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

동산대종사의 한국불교사적 위상

수선님 2021. 1. 3. 12:28

동산대종사의 한국불교사적 위상

 

 

 

김 선 근

동국대 인도철학과 명예교수

 

 

<국문초록>

 

동산대종사(1890-1965)의 발자취는 한국 근·현대 불교사의 역사이다. 동산대종사는 당대(1929-1965)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큰스님으로서 한국불교의 이상, 한국불교의 고민, 한국불교의 비극, 한국불교의 위대성이 스님의 사상과 생활 속에 구현되어 있다. 동산대종사는 삼학(三學) 균수를 통해서 그 시대의 문제를 회통(會通)하면서 1700여년의 한국불교 전통의 법등(法燈)을 지켜 새로운 정법 불교의 좌표를 정립한 마조(馬祖, 709-788)대사와 같은 선지식이었다.

동산대종사는 은사 용성스님의 삼취정계와 보살 48계의 정신으로 청정승가와 정법수호라는 정화불사의 선봉장이었다.

동산대종사는 은사 용성스님이 1940년 4월 1일 입적 후 1941년 하안거부터 1965년 3월 23일 입적하기 까지 범어사 조실로 간화선풍을 진작시킨 간화선법(看話禪法)의 제창자(提唱者)로 스님의 가풍을 펼쳤다. 스님의 가풍은 수행자가 궁극적으로 간화(看話)하는 것은 ‘의심, 의단(疑團)’이라는 방법적 자각을 통해서 자기 존재의 불성을 환기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동산대종사는 그의 주석처요, 정화의 산실인 범어사를 중심으로 불교계 전체의 문제, 고민, 나아갈 길에 위법망구의 정신으로 교단을 스님의 피와 살로 느끼면서 보살행을 실천한 선각자였다. 동산대종사는 현재의 범어사로, 현재의 부산불교로 그리고 현재의 조계종단으로 반석위에 놓으신 불세출의 명안종사였다. 스님의 이런 덕화의 가풍이 현재 범어사, 해인사, 쌍계사 등에서 계승되고 있다. 스님의 가풍은 임제선풍을 진작시켰던 선맥의 대종장(大宗匠)으로 증명되고도 남음이 있다.

이런 동산대종사의 유업을 후학들은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동산대종사의 문인(門人) 능가(1923-)스님의 제안이 참고가 된다. “한국불교의 기본 방향의 대의는 안정수도, 위계질서 확립, 재정 합리화 운영, 현대적 포교, 도제양성, 복지사업 등으로 요약할 수 있으나 이것을 위해서는 선행해야 할 일이 역시 제2정화불교운동의 극명한 수행에 의해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하겠다. 이 대업의 약점을 요약한다면 먼저 불교인의 역사의식과 시대사명의 확고한 자각과 인식이다. …… 장기적이고 단기적인 복합성 있는 강력한 현대적 도제양성 사업의 즉시 수행이다.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교육이 아니라 역사의식과 시대 소명에 즉응할 수 있는 도제양성이 결단코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만이 한국불교의 미래를 약속하는 관건이 될 것이다.”

간디가 인도인의 자존심인 것처럼 동산대종사는 한국 근·현대 불교사에서 한국 불교인의 자존심이다.

 

주제어: 동산대종사, 삼학균수, 정화운동의 선봉장, 간화선법의 제창자, 금정산문의 종장

 

 

 

I. 들어가는 말

 

필자는 ‘마음의 자유와 평화’를 찾기 위하여 1965년도 동국대에 입학한 후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구도부에 가입하여 서울 봉은사의 대학생수도원에 1965년 9월 12일 입사하여 1969년 2월까지 수도생활을 하였다. 그 기간 동안 필자는 당대의 선지식인 청담(1902-1971), 성철(1912-1993), 탄허(1913-1983), 능가(1923- ), 행원(1927-2004), 광덕(1927-1999), 법정(1932-2010)스님으로부터 자성불(自性佛)을 믿고, 부처님의 눈(佛眼)으로 세상을 보면서 매순간 부처님의 행(佛行)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필자는 대학생 수도원의 입사생들(박성배 교수, 전창렬, 김금태, 이진두, 김기중, 황귀철, 이철교 등)과 함께 김용사에서 성철스님의 지도로 1966년 1월 8일부터 2월 20일까지 50일간, 우리는 조석(朝夕)으로 화두 공안을 참구하면서 중도법문을 들었다.

 

『반야심경』으로 시작하여 『금강경』, 『육조단경』, 『신심명』, 『증도가』, 『돈오입도요문』 등을 배우면서 3천배 예참을 통해 증득한 환희심으로 무명 훈습을 소멸하는 수행을 하였다. 개인적으로 성철스님께 ‘자유와 평화의 길(mārga)’을 물었을 때, 스님의 교시(敎示)는 수행자의 5계를 지키면서 매일 108예참과 『금강경』 수지 독송, 그리고 참선을 하라고 당부하셨다.

 

또 스님께서는 수행자는 항상 자신의 부처를 실현하기 위하여 찰라찰라 새로워져야 한다면서, 삶의 목표를 예불대참회문에 나오는 것과 같이 “제가 이제 발심하여 예배하옴은 제 스스로 복 얻거나 천상나거나 성문·연각 보살지위 구함 아니오. 오직 오직 최상승을 의지하옵고 아뇩다라삼보리심 냄이오이다. 원하옵노니 사방세계 모든 중생이 모두 함께 무상보리 얻어지이다.” 라는 원(願, praṇidhāna)으로 염염상속하는 자세로 수행을 하라고 교시하였다. 이런 스님의 자비스런 가르침의 법은(法恩)으로 필자는 수업수생(隨業受生)의 삶에서 수의왕생(隨意往生)의 삶을 사는 인생관을 확립할 수 있었다. 이런 인생관을 가지도록 가르치고 깨우쳐주신 스님에 대한 고마움을 요즈음도 마음 속 깊이 새기면서 살고 있다.

 

김성철 교수는 「간디와 성철」을 읽고 논평문에서 “성철스님이 열반(1993)에 들고 얼마 지난 후, 국내 모 기관에서 ‘해방 이후 우리사회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누구인지’를 묻는 여론 조사를 했다. 그런데 그 결과 성철스님이 1위를 했다. 근·현대 스님들 가운데, 성철스님만큼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 없을 것이다. 그의 몸은 철저히 은둔한 듯 보였어도, 그의 삶과 가르침은 어느 누구보다 우리 사회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역설적 삶이다. 성철스님, 철저하게 은둔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역설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고 평했다. 성철스님은 계정혜(戒定慧) 삼학을 닦아 자신을 청정한 복전(福田)으로 만들고 자신이 체득한 조망을 중생들에게 회향한 출가자의 전범을 보인 현대의 선지식이었다. 성철스님이 현대의 조계가풍(曹溪家風)을 세우는데(1945-1993) 주도적 역할을 한 명안종사(明眼宗師)로서 할 수 있었던 것은 은사인 동산혜일(東山慧日, 1890-1965) 대종사의 견인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논거는 성철스님의 구전을 통해서 아래와 같이 알 수 있다.

 

나는 중이 되려고 절에 온 것이 아니다. 진리를 찾아 헤매다 불교에서 그 진리를 찾았고 불교의 참선 공부를 더 잘하고, 더 넓고 더 깊게 하려고 절에 왔다. 불교의 참선 공부를 더 잘하려면 머리를 길러서는 아니 되고 중이 되어야 한다는 동산스님의 권유를 받고 성철이라는 중이 되었다.

 

위의 사실은 스님의 세수 25세(1936년 3월 3일)에 해인사 백련암에서 동산스님으로부터 수계 득도하였다는 것이다. 그 당시 동산 대종사는 세수 47세이고 해인사의 조실이었다. 그해 11월 18일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동산대종사는 1919년 조선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조선 독립을 선언한 용성진종(龍城震鐘, 1864-1940)스님으로부터 전계증(傳戒證)과 정법안장(正法眼藏), 정전(正傳)과 율맥(律脈)의 신표(信標)로 보인(寶印)을 받았다.

 

성철스님은 「동산 대종사 사리탑비」에서 은사의 행화(行化)를 아래와 같이 천양(闡揚)하였다.

아아! 스님의 금옥 같은 아름다운 모습과 철석같은 마음으로 무궁화 꽃이 만발한 옛 동산을 교화하신 40성상(星霜)은 부지런히 종승(宗乘)을 천양하고 정법을 붙들어 세우는 것을 자신의 소임이라 여기시어 험악한 산길을 시원하게 개척하고 수많은 폐단을 확연히 소탕하여 조사의 등불을 창해(滄海)의 깊은 곳에 안치하고 교단을 태산의 견고한 데 두었으니 큰 원력을 타고 온 사람이라고 누가 이르지 않겠는가.

부산 범어사 조실(1941-1965)로 오랫동안 머문 동산스님은 종정을 세 차례 역임할 정도로 현대 한국불교사의 가장 대표적인 고승 가운데 한 분이다. 스님은 경성 총독부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1913년 선찰대본산 범어사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용성(龍城, 1864-1940)스님을 은사로 성월화상(惺月和尙)을 계사(戒師)로 하여 득도하였다. 스님은 1950년대 종단의 종정으로서 왜색불교를 척결하기 위한 정화운동에 앞장섰다. 1962년 통합종단이 들어서자, 종정을 사임하고 범어사로 내려가 제자들의 교육에 전념하다가 1965년 세수 76세, 법납 53세로 원적에 들었다.

 

동산대종사는 환성지안(喚惺志安, 1664-1729)으로부터 용성에서 동산으로 성철로 이어지는 한국 불교계의 큰 선맥(禪脈)을 잇게 된다. 그래서 본 연구에서는 동산대종사의 한국 근·현대불교사에서 위상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으며 또 그 내용이 무엇인가를 규명함을 목적으로 한다. 본 연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학구적 작업이 필요하다.

 

첫째, 동산 대종사의 생존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사상적 배경을 밝히는 작업, 둘째, 동산대종사의 문집의 내용을 분석 연구하는 작업, 셋째, 동산대종사와 관련된 주변 인물들의 기록을 연구하는 것 등이다. 구체적인 연구방법은 대승경전(大乘經典)과 선전(禪典)들을 통해 각장과 항목들의 주제가 요구하는 사상의 내용들을 추려내고, 다시 이것을 논한 학자들의 저술과 논문을 통해 분석, 비판, 종합하여 필자의 해석과 이론을 정립해 나아가고자 한다.

 

 

II. 동산대종사의 삼학(三學) 균수 형성

1. 시대적 배경

 

동산혜일(東山慧日) 대종사(1890-1965)는 서기 1890(庚寅)년 2월 25일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 상방리 244번지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하성창(河聖昌)이고 모친은 정경운(鄭敬雲)이다. 본관은 진주이며, 본명은 동규(東奎)였다. 스님의 태어난 해는 일본의 일연종(日蓮宗)이 지금의 서울에 별원(別院)을 세워 한국불교를 일본불교화 하려는 해였다.

 

동산대종사가 살았던 시기의 한국불교계는 그야말로 격동기이자 파란만장기였다. 교단 외부로는 일본 식민지와 해방공간, 좌우 대립과 6·25, 4·19와 5·16, 경제개발 등이 이어졌다. 교단 내부로는 조선불교 선종 수좌대회(1935. 3.7-8), 가야총림 결성(1946-1951), 백양사의 고불총림 결성(1947-1950)과 봉암사 결사(1947-1950) 및 정화와 분규(1955-1962), 통합종단의 출범(1962), 교단의 정비 등으로 혼란스러웠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근대라 함은 조선조의 고종(高宗)시대(1864-1906)로부터 일제강점시대(1910-1945)까지를 말한다. 본고에서는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동산대종사의 삼학(三學) 균수 형성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의 불교사는 전래(傳來)로부터 신라말(新羅末)에 이르기까지 ‘삼승귀일(三乘歸一)의 일불승(一佛乘)의 가르침을 신봉해 왔기 때문에 무종무파(無宗無派)의 한 교단을 존속시켜 왔었다. 고려의 불교가 복국우세(福國祐世) 소재초경(消災招慶)의 기양불사(祈禳佛事) 전담하는 국가 예속의 기관으로 전락해 갔다고는 하지만 처음에 사대적(事大的) 중국(宋)의 종파경향 불교를 도입하면서도 신라의 일승 통불교적(一乘通佛敎的) 특성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중국 그대로의 종파개념을 쓰지 않고 전문수업적 용어인 업(業:華嚴業․瑜伽業․律業 등)을 썼던 것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조선왕조 막바지에 승려의 도성 출입금지가 풀리어(1895년; 고종 32년) 도시와 일반 민간에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불교계가 가장 먼저 한 일이 홍법의 도량을 마련한 일이었다. 전국 수사찰(首寺刹)격인 원흥사를 세워(1899) 중앙통제적인 기구를 구성하여 홍법교화(弘法敎化)라는 대승불교 본연의 이타행 실천을 실현해야 하는 당면과제에 놓여 있었다.

