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스님

생태이론과 화쟁사상의 종합

수선님 2021. 1. 17. 11:24

교수신문 주최 제1회 학술에세이 최우수상 수상작

 

생태이론과 화쟁사상의 종합

 

이도흠(인문대·국문과) 교수

 

1. 침묵의 누런 봄날 관악에서 : 서양의 생태론은 대안일까?

인류공멸로 가는 완행열차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봄이다.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다. 귓볼을 간질간질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엔 남국의 화기가 가득하다. 눈부시고 투명한 햇살이 대지로 쏟아진다. 얼었던 땅에 다시 온기가 도는가 했더니 이내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건강하게 살진 보리 잎이 쑥쑥 솟아오르면 종다리는 포로롱 포로롱 날아오르며 노래를 하고 나비는 나풀나풀 수평 곡선을 그리며 향기를 흩뿌린다.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 사이로 송사리는 기지개를 켜고 개구린 퐁당퐁당 뛰어들며 파문을 그린다. 그 파문에 버들개지는 움을 틔우고 풀들은 파릇파릇 언덕을 뒤덮는데 그 사이로 노란 민들레가 점점이 수를 놓는다. 겨우내 허기진 기다림과 그리움을 저 어둡고 깊은 땅 속에서 햇빛 찬란한 우듬지까지 길어 올리고 올려 우죽에서 밑둥치까지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녹색 하나로 만여 가지 색을 내어 수묵화를 그려 거기 빛과 생명이 약동하는 봄날, 나그네는 절로 흥에 겨워 느릿느릿 풀밭 길을 걸으며 상춘곡으로 화답을 한다.

이제 이런 봄은 서울 인근에는 없다. 1960년대로 끝이 났다. 달력엔 봄이 한창이건만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봄은 왔어도 봄 같지 않음)! 미음완보(微吟緩步)하며 답청(踏靑)을 하려 관악에 올랐건만 햇빛은 부옇다. 북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북악산은 고사하고 한강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나무에 물이 올랐지만 종다리도, 그 흔한 참새의 노래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계절의 퇴락을 알리며 하나 둘 조락(凋落)하였던 낙엽들은 거의 부식이 되지 않은 채 수북히 쌓여있고 그 밑으론 생명이 약동하는 소리가 없다. 얼었던 시내는 흐르건만 아무런 생명체도 담지 못한 채 광물질 사이로 고독한 하행을 한다. 50여 년 만의 봄 가뭄에 겨우 물길을 그리는 그 꼴이 참으로 안쓰럽다. 민들레꽃을 서너 송이 확인할 뿐 꽃을 보기도 어렵다. 진달래나 피어야 그나마 이 산 자락에서 갈회색과 초록 빛 사이로 분홍 때깔을 만날 수 있다. 봄이 왔건만 봄 같지 않은 침묵의 봄. 하늘은 황사로 누렇게 뜨고 그 아래 사람도 알레르기성 비염, 결막염, 인후염 등으로 눈, 코, 입이 막혔는데 봄의 찬가는 어느 구멍을 통해 표출될 것인가? 이제 우리는 어디에 가서 풀을 밟으며 꽃향내에 흠씬 취하여 상춘곡을 부를 것인가? 논두렁을 지나 밭두렁을 달려 푸른 언덕을 뒹굴다 흙 강아지 되어 들어가면 향긋한 쑥개떡을 쪄놓고 함박웃음으로 맞아주시던 어머닌 어디서 다시 만나랴?

너설을 타고 올라 연주대에 올라 지구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본다. 어디 서울뿐이랴? 전 지구가 환경위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 1초 동안 0.6 헥타아르의 열대우림이 파괴되고 하루에만 100여종의 생물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2050년까지 80%의 이산화탄소의 양이 증가하여 2100년까지 지구의 평균온도는 3도, 해수면은 0.65미터나 상승할 것이라고 과학자들은 예측한다. 오늘도 수억의 생명체가 제 명보다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살아남은 자라 해서 얼마나 더 나을까? 오염된 공기와 물과 토양을 먹으며, 또 이를 먹고 자란 생물을 포식하며 지구상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이미 오래 전에 자연스러운 삶을 상실하였다. 8천 미터 雪山을 나는 새나 북극의 백곰까지도 환경오염으로 신음하고 있다. 살충제에 죽은 벌레를 새가 먹고 한 쪽 날개가 퇴화한 새를 낳고 그 새를 잡아먹은 독수리가 고공을 날다가 갑자기 떨어져 죽듯, 중금속은 지구상의 모든 살아있는 것의 몸에 조금씩 축적되고 있다. 소라 수컷을 암컷으로 변화시킨 농약 속의 환경 페르몬이 도시에까지 날아와 극히 미량으로도 도시 남자들의 정자 수를 감소시키고 여성화를 촉진시키고 폐암을 유발하듯, 그것은 소리도 없이, 서서히, 그러나 분명한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이제 환경위기는 어느 지역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지구 위의 모든 생명체가 이 모순 속에 던져진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이기에 사태의 심각성이 더하다.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는 세계적, 구조적, 순환적, 복합적, 불가역적, 일상적 특징을 갖는다.

환경위기는 더 이상 한 지역이나 나라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중국의 먼지와 대기오염물질, 바이러스가 편서풍을 타고 한국으로 날아와 황사현상을 일으키고 산성비를 내리고 입도열병 같은 병을 퍼트린다. 황사는 일본에도 내리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 동부에까지 이른다. 지구의 허파인 아마존의 열대우림이 파괴되면 지구의 대기에 이상이 생기고 혼란상태에 이른 대기는 바다에 영향을 미치고 유럽에 폭설을 뿌리고 아시아에 홍수를 가져온다.

환경위기의 문제가 심각한 것은 구조적인 동시에 순환적이라는 점이다. 대기오염이 산성비와 산성안개를 만들고 이것이 토양과 수질을 오염시키고 이로 산림이 파괴되고 동식물이 멸종한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산림파괴로 홍수와 가뭄이 일고 이로 토양과 수질이 오염되며 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인간은 더 많은 문명의 이기들을 부려 대기를 더욱 오염시킨다.

환경위기는 또 복합적이어서 하나의 요인이 여러 결과를 야기한다. 자동차 배기가스가 한편으로는 대기를 오염시켜 호흡기 질환을 유발하고 이 속의 이산화탄소는 온실효과를 만들어 지구의 온난화를 강화하고 산화합물은 산성비를 만들어 토양과 수질을 오염시킨다. 이렇듯 환경위기는 하나의 동인이 여러 문제를 낳는, 곧 복합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환경위기는 특수한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언제든 오염된 공기를 마시고 바람을 타고 날아온 살충제의 잔여물을 호흡하고 중금속에 오염된 채소와 어패류를 먹는 것처럼 모든 생명체가 매일 매일 겪어야 하는 '일상'이다. 그럼에도 환경문제는 한 번 파괴되면 원상이 절대 회복되지 않는 불가역적 성격을 갖는다.

몇몇 학자들은 인류가 금세기 안에 제3의 인종의 탄생을 볼 것이라고 경고한다. 지금도 환경오염으로 기형아는 속출하고 있다. 텔레비전 드라마 에 나오는 외계인처럼 파충류를 닮은 아기가 지구 곳곳에서 태어나면, 인류의 반 이상을 단번에 몰살시키는 천재지변이 일어난다면 인류의 환경파괴는 멈출까? 바람이 황사덩이를 몰고 지나가는 사이 잠시, 연주대 바위 전체가 달리는 착각을 하였다. 그래, 지구 자체가 서서히 인류공멸로 가는 완행열차인데 이 열차 안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똥처럼 그리 살 일이다.

