤아리지 말라는 말과 상통한다. 간화선(看話禪)에서 화두를 주는 이유도 역시 쓸데없는 생각이 끊어지게 하는 것이다.
아무 생각이나 다 끊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비하고 분별하는, 즉 이것저것을 헤아려서 비교하는 생각이 끊어지게 하는 것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은 일체가 한 법이기 때문에 비교할 것이 없다.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오직 그 존재의 인연으로 생겨서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비교할 대상이 없다.
비교는 똑같은 것을 가지고 같은 시간, 같은 환경에서 서로 다른 일을 시켜 비교해야 정확한 비교다.
내가 택시를 할 때, 내가 사는 대구는 길이 바둑판과도 같아서 어디서 어디로 가든 가는 경로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택시를 타면 거의 대부분,
“빠른 길로 가주세요.”
라고 한다. 이 말은 빠른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대의 교통상황에 따라 빨리 가달라는 말이다.
그러면 나는 그 뜻을 알아들으면서도 가끔 분위기에 따라 농담처럼 말한다.
“손님 어떤 길이 빠른가를 알려면요, 똑같은 차를 똑같은 운전자가 똑같은 교통상황을 가진 두 개 이상의 경로를 똑같은 마음으로 달려봐야 정확하게 어떤 길이 빠른 길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손님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알아듣고 함께 웃는다.
비교란 그렇게 해야 비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우주에는 그렇게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니 어떻게 비교해서 좋다 나쁘다 할 수 있는가?
그런데도 우리의 어리석은 생각은 자신 기억의 잔상(殘像)을 일으켜 기억 속의 비슷한 것과 비교하여 미리 판단한다. 그리고 그 판단이라도 수학적으로 냉정하게 비교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인 좁은 소견으로 그때그때의 기분으로 판단한다. 그러니 그것이 어찌 올바른 비교며 판단이겠는가?
그처럼 생각은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제대로 보려고 하지 않고, 생각이 만든 분류속의 대상으로 묶어 버린다.
그리고는 비슷하게 보이는 것을 같은 무리라고 착각하고는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등등으로 비교하고 시비한다.
그렇게 생각은 자신의 생각에 좋은 것이 오면 좋아하고 맘에 들지 않은 것이 오면 내치려 하지만 세상은 우리의 생각대로 인연이 오지 않기 때문에, 좋은 것이 오면 별 일이 없지만 맘에 들지 않는 것이 올 때 내치고 싶어도 내 맘대로 안 되니 괴로움과 번뇌 속에 빠진다.
그리고는 그 괴로움의 원인이 자신이 비교하고 시비하여 생긴 줄 모르고 대상에게 있다고 적반하장으로 대하며 원망한다.
하지만 실상은 이 모든 것이 다 이 한 법이 하고 있다.
생각이 번뇌를 일으키는 작용도 법이 하고 있고, 그렇게 대상이 인연되어 오는 것도 법이 하고 있다.
즉, 대상이 수많은 인연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 순간 우리에게 인연이 되는 것도 법이요, 우리의 생각이 그렇게 형성된 것도, 또 그 순간 우리 속에 있는 수많은 감정곡선에서 하필 그런 감정을 가지는 것도 다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이 모든 것이 법이 하고 있는데, 실상을 알지 못하는 생각은 마치 자신이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는 세상을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다는 망상을 부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호가호위(狐假虎威)다. 물론 여우는 고의성이 있고 생각은 무지로 인해 여우 짓을 하는 것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세상은 고의성이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더 나쁘게 처벌하지만, 불법(佛法)에서는 고의성이 있는 것보다 모르고 짓는 죄를 더 나쁘게 생각하여, ‘모르고 짓는 죄가 가장 크다.’고 한다.
이유는 고의성이 있다는 것은 어쨌든 자신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은 정상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그러면 생각을 돌이킬 수 있고 실상을 말하면 부끄러워 물러서거나 벌을 받는다.
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잘하고 있다고 믿고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남이 뭐라하면 도리어 욕하거나 원망하고 또 벌을 주면 당치 않다고 하며 반항을 한다.
이러한 생각은 자신의 행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더 나쁜 짓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세상에 가장 나쁜 생각이 극(極)이다. 즉 극좌(極左) 극우(極右)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극단적 생각이다. 이런 생각을 가진 자들은 자신이 행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올바르고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을 한다. 남들의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이 지은 자신만의 옳고 그름만 있고 그 속에는 사람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공동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범죄를 저지르거나 세상과 자신을 망쳐놓는 것이다.
