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식

다문화사회에서의 불교수행법 회통으로서의 진푸티상사의 관상법

수선님 2021. 1. 31. 12:47

다문화사회에서의 불교수행법 회통으로서의 진푸티상사의 관상법

 

 

 

 

 

 

 

목 차

 

 

Ⅰ. 들어가는 말

Ⅱ.간화선과 위빠사나의 장단점

1.간화선의 장단점

2.위빠사나의 장단점

Ⅲ.회통으로서의 진푸티관상법

1.관상법의 배경

1)시대적 배경

2)사상적 배경

2.관상법의 眞髓로서의 약사대광명 수지법

1) 약사대광명 수지법의 내용

2) 약사대광명 수지법의 자세

3.관상법의 공덕

1)현세이익의 공덕

2)내세이익의 공덕

3)성불의 공덕

 Ⅳ.맺음말

 

 

 

 

 

 

 

 

Ⅰ. 들어가는 말

 

한국은 이미 150만 다문화가정에 50개 종교 500개 종파를 이루고 있는 다문화(multiculture), 다종교 사회이다. 우리는 연기적 존재이므로 상의상생하는 마음으로 다문화. 다종교사회의 평화와 공존을 보장하는 인식을 만드는 것이 급선무다. 불자는 누구에게나 평등한 사랑, 특히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자를 同體大悲의 정신으로 돌봐야 한다.

 

21세기는 문화가 국력인 시대, 국민 개개인의 상상력이 콘텐츠가 되는 시대로 문화(sabhyata)의 힘으로 개인적, 사회적 갈등을 해소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 불자는 지역, 세대, 계층, 인종, 언어, 이념, 관습을 넘어 세계가 하나 되는 시대, 인류 평화 발전에 기여하고 기쁨을 나누는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

 

이런 역사의 흐름을 指南하는데 석가모니의 인식과 실천이 참고가 된다. 석가모니 부처님 當時 인도 사상계는 62見이나 363의 사상가들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당시(B.C 6)의 우빠니샤드的 인간관이나 짜르와까(Cārvāka)의 唯物論的인 인간관 또는 마칼리고살라(Makkhali Gosāla)의 운명(niyati)에 의한 決定論이나 우연에 의한 無決定論을 배척 會通하여 緣起論(Pratītyasamutpāda)에 입각한 人間觀을 說한 것이다. 석가모니의 인식은 연기설을 깨달음으로써 인도 고대 종교의 短見과 常見을 회통할 수 있었다.

 

석가모니의 실천은 연기설에 의거 涅槃(nirvāņa)에 이르는 수행을 戒(śīla: 正語. 正業. 正命), 定(samādhi: 正念. 正定. 正精進), 慧(prajňā: 正見. 正思)의 三學으로 닦아나갔다. 이 삼학의 내용은 八正道(Āryāşţaņgika-marga)이다. 팔정도는 ‘중도 (majjhimā paţipadā)’라고 한다. 석가모니의 실천은 부처님 당시 짜르와까의 극단적인 쾌락설과 쟈이미니즘의 극단적인 고행설 이 두 극단을 버리고 회통하여 중도에 의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이 양 극단의 중도를 발견해 가는 지혜가 팔정도의 ‘正’의 의미이다. 苦樂 中道는 실천적인 입장이지만 고정적인 입장에 의거하지 않는 것이 중도이다. 臆說이나 先入見을 갖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는 것이 고정적인 견해에 빠지지 않는 중도의 입장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苦와 無常과 無我를 깨닫는 지혜이다. 왜냐하면 無明(avidyā)이 除去되어야 生死의 循環이 깨어지고 인간존재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삼학이 완성되면 이로써 해탈이 실현되고 해탈했다는 자각(解脫知見)이 일어난다. 삼학의 완성은 번뇌가 사라진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無漏’라고 한다. 그리하여 무루의 계, 정, 혜, 해탈, 해탈지견을 ‘五分法身’이라고 한다. 이것은 성자가 갖추는 실천적인 ‘法’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四禪의 수행과정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禪은 명상이라는 의미로 우빠니샤드((Chāndogya Upanişad, Ⅶ. 6.1)이래 쓰이고 있지만, 四禪은 불교에 처음 나타났다. 四禪은 다이나믹칼한 정신집중이며, 거기서 생겨나는 지혜는 신비적인 직관이 아니라 자유자재하면서도 이성적인 如實知見이다.

 

좌선은 안락의 법문이라고 말해지는 것처럼, 결가부좌하여 신체를 안락하게 하고 명상하는 방법이다. 정신을 통일하고 초선에서부터 순차적으로 2선, 3선, 4선의 과정을 밟아간다. 四禪의 수행을 통해서 체득한 지혜가 진리를 깨닫고 합체하여 확고부동하게 되고 고통 혹은 애욕에도 동요하지 않게끔 된 것이 깨달음이다. 이것은 마음이 번뇌의 속박에서 해방된 상태이므로 ‘解脫(mokşa)’이라고 불리며, 이 해탈한 마음에 의해 터득된 진리를 ‘涅槃(nirvāņa)’이라고 한다. 해탈은 마음의 ‘자유’이며, 열반은 ‘평화’라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禪의 완성은 중국적 토양 속에서 발양된 祖師禪에서이다.

 

원시불교의 수행도로서는 ‘37道品(37菩提分法)’이 중시되고 있다. 이것은 四念處 ․ 四正勤 ․ 四如意足(四神足) ․ 五根 ․ 五力 ․ 七覺支 ․ 八正道 이다.

 

이러한 수행에 의해 진척되는 깨달음의 과정은 네 단계로 구별되고 있다. 그것은 預流果(예류과에 도달하기까지는 預流向) ․ 一來果(이 이전은 一來向) ․ 不還果(이 이전은 不還向) ․ 阿羅漢果(이 이전은 阿羅漢向)이다. 과와 향을 합해서 ‘四向四果’라고 하며, 또한 四雙八輩라고도 한다. ‘예류’란 ‘흐름에 참여한다’는 의미로서, 불교의 흐름에 들어가 다시는 물러서거나 타락하지 않는 단계에 도달한 것을 말한다. 삼보에 귀의하고(올바른 믿음을 얻는 것), 성스런 계를 受持하면 예류라고 한다. 그러나 이 외에 三結(我見․戒禁取見․疑)을 끊으면 예류라고 하는 설, 如實知見을 얻으면 예류라고 하는 설 등도 있다. ‘일래’란 한번 이 세상으로 되돌아온다는 의미이다. 

 

수행하는 도중에 죽은 사람은 내세에 天界에 태어난다고 하는데, 거기서 수행을 완성하여 열반에 들기란 불가능하고, 한 번 더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하는 의미에서 일래라고 한다. 일래란 삼결을 끊어 탐․진․치가 희박해진 상태(三毒薄)라고 한다. ‘불환’이란 이 세상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로서, 죽어서 천계에 태어나 거기서 열반에 드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五下分結(貪․瞋․身見․戒禁取見․疑)을 끊은 사람이라고 한다. 오하분결이란 사람을 욕계에 붙들어 매는 번뇌(結)를 말한다. 네 번째의 아라한은 수행을 완성한 사람으로서, 일체의 번뇌를 끊고 이 세상에서 열반에 든다.

 

이 修道論은 윤회의 사고방식과 윤회의 장소로서의 삼계(欲界․色界․無色界)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이 세상의 수행만으로는 깨달음을 완성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윤회를 반복하여 수행을 한다고 하는 사상이 생겼다.

 

석가모니 부처님에 의해 창설된 불교 교단은 부처님 당시는 물론 佛滅 후 약 100년까지는 그의 높은 인격에 의해 一味和合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불멸 후 100년 경, 교단이 처한 상황이 변하면서 부처님의 法과 律에 대한 견해의 차이가 생겨서 교단은 上座部와 大衆部로 분열되었다. 이것을 불교사에서는 ‘근본분열’이라고 칭한다. 이 근본분열 이후에도 수백 년 동안 지말 분열이 계속되어 교단은 무려 18부파 내지 20부파에 이르렀다. 그리고 마우리야왕조(약 320-183 B.C.)의 인도통일, 특히 아쇼카왕의 정책 아래에서 불교는 인도 각지는 물론 남쪽으로는 스리랑카 지방까지 전하여졌다.

 

이러한 부파불교 시대에는 현학적 아비달마와 형식적 계율주의가 주류를 이루면서 종교적 생명력과 대중과의 관계를 상실해 가고 있었다. 이러한 기존의 부파불교 교단을 비판하고 극복하고자 ‘부처님의 참정신을 회복하자’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집단적 불교혁신 운동이 기원전 1세기에 일어난 것이 대승불교이었다. 이 새로운 운동은 붓다를 신앙의 중심으로 하며, 佛德을 찬양하고, 그 慈悲의 힘으로써 이상의 세계에 들어간다고 생각하였다. 대승불교는 붓다와 동일한 깨달음을 목표로 하였다. 그 후 그리스계의 諸王과 사카, 팔라비, 스키타이系 諸王의 지배 아래 중앙 아시아로 진출하고, 서기 1세기에는 중국에까지 이르렀다.

 

오늘날의 세계불교는 크게 남방불교와 북방불교로 이분된다. 남방불교는 현재 스리랑카, 미얀마, 타이, 라오스, 캄보디아 등에서 신봉되고 있다. 북방불교는 현재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일본, 네팔, 부탄, 티베트, 러시아, 몽골, 베트남 등에 퍼져있다. 북방의 지역 불교도들은 자신들의 불교를 ‘대승불교’라고 부르고 지대한 긍지심을 지녀왔으며, 남방불교를 ‘소승불교’로 폄칭하여다.

 

한반도에 불교가 공인된 것은 고구려에서는 372년, 백제에서는 384년, 신라에서는 527년이다. 신라 말에 道義는 784년(선덕왕 5년)에 당나라에 건너가, 曹溪에 가서 六祖 慧能(638-713)의 영당에 참배, 江書의 홍주 開元寺에서 書堂 智藏禪師에게 의심을 결단하고 法을 이어 받았다. 그는 821년(헌덕왕 13년)에 귀국하여 신라에 禪法을 전하였다.

 

한국불교의 대표종단인 대한불교 조계종은 1700여년 한국 불교의 역사와 함께 한 청정 승가 수행종단이다. 종헌 제 1조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법통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을 명기하고 있다.

 

본종(本宗)은 대한불교 조계종이라 칭한다. 본종은 신라 도의국사가 창수(創樹)한 가지산문에서 기원하여 고려 보조국사(普照國師)의 중천(重闡)을 거쳐 태고 보우국사의 제종 포섭으로서 조계종 이라 공칭하여 이후 그 종맥이 면면부절(綿綿不絶)한 것이다(『종헌』 제1조).

 

이상을 종합한 조계종의 법통은 도의-보조 지눌(1158-1210)-태고 보우(1301-1382)-청허 휴정(淸虛 休靜, 1520-1604)을 적통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논술을 통해서 또 알 수 있는 것은 대한불교 조계종의 명칭도 조계산(曹溪山)에서 慧能의 曹溪禪風을 계승한 것에서 전래된 것으로 인지된다.

 

특히 고려 말기 간화선(看話禪) 수행이 정착된 이래 오늘까지 간화선법은 조계종단 내에서 최상승의 수행법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서는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 아직까지 이 이상의 수행법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수행에 대한 다양한 논의는 그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고, 다만 조계종의 역사 속에서 깨달음의 빛을 이어 온 宗師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인식하에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말에 들어서서, 스리랑카와 미얀마 및 태국 등으로부터 ‘위빠사나(vipassanā)’가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약 20여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위빠사나 수행을 중심으로 한 상좌불교는 스님들과 재가불자들 사이에 큰 호응을 얻으면서 널리 확산되고 있다. 현재 위빠사나 수행은 ‘보리수 선원’, ‘마하보디 선원’, ‘한국마하시 선원’ 등을 비롯한 30여 개의 단체와 도량에서 체계적이고도 집중적으로 이루어 지고 있다. 2008년 12월 31일에는 ‘문화체육관광부’에 ‘(사)한국테라와불교(Theravada Buddhasana in Korea)' 설립에 관한 등록을 하였다. 이제 한국에서 테라와다 불교는 또 하나의 불교 종단 내지 교단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남방 상좌불교의 수행법인 위빠사나가 한국 대중의 인식에 영향을 끼치게 된 요인을 내외의 원인으로 파악 할 수 있다. 첫째로는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종단이 종권 다툼으로 인한 여러 폭력 사태로 청정한 승가를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둘째, 남방 상좌불교 수행법인 위빠사나 수행법을 공부하고 수행한 사람이 위빠사나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직접 계승한 것이어서 중국 선종의 조사의 가르침에 근거한 간화선 보다 월등하다고 거론한 것이다. 셋째, 위빠사나 수행법은 친절하고 단계적이어서 수행의 초보자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데 반해서, 간화선의 수행법은 비장한 각오만을 내세우고 수행에서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일부의 위빠사나 수행자는 비판하기도 한다. 또 조계종의 수행법인 간화선을 수행하다가 결국 건강만 해쳤다는 말이 간화선 수행자 일부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간화선의 지도급 수행자들은 간화선이 한국불교의 전통이고, 간화선을 수행해야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위빠사나 수행법으로는 마음의 평안을 얻는 데 그칠 것이라고 대응한다.

 

이러한 시점에서 본고의 목적은 세계화의 도도한 흐름에 맞게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수행법의 長短點을 考究하여 두 수행법의 대립을 회통할 수 있는 길을 진푸티(金菩提)上師의 觀想法을 통해서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글의 진행에 대해 말하면, 2章에서는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장단점을 알아보며, 3章에서는 회통으로서의 진푸티상사의 관상법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으며, 또 그 내용이 무엇이고 수행을 하면 어떤 공덕을 성취할 수 있는 가를 규명하고, 4章에서는 결론으로서의 내용을 서술하고자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뗏목에 비유되고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에 비유된다. 이것은 가르침 자체가(어느 수행법이든지) 절대적 진리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오늘의 세계는 ‘글로벌’시대이고 ‘다양성’의 시대이므로 根機에 맞는 수행법이 요청되는 것은 당위이다. 그래서 이 연구는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Ⅱ.간화선과 위빠사나의 장단점

 

1.간화선의 장단점

 

필자는 이 章에서 간화선이 어떻게 형성되어 한국사회에 정착되어 오늘날 우리의 일상생활에 어떤 장단점이 있는 가를 논구하고자 한다.

 

‘선’이란 원래 범어의 ‘dhyāna'의 略音寫語이다. 어근 ‘dhya(숙고함, 심사함)’로부터 파생된 중성명사이며, 한어로는 ‘禪那’, ‘禪思’, ‘靜慮’ 등으로 번역된다. ‘선나’,‘선사’ 등의 약형(略形)이 ‘禪’인데 이것이 오늘 날 일반적으로 많이 쓰이고 있는 말이다. ‘dhyāna'라는 용어가 ‘숙고하다’, ‘명상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가장 오래된 예는 초기 우빠니샤드 ‘Chāndogya Upaniṣad, Ⅶ, 6. 1.’로서 여기서는 만유의 원리의 하나로서 받아들여진다.

 

禪의 기원은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초기 불교의 선정설로서는 四禪, 八等至 - 四禪 + 四無色定(공무변처‧식무변처‧무소유처‧비상비비상처), 九次第定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선의 완성은 중국적 토양 속에서 발양된 祖師禪에서이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A.D. 67)된 이래 조사선은 아직도 義解‧名相에 걸려 보리달마(菩提達磨, ?-528)가 전한 眞禪味에 이르지 못함을 여래선이라 함에 대하여, 文字義解에 걸리지 않고 바로 以心傳心하는 달마가 본래 전한 선법을 말한다. 如來禪은 敎內의 不了한 선이고, 조사선은 교외에 별전하는 지극한 선이다.

 

조사선의 흐름은 ‘一心’을 강조하는 思潮이다. 보리달마(? - 528)는 慧可(487-593)에게 安心법문으로 시작하여 三祖僧璨(? - 606)의 ‘信心’으로, 東山 法門에서는 ‘守一不移‧守心’으로, 慧能(638-713)에서는 ‘自性淸淨’으로 각각 나타나고 있다. 조사선은 스스로를 ‘전불심인(傳佛心印)’이라 하고 중생심성의 본원(佛性)을 깨닫는 것을 주지(主旨)로 삼은 중국화한 불교의 수행법이다. 그 전법의 계보는 달마(達摩, ?∼528), 혜가(慧可, 487∼593), 승찬(僧璨, ?∼606), 도신(道信, 580∼651), 홍인(弘忍, 602∼675), 홍인의 제자 신수(神秀, 606∼706)와 혜능(慧能, 638∼713)이다.

 

신수는 점오(漸悟)를 주장하고, 혜능은 돈오(頓悟)를 주장했으며 각각 남방과 북방에서 홍법하여 ‘남돈(南頓)’, ‘북점(北漸)’의 양 파를 형성하였으므로 역사에서는 ‘남북선종(南北禪宗)’ 또는 ‘남북종(南北宗)’이라 한다. 후에 혜능의 남종이 북종을 대신하여 중국 선종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래서 혜능을 선종의 실제 창시자라고 한다.

 

조계종 교육원에서 편찬한 『看話禪(조계종 수행의 길)』에 의하면, 조사선의 시작과 그 조사선의 전개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三處傳心으로 마음을 전하였고, 이 법이 전승되어 28번째 보리달마는 東土의 첫 조사가 되었다. 이후 6조 혜능이 실질적으로 조사선을 정착시켰으며 마조와 석두는 조사선을 크게 융성시킨 인물이다. .... 이 두 인물에 의해 5가 7종이 생기고, 여기서 黙照禪과 看話禪이 발생하였다. 이후 大慧가 체계화한 간화선은 조사선의 핵심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수행법이다.

 

위의 논술에서 인지되는 것은 혜능을 조사선의 실제 창시자라고 하고 있으며, 혜능에 의한 선사상은 후대 간화선에 그대로 흘러들어 갔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조사선 시작을 馬祖道一(709-788)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윤영해, 宗浩스님, 圓融스님 등이 조사선의 개조를 마조로 보았다. 마조를 조사선의 개조로 보는 학자들의 견해는 평상심에서 일상의 실천적인 선으로 전개하여 인간의 내면을 강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혜능은 많은 제자들을 길렀지만 그 중에서도 뛰어난 자로는 남악 회양(南嶽懷讓, 677-744), 청원 행사(靑原行思, ?-740), 하택 신회(荷澤神會, 684-758)가 걸출한 인물이다. 혜능의 선사상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선사는 남악 회양과 그의 제자인 마조 도일(709-788)과 청원 행사의 문하에서 나온 석두 희천(700-790) 계통이다.

 

마조 사상의 특징은 평상시의 마음이 다름 아닌 도라는 의미의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 하는 것이다. 마조의 제자는 80여 명에 이른다. 주요 제자로 백장청규(百丈淸規)를 수립한 백장 회해(百丈懷海, 749-814)와 조주 선사(778-897)의 스승인 남전 보원(南泉普願, 748-835)등이 있었다고 한다. 마조 도일의 제자 중에 백장 회해는 황벽 희운(黃劈希運, ?-850)과 위산 영우(潙山靈祐, 771-853)와 같은 훌륭한 두 제자를 둔다. 이중에서 황벽의 제자인 임제 의현(臨濟 義玄, ?-867)이 임제종을 창시하게 된다.

 

임제의 사상은 세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가 부처라 깊이 확신하는 것이다(心卽是佛). 둘째는 미혹으로부터 깨달음으로 가는 구체적인 실천이 ‘다만 밖에서 구하지 말라’는 한 가지에 달려있다(心外無佛). 셋째는 주체적인 자유의 선양이다(隨處作主). 현실 속에서 자신의 본질에 대해 눈뜨고, 자기 자신의 자유를 실현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선종은 서로 종지를 달리하여 북송 때 임제종의 초원(楚圓) 문하에 혜남(慧南, 1002∼69)과 방회(方會, 996∼1046)가 각각 강서(江西)에서 황룡(黃龍)과 양기(楊岐) 두 파를 개창하였다. 그래서 원래의 임제종 등의 5가와 합하여 ‘7종’이라고 부른다. 남송에 이르러 황룡파는 점점 쇠락하고 양기파가 임제종의 정통을 이루었다. 양기파의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는 '간화선(看話禪)'을 제창하였다.

 

『대승기신론』의 止觀 수행의 체계를송대에 와서 화두를 참구하는 공안 공부로 새롭게 응용하였다. 앞선 조사들이 시비, 미오(迷悟)를 판단하던 언론(公案) 중의 몇 어구를 가지고 ‘화두(話頭)’를 삼아 내성식(內省式)의 참구를 진행하는 것인데, 아주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대혜 종고(大慧宗杲, 1089-1163)는 안휘성 출신으로, 어릴 때 지방학교에 입학하여 17세에 출가할 때에는 이미 『운문록(雲門錄)』을 읽었다고 하므로 유학과 선을 두루 갖춘 선승이었다. 그는 당시 이곳 저곳에서 탁발을 하고 다녔는데 특히 조동종의 많은 선사들과 운문종의 선사들로부터 선을 습득했다. 그 후 휘종 6년(1124)에 천영사(天寧寺)에서 원오 극근(圓悟克勤, 1063-1135)의 문하로 들어가 (36세)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1137년, 徑山能仁禪院의 주지가 되어 크게 禪風을 선양했다. 그런데 남종시대에 들어서면서 선종이 크게 동요하기 시작할 때 가장 대조적인 두 사람의 승려가 나타났다. 한 쪽은 묵조선을 사선(邪禪)이라고 비방하면서 간화선을 주장했고, 다른 한 쪽은 간화선을 구두선(口頭禪, 말로만 하는 선)이라고 되받아쳤다.

