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기신론소
원효의 신앙체계: 『대승기신론소』를 중심으로 (1)
Wonhyo's Faith System as seen in his commentaries
on the Awakening of Mahayana Faith
박성배 / 스토니부룩 뉴욕주립대학교 불교학 교수
이 글은 2002년 11월 11~13일까지 동국대학교에서 열린 제2회 국제원효학회 학술회의에서 발표된 글이다.
1. 풀어야할 문제
<신앙의 체계>는, 그것이 누구의 것이든, 그 온전한 모습을 제대로 밝혀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신앙이란 원래 사람의 삶 자체와 관련되어 있고 또한 그것은 말 이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종교적인 의미의 <신앙>이라는 말에는 항상 두 가지의 상반된 모습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인간의 어두운 대목을 낱낱이 들춰내어, 이를 모두 때려부수고, 여지없이 깨트려, 마침내 씨도 없이 죽여버리는 모습이다. 신앙이 악을 물리치지 못한다면 종교적인 신앙은 아닐 것이다. 둘째는 앞의 경우와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아무리 미천하고, 보잘것없고, 쓸모 없고, 설사 제아무리 사악하게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신앙의 이름 아래서는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두 다 다시 살려내어 가장 소중한 것으로 값지게 쓰는 모습이다. 신앙이 악을 구원하지 못한다면 그런 신앙은 종교적인 신앙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파괴(破壞)와 건설(建設)>, <부정(否定)과 긍정(肯定)>, <죽음과 삶>, <어둠과 밝음>, <깨짐과 깨침> 등등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것들이 함께 있는 곳을 우리는 <신앙>의 현장이라 부른다. 이러한 신앙의 현장에서는 많은 문제들이 생긴다. 오늘 필자는 이러한 상극처럼 보이는 것들이 어떻게 한 자리에 함께 있는지, 그 공존의 구조를 원효의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를 통해서 밝혀 보려고 한다.
2. 신앙이라는 말
원효(元曉 617-686)가 감명 깊게 읽었다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은 원래 인도의 마명(馬鳴: A vagho a 생존년대 불분명)이 지었고 양나라의 진제(眞諦: Paramartha 499-569)가 번역한 이른바 구역(舊譯)이다. 구역이란 말은 그후 당나라의 실차난타(實叉難陀 ik nanda 695-704)가 번역한 신역 『대승기신론』(新譯 大乘起信論)과 구별하기 위해서 쓰는 말이다. 원효가 탐독한 구역 『대승기신론』에는 신(信)이라는 글자가 52회나 나온다. 처음, 책의 제목과 귀경송으로 이어지는 서분에서 4회; 제1, 인연분에서 3회; 제3, 해석분에서 21회; 제4, 수행신심분에서 18회; 마지막 권수이익분에서 6회이다. 필자가 이해한 바로는 『대승기신론』의 저자 마명은 믿음을 크게 두 가지의 다른 유형으로 나누고 있는 것 같다: 하나는 부처님처럼 똑바로 깨친 이의 믿음이요, 또 하나는 아직 깨치지 못한 이의 믿음이다. <깨친 이의 믿음>은 그 특징이 <불이(不二, non-duality, 둘 아님)>의 진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데에 있으며 이것은 『대승기신론』이라는 책의 제목에잘 드러나 있고 서분과 제1 인연분과 제2 입의분과 제3 해석분에서도 줄기차게 다루어지고 있다. <못 깨친 이의 믿음>은 다시 둘로 나누어져 하나는 아직 깨치지는 못 했지만 믿음이 견고하여 다시는 물러서지 않는 불퇴신(不退信)의 단계에 이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이 굳건하지 못 하여 자꾸 물러서는 퇴신(退信)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불퇴신과 퇴신은 제4 수행신심분에 잘 다루어져 있다.
원효의 대승기신론관은 철두철미 제2 입의분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가장 중요한 제2 입의분에서 마명은 단 한번도 신(信)이라는 말을 비친 적이 없다. 그러나 원효의 『대승기신론』이해에 있어서는 제2 입의분 만큼 중요한 글은 없기 때문에 원효가 생각한 불교의 <믿음>도 제2 입의분을 떠나서 따로 있을 수 없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대승기신론 전체 분량의 4분의 3을 차지하고있는 해석분도 그 내용을 보면 입의분을 해석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며 그 밖의 인연분, 수행신심분, 권수이익분도 결국은 입의분의 보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해도 결코 무리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원효는 그의 『기신론소의 첫 머리에 있는 유명한 종체장(宗體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비록 광대하지만 간략하게 말하자면 일심에서 [진여문과 생멸문이라는] 두 개의 문을 열었다[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所述雖廣 可略而言 開二門於一心).
이러한 원효의 말투는 한 마디로 말해서 『대승기신론』의 독자들에게 제발 한 눈 팔지 말고 입의분(立義分)에서 사생 결판을 내도록 하라는 당부로 받아 들여도 좋을 것이다. 사실 원효는 그 뒤로도 <이문일심(二門一心) 또는 <일심이문(一心二門)이라는 말을 자주 되새기면서 독자의 눈길이 딴 데로 빗나가지 않도록 무척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입의분(立義分)을 잘 읽어보면 우리는 이 책의 주제가 마하연(摩하衍) 즉 대승(大乘)임을 곧 알 수 있다. 마명은 마하연을 중생심이라고 말했지만 원효는 여기에 회의의 칼날을 꽂는다. 도대체 <그게 뭐냐>는 것이다. 원효의 『기신론소』는 이러한 회의에서 출발하여 모든 가능한 답변을 모두 동원하면서 결국 어떠한 답변도 모두 다 때려 부셔버리고 사람들이 사용한 언어의 한계를 지적한다. 이리하여 원효는 마침내 "마하연"이란 말 자체에까지 회의의 화살을 꽂는다. 마하연 즉 대승이란 말도 마지못해서 한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억지로 대승이라 했다"(不知何以言之 强號之謂大乘: I do not know how to speak of it, but as I am compelled now to name it, I call it "Mahayana.")란 말이 바로 그 말이다.
