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

인간이 갈 길은 어디로 1 / 관응스님

수선님 2021. 1. 31. 12:18

인간이 갈 길은 어디로 1

 

관응(전 직지사 조실) 스님

 

중생 삶의 목적은 이고득락(離苦得樂)


우리는 어디로부터 왔는지 모르지만 이 세상에 생명을 받아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명을 가진 것은 모두 살아가는 데 고생이 붙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삶의 목적이 고생을 떼어내고 즐거움을 누리는 것, 한마디로 한문 문자로 쓰면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일체 생명의 최고 목적이 고생을 멀리하고, 즐거움을 많이 누려보려는 것입니다. 하다 못해 장터에서 콩나물 장사를 하는 사람에게, 돈은 무엇 때문에 버느냐고 물으면, 지금은 가난해서 고생하고 있지만 돈 좀 많이 벌어서 고생하지 않고 생활을 윤택하게 해서 즐겁게 살려고 하는 거라고 답합니다. 결국 학문을 하는 것이나 지위를 가지려는 것이나 최고의 목적이 이고득락입니다. 그럼 이고득락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불교에서는 무엇이든지 그 본바탕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을 전미개오(轉迷開悟)라 합니다. 모르는 것을 궁글려서 아는 것을 연다, 깨달음을 연다는 것이지요. 이고득락을 옳게 하려면 전미개오를 해야 하고, 전미개오를 하려면, 지악작선(止惡作善), 악한 것은 그치고 착한 일을 해야 합니다.

 

고생에서 벗어나는 길


고생이라는 열매(결과)가 나무 끝에 달려 있다면 어떤 것(원인)이 자라나서 꽃이 피고 열매가 되었는지 알아야 하는데, 전부 고생의 원인을 몰라요. 그 바탕이 무엇인가 알아야 고생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원인조차 모르고 있으니 답답한 일 아닙니까.


원인을 알면 풀 수 있는 행을 하게 되고 그러면 고생은 없어지고 낙이 생길텐데, 우리는 아직도 생명체가 어떻게 된 것인 줄 깨닫지 못했어요.


여러분, 숨을 어떻게 쉬는지 아십니까? 어떻게 숨쉬는지는 모르지만 뭔가 숨쉬는 자리가 몸 속에 들어 있지요. 그게 눈에 가면 보이고, 귀에 가면 들리고, 코에 가면 냄새를 맡고, 입에 가면 맛을 알고, 몸으로 가면 느끼고, 뜻으로 가면 좋다 나쁘다 판단합니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이것을 육근(六根)이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뱃속에는 오장육부가 있어요. 폐는 숨쉬는 작용을 하고, 위장은 움직여서 소화를 시킵니다. 또 우리가 먹은 음식물이 피를 만듭니다. 희한하잖아요.


어쨌든 고생이 뭔지 몰라서 문제지 제대로만 알면, 우리가 이 몸뚱이 작용하는 것만 다 알아도 고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여기 컵에 물이 담겨 있는데, 수소와 산소가 조합되면 물이 된다고 합니다. 그럼 이것을 왜 알아내야 하느냐, 물의 본바탕이 뭔지 알아내야, 어떻게 하면 우리 생활에서 이익이 되고 어떻게 하면 해가 되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하게도 밖의 것은 온갖 것을 다 알아냅니다. 밖의 것을 자꾸 구해다가 좋은 것만 보려 하고, 좋은 것만 들으려 하고, 좋은 냄새만 맡으려 하고, 좋은 음식만 떠 넣으려고 하고, 좋은 옷을 입히려고 합니다. 하지만 백년을 해봐도 이 속에서 “이만하면 됐다, 그만 하라.”는 얘기 안 나옵니다. 욕구라는 것이 땅에서 샘물 솟듯이 속에서 나온 것이지 밖에서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밖으로 자꾸 구할 것이 아니라 사람의 바탕은 어떻게 되었기에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이런 작용이 나오느냐? 어째서 숨을 쉬고 어째서 음식을 삭이느냐? 이게 다 생명이 하는 짓인데, 그것을 모두 몰라요. 생명을 취급하는 의사들도 이 내용을 모릅니다.