 

그러면 대혜가 주장한 간화선이란 어떠한 것인가? 그는 그의 어록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천만 가지의 많은 의심도 실은 오직 하나의 의심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의심이 해결되면 천만 가지 의심도 일시에 해결된다.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잠시 그 문제에 정면으로 대결하라. 만약에 그 문제를 단념해버리면 또한 다른 문제에 의심이 생기고, 교설에 의심이 생기고, 古人의 공안에 의심이 생기고, 일상의 일 가운데에 의심이 생긴다. 이것들은 모두 깨달음을 방해하는 악마와 한패이다. 무엇 보다도 먼저 하나의 문제에 관해서 안이하게 납득해서는 안된다. 또한 이렇다 저렇다고 思慮하고 推量해서도 안된다. 오직 마음을 사려가 미치지 않는 곳에 집중시켜라. 그렇게 하면 사려하는 마음은 움직이지 않게 된다. 그것은 늙은 쥐가 소의 뿔 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마침내 이때에 잘못된 견해는 끊어져버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간화선이란 각자의 번뇌망념(不覺)을 조주의 무자 공안이라는 방편을 참구(始覺)하여 근원적인 각자의 본래심을 깨닫도록 하는 참선 수행을 말한다.즉 번뇌망념과 생사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난 근원적인 본래심의 세계(還歸本處)로 되돌아가 涅槃寂靜의 경지를 체득하는 참선 수행인 것이다. 수행상의 연구해야만 할 하나의 ‘화두’에 전신을 집중시켜, 그것과의 대결을 통해서 절대의 진실에 눈뜨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공안 곧 화두는 趙州 ‧ 臨濟를 거쳐 大慧宗杲에 이르러서 대성하게 된다. 간화선의 근본은 조주 무자 공안을 참구하는 것이며, 간화선의 수행에서 본래심을 조고해보는 방편이다. 일종의 화두참구를 으뜸으로 내세워 그것을 최고의 수행법으로 선택한 것은 그와 같은 공안에 의해서 자기의 망상을 제거하는 것을 그 하나의 목표로 삼았다. 

 

가령 조주선사의 ‘無字公案’ 그 자체가 되는 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열쇠가 된다는 것이다.조주 무자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 有나 無의 상대적이고 차별적인 견해에 떨어지지 말고, 유와 무를 모두 초월한 경지를 체득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말하면 간화선의 공안은 자기의 본래심인 불성을 照顧해 보는 도구인 것이다. 대혜는 공안에 대하여 大疑團을 불러 일으켜 ‘大疑大悟’하는 ‘깨침’을 제일로 삼는다. 대혜에게 공안은 고인의 단순한 일화로서가 아니라 깨침의 전부였다. 그래서 대혜에 이르러서 간화선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禪 思想史적 의미에서 주요한 인물은 慧能(638-713), 馬祖(709-788), 臨濟(?-867), 大慧(1089-1163)까지 네 禪師이다.

 

대한불교 조계종은 1700여년 한국 불교의 역사와 함께 한 청정 승가 수행종단이다. 종헌 제 1조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법통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을 명기하고 있다.

 

본종(本宗)은 대한불교 조계종이라 칭한다. 본종은 신라 도의국사가 창수(創樹)한 가지산문에서 기원하여 고려 보조국사(普照國師)의 중천(重闡)을 거쳐 태고 보우국사의 제종 포섭으로서 조계종 이라 공칭하여 이후 그 종맥이 면면부절(綿綿不絶)한 것이다(『종헌』 제1조).

 

이상을 종합한 조계종의 법통은 도의-보조 지눌(1158-1210)-태고 보우(1301-1382)-청허 휴정(淸虛 休靜, 1520-1604)을 적통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논술을 통해서 또 알 수 있는 것은 대한불교 조계종의 명칭도 조계산(曹溪山)에서 慧能의 曹溪禪風을 계승한 것에서 전래된 것으로 인지된다.

 

지눌의 선풍은 수제자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1178 - 1244)에게 전해졌다. 그는 1208년 수선사 사주를 물려받아 수선사를 증축하였고, 1212년(명종 26) 왕사로 책봉되어 중앙과 지방의 선회(禪會)를 주관하였다. 저술로는 『선문염송(禪門拈頌)』30권, 『진각국사어록』2권, 『무의자시집(無衣子詩集)』2권, 『구자무불성화간병론(狗子無佛性話揀病論)』 등이 있다.

 

혜심은 간화선을 선 수행에 있어서 최고의 방법으로 삼으라는 간화일문(看話一門)을 내세웠다. 점수(漸修)의 오랜 수행과정을 밟지 않고 화두를 통해 단박에 부처님의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간화선(看話禪)의 수행 방법이다. 그는 송대(宋代)의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의 등사체제(燈史體制)와 『벽암록(碧巖錄)』의 염송체에서 선가(禪家)의 고화(古話, 화두) 1,125 則과 선사의 이야기를 채집하여 방대한 화두 염송집을 편찬했는데 그것이 『선문염송』이다.

 

혜심은 이렇게 화두를 선수행의 방법으로 하는 간화선을 중시하고 특히 무자화두를 가장 기본적인 공안으로 강조하였다. 그는 대상과 근기를 상관하지 않고 자신이 곧 부처라는 믿음을 가진 후 화두를 참구하도록 하였다. 

 

간화선 수행 이론의 기본 서적으로 『大慧書』를 채택하게 하여 대혜가 중요시했던 智慧分別心이 선병(禪病)의 근원적인 문제로 이해했다. 그는 지눌과 마찬가지로 무자화두의 열 가지 병통(十病痛)을 체계화하여 정리한 것이 『구자무불성간병론』이다. 이렇게 그는 스승 지눌이 이론화한 간화선을 실천적인 간화선으로 정착시켜 우리나라 선종계의 수행에 간화선이 주류로 자리 잡게 하였다.

 

고려 말기에 이르러 태고 보우(太古 普愚, 1301-1382)는 조계종의 중흥조로서 간화선 수행을 정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간화선이란 ‘화두를 간하여 불성의 진리를 보는 선법’이다. 다시 말해서 간화선은 마음의 무명에서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을 ‘화두’라는 패러다임을 도입함으로써 명확한 틀로 정형화해서 지금 이 자리에서 마음의 본성(佛性)을 깨치게 하는 수행법이다. 지눌의 선법에서도 간화선이 소개되었으나 정혜(定慧)를 닦자고만 했지, 화두(話頭)를 들자고는 하지 않았다. 보우는 깨달음을 얻은 이후 본색종사(本色宗師)를 찾아가서 인가를 받는 것을 강조했다. 본인도 無字화두를 타파하여 중국 원나라 호주 하무산(霞霧山) 석옥 청공(石屋 淸珙)으로부터 인가를 받아 임제 종지를 이었다. 이것은 임제선의 영향이다.

 

선은 조사의 관문(關門)을 뚫어야 하는 것으로 임제종의 전통 수행법인 화두 참구를 보우는 주장하였다. 보우는 화두를 참구하는데 굳건한 믿음(大信根)과 화두를 타파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大墳志) 그리고 화두에 강한 의심(大疑情)의 세 가지를 곁들여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것은 고봉 원묘(高峰 原妙, 1238-1295)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임제 가풍의 간화선법의 본격적인 유포는 태고 보우에서부터 시작되어 그로 말미암아 확고하게 정착되었다.

 

조선 중기 왜구의 침입으로 국난에 처해 있을 때 승려로서 불교의 정법을 회생시킨 인물이 청허 휴정(淸虛 休靜, 1520-1604)이다. 서산 대사 이전까지는 선교양종이 크게 대립하고 있었으니, 이를 세분하면 좌선(선종), 진언다라니(밀교), 염불(정토), 간경(화엄‧법화)등의 네 파가 있어 각기 수행법이 별립(別立)되어 있었다. 오랜 전통적 인습에 사로잡혀 선교간의 종파적 갈등이 여전히 심했다. 이에 서산은 禪敎不二의 불교관을 표방하여, 선과 교를 다음과 같이 명확히 판석하고 있다.

 

석가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것(三處傳心)이 禪旨가 되고, 세존께서 일대(一代, 성불후 입멸에 이르기까지)에 걸쳐 설법한 것은 교문이 되었다. 그러므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누구든지 말에 현혹되면 부처님이 꽃을 드신 것이나 가섭이 빙긋이 웃는 일도 모두 敎의 자취만 될 것이고, 마음에서 얻으면 세상의 온갖 잡담이라도 모두 敎 밖에 따로 전한(敎外別傳) 禪旨가 될 것이다......敎門에는 오직 일심법(一心法)만 전하고, 禪門에는 견성법(見性法)만 전한다.

 

서산의 불교관은 선사상이라 할 만치 禪의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하였고, 선을 설명함에 있어서 반드시 敎를 상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선사상을 별도로 이해하지 않고 禪敎觀이라 하여 함께 고찰한 것이다. 지눌의 禪敎一致의 맥락을 그대로 계승한 禪家다운 호방성이 그의 모든 사유에 자유롭게 흐르고 있다.

 

서산은 禪旨를 설명하는 「禪家龜鑑」의 첫머리에서 “여기 ‘一物’이 있다.”고 전지한 다음 “三敎聖人從此句出”이라 했다. 삼교의 이름은 각각 다르나 그 근원은 동일하다는 이론이다. 그에 의하면 삼교가 교리상의 차이는 다소 있으나, 본래 심리의 계발과 인간의 수련을 위한다는 점에서 상통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그 “일물”을,

 

소소영영 부증생부증감 명부득상부득(昭昭靈靈 不曾生不曾減 名不得狀不得)이라 하며, 古佛이 출생하기 이전에 일물은 벌써 원만상으로 있었고 부처님도 어떻게 전할 바를 몰랐는데 가섭이 어찌 전할 수 있었겠는가.

 

라고 태초 이전에 이미 구원적 일물이 있었음을 말했다. 불교의 교조인 부처님도 어떻게 전할 바를 몰랐다는 ‘일물’이라면 일물은 부처님보다 훨씬 높은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다른 현자들과 함께 그 ‘일물’의 일부분을 말씀한 현자 중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서산은 삼교의 성인들도 이 일물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구체적인 예증까지 들었다.

 

이상의 설명을 볼 때, 서산의 불교관은 분명히 ‘禪深敎淺’적 사상이며 敎理를 해석하여 말한다면, ‘捨敎入禪’이 스님의 태도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서산은 무조건 ‘敎’를 반대하는 궁극적 선종위주만이 아니라 충분히 ‘敎’를 살리고 나서 그 위에 ‘禪’을 올린 ‘會敎歸禪’적 입장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는 먼저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으로써 불변과 수연(隨緣)의 두 뜻이 곧 자기 마음의 성품과 형상이며 대뜸 깨치는 것과 점차로 닦는 두 문(門)이 자기 수행의 처음과 끝임을 상세히 분별한 연후에 교의(敎義)를 내버리고 다만 자기 마음의 현전일념(現前一念)으로써 禪旨를 자세히 참구한다면 반드시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몸이 빠져 나오는 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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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捨敎入禪에서는 상‧하근기의 구별을 통한 가르침, 즉 조사선의 선법을 곧바로 수행할 수 없는 근기가 낮은 사람은 교학을 공부하여 불교의 진실한 내용을 안 다음 선문으로 들어가라,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먼저 이론을 살핀 후 이를 놓고 다시 선으로 들어가라는, 즉 선 입문 전 모든 사람들의 교학 수학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만의 독특한 면을 볼 수가 있다. 선주교종이지만 교학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인정하고 반드시 살펴보도록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선교겸수관(禪敎兼修觀)은 지눌에게서 그 연원을 찾아볼 수 있고 그것을 조선조에 와서 서산이 다시 중흥시킨 것이다.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조계종에서 수용하고 있는 참선, 간경, 염불 등의 다양한 수행법은 한국불교 전체의 역사 속에서 줄곧 취해 왔던 원융적 수행법이다.

 

특히 고려 말기 간화선(看話禪) 수행이 정착된 이래 오늘까지 간화선법은 조계종단 내에서 최상승의 수행법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서는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 아직까지 이 이상의 수행법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수행에 대한 다양한 논의는 그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고, 다만 조계종의 역사 속에서 깨달음의 빛을 이어 온 宗師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인식하에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조선 후기의 조계종은 조선 중기에 정비된 수행 및 수학 체계에 따라 교학을 연마하고 수행한 결과 여러 고승들이 출현하여 후학 양성과 교학 발전, 그리고 조계종의 법맥을 계승하게 되었다. 즉, 청허 휴정과 부휴 선수(浮休善修, 1543-1615)의 양대 법맥이 조선 후기까지 이어져 조계종의 사상과 수행은 물론 그 문화를 지켜 나가고 발전시키게 되었다. 나아가 이러한 조계가풍은 근대로 연결되어 현 대한불교조계종을 탄생시키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된다.

 

한국불교사에서 근대불교는 대략 19세기 후반부터 1945년까지를 말한다. 왕조체제를 청산하고 근대사회로 이행하기 위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친 이후부터 일본의 지배에서 해방된 시기까지이다. 이 기간에 청허 휴정과 부휴 선수의 양대 법맥을 이어 그들로부터 경허 성우(鏡虛惺牛, 1849-1912), 용성 진종(龍城震鐘, 1864-1940)등이 출현하여 쇠잔해 가던 선풍을 진작시키기에 이른다. 경허 성우와 용성 진종은 모두 태고 보우(1301-1382)의 10세인 환성 지안(喚醒志安, 1664-1729)의 법맥을 이은 조계의 적손이다.

 

또한 환성 문중 설송파(雪松派)에서는 근대에 성해 남거(聖海南居,1854~1927)가 출현하여, 통도사에서 선맥을 이어 가게 된다. 이 이 남거의 문하에서 구하, 경봉(1892-1992)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송광사에서는 환성 지안의 함월파(涵月波) 석두 보탁(石頭寶鐸)의 문손 효봉 학눌(曉峰學訥1888-1966)이 자리잡아 보조 지눌(1158-1210)을 원사(遠嗣)하여 수행 가풍을 세웠다.

 

경허 성우(鏡虛惺牛, 1849-1912)는 한국의 근대 선승으로서 한국 불교에서 달마라는 평이 말해 주듯이 결사(結社)를 통해 중생들을 제도하는 목적을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 첫째는 조선불교 속에서 선풍의 중흥과 발전으로서 선교(禪敎)의 일치로 승화시켰다. 둘째는 경허선풍이 지니고 있는 조사선의 일상화 내지 대중화로서 그것이 결사의 조직과 전개로 나타났다. 셋째는 전통적인 수행법이었던 간화선풍의 진작으로서 특히 시심마(是甚麽) 화두를 강조한 점이다.

 

이와 같이 그의 선풍은 화두일념 내지 관법을 통한 내면적인 안심과 그것의 외적인 표출로서 보살행의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결부시켜 볼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경허 스님이 주도한 결사의 특징은 정혜를 닦는 가운데에도 현실적 구원사상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허 스님이 결사를 주도한 시기는 말세의식이 만연하여 발심수행의 의욕이 상실한 때이다. 이 같은 현실 속에서 의식 있는 수행자에게는 정혜를 제시하였고, 상대적으로 근기가 낮은 자에게는 불교를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미륵신앙으로 인도하였다. 이와 같이 경허스님은 결사에서 한국불교가 제자리를 찾을 수 있는 개선책을 제시하였다. 경허 스님은 결사의 이념을 보조 지눌(普照知訥)의 정혜결사(定慧結社)에서 찾아 한국 불교 결사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허스님의 전법 제자로는 흔히 경허의 세 달(月)로 부르는 월면 만공(月面滿空, 1871-1946)⦁수월 음관(水月音觀, 1855-1928)⦁혜월 혜명(慧月慧明, 1861-1937), 그리고 한암 중원(漢岩重遠, 1876-1951)⦁남전 광언(南泉光彦, 1868-1936) 등이 스님의 법을 이었다. 나아가 경허 스님의 선풍은 한국 불교의 근대사를 개척한 많은 인물에게 영향을 끼쳤다.

 

경허스님의 법제자 만공스님은 31세 1901년 범어사 계명암(鷄鳴庵)에서 깨달음을 얻은 이후 덕숭산에 금선대를 짓고 정혜사(定慧寺)를 열어 납자들을 제접해 왔다. 만공월면 선사는 경허 성우 선사의 지도와 선법을 계승하여 修德寺를 중심으로 40여년간 선법을 펼치며, 한국 불교 禪院의 체계를 확립한 선승이라고 할 수 있다.

 

만공선사는 간화선을 통하여 오늘날 한국불교선문(韓國佛敎禪門)의 사상적인 骨格과 禪風의 토대를 마련한 선승이라고 할 수 있다. 만공월면을 중심으로 사자상승의 법맥관계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환성 지안(喚惺志安) - 호암 체정(虎巖體淨) - 청봉 거안(靑峰巨岸) - 금허 법첨(錦虛法添) - 용암 혜언(龍岩慧彦) - 영월 봉율(永月奉律) - 만화 보선(萬化普善)-경허 성우(鏡虛惺牛) - 만공 월면(滿空月面).

 

용성(1864-1940)스님 문하에서는 아홉 제자로 불리는 동산(1890-1965), 東庵, 仁谷, 雲庵, 慧菴, 韶天, 古庵, 慈雲, 東軒스님이 배출되었다. 동산대종사는 1919년 조선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조선 독립을 선언한 용성진종(龍城震鐘, 1864-1940)스님으로부터 전계증(傳戒證)과 정법안장(正法眼藏), 정전(正傳)과 율맥(律脈)의 신표(信標)로 보인(寶印)을 받았다. 동산스님의 법제자 性徹(1912-1993)스님도 용성 문하의 대표적인 거장이었다.

 

한국불교 근현대를 이끌어온 大宗匠들은 대다수가 경허, 용성이라는 이 양대산맥에서 태동하였다. 이들 기라성 같은 종장들이 1920년, 30년대에 선학원 운동과 해방 이후 정화 운동의 주축을 이루며 조계종 성립의 단초를 마련했을 뿐더러 한국불교 청정가풍을 선양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김성철 교수는 「간디와 성철」을 읽고 논평문에서 “성철스님이 열반(1993)에 들고 얼마 지난 후, 국내 모 기관에서 ‘해방 이후 우리사회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누구인지’를 묻는 여론 조사를 했다. 그런데 그 결과 성철스님이 1위를 했다. 근·현대 스님들 가운데, 성철스님만큼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 없을 것이다. 그의 몸은 철저히 은둔한 듯 보였어도, 그의 삶과 가르침은 어느 누구보다 우리 사회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역설적 삶이다. 성철스님, 철저하게 은둔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역설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고 평했다. 성철스님은 계정혜(戒定慧) 삼학을 닦아 자신을 청정한 복전(福田)으로 만들고 자신이 체득한 조망을 중생들에게 회향한 출가자의 전범을 보인 현대의 선지식이었다. 성철스님이 현대의 조계가풍(曹溪家風)을 세우는데(1945-1993) 주도적 역할을 한 명안종사(明眼宗師)로서 할 수 있었던 것은 은사인 동산혜일(東山慧日, 1890-1965) 대종사의 견인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고영섭교수는, “수행이 주목되는 전세계적 상황을 염두에 둘 때 당대 대표적 선사로서 불교의 본령인 ‘깨달음’에 대한 문제를 거듭 제기하였다는 점에서 그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는 인물이다. 성철은 한국의 대표적 수행자이자 개혁론자였다는 점에서 수행과 개혁이 일치했던 수행자였다고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성철스님은 성불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불교에서는 성불하는 방법에는 방법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관법을 한다, 주력을 한다, 경을 읽는다, 다라니를 외운다 등등 온갖 것이 다 있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서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이 참선입니다. 견성성불하는 데에는 참선이 가장 빼어난 방법입니다.

 

위의 사실은 자기 마음 거울의 때(무명)를 벗기고 마음의 눈을 뜨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참선이라는 것을 敎示한 내용이다. 스님께서는 참선은 “화두를 배워 부지런히 참구하는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화두를 바로 깨칠 것 같으면 마음의 눈을 안 뜰래야 안 뜰 수가 없습니다. 마음의 눈이 번쩍 뜨이고 마는 겁니다. 一超直入如來地, 한번 뛰어 부처님의 지위에 오른다는 뜻으로, 한번 훌쩍 뛰면 눈을 다 떠버린다는 것입니다.”라고 指南하셨다. 스님께서는 혹독한 수행을 거쳐 깨달음을 얻은 禪僧으로 선방 스님들의 정진을 다음과 같이 재촉하셨다.

 

화두 공부를 점검하기 위해 동정일여, 몽중일여, 숙면일여의 세 가지 관문으로 물어보셨습니다. 첫 번째 관문은 動靜一如 즉 움직일 때나 가만있을 때나 항상 화두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가입니다. 작정하고 참선하느라 앉아 있을 때나 무슨 일이 있어 움직일 때나 화두가 한결같은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夢中一如, 꿈속에서도 화두가 머리를 떠나지 않는지를 묻는 관문이고, 다음은 熟眠一如라 하면, 깊은 잠에 빠져 있더라도 화두는 머릿속에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숙면일여가 되었더라도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숙면일여의 무심에서 확연히 깨우치게 되면 그때 비로소 마음의 눈을 크게 떠 ‘산은 산 물은 물’이라고 소리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자유자재한 대해탈인입니다.

