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은 그 양이 방대하므로 경전 전체를 독송하거나 그 내용을 모두다 파악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기에 [화엄경]이란 어떤 경전이냐고 질문을 받았을 때 명확하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주된 이유는 [화엄경]의 방대함과 난해함에 있을 것이다.
[화엄경]을 처음 펼쳐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반복적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교설(敎設)에 당혹감을 느끼게 되고, 다음으로는 그 깊이를 알수 없을 정도로 난해하고 나아가 우주 전체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사상에 지금까지의 스스로의 지식이 얼마나 하잘것 없는 것인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화엄경] 과 함께 대승경전의 또다른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법화경]에서는 [법화경]이 설해지게 된 것을,부처님은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이 세상에 출현하여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열어 보여서 중생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렇다면 [화엄경]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기 위해서 저토록 수많은 형용사만을 동원하여 반복적으로 나열하고 있을까? 도대체 이러한 경전이 어째서 무엇 때문에 만들어 지게 되었을까? [화엄경]은 무슨 인연으로 설한 것일까?
이 점에 대해서 화엄의 대성자인 법장은 그의 저서 [탐현기(探玄記)]에서 10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법이(法爾)로 인해서
일체의 모든 부처님은 법이(法爾)로 무한한 법륜을 굴리므로 인연을 기다려서 설한 것이 아니라, '법이' 즉 자연적인 작용으로써 설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부처님은 자연적으로 항상 설법하시는 것이 [화엄경]인 것이다.
2)원력(願力)으로 인해서
부처님의 원력으로써 이 가르침을 중생들의 근기에 맞게 설한 것이다. 그러므로 [노사나품 (盧舍那品)]에 "부처님은 원력에 의해서 자유자재로 두루 나타나시어 법륜을 굴리신다"라고 하였다.
3)기감(機感)으로 인해서
부처님이 중생의 부름에 응해서 몸을 나타내어 가르침을 설한 것이다. "부처님은 모든 법계에 충만하고, 언제라도 일체 중생 앞에 나타 나신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4)위본(爲本)으로 인해서
먼저 처음에 이 경전을 설하고, 다음에 다른 경들을 설했으므로 [화엄경]은 근본 법륜을 설한 것이다.
5)현덕(顯德)으로 인해서
부처님 과보의 무량한 덕을 나타내어 보살들에게 믿게 하고, 깨달음을 얻게 하기 위해 설한 것이다.
6)현위(顯位)로 인해서
십신(十信).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십지(十地).불지(佛地)에 이르는 단계를 나타내기 위해, 또한 하나하나의 계위가 원숙해 지면 불지에 이른다고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설한 것이다.
7)개발(開發)을 위해서
중생의 마음속에 있는 불성(佛性)의 공덕을 개발하여, 이것에 의해 닦고 배우게 하기 위해 설한 것이다.
8)견문(見聞)을 위해서
무한한 법문을 중생이 보고 듣도록 하기 위해 설한 것이다.
9)성행(成行)을 위해서
보현보살의 수행을 완성 시켜서, 한 가지 수행이 곧 일체의 모든 수행이 되도록 하기 위해 설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 가지 수행을 철저히 하면 궁극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10)득과(得果)를 위해서
모든 장애를 없애고 부처님의 과보를 얻게 하기 위해서 설한 것이다.
법장은 이 10가지 이유로 [화엄경]이 설해 졌다고 설명했다. 무진원융(無盡圓融)의 법문은 최고의 단계에 오른 대보살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므로, 우리들 처럼 근기가 낮은 수행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해될 리가 없다. 이에 이 [화엄경]을 설해서 무진원융의 가르침을 이해 시키려고 한 것이 [화엄경]을 만든 이유이다.
그리고 법장은 다시 이 [화엄경]을 수지(受持)하고 가르침을 믿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고 [탐현기]에서 5종류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1)위진(違眞)의 비기(非器)
보리심을 발하지 않고 출리(出離)를 구하지 않으며, 이 경을 비방하고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며, 자신을 장식하는 사람은 [화엄경]을 수지할 그릇이 아니다. 명예와 이익을 위해 설법하는 것은 삿된 업인 것이다.
2)배정(背正)의 비기
거짓으로 삿된 선(邪善)을 닦고, 사후에 인천(人天)의 과보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참된 선(善)을 닦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으로서 이 경을 받아 들일 그릇이 아니다. 보리심을 잊고 선근(善根)을 닦는 것인 삿된 업에 지나지 않는다.
3)괴실(乖實)의 비기
자신의 사견(私見)에 따라서 경문의 뜻을 해석하고, 높고 깊은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화엄경]을 받아 들일 그릇이 아니다.
4)협열(狹劣)의 비기
넓고 큰 마음을 가지지 못하고 오직 자기 자신만의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은 이 경을 받아 들일 그릇이 아니다.
5)수권(守權)의 비기
오랜 세월동안의 수행을 완성시키지 않고, 또한 초지(初地)에 들지 않은 보살은 참된 보살이 아니므로 이 경을 받아 들일 그릇이 아니다.
[화엄경]에서 가장 강조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믿음(信)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어떠한 어려움에 처해 있더라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면 이 경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십지경론(十地經論)에 보면 [화엄경]의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 가르침을 믿지 않으면 안된다. 큰 바다나 큰 불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의심치 않고 믿는다면 반드시 이 경을 들을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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