옛날 중국에 주무왕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문왕의 아들인데, 문왕이 다스리던 나라는 중국 서쪽의 제후국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아버지 초상도 치르기 전에 중국 천자가 되고 싶은 욕심이 났던 모양입니다.


그 때는 원나라 말년인지라 황제가 정치를 잘 못해서 백성들이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무왕이 대의명분을 가지고 인근의 800제후와 힘을 합쳐 쳐들어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한 명 따라오다가 선물을 하나 주면서, 사람처럼 만든 인형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술을 마시면 따라 마시기도 하고 벙긋벙긋 웃고 하는 짓이 영락없이 사람인데 인형이라고 하자, 무왕이 “사람인 것 같은데 왜 인형이라고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인형이라는 증거를 대겠다며 그 사람 같은 인형을 끌어다가 한 꺼풀 거죽을 벗기자, 짚풀 등으로 만든 속이 나오는 겁니다. 붙이니까 사람이 되고 떼어놓으니까 잡동사니가 나오는 거예요. 이 얘기가 우스운 소리처럼 느껴질는지도 모르겠지만 알고 보면 대단한 말입니다.


여기 있는 분들도 생명의 이치, 생명의 작용을 100퍼센트 다 안다면 어머니 뱃속을 빌리지 않고 공장에서 찍어내듯 사람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고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생명의 실상을 모르고 그저 되는대로 살아간다면 저 인형이 춤을 추고 술을 마시는 것과 똑같지 않겠습니까.

 

부처님과 중생의 차이


부처님을 인도말로 붓다라고 합니다. 깨달은 사람, 각자(覺者)를 뜻하는데, 그럼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았느냐? 생명의 이치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하는 짓을 모두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 몸 속에 생명이 하나씩 들어 있다고 하지 않았는데, 생명의 이치를 전혀 모르는 우리들은 이 몸뚱이를 생명으로 알고 즐거움을 누리려는 욕심만 잔뜩 차 있습니다.


옛날 삼천 년 전에는 뱃속의 오장육부 중 심장에서 생각이 나온다고 했어요. 그런데 요새는 머리 속의 뇌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생각이 이 몸뚱이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말이 되고, 그렇게 되면 명태는 명태 속에서 생각이 나오고 파리는 파리 속에서 생각이 나오겠네요. 하지만 부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닫고 나서 곧바로 설하신 것이 화엄경입니다. 부처님이 화엄경을 설할 때 과거 현재 미래에 통하여 도장 찍듯이 설하신 그 깨달음의 세계를 해인삼매라고 합니다. 수미산을 중심으로 칠산 팔해가 있는데, 일곱 가지 향물로 된 바닷물에 한꺼번에 하나도 빠지지 않고 삼라만상이 다 비치는데 도장 찍은 것같이 역력하다는 겁니다. 깨닫고 나면 지구 만 억 개를 가루로 내서 만든 수보다 많다는 법계의 낱낱 중생의 본말이 한꺼번에 도장 찍듯이 보인다는 겁니다. 백억만년 전에는 뭐였고 미래에는 뭐가 될 것인지 일체 중생의 인과응보를 다 안다는 겁니다.


부처님이 되면 시간과 공간이 없어져요. 일체 생명을 가진 것뿐만 아니라 세상 물건의 본말 시종을 다 알아요. 이 컵이 어디서 만들었는지도 알고, 컵이 언제 깨질 건지도 다 알고, 또 이 물을 마신 사람은 성이 무엇인지 앞으로 뭐가 될 것인지 연관지어서 다 압니다. 또 부처님의 깨달은 세계, 어느 부처님은 어디서 어떻게 닦아서 부처가 되고, 부처가 된 다음에 첫째는 누구를 제도하고, 둘째는 누구를 제도하고 미래제가 다하도록 제도한다는 것을 다 압니다. 그럼 어떻게 그것을 다 아느냐, 우리 생명의 본질을 깨닫고 나니까 다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깨닫지를 못해서 생명에 대한 지식이 없어 숨을 쉬면서도 숨이 어떻게 쉬어지는지 몰라요.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 이게 다 생명이 하는 짓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깨닫고 보니 일체 생명이 똑같이 생겼다는 겁니다. 아니 생명은 여러 개가 아니라 하나라는 거예요. 생명은 청정법신비로자나불, 하나뿐이라는 겁니다.