이것이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의 폐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모르고 짓는 죄가 가장 크다,’고 하는 것이다.
특히 이 법은 일체가 한 법이어서 나눌 수도 없고 나누어서는 절대로 법을 깨달을 수도 번뇌에서 벗어날 수도 없는데, 극으로 나누면서도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니 얼마나 끔찍한 일이겠는가?
죄의 경중을 떠나 불이법(不二法)을 깨닫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다 상대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가 옳은 사고라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비교하고 분별하고 시비한다.
그리고 세상에서 똑똑하다고 여겨지는 자들은 모두가 세상을 잘 분별하여 옳고 그름을 잘 따지는 자이다.
법에서 볼 때에는 똑똑할수록 극단적인 자이다. 이런 자들과 아는 것이 많은 사람들은 깨닫기가 참으로 힘들다.
오십보백보라는 말이 있다.
내가 아는 동생이 있는데 이 녀석이 어느 날 말하기를
“도박이나 욕정에 집착하는 사람이나, 학문이나 사상에 집착하는 사람이나 똑같다.”
라고 했다.
참 옳은 말이다.
세상에는 가치의 경중(輕重)이 있어 도박이나 욕정은 세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 나쁘게 보고, 학문이나 인문학적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법으로 볼 때에는 둘 다 똑같은 자들이다. 왜냐하면 한쪽을 취하고 한 쪽을 버리고 게다가 집착까지 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생의 말이 그런 뜻이다.
법을 공부하는 사람은 이 말을 잘 살펴서 자신이 어디에 빠져 있는지 잘 알아야 할 것이다.
이 법을 깨닫지 못한 생각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자신이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도 모른다. 즉 호가호위하면서도 자신이 호가호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의 몸을 가지고 살지만 여우의 생각으로 사는 것이다.
그 노인도 그런 이유로 여우의 몸을 받았다.
물론 이 비유는 순전히 나의 생각으로 추측한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비유를 하는가 하면, 불락인과와 불매인과의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생각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깨달은 사람이나 깨닫지 않은 사람이나 인과에 떨어지지만 큰 수행을 한 사람, 즉 깨달은 사람은 인과에 어둡지 않아서 인과를 비켜갈 수는 없어도 인과에 걸리지 않는 것은 안다.
법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법은 이 우주를 만들고 움직이게 하지만, 우주의 어떤 일이나 물건도 간섭하지 않고 어떤 것에도 걸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들의 인연으로 오가게 하여 어떤 것도 잡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 우주의 어떤 것도 순간에만 존재할 뿐 찰나도 머물지 않는다.
그래서 법이 무주(無住)요 무상(無相)이요 무념(無念)이다.
무주(無住)는 머물지 않음이니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고, 무상(無相) 역시 무주를 알면 함께 알아진다.
그런데 무념(無念)에 대해선 사람들이 생각이 없다는 말 그대로만 알지 그 말이 생긴 이유와 뜻은 잘 모른다.
무념(無念)은 사전적인 의미로는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념이라는 말이 생긴 것은 생물학적인 이유로 생긴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고통스러운 삶에서 진리로 나아가 자유를 얻으려는 과정의 여러 가지 방법에서 생긴 것이어서, 단순이 생물학적으로 생각이 없다는 것으로 이해를 하면 무념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무념은 깨닫지 못한 보통 사람이 말한 것이 아니다. 깨닫고 보니 무념만큼 인간이 법의 상태를 알 수 있고, 또 법 자체가 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다.
앞에서
‘법은 이 우주를 만들고 움직이게 하지만, 우주의 어떤 일이나 물건도 간섭하지 않고 어떤 것에도 걸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들의 인연으로 오가게 하여 어떤 것도 잡지도 않는다. 그래서 이 우주의 어떤 것도 순간에만 존재할 뿐 찰나도 머물지 않는다. ’
라고 했다.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자신의 생각을 이것과 똑같이 해보라.
법이 만든 것이 이 우주이니 우주의 일이나 물건이 대상이 될 수 있다.(가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을 생각으로 옮겨 오면 생각이 만든 것은 역시 생각이니 생각의 내용이 대상이다.
법이 온갖 것을 만들어내지만 그 만든 것을 조금도 간섭하지 않고 또 어떤 것도 잡지 않고 저들의 인연으로 오가게 하여 어떤 것에도 걸리지 않는다. 그래서 우주의 어떤 것도 순간에만 존재할 뿐 찰나도 머물지 않는다.
