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난다 존자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나에게 좋은 친구가 있고, 또 좋은 친구와 함께 있다는 것은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아마도 내 수행의 절반은 좋은 친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아난다 존자의 생각에 대해서는 붓다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아난다여, 네 생각은 틀렸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된다. 좋은 친구와 함께 있으면 수행의 절반을 이룩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아난다여, 너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너어게 좋은 친구가 있고, 그 친구와 함께 있게 되면 수행의 절반을 이룩한 것이 아니라 전부를 이룩한 것이나 다름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생각이다. 왜냐하면 순수하고 원만하고 깨끗하고 바른 행동은 언제나 좋은 벗을 따라 다니지만, 나쁜 벗은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언제나 좋은 벗과 사귀고 좋은 벗과 함께 있어야 한다."
(착한 벗이라는 것은 즉 순수하고 원만하고 깨끗하고 바른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악한 벗은 그 반대행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붓다 자신은 제자나 중생들에게 착한 벗이기 때문에 붓다에게서 진리 법을 배우고 닦아, 멀리 떠남과 욕심 없음과 없앰에 의하여 버림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붓다는 우리 중생들에게 착한 벗인가 아니면 나쁜 벗인가? 분명히 착한 벗이다. 그러기에 그에게서 배우고 따르는 것이다.)
또 붓다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 비구들아, 선지식·훌륭한 동무들·착한 일을 따르는 이것은 아직 생기지 않은 바른 견해는 생기게 하고, 이미 생긴 바른 견해는 거듭 생겨나게 하여 더욱 많아지게한다.
외부적 현상 중에, 아직 생기지 않은 착한 법은 생기게 하고, 이미 생긴 착한 법은 거듭 생겨나게 하여 더욱 많아지게 하는 데는, 이른바 선지식·훌륭한 도반·착한 일을 따르는 것 이외에 다른 그 어떤 법도 나는 보지 못했다.
이와 같이 아직 생기지 않은 바른 뜻·바른 말·바른 행위·바른 생활·바른 방편·바른 생각· 바른 선정은 생기게 하고, 이미 생긴 것은 거듭 생겨나게 하여 더욱 많아지게 하느니라. [잡아함 선지식경]
(빠알리 니까야에도 같은 가르침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 이외에 다른 어떤 법에 의해서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한 법들이 일어나고, 또 이미 일어난 불선법들이 버려지는 것을 나는 보지 못했다. 그것은 바로 좋은 친구를 가지고 사귀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좋은 친구를 가진 자에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법들이 일어나고 또 이미 일어난 불선법들이 버려진다)
열반에 드시기 위해서 구시나가라로 가는 마지막 여정에서 붓다는 비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기도 한다.
"비구들이여, 비구들이 서로 삿된 친구가 되지 않고 삿된 동료가 되지 않고 삿된 벗이 되지 않는 한, 비구들에게 번영이 기대될 뿐 퇴보란 있을 수 없다."
"비구들이여, 비구들이 대중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동료 수행자들에게 말과 몸과 마음의 업으로 자애를 유지하는 한 비구들은 향상할 것이고 퇴보란 기대할 수 없다(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는한 비구들은 향상한다)"
불교에서는 함께 수행하면서 탁마하는 친구를 각별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이 친구를 도반 또는 선지식이나 선우(善友)라고 부른다. 대승불교에서는 무연(無緣)의 중생들에게조차 자비를 베풀라고 가르친다. 스스로 청하지 않는 벗이 되고 단 한명의 중생이라도 성불하지 않으면 스스로의 성불조차 미루겠다는 보살도 있다. 인드라망처럼 얽혀 있는 세상사에 나혼자란 있을 수 없다. 연기의 법칙에서 본다면 이는 더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 너와 나의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세상은 홀로 살 수 없다. 연기에 따르면 자기 또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홀로 떠도는 사람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친구처럼 소중한 존재도 없다. 수행자에게는 스승만큼이나 훌륭한 도반도 수행의 절대적인 덕목이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좋은 친구는 수행의 절반이 아니라 전부라고 했을 것이다.
그럼 어떤 사람과 친구를 해야 하나. 잡아함 수류경(隨類經)에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비구들이여, 세상에는 서로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누구와 서로 친하게 지내는가? 살생하는 사람은 살생하는 사람과 친하고 도둑질하는 사람은 도둑질하는 사람과 친하게 지낸다. 음행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런 부류의 사람과 친하게 지낸다. 거짓말하고 이간질하고 욕 잘하고 꾸미는 말 잘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들과 잘 어울린다. 욕심 많고 성내고 삿된 소견을 가진 어리석은 사람은 같은 부류를 다라 서로 친하게 지낸다. 비유하면 더러운 물건이 더러운 물건과 서로 화합하는 것처럼 열 가지 악업 짓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들과 서로 친하게 지낸다.
이와는 달리 살생하지 않고 훔치지 않으며 음행하지 않는 사람은 같은 부류와 어울리기를 좋아한다. 거짓말, 이간질, 나쁜 말, 꾸미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같은 부류의 사람과 친하게 지낸다. 욕심과 성냄과 삿된 소견을 가지 않은 사람은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린다. 비유하면 물과 우유가 서로 잘 화합하는 것처럼 열 가지 선업 짓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같은 사람들끼 서로 친하게 지낸다."