 

모처럼 단일 종단이 자주성을 잃고 비틀거릴 때 뜻있고 눈 밝은 일부 스님들이 들고 일어나 새로 임제종을 남쪽에 세웠으나, 이미 나라를 빼앗긴 망국민이라 일제의 사찰령에 묶여 두 종단 모두 해체되었다. 또 본사(말사 중에서도 재산이 많은 절)의 주지들은 대지주처럼 부유로웠고 고관들처럼 권력도 따랐으며 개중에는 처첩을 거느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일제 말기에는 대부분의 일반 스님들까지도 속성명에 장가를 들었으나 절에서 목탁을 치고 가사 장삼을 입었을 때만 스님이지 일상생활은 속인과 다름이 없었다. 이런 승려 속화(俗化) 현상은 급변하는 사회현상과 자유주의적 풍조의 영향이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즈음에서 정화가 시급한 곳은 사찰이요 반드시 숙청이 되어야 할 대상은 승려들이라고 하겠다.

 

우리 조상들은 처음부터 사찰을 ‘수복멸죄(修福滅罪)하고 숭신불법(崇信佛法)하는 청정한 도량’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전법도생(傳法度生) 수선흥법(修禪興法)하는 삼보상주(三寶常住)의 청정 적정(寂靜)의 불찰(佛刹)이 부처님 팔아먹는 가게(商店)가 되고 명리(名利)의 도적이 머무는 소굴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업장이 두터운 중생계라 눈밝은 선각 선지식이 반드시 정화의 횃불을 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백용성 스님은 한국전통불교의 교단을 회생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총독부에 건백서를 1926년 5월에 제출하였다. 그 건백서(建白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我佛世尊이 出世이래로 佛子大衆이 各各法輪을 轉하야 三千年이 近하도록 比丘의 帶妻食肉의 說을 不聞하엿더니 近者無恥魔屬의 輩가 心을 五欲에 染하고 佛의 正法을 滅하야 敢히 帶妻食肉을 行하며 淸淨한 寺院을 魔窟로 化하야 參禪 念佛 看經 等을 全廢하니 諸天이 泣淚하고 土地神祗가 皆發怒캐하는도다. 世尊이 信敎者를 四部로 分하되 期中 出家의 比丘와 比丘尼의 二部衆은 法海中의 一區分 宗派를 成함으로써 帶妻食肉을 嚴禁하야 專히 道業에 勤務하야 諸佛敎法을 掌理케하고 天下後世에 傳授함으로써 等等相續케 하며, 又 無常世間이 種種虛幻됨으로써 樂할 것이 無함을 看破하고 但只 見性成佛로 宗을 삼게하며 …

 

 

위의 내용은 최근 승려의 대처식육의 심각성을 일깨우고 있다. 출가자들의 엄격한 계율의 수지는 대단히 중요한 덕목인데도 불구하고 대처식육을 감행하는 무리들이 사원의 주지를 하고 있으니 그 폐해가 심각하므로 이러한 일이 없도록 조치해줄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총독부는 1926년 10월경에 대처 주지 조항을 삭제하도록 지시를 내리게 된다. 1929년경에는 각 본사에서도 사법이 개정되어 비구계 수지에 관한 항목과 독신의 조항을 삭제한 사찰이 80%나 되었다고 한다. 취처불교는 왜색불교이며 일제는 이를 공식화하여 한국불교를 왜색불교화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음은 불가지의 일이다. 이에 대하여 조선불교 선종 수좌대회가 1935년 3월 7-8일에 선학원에서 개최되어 정통 선을 부흥하고 참선수행을 통한 불교정화의 방향을 정하였다. 용성스님의 전통불교에 대한 고수가 그 당시에는 수포로 돌아갔지만 1950년대의 불교정화라는 이름으로 다시 불붙기 시작하여 오늘날 조계종의 맥을 계승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의 계율부흥운동은 두 차례의 건백서(1926년 5월과 9월)만으로 끝나지 않고 계율정신을 부흥하기 위하여 『범망경(梵網經)』을 알기 쉽게 우리말로 번역하였다. 그는 새로운 불교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대각교(大覺敎) 운동을 전개했다. 용성선사는 대각교인에게 삼취정계(三聚淨戒)와 보살 48계를 중심으로 계를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대각교는 삼취정계와 대승보살계(大乘菩薩戒)를 중심으로 하는 새불교운동의 교단임을 표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용성조사는 1936년(세수 73세) 11월 18일 범어사에서 교단의 정화와 중흥을 위해 제자인 동산혜일스님에게 戒脈을 전하는 전계식을 가졌다는 것은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다.

출처: 일각사 선원,  http://cafe.naver.com/ilkak/261

이와 같이 용성스님의 계·정·혜 삼학의 정신 계승이 바로 동산스님의 불교정화로 나타난 것이다. 수행자는 계·정·혜 삼학, 즉 청정한 계율이 있어야 맑은 선정에 들고, 그런 연후에야 밝은 지혜가 나오게 되기 때문이다. 현 조계종 종단의 원로회의 의장인 종산스님은 동산대종사에 대해서 “해방 후에는 자유스럽게 추진한 것이 불교정화다. 청정 가풍 진작과 계·정·혜를 균형적으로 닦아야 한다고 보시면서 특히 계율을 강조했어요.”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동산대종사는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켜 한국불교사 및 조계종 종단사를 빛냈던 명안(明眼) 대종사로 자리매김 되었다.

 

 

2. 사상적 배경

 

동산대종사의 가정환경은 그의 사상을 형성하는데 큰 몫을 했다. 동산대종사의 집안은 원래 천도교 집안이다. 기미년 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 대표는 백용성 스님과 만해 한용운 스님 등 2분이고, 기독교 장로회·감리교회 대표가 16인 그리고 천도교 대표 15인 중 한 분이셨던 오세창 선생이 동산스님의 외삼촌으로, 오세창 누님의 아들이 동산스님이다. 동산스님은 오세창 선생의 정신적인 영향을 받아서 불교와 국가가 둘이 아니라는 불이(不二, advaita)라는 인식으로 일제 36년간 불교 교단에 누적된 왜색을 청소하는 작업이 바로 호국사상, 애종사상으로 형성되었다.

 

스님은 7세때 단양의 서당에 들어가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역사(歷史) 등을 7년 동안 이수하고 신교육기관인 익명보통학교(益明普通學校)에 입학하니 그때 나이 15세였다. 담임은 주시경(周時經)선생이었으며, 이 인연은 스님의 민족사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15세 이후에는 신식학업을 익혀 서울의 중동중학교와 총독부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당시 외삼촌인 오세창 선생과 용성스님은 아주 절친한 사이라서 자주 교류하면서 국사를 걱정하고 민족의 안위를 염려하였다고 한다. 동산스님은 두 분의 심부름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용성스님과 교분이 두터워 졌다. 우연히 용성스님이 당시 동산스님에게 “인간의 육체의 병은 의술로 고친다지만 마음의 병은 무엇으로 고치겠소?” 라고 묻는 말씀에 충격과 감동을 받아 “불교는 인간의 마음에 대한 병을 고치는 종교” 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동산스님은 서기 1912년(壬子) 스님의 세수 23세 때 10월 용성큰스님을 은사로 금정산 범어사로 입산, 출가하였다.

 

동산스님은 1913년 봄, 범어사 강원에서 능엄경을 배웠다. 능엄경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출가 이전의 한학 공부와 의학전문학교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익힌 불교교리의 습득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스님은 1913년 10월 보름 결제일(結制日)부터 백양사 운문선원에서 용성(龍城)스님에게 전등록(傳燈錄) 염송(拈頌)과 범망경(梵網經), 사분율(四分律) 등을 수학했다. 또한 스님은 1914년 초기 당시 선지식인 방한암(1876-1951) 스님이 머물던 평안도 맹산의 우두암(牛頭庵)을 찾아가 2년간 교학과 선을 배웠다. 그가 교학을 배운 것은 능엄경, 기신론, 금강경, 원각경이었다고 한다. 1916년에는 출가 본사인 범어사로 돌아와서 영명(永明) 대강백(大講伯)으로부터 대교과정을 2년간 수학하였다.

 

스님은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은사인 백용성스님이 3·1운동의 민족대표로 독립운동 활동으로 감옥에 수감되자, 옥바라지를 위해 공부를 중단하였다. 당시 스님은 대각사, 망월사 등지에 머물면서 은사스님의 옥바라지를 약 3년간 하였다.

 

동산스님은 은사 백용성스님이 출옥한 1921년 봄, 이후부터는 주로 각처의 선원에서 참선수행에 전념했다. 지금까지 익힌 교학의 바탕에서 사교입선(捨敎入禪)의 길에 몰두했다. 동산스님은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선원을 시작으로 금강산 마하연, 속리산 복천암, 태백산 각화사, 범어사, 함양 백운암에서 1923년(34세)까지 용맹 정진하였다.

 

스님은 1924년 4월 보름부터 3년간을 직지사에서 ‘3년 결사(結社)’를 하였고, 1927년 4월에 금정산(金井山) 범어사(梵魚寺) 금어선원(金魚禪院)에서 하안거에 들어가 참선하던 도중인 7월 5일, 방선(放禪) 시간에 대나무 숲을 거닐다가 바람에 부딪치는 댓잎 소리를 듣고 오도(悟道)하였다. 당시 스님은 “서래밀지(西來密旨)가 안전(眼前)에 명명(明明)하였다.” 라고 다음과 같이 그 소식(消息)을 표현하였다고 한다.

 

畵來畵去幾多年 그리고 그린 것이 그 몇 해이던가

筆頭落處活猫兒 붓끝이 닿는 곳에 살아있는 고양이로다

盡日窓前滿面睡 하루 종일 창 앞에서 늘어지게 잠을 자고

夜來依舊捉老鼠 밤이 되면 예전처럼 늙은 쥐를 잡는다.

 

동산스님은 자신의 견처를 은사 용성스님께 말씀을 드리니 즉석에서 인가를 해주시어 용성선사의 법맥(法脈)을 사자상승(師子相承)하게 되었다. 스님은 의사의 꿈을 저버리고 출세간의 장부로서 만중생을 고해(苦海)로부터 구제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선(禪)·교(敎)를 겸하며 수행한 지 어언 15년, 비로소 마음의 안식처를 찾으신 것이다.

 

스님은 범어사 동쪽 대나무 숲에서 오도(悟道)의 인연이 있은 후 그 대밭을 특별히 아끼시며 자신의 별호(別號)를 스스로 순창(筍窓)이라고 까지 쓰셨다고 한다. 이리하여 스님은 40세(1929년, 己巳)에 금어선원에서 동안거(冬安居)에 처음으로 범어사 조실(祖室)이 되어 참선 납자들을 제접(提接)하면서 철저한 보임(保任)을 하였다고 한다.

 

용성스님에게서 전계를 받은(1936년) 이후의 동산스님은 더욱 더 철저한 수행을 하였다. 1937년 하안거 때에는 도리사 조실, 1938년 하안거는 범어사 내원암의 조실로, 1939년 하안거와 동안거에는 은해사 선원의 조실로 있었다. 그런데 은사인 용성스님이 1940년 음력 2월 24일, 대각사에서 세납 77세로 입적하였다. 동산스님은 은사 용성스님의 입적 충격으로 오로지 범어사 금어선원에 조실로 주석하면서 수행에 더욱 매진하였다고 한다. 스님은 1941년 하안거부터 해방되는 그날까지 범어사 금어선원의 조실로 주석하였다.