 

필자는 ‘마음의 자유와 평화’를 찾기 위하여 청담(1902-1971)스님의 권유로 1965년도 동국대에 입학한 후 박성배 교수(1933~)의 인도로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구도부에 가입하여 서울 봉은사의 대학생 수도원에 1965년 9월 12일 입사하여 1969년 2월까지 구도생활을 하였다. 그 기간 동안 나는 당대의 선지식인 경봉(1892-1982), 청담(1902-1971), 석주(1909-2004), 성철(1912-1993), 탄허(1913-1983), 광덕(1927-1999), 일타(1928-1999)스님으로부터 자성불(自性佛)을 믿고, 부처님의 눈(佛眼)으로 세상을 보면서 매순간 부처님의 행(佛行, 보현행원)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그래서 가장 높은 이치를 모르고 사는 백년보다는 가장 높은 이치를 알고 사는 하루가 낫다는 敎說에 의거 禪敎兼修의 巡禮의 길을 나섰다. 우리 구도부 회원들은 김용사에서 3000拜를 마친 후 1966년 1월 8일부터 2월 20일까지 50일 안거정진에 성철스님으로부터 참선지도를 받았다.

 

활구 참구를 올바로 하기 위해서는 입문 단계에서 세 가지의 중요한 요소 곧 화두에 대한 굳건한 믿음(大信根)과 화두를 타파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大墳志), 화두에 대한 강한 의심(大疑情)의 세 가지가 반드시 곁들여져야 한다. 이에 대해 어린 아이가 부모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믿고 있는 것과 같은 확실한 믿음, 부모를 죽인 원수를 단칼에 베어 버리려는 것과 같은 분심, 캄캄한 곳에서 극히 중요한 일을 꼭 해 내고자 할 때의 마음가짐과 같은 의심이라 하여, 이 셋이 함께 갖추어졌을 때 제대로 된 참구를 할 수가 있다.

 

물론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커다란 의심이다. 참선하는 사람이 화두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병이요, 크게 의심할 때 반드시 커다란 깨달음이 있다고 하는 것처럼 큰 의심을 대의단의 핵심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삼요(三要)의 어느 한 마음이 참구상에서 나타난다면 그것은 바른 행법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입문 단계에서 갖춰야 할 마음 자세이다.

 

이런 면에서 활구란 논리나 의미, 즉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한 생각에서 하나의 강한 의심만이 가득해 있는 참구 양태를 말한다. 화두를 참구하는 것은 너무 조급히 하거나 느긋이 하지 말고 거문고 줄 고르듯이 하라고 한다. 이렇게 아무런 맛도 재미도 없이 답답하고 암담하며 꽉 막힌 상태에서, 은근하고 끊임없이 혼신을 다해 지속할 때, 바로 그런 상태가 되어야만 비로소 부처님과 조사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다고 성철스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指南하셨다.

 

화두 하나에 온통 간절하게 마음을 쏟으면, 당장 선과 악, 無記(감각이 없는 상태)의 三性을 뛰어넘어 선도 생각하지 않게 되고, 악도 생각하지 않게 되고, 무기에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즉 화두를 간절히 참구하면 마음이 들뜨는 상태와 어둡게 가라앉는 상태가 없어지고, 화두가 눈앞에 나타나도 그 간절한 마음 때문에 무기에도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철스님은, “화두를 부지런히 해서 나중에 오매일여가 되고, 안팎이 명철(內外明哲)해져 거기서 한 눈 뜨면 깨친 것이지, 견성이지. 그러기 전에는 병난 거여”라고 주장하셨다. “화두를 참구해서 마침내 아주 작은 망상까지도 없어진 구경의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마음의 본원 자리에 단박 깨달아 들어가는 돈오돈수가 선종의 본디 사상인 것이다” 라고 성철스님은 논증했다. 단박에 깨친다는 교의의 바탕 가운데 하나는 本覺 사상이고, 본각 사상의 바탕은 如來藏, 佛性사상이다.

 

성철스님도 그의 저서 『禪門正路』제1장에서 “見性卽佛”을 논하고, 자기의 성품을 보면 바로 부처라고 하는 그 명제의 근거로 불성을 드는 것이 바로 다음 제2장 “衆生佛性”의 내용이다. 여래장과 불성은 같은 내용을 가진 말이고, 둘 모두 중생과 부처가 不二임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간화선에서 겪는 가장 어려운 산란심과 혼침을 동시에 해결하기 위하여서는 화두를 惺惺寂寂하게 오매불망 화두에 매달리는 일이다. 성철대선사는 화두를 참구하는 疑心(情)이 또렷하고 惺惺한 本來心의 작용이 전개되는 것이 간화선의 참구법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의 수행이 이 일단에 집약되고 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자신과 화두가 하나가 되는 체험을 통하여 本地風光이 발현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금생에 정말 해야 할 일은 자기 마음을 깨치는 일이 아니겠는가. 마음을 깨치는 일은 일상생활에서 『金剛經』第五『如來實見分』의 “모든 형상은 다 변화하는 것이다. 모든 형상을 보되 인연의 법칙에 의해 잠시 머무는 것(假相)으로 참된 실상(實相)이 아닌 것으로 직관한다면 곧 진리를 보고 여래(如來)를 본다(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四句偈를 체득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世世生生 萬古光明으로 삶을 살자는 것이다.

 

간화선은 최상근기의 수행자에게는 최상승의 수행법인 것은 장점이다. 최상근기의 수행을 위해서는 본래 망념이 없는 경지에서 바로 도에 계합하는 무심합도, 즉 경절문의 수행을 知訥 菩照(1158-1210)도 강조하였다. 지눌은 최상근기의 수행자는 반드시 이타의 원력행을 닦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진실한 수행자의 이타행으로서 설법을 적극 권장하였다. 깨달은 이후는 차별의 지혜로 중생들의 고통을 살펴서 자비 원력의 마음을 내어 힘이나 분수를 따라 보살도를 행하면 覺行이 점점 원만해 진다고 지눌은 주장했다. 간화선은 개방적이고 열린 자세를 취하는 것은 장점이다. 예를 들면, 臨濟 義玄(?-867)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고 하였는데, 이는 佛法 자체에도 집착하지 않는 자세이고, 이러한 개방성은 조사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눌은 참선 이외에 근기에 따라 간경, 염불, 참회, 설법 등의 수행을 겸하는 것을 말하였다. 그리고 최하근기의 재가신행자들은 염불해서 정토에 나기를 구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지눌은 근기에 따른 수행문의 시설을 두었다.

 

간화선을 우리나라에서 선종계의 수행에 주류로 정착시킨 慧諶(1178-1244)은 간화선은 교학 이론을 떠나 화두를 통한 파격적인 깨우침이었기 때문에 상근기가 아닌 보통 사람들은 수행하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일반인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金剛經』을 수지하고 독송하는 공덕신앙을 강조하였다. 위에서 考究한 바와 같이 간화선은 상근기에게는 최상승의 수행법인 것은 장점이지만, 중하근기의 사람에게는 접근하기가 어렵다는 점이 단점이다.

 

2.위빠사나의 장단점

 

이 章에서는 ‘위빠사나(vipassanā)'의 수행법이 어떻게 형성되어 오늘날 우리의 일상생활에 어떤 장단점이 있는 가를 고찰하고자 한다.

 

‘위빠사나(vipassanā)’는 빨리어(pāli)어로서 ‘vi'와 ’passanā'의 합성어이다. ‘vi’는 ‘관통하다’ ‘분리하다’ ‘쪼개다’ 등을 의미하는 것이고, ‘passanā’는 ‘관찰’ ‘식별’ ‘봄’ 등을 의미한다. 그래서 위빠사나의 의미는 ‘꿰뚫어 봄’이라고 할 수 있고, 한역 경전에서는 이를 ‘관’, ‘觀法’이라고 번역하여 사용하여 왔다, 이러한 위빠사나는 ‘알아차림(sampajańńa, 知)’과 ‘마음지킴(sati,念)’을 그 내용으로 한다. 그래서 자신이 망념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서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 ‘위빠사나’이다. 이러한 ‘삼빠자나’ 와 ‘사띠’는 ‘아누빠싸나’를 이루는 일종의 ‘마음작용(cetasika)’ 인데, 그와 같은 ‘삼빠자나’ 와 ‘사띠’ 로써 몸과 느낌 따위를 ‘아누빠싸나’ 하는 것이 곧 ‘四念處, cattāro satipaţţhānā)’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념처의 위빠사나는 구체적인 수행과정에서 ‘아누빠싸나(anupassanā, 隨觀)’ 라는 말로 대체된다. ‘아누빠싸나’란 어떠한 현상을 ‘지속적으로 따라가며 본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몸, 느낌, 마음, 법의 4가지에 대해 ‘따라가며 보는 것(隨觀,anupassanā)’을 이름하여 ‘사념처의 위빠사나(cattāro satipaţţhānā)’라고 한다. 이러한 위빠사나 수행법이 가장 잘 소개되어 있는 경전이『大念處經, Mahāsatipaţţhāna-Suttanta, DN.vol.2. pp. 290-315)』이다. 현존하는 남방불교의 위빠사나는 대체적으로 초기 불교의 사념처 수행에 이론적 배경을 둔다.

 

위빠사나 수행법은 『대념처경』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그 내용을 알아보자. 부처님께서 마지막 유훈으로 남긴 가르침, ‘自燈明法燈明 自歸依法歸依’하라는 내용이 내포되어 있는 경전에 ‘사념처의 위빠사나’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아난아, 이 가르침에서 안에서, 비구는 몸(身)에 대해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隨觀) 머문다. 열렬함과 삼빠자나(知)와 사띠(念)를 지녀,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 머문다.--- 느낌(受)에 대해--- 마음(意)에 대해--- 법(法)에 대해 법을 따라 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삼빠자나와 사띠를 지녀,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 머문다. 아난아, 이것을 일컬어, 비구가 자신을 등불로 삼아(自燈明) 머물고 자신에 의지하여 머물고(自歸依) 다른 이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또한 법을 등불로 삼아(法燈明) 머물고 법에 의지하여 머물고(法歸依) 다른 이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아난아, 내가 입멸한 후에 , 자신을 등불로 삼아 머물고 자신에 의지하여 머물고 다른 이에게 의지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또한 법을 등불로 삼아 머물고 법에 의지하여 머물고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그는 곧 나의 제자들 중에서 최고의 비구가 될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3개월 전에 설하신 법문이다. 이 법문을 통하여 ‘자등명 법등명’의 실제 내용이 사념처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부처님의 유훈으로 전승된 사념처의 수행은 불자가 신수봉행할 가르침이다. 이 수행법이 어떤 의미와 의의를 지니는가에 대해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비구들이여, 여기 한 갈래의 길(一乘道)이 있다. 이것은 중생을 정화하는 길이며, 슬픔과 근심을 초월하는 길이며, 고통과 고뇌를 소멸하는 길이며, 지혜를 증득하는 길이며, 열반을 실현하는 길이다. 이것은 곧 사념처의 수행이다.

 

그러면 『대념처경』에 나타나는 내용을 알아보도록 한다. 사념처의 위빠사나에서 말하는 기본적인 관찰대상으로서의 4가지란 몸(身), 느낌(受), 마음(心), 법(法)이다. 이들은 수행의 과정에서 포착되는 모든 현상들을 총괄적으로 아우르는 성격을 지닌다. ‘사념처’는 신념처, 수념처, 심념처, 법념처이다.

 

신념처에서는 호흡의 출입, 몸의 동작(행. 주. 좌. 와), 몸의 행동, 몸의 구성 요소 32가지, 몸의 4대 요소, ‘묘지에서 몸이 부패해가는 9단계의 과정’에 대해 알아차림을 말하고 있다. 수념처에서는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으로,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과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는 느낌’에 알아차림을 제시하고 있다. 심념처에서는 1가지 마음의 현상에 대한 마음챙김으로, ‘탐욕이 있는 마음’과 ‘탐욕이 없는 마음’과 같은 8쌍 16가지를 알아차림을 말하고 있다. 법념처에서는 다섯 가지 장애(五蓋), 五蘊, 六入, 七覺支, 四聖諦에 대해 알아차림을 제시하고 있다. 법념처에 제시된 다섯 가지 법들은 수행이 진행되는 순서를 말한다.

 

이상에서 간략히 고찰한 바와 같이『대념처경』은 몸, 느낌, 마음, 법의 4가지에 관련하여 편중됨이 없는 균형 잡힌 수행법을 그 내용으로 한다. 따라서『대념처경』에 나타나는 사념처야말로 가장 온전한 형식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사념처의 위빠사나는 12연기의 교리적 해석과도 정확하게 맞물려 있다. 그러한 사고의 지평에서 현실적인 삶으로부터 열반의 세계에 이르는 과정을 담지해 낸다. 사념처의 위빠사나를 수행하는 기간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四念處를 7년 동안 수행한다면, 그에게는 두 가지 결과 중에 어느 한 가지가 기대된다. 즉 현재의 상태에서 阿羅漢果를 얻든지, 남은 번뇌가 있을 때에는 돌아오지 않음(不還果)을 얻게 된다. 7년이 아니라 6년, 5년, 4년, 3년, 2년, 1년이라도--- 일년이 아니라 7개월이라도--- 7개월이 아니라 6개월, 5개월, 4개월, 3개월, 2개월, 1개월, 보름이라도--- 보름이 아니라 7일 동안이라도, 이 사념처를 열렬히 수행한다면 두 가지 결과 중 어느 한 가지가 기대된다. 즉 현재의 상태에서 아라한의 경지를 얻든지 남은 번뇌가 있을 때에는 돌아오지 않음을 얻게 된다.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이러한 해설은 우리에게 수행하는 목표와 방향을 제시하고 있어서 수행에 대한 확신을 같게 한다. 우리는 이러한 수행 과정에 숙달함으로써 ‘業의 순환(輪廻, saṃsāra)’으로부터 해탈하여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한다.

 

사념처 수행을 좌선 수행과 결부 지어서 설한 경전은 『入出息念經:들숨, 날숨의 마음챙김이라는 경, Ānāpānasati-Sutta,MN, vol.3. pp.78-88.』이다. 이 경전에서는 결가부좌를 하고 들숨과 날숨을 주시하면서 신념처 수행을 하고, 그 다음에는 들숨과 날숨을 계속하면서 수념처, 심념처, 법념처로 마음챙김의 대상을 바꾼다.

『입출식념경』은 『대념처경』에 나타나는 ‘신념처’ 의 세부 항목으로서,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 만을 독자적인 형태로 다룬 것이라고 할 수 있다.『입출식념경』의 이러한 구성은 사념처의 4가지 대상을 매개로 하는 각각의 수행법들이 독자적인 완결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경전에 따르면, 사념처 수행은 七覺支를 성취하는 것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고 한다.

 

사념처의 五蓋는 수행을 시작하면서 곧 부딪히는 장애이다. 즉 감각적인 욕망과 분노의 마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생각 속에서 부침하며, 좌선할 때의 혼침과 졸음은 수행자들의 오랜 벗처럼 슬며시 찾아온다. 마음은 들떠서 안정되어 있지 못하고, 과거의 잘못이 마음에 떠오르며 회한이 싸이기도 한다. 수행이 잘 진전 되지 않을 때에는 佛法僧 삼보와 수행법에 대해서 회의적인 의심이 생기기도 한다. 이러한 장애가 나타나면 즉시 알아차린 후, 일차적인 마음챙김의 대상으로 마음을 빨리 가져가야 한다. 마음챙김의 힘이 강해지면서, 점차로 장애들은 극복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다섯 가지 덮개(五蓋)를 극복하면서 수행을 계속해 나아가면, 깨달음의 일곱가지 요소(七覺支)가 경험되기 시작한다.

 

그러면 칠각지의 항목은 어떤 것인가?

칠각지의 첫째 항목은 염(念)이다. 이때가 되면 몸과 마음이 안정되며 수행에 대한 확신도 강해진다. 다시 말하면 수행자에게 마음챙김이 확립되어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 항목은 擇法이다. 마음챙김(念覺支)이 더욱 예리해지고, 현상에 대한 이해(擇法覺支)가 심화된다. 이는 법을 택해서 지혜로 고찰하고 사유하는 것이다. 셋째 항목은 精進이다. 좋은 현상들을 경험하게 되면서 더욱 더 정진에 힘을 가하게 된다(精進覺支). 넷째 항목은 喜이다. ‘喜’는 마음챙김을 하는 속에서 욕망이 없는 기쁨이 일어나는 것이다. 마음에서 희열을 맛보기도 한다. 다섯째 항목은 輕安이다. ‘輕安’은 기쁜 마음을 느낀 다음에 수행자의 몸과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다. 여섯째 항목은 定이다. 몸과 마음이 편안한 수행자가 그 다음에는 마음집중의 단계에 들어간다. 희열을 맛보며 안정된 마음은 더욱 집중을 이루게 된다. 일곱째 항목은 捨이다. ‘捨’는 집중된 마음이 내적으로 평온해지는 것이다. 생겨났다가는 사라지는 현상들에 대해서 집착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평온이 유지된다. 이는 禪定조차도 넘어서는 경계이고 이 때 진정한 깨달음이 열리는 것이다. 한편 발생적인 측면은 ‘念 ’각지를 닦고서 택법, 정진, 희, 경안, 정, 사를 순서대로 닦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깨달음의 일곱가지 요소(七覺支)가 경험될 때, 이러한 긍정적인 현상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수행의 핵심은 마음챙김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좋은 현상들도 마음챙김의 대상일 뿐이다. 경험되면 바로 알아차리고 일차적인 마음챙김의 대상을 알아차리는 일로 마음을 돌려야 한다.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소(七覺支)가 경험되면서 네 가지 고귀한 진리는 이론적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괴로움의 고귀한 진리(苦聖諦), 괴로움의 발생의 고귀한 진리(苦集聖諦), 괴로움의 소멸의 고귀한 진리(苦滅聖諦)),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고귀한 진리(苦滅道聖諦)가 체험적으로 파악되면서 성인의 道果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현재 미얀마와 태국 등지에서 위빠사나를 지도하는 스승들은 『대념처경』의 내용에 근거해서 각기 자신 고유의 家風으로 가르침을 펼쳐 나간다. 그 가운데 몇 사람을 예를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진 마하시 사야도(Mahasi Sayadaw, 1904-1982) 계열의 수행센터에서는 ‘신념처’에서 ‘몸의 동작(호흡. 행. 주. 좌. 와)’과 ‘몸의 행동’에 대한 알아차림을 중심으로 위빠사나 수행법을 가르친다. 또한 마하시 사야도의 가르침을 독자적으로 계승한 쉐우민 사야도(Shwe Oo Min Sayadaw,1910-2002)는 ‘심념처’를 중심으로 예비적인 선정을 익히지 않고서도 수행할 수 있는 ‘순수 위빠사나(純觀, suddhavipassanā)’를 가르친다는 특징이 있다. 재가자로서 인도에서 널리 활약하고 있는 고엔까(S. N. Goenka, 1924-)는 ‘신념처’의 ‘호흡의 출입’에 대한 알아차림과 ‘수념처’를 중심으로 위빠사나를 가르친다고 한다. 빠욱 사야도(Pa Auk Sayadaw, ?-)는 ‘사마타(止)’를 먼저 익히게 한 다음에 위빠사나를 수행하도록 한다. 빠욱 사야도의 가르침은 순수한 위빠사나라기 보다는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혼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스승들은 제각기 다른 家風을 전수하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열거한 사념처의 세부항목들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들 모두는 궁극적으로 법념처의 ‘四聖諦’에 대한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마하시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은 『대념처경』의 사념처를 위주로 제시되어 있지만, 수행의 구체적인 향상 단계는 5세기 붓다고사가 지은 『청정도론』의 체계를 따라서 제시되어 있다. 남방상좌불교에서 실제 수행의 단계를 『청정도론』을 통해 설명하는 예는 마하시 사야도가 대표적이다.

 

현대 위빠사나에서는 수행이 불교의 재가자에게도 열려 있고, 나아가 불교도가 아닌 사람에게도 수행의 기회가 열려 있다는 것은 장점이다. 또한 현대의 위빠사나에서는 모든 연령의 수행자, 곧 재가자와 승려, 여성 출가수행자가 잘 갖추어진 수행센터에서 수행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장점이다. 이 점이 시사하는 것은 재가자를 포함한 ‘수행의 초심자를 위한 친절하고 단계적 지도’ 와 ‘근기에 따라 방편을 베푸는 배려’는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갖가지 ‘느낌’의 유혹에 노출된 채 살아가는 우리는 ‘느낌’자체를 인위적으로 멈추게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느낌’ 실상을 곧바로 알아차림으로써, 그것에 대한 끄달림으로 인해 발생하는 ‘탐욕’과 ‘분노’를 미리 방지할 수는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 숙련함으로써 끝없이 이어 지는 ‘業 의 輪廻’를 약화, 단절시킬 수 있다는 것은 사상적으로 장점이다.

