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hagavadgītā』의 제사(祭祀,yajna) 패러다임으로 본 『華嚴經』의 공양(供養, pūjanā)
- Bhagavadgītā와 『普賢行願品』을 중심으로 -
대승불교의 특색은 부처님에 대한 신앙과 菩薩道의 실천에 있다. 보살도는 自利․利他를 아우르며 재가․출가를 포함한 利他行을 강조한다. 신앙(śraddha, 信)의 불교는 『阿彌陀經』과 같은 정토교 계통 경전을 가리키는데, 『法華經』도 구원실성(久遠實成)의 如來와 그 方便으로 慈悲行을 설하는 경전이므로 이 부류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보살도의 대표적 경전은 『般若經』과 『華嚴經』이다. 이 밖에 『維摩經』이나 『首楞嚴三昧經』과 같은 각종 三昧經 등이 모두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대승경전은 ‘信의 불교’를 강조하는 전통과 ‘行의 불교’를 강조하는 전통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화엄경』은 『반야경』을 계승하면서, 재가․출가라는 분별된 입장을 버린 ‘보살행’에 대해 설하고 있다. 이와 같이 대승의 보살도는 『반야경』과 『화엄경』에서 이론화되었다. 대승의 보살도는 이타행으로 나타났다. 보살의 이타행은 『반야경』계통에서는 六波羅蜜로 구체화되었는데, 그 내용은 『六道集經』에 기술되어 있다. 여기에 새로이 추가하여 더욱 강력하게 시대와 민심에 적용시켜 강조한 것이 方便(upāyakauśalya), 願(praṇidhāna), 力(bala), 智(jnāna)의 네 가지인데, 이들 十波羅蜜의 내용은 『화엄경』계통의 「十地經(Daśabhūmika)」에 기술되어 있다. 필자는 이것이 『화엄경』의 「入法界品(Gaṇḍavyūha)」인 「普賢行願品」, 「第3 廣修供養章」에서 설하는 ‘供養(pūjanā)’의 수행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십바라밀의 수행과 관련하여 보살은 成佛의 수행을 위해 願을 세우는 것이 중시된다. 성불을 위해 보살에게는 3아승지겁이라는 오랜 기간의 수행이 필요한데, 그 동안 모든 自利利他의 行을 완성해야만 한다. 하지만 일시적인 결심으로는 이 行이 달성되지 않는다. 그러한 확고한 결의에 대해서는 『화엄경』, 『보현행원품』에서 구체적으로 설해진 보현보살의 本願인 十大行願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대승불교의 특징 중 하나인 ‘利他의 願’은 보살에게는 필수적인 것으로, 이 願들을 통해 미래에 성불할 것이라는 佛陀로부터의 보증, 즉 授記(vyākaraṇa)를 받는다는 사상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바이다. 「십지경」이 『화엄경』에 전개되는 ‘보살사상’의 이론편이라면 「보현행원품」은 그 실천편인 것이다.
그렇다면 『화엄경』의 「입법계품」인 「보현행원품」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보현행원품」은 『화엄경』의 총결론으로서 ‘지혜’에서 ‘자비’의 行으로 나아가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이는 무량한 세계에 한없는 중생을 모두 구제하여 함께 ‘不思議解脫境界’로 들어가게 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수행체계적 법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승불교의 궁극적 이상인 ‘일체중생의 성불(解脫, sarva-mukti)’은 오직 ‘보현행원’의 실천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보현행원품」은 먼저 불타의 깨달음의 경계인 ‘부사의해탈경계’를 보인 후, 그 깨달음의 경계에 들어가기 위한 普賢의 십대행원을 善財(Sudhana)童子의 구도과정을 통해 보살의 수행과정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선재동자는 먼저 佛陀의 正覺의 智慧를 상징하는 문수보살로부터 ‘諸法眞空’의 가르침을 받아 菩提心을 발하고 각계 각층의 53善知識을 차례로 방문하여 法을 묻는데, 최후에 보현보살의 가르침을 받아 ‘부사의해탈경계’, 즉 ‘法界’에 들어간다. 여기서 선재동자가 법계에 들어갔다고 하는 것은 보현보살과 동일한 세계에 도달하였다는 의미이다.