구름이 절벽에 부딪쳐 솟아오르듯 저 아래로부터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왜,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산업화와 도시화, 인구의 급증, 자본주의 체제와 세계화, 과학기술중심주의, 기계론적이고 이원론적 패러다임, 가부장적 사고 등 원인은 다양하다.

이에 대해 환경주의자들은 청정기술을 통하여 통제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유조선이 유출한 기름을 제거하기 위하여 화학약품인 유분산 처리제를 뿌리면 이것이 바다를 오염시키는 예에서 보듯 환경주의적 대안들은 기계적 세계관과 인간중심주의를 바탕으로 하였기에 근시안적이고 미봉책이며 국부적이다. 인간이 전 지구의 중심에 서서 자연을 착취하고 개발하는 것을 문명으로 여긴 인간중심주의와 자연을 인간이 이용하는 대상으로 간주해버린 기계적 세계관에서 환경위기가 비롯된 것이 아니던가? 과학의 객관성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며 과학적 활동은 합리적이고 가치중립적(value-free)이며 과학은 누적적으로 발전한다는 과학관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이었던가? 엔트로피 이론을 통해 우리는 자연세계에서 인공적 변화란 사용 가능한 에너지를 불가능한 형태로 바꾸면서 주위의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방향으로밖에 일어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닫지 않았던가? 전지구가 경쟁적으로 벌이는 경제성장이란 사용 가능한 자원을 사용 불가능한 쓰레기로 바꾸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결국 모든 것을 쓰레기로 전환시키는, 종말로 치닫는 질주일 따름이다.

이제 생태론적 사고로 전환해야 함은 자명하다. 여기 바위 틈 사이로 벌레가 기어가는 데도 중력이 작용하듯이, 우주의 섭리는 이 산과 저 산, 이 땅과 저 땅, 건너 편 능선의 소나무에서 그 아래 골짜기 참나무에 기생하는 박테리아에 이르기까지 온생명체에 두루 깃들여 있는 것이 아니던가?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으로 보면 생성이 존재를 빚어내기에 자연은 끊임없이 자신을 새로이 창조해 가는 과정이다. 자연은 자기 스스로를 조직하는 거대한 생태계(ecosystem)이며 지금 이 순간도 새롭게 갱신되고 있다. 호랑이에서 바이러스에 이르기까지 온 생명들이 고정되고 고립된 것이 아니라 우주의 목적에 따라 서로 소통하고 의존하고 서로를 보완하는 가운데 자신을 창조하고 초월하면서 보다 나은 수준으로 진화해 가는 하나의 시스템이다.

사슴을 살리고자 천적인 퓨마를 죽였더니 사슴이 너무 늘어나 모든 싹을 뜯어먹는 바람에 결국 사슴들은 굶주림으로 거의 멸종해버렸다는 미국 어느 주의 일화를 우리는 잘 안다.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이다[一卽多多卽一]. 조그만 개미 한 마리가 죽고 새로운 유충이 태어나는 것도 우주 전체의 어떤 목적과 섭리에 따라 일어나는 전체 속의 부분, 그러나 전체를 담고 있고 전체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부분이다. 서로 서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세계 속에서 하나 하나의 주체는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초월체로서 창조적으로 진보한다. 여기 딱정벌레 한 마리가 내 발에 밟혀 죽었다고 해서 그 벌레는 죽은 것인가? 어느 사이에 개미가 새카맣게 모여 그의 몸뚱이와 더듬이와 다리를 해체해선 가져가 여왕개미를 먹이면 여왕개미는 쑥쑥 개미 알을 낳고 남은 껍질에도 수 억의 미생물이 어디에선가 생명의 하모니를 펼칠 것이 아닌가? 우리는 별에서 와서 별로 돌아가는 것, 우주의 먼지가 모여 별을 만들고 그 별의 몇몇 물질이 모여 생명체를 만들어선 자연을 이루다가 다시 그 별이 초신성이 되어 폭발하면 우주의 먼지로 되었다가 또 다시 별을 이룰 것이 아닌가? 하나하나 존재를 보면 끊임없이 소멸하는 것이지만 전체로 보면 우리는 영원히 불멸한다. 영겁의 회귀가 있을 뿐, 사라지는 것은 아무도 없다.

똥처럼 살 일이다.

아무 데도 나서지 않고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고

한 치 땅도 자기 자리가 아니라며

슬며시 사라지는,

똥처럼 살 일이다

똥처럼 살 일이다.

코를 움켜쥐고 내빼며 욕할수록

멀리 멀리 던져버릴수록

내리는 비에, 지나는 바람에

고요히 자신을 부수어

꽃을 피우는,

똥처럼 살 일이다

똥처럼 살 일이다.

다른 생명을 살리곤

죽어 황금색 덩이가 되었다가

다시 개나 돼지의 밥으로 태어나는,

똥처럼 그리 살 일이다

내가 똥이 되고

네가 또 똥이 되어

밥이 똥이 되고

똥이 밥이 되는

그런 세상에서 살 일이다.

뒷산 관악 기슭 약수터에 갔다가 똥 위에 핀 민들레 꽃을 보고 지은 <똥처럼 살 일이다>라는 시이다. 밥이 똥이 되고 똥은 식물의 자양분이 되고 이 식물을 먹고 다시 똥을 누듯 자연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 아프리카나 남태평양의 전통 사회는 완벽한 생태적 사고를 한다. 그들이 살던 집과 옷과 무기들은 고스란히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런 사고와 그런 생활을 주장하고 실천하는 사람도 꽤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의 인류사회를 신석기시대로 돌릴 수 있을까? 그런다면 60억의 인류 가운데 59억 이상이 굶주려 죽을 것이 아닌가?.

아르네 네스의 주장대로 표층생태론(shallow ecology)은 인간과 자연을 대립적으로 파악하여 자연 그 자체를 위하여 자연을 보존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유용한 이익이 있을 것이라는 면에서 보존하기에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 심층생태론(deep ecology)은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생태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자기를 실현할, 즉 생존하고, 번성하고, 자기 나름의 형태에 도달할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생명평등주의(biospherical egalitarianism)의 입장에서 생태계 전 구성원을 바라본다. 모든 생명체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각각의 평등성과 다양성을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모든 생물권이 평등하게 살아가며, 그러기 위하여 인간이 상실한 '자연의 소리', '지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감수성을 다시 회복하자는 이 소리는 얼마나 아름답고 평화로운 복음인가?

하지만 몇몇이 그런 의식의 개혁을 이룬다고 이 세상이 달라질까? 의식의 변화가 토대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은 소련의 해체 이후에도 엄연한 사실이다. 심층생태론의 주장은 다분히 신비적이며 비과학적이다. 환경을 파괴하고 있는 인간세계는 이미 지배적이고 착취적이지 않은가?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면서 인간이 자연을 개발하고 착취하였는데 인간의 인간에 대한 지배를 개혁하지 않고서는 생태의 균형이란 공허한 목표다. 그들은 '인간성'을 '자연법'으로 축소시켜버려 그 장막 뒤에서 음모를 꾸미고 환경파괴 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이 추상적인 '인간'도 '사회'도 아닌 바로 자본주의란 사실을 얼버무리고 있다. 수많은 노동자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진폐증으로, 폐암으로 죽어 가는데 생명운동을 한답시고 나 홀로 산천 경계 좋은 곳에 황토집을 짓고 전원시를 읊조리는 것은 얼마나 야만적인가? 한 마리의 바이러스와 인간이 동등하다는 생명평등주의는 실제적으로 에코파시즘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심층생태론이 제기한 자연과의 일체화 체험이 여러 신흥 종교가 범람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고 환경교육과 명상이 환경위기 시대의 새로운 상품으로 변질된 예들은 이 이론의 한계가 어디에 있는 지를 잘 보여주는 실례이다. 영성의 힘을 무시해서도 안되지만 토대의 변화 없는 영성 운동만으로 사회변화를 이끌어낼 수는 없다.