 

불교 상가는 결코 사회와 결별한 은둔자들의 집단이 아니다. 월폴라 라홀라의 주장에 따르면 상가는 자신의 정신적, 지적 발전뿐만 아니라 또한 타인에 대한 봉사에 일생을 흔쾌히 바치고자 하는 사람들의 집단이다.

남방불교의 경전은 출가 지향적인 성격이 강한 반면, 북방불교의 대승경전은 출가와 재가를 크게 문제시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오늘날 상좌불교 국가에서 스님은 반드시 독신이지만, 대승불교 국가에서는 결혼을 허용하기도 한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미즈노 코겐(水野弘元)은 일찍이 上座部的 아비달마불교와 初期 大乘佛敎의 특징적 차이를 다음 여섯 가지로 정리한 바 있다.

 

첫째, 남방불교는 아라한을 목적으로 하는 聲聞사상(聲聞乘), 북방불교는 성불을 목적으로 하는 보살사상(菩薩乘).

 

둘째, 남방불교는 업보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타율주의(業報사상), 북방불교는 성불의 願行을 위해 스스로 惡趣에 나아가는 자유주의(願行사상).

 

셋째, 남방불교는 자기 한 사람의 완성을 위해 수행하고 노력하는 자리주의(小乘), 북방불교는 일체중생을 구제하고 사회 전체를 정화 향상시키는 이타주의(大乘).

 

넷째, 남방불교는 聖典의 연구에 얽매이고 사물에 구애 집착하는 有의 태도(有思想), 북방불교는 모든 행동은 般若波羅蜜의 空無所得의 태도(空思想).

 

다섯째, 남방불교는 이론적, 학문적 경향이 짙고 그 이론에는 실천과 관계없는 희론이 적지 않음(이론적), 북방불교는 이론과 학문보다도 실천 신앙을 중시(실천적).

 

여섯째, 남방불교는 출가적, 전문적이면서도 소승적, 세속적인 낮은 입장(전문화, 출가불교), 북방불교는 在家적, 대중적이지만 그 경지는 第一義的인 높은 입장(일반화, 재가불교).

 

남방불교의 수행법은 아라한지향적이고, 북방불교의 수행법은 보살지향적이다. 전자는 上求菩提라는 의미에서 개인의 道이고, 후자는 下化衆生이라는 의미에서 대중의 도이다. 전자는 法을 논함에 있어 분석적 방법을 강조하고 후자는 직관적 방법을 중시한다.

 

보살사상의 이론과 실천을 가장 잘 설하고 있는 『법화경』에서는, “부처님의 평등한 법, 한 맛인 비와 같고, 중생들의 성품 따라 받는 것이 틀리나니, 비를 맞는 풀과 나무 다른 것과 같느니라.”고 중생들의 根機에 대한 교설이 다음과 같이 나온다.

 

그 구름이 내리는 비, 한 가지의 물맛이나 모든 풀과 나무들이 성분대로 축여지고 작은 나무 큰 나무며 상중하의 초목 수풀 크고 작은 성질대로 저 마다가 자라나네.

 

또 「방편품」에서는, “五濁惡世에는 사람들의 業障이 무거워져서 인색하고 탐내고 질투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치성하여 좋지 못한 근성이 마음을 사로 잡고 있기 때문에 , 모든 부처님께서는 최고의 진리를 즉시 설하시지 않으시고 방편의 힘으로 一佛乘밖에 없는 것을 각자의 능력에 따라 三乘으로 나누어서 설하시느니라.”

 

남방 상좌불교의 수행법인 위빠사나는 아라한을 목적으로 한다. 아라한의 열반을 『법화경』에서는 중근기인 중품약초라고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번뇌 없는 법을 알아 열반락을 얻고 나서 여섯 신통 일으키고 삼명까지 얻은 뒤에 홀로 있어 선정 항상 하여서 연각을 증득하면 이런 이는 중품약초

 

『법화경』의 논리에 따르면, 성문은 하근기, 연각은 중근기, 그리고 보살은 상근기라고 한다. 「약왕보살본사품」에서는, “대범천왕이 온갖 중생의 아버지이듯이 이 『법화경』도 이와 같아서 모든 어진 성인과 배우는 사람과 다 배운 사람과 그리고 보살의 마음을 일으킨 사람의 아버지가 되느니라”고 설하였다.  모든 성문벽지불 가운데는 보살이 제일이듯이 이 『법화경』도 또한 이와 같아서 모든 경법 가운데 가장 제일이 되느니 라고 하였다.

 

그래서 『법화경』에서는, “내가 이제 너희들 위해 참다운 법 설하니, 여러 성문 대중들은 멸도가 다 아니요오직 너희들 행할 바는 보살도뿐이러니점점 닦아 다 배우면 모두 모두 성불한다.”고 보살의 이상을 제시했다. 이어서「방편품」에서는, “사리불아, 만일 나의 제자가 스스로 아라한이나 벽지불이라고 말하더라도 모든 부처님께서 보살을 교화하시는 방편의 가르침을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면, 이는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며 아라한이 아니며 벽지불도 아니니라.”라고 菩薩事를 강조하고 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위빠사나의 수행법은 일체중생을 구제하고 사회 전체를 정화 향상시키는 利他主義의 道는 아니다. 그런 점에서 남방불교의 수행법인 위빠사나는 개인의 도이나, 최상승의 道가 아닌 것이 단점이다.

 

위와 같이 불교사상사에서 패러다임의 급격한 변화가 두 번 일어났다고 한다. 그 첫 번째가 소위 소승불교에 대한 대승불교의 도입이고, 다른 하나의 변화는 대승불교에 기초해서 일어난 禪佛敎 내지 딴뜨라 불교이다.

 

첫 번째 패러다임의 변화가 존재론과 인식론, 해탈론 등의 교리상의 전면적 변화를 초래한 데 비해, 두 번째 변화는 대승의 큰 틀을 유지하면서 다만 깨달음의 교육적 측면에 있어 보다 효율적인 방법론과 관련되었다. 이들 변화가 정치적, 사회적 변화와 밀접한 연관 하에서 진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승불교를 전 시대의 사상과 구별 짓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중생에 대한 大悲를 특징으로 하는 이타적 존재로서의 보살의 이상이다. 보살사상은 여러 내적, 외적 요인의 결합에 의해 시작되어 발전되었다. 전개된 이후에는 대승의 전 역사를 통해 그리고 대승불교가 전법된 모든 지역에서 하나의 강력한 이념으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보살의 이상 없는 대승불교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인도의 유명한 불교시인이자 수행자인 샨띠데바(Ṥāntideva,寂天,650-750)는 그의 『입보리행론』에서, 空性과 大悲의 균형을 통해 이루어진 보살의 이상에 대해 매우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대승보살의 보리심의 계발을 두 가지 단계로 설하고 있다. 첫째는 타인과 자신의 동일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자타의 동일성을 통달한 후에,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기쁨과 교환하는 적극적인 보살행의 단계로 나아간다.

 

전자의 단계에서 이타행의 근거는 고통의 변재성과 모든 존재는 苦를 피하고 樂을 구한다고 하는 ‘황금률’에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동일한 고통과 동일한 기쁨을 갖고 있고, 자신은 스스로를 보호하듯 그들을 보호해야만 한다는 보살의 실천윤리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고통의 변재성을 통한 이러한 윤리적 명령은 다음 단계에서 ‘자아’의식의 허구성과 모든 존재의 비실체성에 대한 통찰에 의거 새로운 차원의 윤리로 전환된다. 만일 모든 존재가 본래적으로 空하다면, 타인과 자신을 구별할 하등 근거가 없게 된다. 모든 내적, 외적 대상의 존재성이 제로로 수렴되었을 때, 집착되어야 할 대상도 집착하는 의식도 함께 소멸되며 따라서 이 단계에서 대승보살은 기꺼이 자신의 기쁨을 타인의 고통과 바꾼다.

 

이런 보살의 이상을 일거수 일투족이 체현해서 실천하고 계신 분이 진푸티(金菩提)上師 이다. 그래서 진푸티상사의 관상법을 통해서 두 기존의 수행법인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장·단점을 회통할 길을 다음 章에서 考究하도록 한다. 중생의 능력과 의향이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듯 모든 중생의 성향을 회통할 현대인의 근기에 맞는 수행도가 요청되는 것은 당위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수행도가 진리의 세계에 얼마나 가까우냐 하는 점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Ⅲ.회통으로서의 진푸티관상법

 

1.관상법의 배경

 

1)시대적 배경

 

회통은 여러 가지 성격을 단순히 모아 놓은 화합주의가 아니다. 여러 가지를 종합하되 단순 결합이 아닌 창조적 종합을 말한다. 대립되고 모순되어 보이는 것들을 근원에 들어가 서로 연결되는 지점을 찾아내어 모순과 대립을 해소하고 화합과 통합으로 이끄는 방식을 말한다. 근원에 들어가면 하나요, 현상적으로는 조화로운 모습으로 서로 共存하는 和의 철학이 회통인 것이다.

 

진푸티(金菩提)上師에게 있어 이러한 회통정신은 그가 살던 시대와 사상의 회통이다. 진푸티상사의 회통정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과 생각, 즉 역사적인 이해와 철학적인 해석을 함께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가 격동기를 살았던 ‘시대의 정신’을 온전히 고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의 삶의 각 사건과 사유의 단편들인 선과 면, 평면과 입체의 각 특성을 세밀히 접근해서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진푸티(1964- )상사는 餘他의 禪師와 달리 당대의 역사적 의미를 뚜렷하게 확보하고 철학적 지평을 突兀(loftiness)하게 정립한 禪師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평면과 입체 두 측면에서 아울러 고찰할 때 비로소 역사적 인간의 흔적과 철학적 사유의 지평을 아우른 진푸티상사의 실존적 면모를 조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먼저 시대적 배경을 알아보자.

 

진푸티(金菩提)上師의 속명은 디위밍(狄玉明)으로 삼남 일녀 중 셋째로, 1964년 12월 11일 중국 허베이 성(河北省) 우이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무림의 고수로서 某 支派의 掌門人(문파를 이끄는 책임자)으로 신기에 가까운 무예 실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아버지에게는 무술을 배울만한 그릇이 되지 못하여 전수하지 않았다고 한다. 디위밍은 어린시절부터 잔병치례가 잦고 말수도 적어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또래의 친구들이 깔깔거리며 뛰어놀 때도 그는 자신의 세계에 틀어박혀 꿈을 꾸면서 항상 외롭게 인생의 고통을 견뎌야 했다. 이와 같이 그의 어린시절은 특별히 자랑할 만한 이야깃거리가 없었다. 그저 하루가 일 년 같은 지루하고 따분한 시간이었다. 그는 걸핏하면 혼자 멍하니 앉아서 至高 至尊의 자리에 올라 하늘을 떠받치는 거대한 神이 된 완벽한 자신의 미래를 꿈꾸곤 했다.

 

디위밍의 태어난 그 다음 해 1966년은 문화대혁명이 일어나 또 다른 수난의 시작을 알렸다. 겨우 네 살의 어린 나이에 디위밍은 열여섯 살의 형과 갓 돌을 지난 어린 동생이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삶의 고통과 척박한 세상인심을 묵묵히 견뎌야 했다. 당시는 온 나라가 재난이 끊이질 않아 집집이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디위밍의 아버지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자 그의 집은 끼니조차 잇지 못할 만큼 심각한 상황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럼 어떤 누명을 쓰게 되었는가를 디위밍의 설명을 들어보자.

 

당시 칭하이 성 시닝(西寧 )에서 일하던 그의 아버지는 노환으로 치료가 필요한 외할아버지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자신이 아끼던 자전거를 팔았다. 아버지는 30위안에 산 중고 자전거를 부품을 교체하고 페인트칠도 다시 하여 완전히 새것처럼 만들어 50위안에 되팔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때문에 ‘사기꾼’이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2년 동안 갇히게 되었다.

 

디위밍의 가정의 생계가 어려워지자 그의 어머니는 낡은 수레를 구해 고물을 주워 가정 살림에 보탰으나 사람들의 업신여김과 괴롭힘은 끝이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모든 것은 그에게 삶의 진리를 체득하도록 하였다. 이렇듯 참혹한 경험을 통해 어린 디위밍은 일찌감치 죽음과 이별의 아픔, 삶의 고통과 좌절을 맛보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어린 디위밍에게는 ‘만약 이 세상에 굶주림도 病도 離別도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바람이 있었다고 한다.

 

여섯 살이 되던 해에 디위밍의 집에 경사스러운 일이 생겼다. 그의 아버지가 마침내 누명을 벗게 된 것이다. 디위밍은 형과 동생이 잠든 땅을 떠나 부모와 함께 칭하이 성(靑海省)으로 이사 왔다. 허베이 성(河北省)에서 나고 자랐던 디위밍은 난생처음으로 신비의 땅 칭짱 고원(靑藏高原)에 발을 디뎠다.

 

이곳은 신비롭고 아름다운 땅이었다.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거인처럼 하늘 높이 솟아있는 설산은 천국에 대한 동경을 불러일으켰다. 넓은 대초원 위를 소와 양들이 느긋하게 떼 지어 다녔고, 양치기 처녀의 순박한 미소는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또한, 바람에 들려오는 라마승의 經 읽는 소리는 영혼 깊숙이 파고들었다. 디위밍의 몸과 마음은 꿈과 같은 이 아름다운 세계에 점차 젖어들었다. 아름답고 신비로운 칭짱 고원의 모든 것들은 특별한 영적 능력을 지니고 있어 세대를 이어가며 大德 禪師를 길러 냈다.

 

날마다 배불리 먹고 따뜻한 옷을 입을 수 있어 굶주리거나 추위에 떨 필요가 없는 칭하이는 그에게 ‘천국’과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칭하이는 해발 3-4,000 미터의 고원이라 산소가 부족한 곳이었다. 본래 허약체질이었던 디위밍은 건강이 나빠지면서 기침하고 숨이 차며 고름이 흐르는 부스럼과 같은 잔병이 끊이질 않았다. 의사는 병의 원인이 영양실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의 부모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 민간에서 떠도는 전통 秘方이나 명약을 사방으로 수소문하며 찾아다녔다. 한 번은 그의 아버지가 민간에서 효험이 좋다고 소문난 고약을 가까스로 구해왔다. 거의 수십 근에 달하는 고약을 몇 날 며칠발라도 효험이 없자 그의 부모는 애가 타 안달이 났으나 디위밍은 오히려 태연했다.

 

날마다 생과 사를 넘나들며 병마와 싸우던 디위밍은 일곱 살이 되던 해 3월, 급기야 혼수상태에 빠졌다. 정신을 잃은 디위밍은 꿈속에서 아주 먼 길을 걸어 아름다운 곳에 이르렀다. 푸른 언덕에는 꽃과 과일이 만발하고 시냇물이 졸졸 흘렀으며, 사방에서 새들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름다운 풍경에 도취해 맘껏 뛰어 놀던 디위밍은 그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병마와 고통이 모두 사라져버린 것만 같았다. 기쁨에 들뜬 디위밍은 신 나게 뛰어노느라 집에 돌아가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이때 긴 수염을 휘날리고 흰색 도포를 입은 백발의 노인이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났다. 노인은 호리병이 매달린 지팡이를 짚고 사뿐히 날아오더니 자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얘야, 집에서 부모가 기다리니 그만 놀고 일어나렴.” 노인은 디위밍의 손을 잡아끌더니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디위밍이 눈을 떴을 때 방안에는 온 집안사람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고, 바로 옆에는 그의 어머니가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깨어나자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질렀다.

 

“깨어났어요, 깨어났어, 애가 살아났어!” 그동안 디위밍은 여러 날 동안 혼수상태로 있었다. 그런데 그가 깨어나기 직전에 갑자기 어디선가 미치광이 노인이 들이닥치더니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자네들 주려고 아이 하나를 주워왔네.” 노인은 디위밍의 몸에 손짓으로 그림을 그리더니 귀에다 무슨 말인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디위밍이 기적처럼 깨어난 것이다.

 

정신을 차린 디위밍이 꿈 이야기를 들려주자 모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디위밍은 첫 걸음마를 뗀 후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문장을 말해본 적이 없었다. 반벙어리 같던 아이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자마자 청산유수처럼 말을 내뱉기 시작했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부모를 비롯한 모든 가족은 디위밍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 오히려 큰 복을 얻었다고 기뻐했다.

 

그래서 디위밍의 건강을 걱정하던 아버지는 변변찮은 무술 실력을 총동원하여 아들의 체력을 단련시켰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무술을 연습하면서부터 디위밍의 몸이 점차 좋아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 눈 깜짝할 사이에 디위밍은 열한 살이 되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디위밍은 고양이 생명을 구하는 放生을 실천했다. 진푸티상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고양이가 나에게는 ‘기회와 인연’이었네. 고양이를 구한일이 나에게는 행운의 문을 여는 ‘황금 열쇠’가 되었던 거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의 ‘미로‘에 갇혀 있을 때 이런 작은 선행으로 긍정적인 ’촉매제‘ 역할을 해서 사물의 질적 양적 변화를 일으키고, 더 나아가서는 한 사람의 인생행로를 바꾼다고 진푸티상사는 말했다.

 

선의의 작은 선행이 인생행로를 바꾸는 촉매제 역할을 해서 디위밍의 근본 스승인 仁祖師와 인연을 갖게 되어 환골탈태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인 조사의 제자로 입문한 날부터 디위밍의 인생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인 조사는 디위밍에게 날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麒麟園으로 가서 무술을 연마하라고 특별히 요구했다고 한다. 겁이 많았던 디위밍은 칠흑같이 어두운 새벽길을 나서는 것이 무서웠으나 스승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이를 악물고 호신용 몽둥이를 움켜쥔 채 음침한 숲 속 길을 조심조심 지나가면 소름 끼치는 들짐승들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와 어린 간담은 금세 서늘해졌다고 한다.

 

반년 동안의 기초훈련이 끝나자 인 조사는 디위밍에게 좌선을 시켰다고 한다. 스승인 인 조사가 수련장에 나오시지 않아 스승이 앉던 자리에서 좌선하니 자신이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사나흘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가도록 디위밍은 이렇듯 특별한 禪의 경지를 계속해서 경험했다고 진술했다. 인 조사는 줄곧 나타나지 않았으나 관세음보살이 자주 나타나 디위밍과 융합하고 교감을 나누었다. 인 조사에게 무술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디위밍은 무공을 수련하는 동시에 하루도 빼놓지 않고 좌선하고 수행했다. 그래서 디위밍은 나날이 건강해졌고, 그동안 앓고 있던 병의 증세들도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그 후 디위밍은 제 10대 판체(班禪)라마의 경전 스승으로부터 불법을 배웠는데 그는 어두운 지하 동굴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스승은 디위밍에게 아주 친절하면서도 대단히 엄격하여 이전보다 한층 강화된 수행을 하게 했다. 스승은 낮에는 디위밍에게 글을 가르쳐 수련법의 이론을 익히며 비결을 외우게 하고 밤에는 함께 좌선했다. 한번 좌선하면 새벽까지 이어졌고, 불을 켜거나 조는 것조차 금했기에 침상에서 잠을 자는 것은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판체라마의 지시에 따라 한 달 동안 수련을 마치자 좌선할 때면 디위밍의 머리 위로 후광이 나타났고, 어둠 속에서도 물체를 볼 수 있게 됐다. 또한 사람의 몸속을 투시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까지 생겼다고 한다. 기본적인 요령을 익히고 나자 스승은 디위밍에게 자신과 함께 동문수학한 師妹를 소개해줬다. 스승의 사매는 쉰 살이 넘은 노파로 그녀는 바람과 비를 부를 수 있을 만큼 대단히 뛰어난 법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경전에 있는 비결을 디위밍에게 전수해주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디위밍이 노파에게 불법을 배운지 반년이 흘렀다. 신비하면서도 엄격했던 반 년 동안의 가르침 속에서 디위잉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여러 가지 법술을 배웠으며, 그 시간은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았다고 술회했다.

 

디위밍이 좌선했던 자리에는 火功을 수련한 뒤 지름 3미터 가량의 흰색 원이 생겼다. 흰색 원은 동그랗게 비추는 청아한 달빛이나 부들방석 같았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후 디위밍은 칭짱 고원을 떠나기 전에 이곳 수련장을 찾아갔다. 먼 곳에서도 금방 눈에 띄는 달빛처럼 둥근 흰색 원은 예전 그대로 순결하고 부드러운 빛을 띠고 있었다. 두 손으로 흰색 원을 쓰다듬는 디위밍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인 조사는 이처럼 고상한 불법과 심오한 선 수행을 가르쳐주면서도 단 한 번도 ‘禪 ’이나 ‘佛 ’이라는 단어를 언급한 적이 없었다고 진푸티상사는 회고했다. 인 조사는 디위밍이 보름달과 같이 자애롭고 조화로운 밝은 심성으로 어둠 속의 고독한 영혼을 밝게 비추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불법의 정수와 禪機를 이 청아한 달빛에 융화시켜 그에게 전수했다고 한다. 진푸티상사가 열한 살 때 앉아 좌선하던 땅이 흰색의 둥근원으로 변했는데 그는 그 원을 ‘달빛’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진푸티상사는 옛일을 회상할 때면 마음속에서 부드러운 달빛과 같은 기쁨이 넘쳐흘렀고 인 조사와 함께 보냈던 특별한 나날들과 부드러운 ‘달빛’을 사무치게 그리워한다고 한다.

