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갈 길은 어디로 2
관응(전 직지사 조실) 스님
생명의 이치를 깨달으면…
우리가 평생을 살아도 태어날 때 어떻게 태어나는지 모르고, 지금 살고 있어도 사는 것이 어째서 살아지는지를 모릅니다. 그리고 이 몸뚱이가 없어지면 죽는다고 했는데 죽는 것이 어째서 죽는지를 몰라요. 우리 생명이 하는 일을 전부 모르고 있어요. 우리는 하나도 모른단 말입니다. 모르고 사니까 장님이 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아서 행방도 정할 수 없고 위태롭습니다. 이만저만 위태로운 게 아닙니다.
산 사람은 숨이 쉬어져야 삽니다. 숨이 끊어지면 죽었다고 하거든요. 보통사람들은 어째서 끊어지는지, 어째서 숨이 쉬어지는지 모릅니다. 깨닫기 전에는 다 모르지요. 그런데 부처님처럼 생명의 이치를 깨달으면 생명이 하는 일은 전부 다 알아버립니다.
부처님께서 해인 삼매로 들어가면 세 가지 세간이 한꺼번에 다 보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도 어떻게 태어나는지 모르고 어떻게 사는지 모르는데, 부처님께서 깨달으시고 보니 일체 중생 업과, 인과응보가 다 보이는 겁니다.
어떤 중생이 과거 몇 억 겁 전에 어떻게 돼 가지고, 어떻게 살아 나오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도 알고, 우리가 살고 있는 기세간의 무정지물(無情之物), 낱낱 물건에 대해서도 본말시종을 과거에 보고 현재에 보고 미래에 보는 것이 아니라 도장 찍어놓은 것처럼 과거 일이 현재같이 보이고, 미래 일이 현재같이 다가와 보이는 걸로 보여요.
이 컵을 어느 공장에서 누가 만들었는지 다 알아요. 처음에 이 컵을 만든 다음 어떤 사람이 물을 마셨는지, 물을 마신 사람이 김가인지 박가인지도 다 압니다. 그래 가지고 언제 가서 깨진다는 것까지 알아요. 한마디로 낱낱 물건의 본말시종이 한꺼번에 환히 보이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장님 모양으로 눈을 감고 앉은 것처럼 전부 보이질 않아요. 생명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도 눈으로 안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모르는 사람을 끌어다가 아는 것으로 인도해 주는 것, 모르는 부지(不知)에서 능히 아는 자리, 밝게 아는 자리(明知)로 운전해 주는 것이 부처님의 책임입니다.
꿈 속에서는 꿈인 줄 모른다
부처님께서 45년 동안 설하셨는데, 마지막 8년 동안 부처님이 깨달은 걸 다 내놓은 설법이 바로 법화경입니다. 부처님이 깨닫고 나서 전부 아신 얘기가 모두 다 나옵니다.
깨달은 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 한꺼번에 쉽사리 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49년 동안 끊임없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쨌든 지금 우리는 전부 모르고 앉아 있습니다. 밖으로는 물건이 눈으로 보이고 귀로는 들리고 코로는 냄새 맡아지고 입으로는 맛이 알아지고 몸뚱이는 껄끄럽다, 부드럽다, 차다, 덥다를 알고, 뜻에 가서 좋다 나쁘다를 알아요. 색성향미촉법, 육진 경계가 실물로 있는 양으로 알아요. 그런데 우리가 깨닫지 못해서 실물로 있는 것처럼 나는 것이지, 부처님께서 깨닫고 보니까 그게 안 보이더라는 겁니다. 우리가 보이는 색성향미촉법이 안 보이고 그것보다는 미묘한, 아주 찬란하고 장엄한 세계가 보인다는 거예요. 하지만 우리에겐 그것은 안 보여요.
그걸 비유로 예를 들면, 눈 떴을 때 보이던 것이 눈을 감으면 안 보이지요. 눈 감고서 잠을 잘 적에 있지도 않은 세계가 꿈에 나타나요. 꿈에도 보이는 게 있고 들리는 게 있고 다 있거든요. 우리 깨치지 못한 사람은 눈을 감고 잠잘 때 꿈을 꾸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부처님께서 깨달으니까 눈을 뜨고서 실물이 있는 세상 물건을 다 보고 아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우리 깨치지 못한 사람은 꿈꾸는 것과 같아요. 꿈 속에 든 사람은 꿈 밖의 세계는 아무리 보려 해도 안 보입니다. 그 세계가 안 보이니까 우리한테는 없는 걸로 되어 버렸어요. 찬란한 장엄세계, 극락세계가 안 보이니까 꿈 밖의 얘기를 해도 모릅니다. 꿈꾸는 속에서만 보이는 겁니다.