생명을 깨달으면 하나인 부처가 되는데, 생명을 깨닫지 못해서 차등이 생겨 여자도 되고 남자도 되고 고기도 되고 새도 되는 것입니다. 깨달으면 평등이고, 깨닫지 못하면 차별이 된다는 것이 바로 부처님이 깨달은 내용입니다.


여러 종교 중에서 오직 불교에서만 이런 얘기를 합니다. 생명은 하나인데, 깨닫지 못한 우리는 생명 전체를 못 봅니다. 눈은 보는 것밖에 못하고 귀는 듣는 것밖에 못해요. 하나인 생명에서 안으로는 안이비설신의 육근이 생기고, 밖으로는 육진이 생깁니다. 그래서 제각각 내 몸뚱이 속에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아주 불쌍하게 된 것이지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육근(六根) 육진(六塵) 육식(六識)을 깨트리는 겁니다. 이것을 깨뜨리면 하나로 보이는 것이고, 이놈이 있으면 차별이 생기는 거예요. 고기는 고기대로 새는 새대로 하나의 생명 속에서 깨닫지 못한 탈인 십팔계를 쓰고 앉아 있으니 내 생명이 내 몸뚱이 속에 들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것 하나 깨트려주려고 오신 겁니다. 법화경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부처님의 지견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부처님 지견은 생명을 하나로 보는 것이고, 중생의 지견은 생명을 여러 가지로 보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 우리가 생명에 대해서 아느냐 모르느냐 자기 자신을 점검해보세요. 모르면 저 날아다니는 파리나 우리나 같습니다. 장자에 그런 얘기가 있더군요. 목장에서 염소를 기르던 두 사람이 있었는데, 한 이는 바둑에 팔려서, 한 이는 글 읽다 염소를 잃어버렸어요. 사람들은 글 읽다 염소를 잃어버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둘 다 똑같아요. 사람이 되었거나 파리가 되었거나 자기 생명에 대해 모르는 것은 똑 같아요.


법화경 첫 장을 열면 부처님이 백호광명으로 동방 만팔천 세계를 비췄다고 했어요. 그리고 어떤 이는 보시를 잘 했다, 어떤 이는 지계를 잘했다는 등 과거에 했던 것, 미래에 했던 것이 다 보인다고 법화경 서품에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부처님은 생명의 본질을 깨달아서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몸뚱아리에 의지하는 것밖에 모릅니다. 생명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몸뚱아리에 매여 있으니까 고생이 붙어있다는 말입니다. 본성을 깨닫기 전에는 온갖 고생이 붙어 있는데 그것을 깨달으니까 고생이 도망가버렸습니다. 깨달은 부처님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는 그것뿐입니다.

 

 

생명의 본질을 깨달으면 고생이 떨어진다


부처님께서 해인삼매의 경지를 증득해서 아신 것은 일체 중생이 하나라는 겁니다. 그리고 깨기만 하면 시공간을 초월해서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부처님 말씀을 곧이 듣지 않습니다. 반야심경도 곧이 듣지 않고,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없다고 하는데도 눈에 팔리고 귀에 팔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과 관세음보살이 하는 얘기도 거짓말로 알아요. 관세음보살을 부르기만 해도 물에 빠져도 안 죽고 불에도 안 탄다고 했습니다. 우리 몸은 불에 들어가면 타는데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안 탄다는 경전 말씀을 그저 옛날 이야기로 여기는 분들도 많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해드리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상징적으로 꾸며낸 얘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다 증거가 있습니다.