 

그 緣由는 디위밍과 그 가족의 억울함에 대한 원한의 강렬한 복수심과 사악한 마음을 없애고 설사 원수라도 용서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쁜 일이 佛道의 緣으로 昇華되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원한은 원한에 의해서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원한을 버릴 때에만 사라지나니 이것은 변치 않을 영원한 진리다.” "전쟁터에서 싸워 백만 인을 이기기보다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 가장 뛰어난 승리자다.“라고 『법구경』에서는 敎示하고 있다. 이런 인연의 마음은 디위밍에서 金菩提上師로 환골탈태하는 실천의 계기가 되었다. 진푸티상사는 이를 두고 ‘고뇌 속에 핀 꽃’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실 수행에서 ‘逆緣’은 빠질 수 없는 자양분이다. 이는 연꽃이 핀 연못의 진흙탕에 비유할 수 있다. 진흙탕은 더럽고 냄새나지만 가장 아름답고 향기로운 연꽃을 피워내지 않던가? 이러한 생각의 전환은 말은 쉬워도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대단히 어려운 일로 온갖 마음의 고통 속에서 단련되어 나오는 것이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 디위밍은 사나흘 연속 禪의 경지에 들었다. 이때 그는 ‘ 허난현(河南 縣 )’이라는 글자와 함께 겹겹이 굽이진 설산, 소와 양 떼, 깎아지른 벼랑위에 난 오솔길, 해맑은 웃음소리, 훤칠하고 용맹스런 얼굴과 번쩍거리는 금반지를 보았다. ‘이건 나에게 허난 현으로 가라는 계시가 분명해. 어쩌면 그곳에 어떤 인연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라.’ 디위밍은 사방으로 수소문하여 알아보았다. 마침 누군가가 그에게 허난 현은 칭하이 성 黃南 洲의 외진 곳으로 대대로 티베트족과 몽골족들이 모여 살며 소와 양이 생산되는 비옥한 땅이라고 했다. 당시 칭하이 성과 티베트 일대의 사람들은 대대로 불교를 믿어 고승이 가피한 법물을 항상 호신부처럼 지니고 다녔다.

 

지난 수년 동안 단련한 무술과 법력으로 그는 대단히 강하고 민첩했다. 더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던 옛날의 병약한 디위밍이 아니었다. 그러나 상당 기간 병목상태에 빠진 것처럼 그의 수행은 새로운 진전이 없이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었다. 그는 돌파구를 찾지 못해 마음이 꽉 막힌 것 같이 답답하여 괴로워했다. 어쩌면 이는 수행을 통해 얻은 강한 힘과 초인적인 법력이 그를 집착과 자만에 빠지도록 하여 마음속 깊은 곳까지 자아를 찾아가는데 큰 장애가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진정한 자아를 초월할 수 있을까? 디위밍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하고 또 고심했다.

 

황난 주(黃南洲)에서 용이 새겨진 반지가 돌아온 그날 밤 디위밍의 꿈에 그의 할아버지가 긴 수염과 백 발을 휘날리며 해맑은 모습으로 나타나 다음과 같이 애기했다고 한다.

 

손자야, 지금 너의 목숨은 부처님께서 주신 것을 아느냐? 사실 너는 큰 재앙으로 목숨을 보존치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부처님께서 저우씨 어린 자식의 손을 빌어 독이 든 계란탕을 땅바닥에 엎지르게 하신 덕분에 네가 화를 면하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독을 먹고 죽은 개는 네가 전생에 구해준 적이 있는 천(陳)씨 성을 가진 현관이었는데 다른 사람의 모함으로 온 가족 수십 명이 연루되어 죽을 지경에 처했었다. 다행히 네가 법력으로 황제에게 그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한 끝에 사실 규명 조사가 이루어져 누명을 벗을 수 있었지. 그 때 천 현관은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내생에서는 목숨을 바쳐 은혜를 갚겠노라 하늘에 맹세하고, 금생에 저우씨의 개로 태어나 목숨을 바쳐 너를 구하겠다는 원이 이뤄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단다. 이번에 너를 구한 덕분에 무량한 공덕을 쌓아 지금은 천상의 신선이 되었다. 아무쪼록 너도 빨리 菩提를 증득하고 大願을 세워 끝없는 법력으로 이 세상의 모든 중생을 제도함으로써 너에게 새 생명을 주신 부처님의 자비와 큰 은혜에 감사드리도록 해라.

 

이와 같이 깜짝 놀라 꿈에서 깬 디위밍은 크게 감격하여 깊은 사색에 빠져들어 다음과 같은 뼈저리게 참회와 觀想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위대한 부처님께서는 내가 위험에 처할 때마다 묵묵히 나를 구해주셨다. 그런데 나는 소원을 빌 때를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아무런 사심 없이 불상 앞에 향을 피우거나 과일과 꽃을 바친 적이 없었다. 부처님을 존중하지 않았던 자신을 참회하고, 끝없는 욕심을 부린 자신을 참회했으며,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존중하거나 이해하기는커녕 공경조차 않던 자신을 참회했고, 전생과 이생에서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 모든 중생에게 참회했으며, 자신이 알게 모르게 상처를 입힌 모든 생명에 참회했다. 또한, 자신과 중생은 본래 한 뿌리에서 나왔으나 무시겁 이래 자신의 무지로 그들에게 끼친 고통과 분노, 슬픔과 불행에 대하여 배로 보상할 것을 간절히 바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어렵고 힘든 것은 자신이 과거에 가졌던 증오심과 복수심에 대한 참회였다. 디위밍의 마음은 점차 가벼워지고 편안해졌다. 매번 참회가 끝나고 나면 그는 머리를 땅에 대고 큰절을 했다그렇게 절할 때는 신체의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이며, 이 무수한 가 이 세계는 물론 우주와 허공에 퍼져 있는 것을 觀想하며이 무수한 와 함께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염불했다.

 

그런 다음에는 디위밍은 靜坐한 채 거대하고 자비로운 부처님이 허공에서 상서로운 기운을 발산하는 것을 관상했다. 이러한 의식과 한가지 동작을 덧붙여 예배를 올렸다. 디위밍이 이렇듯 계속해서 참회하며 예배하기를 3-40일이 지나자 그런 어느날 자신이 하늘 위에 올라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참이 지나자 디위밍의 몸은 공중으로 붕 떠오르고 무지개 구름이 그를 받쳐주어 부처님의 진짜 얼굴을 볼 수 있게 했다. 디위밍이 가까이서 보니 부처님의 대자대비하고 무한한 지혜와 큰 위용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날 선정에서 디위밍은 평생 잊지 못할 장면을 다음과 같이 보았다고 술회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이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울부짖으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 있는 황금빛 좌대 위에는 온몸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네 개의 얼굴로 사방을 내려다보고 있는 四面金佛이 앉아 있었다. 중생이 울며 부르짖는 소리에 사면금불의 얼굴에는 수정과 같은 눈방울이 흘러내렸다. 사면금불은 천천히 무지갯빛 나는 손으로 중생 하나하나를 가볍게 들어 올려 그들이 기쁨의 미소를 지을 때까지 상처와 아픔을 어루만져 주었다. 디위밍은 禪定에서 사면금불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놀랍게도 바로 자신의 얼굴이었다.

 

위의 내용은 『법화경』의 「방편품」에 나타나는 ‘오직 부처님과 깨친 이만이 모든 법의 참 모습을 안다’다는 警句를 聯想케 한다. 이런 순간 디위밍은 다음과 같이 깨달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래, 부처님의 얼굴이 내 얼굴이면 또 어떻단 말인가? 수행은 결국 무엇을 위해 하는 것인가? 단지 좌선하는 것만이 수행인가? 그렇게 좌선만 하면 成佛할 수 있는가? 부처님은 단지 선정 가운데 안주하는가? 禪이란 무엇인가? 慈悲喜捨는 선이 아닌가? 禪은 定을 낳고, 定은 慧를 낳는데, 慧는 무엇을 낳는가? 디위밍은 자신에게 크게 감동을 준 것이 부처님의 대자대비와 보살의 大願大行임을 잘 알고 있다. 당시 석가모니부처님은 중생이 고통 속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누리도록 고행하고 좌선하며 선정에 들었다. 그리고 선정 속에서 大智慧와 大解脫을 얻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풀고, 무엇에서 벗어났는가? 아, 그는 인류 고통의 근원을 풀고, 탐욕의 집착에서 벗어나 자신을 버리고 중생을 끌어안았던 것이다.

 

디위밍은 마침내 깨달았다. 무궁무진한 법력을 가진 천수천안관세음보살처럼 자신도 중생을 구원할 수많은 손과 속세의 중생을 교화시킬 무궁무진한 化身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디위밍의 의식 속에서는 그의 선택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두 지방의 이름이 떠올랐다. 하나는 베이징이고 또 하나는 광저우였다. 중생 제도 측면에서 수많은 사람을 제도하고 교화할 수 있는 광저우를 선택했다. 중국에서 유동인구가 최고로 많고 경제가 가장 발달했으며 여러 방면에서 쾌속 성장을 이루고 있는 광저우를 불법을 전수하는 그의 첫 번째 장소로 선택한 것이다. 마치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장 인연 깊은 다섯 비구들에게 설법을 하기 위하여 베나레스에 있는 鹿野苑에 간 것처럼 말이다.

 

나이 스물여섯의 디위밍은 제자 네 명과 함께 남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백설이 뒤덮인 칭짱 고원을 떠나 화려하고 번화한 도시 광저우에 도착하여 정식으로 불법을 전수하여 진푸티(金菩提)라는 법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날은 1991년 8월 3일이었다.

 

진푸티상사는 칭짱 고원에서 18년 동안 자비의 영력이 탁월한 여러 고승의 수행법을 배우고 수련하여, 스스로 우주의 진리와 인생의 참된 면목을 깨달았다. 무지로 고통받고 있는 중생들을 ‘離苦得樂’의 길로 약사부처님의 12대원으로 인도. 실천하고 있다. 서기 1991년 8월 하산한 이래 ‘보리(菩提)’사상을 전하기 위하여 ‘菩提禪修’를 창립하여 현재 캐나다 밴쿠버에 본부를 두어, 미국, 타이완, 싱가포르, 홍콩, 캐나다, 스웨덴, 호주, 일본, 한국 등 지역에 실수행 도량 30여 곳을 설립하여 자비의 이치와 심신을 안정시키는 禪 수행 묘법을 전수하고 있다.

 

2)사상적 배경

 

인간은 자연환경과 사회환경의 영향을 받으면서 사상이 형성된다.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진푸티상사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자연환경, 특별한 가정환경, 그리고 가장 존귀한 스승의 특별한 수행의 지도로 진푸티의 관상법이 형성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진푸티상사의 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관상법이다. 이 章 에서는 그의 관상법의 형성배경을 알아본다.

 

觀想의 어의는 사물을 마음에 떠오르게 하여 관찰하는 것을 뜻한다. 단정히 앉아 순일한 마음으로 한 부처님의 상호와 공덕을 관하여 생각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三昧에 들면 분명히 부처님을 볼 수 있고, 한 부처님을 보게 되면 모든 부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닦는 이는 罪障이 소멸되어 그 佛土에 왕생한다고 한다. 관상법은 밀교의 경전에 나타난 ‘卽身成佛’의 수행법이다. 그래서 어떠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 배경을 알아본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밀교경전은 성립의 시기에 따라 초기밀교, 중기밀교, 후기밀교로 구분된다. 역사적인 시기에 따라 각 경전들은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초기밀교 경전은 대승불교 시대에서 밀교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단계로서 대부분 설법의 주체가 석가모니이며 그 내용 또한 다라니(dhāraņī) 등의 呪法을 중심으로 하는 대승경전이 주류를 이룬다. 그래서 다라니의 염송을 통한 현세적인 이익과 혜택을 중심으로 한 내용의 경전이 대다수이다. 이때까지 만다라는 형성 단계에 있었으며, 다라니(dhāraņī), 인계(mudrā), 관법의 관계에 있어서도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기를 거치면서 밀교는 보다 체계화된 수행체계를 갖추게 되는데, 그것이 身, 口, 意 三密의 의례체계이다. 이와 같이 삼밀의 의례체계를 완전히 구비한 밀교를 중기밀교로 간주한다. 또한 중기밀교 시대에 이르면 다라니, 인계, 관법 등의 세 가지 요소가 점차 유기적인 관계를 갖게 된다. 行딴뜨라인 『대일경』과 요가 딴뜨라인 『금강정경』은 대승 불교사상을 관법 속에 도입하고 儀軌化한 중기밀교의 대표적인 경전이라 할 수 있다.

 

양자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초기밀교 경전과는 구별된다. 먼저 설법의 주체가 석가모니불에서 비로자나불로 변화하고, 수행의 목적에 있어서도 현세 이득적인 것에 대한 성취보다는 成佛이 보다 궁극적인 목표로 강조된다. 그리고 관법에서도 身, 口, 意 三密의 융합이 강조되고, 대승불교에서 신앙되어 왔던 佛, 菩薩 등의 諸尊들이 중기밀교의 만다라에 편입되고 조직화 되는 특징을 보인다. 밀교에서 圖像으로 표현된 만다라는 깨달음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만다라는 경전에서 설해지는 敎義를 담고 있으며, 해당하는 流派에 따라 달라진다.

 

『대일경』과 『금강정경』은 시기적으로 중기밀교에 속하고 주존 역시 大日如來란 점에서 연장선상에 있지만, 다음과 같은 면에서 서로 구별된다. 즉 『대일경』의 대일여래는 ‘胎藏大日’ 혹은 ‘現等覺大日(abhisaṃbodhivairocana)’로 불리고,『금 강정경』의 대일여래는 ‘금강계대일(vajradhātu vairocana)’로 불림으로써 그 명칭에 있어서 차이를 둔다. 또한 도상학적인 면에서도 『대일경』의 대일여래는 禪定印으로 표현되지만, 『금강정경』의 대일여래는 智拳印을 하고 대일의 4방을 둘러싼 아축여래 등과 함께 금강계 5불로서 하나의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처럼 『대일경』과 『금강정경』은 명칭과 도상학적인 면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이후 발달되는 후기밀교의 만다라와 관법형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후 발전된 후기밀교 경전은 중기밀교 경전에서 설해지는 사상과 실천들을 근저로 하면서도 다양한 유파에 따른 수행법들을 포함하게 된다. 또한 이때는 밀교가 힌두교와의 경쟁적인 관계 속에서 상호간의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써 후기밀교 경전에 이교적인 특징이 강해지는 시기이다.

 

이와 같이 밀교경전은 초기, 중기, 후기의 三期에 의해 사상적인 면에서나 실천수행에 있어서 하나의 연계선상 속에 있으면서도 그 특징을 달리한다.

 

티벳의 경전 분류법에 따르면『헤와즈라 딴드라(Hevajra tantra)』(以下 HT로 약칭)는 후기밀교 무상요가 母딴뜨라의 대표적인 경전이다. HT는 廣本과 略本이 있고, 약본의 제1의궤는 11품으로 이루어지고, 제2궤는 12품으로 구성된다. 이 중 만다라와 관상에 관련된 품은 제1의궤 3품, 8품 그리고 제2의궤 5품이 해당된다.

 

제1의궤 3품 「sarvatathāgatakāyavākcittahevajradevatāpatala」은 ‘Hevajra 만다라’와 8요기니의 출생을 설하는 장이다. 2품에는 HT의 만다라 觀想에서 生起次第에 해당하는 3삼매의 단계인 최초요가삼매(ādiyogasamādhi), 만다라왕삼매(maņḑalarājagrīsamādhi), 갈마왕삼매(karmarājāgrīsamāhi)의 관상체계가 설해진다.

 

제1의궤 8품 「Yoginīcakro nāma mahāyoginḑnāṃ melāpakapaṭala」은 明妃인 나이라뜨미야(Nairātmyā)를 중심으로 한 ‘Nairātmyā 만다라’와 15요기니의 출생과 관련된 장이다. 제1의궤 3품이 생기차제에 입각하여 관상의 차제를 설하고 있다면 , 제1의궤 8품은 생기차제와 더불어 구경차제에 기반을 둔 관상의 차제를 설한다. 특히 8품의 ‘Nairātmyā 만다라’ 관상은 3품의 생기차제 단계에서 설명되지 않는 ‘토대만다라 관상’의 방법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Hevajra 만다라’ 관상보다 보다 발전된 형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2의궤 5품 「Hevajrābhyudayapaṭala」는 8面 16臂 4足의 모습을 한 헤와즈라와 나이라뜨미야와의 성적인 요가에 의해 15 요기니가 출생하는 구경차제가 설해지고 만뜨라, 호마관련 의례, 관정 등의 의례가 혼재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HT는 시기적으로 후기밀교에 속하며, 이것은 중기밀교 이후의 발전된 형태라는 점에서 중기밀교 텍스트와의 관계 속에서 논해야 한다. 특히 만다라는 경전에서 설해지는 敎義와 수행의 목표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 각각의 형태와 觀想의 대상은 달라진다.

 

만다라는 무엇을 중심으로 표현했는가에 따라서 尊像만다라, 三昧耶만다라, 種字만다라로 구분된다. 존상만다라라는 붓다의 구체적인 모습을 표현한 것이며삼매야만다라는 붓다를 상징하는 蓮花나 金剛杵 등으로 나타내고, 종자만다라는 붓다의 정수를 담고 있는 種字로 표현한 것이다. 밀교의 수행자들은 바로 이 만다라를 수행의 도구로 삼아 그 속에 표현된 佛 ·菩薩 ·明王들을 하여 三昧에 들고 그 상태에서 불보살과 일체가 되려는 觀法을 행하는데이것을 觀想수행이라고 한다.

 

먼저 중기밀교 경전에는 五字嚴身觀, 五相成身觀, 月輪觀 등의 관법수행이 설해진다. 이들 관법수행의 과정은 붓다(佛)나 붓다의 智慧를 상징하는 것들을 수행자 자신과 일치시킴으로써 붓다가 나에게 들어오고 내가 붓다가 되는 ‘入我我入’의 관법이 그 형태이다.

 

밀교경전은 중생의 三有(身業. 口業. 意業)와 佛의 三密(身密. 口密. 意密)과의 유가를 통한 깨달음의 체득법이 강조되었다. 밀교의 수행자는 本尊의 앞에 앉아서 입(口)으로는 眞言(mantra)을 외우고, 손(手)으로는 印契(mṹdra)를 맺고, 마음(心)을 한 점에 집중시켜서(samādhi) 본존을 觀想한다. 이를 중생의 三業과 붓다의 三密이 일체가 된 瑜伽行이라고 하며, 이를 통해서 수행자와 본존은 하나가 되어 서로 융합하게 된다. 이로써 수행자는 육신을 가진 채로 현세에서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는데, 밀교에서는 이를 卽身成佛이라 한다.

 

대승불교에서 깨달음은 보살로서 誓願을 세우고 무수한 세월 동안 菩薩道를 닦은 후에야 가능했다. 그러나 요가 딴뜨라인『금강정경』에서는 수행자가 법신인 대일여래와 즉시에 합일함으로써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처럼『금강정경』의 요가수행은 삼밀수행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구밀에 의한 붓다와의 相卽觀을 강조한다. 이와 같이 밀교의 실천 수행법은 身·口·意 三密의 加持를 통한 成佛을 목표로 한다. 觀想의 대상으로서의 붓다는 이미 대승경전에서도 나타나며, 그 대상은 구체적인 모습을 한 불상이나 붓다의 32相이 된다. 수행자는 그것을 정수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하는데 이것을 順觀이라 하며, 발바닥에서부터 점차 머리로 관해 가는 것을 역관이라고 한다. 붓다의 32상은 완전한 깨달음을 구현한 정각자의 상서로운 특징이기 때문에 수행자들은 이것을 觀함으로써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때까지 관상의 대상은 자비로운 모습의 부처나 보살이었다그러나 불교 딴뜨라 문헌에서는 그와 같은 깨달음의 경지를 만다라로 표현하고이 만다라를 관상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관상의 대상이 만다라일지라도 딴뜨라 문헌의 유파나 계통에 따라 만다라의 구성은 다르고, 관상의 대상 역시 다양하다. 만다라의 주존은 경전이 내세우는 사상과 교리적인 측면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 주존의 변화는 주목된다. 이런 석가모니불에서 다양한 존격들로 바뀌게 된다.

 

중기밀교 경전인 『대일경』과 『금강정경』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붓다는 비로자나불로 바뀐다. 따라서 두 경전에서 주된 관상의 대상은 비로자나불이 된다. 후기밀교에 속하는 무상요가 딴뜨라 경전에서는 비로자나(vairocana)를 대신해서 忿怒尊의 모습을 한 阿閦(Akʂobhya)이 중앙의 자리를 점하게 된다.

 

딴뜨라 문헌은 儀軌書라고 할 만큼 성취(sādhana)법과 관련하여 만다라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佛· 菩薩들의 외형, 색깔, 해당하는 종자음절, 상징하는 지물 등에 대해 자세히 기술한다. 관상을 행하는 요가 수행자들은 소속된 유파에서 전해져 오는 의궤서에 따라 정확히 불·보살들을 觀하고 修習함으로써 완전한 도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요가 수행자는 만다라에 표현된 尊格의 외적인 모습, 색깔, 가지고 있는 지물 등을 마음속에서 자세히 觀하여 그 대상에 의식을 집중하고 想을 일으키는 것을 반복하게 된다. 이 과정이 숙련되면 자신이 선택한 尊格과의 합일이 자유자재로 가능해지고 마침내 동일성을 체득하게 된다.