우리가 있는 세계는 실물이 있는 세계가 아니에요. 부처님은 보기를 사생 육도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나는 방법을 태란습화 사생, 육도 중생 하면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이라고 했어요. 사람이나 소는 태로 나고, 물고기나 새는 알로 나지요. 습기로 나는 것도 있고, 화생으로 나는 것도 있습니다.
지극하게 선한 일을 하거나 극도로 악한 일을 하면, 즉 극선 극악에 가서는 화생으로 난다는 말입니다. 극악은 지옥인데, 지옥에 나는 중생은 태나 알로 나는 게 아니고 텔레비전처럼 없던 것이 팍 나타나요. 전파로 나타납니다. 그걸 화생이라고 해요.
천상이나 극락세계에 나는 것도 화생이라고 합니다. 화생으로 나는 것은 우리는 못 봤지만, 부처님이 깨달아서 아는 것이니까 실지를 보고 하시는 얘기니까 믿어야 합니다. 안 믿으면 할 수 없어요. 그것은 여러분 자유입니다. 자유는 박탈할 수 없는 겁니다.
하여간 그 성품자리는 하나인데, 깨닫지 못한 사람은 꿈꾸는 것과 같으니까 각기 다른 꿈을 꾸고 있는 거예요. 꿈꾸는 것이 똑같습니까? 꿈은 똑같지 않아요. 그걸 비유해서 얘기할게요. 열 사람이 가령 한 방에서 같이 잠을 잔다고 해도, 각기 혼자만의 꿈 속을 이루고 있습니다. 꿈 속에서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천지 만물이 보입니다.
꿈에도 몸이 있으니 각기 겪는 일이, 차별이 다 달라요. 꿈을 잘 꾼 사람은 선몽을 꿔서 벼슬도 하고, 재물을 벌어들이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욕된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또한 꿈의 길고 짧음이 저마다 다 달라요. 한나절도 못 되는 시간에 한 방 안에서 열 가지 세계가 벌어진 것입니다. 영욕수요(榮辱壽夭)도 다 다르고 이모저모가 다 다릅니다.
삼천 대천 세계가 실로 모양이 있는 세계라고 하지만 꿈꾸는 것과 같다면 갑이 꿈꾸는 세계에서는 을이 꿈꾸는 세계가 안 보이고, 을이 꿈꾸는 세계에서는 갑의 세계가 비쳐지지를 않아요. 꿈이란 헛것을 보는 것입니다. 꿈에서 보는 육진(六塵)이나 육근(六根)은 실물이 아닙니다. 실물이 있는 게 아니라 꿈 생각 하나가 벌어져서 밖으로 세계가 있어 보이고 안으로는 육근이 있어 보이는 것입니다.
중생들은 꿈을 꾸고 있는데 이게 꿈인 줄을 몰라요. 축생은 축생 꿈, 지옥은 지옥 꿈, 물고기는 물고기 꿈, 새는 새 꿈 등 한 성품 속에서 죄다 다른 꿈을 꾸고 있어요. 전부 헛것을 보고 있어요. 자기의 육진, 육근은 그 밖을 튀어나가지 못합니다. 다들 벽을 넘지 못하는데, 깨달은 사람은 벽이 안 보이고 그 바깥이 보인다는 겁니다.
깨닫지 못했더라도 마마를 앓는다거나 되게 앓으면 신경이 마비되어, 뜻으로 아는 의식이 끊기게 됩니다. 의식이 마비되어 의식을 초월한 팔식이나 칠식은 안 보여서 저 산너머에서 뭐 하는지 보이게 됩니다. 그 사람은 뵈는 거 가지고 얘기하는데 이식이 성한 사람은 헛소리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막힌 육진 안의 것만 보이고, 육진 밖의 것은 안 보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도 전부 다 다르게 보입니다.
어떤 물체가 우리 눈 속에 들어가서 눈동자에 사진이 찍히지만 그대로 안 찍히는 것입니다. 저 거대한 산도 멀리서 보면 깨알같이 보이는 겁니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이 정확하게 보이지 않아요. 확대하여 보이고 삐딱하게 보이고 꿈꾸듯이 헛걸로 보여요. 우리 인생의 몸뚱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부처와 중생의 성품자리는 하나다
하여튼 성품은 하나라는 겁니다. 생명체는 하나인데, 너도 하나 가지고 있고, 나도 하나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가 여러 사람에게 다 보이는 거예요.