이 ‘법계’는 곧 法身으로서의 비로자나(Vairocana, 毘盧遮那, 遍照)의 顯現이다. 이 세계는 무한한 緣起의 흐름으로 시간과 공간이 모두 상호 연관되어 있어서, 어느 하나도 홀로 있는 것 없이 서로서로 연유하여 있는 重重無盡한 관계로 성립된다. 이것을 法界無盡緣起라 부르는데, 『화엄경』에서는 法界緣起論이라 부르고 있다. 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個個物物도 모두 상호 의존관계에 있다고 보는 시각이다. 내가 이 세상의 개개물물과 연관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나 속에 이 세계가 있다”고 하는 이치와도 일맥 상통한다.
義相(625-702)스님은 그의 『法性偈』에서 법계무애연기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설한 바 있다.
하나 안에 일체가 있고, 多 안에 하나가 있으니, 하나가 곧 일체이고 多가 곧 하나이다.
여기서 ‘하나’라는 말은 획일주의, 전체주의적인 의미에서의 ‘하나’가 아니라 ‘不二(advaita)', 즉 두 가지든 세 가지든 간에 여러 가지 것들이 상호 마찰 없이 원만한 융화의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대립을 넘어선 것으로 때로는 ‘空’이라고도 하고, 때로는 ‘覺’이라고도 하는데, 특히 『화엄경』에서는 ‘법계(dharma-dhātu)’라고 칭했다. ‘법계’라는 말은 바로 그러한 구성원 또는 구성부분 하나 하나를 의미하는 동시에 그 부분들이 구성하는 전체를 의미하기도 하고, 또한 전체적 구성을 통일적 유기적인 것으로 만드는 근본생명력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법계’라는 말은 ‘법신(dharma-kāya)’의 동의어, 혹은 ‘一心’의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이 법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현상(事)에서 보면 千差萬別相으로 나타나 각기 자기의 개성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중생과 부처, 생사와 열반, 번뇌와 보리가 모두 대립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본체(理)의 측면에서 보면, 모든 차별이 제거되고 평등하다는 것이다. 개개물물이 서로 인연관계에 의해 성립되었기 때문에, 곧 自性을 결한 것이고, 따라서 空(Śūnyatā)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 --- 즉 本体, 理, 般若, 空 --- 에서 보면 중생과 부처, 생사와 열반, 번뇌와 보리, 그리고 世間과 出世間의 차별이 모두 사라지고 일체만유는 圓融無碍하여 서로 걸림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法界緣起觀’의 투철한 자각이야말로 미움과 슬픔, 근심과 걱정, 그리고 시기와 질투를 제거하고 행복과 보람 속에 살 수 있는 길인 것이다. ‘본체적인 면(法界, 理, 般若, 空)’에서 보면, 우리들 중생 안에 부처가 있는 것이며 동시에 부처 안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화엄경』이 가르치는 것은 인간이 비록 현실 속에서는 번뇌와 망상에 휩싸인 업보중생이지만, 본체에서 보면 모두 부처라는 것이다. 부처가 어떻게 나태와 방일을 행하며, 남을 질투하고 시기하며, 비방하고, 해칠 수 있겠는가?
선재동자는 바로 이러한 ‘법계연기관’에 의거하여 보현의 십대행원을 실천함으로써 법계에 들었다고 한다. 선재동자는 법계연기관에 의거 53선지식--- 스승․외도․여자․비구․동자․바수미뜨라(波須密多女, Vasumitra)와 같은 遊女 등 --- 에 대해 계층간의 차별, 종교간의 차별, 남녀의 차별, 신분의 차별 등을 구분함 없이 평등한 求法을 행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법계의 세계에는 차별이 없으며 평등하기 때문이다. 법계무애연기관은 지금 이 자리에서 나도 해탈하고, 남도 해탈시키는 보살의 이타행과 관련되어 있다.