그 맑던 안양천의 그 많던 버들치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황사가 좀 가셨는지 서 편을 보니 시커먼 뱀 한 마리가 꿈틀대며 시흥에서 목동을 지나 한강으로 간신히 기어가고 있다. 안양천이다. 바로 몇 해전만 해도 1급수 물고기가 뛰놀던 안양천이 어찌 해서 20여년 사이에 중금속과 병균들만 득시글거리는 시커멓게 죽은 시궁창으로 변하였는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노는 날이면 영등포에 살던 우리 삼총사는 도시락을 싸들고 서너 시간을 걸어 공군사관학교(지금의 보라매 공원) 뒷산을 넘어 낙골(지금의 난곡동)로 향하곤 하였다. 그곳엔 안양천으로 흐르는 실개천이 있었고 그 냇물엔 버들치가 새카맣게 몰려다녀 족대도 없는 우리들은 워워 하며 물 밖에서 몰아 소쿠리로 채다 해를 넘기곤 하였다. 안양천 너른 내에도 피라미와 모래무지가 지천이었고 봄나물이 흐드러진 방죽에는 도마뱀과 살무사가 마구 기어다녔다. 물이 어찌나 맑은 지 바닥까지 훤히 보여 우리는 내를 걸어다니다 모래 속에 코를 박고 있는 말조개를 잡곤 하였다. 그때도 구로공단은 있었고 환경에 대한 인식이 없어 오폐수를 그대로 강에다 버릴 때였다. 그런데 그때 냇물은 왜 그리 맑았고 지금의 안양천은 죽음의 강이 되었는가? 물이 흐르면저 이온 작용 등을 하며 스스로를 정화해 줄 '비워둠'을 두었기 때문이다. 안양천의 자연 정화력을 넘지 않을 정도의 양만 오폐수로 버려졌으니 모두 흘러가면서 분해되어 버리고 안양천은 늘 맑았던 것이다. 비워둔 것이 있었기에 자연은 스스로의 원리에 따라 그렇게 존재했던 것이다. 그래서 무위(無爲)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비워두는 것[虛]이라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는 그 비워둔 곳마저 개발하여 버렸다. 자본주의 체제는 지구자체를 거대한 쇼핑센터로 전락시켰다. 작년에 100을 생산하였으면 올해 110을 생산하여야 망하지 않듯 자본주의는 '확대 재생산'을 해야만 살아남는 체제이다.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에서 인간은 자연을 원료나 기계 등 '불변자본'으로 변환시키고 변환된 자연은 기계라는 모습을 띠고 다시금 인간 노동력을 대량으로 가변자본화하는 데 기여하며 인간은 다시 도구를 써서 더욱 급속도로 자연을 불변자본화한다. 자본주의는 잉여노동을 착취하고 상품을 판매하여 자본을 축적하는 사회이기에 과잉생산을 추구하고 과소비를 조장한다. 노동자들 스스로도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자본주의적 인간이 된다. 그들의 욕망은 직접 실현되지 않는다.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강한 권력을 소유하고 더 높은 명예를 얻는 것이 그들의 소망이다. 그들 스스로, 자본가와 국가, 대중문화의 상징과 이미지 조작에 놀아났든 아니든, 이들을 얻는데, 다시 말해 생태계 전체를 파괴하는데 스스로 동참한다. 그러기에 자본주의 체제는 자연을 더욱 더 황폐화시키고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소외시키는 동시에 쓰레기를 양산한다. 확대재생산의 원리는 자연이 무한할 것이라는 전제에서 번영과 발전을 약속하는 것인데 자연은 유한하였다. 스스로를 정화할 여분마저 개발하자 안양천이 시궁창으로 변하였듯, 이제 자본주의는 자연의 빈곳까지 개발하였기에 환경위기는 전 지구 차원에서, 인류가 절멸할 정도의 지경에까지 치닫는 것이다. 그러니 자본주의 체제를 해체하거나 혁신을 가하여 확대재생산의 원리를 자연과 문명간의 균형의 원리로 바꾸지 않으면 그 어느 것도 미봉책이지 않겠는가?.

사회생태론은 구체성에 바탕을 둔 것이기에 현실성을 갖는다. 신비주의와 반과학주의를 지양하여 변증법적 이성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객관적 보편 타당성 또한 획득한다. 공동체 건설과 시민포럼, 인간적 필요에 따른 소비 개념 재정립 등 사회운동을 대안으로 내세우기에 힘을 가지며 영적인 인간 자아의 변화에도 초점을 맞추므로 영속성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한반도의 중심인 이곳 관악의 한 봉우리에 서서 서양의 진보철학자들을 경멸해 본다. 급진적인 이들도 서구중심주의나 남성중심주의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 대다수이다. 급진적이라 할 사회생태학에도 제3세계적 시각은 없다. 사회생태론의 한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바로 제3세계의 환경위기이다. 제3세계에서 환경위기의 근본 원인은 서구화,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이다. 서구 문명이 들어오기 전까지 제3세계의 사회는 자연과 완벽하게 공존하며 사람끼리도 서로 평화스럽게 살았다. 그들은 신이 보내준 짐승만을 사냥하였고 화살촉에서 대변과 집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쓰고 버린 모든 것은 자연으로 돌아갔다. 레비스트로스는 서양의 한 선교사를 통하여 경쟁이 아니라 공존이 삶의 목표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선교사가 원주민들에게 축구를 가르치고 시합을 시켰더니 양 팀이 서로 비길 때까지 하였다. 이 예는 서양과 제3세계 사이의 패러다임이 얼마나 다른 것인 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서양 사회는 이 '야생의 사고'를 미개와 야만이라 하였으며 문명의 이름으로 서구화와 산업화를 단행하였다. 이로 제3세계는 자연이 파괴되고 공동체가 해체되었으며 가난과 내전에 시달리고 있다. 이들 사회는 "서구적 산업모델의 수용과 서구식 근대화→산림의 개발과 비료와 농약 사용→산림파괴, 토양의 사막화와 토양오염, 지하수 오염→가뭄 등 천재지변→농촌공동체 파괴와 기근→내전→서구 종속 강화"의 악순환을 겪고 있다. 에티오피아가 서구적 산업화를 단행하자 국토의 40%에 달하였던 삼림은 1%로 축소되었다. 숲이 물을 품어주고 기후를 조절하지 못하자 가뭄이 40여 년 간이나 지속되면서 농토는 거의 모두 사막으로 변하였고 하천과 샘들은 말라버렸다. 대기근이 발생하고 인간과 생물은 말라 죽어가고 있다. 물론 다른 요인도 있지만, 삼림으로 우거졌던 아름다운 나라 루완다가 내전을 겪고 기근으로 수백만의 어린이가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 것도 서구적 농법을 도입하고 산업화를 단행하여 삼림을 파괴한 데 기인한다.