그리고 나서 원효는 바로 이언(離言)과 절려(絶慮)의 문제를 들고 나온다. 대승은 이언(離言)의 경지요 기신은 절려(絶慮)의 세계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원효는 말과 생각의 세계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원효는 책을 읽고 글을쓰며 사색하는 사람이다. 그러한 원효가 어떻게 이렇게 말과 생각을 철두철미하게 죽이려 드는가? 원효는 결국 말도 안 되는 어불성설의 불장난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필자는 여기서 원효의 때리고 부수고 깨지고 죽이는 무서운 칼날을 본다. 그것은 부정(否定)이라는 이름의 칼날이다. 이러한 부정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밑바닥에 <종교적인 믿음>이라는 저력이 없이는 수행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불교적인 믿음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면 즉 부정과 긍정 가운데 첫째인 부정의 극치를 본다. 필자가 원효의 종체장을 훌륭한 <믿음의 글> 즉 일종의 신앙론(信仰論)으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3. 부정의 칼날
이제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의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문제는 "그럼 대승이 뭐냐"는 것이다. 어떠한 언어도 어떠한 생각도 심지어 "대승"이란 말 자체도 난파당하고 마는 자리, 그 자리를 마지못해 "대승"이란 부호, 즉 "대승"이라는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데 그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당체 즉 "달"은 뭐냐는 것이다. 마명이 대승은 일체 중생의 마음이라 하니까 그런 마음은 많은 마음, 복수적인 마음이 아니라 하나의 마음 즉 일심(一心)임이 분명하고 또한 그 일심은 거기서 두 문이 열리는 곳이니 그 곳은 뭔가 기독교의 하나님 자리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원효가 가지고 있는 부정의 칼날 맛을 제대로 맛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 아닌가 생각한다.
마명은 대승을 말로 설명하면서 세 가지 것이 아주 크다고 말했다. 첫째는 몸이 아주 크고 둘째는 공덕이 아주 크고 셋째는 능력이 아주 크다고 했다. 유명한 기신론의 삼대설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들이 대승을 일심이라 말하면서 그것을 실체화하고 거기서 뭔가가 나오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대승의 몸이 아주 크다는 말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어둠의 소치에 불과하다. 몸이 아주 크다는 말은 대승불교의 공 사상에 입각하여 하는 말이다. <나>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나 아닌 것>이 맞서게 되고 이렇게 둘이 맞서 있기 때문에 몸은 이미 두 동강이로 부러져 아주 작은 병신이 되고 만다. 그렇지만 만일 <나>라는 생각이 없어지면 <나 아닌 것>도 없어져 이 세상 모든 것이 <나 아닌 것>이 없게 되어 그 몸은 아주 크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역설적인 말이다. <모든 있는 것은 실제는 없는 것이고 진실로 없는 것이야말로 정말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역설적인 말투처럼 대승이든 중생심이든 일심이든 그것이 정말 크다면 거기엔 <나 아닌 것>과 구별되는 <나>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원효가 찬탄해 마지않는 <일심이문법>의 일심을 작은 일심으로 만들려 하는가? 원효가 그의 종체장 첫 머리에서 대승이란 말에 날카로운 부정의 칼날을 꽂을 때, 이미 모든 말과 생각에 칼날이 동시에 꽂혀 모두 박살이 난 것이다. 그때 대승이란 말뿐만 아니라 중생심이란 말도 일심이란 말도 여래장, 아라야식 등등 모든 말이 다 박살이 난 것이다. 만일 거기에 그래도 뭔가 박살나지 않고 여전히 살아 남아 있는 게 있다면 그것은 원효의 종체장에 나오는 부정의 정신을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밖에 안 된다. 그래서 필자는 종체장을 원효의 신앙 고백으로 보고 싶은 것이다. 신앙이 정말 신앙이 될 수 있으려면 거기엔 먼저 철저한 부정 작업이 선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99.99%의 부정도 신앙적인 부정은 아니다. 0.01%의 잔재가 더 무서운 것이다. 그 속엔 많은 의심과 가지가지의 집착이 숨겨져 있다. 신앙은 100%의 부정일 때만이 비로소 종교적인 신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4. 죽어야 산다
둘째 문제는 일체를 두들겨 부셔 버리는 그 무서운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는 문제이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라면 그런 힘은 구태의연한 종래의 <자기>에게서는 나오지 않는다. 원효에게는 <죽어야 산다>는 신앙 체계가 있었던 것 같다. 종래의 구태의연한 <자기>를 죽일 때 일체가 함께 죽게 된다. 일사(一死)가 일체사(一切死)라고나 할까. 우리는 불경에서 <죽음이 곧 삶이고, 삶이 곧 죽음>이란 표현을 자주 만난다. 신앙은 말장난이 아니다.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것도 아니고, 희망 사항에 상상의 날개를 붙여 끝없이 하늘로 날아 가버리는 것도 아니다. 신앙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떠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긴가 민가 잘 모르겠다면 그건 신앙이 아니다. 뭐가 뭔 줄 모르는 삶은 종교적인 삶이 아니다. 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정확하게 판단하여 결단을 내려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옳은가 그른가를 따져야 하고, 하나를 잡으면 다른 하나는 놓아야 하는 일상적인 삶을 떠난 신앙은 적어도 불교적인 신앙은 아니다. 이렇듯 가장 구체적인 일상적 삶의 현장에서 신앙 생활을 뒤틀리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죽어야 마땅하다. 그것이 죽어야 신앙은 살아나고 삶은 비로소 삶다워진다. <죽어야 산다>는 말이 바로 그 말이다. 죽어야 할 것이 죽을 때 죽음은 곧 삶이 된다. 죽어야 할 자를 고발하고 그 자를 여지없이 죽여 버리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대승기신론』을 비롯한 많은 불교 책들이 하나같이 무명을 이야기하고 번뇌와 망상과 탐진치, 삼독심 등등 죽어 마땅할 것들을 적발하여 이들을 모두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불을 질러버리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한마디로 말해 신앙의 체계를 말하는 한, 죽음이 먼저다. 파괴가 먼저고 부정이 먼저라는 말이다. 어둠이 뭔가를 모르는 사람은 밝음을 찾지 않는다. 이 말은 우리의 삶이 지금 뭔가 어둠에 쌓여 있으니 그 어둠부터 먼저 몰아내자는 것이다. 어둠이란 인간의 무명을 말한다. 무명에서 비롯한 번뇌, 망상 등을 말한다. 이것들을 그대로 놓아둔 체로는 백날 이야기해 보았자 말짱 헛짓이란 말이다. 이렇게 어둠을 물리치는 죽임의 작업이 철저히 수행되어야 다시 살아나는 밝음이 있다. 부정 없는 긍정은 말장난에 떨어지기 쉽다. 파괴 없는 건설은 종교적인 건설이 아니다. 불교에서 파사현정(破邪顯正)이란 말이 회자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구름이 걷혀야 햇볕이 난다. 올바름이 그립지 않은 사람에게서 사악한 것에 대항하는 도전이 나올 수 없고 햇볕의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에게서 구름 걷는 작업이 나올 수 없다. <죽음이 곧 삶이고 삶이 곧 죽음>이란 말만 되 뇌이고 있는 사람은 아직 신앙이 없고 신앙의 체계도 서있지 않은 사람이다. 원효의 부정 정신에 근거하면 먼저 있어야 할 것은 죽음뿐이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삶마저도 죽어야 한다. 또 역설이 나오지만 죽음도 또한 죽어야 한다. 임제 선사의 말이 생각난다.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죽여라!>. 만고의 금언이다. 원효와 임제 사이에 어떤 통하는 점이 있는 것 같다.