「보현행원품」에서 그 형이상학적 세계관은 곧 법계무애연기설이고, 그 실천철학은 이타주의적 공양이라는 사상적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보현행원품」은 “보살이 중생을 수순하여 공양함이 곧 모든 부처님께 공양함이 되어” ‘부사의 해탈 경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설하는 것이다.
「보현행원품」은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보살은 재공양과 법공양을 행한다고 한다. 재공양은 중생(jivātman)들의 육신의 안락을 위하여 돈이나 재물을 가지고 동체대비의 마음으로 베풀어주는 것을 말한다. 이에 반해 법공양은 진리를 베풀어주는 것으로서 法身을 위한 것이므로 영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보현행원품」은 법공양을 행하는 것은 부처님을 출생시키는 원리이므로 재공양보다 훨씬 수승하고 대비될 수 없는 것이라 하였던 것이다. 이와 유사한 패러다임으로 『Bhagavadgītā』(이하 『기따』로 약칭함)에서는 ‘재물의 제사(dravya-yajna)'보다 ’지혜의 제사(jnana-yajna)'가 월등히 더 낫고, 모든 행위는 예외 없이 지혜(jnana)에 의해 완성된다고 설하고 있다. 『기따』에서는 ’지혜의 제사(jnana-yajna)'로서 행위할 때만이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는 마음의 속박에서 벗어나 離欲行을 실천할 수 있다고 설하고 있다. ‘지혜의 제사’ 행위는 인과응보를 초월한 이욕행으로 행위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욕행은 행위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이기적 목적을 포기하고 오직 세계의 복리를 위하여 행위하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해탈의 길로서의 祭祀(yajna)와 供養(pūjanā)이 어떤 過程을 거쳐 形成되었으며, 그 내용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究明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
일반적으로 제사라고 하면 신령과 같은 존재에 정성을 드리는 의식을 말하는데, 종교마다 제사에 대한 견해의 차이는 있으나 제사를 통해 각각의 종교적 특색을 드러낸다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인도 아리얀들은 기원전 1500년경에 빤잡에 이주하여 전쟁의 승리(Ṛg-veda, Ⅳ.50.7; Ⅵ.75.2; Ⅹ.174.2), 농작물의 풍작(Ṛg-veda, Ⅹ.125.2-3), 무병장수(Ṛg-veda, Ⅹ.97.11, Ⅹ.161.1-2), 그리고 자손의 번영(Ṛg-veda, Ⅹ.125.7; Ⅹ.183.1) 등 현실적인 삶에서 행복을 얻기 위해 자연신에 대한 예배와 제사의식을 거행했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편찬된 것이 베다(Veda) 문헌군이었다. 아리안의 사회생활에 있어서 제사가 중요시됨에 따라 신에 대한 제식들이 복잡해지고, 그 제식을 주관하는 司祭者의 직책(hotṛ, udgātṛ, advaryu, brāhman)에 따라 Ṛg(讚歌), Sāma(歌詠), yajur(祭祀), Atharva(呪術)의 네 베다로 구별되어 집성되었다(B.C.1500-1000). 우리는 인도의 祭祀(yajna)를 『리그베다』에 나타난 신화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리그베다』의 철학적 찬가인 「뿌루샤찬가(Puruṣa-sūkta)」 (Ⅹ.90)에서는 뿌루샤(Puruṣa)를 제물로 하여 제사를 지내며, 분할된 뿌루샤의 몸의 각 부분으로부터 모든 만물이 전개되었다고 한다(Ⅹ.90.11-14). 여기서 제사는 창조의 수단이며, 우주의 창조는 초월적인 뿌루샤의 자기한정(분할)이라는 사상적 구조를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리그베다』 초기엔 현세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제사에 의의를 두었으나, 말기에는 제사가 그 자체로 창조적 힘을 나타내는 원리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 제사를 거행할 때 동원되는 여러 가지 儀禮․祭具․祭官 등은 신화의 주인공인 神들을 대신하여 절대적인 힘과 권위를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브라흐마나(Brāhmaṇa)시대(B.C.100-800)에 이르자 종교적 행사로서의 祭祀儀式(yajna)은 신들을 대신하여 세계관의 근저가 되었다. 제사(yajna)는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현상을 지배하는 힘으로 믿어졌다. 더불어 제사를 집행하는 브라흐만들은 신에 봉사하는 司祭者가 아니라, 제사의 힘으로써 신들을 지배하는 자가 된다고 믿었는데, 브라흐마나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학식이 있으며 베다에 정통한 브라흐만은 인간이라고 하는 신이다.