 

이러한 관상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대상은 智薩埵(jńānasattva)와 三昧耶薩埵(samayasattva)이다. 삼매야살타란 관상법의 실천자가 미리 관상의 대상으로서 선택하고 마음속에 떠올린 이미지이다. 그리고 지살타란 삼매야살타와 유사한 이미지를 가지지만 수행자의 외부로부터 그를 방문한다고 생각되는 실재이다. 즉 관상의 대상이 되는 붓다나 신격 그 자체의 原型을 말한다.

 

무상요가 딴뜨라 경전은 중기밀교의 요가 딴뜨라에서 설해진 관법의 요소를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관상체계를 구축해 나아간다. 이것은 生起次第(utpattikrama)와 究竟次第(niʂpattikrama)로 구분된다.

 

生起次第란 붓다의 지혜를 상징하는 月輪, 金剛杵 , 蓮花, 種子音節 등을 관해서 절대적 존대를 현실세계로 이끌어 내는 과정이다. 究竟次第란 요가수행자 스스로가 절대적 존재의 상태를 체현하는 과정이다. HT에서 구경차제는 4歡喜를 단계적으로 체득해 나가는 과정이다. 4歡喜란 歡喜, 最上歡喜, 離歡喜, 俱生歡喜를 말한다.

 

HT에서 관상의 대상은 수행자의 측면에서 보면 자신이 선택한 존격으로서 헤와즈라와 나이라뜨미야이다. 수행자가 선택한 헤와즈라와 나이라뜨미야는 마음속에서 떠올리는 이미지로서 삼매야살타에 해당된다. 바로 이 삼매야살타와 관상에 의지하지 않고도 존재하는 지살타가 관상의 과정에서 나타나게 되는 대상인 것이다. 따라서 수행자는 제존을 生起하는 生起次第에 의해서 삼매야살타를 觀하고 마음속에 그 想을 일으켜 그 대상과 합일한다. 그리고 究竟次第의 단계에서 수행자는 실재하는 지살타와의 합일에 의해 본존과의 동체를 이루게 된다.

 

이상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진푸티의 관상법은 중기밀교의 경전에 나타난 삼매야만다라와 후기밀교의 경전인 HT 제1의궤 8품에 나타난 생기차제와 더불어 구경차제에 기반한 觀想의 차제를 종합 분석에 추가하여 대승의 보살사상을 강조 회통하여 진푸티적인 독특한 구상과 방식이 적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2.관상법의 眞髓로서 무량대광명 수지법

 

1)무량대광명 수지법의 내용

 

불가 무량대광명수지법은 진푸티상사의 관상법의 眞髓이다. 이 수행법은 보리(菩提)를 體現(embodiment)하여 ‘卽身成佛’의 경지를 體得해 涅槃의 삶을 享有하게 하는 법이다. 이 수행법은 약사부처님 마음속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청정한 불법이다. 이 법은 이 시대에 큰 깨달음을 얻으신 진푸티상사께서 수행하여 득도하신 내용의 정수이다. 이 법은 수행자들로 하여금 빠르게 약사부처님과 상응하고, 약사부처님의 강한 영적 가피를 얻으며, 빠른 속도로 몸을 유리처럼 맑고 청정하게 해탈시켜 준다. 또한 건강과 즐거움을 얻고, 몸과 마음의 질병을 소멸시켜주고, 여러 생에 걸쳐 지은 업장을 제거해주며, 자비와 지혜를 얻도록 해주는 금생의 최고로 높은 경계의 깨달음을 얻게 해주는 특별히 뛰어난 밀법이다.

 

이 수행법은 불법을 세간 법에 융합시켜 여러 가지 수행법의 장점들을 잘 운용하여 만들어진 몸과 마음을 정화시키는 일종의 수련방법이다. 이 법의 특성은 현재의 환경, 중생의 실수요를 충분히 고려하여, 오늘의 세대에 적합하고 합리적인 불교수행의 정수를 흡수하여 복잡한 것을 간단하게 하여 수행자가 쉽게 익혀 가장 빠르게 이익을 체득케 하는 수행법이다.

 

불가 무량대광명 수지법을 통해서 體得하는 약사불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도록 하자. 이 부처님은 자세히는 藥師琉璃光如來 또는 大醫王佛. 동방 정류리세계의 교주. 이부처님은 과거에 12대원을 발하여 이 세계 중생의 질병을 치료, 수명을 연장, 災禍를 소멸, 의복 음식 등을 만족케 하고 또 부처의 행을 닦아 無上菩提의 묘과를 증득하게 한다고 서원. 형상은 큰 연화 위에 약병을 들고 오른 손으로 施無畏印을 맺었으며, 또는 오른손을 들고 왼손을 내리는 등의 여러 가지가 있다.

 

서력기원 1세기에 대승불교는 佛陀觀에 있어서 큰 변화를 초래했다. 보살이라는 개념이 一般化되었듯이 불타의 개념도 일반화되어 十方三世에 수없이 많은 불타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소승불교에서는 불타라 하면 무엇보다도 역사적인 석가모니불을 의미했다. 물론 소승불교에서도 과거 七佛 혹은 25佛, 또 미래불인 미륵불(Maitreya Buddha)의 관념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대승에서처럼 佛의 개념이 일반화되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소승에서는 과거의 佛들은 모두 涅槃에 들어가서 生死의 세계와는 아무런 관련을 갖지 않는 존재들로 이해되는 반면에, 대승에서는 諸佛은 宇宙의 各方에서 보살들과 함께 淨土를 이루며 거기서 살아 활동하고 있는 존재들로 간주된다. 대승불교의 사상가들은 이러한 佛陀觀의 변화를 밑받침하기 위하여 불타의 三身說(trikāya))을 전개했다.

 

卽 佛陀에는 3가지 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첫째는 化身 혹은 應身(nirmāņkāya)으로서 중생의 교화를 위해 지상에 태어난 역사적인 불타를 의미한다. 둘째는 報身(saṃbhogakāya)으로서 보살이 願을 發한 후 오랜 수행을 하여 그 결과로서 얻은 초자연적인 몸을 말한다. 예를 들면, 阿彌陀佛은 법장비구가 여러 생을 수행하여 48대원을 성취해 스스로 극락정토를 만들어 중생을 교화하고, 약사여래는 과거세에 藥王이라는 보살로 수행하여 중생들의 아픔과 슬픔을 위로하고 해결하기 위해 12가지 願을 세운 공덕으로 부처님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실천 수행을 통해 부처님의 성품으로 나타내는 것을 보신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원력을 세워 실천수행하면 그 순간 우리는 원만보신이신 부처님을 친견하게 된다. 셋째는 法身(dharmakāya)으로서 어떤 보이는 形態도 초월하며 모든 佛의 근거가 되는 眞如의 깨달음 그 自體를 뜻한다.

 

그러면 藥師佛의 12大願을 알아보자.

 

첫 번째, 내가 내세에 아뇩다라샴막삼보리를 얻을 때, 스스로 몸을 불태워 무량무수무변의 세계를 비추게 해주십시오. 32개의 大丈夫相과 80개의 隨形으로 그 몸을 장엄하게 하여 모든 有情이 나와 다름이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내가 내세에 보리를 얻을 때, 몸이 유리처럼 안팎이 투명하고 티끌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하여 광대한 광명함과 크고 높은 공덕으로 몸이 편안한 데 머물고 불꽃의 그물이 장엄하여 해와 달보다 더 밝으니, 이로써 암흑 속의 중생을 깨우쳐 뜻하는 대로 나아가 여러 사업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내가 내세에 보리를 얻을 때, 무량무변의 지혜 방편으로 여러 유정이 끝없이 물건들을 쓸 수 있도록 함으로써 중생에게 결핍이 없기를 바랍니다.

 

네 번째, 내가 내세에 보리를 얻을 때, 유정 가운데 사악한 길을 걷는 자가 있다면 보리의 도 안에서 편히 안주하게 하고, 성문과 독각의 길을 가는 자가 있다면 大乘 안에 편안하게 머물기를 바랍니다.

 

다섯 번째, 내가 내세에 보리를 얻을 때, 무량무변의 유정이 있다면 나의 불법 속에서 범행을 수행하여 모든 계율을 얻어 三聚戒를 갖추게 하고, 설사 훼손하여 계율을 범하더라도 나의 이름을 듣고 나면 청정함을 얻어 악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섯 번째, 내가 내세에 보리를 얻을 때, 여러 유정이 그의 몸 아래가 열악하고 뿌리를 갖추고 있지 않거나, 추악하고 완고하고 어리석으며, 눈멀고 귀먹고 벙어리이며, 발을 떨고 곱사등이고, 백치이고 미쳤으며 여러 병을 앓고 있더라도, 나의 이름을 듣고 나면 모두 단정하고 지혜로워지며 여러 뿌리가 완전히 갖춰져서 질병과 고통이 없기를 바랍니다.

 

일곱 번째, 내가 내세에 보리를 얻을 때, 여러 유정이 질병으로 고통 받아 구원받고 돌아갈 곳이 없으며, 치료해 줄 약과 의사가 없고, 부모와 집도 없으며, 가난하고 고통이 많다면, 나의 이름이 그의 귀를 스치고 지나가기만 해도 병이 사라지고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며 가족이 생기고 모든 것이 풍족해져서 무상보리를 증득하기 바랍니다.

 

여덟 번째, 내가 내세에 보리를 얻을 때, 여인으로 태어나 백 가지 악함에 핍박받아 역겹도록 싫고 벗어나고 싶어 여자의 몸을 버리기를 원한다면, 나의 이름을 듣고 나면 모든 여자가 남자로 변하여 사내대장부 相을 갖추고 무상보리를 증득하기 바랍니다.

 

아홉 번째, 내가 내세에 보리를 얻을 때, 모든 유정이 마귀의 올가미에서 벗어나 모든 외도의 속박을 떨치게 하고, 갖가지 악한 것에 떨어지더라도 모두 인도를 받아 정견을 갖고 점차 보살행을 닦아 무상정등보리를 증득하기 바랍니다.

 

열 번째, 내가 내세에 보리를 얻을 때, 여러 유정이 왕법에 기록되어 포승줄에 묶이고 채찍을 맞으며 감옥에 갇히거나 형벌을 받아 죽임을 당하거나 끝없는 재난을 만나 슬픔과 근심 속에 몸과 마음이 고통을 받더라도 나의 이름을 들으면 복덕과 위신력 때문에 모든 근심과 고생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열한 번째, 내가 내세에 보리를 얻을 때, 여러 유정이 굶주림과 갈증에 시달리며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악업을 지었더라도 나의 이름을 듣고 온 마음으로 지킨다면 내가 먼저 음식을 올려 그 몸을 배부르게 한 뒤에 불법의 맛으로 편안하고 즐거움을 세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열두 번째, 내가 내세에 보리를 얻을 때, 여러 유정이 가난하여 의복이 없고 모기와 등에 시달리고 춥거나 더워서 괴로움을 당해도 나의 이름을 듣고 온 마음으로 지킨다면 그가 좋아하는 여러 가지 의복을 얻고 보배로운 장엄구를 얻으며, 화려한 비녀와 향으로 치장하고 북치고 곡을 연주하는 여러 재주꾼이 원하는 대로 놀게 되어 모두가 만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무량대광명 수지법의 자세

 

이 수행은 외적인 동작과 생각으로 하는 觀想이 결합되어 있다. 먼저 ‘대광명’의 어의에 대하여 알아본다.

우리가 수련을 통해 체득하고자 하는 것은 ‘몸의 광명(身光明)’과 ‘마음의 광명(心光明)이다. 전자는 형체적인 것이고, 후자는 의식적인 것이다. 형체적인 것은 우리의 신체를 말한다. 天眼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병자들의 몸이 불투명하거나 거무튀튀하게 보인다. 반면에 건강한 사람들은 마치 투명한 유리처럼 온 몸이 깨끗하고 맑아 티끌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대광명 수지법’에서 광명한 신체를 수련한다는 것은 먼저 건강한 신체를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 불결하고 얼룩덜룩한 몸을 투명하고 순백한 몸으로 바꾸는 것이다. 수련을 통해 몸을 순결하고 광명한 상태로 만들면 쉽게 병에 걸리지 않는다. 건강한 사람은 면역력이 강해서 쉽게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 다이아몬드는 탄소의 단일 결정체로 이루어져서 매우 단단하고 투명하다. 사람의 몸도 마찬가지 이치이다. 평소 욕심이나 잡념, 번뇌가 적은 사람일수록 몸이 건강하다. 날마다 근심 걱정에 휩싸인 사람은 쉽게 건강을 상하게 한다. 바꿔 말하면, 똑 같은 환경에서 비교했을 때 생각이 단순한 사람일수록 건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음의 광명’은 수행을 통해 올바르고 명확한 마음가짐으로 사물이나 사람을 전면적이고 투철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좀 더 깊게 들어가 보면 解剖法, 深入法 등이 있다. ‘대광명 수지법’을 수행한다는 것은 수련 방법과 觀想 방법에 따라 그 결과도 각기 다르다.

 

자, 그러면 구체적인 동작에 대해 알아보자.

 

대광명의 동작은 먼저 그 자리에 서서 양 다리를 어깨 넓이만큼 벌린 채 반듯하게 선다. 어깨 넓이만큼 벌리라는 뜻은 양 다리 사이로 발 하나가 들어갈 만큼 다리를 벌리면 된다. 보통 자신의 발 길이에 손바닥으로 두 뼘을 더한 길이가 어깨넓이와 같다. 반듯한 자세로 편하게 서면된다.

호흡에 대해서는,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숨을 들이쉬면 된다.

 

 

1)淸心印

 

반듯하게 선 채로 평온한 마음으로 온 몸에 힘을 뺀 채 앞을 바라본다. 수행을 할 때 수행 위치를 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앞을 바라봤을 때 맞은편에 생명을 상징하는 녹색의 식물 특히 나무가 있으면 가장 좋다. 이는 “나무와 함께 수행을 하면 나무도 자라고 나도 자란다”는 생각에서 기인한다. 무생명체를 바라보는 것은 좋지 않으며 나무든 혹은 다른 무엇이든 간에 일단 맞은편의 사물을 바라볼 때는 자연스럽고 평온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일반적으로 초록이 울창한 나무를 마주보고 수행을 할 경우 다양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몸과 마음이 상쾌하고 청정해지기를 바라며 평온한 마음으로 맞은편의 나무를 바라본다. “나는 나무이고, 나무가 바로 나다”라고 생각하면서, 나무를 바로 본다.“ 아무런 근심걱정도 없고, 무더위나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유롭고 즐거운 마음으로 서 있는 나무이다. 날마다 대지의 영양분을 흡수하고 대자연의 에너지를 흡수한다”고 상상한다. 이것이 첫 번째 방법이다.

 

첫 번째의 방법처럼 할 수 있는 사고력이나 상상력이 부족할 경우에는 두 번째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 그것은 체인으로 두 바퀴가 연결된 것처럼 나와 맞은편의 나무 사이에 에너지가 흐른다고 생각하면 된다. 내 몸의 에너지가 나무로 가고 , 나무의 에너지가 내 몸 속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한다. 마음 편하게 맞은편의 나무와 소통을 한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방법이다.

 

세 번째는 시력을 연마하는 것이다. 수행할 때 맞은 편에 서 있는 나무는 거리가 있기 때문에 좀 어슴푸레하게 보인다. 하지만 물끄러미 자세히 바라보면 처음과는 달리 명확하게 나무의 모습이 보인다. 그 다음엔 날마다 20 분씩 수련을 지속하다 보면 이젠 나뭇가지 하나하나가 자세히 보이기 시작한다. 나뭇잎의 형상과 나뭇잎의 잎맥조차도 선명하게 보인다. 나뭇잎에 달라붙은 벌레까지도 모두 볼 수 있게 된다. 수련할 때는 서둘러서는 안 된다. 평온한 마음으로 물끄러미 바라다보면 점차 선명하게 보이면서 시력이 향상된다. 수련을 끝낸 뒤 시선을 거두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맞은편의 나무를 응시한 뒤에는 시선을 거두고 눈을 감은 뒤 온 몸으로 전해오는 느낌을 체험해야 한다. 특히 아침에 태양이 막 솟아오를 때 수련을 하면 대단히 편안하고 황홀한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다. 이때 수련을 하면 시력이 향상될 뿐만 아니라 일종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여기서 서서 편안한 마음으로 맞은편의 사물을 지긋이 응시하는 이 동작을 우리는 청심인이라고 부른다.

 

2)甘露印

먼저 이곳에 서서 우리가 연꽃위에 서 있다고 관상한다. 연꽃은 커다란 꽃송이로 순결하고 투명한 맑음을 상징하는 꽃이다. 진실한 사람이 연꽃 위에 서 있다면 그 사람은 티끌 하나 없이 청정한 사람이다. 우리는 누구나 몸과 마음이 청정해지기를 바란다, 연꽃 그림을 방안에 붙여 놓고 연꽃의 모양을 수시로 쳐다보며 뇌리에 각인시키라. 그 다음에는 자신이 커다란 연꽃 위에 서 있다고 상상한다. 다음에는 허리를 굽히고 오른손을 펼친 채 관상한다. 연꽃의 꽃잎, 혹은 새파란 연 잎에 투명한 이슬이 송골송골 맺혀있는 모습을 관상한다. 이른 아침 우리는 연꽃 위에서 수많은 이슬이 맺혀있는 모습을 본다. 자, 다음에는 손으로 이슬방울을 집어본다. 중지와 엄지손가락으로 영롱한 이슬방울을 살짝 집어 올려 살며시 만지작 거려본다. 손의 위치는 배꼽보다 살짝 위가 좋다. 또한 손을 배나 옷에 갖다 붙이지 말고 옷에 닿지 않을 만큼만 거리를 둔다. 손바닥은 위로 향하고 엄지와 중지는 이슬방울을 집는 듯이 이렇게 하되 몸의 정 중앙에 위치하도록 한다.

 

3)拈花印

다음은 허리를 굽혀서 왼손을 뻗어 꽃을 따는 동작이다. 엄지와 검지, 중지를 함께 사용하되 손바닥이 바로 앞 정면을 바로 보도록 해야 한다. 손의 위치는 옆에서 봤을 때 손등이 코와 근접해 있어야 한다. 실제적으로는 어깨 가까이 위치하는 것이 옳은데, 맞은편에서 봤을 때 손이 왼쪽 어깨 가까이 위치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관상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몸은 하늘과 공기와 일체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몸이 지금껏 본 빌딩 중에서 가장 높은 빌딩보다 두 배가 크다고 상상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 상상력도 더불어 무한대로 커진다. 더불어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청정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하는 방법은 모두가 불교의 전통적인 手印에서 유래된 것이다.

 

4)無量印

기본의 수인 동작에서 두 팔을 양쪽으로 천천히 펼치며 두 손은 위를 향한다. 단순한 동작이나 관상은 대단히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팔을 천천히 펼치며 ‘정(靜)’의 방식을 이용한다. 하늘 위에 서서 오른 손으로는 달을 만지고, 왼손으로는 태양을 만진다고 상상한다. 지구를 넘어, 하늘, 우주까지 상상의 범위를 넓일 수록 이롭고, 이 때 우주 공간의 에너지를 그물로 물고기를 잡듯 흡입한다고 생각한다. 우주의 에너지는 빛으로 형상화하여 상상하고, 이를 끌어 모으는 생각을 하면서 관상한다면 큰 효과를 얻는다. 이 때 우주의 에너지가 구체적인 색깔을 떠올리고 몸으로 들어온다고 느낀다. ‘상상’이란 어떤 면에서 허구이고 허상이고 환상이지만 이를 통해 수행자는 실제로 존재하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5)通天印

두 손을 머리 위로 뻗을 때는 서둘러서 팔을 뻗지 말아야 한다. 햇살이 내리쬐면 온 몸을 투과하는 느낌이 들듯이 우주의 에너지도 하늘에서 에너지가 쏟아져 내려와 머리 위를 통해 온 몸으로 퍼져 들어온다. 사람은 온 몸에 에너지가 골고루 흘러야 건강하다. 에너지의 흐름이 막히면 병이 들거나 죽기 십상이기 때문이 이 수행법으로 많은 에너지를 쉽게 흡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넓은 마음가짐과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갖는다면 훨씬 많은 에너지를 흡입할 수 있다.

 

6) 圓通印

통천인이 끝나면 손을 자연스럽게 내리고 손바닥이 평행으로 서로 마주본 채 합장을 하며 복부까지 내려온다. 다음 원을 그리며 문지르는데, 먼저 시계 반대방향으로 한다. 손동작을 하는 동시에 관상을 해야 효과를 얻는다. 아무 생각을 하지 말고 무아지경의 상태로 들어간다. 하늘과 우주공간이 상태로 진입했을 때는 동작의 순서나 규칙에 얽매이지 말고 완전히 몰입해야 효과가 크다. 무아지경에 빠져 있는 동안에 손을 시계바늘 방향으로 문지르라는 소리가 들리면 그대로 따른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배를 문지르라는 구령소리가 들리면 두 손으로 천천히 복부에 원을 그린다. 이 때 두 손을 포개고 복부를 문지르면 좀 더 큰 원이 만들어진다. 절대로 속도를 내지 말고 비행기가 착륙하기 전에 천천히 공중을 선회하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원을 그린다.