 

동산스님이 불교정화의 기치를 구현한 것은 1941년 3월 13일 선학원에서 개최된 유교법회(遺敎法會)에서의 설법이었다. 스님은 ‘유교법회’에서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잘못된 불교를 바로잡아 조사(祖師)의 종풍을 일으켜 세울 것을 역설하시면서, 범망경(梵網經)을 통하여 취처승(왜색승)들이 왜곡하고 있는 대승계율(大乘戒律)의 진의(眞義)가 무엇인가를 천명하시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동산스님은 1936년에는 용성스님의 계맥을 계승하고, 1943년에는 한국 불교 계율의 전통을 갖고 있었던 범어사 금강계단의 단주(壇主)로 전계대화상(傳戒大和尙)이 되었다.

 

이렇게 동산스님은 앞에서 살펴본 가정환경과 은사인 용성스님, 그리고 한암스님의 승가오칙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삼학 균수 형성으로 전통불교 수호, 식민지불교의 극복을 통한 종풍(宗風)을 세워야 한다는 행원(行願)의 삶을 실현했다.

 

 

Ⅲ. 동산대종사의 한국 근·현대 불교사적 지위

1. 계율 수호자로서의 정화운동의 선봉장(先鋒將)

 

부처님의 마지막 날들에 관하여 상세히 전하고 있는 소승경전의 『대반열반경, Mahāparinibhāna-sutta』에 의하면, 부처님은 그의 입적(入寂)을 앞두고 아난다(阿難陀, Ānanda)에게 다음과 같이 설했다고 한다.

아난다여, 너희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스승의 가르침이 끝났다. 우리에게는 더 스승이 안 계신다’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아난다여, 너희는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가 너희들에게 가르쳐 주고 제정한 법(法)과 율(律)을 나의 사후(死後)에 스승으로 삼아라.

위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면서 계(戒)를 스승으로 삼아라고 교시(敎示)하였다. 계율은 교단의 구심점이며, 불법이 상전(相傳)되는 근간이다. 불멸후, 비구의 지계정신에 위기를 느낀 가섭존자가 승단(僧團)의 미래를 걱정하여 경(經)과 율(律)을 결집하였다. 그리하여 승단의 구성원들은 율장에 의거해 수행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시대의 사회 상황에 따라 B.C.1세기를 전후로 일반 대중의 신앙과 삶에서 유리되고 번쇄한 이론을 중시한 승단 중심의 부파불교를 비판하며 이상적인 인간상으로서 보살을 내세우며 스스로를 대승이라고 부른 혁신적인 사고를 지닌 자들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대승의 보살도들이 지켜야 할 계를 ‘대승보살계’라고 하였다. 대승불교의 대표 경전 중의 하나인 『화엄경』에서는,

 

보살이 수도를 하고 계를 닦는 것은 모든 중생이 죄를 짓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며, 스스로 구족계를 받아 중생들이 최승법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

 

라고 하여 보살계는 모든 중생들을 위한 것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또한

 

항상 스스로 세 가지 깨끗한 계율에 머무르며, 또한 중생으로 하여금 여기에 안주시킨다. 보살마하살은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오계에 머무르며 살생 등을 영원히 끊고 이 선근으로 이와 같이 회향하니라.

 

라고 삼취정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주요한 대승경전 가운데 하나인 『解深密經』에서도 삼취정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계의 세 가지란, 첫째는 착하지 못함을 버리는 것이 계요, 둘째는 착함을 생겨나게 하는 것이 계요, 셋째는 유정을 넉넉하게 하고 이익하게 함을 내는 것이 계이니라.

 

삼취정계의 구체적 명칭을 轉捨不善戒 轉生善戒 轉生饒益有情戒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에서의 계에 대한 기본설명을 보면,

 

무엇이 보살의 온갖 계율이냐 하면, 보살의 계율에는 요약하여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在家分戒요, 둘째는 出家分戒이다. 이것을 一切戒라고 한다. 또 곧 이 집에 있는 이와 집을 떠난 이의 두 가지 갈래의 깨끗한 계율에 의하여 요약하면 세 가지로 말하나니, 첫째는 율의계요, 둘째는 섭선법계요, 셋째는 유정을 이롭게 함의 계율이다.

 

라고 보살계율에 대해 말하면서 三聚淨戒의 명칭을 들고 있다. 律儀戒, 攝善法戒, 饒益有情戒가 그것이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대승보살계는 일반 대중과 유리되어 관념화 되었던 부파승단의 계율에서 삼취정계로 변화 형성되었다. 삼취정계에 대한 문제는 대승계 이해의 단초가 되는 것이다. 『사분율』적인 계상은 수지에만 있고 삼취정계는 보살적 구원관이 담겨 있으므로 많은 논사가 관심을 갖고 이에 주석을 가하였다. 그러므로 『攝大乘論』에서도 삼취정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계의 세 가지 성품이란 첫째는 계율을 지키어 보호함이고, 둘째는 선법의 계율을 섭지함이며, 셋째는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계율을 섭지하는 것이다.

 

한국불교는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으로 계맥이 단절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으며, 특히 일제시대 식민정책의 민족정신 말살정책으로 불교를 왜색화 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러한 사조에 동산대종사의 은사인 용성스님은 한국불교의 전통성을 유지 계승하고 교단을 회생시키기 위해서 총독부에 건백서를 1926년 5월, 9월 두 번이나 제출했다는 것을 앞에서도 고찰했다.

 

동산대종사의 계율수호는 용성스님의 삼취정계와 대승보살계의 정신을 계승한 계율사상을 적극 실천하는 성격이었다. 동산대종사는 은사 용성스님의 계맥을 이어 받은 후 범망경을 통하여 취처승(왜색승)들이 왜곡하고 있는 대승계율의 진의를 바로 잡으려는 노력으로 종단의 정화운동에 앞장서 나서게 되었다. 그 운동은 두 가지 인데, 하나는 계율 수호를 통한 계맥의 전승이었고, 또 하나는 청정가풍 진작을 위한 교단의 정비운동이었다.

 

먼저 계율수호를 위한 운동을 알아보도록 한다. 스님은 1936년 47세에 용성스님으로부터 지리산(智異山) 칠불선원(七佛禪院)의 서상계맥(瑞相戒脈)을 전수(傳受)받고, 다시 오랫동안 범어사에 전래되어 오던 중국(中國) 법원사(法源寺)의 계법(戒法)을 영명(永明)스님으로부터 1943년에 전수받아, 그해부터 금강계단(金剛戒壇)의 단주(壇主)가 되어 전계화상(傳戒和尙)으로 계(戒)를 전수(傳受)하기 시작하였다. 스님은 1943년 3월 15일에 범어사에서, 가을에는 해인사에서 대소승계(大小乘戒)를 전수(傳受)하였다.

 

동산대종사는 수행자가 참으로 공부를 여실히 해나가려면 “계(戒)가 없는 정(定)이 없고 정(定)이 없는 혜(慧)가 없다”고 주장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지계에 대하여 강조하였다.

 

 

계란 별것이 아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잃었던 내 마음을 다시 회복(回復)하는 그 때가 곧 계(戒)이다. 그렇게 알면 곧 정(定)이 있을 때 계(戒)가 나는 것이며 도(道)가 있을 때 계(戒)가 함께 나는 것이니, 정(定)과 계(戒)와 도(道)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의례히 자성(自性)을 회복(回復)할 때 계(戒)가 있어지고 정(定)이 있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부처님의 본(本) 뜻이요, 그렇게 하려고 『범망경(梵網經)』에 십중대계(十重大戒)와 사십팔경계(四十八輕戒)를 설해 놓은 것이며 그것을 떠나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이 원명(圓明)해야 되고 원명(圓明)하려면 계(戒)를 잘 가져야 하는 것이다.

 

동산대종사에 의하면 정(定)과 계(戒)와 혜(慧)는 동일한 함의를 지니며 잃었던 내 마음을 회복하는 그 때가 곧 계를 지니는 것이라고 교시(敎示)하였다. 스님은 1943년 이후 범어사의 금강계단에서 많은 불제자를 배출하고, 그로부터 1965년 열반하기 까지 동산대종사에게 구족계와 보살계를 받은 사부대중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한다. 동산스님은 계행의 궁극적 목적은 자성을 회복하여 깨치는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오계(五戒)를 분명(分明)히 가져야 한다. 계(戒)를 가진다는 것은 법신(法身)을 살리는 것이며 계를 가짐으로써 법신(法身)을 알게 된다. 계(戒)라 하는 것은 조목(條目)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미(迷)했던 법신(法身)을 살린다는 뜻이다. 오계(五戒)가 비구계(比丘戒)에 있어서는 이백오십계(二百五十戒)가 되고, 보살계(菩薩戒)에 있어서는 십중대계(十重大戒)와 사십팔경계(四十八輕戒)가 되어 각각(各各) 차별(差別)이 있기는 하나 필경(畢竟)에는 이 계(戒)를 가질 때에 곧 미(迷)했던 내 자성(自性)을 깨닫게 되고 십바라밀(十波羅蜜, 布施·持戒·忍辱·精進·禪定·智慧·方便·願·力·智)이 具足하고 戒·定·慧 三學이 具足하는 것이다.

 

스님은 1965년 3월 15일, 범어사 금강계단 제65회 보살계 산림을 주관하시고 그해 3월 23일에는 열반에 드셨다고 한다. 평일과 다름없이 새벽예불, 정진, 도량청소를 하고 점심 공양후 약간 피로한 기색을 보이시더니 종단의 앞날을 염려하면서 “방일하지 말고 부디 정진에 힘쓰도록 하라”고 하시고, 아래의 글을 남겼다.

 

元來未曾轉 豈有第二身 三萬六千朝 反復只這漢

원래 일찍이 바꾼 적이 없거니

어찌 두 번째의 몸이 있겠는가.

백년 3만 6천일

매일 반복하는 것,

다만 이놈뿐일세.

 

두 번째, 동산대종사는 계율 수호에 대한 투철한 의식으로 종단의 청정가풍 진작을 위한 교단의 정화운동에 대해 알아보도록 한다. 동산대종사의 정화운동은 이미 김광식 교수가 그의 논문에서 고찰했으므로 본고에서는 동산대종사의 정화운동의 역사적 위치와 공과에 대한 것만 고구하고자 한다.

 

동산대종사는 스스로 정화운동의 의의와 당위를 설명하셨는데 김광태 박사의 증언에 의하면 아래와 같다.

 

우리 민족의 정통성을 갖고 있는 종교이며, 민족의 정신을 담고 있는 종교가 불교라고 하시면서 불교가 국가의 헌법과 같은 것인데, 불교가 잘 되었을 때에는 범망경, 사분율과 같은 규칙이 승려들의 헌법이었는데, 이것이 문란해져 불교의 근본이 흐트러졌다고 했어요. 그래서 동산스님께서는 성불을 미루더라도 교단을 바로 세우고 가야된다고 하시면서 그것은 대한민국의 제2의 독립운동이고, 건국의 정신을 세우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왜냐하면, 일제가 외국을 침략한 것이 960여 회가 넘고 그중에서 우리 한국을 침략한 것이 거의 300여회나 되는데 그때마다 승군이 위력을 발휘해서 그를 퇴각하였다는 전승의 기록, 역사가 있다고 했어요. 그럴 때에 승려가 80% 이상이 참가하여서 일제를 물리쳤고, 그때에 죽은 승려도 많고, 성벽을 쌓은 노역에도 승려가 많이 동원이 되었는데 그런 것을 역사로 정리하지 않았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래서 민족혼이 말살이 되었는데 이래도 괜찮으냐고 개탄하였어요.