변증법은 이분법을 초월한 무엇이기보다 이분법을 더욱 정교화한 틀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사회를 이루기 위한 변증법들은 이미 그 자체에 자와 타의 대립과 투쟁을 통한 종합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사회생태론이 구체성과 힘을 갖지만 그 패러다임 자체는 아직 자연을 파괴한 사회의 이분법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럼 이분법을 넘어서서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를 극복할 패러다임이 있을까?

2. 초록빛 여름날 상림에서: 씨는 죽어 열매를 남긴다

홍수를 막는 두 방법의 차이는?

상큼한 여름이다. 남원에서 기차를 내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함양 땅 대덕동 상림에 왔다. 참나무 너른 잎이 바람을 타고 너풀거린다. 숲 밖은 찌는 듯 무더운 날이나 여기는 햇빛마저 싱그럽다. 바람은 가슴을 헤치며 지나고 말 그대로 온갖 잡새들이 지저귀는 노래소리는 연신 귀를 뚫어놓는다. 둑 너머 위천은 햇빛에 반짝이는데 물장구를 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해맑다. 상림! 낙엽활엽수림으로선 유일하게 천연기념물(제154호)로 지정된 깊디깊은 숲. 왜 고운 최치원은 이곳에 이리도 울울창창한 활엽수림을 조성하였을까?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적 사유에는 하나가 다른 것보다도 우위를 차지하고 지배하는 폭력적 계층질서가 존재한다." 데리다는 이성중심주의에 바탕을 둔 서구의 형이상학은 정신/육체, 이성/광기, 주관/객관, 내면/외면, 본질/현상, 현존/표상, 진리/허위, 기의/기표, 확정/불확정, 말/글, 인간/자연, 남성/여성 등 이분법에 바탕을 둔 야만적 사유이자 전자에 우월성을 부여한 폭력적인 서열제도이며, 처음과 마지막에 "중심적 현존"을 가정하려고 하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홍수를 막는 방법은 크게 보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댐을 쌓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물이 흐르는 대로 물길을 터주는 것이다. 서구 사회는 인간과 자연을 이항대립으로 나누고 인간에게 우월권을 주었기에 전자의 방식을 택하였다. 댐을 쌓듯 인간 주체가 자연에 도전하여 자연을 개발하고 착취하는 것을 문명이라 하였고 이것으로 그들은 17세기 이후 전 세계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댐은 물의 흐름을 방해하여 물을 썩게 하고 결국 거기에 깃들여 사는 수많은 생물을 죽이고 심지어는 주변의 기후를 변화시키고 지진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렇듯 이항대립에 바탕을 둔 서구의 패러다임은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를 비롯하여 거의 모든 현대성의 위기의 동인이었다.

댐을 쌓는 것이 근대적, 서구적 패러다임에서 비롯된 대안이라면, 물길을 터서 물을 흐르게 하고 나무를 심는 것은 화쟁의 불일불이(不一不二)의 패러다임에서 비롯된 대안이다. 우리가 동강 댐을 놓느냐 마느냐로 시비할 때 미국 정부는 '미국의 강들' (www. americanrivers. org)이라는 시민단체의 운동에 굴복하여 이미 지어진 댐을 수십 개나 파괴하였다. 그러자 물은 흐르면서 자신을 정화를 하면서 1, 2급수를 회복하였고 물고기와 새들이 돌아왔다. 사람들은 때로는 물살을 가르고 때로는 낚시를 던지고, 또 때로는 아름다운 강가에서 사랑도 나누고 사색을 하며 느리고 여백이 많은 삶을 다시 즐기게 되었다.

화쟁의 패러다임을 가졌던 최치원은 홍수를 어떻게 막았을까? 1,100년 전 신라 진성왕(887년∼896년) 때 이곳의 태수로 부임한 고운 최치원은 홍수로 툭하면 넘치는 위천의 물길을 돌리고 이 숲을 조성하였다. 하림(下林)은 사라져버렸으나 지금도 폭 200-300미터, 길이 2킬로미터에 걸쳐 200년 된 갈참나무를 비롯하여 114종, 2만여 그루의 활엽수목이 원시림과 같은 깊은 숲을 이루고 있다.

댐은 물을 썩게 하고 생명들을 죽이지만 숲은 빗물을 품었다가 정화한 다음 서서히 내보낸다. 사람이 걸어다녀 다져진 토양은 시간당 10밀리의 비를 품는 반면에 잘 가꾼 숲은 시간당 200밀리 이상의 강우를 가둔다. 고운 최치원은 왜 활엽수를 심었을까? 임업연구원이 광릉수목원에서 실험하였더니 활엽수 천연림은 사방공사를 한 침엽수와 활엽수가 섞인 숲에 비하여 우기에는 헥타아르 당 28.4톤의 물을 머금고 반대로 건기에는 2.5톤의 물을 더 흘려보내는 것으로 밝혀졌다. 고인 물은 썩지만, 흐르는 물은 산소를 머금고 이온 작용으로 자연 정화를 하며 온갖 생명들을 품는다.

열매와 씨는 둘이 아니다

이런 화쟁의 불일불이(不一不二) 원리에 대하여 원효는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에서 다음과 같이 씨와 열매의 비유로 쉽게 설명한다.

"열매와 씨가 하나가 아니니 그 모양이 같지 않기 때문이요, 그러나 다르지도 않으니 씨를 떠나서는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또 씨와 열매는 단절된 것도 아니니 열매가 이어져서 씨가 생기기 때문이요, 그러나 늘 같음도 아니니 열매가 생기면 씨는 없어지기 때문이다. 씨는 열매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니 열매일 때는 씨가 없기 때문이요, 열매는 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씨일 때는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않기 때문에 생(生)하는 것이 아니요, 늘 같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기 때문에 멸(滅)하는 것이 아니다. 멸하지 않으므로 없다고 말할 수 없고, 생하지 않으므로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두 변을 멀리 떠났으므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하나 가운데 해당하지 않으므로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말할 수 없다."

화쟁의 일곱 가지 의미 가운데 하나인 불일불이는 차이를 통하여 공존을 모색하자는 사유체계다. 씨는 스스로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으나 열매와의 "차이"를 통하여 의미를 갖는다. 씨와 열매는 별개의 사물이므로 하나가 아니다[不一]. 국광 씨에서는 국광사과를 맺고 홍옥 씨에서는 홍옥사과가 나오듯, 씨의 유전자가 열매의 거의 모든 성질을 결정하고 열매는 또 자신의 유전자를 씨에 남기니 양자가 둘도 아니다[不二]. 씨는 열매 없이 존재하지 못하므로 공(空)하고 열매 또한 씨 없이 존재하지 못하므로 이 또한 공하다. 그러나 씨가 죽어 싹이 돋고 줄기가 나고 가지가 자라 꽃이 피면 열매를 맺고, 열매는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지만 땅에 떨어져 썩으면 씨를 낸다. 씨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면 씨는 썩어 없어지지만 씨가 자신을 공하다고 하여 자신을 흙에 던지면 그것은 싹과 잎과 열매로 변한다. 공(空)이 생멸변화(生滅變化)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세계는 홀로는 존재한다고 할 수 없지만 자신을 공하다고 하여 타자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씨는 스스로 공하나 썩어 열매를 맺는 것처럼 이것이 없으니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으니 이것이 있다. 또 씨가 있어 열매를 맺고 열매가 있으니 씨가 나오는 것처럼 이것이 있으므로 해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해서 이것이 있다. 열매일 때는 씨가 없으므로 씨는 열매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씨일 때는 열매가 없으니 열매는 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않으므로 존재한다고 할 수 없고 늘 같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으므로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멸하지 않으므로 존재하지 않는다 할 수 없고 나지 않으므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이중부정을 통해 공한 것이 공한 것이기에[空空] 오히려 존재를 긍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화쟁은 우열이 아니라 차이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고, 투쟁과 모순이 아니라 자신을 소멸시켜 타자를 이루게 하는 상생의 사유체계이다. 서구의 이항대립의 철학이 댐을 쌓아 물과 생명을 죽이는 원리를 이룬다면, 화쟁의 불일불이는 그 댐을 부수고 물이 흐르는 대로 흐르며 물은 나무를 살게 하고 나무는 물을 품는 원리이다. 화쟁의 불일불이는 이항대립적 사고, 우열과 동일성을 해체한다는 점에서는 데리다의 철학과 통하나 데리다는 해체는 하되 대안은 약한데 화쟁은 차이와 상생을 결합한 사유체계이다. 그리 나를 소멸시켜 상대방을 이루려 하는 것이 참사랑이요 화쟁의 불일불이이다.