 

7) 眞火印

원통인이 끝난 뒤에서는 손을 복부에 올려놓고 불이 뱃속에서 훨훨 타오른다고 상상한다.

 

8) 靈力拍打와 안마

진화인이 끝난 다음에는 영력박타이다. 영력이란 일종의 창의적 에너지로서 어디서 발원되는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단지 ‘하늘’ 혹은 자연계에서 발원되는 일종의 에너지라고 설명할 수 있다. 영감이 주는 에너지를 박타, 즉 두드리는 행위로 이해하면 된다. 영력박타는 몸에 병이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 환부를 두드리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두드리는 행위이다. 머리가 아프거나 불면증에 시달리지도 않는데 이유 없이 머리를 두드리고 싶을 때가 있다. 이 때 두드리는 힘의 정도나 방법, 시간은 머릿속으로 사고하여 판단하지 말고 당신의 느낌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이 좋다. 영감 상태에서 박타할 때는 절대로 자신의 몸에 위해를 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영력안마도 사고력을 거치지 않은 일종의 영적인 감각에서 비롯되는데 안마할 때는 머리에서 발까지 차례로 안마를 하지만 영력안마는 다르다. 영감을 키워서 이를 이용하여 안마를 한다면 스스로의 건강을 지킬 수 있다.

 

9) 호흡 배출

영력박타나 안마를 끝낸 뒤에는 호흡 배출을 한다. 우리 몸속의 좋은 에너지와 나쁜 에너지를 각기 다른 색깔로 표현한다. 몸속의 회색 에너지는 최대한 남김없이 배출해 밖으로 보내고 이 때 호흡을 최대한 천천히 하는 것이 좋다. 또한 몸에 좋은 약을 주사기로 주입하듯 숨을 들이쉰다.

 

10) ‘하’ 기합

호흡이 끝났으면 다음에는 ‘하!’하고 기합을 내뱉는다. 전체 수행과정에서 우리는 다양한 에너지를 흡입하게 된다. 에너지를 방출할 때 자연적으로 배출하게 하는 것보다는 인위적으로 방출하는 것이 훨씬 효과가 좋다. 폐와 기관지, 위장 등에 있는 일부 기체성 에너지를 방출하지 않으면 우리 몸 각 기관의 소통을 막거나 기타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으니 반드시 방출해야 한다. 이를 ‘하’라는 기합소리와 함께 방출한다고 관상한다. 아랫배를 살짝 잡아당기면서 ‘하’하고 짧게 기합을 내뱉는데 기합 소리를 약간 길게 내뱉는 것은 몸 안의 에너지를 완전히 방출하기 위해서이다. 즉, 소리와 기(氣)를 함께 내뱉으면서 불필요한 기체 에너지를 방출한다면 몸이 편해지고 마음이 후련해진다. 최대한 기합소리를 크고 길게 내뱉을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한다. 두 손을 포개서 아랫배를 살짝 누르면서 기합소리를 내뱉는다면 훨씬 좋은 효과를 얻게 된다.

 

11) 阿彌陀印

다음은 합장을 하고 ‘아미터, 아미터’하고 주문을 읊조린다. ‘아-미-터’하고 발음할 때 그 음의 위치는 전체 척추의 최하단에 있는 꼬리뼈 아랫부분이다. ‘아-미-터’를 발음할 때는 붉은 색 혹은 노랑색의 빛이 몸 전체를 뚫고 지나간다고 상상한다. 머리, 어깨 등을 뚫고 하늘 위로 솟구쳐 오른다고 상상하면 되며 이 부분을 단련하면 건강증진에 큰 도움이 된다. ‘사악한 기운’이 우리 일상생활 주변에 숨어있는데 우리 자신에게 극도로 나쁜 영향을 미칠 때에 이르러서야 이를 느낀다. 이럴 때는 ‘아미터’를 정신 집중해서 외우면 큰 효과를 얻는다. 머리카락이 쭈뼛거리고 등골이 서늘하던 공포감이 사라지고 마음이 평온해 진다. ‘아미터’의 광명이 어깨, 등, 정수리를 비추며 우주의 에너지가 우리의 몸을 투과하여 온 몸으로 흡입하게 된다. 대광명 수행법과 전체 보리 선수행은 모두가 관상을 토대로 수행한다. 광범위한 禪學에서 관상을 이용한 수행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몸과 마음의 대광명이라는 이로움을 가져다주었다.

 

12) 종결

마지막으로 ‘아미터’를 읊조린 뒤 연꽃에서 내려와 반 발자국만 앞으로 내딛었다고 상상한다. 왼발이던 오른발이던 상관이 없다. 반걸음만 앞으로 내딛으면 곧바로 정상으로 돌아온다. 연꽃에서 내려오면 수행을 도와준 하늘과 땅, 모든 신령들에게 감사를 드린다. 손을 합장한 손의 식지를 인중에 대고서는 존경과 감사를 표시한다. 다음에는 손과 얼굴을 주무르고, 다시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온몸을 가볍게 두드리며 가볍게 전신 운동을 한다.

 

 

13) 주의사항

① 편안한 옷을 입고, 시계와 안경, 액세서리를 모두 풀어 놓으며 몸과 마음을 느슨하게 한다.

② 가을, 겨울의 추울 때에는 옷을 따뜻하게 입어 수행할 때 찬 기운이 스며들지 않도록 주의한다.

③ 수행하기 편안하고, 조용하며 깨끗하고 아늑한 환경을 선택한다. 창문이 있다면 열어서 공기가 순환하도록 하고, 미리 환기시켜놓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떠한 외부 자극으로 선수행을 방해받지 않도록 한다.

④ 수련을 하던 중 갑자기 외부의 소리에 크게 놀랄 경우, 수행을 잠시 멈추고 손을 비비고 몸을 두드린 후 소리의 원인을 찾고 안정을 찾은 후 다시 수련에 임하면 된다.

⑤ 수련에 임하고 있는 사람을 부르거나 건드려 놀라게 하지 않습니다.

⑥ 천둥이나 번개가 치는 등 나쁜 날씨에는 수련하지 않고 아침 안개가 짙으면 실외에서 수련하지 않습니다.

⑦ 너무 슬프거나 기쁘거나 아주 화가 난 상태처럼 정서가 안정되지 않았을 때 억지로 수련하지 않는다. 마음이 평정한 상태가 될 때를 기다려서 수련을 시작한다.

⑧ 너무 배가 부르거나 고플 때 수련하지 않는다. 식후 30분에서 한 시간 경과 후 수련한다.

⑨ 여성인 경우, 임신 중이나 출산 후에라도 평소처럼 수련할 수 있지만 자신의 몸 상태를 파악해서 스스로 조절합니다.

 

 

3.관상법의 공덕

 

1) 현세이익의 공덕

 

우리 인간이 생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생계유지(生計維持)다. 경제적 독립이 없는 곳에 정신적 독립이 없다. 경제적 독립이 될 때에 사회적 독립, 정신적 독립, 인격적 독립, 양심적 독립이 가능하다. 그래서 부(富)란 행복한 삶의 조건이 되는 물질적인 풍요를 의미한다. 우리가 『법화경』을 수지독송 사경하면 불안(佛眼)이 열려 인생의 이치와 일에 막힘이 없어 저절로 부(artha)를 성취한다는 가르침이 「보현보살권발품」에 다음과 같이 교시되어 있다.

 

만일 후세상에서 이 법화경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우는 사람이 있으면, 이 사람은 의복·침구·음식 등의 생활하는 물품을 탐내지 않아도 그 소원이 모두 이루어지며 또한 현세에서 그 복의 과보를 받으리라.

 

우리가 『법화경』을 지극정성 일심으로 받아듣고 깊은 뜻을 잘 해석하고 설한대로 수행하면 받는 복이 한량없다고 「수희공덕품」에서 예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진푸티의 관상법인 불가 무량대광명명 수지법을 무아의 일념으로 수행하면 마음속의 약사불이 감응하여 우리에게 경제적인 富를 성취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 약사불 12대원의 세 번째와 열한 번째 그리고 열두 번째에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내가 내세에 보리를 얻을 때, 무량무변의 지혜 방편으로 여러 유정이 끝없이 물건들을 쓸 수 있도록 함으로써 중생에게 결핍이 없기를 바랍니다.

 

열한 번째, 내가 내세에 보리를 얻을 때, 여러 유정이 굶주림과 갈증에 시달리며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악업을 지었더라도 나의 이름을 듣고 온 마음으로 지킨다면 내가 먼저 음식을 올려 그 몸을 배부르게 한 뒤에 불법의 맛으로 편안하고 즐거움을 세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열두 번째, 내가 내세에 보리를 얻을 때, 여러 유정이 가난하여 의복이 없고 모기와 등에에 시달리고 춥거나 더워서 괴로움을 당해도 나의 이름을 듣고 온 마음으로 지킨다면 그가 좋아하는 여러 가지 의복을 얻고 보배로운 장엄구를 얻으며, 화려한 비녀와 향으로 치장하고 북치고 곡을 연주하는 여러 재주꾼이 원하는 대로 놀게 되어 모두가 만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의무와 사회인으로서의 의무를 잘 이행하려면 심신이 건강해야 한다. 우리는 심신이 건강해야만, 아버지의 구실, 아들 구실, 남편 구실, 직장인 구실, 친구 구실, 사회인 구실을 할 수가 있다. 원기발랄(元氣潑剌)하고 생기약동(生氣躍動)해야만 인간은 살아가는 것이 기쁘고 일하는 것이 즐겁고 사람을 대하는 것이 반갑다. 몸과 마음이 약하면 모든 것이 귀찮다. 사는 것도 귀찮고 일하는 것도 지겹고, 사람을 대하는 것도 기쁘지가 않다. 그래서 건강은 인생의 대본이다. 건강은 인생의 주춧돌이요, 기둥이다. 인간 세상에 건강만큼 중요한 가치를 가지는 것이 없다. 인생의 관리 중에서 건강관리가 제일 중요하다. 건강을 해치는 것은 병(病)이다.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에는 『법화경』을 수지 독송사경하면 병이 소멸되고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정신적인 건강을 얻는다고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와 같이 『법화경』은 중생들의 일체 고통과 일체 질병을 여의게 하며 능히 일체 생사 속박에서 해탈케 하느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약왕보살본사품’을 듣고 능히 따라 기뻐하고 거룩하다고 찬탄하면 이 사람은 현세에서 항상 입으로부터 푸른 연꽃의 향기가 나고, 몸의 아홉 구멍에서는 우두전단의 향기가 항상 나며, 그가 얻은 공덕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으리라."라는 신앙의 영험을 설하고 있다. 이런 내용은 『천수경』의 ‘수지신시광명당(受持身是光明幢)’이라는 句節을 연상케 한다. 우리는 건강의 토대 위에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고, 행복한 인생을 창조할 수 있다. 인생성취 기념탑을 쌓을 수 있도록 사경을 통하여 건강하자.

 

우리가 진푸티의 관상법인 불가 무량대광명명 수지법을 무아의 일념으로 수행하면 마음속의 약사불이 감응하여 우리에게 병이 사라지고 몸과 마음이 안락해 진다는 가르침이 약사불 12대원의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에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여섯 번째, 내가 내세에 보리를 얻을 때, 여러 유정이 그의 몸 아래가 열악하고 뿌리를 갖추고 있지 않거나, 추악하고 완고하고 어리석으며, 눈멀고 귀먹고 벙어리이며, 발을 떨고 곱사등이고, 백치이고 미쳤으며 여러 병을 앓고 있더라도, 나의 이름을 듣고 나면 모두 단정하고 지혜로워지며 여러 뿌리가 완전히 갖춰져서 질병과 고통이 없기를 바랍니다.

 

일곱 번째, 내가 내세에 보리를 얻을 때, 여러 유정이 질병으로 고통받아 구원받고 돌아갈 곳이 없으며, 치료해줄 약과 의사가 없고, 부모와 집도 없으며, 가난하고 고통이 많다면, 나의 이름이 그의 귀를 스치고 지나가기만 해도 병이 사라지고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며 가족이 생기고 모든 것이 풍족해져서 무상보리를 증득하기 바랍니다.

 

우리가 뜻을 세우고 힘을 기르는 목적은 보람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다. 뜻과 힘의 목표가 일에 있다. 일은 나무의 열매와 같다. 나무가 잎이 나고 꽃이 피는 목적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다. 뜻이 뜻만으로서 머무르고 힘이 힘만으로서 머무른다면, 뜻과 힘에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겠는가. 뜻을 세우는 것도 힘을 기르는 것도 모두 다 개인의 발전과 사회의 공동선을 위하여 일하기 위해서다. 나무는 그 열매에 의해서 가치가 판단되듯이 사람은 그 행동에 의해서 가치가 결정된다. 우리는 일을 하는데 무장무애를 발원한다. 공동선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피가 있어야 한다. 『법화경』의 「다라니품」에는 법화경을 수지・독송하는 자를 보호한다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도 『법화경』을 읽고 외우고 받아 지니는 사람을 위하여 옹호하여 그의 재앙과 걱정근심과 어려움을 없게 하오리다. 만일 어떤 이가 이 법사의 허물을 찾아내려 하여도 그로 하여금 찾아내지 못하게 하겠나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진푸티의 관상법인 불가 무량대광명명 수지법을 무아의 일념으로 수행하면 마음속의 약사불이 감응하여 우리가 주어진 일을 원만하게 성취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 약사불 12대원의 다섯 번째에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다섯 번째, 내가 내세에 보리를 얻을 때, 무량무변의 유정이 있다면 나의 불법 속에서 범행을 수행하여 모든 계율을 얻어 三聚戒를 갖추게 하고, 설사 훼손하여 계율을 범하더라도 나의 이름을 듣고 나면 청정함을 얻어 악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  『법화경』의 「안락행품」에는 “법화경을 읽는 이는 근심 걱정 항상 없고 병과 고통 전혀 없어 얼굴빛이 아름답고 가난하고 천박하게 태어나지 아니하고 병과 고통 전혀 없어 얼굴 빛이 아름답고 가난하고 천박하게 태어나지 아니하고 중생들이 좋아하여 어진 성현 보듯 하며 하늘나라 동자들이 따라와서 시중들고 칼막대로 못 해치고 독약으로 못 죽이며 만일 누가 욕을 하면 욕한 입이 막히리니 두려움이 없기로는 사자왕과 같으며 그 지혜의 밝은 광명 태양처럼 비추리라”는 가르침으로 독송한 이는 일을 원만성취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법화경』에 나타난 현세이익적 공덕은 부·건강·일의 무장무애같은 내용의 가르침이 설해지고 있음이 인지된다.

 

우리가 진푸티의 관상법인 불가 무량대광명명 수지법을 무아의 일념으로 수행하면 마음속의 약사불이 감응하여 우리가 주어진 일을 원만하게 성취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 약사불 12대원의 다섯 번째에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다섯 번째, 내가 내세에 보리를 얻을 때, 무량무변의 유정이 있다면 나의 불법 속에서 범행을 수행하여 모든 계율을 얻어 三聚戒를 갖추게 하고, 설사 훼손하여 계율을 범하더라도 나의 이름을 듣고 나면 청정함을 얻어 악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2) 내세이익의 공덕

 

불교에서는 원래 죽음이 없다고 한다. 그것을 지눌은 이렇게 설명하였다. “생사(生死)란 본래 없는 것인데, 망령되이 있다고 헤아린다. 그것은 마치 눈병이 있는 사람이 허공에 어른거리는 것을 볼 때, ‘있다’고 하나 눈병이 다 나으면 허공의 꽃도 저절로 없어져 비로소 아무것도 없었던 것을 알게 되는 경우와 같다”고 한다.

 

생사란 본래 나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닌 것을 깨달은 경지에서는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眞諦). 그러나 중생이 생멸의 눈(俗諦)으로 탐진치를 여의지 못하고 임종에 이르게 되면 탐내고 성내고 어리석음의 업인이 각인되어 내세에서 지옥·아귀·축생의 과보를 피할 수 없게 되고 혹 인간세계에 태어난다 해도 생각이 천박하고 방종하여 고통을 면할 수 없다고 한다. 하지만 탐진치를 여의고 원력으로 사무쳐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사경 수행을 하면 도리천상에 태어난다는  『법화경』의 「보현보살권발품」 교설을 알아보자.

 

 

만일 법화경을 옮겨 쓰기만 하여도 그 사람의 공덕이 커서 목숨을 마친 뒤에는 마땅히 도리천(忉利天)에 태어나리니, 이때 팔만 사천의 천녀들이 여러 가지 기악을 연주하며 와서 맞이하오리다.

 

또  『법화경』의 「약왕보살품」에는 “만일 여래가 열반한 뒤 후 오백 년에 이르러 어떤 여인이 이  『법화경』을 듣고 그 설한 바와 같이 수행하면, 그 목숨을 다 마친 뒤에 극락세계의 아미타불을 큰 보살 대중들이 둘러싸고 설법 듣는 곳에 가서 연꽃 속에 있는 보배 자리에 태어나리라. 그리하여 다시는 탐욕의 괴로움을 받지 않으며, 다시는 성냄과 어리석음의 괴로움을 받지 않으며, 또한 교만하고 질투하는 여러 가지 적의를 품는 아픔과 고통을 받지 않으리라”고 설하고 있다. 생사가 본래 없으나 업인에 따라 변화하는 것을 직관하고 오온 번뇌 망상을 타파하도록 사경하여야 한다. 우리가 사경 수행하면 결단코 불도를 이루니, 삼독(三毒)이 변화하여 계(戒)·정(定)·혜(慧)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불가 무량대광명 수지법을 수행하면 약사불이 감응하여 우리가 주어진 인생을 마감한 후 내세에 좋은 과보를 받는다는 가르침이 약사불 12대원의 네 번째와 여덟 번째, 아홉 번째 그리고 열 번째에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네 번째, 내가 내세에 보리를 얻을 때, 유정 가운데 사악한 길을 걷는 자가 있다면 보리의 도 안에서 편히 안주하게 하고, 성문과 독각의 길을 가는 자가 있다면 大乘 안에 편안하게 머물기를 바랍니다.

 

여덟 번째, 내가 내세에 보리를 얻을 때, 여인으로 태어나 백 가지 악함에 핍박받아 역겹도록 싫고 벗어나고 싶어 여자의 몸을 버리기를 원한다면, 나의 이름을 듣고 나면 모든 여자가 남자로 변하여 사내대장부 相을 갖추고 무상보리를 증득하기 바랍니다.

 

아홉 번째, 내가 내세에 보리를 얻을 때, 모든 유정이 마귀의 올가미에서 벗어나 모든 외도의 속박을 떨치게 하고, 갖가지 악한 것에 떨어지더라도 모두 인도를 받아 정견을 갖고 점차 보살행을 닦아 무상정등보리를 증득하기 바랍니다.

 

열 번째, 내가 내세에 보리를 얻을 때, 여러 유정이 왕법에 기록되어 포승줄에 묶이고 채찍을 맞으며 감옥에 갇히거나 형벌을 받아 죽임을 당하거나 끝없는 재난을 만나 슬픔과 근심 속에 몸과 마음이 고통을 받더라도 나의 이름을 들으면 복덕과 위신력 때문에 모든 근심과 고생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3) 성불의 공덕

 

 『법화경』에는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을 중심으로 하는 본문이 있다고 말해진다. 「여래수량품」은 ‘개적현본(開迹顯本)’의 가르침이며, 석가불이 ‘구원실성(久遠實成)’의 불타임을 보임으로써 「방편품」에서 밝힌 불성상주(佛性常住)를 실증하고 있는 것이다. 80세로 입멸한 석가모니불은 중생을 불도(佛道)로 유인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음을 보이고, 상주하는 구원(久遠)의 본불(本佛)을 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본문의 중심 사상이 되는 것이다.

 

 『법화경』에는 아직 ‘불성’이라는 표현은 없지만, 그와 동일한 것이 “제법(諸法)의 본성은 항상 청정(prabhāsvara)하다”라고 표현되어 있다. ‘제법본성청정’이란 말은 『반야경』 등에 나오며, ‘심성본정(心性本淨)’과 같은 의미이다. 이 ‘심성본정설’이 ‘실유불성(悉有佛性)’이나 여래장설로 발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법화경』에서 말하는 ‘정법(正法)’이란, 교설로서는 ‘개삼현일(開三顯一)’의 ‘일불승(一佛乘)’의 가르침이지만, ‘이(理)’로서는 ‘제법실상(諸法實相)’으로서의 제법의 본성정(本性淨)이며 주체적으로는 보살행을 행하는 보살의 ‘자기에게 불성이 있다’고 하는 자각이다. 이 청정한 법(自性淸淨心)은 비록 번뇌에 덮여 있지만 본성이 청정하기 때문에 연꽃과 같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법화경』의 「분별공덕품」에서는 자기도 사경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사경하게 하는 것이 ‘자각각타’의 길이라고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 경을 듣고 널리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쳐 듣게 하고 자신도 간직하고 남에게도 간직케 하며, 자신도 쓰고 다른 사람에게도 쓰도록 하며 또는 꽃과 향과 영락과 당번과 증개 그리고 향유와 소등으로 법화경에 널리 공양하면 이 사람이 받는 공덕은 한량없고 가이없어 결국에는 부처님의 지혜인 일체종지(一切種智)를 갖추게 되느니라.