그러면 이것을 생각에 대입하면
‘생각은 온갖 생각을 만들어내지만 그 생각들을 조금도 간섭하지 않고 또 어떤 생각도 잡지 않고 생각끼리의 인연으로 오가게 하여 어떤 것에도 걸리지 않는다. 그러면 어떤 생각이든 역시 순간에만 머릿속에 있을 뿐 찰나도 머물지 않고 사라진다.’
가 된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하다.
세간에서 말하는 삐뚤어진 청정한 생각이라는 것에 걸려서 생각을 어떻게 하려고 하지마라. 생각이 인연으로 일어났다면 놔두면 인연으로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러면 생각을 어떻게 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생각을 시비하지 않는 것, 이것이 무념(無念)이다.
무념은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떤 생각이 일어나도 그것들을 조금도 간섭하지 않고 또 어떤 생각도 잡아서 옳으니 그르니 하지 않고 그냥 두어 인연대로 사라지도록 한다. 그러면 어떤 생각이 일어나도 그것에 걸리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이 공적(空寂)해지고 늘 여여(如如)한 것이 무념(無念)이다.
그리고 불교에서 말하는 청정이란 더러움의 상대적인 의미인 깨끗함을 칭하는 것이 아니다.
청정은 더러움에도 물들지 않지만, 깨끗함에도 물들지 않고, 또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음에도 물들지 않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법과 다른 것이 없다. 일체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청정이다. 대상을 건드리지 않으면 물들지 않고, 대상 역시 건드리지 않으면 그것의 인연으로 흘러간다.
그것이 청정이다. 그래서 진정한 청정한 생각은 어떤 생각도 시비하지 않는 무념을 말한다.
이것이 인과에 어둡지 않은 불매인과(不昧因果)이다.
불락인과는 세상이 존재하는 것은 모두 인과(因果)의 산물이기 때문에 인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실제로 그렇다. 부처님도 배가 고프고 밥을 먹고, 좀 지나면 변소를 가야하고, 또 어디를 가려면 자신의 다리로 걸어가야 하고 누가 물으면 그 인연으로 대답을 한다. 이것이 인과다.
인과는 이 우주에 존재하는 한 어떤 존재도 비켜갈 수가 없다.
다만 인과의 조건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조건이 생기게 하는 보이지 않는 인연의 조건, 또 그 조건을 이루는 인연까지, 우리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것과, 또 그런 인과가 단순히 인과로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인과를 만들어내면서 변해간다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단순하게 아는 인과와 다르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나쁜 짓하면 벌 받는다.’라는 식의 인과는 세상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다. 왜냐하면 나쁜 놈이 더 잘 먹고 잘 산다는 말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면서 세상 막 되먹었다고 하는 이유는 인과의 조건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고 단순하게 ‘나쁜 짓하면 벌 받는다.’의 공식만 외우고는 세상을 욕하고 있기 때문이지만
진짜 인과는 앞에서 말한
‘인과의 조건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조건이 생기게 하는 보이지 않는 인연의 조건, 또 그 조건을 이루는 인연까지, 우리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것과, 또 그런 인과가 단순히 인과로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인과를 만들어내면서 변해간다는 것이 우리가 단순하게 아는 인과와 다르다.’
는 것처럼 그렇게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막 되먹은 것이다.
이것이 인과에 어두운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인연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며 그 인연이 우리가 도저히 알 수 없는 수많은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실상을 알게 되면 우리의 좁은 소견으로 세상을 절대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면 이 사람에게는 이 법이 티끌만큼도 어김없이 연기법으로 돌아가며 세상이 그런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것이 인과에 어둡지 않은 것이다.
사실 인과에 어둡지 않은, 즉 인과에 밝은 것은 큰 이치를 아는 것도 또 큰 지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이 원래 연기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과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세상의 인과가 단순하게 인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다시 인과를 일으키는 인이 되고, 또, 인과를 이루는 원인과 조건들이 우리가 알 수 있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그날의 기분이나 날씨, 그리고 나와 인연된 것들과의 관계, 그 날에 일어났던 세상의 일들 등 수많은 것들이 그 순간의 인연에 작용하기 때문에 단순하게 나쁜 짓했으니 벌 받아야 한다는 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쁜 짓도 사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르다.