대처승이 나가면, 자연 그 제도도 필경은 없어져야 하는데 아직도 새 제도를 만들지 못하고 있어 동산스님은 힘이 부치니, 저보고 그런 일을 거들어 달라고 하셨어요. 그래 저는 스님이 말씀하신 제2건국운동, 건국정신, 애국하는 것에 나도 동참을 하겠다고 답변을 하고는 “저도 조력하겠습니다” 하고 말씀을 드렸지요.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동산 대종사의 정화운동은 제2 건국운동, 건국의 정신을 세우는 것이었다. 동산 대종사는 일제하의 불교계에서 범어사 금강계단의 전계대화상(단주)으로 승려들의 구족계와 보살계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재가자들의 보살계 산림을 주관한 율사의 역할을 하였다. 해방 후 스님은 계율수호에 대한 사명감으로 정화운동시(1954-1962) 종정으로 정화운동을 발의하고, 추동하고 진두지휘하였던 최고의 영도자였다. 스님이 한국 현대불교사에서 최고의 ‘큰 스님’으로 존경받게 됨은 스님의 수행, 사상, 일상생활에서 파악할 수 있다. 김광태 박사와 현욱법사의 아래와 같은 증언이 참고가 된다.

 

일주문에 딱 들어가니깐, 노장스님은 보이지 않고 대웅전으로 가는 마당을 보니깐 청소가 말끔히 되어 있었어요. 만약 스님이 안 계시면 마당에 낙엽이 꽉 차 있지요. 그런 것은 조계사에 계실 때에도 그랬어요. 조계사나 범어사에서도 누더기를 입으시고, 그렇게 마당 청소를 하셨어요. 동산스님은 종정을 하실 때에 조계사에서의 일상을 보면, 당신의 일과표를 만들어 놓고서 생활을 하셨습니다. 기상, 예불, 공양, 청소, 접대, 오후불식 등등에 대한 일거수 일투족을 엄격하고, 분명하게 정하신 스님입니다. 저는 이것을 역력히 지켜 본 당사자입니다. 그때에도 모든 불단을 다 참배하는 진짜 중입니다. ... 노장님은 열두 시부터 한 시까지가 기도시간이었어요. 남북통일 기원, 인류평화 기원 그렇게 기도를 하시드라구요.

 

당시 옆에서 가까이 모시면서 가장 큰 감명은 복과 덕이 충만하신 분으로 꼭 닮고 싶은 어른이었습니다. 노장님의 일과로 새벽 예불이 끝나면 공양후 제일 먼저 빗자루를 들고 도량 청소를 시작하면 대중들도 자연 따라 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저도 그것을 10년간 지키느라고 많은 수련을 하였어요.

 

제가 모셔 보니 우리 스님은 새벽 세 시 무렵에 일어나십니다. 일어 나셔서 시자와 함께 밖으로 나오시면 제일 먼저 우물가, 물이 졸졸 흐르는 수각에 가셔서 합장을 하십니다. 그 후에는 부엌에 가셔서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조왕단에 삼배를 하십니다.

그 다음에는 탑, 종루, 지장전 등을 순서로 해서 각단 예배를 서서 하십니다. 이렇게 행도예배를 하시고 법당에 가서 좌정을 하시면 그때서야 종을 치면 대중들이 모여들지요.

저희 스님이 만덕을 누리시고, 복혜가 구족하고, 여러 선지식 중에서 복을 가장 많이 받았던 것은 모든 하급 신들에게까지 예를 갖추었고, 그래서 모든 신들까지도 우리 스님을 존경하고, 옹호하신 결과가 아닌가 합니다. 우리 스님은 산문에 들어서면 바로 그 입구에서 산을 향해 절을 하십니다. 만덕사에 갈 때에 보니, 만덕산 입구에서 버스에서 내리면서 바로 산을 향해 절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어찌 노장님을 받들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였어요. 저도 그래서 그런 스님의 모습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왜냐하면 저도 도인이 되고 싶었으니까요. 그리고 또 하나 가풍은 누구나 오는 사람은 환영으로 받아들이고 가는 이는 잡지 않는 것은 유명합니다. 식량이 없어 삼직은 대중을 더 받을 수 없다고 하면 십시일반이라 하시고 모두 다 받아 주었습니다. 저도 물들어 범어사, 불국사, 신흥사, 무문관 수도원 등 일찍 큰 사찰을 운영하면서 오는 대중을 한 번도 물리친 적이 없었습니다.

 

위에서 고찰한 모습들이 스님의 수행 가풍이었다. 스님은 범어사 선원에서 전국수좌들과 치열한 공동수행을 통해 원융적인 대중생활을 하였고, 신해행증을 보여준 일상생활을 통해 수좌계의 존경받는 어른으로 자연스럽게 자리매김 되어 각인되었다. 그래서 스님은 정화운동의 선구자, 정화운동의 견인자라는 성격을 부여받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 스님의 정화운동의 공과에 대한 것은 김광식 교수의 견해가 참고가 된다. 불교정화운동(1954-1962)에 있어서 동산대종사의 긍정적인 역할은 한국불교의 전통의식의 환기, 승단 및 승려의 청정의식의 환기, 민족불교의 지향의 재검토, 교단 정체성 각성, 불교 문화재의 정비, 사찰 환경의 개선 등을 들 수 있다.

 

이에 반해서 부정적인 면은 동산대종사와 함께 정화의 최일선에 섰던 금오, 청담, 대의 등의 추진세력들은 그 당시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역사의 이론이성으로선 불교자주화에 문제점을 야기하였다는 데에 도덕적 책임이 있다. 그 부정적인 부문을 다양하게 대별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비구 대처 분규의 문제는 불교적인 사상, 방법에 의해서 해결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공권력의 협조, 개입으로 인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관행이 생겨 불교교단의 정치적 종속이 심화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사법부에 의뢰한 수많은 재판에 삼보정재를 낭비한 것이다. 종단의 3대사업, 포교, 역경, 도제 양성에 사용되어야만 할 정재가 사법부와 정치인의 주머니에 흘러 들어간 것은 비통한 불교계의 아픈 상처이다. 이 시기에 마땅히 이루어졌어야 할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기관 설립과 언론 방송 및 출판문화 등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셋째, 정화 당시 추진세력들이 수적 열세를 보충하기 위하여 자격 없는 자들을 급조승으로 영입하여 사찰 운영권을 전담시켜 많은 부작용을 낳게 하였다. 넷째, 비록 대처승에게 반불교, 반민족불교적인 성격이 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 하여도 그들이 수행한 역할과 성과는 객관적으로 평가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조계종단은 개항부터 정화불사 이전(1876-1954)의 역사를 무관심으로 방치하였다는 몰역사의식의 종단운영을 가져오게 하였다. 다섯째, 정화운동의 여파로 선(禪)을 우선시하는 수행의 풍토가 교학의 소홀, 다양하고 균형적인 교육제도 및 시설의 미비로 연결되어 한국불교의 원융성, 통합성이 발휘되지 못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여섯째, 정화운동시 기독교의 성장이 급증하였다는 것에 대한 비판을 감수해야 한다. 일곱째, 불교가 민족의 불교를 지향한다면 민족의 고민과 진로에 대하여, 사회의 각 분야에서 불교적인 가치를 지닌 인재를 얼마나 양성했는지에 대한 물음에 답해야 한다.

 

이런 부정적인 역사의 면을 반성하여 교단의 자주성과 정체성을 세우는 것이 오늘의 불자들의 의무라고 인식하고 실천하는 것이 당위이다. 스님께서도 부처님처럼 일상생활에서 연기의 인식으로 중도적 삶을 실천하는 고뇌를 이종익 박사의 증언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알 수 있다.

 

그 때에 선사(禪師)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십년(數十年) 종권(宗權)을 장악(掌握)하고 사재(寺財)를 점유(占有)하여 뿌리 깊은 기반(基盤)을 잡고 있는 대처측(帶妻側)을 일조(一朝)에 사원(寺院) 밖으로 몰아낸다면 큰 문제가 생길 것이다. 그러니 비구승(比丘僧)은 전국(全國) 사찰(寺刹) 중(中) 수도장(修道場)이 될 만한 곳을 십오개(十五個) 내지(乃至) 삼십개(三十個) 정도(程度)만 관리(管理)하고 수도(修道)에 전력(專力)하여 불교(佛敎)의 규범사찰(規範寺刹)을 만들고 도덕(道德)이 높은 승려(僧侶)가 많이 출현(出現)한다면 전국불교(全國佛敎)가 정화(淨化) 재건(再建)될 것이니, 나는 이것이 선책(善策)이라고 본다”고 말씀하셨다.

당초(當初)에 선사(禪師)님의 의견(意見)은 매우 현명(賢明)한 고견(高見)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장측(小壯側)의 과격파(過激派)에 의(依)하여 좌절되어 버리고 역사상(歷史上) 아름답지 못한 비구(比丘), 대처(帶妻)의 분규가 붙게 된 것을 나로서 생각하여도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일이 일단 한쪽으로 기울어지자 선사(禪師)님은 그대로 밀고 끝까지 백절불굴(百折不屈) 나가셔서 시종일관(始終一貫)하셨다는 대의명분(大義名分)과 그 정진(精進)과 투지(鬪志)는 또한 후배(後輩)의 표본(標本)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유형의 사고는 1952년 조계종 종정으로 취임한 만암 종헌(1876-1956)에 의해 주도된 호남의 고불총림(1947-1950)에 나타나 있다. 만암스님은 대처승을 역사적인 산물로 바라보고 현실을 인정하여 승려를 정법중(正法衆, 비구)과 호법중(護法衆, 대처)으로 이원화하여 포용하자고 제안했다. 이 제안에 대한 후학들은 심사숙고하게 음미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2. 간화선법(看話禪法)의 제창자(提唱者)

동산대종사는 선찰 대본산 범어사 조실로 1941년 하안거부터 1965년 3월 23일 입적하기까지 참선 납자들을 제접(提接)하면서 간화선풍(看話禪風)을 진작시켰다. 그래서 필자는 이 장(章)에서 스님의 간화선법이 어떻게 형성되어 스님의 가풍을 어떻게 펼쳐보였는지 논구하고자 한다.

 

‘선’이란 원래 범어의 ‘dhyāna'의 略音寫語이다. 어근 ‘dhya(숙고함, 심사함)’로부터 파생된 중성명사이며, 한어로는 ‘禪那’, ‘禪思’, ‘靜慮’ 등으로 번역된다. ‘선나’,‘선사’등의 약형(略形)이 ‘禪’인데 이것이 오늘 날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고 있는 말이다. ‘dhyāna'라는 용어가‘숙고하다’,‘명상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가장 오래된 예는 초기 우빠니샤드 ‘Chāndogya Upaniṣad, Ⅶ, 6. 1.’로서 여기서는 만유의 원리의 하나로서 받아들여진다.

禪의 기원은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초기 불교의 선정설로서는 四禪, 八等至 - 四禪 + 四無色定(공무변처‧식무변처‧무소유처‧비상비비상처), 九次第定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선의 완성은 중국적 토양 속에서 발양된 祖師禪에서이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A.D. 67)된 이래 조사선은 아직도 義解‧名相에 걸려 보리달마(菩提達磨, ?-528)가 전한 眞禪味에 이르지 못함을 여래선이라 함에 대하여, 文字義解에 걸리지 않고 바로 以心傳心하는 달마가 본래 전한 선법을 말한다. 如來禪은 敎內의 不了한 선이고, 조사선은 교외에 별전하는 지극한 선이다.

 

조사선의 흐름은 ‘一心’을 강조하는 思潮이다. 보리달마(? - 528)는 慧可(487-593)에게 安心법문으로 시작하여 三祖僧璨(? - 606)의 ‘信心’으로, 東山 法門에서는 ‘守一不移‧守心’으로, 慧能(638-713)에서는 ‘自性淸淨’으로 각각 나타나고 있다. 조사선은 스스로를 ‘전불심인(傳佛心印)’이라 하고 중생심성의 본원(佛性)을 깨닫는 것을 주지(主旨)로 삼은 중국화한 불교의 수행법이다. 그 전법의 계보는 달마(達摩, ?∼528), 혜가(慧可, 487∼593), 승찬(僧璨, ?∼606), 도신(道信, 580∼651), 홍인(弘忍, 602∼675), 홍인의 제자 신수(神秀, 606∼706)와 혜능(慧能, 638∼713)이다.

 

신수는 점오(漸悟)를 주장하고, 혜능은 돈오(頓悟)를 주장했으며 각각 남방과 북방에서 홍법하여 ‘남돈(南頓)’, ‘북점(北漸)’의 양 파를 형성하였으므로 역사에서는 ‘남북선종(南北禪宗)’ 또는 ‘남북종(南北宗)’이라 한다. 후에 혜능의 남종이 북종을 대신하여 중국 선종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래서 혜능을 선종의 실제 창시자라고 한다.