 

누구나 사경을 하면 ‘무상정등정각’을 체득한다고 「여래신력품」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여래가 열반한 뒤에 이 『법화경』을 일심으로 받아가지고 읽고 외우며 해설하고 옮겨 쓰고 설한 대로 닦아 행하라. 너희들이 있는 국토에서 만일 이 『법화경』을 받아 가지고 읽고 외우며 해설하고 옮겨 쓰거나 설한 것과 같이 닦아 실천하라. 이 『법화경』이 있는 곳이 동산이거나 숲속이거나 나무아래거나 절이거나 거사의 집이거나 전각이거나 또는 산골짜기거나 넓은 들일지라도 그 곳에 탑을 세우고 공양할지니라.

왜냐하면 이곳은 곧 도량이니 여러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위없이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으셨고, 여러 부처님께서 다 여기에서 열반에 드시기 때문이니라.

 

「여래신력품」에서는 “그러므로 지혜 있는 사람들은 이런 공덕 이런 이익 듣고 보아 내가 열반 보인 뒤에 마땅히 법화경을 받들어서 가질지니 이런 사람 성불하기 결정코 의심 없다”고 재차 강조하고 있다. 또 「방편품」에서는 “성문이나 보살들이 내가 설한 법문 듣고 한 게송만 기억해도 성불함은 의심 없다”고 하였다. “모든 법은 본래부터 그 자성이 고요하여 불자들이 도 닦으면 오는 세상 부처된다”고 사경을 강조하고 있다.

 

『법화경』에서는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사경을 하는 것이 당위라고 주장한다. 사경을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는 것이고(śravaṇa), 항상 그 가르침에 대해서 음미하는 것이며(manana), 부처님의 마음과 계합하는 명상이다(nididhyāsana).

 

우리가 무아의 일념으로 사경을 하면 자아에 대한 그릇된 지식(mithyā-jnāna)이 사라져서 자아는 욕망과 충동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되고 행위(karma)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 결국 윤회로부터 벗어나 성불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진푸티의 관상법인 불가 무량대광명명 수지법을 무아의 일념으로 수행하면 마음속의 약사불이 감응하여 우리가 금생에 ‘즉신성불’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 약사불 12대원의 첫 번째와 두 번째에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첫 번째, 내가 내세에 아뇩다라샴막삼보리를 얻을 때, 스스로 몸을 불태워 무량무수무변의 세계를 비추게 해주십시오. 32개의 大丈夫相과 80개의 隨形으로 그 몸을 장엄하게 하여 모든 有情이 나와 다름이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내가 내세에 보리를 얻을 때, 몸이 유리처럼 안팎이 투명하고 티끌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하여 광대한 광명함과 크고 높은 공덕으로 몸이 편안한 데 머물고 불꽃의 그물이 장엄하여 해와 달보다 더 밝으니, 이로써 암흑 속의 중생을 깨우쳐 뜻하는 대로 나아가 여러 사업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Ⅳ. 맺음말

 

 

불가 무량대광명 수지법의 수행은 중생의 마음을 부처님의 마음으로 전환시키는 수행이다. 누구나 불가 무량대광명 수지법의 수행을 무아의 일념으로 정성스럽게 행하면 자성불(自性佛)의 자명성(自明性, svayaṃprakāśa)이 태양빛 보다 더 밝게 빛나 드러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현세와 내세의 삶에서 행복해지고 보람된 인생을 살게 되어 구경엔 성불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본문에서 고찰한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한국은 이미 150만 다문화가정에 50개 종교 500개 종파를 이루고 있는 다문화(multiculture), 다종교 사회이며 세계불교의 영향을 받아왔다. 오늘날의 세계불교는 크게 현재 스리랑카, 미얀마, 타이, 라오스, 캄보디아 등에서 신봉되는 남방불교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일본, 네팔, 부탄, 티베트, 러시아, 몽골, 베트남 등에 퍼져있는 북방불교로 이분된다. 북방의 지역 불교도들은 자신들의 불교를 ‘대승불교’라고 부르고 지대한 긍지심을 지녀왔으며, 남방불교를 ‘소승불교’로 폄칭한다.

 

북방불교에서는 간화선을 수행법의 주류로 전통화되어 계승되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간화선은 최상근기의 수행자에게는 최상승의 수행법인 것은 장점이다. 한국 불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지눌은 최상근기가 본래 망념이 없는 경지에서 바로 도에 계합하는 무심 합도, 즉 경절문의 수행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지눌은 최상근기의 진실한 수행자는 깨달은 후 고통 받는 중생에게 보살도를 행하면 각행이 원만해지므로 이타행으로서 설법을 적극 권장하였다. 간화선은 佛法 자체에도 집착하지 않는 개방적이고 열린 자세를 취하는 것은 장점이다. 그러나 지눌은 근기에 따른 수행문의 시설을 두었다. 참선 이외에 근기에 따라 간경. 염불. 참회. 설법 등의 수행을 겸하는 것을 말하며 최하근기의 재가신행자들은 염불해서 정토에 나기를 구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근기에 따른 수행법의 차별성은 간화선을 우리나라에서 선종계의 수행에 주류로 정착시킨 慧諶(1178-1244)도 인정하였다. 그는 간화선은 교학 이론을 떠나 화두를 통한 파격적인 깨우침이었기 때문에 상근기가 아닌 보통 사람들은 수행하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그래서 일반인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金剛經』을 수지하고 독송하는 공덕신앙을 강조하였다. 위에서 考究한 바와 같이 간화선은 상근기에게는 최상승의 수행법인 것은 장점이지만, 중. 하근기의 사람에게는 접근하기가 어렵다는 점이 단점이다.

 

남방불교에서는 위빠사나를 수행법의 주류로 전통화되어 계승되고 있으며 중하근기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 현대 위빠사나에서는 수행이 불교의 재가자에게도 열려 있고, 나아가 불교도가 아닌 사람에게도 수행의 기회가 열려 있다. 또한 현대의 위빠사나에서는 모든 연령의 수행자, 곧 재가자와 승려, 여성 출가수행자가 잘 갖추어진 수행센터에서 수행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장점이다. 이 점이 시사하는 것은 재가자를 포함한 ‘수행의 초심자를 위한 친절하고 단계적 지도’ 와 ‘근기에 따라 방편을 베푸는 배려’는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갖가지 ‘느낌’의 유혹에 노출된 채 살아가는 우리는 ‘느낌’자체를 인위적으로 멈추게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느낌’ 실상을 곧바로 알아차림으로써, 그것에 대한 끄달림으로 인해 발생하는 ‘탐욕’과 ‘분노’를 미리 방지할 수는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 숙련함으로써 끝없이 이어 지는 ‘業 의 輪廻’를 약화·단절시킬 수 있다는 것은 사상적으로 장점이다.

 

북방불교의 수행법은 보살지향적이나 남방불교의 수행법은 아라한지향적이다. 그래서 『법화경』에서는, “내가 이제 너희들 위해 참다운 법 설하니, 여러 성문 대중들은 멸도가 다 아니요, 오직 너희들 행할 바는 보살도뿐이러니, 점점 닦아 다 배우면 모두 모두 성불한다.”고 보살의 이상을 제시했다. 이어서「방편품」에서는, “사리불아, 만일 나의 제자가 스스로 아라한이나 벽지불이라고 말하더라도 모든 부처님께서 보살을 교화하시는 방편의 가르침을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면, 이는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며 아라한이 아니며 벽지불도 아니니라.”라고 菩薩事를 강조하고 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위빠사나의 수행법은 일체중생을 구제하고 사회 전체를 정화 향상시키는 利他主義의 道는 아니다. 그런 점에서 남방불교의 수행법인 위빠사나는 개인의 도이나, 최상승의 道가 아닌 것이 단점이다.

 

불교사상사에서 패러다임의 급격한 변화가 두 번 일어났다고 한다. 그 첫 번째가 소위 소승불교에 대한 대승불교의 도입이고, 다른 하나의 변화는 대승불교에 기초해서 일어난 禪佛敎 내지 딴뜨라 불교이다.

 

첫 번째 패러다임의 변화가 존재론과 인식론, 해탈론 등의 교리상의 전면적 변화를 초래한 데 비해, 두 번째 변화는 대승의 큰 틀을 유지하면서 다만 깨달음의 교육적 측면에 있어 보다 효율적인 방법론과 관련되었다. 이들 변화가 정치적, 사회적 변화와 밀접한 연관 하에서 진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승불교를 전 시대의 사상과 구별 짓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중생에 대한 大悲를 특징으로 하는 이타적 존재로서의 보살의 이상이다. 보살사상은 여러 내적, 외적 요인의 결합에 의해 시작되어 발전되었다. 전개된 이후에는 대승의 전 역사를 통해 그리고 대승불교가 전법된 모든 지역에서 하나의 강력한 이념으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보살의 이상 없는 대승불교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인도의 유명한 불교시인이자 수행자인 샨띠데바(Ṥāntideva, 寂天, 650-750)는 그의 『입보리행론』에서, 空性과 大悲의 균형을 통해 이루어진 보살의 이상에 대해 매우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대승보살의 보리심의 계발을 두 가지 단계로 설하고 있다. 첫째는 타인과 자신의 동일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자타의 동일성을 통달한 후에,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기쁨과 교환하는 적극적인 보살행의 단계로 나아간다.

 

이런 보살의 이상을 일거수일투족이 체현해서 실천하고 계신 분이 진푸티(金菩提)上師 이다. 그래서 진푸티상사의 관상법을 통해서 두 기존의 수행법인 간화선과 위빠사나의 장·단점을 회통할 길을 考究하였다. 중생의 능력과 의향이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듯 모든 중생의 성향을 회통할 현대인의 근기에 맞는 수행도가 요청되는 것은 당위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수행도가 진리의 세계에 얼마나 가까우냐 하는 점이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현재의 진푸티상사의 관상법은 수행법으로 중기밀교의 대표경전인『금강정경』주류로하는 삼매야 관상과 후기밀교의 대표적 경전인 『HT = 헤와즈라 딴뜨라(Hevarja tantra)』에 나타난 관상을 종합분석하여 거기에다 보살사상을 강조하여 진푸티상사의 독특한 구상과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대승불교에서 깨달음은 보살로서 誓願을 세우고 무수한 세월 동안 菩薩道를 닦은 후에야 가능했다. 그러나 요가 딴뜨라인『금강정경』에서는 수행자가 법신인 대일여래와 즉시에 합일함으로써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처럼 『금강정경』의 요가수행은 삼밀수행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구밀에 의한 붓다와의 相卽觀을 강조한다.

 

진푸티상사는 칭짱 고원에서 18년 동안 자비의 영력이 탁월한 여러 고승의 수행법을 배우고 수련하여, 스스로 우주의 진리와 인생의 참된 면목을 깨달았다. 무지로 고통 받고 있는 중생들을 ‘離苦得樂’의 길로 약사부처님의 12대원으로 인도·실천하고 있다. 서기 1991년 8월 하산한 이래 ‘보리(菩提)’사상을 전하기 위하여 ‘菩提禪修’를 창립하여 현재 캐나다 밴쿠버에 본부를 두어, 미국, 타이완, 싱가포르, 홍콩, 캐나다, 스웨덴, 호주, 일본, 한국 등 지역에 실수행 도량 30 여 곳을 설립하여 자비의 이치와 심신을 안정시키는 禪 수행 묘법을 전수하고 있다. 

 

간화선과 진푸티상사의 관상법을 겸수하면 중생의 상중하의 근기 모두가 현세와 내세에 행복하고 구경에는 성불할 수 있다.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한국에 다양한 문화가 유입되고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며 다양해지는 사회를 살아가는 지친 현대인에게 불교 수행법의 필요성은 더욱 높아졌다. 필자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한국불교의 전통적 수행법의 장점을 계승하고 회통으로서의 진푸티상사의 관상법을 겸수할 것을 주장한다. 개인의 행복과 성불을 함께 이루면서 연기적 존재인 우리가 상의상생하는 마음으로 다문화, 다종교사회의 평화와 공존을 보장하는 인식을 만들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평등한 사랑, 특히 사회적 약자와 가난한 자를 同體大悲의 정신이 필요한 21세기 다문화 한국사회에 부처님의 가르침은 뗏목이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비유하는 경전문구가 어느 수행법이든지 절대적 진리가 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끝으로 우리가 불자로서 다문화사회에 수행하는 정신으로 “나는 서원하네. 매 순간을 충실히 살며 모든 존재를 자비의 눈으로 바라 볼 것을!”이라는 틱낫한 스님의 말씀을 명심하고 실천하자.

 

 

 

 

참 고 문 헌

 

<약 호 표>

CD : 靑潭大宗師全書(卷數, 페이지數)

Gītā : The Bhagavadgītā

HD : 韓國佛敎全書(卷數, 페이지數, 段)

T : 大正新修大藏經(卷數, 페이지數, 段)

 

 

 

I. 原典類

 

『金剛經』, 李箕永 譯解(1987), 서울, 한국불교연구원.

『金剛經』第五「如理實見分」(T8)

『金剛般若波羅蜜經』 鳩摩羅什譯. 권 제1(T8).

『금강반야바라밀경오가해설의』 (HD 7).

「金剛三昧經論」 上․中(HD 1).

『大般若波羅蜜多經』 권 제45∼49(T5).

『大乘起信論』(T32).

「大乘起信論別記本」 (HD 1).

「大乘起信論疏記會本」 (HD 1).

『大乘莊嚴經論』 권 제7(T31).

『大智度論』 권 제19(T25).

『大慧語錄』 권 제 28(T47).

『大念處經, Mahāsatipaţţhāna-Suttanta, DN.vol.2. pp. 290-315)』

『滿空法語』

『妄盡還源觀』(T45).

『妙法蓮華經』 (T9).

「法執別行錄節要幷入私記」 (HD 4).

「法華經宗要」 (HD 1).

「불국품」『유마경』(TD 14).

『三國遺事』 권 제3.

「象跡喩經」 『中阿含經』 7 (TD 1).

「禪家龜鑑」 上 (HD 7).

『攝大乘論釋論』 권 제8(T31).

『成唯識論』권 제7(T31).

「惺牛 鏡虛集」 (HD 11).

『(小品)般若波羅蜜經』 권 제3(T8).

「十門和諍論」 (HD 1).

「涅槃經宗要」 (HD 1).

「儒家龜鑑」 (HD 7).

『雜阿含經』 권 제 40(T2).

『雜阿含經』 권 제 12(T2).

『雜阿含經』 권 제 27(T2).

『長阿含經』 권 4(T1).

『傳燈錄』권 제9(T51).

「定慧結社文」 (HD 4).

「定慧結社文序」 (HD 4).

「第九能斷金剛分」, 『大般若波羅蜜多經』 권 제1, 玄裝譯 (T7).

「中論」 1 (T30).

「中阿含經」 권56(T1)

「中阿含經」 권1(T1)

『解心密經』 권 제4 (T16).

『華嚴經』(T10).

「華嚴一乘法界圖」 (T45).

「隨喜功德品」 ?妙法蓮華經? 6 (T 9)

「陀羅尼品」 ?妙法蓮華經? 7 (T9)

「安樂行品」 ?妙法蓮華經? 5 (T 9)

「普賢菩薩勸發品」 ?妙法蓮華經? 7 (T9)

「藥王菩薩本事品」 ?妙法蓮華經? 6 (T 9)

「如來壽量品」 ?妙法蓮華經? 5 (T 9c)

「方便品」 ?妙法蓮華經? 1 (T 9)

「分別功德品」 ?妙法蓮華經? 5 (T 9)

「如來神力品」 ?妙法蓮華經? 6 (T 9)

「方便品」 ?妙法蓮華經? 1 (T 9)

沙門果經 제8(T1.)

增一阿含經 卷 3 (T 2)

增一阿含經 卷 40 (T 2)

「묘장엄본사품」 『법화경』(T9, p.60C.)

「약초유품」『법화경』(T9)

「방편품」『법화경』(T9)

「약왕보살본사품」『법화경』(T9)

『小品 般若波羅蜜經』 卷第九(T.8)

『密敎』(東京:岩波書店,2001)

『攝大乘論釋』(T31)

「普賢菩薩勸發品」 ?妙法蓮華經? 6 (?大正藏? 9)

『雜阿含經』권2. 유행경.

 

Gītā V. 10

 

靑潭大宗師全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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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潭大宗師全書?

靑潭大宗師全書?

 

Conze, Edward.

1970 Buddhist Wisdom Books, London, George Allen & Unwin L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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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 Indian Philosophy Vol. 1, London, George Allen Unwin Ltd.

1948 The Bhagavadgīt?, London, George Allen & Unwin, Ltd.

1953 The Principal Upaniṣads, London, George Allen & Unwin, Ltd.

1966 The Dhammapada,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U. Wogihara & C. Tsuchida(1958). ?梵文法華經? Saddharmapunadarika-Sūtram ;Romanized and Revised Text of The Bibliotheca Buddhica Publication, Tokyo, The Sankibo Buddhist Book Store.

 

Saṃyutta-Nikāya Vol. Ⅱ.

Vinaya-Piṭka Vol. 1.

 

II. 國內外著書 및 論文

 

강향숙,「『헤와즈라딴뜨라』만다라의 觀想수행 연구」, 박사학위 논문(동국대,2011)

고영섭(2006). 「원효 십문화쟁론 연구의 지형도」, ?효당 최범술 스님의 생애와 업적?, 효당 사상연구회.

고영섭(2006), 「이성철의 불교개혁론」을 읽고, 『퇴옹성철의 깨달음과 수행』(서울:예문서원)

권기종(2004). ?불교사상사 연구 上․下?, 서울, 한국불교연구원.

길희성(1984). ?인도철학사?, 서울, 민음사.

김동화(1977). ?불교교리발달사?, 서울, 삼영출판사.

김재성, 「위빠사나 수행, 그 이론과 실천」『지구촌 시대의 한국문화와 불교』(서울:도서출판 오성,2005),

김영태(2002) 「釋迦 본래의 歷史性과 韓國佛敎 敎團淨化運動의 史的 意義」,

?청담대종사와 현대한국불교의 전개?

김선근

1990『마하뜨마 간디철학연구?, 서울, 불광출판부.

2005『인도 정통철학과 대승불교?, 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2007 「『金剛經』의 看話禪觀」, 『제 47회 한국불교학회 추계학술대회』자료집 2007년 11월 17일

2007「청담스님의 한국불교사에서의 위치」,『禪과 文化』제 4호

2010 「청담대종사의 간화선관」『마음사상』제8집(진주:국립 경남과학기술대학교 청담사상연구소),

2012 「동산대종사의 한국불교사적 위상」,『한국교수불자연합학회지』제18권 제2호

 

김성철, 「간디와 성철」을 읽고, 『퇴옹 성철의 깨달음과 수행』(예문서원, 2006)

김호귀(2010). 정성본「만공선사의 생애와 선사상연구」『한국불교학』제 이십이 집.

동산문도회편,동산대종사문집(서울:불광출판부,1998)

대한불교 조계종교육편,『曹溪宗史』고. 중세편, (서울; 조계종출판사, 2004).

목정배(2001). 『계율학 개론』서울, 장경각.

바이이(白衣)엮음,『 袈裟』(부산:보리선수,2004)

박경준,「빠알리어 경전과 대승경전의 사상적 차이」,『불교평론』44(2010. 가을)

박성배, 『깨침과 깨달음』,윤원철 역(서울: 예문서원,2002)

변태섭(1996).『韓國史通論?, 서울, 삼영사.

불학연구소, 『看話禪 - 조계종 수행의 길-』 (서울: 조계종출판사, 2008).

서경수(1990). ?불교철학의 한국적 전개?, 서울, 불광출판부.

성철, 『禪門正路』(합천:해인총림,1981)

안성두,「수행도의 다양성과 깨달음의 일미」『불교평론』18(2004. 봄)

원택스님 엮음, 성철스님이 들려준 이야기2(서울:글씨미디어,2012)

원택 스님 엮음, 성철스님 행장(서울:글씨미디어,2012)

이기영

1974 ?한국의 불교?, 서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82 ?한국불교연구?, 서울, 한국불교연구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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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승택,「초기불교의 경전에 나타나는 위빠사나」『지구촌 시대의 한국문화와 불교』(서울:도서출판 오성,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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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택 편,퇴옹성철의 깨달음과 수행((서울:예문서원,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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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기념사업회(2002). ?청담대종사와 현대한국불교의 전개? ; 청담대종사 탄신 100주년 기념 학술논문집, 서울, 청담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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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川彰(1989). ?인도불교의 역사?上․下, 이호근 역, 서울, 민족사.

祖師禪에서의 本來面目의 의미」『한국선학』제 15호(서울; 한국선학회, 2006)

『臨濟禪 硏究』(서울; 경서원, 1996)

『看話禪』(합천; 장경각, 1999)

賴富本宏, 『金剛頂經入門』(東京:大法輪閣,2005)

『大乘佛敎의 成立史的 硏究』(東京:三省堂,1957)

松長有慶, 『密敎』(東京:岩波書店,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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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印度哲學? 第九集, 1999.

 

 

 

 

 

 

[출처] 다문화사회에서의 불교수행법 회통으로서의 진푸티상사의 관상법|작성자 만남 창조 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