원래 “신앙”이란 말은 사람이 만든 말이다. 왜 사람은 이런 말을 만들어냈을까? 중요한 것은 “신앙”이란 것이 사람을 떠나 따로 저기에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아는 일이다. 이 말은 신앙의 체계라는 것도 사람 때문에 생겨났다는 말이다. 사람은 신앙이 필요하다. 신앙없이는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할 수 없다. 사람은 순간 순간 죽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누구나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친다. 무명(無明) 탓이다. 그러나 종교의 세계는 그렇지 않다. 죽기 전에 먼저 죽는 것이다. 이것은 살아 있으면서 죽는 것이기에 자살이 아니다. 구태여 이름 붙이자면 대사(大死)다. 커다란 죽음이란 말이다. 이것이 신앙의 현장이다. 현실적으로 사람은 살고 있는 존재이지 죽어 있는 존재가 아니다. <죽어야 산다>는 말은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삶의 길이 아니란 말이다. 즉 죽음이 삶이지 죽음과 삶이란 두 놈이 따로 있으면서 또한 함께 나란히 서 있다는 말이 아니다. 원효의 많은 저술 가운데 비교적 후기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고 또한 걸작 중의 걸작으로알려져 있는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을 펴보자. 거기에 처음부터 쏟아져 나오는 부정적인 표현법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살려고 발버둥치는 놈들을 모두 때려부수는 작업이 아니고 무엇인가? 왜 때려부수는가? 죽어야 살기 때문이다. 원효의 저술이라면 이런 특징은 어디에나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대혜도경종요』(大慧度經宗要), 『진역화엄경소서』(晉譯華嚴經疏序), 『본업경소서』(本業經疏序), 『열반종요』(涅槃宗要) 등등 어느 책을 펴보아도 한결같이 쏟아져 나오는 투가 모두 부정법이다. 부정은 분명히 신앙인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부정은 신앙이 일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부정적인 표현은 종교적인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서도 나타난다. 그렇다면 양자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답변은 간단하다. 전자는 살기 위해서 부정하지만 후자는 죽어버리기 위해서 부정한다. 전자가 살리려고 애쓰는 것이 <나>라면 후자가 죽이려고 애쓰는 것도 <나>다. 똑 같은 <나>이건만 <나>에 대한 양자간의 견해는 전혀 다르다. 무엇이 그런 차이를 가져오게 하는가? 신앙이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죽어야 살지만, 신앙 없는 세계에서는 죽으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도 살기 위해 부정하는 것이다. 살기 위한 부정의 핵심에는 항상 내가 도사리고 앉아 있다. 따라서 부정되어야 할 것은 내가 아니라 남이 되고 만다. 여기서 추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인 부정의 표적은 다름 아닌 <나>다. 그런데 이 <나>라는 놈이 어찌나 묘한지 자꾸 둔갑을 한다. 그래서 꼭 죽은 줄 알았는데 어딘가에 숨어서 또 미소짓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 교활한 자를 때려잡을 것인가. 무엇보다도 여기서 잡으려는 자는 누구며 잡혀야 할 자는 누구인가? 만약 그 두 놈이 똑같은 놈이면 일은 이미 그른 것이다. 아무리 야무지게 때려잡은들, 잡은 놈이 똑같은 그 놈이면, 결과는 헛농사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본질에 육박해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나를 때려잡을 수 있는 힘은 나에게서는 나오지 않는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죽어 마땅한 <나>에게서 죽어 마땅한 <나>를 때려잡을 힘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왜 사람들은 어떤 잘못을 저지른 다음, 후회하고 참회하고 별 야단을 다 치고, 그러고서 또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는가? 왜 <퇴신(退信)의 경지>에서 <불퇴신(不退信)의 경지>로 넘어가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먹으로 먹을 지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5. 기신(起信)이란 말
모든 언어는 무거운 업을 가지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언어의 업에 짓눌려 산다. 우리들이 『대승기신론』이라는 책의 제목을 두고 한번 생각해봐도 사람들이 그 동안 얼마나 그 무거운 언어의 업에 짓눌려 왔던가를 곧 알 수 있다. 우선 “기신(起信)”이라 하면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누구의 기신?> 또는 <누가 무엇을 믿는가?>라는 식으로 머리가 돌아간다. 이것은 자기가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아니고 언어가 사람을 구사하고 있는 현상이다. 육조 단경에도 보면 무념(無念)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과정에서 기념(起念)이란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도 사람들은 무조건 <누가 무슨 생각을 일으키는가?>라는 식으로 머리를 굴린다. 이런 식의 머리 굴림은 그 속에 이미 답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진여자성을 생각한다>는 답변을 이미 머리 속에 깔고 있으면서 생각하는 주체인 내가 빠져나가면 말이 안 된다고 속단하고, <생각한다>는 타동사의 목적어가 없다면 또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말이 좋아 철학이지 이건 철학이 아니다. 한마디로 언어의 노예생활이지 사람이 사람 노릇하고 있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여기서 사람 노릇이란 언어의 노예 노릇 그만하고 언어를 부릴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새로운 언어, 새로운 논리를 자꾸 창조하면서 진리와 사람의 간격을 없애 줘야 그것이 철학이지 그렇지 못 하면 그런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철학이 아니다. 사람 죽이는 짓을 어찌 철학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6세기 중엽, 진제의 『대승기신론』이 출판된 이래 수백 종의 『대승기신론』관계 연구서들이 줄기차게 나왔다. 그 가운데서 가장 생명이 길고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책이 법장(法藏, 643-712)의 『대승기신론의기』(大乘起信論義記)이다. 이 책에서 법장은 “대승”과 “기신”의 관계를 능소의 관계(能所關係)로 보았다.