어쨌든 부처님이 깨닫고 나서 일체 중생의 인과 응보가 한꺼번에 보이고, 일체 무정의 기세간, 일체 부처님 세계가 보이는데, 일체 중생이 다 하나라는 얘기를 내가 팔십이 넘도록 강조해도 알아듣는 이가 없어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심리학에서 하는 소리인데, 이 세상에는 동물도 많이 있고 곤충도 많이 있습니다. 나이 드신 분 중에는 너댓 살 먹은 어린애가 커다란 황소를 몰고 가는 일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요즘에도 인도에 가면 큰 코끼리가 댓 살 먹은 어린애에게 끌려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황소나 코끼리가 몸뚱이는 크지만 아는 정도, 지식의 정도가 어린애보다 낮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또 감각만 가지고 얘기해도, 이 몸뚱이에도 감각하지 못하는 곳이 있어요. 뼈, 손톱, 머리털 등은 톱으로 썰어도 아픈 줄을 모릅니다. 감각 있는 곤충만 가지고 얘기하더라도 어떤 것은 전면만 보지 측면은 못 보는 곤충이 있습니다. 이런 곤충을 1차원에 사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2차원, 3차원의 세계는 모릅니다. 또 하루만 사는 하루살이가 내일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알지도 못하면서 몸뚱이가 백년은 살겠지 하면서 그냥 사는 겁니다. 우리 산다는 것도 한순간입니다. 숨쉬다가 나가던 숨이 안 나오고 들어가던 숨이 안 들어가면 죽는 겁니다. 이 몸뚱이는 생명이 아닙니다. 눈이 보는 게 아니고, 심장에서 생명이 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눈으로 본다, 귀로 듣는다고 말하지 눈이 본다 귀가 듣는다고 하지 않잖아요. 눈이 본다고 하면 죽은 사람도 눈이 있으니 볼 수 있지 않겠어요.


또 살다가 죽으니까 홀연히 죽었다고 합니다. 죽은 뒤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까 내생은 생각하지도 못하는 겁니다. 공자 같은 이도 내생은 몰랐어요. 하지만 부처님은 생명을 깨신 분입니다. 우물 속 개구리에게 태평양 얘기를 하면 모르듯이 부처님은 도솔천을 떠나지 않고 이미 정반왕의 아들로 태어나 중생제도를 마쳤다는 얘기를 아무리 해도 사람들은 그 소리가 전혀 이해되지 않습니다.


또한 일체 중생의 생명이 하나라는 부처님 말씀도 믿지 않고 제각각 이 몸뚱이를 자기로 알고 사는 겁니다. 우리도 부처님처럼 생명의 이치를 깨달아 이 몸뚱이가 내 생명이 아니요, 일체 중생의 생명이 하나라는 이치를 안다면 저절로 고생이 떨어져나가고 지극하고 영원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생명체가 하나임을 몰라서 어두워지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은 경계를 중생에게 다 말할 수 없으니 나누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아함경을 말씀하실 때는 눈에 보이는 것도 있고, 육근, 육식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아함경을 십이년 동안 설하신 것이 아함경 시대인데, 그 때는 시간과 공간이 있다고 인정하십니다. 깨달으면 시간과 공간이 없어져버리는데 당시 사람들은 18계가 있는 줄 알았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이 있다고 한 것이 아함경 시대입니다. 그걸 구사론에서 ‘삼세실유 법체항유(三世實有 法體恒有)’라고 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가 실제로 있고 가깝고 멀리 법체가 항상 있다는 것이지요.


12년 동안의 아함경 시대에 설명한 것은 중생들의 근기에 맞춰서 말씀하신 것이지 부처님의 깨달은 세계를 얘기한 것은 아닙니다. 그 다음에 조금 더 나아가서 8년 동안 방등을 말씀한 것은 천상사람들의 근기에 맞춰서 얘기한 것입니다. 아함 12년, 방등 8년 해서 20년 설한 것을 규봉 스님이 밀의의성설상교(密意依性說相敎)라고 했듯이 그 제목만 새겨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은 내용을 보면, 기세간, 중생세간, 지정각세간의 삼종세간이 한꺼번에 보인다고 합니다. 중생을 보통 태어나는 방법을 가지고 태란습화(胎卵濕化) 사생(四生)으로 나눕니다. 또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등 육도로 나뉘어 수많은 중생과 천인이 살고 있지요. 한없이 신령스러운 그런 세계를 깨닫지 못하면 흐릿해져서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깨달으면 환히 알게 되지요. 그래서 깨달은 경지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무상정등정각, 무상정변지라고 하는 겁니다. 위없이 높고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이요, 위없이 바른 앎입니다. 정각은 바로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을 바로 깨닫는가 하면, 생명의 본질을 바로 깨닫는 것입니다.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생명에서 퍼진 것이 많습니다. 생명에서 나온 것이 기세간 유정세간에 수없이 많은데, 하나둘만 아는 것이 아니라 다 바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각을 해도 변정각(遍正覺)해야 합니다. 이 말은 두루 변(遍)자를 써서 일체를 다 안다는 것이고, 양으로만 두루 아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도 바르게 깨달았다고 하여 정변정각이라고 합니다. 이걸로도 부족하여 앞에 위없다는 무상(無上)을 붙여 무상정변정각이라고 합니다.