조계종 교육원에서 편찬한 『看話禪(조계종 수행의 길)』에 의하면, 조사선의 시작과 그 조사선의 전개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三處傳心으로 마음을 전하였고, 이 법이 전승되어 28번째 보리달마는 東土의 첫 조사가 되었다. 이후 6조 혜능이 실질적으로 조사선을 정착시켰으며 마조와 석두는 조사선을 크게 융성시킨 인물이다. .... 이 두 인물에 의해 5가 7종이 생기고, 여기서 黙照禪과 看話禪이 발생하였다. 이후 大慧가 체계화한 간화선은 조사선의 핵심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수행법이다.

 

위의 논술에서 인지되는 것은 혜능을 조사선의 실제 창사자라고 하고 있으며, 혜능에 의한 선사상은 후대 간화선에 그대로 흘러들어 갔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조사선 시작을 馬祖道一(709-788)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윤영해, 宗浩스님, 圓融스님 등이 조사선의 개조를 마조로 보았다. 마조를 조사선의 개조로 보는 학자들의 견해는 평상심에서 일상의 실천적인 선으로 전개하여 인간의 내면을 강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혜능은 많은 제자들을 길렀지만 그 중에서도 뛰어난 자로는 남악 회양(南嶽懷讓, 677-744), 청원 행사(靑原行思, ?-740), 하택 신회(荷澤神會, 684-758)가 걸출한 인물이다. 혜능의 선사상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선사는 남악 회양과 그의 제자인 마조 도일(709-788)과 청원 행사의 문하에서 나온 석두 희천(700-790) 계통이다.

 

마조 사상의 특징은 평상시의 마음이 다름 아닌 도라는 의미의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 하는 것이다. 마조의 제자는 80여 명에 이른다. 주요 제자로 백장청규(百丈淸規)를 수립한 백장 회해(百丈懷海, 749-814)와 조주 선사(778-897)의 스승인 남전 보원(南泉普願, 748-835)등이 있었다고 한다. 마조 도일의 제자 중에 백장 회해는 황벽 희운(黃劈希運, ?-850)과 위산 영우(潙山靈祐, 771-853)와 같은 훌륭한 두 제자를 둔다. 이중에서 황벽의 제자인 임제 의현(臨濟 義玄, ?-867)이 임제종을 창시하게 된다.

 

임제의 사상은 세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가 부처라 깊이 확신하는 것이다(心卽是佛). 둘째는 미혹으로부터 깨달음으로 가는 구체적인 실천이 ‘다만 밖에서 구하지 말라’는 한 가지에 달려있다(心外無佛). 셋째는 주체적인 자유의 선양이다(隨處作主). 현실 속에서 자신의 본질에 대해 눈뜨고, 자기 자신의 자유를 실현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선종은 서로 종지를 달리하여 북송 때 임제종의 초원(楚圓) 문하에 혜남(慧南, 1002∼69)과 방회(方會, 996∼1046)가 각각 강서(江西)에서 황룡(黃龍)과 양기(楊岐) 두 파를 개창하였다. 그래서 원래의 임제종 등의 5가와 합하여 ‘7종’이라고 부른다. 남송에 이르러 황룡파는 점점 쇠락하고 양기파가 임제종의 정통을 이루었다. 양기파의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는 '간화선(看話禪)'을 제창하였다. 이것은 앞선 조사들이 시비, 미오(迷悟)를 판단하던 언론(公案) 중의 몇 어구를 가지고 ‘화두(話頭)’를 삼아 내성식(內省式)의 참구를 진행하는 것인데, 아주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는 안휘성 출신으로, 어릴 때 지방학교에 입학하여 17세에 출가할 때에는 이미 『운문록(雲門錄)』을 읽었다고 하므로 유학과 선을 두루 갖춘 선승이었다. 그는 당시 이곳 저곳에서 탁발을 하고 다녔는데 특히 조동종의 많은 선사들과 운문종의 선사들로부터 선을 습득했다. 그 후 휘종 6년(1124)에 천영사(天寧寺)에서 원오 극근(圓悟克勤, 1063-1135)의 문하로 들어가 (36세)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1137년, 徑山能仁禪院의 주지가 되어 크게 禪風을 선양했다. 그런데 남종시대에 들어서면서 선종이 크게 동요하기 시작할 때 가장 대조적인 두 사람의 승려가 나타났다. 한쪽은 묵조선을 사선(邪禪)이라고 비방하면서 간화선을 주장했고, 다른 한쪽은 간화선을 구두선(口頭禪, 말로만 하는 선)이라고 되받아쳤다.

 

그러면 대혜가 주장한 간화선이란 어떠한 것인가? 그는 그의 어록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천만 가지의 많은 의심도 실은 오직 하나의 의심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의심이 해결되면 천만 가지 의심도 일시에 해결된다.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잠시 그 문제에 정면으로 대결하라. 만약에 그 문제를 단념해버리면 또한 다른 문제에 의심이 생기고, 교설에 의심이 생기고, 古人의 공안에 의심이 생기고, 일상의 일 가운데에 의심이 생긴다. 이것들은 모두 깨달음을 방해하는 악마와 한패이다. 무엇 보다도 먼저 하나의 문제에 관해서 안이하게 납득해서는 안된다. 또한 이렇다 저렇다고 思慮하고 推量해서도 안된다. 오직 마음을 사려가 미치지 않는 곳에 집중시켜라. 그렇게 하면 사려하는 마음은 움직이지 않게 된다. 그것은 늙은 쥐가 소의 뿔 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마침내 이때에 잘못된 견해는 끊어져버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간화선이란 수행상의 연구해야만 할 하나의 ‘화두’에 전신을 집중시켜, 그것 과의 대결을 통해서 절대의 진실에 눈뜨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공안 곧 화두는 趙州 ‧ 臨濟를 거쳐 大慧宗杲에 이르러서 대성하게 된다. 간화선이라는 일종의 화두참구를 으뜸으로 내세워 그것을 최고의 수행법으로 선택한 것은 그와 같은 공안에 의해서 자기의 망상을 제거하는 것을 그 하나의 목표로 삼았다. 가령 조주선사의 ‘無字公案’그 자체가 되는 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열쇠가 된다는 것이다. 대혜는 공안에 대하여 大疑團 을 불러 일으켜 ‘大疑大悟’하는 ‘깨침’을 제일로 삼는다. 대혜에게 공안은 고인의 단순한 일화로서가 아니라 깨침의 전부였다. 그래서 대혜에 이르러서 간화선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대한불교 조계종은 1700여년 한국 불교의 역사와 함께 한 청정 승가 수행종단이다. 종헌 제 1조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법통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을 명기하고 있다.

 

본종(本宗)은 대한불교 조계종이라 칭한다. 본종은 신라 도의국사가 창수(創樹)한 가지산문에서 기원하여 고려 보조국사(普照國師)의 중천(重闡)을 거쳐 태고 보우국사의 제종 포섭으로서 조계종 이라 공칭하여 이후 그 종맥이 면면부절(綿綿不絶)한 것이다(『종헌』 제1조).

 

이상을 종합한 조계종의 법통은 도의-보조 지눌(1158-1210)-태고 보우(1301-1382)-청허 휴정(淸虛 休靜, 1520-1604)을 적통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논술을 통해서 또 알 수 있는 것은 대한불교 조계종의 명칭도 조계산(曹溪山)에서 慧能의 曹溪禪風을 계승한 것에서 전래된 것으로 인지된다.

지눌의 선풍은 수제자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1178 - 1244)에게 전해졌다. 그는 1208년 수선사 사주를 물려받아 수선사를 증축하였고, 1212년(명종 26) 왕사로 책봉되어 중앙과 지방의 선회(禪會)를 주관하였다. 저술로는 『선문염송(禪門拈頌)』30권, 『진각국사어록』2권, 『무의자시집(無衣子詩集)』2권, 『구자무불성화간병론(狗子無佛性話揀病論)』 등이 있다.

 

혜심은 간화선을 선 수행에 있어서 최고의 방법으로 삼으라는 간화일문(看話一門)을 내세웠다. 점수(漸修)의 오랜 수행과정을 밟지 않고 화두를 통해 단박에 부처님의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간화선(看話禪)의 수행 방법이다. 그는 송대(宋代)의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의 등사체제(燈史體制)와 『벽암록(碧巖錄)』의 염송체에서 선가(禪家)의 고화(古話, 화두)1,125 則과 선사의 이야기를 채집하여 방대한 화두 염송집을 편찬했는데 그것이 『선문염송』이다.

 

혜심은 이렇게 화두를 선수행의 방법으로 하는 간화선을 중시하고 특히 무자화두를 가장 기본적인 공안으로 강조하였다. 그는 대상과 근기를 상관하지 않고 자신이 곧 부처라는 믿음을 가진 후 화두를 참구하도록 하였다. 간화선 수행 이론의 기본 서적으로 『大慧書』를 채택하게 하여 대혜가 중요시했던 智慧分別心이 선병(禪病)의 근원적인 문제로 이해했다. 그는 지눌과 마찬가지로 무자화두의 열 가지 병통(十病痛)을 체계화하여 정리한 것이 『구자무불성간병론』이다. 이렇게 그는 스승 지눌이 이론화한 간화선을 실천적인 간화선으로 정착시켜 우리나라 선종계의 수행에 간화선이 주류로 자리 잡게 하였다.

 

 

고려 말기에 이르러 태고 보우(太古 普愚, 1301-1382)는 조계종의 중흥조로서 간화선 수행을 정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간화선이란 ‘화두를 간하여 불성의 진리를 보는 선법’이다. 다시 말해서 간화선은 마음의 무명에서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을 ‘화두’라는 패러다임을 도입함으로써 명확한 틀로 정형화해서 지금 이 자리에서 마음의 본성(佛性)을 깨치게 하는 수행법이다. 지눌의 선법에서도 간화선이 소개되었으나 정혜(定慧)를 닦자고만 했지, 화두(話頭)를 들자고는 하지 않았다. 보우는 깨달음을 얻은 이후 본색종사(本色宗師)를 찾아가서 인가를 받는 것을 강조했다. 본인도 無字화두를 타파하여 중국 원나라 호주 하무산(霞霧山) 석옥 청공(石屋 淸珙)으로부터 인가를 받아 임제 종지를 이었다. 이것은 임제선의 영향이다.

 

선은 조사의 관문(關門)을 뚫어야 하는 것으로 임제종의 전통 수행법인 화두 참구를 보우는 주장하였다. 보우는 화두를 참구하는데 굳건한 믿음(大信根)과 화두를 타파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大墳志) 그리고 화두에 강한 의심(大疑情)의 세 가지를 곁들여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것은 고봉 원묘(高峰 原妙, 1238-1295)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임제 가풍의 간화선법의 본격적인 유포는 태고 보우에서부터 시작되어 그로 말미암아 확고하게 정착되었다.

 

조선 중기 왜구의 침입으로 국난에 처해 있을 때 승려로서 불교의 정법을 회생시킨 인물이 청허 휴정(淸虛 休靜, 1520-1604)이다. 서산 대사 이전까지는 선교양종이 크게 대립하고 있었으니, 이를 세분하면 좌선(선종), 진언다라니(밀교), 염불(정토), 간경(화엄‧법화)등의 네 파가 있어 각기 수행법이 별립(別立)되어 있었다. 오랜 전통적 인습에 사로잡혀 선교간의 종파적 갈등이 여전히 심했다. 이에 서산은 禪敎不二의 불교관을 표방하여, 선과 교를 다음과 같이 명확히 판석하고 있다.

 

석가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것(三處傳心)이 禪旨가 되고, 세존께서 일대(一代, 성불후 입멸에 이르기까지)에 걸쳐 설법한 것은 교문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누구든지 말에 현혹되면 부처님이 꽃을 드신 것이나 가섭이 빙긋이 웃는 일도 모두 敎의 자취만 될 것이고, 마음에서 얻으면 세상의 온갖 잡담이라도 모두 敎 밖에 따로 전한(敎外別傳) 禪旨가 될 것이다......敎門에는 오직 일심법(一心法)만 전하고, 禪門에는 견성법(見性法)만 전한다.