[법장의 원문]
대승 소신지경 체능위의
(大乘 所信之境 體能爲義)
기신즉 능신지심 징정위성
(起信卽 能信之心 澄淨爲性)
심경합목 고운 대승기신
(心境合目 故云 大乘起信)
[필자의 번역]
“대승”은 믿어야할(所信) 경지임으로 본체와 능력이 그 뜻이 되고
“기신”은 믿는(能信) 마음임으로 맑음과 깨끗함이 그 바탕이 된다.
[믿는] 마음과 [믿어야 할] 경지를 합하여 “대승기신”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법장은 여기서 능(能)과 소(所)라는 불교의 주석학적인 전문 용어를 가지고 “대승기신”이라는 책의 제목을 이해한 것이다. 능소(能所)란 말은 가령 여기에 어떤 행위나 동작이 있을 때 그런 행위의 주체는 누구이며 그리고 그런 행위를 받는 대상이 무엇인가를 밝혀야 할 때 동원되는 해석의 도구이다. 요즘엔 능소라 하면 곧잘 능동(能動, active)과 수동(受動, passive)으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주관(主觀, subjective)과 객관(客觀, objective)으로 바꾸어 이해한다. 그러나 법장의 능소가 과연 요즘의 능소처럼 깨끗하게 능동-수동 아니면 주관-객관이라는 이분법(二分法, dualistic)으로 나누어질지는 의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장의 제목 풀이는 원효의 그것과 아주 대조적이다.
[원효의 원문]
총이언지 (總而言之)
대승시 논지종체 (大乘是 論之宗體)
기신시 논지승능 (起信是 論之勝能)
체용합거 이표제목 (體用合擧 以標題目)
고언 대승기신론야 (故言 大乘起信論也)
[필자의 번역]
통 털어서 말하자면
"대승”이란 이 책의 몸이고
"기신”이란 이 책의 몸짓이다.
몸과 몸짓을 하나로 묶어 책의 제목을 삼아
대승기신론이라고 말한 것이다.
원효는 법장과는 달리 “대승”과 “기신”의 관계를 체용관계(體用關係)로 읽은 것이다. 문제는 『능소관계』와 체용관계』의 차이이다. 체용의 논리는 한 마디로 몸의 논리다. 말하자면 몸에서 몸짓을 설명하는 논리이다. 몸 떠난 몸짓도 없고 몸짓 없는 몸도 없다. 그래서 체용 논리의 저변에는 항상 불이(不二) 사상이 깔려 있다. 그러나 능소의 논리는 몸의 논리가 아니라 몸짓의 논리이다. 능소도 사람을 다루는 이상 몸을 무시하진 않지만 능소에 묶인 사람들은 몸짓 설명이 급선무이기 때문에 몸짓과 몸짓 사이의 여러 가지 차이들이 먼저 눈에 띄기 마련이다. 하나의 몸짓만을 다룰 때도 앞의 몸짓과 뒤의 몸짓 사이의 차이에 더 관심이 쏠리게 된다. 그러나 몸에 관심이 더 많은 체용의 논리는 겉에 나타난 차이를 언어로 규정짓고 이를 의식에 보관하는 여러 행위를 무명과 망상이 주동이 되어 생긴 집착으로 보기 때문에 먼저 이런 병통의 근본 원인을 치료하고 하루속히 몸으로 돌아 갈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능소의 논리가 겉으로 나타난 몸짓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에 모든 차이를 무효화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앞서 인용한 법장의 제목 풀이를 잘 살펴보면 법장은 대승과 기신을 둘로 나눠놓았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법장은 앞에 인용한 문장에 곧 뒤이어 말하기를 “대승기신은 증의 경지를 말한 것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하고 있다. 법장에 의하면 “대승기신”이란 말은 “부처님의 경지를 바라보면서 자기의 마음을 잘 다스려라”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법장은 대승기신을 자기가 이미 부처님의 경지에 들어간 경계를 말하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는 식으로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이는 “대승기신”이란 말을 체용 관계로 보는 원효의 해석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대승은 체요 기신은 용”이라는 원효의 말은 “대승기신”을 <부처님의 경지>, <증의 경지>로 보려는 것인데 반하여 법장의 말은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정신 차려서 공부 열심히 하라>는 교훈조의 말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원효는 법장보다 25세가 앞서며 원효가 의상(義湘, 625-702)과 함께 중국에 들어가려다 말고 신라로 되돌아온 것이 661년의 일이라면 그때 원효의 나이는 45세쯤 되었을 것이다. 그때 법장은 20대의 젊은 나이였고 원효가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법장은 40대의 한참 정력적으로 저술활동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필자는 원효가 언제 그의 기신론소를 지었으며 법장이 언제 원효의 소를 읽었는지 잘 모르지만 지금 원효의 소와 법장의 소를 비교해 보면 두 분 사이엔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원효는 신앙의 눈을 가지고 수행을 드려다 보고 있는 반면, 법장은 학자의 눈으로 실천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신앙의 눈이란 다름 아닌 부처님의 눈이다. 부처님의 눈이 일하지 않는 눈을 우리는 신앙의 눈이라 말할 수 없다. 법장이 “대승기신”이란 책의 제목에서 읽기를 거부했던 “증의 경지”를 원효는 처음부터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이다. <증의 경지>가 곧 <부처님의 경지>이며 이 경지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신앙의 눈>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6. 체용론적 해석의 근거
원효가 마명의 『대승기신론』을 극찬했다는 이야기는 되풀이할 필요가 없다. 원효는 당시의 학자들이 마명의 책을 읽고도 그의 메시지를 잡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에 대하여 심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물의 근원을 찾아간다면서 물살에 휘말려 물줄기로 떠내려 가버린 자들!” “무성한 잎사귀를 따는 데에 정신에 나가 나무의 줄기를 잊어버린 자들!”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뿌리에다 갖다 붙이고 있는 자들!” 정신 빠진 학자들에 대하여 원효는 호된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만일 원효가 법장의 소를 직접 읽었다면 뭐라고 말했을까? 원효의 해동소를 그의 출세작이라 말하지만 원효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해동소는 법장의 책에 가려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했으며 아주 최근에 나온 한국의 원효 해설서까지도 법장을 원효의 훌륭한 계승자로 보고 있는 형편이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법장이 원효를 자주 인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빈번한 인용을 어찌 계승의 증거로 내세울 수 있는지 모르겠다.