여기 전기가 여러분 눈에 다 비칩니다. 전기는 하나로 비추는 거예요. 내 눈에 비치는 전기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전등이 눈동자에 비치는데 그게 아무리 밝게 비치더라도 눈 도수대로만 보입니다. 0.9는 0.9대로, 0.2는 0.2대로 비치는 거예요. 보는 것도 그렇지만 듣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이 몸뚱이는 업으로 됐어요. 근데 업이 뭔지를 몰라요. 그러니 얘기가 잘 안 되는 것입니다. 전기가 무엇인지 한 번 봅시다. 어떤 게 전기입니까. 눈에 보입니까? 안 보여요. 눈으로 보면 환한 기운으로 비쳐지고, 손을 대면 지지직거리며 전기가 오르고, 코에 대면 시큼해요. 하지만 전기의 전체의 모습을 제대로 모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게 한 가지가 아니에요.
물을 비유해서 얘기하면 1도에서 100도까지 물, 액체로 보여요. 만약 온도를 높여서 100도 이상이면 증기, 기체가 되고, 또 0도 이하에서는 얼음, 고체가 됩니다.
한 물건이 여러 모습으로 탈바꿈을 합니다. 기체나 액체, 고체로 탈바꿈하지만 수소 자체는 변동이 없습니다. 물건의 근본이 되는 원소라는 것은 변동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어보지도 않았고 죽는 것을 모르니까, 죽으면 없어지는 줄 알아요. 기체가 되고 액체가 되고 고체가 되어도 변하지 않는 수소를 아는 사람은 탈바꿈해도 수소는 본래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생명은 죽는 것도 아니고 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늘 염송하고 있는 반야심경에서 봤지요. 육도(六道)라고 해도 전부 몰라요. 눈에 안 보이면 없는 줄 알아요. 눈에 안 보인다고 없다면, 공기가 눈에 안 보인다고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자기 눈에 안 보일 뿐이지, 세상 물질이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보이는 것도 없는 게 있습니다. 꿈에 보는 것은 실물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은 품성으로 보면 육근(六根), 육식(六識), 육진(六塵)도 미한 가운데서 보기 때문에 실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꿈의 것은 잠깬 사람이 보더라도 실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꿈에도 꿈 생각 하나가 변해서 안으로 꿈의 몸뚱이가 되고 밖으로 꿈의 경계가 됩니다. 식 하나가 변해서 육근 육진이 되듯이, 이걸 모르고 이걸 실물로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은 내용을 중생들에게 전달하려고 해도 잘 안 되듯이 꿈 안에서는 이게 안 보여요. 꿈에 보이는 몸뚱이를 꿈 깬 다음엔 알게 되지요.
수소 하나가 액체도 되고 기체도 되고 고체도 되듯이, 마음 하나 생명체 하나가 업에 따라서 탈바꿈하는 거예요. 어떤 무슨 업을 지으면 사람이 되고, 어떤 무슨 업을 지으면 짐승이 되고, 어떤 무슨 업을 지으면 곤충이 되고, 어떤 무슨 업을 지으면 지옥에 가고, 어떤 무슨 업을 지으면 천상에 가듯이, 생명체 하나를 가지고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성품은 하나예요. 그 성품을 바로 지키면 부처가 되는 것이고 장엄세계가 보이는 것입니다. 물의 성질이 온도에 따라서 바뀌듯이, 생명체는 인연을 따라서 육도 윤회하는 것입니다.
하나가 변동되어 모양이 나오는 것을 상(相)이라고 하며, 모양의 밑바탕이 되는 본질을 성품이라고 합니다. 성(性)과 상(相)은 달라요. 하나의 모양 기운이 변해서 태풍도 되고 가는 바람도 되고 솔바람도 되는 거예요. 공기는 눈으로 안 보이지만 다른 감각으로는 느낄 수 있습니다. 차다, 덥다 하는 것은 피부로, 숨쉬는 것은 코로 알 수 있지요. 눈으로 안 보인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닙니다.
어쨌든 생명의 본질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 기운은 본디 사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에요. 한 성품자리는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닙니다. 그 모양은 평등합니다.
금강경 에 “시법(是法)이 평등(平等)하고, 무유고하(無有高下)”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법이 평등하고 높고 낮은 데가 없다’는 것은 우리 일체 성품을 얘기합니다. 그 기운이 사람한테 들어가면 사람이 되고, 짐승한테 들어가면 짐승이 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무에 들어가면 나무가 되는데, 나무도 그 종류에 따라 밤나무에 들어가면 밤이 나오고, 감나무에 들어가면 감이 열립니다.
이건 애초에 일체 물건이 아닙니다. 사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물건도 그 기운은 밤나무 성품도 되고 사람의 성품도 되는 겁니다.