깨달으면 생명에서 밝은 광명이 나옵니다. 환한 기운이 나오기에 못 비추는 데 없이 가까운 데서부터 끝까지 한 광명을 비추는 것입니다. 한 광명 속에 전부 비추니까 모르는 것 없이 다 알아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깨닫지 못해서 밝은 기운이 없어지고 어두운 기운이 생깁니다. 그것이 무명(無明)입니다. 무명으로 쓰는 마음, 전체적으로 쓰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쓰는 마음은 식(識)이라고 하고, 전체적으로 알고 쓰는 것은 지혜라고 합니다.


우리 중생들은 깨닫지 못해 식이 생겨 생명의 본질인 전체의 일심(한마음) 자리를 알지 못하는데, 생명체는 하나입니다. 생명은 하나라는 것을 모르니 어두운 것이지요. 사람은 사람만큼 쓰고 벌레는 벌레만큼 쓰는 겁니다. 벌레 중에도 지렁이는 지렁이만큼, 굼벵이는 굼벵이만큼, 파리는 파리만큼, 모기는 모기만큼만 쓰는 거예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생명은 하나인데, 중생들이 깨닫지 못해서 태란습화 사생으로 태어나 육도를 윤회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나 짐승은 태에서 태어나는데, 흐릿한 기운이 나오면 태 속에 들어가 버립니다. 태는 깜깜한 곳인데 거기 왜 들어가느냐, 깨닫지 못해서 어두운 기운이 씌어서 그렇습니다. 공중을 나는 새가 아무리 많아도, 물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가 아무리 많아도 알에서 태어납니다.


유정 무정이 세상에 날 적에 전체를 다 버리고 부분으로 떨어져 나오게 되는데, 그게 중생입니다. 중생들의 식이 부분으로 작용해 밖으로는 육진이 생기고 안으로는 육근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 육진, 육근, 육식이 전후가 없이 한 몸으로 생긴 것입니다.


 

생명의 본질을 깨지 못하면 만족할 수 없다


부처님은 삼계육도 중생에게 다 진성(眞性)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진성은 생명체로, ‘법(法)’자 하나로 쓸 수 있습니다. 불교는 불법승 삼보로 돼 있는데, 그 가운데의 법을 깨면 부처이고 깨지 못하고 배우면 중생입니다. 법은 우주 생명체를 말합니다. 아함 12년 동안에는 육근, 육진, 육식 중에 육진만 법이라고 했습니다. 주관은 빼고 객관만 가지고 법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법을 인식하는 건 지혜라고 했습니다. 아비담마구사론에서 담마는 법이고, 아비는 법을 대해서 아는 지혜입니다. 그걸 장독에다 감춰 놓은 것을 아비담마구사론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깨닫고 보니까 사생 모두에게 실로 진여자성이 있는데, 무별자취요, 무별자성이라, 따로 생명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인 법성이라는 겁니다.