그래서 그냥 자신이 바라보는 가치만 가지고 세상이 인과가 있다는데 왜 인과대로 되지 않을까? 하며 욕만 하지 말고 똑 같은 일을 사람마다 다르게 보고, 또 날 마다 세상분위기에 따라 달라지는 복잡한 것에 대해 '아! 같은 일도 사람마다 때마다 나라마다 저렇게 달라지는 것이 세상이구나.' 하며 내 고집을 버리고 세상 이치를 잘 살펴보면, 금방 답이 나올 수 있다.
간단한 예로 다른 사람이 내 뺨을 때려도 이쁜 놈이 있고 화가 나는 놈이 있다.
자신의 갓 난 아이가 뺨을 때리면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대견하여 이쁘다.
그런데 그 아이를 낳아준 마누라가 때리면 화가 난다.
하지만, 아이가 뺨을 때리든 마누라가 뺨을 때리든 따지면 다 이유가 있다.
그리고 내가 아이와 마누라를 바라보는 마음도 다 다르다.
마누라는 좋을 때도 있지만 바가지를 긁으면 밉다. 그런데 아이는 마냥 귀엽고 예쁘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순전히 내가 좋다 나쁘다의 조건을 붙인 것인데, 사람들은 저쪽이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렇다고 생각을 한다.
이런 생각들이 바로 인연의 조건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이 사람마다 다 다르니, 세상이 어찌 내가 생각하는 인과대로 되겠는가?
이처럼 하나의 일이라도 조건에 따라 결과가 여러가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에 일어나는 일을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렇게 조밀하게 살펴보면, 살인을 하는 사람도 그렇게밖에 될 수 없는 상황을 알 수가 있다. 물론 살인과 세간에서 말하는 악을 정당화하자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피다가 문득 모든 것이 인연으로 일어나고 변하고 사라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아가 가장 근본적인 원인인, 일체의 인연이 모두 이 한 법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일체의 시비와 분별이 사라진다.
그것이 인과에 어둡지 않은 것이다.
인과에 어둡지 않으면 무념(無念)이 된다. 즉 시비가 사라지고 내가 바라는대로만 세상이 되길 바라는 망념(妄念)이 사라진다. 그것이 곧 무념(無念)이다.
이치를 알고 나니 일체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념은 앞에서 말했듯이
‘어떤 생각이 일어나도 그것들을 조금도 간섭하지 않고 또 어떤 생각도 잡아서 옳으니 그르니 하지 않고 그냥 두어 그들의 인연 따라 사라지도록 하는’
것이다.
일체가 인연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이 때때로 정말로 맘에 들지 않은 것들이 올라온다.하지만, 그것은 내가 하는 것도 생각이 하는 것도 아니다. 모두가 다 법이 하고 인연이 한다. 인연은 법의 작용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이 올라온다. 그러나 그 반대로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듯이 사라지는 것도 우리가 할 것이 없다. 그냥 두면 된다.
그러면 마음은 어떤 생각이 올라와도 인연으로 온 것처럼 인연으로 사라질 줄 알게 되고, 그러면 그것을 건드리지 않게 되고, 그러면 어떤 생각에도 걸리지 않게 된다.
그것이 바로 온갖 생각을 하지만 어떤 생각에도 걸리지 않아 마음이 공적(空寂)하여 여여(如如)한 것이다.
그처럼 세상의 일도 역시 법이 하므로 그냥 법에 맡겨 인연 따라 살면 몸은 비록 인과에 떨어지지만 마음은 인과에 걸리지 않는다.
이것이 인과에 어둡지 않은 불매인과(不昧因果)이다.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고 또 자신의 생각을 바라보는 것이 무념이고, 무념은 법과 성품과 똑같은 것이니 무념을 이룬 자는 다시 무엇을 할 필요가 없다.
무념(無念)은 무심(無心)이니 이런 자를 무심도인이라 하고 황벽(黃檗)스님은 전심법요(傳心法要)에서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을 드린다 하더라도 한 사람의 무심도인에게 공양함만 같지 못하다. 무슨 까닭인가? 무심도인은 일체의 마음이 없는 까닭이다.
供養十方諸佛이라도 不如供養一個無心道人이니 何故인가 無心者無一切心也니라”
라고 하였다.
무심도인이 바로 불매인과를 아는 자이고, 여우의 몸을 벗은 자다.
[출처] 불락인과(不落因果) 불매인과(不昧因果)|작성자 monk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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