이에 대해 규봉 스님은 밀의의성설상교(密意依性說相敎)라고 했어요. 성품은 그대로 놔두고 모양을 얘기해 주는 겁니다. 우리는 모양에 잡혀서 성품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깨달은 부처님은 성품을 아시지만 깨닫지 못한 우리는 모양밖에 안 보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깨달은 내용이신 해인 삼매는 제쳐놓고 우선 너희들이 보이는 모양대로 얘기해보자 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함입니다.
그래서 아함경에서는 인천교(人天敎), 인간과 천상에 대해 얘기한 겁니다. 그걸 논으로 말하면 세친 보살의 아비담마구사론이 있는데, 이것은 인간에 대한 교육을 얘기하는 겁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처럼 산도 있고, 들도 있고, 시간과 공간도 있어요. 그것을 세친 보살은 업감연기(業感緣起)라고 했습니다.
아함, 사람답게 사는 지혜
세상에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고, 물건도 많고 내 몸 밖에 시간과 공간이 있어요. 어떻게 하면 내 것이 되느냐가 문제인데, 만드는 방법이 있지요. 내 업으로 만든다는 겁니다.
업감(業感), 업으로 당겨온다는 겁니다. 감(感)은 다른 말로는 초대할 초(招), 이끌 인(引)을 써서 ‘초인(招引)’이라고 합니다.
또 천당과 지옥이 있어요. 복 되는 일을 많이 지으면 천당이 나한테 가까워지고 나쁜 일을 하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합니다. 내가 업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중생들은 실물로 알기 때문에, 꿈꾸는 사람이 꿈 깨기 전에는 실물로 보이는 게 있으니까 그 사람한테는 그걸 인정을 해주면서 얘기를 해줘야 듣거든요. 그래서 아함 12년, 그 때는 업감연기설로 얘기합니다. 업감연기는 세상 사람들의 사는 방법을 얘기한 인천교입니다.
세상 사는 게 사람다운 짓을 하는 겁니다. 사람이 되려면 사람의 행동을 해야 된다는 것이 인간의 교육입니다. 그런데 기성인들이 그 걸 제대로 못해요. 인간 윤리에 대해서는 공자와 맹자가 얘기를 잘 했어요.
사람이 사람답게 하려면 어떻게 되느냐. 맹자 말씀 중에 “만물지중(萬物之衆)에 유인최귀(唯人最貴)라, 소귀호인자(所貴乎人者)는 이기유오륜야(以其有五倫也)라”, 만물 가운데 오직 사람이 가장 존귀하다, 사람이 가장 귀한 까닭은 오륜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륜은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입니다.
“인이부지유오상즉(人而不知有五常卽) 기위금수불원의(其違禽獸不遠矣)라”, 사람으로서 항상 지켜야 하는 이 다섯 가지를 지키지 않으면 짐승과 다른 바가 없다고 해서 이 오상(五常)을 유교에서는 꼭 지킵니다. 부모한테 효도를 해야 사람 사는 질서가 잡히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짐승과 다르다는 겁니다.
공자의 제자 중에 증삼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아버지가 증석인데, 증석의 친구들이 집에 와서 같이 음식을 먹다가 한나절이 지나 출출해지면, 증삼을 불러, “남은 음식이 있느냐?”고 물으면 반드시 ‘예.’ 하고 대답하고 곧바로 음식을 내왔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증석이 죽고 증삼이 노인이 됐을 때 친구들과 있다가, 아들 원을 불러 “남은 음식이 있느냐?”고 물으면 “없습니다.” 합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간 후에 그 음식을 내와요. 그래서 그 이유를 물으니, “두었다가 아버님께 한 번 더 차려드리려고 했습니다.” 해요. 혼자 먹으면 맛이 있겠습니까? 증삼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지요.
증원의 효는 이른바 부모의 입과 몸을 봉양하는 효이지만, 증삼의 효는 뜻을 맞추는 효도, 모양 속에 든 성품을 맞추는 효도라고 해서 양지지효(養志之孝)라고 합니다.
성품에 맞는 교육을 시켜야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윤리를 지키는 것도 있지만 지혜가 다릅니다. 사람의 피에도 지혜가 들어 있어요. 자식을 낳아도 짐승들의 젖을 먹이지 말고 백혈(白血)이라고도 하는 모유를 먹여야 됩니다. 이번 강연 주제가 ‘인간이 갈 길은 어디로?’ 아닙니까. 자식에게 소젖을 먹이면 인간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가 태임(太任)인데, 어질고 명철한 머리를 지닌 현숙한 부인으로 문왕을 임신했을 때 태교를 잘 했어요. 신사임당의 호가 사임당인데, 바로 이 태임을 스승 삼는다고 하여 사임당이라고 했어요.