미봉책의 대안은 아무런 소용이 없지만 지금의 문명을 송두리째 부정한 대안은 실현 가능성이 없다. 하지만 인간과 자연이 씨와 열매처럼 자신을 소멸시켜 상대방을 이루려 한다면, 그 원리에 따라 사회를 재편하고 사회와 정치 시스템을 바꾸고 가치관을 혁신한다면, 인간은 함양의 상림처럼 자연의 원리를 거스르지 않는 문명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3. 금빛 가을날 광릉에서 : 연꽃은 저 높고 아름다운 산록에서 피어나지 않는다.

해체할 것은 이성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을 파괴하는 특정 개념의 이성이다

삽상한 가을날이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림, 광릉의 숲 속에 있다. 초록이 지쳐 노랑, 갈색, 빨간 색으로 단장한 사이사이 소나무는 시방도 초록이 좋아 점점이 녹색 섬.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눈이 부시게 푸르다. 누군가가 몹시도 그리워진다. 그를 알았음일까? 바람이 훅 지나는가 했더니 상수리들이 후두두둑 떨어진다. 다람쥐도 깜짝 놀랐는지 저만치서 도토리를 줍던 녀석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난다. 다시 숲은 고요를 되찾았다. 다람쥐 녀석은 손을 뻗치면 닿을 거리에서 상수리를 줍고 있고 그 위로 갈잎 하나가 곡선을 그리며 너풀너풀 떨어진다. 동양의 한 귀퉁이, 정적의 숲 속에서 장자를, 원효를 떠올린다.

과연 동양이 대안일까? 박이문 교수의 주장대로 자연과 대립적이면서 이분법적이고 이성중심적 사유인 서양의 현대철학이 환경위기를 낳았으므로 이를 자연친화적이고 일원론적이며 감성중심의 미학적 사고인 동양사상과 결합하여 생태학적 세계관, 미학적 이성을 추구하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동양의 전통사상이 덧없는 공허함이나 신비주의적인 외형을 가지는 경향이 있고, 동양의 현인들이 심오하게 사유하고 느꼈다는 사실이 '그들 저서가 모호하다'는 비판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해 주지는 못한다."라는 머레이 북친의 비판 또한 타당하다.

몇몇 사람들의 "동양 사상이 대안이다."라는 주장에서 공허감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보편성과 오늘의 현실맥락을 배제한' 당위적이고 선언적인 공리공론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동양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동양의 전제정권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면, 비합리적이고 야만적인 중세의 농업사회로 퇴행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현재의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현실, 우리가 디디고 있는 이 땅의 모순에 대한 비판과 대안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아무리 지극한 철학이라 하더라도 (현재적) 의미는 없다. 오늘날의 복잡해진 사회현실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면, 아직 분단모순과 계급모순, 민족모순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한반도의 토대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성현들의 현학적이고 신비적인 은유 놀이로 그칠 뿐이다.

"동양사상에서 대안을 찾자"는 것은 동양사상의 위대성이나 '동일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 사상과 대화를 하여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동일성의 사고가 얼마나 커다란 비극과 야만을 낳는지 우리는 아우슈비츠에서, 난징에서, 프놈펜에서 보지 않았던가? '동일성'이 타자를 배척하고 폭력을 가하는 것이라면 차이는 타자와의 관계를 통하여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다. 차이의 관점에서 동양사상을 논할 때 '형이상학적 보편성'을 찾을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양자를 서로 하나로 통하게 할 수 있다. 고운 선생은 숲을 조성하기 전에 둑을 쌓았다. 화쟁의 패러다임은 서양과 동양, 현대와 탈현대의 대안 또한 하나로 아울러야 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스트의 주장대로 이성중심주의가 지금의 위기를 불러온 한 원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이성을 무시한다면 '지금 여기에서' 생명을 무차별로 학살하고 있는 죽음의 문화를 비판할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세상이 무지몽매함과 야만, 고립에 빠져 있을 때 이성은 그 어두움 속을 밝히고 벗어나도록 이끄는 빛이다. 20세기 인류는 합리성을 통하여 '주술의 정원'에서 해방되었다. 이성의 빛을 따라 인류는 중세의 야만과 무지에서 벗어나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며 인간중심적인 현대사회를 건설하였다. 휴머니즘과 민주주의는 현대 사회의 보편원리가 되었고 과학과 기술은 중세의 야만의 성들을 속속 무너뜨리고 엄청난 생산혁신을 단행하였으며 물질적 풍요를 가져 왔다. 하버마스의 말대로 합리성이 없다면 유토피아를 실현할 방법 또한 없다. 비판이성은 이성의 건축술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다. 문화 전체에 대한 최고의 재판관의 역할을 한다. 어떠한 믿음, 결정, 담론도 어떤 형태로든지 합리성의 개념 없이는 가능하지 않고, 합리성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 이성을 전제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해체할 것은 이성 그 자체가 아니라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마저 비인간화하고 소외시키고 있는 특정 개념의 이성인 것이다.

교조는 지성의 무덤, 깨달음은 우리 몸 속에 현존한다

화쟁은 신비주의도 반과학주의도 아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지금의 환경위기를 낳은 근본 원인과 모순에 대한 첨예한 인식과 실천이 없다면 그것은 당위적, 선언적 공리공론에 그친다는 점이다. 지금 여기에서 자본주의 체제가 환경위기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데 이 또한 불일불이로 언제인가는 포용될 것이라며 실천을 행하지 않는다면 이는 추상적 관념으로 전락한다. 그럼 화쟁의 틀 안에서 서구적 합리성을 결합할 수 있을까?