 

서산의 불교관은 선사상이라 할 만치 禪의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하였고, 선을 설명함에 있어서 반드시 敎를 상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선사상을 별도로 이해하지 않고 禪敎觀이라 하여 함께 고찰한 것이다. 지눌의 禪敎一致의 맥락을 그대로 계승한 禪家다운 호방성이 그의 모든 사유에 자유롭게 흐르고 있다.

서산은 禪旨를 설명하는 「禪家龜鑑」의 첫머리에서 “여기 ‘一物’이 있다.”고 전지한 다음 “三敎聖人從此句出”이라 했다. 삼교의 이름은 각각 다르나 그 근원은 동일하다는 이론이다. 그에 의하면 삼교가 교리상의 차이는 다소 있으나, 본래 심리의 계발과 인간의 수련을 위한다는 점에서 상통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그 “일물”을,

 

소소영영 부증생부증감 명부득상부득(昭昭靈靈 不曾生不曾減 名不得狀不得)이라 하며, 古佛이 출생하기 이전에 일물은 벌써 원만상으로 있었고 부처님도 어떻게 전할 바를 몰랐는데 가섭이 어찌 전할 수 있었겠는가.

 

라고 태초 이전에 이미 구원적 일물이 있었음을 말했다. 불교의 교조인 부처님도 어떻게 전할 바를 몰랐다는 ‘일물’이라면 일물은 부처님보다 훨씬 높은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다른 현자들과 함께 그 ‘일물’의 일부분을 말씀한 현자 중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서산은 삼교의 성인들도 이 일물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구체적인 예증까지 들었다.

 

이상의 설명을 볼 때, 서산의 불교관은 분명히 ‘禪深敎淺’적 사상이며 敎理를 해석하여 말한다면, ‘捨敎入禪’이 스님의 태도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서산은 무조건 ‘敎’를 반대하는 궁극적 선종위주만이 아니라 충분히 ‘敎’를 살리고 나서 그 위에 ‘禪’을 올린 ‘會敎歸禪’적 입장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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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배우는 자는 먼저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으로써 불변과 수연(隨緣)의 두 뜻이 곧 자기 마음의 성품과 형상이며 대뜸 깨치는 것과 점차로 닦는 두 문(門)이 자기 수행의 처음과 끝임을 상세히 분별한 연후에 교의(敎義)를 내버리고 다만 자기 마음의 현전일념(現前一念)으로써 禪旨를 자세히 참구한다면 반드시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몸이 빠져 나오는 살 길이다.

 

활구 참구를 올바로 하기 위해서는 입문 단계에서 세 가지의 중요한 요소 곧 화두에 대한 굳건한 믿음(大信根)과 화두를 타파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大墳志), 화두에 대한 강한 의심(大疑情)의 세 가지가 반드시 곁들여져야 한다. 이에 대해 수미산이 자리 잡고 있는 것과 같은 믿음, 부모를 죽인 원수를 단칼에 베어 버리려는 것과 같은 분심, 캄캄한 곳에서 극히 중요한 일을 꼭 해 내고자 할 때의 마음가짐과 같은 의심이라 하여, 이 셋이 함께 같추어졌을 때 제대로 된 참구를 할 수가 있다.

 

물론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커다란 의심이다. 참선하는 사람이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병이요, 크게 의심할 때 반드시 커다란 깨달음이 있다고 하는 것처럼 큰 의심을 대의단의 핵심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삼요(三要)의 어느 한 마음이 참구상에서 나타난다면 그것은 바른 행법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입문 단계에서 갖춰야 할 마음 자세이다.

 

이런 면에서 활구란 논리나 의미, 즉 머리 속으로 생각하고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한 생각에서 하나의 강한 의심만이 가득해 있는 참구 양태를 말한다. 화두를 참구하는 것은 너무 조급히 하거나 느긋이 하지 말고 거문고 줄 고르듯이 하라고 한다. 이렇게 아무런 맛도 재미도 없이 답답하고 암담하며 꽉 막힌 상태에서, 은근하고 끊임없이 혼신을 다해 지속할 때, 바로 그런 상태가 되어야만 비로소 부처님과 조사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한다.

 

특히 捨敎入禪에서는 상‧하근기의 구별을 통한 가르침, 즉 조사선의 선법을 곧바로 수행할 수 없는 근기가 낮은 사람은 교학을 공부하여 불교의 진실한 내용을 안 다음 선문으로 들어가라,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먼저 이론을 살핀 후 이를 놓고 다시 선으로 들어가라는, 즉 선 입문 전 모든 사람들의 교학 수학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만의 독특한 면을 볼 수가 있다. 선주교종이지만 교학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인정하고 반드시 살펴보도록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선교겸수관(禪敎兼修觀)은 지눌에게서 그 연원을 찾아볼 수 있고 그것을 조선조에 와서 서산이 다시 중흥시킨 것이다.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조계종에서 수용하고 있는 참선, 간경, 염불 등의 다양한 수행법은 한국불교 전체의 역사 속에서 줄곧 취해 왔던 원융적 수행법이다.

 

특히 고려 말기 간화선(看話禪) 수행이 정착된 이래 오늘까지 간화선법은 조계종단 내에서 최상승의 수행법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서는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 아직까지 이 이상의 수행법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수행에 대한 다양한 논의는 그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고, 다만 조계종의 역사 속에서 깨달음의 빛을 이어 온 宗師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인식하에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 후기의 조계종은 조선 중기에 정비된 수행 및 수학 체계에 따라 교학을 연마하고 수행한 결과 여러 고승들이 출현하여 후학 양성과 교학 발전, 그리고 조계종의 법맥을 계승하게 되었다. 즉, 청허 휴정과 부휴 선수(浮休善修, 1543-1615)의 양대 법맥이 조선 후기까지 이어져 조계종의 사상과 수행은 물론 그 문화를 지켜 나가고 발전시키게 되었다. 나아가 이러한 조계가풍은 근대로 연결되어 현 대한불교조계종을 탄생시키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된다.

 

한국불교사에서 근대불교는 대략 19세기 후반부터 1945년까지를 말한다. 왕조체제를 청산하고 근대사회로 이행하기 위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친 이후부터 일본의 지배에서 해방된 시기까지이다. 이 기간에 청허 휴정과 부휴 선수의 양대 법맥을 이어 그들로부터 경허 성우(鏡虛惺牛, 1849-1912), 용성 진종(龍城震鐘, 1864-1940)등이 출현하여 쇠잔해 가던 선풍을 진작시키기에 이른다. 경허 성우와 용성 진종은 모두 태고 보우(1301-1382)의 10세인 환성 지안(喚醒志安, 1664-1729)의 법맥을 이은 조계의 적손이다.

 

3.1운동 이후 불교계에 새로운 선풍을 불러일으킨 것이 선학원의 등장이었다. 선원 수좌들을 중심으로 성립된 선학원은 구한 말 경허스님과 용성스님의 선풍진작 운동이 일구어낸 가시적인 결과이기도 했다. 선학원 운동의 주역으로 참여하였던 이들이 모두 수선 납자들을 중심으로 한 선원 수좌들이었기 때문이다. 선학원은 한국 전통선의 부흥을 위하여 용성, 만공, 성월스님의 협의를 거쳐 구체화되어 1921년 8월 10일 공사를 시작하여 11월 30일에 준공하였다.

 

선학원에서는 1934년 12월 재단법인 조선불교선리참구원(朝鮮佛敎禪理參究院)을 설립하였다. 선리참구원이 설립됨으로써 전반적으로 조직과 재정이 확충되는 계기가 되었다. 1935년 1월에 선학원 계열의 수좌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불교선종 종헌’을 선포하고, 대표 종정에 만공스님을, 종정에 혜월 (慧月)⦁수월(水月)⦁한암(漢巖)스님을 추대하였다. 1935년 1월 5일에 공포⦁시행된 종헌에는 “신라의 도의국사가 창건한 가지산문에 기원하여 고려보조국사의 중천을 거쳐 태고보우국사의 제종포섭(諸宗包攝)으로서 선종(禪宗)이라 칭하였으며....” 라고 하였다. 이것은 원조를 도의국사, 종조를 태고국사라 하고 견성성불과 제세도중(濟世度衆)을 종지로 삼아 1941년에 성립한 조선불교조계종과 큰 차이가 없었다. 조계종의 종지가 선학원의 종지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동산스님은 서기 1912(壬子)년 스님의 세수 23세 때 ‘마음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용성큰스님을 은사로 금정산 범어사로 입산 출가하였다. 스님은 출가후 용성스님과 한암스님으로부터 선교를 익힌 후 은사 용성스님이 출옥한 1921년 봄, 이후부터는 주로 각처의 선원에서 1923년(34세)까지 용맹정진하였다.

 

특히 스님은 1924년 4월 보름부터 3년간을 직지사에서 ‘3년 결사(結社)’를 하였고, 1927년 4월에 금정산(金井山) 범어사(梵魚寺) 금어선원(金魚禪院)에서 하안거에 들어가 참선하던 도중인 7월 5일, 방선(放禪) 시간에 대나무 숲을 거닐다가 바람에 부딪치는 댓잎 소리를 듣고 오도(悟道)하였다는 것은 앞에서 고찰했다.

 

오도한 다음 동산스님은 자신의 견처를 은사 용성스님께 말씀을 드리니 즉석에서 인가를 해주시어 용성선사의 법맥(法脈)을 사자상승(師子相承)하게 되었다. 스님은 의사의 꿈을 저버리고 출세간의 장부로서 만중생을 고해(苦海)로부터 구제하겠다는 서원을 세우신 지 어언 15년, 비로소 마음의 안식처를 찾으신 것이다.

 

동산스님은 은사 용성스님이 입적(1940년 4월 1일, 음력 2월 24일)한 지 불과 1년 밖에 안 된 시점에서 용성스님의 수행, 사상, 행적을 알 수 있는 자료를 취합하여 『용성선사어록』을 발간했다. 동산스님이 용성스님의 법맥을 계승했다는 것은 『용성선사어록』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알 수 있다.

 

만약 상음(賞音)의 자기(子期)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어느 누가 백아(伯牙)의 거문고 소리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소리를 알아듣는 자는 적고 뜻을 잃은 자는 많다.

그러므로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부처님이 꽃을 드시어 대중에게 보이셨을 때 대중의 수가 백만이었건만 오직 금색 두타인 마하가섭만이 파안미소하였다. 또한 황매산중(黃梅山中)에는 득도한 자가 자그만치 칠백여 명이었으나 오직 노행자(盧行者)만이 밤을 틈타 입실(入室)한 것이다.

슬픈 일이다. 때는 바야흐로 성인께서 가신 지가 오래다. 마는 강하고 법은 약하다. 여래(如來)의 정법(正法)이 파순(波旬)의 마설(魔說)로 변질되어 가고 임제(臨濟)의 종풍(宗風)이 야간의 긴 울음소리에 떨어져 가고 있다. 만일 선사(禪師)와 같이 행(行)이 높고 지혜(知慧)가 원대한 자가 아니라면 아무리 설(說)한들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선사의 살아온 인연과 법을 얻은 인연, 세 번의 깨달음, 다섯 종파의 변명 문답의 기연, 근기를 따른 설법, 선문강화, 삼장역회의 노력, 불교총림의 시설, 치아사리의 방광과 서상, 방생의 십년, 기타 사람을 위한 노파심절 등이 낱낱이 선사의 어록 가운데 실려 있으니 구태여 번거롭게 얘기할 것도 없다. 각자가 한번 이 어록을 보기 바란다.

선사께서 오심이여,

끓는 번뇌(煩惱)에 시원한 감로수(甘露水)요

선사께서 가심이여

인천(人天)의 안목(眼目)을 잃었도다.

아아! 슬프도다, 교화의 연이 이윽고 끝나시니 작은 병환을 보이셨다. 새와 짐승들도 슬피 울고 숲속의 나무도 흰옷으로 갈아입는구나. 하물며 우리 제자들이야 누가 슬피 울어 눈물 흘리며 옷깃을 적시지 않으리오. 선사께서 엄연히 꾸짖으시도다.