만일 “대승기신”(大乘起信)이란 말을 법장 식으로 읽으면 우리는 대승을 기신의 주어로 볼 수 없다. 그러나 이를 원효 식으로 읽으면 대승은 기신의 주어가 되어야 한다. 누가 옳은가? 그 판단은 대승기신론의 저자 마명이 이미 그의 본문에서 내려주고 있다. 『대승기신론』의 첫 문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논왈장(論曰章)>을 한번 보자. <논왈장>은 “논왈유법능기 마하연신근 시고응설”(論曰有法能起 摩訶衍信根 是故應說)이라는 단 15자로 되어 있는 짧은 문장이다. 필자는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번역해보았다. “논은 말한다: ‘유법’이 능히 마하연 신근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마땅히 이를 설해야겠다.” “유법”은 하나의 전문 용어로서 이 문장의 주어이다. 실차난타가 번역한 신역을 보면 마하연을 두 가지로 말하여 하나는 유법(dharmin)이고 하나는 법(dharma)이라고 말하면서 “유법”은 법을 가진 자라는 뜻이 되어 결국 그것은 일체 중생심이 된다. 신역을 보지 못한 구역의 주석가라고 말할 수 있는 정영사 혜원의 대승기신론의소도 원효의 해동소도 모두 “유법”을 전문 용어로 다루면서 이 문장의 주어로 삼고 있다. “유법”을 주어로 삼는 이상, 그 술어는 응당 "능기마하연신근"이 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마하연”은 신근의 형용사 노릇을 하고 있으므로 남는 것은 결국 “기신”이다. 그럼 누가 기신하는가? 눈을 씻고 봐도 “유법”밖엔 없다. 유법은 뭔가? 일체 중생심이요 그것은 곧 대승이다. 그러므로 자연스런 해석은 원효처럼 양자를 체용 관계로 보아 <대승이 기신한다>가 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자연스런 해석을 사람들은 왜 거부하는가? 해석자의 마음보에 능소(能所)라는 이분법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대승은 소신(所信)이요 기신은 능신(能信)이라는 이분법 말이다. 원효의 해석이 자취를 감추고 법장의 해석이 판을 치게 된 것도 알고 보면 사람들의 마음보에 <능소라야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다시 육조단경의 경우로 돌아가 말하자면 사람들이 “무념(無念)”의 념(念)이란 글자를 해석하면서 이를 진여자성과 기념의 체용관계로 보는 돈황본을 팽개치고 그 뒤에 나온 흥성사본의 <념자념진여본성(念者念眞如本性)> 즉 “념이란 진여본성을 생각하는 것”이라는 해괴한 오독을 옳게 여겨 결국 돈황본은 각광을 받지 못하고 흥성사본이 오늘날까지도 옳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현상이다. 1969년 콜럼비아 대학교 출판사에서 나온 필립 얌폴스키(Philip Yampolsky) 교수의 해석이 바로 그 좋은 예이다. 그는 돈황본을 번역했다고 광고해 놓고서는 이 대목에 이르러 돈황본은 말이 안 되어 흥성사 본을 따른다고 정직하게 밝혔다. 정직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지> 그 까닭을 파고 들어가진 않았다. 능소적인 이분법이라야 귀에 솔깃하지 불이적인 체용은 어딘지 불편했기 때문이리라.
대승기신론의 논왈장은 15자로 된 단 한 줄의 글이지만 이 글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중요한 글이다. 첫째, <대승기신론>이라는 책의 제목은 논왈장의 <유법능기마하연신근>이란 말을 한문 투로 간략하게 표현했을 뿐이다. 논왈장의 “유법기신”이나 책 제목의 “대승기신”이나 같은 말이다. 다시 말하면 “대승기신”이란 말은 “유법능기 마하연신근”이란 말에 바탕하여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유법은 곧 대승임으로 논왈장은 <대승능기대승신근>이란 말이 되고 그 뜻은 대승이 대승신근을 일으킨다는 극히 자연스러운 말이 된다. 사람이 사람 노릇한다는 말이나 똑같은 어법이다. 사람이 체라면 사람 노릇하는 것은 그 용이다. 마찬가지로 대승이 대승 노릇한다고 말할 때, 대승은 체요 기신은 그 용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체용론적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일시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다. 내가 믿고 안 믿고에 관계없이 대승은 항상 대승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로 물러서자니 물러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불퇴신이 가능한 것이다. 내가 노력해서 뭔가 달라지는 것도 대승이 대승 노릇을 항상 잘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진정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으며 절로 환희심이 나는 대목이다. “대승기신”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이것이 믿어지지 않는 사람들이 열심히 이를 듣고 닦아 나가면 되겠다는 희망이 생기는 것이다.