또 저 두 견해에 다 동조하면 그 안에서 스스로 모순을 일으켜 다투게 될 것이요, 만일 저 두 견해에 다 반대하면 그 두 견해와 다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동조도 말고 반대도 말고 설법하라는 것이다. 동조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말대로 해석하자면 모두 다 허용하지 않는 것이요,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뜻을 따라 말한다면 허용하지 않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반대하지 않기 때문에 그 情에 어긋나지 않고, 동조하지 않기 때문에 도리에 어긋나지도 않는다. 정에 대해서나 도리에 대해서나 서로 어긋나지 않는 까닭에 진여에 상응하는 설법을 한다는 것이다.(《金剛三昧經論》)

어떤 사상을 진리라고 하여 그것을 맹종하면 교조로 흐른다. 교조는 지성의 무덤이다. 반면에 어떤 사상을 허위라고 하여 전적으로 부정하여 버리면 그 사상 속에 있는 일말의 진리도 버리게 된다. 현대의 철학과 탈현대 철학, 서양 철학과 동양철학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이다. 따르기도 하고 따르지 않기도 해야 양자에 담긴 진리를 수렴하면서도 허위를 버릴 수 있다.

깨달음은 저 언덕 너머 어딘가에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바로 여기가 도솔천이듯, 깨달음은 우리의 몸 속에, 우리가 있는 이 땅위에 현존한다. 자연의 공(空)함을 인식하는 것은 마음이요, "마음이 자리하는 것은 특정한 몸이요, 이 몸은 또 특정한 장소에 자리한다. 공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보편적으로) 어느 곳에서나 존재하지만 오로지 이 순간에만, 바로 이곳, 내 몸 속에서 실현된다."

이처럼 불일불이는 21세기의 사회의 현실이란 맥락에서, 이 땅위에서 호흡하고 있는 우리 몸을 바탕으로 우리 몸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런 면에서 화쟁의 불일불이는 화쟁의 또 다른 개념인 일심(一心)의 사유와 진속불이(眞俗不二)와 결합할 때 비로소 올바른 생태이론이 될 수 있다.

참은 짓을 통해 드러나고 짓은 품을 만들며 품은 참을 품는다

"일심(一心)이라 하는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을 포괄하는 법은 그 본성이 둘이 아니요, 참되고 참되지 않음에도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라 하는 것이다. 이 둘이 아닌 곳에 여러 법이 적중하여 열매를 맺어 허공과 같지 않아 본성이 스스로 신비한 이해력을 갖고 있어 마음이라고 한다.…따라서 일심은 일체 세간의 법과 출세간의 법을 포괄한다."(《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일심이란 직역하면 한 마음이란 뜻이다. 하나란 진(眞)과 속(俗), 정(淨)과 염(染), 중관(中觀)과 유식(唯識),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 이(理)와 사(事)를 둘로 보지 않고 하나로 아우르기에 하나이다. 하나란 모든 대립을 통일한 세계를 인식하는 궁극적 실체이자 모든 사유와 존재가 출발하는 원점이다. 그 본성이 둘이 아니란 것은 일심이 아닌 곳에서는 둘임을 전제로 한다. 일심에 의하지 않으면 주(主)와 객(客) 등 세계의 실체를 둘로 나누어 본다. 하지만 이것은 세계의 실체가 그런 것이 아니라 중생이 깨닫지 못한 세계에서나마 세계의 실체를 이해하려고 편의상 둘로 구별하여 본 허상일 뿐이다. 이렇듯 세계의 실체가 본래 둘이 아니기에 하나이다. 이 하나가 허공과 달리 스스로 모든 법을 포괄하고 이해하여 온 세계를 지어내니 마음이라 이른다. 미각(未覺)이 있기에 미각이 아닌 것을 깨달음이라 하고 깨달음이 있기에 이와 다른 것을 미각이라고 하는 것처럼, 속한 세계에 있으면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 진(眞)이고 깨달았다면 깨달은 세계에서 속한 세계에 있는 중생을 구원해야 하는 것처럼, 전자가 있으므로 해서 후자가 드러나고 또 후자가 있어 전자가 드러나기 때문에 전자와 후자는 하나가 된다. 이처럼 일심이란 더럽고 깨끗한 일체의 법이 다 의지해 있는 곳이기 때문에 곧 모든 법의 근본이다.

어느 가을날 관악산 약수터 뒷켠의 숲에서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있어 마명(馬鳴)과 원효, 그리고 우리 고유의 풍류사상을 종합하여 세계의 실체와 인간의 인식과 언어기호와의 관계, 모더니즘의 사유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유를 그림 하나로 압축해 보았다.

빛이 원래 하나이나 이를 밝음과 어두움으로 가르고 다시 세분하여 빨, 주, 노, 초로 나누듯, 세계는 하나이나 그러면 인간이 이를 이해할 수도 이용할 수도 소통할 수도 없다. 그러니 플라톤에서 시작하여 칸트와 헤겔, 마르크스, 하이데거 등은 이데아와 그림자, 본질과 현상, 주와 객, 노에시스(noesis)와 노에마(noema) 등 둘로 나누어 본다. 이처럼 하나를 둘로 나누는 것은 실제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이해하고 이용하고 소통하기 위한 것이니 하나가 둘로 갈라지는 것은 용(用)이다.

무지개가 빨, 주, 노, 초, 파, 남, 보 일곱 가지 색인가? 빛이 프리즘이나 물방울을 통과하면서 굴절되어 인간세계에서 그리 나누어 나타나는 것이며 일곱 가지 범주를 가진 인간에게 그리 보이는 것일 뿐이다. 무지개를 자세히 보면 빨강과 주황 사이에도 무한대의 색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색에 대해 알 수도, 전달할 수도 없으니 이를 분별하여 무엇이라 명명한다. 그러니 빨강과 주황만의 언어를 갖고 있는 언어공동체는 그 사이의 색을 보지 못한다. 유럽 사람들도 근세 초까지 무지개를 네 가지나 다섯 가지로 보았다. 주황이란 언어가 없으니 빨강과 주황을 같이 본 것이다. 멀쩡한 주황을 빨강이라 하면 이것은 허위이다. 그러나 주황을 주황이라 하는 것도 허위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범주를 세분하여 주황을 '진한 주황, 아주 진한 주황, 극도로 진한 주황' 등으로 만 가지, 억 가지로 나눈다 해도 그것은 실제의 색에 이를 수 없다.

이렇듯 아무리 범주를 세분하였다 하더라도 둘로 나눈 것-또는 이에 근거한 이원론적 사고나 이에 이름 붙인 언어기호-로는 세계의 실체를 드러내지 못한다. 극도로 세분한 범주에 언어기호를 부여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세계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럼에도 포스트모더니즘 이전의 서양 철학자들이 세계를 둘로 나누고 이렇게 인식한 것이 진리라 생각한 것처럼, 사람들은 둘로 나누고 이에 이름을 부여한 것을 실체로 착각하였다. 그러니 셋을 두어 둘의 허상을 해체하여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체(體)이다.

그럼 이들은 어떤 관계를 가질까? 그럼에도 체용상의 원리는 서구철학처럼 실체적이지 않다. 세계를 범주화한 틀을 넘어선다. 체용상이 세계의 각각의 모습이나, 모두 일심에 의한 것으로 일심의 세 가지 의미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의 체는 영원히 알 수 없다. 우리는 이를 인간의 행위를 통하여 한 자락 엿볼 뿐이다. 이처럼 체(참)는 용(짓)을 통하여 일부 드러난다. 몇몇 원숭이가 직립을 하고 손을 쓰면서 손이 발달하고 뇌가 점점 커진 것처럼, 탄소동화작용이나 광합성 작용을 하는 나무가 햇빛을 충분히 받아들이도록 넓게 벌어진 잎과 바람에 살랑거리며 공기를 내뿜도록 가는 잎새를 갖는 것처럼 짓[用]은 품[相]을 만든다. 뇌가 일정 정도 이상으로 커진 원숭이는 다른 원숭이와 다른, 인간의 특질을 드러내고 너른 이파리를 가진 나무와 가는 이파리를 가진 나무는 다른 특성을 갖는다. 이처럼 품[相]이 참[體]을 담는다. 이처럼 참은 짓을 통하여 드러나고 짓은 품을 만들며 품은 참을 담으며 이 참은 또 다시 짓을 낳는다. 이처럼 참과 짓과 품은 영겁순환에 놓인다. 일심이 이문으로 나누어지고 이문은 화쟁의 방편을 통하여 다시 일심의 체로 돌아가고 이는 다시 이문으로 갈린다.