산과 산 물과 물은

나의 모습이요

꽃과 꽃 풀과 풀은

나의 뜻이다.

등한히 왔다 등한히 가니

밝은 달이 비추고

맑은 바람이 분다.

만약 이 뜻을 요달하면

어찌 오고 가는 상(相)이 있고

사랑과 미움의 정이 있으리오

정은 남고 지혜는 격(隔)했으니

간절히 모름지기 뜻을 가져라.

말씀을 마치고 엄연히 가셨다. 선사가 가신 지 1주기, 소상(小祥)을 맞이하여 궤 속에 간직된 선사의 유고를 내가 꺼내어 얻고 대중들에게 돌려가며 보였다. 그때 마침 신도 가운데 최창운 씨가 듣고는 매우 기뻐하며 유통하기를 간청하였다. 이에 신남신녀들에게 권선문을 내어 편집하고 간행하여 유포하니 영원히 무궁하기를 바란다.

특히 바라는 바는 성수는 하늘처럼 항상하고 이 땅은 오래도록 영원하여라. 종풍은 끊이지 않고 부처님의 태양은 길이 빛나라. 법계의 함령(含靈)들이여! 마음 깨쳐 성불하라.

시(時) 세존응화 2968년 3월 3일

문인(門人) 동산혜일(東山慧日) 발(跋)

 

위의 발문에서 필자가 착목하는 것은 동산스님이 용성스님의 법을 계승하려는 의식이 충만하였다는 것이다. 동산스님은 이 발문에서 1941년 전후에 마(魔)가 강하고 법은 약하며, 여래의 정법이 마설로 변절되고 임제의 종풍이 사라지고 있다는 현실인식 아래 은사 용성스님의 법과 정신을 계승 구현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임제종풍을 선양하겠다는 원력이 지대함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간화선은 선교일치(禪敎一致)의 관점을 취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사교입선(捨敎入禪)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동산대종사는 기본적으로 사교입선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을 다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처음에 우리 수좌(首座)가 문자(文字)를 여의고 공부(工夫)에 들어간다. 사집(四集)·사교(四敎)·대교(大敎)까지 다 간경(看經)해 마치고는 사교입선(捨敎入禪)하는 것이다. 교(敎)를 버리고 선(禪)에 들어와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다가 활연대오(豁然大悟)를 한다. 선(禪)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기에 선문(禪門)에서는 도무지 글 보는 것을 허락(許諾)치 않고 다만 활구(活句)참선(參禪)만 하게 한다.

 

 

위에서 고구한 바와 같이 동산대종사는 사교입선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며 활구참선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파하고 있다.

 

 

선문(禪門)에 참의(參意)와 참구(參句)가 있다. 참의(參意)라는 것은 보고 듣고 알고 행(行)하는 공(功)[見聞解行之功]이 있지만 참구(參句) 즉 활구참선(活句參禪)은 견문해행지공(見聞解行之功)이 없다. 다만 아무런 자미(滋味)도 없고 찾을 길 없고 잡을 수도 없는[無滋味沒摸索] 話頭上에 다만 이끌어 나갈 뿐이다.

“어떤 중이 조주(趙州)스님께 묻되, 개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조주(趙州)가 답(答)하기를 무(無)니라[有僧이 問趙州호대 狗子도 還有佛性也無잇가? 州云 無니라].” 이 무자(無字)는 큰 불더미와 같아서 불법(不法) 알음알이[佛法知解]를 둘 곳이 도무지 없다 하였다. 참의(參意)와 참구(參句)가 이와 같이 다른 것이다.

 

동산대종사의 간화선은 먼저 ‘의단(疑團)’즉 핵심이 되는 언구(言句)에 대한 의심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리고 이때 의심의 대상으로서의 언구(言句)는 ‘무자(無字)화두(話頭)일구(一句)’나 ‘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이다. 이 일구(一句)인 화두(話頭)를 통해서 모든 알음알이를 단칼에 잘라버리고 구경각에 이를 수가 있다고 동산대종사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였다.

 

만법귀일(萬法歸一)하니 일귀하처(一歸何處)오. 화두(話頭)를 그냥 하나는 무엇인고? 하는 것은 조사(祖師)의 뜻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조사(祖師)의 의지(意旨)가 하나가 돌아가는 곳이 있는 것을 분명(分明)히 일렀다. 이것을 알려면 불가불(不可不)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 이렇게 의심(疑心)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렇게 의심(疑心)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공(空)한 데 들어 앉아 공(空)한 것만 가지고 일체(一切)가 공(空)했다고 한다.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선사(禪師)의 공안(公案)이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요, 불법(佛法)이란 깨침으로써 원칙을 삼는 것[以悟爲則]이니 크게 疑心하는데 반드시 크게 깨치는 道理가 있는 것이다.

 

동산스님은 몽산화상의 말을 빌어서 화두상에 의심이 있어서 끊어지지 않는 것이 참된 의심이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화두는 곧 의심이라는 것이다. 참된 의심이란 고묘(古廟)의 향로와 같아서 다만 성성하고 적적할 따름이지, 혼침과 망상이 붙을 곳이 없다고 하였다. 만일 의심을 하다가 조금 지나서 의심이 사라지는 것은 참된 의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화두가 순일해지면 의정(疑精) 하나만 남게 되는데, 그 의정은 의정하는 생각도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의심하는 의심만 현전하면 혼침 등의 일체 망상이 저절로 없어져서 성성적적(惺惺寂寂)하지 않으려고 해도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화두란 하나의 집중된 의심 덩어리(疑團)을 의미한다.

 

동산스님이 궁극적으로 보고자(看話) 하는 것은 의심이라는 방법적 자각을 통해서 자기 존재의 불성(佛性)을 환기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삶의 찰라찰라에서 부처다움인 것이다. 그러나 스님에 의하면 “만약 터럭 끝만큼이라도 제하여 버릴 번뇌 습기가 남아 있다면, 이것은 아직도 마음을 뚜렷이 깨치지 못한 까닭이니, 이런 사람은 다만 다시 분발하여 크게 깨치기를 기약할 따름이라고 한다.”고 지남(指南)하였다. 이와 같이 돈오에 대한 언급은 스님의 독자적 선법의 제창이라고 볼 수 있다.

 

성철스님은 「동산대종사 사리탑비」에서 은사 동산혜일(東山慧日)대종사가 임제종 종풍 등을 다음과 같이 천양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어떤 깨지고 눈먼 머리 깎은 이가 있어서 독을 바른 크나큰 북을 높이 달아 놓으니 불조가 목숨을 잃고 금강보검을 비껴 차니 일월이 더욱 빛나더라. 삼현(三玄)의 과갑(戈甲)을 방(榜)과 할(喝)의 아래에 펼치니 평지(平地)에 큰 파도가 도도하고 사빈주반(四賓主伴)을 언상(言像) 밖에 증험하니 푸른 하늘에 빠른 번개가 소리치도다. 사자가 몸을 뒤치매 백 가지 짐승들은 뇌가 찢어지고 코끼리가 몸을 돌리매 미진처럼 많은 중생이 널리 법은에 젖도다. 험하기는 깎아지른 천길이요, 꽃은 만 떨기를 펼침이라. 영축산 고개의 보배달은 그것을 힘입어 더욱 밝고 조계산의 신령스러운 파도는 그것을 인하여 더욱 용솟음치니 실로 임제(臨濟)의 적실한 골수요, 태고(太古)의 정밀한 혈맥(血脈)이라. 이것은 우리의 스승 동산 대종사의 가풍의 상도(常道)로다.

 

3. 금정산문(金井山門)의 종장(宗匠)

 

범어사는 1200여년의 장구하면서도 찬란한 역사를 갖고 있는 사찰로서 부산지역의 불교를 대표하는 사찰이다. 한편 근·현대 불교사를 돌이켜 보건대 범어사의 사격은 선찰대본산이라는 독특한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 격동의 세월이었던 근·현대 불교의 버팀목 역할을 다하였던 사찰이다. 이 같은 범어사의 역사는 범어사의 역사, 자존심, 정통성을 지키려는 동산대종사의 피와 땀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동산대종사는 범어사를 통하여 지역사회의 주민뿐만 아니라 전 국민의 아픔을 치유하였고, 지역사회를 통하여 불교가 발전하도록 앞장을 섰다. 그래서 불교가 민족의 문화로 자리 잡게 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이다.

 

동산대종사는 주석처요, 정화의 산실인 범어사를 중심으로 불교계 전체의 문제, 고민, 나아갈 길에 결코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고 위법망구의 정신으로 교단, 종단의 아픔과 나아갈 길에 대하여 그 문제의 중심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동산대종사는 현재의 범어사로, 현재의 부산불교로 그리고 현재의 조계종단을 반석 위에 놓으신 불세출의 선지식이었다.

 

앞에서 고구한 바와 같이 동산대종사는 1912년에 범어사에 출가하여 범어사 금어선원에서 참선하던 도중 1927년 7월 5일, 방선(放禪) 시간에 대나무 숲을 거닐다가 오도하였다. 동산대종사는 은사 용성스님이 1940년 4월 1일 입적한 후 1941년 하안거부터 1965년 3월 23일 입적하기까지 참선 납자들을 제접하면서 간화선풍을 진작시켰다. 마치 석가모니 부처님이 길에서 태어나, 길(道)을 묻다가 길(道)을 깨달은 후, 길(道)을 가리키다가, 길에서 입적한 것과 같이 동산대종사에게는 범어사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길’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동산대종사는 마치 마조(馬祖, 709-788) 대사가 선불교 역사상 눈 밝은 제자들을 가장 많이 길러낸 것과 같이 스님의 가풍이 범어사, 해인사, 쌍계사 등에서 이어지고 있는 것만 봐도 임제선풍을 진작시켰던 선맥의 대종장으로 증명되고 남음이 있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동산대종사의 문인(門人) 성철스님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팔을 자르는 정성과 다리를 찌르는 분심으로 힘써 조사의 도를 탐구하고 곁으로 경전을 찾으며 깊이 심오한 곳에 들어가니 환하게 사무쳐 깨달아 밀의(密意)를 밝게 갖추고 현묘한 근원에 묘하게 계합하였으니 어찌 세세생생에 인연이 성숙하고 오랜 겁 동안에 공덕이 이루어진 분이 아니겠는가. 해는 병자년(1936) 겨울에 용성 사조께서 정전옥첩(正傳玉帖)을 손수 써서 스님에게 특별히 하사하셨으니 그때에 불효(不孝) 성철(性徹)도 참여하여 모시었다. 그 글을 간략히 소개하면 “이 해동초조보인을 가져 계맥과 정법안장 정전의 신표를 삼아 동산(東山)에게 부여하노니 잘 스스로 호지하여 하여금 끊어지지 않게 하라” 하였으니 그 중임을 맡긴 것이 이와 같더라.

그로부터 사자좌에 버티고 앉아서 용상대덕들을 널리 제접하니 그 기지는 번개치는 것 같고 말씀은 우레 소리와 같아서 돌연히 거두어 드리니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다 마르고, 홀연히 놓아 버리니 앵무새 노래하고 나비가 춤을 춤이라. 넓고 넓은 하늘에 칼빛이 번쩍이고 둥글고 둥근 옥쟁반에 구슬빛이 영롱하더라.

불조의 둥우리와 구덩이를 다 깨트리고 중생들의 결박을 모두 풀어주었으니 위대하고 장하여라. 드넓은 세상에 비할 데 없도다.

때로는 천화대계를 연설하시어 수만 명의 제자들에게 계첩을 주시고, 명리를 떨쳐버리고 교화를 전국에 입혔으니 해인사, 범어사, 서울, 부산이 가장 성하게 교화한 곳이더라. 스님과 신도 사부대중이 찬탄하지 아니함이 없더니라.

 

이어서 성철스님은 동산대종사의 교화행(敎化行)을 다음과 같이 천양하였다.

 

무술년 동지(冬至)달 종단대표로서 또 태국에 가셔서 세계불교대회에 참예하사 부처님의 말씀을 깊이 연설하시고 조사의 가풍을 높이 드날리시니 그 음성이 낙락하여 모든 대중들을 감동시키니 세계 만방의 스님들과 신도들이 희유한 일이라 칭탄하니라.