또한 논왈장은 그 다음에 나오는 제2 입의분의 서곡 노릇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들의 특별한 주의를 끈다. 다시 말하지만 입의분의 주제는 “마하연”이며, 마하연은 다름 아닌 “중생심”이다. 그리고 이 중생심은 이 세상의 좋고 나쁜 모든 일을 다 한다고 입의분은 증언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 이 세상의 어떤 일이고 이 중생심 밖의 일이 아니란 말이다. 그렇다면 기신도 중생심의 하는 일이 된다. 그리고 입의분의 마지막 증언은 모든 부처님과 중생심은 하나라는 것이다. 이런 증언을 설명하기 위해서 마명은 이른바 체·상·용 삼대설을 끌어들인 것이다. 삼대설의 요지는 중생심에는 아무도 무시 못할 세 가지의 커다란 특징이 있으니 첫째, 그 몸이 크고, 둘째, 그 공덕이 크고, 셋째, 그 능력이 크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대로 부처님 설명이다. 그러니 결론은 중생심(衆生心)이야말로 모든 부처님이 본래 타고 계신 바라는 것이다. 부처님과 중생심을 하나로 보는 것이 입의분의 핵심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답변은 명백하다. 기신도 부처님이 하고 계신 것이다. 내가 기신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부처님이 기신하고 계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노력해서 우리가 기신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좀도둑 근성을 버려야 한다. 입의분은 제3 해석분으로 이어지는데 해석분의 메시지도 입의분의 근본 메시지에서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요지는 진여문과 생멸문을 둘로 나누지 말라는 말이다. 둘이지만 둘이 아니라는 말이다. 말을 다른 말로 쓰는 이상 우리에겐 양자가 이미 나누어져 있는 꼴이 된다. 그러므로 양자를 둘로 나누지 말라는 말은 언어를 때리는 것이지, 진실을 때리는 것이 아니다. 언어 속에 진실을 가두지 말란 말이다.
7. 원효에는 능소가 없는가
불립문자를 내세운 선종의 승려들이 의외에도 책을 많이 저술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선승은 문자에 집착하고 문자에 얽매이는 현상을 한탄했을 뿐, 문자 자체를 꾸짖지 않았다. 문자와 사람 사이의 전도된 모습을 한탄했을 뿐이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도 이와 비슷하다. 우리는 지금 능소에 얽매여 불경을 읽을 때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을 뿐, 능소 자체를 비판하진 않는다. 능소에 얽매이지 않고 능소를 쓴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능소다. 원효가 저술한 대승기신론소의 도처에 우리는 능소를 본다.
원효가 그의 『대승기신론소』에서 책의 제목 풀이를 마치고 귀경송을 해석하면서 내놓은 첫 마디가 “능소”였다.
마명의 귀경송은 “귀명진시방(歸命盡十方)”이란 말로 시작하는데 누가 귀명하는가? 누구에게 귀명하는가? 라는 질문을 예상한 듯, 귀명(歸命)은 능귀상(能歸相)이요 진시방(盡十方)아래는 소귀덕(所歸德)이라고 말했다. 원효도 능소를 가지고 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왜 이런 짓을 했을까? 주제가 귀명이기 때문이다. 귀명이란 말을 쓴 이상, 이것은 당연한 절차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일하는 능소가 집착과 구속의 능소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집착과 구속을 일삼는 능소의 주체는 <나>다. 그러한 <나>를 송두리채 죽여버리는 것이 “목숨바쳐 돌아가나이다”라는 “귀명”두 글자의 뜻이다. 능소를 쓰되 능소에 묶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능소를 써도 좋을 때>와 <능소를 써서는 안 될 때>를 분명히 구별해 둘 필요가 있다. 가장 좋은 구별법은 능소가 <몸짓의 언어>인데 반하여 체용은 <몸의 언어>라는 차이를 바로 아는 일이다. 귀명(歸命: 목숨 바쳐 귀의하나이다)은 수행자의 몸짓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응당 <내가 나의 가장 소중한 목숨마저 내던져서...>라는 능(能) 표현이 나올 수밖에 없고 능(能)을 쓴 이상, 그 소(所) 표현인 “진시방”으로 시작하는 삼보가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마명의 귀경송을 원효가 능소로 푼 것은 잘 한 일이다. 그리고 원효가 마명의 “대승기신”을 능소로 풀지 않고 체용으로 푼 것도 또한 잘 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체용이 들어 올 자리이지 능소가 들어올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체용이 들어올 자리>와 <능소가 들어올 자리>를 어떻게 구별하는가? 다시 되풀이 하지만 결국은 이야기의 현장이 <몸짓>을 이야기하고 있는 자리인가 아니면 <몸>을 이야기하고 있는 자리인가를 가릴 줄 아는 길밖엔 없다. 신앙은 몸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나오는 말이며 대승기신은 몸을 드러내려는 신앙적인 표현이다.
원효가 그의 대승기신론소의 벽두에 들고 나온 문제가 <몸의 문제>였다. 그의 첫 마디는 “대승지위체야(大乘之爲體也: 대승의 몸됨)”이었다. 우리는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옳은가? 해답은 그런 문제 제기에 이어지는 그의 말투에서 찾을 수 있다. “사람들은 대승을 두고 공적이니 충현이니들 말하지만...”으로 시작하여 퍼붓는 맹공(猛攻), 맹타(猛打)의 표적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대승을 <몸짓의 언어>로 풀려고 들지 말라는 것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그의 중간 결론은 “부지하이언지 강호지위대승”(不知何以言之 强號之謂大乘: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억지로 대승이라 했다)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문절에서 이언절려(離言絶慮)의 문제를 들고 나오고 그 중간 결론은 “위도자영식만경 수환일심지원”(爲道者永息萬境 遂還一心之原: 도를 닦는 사람들로 하여금 망상에서 비롯한 오만 경계로부터 영원히 해방되도록 하여 마침내 우리의 근원인 일심으로 돌아가게 하고자 한다)이었으며 마지막 결론은 유명한 개합(開合)의 논리로 일심(一心)과 만의(萬義)의 관계를 <원융(圓融), 무애(無碍), 자재(自在)>라고 선언하는 것이었다. 이런 구조가, 말하자면 원효의 종체장이 가지고 있는 기본 골격인데 여기의 그 어디에 몸짓 이야기가 나오는가? 그렇기에 원효는 스스로 이 글을 <종체(宗體)>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오직 한가지, <몸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일이다. 몸 이야기의 핵심 문제는 다름 아닌 믿음의 문제다. 그리고 그런 믿음은 <몸짓 믿음>이 아니고 <몸 믿음>이다. 양자는 어떻게 다른가? 믿음을 말하면서 능소를 주무기로 사용하면 <몸짓 믿음>으로 전락하고, 체용으로 풀면 <몸 믿음>으로 나아간다.