그리하여 브라흐만 승려들은 브라흐마나 시대에 祭式萬能主義, 브라흐만 至上主義, 베다 至上主義를 수립하였던 것이다.
브라흐마나시대의 말기에 이르면, “善을 行하는 자는 善生을 받고, 惡을 행하는 者는 惡生을 받는다.”라든가, “死後에 영혼은 天秤에 달려서 善惡의 善을 헤아려 그에 따라서 상벌을 받는다”는 문구와 같이 輪廻說과 業說의 형성을 암시하는 내용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같이 祭祀는 사람들이 天上과 地獄이 있다는 믿음에 대한 집착에만 토대를 두고 널리 호응을 얻었다. 사람들이 제사를 중시한 이유는 그들이 바라는 목표나 결과를 얻는데 유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브라흐마나 시대 말기엔 死後에 再生하여 天上界에 태어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不死(amṛta)의 세계에 이르고자 하는 祈願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이 알아서 이 聖業(yajna)을 행하는 사람은 죽어서 再生하고, 재생하여 종국에는 不死의 생을 얻는다. 이와 같이 알지 못하여 이 聖業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죽어서 제삼 제사의 죽음의 먹이가 된다.
위의 文證은 不死(amṛta, immotality)를 얻는 방법(sādhana)으로서 祭祀(yajna)에 대한 지혜를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不死(amṛta, mokṣa)의 사상은 『브라흐마나』에서 체계적으로 확립되지는 않았지만 그 始原이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초기 우빠니샤드 시대(B.C.700-500)에 네 『베다』를 모두 배웠던 비데하(Videha)국의 왕 자나까(Janaka)는 죽음 이후에 영혼의 운명에 관해 진리를 깨달은 야가발꺄(Yājnavalkya)에게 질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베다』나 『브라흐마나』로는 육신이 죽은 이후 영혼의 운명에 관한 지식을 전해 주기에 부적절했다고 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나타내준다. 초기 우빠니샤드 시대의 철인들은 해탈(moksa, amṛta)이 제사(yajna)에 의해서는 도달할 수 없고 명상을 통해 체득된 지식(jnāna)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몇몇 우빠니샤드에서는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 대신, 신성하고 순수한 삶 자체를 제사라고 간주했다. 다섯 가지 불에 대한 우빠니샤드의 제식적인 지식의 개념(pancāgni vidyā)은 인간의 삶 자체를 하나의 제사라고 보았다. 우빠니샤드는 제사를 철학적인 방법으로 인식 그것에 호의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불에 대한 지혜(Vaiśvānara vidyā)는 우주 전체를 하나의 제사로 간주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빠니샤드에서는 동물을 제물로 올리는 제사 대신에 지혜의 제사(jnāna-yājna)를 강조하게 되었다. 이러한 우빠니샤드의 절대론적 철학이 흥기하자, 절대자에 대한 철학적 인식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어 명상과 정신집중을 강조하는 새로운 경향이 초기 우빠니샤드 시대에 나타났다. 따라서 우빠니샤드의 철인들은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주의 영원하고 절대적인 實在 자체를 아는 지식(jnāna)이 필요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브라흐마나의 祭祀(yajna) 중심의 행위주의적 철학을 극복했던 것이다. 따라서 초기 우빠니샤드에서는 ‘지혜(jnāna)와 제사(yajna)’가 不卽不離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제사를 특별히 강조할 필요성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형성된 지혜(jnāna) 개념은 ‘梵我一如’의 眞理를 깨닫는 최고의 知識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과 그 밖의 司祭들은 여전히 외적 신앙의 형태인 제사에서 자신의 만족을 찾으려 하였다. 이런 ‘재물의 제사’를 중시하는 신앙과 ‘지혜의 제사'를 중시하는 신앙의 형태가 『기따』시대에까지 상속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기따』에는 『베다』적 현세이익적 제사와 『브라흐마나적』 천상계에 태어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윤리적 제사, 그리고 『우빠니샤드』적 해탈에 이르는 길로서의 지혜의 제사의 개념이 혼용되어 나타난다.