화쟁의 또 다른 의미 가운데 하나는 따르기도 하고 따르지 않기도 하는 순이불순(順而不順)이다. 세계는 A or not-A,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며, 주체인 동시에 객체인 것, 주체와 객체 중간에 있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가? 서양은 오랜 동안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이분법적 모순율과 배중율을 바탕으로 사고하였다. 그러나 당신은 아내를 전적으로 사랑하는가, 아니면 절대적으로 싫어하는가? 실은 좋아하는 동시에 싫어할 것이다. 이처럼 실제 세계는 A or not-A가 아니라 A and not-A, 곧 퍼지이다. 퍼지식 사고를 하는 순이불순의 논법을 따라 두 가지 다른 견해이지만 따르기도 하고 따르지 않기도 하여 하나를 이루는 방편인 일심이문의 화쟁을 확대하여 이 이문(二門)에 서구적 합리성을 포함시킬 수 있다.

불일불이의 패러다임에 서구적 합리성을 하나로 원융시키는 것 또한 화쟁의 논법이다. 씨와 열매의 관계처럼 인간과 자연, 나와 우주의 모든 생명체가 서로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생각하여 서로가 서로를 살리려 할 때, 생명체는 서로 공존을 모색하는 가운데 종의 다양성과 진화발전을 추구한다. 대신 서구적 합리성을 포용하여 자연과 생태위기를 불러오는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가부장주의, 이성중심주의, 과학만능주의, 개발 위주의 정책 등 불일불이의 상생을 방해하는 것에 대하여 첨예한 인식을 하고 비판을 하고 대응을 한다. 그러면서도 합리성의 틀에만 머물지 않고 불일불이의 원리에 따라 인간의 삶의 질이 개선되면서도 모든 생명체가 번성하는 가치론을 지향한다. 나는 이를 오늘 '화쟁적 합리성'이라 부르고자 한다. 이는 몸을 바탕으로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속제(俗諦)를 버리고 나타난 진제(眞諦)'는 '속제를 녹여 나타난 진제'와 같은 것이니, 이 2문의 진제는 오직 하나요 둘이 아니며, '진제의 오직 하나'란 원성실성(圓成實性)이다. 그러므로 버리고 녹여 나타난 것은 오직 一心이다.(《금강삼매경론》

금을 녹여 금부처를 만들듯 진제를 녹여 속제를 만들며, 다시 금부처를 녹여 금덩이로 환원시키듯 속제를 녹여 진제로 만든다. 중생의 입장에서 보아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는 것은 대승철학의 요체이다. 그러니 중생이 곧 부처요, 중생의 마음은 부처의 마음으로 본래 청정하다. 그런데 청정한 하늘에 티끌이 끼어 그 하늘을 가리듯, 일체의 중생이 무명(無明)으로 인하여 미혹에 휩싸이고 망령된 마음[妄心]을 품어 진여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세계를 분별하여 보려 한다. 그러니 유리창의 먼지만 닦아내면 맑고 푸른 하늘이 드러나듯, 모든 사람의 미혹하고 망령된 마음만 닦아내면 그들 마음 속에 있는 부처가 저절로 드러난다. 깨달음과 해탈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 마음 속 부처를 드러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미천한 인간들이 속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끊임없이 수행 정진하여야 완성된 인격[眞]에 이를 수 있고 또 이에 이른 사람은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들을 이끌어야 비로소 깨달음이 완성될 수 있다.

연꽃은 저 높고 아름다운 산록에서 피어나지 않는다. 왜 저 아름다운 연꽃이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고 향기로운 바람이 스치고 지나는 높은 언덕에 피지 않고 냄새나는 수렁의 진흙 속에서 피어날까? 왜 가장 더러운 진흙 속에서 줄기를 뻗어 청정한 하늘 위로 가장 아름다운 꽃 송아리를 틔울까?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이 저 높은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고 반야의 바다를 완전히 갖추었어도 열반의 성에 머무르지 않고 무량한 겁 동안 온갖 번뇌를 버리지 않고 온 중생을 구제한 뒤에 비로소 열반을 얻는 것이다. 높은 깨달음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열반에 머물지 않고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한 중생을 구제해야 비로소 깨달음의 완성에 이른다. 이것이 진속일여[眞俗一如]이다.

원효는 열반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부주열반(不住涅槃)을 추구하였고 이를 몸소 실천하고자 누더기 옷을 입고 박을 두드리며 중생 속으로 내려갔다. 진속불이(眞俗不二)는 생태론적 관념에만 머물지 않고 모든 생명체가 공존할 수 있는 실천인 자비행(慈悲行)을 행하는 사유이다. 지식인들만 공허한 외침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생태적 사고가 잠재되어 있으나 다만 산업화와 인간중심주의, 기계론적 세계관이나 기득권층의 이데올로기에 조작되어 감추어져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여 그들로 가서 그들 속의 부처님이라 할 생태적 사고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 항아리가 숨을 쉬어선 물을 맑게 오래도록 간직하고 메주가 곰팡이를 피워 고단백 영양제와 항암제로 변하듯, '무지한' 농부나 '야만적인' 아프리카 원주민이 서양의 유식한 생태학자보다 더 훌륭하게 생태적 지혜를 펼치던 것을 수없이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진속불이는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에서 억압당하고 신음하는 민중들, 그 지배체제로 인하여 착취되고 개발되며 종의 절멸로 치닫고 있는 생명체들을 모두 보듬을 수 있는 방편과 실천을 제시한다.

이 광릉 숲 땅거미가 내리고 디디는 발길마다 낙엽이 수북하다. 낙엽이 떨어진다고 그 나무를 죽었다고 하는가? 봄이 오면 그 자리에 싹이 돋고 잎이 나지 않겠는가? 저리 돌처럼 죽어있는 것 같은 나무 둥치 속으로 생명의 불성이 잠자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4. 잿빛 겨울날 다시 관악에서 : 석굴사여, 아! 석굴사여