8. 절대 긍정(絶對 肯定)
<내가 대승에 대한 믿음을 일으킨다>는 능소적인 해석을 버리고 <대승이 기신한다>는 체용론적인 입장에 서서 보면 이 세상에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선(善)이든 악(惡)이든 세간법(世間法)이든 출세간법(出世間法)이든 그 어떤 것이든 모두가 <대승> 속에서 일어난 일이며 <대승>이 하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비좁아서 이 세상에 포용 못할 것이 너무 많다. 이것도 버려야 하고 저것도 버려야 하고 버려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는 부처님의 경지는 버려야 할 것이 너무도 많은 이 <비좁은 마음>을 먼저 버린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여기가 바로 부정이 긍정으로 넘어가는 대목이다. 나를 버리는 부정이 바로 일체를 포용하는 긍정이란 말이다.
신앙이란 탁상공론이 아니고 지금 당장 여기에 이렇게 있는 나의 문제이기 때문에 대승기신론 제2 입의분에서 선언한 “소언법자 위중생심”(所言法者 謂衆生心: 법이란 중생심)이란 말을 진정 내가 제대로 알아들었다면 현실적으로 나에게서 무슨 변화 즉 살아 움직이고 꿈틀거림이 생겨야 할 것이다. 한번 상상해 보자. 만일 이 때, 이를 가르쳐준 스승이나 옆에서 함께 듣고 있었던 친구가 “알아들었어?”라고 물었을 때, “응, 알아들었어!"라고 답변하고 또 "그럼, 정말 믿는 거야?”라고 물으면 “응, 정말 믿어!”라고 답변한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자는 말이다. 이런 경험은 아마 진지한 『대승기신론』 독자라면 거의 누구나 한번쯤은 가졌으리라 믿는다. 바로 이때, “알아들었다” 또는 “믿는다”고 고백한 사람에게서 무슨 변화가 생겼느냔 말이다. 중대한 변화는 가끔 겉으로 나타나지 않고 저 깊은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일어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런 변화를 쉽게 감지할 수 없는 경우도 많지만 지금 우리들이 문제삼고 있는 것은 <사실은 모르면서도 알았다고 착각>하는 경우이기 때문에 우리의 말이 많아지는 것이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아니 한 달이 지나고 일년이 지나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경우, 이런 기막힌 경우, “알아들었다”는 게 무슨 소용이 있으며 “믿는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말이다. 아무 소용도 없고 아무 의미도 없는 그런 “알아들음”과 그런 “믿음”에 우리는 어떤 크레디트를 주어야 하는가? 아니 그래 놓고도 “알아들었다” 또는 “믿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믿음”을 마명이나 원효가 “믿음”이라고 인정해 줄 것 같은가? 대승기신론이나 해동소가 밝히고자 하는 믿음이 겨우 그 정도의 믿음일까? 이에 대한 답변은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럼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 적어도 한 가지가 빠진 것이다. 대승이란 능히 일체 세간과 출세간의 좋은 인과를 모두 창조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아무런 변화가 없단 말인가? 전류는 흐르고 있는데 작동 스위치를 누르지 않고 있는 것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잘못된 믿음은 시동 스위치를 꺼버리는 것과 같다. 우리의 경우는 내가 믿음을 일으킨다고 생각하는 능소적인 믿음을 갖는 것이 바로 스위치를 꺼버리는 짓과 비슷하지 않을까?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대승이 기신한다는 식으로 <나>를 빼버리면 시동이 걸릴 것이다. 부정이 곧 긍정이다. 여기서 기신론은 나를 부정할 줄 모르고 나를 부정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제4 수행신심분과 제5 권수이익분을 추가하여 가지가지의 믿음을 모두 열거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어느 경우든 <나>를 철두철미 완전히 버릴 때 대승, 유법, 일체 중생심, 또는 일심으로 불리는 생명 자체가 항상 일을 하고 있음이 드러날 것이다. 생명 자체의 일함이 바로 부처님의 일함이다. 원효의 『대승기신론별기』는 제4 수행신심분과 제5 권수이익분을 다루지 않았다. 원효의 별기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 끝을 맺고 있다: “차후이분자 단가의문 심기신심 근식망상 불가집언 분별시비 이쟁론고 금석 번불갱소식야”(此後二分者 但可依文 懃息妄想 不可執言 分別是非 以諍論故 今釋 煩不更消息也: 이 다음 수행신심분과 권수이익분에 대해서는 다만 본문 그대로 따라가면서 부지런히 망상을 쉬도록 할 것이다. 말에 집착하여 시비에 말려들지 말지니 그런 짓은 쟁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번 나의 주석은 그런 것들이 번거러워 여기서 그치겠다). 그러나 원효는 별기 다음에 다시 해동소를 쓰면서 제4, 제5분에 대해서도 긴 주석을 달았다. 그러나 그 내용을 살펴보면 해동소의 글투를 따라 여러 말을 했을 뿐, 그 메시지는 앞의 제 1, 제2, 제3분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9. 커다란 그림
원효의 『대승기신론소』의 핵심은 종체장(宗體章)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종체장은 믿음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없다. 그의 『대승기신론별기』의 대의장(大意章)에서도 신(信)이란 글자가 단 한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마치 마명의 『대승기신론』의 근본 바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입의분에서 신(信)이란 글자가 단 한번도 나타나지 않는 것과 분위기가 비슷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화엄종에서 말하는 신(信)·해(解)·행(行)·증(證)의 수행 체계를 가지고 이야기하자면 마명이나 원효나 그 출발점이 증(證)이기 때문이 아닐까? 증은 철두철미 불이(不二)의 경지다. <증의 경지>가 똑바로 드러나면 신과 해와 행은 그 속에 있는 것이다. 초발심시에 변성정각(初發心時 便成正覺)이란 말은 <증의 경지>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대승기신”이란 책의 제목과 “유법능기마하연신근”이란 논왈장의 메시지와 “유법자위일체중생심”이라는 입의분의 선언과 해석분의 첫 머리에 나오는 “일심-이문”의 법문이 모두 하나같이 부처님의 깨침을 이야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증의 경계란 말이다. 증(證)이 드러나면 신(信)과 해(解)와 행(行)은 저절로 그 속에 들어 있다. 그런데 왜 그것이 안 드러나는가? <나>라는 것이 속에서 안 죽으려고 발버둥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를 죽이나? 부처님의 깨침 즉 증(證)의 경지를 들이대는 수밖에 없다. 예불, 참회, 발원, 참선, 염불 등등 근기(根機)와 인연(因緣)을 따라 무엇을 하든 그 모든 것이 부처님의 깨침 즉 증(證)의 일함이어야 한다.