그런데 왜 코뿔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했을까? 숫타니파타의 (Khaggavisāna Sutta. 코뿔소 경)은 아난다 존자가 홀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연각불(Paccekabuddha. 緣覺. 獨覺)에 관하여 질문하자 붓다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럼 연각불들은 왜 혼자서 수행하고 깨달을 수 밖에 없었을까? 붓다께서는 여러 가지 상황과 서로 다른 시대에 연각불들이 자신의 깨달음을 표현한 것을 아난다에게 들려주는 형태로 경전은 구성되어 있다. 주변에 좋은 친구가 없다면, 만약에 붓다의 법이 없는 곳에 태어났거나 붓다의 법이 소멸하는 말법시대에 살았다면 당연히 연각불처럼 수행할 수 있다. 연각불은 주로 붓다의 법이 소멸한 말법시대에 태어난다고 한다. 그럼 연각불이란 어떤 분들인가?
" 빳쩨까붓다(pacceka-buddha)에서 빳쩨까(pacceka)는 paṭi(~에 대하여)+eka(하나)가 합성된 단어로 ‘각각 분리해서, ‘독립적으로, 별도로, 홀로’의 뜻이다. 부처님의 교법이 사라진 시대에 나서 부처님 법에 의지하지 않고 홀로 깨달아서 세상에 법을 선포하지 않고 반열반(般涅槃)에 드는 분이 바로 벽지불이다. 즉 깨달았다는 뜻에서는 부처님과 같지만 중생들에게 법을 선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부처님과 다르다. 그리고 부처님 법을 의지하지 않고 깨달았다는 점에서 아라한과도 다르다. 중국에서 벽지불(辟支佛), 독각(獨覺), 연각(緣覺)으로 번역되었다.
상좌부 불교에 따르면 깨달음에 이르는 존재에는 부처님(Buddha), 연각불 (pacceka-buddha), 아라한(arahat)의 세 가지가 있다. 아라한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았다는 의미에서 제자, 즉 성문(聲聞, sekha)이라고 한다. 성문은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의 상수제자, 아누룻다와 마하까사빠와 아난다 등의 대제자, 그리고 일반 제자로 다시 나뉜다.
부처님, 연각불, 아라한은 모두 깨달은 분들이지만 깨달음의 자질은 서로 다르다. 부처님은 많은 중생들을 교화하고 구제할 수 있지만 벽지불은 홀로 지내는 부처님들이어서 원칙적으로 법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을 구제할 수 없다. 아라한은 중생을 구제할 수 있긴 하지만 부처님처럼 많은 중생들을 구제하지는 못한다.
이 세 부류의 성자들이 바라밀(pāramī)을 완성하여 깨달음을 이루는데 걸리는 시간은 아주 차이가 많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4, 8 또는 16아승지겁과 10만겁 동안 열 가지 바라밀을 완성시켜야 한다. 하지만 연각불의 경우에는 2아승지겁과 10만 겁만이 필요하다. 성문 가운데 상수 제자는 1아승지겁과 10만 겁, 대제자의 경우에는 10만 겁이 필요하고, 일반적인 제자의 경우에는 한 생이나 백 생 또는 천 생 또는 더 긴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벽지불(연각불)은 남에게 법을 전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이 얻은 깨달음은 귀먹고 말 못하는 사람이 꾼 꿈에 비유된다. 그리고 벽지불의 지혜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보살보다도 낮은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J.iv.341) 또 재가자인 채로 벽지불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즉시 재가자의 표식이 사라지고 출가자의 위의를 갖춘다고 한다. 또한 한 시기에 오직 한 분만 출현하는 부처님과는 달리 출현하는 벽지불의 숫자에는 제한이 없다."
사람들은 늘 자기가 보고싶은 것만 볼려고 한다는 말을 나는 여러번 강조하는 편이다. 이 말은 원래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였던 카이사르(시이저)가 한 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인간의 이러한 본성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로마시민들이 보고싶어하는 것만 보여줬다. 그래서 로마시민들은 카이사르가 공화정에서 황제정으로 국가체제를 바꾸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경전의 공부도 마찬가지이다. 절대로 자기가 보고싶어 하는 것만 보는 식으로 공부하거나 설법을 하면 안된다. 붓다는 그 어디에서도 코뿔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한 적이 없다. 경전 그 어디에서도 연각불이 되라고 하지 않았다. 친구 사귀고 좋은 도반의 중요성을 경전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툭하면 코뿔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한다. 마치 독불장군이 세상의 최고인냥 자기 만족감과 우월감을 은근히 표시하는 방법으로 이 말을 써 먹는다. 하지만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코뿔소 경은 연각불들의 이야기를 붓다께서 아난다에게 일러준 것일 뿐이다. 그렇게 살라고 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붓다라는 좋은 친구와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다. 붓다의 가르침을 논하는 불자들이 연각승을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것 붓다의 가르침이 없는 시대에나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성문승 즉 아라한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보살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 연각승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도 없다. 붓다의 법은 영원할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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