아이를 임신했을 때는 보고 듣고 먹는 것이 모두 아이에게 가기 때문에 주의해야 할 일이 많아요. 태교를 잘 해야 돼요. 눈은 사악한 빛을 보지 말고, 귀는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않으며, 입은 오만스런 말을 하지 않아야 해요. 음식도 삼갈 게 많고 반듯한 것만 먹어야 해요.
그렇게 태교를 잘해서 아이를 낳으면 품행이 단정하고 용모가 묘하며 재주가 뛰어나다고 했어요. 그런데 낳기 전에도 주의를 해야 하지만 낳은 후에도 문제예요. 교육도 반듯하게 해야 해요.
혈액형이 A형, B형, AB형, O형이 있지요. A형은 무엇을 먹든지 피가 A형이 돼요. B형은 B형, O형은 O형이 됩니다. 같은 피로 동화시키는 거예요. 초목도 마찬가지입니다. 사과씨를 뿌리면 사과가 열리고, 고추씨를 뿌리면 고추만 열립니다. 자기에게 맞는 기운만 빨아 당겨 자기와 동화시키는 시키는 거예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들딸을 자기와 같이 만들려고, 동화시키려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정원을 가꾸는 사람처럼 교육하면 안 되는 겁니다.
화초의 성질을 무시하고 가지 치고, 자르고 하면 밖으로 퍼질 기운이 안으로 막혀버리게 되는 거예요. 자식을 그렇게 키우면 사회에 나가도 불평불만만 하게 됩니다. 자식의 성품에 맞게 반듯한 교육을 해야 해요. 억지로 자신에게 맞추려고 하면 안 되는 겁니다.
하나 안에 일체가 있고, 일체 안에 하나가 있다
오늘은 불교 얘기는 별로 안 하고 세속 얘기를 많이 했어요. 불교 공부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세상 일이 바쁜데 그게 쉽지 않지요. 똑똑한 사람이 있다면 “부모에게 효도 안 하면 어떻습니까? 나쁜 짓은 왜 하면 안 됩니까?” 하고 물어볼 것입니다.
인천교는 윤리이지 종교가 아닙니다. 원리가 들어서야 하는데 성품이 분명치 않아요. 우리는 왜 욕심을 내는지 출처를 모릅니다.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천당에 가고 악한 일을 많이 하면 지옥에 간다는데 왜 그런지 모릅니다. 그 뿌리는 윤리로는 알 수 없고 종교에 들어가야 알 수가 있습니다.
생명은 하나입니다. 한 가지 기운을 사람은 사람만큼 받고, 벌레는 벌레만큼 받아요. 그런데 하나인 줄 모르고 제대로 성품을 못 쓰니까 식(識)으로 변해 전체가 안 보입니다. 부분적으로 한 구석만 보이니 본성대로 안 나오고 어긋나는 행동이 나오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 집착이 생기게 되고, 내 생명이 따로 있다는 아집이 생기는 거예요. 아집으로 인해 깨닫지 못 하니 나란 집착으로 인해 만 가지 고통이 생깁니다. 백패(百敗)의 근원이 되는 거예요.
커다란 생명 하나가 벌레에 들어갈 때 벌레만큼 잘라서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하나로 있으면서 전체가 들어가는 겁니다. ‘일중일체(一中一切) 다중일(多中一)’, 하나 안에 일체가 있고 일체 안에 하나가 있는 거예요. 내 생명, 네 생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품은 하나예요. 내 생명이 다른 사람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출처 : 월간 불광 2004. 11, 12
관응 스님 1910년 경북 상주 출생, 1929년 상주 남장사에서 혜봉 스님을 계사로, 탄옹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하였다. 1934년 금강산 유점사 불교전문강원 대교과 졸업, 1936년 선학원 일봉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였다. 1938년 중앙불교전문학교 졸업, 1942년 일본 교토 용곡대학교 졸업, 오대산 월정사, 가야산 백련암, 고성 옥천사 등 제방선원에서 안거하였으며, 1956년 직지사 조실로 추대되었다. 1959년 조계사 정화 초대주지 겸 중앙포교사, 1961년 동국학원 이사, 1965년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 육년결사, 1981년 직지사 주지, 1984년 원산 스님 외 9명에게 전강을 내렸으며, 1985년 조계종 원로회의 부의장, 2004년 세수 95세, 법랍 76년으로 황악산 직지사 중암에서 원적하셨다.
[출처] 인간이 갈 길은 어디로 2 / 관응스님|작성자 둘이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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