신앙의 체계라는 관점에서 볼 때 원효는 <커다란 그림>을 그리려고 애썼던 것 같다. 커다란 그림이란 작은 그림을 예상하고 하는 말이다. 작은 그림이란 아무리 잘 그려도 이리 막히고 저리 막혀서 결국엔 자기 자신 마저 비생명화 되어 버리는 그림이다. 비생명화는 신앙의 길이 아니다. 처음엔 말도 안 되는 것 같고 받아들이기 힘들어도 결국은 나를 해탈의 길로 이끌어 주고 나의 생명을 생명답게 해준다면 그런 것이 커다란 그림일 것이다. 현실적으로 우리들은 눈과 귀를 가지고 살기 때문에 보이고 들리는 것은 모두가 몸짓이다. 눈과 귀는 몸짓을 인식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누가 몸짓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종교는커녕 인간도 아니다. 그러나 몸짓을 보는 눈이나 귀는 다 똑같진 않다. 깨친 사람은 못 깨친 사람과 똑같이 몸짓을 보고 듣지만 <몸짓으로 몸짓을> 보지 않고 <몸으로 몸짓을> 보고 듣는다. “몸짓으로 몸짓을 본다”는 말은 자기의 잣대로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보고 고약하게도 때로는 선입견으로 보고 오해하고 망상심으로 보고 착각하고 왜곡하는 것인데 반하여 “몸으로 본다”는 말은 결국 대승의 눈, 부처님의 눈으로 본다는 말이기 때문에 전자의 병통을 극복하고 있다. 원효의 경우, 그는 체용으로 기신을 이야기하면서도 귀명을 소중히 여기고 삼보를 공경하는 모든 수행에 있을 자리를 주었다. 그래서 필자는 그의 그림을 <커다란 그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작은 그림은 몸짓만을 정확하게 그리려다 결국엔 다른 사람들이 그린 작은 그림과 충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덜된 그림을 완전한 그림으로 착각하여 오만에 빠지고 자기 것에 집착하여 적반하장으로 커다란 그림을 덜된 그림이라 욕한다. 이러한 그림은 비단 작은 그림일 뿐만 아니라 못 된 그림이다. 깨친 사람들이 이단사설(異端邪說)이라 규탄하는 그림들이 모두 이에 속한다.
대승기신론의 입의분에 나오는 체와 상과 용을 원효는 대승이라고 불리는 <몸>을 설명하는 명의(名義)라고 밝혔다. “명의”란 이름이요, 이름을 밝히는 뜻이라는 말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달 자체는 아니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란 말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달을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손가락을 보는 것을 <믿음>이라고 부르고 있다. 우리는 불경을 대할 때 그 속에 있는 무수한 손가락(몸짓)에 현혹되지 말고 그러한 몸짓들이 가리키는 달(몸)을 바로 보는 공부를 해야할 것 같다.
필자는 처음 이 글을 시작하면서 <부정과 긍정>, <죽음과 삶>등 모순되어 보이는 것들이 함께 있는 자리가 신앙의 현장이라고 말했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으로 이 말을 다시 한번 분명하게 정리해 둘 필요를 느낀다. 부정이든 죽음이든 그런 말을 쓰는 사람이 몸짓에 구속되어 <몸짓의 언어>밖에 구사할 줄 모르면 부정은 긍정이 아니고 죽음은 삶일 수 없다. 그러나 원효처럼 <죽어야 산다>는 신앙으로 밀고 나가면 죽음은 곧 삶이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이 몸짓의 속박에서 벗어나 <몸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알게 되면 부정 그 자체가 곧 몸의 일함이기 때문에 부정은 부정만이 아니게 된다. 그러므로 부정과 긍정의 공존을 몸짓의 언어로 풀려는 것은 잘못이다. 만일 이를 몸짓의 언어로 풀면 부정과 긍정이란 두 놈이 따로 따로 존재하면서 으르렁거리고 맞서있는 것이 신앙의 현장인 것처럼 오해하는 사람이 생기게 될 것이다. 원효가 말했듯이 소승의 몸은 모두 다른 별개의 몸이지만 대승의 몸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대승의 몸 속에서는 모든 몸짓이 함께 있는 것이다. 몸짓의 몸짓은 모순의 공존이 불가능하지만 몸의 몸짓은 창조적인 공(空)과 연기의 모습으로 함께 있는 것이다. 몸의 몸짓이란 다름 아닌 몸의 일함이기 때문이다. 몸을 떠나서 몸짓을 그리려 하면 작은 그림이 되어 버리지만 몸 속에서 몸짓을 그리면 모든 작은 그림들이 각기 제 구실을 하게 된다. 작은 그림이란 <몸짓 그림>이요, 커다란 그림이란 <몸 그림>이다. 작은 그림이란 많은 경우에 덜된 그림이요 못된 그림이기 쉽다. 만일 작은 그림이 자기의 덜됨을 깨닫지 못하고 오만에 빠져 못된 그림으로 전락하는 경우, 커다란 그림은 불문곡직하고 여지없이 철퇴를 가하는 무서운 부정을 감행한다. 그러다가도 일단 커다란 그림과 한 몸이 되면 여러 가지 사정과 가지가지 인연 때문에 생겨난 상처를 어루 만져주고 치유해준다. 이것이 커다란 그림의 제 모습이다. 원효의 신앙 체계란 그의 커다란 그림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대승기신론소 - 원효의 신앙체계/박성배 교수 |작성자 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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