『기따』에서는 현세이익적인 『베다』의 기복제사나 천상계에 태어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브라흐마나』의 윤리적 제사로에서 재물로 바치던 양이나 염소, 암소 등 동물 대신 꽃, 음식(꿀) 등 일상적 물질(dravya)들로 대체하였다. 이는 우빠니샤드에서 발원하여 초기불교에서 정착되고 『기따』에서 만개하였다. 이렇게 제사의 재물이 동물로부터 다른 물질로 대체된 것은 아힘사(ahiṃsā)의 철학적 인식으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기따』는 위에서 언급한 外向의 현세이익의 기복적 제사나 천상계에 태어남을 목적으로 하는 재물의 제사는 해탈에 이를 수 없다고 비판하면서, 內省的 지혜의 제사에 의해서만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재물의 제사보다 지혜의 제사가 월등히 더 낫나니, 오 빠람따빠(적을 괴롭히는 자)여, 모든 행위는 예외 없이 지혜에서 완성(해탈)된다, 뿌르타의 아들이여.
그리하여 우리가 ‘지혜의 제사'로서 행위를 할 때만이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는 마음의 속박에서 벗어나 無我의 離慾行을 할 수 있다고 『기따』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사들도 역시 집착과 결과에 대한 바램을 버리고 해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오! 빠르타의 아들이여, 이것이 나의 결정적인 최상의 견해다.
위의 본문 註29)와 같이 『보현해원품』의 「제3 광수공양장」에서는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財供養’과 ‘法供養’을 행한다고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른바 꽃과 꽃타래와 하늘음악과 하늘 일산과 하늘 옷과 가지가지 하늘 향과 바르는 향, 사르는 향, 가루 향과 이와 같은 많은 供養具(공양거리) 수미산 같으며...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공양구로 항상 공양하느니라.
선남자여, 모든 공양 가운데는 법공양이 가장 으뜸이니라. ①이른바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하는 공양이며, ②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공양이며, ③중생들을 섭수하는 공양이며, ④중생들의 고통을 대신 받는 공양이며, ⑤착한 바탕을 부지런히 닦는 공양이며, ⑥보살의 할 일을 버리지 않는 공야이며, ⑦보리심을 여의지 않는 공양이니라.
위 문장의 註32)(Ibid, Ⅳ.33; śreyān dravyamavād yajnāj / jnānayajnaḥ paraṁtapa / sarvaṁ karmā 'khilaṁ pārtha / jnāne parisamāpyate //)는 『기따』의 ‘재물의 제사(dravyajnāna)' 패러다임과 같은 財供養의 공양구의 내용을 나타낸 것이다.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보현행원품』이 A.D.150년 전후로 작성된 이 시기에는 정통파(āstika)나 비정통파(nāstika) 공히 財供養의 공양구의 내용이 일상적인 물질로 대체 정착되어 보편화된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런 사조는 슝가(Śuṇga)왕조(183-71 B.C.) 멸망후 인도는 꾸샤나(Kuṣāṇa)왕조(A.D.48-220)를 중심으로 하는 북인도와 안다라(Andhara)왕조(B.C.60-A.D.290?)를 중심으로 하는 남인도로 양분되었는데, 이 시기에 대승불교의 보편적인 敎가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영향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승불교의 보현행자들은 ’일체중생의 해탈(sarva-mukti)'이 궁극의 실천목표이므로 가난하고 힘이 없는 모든 중생들에게 ‘離苦得樂’케 하는 첩경이 ‘財供養’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보현행자들은 일체중생의 饒?과 安樂을 위해 빈곤의 사회적 차별이 없는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재공양을 강도한 것으로 생각된다.