우리는 왜 뜨거운 것을 먹으면서 시원하다 말하는가

우리는 왜 뜨거운 것을 마시면서 시원하다고 말하고 맛없는 중국산 조기를 먹으며 얕은맛이 없다고 하는가? 뜨거운 것과 시원한 것은 서로 대립의 관계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대립을 불일불이의 관계로 파악하여 하나로 아우른다(화쟁시킨다). 우리가 가장 시원하게 느끼는 맛은 '뜨거운 시원함'이다. 깊은 맛과 얕은 맛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산 조기를 먹으며 얕은 맛이 없다고 말하지만 잘 새겨보면 깊은 맛이 없다고 해야 한다. 왜 그랬을까? 우리에게 최상의 맛은 '얕은 맛이 나는 깊은 맛'이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 또한 마찬가지이다. "저승길이 얼마나 좋으면 가서 한 명도 돌아오지 않더냐?"라는 말처럼 우리에게 삶과 죽음은 대립적인 것이 아니다. 죽음이 있어서 삶은 실존적 깊이를 더하고 삶이 있어서 죽음은 의미를 갖는다. 우리에게 최상의 삶은 생과 사가 화쟁을 이룬 '죽이는 삶'이니, 우리는 어느 때든 최고 열락의 상태를 "죽인다"라고 표현한다. 이처럼 화쟁은 원효의 철학만이 아니라 우리의 집단무의식 속에서 면면히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 속에 잠자고 있는 이 화쟁의 사유를 꺼내어 자연과 우리, 인간과 지구상의 온생명 사이에 화쟁의 다리를 놓아야 한다. 이 패러다임에 따라 세계를 재편해야 한다.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해서 지금의 과학기술과 문명을 일체 해체할 수는 없다. 석굴암의 예는 21세기의 과학기술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 지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석굴사(석굴암)의 불상을 부식시키는 습기를 제거하기 위하여 현대과학의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지금도 습기 제거기를 돌리고 있으나 그 진동으로 석굴사의 그 아름다운 불상들은 하나 둘 부스러지고 있다. 그러면 천여 년 동안 그것은 어떻게 해풍이 강한 동해 변에 있으면서도 조금의 마모도 허용하지 않았을까? 답은 지하샘이었다. 사람들은 석굴사를 하필 차디찬 샘물이 솟는 곳에 앉힌 이유를 몰랐다. 그러나 동해에서 불어온 습기 많은 해풍은 석굴사에 들어왔다가 샘물로 냉각된 바닥의 돌을 지나면서 이슬을 맺는 것이었다. 지상의 공기는 수분을 빼앗겨 건조해진다. 이러니 본존불을 비롯한 모든 유물들은 자연스레 보존되는 것이다. 엔트로피가 거의 제로의 상태인 방안일 뿐 아니라 완벽한 순환의 체제이다. 8세기의 신라인들이 어찌 현대과학보다 높은 지혜에 도달하였을까? 업과 연기의 원리에 따라 우주 삼라만상의 참에 도달하려 하였기에 그런 깨달음이 온 것이 아니겠는가?

1991년 미국은 애리조나주 오라클에 유리로 밀폐시킨 가상지구 바이오스피어2(Biosphere Ⅱ)를 14만 평방 피트에 달하는 너른 땅에 지었다. 흙과 물, 공기, 들과 언덕을 갖추고 동, 식물 또한 살게 하였다. 빛만 빼놓고는, 산소도 바람도, 꽃가루받이도 모두 자체적으로 이루어지게 하였다. 8명의 사람들이 이 작은 지구에 들어가 외부와 완전히 고립된 채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였다. 그러나 18개월만에 바이오스피어2는 치명적인 불균형 상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산소 농도가 처음 21%에서 14%로 떨어져 사람들이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가 없었다. 대신 가상지구에 충만하게 된 이산화탄소와 질소로 인해 잡초만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자랐다. 바퀴벌레와 개미 같은 몇몇 곤충들만 번창하게 되었고, 25종의 작은 동물들 가운데 19종이 전멸하고 말았다. 식물의 꽃가루받이를 대신해 주던 곤충들이 죽자 식물들도 번식할 수 없게 되었다.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여러 모로 조사가 이루어졌다. 건물의 콘크리트 벽이 산소를 흡수하고는 방출하지 않았고 농사용 토양에 함유된 박테리아가 산소를 많이 소비하는 통에 산소농도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현미경으로나 보이는 하찮은 박테리아가 대기의 균형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앞에 떠다니는 미세한 먼지보다 작은 박테리아 한 마리도 다른 모든 생명의 균형에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세계가 인드라망처럼 인연의 비늘로 철저히 겹쳐있는데 인간 홀로 존재한다 할 수도 없거니와 홀로 무엇이라 내세울 수도 없으며, 홀로 삶을 영위할 수는 더 더욱 없는 것이다. 나는 없다. 그러나 네가 있어서 나는 있다. 지구상의 온생명은 홀로 남겨진 존재가 아니다. 인연의 사슬이 깊어 수천 억 년 가운데 같은 시대에 수조 개의 별 가운데 같은 별에 살아가는 것이다. 그들 생명체들이 있어서 내가 있고 내가 있어서 온생명이 있는 것이다.

서양의 과학자들은 나뭇잎을 떼어내 현미경 앞에 놓고 분석하여 이를 생물학이라 내놓는다. 그러나 살아서 생동하면서 숲의 다른 나무, 같은 나무의 다른 잎들과 서로 의존하며 인과의 다발로 맺어졌던 관계에서 떨어져 나와 이미 죽은 나뭇잎 하나가 나무 전체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줄까?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과학이 아니다. 석굴암처럼, 업과 연기의 원리를 알아 그 순리를 따르는 것이 진정 새로운 과학의 길이 아니겠는가? 우주 삼라만상을 인간의 잣대로 억지로 질서화할 것이 아니라 짓을 통하여 그 무질서에 가까이 가려고 하여야 21세기의 과학은 실증적 사실을 넘어 진정한 실체에 다다를 것이며 인간과 전 우주가 하나로 공존하는 길을 열 것이 아닐까? 우주 삼라만상의 알 수 없는 참을 짓을 통하여 터득하여 그 원리에 부합하는 과학기술을 개발하고 온생명이 서로 조화와 균형의 연기를 이룬 문명을 건설하는 것, 그것이 진정 21세기 문명이 지향해야 할 참다운 길이 아니겠는가?

겨울날 관악산에 다시 올랐다. 바람이 시리다. 온통 황량하다. 겨울나무가 바람에 잉잉 우는 소리뿐 사위는 적막하다. 생명의 흔적은 찾아볼 수도 없다. 그러나 그것이 쓸쓸하게만 보이지 않는 것은 겨울의 나무는 봄의 싹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몇 달이 지나면 이곳에도 찬란한 생명의 합창이 펼쳐질 것이다. 혹자는 화쟁이 21세기의 패러다임이 된다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실현 가능한 것이냐고, 너무 장밋빛 꿈을 꾸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것이다. 한 200여년 전만 하더라도 신분에 따른 차별을 정당화하는 중세적 세계관에 맞서 휴머니즘의 원칙을 외치던 이들은 당시 전 인류를 통틀어 몇 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은 누구도 어길 수 없는 보편적인 원칙이 되었다. 화쟁도 마찬가지이다. 현실적 가능성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정당성이다. 정당성이 있으면 힘을 가지며 가능성도 따라간다. 더구나 토대도 산업사회에서 디지털 사회로 변하고 있다. 새만금이 다시 막히고 대형 댐은 속속 들어설 정도로 현실은 냉혹하지만 우리가 각자 몸 속에 잠자고 있는 화쟁의 마음을 하나 둘 드러낸다면, 화쟁적 합리성으로 온생명을 죽이는 사람과 정책과 구조에 대해 비판하고 실천을 행한다면, 온생명이 서로 조화와 균형 속에 서로를 살리는 새로운 지구 생태계가 열리리라. 하늘이 어두운 것이 무슨 문제이겠는가? 거기 별만 반짝인다면 나그네는 금빛 별살을 따라 고독하고 고통스러우나 정녕 행복한 그 길을 걸어갈 것이고 그 끝은 환한 새벽이지 않겠는가?

 

 

 

 

 

 

 

[출처] 생태이론과 화쟁사상의 종합|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