경자년(1960) 이후로는 항상 청풍당에 머물면서 납자를 다루는 용광로는 더욱 뜨겁고 그들을 편달하는 망치질이 더욱 신묘하여 봉황의 새끼들은 나뭇가지에 가득하고 금빛고기들은 못에 가득하더니라.

 

또 성철스님은 동산대종사의 “문도는 수백이고 단월은 수만이었다. 가르침 받음이 간절하고 독실하여 모두 큰 은혜에 젖었으니 모두 다 절집의 동량이요, 큰 배의 나침반이라. 그러나 큰 법을 비밀히 전한 것은 다른 사람이 옅보지 못하니 이것은 황벽의 이른바 도란 마음으로 깨닫는 데 있고 언설에 있지 않다고 한 까닭이다.”고 하였다. 성철스님은 은사 동산대종사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을사년(1965) 늦은 봄 금강계단에서 보살계를 설해 마치고 대중들에게 선언하시되, “나는 다시는 이 자리에 오르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 말을 들은 이들이 모두 놀라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더니 3월 24일에 이르러 과연 원적하시니 천지가 캄캄하고 초목도 슬피 울더라. 스님네와 신도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어 장례를 치르니 인파가 3만이라 산에 가득하고 계곡에 넘쳐서 슬퍼하는 이들이 수천에 이르러서 하늘을 가리고 태양을 가리었으니 그 또한 수 백년 이래에 미증유한 일이더니라.

 

Ⅳ. 맺음말

 

동산대종사(1890-1965)의 발자취는 한국 근·현대불교의 역사이다. 동산대종사는 한국 근·현대 불교사의 중심에서 대승보살도의 살아있는 실증을 행동으로 보이신 삼학(三學)의 보살(菩薩)이었다.

 

동산대종사는 ‘육체의 병을 고치는 의사에서 마음의 병을 고치는 의사’가 되어 제세도중(濟世度衆)하는 서원(praṇidhāna)으로 1912년(壬子)에 용성스님(1864-1940)을 은사로 범어사로 입산 출가하였다. 스님은 출가후 용성스님과 한암(1876-1951)으로부터 선교를 익힌 후 용성스님이 출옥한 1921년 봄, 이후부터 각처의 선원에서 1923년까지 정진하였고, 1924년 4월 보름부터 3년간을 직지사에서 결사를 한 후, 1927년 4월에 범어사 금어선원에 하안거에 들어가 참선하던 도중인 7월 5일, 방선(放禪)시간에 대나무 숲을 거닐다가 바람에 부딪치는 댓잎 소리를 듣고 오도(悟道)하였다고 한다. 오도한 다음 스님의 견처를 은사 용성스님께 말씀을 드리니 즉석에서 인가를 해주시어 용성선사의 법맥을 사자상승(師子相承)하게 되었다.

 

동산스님은 일제강점기에 계(戒)의 경시(輕視) 사조에 응전으로 수행자의 본분사인 삼학(三學) 균수를 통해서 한국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한 명안(明眼) 종사(宗師)였다. 그래서 은사인 용성스님으로부터 1936년 47세에 지리산(智異山) 칠불선원(七佛禪院)의 서상계맥(瑞相戒脈)을 전수(傳受)받고, 또 오랫동안 범어사에 전래되어 오던 중국 법원사(法源寺)의 계법(戒法)을 영명(永明)스님으로부터 1943년에 전수받아, 그해부터 금강계단의 단주(壇主)가 되어 전계화상으로 계를 전수하기 시작하였다. 동산대종사는 수행자가 참으로 공부를 여실히 해나가려면 “계(戒)가 없는 정(定)이 없고 정(定)이 없는 혜(慧)가 없다”고 주장하시면서 삼학 균수를 주창하셨다. 동산대종사는 계행의 목적을 자성을 회복하여 깨치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런 계율 수호에 대한 투철한 의식으로 종단의 청정가풍 진작을 위한 교단의 정화운동에 진력한 선봉장이었다.

 

동산대종사는 은사 용성스님이 1940년 4월 1일 입적후 1941년 하안거부터 1965년 3월 23일 입적하기까지 범어사 조실로 간화선풍(看話禪風)을 진작시킨 간화선법(看話禪法)의 제창자(提唱者)로 스님의 가풍을 펼쳤다. 스님의 가풍은 수행자가 궁극적으로 보고자(看話)하는 것은 ‘의심(疑團)’이라는 방법적 자각을 통해서 자기 존재의 불성(佛性)을 환기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님에 의하면 ‘만약 터럭 끝 만큼이라도 제하여 버릴 번뇌 습기가 남아 있다면, 이것은 아직도 마음을 뚜렷이 깨치지 못한 까닭이니, 이런 사람은 다만 다시 분발하여 크게 깨치기를 기약할 따름이라고 한다“고 지남(指南)하였다. 이런 돈오(頓悟)에 대한 언급은 스님의 독자적 선법의 제창이다.

 

범어사는 1200여년의 장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 부산지역의 불교를 대표하는 사찰이다. 한편 근·현대 불교사를 돌이켜 보건대 범어사의 사격은 선찰대본산(1911년)이라는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 한국불교의 전통, 선맥 계승을 명분으로 내세운 운동의 주역으로 참여하였다. 범어사는 일제하 수좌들의 항일불교, 전통의 선과 계율을 수호하는 근거처였던 선학원 창설, 운영에도 깊이 관여했다. 이는 선찰대본산이라는 자부심, 임제종 운동시의 민족불교 지향 정신의 계승 등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전통에 동산대종사는 주석처로 정화의 산실인 범어사를 중심으로 불교계 전체의 문제, 고민, 나아갈 길에 위범망구의 정신으로, 교단을 스님의 피와 살로 느끼면서 보살행을 실천한 선각자이었다. 동산대종사는 현재의 범어사로, 현재의 부산불교로 그리고 현재의 조계종단으로 반석 위에 놓으신 불세출의 선지식이었다. 스님의 이런 덕화(德化)의 가풍이 현재 범어사, 해인사, 쌍계사 등에서 이어지고 있다. 스님의 가풍은 임제선풍을 진작시켰던 선맥의 대종장으로 증명되고도 남음이 있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동산대종사의 문인(門人) 성철스님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아아! 스님의 금옥 같은 아름다운 모습과 철석같은 마음으로 무궁화 꽃이 만발한 옛 동산을 교화하신 40성상은 부지런히 종승(宗乘)을 천양하고 정법을 붙들어 세우는 것을 자신의 소임이라 여기시어 험악한 산길을 시원하게 개척하고 수많은 폐단을 확연히 소탕하여 조사의 등불을 창해의 깊은 곳에 안치하고 교단을 태산의 견고한 데 두었으니 큰 원력을 타고 온 사람이라고 누가 이르지 않겠는가.

 

그러면 이런 훌륭한 스님의 유업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역시 동산대종사의 문인(門人) 능가스님의 제안이 참고가 된다.

 

한국불교의 기본 방향의 대의는 안정수도, 위계질서 확립, 재정 합리화 운영, 현대적 포교, 도제양성, 복지사업 등으로 요약할 수 있으나 이것을 위해서는 선행해야 할 일이 역시 제2정화불교운동의 극명한 수행에 의해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하겠다. 이 대업의 약점을 요약한다면 먼저 불교인의 역사의식과 시대사명의 확고한 자각과 인식이다. …… 장기적이고 단기적인 복합성 있는 강력한 현대적 도제양성 사업의 즉시 수행이다.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교육이 아니라 역사의식과 시대 소명에 즉응할 수 있는 도제양성이 결단코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만이 한국불교의 미래를 약속하는 관건이 될 것이다.

 

간디가 인도인의 자존심인 것처럼 한국 근·현대 불교사에서 동산대종사는 한국 불교인의 자존심이다. 훌륭한 인재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랜 계획과 관심과 지원과 관리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아야겠다.

 

 

참 고 문 헌

<약 호 표>

CD : 靑潭大宗師全書(卷數, 페이지數)

Gītā : The Bhagavadgītā

HD : 韓國佛敎全書(卷數, 페이지數, 段)

T : 大正新修大藏經(卷數, 페이지數, 段)

I. 原典類

「金剛三昧經論」 上․中(HD 1).

「大乘起信論別記本」 (HD 1).

「大乘起信論疏記會本」 (HD 1).

「法執別行錄節要幷入私記」 (HD 4).

「法華經宗要」 (HD 1).

「불국품」『유마경』(T 14).

「象跡喩經」 『中阿含經』 7 (T 1).

「禪家龜鑑」 上 (HD 7).

「惺牛 鏡虛集」 (HD 11).

「十門和諍論」 (HD 1).

「涅槃經宗要」 (HD 1).

「儒家龜鑑」 (HD 7).

「定慧結社文」 (HD 4).

「定慧結社文序」 (HD 4).

「第九能斷金剛分」, 『大般若波羅蜜多經』 권 제1, 玄裝譯 (T 7).

「中論」 1 (T 30).

「華嚴一乘法界圖」 (T 45).

『(小品)般若波羅蜜經』 권 제3(T 8).

『高僧傳』「曇無讖傳」(T 50, 336,c)

『금강반야바라밀경오가해설의』 (HD 7).

『金剛經』, 李箕永 譯解(1987), 서울, 한국불교연구원.

『金剛般若波羅蜜經』 鳩摩羅什譯. 권 제1(T 8).

『大般若波羅蜜多經』 권 제45∼49(T 5).

『大乘起信論』(T 32).

『大乘莊嚴經論』 권 제7(T 31).

『大智度論』 권 제19(T 25).

『大慧語錄』 권 제 28(T 47).

『東山大宗師文集』(동산대종사문집편찬위원회, 1998)

『滿空法語』

『妄盡還源觀』(T 45).

『妙法蓮華經』 (T 9).

『菩薩瓔珞本業經』卷下 (T 24, 1020,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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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潭大宗師全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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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Postion of Venerable Dong-san in the History of Korean Buddhism

 

 

Kim, Sun-keun

Emeritus Professor, Dongguk University

 

At the age of 47(1936), the venerable Dong-San was handed down from his guru the master Yong-Sung. He spent his entire life preserving the teachings of his guru. He strongly opposed to the Japanese way of changing Korean Buddhism and asserting traditional Korean Bhikkhu-Buddhism.

The movement aimed at preventing unwholesome deeds and recommending wholesome deeds. It can be said the movement expressed that Buddhism meant purifying mind. External purification was meant as depending attack against Saṇga and the Buddhist doctrine. It was one of the ultimated goals in the Buddhist followers that they were eager to embody pure land in real life. It is started by practising precepts and realizing loving-kindness by which we could established pure land. In terms of that, purification of society and universe can be attained.

In Dong-San’s Seon-thinking framework, keeping the precepts is of the utmost importance. According to him, liberation and action are not two but one. If you are aware that there can be no samādhi without śīla and no prajnā without samādhi and you continue practice, the three precepts will automatically be realized.

Dong-San stands firmly on the side of SagyoIpsen(捨敎入禪), teaching the importance of koan meditation(公案). Dong-san states that the final stage of enlightenment can be achieved through doubt. According to Dong-san, Koan does not mean anything else but one concentrated chunk of doubt(Uidan, 疑團). Uidan is methodological doubt, a tool and a method with which we push to a dead end from which we cannot escape. Therefore, in the Koan Seon by Dong-san, Koan, conbined with doubt, is the most important form of practice. Dong-san’s Koan Seon method is ‘the co-relationship between Uidan and Koan’ and the concept of sudden enlightenment(頓悟).

Dong-san’s thought did not mean to the Buddhist doctrine systematically but mean to awaken sentient beings who suffer from ignorance(Avidyā), affliction and lead them the truth. Thus, his influence to the modern history of Koran Buddhism is indeed great and influential. 

 

Key words : Venerable Dong-san, the protector of śīla, the purification movements, teaching the importance of Koan meditation, the supreme patriarch of the Bum-oh temple, A Bodhisattva of the 20th century.

 

교수불자연합회 <gby2010@hanmail.net>;

 

 

 

 

 

 

 

 

 

[출처] 동산대종사의 한국불교사적 위상|작성자 만남 창조 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