註33)(Ibid, Ⅻ.13; adveṣtā sarvabhūtānāṁ / maitraḥ karuṇa eva ca /nirmamo nirahaṁkāraḥ / samaduḥkhasukhaḥ kṣamī //)는 『기따』의 ‘지혜의 제사(jnāna-yajna)'패러다임과 같이 정신적인 내용을 나타낸 것이다. 註33)의 法供養中 일곱 번째의 ‘보리심을 여의지 않는 공양’은 일체 선근공덕의 모태이며 깨달음의 自態的 전개이고, 중생들을 이롭게 하고 중생들의 고통을 대신 받는 공양등은 깨달음의 對態的 전개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보리심을 여의지 않는 공양’에서 일체 법공양은 성취되는 것이다. 또한 註33)에서 ‘法供養’이 모든 供養 가운데 가장 으뜸이라고 했다. 그 이유를 『기따』의 “모든 행위는 예외없이 지혜에서 완성(해탈)된다.”고 하는 유사한 패러다임의 내용으로, 『보현행원품』에서는 “모든 부처님들은 법을 존중하기 때문이며,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함이 많은 부처님을 출생하는 까닭이다.”고 설하고 있다. 법공양은 인간의 영원한 지혜요, 우리들 행동의 지침이요, 생활의 등불이다. 법공양은 우리(jivātman)가 가야할 길(mārga)이요, 부처님을 출생시키는 원리이므로, 일시적이고 유한한 육신의 안락을 형성시키는 재공양에 대비될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현재 범부 중생일지라도 법공양을 실천하면 법공양을 실천하는 자신이 바로 부처님을 실현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차별이 없다”는 교의를 믿고, ‘事事佛供’하는 생활을 실천하는 것이 해탈의 길(mārga)이라는 것을 『보현행원품』에서는 설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지면관계로 供養(pūjanā)이 어떤 過程을 거쳐 형성되었는지에 대해서 고찰하지 못했으나 本 論文에서는 기술하고자 한다.
『기따』와 『보현행원품』은 인도의 역사의 전환기에 그 시대를 향도하는 宗敎指導者들이 當代의 모든 사상을 회통하는 입장에서 그들의 종교적 이상을 담은 경전으로 산출된 것이었다.
『기따』와 『보현행원품』은 베다의 절대적 귄위를 부정하고 경직된 카스트제도를 완화시키는데 충격을 가한 혁명적인 메시지이다. 이 양자에 나타난 해탈의 수단(sādhana)도 역시 유사한 패러다임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기따』의 ‘jnāna-yajna'는 부파불교의 ’阿羅漢(Arhat)'처럼 자기자신들만의 정신적 행복을 추구하는 ‘自利의 道(mārga)’이었지, 『보현행원품』에서 제창하는 ‘自覺覺他覺行窮滿’의 菩薩의 ‘利他의 道(mārga)’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기따』의 ‘jnāna-yajna’는 은둔적․이기주의적․出世間主義的 解脫의 道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에 반해 『보현행원품』의 ‘法供養’은 활동주의적․이타주의적․보살주의를 제창함으로써, 그 당시 인도의 모든 인종․종파․남녀․재가․출가․빈부․귀천․카스트 등의 모든 차이를 초월하는 ‘회통의 道(mārga)'였음을 알 수 있다.
[출처] 『Bhagavadgītā』의 제사(祭祀, yajna) 패러다임으로 본 『華嚴經』의 供養(pūjanā)|작성자 만남 창조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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