즉 여기에 전기가 있습니다. 전기가 사람마다 모두를 비추니까 생명과 마찬가지로 법체라고 한다면 전기는 하나지만 여러분 눈 속에 다 들어와 자기한테 비추니까 그 법성이 자기한테만 비추는 줄 압니다. 자기한테 비추는 그림자만 보고 생명이라고 합니다. 자기 몸뚱이 속에 생명이 따로 있다고 하는 것은 그림자를 보고 말하는 겁니다. 견성을 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해서 따로 생명이 있다고 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없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제법무아, 모든 법 중에서 나라고 하는 게 없다고 합니다. 비친 그림자를 나라고 생각하는 건 아집입니다. 법성이 하나요, 몸뚱이 속에 따로 생명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개별적으로 자체가 없다는 건데 중생은 깨닫지 못해 식으로 작용하여 전체를 보지 못하고 내 몸뚱이만 보호하려고 거짓말하고 도둑질하고 남을 속이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자리가 하나라는 걸 깨닫지 못하면 식으로 작용해 전체를 보지 못하고, 육근, 육진, 육식을 가지고 갈라진 생명, 18계의 식 속에서 살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깨뜨리고 하나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구구절절히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삼법인이 들어가야 제대로 된 법문이고, 인천교(人天敎)밖에 안 되는 다른 종교와는 그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 몸뚱이 속에 따로 생명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거 큰일날 소리 아닙니까. ‘그럼 무엇 때문에 살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개별적으로 그 자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태양에는 광성이 있지만 달에는 광성이 없어 해가 비쳐야만 햇빛을 받아 광명이 있는 척하듯이 나 하나로 똑 떨어진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사생 육도가 진성을 깨닫지 못해서 드러난 것이라고 했습니다. 진성자리, 성품의 본질은 놔두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그 작용은 하나의 상으로서 진성을 깨닫지 못한 전시품입니다. 진성의 모양이라는 겁니다.


사람과 벌레가 아무리 많아도 진성자리 생명은 하나에서 나왔습니다. 소나무, 밤나무는 각각의 특성이 있지만 땅에겐 하나이듯이, 불교 외의 철학이나 종교에서도 본체는 하나라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본체라는 말은 안 쓰고 실상이라고 합니다. 우리 생명체는 우주 하나밖에 없습니다. 생명은 하나입니다.


또한 깨달으면 보는 것과 듣는 게 다르지 않습니다. 나한만 되더라도 그렇습니다. 안청비간(眼聽鼻看), 눈이 듣고 코가 보기도 합니다. 그처럼 우리도 인생관을 한번 바꿔보자는 겁니다. 불교는 상식이 아닙니다. 상식인 아집으로 봐서는 안 됩니다. 반야심경에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미촉법도 없다고 하는데 그 본뜻을 알아야 합니다. 절대로 아집으로 알려고 해선 안 됩니다.


이 몸뚱이는 내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 몸뚱이는 오온, 다섯 가지 기운의 잔재로 모여 활동하고 작용하는 것이고, 마음이 행동하는 작용(업)의 잔재가 모여 오온으로 된 생명이 지은 수공품입니다. 전체를 다 내버리고 자기가 만든 수공품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수공품은 자기 생명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품을 깨닫지 못하면 온갖 걸 다 해봐도 허전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것입니다. 남편이 아무리 잘해주고 부모님이 잘해줘도 허전한 것과 같이, 생명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면 만족할 수 없는 겁니다.<계속>

 

출처 : 월간불광 2004. 9, 10

 

관응 스님 1910년 경북 상주 출생, 1929년 상주 남장사에서 혜봉 스님을 계사로, 탄옹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하였다. 1934년 금강산 유점사 불교전문강원 대교과 졸업, 1936년 선학원 일봉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였다. 1938년 중앙불교전문학교 졸업, 1942년 일본 교토 용곡대학교 졸업, 오대산 월정사, 가야산 백련암, 고성 옥천사 등 제방선원에서 안거하였으며, 1956년 직지사 조실로 추대되었다. 1959년 조계사 정화 초대주지 겸 중앙포교사, 1961년 동국학원 이사, 1965년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 육년결사, 1981년 직지사 주지, 1984년 원산 스님 외 9명에게 전강을 내렸으며, 1985년 조계종 원로회의 부의장, 2004년 세수 95세, 법랍 76년으로 황악산 직지사 중암에서 원적하셨다.

 

 

 

 

 

 

 

[출처] 인간이 갈 길은 어디로 1 / 관응스님|작성자 둘이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